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4일 경신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소상제(小祥祭)를 거행하였는데, 임금이 혼궁(魂宮)에 나아가서 곡(哭)을 하였다. 액정서(掖庭署)에서 전하의 곡림위(哭臨位)를 혼궁 신위(神位)의 동쪽에다 남쪽을 향하게 설치하였다. 제사를 거행한 뒤 곡림할 때가 되니 호위하는 관원들이 모두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기다렸다. 좌통례(左通禮)가 합문 밖에 나아가 꿇어앉아 중엄(中嚴)임을 계청(啓請)하였고 조금 있다가 또 외판(外辦)되었음을 아뢰니, 전하가 익선관(翼善冠)에 참포(黲袍)·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를 갖추고 나왔다. 좌통례·우통례가 앞에서 인도하고 곡림위로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앉게 하였으며 승지·사관의 입시는 상의(常儀)와 같다. 좌통례가 꿇어앉아 곡할 것을 계청하니 전하가 곡을 하며, 좌통례가 꿇어앉아 곡을 그칠 것을 계청하니 전하가 곡을 그쳤다. 좌통례·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대내(大內)로 들어갔다.
상침(尙寢)이 곡림위(哭臨位)를 별전(別殿)에 설치하였다. 곡림할 때가 되니 상의(尙儀)가 외판되었음을 아뢰었다. 대왕 대비전이 담복(淡服)을 갖추니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곡림위에 이르렀다. 상의가 꿇어앉아 곡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대왕 대비전이 곡하고 【시녀(侍女)들도 모두 곡한다.】 상의가 꿇어앉아 곡을 그칠 것을 계청하니 대왕 대비전이 곡을 그쳤다. 【시녀들도 곡을 그친다.】 상궁이 대왕 대비전을 인도하여 대내로 돌아왔다.
상침(尙寢)이 중궁전(中宮殿)의 곡림위를 전전(前殿)에 설치하고 내명부(內命婦) 이하의 곡위(哭位)는 중궁전 곡림위 뒤에다 설치하였다. 곡림할 때가 되니 상의(尙儀)가 꿇어앉아 외판되었음을 아뢰었다. 중궁전이 담복(淡服)을 갖추니 상궁이 앞에서 인도하여 곡림위에 이르렀다. 상의가 꿇어앉아 곡할 것을 계청하니 중궁전이 곡을 하며, 내명부 이하도 곡을 하였다. 상의가 꿇어앉아 곡을 그칠 것을 계청하니 중궁전이 곡을 그치고 내명부 이하도 곡을 그쳤다. 상궁이 중궁전을 인도하여 대내로 돌아왔다.
액정서(掖庭署)에서 왕세자의 곡림위를 별당(別堂)에다 서쪽을 향하게 설치하였다. 곡림할 때가 되니 내시(內侍)가 꿇어앉아 외비(外備)되었음을 아뢰었다. 왕세자가 최복(衰服)을 갖추고 나아가니 내시가 앞에서 인도하여 곡림위로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앉게 하였다. 내시가 꿇어앉아 곡할 것을 찬청(贊請)하니 왕세자가 곡을 하고 내시가 꿇어앉아 곡을 그칠 것을 찬청하니 왕세자가 곡을 그쳤다. 내시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임시로 만든 악차(幄次)로 나아가 다시 익선관(翼善冠)에 참포(黲袍)·오서대(烏犀帶)를 갖추었다. 내시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다시 들어가 곡위로 나아갔다. 내시가 꿇어앉아 곡할 것을 찬청(贊請)하니, 왕세자가 곡을 하고 내시가 꿇어앉아 곡을 그칠 것을 찬청하니 왕세자가 곡을 그쳤다. 내시가 꿇어앉아 옷을 바꾸어 입을 것을 찬청하니 왕세자가 다시 길복(吉服)으로 갖추었다. 내시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대내로 돌아왔다.
수칙(守則)이 왕세자빈(王世子嬪)의 곡림위를 별당(別堂)에다 설치하였다. 곡림할 때가 되니 수칙이 꿇어앉아 외비(外備)되었음을 아뢰었다. 왕세자빈이 최복(衰服)을 갖추니 수규(守閨)가 앞에서 인도하여 곡림위로 나아갔다. 수칙이 꿇어앉아 곡할 것을 찬청(贊請)하니 왕세자빈이 곡하고 【시녀들도 모두 곡을 한다.】 수칙이 꿇어앉아 곡을 그칠 것을 찬청하니 왕세자빈이 곡을 그쳤다. 【시녀들도 곡을 그친다.】 수규(守閨)가 왕세자빈을 인도하고 임시로 만든 악차(幄次)로 들어가니 다시 담복(淡服)으로 갖추었다. 수규가 왕세자빈을 인도하고 다시 들어가 곡위로 나아갔다. 수칙이 꿇어앉아 곡할 것을 찬청하니 왕세자빈이 곡하고 【시녀들도 모두 곡을 한다.】 수칙이 꿇어앉아 곡을 그칠 것을 찬청하니 왕세자빈이 곡을 그쳤다. 【시녀들도 모두 곡을 그친다.】 수칙이 꿇어앉아 옷을 바꾸어 입을 것을 찬청하니 왕세자빈이 다시 길복(吉服)으로 갖추었다. 수규가 왕세자빈을 인도하여 대내로 돌아왔다.
이철보(李喆輔)를 이조 참판으로,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정형복(鄭亨復)을 호조 참판으로, 조명겸(趙明謙)을 병조 참판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예조 판서로, 신만(申晩)을 우부빈객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지경연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동춘추로, 조명교(曺命敎)를 예문 제학으로, 조숙(趙)을 부교리로, 민택수(閔宅洙)를 사간으로, 조중회(趙重晦)를 필선으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김시묵(金時默)을 지평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승지로, 조동점(趙東漸)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3월 5일 신유
봉상시(奉常寺)에서 아뢰기를,
"추향(秋享)·동향(冬享)을 친제(親祭)할 때 공신(功臣) 45위(位)와 7사(祀) 5위(位)의 제수가(祭需價)를 선혜청으로 하여금 하향(夏享)의 예에 의거 마련하여 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판윤 구택규(具宅奎)가 상서하여 스스로 변해(辨解)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왕세자가 대신·비국 당상을 소접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청하기를,
"제주 군병들의 습조(習操)는 목사(牧使)의 장달(狀達)에 의거 물려서 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와 도승지를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의소묘(懿昭墓) 다례(茶禮)의 제문(祭文)을 쓰라고 명하고나서 소의묘의 수묘관(守墓官) 동양군(東陽君) 이당(李㭻)과 시묘관(侍墓官) 김이재(金以載)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장번 내관(長番內官)에게는 반숙마(半熟馬) 1필(匹) 씩을 사급(賜給)하고 수위관(守衞官) 이하에게는 모두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혼궁(魂宮)의 종실 하릉군(夏陵君) 이적(李樀), 신계군(新溪君) 이덕(李㯖), 능안군(綾安君) 이진(李槇), 낙성수(樂城守) 이단(李壇), 장번 내관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 씩을, 충의(忠義)048) 이하에게는 각각 아마(兒馬) 1필 씩을 하사하게 하였으며, 반감(飯監) 이하에게는 모두 효순 혼궁(孝純魂宮) 상일(祥日)의 예에 의거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길례(吉禮) 때에 혼인을 주관한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을 면급(面給)하고, 사자(使者) 이성옥(李成玉), 가례청 당상(嘉禮廳堂上)인 판서 홍봉한(洪鳳漢), 참판 남유용(南有容)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 씩을, 판서 원경하(元景夏), 참판 조명리(趙明履), 참의 이익보(李益輔)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 씩을, 참의 이응협(李應協)에게는 아마 1필을 사급(賜給)하게 하였다. 도청(都廳)인 부응교 조중회(趙重晦)에게는 가자하고, 정랑(正郞) 조처로(趙處魯)에게는 반숙마 1필을, 좌랑 장명억(張命億)에게는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사급하였다. 감역관(監役官) 김준(金峻)·남학구(南鶴耉)·윤옥(尹沃)은 모두 승서(陞敍)시키고, 원역(員役)·공장(工匠) 등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미포(米布)로 등급을 나누어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3월 6일 임술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급제(及第)한 이성술(李聖述)을 삭과(削科)시켰다. 이성술은 이때 유벌(儒罰)049) 을 받았는데도 무릅쓰고 들어가 급제했기 때문에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려 발거(拔去)시킬 것을 청하였다.
3월 7일 계해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위유(慰諭)하고 면려하는 내용의 답을 내렸다.
3월 8일 갑자
부교리 조숙(趙)이 상서하여 청하기를,
"《소학(小學)》 한 책은 때때로 주연(胄筵)에서 강독(講讀)하는 여가에 세밀히 연구 분석하여 늘상 연거(燕居) 때 참결(參決)하는 과정에서 체험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소과(小科)의 초시(初試) 때 사학(四學)050) 에서 《소학》에 대한 강(講)을 받게 하되 추생(抽栍)으로 고강(考講)하게 하여 한 장(章)을 모두 배송(背誦)케 한 다음 조(粗)051) 이상의 입격자(入格者)를 뽑아 그 이름을 기록하여 이를 춘조(春曹)에 보냄으로써 출방(出榜)한 뒤에 고험(考驗)하는 자료로 삼도록 하소서.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이에 대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추과(秋科)에서 반행(頒行)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답을 내려 가납(嘉納)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3월 9일 을축
홍봉한(洪鳳漢)을 예조 판서에, 이철보(李喆輔)·구윤명(具允明)을 승지에 제수하였다.
3월 10일 병인
임금이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출궁(出宮)하여 다시 익선관에 참포·오서대로 갖추고 묘소로 올라갔는데 어장(御將)에게 함께 묘소로 올라가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곡림(哭臨)하고 나서 승지에게 비문(碑文)을 읽게 했는데 임금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고 충신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임금이 연(輦)을 타고 홍익한의 집앞을 지나다가 정려(旌閭)를 보고 치제하게 하고 그 자손들을 녹용하게 하였다. 또 고 완춘군(完春君) 이수량(李隧良)에게 치제하고 그의 후손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수량은 무신년052) 에 군공(軍功)을 세웠는데 집이 연(輦)이 지나는 길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궁할 때 관왕묘(關王廟)에 역림(歷臨)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청룡도(靑龍刀)를 들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별군직(別軍職) 이의배(李義培)가 빼어가지고 나와서 두 번 휘둘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장사로다."
하고, 첨사(僉使)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3월 11일 정묘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문무과(文武科)에 대해 방방(放榜)하고 신은(新恩)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3월 14일 경오
월식이 있었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청대(請對)하였으나, 임금이 소견(召見)을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5일 신미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연명 차자를 올려 물러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예사 비답을 내렸으며 이어 김상로에게 엄중한 하교를 내렸다. 김상로가 금오(金吾)에 나아가 대명(待命)하니,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3월 16일 임신
부교리 한광조(韓光肇)가 황단(皇壇) 망배례(望拜禮)의 날짜를 품정(稟定)하는 일 때문에 청대(請對)하니, 물어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한광조가 말하기를,
"신미년053) 에 성상께서 망배례의 날짜에 대해 하순(下詢)했었는데 그때 연신(筵臣)이 경인일(庚寅日)은 분명히 19일이라고 앙대(仰對)했습니다만, 신이 명나라의 정사(正史)를 조사하여 본 바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순사(殉社)한 날은 분명히 18일인 정미일(丁未日)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때 혹은 18일이라고도 하고 혹은 19일이라고도 하여 마음속으로 의심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시강원(侍講院)의 《심양일기(瀋陽日記)》에서 조사해 내어 도승지로 하여금 베껴 재전(齋殿)에 봉안(奉安)하게 했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19일로 했었는데 그뒤에도 또한 19일로 하였다."
하고, 이어 19일로 하도록 명하였다.
3월 18일 갑술
김치인(金致仁)·홍낙성(洪樂性)을 승지로, 조명리(趙明履)를 이조 참판으로,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남학로(南鶴老)를 지평으로, 윤동성(尹東星)을 정언으로, 한광회(韓光會)를 교리로, 서효수(徐孝修)를 수찬으로, 조석명(趙錫命)을 판돈녕으로, 김한철(金漢喆)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삼았다.
검열 이명식(李命植)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조께서 작년 겨울에 도승지에게 한원(翰苑)054) 의 당상을 겸하게 하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도승지는 곧 계묘년055) 방중(榜中)의 사람으로 그 과명(科名)은 비록 고쳤으나 입신(立身)이 부정하므로 신이 사사로이 일찍이 마음속으로 그르게 여기고 말로 공척(攻斥)했었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고 참판 신 조석윤(趙錫胤)은 정세규(鄭世規)가 이조 판서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으로 사실(私室)에서 대략 논하면서 수작했었는데, 그가 아전(亞銓)에 제수되기에 이르러서는 이것으로 스스로 인구(引咎)하여 결국은 체파(遞罷)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배들의 처의(處義)가 구차스럽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신이 그를 공척한 것은 조석윤이 정세규를 논한 정도 뿐만이 아니었고 당상과 낭청의 분의는 장아(長亞)의 사이 정도일 뿐만이 아니니, 신이 어떻게 감히 낭속(郞屬)이 되는 것을 달게 여겨 스스로 본디 품은 마음을 저버림으로써 거듭 조석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처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검열 정창성(鄭昌聖)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이명식(李命植)의 서본(書本)을 살피건대 그가 인혐한 것은 곧 도승지 이철보(李喆輔)의 계묘과(癸卯科)에 대한 일이었습니다. 신의 아비 정광은(鄭光殷)도 또한 그 과방(科榜)에 참여되어 있었는데 그의 서본이 비록 신의 집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이 이미 그 과명(科名)을 거론하여 공척하였으니, 신의 통분스런 사심(私心)과 자처(自處)하는 의리에 있어 결단코 잠시라도 무릅쓰고 직차(職次)에 버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3월 19일 을해
임금이 영화당(映花堂) 뜰에서 황단(皇壇)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고나서 승지에게 명하여 슬픈 회포가 있어 그 회포를 기록한 시(詩)를 쓰게 하였다. 검열 이명식(李命植)을 보안 찰방(保安察訪)으로 출보(黜補)시키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도승지 이철보(李喆輔)가 오늘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문하였더니 이명식이 상서해서 옥신각신한 것 때문이라고 하였다. 아! 내가 비록 노쇠하였으나 여러해 동안 고심하여 왔으니, 이명식이 비록 지난 겨울 눈물을 흘린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떻게 감히 다시 오늘날 그런 습관을 부릴 수 있겠는가? 그의 소장을 되돌려 주고 보안 찰방에 제수하되 당일 사조(辭朝)하게 하라. 이런 등등의 소장을 어떻게 감히 준례에 따라 봉입(捧入)할 수 있단 말인가? 해당 승지는 체차시키라."
하였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동래부(東萊府)의 예단삼(禮單蔘)에 관한 일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당초 다시 체삼(體蔘)으로 지급한 것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조처였습니다만 1년에 지급하는 것이 2백여 근(斤)에 이르고 있으니, 실로 계속 잇대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등등의 일을 어찌하여 동궁에게 품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이는 변경에 관계된 중대한 일입니다. 이번에 단삼(單蔘)을 개봉(開封)도 하지 않고 되돌려 보냈으니, 이는 훈도(訓導)들이 잘 주선하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따라서 또한 처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3월 20일 병자
오시(午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사방이 어둠침침하여 마치 티끌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정언 이명환(李明煥)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최석항(崔錫恒)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전후의 합사(合辭)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비록 대조께서 내린 연전의 처분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그의 죄악이 천지에 꽉 찼다는 것을 성감(聖鑑)이 이미 통촉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해 겨울 관작을 회복시키라는 명령이 여러 사람들의 뜻밖에서 갑자기 내려졌습니다. 눈앞의 대론(大論)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데 이미 거행하게 한 왕장(王章)을 한번 동요시킴에 따라 시비가 서로 혼동되는 것은 물론 효경(梟獍) 같은 역적의 잔당들이 이로 인하여 다른 마음을 먹게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더욱 개연스러운 것은 관작을 회복시키라는 명령이 내리던 날 조신(朝臣)들이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여 있었는데도 끝내 한마디 아뢰어 바로 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들어가 대조께 여쭈어 속히 최석항의 관작을 회복시키게 하소서.
홍준해(洪準海)가 시임 정승을 논척(論斥)한 것은 실로 일세(一世)의 공의를 채택한 것인데 언자(言者)는 쫓겨났고 정승은 그대로 있으니, 이는 형정(刑政)이 정당한 데 어긋난 것으로 또한 성조(聖朝)에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양천(李亮天)의 소장 내용은 그다지 관계되는 것이 없는데도 이에 홍준해와 같은 죄를 받았습니다. 바야흐로 은택이 널리 내려지고 있는 때를 당하여 전후 견적(譴謫)당한 사람도 모두가 은유(恩宥)를 받고 있는데 유독 이 두 사람만이 먼 바닷가로 귀양가서 살아서 돌아올 기약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두 사람에게는 모두 노모(老母)가 있기 때문에 골육이 생이별을 하고 피눈물로 날을 보내고 있다고 하니, 이것도 또한 자애로움으로 감싸주는 하늘로서는 의당 슬프고 가엾게 여겨야 할 일입니다. 또한 원하건대 저하께서 대조께 앙품하여 속히 홍준해·이양천의 귀양을 풀어주게 하여 주소서. 곧 조지(朝紙)056) 를 접하니 검열 이명식(李命植)을 외직에 보임시키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가 고집한 것은 숭상할 만한 것인데도 이렇게 꺾어누르는 거조가 있으니, 이는 사기(士氣)를 배양하는 방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또한 삼가 바라건대 대조께 진달하여 즉시 성명(成命)을 중지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이제 이 상서를 열람하건대 대조의 전후 하교를 생각하지 않고서 방자스럽게 하는 것이 이러하니, 이미 한심스러운 데에 관계된다. 더구나 지난 겨울 홍준해·이양천의 일 때문에 성심(聖心)이 미령하시어 중외(中外)에서 초조하고 당황해 하기에 이르렀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오히려 마음이 깜짝 놀랄 지경이다. 아! 저 사람이 신자(臣子)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일의 무엄하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정언 이명환(李明煥)을 우선 체차시키고 그의 소장은 되돌려 주라."
하고, 또 하령(下令)하기를,
"영해(嶺海)로 귀양보내되 이틀 걸을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押送)시키라."
하였다.
좌승지 김치인(金致仁)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정언 이명환(李明煥)을 귀양보내라고 한 명에 대해 신은 삼가 지나친 조처라고 여깁니다. 아! 저 이명환은 신진(新進) 소관(小官)으로 대지(臺地)에 새로 들어왔으니, 그가 진달한 논의는 스스로 숨김없이 아뢴다는 정성에 의탁한 것입니다. 따라서 혹 예심(睿心)을 거스르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조용히 가르쳐 나무라야 하는 것인데 이제 이에 지나치게 꺾어 눌러 먼저 체직시키고 나서 계속해서 이런 위노(威怒)와 견책에다 노정(路程)을 엄중하게 하여 떠나라는 명령이 갑자기 있게 되었으니, 경색(景色)이 수심(愁心)에 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청명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이명환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신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대각의 중직(重職)인 것입니다. 처분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조금 전의 처분은 실로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은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진달한 내용이 이러하니, 귀양보내라는 영(令)은 환수하겠다. 다만 체직시키라."
하였다.
3월 23일 기묘
5릉(陵)의 영건청 당상(營建廳堂上)인 공조 참판 심성진(沈星鎭)·예조 참의 이익보(李益輔)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낭청(郞廳)인 노수(盧脩)·한후유(韓後裕)는 모두 승서(陞敍)시키고, 감역(監役) 이헌진(李憲鎭)·능관(陵官) 정만순(鄭晩淳)·박재원(朴載源)·이수(李琇)·이사질(李思質)은 모두 승륙(陞六)시키고, 영역 부장(領役部將)은 변장(邊將)에 제수하고, 사자관(寫字官)·공장(工匠) 등에게는 미포(米布)를 제급(題給)하고, 서사관(書寫官)인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와 홍계희(洪啓禧)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匹) 씩을 면급(面給)하도록 명하였다.
심성진(沈星鎭)·유언국(兪彦國)·조중회(趙重晦)를 승지로, 박치문(朴致文)을 사간으로, 이조망(李朝望)을 지평으로, 이육(李堉)·이성경(李星慶)을 정언으로, 홍중효(洪重孝)를 부수찬으로, 심발(沈墢)을 보덕으로, 이우(李堣)를 필선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동경연으로, 오혁(吳)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를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지난번의 청대(請對)는 답답한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천리와 인정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지나치게 고집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아직도 변경의 일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경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호조 판서와 동래 부사가 모두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래 부사가 조령(朝令)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먼저 올려보낸 것은 아주 잘못이다."
하였다.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지난번 예단삼(禮單蔘)에 대해 신칙시킨 것은 바로 교린(交隣)의 도리를 중히 여겨서인 것이다. 그런데 기강이 해이해져 오히려 농간을 부리는 일이 있으니 저들로 하여금 이를 핑계삼아 영(令)이 있기 전의 삼(蔘)까지도 받지 않게 하였다. 이 신칙은 나라 안에서만 행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 영이 스스로 날아서 왜관(倭館)으로 갔단 말인가? 임역(任譯)들이 거조(擧條)를 등서(謄書)하여 저들에게 보여준 소치인 것으로 이는 모두 임역들이 저지른 일이다. 지난번 결곤(決棍)한 뒤 만일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저들을 꾀어내고 내백(萊伯)을 속이고서 막중한 예단삼을 조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멋대로 올려 보낼 수 있겠는가? 해당 훈도(訓導)·별차(別差)는 통제사(統制使)로 하여금 군대의 위엄을 벌려놓고 세 번 돌려서 보이게 한 다음 곤장 50대를 치고나서 해도(海島)에 정배(定配)시키라. 아! 내백의 백(伯) 자가 어찌 범연한 것이겠는가? 일부(一府)의 백(伯)으로 대우했는데도 하찮은 이런 등류의 일을 사리에 의거하여 쟁집(爭執)하지 못하고서 감히 등문(登聞)하였으니, 이는 조정의 명관(命官)이 아닌 것이다. 부사 신위(申暐)는 남해현(南海縣)으로 귀양보내고, 전 부사 조재민(趙載敏)은 해미현(海美縣)에 귀양보내라. 삼을 다듬은 사람은 한 차례 엄형(嚴刑)을 가하여 먼 곳에 귀양보내고, 탁지(度支)의 신하는 의금부에 내려 추고(推考)하게 하라. 장단 부사 이이장(李彛章)을 동래 부사에 제수하라."
하고, 송덕상(宋德相)을 계방(桂坊)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송덕상은 곧 선정(先正) 송시열(宋時烈)의 현손(玄孫)인데, 이천보가 천거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만식(李萬軾)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자가 그의 아비 이혼(李混)이 억울하다는 것으로 금호문(金虎門) 밖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한 지가 이미 수년이 되었습니다. 이혼이 범한 죄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왕래하면서 보기에 매우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경술년057) 옥사에 관계된 일이다. 이혼의 일은 매우 잔인한 것이었다."
하였다.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지난번 이은정(李殷鼎)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몹시 불쌍하게 여겼다. 그런데 또 듣건대 이만식이 문밖에 엎드려 운다고 하니, 또한 매우 딱하고 불쌍하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문안(文案)을 조사하여 등대(登對) 때에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5일 신사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접하였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평양 서윤(平壤庶尹) 박사백(朴師伯)은 청렴하고 대범해 사건의 본말을 종합하여 상세히 밝히며, 목천 현감 김창운(金昌運)은 정치를 잘한다는 소문이 많이 들리는데도 간신(諫臣)의 한 상서에서 잘 다스리고 있는 두 수령을 논핵하였으므로 물정(物情)이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사간 심익성(沈益聖)을 마땅히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신과 금오 당상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혼(李混)의 초사(招辭)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사실이 황탄(謊誕)스러운데도 지금껏 신설(伸雪)되지 않았으니, 불쌍하고 가련하다."
하니,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무신년058) 의 옥사(獄事)에는 누락된 것이 많고 경술년059) 의 옥사에는 억울한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도 잔인한 경우는 목천임(睦天任)이었다. 신문(訊問)할 때 단지 속히 죽여주기만을 원했었다."
하였다.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의 상언(上言)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완천(完川)의 일은 더욱 원통하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초사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또한 계획이 헛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완천이 이미 백탈(白脫)060) 되었는데 낙춘(洛春)의 일도 또한 잔인하였다. 이제 신설시키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대합니다."
하였다. 이경지(李慶祉)의 초사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애매한 일이다."
하니,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무부(武夫)로서 무신년 전에 6적(賊)과 절교(絶交)하지 않았던 것은 또한 괴이하게 여겨질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내가 온천에 갈 때 이은정(李殷鼎)의 혈소(血訴)를 듣고 마음으로 매우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겨 하교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런 등등의 일은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잇따라 신설시킬 수 없는 것이어서 아직껏 말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전은군(全恩君) 이돈(李墩)과 이만식(李萬軾)의 일로 인하여 문안을 가져다 조사하여 보았다. 전 완천 도정(完川都正) 이엽(李燁)의 일은 대저 심익연(沈益衍)의 공초에 교묘한 거짓과 황탄스러운 것이 많이 있는데도 지금까지 단서(丹書)061) 에 들어있는 것은 왕정(王政)에 있어 흠결인 것이다. 목천임(睦天任)은 그때에도 마침내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는데 같은 일로 벌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이미 복관(復官)되었으니, 이직껏 단서에 그대로 들어있게 하는 것은 또한 상세히 살핀다는 것에 흠결이 된다. 이혼에 대해서는 그때 두세 번 하문했던 그 일을 중히 여긴 것에 불과했던 것인데 신문하기에 이른 것은 이미 지나친 것이었다. 이동혁(李東赫)의 공초(供招)도 또한 황탄스러운 데 관계되는 것이니, 특별히 신설시켜 그의 아들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라. 이경지(李慶祉)는 이주연(李周衍)의 공초가 매우 황탄스러운 데 관계되는 것이었으며 그 아들의 혈소(血訴)가 사람을 감동시키게 하였다. 전 완천 도정 엽, 전 직장(直長) 목천임, 전 영장(營將) 이경지에는 모두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이혼도 단서에서 설원시켜 주라. 일로 인하여 생각건대 더욱 측은한 사람이 있다. 전(前) 낙춘군(洛春君) 이전(李㙉)은 그 인품을 알고 있으므로 마음으로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다. 일은 같은데 혼자만 누락시키는 것은 이를 어찌 왕정(王政)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똑같이 직첩을 돌려주라. 아! 이혼의 일은 그 아들에게 감동되어 문안을 조사하여 처분을 내린 것이다. 기타 4인은 항상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이제 노쇠한 나이에 만일 처분을 내리지 않는다면 아! 이 5인이 언제 단서에서 소설(昭雪)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국체(國體)는 엄한 것이니 이 뒤로 이로 인하여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면 왕부(王府)에서 심리(審理)하라."
하였다. 윤급(尹汲)을 발탁하여 한성 판윤으로 삼았는데, 이천보(李天輔)가 아뢴 것을 따라서 종2품을 가망(加望)하게 한 것이다. 또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으니, 김상로가 아뢴 것으로 인하여 예단삼(禮單蔘)을 잘 살펴 신칙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포장(捕將) 조동점(趙東漸)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성내(城內)를 기포(譏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성내에 도둑이 많이 발생하였는데 사족(士族)들의 집에도 들어갔다고 한다.
3월 26일 임오
김상중(金尙重)을 승지로, 이성중(李成中)을 대사헌으로, 엄우(嚴瑀)를 대사간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집의로, 이사관(李思觀)을 사간으로, 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이기덕(李基德)을 지평으로, 이운해(李運海)를 정언으로, 홍중효(洪重孝)를 헌납으로, 이익보(李益輔)를 공조 참판으로, 신만(申晩)을 판의금으로, 김성우(金聖佑)를 사서로, 한광회(韓光會)를 부응교로, 이중조(李重祚)를 필선으로 삼았다.
정언 이육(李堉)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어제 내리신 하교를 보건대, 이엽(李燁) 등 5인을 신설(伸雪)시켜 복관(復官)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신은 놀라고 개탄스럽고 의아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대저 역옥(逆獄)이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이제 한 죄인의 아들이 원통하다고 호소하는 것으로 5인을 일례(一例)로 모두 신설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의 옥정(獄情)을 신이 상세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만일 좌죄(坐罪)된 것이 혹시 억울한 데 관계된다면 당초 참작하여 조처하는 것은 그래도 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일이 오래된 뒤에 특별한 다른 단서가 없는데도 갑자기 관대하게 풀어주는 것이 어찌 옥체(獄體)를 중대히 여기는 방도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대조께 앙품하여 신중히 살펴 속히 성명(成命)을 환수하게 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 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조께서 처분을 내린 일인데 어떻게 다시 앙품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부수찬 홍중효(洪重孝)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단삼(禮單蔘)의 일 때문에 임역(任譯)들을 곤장을 쳐서 도배(島配)시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종전에 왜인들이 약조한 것 이외의 것을 바란 것은 모두 임역들이 잘 주선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들에게 유인당한 소치였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곤장을 쳐서 도배시키는 것은 실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성대한 덕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다만 통영(統營)과 동래부의 거리는 수백여 리(里)가 되는데 왜인들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부산 첨사로 하여금 군대의 위엄을 벌려놓고 곤장을 쳐서 저들로 하여금 조정의 처분을 눈으로 보도록 한다면 반드시 두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교유(敎誘)하고 농간을 부린 죄를 논한다면 소통사(小通事)들이 임역보다 더 심할 것이니, 그 가운데 가장 무상한 자 한두 사람을 조사해 내어 효시하여 여러 사람을 경계시키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호조 판서의 견파(譴罷)가 이미 이 일에 좌죄(坐罪)된 것이라면 신은 저들이 이런 사실을 들을 경우 더욱 그 기세를 돋구게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따라서 이 뒤로도 점퇴(點退)062) 하는 것이 한량이 없게 될 것이니,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서의 내용은 묘당으로 하여금 등대(登對)할 때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3월 27일 계미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063) 의 시재(試才)를 설행하였는데, 임진년064) 의 명장 곽재우(郭再祐)의 자손과 곽재우의 방손(傍孫) 곽정후(郭禎垕)를 녹용하여 권무 군관(勸武軍官)에 넣게 하였다. 임금이 그에게 홍의 장군(紅衣將軍)의 겨레붙이냐고 하순(下詢)하고 나서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목천임(睦天任) 형제가 신설(伸雪)되지 않아서 그 아들들이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똑같이 신설시키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팔금(八金)도 석방시키려 한다."
하니,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대간에서 아뢰고 있는 중입니다."
하자,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윤용리(尹用履)를 결말 지은 뒤에 팔금에 대해서는 의당 즉시 정지해야 하는데 아직도 정지하지 않고 있다고 하니, 정지하지 않은 대간은 모두 파직시키라. 우로(雨露)는 땅을 가리지 않고 내리는 법이다. 재작년에 이미 처분을 내렸으나 그때 비천한 사람과 혹 상한(常漢)으로서 원통하게 죄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대신과 금오 당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상세히 조사한 다음 별단(別單)으로 써서 들여오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듣건대 호조에서 삼(蔘) 1근(斤), 미삼(尾蔘) 5냥을 지급하여 조삼(造蔘)하게 했다고 하는데, 이는 호조에서 조삼하게 한 것이니 계인(契人)들의 죄가 아닌 것이다. 왜역(倭譯)에게 곤장을 치는 것을 통제사(統制使)에게 거행하게 했었는데 이제 유신(儒臣)이 상서하여 진달한 내용을 들어보니, 좌수사(左水使)로 하여금 거행케 해야겠다."
하였다.
3월 28일 갑신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 김약로(金若魯)를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오랫동안 입진(入診)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김약로가 춘당대(春塘臺)의 장전(帳殿)에서 자세히 진청(陳請)하는 가운데 말을 가리지 않는 것이 많았다. 하교하기를,
"군신(君臣)은 분의(分義)가 엄절(嚴截)한 것이다. 직책이 도제조(都提調)로 있으면서 입진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청하는 것은 사리상 당연한 것이요, 지성으로 아뢰었으니 혈성(血誠)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말하는 과정에서 매우 말을 가리지 않았으니 기강을 중하게 여기고 국체(國體)를 엄격하게 하는 방도에 있어 계칙시키는 조처가 없을 수 없다. 판부사 김약로는 파직시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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