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정해
임금이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상복을 벗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소견하였는데 세손의 사부를 지낸 사람들은 천담복 차림으로 입시하였다.
경상도에서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12월 2일 무자
평안도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12월 3일 기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어영 대장 홍봉한이 아뢰기를,
"치성(雉城)에 대한 그림을 열람하셨습니까? 광희문 북쪽으로부터 흥인문 남쪽까지 치성 네 군데를 만들도록 정하였습니다."
하매,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그 간격이 넓고 멀으니 의당 다섯 군데를 설치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섯 군데에 치성을 만들기로 정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중전의 탄신 날짜가 이미 다가왔으므로 하례하는 의절을 즉시 여쭈어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명년에 하례드릴 것에 대해서도 미리 분부를 내려주시기를 우러러 청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예관(禮官)의 여러 신하들이 선조(先朝)316) 께서 이미 60세에 경축하였으니, 계술(繼述)의 도리로 볼 때 거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계속해서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께 하례를 드릴 때에는 내가 사친(私親)의 복을 입고 있어서 하례드리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승하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그 예를 거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극력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4일 경인
강원도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고 불에 타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12월 5일 신묘
우의정 김상로가 비국의 여러 재신들과 청대하니,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답하기를,
"비록 옛날에 선왕이 승하하셨을 때에 따라 죽지 못하였으나, 또 어찌 차마 오늘날 하례의 일을 성대히 벌일 수 있겠는가?"
하고, 송현(松峴)의 옛 궁으로 거둥하겠다고 명하였다. 그러자 약방·정원·옥당이 청대 하였는데, 허락하지 않고, 승여소(乘輿所)로 나가 화협 옹주의 집까지 두루 들리겠다고 명하였다. 해가 저물 무렵에 송현궁으로 향하여 소주소(小駐所)에 도착하자, 여러 신하들이 깊은 밤에 빈 궁전에 들어가서는 안되니 빨리 어가를 돌리자는 뜻으로 극력 청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하례를 드리겠다고 청하였는데, 말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례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지금 이 궁에 누어서 경들의 청을 사양해야 하겠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하례를 받는 일은 인정이나 예절로 보아 폐지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움을 만나 불효하고 공경스럽지 못한 바람에 전후로 헤아릴 수 없는 흉한 말을 실컷 들었으니, 지금 하례를 받는다면 더욱 불효가 되는 것이다. 지금 나를 무망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고,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잇따라 내렸다. 드디어 궁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눈비가 섞여 내렸다. 예조 판서 원경하가 사모를 벗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어가를 돌리자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백 번 머리를 깨뜨리더라도 나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대사간 서지수, 장령 김광국이 청대하여 들어가 아뢰었는데,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상로 등이 대왕 대비전의 합문 밖에 나아가 승전색을 불러 구두로 전해 아뢰기를,
"신들이 전하의 6순 경사를 맞아 감히 선조(先朝)에서 거행하였던 전례를 인용하여 사당에 고한 다음 하례를 드리겠다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효성의 마음으로 굳게 거절하시고 갑자기 옛 궁으로 행차하시더니 심지어는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들이 애타 어쩌할 줄을 몰라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아뢰니, 빨리 분부를 내리셔서 성상의 마음을 돌려 주소서."
하니, 대비가 언서(諺書)로 답하기를,
"송현궁으로 거둥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마는, 구두로 전한 계사를 들어보건대,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니 놀라움을 무어라 말할 수 없다. 속히 봉서(封書)를 보내려고 한다."
하였다. 김상로 등이 또 왕세자에게 청대하여 이로써 아뢰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이처럼 황급한 때를 당하여 어느 겨를에 호위를 갖출 수 있겠는가? 보연(步輦)으로 가겠다."
하였다. 승지가 동궁이 이 소식을 듣고 방금 온다고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너무 지나치다."
하였다. 대왕 대비전의 승전색이 봉서를 가지고 도착하자, 임금이 바깥 난간으로 나가 엎드려 받아 읽고 나서 소매 속에 넣은 다음 대신을 불러 입시케 하라고 명령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만약 경축한다는 일에 대해 다시 말하지 아니한다면 내 마땅히 자전의 분부에 따르겠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지금은 신이 한결같이 굳이 간쟁할 수만 없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언서로 회답을 올렸는데, 아뢰기를
"나올 때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이렇게 밤이 깊었으니 이는 모두 신이 불효한 소치로서 그지없이 황공합니다. 지금은 대신이 신의 뜻을 양해하여 경축하는 일을 그만두려고 하니, 돌아가서 뵙겠습니다. 지금 곧 돌아가려고 하니, 자전께서는 마음을 너그러이 가지소서."
하고, 이내 궁으로 돌아왔다. 왕세자가 소여(小輿)를 타고 돈녕부 앞길에 이르러 임금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돈화문 밖으로 되돌아와 맞이하여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12월 8일 갑오
임금이 선화문에 나아가 대신·비국 당상 및 약방·정원·옥당의 관원을 불러 보았다. 이때에 대신을 불러 입시케 하라고 명하였는데, 우의정 김상로가 즉시 입시하지 않았고, 약방에서 합문에 나아갔으나 눈비가 섞여 내렸기 때문에 문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임금이 ‘내가 할 일이 있다.’는 분부를 잇따라 내리고 또 대소 공무를 동궁에게로 들여보내라는 하교가 있었다. 그러자 정원·옥당에서 청대하였고, 대사간 서지수·장령 김광국도 와서 청대하였는데, 모두 선화문 밖으로 와서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약방에서 증세를 진찰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 문에 앉은 이유는, 희정당은 정사당(政事堂)이므로 왕세자에게 대리 청정케 한 뒤로는 다시는 앉고 싶지 않아서이다. 송현궁에 거둥한 것은 나의 큰 뜻이었는데, 자전의 분부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하니, 영성군 박문수가 말하기를,
"오늘 누가 감히 봉승하겠는가 여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탄하십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옷을 벗은 뒤라야만 이 마음이 드러날 것이다. 태조와 영묘(英廟)317) 께서도 이미 행하셨다."
하였다. 예조 판서 원경하가 선왕이 어제(御製)한 ‘곽공(郭公)318) 처럼 길이길이 다복하게 살지어다.[永年多福郭公如]’라는 시를 가지고 읽으면서 간하니, 임금이 책상에 엎드려 곡(哭)하며 말하기를,
"이 어제시(御製詩)는 내가 연잉군(延仍君)으로 있을 때에 주신 것이다. 내가 그냥 연잉군으로 있었다면 어찌 이런 아픔이 있겠는가? 이 옷을 벗지 않는다면 무슨 얼굴로 지하에 돌아가 형님을 뵐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눈보라가 치는 혹독한 추위에 필시 몸에 손상이 올 것인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경이 개연하게 생각할 줄로 여긴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병 때문에 부름을 받고도 즉시 나오지 못하였고 또 대신의 반열에 끼어 있으면서 의당 거행해야 할 전례를 윤허받지 못하였으니, 신은 정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이로 인해 평소에 먹은 마음을 이룩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하였다. 승지 김치인(金致仁)이 양정합(養正閤)에 나아가 구대(求對)하고 이 말을 아뢰니, 왕세자가 듣고 앞에 나아가 엎드려 내린 전교를 회수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지금 나의 마음을 모르고 있다. 태조께서는 정종에게 선위(禪位)하였고 영묘(英廟)께서도 이미 거행하신 전례이다. 그러므로 네가 너의 아비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자 한다면 이 옷을 항상 입도록 허용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 청포(靑袍)를 입은 것은 사실 의도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하교를 회수하라고 극력 청하니, 임금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 국조에서 선수(禪授)한 일이 어찌 없었는가?"
하니, 이조 판서 조재호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손에 태아(太阿)를 가지고 계신 것이 얼마나 존숭(尊崇)한 일인데, 이러한 거조를 하신단 말입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이 마음을 펴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대사간 서지수가 말하기를,
"옛 궁에서는 어가를 돌리실 때에 대신이 우선 뜻을 따르겠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성덕에 누가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서지수를 우선 체차하라. 의리를 안다는 서지수가 이렇단 말인가? 서지수는 본디 괴상한 무리인데 그의 아비와 할아버지부터 그러하였다."
하였다. 장령 김광국이 약간 그를 위해 변명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臺臣)도 당을 비호하려고 하는가? 체차하라."
하고, 서지수를 울산부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들은 비록 돌보아 줄 것조차도 없지만 원량은 생각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원량을 사랑하지 않을지언정 차마 선조께 불효할 수는 없다. 경들은 나로 하여금 지하로 돌아가 형님을 뵈올 체면이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경묘께서 대리를 하라고 명하실 때에 대소 공무를 모두 나에게 들여 보냈는데, 이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흉측한 말을 들었다. 지금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의 괴로운 마음을 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신이 이 일을 동조(東朝)께 아뢰겠다고 먼저 나갔다. 임금이 손수 글을 써서 내려 말하기를,
"이 뒤로는 사전(祀典)이나 순감군(巡監軍) 군호(軍號)의 일로 표신을 청하는 일 이외에는 모두 동궁에 들여 보내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돌려보냈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리 청정하는 것이 하나의 기휘(忌諱) 거리가 되었다. 노론은 일찍이 이 때문에 화를 받았기 때문에 겁을 먹어 뜻을 받들지 않고 있으며, 소론은 일찍이 대리 청정하는 것을 죄로 삼았기 때문에 이것을 의리로 삼으려고 뜻을 받들지 않고 있는데, 신하들의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기에 하나는 무함이라고 하고 하나는 무함이 아니라고 하니, 내가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어찌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야사(野史)에서는 어떻게 쓴지 모르겠지마는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자궁에 들어간 공문서 이외에는 모두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도록 하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서로 이끌고 극력 간하였다. 영부사 김재로가 들어오자 임금이 그의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지금 경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 경은 나의 이 괴로운 마음을 이룩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오직 빨리 정전으로 나아가셔서 어리석은 신의 소견을 다 말씀드리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홍준해·이양천·한종제를 제외한 그 나머지 이목의 유신으로 귀양간 사람을 모두 풀어주라고 명하고, 또 민백상·조명정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김상로 등이 대비전 합문 밖에 나아가 구두로 전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신들의 죄로 인하여 또 대소 공사와 군호를 동궁으로 들여보내라고 하교하시고 인하여 선화문으로 나가셨는데, 동궁이 울며 청하였으나 되지를 않았습니다. 신들이 정성이 얕고 힘도 미약하니, 오직 우리 자전께서 빨리 분부를 내리셔서 성상의 마음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대비전께서 언서(諺書)로 하답하기를,
"엊그제 일로 인하여 아직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또 계사를 보게 되었구나. 이미 거행하였던 전례를 주상께서 따르는 것은 이게 바로 계술하는 효도이다.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몹시 추운 때에 선화문으로 나가서 대소 공사와 군호를 동궁으로 들여보내라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이제 친히 희정당으로 가서 마음을 돌리라고 권하려 한다. 주상의 효성으로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뜰 가운데로 내려와 엎드렸다. 대비가 희정당에 나아가 승전색을 시켜 구두로 전교하기를,
"주상은 무슨 연고로 찬 곳에 앉아 있는가? 즉시 올라오는게 어떻겠소?"
하니, 임금이 승전색으로 하여금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자전께서 추운 궁전에 나오시게 한 것 역시 신이 불초한 죄입니다만,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울적하여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주상에게 들어 볼 말이 있으니, 청컨대 잠시 들어왔으면 하오."
하니, 임금이 일어나 들어갔는데, 얼마 안되어 나와서 자리로 내려와 굽어 엎드리고 있었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이처럼 찬 곳에 앉아 있으려면 애당초 왜 뜻을 받들겠다고 답하였소? 빨리 올라오시는 게 어떻겠소?"
하니, 임금이 관을 벗고 승전색으로 하여금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마음이 몹시 답답하니, 소신의 마음을 굽어 양찰해 주시기를 천만 번 엎드려 바랍니다."
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아까 명을 따르겠다는 말을 해 놓고 또 왜 이러시는거요? 빨리 올라오시는게 어떻겠소?"
하니, 임금이 승정객으로 하여금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임오년319) 부터 머리를 땋고 받들어 모시었습니다마는, 오늘의 하교는 받들어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아까 따르겠다고 대답하시기에 마음에 매우 다행히 여겼는데, 지금 왜 이러하십니까? 실로 주상의 효성답지 않소. 어서 빨리 올라오시는게 어떻겠소?"
하니, 임금이 승전색으로 하여금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방금 군호에 대한 일로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하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전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니, 자리로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군호를 들이라고 명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정사와 군호를 모두 처리하겠다고 대답해 놓고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하니, 임금이 또 자리로 내려가 관을 벗고 승전색으로 하여금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이렇게까지 하교하시니, 이는 모두 신이 불초하고 무상한 죄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군호는 이미 들여오기로 하였다고 들었소만, 정사 등의 일은 주상의 효성으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직도 추운 궁전에 앉아 있으니, 빨리 들어오시는게 어떻겠소?
하니, 임금이 승전색으로 하여금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이 모두가 불효하고 무상한 소치입니다. 차라리 오늘날 불효를 저지를지언정 차마 옛날의 불효는 되풀이 할 수는 없습니다. 심사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말할 일이 있으니, 들어오시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임금이 승전색으로 하여금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아버지가 부르면 느리게 대답하지 않고 임금이 부르면 느리게 대답하지 않는 것인데, 자전께서 하교가 계신데도 즉시 명을 받들지 않았으니 불효하고 무상합니다. 그러나 또한 소신의 마음을 펴기 위해 한 걸음도 감히 들어가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더욱 신의 죄일 따름입니다.
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오늘 얼마나 춥습니까? 그런데 내 여기에 앉아 있은지 이미 오래 되었소. 주상의 평상시의 효성으로 볼 때 어떻다 하겠소? 빨리 들어오시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임금이 들어가 조금 있다가 탑상(榻上)으로 나와 앉았다. 대비전에서 승전색으로 하여금 구두로 전하여 여러 대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지금은 주상께서 모두 내 말을 따르겠다고 대답하였으니, 종사의 다행이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30년 동안 고심해 오던 일을 지금 또 이루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슬프고 아플 뿐입니다."
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희정당으로 빨리 들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임금이 승전색으로 하여금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삼가 마땅히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전후로 내리신 전교를 오래 머물러 둘 수 없으니, 모두 회수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쪽 조선은 임금 군(君) 자 하나만으로 넉넉하다. 나는 지금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이렇게 하시면 자전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전의 뜻을 받들어 따른 것은 다만 임금 군(君) 자 하나 뿐이다."
하고, 손수 전교를 써서 승지에게 주면서 시행하게 하였다. 승지가 도로 회수할 것을 극력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절목 중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아까 들어오겠다고 말씀해 놓고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오? 내가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궁으로 돌아가겠소."
하니, 임금이 승전색으로 하여금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조금 전에 들어가겠다는 뜻으로 말씀드렸는데, 여러 신하들이 절목 중의 일로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이 역시 신의 죄입니다."
하였다. 대비전에서 또 하교하기를,
"정사 등의 일은 모두 주상이 처리하겠다고 답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의 청 또한 이같은 것이오. 내가 추운 궁전에 있으므로 병이 날까 염려되니, 빨리 들어오시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임금이 하교를 받들어 즉시 일어나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친히 쓴 전교를 만약 가지고 가지 않을 경우에는 내 마땅히 동조(東朝)에게 명을 내려 주기를 청하지, 들어갈 수는 없다."
하였다. 여러 승지가 간쟁하다가 마지못해 이내 받들고 나가니, 임금이 대내(大內)로 들어갔다.
12월 9일 을미
정원에서 청대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약방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옛날 한세량(韓世良)이, ‘하늘에는 두개의 태양이 없는 법이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대리가 어찌 왕이라고 하겠는가? 왕위를 물려 준 뒤에는 한 대궐 안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 거처해야 하는 것이다. 무자(誣字)에 대한 말은 어제 자전께 고하였는데 자전께서도 아시고 계셨으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갑진년320) 대상(大喪) 초기에 심유현(沈維賢)이 만들어낸 말이 또한 대궐 안으로 흘러들어 왔으니, 어찌 통분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정원에서 모든 공무를 입계하니, 임금이 모두 도로 내렸다. 또 올렸으나 그때마다 내보냈다.
12월 10일 병신
여러 승지들이 손수 쓴 전교를 도로 회수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그만두라고 답하고 공무가 들어오는 대로 도로 내렸다.
함경도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12월 11일 정유
여러 승지가 손수 쓴 전교를 회수할 것을 아뢰었으나, 앞에서 답한 것처럼 하였다. 또 청대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공무가 들어오는 대로 도로 내려보냈다.
12월 12일 무술
여러 승지가 또 손수 쓴 전교를 회수할 것을 아뢰었으나, 앞에서처럼 답하였고, 재차 아뢰었으나 앞에서 답한 것처럼 하였다. 공무가 들어오는 대로 도로 내려보냈다.
임금이 선화문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 2품 이상의 약방·승지·유신들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승지가 봉서(封書)를 도로 바쳤으니, 내가 어찌 곤욕스럽지 않겠는가?"
하며, 하교하신 말씀이 비상(非常)하였다. 유신에게 《시전(詩傳)》을 가지고 오라고 명한 다음 친히 육아편(蓼莪篇)321) 을 세 번 읽고 또 비상한 하교를 하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또 전에 손수 써서 내렸던 글을 회수할 것을 극력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 9월 20일에 내가 병이 나지 않았던 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선조의 피붙이라고는 나 한 사람 뿐이었는데, 그때 자전께서 이 말씀을 하셨으니, 내가 어찌 감동하지 않았겠는가? 갑진년322) 대상(大喪) 때 심유현이 밖에서 흉측한 말을 만들어내고 대궐 안에까지 흘러 들어온 말이 있었다. 순관(順寬)이 나를 대놓고 모욕을 주었으며 또 이천해(李天海)같은 자도 있었다. 그러함에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역시 모질다고 하겠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다같이 명을 받들어 따를 수 없다는 의리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신축년323) 과 임인년324) 의 남은 찌꺼기인 것이다. 이는 왕위를 전하는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도 굳이 간쟁한단 말인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러한 하교를 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한 마디로 결정할 수 있다. 시약청을 설치하겠는가, 전교를 받들어 따르겠는가?"
하니, 제조 박문수가 말하기를,
"두 가지 하교를 모두 받들어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나 저나 하나를 따를 경우에는 무상 불충한 신하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의 명이 중한가, 견제하는 중신(重臣)이 중한가? 중신이 주도한 이 일은 견제하는 데 가까우니, 경들은 모름지기 받들어 따라야 할 것이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그 명을 받들어 따를 수 없다는 것을 훤히 알고 계시면서 일부러 이러한 하교를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박문수가 어찌 감히 임금을 견제한단 말인가? 신축년에 사용하고 남은 찌꺼기를 어찌 감히 오늘에 쓰려고 한단 말인가?"
하고, 처분하는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극력 구원하여 중지하였다. 영부사 김재로가 말하기를,
"전교를 빨리 도로 거두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경들에게 사과하겠다. 처음에는 약을 복용하고 편안히 지내려고 하였는데, 승지가 한사코 간쟁하여 격발되었고 또 눈을 부릅뜨고 견제하는 자가 있었다. 신축년에 내가 세제(世弟)가 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손수 쓴 전교를 도로 거두라고 잇따라 아뢰자, 임금이 전교를 촛불에 불사르면서 말하기를,
"이 종이를 불사르더라도 내 마음은 어찌 불사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13일 기해
약방에서 입진하기를 청하고, 좌의정 이천보는 나와 사은 숙배한 뒤에 청대하였으며, 우의정 김상로는 여러 재신들을 인솔하여 청대하고, 승지·옥당이 청대하였는데, 모두에게 그만두라고 답하였다.
12월 14일 경자
약방·정원·옥당·대신·재신들이 청대하고, 영의정 이종성은 시골에서 들어와 대궐 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이 선화문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이종성을 불러 입시하라고 하였는데, 이종성이 사은 숙배하지 않고 들어오자, 임금이 큰소리로 즉시 사은 숙배하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이종성이 나가서 사은 숙배하고 들어오니 임금이 또 누누이 비상한 하교를 수천 마디나 하였는데, 전일과 똑같았다. 이종성이 여러 신하들과 같이 극력 간하자, 임금이 또 육아편(蓼莪篇)을 읽었다. 그리고 《춘방일기(春坊日記)》를 가져오게 하여 승지로 하여금 세제로 책봉하였을 때 사양하였던 상소인 사세제책봉소(辭世弟冊封疏) 세 편을 읽도록 하였는데, 밤 3경에 이르렀다. 왕세자가 팔짱을 끼고 임금의 앞에 서있었는데, 임금이 손으로 휘저으며 가도록 하고 말하기를,
"너는 무엇 하러 나왔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시를 읽을 것인데,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이므로 내 마땅히 너를 위해 내렸던 전교를 반한(反汗)하겠다."
하고, 이어서 육아시를 읽어 끝 편에 이르자, 왕세자가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친히 동궁에게 하교하셨는데, 동궁의 효성이 지극하였습니다. 반한하겠다고 하신 명을 식언(食言)하시면 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소학(小學)》의 편제(篇題)를 읽으라고 명한 다음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너의 도리는 들어가라고 한 명을 들었으면 들어가면 될 뿐이다. 무엇하러 오래 앉아 있는가?"
하니, 왕세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신하가 일제히 회수한다는 전교를 빨리 쓰라고 청하니, 임금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어렵다. 어렵다."
하였다. 임금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말하기를,
"동궁이 들어간 줄로 알았는데 아직까지도 물러가지 않고 기둥 뒤에 있으면서 내가 들어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여러 신하들은 잠시 물러가 나를 괴롭히지 말라."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신들이 비록 죽을지라도 전교를 도로 거두지 않으실 경우에는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선조(先祖) 때에 대신이 이러한 전교를 받들어 따른 것도 모두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이러한 전교를 받들어 따른 것은 정말로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는 선조께서 하신 일을 불만스럽게 여긴 것이다."
하였다. 제조 박문수가 말하기를,
"감히 선조께서 하신 일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 전교를 받들어 따르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왜 그렇게도 지나치게 말씀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책상을 치며 큰소리로 말하기를,
"영성군 박문수를 제주도에 안치하라. 그가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옛날에 거행하였던 일을 경들은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인가? 옛날에 처분한 일을 불만스럽게 여기면 이것이 신하인가, 역적인가? 모두가 임금을 견제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니 매우 괴이하고 고약하다. 영상·좌상·우상은 해도(海島)에다 안치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입시한 대신·경재·유신·승지를 모두 해도에다 안치하라."
하고, 남소 위장(南所衛將)을 가승지로 차출하여 전교를 쓰도록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특별히 문에 나와 마음을 터놓고 하교하였는데, 감동하기는 커녕 옛날에 하교한 것에 대해 감히 불만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이를 신칙시키지 않는다면 임금이 있고 나라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입시한 대신은 중도 부처(中道 付處)하고 재신은 모두 멀리 귀양보내며, 승지와 유신은 모두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특별히 정찬술(鄭纘述)을 총융사로 제수하여 금위·어영의 두 영(營)을 아울러 관장하게 하고, 유복명(柳復明)·신치운(申致雲)·홍낙성(洪樂性)·이규채(李奎采)·이창유(李昌儒)를 특별히 승지로 제수하였다.
12월 15일 신축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여러 승지와 약방에서 청대하였다.
박필균(朴弼均)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육상궁에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효장묘(孝章廟)를 두루 들렀다. 임금이 광화문 앞에 이르러 연(輦)을 멈춘 다음 그곳 백성 가운데 부로(父老)들을 불러 놓고 하교하기를,
"임어한 지 30년이 되었으나 너희들에게 온전한 혜택이나 온전한 정사를 베풀지 못하였는데, 이제부터 우리 백성들을 크게 저버리게 되었다."
하고, 드디어 육상궁으로 나아가 전배하고, 날이 저물 무렵에야 비로소 어가를 돌렸다. 연에 오를 때에 효장묘(孝章廟)를 두루 들리겠다고 명하였는데, 궁문 밖에 이르러 여(輿)를 타고 앉아 소매 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도승지 유복명에게 주고 그로 하여금 꿇어앉아 읽도록 하였다. 그 대의는 ‘자전께 윤허를 얻어 진전(眞殿)에 곡하고 하직한 다음 춘추관 당상과 낭청으로 하여금 즉시 심도(沁都)325) 로 가서 열성조에서 선위한 고사를 상고해내게 한다.’는 것이었다. 유복명이 꿇어앉아 〈다 읽고〉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게 무슨 일입니까?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고, 어가를 수행한 여러 신하들도 모두 깜짝 놀라 얼굴빛이 질려 말하기를,
"이게 무슨 하교이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군직에 있는 사람과 연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 사실 너희들에게 덕을 입힌 일이 없는데 오늘 영원히 작별하게 되었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울었고 군사들도 울었다. 임금이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 지금 뜻을 이루었으니 통쾌하다마는, 선조 때의 일을 추억해 보니 자연히 감회가 생기는구나."
하고, 궁 안으로 빨리 들어가자고 재촉하였다. 승지 이규채와 사관이 여(輿)를 붙잡고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남유용(南有容)을 특별히 동지춘추로 제수하였다. 임금이 궁내로 들어가자, 여러 신하들이 중문(中門) 밖에 엎드려 있었다. 임금이 승전색이나 사약(司鑰)으로 하여금 잇따라 봉서를 내렸는데, 여러 승지들이 내린 족족 도로 거두자, 하교하기를,
"시각을 알리는 북을 치지 말라고 이미 명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금루관(禁漏官)이 시각을 알렸으니, 해당 금루관을 잡아다 곤장을 치도록 하라."
하였다. 병방 승지 이창유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시키는 것은 거북스럽다며 넌지시 여쭙자, 임금이 책망하였다. 그러자 이창유가 매우 두려워하여 곤장을 쳤다. 이뒤로 경루(更漏)를 설치하지 않았으니 행재소(行在所)가 조용하였다. 여러 승지가 합문에 엎드려 청대하니, 하교하기를,
"도승지 외에는 모두 물러가라."
하였다. 승지가 이 소식을 왕세자에게 알리자, 왕세자가 허둥대며 호위를 갖추지 않고 소여(小輿)로 나와 부어교(鮒魚橋) 앞에 이르러 승지에게 하령하기를,
"내 지금 대죄하고 있으므로 의장(儀仗)을 설치해서는 안되니, 모두 치우도록 하라."
하고, 소여에서 내려 걸어서 창의궁(彰義宮)으로 갔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왕세자가 온다는 말을 듣고 지금 막 추운 뜰에 나와 앉아 있으니, 승지는 들어가서 이 뜻을 전유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드디어 합문 밖에 나아가 상소하기를,
"삼가 신이 너무나도 불초한 사람으로 외람되게 대리하라는 명을 받들고 나서 주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차마 듣지도 못할 하교를 갑자기 받고 나니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마치 깊은 연못으로 떨어진 것과도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신이 불효하고 무상하여 어젯밤에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신의 죄입니다. 당장이라도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으나 되지를 않습니다. 아! 성상의 계책이 충실하시어 교화가 팔도에 두루 미치었는데, 갑자기 망극한 분부를 내리시니, 마음 속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아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잠시라도 어찌 차마 물러갈 수 있겠습니까? 감히 만 번 죽음을 무릎쓰고 문 밖에 거적 자리를 깔아 놓고 엎드려 우러러 성상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있으니, 신은 더욱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정원에 내린 하교를 빨리 거두셔서 종사를 중히 하소서. 그러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유복명에게 하교하기를,
"〈왕세자의 상소를〉 도로 내주어라."
하였다. 유복명이 구두로 전해 아뢰기를,
"왕세자가 상소를 도로 내준다고 하여 허둥대며 어찌할 줄을 몰라 지금 땅에 엎드려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자, 승전색에게 하교하기를,
"왜 이처럼 나를 괴롭힌단 말인가? 즉시 들어가라는 뜻으로 전유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승전색으로 하여금 구두로 전해 아뢰기를,
"매양 이처럼 차마 듣지 못할 하교만 내리시는데 어떻게 감히 물러가겠습니까? 잠시 소견(召見)을 허락하여 달라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전색으로 하여금 구두로 왕세자에게 하교하기를,
"차가운 데에 앉아 있으므로 냉기가 올라올 것이니, 즉시 들어가라."
하자, 왕세자가 승전색으로 하여금 아뢰기를,
"어찌 감히 이처럼 하교하시는 것을 듣고 물러가겠습니까? 할 수 없이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겠습니다."
하였다. 왕세자가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나와 궁으로 돌어갔다. 영부사 김재로가 경재(卿宰)와 여러 조(曹)의 참의들을 거느리고 합문에 나아가 청대를 아뢰니, 그만두라고 답하였다. 낙창군 이탱(李樘)이 여러 종친들을 거느리고 청대를 아뢰었는데, 역시 허락하지 않았고,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6일 임인
영부사 김재로가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면서 구두로 계사를 전하였는데, 비답이 없었다. 낙창군 이탱이 여러 종친들을 거느리고 청대하니, 그만두라고 답하였다. 왕세자가 또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소를 올려 애타는 고충을 털어놓았으나, 효성이 얕아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성상을 가까이 모시고도 우러러 감동시키지 못하여 윤허를 내리시지 않으시고 차마 듣지도 못할 하교만 잇따라 내리시니, 가슴이 내려앉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지금 성상의 뜻이 비록 완고하시지만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신은 오직 죽음 뿐입니다. 망극한 하교를 들은 이상 반드시 죽음을 무릅쓰고 극력 청하여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하고야 말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마음 역시 완강하다는 점을 굽어살피시고 빨리 유음을 내리시어 어제의 하교를 반한(反汗)하심으로써 종묘와 사직을 중히 하소서. 신이 장차 문 밖에 나아가 엎드려 있으려는 즈음에 갑자기 엄한 하교를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여 감히 그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억지로 물러나와 거적자리에 엎드려 명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면서 감히 재차 성명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어리석은 신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며 흐르는 눈물과 애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유복명에게 〈상소를〉 도로 내주라고 하교하였다. 승전색으로 하여금 전교하기를,
"왕세자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눈 쌓인 뜰에 나가 앉아 있으니, 승지는 들어가 이 말을 동궁에게 전하라."
하였다. 승지 이규채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를 받고 왕세자에게 전하였는데, 왕세자가 말하기를, ‘신이 어젯밤에 나아갔을 때 효성이 얕아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하고 물러나와 밤새도록 허둥대며 애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거적자리에 엎드려 명을 기다리려던 즈음에 또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받고 나니, 더더욱 마음이 조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기에 대궐 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며 감히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승전색으로 하여금 하답하기를,
"문 밖에 또 나와 엎드려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할 경우 내가 앞으로 수라를 들지 않고 제사(諸司)를 미리 준비하여 북한산 행궁(行宮)으로 갈 것이다. 그러면 너는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빨리 들어가라는 뜻으로 승지는 가서 유시하라."
하였다. 이규채가 또 아뢰기를,
"신이 삼가 하교를 받들고 왕세자에게 전하였는데, 왕세자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이러한 하교를 받들고 어떻게 감히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시 대궐로 들어가겠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청(庭請)을 다섯 차례나 아뢰었으나, 모두 답을 내리지 않았다. 낙창군 이탱 등이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모두 답하지 않았다. 여러 승지가 합문에 엎드려 청대하니, 그만두라고 하교하였다. 승지 이창유가 금군 정령(禁軍正領) 등이 땅에 엎드려 있는 일을 넌지시 아뢰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저버렸다. 포장을 치고 잘 휴식을 취하면 내 마음이 기쁘겠다."
하였다. 상중(喪中)에 있는 신하 정우량(鄭羽良)이 상소하여 궁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글을 보니, 경을 본 것 같다. 30년 동안 괴로워하였던 마음을 경은 알 것이다. 이미 자전의 윤허를 받았고 또 진전에 아뢰었는데, 오늘 한 이 거조는 나의 마음에 하고자 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경기 감사 김상익(金尙翼)이 수령·찰방 들과 같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어가를 돌리라고 청하였는데, 상소를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전 참판 정형복(鄭亨復) 등이 상소하여 어가를 돌리라고 청하였는데,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관학 생원 이언중(李彦中) 등이 상소하여 어가를 돌릴 것을 청하였는데, 손수 써서 비답을 내리기를,
"아! 33년 동안 임금이 임금과 스승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너희들이 어떻게 신하와 제자된 직분을 닦을 수 있었겠는가? 오직 원하건대, 많은 선비들은 명륜당에 걸려 있는 훈계와 향교(香橋)의 기둥에 새겨 있는 교훈을 조금이라도 몸받아 편당이 없이 나의 후사를 섬기도록 하라."
하였다. 오부(五部)에 사는 백성 이진성(李震成) 등이 상소하여 어가를 돌릴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부덕한 내가 너희들의 임금 노릇을 한지 지금 33년이나 되었는데도 백성들에게 온전한 혜택도 입히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마음 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옛날 선왕의 훌륭한 덕과 깊은 사랑이 백성들의 살갗에 적시었으므로 도성 백성들이 나에게 소를 올려 간청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이치이다마는, 아!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 하나 나를 못잊어 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는가? 너희들의 글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내가 한 이 거조는 이미 자전의 허락을 받았으며 또 진전에 고하였으므로 백 번을 생각해 보아도 마음은 한 조각 돌과 같다. 아! 우리 백성을 저버렸다. 특별히 유시를 손수 써서 승선(承宣)으로 하여금 읽어 선포하게 하노라. 아! 도성 백성들은 나의 뒤를 잇는 임금을 잘 받들도록 하라."
하였다. 한성부 서리 한시걸(韓時杰) 등과 의정부 서리 이덕만(李德萬) 등과 사군문(四軍門)서리 임세무(林世茂) 등과 충훈부 서리 홍우택(洪禹澤) 등과 돈녕부 서리 최태용(崔泰容) 등과 의빈부 서리 손희경(孫希敬) 등과 중추부 서리 김상서(金象瑞) 등이 모두 상소하여 궁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도성 백성들에게 하유하였다. 아! 너희들 역시 나의 백성이니, 모두 나의 뜻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훈련 도감 마보군 정령 기대총(馬步軍正領旗隊摠) 강연우(姜連佑) 등과 금위영 경표하 칠색 기대장(禁衛營京標下七色旗隊長) 김세창(金世昌) 등과 어영청 경향 군병 기대장(御營廳京鄕軍兵旗隊長) 나만영(羅萬英) 등이 모두 상소하여 어가를 돌릴 것을 청하였는데, 손수 써서 하유하기를,
"부덕한 내가 항상 스스로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날 군민(軍民)을 아끼고 보살피던 선왕의 지극한 덕을 본받아 가엾게 여기는 이 마음은 가슴 속에서 느슨해지지 않고 있었다. 박덕하고 능력이 없어 우리 삼군(三軍)을 고생하게 하였는데, 오늘날 또 우리 삼군을 저버리게 되었다. 아! 삼군들은 내가 부덕하다 하지 말고 모름지기 옛날 선왕의 훌륭한 덕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승정원 서리 백수륜(白壽倫) 등이 상소하여 궁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는데, 손수 써서 비답하기를,
"나의 뜻을 이미 삼군에게 유시하였으니, 너희들은 그만 청하라. 내가 너희들을 저버렸다."
하였다.
12월 17일 계묘
하교하기를,
"엊그제 어공(御供)을 진상하지 말라고 이미 하교하였는데, 오늘 왜 받아들였는가? 감선 제조(監膳提調)를 중추하라."
하였다.
여러 승지가 차비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 청대하였는데, 공조 판서 조관빈, 대사성 남유용, 사직 구택규가 뒤따라 들어가 청대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차 임금으로 하여금 눈이 쌓인 뜰에 앉도록 하는게 옳겠는가? 모두 물러가라. 사알(司謁)은 함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으니 태거(汰去)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미 자전께 윤허를 받았고 또 진전에 들어가 고하고 나왔다. 자전이라면 그래도 다시 말씀드릴 수도 있겠으나 진전에는 어쩐단 말인가? 이번 걸음은 저양촉번(羝羊觸藩)326) 과 같은데, 어찌 다시 돈화문으로 들어갈 뜻이 있겠는가? 가서 《실록》을 상고해내어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오늘 만약 또 이와 같이 할 경우에는 나는 차가운 뜰로 나갈 것이다."
하였다.
정청(庭請)하여 계사를 올리니, 하교하기를,
"내가 임금 노릇을 한지 30년이 되었으나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이처럼 거듭 청한단 말인가?"
하였다.
약방에서 세 차례나 진찰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승지들이 합문에 엎드려 청대하고 서평군 이요(李橈)가 여러 종신들을 인솔하고 청대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종신들이 계사를 올렸는데, 도로 내주라고 하교하였다.
하령하기를,
"동궁과 빈궁에게 날마다 내리는 공상(供上)을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왕세자가 합문 밖에 나아가 승전색으로 하여금 아뢰기를,
"어제 삼가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받고 감히 나오지 못하고 물러갔었습니다. 밤이 되자 지나친 거조가 갈수록 더하였는데 불효한 자식의 정성이 얕아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였으니 허둥대며 애가 타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합문 밖에 나와 명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하니, 승전색으로 하여금 도승지 유복명에게 하교하기를,
"동궁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지금 차가운 뜰로 나가 앉아 있는데, 그가 들어갔다는 말을 들은 뒤에 전(殿)으로 올라가겠다. 이 뜻을 전유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승전색으로 하여금 다시 아뢰기를,
"비록 차마 듣지 못할 분부를 내리셨으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었으며 또 밤이 깊어가는데, 여전히 어가를 돌릴 기미가 없으니, 애가 타 어쩔 줄을 모르겠으며 비록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갈 뜻이 없습니다."
하니, 정원에 하교하기를,
"비록 자전께서 친히 나오시더라도 명을 받들어 따르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더구나 너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너는 온돌 방에 잘 있으면서 나로 하여금 차가운 곳에 있도록 하니, 자식의 도리가 이렇단 말인가? 내린 봉서는 보고 난 뒤에 즉시 가지고 가라는 뜻으로 전유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세 번째 아뢰기를,
"하교를 내릴 때마다 이처럼 차마 듣지 못할 말씀만 하시어 궁으로 돌아가실 날이 갈수록 더더욱 막연하기만 하니, 어찌 한 걸음이라도 돌릴 마음이 있겠습니까? 더욱 황공하기만 하여 그대로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수 써서 내린 글도 차마 받들어 따를 수가 없기 때문에 감히 봉해 올립니다."
하니, 승전색으로 하여금 왕세자에게 하교하기를,
"차라리 자애롭지 못한 아비가 될지언정 차마 불효하는 자식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냉기가 올라오고 있으니, 빨리 궁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손수 써서 내린 글도 가지고 가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네 번째 아뢰기를,
"신의 효성이 얕아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잇따라 하시니, 신이 더욱 죽을 죄를 지어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비록 이렇게 하교하셨으나 어찌 감히 물러가겠습니까? 즉시 전으로 올라가시기를 천만 엎드려 빕니다. 그리고 손수 써서 내리신 글은 할 수 없이 도로 올립니다."
하니, 승전색으로 하여금 유복명에게 하교하기를,
"손수 써서 내린 글은 받지 않으니 억지로 받으라고 다그치지 않겠다만, 냉기가 한창 올라오고 있으며, 문을 굳게 닫아 버려 다른 문으로 출입할 수 없으니, 빨리 궁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전유하라."
하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따금 냉기가 올라오고 있는데, 아직도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신료들은 왜 왕세자 앞에 나아가 청하지 않는가? 빨리 궁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전유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다섯 번째 아뢰기를,
"하교할 때마다 이처럼 차마 듣지 못하겠으니 신이 더욱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두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너무나 애가 타 어쩔 줄을 모른 나머지 신이 죽을 죄를 지어 다시 말씀드릴 일이 없습니다."
하니, 승전색으로 하여금 하교하기를,
"자기의 아들로 하여금 차가운 땅에 오래도록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은 비록 불가한 것 같으나, 자신의 아비로 하여금 이처럼 곤욕을 치르고 신경을 쓰게 하니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빨리 들어가도록 하라."
하고, 또 유복명에게 하교하기를,
"그의 군부로 하여금 이처럼 신경을 쓰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경들은 왜 왕세자 앞에 가서 청하지 않는단 말인가? 즉시 궁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전유하라."
하고 또 정원에 하교하기를,
"차마 듣지 못할 하교라고 하면서 아직까지도 오래 머물러 있으니 효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돌아가서 상소를 올리면 할 수 있는 도리가 있을 것이니, 곧바로 궁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전유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여섯 번째 아뢰기를,
"차마 받들어 따르지 못할 하교를 매양 이처럼 하시니, 비록 들어간다 하더라도 여기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이 더욱 죽을 죄를 지어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니, 승전색으로 하여금 하교하기를,
"좋은 도리로 하교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런단 말인가? 나 역시 옛날 하루에 세번이나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빨리 들어가 상소를 올리도록 하라."
하매, 왕세자가 일곱 번째 아뢰기를,
"매양 이처럼 하교하시니,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왕세자가 이어서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궁으로 들어갔다.
상중에 있는 신하 정우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비상한 조치를 내리셨다는 말을 들은 뒤로 감히 상중에 있다고 주저할 수 없어 짧은 상소로 정성의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손수 쓰신 비답 64자를 삼가 받았는데 읽으면서 한자 한자마다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서 더더욱 그지없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아! 신축년·임인년 이후로 온갖 방법으로 핍박하고 동요하였으나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천운이었습니다. 효경(梟獍)의 잔당과 괴수의 남은 종자들 중에 모양은 같으나 마음은 달리 먹은 자가 어떻게 꼭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해가 하늘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왕의 기강이 뚜렷하니, 오직 형벌의 정사를 닦아 밝히고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내리신 봉서와 전후 전교를 빨리 도로 거두시고 정전으로 돌아가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의 정성을 내가 알고 있는데 또 경의 상소를 보니, 매우 위로가 된다. 그러나 소자의 마음을 조금만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중도 부처된 죄인 김약로·이종성·이천보·김상로 등이 상소하여 빨리 봉서를 회수하고 곧바로 어가를 돌릴 것을 청하였으며, 경기 감사 김상익(金尙翼)이 도사·수령·찰방 등과 상소하여 어가를 돌릴 것을 청하였고, 검열 이명식(李明植)이 차자로 앞서 내린 명을 반한할 것을 청하였으며, 전 첨정 서종협(徐宗浹) 등과 전 참지 어유룡(魚有龍) 등과 전 대사헌 권혁(權爀) 등과 급제한 유언술(兪彦述) 등과 전 지평 조종보(趙宗溥) 등과 전 첨정 이형진(李衡鎭) 등과 전 도정 구수훈(具樹勳) 등과 전 정 안윤복(安允福) 등과 도총 경력 유광택(柳光宅) 등과 전 부사 허반(許槃) 등이 상소하여 어가를 돌릴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살펴보지 않았다. 관학 생원 이언중(李彦中) 등이 다시 상소하여 어가를 돌릴 것을 청하였는데, 살펴보지 않았다. 전 전의감 정 김두춘(金斗春) 등과 교서관 창준(校書館唱準) 김익령(金益齡) 등과 의관 김이형(金履亨) 등과 습독관 임익흥(林益興) 등과 주학 교수(籌學敎授) 김인령(金麟齡) 등과 태학 전복 김창진(金昌珍) 등과 금위영 기사 이서찬(李瑞贊) 등과 악사 황세대(黃世大) 등과 시강원 서리 안세경(安世卿) 등과 종친부 서리 김상택(金尙澤) 등과 사헌부 서리 신억량(申億亮) 등과 비변사 서리 최상억(崔尙億) 등과 승정원 사령 박관흥(朴寬興) 등과 의금부 서리 김정환(金挺桓) 등과 사간원 서리 김진흥(金振興) 등과 입전(立廛) 시민 박동원(朴東元) 등과 미전(米廛) 시민 천세장(千世章) 등과 하미전(下米廛) 시민 최수강(崔壽堈) 등과 잡곡전(雜穀廛) 시민 김여강(金麗江) 등과 은전(銀廛) 시민 이태방(李泰芳) 등과 백목전(白木廛) 시민 김상벽(金尙璧) 등과 면주전(綿紬廛) 시민 홍진억(洪震億) 등과 청포전(靑布廛) 시민 김익정(金益精) 등과 저포전(苧布廛) 시민 유만세(兪萬世) 등과 포전(布廛) 시민 하두창(河斗昌) 등과 진사전(眞絲廛) 시민 정상린(鄭祥麟) 등과 의전(衣廛) 시민 이지번(李枝蕃) 등과 지전(紙廛) 시민 강세구(康世衢) 등과 상전(床廛) 시민 최대현(崔大賢) 등과 발리전(鉢里廛) 시민 김복겸(金福謙) 등과 염상전(鹽床廛) 시민 방세태(方世泰) 등과 화피전(樺皮廛) 시민 박시호(朴時豪) 등과 외어물전(外魚物廛) 시민 이상명(李尙明) 등과 생선전(生鮮廛) 시민 김세문(金世文) 등과 내어물전(內魚物廛) 시민 김중해(金重海) 등과 혜전(鞋廛) 시민 박정창(朴廷昌) 등이 상소하여 어가를 돌릴것을 청하였는데, 모두에게 비답하기를,
"어제 이미 하유하였는데, 오늘 무엇을 하유할 것이 있겠는가? 30년 동안 백성의 임금 노릇을 하였지만 백성에게 온전한 혜택도 입히지 못하였는데, 오늘 우리 백성을 저버리게 되었구나."
하였다.
영부사 김재로가 경재들을 거느리고 대왕 대비전의 합문 밖에 나아가 애가 타고 몸이 떨려 마음을 둘 데가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와서 호소한다는 뜻으로 아뢰자, 대왕 대비전에서 승전색으로 하여금 언서로 답하였다. 김재로 등이 창의궁으로 되돌아와 아뢰기를,
"아침에 동조에 가서 호소하겠다는 뜻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궐에 나아가 아뢰었더니, 해가 진 뒤에 비로소 비답을 내렸기 때문에 지금에야 돌아와 동조께서 답한 하교를 말씀드리고자 감히 이렇게 청대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동조에서 언서로 비답한 것을 들여오라."
하였다. 조금 있다가 임금이 대문 안에서 나와 말하기를,
"내가 여러 신하들에게 ‘자전께 허락을 받았다.’고 말하였었는데, 지금 자전의 하교에는 그때에 허락을 하였다는 뜻이 없다. 자전께서 이미 공상을 거두겠다고 하교하였다면 내 마땅히 궁으로 돌아갈 터인데, 지금 자전의 하교를 거짓으로 꾸민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영부사는 나를 위해 이 무함을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다시 대비전 합문 밖으로 나아가 이로써 아뢴 다음 앞서 내렸던 비답을 올렸다. 그러자 대비전에서 승전색으로 하여금 하교하기를,
"거둥하였을 때에 지나치게 간청한 바람에 기운을 손상할까 염려한 나머지 만류하지 못하였다. 그날 주상이 현기증이 특히 심하였고, 나 역시 현기증과 담기가 있어서 마음 속으로 고민하다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허락한 것처럼 하였는데, 지금에야 생각이 난다. 오늘에 이르러 바라는 것은 주상 뿐인데 의외로 이같은 데에 이르렀다. 궁으로 돌아가지 않기에 답답해 하다가 바야흐로 봉서(封書)를 쓰고 있는데, 내 역시 창의궁으로 거둥하고 싶다."
하였다. 또 승전색으로 하여금 하교하기를,
"주상이 거둥하였을 때에 나의 침식(寢食)하는 것을 염려하시었는데 나도 어찌 이를 생각하지 않겠소?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주상이 이미 수라를 들지 않으니 내 어찌 차마 들 수가 있겠소? 세자가 이제 막 홍진을 치르고 나서 침식을 전폐하고 계속 찬 곳에 있으니 답답하고 민망하오. 음식물을 가지고 권하고 있으나 내 역시 어찌 차마 들 수 있겠소? 전혀 먹지 않고 계시니, 답답하고 염려됨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소."
하였다. 대체로 앞서 내린 언교(諺敎) 가운데 ‘그날 주상이 와서 말할 때에 내 듣기만 하였을 뿐이다.’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이 부문을 고치고자 한 것이다. 임금이 뜰에서 일산과 자리를 설치하지 않고 눈 속에 그냥 서 있다가, 김재로가 고쳐서 내린 비답을 가지고 들어오자, 임금이 드디어 여러 관서에 예비하라 명하고 궁 안으로 들어가니, 금루관이 비로소 시각을 알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보연(步輦)을 타고 궁으로 돌아가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올 때에 진전에 고하였으니, 지금 이유없이 돌아갈 수는 없다. 내시는 달려 가서 사유를 구두로 고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모두 한 자급과 반의 급수로 다투고 있으니, 정말 비루하다. 오직 김진상(金鎭商)과 윤심형(尹心衡)만 청렴한 지조로 뜻을 지키고 있으니, 내 실로 부끄럽다."
하고, 고 봉조하 최규서(崔奎瑞)의 집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김진상에게는 지사를 제수하고, 윤심형에게는 동지중추를 제수하여 세상을 격려하라고 명하였다. 전일에 대신·중신·승지·유신을 중도 부처하거나 귀양보내라는 명을 취소하고 각자의 관직을 그대로 잉임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궁으로 돌아오다가 육조(六曹)의 앞 길에 이르자, 관학 유생 이언중 등이 맞이하니, 임금이 불러들여 위로하고 타일렀다. 이날 이언중이 재차 소를 올렸으나 비답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언중이 비답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자전의 분부를 받들어 마지 못해 어가를 돌린다마는, 스스로 처음 생각했던 마음을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부끄럽다."
하고, 승지로 하여금 비답을 읽어 여러 유생들을 하유하도록 하였다. 단휘문(端暉門) 밖에 이르러 여에서 내렸다. 그리고 잠시 전의 비답 가운데 말을 고쳐 내려주라고 대비전에 청하였는데, 승전색이 잘 알아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즉시 들어갔다가 조금 후에 다시 나왔는데, 언서의 비답을 번역해 써서 내리자 곧 궁으로 돌아갔다.
12월 18일 갑진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대소 신료와 군인·백성들에게 하유하였는데, 글에 이르기를,
"아! 예로부터 제왕들은 비바람에 시달리고, 몸소 전쟁[矢石]을 무릅써 가며 창업하거나 중흥한 자가 있었는데 매우 어렵고도 어렵다 하겠다. 그렇지만 어찌 나처럼 어려운 때를 만나 마음 속에 가득히 아픔을 안고 있기야 하였겠는가? 남면(南面)하여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이 즐겁지 않은게 바로 나의 고심이다. 한 번 뜻을 이루고자 하였는데 어찌 그냥 말 수 있겠는가? 아! 부자와 형제는 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똑같은 것이다. 이미 선왕이 승하하실 때에 따라 죽지 못하였고 또 무신년327) 에도 죽지 못하였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다. 아! 조정의 분위기가 안정되었더라면 성상께서 건강하셨을 것이니 어찌 병이 덮쳤겠으며, 뭇 신료들이 함께 공경하고 협력하였더라면 나라가 편안하였을 것이니, 어찌 신축년·임인년에 당인(黨人)들이 금고를 당하였겠는가? 이 때문에 세도가 날이 갈수록 더욱 어수선해지고 우리 백성이 날마다 더더욱 곤궁해졌는데, 근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아! 즉위한 지 28년이 되었으나 조정에 정사를 제대로 거행하지 못하였고 백성에게 은택을 제대로 입히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남면하여 임금 노릇을 하는 것을 즐거워할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부끄러울 것인데, 더구나 이처럼 마음이 괴롭고 이처럼 마음이 아프며 이와 같은 때를 당한데다가 또 갈수록 노쇠해져서 기억한 열 가지 중에 아홉 가지나 잃어버리고 아침에 들은 것도 저녁이면 잊어버리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6순에 가까워져서 경자년328) 을 추억해 보니, 갑절이나 마음이 아프다.
지난번 하례를 드리겠다고 청하는 여러 사람들의 뜻을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송현궁으로 갔었다. 그러나 자전께서 간곡히 만류하시므로 마지못해 돌아왔다. 괴로운 마음과 지극한 아픔이 이로 인하여 더더욱 절실하다. 그러므로 정사를 보는 가운데 한결같이 옛날을 따라 거행하라고 명하자, 여러 신하들이 시끄럽게 일어나 우리 자전의 마음을 움직여 30년 동안 울적하게 맺혀 있던 마음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다. 이때가 정말 기회라고 여겨져 먼저 자전에게 아뢰고 또 진전에 아뢴 다음 옛날의 집으로 돌아가 꼭 나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런데 신료들이 뜰에 모이고 서민들이 문을 지키면서 나를 3일 동안이나 괴롭혔다. 나같은 부덕하고 무능한 사람이 어찌하여 이러한 대우를 받는단 말인가? 볼 낯이 없고 마음이 더욱 부끄럽다. 군인과 백성의 상소를 보고 부로들의 소리를 들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는 나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옛날 선왕께서 베푸신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이 백성들의 피부를 적시었기 때문이다. 아!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하는데 나는 30년 동안이나 정사를 하면서 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히지 못한 채 하루아침에 백성들을 저버렸으므로 마음에 슬피 느껴져 그런한 것이다. 그리고 아비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는 것은 곧 오륜 중에 하나인데도 원량이 간곡히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대신을 공경하고 예로 신하를 부려야 한다는 말이 성인의 가르침 속에 있는데도 엄동 설한에 하루종일 추운 데에 있으면서 응답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무슨 마음에서이겠는가? 이는 마음이 괴로운 것이고 이는 지극한 아픔인 것이다. 차라리 어질지 않고 자애롭지 않으며 예절이 없을지언정 결코 효성스럽지 못하고 공경스럽지 못하였던 마음을 저버리지는 않겠다. 아! 여러 신하들이 이미 나를 이해해주지 않고 우리 자전에게 가서 호소하자, 자전의 마음이 지나치게 움직여 망극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다른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여를 타지 않은 채 돌아와 눈물을 흘리며 자전의 뜻을 받들어 따랐다. 이 세상을 우러러 보고 굽어볼 때 이 사람은 왜 이런단 말인가? 앞으로 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게 생겼다. 자전의 분부를 비록 받들어 따르지마는, 후일에 무슨 얼굴로 돌아가 뵐 것이며 또한 무슨 면목으로 우리 형님을 뵐 수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나도 모르게 목을 놓아 서럽게 운다. 아! 금년의 일은 옛날의 일과 비할 바가 아니니, 정말 다시 즉위하였다고 하겠다. 임금의 거취를 모호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문에 나와 마음을 털어 유시하노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경묘에게 질환이 있었으므로 즉위한 초년에 대신 김창집(金昌集) 등이 건저(建儲)를 청하였는데, 우리 전하께서 임금의 아우로 이극(貳極)의 자리에 올랐고 또 대리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대체로 질환은 정사를 보는 데 구애가 되고 또 후사를 이을 기대도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삼종(三宗)329) 의 핏줄이 다만 우리 전하 한 사람 밖에 없었고 보면 처지와 사리에 합당하고, 천리와 인정으로 보아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바로 이른바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백세를 기다려 보아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한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오직 저 일종의 흉역들이 은밀히 환관과 결탁하여 위복(威福)을 자행하며 우리 전하께서 대리 청정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무함의 옥사를 얽어 만든 다음 무자비하게 형벌을 가하여 이리저리 얽어 꼭 우리 전하에게까지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신명의 도움과 자전의 옹호에 힘입어 오늘날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천운이었다. 그러다가 갑진년에 당저(當宁)가 된 뒤로 그들을 엄하게 징계하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형벌이 너무나 관대하였다. 이에 난적들이 더더욱 거리낀 바가 없어 이천해(李天海) 심유현(沈維賢)의 무리가 망측하고 흉악스런 말을 만들어 내어 무신년의 변란을 빚어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의 괴수가 도리어 수상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안으로는 비호하고 밖으로는 사면하는 바람에 배를 삼킬 만한 고기가 그물을 벗어나게 되어 일종의 부리가 면면히 끊어지지 않고 의발(衣鉢)을 전수해 받았다. 그리하여 신축년에 건저하려는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의리를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게 함으로 인해 한 나라 안에 충신과 역적이 가려지지 않았고 시비가 뒤섞이어 점차로 세도가 낮아지고 윤리가 무너지게 되었다. 우리 전하께서 전후로 하교하신 말씀이 지성스럽고 간곡하였으며 명백하고 간절하였건만 오직 저 무리들은 못 들은 체하면서 험악한 말버릇을 고치지 않았으니, 이게 어찌 세도와 인심의 큰 괴변이 아니겠는가? 이는 참으로 왕법(王法)이 거행되지 않고 형정이 밝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당습이 더욱 고질화되고 흉측한 무리들의 마음을 교화시키기 어렵게 된 것이다. 아! 이러한 의리는 팽팽하게 뻗쳐 있어 깨뜨리기 어려운 것인데도 임금의 마음에는 혐의로 여겨 충신과 역적을 분명히 말함으로써 시비가 저절로 정해지도록 하려 하지 않고, 구구하게 저 흉측한 역적의 잔당들에게 손을 빌려 공론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년에 누차 국안(局案)을 번복하였으나 저들의 의심만 더 사게 되었고 전후로 비상한 조치를 하였으나 성상의 덕에 누만 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일에 이르러서는 곧 한나라·당나라 이후 중간쯤 가는 임금도 하지 않는 일인데도 성명이 하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6책 78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472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327]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328]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註 329] 삼종(三宗) : 효종·현종·숙종.
사신은 말한다. "경묘에게 질환이 있었으므로 즉위한 초년에 대신 김창집(金昌集) 등이 건저(建儲)를 청하였는데, 우리 전하께서 임금의 아우로 이극(貳極)의 자리에 올랐고 또 대리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대체로 질환은 정사를 보는 데 구애가 되고 또 후사를 이을 기대도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삼종(三宗)329) 의 핏줄이 다만 우리 전하 한 사람 밖에 없었고 보면 처지와 사리에 합당하고, 천리와 인정으로 보아 맞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바로 이른바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고 백세를 기다려 보아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한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오직 저 일종의 흉역들이 은밀히 환관과 결탁하여 위복(威福)을 자행하며 우리 전하께서 대리 청정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무함의 옥사를 얽어 만든 다음 무자비하게 형벌을 가하여 이리저리 얽어 꼭 우리 전하에게까지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신명의 도움과 자전의 옹호에 힘입어 오늘날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천운이었다. 그러다가 갑진년에 당저(當宁)가 된 뒤로 그들을 엄하게 징계하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형벌이 너무나 관대하였다. 이에 난적들이 더더욱 거리낀 바가 없어 이천해(李天海) 심유현(沈維賢)의 무리가 망측하고 흉악스런 말을 만들어 내어 무신년의 변란을 빚어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의 괴수가 도리어 수상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안으로는 비호하고 밖으로는 사면하는 바람에 배를 삼킬 만한 고기가 그물을 벗어나게 되어 일종의 부리가 면면히 끊어지지 않고 의발(衣鉢)을 전수해 받았다. 그리하여 신축년에 건저하려는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의리를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게 함으로 인해 한 나라 안에 충신과 역적이 가려지지 않았고 시비가 뒤섞이어 점차로 세도가 낮아지고 윤리가 무너지게 되었다. 우리 전하께서 전후로 하교하신 말씀이 지성스럽고 간곡하였으며 명백하고 간절하였건만 오직 저 무리들은 못 들은 체하면서 험악한 말버릇을 고치지 않았으니, 이게 어찌 세도와 인심의 큰 괴변이 아니겠는가? 이는 참으로 왕법(王法)이 거행되지 않고 형정이 밝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당습이 더욱 고질화되고 흉측한 무리들의 마음을 교화시키기 어렵게 된 것이다. 아! 이러한 의리는 팽팽하게 뻗쳐 있어 깨뜨리기 어려운 것인데도 임금의 마음에는 혐의로 여겨 충신과 역적을 분명히 말함으로써 시비가 저절로 정해지도록 하려 하지 않고, 구구하게 저 흉측한 역적의 잔당들에게 손을 빌려 공론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중년에 누차 국안(局案)을 번복하였으나 저들의 의심만 더 사게 되었고 전후로 비상한 조치를 하였으나 성상의 덕에 누만 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일에 이르러서는 곧 한나라·당나라 이후 중간쯤 가는 임금도 하지 않는 일인데도 성명이 하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승지에게 명하여 옥으로 달려가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방면하라고 하였다.
예조에서 전에 내린 전교를 반한(反汗)하였다고 하여 하례를 드릴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9일 을사
임금이 약방의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동궁이 창의궁으로 갈 때에 의장을 갖추지 않고 부어교(鮒魚橋)에서 여(輿)를 물리치고 도보로 갔으니, 변에 대처하는 절차를 극진하게 하였습니다."
하자, 제조 박문수가 말하기를,
"돈화문 밖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엎드려 대죄하였으며, 경명문(景明門) 밖에서는 장막을 모두 철거하고 추운 데에 앉아 음식을 들지 않고 연일 눈물을 흘리면서 경재들을 만날 때마다 선처할 수 있는 계책을 묻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러하였는가, 동궁이 그랬단 말인가?"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화문에 나아가 시민과 공인(貢人)들을 불러 물어보아야 하겠다."
하니,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날씨가 이처럼 추우니, 뒷날에 불러 물어 보아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뒷날까지 기다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정부 육조, 한성부의 당상·낭청과 오부(五部)의 관원은 모두 나와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선화문에 나아가 공인과 시민을 불러 그들의 폐막을 물으니 공인과 시민들이 각각 그들이 종사하는 업종을 들어 대답하였다. 다시 희정당으로 나아가니 여러 신하들이 다시 입시하였다. 속미음(粟米飮)을 들었다.
12월 20일 병오
이지억(李之億)을 승지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윤상임(尹尙任)을 대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사간으로, 이민곤(李敏坤)을 집의로, 송능상(宋能相)·윤방(尹坊)을 장령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헌납으로, 이성경(李星慶)·심관(沈鑧)을 지평으로, 이기덕(李基德)·이인원(李仁源)을 정언으로, 이방좌(李邦佐)를 충청 병사로, 성천주(成天柱)를 보덕으로, 조중회(趙重晦)를 필선으로, 윤득양(尹得養)을 사서로, 우홍규(禹弘圭)를 황해 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금주(禁酒)를 내린 뒤로 술집이라는 이름만 붙어 있으면 추조(秋曹)와 한성부의 이속(吏屬)들이 별도로 금란방(禁亂房)을 설치하여 날마다 돈을 징수하며 기존의 법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타 속전(贖錢)을 남징(濫徵)하는 폐단은 이루 다 낱낱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특별히 두 아문에 신칙하여 이 폐단을 통렬히 개혁하도록 하되, 발각되는 대로 죄를 논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이창의가 말하기를,
"본조의 문낭청(文郞廳)은 시종신(侍從臣)에 구애하지 말고 특별히 가려 차출하되, 6개월 전에는 절대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자, 호조 판서 조영국도 지부(地部)의 문낭청 역시 추조(秋曹)의 예(例)처럼 하도록 신칙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12월 21일 정미
경상도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12월 22일 무신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생원 이세희(李世熙)가 상서하기를,
"삼가 도성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선화문에 《시경》의 육아편(蓼莪篇)을 강하신 것과 육상묘에서 합문을 닫으신 일은 성상의 뜻한 바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너나 없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이 이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효성이야말로 지극하다. 순임금은 50이 되도록 부모를 사모하였는데 우리 임금은 60이 되도록 부모를 사모하셨으니, 우리 임금님의 효성은 순임금의 효성과 같다. 그러나 머리를 싸매고 매우 마음 아파하며 이처럼 비상한 거조를 취하신 것은 필시 분수에 미진한 점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해가 비록 높지마는 좁은 대롱으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근일에 취하였던 비상한 거조가 과연 도성 사람들이 말한……의 이유에서 나왔다고 할 경우, 이는 성상의 효도를 하루라도 펴지 못하면 종사에 하루의 근심이 있는 것이고 이틀을 펴지 못하면 종사에 이틀의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신민들의 망극한 심정은 잠시 놓아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저하(邸下)와 같은 큰 효성으로 어찌 여러 모로 그 마음을 다 써 보려고 생각하지 아니하셨겠습니까?
신이 사첩(史牒)을 상고해 보니, 삼대(三代) 이전은 이미 상고할 수 없지만 삼대 이후로는 어느 제왕이나 사가의 어버이에게 융성히 해 드리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송나라 인종(仁宗)은 사실 역사에서 칭한 삼대 이후의 요순 같은 임금인데, 모두 사가의 어버이를 추숭하는 전례(典禮)를 거행하였으며, 한나라 소제(昭帝)와 명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도 모두 거행하였습니다. 이를 거행하지 않았던 임금은 오직 한나라 장제(章帝) 한 사람 뿐이었고 화제(和帝)는 또 거행하였습니다. 당시 이름난 신하와 보필의 재상인 가의(賈誼)·장석지(張釋之)·한기(韓琦)·부필(富弼)·장안세(張安世)·개관요(蓋寬饒)·반고(班固)·장거정(張居正)·이춘방(李春芳) 같은 여러 사람들도 이 일에 대해 모두 이의가 없었으며, 사평(史評)이나 선유들의 의논 역시 역대 제왕들이 한 일에 대해 비난한 글자가 하나도 없고 보면 성현의 은미한 뜻을 대체로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이는 본디 의리에 거리낄 바가 없고 예경(禮經)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성상께서 참아오며 망설이다가 오늘날에 이른 것은, 대조(大朝)께서는 동조(東朝)의 마음을 체득하고 저하께서는 성상의 마음을 체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삼공을 맞이하여 의견을 물어본 다음 백관을 거느리고 동조에 말씀을 드리되, 정성을 쌓아 감동케 하여 기필코 윤허를 받으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이 일은 본디 예경에 위배되지 않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사실 종사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자전께서는 성실하고 깊은 자품으로 고전에 대해서 통달하시어 계시므로 필시 옛날 명철한 임금들은 이를 거행하지 않은 분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명나라 인성(仁聖) 진 태후(陳太后)는 만력(萬曆)의 초기에 수렴 청정하면서 친히 그 전례는 거행하도록 윤허하였는데, 이는 또 성모(聖母)께서 본받을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 저하의 오늘날 처해 있는 도리에 있어서 대조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고 종사의 걱정을 진정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조금 의리에 구애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돌아볼 겨를이 없이 하셔야 됩니다. 더구나 이 전례는 사첩에 뚜렷하고 또 명나라에서 융성히 높였던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일에는 가볍고 무거운 차이가 있으며 도에는 통상적인 것과 임시 변통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오직 저하께서 효성을 다하여 동조의 자비로운 뜻을 감동시키는 데 있는 것이지, 반드시 대조의 명을 기다려 거행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이른바 뜻을 계승하고 뜻에 앞서 알아 행하는 것이니, 이는 이른바 형체나 소리가 없어도 보고 듣는다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사람이 미미하다고 하여 소홀히 여기시거나 일이 크다고 하여 어렵게 여기시지 말으시고 빨리 신의 상소를 아래에 내려 널리 조정의 의논을 물어 마무리하소서. 아! 어버이를 높이려는 마음은 서민들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하들 중에 누가 성상의 괴로운 마음을 모르겠으며 누가 미미한 신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우리 동방의 풍속은 명분과 의리를 실정보다 지나치게 지켜서 임금이 아픔을 안고 있고 종사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였는데도 앞뒤로 눈치를 살피면서 서로 보고 말하려다 말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날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입을 열어 이 일에 대해 설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신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신은 비록 보잘것은 없지만 종적은 선원(璿源)의 지파(支派)에 매여 있습니다. 지난번 주상께서 홍화문에 나오신 날 망령되이 말씀을 드려 대조의 은혜를 받았는데, 종사와 나라에 생각이 달려 한밤중에도 걱정하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조의 마음을 편안히 해 드리고 저하의 걱정을 풀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한 가지 도리에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하였다. 글이 정원에 도착하자 왕세자에게 청대하였는데, 낙선당에서 입대하였다. 도승지 유 복명이 말하기를,
"이세희의 글은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 언급하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감히 성상의 뜻을 억측하여 글로 쓴단 말입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지금 처분을 내리면 좋겠으나 매우 중하고 어려운 일이니, 어찌 여쭙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승지들이 청대하니, 임금이 낙선당에 나아가 소견하였다. 이세희가 소를 올렸다고 고하니, 임금이 읽으라고 명하였다. 동조의 마음을 체득한다는 대목과 송나라 인종 등의 말에 이르자, 임금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기를,
"이는 유 태후(劉太后)330) 의 고사이다. 질타할 역적보다 더 심한 것인데, 이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욕하는 것이다."
하고, 해부(該府)에 명하여 친국(親鞠)을 거행한다고 하였다.
12월 23일 기유
이일제(李日躋)를 동의금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지의금으로 제수하였다.
임금이 내사복에서 이세희를 친국하였다. 이세희를 문초하니, 이세희가 공초하기를,
"망령되이 성상의 마음을 헤아려 이 글을 지어 올렸는데, 《송감(宋鑑)》 등의 서적을 허반(許槃)의 집에서 상고해 보았습니다. 신이 포천에서 들어와 허반을 만나보았는데, 허반이 말하기를, ‘지난번 주상께서 《시경》의 육아편을 강하신 것은 효성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소를 올릴 만하다.’ 하였습니다. 허반의 오촌 숙 허진(許溍)이 상소에 연명하려고 하다가 그의 아비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연명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형 이시희(李時熙)가 이관후(李觀厚)의 옥사에 연루되어 들어갔는데, 이러한 소를 올리면 신의 형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망령되이 성상의 뜻을 억측하였으니, 그 죄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형문을 한 차례 가하였다. 허반을 문초하니, 허반이 공초하기를,
"《송사(宋史)》와 《명사(明史)》는 신의 집에 있습니다. 이세희가 이를 상고해 보았는데, 신은 권하거나 말린 일이 없었습니다. ‘육아편을 강하게 한 데에 성상의 뜻이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느냐?’고 말한 것은, 대체로 신이 일찍이 고서를 보았을 때 제왕들이 이렇게 한 일이 많았으며 보통 사람도 모두 어버이를 높혀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망령되이 수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선비로서 주장할 수 있는 제일 가는 의리가 아니고 조정의 큰 시비거리이므로 한낱 하찮은 선비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 극력 만류하였습니다."
하였는데, 형문을 한 차례 가하였다. 허진을 문초하자, 허진이 공초하기를,
"신이 처음에는 이세희의 상소에 연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아비가 만류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빼고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다시 허반을 문초하니, 허반이 공초하기를,
"애당초 이세희의 상소를 준엄하게 배척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이 죽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신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만약 존숭(尊崇)하는 거조가 있을 경우에는 상소를 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하찮은 일개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세희를 금지하지 못한 죄는 죽더라도 달갑게 받겠습니다."
하였는데, 형벌을 한 차례 가하였다. 다시 이세희를 문초하니, 이세희가 앞서 공초한 대로 공초하였다. 이세희는 사형을 감하여 섬으로 귀양보내고 허반은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며 허진은 정상을 참작하여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이시희는, 지난 해에 범한 죄가 이미 망측(罔測)하였는데, 사면으로 인하여 방면되었으니,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런데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지휘하여 소를 올리게 하였은 즉 더더욱 놀라운 일이니,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장령 윤방(尹坊)이 말하기를,
"이세희를 만약 살려 둔다면 들뜨고 야박한 세도를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방의 간쟁한 말이 옳다."
하였다.
장령 윤방이 소조(小朝)에 청대하니, 왕세자가 소견하였다. 윤방이 말하기를,
"오늘은 재계하는 날이므로 달사(達辭)를 올릴 수 없기 때문에 구대(求對)하여 소회를 우러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국청의 죄인 이세희가 올린 글의 내용이 망령되이 성상의 뜻을 억측하여 음흉하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은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범하였고 고증으로 인용한 대목도 매우 흉악하였으니, 그를 천지 사이에 둘 수 없습니다. 대조께 여쭈어서 섬으로 귀양보내라고 한 명을 빨리 회수하고 통쾌히 왕법을 바루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대조께서 이미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 처분하셨으니, 다시 여쭙기는 어렵다."
하였다.
12월 25일 신해
봉상시에서 아뢰기를,
"동서 적전(東西籍田)은 곧 자성(粢盛)이 생산되는 땅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제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전지에 율무를 심었습니다. 지금은 율무로 올리는 수량은 점차로 증가되고 있으므로 제사에 쓰는 곡식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올해는 원래 납부하는 곡식의 수량에서 부족한 것이 13석이나 됩니다. 지부(地部)로 하여금 별도로 획급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지평 이성경(李星慶)과 정언 이인원(李仁源) 등이 상서하여 이세희에게 통쾌히 왕법을 바루고 이시희·허반·허진은 외딴 섬으로 귀양보낼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이 일은 대조께서 이미 처분하였는데 어떻게 다시 여쭐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간 남태혁(南泰赫)이 상서하여 청하기를,
"이세희·이시희·허반 등에게 참착해 조치한 명을 도로 거두고 통쾌히 왕법을 바루소서. 그리고 허반의 형 허채(許采)와 아우 허휘(許彙)를 조정의 문적에서 영원히 삭제시키고 향리로 내쫓으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께서 이미 처분을 내렸는데 어떻게 다시 여쭈어 보겠는가? 말단에 말한 건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도제조 김약로가 말하기를,
"대간이 올린 글에 허채와 허휘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내쫓자고 청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직(坐直) 승지를 불러 두 건의 일에 대해 묻기를,
"이 의논은 어떤 대간이 제기하였는가?"
하자, 승지 이지억이 아뢰기를,
"남태혁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대간이 청하는 것은 왕정에 흠이 있다는 이유로 모두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여러 대간들이 대각으로 가려 하지 않고 관례에 따라 글을 올렸으니, 먼저 체차한 다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6일 임자
정언 이기덕(李基德)이 상서하여 이세희에게 나라의 법을 통쾌히 시행할 것을 청하니, 하령하기를,
"지금 이 글을 보니, 관례에 따라 글을 올린 대각의 신하들과 다름이 없다. 어제 대조께서 처분을 내린 뒤이므로 관례에 따라 답할 수 없다. 그의 글을 도로 내주고 먼저 체차한 다음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7일 계축
함경 감사 황정(黃晸)이 죽었다.
12월 28일 갑인
이후(李)를 우윤으로, 남태경(南泰慶)·이응협(李應協)을 승지로 삼았다.
경기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들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하령하였다.
임금이 친히 태묘와 각능과 전(殿)·궁(宮)에 정조제(正朝祭) 때 쓸 향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전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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