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8권, 영조 28년 1752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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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무자

우박이 내리고 밤에는 번개가 치고 천둥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갔는데, 승사(承史)가 입시하였다. 임금이 불러 주며 전교를 쓰게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용잠(龍潛)의 구궁(舊宮)이 얼마나 막중한 곳인가? 그런데 의소궁(懿昭宮)의 일은 이미 끝났으나 송현궁(松峴宮)의 완공 날짜는 까마득하기만 하니, 이보다 더 한심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일을 담당한 중관(中官)은 해부(該府)에서 처리하도록 하고 호조 판서는 종중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일이면 거둥할 것인데 도승지가 비어 있다고 하니, 그의 대임자는 서지수(徐志修)로 제수하고 동부승지는 체자하여 집의 김상철(金尙喆)로 제수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거행하려 하는데 대신(臺臣)들이 모두 부름을 어기자, 하령하기를,
"대조께서 상설(象設)에 엎드려 슬퍼하시다가 재차 탕약을 복용하실 때에 어떻게 감히 눈치만 살피겠느냐고 하교하셨다. 더구나 상참은 차대(次對)와 달라 기강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나 무엄하니 모두 고신(告身) 3등을 빼앗는 율을 적용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충청도 유생 박한후(朴漢垕) 등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청하였는데,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홍문관 제학 서종급(徐宗伋)에게 명하여 반궁(泮宮)288)  에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생원 곽성제(郭聖濟), 유학 김적기(金迪基)를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고, 그 나머지는 급분(給分)289)  하였다.

 

10월 2일 기축

형조에 갇혀 있는 죄수들 가운데 죄질이 가벼운 자들을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송현의 옛 궁에 나아가 하교하기를,
"엊그제 그때의 일들에 대해 감회가 일어나 진전(眞殿)290)  에 전(奠)을 드리고 또 제3실에 감회가 일어나 이 궁을 찾아왔다. 아! 외방에 잠시 어가를 멈추었던 곳에도 표식을 세워서 후세에 전하는데, 더구나 두 분 성상께서 임하시던 옛날의 궁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궁이 허물어진 것을 보니 마음이 송구스럽다. 탁지(度支)291)  를 시킬 것 없이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보수하도록 하라."
하고, 또 단청을 칠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검소하였던 선왕의 덕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영건 당상(營建堂上) 조영국(趙榮國)·김상성(金尙星) 등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하교하기를,
"송현궁과 어의 본궁(於義本宮)은 호조의 낭관이 3년마다 한 차례씩 봉심하고 보수하게 하라. 창의궁(彰義宮)은 지금 두 선왕의 묘(廟)가 있으니 여기도 똑같이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육상묘(毓祥廟)로 가서 창의궁까지 두루 둘러 보았다.

 

산실청(産室廳)에서 일을 한 자들에게 상을 주었다. 【도제조 김상로(金尙魯)는 그 자리에서 안구마를 주고, 제조 원경하(元景夏)·부제조 김광세(金光世)·권초관(捲草官) 홍계희(洪啓禧)·호조 참판 홍봉한(洪鳳漢)은 가자(加資)하였으며 사관은 6품으로 올려 주었다. 그 나머지는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64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남태제(南泰齊)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10월 3일 경인

윤동준(尹東浚)을 대사간으로, 이수관(李壽觀)을 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집의로, 최익수(崔益秀)를 장령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정언으로, 조명채(曹命采)를 이조 참의로, 이정보(李鼎輔)를 동지경연으로 삼고, 민우수(閔遇洙)를 대사헌으로 제수하였는데, 특별히 발탁한 것이었다.

 

10월 4일 신묘

밤에 번개가 치고 천둥하였다.

 

밖에 나가 있는 대신(臺臣)은 삭직하라고 하령(下令)하였다.

 

10월 5일 임진

윤광의(尹光毅)·송창명(宋昌明)을 승지로 삼았다.

 

정원에서 천둥한 이변에 대해 진달하여 면계(勉戒)하였는데, 왕세자가 아뢴 바를 깊이 유의하겠다고 답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편집 당상과 낭관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3년상에는 금옥 관자(金玉貫子)를 떼어내는가?"
하니, 편집 낭관 이사관(李思觀)이 말하기를.
"경자년292)  에는 금옥 관자를 떼냈으나 갑진년293)  에는 금옥 관자를 떼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의소(懿昭)와 효순(孝純)의 두 혼궁(魂宮)에 모두 천담복(淺淡服)을 입었으니 금옥 관자를 떼내서는 아니될 것이다. 대내에서는 백총(白驄)망건에다 상아 은혈권자(象牙隱穴圈子)와 폐양자(蔽陽子)를 착용하였는데, 옛날의 예(禮)에도 그러한 제도가 있었는가?"
하니, 이사관이 말하기를,
"예에 건(巾)만 있고 고깔[弁]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제도가 없습니다."
하였다.

 

화유 옹주(和柔翁主)의 가례(嘉禮) 때에 입고 사용할 모든 도구들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승지에게 주면서 우의정 김상로에게 전유(傳諭)하라고 명하였다.

 

10월 6일 계사

하교하기를,
"광주 유수가 아뢴 바를 들어보고 그 그림을 보았는데, 나의 의견에는 돈대(墩臺)가 성보다 낫다고 여겨진다. 내년에 봄이 되면 훈련 대장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본 다음 여쭈어서 정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날씨가 이처럼 추우니, 북관(北關)의 백성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 몸이 추운 것만 같은데, 더구나 근근이 살아가는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지의(紙衣)를 넉넉히 내려보내 나의 이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임금은 권장하는 것이나 징계하는 것을 믿음직스럽게 해야 한다. 그런데 북도(北道)의 진휼을 모두 끝낸 뒤에 수령들이 부지런히 하였는가, 게을리 하였는가에 대해 감사가 장계로 보고하였기에 비국으로 하여금 상을 주게 하였더니, 그 가운데 권분(勸分)294)  한 사람에게 지난번 공명첩(空名帖)만 주었다. 이 어찌 권분하는 의의이겠는가?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郡)에 있을 때도 이러한 일을 시행하자고 청한 적이 있었다. 백성을 위해 권분하는 것인데, 상을 아낄 것이 뭐가 있는가? 똑같이 시행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한 도에 교화를 펴는 것은 방백(方伯)에게 달려 있고 백성들의 편안함과 근심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조 참의의 망(望)에 인재를 뽑고자 하여 황해 감사 조명채(曹命采)를 낙점하여 결정하였다. 그러나 지금 균역(均役)의 일이 그에게 맡겨져 있으니, 잠시 동안 그냥 위임시키도록 하라. 곡산 부사 박상덕(朴相德)은 나이 젊은 사람으로서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 가상하다. 나은 관직으로 승진시켜 쓰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7일 갑오

우의정 김상로가 출사하자 임금이 인견(引見)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이 부름을 받아 염치를 무릅쓰고 나왔으니 충심을 죄다 아뢰겠습니다. 지금 나라의 형세와 세도(世道)가 오싹할 정도로 기울어져 망하려는 조짐이 있어 거의 날마다 달라지고 시각마다 달라지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번득 깨달으시고 척연(惕然)히 일깨워 빨리 강령을 바로잡고 분발하여 진작시킨다면 그래도 아직은 구제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과 정승이 서로 대하였으니 남김없이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평안 감사 홍상한(洪象漢)이 올린 장계에 ‘강계(江界)·이산(理山)·위원(渭原) 세 고을이 재해를 입었다.’ 하면서 호남에서 시행하였던 정묘년295)  의 사례를 인용하여 순회하며 군사를 조련하는 일을 중지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이처럼 재해를 입었고 또 전례가 있으니, 이 세 고을은 가을의 군사 조련을 중지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함경도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10월 9일 병신

황경원(黃景源)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10일 정유

임금이 친히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조재호(曹載浩),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올렸다. 박상덕(朴相德)을 대사간으로, 민택수(閔宅洙)를 사간으로, 이수덕(李壽德)을 장령으로, 박치문(朴致文)을 집의로, 이환(李渙)을 필선으로, 임사하(任師夏)를 보덕으로, 이창의(李昌誼)를 호조 참판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예조 참판으로, 이사관(李思觀)을 사서로, 유현장(柳顯章)을 헌납으로, 정언충(鄭彦忠)·박기채(朴起采)를 지평으로, 이우(李堣)를 정언으로, 조중회(趙重晦)를 교리로, 홍봉한(洪鳳漢)을 좌부빈객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예문 제학으로, 서명구(徐命九)를 전라도 관찰사로, 이일제(李日躋)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손수 쓴 글을 내려 좌의정 이종성(李宗城)에게 유시하였다.

 

10월 12일 기해

이조에서 아뢰기를,
"어제 도정할 때에 의금부 도사, 제용감 주부, 강릉 참봉 세 자리가 빈 것으로 잘못 알고 흐리멍덩하게 거듭 의망하여 낙점까지 받았습니다. 의망 단자를 효주(爻周)296)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조 판서 조재호는 성품이 매우 거칠고 방자하였다. 그런데 현빈(賢嬪)의 오라버니였기 때문에 급제한 지 10년이 못되어 벼슬이 뛰어올라 전관(銓官)이 되었는데, 도정을 담당하여 그릇된 일이 많았다. 도정에 6품으로 올려 줄 것이 두 자리이고 처음으로 출사시킬 것이 한 자리였는데, 빈 자리로 잘못 알고 거듭 의망하여 낙점을 받았으니, 다른 일도 이를 미루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다."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64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296] 효주(爻周) : 사실 조사에서 이상이 없음을 나타내는 가위표의 표시를 이르는 말.
사신은 말한다. "이조 판서 조재호는 성품이 매우 거칠고 방자하였다. 그런데 현빈(賢嬪)의 오라버니였기 때문에 급제한 지 10년이 못되어 벼슬이 뛰어올라 전관(銓官)이 되었는데, 도정을 담당하여 그릇된 일이 많았다. 도정에 6품으로 올려 줄 것이 두 자리이고 처음으로 출사시킬 것이 한 자리였는데, 빈 자리로 잘못 알고 거듭 의망하여 낙점을 받았으니, 다른 일도 이를 미루어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다."

 

10월 14일 신축

왕세자가 홍진을 앓자, 약원(藥院)에 명하여 숙직하도록 하였다.

 

이때 홍진이 두루 번져 서울이나 지방에 앓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사망자가 매우 많았다.

 

불에 타 죽은 개성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10월 16일 계묘

임금이 손수 쓴 글로 좌의정 이종성에게 돈유(敦諭)하자, 이종성이 비로소 사은 숙배하였다. 임금이 시임 대신·원임 대신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병조 판서 김상성이 호조 판서로 있을 때에 호조에서 납부하는 강계(江界)의 삼(蔘) 10근을 예전과 같이 더 늘려 정하는 일에 대해 여쭈어서 정하였습니다. 대체로 호조에서 납부하는 원래 삼의 수량은 30근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조정에서 삼을 캐는 일이 점차로 어려워지고 있다는 상황과 강계 백성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폐단을 염려하여 참작해 10근으로 감해 준 지도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삼이 더욱 귀해서 민폐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데, 10근을 더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변방 백성들을 돌보아 주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10근을 더 늘려 정하는 건에 대해서는 도로 거두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황해 감사 조명채와 경상 감사 윤동도(尹東度)가 함께 재결(災結)을 더해 줄 것을 장청(狀請)하였습니다. 두 도의 농사가 모두 늦게 재해를 입었는데, 올해 연분 사목(年分事目)은 늦 재해를 입기 전에 반포하였기 때문에 비총(比摠)297)  이 너무 높아서 재해를 봐주기에는 사세상 부족합니다. 때문에 호조에서 획급한 재결 이외에 해서는 1천 4백 결을, 영남은 2천 5백 결을 더 지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추이(推移)해서 나누어 봐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동지 부사(冬至副使) 이창의(李昌誼)를 체차하고, 서장관 정기안(鄭基安)을 서용하여 도로 차출하라."
하였다. 이종성이 나아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죄를 짓고 움추리고 있는 신을 발탁하여 보필하는 재상의 자리에 두셨습니다. 성상께서 너무나 간곡하게 타이르신 바람에 염치를 무릅쓰고 나와 사은 숙배하였습니다만, 사람들의 말이 망극하여 군부(君父)께 죄를 지었으니 신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간 일은 말하지 말라. 이처럼 보잘것없는 무리들을 개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난번 온천에 거둥했을 때 보니 수염과 머리털이 상당히 거무스름했는데, 지금은 너무 쇠하였구려. 고 영상 홍치중(洪致中)이 처음 출사하였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었는데 그뒤로 끝가지 행공(行公)하였었다."
하였다. 판부사 유척기(柳拓基)에게 이르기를,
"옛말에 ‘말을 하여도 채용하지 않고 도가 합치하지 않으면 떠난다.’고 하였는데, 기미년298)  의 처분에 대해서는 내 실로 부끄럽다. 그 뒤로 출사하라고 억지로 다그치지 않은 것은 경이 이밀(李密)299)  처럼 사정을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대학(大學)》 혈구장(絜矩章)에 말하지 않았던가? 경이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었으니 지금 그를 미루어서 임금을 섬겨야 할 것이다. 옛날 조정에 있던 사람은 얼마 안되니 경는 나를 위해 머물러 있으라."
하니, 유척기가 말하기를,
"신이 시골에 머문 지 이미 오래되어서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한데다가 또 여러 번 상(喪)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근력이 미치지 못하므로 조회 때 알현(謁見)하는 예마저 자력으로 할 길이 없습니다. 만약 치사(致仕)를 허락해 주신다면 비록 한적한 곳에 물러가 있더라도 조정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해 감히 의견을 내세워 잘잘못을 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구하게 하찮은 보답이나마 이 세상에서 보답할 길은 이 일에 있습니다."
하고, 이어서 물러갔다.
사신은 말한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나아갔을 때에는 충성을 다하기를 생각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가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평상시를 두고 하는 말일 뿐이다. 만약 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였을 경우에는 대신된 자는 나아가 있거나 물러가 있거나 간에 나라의 걱정을 잊을 수는 없다. 지금 임금이 자주 지나친 일을 하고 있으나, 대소 신료들은 아부만 하고 있다. 새로 제정한 법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으며, 언관(言官)이 견책을 당하고 기강이 해이하며 조정의 기상(氣象)은 분열되어 두렵게도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성상이 지난 일들을 깊이 뉘우쳐 따뜻하게 타이르며 만류하였으니, 의당 선심(善心)이 발로되었을 때에 잘잘못을 지적하여 말함으로써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묵묵히 말 한 마디도 없이 물러가고 말았다. 유척기처럼 노성(老成)하고 오랜 명망을 지닌 자는 지금 시대에 한 사람 뿐인데 그가 나라의 위태로움을 마치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보아 넘기었으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가 스스로 편리한 점만 취했다고 말한다면 모르거니와 옛날에 일컬어진 대신으로 볼 때는 부끄러움이 있다고 하겠으니, 애석한 일이다."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李光佐)는 신축년300)  ·임인년301)   때 흉측한 역적의 괴수였다. 그런데 큰 의논이 다시 제기되었을 적에 이종성이 그의 제자라고 자칭하면서 방자하게 그들을 변명하여 비호하였다. 양사에서 잇따라 먼 곳으로 귀양보내자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누차 엄하게 하교하였고 갑자기 정승을 제수하면서 손수 글을 써서 계속 내렸으니 세상에 드문 은혜로운 예우였다. 그리고 흉당(凶黨)이 그를 의지하고 소중히 여겨 꼭 그가 나오게 하려고 하였으나 이종성이 대각의 의논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감히 뛰어들었다. 다른 일은 논할 것도 없고 이미 대관(大官)이라고 하는 자가 이렇게까지 염치를 잃어 버렸으니, 그를 나무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64면
【분류】인사(人事) / 외교(外交) / 재정(財政) / 농업(農業) / 역사(歷史)


[註 297] 비총(比摠) : 연분을 정하는 방법의 하나로, 매년 가을에 호조에서 그해의 기후와 작황(作況)을 참고하여 상당년과 비교해 상량하여 총수를 결정하고, 급재(給災) 절차를 거쳐 세액을 결정함.[註 298] 기미년 : 1739 영조 15년.[註 299] 이밀(李密) : 진(晉)나라 무양(武陽) 사람으로, 자는 영백(令伯)이고 이름은 건(虔)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개가하였으므로 할머니 유씨(劉氏)한테서 자랐다. 젊었을 때에 촉나라에서 낭관 벼슬을 하였다. 무제(武帝)가 그를 태자 세마(太子洗馬)로 부르자, 할머니를 모시고 있다며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음.[註 300]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301] 임인년 : 1722 경종 2년.
사신은 말한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나아갔을 때에는 충성을 다하기를 생각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가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평상시를 두고 하는 말일 뿐이다. 만약 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였을 경우에는 대신된 자는 나아가 있거나 물러가 있거나 간에 나라의 걱정을 잊을 수는 없다. 지금 임금이 자주 지나친 일을 하고 있으나, 대소 신료들은 아부만 하고 있다. 새로 제정한 법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으며, 언관(言官)이 견책을 당하고 기강이 해이하며 조정의 기상(氣象)은 분열되어 두렵게도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성상이 지난 일들을 깊이 뉘우쳐 따뜻하게 타이르며 만류하였으니, 의당 선심(善心)이 발로되었을 때에 잘잘못을 지적하여 말함으로써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묵묵히 말 한 마디도 없이 물러가고 말았다. 유척기처럼 노성(老成)하고 오랜 명망을 지닌 자는 지금 시대에 한 사람 뿐인데 그가 나라의 위태로움을 마치 나와는 무관한 일처럼 보아 넘기었으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가 스스로 편리한 점만 취했다고 말한다면 모르거니와 옛날에 일컬어진 대신으로 볼 때는 부끄러움이 있다고 하겠으니, 애석한 일이다."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李光佐)는 신축년300)  ·임인년301)   때 흉측한 역적의 괴수였다. 그런데 큰 의논이 다시 제기되었을 적에 이종성이 그의 제자라고 자칭하면서 방자하게 그들을 변명하여 비호하였다. 양사에서 잇따라 먼 곳으로 귀양보내자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누차 엄하게 하교하였고 갑자기 정승을 제수하면서 손수 글을 써서 계속 내렸으니 세상에 드문 은혜로운 예우였다. 그리고 흉당(凶黨)이 그를 의지하고 소중히 여겨 꼭 그가 나오게 하려고 하였으나 이종성이 대각의 의논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감히 뛰어들었다. 다른 일은 논할 것도 없고 이미 대관(大官)이라고 하는 자가 이렇게까지 염치를 잃어 버렸으니, 그를 나무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64면
【분류】인사(人事) / 외교(外交) / 재정(財政) / 농업(農業) / 역사(歷史)


[註 297] 비총(比摠) : 연분을 정하는 방법의 하나로, 매년 가을에 호조에서 그해의 기후와 작황(作況)을 참고하여 상당년과 비교해 상량하여 총수를 결정하고, 급재(給災) 절차를 거쳐 세액을 결정함.[註 298] 기미년 : 1739 영조 15년.[註 299] 이밀(李密) : 진(晉)나라 무양(武陽) 사람으로, 자는 영백(令伯)이고 이름은 건(虔)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개가하였으므로 할머니 유씨(劉氏)한테서 자랐다. 젊었을 때에 촉나라에서 낭관 벼슬을 하였다. 무제(武帝)가 그를 태자 세마(太子洗馬)로 부르자, 할머니를 모시고 있다며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음.[註 300]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301] 임인년 : 1722 경종 2년.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李光佐)는 신축년300)  ·임인년301)   때 흉측한 역적의 괴수였다. 그런데 큰 의논이 다시 제기되었을 적에 이종성이 그의 제자라고 자칭하면서 방자하게 그들을 변명하여 비호하였다. 양사에서 잇따라 먼 곳으로 귀양보내자고 아뢰었으나, 임금이 누차 엄하게 하교하였고 갑자기 정승을 제수하면서 손수 글을 써서 계속 내렸으니 세상에 드문 은혜로운 예우였다. 그리고 흉당(凶黨)이 그를 의지하고 소중히 여겨 꼭 그가 나오게 하려고 하였으나 이종성이 대각의 의논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감히 뛰어들었다. 다른 일은 논할 것도 없고 이미 대관(大官)이라고 하는 자가 이렇게까지 염치를 잃어 버렸으니, 그를 나무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10월 17일 갑진

조중회(趙重晦)를 겸 필선으로, 이규채(李奎采)를 겸 사서로, 이종백(李宗白)을 의금부 동지사로, 홍낙성(洪樂性)을 승지로, 홍계희(洪啓禧)를 우빈객으로, 조재호(趙載浩)를 좌부빈객으로, 홍봉한(洪鳳漢)을 우부빈객으로, 정기안(鄭基安)을 겸집의로, 남태제(南泰齊)를 동지 부사로,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이천보(李天輔)를 좌의정으로 삼았다.
사신은 말한다. "비루한 사람과 같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징계하고 성토하는 큰 의논은 결코 대신 한 사람이 지휘하여 갑자기 중지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보면 비록 윗사람에게 아첨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너무나도 스스로를 헤아려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뢴 말이 터무니 없어서 임금이 매우 노하여 누차 힐책하였으나 끝끝내 바른 대로 실토하지 않음으로써 천고에도 없는 잘못을 임금이 저지르게 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고한 두 신하로 하여금 억울하게 형벌을 받게 하였으니, 임금을 섬길 때 숨김없어야 한다는 의리 역시 없어지고 말았다. 만약 나로 인하여 연루됨을 염려하였다면 스스로 그 죄를 책임졌어야 옳을 것이다. 임금 앞에 아주 가까이 있을 때도 오히려 속였는데 더구나 이보다 더 큰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잠시 동안 파직하고 나서 뒤이어 곧바로 제수한 것은 또한 그에게 무엇이 취할 게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아! 보필하는 정승이 적임자가 아니어서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65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사신은 말한다. "비루한 사람과 같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징계하고 성토하는 큰 의논은 결코 대신 한 사람이 지휘하여 갑자기 중지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보면 비록 윗사람에게 아첨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너무나도 스스로를 헤아려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뢴 말이 터무니 없어서 임금이 매우 노하여 누차 힐책하였으나 끝끝내 바른 대로 실토하지 않음으로써 천고에도 없는 잘못을 임금이 저지르게 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고한 두 신하로 하여금 억울하게 형벌을 받게 하였으니, 임금을 섬길 때 숨김없어야 한다는 의리 역시 없어지고 말았다. 만약 나로 인하여 연루됨을 염려하였다면 스스로 그 죄를 책임졌어야 옳을 것이다. 임금 앞에 아주 가까이 있을 때도 오히려 속였는데 더구나 이보다 더 큰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잠시 동안 파직하고 나서 뒤이어 곧바로 제수한 것은 또한 그에게 무엇이 취할 게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아! 보필하는 정승이 적임자가 아니어서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을 길이 없으니, 애석하다."

 

왕세자가 양정각(養正閣)에 있었는데,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의관 김이형(金履亨)이 말하기를,
"옥안(玉顔)의 기색을 우러러 보니 반점이 불그스레 윤기가 나 속에서 비추던 것이 죄다 밖으로 드러났으니, 증세가 매우 순조롭습니다."
하였다. 제조 원경하가 말하기를,
"홍색이 이미 두루 퍼졌으니, 이제 반점이 수그러들 기미가 있습니다."
하고, 복용할 탕제 한 첩을 지어 올렸다.

 

10월 19일 병오

달무리가 목성을 감쌌다.

 

10월 20일 정미

달무리가 목성을 감쌌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갔는데,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김이형에게 묻기를,
"너를 부른 것은 동궁의 병 증세가 염려 없는가를 알고 싶어서였다. 이 뒤로는 다른 염려가 없겠는가?"
하니, 김이형이 말하기를,
"조금도 염려할 것은 없고 단지 조섭(調攝)을 잘하면 됩니다."
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얼굴에는 이미 반점이 사라졌고 팔에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였다.

 

10월 22일 기유

임금이 입진을 허락하지 않자, 약방에서 여섯 차례나 계사를 올려 청대(請對)하였는데, 세 제조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한광조(韓光肇)·이중조(李重祚)·임상원(林象元) 세 사람은 충청도 연해에, 남태회(南泰會)는 호남 연해에, 이수덕(李壽德) 등 네 사람은 경상도에 유배하였는데, 부름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19일 밤 꿈에 크게 깨달았다. 한쪽 조선의 땅에 임금이 있는가, 신하가 있는가? 나는 ‘당(黨)만 있고 나라는 없으며 신하만 있고 임금은 없다.’고 말하겠다. 민백상(閔百祥)이 이른바 네 글자는 오늘날의 청을 따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일이 수습되기 전에는 그 무함이 여전할 것이므로 나의 뜻을 대신에게 대략 말하였고 또 능을 참배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하소연하였던 것인데, 지난번 소요가 일어난 단서는 대체로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지금 유신들의 이목을 보건대, 하나는 그들의 당만 생각한 채 임금이 무함당한 것을 씻어 주는 일에 대해서는 돌아보지도 않으며, 하나는 임금이 무함당한 것이 씻어졌는지 안 씻어졌는지 마치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처럼 보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이 일로 인해 모욕을 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는데, 더구나 숙직할 때에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모두 양도(兩道)에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윗사람을 속이는 것을 무함이라고 하고 윗사람을 무함하는 것을 역(逆)이라고 하는데, 엄하게 다스리면 무함이 저절로 가려지는 것이다. 아! 신축년·임인년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경묘(景廟)에게 불행히도 병이 있었다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다같이 듣고 있었던 바이니, 병이 있어서 후사를 이을 희망이 없을 경우에 어떻게 세자를 세워 대리(代理)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임금이 선왕의 아우로 형이 물려 준 대통을 받는 것은 매우 정대하고 광명한 바이다. 그런데 유독 저 효경(梟獍)의 무리들이 하늘의 태양을 속일 수 있으며 성상을 무함할 수 있다고 여기고 무함의 옥사를 단련(鍛鍊)하여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언급하였으니, 이는 사실 경묘를 무함한 것이다. 경묘가 즉위한 뒤에 처분하였던 일이 경묘의 본뜻에서 하였다고 한다면 어찌 무함이 아니겠는가? 성상이 받은 무함을 씻어 주고자 한다면 먼저 경묘가 받은 무함을 분변해야만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리적이어서 흉역들이 저지른 일의 본말이 하늘과 땅 사이에 도망할 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반역을 토벌한다면 임금이 받은 무함이 씻어지지 않고 정대한 토벌이 시행되지 않을까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다만 을사년302)  에 막 왕통이 바뀔 때 나라의 일을 맡은 자들의 식견이 밝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해가 서로 뒤섞였던 것이다. 이로써 가장 으뜸가는 의리로 삼으면서 반역을 토벌하여 무함을 씻어야 한다는 논의가 도리어 죽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의논의 뒤로 밀리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이는 보복하는 인상에 가까운 것으로서 임금에게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정미년303)   일이 있었던 것이다. 무신년304)  의 흉역들의 흉칙하고 사리에 어긋난 말이 신축년·임인년의 흉역들의 말과 한 맥락으로 관통되어 왔었다. 만약 이때에 그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 정대한 토벌을 시행하였더라면 마치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것처럼 되어 만세토록 사실이 훤히 드러나 영구히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전에 기회를 놓쳤고 또 뒤에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탕평(蕩平)해야 한다는 설이 나오고 《대훈(大訓)》을 짓게 된 것이다. 이 뒤로부터 토벌하여 무함을 씻는 의리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쉬쉬하였고 두 성상이 받은 무함을 둘로 쪼개어 놓았으므로 한갓 흉당들의 협지(脅持)만 되었을 뿐 무함을 씻을 날이 없게 되고 말았으니,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는가? 당저(當宁)가 계실 때에 그들이 반역을 하였으면 이는 경묘에게 반역을 꾀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신축년·임인년의 역적들을 토벌한다는 자들이 앞뒤 20여 년 동안 끌어오면서 과연 이러한 의리로서 성상의 앞에 한 번이라도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가? 경묘에게 병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 경묘가 받은 무함이 씻어지고 따라서 지금의 주상이 받은 무함도 씻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씻어질 터인데 애석하게도 이러한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어찌 뭇 신하들의 죄가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65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歷史)


[註 302]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註 303] 정미년 : 1727 영조 3년.[註 304]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사신은 말한다. "윗사람을 속이는 것을 무함이라고 하고 윗사람을 무함하는 것을 역(逆)이라고 하는데, 엄하게 다스리면 무함이 저절로 가려지는 것이다. 아! 신축년·임인년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경묘(景廟)에게 불행히도 병이 있었다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다같이 듣고 있었던 바이니, 병이 있어서 후사를 이을 희망이 없을 경우에 어떻게 세자를 세워 대리(代理)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임금이 선왕의 아우로 형이 물려 준 대통을 받는 것은 매우 정대하고 광명한 바이다. 그런데 유독 저 효경(梟獍)의 무리들이 하늘의 태양을 속일 수 있으며 성상을 무함할 수 있다고 여기고 무함의 옥사를 단련(鍛鍊)하여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언급하였으니, 이는 사실 경묘를 무함한 것이다. 경묘가 즉위한 뒤에 처분하였던 일이 경묘의 본뜻에서 하였다고 한다면 어찌 무함이 아니겠는가? 성상이 받은 무함을 씻어 주고자 한다면 먼저 경묘가 받은 무함을 분변해야만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리적이어서 흉역들이 저지른 일의 본말이 하늘과 땅 사이에 도망할 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반역을 토벌한다면 임금이 받은 무함이 씻어지지 않고 정대한 토벌이 시행되지 않을까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 다만 을사년302)  에 막 왕통이 바뀔 때 나라의 일을 맡은 자들의 식견이 밝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해가 서로 뒤섞였던 것이다. 이로써 가장 으뜸가는 의리로 삼으면서 반역을 토벌하여 무함을 씻어야 한다는 논의가 도리어 죽은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의논의 뒤로 밀리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하였다. 이는 보복하는 인상에 가까운 것으로서 임금에게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정미년303)   일이 있었던 것이다. 무신년304)  의 흉역들의 흉칙하고 사리에 어긋난 말이 신축년·임인년의 흉역들의 말과 한 맥락으로 관통되어 왔었다. 만약 이때에 그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 정대한 토벌을 시행하였더라면 마치 태양이 중천에 떠 있는 것처럼 되어 만세토록 사실이 훤히 드러나 영구히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전에 기회를 놓쳤고 또 뒤에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탕평(蕩平)해야 한다는 설이 나오고 《대훈(大訓)》을 짓게 된 것이다. 이 뒤로부터 토벌하여 무함을 씻는 의리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쉬쉬하였고 두 성상이 받은 무함을 둘로 쪼개어 놓았으므로 한갓 흉당들의 협지(脅持)만 되었을 뿐 무함을 씻을 날이 없게 되고 말았으니,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는가? 당저(當宁)가 계실 때에 그들이 반역을 하였으면 이는 경묘에게 반역을 꾀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신축년·임인년의 역적들을 토벌한다는 자들이 앞뒤 20여 년 동안 끌어오면서 과연 이러한 의리로서 성상의 앞에 한 번이라도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가? 경묘에게 병이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 경묘가 받은 무함이 씻어지고 따라서 지금의 주상이 받은 무함도 씻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씻어질 터인데 애석하게도 이러한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어찌 뭇 신하들의 죄가 아니겠는가?"

 

영의정 이종성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23일 경술

왕세자빈(王世子嬪)이 홍진을 앓았다.

 

대신·약원·옥당이 구대(求對)하니,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대신의 이목에는 당만 있고 임금은 없다.’는 말로 하유하였다. 그러자 여러 대신들이 금오(金吾)에서 서명(胥命)하였는데,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약원에서 세 차례나 아뢰자, 비로소 입시하라고 허락하였다.

 

10월 24일 신해

김치인(金致仁)·윤상임(尹尙任)을 승지로,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한종제(韓宗濟)·권항(權抗)을 정령으로, 박창윤(朴昌潤)을 헌납으로, 윤동성(尹東星)·이홍덕(李弘德)을 지평으로, 홍준해(洪準海)를 정언으로, 정순검(鄭純儉)을 교리로, 조관빈(趙觀彬)을 지춘추로, 조재호(趙載浩)를 지경연으로 삼았다.

 

북도에서 지난해와 올해 진휼할 때에 권분한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10월 26일 계축

왕세자가 앓던 홍진이 나았다. 종묘에 고한 다음에 하례를 드리고 경과(慶科)를 보이되, 정시(庭試)로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초시(初試)에 5백 명을 뽑아 상을 주었다. 【도제조 김약로에게는 안구마와 표범 가죽 두 벌을 하사하고, 제조 원경하와 부제조 이후(李)에게는 가자하고, 한주(翰注)는 6품에 올렸으며, 그 나머지는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65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정순검(鄭純儉)을 북청부(北靑府)로 귀양보내고, 여러 대신(臺臣)들에게는 모두 고신을 빼앗는 율을 시행하였으니, 이는 부름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헌부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27일 갑인

원손이 홍진을 앓았다.

 

임금이 극수재(克綏齋)로 나아갔는데,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제조 원경하가 말하기를,
"원손도 홍진의 증세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놀라며 말하기를,
"그러한가?"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증세가 매우 순조로우니 염려하실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도제조 김약로가 말하기를,
"빈궁(嬪宮)의 홍진 증세는 붉은 반점이 거의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손의 증세와 비교해 볼 때 어떠하던가?"
하자, 김약로가 말하기를,
"원손은 처음 홍진을 앓은지 이제 4일이 되었는데, 얼굴에 붉은 기가 점차로 풀리고 있으니 대체로 순조로운 편입니다."
하였다.

 

조태언(趙泰彦)을 승지로, 정기안(鄭基安)을 집의로, 이사관(李思觀)·이제현(李齊顯)을 지평으로, 이양천(李亮天)을 교리로, 이명환(李明煥)을 문학으로 삼았다.

 

10월 29일 병진

정언 홍준해(洪準海)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종성은 강퍅하고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역얼과 폐족들이 그에게 의지하고 있으므로 음험하고 사특한 모의가 모두 그의 지휘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당심을 함부로 뻗쳐 스스로 수세(手勢)를 범하였는데, 지난해에 올린 상소는 예기(銳氣)를 길렀다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를 탄핵한 흰 종이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금구 매복(金甌枚卜)305)  이 이 사람에게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정말 이른바, ‘천하에는 없는 일이 없다.’고 한 말과 같습니다. 그가 당돌하게 뛰어들어 갑자기 영의정으로 올라갔으니, 그전에는 영남의 해안으로 귀양보내려고 하였는데 뒤에는 임의로 태현(台鉉)306)  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한 마디도 말한 사람이 없으니, 대각을 두어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는데, 하령하기를,
"대조(大朝)께서 하교하신 것은 생각지 않고 협잡하는 마음을 부리려고 하였으니, 매우 무엄하다. 그의 상소를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극수재에 나아갔는데,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은 무엇 때문에 나갔는가?"
하니, 승지 홍낙성(洪樂性)이 대답하기를,
"정언 홍준해의 상서(上書) 때문에 도성을 나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니, 홍낙성이 말하기를,
"먼저 언로가 막혔다고 말하였고, 다음은 영상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끝에 가서는 전후로 이에 대해 말하지 않은 대신(臺臣)들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글을 받아들여 올렸는가?"
하니, 홍낙성이 대답하기를,
"영지(令旨)를 내려 도로 내주었습니다."
하였다.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이번에 어떻게 하교를 내렸던가? 참으로 조금이라도 신하의 의리가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그 글의 깊고 얕음은 비록 모르겠으나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원량이 어찌 이처럼 너무나 관대하게 처분하였단 말인가? 이와 같은 따위를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경우에는 나라가 나라 꼴이 안되고 임금이 임금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홍준해를 대정현(大靜縣)으로 귀양보내되, 즉시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홍낙성에게 말하기를,
"이 전교를 가지고 가서 원량에게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 가운데 누가 행공(行公)하고 있는가?"
하니, 승지 윤상임(尹尙任)이 말하기를,
"이양천(李亮天)이 이제 막 상소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역시 수상한 내용이던가?"
하자, 윤상임이 말하기를,
"감히 관례에 따라 봉입(捧入)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왜 그의 상소를 보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손수 쓴 글로 영의정 이종성에게 돈유하고 즉시 〈사자와〉 함께 오라고 명했다.

 

지평 이사관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귀양간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무려 16명이나 됩니다.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문안하는 반열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물론 죄를 받아야 합니다만, 귀양까지 보낸다는 것은 옛날 법전에 비추어 맞지 않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대조께 우러러 여쭈어서 그 명을 회수하게 하시어 성덕(聖德)을 빛나게 하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예사로 하답하였다.

 

교리 이양천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성상의 심기가 평안함을 잃어 거듭 노하시어 사방으로 찬배하자 관료들이 기운을 상실하였습니다. 아! 저 끊기지 않은 한 가닥의 의논은 대체로 백세(百世)를 기다려 보아도 옳다고 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므로 그 계사를 정지하느냐 정지하지 않느냐에 관계가 없으니, 신이 이를 애석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지 애석하게 여김은 오늘날 성상께서 조치하신 일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서로 잇따라 귀양간 삼사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태반이 사특한 의논의 편에 들어 공론과 혈전(血戰)을 치르고 있는 자들인데도 사기(事機)에 임하여 도리어 주저하면서 자신이 감당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보통 인정은 너나없이 화를 두려워하고 이익을 노리지만, 또한 너나없이 공론을 돌아보며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만약 일종의 불충한 무리가 자신이 직접 나서서 담당하거나 팔짱을 끼고 좌시하면서 밖으로는 임금을 위하여 근심을 덜어드린다는 이름에 의탁하고 안으로는 나라와 비방을 나누려는 꾀를 품어, 나아가서는 ‘네, 네’ 하고 물러가서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엄명이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이다.’고 말한다면 그의 죄는 비록 만 번 죽어도 용서받을 수가 없으며 성상의 덕에도 크나큰 누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그의 임금이 파당을 지은 사람들을 매우 미워하여 약도 복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때에 감히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그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길 가는 사람들도 알 것이다. 그는 홍준해와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이다. 같은 섬으로 귀양을 보내어 그와 같이 국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야 할 것이다. 모두 정의현(旌義縣)으로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동궁에 승지가 입대하였을 때에 왕세자가 말하기를,
"내가 대리한 지가 4년이 되었으나 성상의 마음을 우러러 본받지 못하여 약을 물리치시기에 이르렀으니 모두 나의 잘못이다. 나 역시 무슨 마음으로 약을 복용하겠는가?
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제조 원경하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동궁이 스스로 인죄(引罪)하면서 성상께서 탕제를 드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시 환약을 복용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게 무슨 모양이란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홍준해와 이양천의 편을 들면서 임금은 돌아보지 않으며 징계와 토벌을 청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당을 비호하고 역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가? 아! 원량은 바로 저군(儲君)으로서 지금 대리하고 있으니 사체가 중대하다. 그런데 조용히 조섭(調攝)해야 한다는 것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이처럼 날뛰고 있으니, 그의 눈에 저군은 보이지 않고 다만 그의 당인들만 보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비록 혼미하여 누워 있으나 태아(太阿)307)  가 손에 있다. 홍준해는 추자도로, 이양천은 흑산도로 귀양보내되, 모두 엄하게 위리 안치하라."
하였다.

 

오수채(吳遂采)·민계(閔堦)를 승지로, 윤득우(尹得雨)를 사서로 삼았다.

 

10월 30일 정사

이조 참판 김한철(金漢喆)을 폄(貶)하여 충주 목사로 삼았는데, 이는 홍준해에게 청직(淸職)의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윤득재(尹得載)를 특별히 발탁하여 이조 참판으로 삼고, 윤광의(尹光毅)를 동의금으로, 조재호(趙載浩)를 판의금으로, 조숙(趙)을 교리로, 채제공(蔡濟恭)을 정언으로 삼았다.

 

지평 이사관이 인피(引避)하기를,
"삼사가 명을 어기고 오만을 부린 것은 정말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신이 논하였던 것은 그 사람들을 애석하게 여긴 것이 아니었는데, 정성이 모자라고 말솜씨가 모자라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내국에서 계사를 세 차례나 올려 청대(請對)하니, 비답하기를,
"왜 이렇게 하는가? 그만 중지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경재(卿宰)들을 인솔하고 구대(求對)하였는데, 차마 듣지 못할 하교가 잇따랐다. 그러자 김상로가 서명(胥命)하였는데,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때 이목(耳目)의 관원은 한심스럽다고 하겠다. 김상중(金尙重) 등 8명을 호남에 귀양보내라."
하였다.

 

약원에서 숙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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