8월 1일 기축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참찬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신이 교로(郊路)에서 유개(流丐)를 만났는데, 양식이 없어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진휼청(賑恤廳)에 분부하여 양식을 주어 돌려보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대사간 송창명(宋昌明)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오늘 상참은 저하께서 대리(代理)하신 이후 처음 행하시는 것인데, 대직(臺職)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경책(警責)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청컨대 초선(抄選)한 이외에 외방에 있는 대신(臺臣)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8월 2일 경인
관학 유생(館學儒生) 진사 김항주(金恒柱) 등이 상서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진사 신광리(申光履) 등과 유학(幼學) 김보순(金普淳)·홍상직(洪相稷) 등이 상서하여 연달아 사흘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의소묘(懿昭廟)를 창의궁(彰義宮)에 세웠다.
8월 3일 신묘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김포군의 명화적(明火賊) 수백 명이 말을 타고 깃발을 세우고서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며 곳곳에서 도둑질을 하여 다친 사람이 많은데, 본군(本郡)에서 감영(監營)에 보고한 것이 지극히 더디었으니, 군수 윤득중(尹得中)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잡아오고, 감사(監司) 및 토포사(討捕使)는 중추(重推)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기찰(譏察)해 잡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조덕중(趙德中)을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8월 5일 계사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제조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군부(君父)에 대한 무함을 채 씻지 못했다.[君誣未雪]’라고 한 네 글자가 고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성상께서 혹시라도 ‘일대(一代)의 언의(言議)가 모두 이와 같다.’라고 생각하실 듯도 하나, 실제로는 그러하지 아니합니다. 고 봉조하의 언의와는 다른 사람이 많이 있으며, 신 또한 같지 아니합니다."
하자,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신이 젊어 위포(韋布)로 있었을 때에 이 논의가 중신(重臣)과 같았습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은 오원(吳瑗) 및 권혁(權爀)의 아우 권위(權煒)와 더불어 강마(講磨)한 바 있었는데, 그 당시의 대신(大臣)도 또한 신 등의 논의와 같았습니다. 이로 인해 비방이 세상에 넘쳐 나와 심지어 신 등이 창도하여 별당(別黨)을 만든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대신과 함께 상중(喪中)에 벌을 받게 되었던 것인데, 그 벌을 베푼 자는 곧 조징(趙徵)이었습니다. 영상이 일찍이 신이 상중에 벌을 받고 비방이 많았다고 진달한 것은 바로 이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신은 일찍이 신과 더불어 혼인을 약속했으나, 절혼(絶婚)했고 또 절교(絶交)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서로 만나보지도 아니합니다. 대신의 십수 년 이후의 언의는 신도 모르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떤 일로 인해서인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자질구레하여 감히 진달하지 못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신이 처음 연석(筵席)에 올랐을 때 성심(聖心)을 개석(開釋)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먼저 민백상(閔百祥)의 출륙(出陸)을 청하였으니, 신도 경중이 차례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그 책임은 전적으로 보필하는 신하에게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능히 내 마음을 개석하지 못하면서 도리어 대신을 책망하고자 하는가?"
하므로, 원경하가 말하기를,
"대신을 버리고 누구를 책망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아들된 자가 네 글자를 가리켜 의리라고 한다면 그 아비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당초 ‘병을 숨겼다.’는 말이 그대로 네 글자에 미치게 된 것입니다."
하자, 이천보는 말하기를,
"전하께서 징토에 엄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민백상이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는 그의 가정에서 들은 바이기 때문에 이와 같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고, 원경하는 말하기를,
"민백상에게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준론(峻論)을 세우고자 하여 경솔하게 이런 말을 꺼냈던 것입니다."
하였다.
8월 6일 갑오
사학 유생(四學儒生) 맹지대(孟至大)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8월 8일 병신
유복명(柳復明)을 병조 참판으로, 홍중일(洪重一)을 대사간으로, 이춘제(李春躋)를 대사헌으로, 박치문(朴致文)을 집의로, 민택수(閔宅洙)를 사간으로, 권해(權賅)를 헌납으로, 송능상(宋能相)·민우(閔堣)를 장령으로, 채경승(蔡慶承)·이육(李堉)을 지평으로, 임희교(任希敎)·유건(柳健)을 정언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제학으로, 권적(權樀)을 판의금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진선으로 삼았다.
8월 10일 무술
박필정(朴弼正)·윤광의(尹光毅)·엄우(嚴瑀)를 승지로, 정기안(鄭基安)을 보덕으로, 심수(沈鏽)를 문학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우의정 이천보가 말하기를,
"사학(四學)은 곧 국가에서 선비를 기르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학의 담장이 무너지고 집이 기울어져 유생들이 실제로 몸을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아마도 조종조(祖宗朝)의 유도(儒道)를 숭상하고 선비를 대우하던 성대한 뜻이 아닌 듯합니다. 접때 국자장(國子長)의 진품(陳稟)으로 인해 태학의 무너진 곳을 이미 수리하여 고치게 하였는데, 이번에 사학도 또한 태학의 예에 의해 즉시 수리·보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또 사산(四山)의 송금(松禁)을 신칙할 것을 청하니, 하령하기를,
"옳다."
하였다.
8월 11일 기해
충청 감사 김시찬(金時粲)이 상서하기를,
"진전(陳田)을 조사하여 감한 뒤에 도리어 옛 진전에 대해 징수하는 폐단은 전적으로 비총(比摠)263) 에 이미 정한(定限)이 있는 데서 말미암았습니다. 은결(隱結)은 또 추이(推移)할 곳이 없어 심지어 묵은 논에도 급재(給災)할 수 없는 데에 이르고 있습니다. 청컨대 비총을 조금 바꾸어 융통성이 있게 하고, 다시 옛 진전을 조사하여 모두 견면(蠲免)을 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3일 신축
임금이 명릉(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명정전(明政殿)에서 전하였다.
8월 14일 임인
이후(李)를 승지로 삼았다.
8월 15일 계묘
사간 민택수(閔宅洙)가 상서하여 초선(抄選)한 여러 사람들을 초치해서 자주 인접하여 예학(睿學)에 보탬이 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유념하겠다."
하였다.
무소 감시관(武所監試官) 집의 박치문(朴致文), 헌납 권해(權賅)가 상서하기를,
"전 주부 이재춘(李再春)과 수문장 김광조(金光祚)·이기태(李杞泰)는 합격한 거자(擧子)와 더불어 과장(科場)에서 농간을 부리다가 간교한 정상이 탄로되었습니다. 거자는 비록 이미 발거(拔去)했지만, 세 사람 등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시켜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지평 채경승(蔡慶承)이 상서하기를,
"기근과 흉년이 해를 이어 든 끝에 백성들이 흩어져 도둑이 되어 돈과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들을 협박합니다. 청컨대 좌우 포청과 각도의 진영(鎭營)에 엄하게 신칙하여 다방면으로 기형(譏詗)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8월 17일 을사
황경원(黃景源)을 대사간으로, 임순(任珣)을 사간으로, 이운해(李運海)를 지평으로, 이득종(李得宗)·유현장(柳顯章)을 정언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숭릉(崇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친히 명정전에서 전하였다.
8월 19일 정미
임금이 친림하여 한권(翰圈)에 든 사람을 시험하여 조재후(趙載厚) 등 5인을 뽑았다. 조재후를 검열에 부직(付職)시키라고 명하였다.
8월 20일 무신
임금이 좌의정 이종성(李宗城)에게 수서(手書)를 내려 조정에 나오도록 효유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 조재호(趙載浩)를 소견하였으니, 조재호가 이제 막 영백(嶺伯)으로 있다가 체직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영외(嶺外)의 풍속에 대해 물으니, 조재호가 진달하기를,
"좌도(左道)의 풍속은 선정(先正)의 유법(遺法)을 지켜 분수를 편안히 지키고 곤궁함을 당연한 것으로 알아 견디고 있으며, 우도(右道)의 풍속은 조식(曹植)의 여풍(餘風)으로 오로지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도내(道內)에 쓸 만한 사람이 있는지를 물으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권상일(權相一)이 곧 한 도의 명망가입니다. 그 문하에 유학(遊學)하는 사람들이 모두 단정한 선비이니, 그 스승의 어짊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로 행공(行公)할 것을 권면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신의 선부(先父)의 나라를 위한 정성은 단지 ‘탕평’이란 두 글자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을사년264) 연경(燕京)에 갔을 때 만수산(萬壽山)을 보고는 ‘황명(皇明)이 망한 것은 당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돌아와 아뢰었던 것입니다. 정미년265) 이후에는 처지가 자별하여 언의(言議)를 자임하지 않았고, 언제나 지업(志業)을 채 펴지 못한 것 때문에 죽음에 임하여서도 심지어 ‘염습(殮襲)은 박한 쪽을 따르라.’고 경계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또 신의 아비가 이조 참의를 사양하는 상소에 이르기를, ‘격례(格例)에 구애되어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다름이 또한 훨씬 더하니, 신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있겠습니까? 대저 건극(建極)의 다스림은 비유컨대 한성(漢城) 안에 종루(鍾樓)를 세움과 같습니다. 어떤 문으로 들어왔는지 묻지 말고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동쪽에서든 서쪽에서든 모두 내가 극(極)을 세운 땅으로 귀착되게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근래 대각(臺閣)의 언사(言事)에 대해 성상께서 당습을 징계하는 데 지나치신 나머지 처분이 과중함을 면치 못합니다. 매번 약을 그만 들겠다고 하교하시므로, 언로의 막힘이 요사이와 같은 적이 없었으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숙묘(肅廟)의 처분은 매사가 엄중하였지만, 한림(翰林)이 한천(翰薦)에 실패하였다 해서 벌이 삭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박정원(朴正源)을 권관(權管)으로 삼은 것은 전고에 없던 일입니다. 또 박사한(朴師漢)에 대해서는 권관의 아비란 구실을 적용하여 의망한 전관(銓官)을 중추(重推)했으니, 참으로 지나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총재(冢宰)가 상주한 바를 듣고 보니, 박정원의 일은 스스로 지나친 일인 줄을 알겠다. 모두 정침(停寢)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1일 기유
임금이 관학 유생의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직접 시험하였다. 제술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시항(李時沆)과 강경을 한 사람인 지응룡(池應龍)과 이제해(李濟海)를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라고 명하였다.
숭릉(崇陵) 화소(火巢) 안의 위전(位田)은 전의 예에 의해 능군(陵軍)이 갈아먹도록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의소묘(懿昭墓)에 3년 동안 효장묘(孝章墓)의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기병(騎兵) 20명을 3년을 한정하여 획송(劃送)해 수호군(守護軍)과 번을 갈아 들게 하라고 명하였다.
8월 23일 신해
임금이 지중추부사 홍계희(洪啓禧)를 소견하였다. 홍계희가 아뢰기를,
"영남의 세(稅)를 균정(均定)할 때 어조(漁條)·방렴(防簾)은 5분의 1로 세를 정했는데, 이제 들으니 큰 폐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정(釐正)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다른 도의 예에 의거해 참작해서 세를 정한 뒤 장문(狀聞)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사목(事目)이 이미 반포된 이후 연해(沿海)의 수령들이 반드시 어염(魚鹽)을 사서 쓰는데, 듣건대 염부(鹽夫)·어부(漁夫)는 값을 받는 일이 없다고 하니, 반드시 중간에서 녹여 없앤 소치일 것이다. 아! 나의 백성들이 해촌(海村)에서 아무리 억울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능히 전달되겠는가? 이후로 수령이 혹 억지로 사거나 징구(徵求)하거나, 혹 능히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하여 하민(下民)에게 폐를 끼친다면 마땅히 장법(贓法)으로 다스릴 것이다. 균청(均廳)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에 엄하게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4일 임자
임금이 의릉(懿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친히 명정전에서 전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의릉(懿陵)의 제문을 직접 짓고,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박한 덕으로 임어한 지 2기(紀)가 되었건만 정성은 능히 위에 미치지 못하고, 믿음은 능히 아랫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다. 지난 가을 이후로 탕제(湯劑)를 올리는 것에 대해 허락을 아낀 것은 합문(閤門)을 닫고자 하는 뜻도 반찬을 물리치려는 뜻도 아니었으니, 유유한 이 마음은 푸른 하늘이 조림(照臨)하고 있다. 언제나 의릉을 바라볼 때면 심담(心膽)이 떨어지려 한다. 내일 마땅히 의릉에 전알(展謁)하고 직접 지은 제문으로 고유(告由)한 뒤 재실(齋室)에서 마땅히 탕제를 먹을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천지 사이에 ‘무함을 씻는다.[雪誣]’는 말이 없게 된 연후에야 진정으로 임금의 무함을 씻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론(老論)이라 이름하고 다시 이런 일을 하니, 이는 경묘(景廟)에 대한 신하의 절조가 없는 것이며, 소론(少論)이라 이름하고 우물쭈물하기만 하니, 이것은 나에 대해 신하의 절조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8월 25일 계축
임금이 휘릉(徽陵)의 기신제에 쓸 향을 명정전에서 직접 전하였다.
임금이 의릉(懿陵)에 행행(幸行)하였다. 임금이 흑사 첩리(黑紗貼裏)를 갖추고 능소(陵所)로 나아가서 재실(齋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는 홍살문(紅箭門) 안 배위(拜位)에 나갔다. 사배(四拜)를 행하고 마친 뒤 직접 능 위를 살펴보고 우상을 입시케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상설(象設)266) 곁에 엎드려 말하기를,
"오늘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내가 직접 제사를 올리러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 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세도(世道)가 한심하기 때문에 황형(皇兄)께 고하고 호소하러 온 것입니다."
하고, 이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많이 내렸다.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이 무슨 거조이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誣)’란 글자를 씻은 뒤에 일어나겠다."
하였다. 이천보가 사관(史官)을 돌아보며 2품 이상이 같이 들어올 것을 유시(諭示)하라고 말하니, 2품 이상이 모두 들어왔다. 이때 따가운 볕이 내리쬐는데도 임금이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여러 재신(宰臣)들이 각각 진언(進言)하며 간하고, 이천보가 눈물을 흘리며 임금이 일어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나의 무함을 풀었다만,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의 계사(啓辭)는 아직 그대로 있는데, 오늘 대신(臺臣)이 나오지 않는 것이 옳겠는가?"
하므로,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삼사(三司)의 죄입니다. 정계(停啓)하는 것이 무엇이 어려워 전하께서 이런 거조를 하십니까? 신이 한사코 하겠습니다."
하였다. 내국 제조(內局提調) 원경하(元景夏)가 고성(高聲)으로 아뢰기를,
"제사를 진설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으시고 이런 지나친 거조를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성을 지르지 말라. 이곳은 이렇게 할 곳이 아니다."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또한 어찌 전하께서 이렇게 하실 곳이겠습니까?"
하였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당인(黨人)의 머리를 베지 않으시고 이처럼 스스로 괴로워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입으로 고하기를,
"5년 동안 모신 것이 꿈만 같습니다. 원컨대 빨리 돌아가 모시어 이런 세계를 보지 않게 해주소서."
하고, 드디어 제사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전사(殿司)·능사(陵司)는 초헌(初獻) 때에 재랑(齋郞)의 뒤를 따라 즉시 시접(匙楪)에 정저(正箸)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망예(望瘞) 때 축문(祝文)은 안쪽으로 포개 접어서 글자가 노출되지 않게 할 것이며, 무릇 대소의 제향(祭享) 때도 이에 의거해 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재실로 도로 들어와 하교하기를,
"어제 약을 정지하도록 특별히 하교하고 직접 제문을 지어 의릉에 전알했는데, 몸이 진신(搢紳)이 되어 지영(祗迎)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기강이 없는 것이다. 불참한 문음(文蔭) 이상에게는 모두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베풀고 문신(文臣) 당상관 이하는 모두 투비(投畀)하라."
하였다. 회가(回駕)할 때에는 밤이 이미 깊었는데도 연로(輦路)의 좌우에 횃불을 꽂지 않았으므로, 공조의 당상관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낭청(郞廳)은 태거(汰去)하라고 명하였다. 병방 승지(兵房承旨) 이후(李)가 한성부도 또한 마땅히 처분할 것을 청하니, 경조(京兆)의 당상관은 종중 추고하고 낭청은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자신이 부관(部官)이 되어 집 앞의 등과 횃불도 능히 거행하지 못하니, 이로 미루어 보건대, 좌경(坐更)을 잘하지 못함을 알 만하다."
하고, 부관을 나처하라고 신칙하였다. 임금이 금훤랑(禁暄郞)이 누구냐고 묻자 승지가 김성우(金聖佑)라고 대답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궁(宮)을 나설 때는 김굉(金硡)이 했는데, 환궁 때에 어찌하여 대신 하게 하였는가? 이 또한 나태한 소치다."
하고, 김굉을 잡아들여 곤장으로 다스리라 명한 뒤에 드디어 대내(大內)로 들어왔다.
8월 26일 갑인
하교하기를,
"어제 돌아올 때 야색(夜色)이 어둑어둑했는데, 승지 이후(李)가 능히 협여(挾轝)를 신칙해 마치 후전(後殿)이 있는 것 같았다.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김광국(金光國)을 장령으로, 이민곤(李敏坤)을 헌납으로, 최재흥(崔載興)·이인원(李仁源)을 지평으로, 이의로(李宜老)를 정언으로, 김문행(金文行)을 부교리로, 김상철(金尙喆)을 수찬으로 삼았다.
좌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다시 수서(手書)로 조정에 나올 것을 권면하였다.
8월 27일 을묘
판결사(判決事) 윤빈(尹彬)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본직(本職)에 대죄(待罪)한 지 넉 달째인데, 백성들이 호소한 것 중에서 가장 딱하고 측은한 것은 곧 양인(良人)이 자신을 팔기를 원하는 경우로서, 혹은 아비가 죽었으되 장사를 지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어미가 굶주려 거의 죽게 된 상황 때문이기도 합니다. 경성(京城)이 이와 같으니, 외방(外方)의 사정은 알 만합니다. 아!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 하는 교화가 비록 한 세상에 두루 미치고는 있지만, 체수(滯穗)267) 의 이익은 오히려 저 과부에게 막혀 있어, 불쌍한 백성들로 하여금 노비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돌아보건대 가을 걷이가 이미 닥쳤으니, 유랑하던 백성들은 안집(安集)할 희망이라도 있겠지만, 자신을 판 사람들의 경우는 남의 속박을 받아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사서 취한 자도 또한 공연히 손해를 볼 수는 없으니, 이제부터 한결같이 고공(雇工)의 예에 의하여 우선 복역(服役)은 하되, 10년 뒤에는 본가(本價)를 면제시키도록 허락하여 스스로 물러나게 함이 마땅합니다. 신해년268) 의 큰 흉년 이후 양민으로서 자신을 판 사람의 경우 그 값이 쌀 5, 6두(斗)와 돈 3, 4꿰미에 불과하였는데, 아들 딸을 낳아 자손이 불어난 뒤에 아무리 갑절의 값을 바치며 물러나기를 애걸해도 물러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의(法意)로 보아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길에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경우 진정(賑政)이 바야흐로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진청(賑廳)의 입안(立案)을 받은 경우 외에, 10세 이후에 사들인 경우에는 진정이 끝난 뒤 관(官)에 정장(呈狀)하여 모두 고용(雇傭)으로 시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노(奴)의 양처(良妻) 소생의 경우 신해년부터 어미를 따라 양인으로 하는 일을 정식(定式)으로 만들었는데, 아직도 제멋대로 침포(侵暴)하는 자가 있으니, 또한 드러나는 대로 중벌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8일 병진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문신에게 제술을 실시하여 입격한 사람인 김회원(金會元)·정존겸(鄭存謙)을 모두 승륙(陞六)시켰다. 우의정 이천보가 아뢰기를,
"신이 며칠 전 능소(陵所)에서 아뢴 바를 사람들이 간혹 잘못 전하여 마치 신이 삼사(三司)에 분부한 것이 있기나 한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다면 대신이 어찌 권세가 무겁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잊지 않고 있다. 경이 어찌 ‘한사코 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고, 이어 목소리를 돋구어 하교하기를,
"경이 그르다. 말을 전한 자가 누구냐? 내가 마땅히 엄하게 다스리겠다."
하였다. 임금이 더욱 진노하여 이어 의릉(懿陵)을 봉심(奉審)할 때 입시했던 사관(史官)을 투비(投畀)하고 주서(注書)는 제주에 안치하라 명했다가, 곧 정침하라 명하였다. 이조 판서 조재호(趙載浩)가 말하기를,
"이광좌(李光佐)에게 세 가지 큰 죄가 있으니, 김일경(金一鏡)을 발탁해 병조 판서에 제수한 것과, 신축년269) ·임인년270) 에 옥사(獄事)를 단련(鍛鍊)한 것과, 그의 조아(爪牙)·심복(心腹)으로서 전에 천인(薦引)했던 자들이 무신년271) 이후 극적(劇賊)이 된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죄를 짓고도 생전에 요행스럽게도 전형(典刑)을 면했으니, 죽은 뒤 어찌 징토해야 한다는 논의가 없겠습니까? 또 신에게 따로 통완(痛惋)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신년 이후 즉시 자신의 죄를 인책하여 글을 올려 죄를 청한 뒤 전야(田野)로 물러나 있으면서 처분을 기다려야 마땅했을 터인데, 조금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도리어 전날의 습기(習氣)를 마구 부리면서 당류(黨類)를 규합하여 국가로 하여금 탈가(稅駕)할 곳이 없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그 죄가 더욱 대단하다 할 만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논한 바가 참으로 나의 뜻과 같다. 하지만 이광좌의 공로는 그 죄를 속(贖)할 만한 것이 있다. 갑진년272) ·무신년 및 연전에 합문(閤門)을 닫았을 때 모두 공로가 있었다."
하였다. 조재호가 말하기를,
"죄는 있지만, 그에게 공이 있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만약 신의 아비·형제와 고 좌상(左相) 송인명(宋寅明)이 없이 이광좌 혼자에게만 맡겼다면 국가의 안전은 기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신년에 이르러 여러 역적들이 모두 심유현(沈維賢)의 무리에게 속임을 당하였는데, 자복한 초사(招辭)는 낱낱이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신의 아비와 고 좌상이 상의하기를, ‘난적(亂賊)의 근인(根因)이 이제 죄다 노출되었다.’ 하고는 마침내 역적의 초사를 초출(抄出)하여 팔로(八路)에 널리 고하였던 것이니, 민진원(閔鎭遠)이 이른바 ‘성무(聖誣)를 변명(辨明)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변명할 만한 무함(誣陷)이 없는 것입니다. 신하에게 죄가 있으면 죄를 줄 뿐이니, 어찌하여 지나치게 사기(辭氣)를 허비하십니까?"
하고, 이천보가 말하기를,
"인신(人臣)은 단지 의리(義理)만 보고 고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목소리를 돋구어 말하기를,
"이른바 의리란 것이 무엇이냐?"
하고, 연이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렸다. 이에 이천보가 물러나와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문에 임하여 누웠는데 옥음(玉音)이 아픈 소리를 내며 신음하므로 내국(內局)에서 진후(診候)할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협실(夾室)로 옮겨 침수(寢睡)할 것을 청하였으나, 또 답하지 아니하였다. 동궁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엎드려 울자, 임금이 비로소 하교하기를,
"의릉(懿陵)에 하소연하였을 때 경청하였을 것인데도 당심(黨心)이 이와 같으니, 우상을 비난하여 논의한 사람을 알아낸 뒤에야 입진을 허락할 수 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박정원(朴正源)을 권관(權管)에 출보(黜補)하라는 명을 이미 그냥 두라 했으니, 그때의 승선(承宣)을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하라는 명도 또한 정침토록 하라."
하였다.
8월 29일 정사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북평사(北評事) 남태회(南泰會)를 소견하여 북로(北路)의 흉황(凶荒)에 대해 물었다. 남태회가 말하기를,
"신이 환진(還賑)273) 의 식례(式例) 외에 죽을 쑤어 나누어 먹였는데, 우마(牛馬)의 똥이 섞인 흙 가운데 떨어진 콩을 다투어 주워서 먹었으니, 이로 미루어 매우 참혹함을 알 만합니다. 대저 북관(北關)의 고질적인 폐단은 청차(淸差)가 올 때의 요역(徭役)입니다. 이른바 복정(卜定)274) 한 소[牛]와 보습[犂]과 염석(鹽石) 등의 물건을 모두 백성들에게 책임지워 징수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유산(流散)하고 있으니, 조정에서 영동·영남의 모곡(耗穀)을 덜어내어 몇 해를 한정해서 요역을 방급(防給)한 뒤에라야 다시 생업에 복귀하여 안집(安集)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북관의 해민(海民)을 균청(均廳)에 소속시킨 뒤 순포(純布)로 세금을 바치게 했는데, 해척(海尺)들은 물고기나 미역을 채취하여 덕원(德源)이나 원산(元山)에서 판매(販賣)합니다. 그러므로 돈은 얻기 쉬우나 포(布)는 얻기 어려워서 백성들이 모두 돈으로 바치기를 원하여 신이 떠날 때 일제히 호소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균청으로 하여금 백성들이 원하는 것에 따라 받아들이게 하라."
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옛 북백(北伯) 황정(黃晸)은 청간(淸簡)하여 잘 다스렸고 진정(賑政)도 또한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새 도신(道臣) 이종백(李宗白)은 그 어미가 늙고 병들어 비록 억지로 부임은 하지만, 실로 오래 있기 어렵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관은 비록 이미 진정을 끝냈다지만, 삼수(三水)·갑산(甲山)에 또 흉년이 들었으니, 이제 겨우 일어난 백성을 서툰 손에 맡길 수는 없다. 전 감사 황정을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잘못 전한 사람은 의금부(義禁府)에 스스로 나타나라고 명하였으나 스스로 나타난 사람이 없었다 하여 특별히 의금부 판사(判義禁府事) 권적(權樀)을 체직시켰다. 승지 서명신(徐命臣)에게 하루 내 전교(傳敎)를 무릇 열 번이나 내렸다.
윤득재(尹得載)를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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