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9권, 영조 29년 1753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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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진

한광회(韓光會)를 사간으로, 민백창(閔百昌)을 집의로, 윤방(尹坊)을 장령으로, 이의철(李宜哲)을 정언으로, 한사득(韓師得)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5월 2일 정사

사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유복명(柳復明)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예단삼(禮單蔘)의 일에 대해 삼가 개탄스럽게 여기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신의의 명성이 온 천하에 널리 드러났는데 이제 이에 하찮은 의약물(醫藥物) 때문에 남을 속이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 크게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속히 지부(地部)로 하여금 즉시 변통시키게 하소서."
하고, 또 호삼(胡蔘)을 무역할 것을 청하고, 또 청하기를,
"대조께 여쭈어 최석항(崔錫恒)을 복관시키라고 한 명을 도로 중지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예단삼의 일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대조께 여쭈라는 일은, 지난 겨울의 처분이 지당한 것이었는데 어찌하여 이러는 것인가?"
하였다.

 

5월 6일 신유

대신을 보내어 종묘와 사직에 가서 비를 빌라고 명하였다.

 

관상감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나온 예부의 자문 내용에 장친왕(莊親王) 등이 조목별로 진달하여 시헌서(時憲書)의 자성(貲星)과 삼성(參星)의 순서를 다시 정하였다고 했습니다. 고법(古法)에는 삼성의 성좌를 이루고 있는 세 개의 별 가운데 동쪽에 있는 하나의 별을 거성(距星)으로 만들었으므로 자성이 앞에 있고 삼성이 뒤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강희(康熙)077)   연간(年間)에는 서양(西洋)의 주서(籌書)를 사용해서 삼성의 성좌를 이루고 있는 세 개의 별 가운데 서쪽에 있는 하나의 별을 거성으로 만들어 드디어 삼성이 앞에 있고 자성이 뒤에 있도록 고쳤습니다. 그리고 시헌서(時憲書)의 내용에 성수(星宿)가 만나는 날도 또한 이에 의거하여 주(註)를 달았습니다. 건륭(乾隆)078)   5년에 흠천감(欽天監)에서 아뢰기를, ‘별의 거도(距度)는 사람이 지정한 것인데 성도(星度)에 의거하여 조사하여 보면 자성의 점도(占度)는 본디 좁아서 옛날에는 자성을 앞에 있게 했는데 그렇게 하면 삼성과의 거리가 1도(一度)가 되며, 삼성의 점도는 본디 넓어서 옛날에는 삼성을 뒤에 있게 했는데 그렇게 하면 정성(井星)과의 거리가 10도 36분(分)이 됩니다. 만일 서양의 법처럼 삼성을 앞에 있게 하고 자성을 뒤에 있게 하면 삼성이 도리어 자성과의 거리가 1도가 되고 자성이 정성과의 거리가 10도 36분이 되는데, 이렇게 도수(度數)를 옮겨 자성으로 귀결시킨 것은 고법(古法)이 훌륭했던 것만 못합니다.’ 했습니다. 이리하여 의상지(儀象志)·항성표(恒星表)·경위도표(經緯度表)를 다시 정리하여 성좌(星座)의 차제(次第)를 조사해 내어 그 순서를 개정(改正), 삼수(參宿)가 뒤에 있고 자수(貲宿)가 앞에 있게 하였습니다. 건륭 19년의 칠정서(七政書)는 곧 이 표(表)의 추주법(推籌法)을 적용한 것인데 아울러 시헌서의 치수(値宿)도 또한 자수가 앞에 있고 삼수가 뒤에 있게 한 고법에 의거하여 주를 개정할 것으로 성지(聖旨)를 받들어 자문(咨文)을 보내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시헌서의 성수의 만나는 날도 의당 이 법에 의거하여 자수가 앞에 있고 삼수가 뒤에 있게 하여 주(註)를 달아야 합니다. 칠정서에 이르러서는 신법(新法)에 의한 항성표를 구득하여 오기 전에는 자수와 삼수 두 별의 거도(距度)를 형편상 우선 종전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칠정서는 곧 시헌서가 거기에 의거하여 나온 것으로 그 열수(列宿)의 차제를 서로 다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본감(本監)의 관원이 안국빈(安國賓) 등으로 하여금 천상(天象)을 관측하고 증험하여 거도를 조사하여 정하게 했는데, 그 추주법(推籌法)이 근밀(近密)한 것 같습니다. 칠정서와 시헌서를 똑같이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5월 9일 갑자

엄우(嚴瑀)와 조명정(趙明炡)을 승지로, 김광세(金光世)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몇 번 기우제를 지냈어도 비가 내릴 기미는 더욱 멀어지기만 하니 백성들의 농사를 생각하면 밥맛이 어찌 달겠는가? 저 하늘을 바라보니 마음이 타는 것만 같다. 오는 11일에는 마땅히 몸으로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북교(北郊)에서 직접 기우제를 지내겠으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청대(請對)하니, 내국(內局)이 입시할 대신과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이천보 등이 한더위에 직접 비를 비는 것도 정섭(靜攝)에 방해가 된다는 것으로 도로 정지할 것을 애타게 청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선조(先朝) 때 어찌 몸을 아끼라는 하교가 있었는가? 내가 어찌 내 한몸을 아껴 백성을 위해 비오기를 빌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민(申旼)에게 가자(加資)하고, 금위영(禁衛營)의 중군(中軍)에 차임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민의 자급을 올려 주었는데 누가 무승지(武承旨)에 적합한가?"
하니,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이윤성(李潤成)과 윤태연(尹泰淵)이 모두 적합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靈城)은 병조 판서를 역임했으니 반드시 알 것이다."
하니,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윤태연에 대해서 신은 그가 적합한 사람인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대료(大僚)로 있으면서 한 사람의 무승지를 천거하였는데 중신(重臣)이 갑자기 적합하지 못하다고 하니, 신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중신이 이윤성에 대해서는 가부를 말하지 않고 윤태연에 대해서만 이렇게 하니, 중신이 무변(武弁)들에 대해 애오(愛惡)의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이므로 개연(慨然)스럽습니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대신은 신이 마치 치우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처럼 하니, 신도 또한 개연스럽습니다. 이들은 비록 대신이 천거하였지만 성상께서 이미 하문이 었었으니, 어떻게 감히 가부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대신이 실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신이 천거한 경우에는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할 수 없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천보(李天輔)는, 박문수가 성낸 기색으로 변명했다는 이유로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윤태연은 결단코 써서는 안됩니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영성이 윤태연을 신이 천거했다는 이유로 영구히 저지시키려 하고 있으니, 어찌 절박한 일이 아닙니까?"
하였다. 호조 판서 이창의(李昌誼)를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창의가 말하기를,
"예단삼(禮單蔘)에 대한 일은 크게 국계(國計)에 관계되고 또 변정(邊情)에도 관계가 됩니다. 접위관(接慰官)이 가지고 간 수십 근(斤) 이외에 계속해서 잇따라 보내야 할 것이 또 80여 근이나 됩니다. 임신년079)  ·계유년080)   두 해의 조목에 또 70여 근이나 되어 이를 모두 계산하면 금년에 응당 지급해야 할 것이 1백 5, 60근이 됩니다. 반드시 강삼(江蔘)을 중개인을 통하여 미리 구매한 뒤에야 지탱하여 쓸 수가 있겠으니, 청컨대 관서(關西)의 세수미(稅收米) 가운데 5, 6천 석을 덜어내어 강삼을 사오게 하여 주소서."
하니, 4천 석을 한정으로 하여 획급(劃給)하게 하였다.

 

5월 10일 을축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명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의 휘일(諱日)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북교(北郊)의 단소(壇所)에 나아가 위판(位版)을 봉심(奉審)하였다.

 

5월 11일 병인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냈다. 초헌(初獻)이 있은 뒤에 비가 좍좍 내릴 조짐이 있어 기뻐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밖에 서 있었는데 곤룡포(袞龍袍)가 모두 젖었다. 하교하기를,
"이는 곧 우리 고황제(高皇帝)와 성조(聖祖) 태종(太宗)께서 하사하시는 것이다."
하였다. 환궁할 때 효장묘(孝章廟)에 들렀다. 추조(秋曹)와 금오(金吾)에 명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켰다.

 

5월 12일 정묘

하교하기를,
"비가 오기는 했으나 5촌(寸) 1작(勺)이었을 뿐이니, 내일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하겠다. 의조(儀曹)에서는 자세히 알고 있으라."
하였다. 내국 제조(內局提調) 박문수(朴文秀), 부제조 심성진(沈星鎭),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 등이 구대(求對)하여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3일 무진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였다. 단소(壇所)에 나아가 위판(位版)을 봉심(奉審)하고나서 논가에 있는 부로(父老)들을 불러 우택(雨澤)의 다과(多寡)와 이앙(移秧)의 조만(早晩)에 대해 순문(詢問)하였다.

 

5월 14일 기사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냈다. 막차(幕次)에 나아가 경기 관찰사 김상익(金尙翼)을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여 도내(道內)의 폐단에 대해 순문한 뒤 환궁하였다.

 

유신(儒臣)에게 《절작통편(節酌通編)》을 가지고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하찮은 부덕한 몸으로 근 30년 동안 임어(臨御)하여 오면서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마치 깊은 연못과 계곡에 떨어지는 듯한 자세를 지녔었다. 더구나 근래에는 기력이 더욱 노쇠하여졌는데 지난 겨울 이후부터는 마음 또한 식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저 높고 높은 하늘이 나의 노쇠한 것을 돌아보고 나의 백성들을 구휼하신 덕으로 다행히 가뭄이 없은 지가 거의 10년이나 되었었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때가 있으면 비가 너무 적게 오는 때가 있는 것은 예로부터 있어온 것이므로 한번 가뭄이 드는 것은 반드시 닥치게 되는 형세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항상 걱정스럽게 여겨 왔었다. 그런데 금년에 한번 가뭄이 시작한 것이 벌써 3개월이 되었으니, 백성들의 농사를 생각하면 나의 마음이 안타깝고 절박하다. 따라서 몸으로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친히 예를 거행함에 있어 어떻게 감히 노쇠했다고 핑계할 수 있겠는가? 직접 교단(郊壇)에 나아가 백성을 위하여 비를 빌었는데 3일 동안 비가 조금 내렸으나, 이것이 어찌 정성에 연유된 것이겠는가? 실로 우연의 소치인 것이다. 이 비가 모맥(牟麥)에는 다행스러운 것이 되었지만 논에는 너무도 부족하다. 무릇 기우하는 법규는 척(尺)이 내리지 않으면 그치지 않는 것이므로 예전에 비를 맞으시면서 직접 거행하는 것을 내가 이미 우러러 본 적이 있었다. 4, 5촌(寸)의 비가 내렸다는 것으로 갑자기 기우제를 정지한다면 이는 이웃 나라에 알리게 할 수 없는 일일 뿐만이 아니라 신(神)을 섬기는 도리와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어찌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동교(東郊)로 나가는 것은 이것이 바로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모맥(牟麥)은 우택(雨澤)을 입었다고 할 수 있으나 모자리판은 민둥민둥할 정도이다. 지금이라도 비가 좍좍 쏟아진다면 가을의 추수를 기대할 수 있겠지만 며칠만 더 지난다면 모가 장차 말라 죽을 상황이다. 이런 것을 눈으로 직접 보니 마음이 더욱 초조하고 안타깝다. 이미 비가 내렸다고 하여 상하의 마음이 이미 해이하고 미성(微誠)이 더욱 얕아진다면 어떻게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옥백(玉帛)과 종고(鍾鼓)를 하였으나 성월(星月)이 깨끗하니 스스로 성의가 두텁지 못했음이 부끄럽고, 백성의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국군(國君)은 사직(社稷)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몰랐겠는가마는 사직단(社稷壇)에 섭제(攝祭)하게 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이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백성을 위하여 친경(親耕)하면서 천제(天帝)와 사직단(社稷壇)에 섭사(攝祀)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것이 비록 나이 들어 노쇠한 탓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게으른 데 가까우니, 이것이 두 가지 허물이다. 농부들은 비를 바라고 있고 의조(儀曹)에서는 기우를 주저하고 있는데도 즉시 내가 거행하게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세 가지 허물이다. 이 세 가지 허물이 있음을 알고도 스스로 면려하지 않았으니, 이는 내가 신(神)을 속인 것이고 내 마음을 속인 것이고 나의 백성들을 속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부터 우선 감선(減膳)하겠다."
하였다.

 

5월 15일 경오

장령 이수덕(李壽德)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문(東門)의 역사(役事)는 실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주인 없는 분묘(墳墓)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어 치첩(雉堞)을 수축하는 즈음에 잔해가 드러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되었고 짧은 거적에 싸놓은 언덕에 썩은 뼈가 삼대처럼 널려 있으니, 길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참혹하고 딱한 뿐만이 아니라 원기(冤氣)가 화기(和氣)를 침범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속히 뼈를 묻는 정사를 시행하여 은택이 해골에 미치게 한다면 이것도 또한 재변에 대응하는 한 가지 일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뢴 대로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당상을 소접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대조께서 특별히 금오(金吾)·추조(秋曹)에 명하여 지체된 죄수들은 소결(疏決)하게 하셨으니, 덕의(德意)가 넘쳐 흐릅니다. 이는 실로 재변을 당하여 수성(修省)하는 뜻에서 나온 조처인데 죄수의 지체되는 폐단은 지방이 더욱 극심합니다. 청컨대 옥송(獄訟)의 판결이 오래 지체되어 억울한 사람은 제도(諸道)와 삼도(三都)에 분부하여 똑같이 소결시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과 이조 참판 조명리(趙明履)를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떤 역관(譯官) 하나가 상언(上言)하기를, ‘숭정(崇禎)081)   어필(御筆)을 사가지고 왔다.’ 하였다."
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어필의 족자(簇子)를 받들어 내어오게 하였다. ‘사무사(思無邪)’라는 세 글자가 쓰여있었는데 글자 모양이 상당히 컸다. 임금이 말하기를,
"숭정 때의 어필로 일찍이 우리 나라에 나온 것이 모두 3본(本)이 있는데 죄다 이 세 글자를 썼기 때문에 내가 의심스러워 경 등에게 보이고서 질의(質疑)하는 것이다."
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모본(模本)인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도 귀한 것이다."
하고, 싸서 놓으라고 명하였다. 삼각산(三角山)·북악산(北岳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의 기우제에 대한 제문(祭文)을 쓰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저 토룡제(土龍祭)는 기우제에 있어 극진한 것이지만 편룡(鞭龍)하는 데 이르러서는 설만(褻慢)스럽기 그지없으니, 이 뒤로는 일체 제거하라."
하였다.

 

5월 16일 신미

승지 이지억(李之億)에게 기조(騎曹)의 창고에 남아 있는 전화(錢貨)를 적간(摘奸)하라고 명하였다. 이지억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은(銀)은 5만 4천 8백 냥 가운데 7천 냥이 모자라고, 돈은 15만 냥 가운데 9백 냥이 모자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세밀하게 살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옛말에도 맑은 물에는 큰 물고기가 없다고 했으니,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교인(校人)에게 속은 것082)  이 참으로 좋은 것이다. 당초에는 엄중히 조처하려 했으나 다시 생각하여 보니,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따라오게 한다면 부끄러움을 느껴 스스로 마음을 고치게 되리라고 여겨졌다. 고자(庫子)들이 곤장을 참아내지 못하여 자복해서 일률(一律)에 처하게 한다면 이는 왕자(王者)가 형벌을 삼가고 신중히 한다는 뜻이 아닌 것으로 관계되는 것이 또한 중하다. 상신(相臣)과 병조 판서는 강론하고 상의하여 품정(稟定)하라."
하고, 또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을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이 교서를 내리기를,
"동룡문(銅龍門)083)  에 들여 보내서 원량(元良)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5월 20일 을해

사서 김성우(金聖佑)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대조께서 저술하신 글 1부(部)를 얻었는데, 매양 ‘아! 원량(元良)이여라.’고 한 글귀를 읽기에 이르러서는 그때마다 한 번 읊고 세 번 탄식하는 것을 깨닫지 못할 지경이며, 여기에서 대성인(大聖人)이 주고받은 심법(心法)을 알 수 있으니, 더욱 마땅히 잊지 않고 잘 지켜 체행(軆行)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그 가운데서 학문에 절실한 것을 점출(拈出)해 내어 저하를 위하여 외워 보겠습니다. 그 내용에, ‘맛있는 음식은 한때 배부르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학문의 자미(滋味)는 일생동안 배부르게 한다. 지금 하루에 두 번 서연(書筵)을 여는 것은 곧 이것이 하루에 두 번 음식을 먹는 것이니, 장구(章句)를 익히 읽고 의리(義理)를 곰곰이 생각하여 마치 추환(芻豢)084)  의 극진한 맛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면 평생 동안 행동을 윤택하게 하는 공효가 어찌 가끔 입맛을 즐겁게 하는 것에서 그칠 정도일 뿐이겠는가?’ 하였으며, 또 조사하여 보건대, ‘경서(經書)를 읽는 방법은 마땅히 의리의 소재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사서(史書)를 보는 방법은 반드시 치란(治亂)을 분변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훌륭한 말입니다. 대저 의리를 밝히고 시비를 결정하는 것은 육경(六經)·사서(四書)에 들어있는 것이고 고금을 토론하고 득실을 살피는 것은 역대의 여러 사서에 있는 것입니다. 저 만세토록 군신(君臣)의 기강을 확립시키고 임금이 표준을 세우는 근본을 진작시키는 것은 오직 1부(部) 《춘추(春秋)》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실 때를 당하여 의리를 강명하고 깊은 뜻을 천발(闡發)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니, 오직 저하께서는 힘쓰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은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5월 21일 병자

민우수(閔遇洙)를 대사헌으로, 임순(任珣)을 집의로, 임위(任瑋)를 헌납으로, 이현조(李顯祚)·이석상(李錫祥)을 정언으로, 김문행(金文行)을 응교로, 한광조(韓光肇)를 교리로, 정형복(鄭亨復)을 동의금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모화관(慕華館)의 석척 기우제(蜥踢祈雨祭)085)  를 경회루(慶會樓)의 연못으로 옮겨서 행하라고 명하였다.

 

시강원(侍講院)에서 아뢰기를,
"왕세자께서 《소학(小學)》의 강독을 마쳤으니, 계속해서 강독할 책을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에게 문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전(書傳)》의 강독을 끝마쳤을 때 하교로 인하여 사서(四書)·이경(二經)086)  을 다시 강독하게 할 것으로 문의하여 정탈(定奪)받았었습니다. 이제 전의 정탈에 의거해서 사서·이경을 차례에 따라 거듭 강독하게 하되 먼저 《대학(大學)》을 강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는데, 대신도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이익보(李益輔)를 비국 당상에 차임했는데,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뢴 것이다. 한림 권점(翰林圈點)에 대해 신칙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아뢴 것이다.

 

하교하기를,
"경회루(慶會樓)에서 동자(童子)들에게 비를 빌게 하는 것을, 내일은 옮겨 춘당대(春塘臺)에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구윤명(具允明)·김문행(金文行)을 승지로, 성천주(成天柱)를 사간으로, 민우(閔堣)를 장령으로, 이후달(李厚達)·윤득우(尹得雨)를 지평으로 삼았다.

 

5월 23일 무인

임금이 건원릉(健元陵)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하교하기를,
"비가 내리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지만 하늘은 더욱 높기만 하다. 재차 친히 비를 빌었지마는 시원스럽게 비가 내리지 않고 있다. 26일에는 마땅히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사직단(社稷壇)에서 친히 비를 빌겠으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가 친히 비를 빌겠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4일 기묘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친히 비를 빌겠다는 명을 극력 도로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에게 숙마(熟馬)를 면급(面給)하라고 명하였는데, 치성(雉城)을 축조하는 일을 끝마쳤기 때문이었다. 병조의 포흠(逋欠)을 낸 고자(庫子)들은 추조(秋曹)로 보내지 말고 본조(本曹)에서 상세히 조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5월 25일 경진

임금의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단상(壇上)을 봉심(奉審)하고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았다.

 

이상윤(李尙允)을 지평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승지로, 이종성(李宗城)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건강(乾剛)이 날로 지나침에 따라 언로(言路)가 영구히 막혀서 관사(官邪)가 조정에 가득한데도 탄핵이 나오지 않고 있으며 곤직(閫職)에 잘못이 있어도 바로잡는 말을 들을 수 없음은 물론 뭇 신료들은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 방자한 짓을 멋대로 하며 임금은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어서 오만스럽게 스스로 훌륭하게 여기고 있는데,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나라가 망할 수가 있습니다. 종전의 비상하게 지나친 거조와 헤아릴 수 없는 위노(威怒) 때문에 놀라고 초조하고 겨를이 없어 한 것은 억조 창생이 다 같은 마음이었는데 어찌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규계(規戒)하는 말을 진달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 5년 동안에 밖으로 드러난 부험(符驗)에 대해 조목조목 거론할 수 있습니다. 차대(次對)를 폐지하고나니 묘당에서는 모유(謨猷)에 대해 토론하는 일이 없어졌으며, 경연(經筵)을 정지시키고나니 유신(儒臣)들이 강독할 직책을 잃게 되었습니다. 대벽(大辟)087)  의 죄인에 대한 생살(生殺)을 결단하지 않은 것이 몇 해이며, 여러 신하들의 장주(章奏)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있습니다. 외정(外廷)에서 접견할 때가 적다면 함께 거처하는 것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기무(機務)에 대한 수응(酬應)이 이미 간략하다면 유의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끝에는 자리만 지키고 녹봉만 타먹음으로써 어진 이의 진출을 막은 데 대해 죄를 내릴 것을 청하였는데,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주겠다고 허락하였다.

 

5월 26일 신사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냈다. 환궁할 때 경덕궁(慶德宮)에 들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3차에 걸쳐 비가 오기를 빌었는데도 끝내 감응이 아득하기만 하니, 내가 환궁할 면목이 없다. 우선 이 궁(宮)에 머물러 있다가 끝내 비가 오지 않으면 마땅히 다시 우단(雩壇)에 비가 오기를 빌어야 하겠다."
하고, 즉시 해엄(解嚴)할 것을 분부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어찌 군부(君父)가 옷을 벗지 않고 앉아 있는데 신자(臣子)는 옷을 벗고 누어 잘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잇따라 엄중한 하교를 내리니, 대신 이하의 관원들이 모두 대명하였는데,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내국 제조 박문수(朴文秀)가 환궁할 것을 애타게 간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박문수가 손으로 일산(日傘)을 잡고 펴기를 청하니, 또 허락하였다.

 

5월 27일 임오

하교하기를,
"내일 아침 마땅히 우단(雩壇)에 나아가 희생(犧牲)을 대신하여 몸소 기우제를 지내겠으니, 의조(儀曹)에서는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청대(請對)하니, 비답하기를,
"그것은 중지하라."
하였다.

 

이조 참판 조명리(趙明履)를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여 우단(雩壇)의 친제(親祭)에 대한 제문(祭文)을 쓰게 하였다. 전악(典樂)을 불러들이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우사(雩祀)의 영신악(迎神樂)이 《오례의(五禮儀)》에는 삼성(三成)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대들은 구성(九成)이라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전악이 대답하기를,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있습니다."
하였다. 《악학궤범》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여 조명리에게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다 읽고 나서는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5월 28일 계미

임금이 우단(雩壇)에 거둥하여 단상(壇上)을 봉심(奉審)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단의 신(神)은 인신(人神)인가?"
하니, 교리 한광조(韓光肇)가 말하기를,
"《좌전(左傳)》에 있는데 모두가 인신입니다. 구망씨(句芒氏)는 소호(小皡)의 아들이고 축륭씨(祝融氏)는 전욱(顓頊)의 아들이고 후토씨(后土氏)는 공공(共工)의 아들이고 욕수씨(蓐收氏)와 현명씨(玄冥氏)는 소호(小昊)의 아들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가?"
하였다. 가주서(假住書) 구윤옥(具允鈺)이 좌상과 우상에게 문의(問議)한 뒤에 돌아와서 아뢰기를,
"전대로 구성(九成)으로 행사(行祀)하소서."
하니,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예조 당상과 경조 당상(京兆堂上)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단(壇)의 안팎이 불결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익정(李益炡)을 예조 판서에, 신만(申晩)을 판윤에 제수하였다.

 

5월 29일 갑신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냈다. 환궁할 적에 내국 제조(內局提調) 박문수(朴文秀)가 탕제(湯劑)를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끝내 비가 내리지 않고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약을 먹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누누이 극력 청하자, 비로소 진어(進御)할 것을 허락하였다. 대가(大駕)가 성문 밖에 이르렀을 적에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청대(請對)하여 입시하고 말하기를,
"어제 내린 비도 또한 먼지를 적시는 것에 불과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억울해 하는 기운이 뭉쳐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동문(東門)에 성을 쌓을 때 해골(骸骨)이 낭자하게 드러났었다고 하는데, 썩은 해골을 묻어주는 것은 삼대(三代)088)   때의 아름다운 정사였습니다. 지금 닥친 재이(災異)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그 탓을 여기에다 돌리고 있으니, 여제(厲祭)를 급급하게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큰일을 소홀히 하고〉 잗단 일은 잘 살펴서 한다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였다. 좌상과 우상을 불러서 하문하니,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신의 집이 동성(東城)에 가깝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만 영부사의 들은 소문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찌 천승(千乘)의 나라에서 생령(生靈)을 위하여 성을 쌓는데 수십 개의 아총(兒塚) 때문에 가뭄이 들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소결(疎決)은 진실로 나라의 대정(大政)인 것인데 또 계복(啓覆)089)  을 행하지 않은 지가 또한 오래되었습니다. 이것도 또한 원기(冤氣)가 뭉치게 되는 일단인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거행할 수 없더라도 겨울에는 반드시 거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대가가 도동(桃洞) 앞길에 이르자 승지에게 명하여 영어(囹圄)로 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라고 하였다. 또 교리 한광조(韓光肇)를 보내어 기읍(畿邑)의 원옥(冤獄)을 염찰(廉察)하게 하였으며, 또 총융사(摠戎使) 구성임(具聖任)에게 명하여 수문(水門)의 성역(城役)을 우선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날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철악(撤樂)하였다. 친히 종묘 삭제(宗廟朔祭)의 제문(祭文)을 지어 비가 오기를 빌었다. 이날 밤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향불을 피우고 묵묵히 기도하면서 새벽까지 한데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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