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9권, 영조 29년 1753년 1월

싸라리리 2025. 10. 3. 11:51
반응형

1월 1일 정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나서 화평 옹주(和平翁主)·화완 옹주(和緩翁主) 두 옹주의 집을 두루 들렀다. 태묘의 문을 나올 때 이정 당상(釐正堂上) 박문수(朴文秀)를 입시하도록 명하여, 공물 아문(貢物衙門)에서 차제(差祭)를 공인(貢人)으로 하여금 대가를 지급하고 면하게 하기를 도모하는 폐단에 대해 계칙하였다. 그리고 2월 초8일에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춘당대(春塘臺)에서 시사(試士)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작년 초3일에 구저(舊邸)의 군병들이 추운 곳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이번 연초에도 또한 수가(隨駕)하였으니, 마땅히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기 위해 시재(試才)해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연초에 권농(勸農)하는 전교는 경묘(景廟)께서 대리(代理)한 뒤로 이런 등의 일은 동궁이 모두 했었다."
하였다.

 

1월 2일 무오

김이만(金履萬)을 사간으로, 이계창(李啓昌)을 장령으로, 서유량(徐有良)·서명천(徐命天)을 정언으로, 윤득우(尹得雨)를 지평으로, 홍봉한(洪鳳漢)을 예조 판서로, 박문수(朴文秀)를 판돈녕으로, 황인검(黃仁儉)을 문학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예조 참판으로, 이종백(李宗白)을 호조 참판으로, 윤동형(尹東衡)을 판윤으로, 송명흠(宋明欽)을 군자감 정으로, 홍중효(洪重孝)를 교리로, 조숙(趙)을 수찬으로 삼았다.

 

1월 5일 신유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과 비국 당상도 함께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육순(六旬)을 애(艾)라 하는가?"
하니,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50세를 애라 하고, 60세를 기(耆)라고 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는 경 등이 기(耆)로써 나를 대우해야 한다."
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조참 단자(朝參單子)를 도로 내리셨는데, 연초의 조참을 어찌하여 대조(大朝)께서 거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에는 정유년001)   이후 해마다 조참을 품고(稟告)했었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승지가 전례를 원용하여 다시 품고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추고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청정(聽政)한 뒤의 사전(祀典)은 모두 세자가 거행하게 되어 있으나, 이는 내가 비록 늙었어도 반드시 몸소 행하려고 한다. 그러나 조참에 이르러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교서(敎書)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영서(令書)로 이정(釐正)하도록 하라."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교서는 곧 옛날의 선마(宣麻)002)  인 것입니다. 대조께서 이미 사람들에게 벼슬을 제수하였는데 소조(小朝)께서 어떻게 선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도제조 김약로(金若魯)는 말하기를,
"동궁의 조참은 시민당(時敏堂)에서는 행할 수 있어도 정문(正門)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부사직(副司直) 이후(李)는 말하기를,
"조참은 임금이 정치를 발표하는 대정(大政)인 것입니다. 동궁께서 신료들을 접견할 적에는 ‘접(接)’ 자를 쓰고 ‘조(朝)’ 자를 쓸 수는 없으니, 접 자와 조 자는 그 뜻이 다릅니다."
하였다. 회령 부사 이언섭(李彦燮)을 잡아다 국문하고, 북병사(北兵使) 이경철(李景喆)은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회령에서의 개시(開市)003)   때 무늬 놓은 비단을 금법을 범하면서 매매했기 때문이었다. 금범을 범한 사람은 무지하여 함부로 범했다는 것으로 참작하여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양서(兩西)의 소미(小米)004)   가운데 균역청(均役廳)에 예속된 것은 이제 이미 폐지하였습니다. 청컨대 금년부터 시작하여 관서(關西)의 1천 5백 석(石), 해서(海西)의 1천 석을 기사년005)   품정(稟定)한 것에 의하여 돌려가면서 총융청(摠戎廳)과 강도(江都)의 군향(軍餉)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장산(長山) 이북의 각 고을의 세미(稅米)는 연교(筵敎)로 인하여 돈으로 만들어서 상납하게 하였습니다. 대저 이북 각 고을의 조운(漕運)은 험난한 나루를 경유하여야 하기 때문에 복선(覆船)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본조(本曹)에서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번번이 돈으로 만들게 하고 있습니다만, 한 도내(道內)의 산간 연해의 세전(稅錢)이 혹은 가볍기도 하고 혹은 무겁기도 하여 또한 일정치가 않습니다."
하고, 김상로는 말하기를,
"돈으로 내게 하는 것이 이미 백성을 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가벼운 쪽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의당 을축년006)  에 개정한 값을 그대로 정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정 당상(釐正堂上)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이정(釐正)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신에게 위임하고 있습니다만, 다만 평시 제조(平市提調)가 주관한 연후에야 일이 대부분 온편하고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원컨대 신이 맡고 있는 선공 제조(繕工提調)와 서로 바꾸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靈城)이 아니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환차(換差)하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황정(黃晸)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그가 춘방(春坊)의 옛 요속(僚屬)이었다는 것으로 조부(吊賻)와 제반 일을 넉넉한 쪽으로 따라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성수(聖壽)가 육순에 찼으므로 신민(臣民)들이 기뻐하고 있는데 대조께서 지나치게 겸손하시므로 실로 답답할 뿐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정례(情禮)를 펴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천청(天聽)을 감동시켜 돌릴 수 있겠는가?"
하자, 김약로가 말하기를,
"저하께서 문침(問寢)하고 시선(視膳)하시는 여가에 조용히 진백(陳白)하시면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갑자기 격뇌를 끼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1월 6일 임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접(召接)하였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대조의 보령(寶齡)이 육순에 찼는데도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한 예를 아직껏 펴지 못하여 답답합니다."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민망하고 박절한 마음이 극심하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이세희(李世熙)를 참작하여 처리한 것은 비록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양사(兩司)에서 당연히 쟁집(爭執)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간신(諫臣)들이 유독 구대(求對)하지 않았으니 크게 대간의 체통을 잃은 처사입니다. 전 사간 남태혁(南泰赫)을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윤상임(尹尙任), 장령 이계창(李啓昌) 등이 상달하기를,
"신 등이 삼사(三司)의 합달(合達)에 대해 정달(停達)하자는 의견 때문에 서간(書簡)을 발송하였습니다만 교리 채제공(蔡濟恭)은 아무런 가부가 없었습니다. 이는 모두 신 등이 경시당한 소치이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사퇴하지 말고 또한 물러가 여론을 기다리지도 말라."
하였다. 교리 채제공이 말하기를,
"신축년007)  ·임인년008)  에는 신의 나이 겨우 두어 살이었기 때문에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보지도 못하고 그뒤 단지 장주(章奏)만을 의거하여 알았을 뿐인데 갑(甲)과 을(乙)이 각기 소견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큰 안목과 큰 역량(力量)을 지닌 뒤에야 그 시비(是非)를 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안목과 역량이 모두 부족합니다. 이런 하찮은 소견을 가지고 혹은 갑을 따라 연달(連達)하기도 하고 혹은 을을 따라 정달(停達)하기도 한다면 하지 못하는 짓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니, 신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고집하고 있는 의견이 이미 이러하기 때문에 합달의 정달에 대해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하니, 윤상임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한 말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시비를 판단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므로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야 합니다. 세상에 어찌 시비를 판단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합달의 정달에 대해서는 이미 소견이 없으니 참섭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내 물러나왔다. 윤상임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창의궁(彰義宮)에 임행(臨幸)했을 때 내린 봉서(封書)를 왕명을 출납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멍하니 받아놓고서 하룻밤을 묵혔으니, 그날의 승지는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달한 바에 의거하게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삼사의 합달은 한쪽 사람들의 당습(黨習)에서 나온 기량(伎倆)인데 한 해가 지나도록 정지하지 않고 있으므로 공의(公議)가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음은 물론 전후의 성교(聖敎)가 간절하고도 비통했으니, 느낌이 없는 짐승이나 물고기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리 채제공은 참섭하고 싶지 않다고 핑계대면서 아무런 가부가 없었으니, 논사(論思)하고 언의(言議)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이와 같이 구차스럽게 시비에 대한 의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교리 채제공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달한 바에 의거하게 하였다. 이계창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소견이 합치되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윤상임이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으로 채제공의 파직을 청한 것은 잘못입니다. 윤상임은 마땅히 파직시켜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7일 계해

조명리(趙明履)·김치인(金致仁)·이규채(李奎采)·구윤명(具允明)을 승지에 제수하였다.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처음 정사(呈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는 답을 내렸다.

 

1월 8일 갑자

임금이 태묘의 삭제(朔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고나서 승지에게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동자(董子)009)  의 말에 ‘조정(朝廷)을 바루고 나서 백관을 바루고 또 만백성을 바룬다.’고 하였는데, 나는 나이 육순에 이르렀어도 이미 마음을 바루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을 바루고 백관을 바루고 만백성을 바루지 못하였으니, 밤중에 떠오르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된다. 지난 겨울 구저(舊邸)에서 자교(慈敎)를 받들어 다시 임어하게 되었는데 백성을 위하여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그 근본이 농사에 있는 것이다. 연초의 권농하는 교서는 청정(聽政)한 뒤에는 원량(元良)이 행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권권(惓惓)해 하는 마음에서 나도 모르게 스스로 행하게 되었다. 공자께서 예라는 것이 옥백(玉帛)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악(樂)이라는 것이 종고(鐘鼓)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말로 계칙하는 것은 말단이고 몸소 행하는 것이 근본인 것이다. 이미 한 가지 혜택도 나의 백성들에게 베풀지 못하였으므로 다시 농단(農壇)에서 다섯 번 쟁기를 잡는 친경(親耕)을 행하려 하니, 의조(儀曹)와 태상(太常)에서는 알고 있으라. 예는 사치스럽게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박하게 하면서 진심이 수반된 것이 낫다고 하였다. 기민(耆民)과 서민(庶民)을 위로하고 술을 베푸는 것을 정묘년010)  에 벼 베는 것을 살펴보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1월 10일 병인

예조에서 아뢰기를,
"친경(親耕)하시겠다는 일로 명을 내리셨으므로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기미년011)   친경 때는 경칩이 지난 뒤 해일(亥日)에 먼저 선농제(先農祭)를 거행하고 나서 이어 친경례를 행하였습니다. 오는 2월 13일은 곧 경칩이 지난 뒤의 해일이니, 그날 친제(親祭)한 뒤 친경하는 절차를 기미년의 예에 의거 마련하여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1월 11일 정묘

정언 서명천(徐命天)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합사(合辭)하는 대론(大論)은 이것이 관계되는 것이 어떠한 것입니까? 윤상임(尹尙任)은 윤연(尹㝚)·윤수(尹邃)의 지친으로 영호(營護)할 사심(私心)을 품고 이계창(李啓昌)을 모집하여 갑자기 정달(停達)하자는 서간을 발송했으니, 빨랐던 행동에서 그 심장(心腸)이 탄로되었습니다. 비록 옥서(玉署)012)  에서 연서(聯署)하려 하지 않아서 그 계획을 성취시키지 못했습니다만 그에게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의 당습에 의한 기량이고 공의가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등의 말은 더욱 무엄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 두 사람을 속히 찬출(竄黜)시키는 법전을 시행하여 제방(隄防)을 준엄하게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이제 이 상서를 살펴보건대 지난번 대조의 하교를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이미 매우 무엄한 것이다. 그런데다 더구나 관계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는 등의 말을 장주(章奏)에 멋대로 썼으니 더욱 한심스럽다. 그의 소장은 돌려주고 우선 체차시키라."
하였는데, 곧이어 고신(告身)의 율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김한철(金漢喆)을 대사간으로, 심익성(沈益聖)을 집의로, 이득종(李得宗)을 헌납으로, 정중기(鄭重器)를 지평으로, 이헌묵(李憲默)을 정언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좌빈객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홍문관 제학으로, 조재호(趙載浩)를 동춘추(同春秋)로, 김상성(金尙星)을 우부빈객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부교리로, 서효수(徐孝修)를 부수찬으로, 윤득재(尹得載)를 함경 감사로, 심성진(沈星鎭)·이익보(李益輔)를 영건 도감 당상(營建都監堂上)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 여러 능침(陵寢)의 비역(碑役)을 가까운 능에서부터 시작하여 장릉(章陵)·강릉(康陵)·태릉(泰陵)·효릉(孝陵)·희릉(禧陵)의 비역을 먼저 거행하라고 명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도감을 설치하였다.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두 번째 정사(呈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답을 내렸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니, 중국에서 돌아온 삼사신(三使臣)도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하순(下詢)하기를,
"청나라의 사정이 어떠하던가?"
하니, 정사(正使)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摙)이 대답하기를,
"근래 토목의 역사가 20리에 잇따라 있고, 황태후(皇太后)의 수연(壽宴)이 있은 뒤 13성(省)에서 모두 수륙재(水陸齋)013)  를 설행했다고 합니다."
하고, 서장관(書狀官) 유한소(兪漢蕭)는 말하기를,
"황제(皇帝)가 하루도 경사(京師)에 있으려고 하지 않아서 출입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쪽에는 마상(馬上)의 조정(朝廷)이라는 동요가 있을 정도입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만촌집(呂晩村集)》을 구입하여 가지고 오려 하였으나 저들이 팔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단지 시초(詩抄) 한 권만 구득하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전집(全集)은 아니지만 출처와 사적(事蹟)을 또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니,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1월 12일 무진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1월 13일 기사

밤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감쌌다.

 

1월 14일 경오

엄우(嚴瑀)를 승지로, 김광세(金光世)를 대사헌으로, 권상일(權相一)을 대사간으로, 정한규(鄭漢奎)를 집의로, 심발(沈墢)을 사간으로, 이홍직(李弘稷)을 헌납으로, 이성경(李星慶)·권세숙(權世橚)을 지평으로, 윤방(尹坊)·남학로(南鶴老)를 정언으로, 민백창(閔百昌)을 겸 문학으로, 이유수(李惟秀)를 겸 사서로, 채제공(蔡濟恭)을 교리로 삼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원손궁(元孫宮)의 장태사(藏胎使)는 청컨대 종2품으로 고쳐서 계하(啓下)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세 번째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답을 내렸다.

 

편집 당상(編輯堂上)과 공시 이정 당상(貢市釐正堂上)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공인(貢人)의 폐단에 대해 하순(下詢)하니, 판돈녕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응판관(應辦官)과 월령(月令)이 가장 공인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어 있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응판법(應辦法)은 대공(大貢)은 대과(大科)에 응하게 하고 소공(小貢)은 소과(小科)에 응하게 한 것으로 처음에는 시관(試官)의 상(床)에 세 그릇을 진배(進排)하게 하는 것에 불과했었습니다. 신유년014)  에 변통시킨 뒤로는 대과·소과를 막론하고 그 수량이 혹 4, 5백 냥(兩)에 이르러서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신은 이를 균일하게 하고 싶었습니다만, 박문수는 ‘차공(此貢)과 피공(彼貢)을 물론하고 합계하여 6, 7천 냥을 만들어 10년에 증광시(增廣試)를 설행하고 수년(數年)에 정시(庭試)를 설행할 때 가령 매년에 아무냥을 지급한다고 만들어 놓은 다음 매 1석(石)에 1승(升)씩을 거두면 좋을 것이다.’ 했습니다. 전부터 응판(應辦)은 으레 주장(主掌)하는 관원이 보태어서 정하여 왔으므로 비록 균일하게 정하려 해도 사세가 끝내 균일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신 등이 반복하여 상의한 결과 선혜청(宣惠廳)과 호조에서 공가(貢價)를 백성에게 지불[上下]할 때 매 1석마다 1승씩을 제하여 상진청(常賑廳)에 유부(留付)하여 놓았다가 응판하는 물력(物力)에 따라 절가(折價)하여 백성에게 지불하면 비로소 충분히 균평(均平)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또 그 쌀로 감찰의 공고(公故)에 대한 책응(責應) 비용을 계산하여 지급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월령법(月令法)을 영구히 혁파시켜 버린다면 실로 공인들에게 막대한 혜택이 될 것입니다. 단지 공가에서 한 되씩 제한 쌀로는 각궁(各宮)에 연례(年例)로 획송(劃送)하는 것과 각처의 제수(祭需)에 대한 값을 지급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았습니다. 이는 사체(事軆)에 특별한 점이 있어 이에 대해서는 버려두었습니다. 이밖에는 각사(各司)·각영(各營)을 물론하고 대거(貸去)하든 영하(永下)하든 모두 1승씩 제하여 부족한 수량을 보충하게 하는 것이 일에 있어 매우 온편하고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반드시 공인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모두 진휼청(賑恤廳)에 예속시켜 놓고 응판은 관주인(館主人)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고 월령(月令)은 묵자(墨子)015)  로 하여금 담당하도록 정례(定例)를 만들어 판령 정례(辦令定例)라고 명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홍봉한을 선혜청 당상에 차임하라고 명하였다. 그뒤 사직(司直) 이후(李)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1석(石)에 1승(升)씩 거두는 것은 끝내 구차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균역(均役)의 결전(結錢)·결미(結米)는 대략 조용조(租庸調)016)  를 모방한 것인데 이는 그렇지 않다. 응판은 진실로 좋은 것이지만 월령은 어찌 또 하나의 공물(貢物)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후가 말하기를,
"호조에서는 1승씩 더 받게 하되 선혜청에서는 1승씩 더 받지 못하게 하여 관에서 취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찰(監察)이 어떻게 공인을 독책하겠는가?"
하였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국초에는 13사고(司庫)를 두었었는데 대감(臺監)이 날마다 가서 살피면 각사(各司)에서 감찰을 대우하기를 한결같이 본사(本司)처럼 했습니다. 이는 의막(依幕) 등의 일을 모두 공인이 담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박문수는 말하기를,
"옛날에 칠문법(漆門法)017)  이 있었는데 그에 소요되는 기구(器具)를 지금도 공인에게 징색(徵索)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또 말하기를,
"균역청에 저장되어 있는 것 가운데 전목(錢木)이 상당히 많은데 수직(守直)하는 것이 너무 허술하여 전곡 아문(錢穀衙門)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 작은 경비를 아끼다가 큰 해를 당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고,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는 말하기를,
"사람이 없는 산밑에다 하나의 아문을 설치하여 재화(財貨)를 저장하여 놓았는데 관원은 곧 빌려온 관원이고 서리(書吏)와 고직(庫直)도 또한 빌려온 하인이어서 보기에 매우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관원과 원역(員役)을 창설하려 한다면 곧 하나의 선혜청이 생기는 것으로 1년 동안 응하(應下)할 경비가 장차 1만 냥이 넘게 될 것이니, 또한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매우 난처합니다."
하고, 우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신이 재작년 서쪽 지방으로 내려갈 적에 이 일을 가지고 하순(下詢)했기 때문에 신이 이미 한 개의 청(廳)을 따로 설치하도록 진달했었습니다만, 오래지 않아 점점 장대(張大)해짐에 따라 일에 안타까운 상황이 많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사세로는 전대로 분차(分差)하기 위해 타사(他司)의 낭청(郞廳)에게 겸하여 업무를 수행하게 하고 타사의 원역(員役)을 빌려다가 부리는 것은 과연 허술하고 구애되는 단서가 있습니다. 또 수직(守直)하는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본청(本廳)이 사람이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고 수만 냥의 재화를 그 가운데다 저장하여 두었는데 이른바 수직이라는 것이 너무 수효가 적으니 뜻밖의 걱정이 없지 않으므로 참으로 난처합니다. 그러나 실낭청(實郞廳)과 실원역(實員役)을 창출하려 한다면 그 허다한 과액(窠額)을 일시에 많이 차출하게 되어 그 규모와 제치(制置)가 곧 하나의 선혜청이 되는 것은 물론, 1년 동안의 공공연히 소모되는 비용이 장차 1만여 금(金)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것도 또한 난처한 일입니다. 신의 의견은 균역청의 절목을 이미 반포하여 두서(頭緖)가 이미 완성되었으므로 지금의 경우는 처음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따로 청을 설치할 필요없이 파기시켜 선혜청의 혜당(惠堂)이 겸하여 관리하는 것을 진휼청의 예처럼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1년의 봉상(捧上)·용하(用下)와 남아 있는 수량에 대해서는 철저한 한계를 두어 선혜청의 것과 혼잡(混雜)되는 폐단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백성을 위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이 청(廳)을 설치하는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만, 반드시 영구히 폐단이 없는 방도를 생각한 연후에야 비로소 혜택이 백성들에게 전하여지게 될 것입니다. 약간의 실원역(實員役)을 차출하여 그 전수(典守)를 엄중히 하고 간혹 음랑(蔭郞)을 차출하여 착실히 구관(句管)하게 하는 방도를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대신이 아뢴 대로 선혜청에 합쳐 설치하게 하자는 방안도 또한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영 대장을 균역청 당상으로 차하(差下)한 것은 또한 뜻이 있는 것이었다. 선혜청에 합속(合屬)시키는 데 대한 절목을 만들어 계품(啓稟)하라."
하였다. 또 편집 당상(編輯堂上)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말하기를,
"궤장(几杖)·명기(明器) 가운데 응당 있어야 할 것은 평상시 늘 쓰던 것이 있으면 새로 만들지 말고 그것을 퇴광(退壙)에 넣게 하라. 상상(殤喪)에는 빈궁(殯宮)을 쓰지 말 것이며, 내상(內喪)이 먼저 있을 경우에는 공제(公除)018)   전에 진현(進見)하는 복색에 대해서는 이미 편집에 기재되어 있다. 빈전(殯殿)에 내상이 먼저 있을 경우 공제 전에 만일 압존(壓尊)되는 일이 있을 때의 복색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빈전·빈궁을 물론하고 압존되는 곳일지라도 복(服)이 끝난 뒤에 수가(隨駕)나 영송(迎送)하는 절차가 있을 경우에는 상복(常服)으로 할 것으로 수교(受敎)에 기재하고나서 의조(儀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1월 15일 신미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으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다.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승지와 사관이 차례로 입시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와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당(堂)에 올라가서 두 번 절하니 왕세자가 답배(答拜)하였다. 필선(弼善)이 좌석(座席)으로 올라갈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좌석으로 올라갔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뜰 아래서 두 번 절하였는데, 주서(注書)가 외치기를,
"일을 상달할 관원은 그대로 머물러 있고 일을 상달하지 않을 관원은 나가라."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친경하는 성대한 일을 15년 만에 재차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임금들은 빈풍(豳風)019)   한 편만으로도 농사짓는 데 대한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하께서 대조를 따라 전지(田地)에 친림(親臨)하시면 다만 빈풍을 강독하는 유익함이 있는 정도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이제 식년(式年)020)  을 당하여 판적(版籍)을 만들어야 하는데, 임금은 백성을 맡아 기르는 처지이니 일국의 생치(生齒)의 가감(加減)과 허실(虛實)에 대해 도리상 의당 상세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적이 실제와 부합되게 한 연후에야 또한 부세(賦稅)와 출역(出役)을 고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판적에 대한 기록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촌리(村里)와 정락(井落)에 대해서도 또한 낱낱이 그림으로 그려서 보관하여 두고 있습니다만 우리 나라의 경우는 판적에 관한 법이 매우 허술하여 식년(式年)이 되어야 판적을 정리하는데 태반은 허술하여 누락되기 일쑤입니다. 이번에는 경외(京外)를 막론하고 각별히 엄중히 계칙하여 사실대로 하게 하되, 만일 혹시라도 누락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청컨대 《속전(續典)》에 의거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헌 김광세(金光世)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간 심발(沈墢)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17일 계유

구택규(具宅奎)를 발탁하여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임금이 사람을 기용함에 있어서는 오로지 인재를 얻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예로부터 애석하게도 침체된 인재가 많았다. 이제 바야흐로 도민(都民)을 위하여 폐단을 이정(釐正)함에 있어 형조와 한성부를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판윤 윤동형(尹東衡)의 체직을 허락하고 그 대신 행 사직(行司直) 구택규를 제수하여 내가 인재를 아끼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구택규는 신축년021)  ·임인년022)   무렵에 양사(兩司)에 출입하면서 시의(時議)의 준론(峻論)을 주장하는 쪽에 빌붙어서 논계(論啓)하여 찬축시킨 것이 거의 없는 날이 없는 정도였다. 또 제일 먼저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대빈(大嬪)으로 추존(追尊)하자는 의논을 발의하였었다. 나중에는 또 완론(緩論)을 주장하는 쪽에 빌붙었으며, 임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지난일이 잘못되었음을 진달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딱하게 여겨 통정(通政)·가선(嘉善)에서 자헌(資憲)에까지 올려주었고 그의 아들 구윤명(具允明)의 통정(通政)도 모두 중비(中批)023)  에서 나온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57책 79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77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歷史)


[註 021]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022]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023] 중비(中批) : 전형을 거치지 않고 임금의 특지로 관원을 임명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구택규는 신축년021)  ·임인년022)   무렵에 양사(兩司)에 출입하면서 시의(時議)의 준론(峻論)을 주장하는 쪽에 빌붙어서 논계(論啓)하여 찬축시킨 것이 거의 없는 날이 없는 정도였다. 또 제일 먼저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대빈(大嬪)으로 추존(追尊)하자는 의논을 발의하였었다. 나중에는 또 완론(緩論)을 주장하는 쪽에 빌붙었으며, 임금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지난일이 잘못되었음을 진달하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딱하게 여겨 통정(通政)·가선(嘉善)에서 자헌(資憲)에까지 올려주었고 그의 아들 구윤명(具允明)의 통정(通政)도 모두 중비(中批)023)  에서 나온 것이었다."

 

1월 18일 갑술

유성이 대릉성(大陵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겸사서 이유수(李惟秀)가 상서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외람되게 지금의 수상을 논핵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지처(地處)와 위세(威勢)가 판연히 업신여길 수 없는 것이 전일에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말에도, 상정(常情)과 사리(事理)에 의거하여 헤아려 보더라도 그가 반드시 서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신은 진실로 스스로 편안한 마음을 지닐 수 없습니다. 처음에 이미 그와 함께 같은 조정에 있으려 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이에 머리를 수그리고 두려워하면서 백료(百僚)들의 끝자리에 따라다니며 그가 멋대로 눈을 부릅뜨고 시키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니, 어찌 전후의 사정이 너무도 어긋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하령하기를,
"말단의 조어(措語)는 매우 한심스러운 것에 관계가 된다. 직책이 강관(講官)으로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그리고 작년 겨울 대조께서 홍준해(洪準海)에게 내린 처분이 지극히 준엄하고도 정대했는데 그가 말을 만들어 침척(侵斥)하였으니, 더더욱 무엄하기 그지없다. 그의 소장은 도로 내어주고 겸 사서 이유수에게는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키는 형전(刑典)을 시행하고 소장을 봉입한 승지는 중추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잇따라 사직 단자를 올렸으나 잇따라 돈유(敦諭)를 내렸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도성을 나가게 되었다.

 

1월 19일 을해

승지를 보내어 수서(手書)를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에게 전하고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1월 20일 병자

영건 당상(營建堂上)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5릉(陵)의 비역(碑役)에 대해 하순(下詢)하니, 예조 참의 이익보(李益輔)가 말하기를,
"비면(碑面)의 큰 글자를 속히 써낸 연후에야 제때에 미치지 못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사관(書寫官)은 누구인가?"
하니, 이익보가 말하기를,
"앞면은 홍계희(洪啓禧)가 맡았으며 뒷면은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가 맡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은 무슨 일로 도성을 나갔는가?"
하니, 연신(筵臣) 이유수(李惟秀) 때문이라고 글로 써서 앙대(仰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의 처분이 미약하였다.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어 놓은 것은 그 한계가 매우 엄중한 것인데 이유수가 사직(辭職)을 칭탁하여 당습을 품고 협잡을 부렸으니, 이는 전에 없던 것이다. 아! 그가 선파(璿派)로서 은혜를 갚기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서 당습을 부리는 것을 달게 여기고 있으니,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임금이 다시 임어하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결단코 진신(搢紳)의 반열에 두어 당습을 조장하게 할 수 없다.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고 사전(赦典)을 거행하지 말게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유수가 사심을 품고 있는 것은 이미 알았다. 그러나 경이 도성을 나간 것은 지나친 것에 관계된다. 대신의 체모는 다른 사람에 견주어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유수는 또한 대신(臺臣)이 아닌데 어떻게 거취를 경솔히 함으로써 체통을 손상시키는가? 즉시 도성으로 들어오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영의정 이종성에게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1월 21일 정축

홍익삼(洪益三)을 대사간으로, 이수관(李壽觀)을 집의로, 이득종(李得宗)을 헌납으로, 황인검(黃仁儉)·서해조(徐海朝)를 지평으로, 정존겸(鄭存謙)·심수(沈鏽)를 정언으로, 서효수(徐孝修)를 겸 사서로, 한광회(韓光會)를 겸 필선으로, 김진상(金鎭商)을 지돈녕으로, 최재흥(崔載興)을 태인 현감(泰仁縣監)으로, 신사언(申思彦)을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삼았다. 최재흥은 최규서(崔奎瑞)의 손자로서 젊어서부터 심질(心疾)이 있어 장옥(場屋)에 들어가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혹은 이학(理學)을 한다고 지목하기도 하였다. 정우량(鄭羽良)이 마침 전조(銓曹)에 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듣고 찾아가서 만났다. 그리하여 최재흥이 그와 굳게 교재를 맺었으므로 정우량이 임금에게 극력 추천하여 곧바로 자의(諮議)024)  에 통망(通望)하였고 얼마 안 되어 또 남대(南臺)025)  에 제배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론(士論)이 시끄러워졌고 그에 따라 대사간 이존중(李存中)이 탄핵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노모(老母) 때문에 이 고을에 제수된 것이다. 이때 학문을 한다고 거짓 일컬으면서 세상을 속이고 영달을 꾀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임금이 이를 싫어하였다. 그리하여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말하기를,
"이 사람이 장차 은사(隱士)가 되려는 것인가?"
하였다.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상서하여 견책을 내려줄 것을 청하니, 위유(慰諭)하는 내용의 답을 내렸다.

 

1월 22일 무인

왕세자가 태묘에 전알(展謁)하였다.

 

1월 23일 기묘

임금이 화협 옹주(和協翁主)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이는 옹주의 장사(葬事)를 막 끝냈기 때문이었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이미 추조(秋操)를 치렀으면 춘조(春操)는 정지한 근례(近例)가 있으니, 양도(兩都)026)  와 통제사(統制使), 경상 좌우 병사, 전라 병사, 충청 병사, 황해 병사, 경기 수사, 남북 병사(南北兵使)에게 수륙(水陸)의 조습(操習)을 모두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월 24일 경진

유성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서 서방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월 25일 신사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상당을 소접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지난번 영변 부사(寧邊府使) 김양택(金陽澤)의 상서로 인하여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잘 상의하여 장달(狀達)하게 했었습니다. 평안 감사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화전(火田) 가운데 이미 세안(稅案)에 들어 있는 것은 변동시킬 수 없으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기전(起田)하는 대로 전세(田稅)를 부과하게 해야 합니다. 성(城) 밑의 석전(石田)은 5결(結)을 한정하여 감세(減稅)하고 면역(免役)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백성들을 모아 경작하게 해야 합니다. 성북(城北)의 길은, 옛날에는 통행시켰다가 지금은 폐기시켰는데 이는 실로 편리함을 취한 데 연유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억지로 다시 통행시킨다면 시끄러운 폐단이 있을 것 같습니다.’ 했는데, 진달한 세 건의 일에 관해서는 도신의 논열(論列)이 모두 사의(事宜)에 맞는 것 같으니, 청컨대 장달(狀達)한 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선천(宣川)의 좌현(左峴)은 곧 관서의 가장 중요한 관방(關防)인데, 그 형편(形便)을 살펴보면 이미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을 쌓을 수 없다면 수목(樹木)을 금양(禁養)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방책이 되는 것입니다. 고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일찍이 본도(本道)를 맡고 있을 적에 좌현의 동쪽·서쪽에 나무를 심어놓았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자랐습니다만, 관부(官府)에서 잘 금하여 보호하지 않은 탓으로 간혹 베어간 것이 많습니다. 또 금양(禁養)하는 보수(步數)도 오히려 길지 못한 것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에 신이 본번(本藩)에 대죄(待罪)하고 있을 적에 민전(民田)을 많이 매입하여 동서로 봉표(封標)를 물려서 각각 3,4리로 한정한 다음 수목을 더 심어서 뒷날 힘을 얻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일이 오래되면 점점 해이해지기 마련인 것이니, 신구(新舊) 금양처(禁養處)와 기타 고개 비탈에 나무를 심은 곳에 모두 금양하도록 신칙해야 함은 물론, 비국에서 낭청(郞廳)을 보내어 그 근만(勤慢)을 살피게 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별시재(別試才)를 거행했는데, 잇따라 3일 동안 행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성수(聖壽)가 육순이 되었다는 것으로 번갈아 칭경(稱慶)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선조(先朝)의 육순 때 진하(陳賀)할 적에 사저(私邸)에서 거우중(居憂中)에 있었던 탓으로 진하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했었다는 것으로 차마 하례(賀禮)를 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를 물리쳤다. 그리고 승지에게 창회시(愴懷詩)를 쓰게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다.

 

1월 27일 계미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춘당대에 입시하였을 적에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이 말하기를,
"신이 주원(廚院)027)  에 대죄(待罪)하고 있기 때문에 본원(本院)의 일을 앙달하겠습니다. 본원에 예속되어 종묘의 천신(薦新)과 어공(御供)에 소요되는 백어(白魚)·생해(生蟹)를 봉진(封進)하던 어부가 1백 50명이 있었는데 이제 이미 모두 균역청에 예속되었습니다. 금년부터는 세금을 징수하여 본원으로 보내어 본원에서 준비하여 봉진(封進)하게 한다고 하니, 참으로 난처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논어》의 향당편(鄕黨篇)에 의하면 ‘시장에서 산 술과 산 포(脯)를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막중한 천신과 어공을 대가(代價)로 지급하는 것은 사체에 있어 부당하다. 균역청으로 하여금 묘당에서 상의하여 품의한 다음 구처(區處)하게 하라."
하였다. 고 충신 홍임(洪霖)의 손자를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조용하도록 명하였고, 절개를 지키다가 죽은 이술원(李述原)의 아들 이우방(李遇芳)도 또한 전조(銓曹)로 하여금 조용하게 하였다.

 

이때 노루가 임금 앞으로 뛰어 달아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노루는 곧 영남(嶺南)에서 봉진한 것인데 원량(元良)이 살아 있는 동물은 차마 해쳐 죽일 수 없다고 하여 후원에 놓아준 것이다."
하였다. 시신(侍臣)들이 완물 상지(翫物喪志)028)  한다는 경계를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승지는 이 말을 춘방(春坊)에 전하여 동궁으로 하여금 듣게 하라."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