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9권, 영조 29년 1753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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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무자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이어 육상묘(毓祥廟)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계유년029)  의 일을 추념(追念)하니 이 마음의 감회가 배나 더한다. 4월 26일은 곧 나의 사친(私親)이 처음 봉(封)해진 날이니, 그날은 의당 전배(展拜)하여 조금이나마 이 감회를 펴고 싶다.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환궁할 때 경복궁에 역임(歷臨)하여 하교하기를,
"옛날 계유년 어제시(御製詩)에 ‘지난해에 다시 개국(開國)했던 해를 만났는데[去年重遇龍飛歲], 오늘 기꺼운 마음으로 성조(聖祖)의 궁궐을 우러러 본다.[今日欣瞻聖祖宮]’고 했는데, 내가 또 임신년을 맞게 될 줄을 어찌 처음에 생각이나 했었겠는가?"
하고, 강녕전(康寧殿)의 옛터에다 막차(幕次)를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입시하였는데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니, 임금이 초연한 안색을 지으면서 한참 있다가 대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경 등이 원량(元良)을 잘 보좌하라. 옛사람의 말에 ‘그 음악을 연주하고 그 예를 행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 예를 행할 수가 없다."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등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원컨대 더욱 스스로 진작하고 면려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곳은 곧 옛날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했을 때의 대궐이니, 한(漢)나라광무제(光武帝)030)  가 남돈현(南頓縣)에서 한 것에 견줄 정도가 아닌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임어하였으니 어찌 한 번의 시혜(施惠)가 없을 수 있겠는가? 건춘(建春)·연추(延秋)·광화(光化)이 세 문(門)의 부근에 사는 백성들에게 1년의 부세(賦稅)를 감면시킴으로써 나의 뜻을 보이게 하라."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어제(御製) 창회시(愴懷詩)를 써서 동궁에게 보이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성조(聖祖)께서 지은 ‘태양이 용의 비늘을 비추니 만 개의 갑옷이 금이로구나![日照龍麟萬甲金]’라고 한 글귀에서 그 기상(氣象)을 알 수 있다."
하였다.

 

2월 4일 경인

북병사(北兵使) 이경철(李景喆)을 잉임(仍任)시키고 남병사(南兵使) 이징서(李徵瑞)는 체차시키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윤득재(尹得載)가 아뢴 것으로 인하여 내린 조처였다. 또 시임 북병사 조동정(趙東鼎)을 남병사의 대신으로 차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윤득재가 또 말하기를,
"북관(北關)과 남관(南關)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북관의 백성들 가운데 억울한 일이 있어도 순영(巡營)에 와서 호소하지 못하고 모두 평사(評事)에게로 가게 되는데 평사도 개시(開市)하는 기간이 지나면 즉시 돌아갑니다. 마땅히 가을이 되기 전에 부임하게 하여 기한이 찬 뒤에야 비로소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2월 5일 신묘

왕세자가 대신·비국 당상을 소접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아뢰기를,
"관사(官司)를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어 놓았으므로 각기 관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장례원(掌隷院)은 전적으로 노비를 관장하는데 근래 노비의 사송(詞訟)을 모두 추조(秋曹)·경조(京兆)로 나아가 송사(訟事)하고 있기 때문에 장례원은 하나의 용관(冗官)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뒤로는 노비에 관한 송사를 본원(本院)을 경유하지 않고서 먼저 추조·경조로 나아가 제소(提訴)하는 것은 청컨대 일체 시행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황장목(黃腸木)031)  을 관동(關東)과 영남(嶺南)에 봉치(封置)한 것은 그 사체가 매우 엄중한 것인데 근래 혹 봉표(封標) 밖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혹 사사로이 기른 것이라고 일컫기도 하면서 공문(公文)을 내기를 도모하여 마구 베어내고 있으므로 곳곳의 봉산(封山)이 모두 민둥산이 되어버렸습니다. 청컨대 삼척·강릉·양양·고성·인제 등 다섯 고을은 봉표 밖이나 사사로이 기른 것이나를 막론하고 비록 경사(京司)의 공문이 있다고 하더라도 청컨대 일체 시행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춘추관 당상 조영국(趙榮國)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강릉 왕후(康陵王后)032)  의 장월(葬月)이 《실록》과 《보략(譜略)》의 지장(誌狀)이 서로 틀리니 추측하여 이정(釐正)할 수 없다. 영건청(營建廳)에 분부하여 비문(碑文)의 모년(某年)이라고 한 아래에다 단지 하(夏) 자만 쓰라."
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강도(江都)의 외성(外城)은 조정에서 이미 수만 냥의 재화(財貨)를 들여 다시 벽돌로 쌓았습니다만 불행하게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한현모(韓顯謨)가 또 약간의 석성(石城)을 쌓은 뒤에 지금까지 8년이 되도록 돌 하나 흙 한줌도 더 쌓지 않고 있어 곧 버려진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외성의 길이가 50리인데 지금 완축(完築)된 것은 30리이고 무너진 곳이 20리입니다. 신이 그 지세(地勢)를 살펴보건대 포토(浦土)가 비습(卑濕)하여 성안 제방(隄防)의 물이 몰래 스며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기지(基址)가 결국 견고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벽돌로 쌓은 성이 어떻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벽돌은 진실로 돌만 못하고 돌은 진실로 흙만 못합니다. 당초 벽돌로 쌓을 적에 원래 흙을 깎아 평평하게 해놓고 쌓은 것이 아니고 토성(土城)에다 벽돌로 쌓은 것인데 그 뒤에 또 흙을 더 쌓아 그 높이를 더 높게 했기 때문에 밖의 벽돌은 무너졌으나 안의 흙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리고 해자(垓子)의 흙은 의지할 데가 없어 번번이 빗물에 씻겨나가고 있으니 앞으로 몇 년만 더 지나면 흙도 또한 다시 보존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지세(地勢)를 따라 흙으로 쌓는다면 쌓기가 쉽고 여장(女墻)033)  의 축조도 또한 무너진 벽돌을 사용하면 충분하여 많은 재력(財力)을 들일 필요없이 완료시킬 수 있습니다. 양서(兩西)의 세미(稅米) 가운데서 헤아려 본부(本府)에 획급(劃給)하여 해마다 개축(改築)하게 한다면 4년이 지나지 않아서 민력(民力)을 허비할 것도 없이 역사(役事)를 완료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조영국이 강도(江都)에 가서 《실록》을 상고하여 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주달할 때 언급한 것이다.

 

2월 6일 임진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청대(請對)하였으나, 임금이 소견(召見)하지 않았다. 이때 대신이 성수(聖壽)가 육순이 되었다는 것으로 잇따라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2월 7일 계사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2월 8일 갑오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관 위에 배(背)가 있었다. 흰무지개가 햇무리 위에서 에워싸고 있다가 한참만에 없어졌다.

 

임금이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시사(試士)하여 홍억(洪檍) 등 6인을 뽑았다. 창명(唱名)을 마치자 신은(新恩)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당습(黨習)에 대해 경계시켰다.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이 말하기를,
"근래 종실들이 매우 빈궁(貧窮)하게 되어 강교(江郊)에 거처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궁핍스러움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의당 불쌍히 여겨 돌보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가 말하기를,
"고(故) 밀창군(密昌君)의 처(妻)가 나이 80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희귀(稀貴)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더구나 중신(重臣)의 어머니이니 【전 판서 이익정(李益炡)의 어머니이다.】  사체가 자별하다. 의자와 식물을 전성군(全城君)의 처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자, 승지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은전은 아래에서 간청(干請)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미안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민택수(閔宅洙)를 집의로, 정희신(丁喜愼)을 장령으로, 이조망(李朝望)·이제현(李齊賢)을 지평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사간으로, 박해윤(朴海潤)을 정언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홍문 제학으로, 홍계희(洪啓禧)를 광주 유수(廣州留守)로, 정찬술(鄭纘述)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궁인 문씨(文氏)를 소원(昭媛)으로 삼았다. 소원의 교지(敎旨)에 어보(御寶)를 찍으라고 명하고 이어 어보를 내리니, 승지 윤광의(尹光毅)가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개정(開政)하는 때가 아니면 어보는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도로 환납(還納)하였다. 임금이 중관(中官)을 시켜 윤광의를 준절히 꾸짖기를,
"군부(君父)의 명이 있는데 승지가 어떻게 감히 이를 어길 수 있겠는가? 정사(政事)가 아니더라도 어보를 찍은 것은 전례가 있으니,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니, 윤광의가 말하기를,
"후궁의 봉작(封爵)을 승지를 시켜 개정(開政)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갑자기 어보를 찍게 하면 반드시 뒷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비록 죄를 받게 되더라도 감히 하교를 봉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임금이 다른 승지에게 명하여 교지(敎旨)에 어보를 찍게 하였다. 그러나 그뒤 〈윤광의를〉 발탁하여 이조 참의에 제수하였으니, 이는 그의 정직함을 가상하게 여긴 것이다.

 

2월 11일 정유

성천주(成天柱)를 집의로, 심익성(沈益聖)을 사간으로, 한광회(韓光會)를 헌납으로, 이인원(李仁源)을 【이심원(李心源)이라고 개명(改名)하였다.】  지평으로, 이수덕(李壽德)·윤득우(尹得雨)를 정언으로, 김광국(金光國)을 필선으로 삼았다.

 

내국(內國)에서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들이 청대(請對)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가?"
하니,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말하기를,
"오랫동안 입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청대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조영국(趙榮國)이 《실록》을 상고하고 왔기 때문에 내가 잘못 오해하고서 입시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제문(祭文)은 입달(入達)해야 하는가, 입계(入啓)해야 하는가?"
하니, 기사관(記事官) 정창성(鄭昌聖)이 말하기를,
"종묘와 각릉(各陵)의 제문은 입계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입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특명(特命)으로 치제(致祭)하는 제문에 이르러서는 1본(本)은 입계하고 1본(本)은 입달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문을 어떻게 양쪽에 들여야 한단 말인가? 입계한 제문을 만약 원량(元良)에게 들여보내야 한다면 입달한 제문은 어찌하여 입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승지 구윤명(具允明)이 말하기를,
"제문에 관한 일은, 신이 어느 때 생긴 격례(格例)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감사(監司)·병사(兵使)의 교서(敎書)에 이르러서도 영서(令書)라고 쓰는 것은 또한 방애(妨碍)되는 점이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직책을 제수했는데 영서라고 쓰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하니, 구윤명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미안스러운 것입니다. 변통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정해진 격례를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이 뒤로는 특교(特敎)에 의한 제문(祭文)만 입계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2일 무술

햇무리가 졌는데, 햇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고 햇무리 아래에는 이(履)가 있었다.

 

2월 13일 기해

임금이 친경(親耕)하는 예를 행하였다. 하루 전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전하의 경적위(耕籍位)를 남유문(南壝門) 밖 동남쪽 10보(步)쯤 되는 곳에다 남쪽을 향하도록 하여 땅이 마땅한 데 따라 설치하였으며, 전설사(典設司)에서는 악좌(幄座)를 관경대(觀耕臺) 위에다 남쪽을 향하도록 설치하고 소차(小次)는 서계(西階) 아래의 조금 북쪽에다 남쪽을 향하게 설치하였다. 봉상시에서 전하의 판위(版位)를 경적소(耕籍所)에다 남쪽을 향하게 설치하고 시경위(侍耕位)는 동서계(東西階)의 아래에서 북상(北上)034)  하게 설치하고 좌우 통례(左右通禮)·알자(謁者)·찬의(贊儀)의 위차는 동계(東階) 아래에다 설치하였다. 또 찬의의 위차를 서계(西階) 아래에다 마주 향하여 북상(北上)하게 설치하였다. 친경(親耕)을 배종(陪從)하는 종친·재신(宰臣)의 위차는 동남쪽에 설치하고 여러 판서(判書)·대간(臺諫)의 위차는 그 남쪽에 설치했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여 북상(北上)하게 하였다. 서인(庶人)들의 위차는 그 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옮겨 10보 밖에 설치하고 기민(耆民)이 배경(陪耕)하는 위차는 또 그 남쪽에 설치했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게 하였다. 친경(親耕)의 뇌석(耒席)은 종친의 위차 북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옮겨 남쪽을 향하도록 설치하였다. 사복시에서 친경우(親耕牛)를 친경위(親耕位)의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전악(典樂)이 등가악(登歌樂)을 친경대(親耕臺) 위에 진설하고 헌가악(軒架樂)을 서인(庶人)의 경위(耕位) 서남쪽에다 모두 북쪽을 향하도록 진설하였다. 봉상시에서 경적사(耕籍使)의 위차는 친경위(親耕位)의 동쪽에다 남쪽을 향하게 진설하였으며, 봉상시 정(奉常寺正)은 경적사의 동남쪽에서 조금 뒤로 물리게 하고 적전령(籍田令)을 봉상시 정의 남쪽에서 조금 뒤로 물리게 했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여 북상(北上)하게 하였다. 봉청상관(奉靑箱官)과 집분삽관(執奮鍤官)의 위차는 그뒤에 설치하고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의 위차는 서인(庶人) 위차의 앞에 설치하였다. 주부(主簿)의 위차는 판관의 위차 남쪽에서 조금 뒤로 물려 서쪽을 향하여 북상(北上)하게 하고, 사복시 정의 위차는 친경우가 매여 있는 동쪽에서 조금 앞으로 나와서 남쪽을 향하게 하고, 경기 관찰사와 읍령(邑令)들 및 여러 현령(縣令)들의 위차는 서인의 위차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게 한 다음 옷을 달리 입고 두줄로 서상(西上)035)  하게 하였다. 【기내(畿內)의 읍령(邑令) 가운데 적전(籍田)을 관리하는 사람과 현령(縣令)들은 흑단령(黑團領)을 입고서 적전(籍田)을 갈 때를 당하여 나란히 밭두둑에 서서 갈기를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간다.】  종경관(從耕官)의 위차는 친경위의 동쪽인 집분삽관의 서쪽에서 조금 북쪽에 설치하여 서상(西上)하게 하였으며, 또 종경(從耕)하는 뇌거(耒耟)와 소는 종경관 위차의 뒤에 설치하였다. 백관(百官)이 서립(序立)하는 위차는 제집사(諸執事)의 뒤에서 조금 남쪽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문관은 동쪽, 무관은 서쪽으로 위차를 달리하게 하였고 두 줄로 서서 서로 마주 대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7책 79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78면
【분류】왕실(王室) / 농업(農業)


[註 034] 북상(北上) : 북쪽을 상위로 함.[註 035] 서상(西上) : 서쪽을 상위로 함.

 

적전(籍田)을 친경하였다. 전하께서 대차(大次)로 돌아오니 뭇 신하들이 각기 위차에서 기다렸다가 봉상시 정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뇌거(耒耟)를 잡은 사람들을 인솔하고 먼저 위차로 나아가자, 알자(謁者)가 시경(侍耕)·종경(從耕)하는 집사(執事)들과 문무 백관을 인솔하였는데 모두 조복을 입었으며          【4품 이상은 조복을 입었고 5품 이하는 흑단령을 입었다.】         차례대로 위차로 나아갔다. 관찰사·읍령과 현령도 각기 위차로 나아갔다. 좌통례가 대차(大次)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임을 계청(啓請)하니, 전하가 이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었다. 조금 있다가 좌통례가 또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뢰니 전하가 막차에서 나왔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輿)에 탈 것을 계청하니 전하가 여에 올랐다. 헌가악(軒架樂)이 연주되었다. 좌우 통례가 양쪽에서 인도하여 관경대(觀耕臺)의 남쪽 계단 아래 이르자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니 전하가 여에서 내렸다. 예의사(禮儀使)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기를 계청하니 전하가 규를 잡았다. 예의사가 앞에서 인도하여 경적위(耕籍位)에 이르러 남쪽을 향하여 서니          【임금이 설 때마다 예의사는 물러나 왼쪽에서 부복(俯伏)하였다.】         음악이 그쳤다. 예의사가 경적례(耕籍禮)를 행할 것을 계청하니 적전령(籍田令)이 친경할 뇌사(耒耜)를 내어다 올리고 나서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부복(俯伏)하였다. 규를 꽂고 도(韜)036)                  를 열고 뇌를 꺼내어 동쪽을 향하여 서서 봉상시 정에게 주니, 봉상시 정이 이를 근시(近侍)에게          【승지이다.】         주어 올리게 하였으며, 사복시 정이 소를 끌고 나왔다.          【소를 모는 사람은 두 사람이 따르게 되어 있다.】         예의사(禮儀使)가 규를 꽂고 뇌를 받기를 계청하니, 전하가, 규를 꽂고          【만일 꽂는 것이 불편하면 근시가 승봉(承捧)한다.】         뇌사를 받았다. 음악이 연주되었다. 근시 한 사람이 품계가 높은 중관(中官) 2인과          【중관은 흑단령을 입는다.】         함께 뇌를 잡고 사복시 정은 고삐를 잡는데          【두 마리의 소에 고삐는 하나로 하는데 뒤에서 조금 왼쪽으로 서서 잡는다.】         전하가 뇌를 잡고 다섯 번 민다. 예가 끝나고 나면 음악이 그친다. 근시가 뇌사를 받아 다시 차례에 따라 건네주면 적전령(籍田令)이 이를 도(韜)에 넣는다. 예의사가 규를 잡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잡는다. 예의사가 전하를 인도하여 관경대(觀耕臺)로 올라가면 헌가악이 연주되는데 남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음악이 그치고 등가악(登歌樂)이 연주된다. 전하가 좌석으로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앉으면 음악이 그친다.
알자(謁者)가 종경 재신(從耕宰臣)을          【대신이다.】         인도하여 친경위(親耕位)의 동쪽에 있는 논두둑에서 조금 북쪽으로 나아간다. 뇌사를 잡은 사람들이 뒤따라 가는데 각기 뇌사를 받아서 잡으면          【밭가는 것을 도와주고 소를 모는 사람이 각기 따른다.】         헌가악이 연주된다. 일곱 번 뇌거를 미는 예를 끝마치고 나서 물러나와 위차로 돌아오면 음악이 그친다. 알자가 종경(從耕)하는 판서와          【이판과 병판이다.】         대간(臺諫)을          【양사(兩司)의 장관(長官)이다.】         나누어 인도하여 친경위에서          【이판은 재신(宰臣)들이 있던 논두둑의 동쪽으로 나아가는데 대사헌은 이판의 동쪽에 선다. 병판은 종신들이 있던 논두둑의 서쪽으로 나아가는데 대사간은 병판의 서쪽에 선다.】         조금 북쪽으로 나아가는데 뇌사를 잡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각기 뇌거를 받아서 잡으면          【밭가는 것을 도와주고 소를 모는 사람이 따른다.】         음악이 연주되고 아홉 번 뇌를 미는 예를 끝마치면 음악이 중지된다. 알자가 시종(侍從)하는 종경관(從耕官)과 문무 백관을 나누어 인도하여 모두 관경대(觀耕臺) 아래로 나아와 처음의 위차(位次)대로 서립(序立)한다.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이 서인(庶人)을 인솔하고 차례로 1백 묘(畝)를 가는데 갈기를 마치고나면 그제야 물러간다. 경적사(耕籍使)가 동계(東階)로 올라와서 악좌(幄座) 앞에서 조금 동쪽으로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선다. 배경(陪耕)하는 기민(耆民)들이 관경대 아래로 나아와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나서 꿇어앉는다. 도승지가 나아가 악좌 앞에 당하여 북면(北面)하고서 전교를 받아가지고 물러나와 남계(南階)의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서서 전교를 반선(頒宣)하고 물러난다. 좌통례가 전교를 받아가지고 서쪽을 향하여 선교(宣敎)하기를, ‘삼가 기민(耆民)들을 위로한다.’ 하니, 기민들이 네 번 절하였고 모두 물러가 위차로 돌아갔다. 예의사가 예가 끝났음을 아뢰니          【찬의(贊儀)도 또한 외친다.】         전하가 남쪽 계단으로 내려 왔다. 이때 등가악이 연주되었는데 관경대 아래에 이르자 음악이 그쳤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啓請)하니 전하가 규를 놓았고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받았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輿)에 탈 것을 계청하니 전하가 여를 탔고 헌가악이 연주되었다. 대차(大次) 앞에 이르자 음악이 그쳤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니 전하가 여에서 내려 대차로 들어가니, 시경자(侍耕者)·종경자(從耕者)와 문무 백관이 모두 물러났다. 봉청상관(捧靑箱官)이 늦벼와 올벼의 씨를 봉상시 정에게 전수(傳授)하면 받아가지고 경소(耕所)로 가서 부리고 판관이 주부(主簿)를 데리고 1 백 묘를 끝까지 다 살핀다. 봉상시 정이 일을 살피기를 끝마치고나서 대차에 이르러 북면(北面)하고 꿇어앉아 일을 끝마쳤음을 아뢰고 나면 모두 물러간다.

 

친경한 뒤 노주의(勞酒儀)는 이러하다. 그날 친경을 끝마치고 나서 액정서(掖庭署)에서 이어 어좌(御座)를 친경대(親耕臺) 위에다 남쪽을 향하도록 설치하며, 전설사(典設司)에서 기민(耆民)·서인(庶人)의 위차를 친경대 아래에다 설치하고 동쪽과 서쪽에 두 줄로 서로 마주 대하게 하였다. 【기민은 동쪽이고 서인은 서쪽에 설치하였다.】  또 배위(拜位)를 친경대 아래에서 조금 남쪽에다 설치하였다. 내자시(內資寺)에서 기민·서인의 주탁(酒卓)을 계단 아래 동쪽과 서쪽에다가 진설하고 기민·서인은 각기 그 복색의 옷을 입고 【친경할 때의 복색이다.】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정제(整齊)하고 기다린다. 【경조(京兆)의 낭청(郞廳)이 간검(看檢)한다.】  좌통례가 대차(大次)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뢰면 전하가 이어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나온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輿)에 타기를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 타는데 산선(繖扇)과 시위(侍衞)는 상의(常儀)와 같다. 헌가악(軒架樂)이 연주되는데 좌우에서 부축하고 관경대 남쪽 계단 아래 이르면 좌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여 전하가 여에서 내리면 헌가악이 그친다. 그리고 등가악(登歌樂)이 연주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규(圭)를 잡을 것을 계청하면 근시(近侍)가 꿇어앉아 규를 올리고 전하가 규를 잡는다. 좌우 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남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관경대 위로 나아가 전하가 어좌(御座)에 나아가서 남쪽을 향하여 앉는다. 산선·시위는 상의(常儀)와 같고 음악이 그친다. 기민·서인이 차례대로 각기 배위(拜位)에 나아가 【통례원(通禮院)에서 검칙(檢飭)한다.】  네 번 절하고 【외치는 것은 없다.】  이를 마치면 각기 좌석으로 나아간다. 동위·서위의 집사자(執事者)들 【위군(衛軍)이다.】  각기 찬기(饌器)를 기민·서인의 앞에다 진설하는데 내자시의 관원이 술을 따라서 【온주(醞洒)이다.】  집사자에게 주면 집사자가 잔을 돌린다. 기민·서인은 모두 위차를 떠나 부복(俯伏)하고서 꿇어앉아 잔을 받아 마시고나서 다시 위차로 돌아간다. 잔을 돌리는 것은 두 잔에서 석 잔까지 이르는데 위의 의식과 같다. 조금 있다가 집사자가 찬기를 철거하면 기민·서인이 다시 배위(拜位)로 나아가 네 번 절한다. 【외치는 것은 없다.】  좌통례가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어좌 앞에 부복하고 꿇어앉아 예가 끝났음을 아뢰면 【찬의(贊儀)도 외친다.】  전하가 여에서 내리면 등가악이 그친다. 좌우 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남쪽 계단으로 내려가서 관경대 아래에 이르면 음악이 그친다. 좌우 통례가 꿇어앉아 규를 놓을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규를 놓는데 근시가 꿇어앉아 여에 오를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 오른다. 산선(繖扇)·시위(侍衞)는 상의(常儀)와 같다. 좌우 통례가 좌우에서 인도하여 대차(大次) 앞에 이르면 음악이 그친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수레에서 내릴 것을 계청하면 전하가 여에서 내려 대차로 들어가고 기민·서인은 차례대로 나간다.

 

친경 때 임금이 말하기를,
"정위(正位)는 신농씨(神農氏)이고 배위(配位)는 후직(后稷)인가?"
하니, 승지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섯 번 미는 예를 행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토맥(土脉)이 깊이 일어났다. 기미년037)  에는 단지 겉흙만 일어났었다. 종경(從耕)에도 악장(樂章)이 있는가?"
하니,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있습니다."
하였다. 종경한 여러 신하들을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는데 악장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물러갔기 때문이었다. 예의사(禮儀使)에게 명하여 직접 전지(田地)에 가서 파종(播種)하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동조(東朝)께서 온주(醞洒)를 하사한 것이 있기 때문에 선사(宣賜)한다."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경이 경근차(耕根車)의 곁에 올라 오늘의 친경에 참여하였으니 귀한 일이다."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어제시(御製詩)를 쓰게 하였다. 또 명하여 전교를 쓰게 하기를,
"지금 대신이 아뢴 내용을 들으니 우리 성조(聖祖)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간 해가 곧 내년이었다고 한다. 내년에 전알(展謁)하여도 어찌 늦겠는가마는 나의 날마다 간절해지는 마음에 있어 어찌 내년 가을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금년 가을에 마땅히 건원릉(健元陵)을 전알할 것이니 이런 내용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동관왕묘(東關王廟)를 들렀다. 동남묘(東南廟)에도 일례(一例)로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는데, 왕묘에 있는 어제(御製)를 싼 사롱(紗籠)의 색깔이 바랬는데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환궁할 때 흥인문(興仁門)에 들러서 치성(雉城)을 마땅히 증축해야 될 곳에 홍기(紅旗)를 세워놓으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한 개의 치장(雉墻) 사이는 1백 30보(步)를 기준으로 하라."
하고, 성(城) 가까이에 있는 근전(芹田)에 물을 가득 대놓는 것은 성지(城址)를 해치게 된다는 것으로 근전을 다 메우라고 명하였다.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동문(東門)에는 마땅히 몇 개의 치장을 만들어야 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광희문(光熙門) 이북은 여섯 개의 치장을 마련해야 합니다."
하였다. 명정문(明政門)에 나가서 기백(畿伯)과 차원(差員)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여 권농(勸農)에 더욱 힘쓰라는 뜻으로 면려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일찍이 기미년038)  에 이미 친경을 행하였었는데 이제 늙은 나이에 어찌 다시 행할 줄 알았겠는가? 이미 다시 나가서 행한 뒤에 늘 잊지 못하는 것은 백성들이다. 이렇듯이 잊지 못하는 마음에서 농사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선무(先務)로 삼았기 때문에 피로함을 꺼리지 않고 몸소 동교(東郊)에 나아가서 다시 뇌를 다섯 번 미는 예를 행하였으니, 아! 도신과 수령들은 나의 이 뜻을 본받기 바란다. 〈전국 시대〉 제왕(齊王)이 아 대부(阿大夫)를 팽형(烹刑)에 처하고 즉묵 대부(卽墨大夫)를 높은 벼슬에 봉한 것도 또한 전야(田野)가 개간되었느냐 개간되지 않았느냐에 불과했었으니, 이런 내용으로 팔도(八道)·삼도(三都)039)  에 하유하라."
하였다.

 

2월 14일 경자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진달하여 사면(辭免)시켜줄 것을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우악한 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부수찬 서효수(徐孝修)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조께서 직접 문묘를 배알하시어 어진 이를 높이는 정성을 돈독히 하였고 몸소 적전(籍田)에 나아가서 농정(農政)을 밝히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성인을 높이면 선비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것은 저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고 농정을 밝히면 근본을 힘쓰고 어려움을 아는 것도 이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청컨대 예를 후히 하고 정성을 다하여 산림에 묻혀 있는 어진 이를 초빙하여 오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구중 궁궐에 거처하고 있으면서도 전야(田野)의 일을 생각하셔야 하고 곤복과 면류관을 쓰시고도 비옷[雨衣]입고 일하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면려하여 진달한 것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정청 당상(釐正廳堂上) 박문수(朴文秀)를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정 절목(釐正節目)에 대해 하순(下詢)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균역(均役)에 대해서는 지방에서 편하다고 하고 공시(貢市)에 대해서는 서울 백성들이 편하다고 하니, 이 두 가지 일은 반드시 연소하고 재주가 민첩한 사람을 얻은 연후에야 구관(句管)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어장(御將)이 해야 한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균역을 성취시키는 것은 사소한 일입니다. 허구 많은 일 가운데 우리 저하를 보도(輔導)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춘방(春坊)의 관원을 잘 가려서 진강(進講)하게 한다면 1,2년 사이에 마땅히 크게 향상되는 이익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은 오래도록 학문에 전념하게 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고 싶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제왕가(帝王家)의 가법(家法)은 엄절(嚴截)하게 하는 것이 비록 아름다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여염집의 부자(父子) 사이로 말하여 본다면 한결같이 너무 엄격하게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조가(朝家)의 법(法)이 본래 이러하다."
하였다.

 

2월 18일 갑진

호조에서 아뢰기를,
"곧 내수사(內需司)의 첩정(牒呈)을 받아보건대 신궁(新宮)의 은자(銀子)·미태(米太)·원결(元結)을 한결같이 숙원방(淑媛房)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할 것으로 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례에 의거 전토(田土) 구입에 관한 가은(價銀) 2천 냥을 수송(輸送)하였고, 전장(田庄)을 준비하기 전의 수용(需用)은 본조(本曹)의 콩 1백 석, 선혜청의 쌀 1백 석씩을 5년을 기한으로 백성에게 지불하겠으며, 원결(元結) 2백 결은 본방(本房)의 망정(望呈)을 기다려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정시 문과(庭試文科)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2월 20일 병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접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달하기를,
"경상도의 저인배(邸人輩)들이 본도(本道) 도사(都事)        윤학보(尹學輔)가 비리로 저지른 침학(侵虐)에 대해 이정청(釐正廳)에 정소(呈訴)하였으니, 그가 조정에 욕을 끼친 것이 큽니다. 청컨대 붙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臺臣)이 봉서(封書)를 하룻밤 묵힌 것 때문에 논핵하여 승지를 파직시켰습니다. 대신의 계달(啓達)에서 이미 그날의 승지라고 일컬었으면 원리(院吏)에게 분부한 신치운(申致雲)만이 유독 현고(現告)에서 누락된 것은 염치에 관계되는 일이니, 파직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1일 정미

영건청(營建廳)에서 아뢰기를,
"정묘년040)  에 영건할 때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조사하여 보니, 한 능침(陵寢)에서 사역(使役)한 공장(工匠)·모군(募軍) 등에 대한 역가(役價)가, 베가 6동(同) 21필(疋), 쌀이 75석(石)이었기 때문에 그 수량에 의거 먼저 가져다 쓰게 했습니다. 지금 이 5능(陵)의 비역(碑役)에 소요되는 각항(各項)의 공장·모군 등의 공역(工役)이 매우 호번하여 쌀과 베를 이미 다 썼으니, 쌀 1백 50석, 포목 12동(同)을 선혜청·병조에서 수송(輸送)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김양택(金陽澤)을 대사간으로, 김이만(金履萬)을 집의로, 김원행(金元行)을 지평으로, 이명환(李明煥)·박도원(朴道源)을 정언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부교리로, 유언민(兪彦民)을 보덕으로, 이후(李)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금천군(金川郡)의 읍내(邑內)는 수토(水土)가 매우 나빠서 도신(道臣)이 고금교(古金郊)로 읍을 옮기게 해줄 것을 장청(狀請)하였습니다. 고금교는 청성령(靑城嶺)의 직로(直路)에 있으므로 관방(關防)에 해가 되지 않으니, 옮기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군려(軍旅)와는 다른데 어찌하여 원량(元良)에게 품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 일은 이미 관방에 관계된 것이니 어찌 대조께 여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읍을 옮기는 것은 진실로 중대하고 곤란한 일이지만 대신의 진달이 이러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도신(道臣)이 또 강령(康翎)으로 고을을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지리가 좋지 않다고 말을 하니, 이것은 시행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리로 말을 한 것은 잘못이다. 황해 감사를 중추하라."
하였다. 춘방(春坊)에 처음 의망(擬望)할 때에는 두 당상이 함께 의논하여 하게 했는데, 대신이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선천(宣川)의 동림(東林)은 왼쪽으로 좌현(左峴)의 대로(大路)를 압도하고 있고 오른쪽으로 청강평(淸江坪)과 여러 곳에서 만나는 길목을 끼고 있으니, 참으로 관서(關西) 직로(直路)의 제일의 관방(關防)입니다. 때문에 고려 때 이곳에 성을 쌓고 방어사(防禦使)를 설치했습니다. 연전(年前)에 조정에서 이 곳에 성을 쌓을 것을 명하였으나 사역(事役)이 호대(浩大)하여 단지 서림(西林)에만 쌓고 동림(東林)에는 쌓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도신으로 하여금 금년 봄과 여름 사이에 그대로 구지(舊址)에다 성을 쌓고서 동림의 안산(案山) 좌현의 노상(路上)에 있는 원봉(圓峰)과 노하(路下)에 있는 난봉(鸞峰)과 서남(西南)의 전도산(傳道山)이 네 곳에는 각기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위급한 시기에 힘이 될 수 있는 방도를 삼아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의주 부윤 남태기(南泰耆)가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더 쌓아서 군향(軍餉)·재화(財貨)를 저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그 성의가 매우 돈독합니다. 그러나 본부(本府)의 군액(軍額)이 매우 적어서 위급한 시기에 방어할 수가 없으니 본부의 마군(馬軍)·보군(步軍) 가운데 병영(兵營)에 예속된 자들은 경보(警報)가 있어도 병영에 영부(領付)하지 말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원이 본부를 도와 지키게 할 것을 정식으로 삼아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균역청을 선혜청에 합속(合屬)시켰는데 허다한 전곡(錢穀)과 문부(文簿)를 한 사람의 음랑(蔭郞)이 혼자서 조관(照管)하기는 어려우니, 의당 낭관 한 사람을 더 차출하여 상평 낭청과 함께 구관(句管)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균역청·상진청(常賑廳)의 양랑(兩郞)을 물론하고 아울러 겸하여 업무를 살피게 하는 것을 한결같이 호조의 판적색(版籍色) 양랑의 예와 같게 하는 것이 매우 온편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또 말하기를,
"균역청의 전조(錢條)는 그래도 지탱해 갈 수가 있습니다만 미조(米條)에 이르러서는 각도(各道)의 결역(結役)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모두 돈으로 바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군문(軍門)의 허다한 향미(餉米)를 실로 추이(推移)하여 급대(給代)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일 돈을 곧바로 군문에 획급한다면 또 끝없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지금 이를 변통시키는 데는 단지 한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선혜청의 공가(貢價)를 종전에 마련한 것은 영남은 5분(分) 안에 3분은 쌀, 1분은 포목, 1분은 돈으로 내게 되어 있고, 호남은 6분 안에 4분은 쌀, 1분은 포목, 1분은 돈으로 내게 되어 있고, 호서는 5분 안에 4분은 쌀, 1분은 또 이를 3분하여 2분은 포목, 1분은 돈으로 내게 되어 있습니다. 기타 여러 청(廳)에도 모두 항정(恒定)된 법규가 있는데 포목과 돈은 공인(貢人)에게 이로운 점이 있습니다만 쌀에 이르러서는 참혹한 흉년이 아닌 때를 제외하고는 그 값이 2, 3냥에 불과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이로움을 잃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선혜청에서는 한결같이 원래 정한 분수(分數)에 따라서 마련한 뒤에 쌀은 균역청에서 공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결전(結錢)으로 환급(換給)하되 해청(該廳)의 쌀 1석(石)의 본가(本價)에서 태가(駄價)와 잡비(雜費)를 제하고 3냥 7전으로 할 것을 영구히 항규(恒規)로 삼게 하며, 비록 미곡(米穀)이 지극히 천할 때라도 혹시 감할 수 없게 하소서. 만약 쌀이 귀할 때를 당할 경우에는 백성들이 반드시 원치 않을 것입니다만 또한 강제로 하지 않도록 할 것으로 항식(恒式)을 정한다면 공인(貢人)이 혜택을 입는 것이 이미 그다지 적지 않고 균역청의 미조도 또한 구간스러움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율도량형(律度量衡)을 같게 하는 것은 왕정(王政)에 있어 가장 중대한 것인데 근래 각 아문(衙門)의 두곡(斗斛)이 각기 같지 않습니다. 비국(備局)에서 신칙하여 선혜청의 곡자(斛子)와 서로 비준(比準)하도록 엄중히 과조(科條)를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김상로는 말하기를,
"호조에 만들어 둔 동곡(銅斛)을 경외(京外)로 하여금 교준(較準)하게 하면 되는 것이니, 특별히 신칙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한결같이 동곡을 따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해서(海西) 은여결(隱餘結)의 대미(大米)·소미(小米)·콩을 배로 운송하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호조에서 작전(作錢)하게 하는 예에 따라 작전하게 함으로써 민폐를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사옹원(司饔院)에 어부(漁夫)를 출급(出給)할 것으로 하명하였습니다만, 듣건대 천신(薦新)에 드는 백어(白魚)가 5백 개(箇)이고 공상(供上)에 드는 생해(生蟹)가 수천 개라고 하니, 청컨대 선혜청에서 마련하여 진공(進貢)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일이 올바르게 된다."
하였다. 이천보·김상로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의 마음에 억울함이 있어도 감히 극력 청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천리와 인정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어떻게 굳게 거절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 경 등을 부르려고 하였었으나 혐의스러움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부르지 않았었다. 이렇게 한다면 송현궁(松峴宮) 밖으로 가는 수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하였다.

 

2월 22일 무신

이정청(釐正廳)의 여러 당상(堂上)들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정 당상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화협 옹주방(和協翁主房)에서 각전(各廛)에 외상(外上)을 진 것이 매우 많습니다. 서원(書員) 전세범(全世範)이 시민(市民)들을 침학하여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만약 무겁게 감죄(勘罪)하지 않으면 뒷사람을 징계할 수 없게 됩니다."
하고, 또 현목(玄木) 20동(同)을 화협 옹주방으로 보내어 즉시 환상(還償)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세범의 한 짓이 매우 무상(無狀)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징속(徵贖)시키지 말고 무거운 쪽을 따라 엄중히 다스리게 하라."
하고, 또 현목 55동(同)을 화협 옹주방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구선행(具善行)이 균역(均役)을 실시한 뒤 본영(本營)이 잔폐(殘弊)된 이유에 대해 장문(狀聞)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김재로(金在魯)가 영상으로 있을 때 1만 냥을 획급(劃給)할 것으로 복계(覆啓)했습니다만, 신은 삼가 의아스런 점이 있습니다. 균역을 시행하기 전에 우연(右沿)의 어세(漁稅)를 모두 통영(統營)에 예속시켰을 때에도 매년 받아들이는 것이 4, 5천 냥에 불과하였고 만약 어리(漁利)를 잃을 경우에는 단지 2, 3천 냥일 뿐이었습니다. 만일 우연에서 나오는 어세전(漁稅錢)이 부족할 경우에는 타도(他道)의 세전(稅錢)을 옮겨다가 1만 냥의 수효를 충당시켜야 합니까? 그리고 통영에다 이미 1만 냥을 지급한다면 영남의 좌수영(左水營)과 호남의 좌수영·우수영에도 나누어 지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조정의 처분이 비로소 치우치지 않게 되고 인심도 복종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다른 수영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은 채 유독 통영에만 1만 냥을 지급한다면 어찌 치우친 조처가 아니겠습니까? 구선행이 비록 오래된 장수(將帥)로서 변방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계책에서 조목에 따라 증언하였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한초(李漢招)·이강(李綱) 등이 담당하고 있었을 적에는 전쟁이 바야흐로 급박했었지만 지금 남방(南方)에 그런 걱정이 있습니까? 민폐가 가장 극심한 것으로 말한다면 통영에서 낙인(烙印)한다고 칭탁하고서 수천의 선척(船隻)들을 독촉하여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하고서는 또 즉시 낙인하지 않은 채 여러 날을 지체시켰는데 그 사이 영속배(營屬輩)들이 조종하여 농간을 부린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원균(元均)이 장수가 되어서는 폐전하였고 이순신(李舜臣)이 장수가 되어서는 승전(勝戰)했으니, 장수의 잘하고 잘못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선척의 낙인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고, 예조 판서        홍봉한은 말하기를,
"이미 1만 냥을 주기로 허락해 놓고 전연 지급하지 않는다면 통영의 형세가 또한 절박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균역청으로 하여금 대신과 상의한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3일 기유

임금이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혼궁(魂宮)에 임어하였다. 도승지 조명리(趙明履)에게 명하여 의소 세손의 소상(小祥)의 제문(祭文)을 쓰게 하고서 하교하기를,
"이번 의소(懿昭)의 소상일에는 일찍이 강서원(講書院)·위종사(衛從司)를 거친 사람으로서 바야흐로 외임(外任)에 있는 자도 또한 와서 혼궁에 참여하게 하라. 복(服)을 벗을 때는 일찍이 사부(師傅)를 역임한 대신도 모두 입시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5일 신해

장령 정희신(丁喜愼)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상 좌병사 손진민(孫鎭民)은 본래 영남 사람으로 발탁되어 곤수(閫帥)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런데 공을 세워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기세를 부려 교만하고 방자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집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인아(姻婭)의 친속을 막비(幕裨)로 포열(布列)시켜 놓고 군졸들을 잔해(殘害)하므로 원통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만 탐독(貪黷)을 끝없이 부리고 혹독하게 하는 것이 더욱 극심합니다. 영남은 본래 추로(鄒魯)의 고장이라는 것으로 조정에서 진념(軫念)하고 있기 때문에 수토신(守土臣)도 반드시 예모(禮貌)를 갖추어 선비를 대우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손진민은 본도(本道) 사람으로서 꾸짖고 욕하는 것을 마치 노예에게 하듯이 하고 있어 사자(士子)로서 곤장을 맞는 사람이 계속 잇따르고 있습니다. 신이 지난 겨울 호서의 적소(謫所)에 있었을 적에 지역이 영남의 경계와 가까웠는데 남쪽에서 온 사람이면 말을 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신은 잡아다가 엄중히 징죄(懲罪)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영남의 일도(一道)는 지역이 섬 오랑캐와 근접해 있으므로 변방을 공고히 하는 계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정묘년041)   무렵에 도신(道臣)의 진청(陳請)으로 인하여 별무사(別武士)의 도시(都試)에 대한 법규를 설립했었습니다. 전임 방어사(防禦使)와 사대부의 자손으로서 활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은 모두 여기에 입속(入屬)시켜 해마다 시재(試才)해서 선발하고 장려하는 방안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출신(出身)한 사람 가운데 우등(優等)을 받은 사람도 아직껏 수용되지 못하고 있고, 한량(閑良)으로서 만점을 받은 사람도 또한 논상(論賞)이 없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용동(聳動)되었던 사람들도 끝내는 모두 해이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는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할 때 만점에 대한 한가지 조항은 전혀 거론하지 않은 채 소략하게 초창(草刱)한 데에서 나온 탓인 것입니다. 경군문(京軍門)과 서북(西北) 제도(諸道)에는 모두 만점을 받으면 직부(直赴)하게 하는 법규가 있으니, 한결같이 다른 도의 법규에 의거 권장하는 방도로 삼는 것이 또한 사의(事宜)에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2월 26일 임자

윤급(尹汲)을 홍문 제학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부응교로 삼았다.

 

대신·예조 당상(禮曹堂上)·유신(儒臣)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디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졌으니, 의당 한결같이 전례(典禮)를 준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옹주의 가례(嘉禮)에는 나의 마음에 불안한 점이 있으니, 예조 당상과 유신은 모두 소견을 진달하라."
하니,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화협 옹주(和協翁主)는 이미 출가하였으니, 예에 있어 복(服)을 강등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이 혼례는 불가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옹주는 이미 기년(朞年)의 복제(服制)가 아니니, 가례에 대해서는 의심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고, 승지        엄우(嚴瑀)는 말하기를,
"사가(私家)로 말하더라도 복제가 대공(大功)이 된다면 예문(禮文)에 어긋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널리 채집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의심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함경 감사        윤득재(尹得載)가 북관(北關) 사람일 경우 능관(陵官)을 거치지 않아도 곧바로 준원전 참봉(濬源殿參奉)에 차임하도록 진품(陳稟)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제(官制)를 어찌 부정(不正)하게 북관 사람을 위하여 고칠 수 있겠습니까? 의당 여섯 능(陵) 가운데 사과(四窠)는 남관(南關) 사람을 쓰고 이과(二窠)는 북관(北關) 사람을 써야 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북도(北道)에는 경참봉(京參奉)으로 승차(陞差)되는 길이 있는데 관서(關西)에만 유독 이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청천강(淸川江) 남북 지방의 글을 읽은 선비들이 일생 동안 그대로 묻혀 버리니 피차(彼此)의 차별이 없이 똑같이 사랑하는 의리가 아닙니다. 평양의 숭령전 참봉(崇靈殿參奉) 이과(二窠)는 남북(南北)에서 각기 1인씩을 나누어 차임하여 사일(仕日)이 60개월에 찬 뒤에는 의당 경참봉(京參奉)으로 승천(陞遷)시키는 것을 준원전 참봉의 예와 같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관(西關)만 오직 구석을 향하여 탄식함이 없지 않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정 당상 박문수를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전 감찰(監察)        조구성(趙九成)은 곧 인조조(仁祖朝)의 공신인 조시준(趙時俊)의 현손(玄孫)입니다. 수위관(守衞官)으로 통적(通籍)되어 감찰에 제수되었는데, 지평        박기채(朴起采)가 수위관 출신이라 하여 서경(署經) 때 불(不) 자를 썼고 또 정리(政吏)를 불러 그 대신 다시 차출하게 하였습니다만, 앞서 수위관으로 통사(通仕)한 사람이 헤일 수 없이 많았습니다. 삼조(三曹)·금오(金吾)·경조(京兆)에서 원래 하자를 지적하여 저지한 것이 없었고 또 서경하는 법에도 잇따라 3차의 불순(不順)이 있은 뒤에야 체직시키는 것은 바로 상세히 살피고 삼간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구성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영남의 시노비(寺奴婢)는 혹 1백여 세가 되도록 신공(身貢)을 바치기도 하고 남녀가 늙어 죽도록 시집 장가를 가지 못하기도 하니, 이는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노비법(奴婢法)은 기성(箕聖) 때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이다."
하였다. 교리 홍중효(洪重孝)가 아뢰기를,
"한나라 순우의(淳于意)의 딸인 제영(緹縈)이 대신 자신을 몰입(沒入)하여 관비(官婢)로 삼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니, 노비법은 일찍이 없은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대대로 노비가 되는 것이 우리 나라의 법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노비에 대한 폐단은 참으로 잔인하다."
하였다.

 

호서 어사(湖西御史) 채제공(蔡濟恭)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균역(均役)에 대해 과연 백성들의 원망이 없던가?"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모두 편하다고 일컫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염세(鹽稅)에 대해서는 또한 어떠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민정(民情)이 또한 칭송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이최진(李最鎭), 전 서산 군수 임경관(任鏡觀), 태안 군수 이사조(李師祚), 홍주 목사 안상휘(安相徽), 회덕 현감 이준(李浚), 서천 군수 홍유보(洪有輔)는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감죄(勘罪)하라고 명하고, 천안 군수 김상열(金相說), 직산 현감 최보흥(崔普興)에게는 모두 새서(璽書)와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남포 현감 이세태(李世泰)는 우직(右職)042)  에 등용시키고, 이인 찰방(利仁察訪) 김범석(金範錫)도 또한 발탁 기용하게 했는데, 어사의 서계(書啓)에 따른 것이다.

 

2월 27일 계축

화유 옹주(和柔翁主)가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下嫁)하였다. 황인점은 참판        황재(黃梓)의 아들이다.

 

2월 28일 갑인

정언 박도원(朴道源)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구택규(具宅奎)는 본디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혈당(血黨)으로 모든 참혹한 논의에 관계된 것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연전에 한 장의 소장을 올려 자복(自服)한 것은 외면을 덮어 가린 것에 불과한 것이고 그의 흉패(凶悖)스런 속마음은 숨겨진 가운데 그대로 있는데도 진신(搢紳)의 반열에 끼이게 되었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경월(卿月)043)  에 특별히 발탁시키는 것이 갑자기 뜻밖에도 나왔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대조께 여쭈어 속히 개정(改正)하는 것을 단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매우 잘못된 데 관계된 내용이다. 그의 소장은 도로 내어주라."
하였다.

 

사간 심익성(沈益聖)이 상서하여 청하기를,
"수령을 신중히 가리는 것을 당(唐)나라 때의 전주첩(殿柱帖)처럼 해서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히 순양리(循良吏)를 가리게 하여 하나의 첩자(帖子)로 만들어 놓고 이를 좌우에 비치하여 두고서 자리가 나는 대로 차송(差送)하게 하소서. 경성의 아주 가까운 곳에는 장옥(檣屋)을 헐어 철거시킨 다음 경조(京兆)로 하여금 엄중히 금단(禁斷)하게 해야 합니다. 평양 서윤(平壤庶尹) 박사백(朴師伯)은 문을 닫고 들어 앉아 병을 조섭하느라 아문(衙門)에 좌기(坐起)하는 날이 매우 드뭅니다. 그리하여 오성(吳姓)의 부인(富人)에 대한 살옥(殺獄)을 전적으로 하리(下吏)에게 위임하였으니,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목천 현감 김창운(金昌運)은 형장을 죄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가하였으니, 청컨대 먼저 파직시키고 나서 잡아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두 수령은 잡아다 국문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2월 29일 을묘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문과 전시(文科殿試)를 설행하고, 노성중(盧聖中) 등 11인을 뽑았다. 시관(試官)들에게 시식(侍食)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과 함께 시식할 적에 임금이 곡신(穀神)에게 제(祭)하면 먼저 밥을 먹는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도승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마치 임금을 위하여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 판서 이진망(李眞望)은 은사(恩賜)로 장원(壯元)을 삼았었는데 지금은 은사를 말단에 붙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증별 전시(增別殿試)는 모두 사제(賜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은사(恩賜)도 모두 뒤섞여 앉아서 제정(製呈)합니다만, 이의 경우는 뜰에 있는 사람은 사제한 사람이 아니고 은사는 이미 사제한 사람이기 때문에 대상(臺上)에 앉히며 반드시 말단에다 붙이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면(李葂)은 【이여매(李如梅)의 손자이다.】  지금 생존해 있는가?"
하니, 대독관(對讀官) 성천주(成天柱)가 말하기를,
"작년에 이미 작고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면의 말이 매우 슬펐었는데 그의 족질(族姪)이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었다. 그 인품이 매우 착한데 벼슬이 동지중추부사에 그쳤으니, 가련한 일이다. 그의 손자는 아직 어린가?"
하니, 성천주가 말하기를,
"나이 겨우 10여 세라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집에 화상(畵像)이 있는가?"
하니, 성천주가 말하기를,
"이여매의 아비인 영원 백(寧遠伯) 이성량(李成樑)의 화상은 있습니다."
하였다. 이여매의 봉사손(奉祀孫)은 복(服)이 끝나기를 기다려 사용(司勇)의 녹직(祿職)에 붙였다가 나이가 차면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여송(李如松)이 신종 황제(神宗皇帝)에게 척리(戚里)가 되는데 경 등은 알고 있는가?"
하니, 독권관(讀券官)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어느 글에 나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소설(小說)에 있다. 이여송의 아내가 정 귀비(鄭貴妃)의 아우이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증렬미(拯劣米)044)  에 대한 일은 어사(御史)의 말이 옳습니다. 홍상한(洪象漢)이 선혜 당상(宣惠堂上)으로 있을 때 부상미(腐傷米)를 강제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또 수령의 해유(解由)045)  에 대한 구애법(拘碍法)을 만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차마 법에 없는 일로 우리 백성에게 무한한 폐단을 끼치게 할 수 있겠는가? 해유에 대한 일은 버려두라."
하였다. 동궁의 소대(召對) 때 강규(講規)는 한결같이 구규(舊規)를 따르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세자 부(世子傅)인 이천보(李天輔)가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윤명(具允明)의 일은 누가 논했는가?"
하니, 대독관(對讀官) 엄우(嚴瑀)가 말하기를,
"구윤명이 아니고 이에 그의 아비 구택규(具宅奎)의 일인데, 정언 박도원(朴道源)이 논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글에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니, 엄우가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혈당(血黨)이라고 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혈당이란 말은 오히려 완론(緩論)이다. 구윤명은 인품이 상당히 올바르지만 그의 아비는 젊었을 때 지나치게 당습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 추론(追論)하는 것인가?"
하였다.

 

좌부승지 구윤명(具允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집은 받은 은혜가 너무도 엄청나서 부자(父子)·형제(兄弟)가 모두 조적(朝籍)에 포열(布列)되어 있으니, 진실로 미워하고 시기하는 자들이 다른 때보다 극심할 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전혀 근거 없이 무함하는 말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연전에 이정보(李鼎輔)가 이런 등등의 구어(句語)로 신의 아비에게 오욕을 가했었는데 그때 신의 아비가 환하게 분변하여 이미 대조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렇게 전철을 답습하는 무리한 말에 대해 신이 서둘러 스스로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30일 병진

장령 정희신(丁喜愼)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기강이 해이해져 대낮에 큰 길에서 겁탈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지난밤 남부(南部)의 송성(宋姓) 사람의 집에 횃불을 든 강도 수십 인이 칼을 들고 돌입하여 노소를 모두 결박하여놓고 재산을 죄다 털어갔습니다. 도성 안에서 이런 변고가 발생한 것은 전고에 없던 일입니다. 좌포장·우포장을 우선 파직시키고 날짜를 정하여 추포(追捕)하게 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여주 목사 전일상(田日祥)은 성품이 본래 거칠고 패려하여 탐학한 짓을 멋대로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억지로 은결(隱結)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는데 허복(虛卜)046)  이 과반이며, 1곡(斛)에 대한 적곡(糴穀)을 받아들일 적에는 3두(斗) 씩을 더 징수하였으며, 양정(良丁)에게 강제로 봉초(捧招)하여 오로지 뇌물 받기만을 일삼고 있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시키소서. 청안 현감 장섭(張涉)은 마음대로 유치(留置)되어 있는 적곡을 내어다가 돈으로 바꾸어 이익을 꾀하였으며 데리고 온 아객(衙客)을 위하여 부민(富民)을 협박하여 혼인시켰으니, 청컨대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전 지평 유정원(柳正源)은 본디 아망(雅望)을 지니고 있는데 문을 닫고 들어 앉아 글을 읽었으므로 문예(文藝)와 학식(學識)에 있어 그보다 나은 사람이 드뭅니다. 지난번 당록(堂錄)047)  에 오른 것은 실로 공의에 의한 것인데 그때의 대신(臺臣)이 대직(臺職)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갑자기 개정(改正)하기를 청했습니다. 국조(國朝) 이래 통청(通淸)되기 전에 당선(堂選)에 든 사람은 몇몇 정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유정원은 이미 대망(臺望)에 들어있으니 더욱 논할 대상이 아닙니다. 특별히 개정하라고 한 하령(下令)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첫번째의 건사(件事)와 개정하게 한 것을 환수하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두 수령은 모두 잡아다 국문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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