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병술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근래 대신(臺臣)들이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이 하나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상참은 곧 대조회(大朝會)인 것인데 대신(臺臣)에게 모두 세 번 패초하였으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정시(正時)가 이미 지나 오고(午鼓)가 장차 울리게 되었으니, 사헌부의 두 대신이 아니었으면 상참이 정지될 뻔하였습니다. 패초를 어긴 대신(臺臣)들은 삭직(削職)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집의 정기안(鄭基安)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응교 한광회(韓光會)가 말하기를,
"죄인을 신설(伸雪)시킨 것이 비록 대조께서 불쌍히 여겨 돌보는 성덕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대각(臺閣)의 처지에서는 쟁집(爭執)하는 의논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집의 정기안은 입대한 뒤에도 발론하여 상달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체차시키소서."
하고, 또 지평 이기덕(李基德)의 처의(處義)가 곧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으로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4월 2일 정해
윤득징(尹得徵)을 사간으로, 김이만(金履萬)을 집의로, 박치륭(朴致隆)을 헌납으로, 이헌묵(李憲默)·유건(柳健)을 정언으로, 서효수(徐孝修)를 수찬으로, 채제공(蔡濟恭)을 부수찬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을 전직(前職)에 잉임(仍任)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영남 어사(嶺南御史) 이득종(李得宗)을 인견하였다. 군위 현감(軍威縣監) 남태보(南泰普)는 승서(陞敍)시키고, 전 울산 부사 남학종(南鶴宗)·전 통제사 정찬술(鄭纘述)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처하게 하라고 명했는데, 어사의 별단을 따른 것이다.
임금의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태묘(太廟) 하향 대제(夏享大祭)의 서계(誓戒)에 친림하였다.
4월 3일 무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조석명(趙錫命)이 졸(卒)하였다.
김상복(金相福)을 부제학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부수찬으로, 한광조(韓光肇)를 겸 문학으로 삼았다.
4월 8일 계사
임금이 태묘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폈다.
4월 9일 갑오
임금이 태묘의 하향제(夏享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내 나이 19세 때 섭행(攝行)의 초헌관(初獻官)으로 여기에 왔었고 다음해에 또 영녕전(永寧殿)의 헌관이 되기를 요구하여 차임되었다. 이제 육순 나이에 비궁(閟宮)065) 에서 대향(大享)을 지내게 될 줄 처음에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태묘 수복(守僕)들의 삭료(朔料)는 별감의 예에 의거하여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환궁할 때 동성(東城)에 임어하여 여(輿)에서 내려 성을 돌아보고나서 유신(儒臣)들에게 치성(雉城)에 대한 이해(利害)를 진달하라고 명하였다. 부응교 한광회(韓光會)가 말하기를,
"성이 넓으면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어서 예로부터 40리(里)나 되는 성을 잘 지켜낸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는 훈계(訓戒)가 제일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하고, 교리 한광조(韓光肇)는 말하기를,
"성이 아무리 공고해도 장수가 적임자가 아니면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성을 지키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는 것이지 성을 쌓는 데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고, 부수찬 채제공(蔡濟恭)은 말하기를,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장맛비를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의 껍질을 가져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만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는가?〉 했는데, 오늘 한 가지를 방비하고 내일 또 한 가지를 방비하면 바로 《시경》의 뜻대로 되는 것은 물론 이는 실로 국가의 원대한 모유(謨猷)가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들의 소견이 모두 옳다."
하고, 치성(雉城)을 축조하는 역부(役夫)들에게 술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러 여를 멈추고 감회시(感懷詩)를 쓰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섭행의 초헌관이 되었을 때 용두(龍頭)는 의당 왼쪽을 향하게 해야 한다는 성교(聖敎)가 있으셨다."
하였다. 【술잔의 왼쪽에 용의 머리를 새겼다.】
【태백산사고본】 57책 79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485면
【분류】왕실-경연(經筵)
[註 065] 비궁(閟宮) : 종묘.
4월 10일 을미
장령 이택징(李澤徵)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신년066) ·경술년067) 의 두 옥사(獄事)는 사적(史籍)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으로 그에 간련(干連)된 데에는 각기 단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사(爰肆)068) 와 공안(供案)이 칡덩굴처럼 어지러이 얽혀 있기 때문에 복헌(覆讞)을 기다리지 않고 갑자기 신설(伸雪)을 시행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근래 그 자손들이 억울함을 호소한 것으로 드디어 7명의 죄인을 신원(伸冤)시키라는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만, 방한(防限)이 한번 무너지면 실로 큰 걱정이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마를 탄 부류들이 궐문 밖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혈서(血書)로 된 글을 난가(鑾駕) 앞에서 올리기에 이르렀는데도 입시한 여러 신하들은 단지 임금의 뜻을 받들어 따를 줄만 알 뿐이니, 삼가 대료(大僚)에 대하여 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해당 의금부 당상은 견책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대조의 덕의에서 나온 조처이다. 옥관(獄官)에게 견책을 가하라는 청은 지나치다."
하였다.
수찬 채제공(蔡濟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학문하는 방도는 제왕(帝王)과 필서(匹庶)를 막론하고 모두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책을 통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고 그 이치를 궁구하여 일에 응용해야 하는데 무릇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하는 방도를 모두 여기에서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글을 읽는 방법에 있어 두 가지 걱정이 있으니, 그것은 곧 편수(遍數)가 많지 않는 것과 일과(日課)에 간단(間斷)이 있는 그것입니다. 제왕의 학문에 진실로 간단하는 일이 있게 되면 무릇 기기(奇技)·음교(淫巧)가 그 사이를 파고 들어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게 됩니다. 화리(貨利)는 증식시키고 싶고 성색(聲色)은 즐기고 싶고 부시(婦時)069) 는 친하고 싶은 것인데 이 몇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앞에 나오게 되면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을 점점 소원하게 대하게 되어 아주 잊어버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 경우가 드뭅니다. 근일 예후(睿候)에 간간이 작은 질병이 발생하여 서연(書筵)에서 소대(召對)를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는데, 비록 문구(文具)에 응하여 예수(禮數)만 갖추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하께서 깊은 구중 궁궐에 거처하면서 소일(消日)하는 것이 무슨 일이며 공력(工力)을 들이는 것이 무슨 일입니까? 다행히 이제 해가 점점 길어지고 천기(天氣)가 청화(淸和)하여져 가고 있으니, 체후가 조금 평복(平復)되기를 기다려 서정(書程)을 엄하게 정하여 편수는 흠씬 젖도록 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일과(日課)는 간단이 있게 되는 것을 경계하여 성인이 순일하여 또한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를 삼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절실하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 11일 병신
사헌부 【장령 이택징(李澤徵)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윤광찬(尹光纘)은 목호룡(睦虎龍)을 위훈(僞勳)에 올릴 때 추증(追贈)된 관질(官秩)을 조금도 거리낌없이 그 판적(版籍)에 썼습니다. 그가 이미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국법에 의해 처단된 흉적(凶賊)의 위훈이 이미 삭제된 뒤에 멋대로 누차 써서 선대를 영화롭게 하고 후손을 빛나게 하는 자료로 삼고 있으니, 국법을 무시하고 역맥(逆脈)을 비호한 것이 어찌 윤광찬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소서. 이성술(李聖述)이 일찍이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로 있었을 적에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였던 역적들을 모두 먹으로 지운 것을 살렸고 또 자기 할아비가 목호룡의 위훈이 있을 때 추증받은 관질(官秩)을 장적(帳籍)에 기재하여 죄벌을 무시하고 과장(科場)에 들어갔다가 죄가 삭과(削科)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영관(瀛館)070) 의 선발은 책임이 매우 중한 것인데 조숙(趙)이 어리석고 무식한 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이므로 물정(物情)이 믿지 않아서 동렬(同列)들에게 수치를 끼치고 있으니, 개정(改正)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된다."
하였다.
지평 김원행(金元行)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천지 사이의 한 궁민(窮民)입니다. 일찍이 혹독한 화(禍)를 당하여 지극한 아픔이 가슴속에 가로질러 있는데 황야에 귀양가 있을 적에 형체는 보존되었지만 정신은 이미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영구히 농부가 되어 남은 생애를 마치려 했었는데 십수년 전에 외람되이 일명(一命)071) 을 받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또 작년부터 무단히 갑자기 승진하게 되었는데 대각(臺閣)의 준선(埈選)은 더욱 외람되기가 그지 없습니다. 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광영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는 평인(平人)으로서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의 말인 것이요, 신과 같은 처지의 사의(私義)에 있어서는 항품(恒品)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신의 집의 당일의 화(禍)를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을 낳아준 할아비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은 선조(先朝)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마음속으로 순국(殉國)할 것을 맹세하여 태평할 때나 험난할 때나 한결같이 절개를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흉당(凶黨)들에게 미움이 누적된 탓으로 참독(慘毒)스런 칼날이 삼세(三世)까지 모두 미치게 되었으므로 문호(門戶)가 완전히 탕복(蕩覆)되어 세상 사람들도 슬퍼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오히려 지금까지 억장이 무너지고 피눈물을 삼키고 있었는데, 신은 불효한 탓으로 변고가 망극하던 때를 당하여 가슴과 배를 가르고 스스로 천하(泉下)072) 로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뒤에 성명(聖明)을 만나서도 오히려 죄받을 것이 두려워 침묵을 지키면서 한 번도 원통한 정상을 드러내지 못한 채 두려워하면서 겉에 나타내지 않고 참고 견디며 살아왔으니, 동이를 이고 울부짖으면서 하늘을 보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격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지극히 인자하고 지극히 현명하신 대조께서 유왕(幽枉)을 통찰하여 주지 않으셨다면 끝내 단서(丹書)의 죄적(罪籍)을 씻어 구천에 있는 영혼을 위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의 형인 신 김성행(金省行)이 증직(贈職)의 은혜를 받기에 이르러서는 깊이 돌보아주고 높이 장유(奬諭)하여 준 것이 더욱 더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이 비록 스스로 변백(辨白)하지 않아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스스로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는 것은, 신의 정성이 천박하여 신의 할아비의 당일의 혈충(血忠)을 스스로 일월(日月) 같은 성명(聖明)께 진달하지 못하여 하마터면 끝내 영구히 가려 덮여지게 할 뻔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소설(昭雪)시키는 은혜를 받은 뒤에 일종(一種)의 참적(讒賊)들의 말이 오히려 멋대로 현혹시키고 있는데도 신이 또 한 마디도 변백하지 못한다면 이런 손자가 장차 어떻게 세상에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속히 신을 체직시키고 조적에서 삭거(削去)시킴으로써 전려(田廬)에서 생애를 끝마치게 하소서."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4월 13일 무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종신들에게 강경(講經) 시험을 보여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전 판부사 김약로(金若魯)를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권혁(權爀)을 대사헌으로, 윤동준(尹東浚)을 대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집의로, 정기안(鄭基安)을 사간으로, 민우(閔堣)를 장령으로, 이홍직(李弘稷)을 헌납으로, 조종부(趙宗溥)를 지평으로, 조엄(趙曮)을 정언으로, 윤광의(尹光毅)를 형조 참판으로, 김약로(金若魯)를 판중추 부사로 삼았다.
장령 이택징(李澤徵)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시키라고 명하였으니, 조숙(趙)의 영선(瀛選)을 개정(改正)하기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조동점(趙東漸)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4월 14일 기해
진사 이성술(李聖述)을 대정현(大靜縣)에다 연한을 정하지 말고 도배(島配)시키며, 전 승지 윤광찬(尹光纘)은 해남현(海南縣)의 극변(極邊)에 정배(定配)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성술의 아버지인 이형수(李衡秀)는 임인년073) 의 녹훈(錄勳)에 참여되었으므로 그의 아버지를 준례에 따라 증직(贈職)시켰는데, 을사년074) 에 위훈(僞勳)으로 판정되어 삭훈(削勳)시켰다. 그리고 이성술이 장의(掌議)가 되었을 때 소하(疎下)의 6적(六賊)을 모두 먹으로 지운 것을 살려 놓았다. 이성술이 급제되기에 이르러 수찬 서효수(徐孝修)가 그의 호봉(糊封)에 기록된 4조(四祖) 가운데 증직(贈職)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임인년에 증직된 것을 쓴 것으로 여겨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엄중히 처단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사하니 바로 효행에 의거하여 증직된 것이었다. 그뒤 경조(京兆)에서 또 이성술의 을사년 이후의 장적(帳籍)을 조사하여 보니 과연 삭훈된 뒤에 증직을 기재하였었다. 윤광찬은 이형수의 생질인데 또한 외조(外祖)의 증직을 썼다. 이는 이택징(李澤徵)이 발각하여 진달하였고 대신도 또한 엄중히 처단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윤광찬은 그의 아우 윤광소(尹光紹)와 함께 동시에 급제하여 기세를 돋구어 남을 무시하였으며, 또 당론을 준렬하게 주장했으므로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한익모(韓翼謨)를 내직으로 천전(遷轉)시키라고 명하였다.
조동하(趙東夏)를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4월 15일 경자
유성이 항성(亢星) 아래에서 나와서 동방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4월 17일 임인
신사건(申思建)을 강화 유수로 삼았다.
4월 18일 계묘
지평 조종부(趙宗溥)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중효(洪重孝)는 명색이 유신(儒臣)으로서 지난번의 상서에서 〈한(漢)나라 때〉 유씨(劉氏)·여씨(呂氏)니 창상(滄桑)·겁회(劫灰)니 하는 등등의 말이 있었는데 매우 패려스러워 보고 듣기에 놀랍기 그지없으니, 영원히 사적(仕籍)에서 간삭(刊削)시키소서. 대각(臺閣)의 언의(言議)는 그것이 얼마나 엄중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윤광찬(尹光纘)의 일이 발각난 뒤 서지수(徐志修)가 글을 보내어 대신(臺臣)을 만류시키고 청탁한 것이 진신(搢紳)들 사이에 전파되어 전설(傳說)되고 있으니, 엄중한 죄벌을 가하여 당습을 징계시키소서."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다는 답을 내렸다.
4월 21일 병오
이조망(李朝望)을 지평으로, 원경하(元景夏)를 판돈녕으로, 한익모(韓翼謨)를 병조 판서로, 이성중(李成中)을 우윤으로, 서지수(徐志修)를 승지로 삼았다.
전 통제사(統制使) 정찬술(鄭纘述)을 직산현(稷山縣)으로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는데, 통영(統營)에서 올라올 적에 교자(轎子)를 탔기 때문이었다.
4월 22일 정미
지평 이조망(李朝望)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대신이 몸소 보호하는 직임에 있으면서 전석(前席)에서 간절히 진달함에 있어 말이 뜻을 통달시키지 못하여 과연 망발이 있게 되었고 갑자기 처분을 받게 되었으니, 의당 요석(僚席)의 대신이 광구(匡捄)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조숙(趙)이 이에 옥서(玉署)의 신하로서 차자를 올려 많은 말을 허비해 가면서 대신을 구원하였으니, 직책을 휴손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매우 아첨하여 빌붙는 것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홍준해(洪準海)·이양천(李亮天)은 한마디 말을 내뱉어 곧이어 절해(絶海)에 귀양보냈는데, 은택을 널리 베푸는 마당에 유독 관전(寬典)에서 누락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조께서 앙품하여 속히 석방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숙의 일은 대조의 하교가 엄절하였는데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홍준해·이양천의 일은 어찌하여 그렇게 영구(營救)하는 것인가? 진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하였다.
4월 23일 무신
대신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우상이 비록 병 때문에 나오지 못하고 있으나 이조망(李朝望)이, 조숙(趙)이 차자를 올려 도제조를 영구한 것을 아첨하여 빌붙는 것이라고 지목했기 때문에 이 일로써 불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지평 이조망을 해남현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어 지통(持通)과 정통(正通)에 대해 신칙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고 영돈녕(領敦寧) 조현명(趙顯命)은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 지극한 효행이 있었으며, 추후 거상(居喪)한 한 가지 일은 그것이 예경(禮經)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나이 60세가 넘은 대신이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여묘살이 하다가 병이 생겨 서거(逝去)하였으니, 김유경(金有慶)의 예에 의거하여 특별히 정려(旌閭)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천보가 또 말하기를,
"고 징사(徵士) 김창흡(金昌翕)은 곧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인데 지기(志氣)의 고상(高尙)함이 월등히 뛰어났는데도 산속에서 은둔하여 지냈으며, 기사년075) 의 화란(禍亂)을 당한 이후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그 일생을 마쳤습니다. 선조(先朝)께서 정초(旌招)한 예에 대해 공의(公議)가 너무 늦었음을 애석하게 여겼으니, 이렇게 선비의 절개가 없어진 때를 당하여 더욱 마땅히 표장(表章)해야 합니다. 청컨대 특별히 증직(贈職)시키소서."
하니, 이조 판서에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의 체직을 허락한다고 명했다. 지평 조종부(趙宗溥)가 다시 전일의 언설(言說)을 따져 당수(黨首)로 지목했는데 대신이 진백(陳白)하였다. 왕세자를 시좌(侍坐)하게 하고 춘방(春坊)의 상하번(上下番)도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는 무슨 글을 강(講)했는가?"
하니, 보덕(輔德) 박치문(朴致文)이 대답하기를,
"어제는 양연(兩筵)을 행했습니다만, 오늘은 단지 서연(書筵)만 행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앞서 가르친 음독(音讀)은 무슨 글인가?"
하니, 박치문이 대답하지 못하자,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사물잠(四勿箴)076) 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시잠(視箴)을 외게 하니, 왕세자가 배송(背誦)하였다. 임금이 학문에 부지런할 것과 정사에 부지런할 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면려하고 계칙하는 하교를 내렸다. 이어 춘방관은 가려서 의망하라고 명하였는데, 보덕이 앞서 가르친 음독에 대해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는 충효(忠孝)라는 시호를, 좌의정 정석오(鄭錫五)에게는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는 익효(翼孝)라는 시호를,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에게는 정희(靖僖)라는 시호를, 예조 판서 이언강(李彦綱)에게는 정효(貞孝)라는 시호를, 좌의정 유관(柳灌)에게는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지돈녕 이석(李晳)에게는 장정(莊靖)이라는 시호를, 증 좌찬성 김석연(金錫衍)에게는 정희(貞僖)라는 시호를, 병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에게는 정의(貞毅)라는 시호를, 증 영의정(領議政) 장운익(張雲翼)에게는 정민(貞敏)이라는 시호를, 증 좌찬성 장붕익(張鵬翼)에게는 무숙(武肅)이라는 시호를, 예조 판서 엄즙(嚴緝)에게는 정헌(貞憲)이라는 시호를, 증 영의정 정수기(鄭壽期)에게는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예조 판서 노진(盧槇)에게는 헌민(憲敏)이라는 시호를, 이조 판서 신명인(申命仁)에게는 정청(貞淸)이라는 시호를, 공조 판서 이광적(李光迪)에게는 정헌(靖憲)이라는 시호를, 증 좌찬성 최경회(崔慶會)에게는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판윤 임열(任說)에게는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증 영의정 신정(申晸)에게는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이조 판서 남선(南銑)에게는 정민(貞敏)이라는 시호를,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에게는 충정(忠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종백(李宗白)을 대사헌으로, 임순(任珣)을 사간으로, 이인원(李仁源)·이의로(李宜老)를 정언으로, 성천주(成天柱)를 교리로, 이현중(李顯重)을 부교리로, 신민(申旼)을 승지로, 심발(沈墢)을 보덕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사인(舍人)으로, 이창의(李昌誼)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4월 25일 경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접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대조께서는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는 것으로 후손을 평안하게 해주는 모유(謨猷)로 삼으셨습니다. 사가(私家)의 경우로 말한다면 부형(父兄)으로서 자제들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대조께서 3백 년 동안 이어온 기업(基業)을 저하에게 맡기시면서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라[勤學勤政]는 네 글자로 돌아다보면서 면려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더욱 경성(警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마음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이천보가 분관(分館)이 지체되고 있다는 것으로, 승문원의 관원을 의금부에서 추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헌납 이홍직(李弘稷)이 도리어 이계창(李啓昌)을 비난했다는 것으로 이홍직을 체차시키라고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선원록청(璿源錄廳)에서 아뢰기를,
"이번 식년(式年)에 《선원록》을 개수(改修)할 적에 어첩(御牒)에, 청컨대 원손(元孫)의 탄일(誕日)을 기재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4월 26일 신해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여 전배(展拜)를 마치고 돈의문(敦義門)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이곳은 본디 치첩(雉堞)이 있으니 치성(雉城)을 쌓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명정문(明政門)에 이르러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가뭄이 이러한데도 달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않고 있다. 길가를 살펴보니 시내와 개천이 모두 말라 붙었는데 해조(該曹)에서 기우(祈雨)를 청하지 않은 데에는 깊은 뜻이 있기는 하다. 내가 비록 정섭(靜攝)하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백성이 장차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내 한 몸을 아낄 수 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내일 아침에 첫번째의 기우제를 전례에 의거하여 품한 다음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대정(大政)을 하기로 정한 날이 기우의 재일(齋日)과 상치하는데 비록 재일과 상치되더라도 재일에 개정(開政)한 전례가 있으니, 앞서 정한 날대로 대정을 거행하라."
하였다.
4월 28일 계축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이조 판서 조재호(趙載浩)·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사진(仕進)하였다. 홍경해(洪景海)를 설서로, 윤급(尹汲)을 형조 판서로, 이태중(李台重)을 황해 감사로, 이보혁(李普赫)을 판윤으로, 조명채(曹命采)를 대사성으로, 신만(申晩)을 판의금으로, 조명겸(趙明謙)을 지의금으로, 남태제(南泰齊)를 동의금으로, 유명복(柳明復)을 대사헌으로, 윤광의(尹光毅)를 대사간으로, 민택수(閔宅洙)를 집의로, 권해(權賅)·이수덕(李壽德)을 장령으로, 남학로(南鶴老)를 지평으로, 윤득양(尹得養)을 정언으로, 구선행(具善行)·조동하(趙東夏)를 훈련 도정으로 삼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했는데, 대신도 함께 입시하였다. 내국에 명하여 세의(世醫)의 자손들을 수용하게 하였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4대신(大臣)의 자손들을 녹용하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유신에게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4월 29일 갑인
사헌부 【집의 민택수(閔宅洙), 장령 권해(權賅)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오늘날 북면(北面)하여 섬기는 신하들이 가죽을 벗겨 깔고 살점을 씹어 먹으려 하는 사람으로서 목호룡(睦虎龍) 같은 자가 없습니다. 진실로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행위를 계승하여 흉역(凶逆)을 저지를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말이 무옥(誣獄)에 언급될 경우 거의 뼈가 싸늘하고 마음이 떨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윤광찬(尹光纘)이란 자가 있어 방자하게 목호룡의 위훈(僞勳)을 할 때 추증된 관질(官秩)을 조금도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이 판적(版籍)에 썼습니다. 그는 경악(經幄)을 출입하는 사람으로서 차마 위훈이 있을 때 추증받은 것을 누차 국적(國籍)에 기재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지난번 성상께서 특별히 정배시키라고 명을 내렸습니다만 그것으로는 그가 법을 무시하고 역적을 비호한 죄를 징계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윤광찬을 절도에 안치시키소서. 악역(惡逆)은 곧 천지 사이의 일죄(一罪)인 것이므로 속마음이 서로 통하고 심법(心法)을 전수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또한 감히 멋대로 영호(營護)할 계책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성술(李聖述)은 일찍이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로 있을 적에 김일경의 소하(疏下)에 들어 있던 역적들을 아울러 다 먹으로 지운 것을 살려 놓고 또 그의 할아비가 목호룡의 위훈을 녹훈할 때 추증받은 관질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고 장적(帳籍)에 기재하였으니,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방자하고 무엄한 죄를 엄중히 신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이성술을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함으로써 왕법(王法)을 바루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조께서 이미 처분을 내리셨다."
하였다.
4월 30일 을묘
유성이 저성(氐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고 꼬리의 길이는 5, 6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접하였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각사(各司)에서 수즙(修葺)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날마다 몰려오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가뭄을 걱정하느라고 마음 타는 때를 당하여 공구 수성(恐懼修省)하는 뜻에 어긋나는 것이 있습니다. 청컨대 대궐 내외(內外)와 여러 상사(上司)에 대해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역사(役事)를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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