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오
우의정 김상로가 합문(閤門)에 나가 구대하기를 세 차례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상로가 또 서명(胥命)하니, 명을 기다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동지사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과 형조 참판 남태제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서장관 정기안(鄭基安)은 대간이 본직인데, 귀양보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배표(拜表)308) 의 날짜가 5일밖에 안 남았는데, 사신의 일이 임박하여 낭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대조께 여쭈어서 빨리 변통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어찌 번거롭게 여쭐 수 있겠는가?"
하였다.
11월 2일 기미
대신과 경재들이 또 구대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작년 가을 이후로 시종의 신하 가운데 불러도 나오지 않은 사람은 모두 시종안(侍從案)의 이름에 쪽지를 붙여 놓도록 하라."
하였다.
특별히 남태온(南泰溫)·이규채(李奎采)를 승지로 제수하고, 권상일(權相一)을 동의금으로, 채제공(蔡濟恭)을 부교리로, 윤방(尹坊)·이상윤(李尙允)을 정언으로, 이지억(李之億)·이헌묵(李憲默)을 장령으로 삼았다. 곧바로 또 이지억을 특별히 발탁하여 승지로 삼고, 윤방을 장령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정원과 옥당이 서로 잇따라 합문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그만두라고 답하였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청대하니, 임금이 또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또 세 차례나 아뢰면서 청대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김상로가 여러 재신들을 인솔하고 또 세 차례나 아뢰고 청대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연명으로 상소하여 구대하였는데, 비답이 없었다.
약방 도제조 김약로 등이 죽을 죄를 지은 신하라고 일컬으면서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조께서 탕약을 도로 내주면서 당(黨)을 하는 사람들을 갈아 마시겠다고 하교하셨으므로 신 등이 정신을 잃고 넋이 빠져 서명한 지 4일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처분이 없으시니, 엄한 벌을 내려 주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애타는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인접(引接)하였다. 정언 이상윤(李尙允)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경재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 등이 탕약을 들 것을 청하니, 임금이 잇따라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하면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승지 이지억이 울면서 청하니, 비로소 탕약을 들었다. 김상로가 충청도 도신(道臣)이 올린 장계에 따라 비총(比摠) 이외에 재해를 입은 1천 결을 더 지급해 줌으로써 혜택을 골고루 나누어 주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해서의 산간 고을이 흉년을 가장 혹독하게 입었으니 곡산(谷山) 전 부사 박상덕(朴相德)을 그대로 위임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지억에게 명하여 유시를 써서 내려 안팎에 반포해 보이도록 하였다. 그 내용에 이르기를,
"아! 30년 동안 마음 속에 뻗쳐 있던 것을 대소 여러 신하들에게 환하게 유시하겠으니 모두 듣고 잘 알기 바란다. 아! 부덕한 내가 임어한 지 지금 거의 30년이나 되었는데, 날마다 고심한 것은 조제(調劑) 두 글자였다. 아! 내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여러 신하들 중에 살아 남은 자가 드물 것이다. 병신년309) 이전에야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갈수록 되풀이 되고 깊어져 신축년·임인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갑진년310) 에 대통을 계승한 뒤로 마음을 다하여 조제하지 않았더라면 피차간에 보복하느라 서로들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아! 나라의 삼척(三尺)311) 은 당인들간에 보복하는 것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일시에 보복하면 당인은 비록 통쾌하겠으나 아! 보복이란 예로부터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니, 법을 만든 자가 도리어 그 법에 걸리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는가?
고 상신 이광좌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다 잘 할 수 있겠는가? 중인(中人) 이하야 어찌 잘못한 일이 없겠는가?’ 하였다. 신축년·임인년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에게 옳지 못한 점이 많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갑진년에 이 사람이 없었더라며 오늘날이 없었을 것이니, 공과 잘못이 서로 엇비슷할 정도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해에 닫혀진 합문을 누가 열었는가? 이 사람이 열었으며 지난해 수라상을 물리쳤을 때에 누가 권하였는가? 이 사람이 권하였다. 그때 영상과 좌상은 모두 해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그를 굳세게 억누르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고 상신 조태억(趙泰億)은, ‘술편(述編)에 이미 이르기를, 「문자를 적발하는 것도 이미 경계하였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언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가운데 구절은 또한 무함을 씻지 못한 하나의 단서이다. 비록 윤봉오(尹鳳五)와 같이 심각한 자도 지난번 장전(帳殿)에서 오히려 뽑아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였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난해에 조태구(趙泰耉)가 올린 두 차자는 놀라서 몸둘 바를 몰랐는데, 그중 한 차자는 곧 유봉휘(柳鳳輝)가 남긴 뿌리였다. 그런데 자리를 사양할 때에 좌상이 설서로 하여금 조태구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때 사부로 입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감동하기는 커녕 강퍅한 마음으로 조그만 원한도 반드시 갚겠다는 뜻을 부리어 마침내 그 일을 심각하게 하려 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아름답지 못하였다. 그러나 윤허를 미루었던 것은 조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경자년312) 에 그를 약원의 제조로 제수한 성상의 뜻을 생각해서였다. 그해 그달에 진찰하는 자리에서 그가 울면서 약을 드시라고 권하였으니, 내가 직접 보았는데, 감동하여 그랬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태구가 선왕을 생각하고 폐하에게 보답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았으니, 내가 그를 아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최석항(崔錫恒)에 이르러서도 동시에 처분을 하였던 것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니, 정승에 제수된 뒤에 그가 한 행동은 내가 애초에 예상한 바가 아닌 때문이었다. 신축년·임인년의 일은 끝 부분에 가서 조태구와는 크게 차이가 있었는데 당인들이 조태구와 싸잡아서 얽어넣은 것은, 대체로 그 당시 정승이 된 자를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려는 뜻이었으니, 이는 보복의 의리이다. 지난해 그들이 진찰하는 자리에 같이 입시하였을 때 이미 그의 마음을 알았으며 춘당대(春塘臺)의 장전에서도 본 자가 있었다. 지금 이 사람이 조태구와 같이 복직된다면 한편에서는 반드시 승복하지 않을 것이고, 조태구 때문에 이 사람 역시 복직시키지 않는다면 한편에서도 반드시 승복하지 않을 것이니, 어느 쪽에 얽매일 것이 있겠는가? 다만 나의 현위(弦韋)로 알맞게 처리할 뿐이니, 고 상신 최석항을 특별히 복직시키라."
하였다.
구윤명(具允明)·이정작(李庭綽)을 승지로, 조재민(趙載敏)을 대사간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집의로, 정광진(鄭光震)을 사간으로, 김시묵(金時默)·김굉(金硡)을 지평으로, 조윤제(曹允濟)를 헌납으로, 송문재(宋文載)를 정언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제학으로, 심발(沈墢)을 동지 서장관으로, 남태제(南泰齊)를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그리고 최석항의 관작을 회복해 주었다.
11월 4일 신유
왕세자의 홍진 증세가 나았으므로 하례를 드리고 교서를 반포하였다. 사면(赦免)을 반포할 때에 세자빈과 원손의 홍진도 나았다. 약방 도제조 김약로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대사간 조재민, 지평 김굉이 청대하니, 임금이 잇따라 엄한 하교를 내리어 시종안(侍從案)의 그들의 이름에다 쪽지를 붙었다. 왕세자가 조재민은 해남에, 김굉은 거제로 귀양보내도록 하였다.
동지 서장관 심발이 쪽지를 붙인 대상에 들어있어서 개차하여 김문행(金文行)으로 대신하였다. 그리고 이명곤(李命坤)을 병조 참판으로, 김문행을 겸집의로 삼았다.
11월 5일 임술
이조 참판 윤득재를 출보하여 청주 목사로 삼으니, 이는 조재민과 김굉을 대간으로 의망하였기 때문이었다.
권상일(權相一)을 부제학으로 제수하였다.
영변 부사(寧邊府使) 김양택(金陽澤)이 상서하여 고을의 폐단에 대해 말하였는데, 첫째는 화전(火田)에 세금을 부과하는 폐단이요, 둘째는 군액(軍額)을 채우기 어려운 폐단이며, 셋째는 고을의 촌락이 점차로 비어가는 폐단이었다.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11월 6일 계해
약원에서 일곱 차례 구대(求對)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7일 갑자
임금이 유신을 불러 술편(述編)을 읽도록 명한 다음 원량에게 보일 글을 친히 지었다.
이종백(李宗白)을 도승지로, 이성중(李成中)을 대사간으로, 임원(任遠)을 지평으로, 정존겸(鄭存謙)을 문학으로, 박사눌(朴師訥)을 사서로, 조재호(趙載浩)를 우빈객으로, 이후(李)를 동의금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정언 이상윤(李尙允)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상윤이 이존중을 섬으로 귀양보내라고 한 명을 회수할 것을 청하였으며, 그뒤로 연일 부름을 받고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평안도와 경기에서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모두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승지 구윤명(具允明)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천고의 역사를 보실 때 뭇 신하들이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임금이 약을 물리친 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조정의 신하에게 처분을 내리는 일과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일은 서로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하교해 주소서."
하고, 도제조 김약로 역시 말하자, 가감이중탕(加減理中湯)을 하루에 두 차례씩 달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쪽지를 붙여 현고(現告)313) 한 것을 가져다 보니, 무려 80명이나 되었습니다. 시종의 신하들이 일시에 모두 비어버렸으니, 분간(分揀)하는 도리를 취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쪽지를 붙이라고 명한 것은 세도에 분개해서 그런 것인데, 마침 그들의 소원에 들어 맞으니, 그만두라고 하라."
하였다.
11월 9일 병인
포도청에 현재 갇혀 있는 죄인 황진기(黃鎭紀)의 아들 황영(黃英)이 물고되었다.
11월 10일 정묘
이창의(李昌誼)를 도승지로 삼았다.
예조 판서 원경하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날 선묘조(宣廟朝) 때에 정곤수(鄭崑壽)가 종백(宗伯)314) 에 제수되었는데, 그가 삼공과 같은 품계로서 내려 앉아 동벽과 서벽으로 나누는 것은 체면으로 보아 온당하지 않다고 하여 병을 끌어대어 사직하자 체차하였으며, 비록 비국이나 금오라 하더라도 공적인 모임에서 앉는 서열이 불편할 경우 역시 체차되었는데, 지금까지 아름다운 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비록 용열하고 어리석으나 벼슬은 정1품이고 또 혜국(惠局)은 본디 도제조의 아문이니, 앉는 서열이 서로 구애되는 것이 어찌 비국과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대전(大典)》을 상고해 보니, 정1품의 관원은 의정의 관원과 한 줄에 서도록 되어 있는데, 재배(再拜)하고 자급을 낮추어 직무를 보는 것은 최근의 잘못된 관례입니다. 신이 영의정 이종성과 내외종(內外從)의 친척으로 혐의가 있으니, 청컨대 《속전(續典)》에 따라 신이 띠고 있는 비국과 혜국의 임무를 모두 해임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비록 구례가 있다 하더라도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해에 관서(關西)에 사는 김영준(金英俊)의 집에 4대가 함께 산다는 말을 듣고 그의 집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리라 명하고 김영준 부자를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들이 모두 이미 죽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고도 먼 곳에 사람들을 어루만져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김영준의 아들이나 조카들 가운데 쓸 만한 자를 해조로 하여금 즉시 조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3일 경오
임금이 효순빈(孝純嬪)의 혼궁(魂宮)에서 이조 판서 조재호를 소견하고, 전형의 책임을 위임하여 세도를 잘 조화시키라고 유시하자, 조재호가 임무를 감당해낼 수 없다는 뜻으로 우러러 대답하였다.
11월 14일 신미
임금이 효순궁에 나아가자, 예조의 당상도 같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망곡(望哭)은 예가 아니다. 예라는 것은 인정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곳에 가서 곡해야 옳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무릇 망곡은 밖에서 상이 났거나 같은 궁궐이 아닐 경우에는 괜찮다. 그러나 같은 궁궐 안에서, 이른바 망곡이라는 것은 의의(意義)가 없는 것이다. 그곳에 가서 곡하고 복을 벗는 일에 대해 의조(儀曹)에 분부하여 이를 편집해 넣도록 하여야 옳을 것이다. 복을 벗는 것이나 문안하는 것은 해당 궁전에서만 하도록 하라."
하였다.
효순빈의 소상제(小祥祭)를 행하였다.
혼궁에서 일을 한 종실(宗室) 동은군(東恩君) 이부(李榑) 등 이하에게 모두 차등 있게 상을 주고, 수묘관(守墓官) 해봉군(海蓬君) 이인(李橉), 시묘관(侍墓官) 신치하(申致夏)에게 모두 가자하고, 삼헌관(三獻官)을 같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초헌관(初獻官)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아헌관(亞獻官) 조재호, 종헌관(終獻官) 동은군 부가 나아가 엎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다시 효순의 연제(練祭)를 보겠구나!"
하고, 조재호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효부(孝婦)가 살아 있을 때에 누차 나를 보고 경에게 전형의 임무를 맡기지 말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이 여전히 귀에 쟁쟁하다. 이제 이미 경을 쓰겠다는 뜻으로 사유를 고하였으니, 어찌 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1월 17일 갑술
혼전(魂殿)과 혼궁에서 제관들이 절하는 위치에 대해 일체 서쪽을 향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영부사 김재로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또 하교하기를,
"태실(太室)의 좌탑(坐榻)에 까는 천은, 옛날에는 무늬가 놓인 비단을 사용하였고 지금은 명주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빈혼전(殯魂殿)과 빈혼궁(殯魂宮)에는 무늬 있는 비단을 사용하고 있으니, 마음에 어떠하겠는가? 이 뒤로는 빈전에 홍광직(紅廣織)으로 두른 휘장을 붉은 명주로 대신하고, 보자기와 요 그리고 상건(床巾)은 그전에 무늬 있는 비단으로 사용하던 것을 모두 향주(鄕紬)로 대신하고, 그전에 향초(鄕綃)를 사용하던 것은 그냥 두라는 뜻으로 책에 기록하여 편집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성중(李成中)을 이조 참판으로, 조숙(趙)·한광협(韓光協)을 정언으로, 이후(李)를 호조 참판으로, 윤급(尹汲)을 좌부빈객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수찬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임금이 내국의 편집청 당상과 낭청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중전의 탄일에 하례를 드리는 것을 임시 중지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 만약 하례를 하게 될 경우 내년 봄에는 여러 신하들이 경자년315) 의 구례를 인용하여 원량과 같이 와서 굳이 청할 것이다. 내 이를 걱정하여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8일 을해
약방에서 동궁을 입진하였다. 도제조 김약로가 철을 따라 몸조리를 잘 하는 방법에 대해 아뢰니,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였다. 김약로가 또 말하기를,
"지금 중궁전 회갑의 해를 맞아 하례를 드릴 절목의 초기(草記)에 대해 윤허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어제 대조께서 도로 회수하였으므로 신들이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나의 마음도 또한 그러하다."
하였다.
11월 22일 기묘
전 사과 윤봉구(尹鳳九)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의 환후가 회복되셨으니 나라의 경사입니다. ‘큰 병을 치르고 난 끝에는 선한 마음이 싹튼다.’고 하였는데, 이는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선묘(宣廟)에게 고하였던 말입니다. 대체로 흉금이 편안하여 정신이 맑고 기운이 순조로우면 온 몸이 저절로 건강해져 모든 병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큰 병이 막 몸에서 떠났을 때에는 마음에 영위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사사로운 뜻은 물러가고 천리(天理)만 순수하게 남아 착한 마음의 싹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막 솟아오르듯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이대로 확충해 나가면 미약한 것이 더욱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특히 마음을 기르는 요법이며, 본원에 힘쓰는 극도의 공력인 것입니다. 만약 저하께서 이때에 더욱 유의하신다면 지금 병이 나은 경사가 또 하늘에 나라의 영구한 운명을 비는 근본이 될 것이기 때문에 신이 간곡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11월 23일 경진
임금이 대신과 예조의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중궁전의 회갑에 하례를 드릴 것을 극력 청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세자에게 가서 전하도록 하였다. 문학 박사눌(朴思訥)이 가서 고한 뒤에 또 청대하니, 임금이 불러 물었다. 박사눌이 말하기를,
"동궁이 이 하교를 받고 매우 실망하며 말하기를, ‘내가 평소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고는 이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치구나."
하였다.
11월 24일 신사
서지수(徐志修)를 대사간으로, 정중기(鄭重器)를 정언으로, 조중회(趙重晦)를 교리로, 김상복(金相福)·윤광의(尹光毅)를 승지로, 홍봉한(洪鳳漢)을 동경연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좌부빈객으로 삼고, 이창의(李昌誼)를 특별히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충청도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11월 25일 임오
김치인(金致仁)·이창유(李昌儒)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화협 옹주(和協翁主)의 집에 거둥하려 하자, 부교리 채제공이 재차 차자를 올려 간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즉시 군사를 집결시키지 않았다고 하여, 병조 판서 김상성과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잡아 들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부절(符節)을 빼앗으러간 선전관이 표신(標信)을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행수 선전관(行首宣傳官) 이한응(李漢膺)은 영해부(寧海府)로 귀양보내고 부행수(副行首) 서혁수(徐赫修)는 군율을 시행하라고 하였는데, 승지 이지억(李之億)이 나아가 말하기를,
"대궐문 밖에서 군율을 시행하는 것은 거북합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취소하고 초모(貂帽)를 하사하였다. 옹주의 집에 들어가 밤이 깊도록 궁으로 돌아가지 않자, 약방·정원·대신이 모두 청대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동이 틀 무렵에 비로소 어가를 돌리었다.
관상감에서 올린 계사로 인해 원손의 태봉(胎峯)을 강원도(江原道) 영월부(寧越府) 하동면(下東面) 정양리(正陽里) 계족산(鷄足山) 서쪽 기슭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정하고, 계유년 정월을 기다렸다가 날을 잡아 거행하도록 하였다. 대개 남자의 태는 5개월이 되어서 묻은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11월 27일 갑신
화협 옹주가 죽었다. 임금이 옹주의 집에 가려고 하는데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승지 이지억 등을 소견하고 귀양간 신사건(申思建)을 방면하며 화유 옹주(和柔翁主)의 길례(吉禮)를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약방 도제조 김약로 등이 청대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김약로 등이 성체(聖體)가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하여 잠시 동안 옹주의 집에 간다는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지난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상이 있었을 때 전하께서 적지 않게 몸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신은 지금까지 매우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내 몸이 손상을 받은 것은 조정 신하들의 당논(黨論)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어찌 딸이 죽어 곡(哭)한 것에 연관시키는가?"
하자, 김약로가 속담으로 비위를 맞추며 사과하였다. 임금이 옹주의 집에 들려 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어가를 돌리겠다는 명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자 부교리 채제공이 차자를 올리고 내국에서도 궁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이규채(李奎采)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우상과 어영 대장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이 뒤로는 하교라고 하여 비록 휘지(徽旨)를 받들었다 하더라도 휘지의 밑에다 ‘전왈(傳曰)’ 두 글자를 써 넣으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11월 28일 을유
임금이 어영 대장 홍봉한을 소견하였다. 홍봉한이 도성 안의 개천이 막히고 동쪽 성의 성첩(城堞)이 낮고 허물어졌다고 아뢰면서 개천을 파내고 치첩(雉堞)을 축조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청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장려하였다.
11월 29일 병술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제조 박문수가 말하기를,
"어제 어영 대장이 치성(雉城)의 일에 대해 우러러 말씀드렸는데, 신 역시 생각해 본 바가 있습니다.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광희문(光熙門)까지는 지세가 낮아서 갑자기 도적이 밀어닥칠 경우 필시 수비하지 못할 것이니, 치성을 더 높이 쌓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어영 대장에게 그 일을 위임하여 더 쌓은 다음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영 대장과 영성(靈城)이 상의하지 않고도 의견이 같으니, 내 단연코 그 일을 하겠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강가의 잠전(蠶田)에 당초 뽕나무를 심었던 것은 누에를 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잠전이 죄다 백성의 소유가 되어 오래도록 뽕나무를 심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다시 뽕나무를 심게 하고 간간이 조사한다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내전에서 신칙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왕 도성을 수비하려면 의당 치첩이 있어야 할 것이고, 동쪽 성은 더욱 치첩을 높이지 아니할 수 없다. 지금 이런 마음에서 특별히 장신(將臣)을 부른 것인데, 이는 우리 백성을 위하는 일이다. 어영으로 하여금 봄이 온 뒤로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설치할 치첩의 숫자에 대해서는 먼저 강구하여 정하되 어영 대장이 전임 어영 대장 및 훈련 대장·총융사와 함께 가서 살펴보고 나서 대신 및 비국 당상들과 같이 들어와 여쭈어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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