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기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문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이미 유시했음에도 자현(自現)하는 자가 없으니, 세도(世道)가 한심하다."
하니, 내국 제조 김약로가 말하기를,
"뭇 신하들의 죄가 아님이 없지만, 우상의 말이 또한 오활(迂闊)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자현하는 자가 없으니, 조참은 마땅히 변경하여 설국(設鞫)으로 해야 하겠다."
하였다. 백관이 제 자리로 나아가니, 임금이 말하기를,
"통례(通禮)는 단지 ‘부복(俯伏)’이라고만 외치고 자현하는 자가 있기를 기다려 ‘흥(興)’이라 외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를 발탁하여 판의금으로 삼고, 또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을 박탁하여 지중추로 삼았으니, 대려 훈신(帶礪勳臣)으로 나이가 70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특별히 제수하여 임상원(林象元)을 교리로 삼고, 남태회(南泰會)를 수찬으로, 박홍준(朴弘儁)을 헌납으로, 박창윤(朴昌潤)을 필선으로, 이극록(李克祿)을 사서로, 홍계희(洪啓禧)를 우빈객으로 삼았다.
임금이 직접 대유(大諭)를 지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청구(靑丘) 땅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유약(有若)275) 이 말하기를, ‘효제(孝悌)란 것은 인(仁)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대학(大學)》에는 ‘효(孝)란 임금을 섬기는 바이며, 제(悌)란 어른을 섬기는 바이다.’라고 했으니, 사람에게 효제가 없다면 어찌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킨다고 할 수 있겠는가? 누군들 형제가 없으리요마는,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5년 동안의 지극히 우애로웠던 은혜를 털끝만큼도 갚지 못하고 궁검(弓劍)을 더위잡을 수 없으니 심담이 떨어져 통박(痛迫)한 중에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무신년 난역(亂逆)을 추상(追想)하면 꿈에도 놀랄 만하다. 효경(梟獍)과 같은 무리를 쾌히 징토하였으니, 오늘날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다시 제기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른바 ‘무(誣)’란 것은 인국(隣國)을 이르는 것이다. 군신(君臣) 사이에 어찌 감히 ‘무’라 말할 수 있으랴? 이 따위의 의리는 성현(聖賢)께 질정하여도 의문이 없을 것이고 아이에게 물어도 능히 알 것이다. 그런데 저 민백상(閔百祥)은 가정에서 들은 것을 주워 모아 오찬(吳瓚)을 편들며 감히, ‘군부(君父)에 대한 무함(誣陷)을 채 씻지 못하였다.[君誣未雪]’란 네 글자를 서독(書牘)에다 썼다. 멀리 의릉(懿陵)을 바라보니, 진실로 듣고 싶지 않아 병중에 억지로 능에 절한 뒤 상설(象設)에 머리를 조아리며 차마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능에 전알(展謁)하기 전 입시했을 때 내가 말하기를, ‘이 네 글자는 갑진년276) 이후에 한쪽편 사람들이 징토하던 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징토는 징토인 것이고, 네 글자는 네 글자일 뿐이다. 어찌 감히 이것을 핑계대어 분의(分義)를 돌아보지 아니하는가? 민백상은 오찬으로 인해 분요(紛擾)을 일으켜 이 말을 끼워 넣었으니, 반드시 말을 지어내어 우상에게 잘못 전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상이 어찌 사관(史官)을 추고하기를 청한 거조가 있겠는가? 처음부터 자현(自現)할 것을 명한 것은 우상에게 말한 자에 불과했는데 끝내 자현하지 않았으니, 내가 비록 노쇠했지만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모두 뜰에 모인 뜻을 본떠 이에 조참(朝參)을 명하여 문에 임해 밝게 유시한 것이니, 뜰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모두 이 유시를 들으라."
하였다. 승지가 읽기를 마치자, 이조 판서 조재호(趙載浩)가 나와 말하기를,
"그날 문안(問安) 반열에서 신이 우상에게, ‘3백 년 이래로 대신(大臣)이 삼사(三司)를 명령한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우상이 말하기를, ‘창황중에 미처 말을 가리지 못했지만 본래 뜻은 이와 같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대신과 수작한 자를 물으신다면, 신이 청컨대 자수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어떤 사람에게서 들었는가?"
하였다. 조재호가 말하기를,
"소란한 중이라 곁에서 들었는데, 실로 능히 기억하지 못하니, 어떻게 지적하여 고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날 경재(卿宰) 중에 자현하는 자가 있는가?"
하였다. 경재들도 계속해 나아가 스스로 수작한 바가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임금이 그날 참의(參議) 가운데서 후반(候班)에 참여한 자를 불러 물으니, 예조 참의 윤봉오(尹鳳五)와 호조 참의 조태언(趙泰彦)이 나아와 엎드렸다. 윤봉오가 말하기를,
"신은 후반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태언과 함께 집의문(集義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우상이 능 위에서 ‘정계(停啓)시키겠다.’고 앙달(仰達)한 것을 들었으므로, 때마침 신사건(申思建)을 만나 물어보았더니, 신사건이 말하기를, ‘오늘 거조는 신자(臣子)로서 망극한 일이었다. 정계를 어찌 족히 말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이처럼 수작하였으므로, 감히 이렇게 앙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너에게 전했느냐?"
하였다. 윤봉오가 말하기를,
"누군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른 대로 고하지 아니하니, 국문(鞫問)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조태언에게 묻기를,
"너 또한 들은 바가 있느냐?"
하니, 조태언이 말하기를,
"신은 실로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함께 앉아 있었으니, 어찌 참여해 듣지 않았겠는가?"
하고, 윤봉오과 조태언이 대답한 바가 모두 의심스럽다 하여 장차 친문(親問)을 행하려 하였다. 지의금(知義禁)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나라를 망칠 거조를 하시는 것입니까? 형신(刑訊)이란 역적을 다스리는 율(律)입니다. 설령 윤봉오와 조태언에게 말을 지어내어 떠든 죄가 있을지라도 어찌 형신하는 데까지 이를 수야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상성을 체차(遞差)하라."
하였는데, 한참 있다가 다시 하교하기를,
"절의(節義)를 위해 죽는 사람은 마땅히 범안(犯顔)하고 과감히 간쟁(諫爭)하는 선비에게서 구하여야 할 것이다. 지의금을 체차하라는 하교를 환수하라."
하였다. 이어 통례(通禮)로 하여금 ‘흥(興)’을 외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물러났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서 윤봉오(尹鳳五)와 조태언(趙泰彦)을 직접 국문하였다. 윤봉오에게 물으니, 윤봉오가 말하기를,
"‘정계하겠다.’는 대답은 신이 마침 듣기는 했지만, 누가 전한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네가 만약 대사간이 된다면 마땅히 정계하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하니, 윤봉오가 말하기를,
"아랫 부분에 대해서는 비록 정계하더라도 의리는 크게 불가한 데에 이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윤봉오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뜻밖이다."
하였다. 조태언에게 물으니, 조태언이 말하기를,
"신은 이미 능 위에서의 이야기를 알지 못했으니, 어찌 수작하는 데 참견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또 본래 귀가 먹어 고성(高聲)이 아니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대사간이 된다면 마땅히 정계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
하니, 조태언이 말하기를,
"정계 여부에 대해 어찌 평일에 요량한 바 없겠습니까만, 항양(桁楊) 아래에서 구차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옳다."
하고, 특별히 석방해 사은(謝恩)하고 나가도록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윤봉오는 이미 수작한 일이 있었는데도 바른 대로 진달하지 않았으니, 향리(鄕里)로 쫓아버리고 종신토록 영원히 금고(禁錮)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우상이 오늘 한 바는 뜬소문에 동요됨이 있는 것 같다. 기강을 진작하고 말세를 격려하는 일은 대관(大官)부터 먼저 해야 마땅하다. 우의정 이천보(李天輔)를 파직하라."
하였다.
하교하여 전 우의정 이천보에게 유시하기를,
"경을 위해 아깝게 생각하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여긴다. 뜻밖의 갈등으로 경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했으나, 이번의 처분은 한 오라기의 온축(蘊蓄)도 없으니, 다시 대명(待命)하지 말라."
하였다.
9월 3일 경신
특별히 김상로(金尙魯)를 우의정에 제배하고, 김상성(金尙星)을 병조 판서로, 신만(申晩)을 판의금으로, 조태언(趙泰彦)을 승지로 삼았다.
9월 4일 신유
임금이 비국 당상과 유신(儒臣)을 인견하고, 이어 왕세자에게 시좌(侍坐)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란 진실로 알기가 쉽지 아니하다. 조태언(趙泰彦)은 이번의 일이 아니었다면 내 어찌 그 얼굴을 볼 수 있었겠는가? 당나라 현종(玄宗)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 또한 그러하다. 출입할 때 행보(行步)가 몹시 거북하였는데 국문 때 족쇄에 다쳤기 때문일 것이다."
하니, 교리 임상원(林象元)이 말하기를,
"가쇄(枷鎖)가 도리어 이와 같으니, 하물며 항양(桁楊)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역적을 다스리는 율을 베풀었으니, 또한 지나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세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윤봉오(尹鳳五)에게 형(刑)을 가하지 않았던 것은 너를 위해서이다. 대저 형을 가하는 자는 비록 시원하기는 하지만, 형을 당하는 자야 어찌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서관(庶官)이 조그만 일로 하례(下隷)를 무겁게 형벌하는 일을 나는 몹시 미워한다."
하니, 공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이번의 하교는 실로 요순의 성덕입니다."
하였다.
여러 대신(臺臣)을 체직시키라 명하였으니, 대유(大諭) 이후에 머뭇거리며 위패(違牌)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밤 임금이 유신(儒臣)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함을 씻는다.’는 것은 민백상(閔百祥)의 말인데, 이는 또한 그 가정(家庭)의 말이기도 하다."
하매, 부수찬 남태회(南泰會)가 말하기를,
"신은 민백상의 청백·공평함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봉오(尹鳳五)의 의리란 말은 곧 ‘임금의 무함을 채 씻지 못하였다.’는 두뇌(頭腦)였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당종(堂從) 세 사람이 나란히 대신의 반열에 올랐으니, 찰 데까지 가득 찼습니다. 바라건대, 상직(相職)을 해면(解免)해 주소서."
하였으나,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9월 5일 임술
이종백(李宗白)을 대사헌으로, 김상석(金相奭)을 대사간으로, 임순(任珣)을 집의로, 김상철(金相喆)을 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을 헌납으로, 이택징(李澤徵)·이영복(李永福)을 장령으로, 허휘(許彙)·남혜로(南惠老)를 지평으로, 윤동성(尹東星)을 정언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우참찬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동의금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홍문 제학으로, 이상윤(李尙允)을 설서로, 홍계희(洪啓禧)를 지돈녕으로 삼았다.
9월 6일 계해
임금이 약방의 여러 신하와 여러 재신(宰臣)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봉오는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나, 조태언은 구덩이에서 빼내어 승지로 삼았다."
하니,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이것은 전하의 크게 공정한 도리입니다."
하였다. 호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전 우상은 능 위의 망극한 때를 당하여 조제(調劑)할 것을 우러러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근거없는 말이 ‘대신(臺臣)을 지휘하였다.’고 전파하였기 때문에 사관을 추고할 것을 청하여 근거없는 말을 진정시키고자 하였지만, 천위(天威) 아래서 충정(衷情)을 채 드러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저 이 일은 형체를 포착하기 어려운데, 한 사람이 말을 하고 두 사람이 말을 해 마치 근저(根柢)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적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비로소 깨달았다. 진실로 경의 말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귀로 들을 수는 있되 입으로 말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면, 어찌 이처럼 와전되었겠는가?"
하므로, 김상성이 말하기를,
"무신년277) 에 역적을 다스릴 적에 전하께서는 언제나 평번(平反)하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는 어찌하여 반드시 대단하게 격뇌하시는 것입니까?"
하였다.
9월 7일 갑자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상시에 몸가짐을 편안한 대로 내맡겨 두지 않으려고 드나들 때 혹 소련(小輦)을 타지 않고 멀리 걸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은 뜻이 있어서이니, 마음속으로 송나라 효종(孝宗)의 철장(鐵杖)·목마(木馬)의 습관을 따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도 근력도 모두 쇠로하여 아마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주자서(朱子書) 가운데 제이주(第二奏)의 ‘다시는 천어(天語)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읽고, 나는 이것이 정말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고, 이어 위패(違牌)한 대신(臺臣)에게 모두 고신(告身)의 율을 베풀라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또 차자를 올리기를,
"동당(同堂)의 형제가 삼공(三公) 중 둘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해면하여 주소서."
하였으나,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좌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며칠 이래로 천심(天心)이 격뇌하여 유전되는 한두 사구(辭句)를 차마 받들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문(門)에 거둥하여 국문을 베풀어 밤을 지새워 새벽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성명(聖明)으로 하여금 이런 극도의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은 조정 신하들의 만 번 죽을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신은 나아가 현명한 말로 항쟁(抗爭)하지 못하여 광정(匡正)하지 못한 죄를 자초(自招)하였으며, 물러나 목을 찌르고 창자를 갈라 불충한 죄를 능히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또한 오직 거적자리에 몸을 맡기고 환토(圜土)278) 에서 진흙에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조금이나마 만분의 일이라도 죄를 대속할 따름입니다."
하고, 이어 상직(相職)을 해면시켜 줄 것을 바라니, 비답하기를,
"아! 임금과 신하가 비록 의(義)로 만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경의 평일의 뜻으로 어찌 와서 나를 보려고 하지 않는가? 태연하게 마치 모르는 것처럼 하니, 어찌 세록지신(世祿之臣)이 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하였다.
수찬 남태회(南泰會)가 아뢰기를,
"신이 북쪽에서 돌아올 적에 철원에 이르렀는데, 부사 우홍규(禹弘圭)의 군관(軍官) 두 사람이 사사로이 역마(驛馬)를 타고 떠나버렸었습니다. 우홍규는 파직하고 군관은 과죄(科罪)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북관(北關)에서 진휼(賑恤)을 설행했을 때 사재(私財)를 바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경오년279) 의 전례에 의거하여 상전(賞典)을 베풀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산(茂山)에 사는 한량(閑良) 정인(鄭仁)은 곧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후예이며, 그의 5대조는 임진 왜란 때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기에 한 사우(祠宇)에 같이 향사(享祀)하고 있습니다. 선조(先朝) 을미년280) 에 북로(北路)에 기근이 들자 영고(寧考)께서 하교하시어 민간에 효유한 적이 있는데 사지(辭旨)가 지극히 측은하였으므로, 정인이 듣고 감읍한 나머지 정하게 베껴 벽에 붙이고는 아침마다 향을 피우고 배례(拜禮)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신년281) 에 역적을 토죄하는 교문(敎文)이 반포되자 또 벽에 붙여 놓고 30년을 하루처럼 정성을 들였기에 도신(道臣)이 복호(復戶)를 주어 장려했습니다만, 조정에서도 마땅히 포상(褒賞)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성이 심히 가상하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쌀과 포(布)를 후하게 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8일 을축
조명교(曺命敎)를 대사헌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간으로, 조중직(趙重稷)을 집의로, 윤득징(尹得徵)을 사간으로, 권해(權賅)를 헌납으로, 정희신(丁喜愼)·민우(閔堣)를 장령으로, 이운해(李運海)·정언상(鄭彦祥)을 지평으로, 이조망(李朝望)·김성우(金聖佑)를 정언으로, 정익하(鄭益河)를 우참찬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지돈녕으로, 조관빈(趙觀彬)을 공조 판서로, 장태소(張泰紹)를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조명교·서명신·조중직·이조망·정희신·윤득징·이운해를 충청도에 투비(投畀)하라고 명하였으니 새로 제수하는 명이 내려졌음에도 모두 외방에 있다고 핑계를 대었기 때문이었다. 위패(違牌)한 대간(臺諫)에게는 모두 탈고신 삼등(奪告身三等)의 율을 베풀었다.
9월 10일 정묘
약방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진년282) 뒤 일본 사신을 송별(送別)하는 시에 이르기를, ‘회답사(回答使)란 이름의 사신 어디로 향하는고? 오늘날 교린(交隣)하잔 말 나는 모를레라. 한강(漢江)에 이르러 강 위를 바라보니, 두 능(陵)의 송백(松栢)은 가지도 나지 않았네.’라고 하였다. 말이 심히 강개(慷慨)한데, 누가 지은 것인가?"
하니, 제조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신 또한 익히 보았으되, 누가 지은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의 거취를 경 등은 알고 있는가?"
하니,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이태좌(李台佐)는 참으로 드물게 있는 사람이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김일경(金一鏡)이 교문(敎文)을 지어 진하(陳賀)했을 때와 임인년283) 옥사(獄事) 때 시종일관 참여하지 않았고, 박상검(朴尙儉)의 옥사에도 끝에 가서 단지 한 차례 담당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신은 좌상과 함께 강관(講官)이 되자, 고 상신이 글을 써서 아들에게 당론을 하지 말라고 하고 또 신에게도 전해 보였습니다."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고 상신은 당하관으로 있을 때부터 탕평론을 주장했기에, 이인엽(李仁燁)은 보합청 당상(保合廳堂上)이라 지목하고 고 상신은 보합청 낭청(保合廳郞廳)이라 지목했다 합니다."
하였다.
9월 11일 무진
전 병조 판서 김상로(金尙魯)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세상이 신을 버리매 신도 또한 세상을 버렸습니다. 그물은 하늘을 뒤덮고 함정은 땅에 널려 있어 한번 발을 디디면 깨어져 가루가 될 지경이니, 신은 차마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몸이 화살의 과녁이 되어 뭇 살촉이 몰려드는지라 조정에 있어도 도움되는 바 없고 세상의 노여움만 끓어오르니, 신은 감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물러나 성상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장주(章奏)에 딱 잘라 말하여 조단(朝端)의 한 발자국이 곧 절지(截地)가 되었으니, 신은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미한 가문이 항만(亢滿)하게 됨에 이르러서는 내심 두려워하며 떨고 있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이번 상직(相職)은 성의(聖意)가 있는 바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85차례 정사(呈辭)한 뒤 상서하여 사직하니, 왕세자가 예사 답을 내렸다.
9월 13일 경오
좌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상서하여 상직을 사양하니, 왕세자가 ‘다시는 공사(控辭)하지 말고 뜻을 바꾸어 조정에 나오라.’고 답하였다.
9월 14일 신미
좌의정 이종성이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에 승지에게 돈유(敦諭)할 것을 명하였다.
9월 15일 임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사단(辭單)을 85차례 올렸고, 지친이 정석(鼎席)에 나란히 있으니, 청컨대 상직을 갈아주소서."
하고, 이어 시골로 돌아가 남은 해를 마치기를 비니, 왕세자가 예사 답을 내렸다.
9월 17일 갑술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또 상서하여 면직을 바랐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8일 을해
홍봉한(洪鳳漢)을 대사헌으로,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김상철(金尙喆)을 집의로,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을 헌납으로, 이택징(李澤徵)·유건(柳健)을 장령으로, 송덕중(宋德中)을 지평으로, 이규채(李奎采)를 보덕으로, 박사눌(朴師訥)을 문학으로, 송문재(宋文載)를 사서로, 이덕해(李德海)·이만육(李萬育)을 정언으로, 서명빈(徐命彬)을 형조 판서로, 윤급(尹汲)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제주의 정묘년284) 식년시(式年試) 무과 초시에 입격한 사람인 김성룡(金成龍)과 경오년285) 식년시 무과 초시에 입격한 사람인 김응정(金應鼎)에게 모두 정시(庭試)의 전시(殿試)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본주(本州)는 바다 건너의 절도로서 초시에 입격한 사람이 능히 본과(本科)에 응시하러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에 으레 타과(他科)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9월 19일 병자
임금이 정시(庭試)의 전시(殿試)에 친림하여 이명환(李明煥) 등 20명과 직부(直赴)한 사람인 이우(李堣) 등 5명을 뽑았다. 임금이 시관(試官) 서지수(徐志修)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이 이제 막 북관(北關)에서 왔는데, 북쪽 백성들이 올해는 생활할 수 있겠던가?"
하니, 서지수가 말하기를,
"근근이 흉년을 면했습니다만, 길주(吉州)·명천(明川)은 또 서리의 재해를 입었습니다. 3년 동안 흉년을 겪은 끝인데도 옛 포흠(逋欠)을 징수하고 있으니, 반드시 민정(民情)의 소요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길주 고을을 옮기는 일은 지극히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연전에 우상 김상로(金尙魯)가 내려가 살펴보고 새 터를 가려 얻어 윤허를 받았으므로, 이방수(李邦綏)가 목사(牧使)가 되어 새 터 수십 군데에다 우물을 팠습니다만, 끝내 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 몇 리쯤 되는 곳을 가려 동헌을 헐어 옮기고 고을을 옮길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재작년 겨울 내려갔을 때 고을 사람들이 불편함을 말하는 자가 많기에 작년 봄에 신이 직접 살펴보았더니, 우상이 전에 옮기고자 한 것은 단지 규봉(窺峰)이 압림(壓臨)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번에 정한 곳도 또한 규봉이 압림하여 있었고 앞에는 큰 내가 둘러 있어 성(城)에 물이 침범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봄에 도신(道臣)이 정침할 것을 청하여 중추(重推)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나, 여러 신하들이 간섭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 그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비국에서 입시할 때 품처토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양호(兩湖)의 잡역미(雜役米)에 관한 일을 이미 도신(道臣)에게 맡기고 조정에 미루지 않게 했으니, 회록(會錄)한 조관(條款)은 균청(均廳)에 관유(關由)할 필요가 없는데, 균청의 사목(事目)에 들어 있으니 간행할 때 이 또한 마땅히 도신에게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잘못 기록했다면 마땅히 빼 버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무변(武弁) 중에서 병사(兵使)·수사(水使)의 우후(虞候)가 가장 딱합니다. 이 무리들이 오랫동안 근무하여 한번 이 직임에 보직(補職)되면 곧 까닭없이 산직(散職)이 되는 것과 같게 되니, 한번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실직(實職)을 가진 사람으로 차출하여 수령의 예로 시행한다면 이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판돈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무변이 수령을 거친 뒤에 승자(陞資)하도록 정식하는 것은 의도가 있습니다. 우후는 일개 좌막(佐幕)에 불과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변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뒷날 대신이 입시했을 때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북평사(北評事)는 옥당관(玉堂官)을 지낸 인원이 매우 적습니다. 양사(兩司)에서 통의(通擬)하는 것이 본래 전례이니, 이에 의거해 통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옥당관으로 행공(行公)하지 않는 사람을 차출하여 보내되, 양사에서도 또한 통의하라."
하였다.
정언 이만육(李萬育)이 상서하여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접때 대신(臺臣)을 한결같이 모두 투비(投畀)한 것은 비록 대조의 칙려(飭勵)하는 뜻에서 나오긴 했습니다만, 일시에 쫓아버렸으니 꼴이 서글프고 참담합니다. 후사(喉司)에서는 마땅히 작환(繳還)해야 할 바인데도 진백(陳白)한 바 없으니,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양사(兩司)가 통피(通避)하지 아니함은 《속대전(續大典)》에 실려 있는데, 집의 김상철(金尙喆)은 억지로 인혐했고 후원에서는 법을 굽혀 따르면서 봉입하였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를 중추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께서 처분하신 뒤이니, 어찌 다시 품하겠는가? 끝에 진달한 바는 그대로 실시하라."
하였다.
9월 20일 정축
이천보(李天輔)를 판중추부사에 서부(敍付)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또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왕세자가 예사 답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인생 70은 옛부터 드물다.’고 하였다. 신급제(新及第) 이시항(李時沆)은 금년에 일흔 다섯이니, 특별히 승륙(陞六)시켜 내가 나이를 존중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1일 무인
이규휘(李奎徽)를 정언으로, 남태회(南泰會)를 부교리로, 성천주(成天柱)를 부수찬으로, 서효수(徐孝修)를 겸 사서로, 이득종(李得宗)을 겸 문학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우참찬으로 삼고, 조재호(趙載浩)를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대개 조재호가 전날 시관(試官)으로서 위패(違牌)하였다가 휘지(徽旨)로 파직되었기 때문이었다.
9월 22일 기묘
지진이 일어났다. 오시(午時)에 뇌성(雷聲)이 울렸다. 초혼(初昏)에 천둥하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왕손(王孫)이 탄생하였다. 내국(內局)의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 축하했는데, ‘원손(元孫)’이라 일컫는 사람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元)’ 자는 곧 ‘장(長)’ 자를 이르는 것이니, 정호(定號)하기 전에 어찌 원손이라 일컬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드디어 정호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너무 빠르다는 것으로 어렵게 여기자, 여러 신하들이 다시 힘써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올해 안에 어찌 다시 왕손을 볼 줄 생각했으랴? 슬픔과 기쁨이 마음속에서 엇갈린다. 지금부터 이후로 국본(國本)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으나, 경오년286) 과는 차이가 있으니, 이름을 지은 뒤에라야 이에 능히 국본을 공고히 하고 인심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빈궁(嬪宮)에게서 탄생한 아들을 원손이라 정호하고, 고묘(告廟)·반교(頒敎)하는 등의 일을 7일이 지난 이후에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원경하(元景夏)를 예조 판서로, 조재호(趙載浩)를 우빈객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지경연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부교리로 삼았다.
9월 23일 경진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으로 들어갔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뇌성의 이변으로 인해 깊이 경구(警懼)를 더하고 하교하기를,
"올봄 이후로 다시 나라의 경사가 있으니, 실로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우신 것이며 또한 열조(列朝)께서 우리 나라를 붙드신 것이다. 지금 군신(君臣)은 이로 인해 서로 힘써 이에 나라를 공고히 해야 마땅하다. 지금 왕자(王子)·대군(大君)은 없고 단지 원량(元良)만 있는데 새로 왕손을 낳았으니, 나라의 근본이 절로 굳건해지는 바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마땅히 조용하게 저 하늘에 우러러 보답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거조(擧措)를 보건대 차서(次序)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모두 원손(元孫)을 더디 기다린 것처럼 알고 있으니, 인심이 장차 반드시 떠들썩할 것이므로, 슬픔을 억누르고 이름을 정하되 마땅히 절제해야 할 것이다. 또 세손(世孫)으로 봉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경오년에 반교(頒敎)·진하(陳賀)한 일은 고례(古例)가 아니다. 고유문(告由文)과 반시문(頒示文)은 직접 지어 내릴 것이니, 태묘에 고유하는 것은 삭제(朔祭)와 겸행(兼行)하고, 반시문은 정원(政院)에서 정부(政府)와 팔도(八道)·삼도(三都)에 하유하도록 하라. 사직(社稷)에 고하고 반교·진하하는 일은 일체 모두 그냥 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호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에게 묻기를,
"원손을 보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보았나이다. 실로 우리 동방의 억만년토록 끝없는 기쁨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음성이 심히 크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코가 높고 미간이 넓은데다, 눈빛이 사람을 두렵게 하였으니, 비단 음성이 우렁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의 전형(典刑)과 흡사하다."
하였다. 광주 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원손을 위해 복을 아끼시는 하교를 하시니, 신은 실로 흠앙(欽仰)하는 바입니다. 억만년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이 또한 여기에 터잡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한 산성 밖에 높은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병자년287) 에 오랑캐들이 이 봉우리 위에서 엿보았으니, 실로 요긴한 곳입니다. 민진후(閔鎭厚)가 수어사(守禦使)가 되었을 때 봉우리 위에 작은 성을 쌓아 천총(千摠)이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켰습니다만, 그 형세를 지탱하기 어렵고 또 땅이 높아서 성가가 쉽게 무너집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돈대(墩臺) 둘을 쌓아 적이 올라올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형이 과연 성 안을 내려다보고 있는가?"
하므로, 이기진이 말하기를,
"홍이포(紅夷砲)를 쏘면 포탄이 성중에 들어온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형과 돈대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또 ‘당종(堂從) 형제가 나란히 정석(鼎席)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또 늙었다.’는 이유로 굳이 사직하니, 임금이 면부(勉副)하고 영중추부사에 부직(付職)하였다.
9월 25일 임오
판부사 이천보(李天輔)가 상서하여 인죄(引罪)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9월 26일 계미
김상복(金尙福)을 승지로, 이중조(李重祚)를 수찬으로 삼았다.
9월 27일 갑신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또 상서하여 사직하니, 왕세자가 예사 답을 내렸다.
9월 28일 을유
신은(新恩)을 방방(放榜)하니, 임금이 이명환(李明煥) 등 25명을 인견하고, 경계하기를,
"내가 ‘공(公)’이란 한 글자로 너희들에게 하유하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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