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79권, 영조 29년 1753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3.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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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을유

오방(五方)에 토룡제(土龍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집의 임순(任珣)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의 가뭄이 또한 너무 극심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의 잘못된 점에 대해 자방(諮訪)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강론(講論)함으로써 재변을 해소시키는 방책으로 삼으소서. 황정(荒政)에 관계된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양맥(兩麥)090)  은 아주 흉년이 들어버렸고 가을 농사도 또한 흉년이 될 판국에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기근이 닥치기를 기다려 주진책(賙賑策)에 대해 의논한다면 이는 참으로 이른바 읍양(揖讓)하면서 불을 끄고, 말라죽은 물고기의 가게에 물을 터뜨려 놓는 격입니다. 눈앞에 백성들을 급한 데서 벗어나게 하는 방도는 맥적(麥糴)보다 먼저 할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제도(諸道)로 하여금 민력(民力)의 완급(緩急)을 살펴서 3분의 1이나 4분의 1을 감면시키소서. 또 관시(關市)의 세금을 감면하고 산택(山澤)의 법금을 늦추는 것은 곧 예로부터 황정(荒政)에서 먼저 해 온 일입니다. 한번 균역(均役)을 실행한 뒤로부터 주량(舟梁)·어염(魚鹽)의 세(稅)가 거의 한(漢)·송(宋)의 세대와 같아서 관(官)에서 1분의 세금을 감면하면 백성이 1분의 은사(恩賜)를 받게 되고 관에서 하루의 독책을 늦추면 백성이 하루 동안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의당 구관(句管)하는 신하로 하여금 상세히 잘 헤아리게 하여 백성과 더불어 재손(裁損)하게 한다면 그 혜택이 또한 어찌 작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장령 민우(閔堣)도 또한 상서하여 영선(營繕)을 중지하고 저축을 넓히고 고장(庫臧)을 검열하고 술빚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고 또 청하기를,
"식년(式年)의 대과(大科)·소과(小科)를 내년 가을로 물려서 거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6월 3일 정해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국청 죄인 남태적(南泰績)은 대간의 계달에 의거하여 국청을 설치하고 엄중히 형문하라고 명하였다. 남태적은 영어(囹圄)에서 판결이 나지 않은 지가 거의 30년이나 되었으므로 성의(聖意)가 참작하여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허반(許槃)의 직첩(職牒)을 도로 내어주라고 명하였는데, 그가 명류(名流)를 따르려 하다가 엄중한 형신(刑訊)을 받고 귀양가던 도중에 죽었으니 잘못 죽였다고 할 만하다는 하교가 있었다. 이양천(李亮天)·홍준해(洪準海)에 대해 위리(圍籬)를 철거하고 육지(陸地)로 내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였으며, 이명언(李明彦)은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그 나머지 죄적(罪謫)에 있는 사람들은 석방하기도 하고 혹은 양이(量移)091)  하기도 하였다. 전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을 서용하여 다시 장임(將任)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원경순(元景淳)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무겁게 감죄(勘罪)하게 하였는데, 사인(士人)을 함부로 살해했다는 것으로 집의 임순(任珣)이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이세희(李世熙)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하교하기를,
"이세희의 상소 내용 가운데 한 구어(句語)는 내가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여러 신하들은 이 하교를 들었으니, 반드시 나의 마음을 알 것이다."
하니, 동의금 조명겸(趙明謙)이 말하기를,
"종전에도 매양 감히 들을 수 없는 것이라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한번 대신들에게 환히 유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 등이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먼저 이 말을 꺼내니 신 등은 참으로 황공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마음에 슬프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마땅히 자성(慈聖)에게 고하고서 하겠다. 어찌 경 등을 두려워해서 하지 않는 것이겠는가? 연전에 이미 묘호(廟號)를 정하였으니 추숭(追崇)하는 것에 견주어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일찍이 진달한 바가 있었던 것에 대해 오명준(吳命峻)이 아첨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닌가? 그뒤 어떤 이는 대원군(大院君)의 예에 의거하여 하자는 의논이 었었는데 이에 대해 이병상(李秉常)이 운운한 말이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나에게 곤의(袞依) 차림으로 사묘(私廟)에 배알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어떻게 홍색(紅色)의 옷을 입고 사친묘(私親廟)에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이는 나에게 사친(私親)을 제묘(諸廟)의 예로 대우하게 하는 것이다. 김시위(金始衞)·김유(金濰)·홍용조(洪龍祚)·이종성(李宗城)·조중회(趙重晦)·이기진(李箕鎭)은 이들이 모두 명류(名流)인가? 명류들이 어찌 모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사람이겠는가?"
하고, 이어 오열하면서 육아장(蓼莪章)092)  을 외었다. 또 하교하기를,
"최진형(崔鎭衡)은 그 이력(履歷)으로 보아 당연히 도총(都摠)이 되어야 하는데 흥덕(興德)에 제수되었다. 그에 부임할 적에 내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흥덕으로 가면 장독(瘴毒)을 마시고 죽게 될 것이다.’ 하였었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최진형이 실로 도총에 합당합니다만, 지난번 병조 판서가 최진해(崔鎭海)를 영장(營將)에 의망(擬望)했을 적에 신이 훌륭하다고 칭찬했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경외(京外)에서 함부로 형장(刑杖)을 쓰는 것에 대해 엄중히 계칙하였다.

 

지평 이상윤(李尙允)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성(東城)을 개축(改築)할 때 동문(東門)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의 거리가 1리입니다. 근래 여역(厲疫)과 두진(痘疹)으로 죽은 남녀가 몇 천 명인지 모를 정도인데 이들을 모두 그 사이에다 묻었습니다. 이제 감독하는 사람이 잘 살피지 못한 탓으로 성을 개축할 즈음 수천 개의 남녀 무덤에서 발굴된 뼈를 수십 개의 구덩이를 파고서 묻었는데, 해골과 몸뼈가 부러지고 부서져 머리와 발이 위치가 바뀌어져 그 낭자하게 전도된 꼴은 차마 볼 수가 없는 정도였다고 하니, 이것이 재이(災異)를 부르는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듣고나니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감예관(監瘞官)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하라."
하였다.

 

황해 감사 이태중(李台重)을 소견하고, 위로하고 면려하여 보냈다.

 

6월 4일 무자

엄우(嚴堣)를 대사간으로, 이규휘(李奎徽)를 장령으로, 한광회(韓光會)를 교리로, 이의철(李宜哲)을 문학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예조 참판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좌의정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우윤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홍문 제학으로, 윤급(尹汲)을 지경연으로, 이성중(李成中)을 동경연으로 삼았다.

 

지평 이후달(李厚達)이 상서하여 최석항(崔錫恒)의 일은 속히 대조께 여쭈어 다시 추삭하는 벌을 시행하게 하고, 윤동로(尹東輅)는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윤광찬(尹光纘)의 시권(試券)은 불에 넣어버리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 제방(隄防)이 엄중하지 않은 탓으로 공의(公議)에 죄를 얻은 무리들이 감히 주군(州郡)으로 돌아다니면서 오만스럽게 관장으로 자처하고 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영광 군수 김시위(金始煒), 강릉 부사 조진세(趙鎭世), 부안 현감 이영조(李永祚)는 먼저 현직에서 도태(淘汰)시키고나서 이어 사판에서 간삭(刊削)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최석항의 일에 대해서는 대조의 처분이 지당하였는데 어찌 이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 윤 동로의 일은 그 아들을 이미 엄중히 조처했으니 겹쳐서 형벌을 시행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시권을 불에 태우라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김시위 등에 대한 일은 지나치다."
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접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달하기를,
"4차에 걸쳐서 친히 비 오기를 빈 것은 국조(國朝)에서는 아직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이뒤에 다시 비 오기를 빌겠다는 명이 있으면 저하께서 섭행하겠다고 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감히 섭행할 것을 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성이 부족하여 승낙받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오직 대신이 좋은 말로 진달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였다. 이어 하순(下詢)하기를,
"대간의 상서에서 논한 윤동로(尹東輅)와 김시위(金始煒) 등의 일에 대해 본사(本事)의 내용을 모르겠다."
하니, 이천보가 바로 말하기를,
"윤동로는 윤광찬의 아비인데 윤광찬이 호적에 위훈(僞勳)으로 증직된 것을 기재한 일 때문에 멀리 귀양보냈습니다. 한가지 일을 기지고 부자(父子)를 모두 죄주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 김시위·이영조·조진세는 바로 삼사(三司)에 있으면서 논계(論啓)를 정지시킨 사람들로 이미 공의에 죄를 얻었으니, 다시 옛 자리에 통망(通望)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조(聖朝)에서는 버리는 인물이 없는 법이니, 외관(外官)에 제수하여 내어보낸 것이 또한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지평 이상윤(李尙允)이 인피하였으나,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신과 금오·추조·이정 당상(釐正堂上)·병조 판서·기백(畿伯)·좌우 포장(左右捕將)·이군 색낭청(二軍色郞廳)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동조(東朝)께 문안할 때 보니 어정(御井)의 물이 모두 말랐었는데, 자성(慈聖)께서 하교하기를, ‘이 샘은 물을 많이 퍼내기 때문에 쉬이 마른다.’ 하였다. 이는 나의 걱정을 늦추어 주게 하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니, 자애로운 은정(恩情)이 지극하다. 오늘 다시 소결(疏決)하려 한다."
하고, 기백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기내(畿內)의 판결이 지체된 옥사에 대해 하순하니, 김상익(金尙翼)이 대답하기를,
"지난번 모두 소결하여 석방하였습니다."
하였다. 두 포장(捕將)을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하순하기를,
"포도청에는 억울한 자가 없는가?"
하니, 구선행(具善行)·조동하(趙東夏) 등이 대답하기를,
"구수(舊囚) 이외에 판결이 지체된 옥사는 없으며 잇따라 재계(齋戒)하는 날을 만나고 있어서 형장을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국청 죄인 남태적(南泰績)을 감사(減死)하여 거제부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병조의 당상관과 낭청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고자(庫子)들의 포흠(逋欠)에 대해 하순하고 죽은 사람은 추징하지 말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정 당상들을 중추하라고 명하였는데, 아직도 품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있었다. 금오·추조의 잡범(雜犯) 가운데 감등시키거나 석방시킨 자가 초3일의 소결에 견주어 더욱 많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는 유감이 없다."
하였다. 춘방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거듭 강독하고 있는 책자에 대해 하순하니, 보덕 심발(沈墢), 설서 홍경해(洪景海)가 대답하기를,
"재작년의 하교에 따라 사서(四書)를 거듭 강독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가고나니, 이미 밤이 오고(五鼓)가 되었다.

 

6월 6일 경인

유건(柳健)을 장령으로, 유척기(兪拓基)를 내국 도제도(內局都提調)로, 유언민(兪彦民)을 수찬으로, 이득종(李得宗)을 겸 사서로, 김상성(金尙星)을 좌부빈객으로 삼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도제조 김약로(金若魯)의 사직을 허락하였다.

 

6월 7일 신묘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명릉(明陵)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전하였다.

 

승지를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판은 어찌하여 들어오지 않았는가?"
하니, 구윤명(具允明)이 대답하기를,
"병조 판서가 기필코 체면(遞免)되려 하고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의사란 말인가? 총부(摠府)의 망(望)을 받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였다.

 

6월 9일 계사

신만(申晩)을 좌참찬으로, 채제공(蔡濟恭)을 부수찬으로, 황인검(黃仁儉)을 사서로, 이의벽(李義璧)을 경상 우병사로, 박재하(朴載河)를 전라 좌수사로, 최진형(崔鎭衡)을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로 삼았다.

 

좌참찬 권적(權樀)을 특별히 본직(本職)에서 해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처음 권적이 빈객으로 서연(書筵)에 들어와서 아뢰기를,
"치성(雉城)의 터를 닦을 적에 많은 분묘(墳墓)를 발굴하여 다같이 한 구덩이에다 묻었는데 북도(北道) 사람으로 객사(客死)한 자의 고빈(藁殯)도 또한 그 가운데 섞여져 들어 갔습니다. 그리하여 죽은 자의 아들이 와서 찾다가 찾지 못하고 길에서 울부짖으면서 통곡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돌을 뜨는 장소가 사릉(思陵)과 가깝기 때문에 능침을 진동시켜 놀라게 하였으며 산맥(山脈)을 끊어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하니,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대명하였다. 임금이 기조(騎曹)의 낭관(郞官)과 경기 도사에게 사릉으로 달려가서 봉심(奉審)하라고 명하였는데, 돌아와서 사실과 어긋난다고 아뢰었다. 권적에게 함문(緘問)하라고 명하니, 권적이 사인(士人) 이인익(李寅翼)에게서 들었다고 앙대(仰對)하였다. 이인익은 정배하고 권직은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6월 11일 을미

사간 정기안(鄭基安)이 상서하여 속히 아뢰어 남태적(南泰績)을 도배시키라고 한 명을 환수하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대조께서 이미 처분을 내렸는데 이제 어떻게 다시 여쭐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날 비로소 비가 내렸다. 토룡제(土龍祭)를 정지하라고 명하고, 농민을 불러 우택(雨澤)의 다과(多寡)에 대해 하문하였다. 기백(畿伯)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도내(道內)의 옥안(獄案)을 심리(審理)하게 하였다.

 

6월 12일 병신

유성이 허성(虛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로 사라졌는데,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6월 14일 무술

한광회(韓光會)를 사간으로, 권항(權抗)을 장령으로, 홍억(洪檍)·변치명(邊致明)을 지평으로, 이명환(李明煥)·이인원(李仁源)을 정언으로, 조영국(趙榮國)을 판윤으로, 김상복(金相福)을 부제학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부교리로 삼았다.

 

대신·예조 판서·이정 당상(釐正堂上)·경기 어사(京畿御史)를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신 등이 빈청에 모였었을 적에 호조 판서는 방금 탁지(度支)를 맡고 있기 때문에 비가 내린 것을 기뻐하였고, 어영 대장은 사람들이 모두 극심한 가뭄에 대한 탓을 성역(城役)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비가 내린 것을 기뻐했습니다. 기뻐하는 내용이 각기 같지 않았기 때문에 신 등이 웃었습니다."
하였다. 용인 현령(龍仁縣令) 윤희복(尹熙復)은 파직시키고, 여주 목사 전일상(田日祥)은 잡아다가 신문하라고 명하였는데, 경기 어사 한광조(韓光肇)가 아뢴 것이다.

 

6월 15일 기해

특별히 임순(任珣)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6월 17일 신축

왕세자가 내국(內局)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내시가 원손(元孫)을 안고 나오니, 도제조 유척기(兪拓基)가 상달하기를,
"대조께서 원손(元孫)이 보통 사람보다 다르다고 하교하였는데, 이제 이에 우러러 쳐다보니, 실로 우리 동방의 끝없는 경사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8일 임인

이중경(李重庚)을 도승지로, 심발(沈墢)을 집의로, 안극효(安克孝)를 장령으로, 김광국(金光國)을 헌납으로, 유언국(兪彦國)을 보덕으로, 임위(任瑋)를 필선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응교로 삼았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랑(月廊)에 나갔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여 《시경》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주남(周南)을 다 읽겠으니, 원량(元良)은 관저장(關雎章)·갈담장(葛覃章)을 읽고 영사(領事) 이하의 관원들은 각기 일장(一章)씩을 읽으라."
하고, 임금이 편제(篇題)부터 강하여 인지장(麟趾章)에 이르렀다. 왕세자는 관저장과 갈담장을 강하였고 영사 이하들의 관원들은 각기 돌려가면서 강하고 문의(文義)를 진달하였다. 이를 끝내고 나서 영사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강을 정지한 지가 여러 해인데도 강하는 목소리가 전보다 감손된 것이 없으니, 신은 참으로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제 나이 60에 강경(講經)하였으니, 이 뒤로는 서연(書筵)에 소대를 잠시도 정지해서는 안된다."
하고, 또 홍문록(弘文錄)을 거행하도록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영사 이천보(李天輔) 등이 누누이 복선(復膳)할 것을 앙청하니, 하교하기를,
"오늘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극력 청할 뿐만이 아니라 이미 전례가 있다고 한다. 각사(各司)에 좌기(坐起)하지 않음에 따라 민폐가 많이 생겼고 내외의 중일제(中日製)093)  를 정지함에 따라 군병들이 또한 답답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니, 이 때문에 복선(復膳) 등의 일을 특별히 허락한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마음은 어찌 비가 내렸다고 하여 감히 해이해질 수 있겠는가? 현악(懸樂)에 이르러서는 입추(立秋) 이후에 거행하여 내가 두려워 조심하고 있다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6월 20일 갑진

지평 변치명(邊致明)이 상서하여 소결(疏決)한 뒤에 쟁집(爭執)하지 않은 대신(臺臣)을 경책(警責)할 것을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6월 21일 을사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서유량(徐有良)을 정언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사간원 【 헌납 김광국(金光國)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남태적(南泰績)의 죄범은 역적들의 공초에 낭자하게 드러났는데 이번 공사(供辭)에서도 한사코 버틴 것은 더욱 음흉하고 교활한 짓입니다. 그런데 참작하여 조처한다는 명이 갑자기 뜻밖에서 내려졌습니다. 이것이 비록 가뭄을 걱정하여 판결이 지체된 옥사를 소결시키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 역적이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가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비상합니다. 청컨대 대조께 앙품하여 도배 죄인 남태적을 다시 국청으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중히 국문하게 하여 쾌히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이명언(李明彦)의 흉역스런 속마음이 여지없이 다 탄로되었으니, 당초에 도배시킨 것도 이미 실형(失刑)인 것입니다. 중간에 이미 석방시킨 것에서 그의 죄범은 용서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석방시키라는 명이 비록 한때 탕척(蕩滌)시켜주는 은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제방이 이 일 때문에 점점 무너져 난적이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니, 청컨대 대조께 여쭈어 속히 이명언을 석방시키라는 명을 정지시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소결할 때 남태적을 도배하고 이명언을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여러 날이 지나도록 쟁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변치명(邊致明)이 비로소 말하였고 김광국이 또 상달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모두 상서하여 스스로 인구(引咎)하였으나, 왕세자가 모두 우악한 답을 내리고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판의금 신만(申晩), 지의금 조명겸(趙明謙) 등이 또 변치명의 상서로 인하여 모두 상서하여 인죄(引罪)하니, 왕세자가 모두 우악한 답을 내렸다. 대사간 엄우(嚴堣), 집의 심발(沈墢), 지평 홍억(洪檍) 등이 또 모두 논해야 하는데도 논핵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상서하여 스스로 탄핵하니, 왕세자가 모두 우악한 답을 내렸다.

 

6월 23일 정미

사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25일 기유

조명채(曹命采)·이경조(李景祚)를 승지로, 윤방(尹坊)을 장령으로, 장주(張澍)를 정언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접하였다. 헌납 김광국(金光國)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응교 한광회(韓光會)가 패초(牌招)를 어긴 대신(臺臣)을 모두 체차시킬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신과 예조 판서를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경 등을 부른 것은 나의 마음이 슬퍼서이다. 금년은 곧 나의 사친(私親)이 봉작(封爵)된 해이다. 추보(追報)하는 도리에 어찌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지난해에 전은군(全恩君)이 상소했는데 내가 어찌 그의 말을 기다렸겠는가? 자전께서 하교하기를,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이다.’ 했으니, 이것이 지당한 하교였다. 고 영상 이광좌(李光佐)의 이른바 ‘대(大)’자에 대해서는 내가 싫어하였다. 나는 16자(字)의 존호(尊號)를 받으면서 사친에게는 한 글자도 올릴 수 없다면 이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일이겠는가? 지난 겨울 이세희(李世熙)의 상소는 공교하고도 참혹한 것이었다."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 등이 성의(聖意)의 소재를 분명히 보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두 글자의 시호(諡號)에 있다."
하니, 이천보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이 마땅히 봉승(奉承)하겠습니다. 마땅히 봉상시 관원이 제사지내게 하되 영원히 불천지위(不遷之位)094)  로 만들겠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은 말하기를,
"침원(寢園)의 제도와 사향(祀享)의 절차에 대해 신이 마땅히 대신들과 전례를 참고하여 앙진(仰陳)하겠습니다."
하였다.

 

숙빈(淑嬪) 최씨(崔氏)에게 화경(和敬)이라고 추시(追諡)하고, 묘(廟)는 궁(宮), 묘(墓)는 원(園)이라 하였다. 시임 대신·원임 대신, 관각(館閣)의 당상, 육조(六曹)의 참판 이상의 관원을 명초(命招)하여 입시해서 시호를 의논하게 하였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 판부사 김약로(金若魯),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우의정 김상로(金尙魯),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 호조 판서 이창의(李昌誼), 형조 판서 윤급(尹汲), 홍문 제학 서종급(徐宗伋), 호조 참판 정형복(鄭亨復), 예문 제학 남유용(南有容), 동춘추 심성진(沈星鎭), 병조 참판 김광세(金光世), 예조 참판 한익모(韓翼謨), 이조 참판 조명리(趙明履), 공조 참판 이익보(李益輔), 좌부승지 이지억(李之億), 우부승지 조명정(趙明鼎)이 입시하였다. 김 약로가 말하기를,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儆戒)하는 것을 경(敬)이라 하니, 경자가 좋겠습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화(和) 자도 또한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화경(和敬)이라는 글자가 진실로 나의 뜻에 맞는다. 오늘 이후로는 한이 되는 것이 없겠다. 내일 마땅히 내가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친히 신주(神主)를 쓰겠으니, 이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김약로가 말하기를,
"이제 이미 시호를 정하고 친제(親祭)하게 되었는데 상시(上諡)하는 한 가지 의절(儀節)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종반(宗班)의 의빈(儀賓)을 여러 집사(執事)에 차임하게 하였다. 이익정이 말하기를,
"정자각(丁字閣)을 마땅히 영건(營建)하여야 합니다. 궁원(宮園)에 친행(親行)하고 섭행(攝行)하는 제사에 대한 축문도 또한 강정(講定)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축문에 감히 비(妃)라고 일컫을 수 없는 것은 압존(壓尊)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경고(敬告)라는 글자는 마땅히 소고(昭告)라고 고쳐야 하고 또한 마땅히 국왕(國王) 모(某)라고 써야 한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비(妃) 자는 곧 후(后) 자이니, 《춘추(春秋)》에 다같이 높이는 것을 비난한 것이 매우 엄중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때 이익정이 비(妃)라고 일컫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언급된 것이다. 시단(諡單)을 배진(陪進)할 때 고취(鼓吹)와 의장(儀仗)을 진설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분면(粉面)하고 다시 고쳐 쓸 적에 성관(姓貫)을 써야 하는가?"
하니, 김재로 등이 말하기를,
"쓰는 것은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중궁전과 왕세자도 똑같이 행례(行禮)하되 중궁전은 신우문(神佑門)을 거쳐 동가(動駕)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유독 패초(牌招)를 어겼는데, 엄중한 교지를 내려 중도 부처(中道付處)하라고 명하였다. 이지억이 특별히 윤허한 명을 도로 정지시키기를 청하므로 특별히 윤허하였고, 이지억을 가자(加資)하라고 명한 것은 그의 말을 가상히 여겨서였다.

 

6월 26일 경술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지영(祗迎)한 뒤 수가(隧駕)하여 전배례(殿拜禮)를 행하였다. 중궁전의 연(輦)이 이르니 왕세자가 지영하고 고유제를 행하였다. 신주를 고쳐 쓴 뒤에 환안제(還安祭)를 행하였다. 끝나고 나서 임금이 왕세자에게 중궁전을 모시고 먼저 환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환궁할 때 특별히 병조 판서 김상성(金尙星)과 도승지 이중경(李重庚)에게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는데, 그들의 주대(奏對)가 성지(聖旨)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즉시 추존(追尊)하기를 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써 잇따라 엄중한 하교를 내리기를,
"대신은 마땅히 관(冠)을 벗고 사죄해야 한다."
하니, 이에 대신 이하의 관원들이 모두 대명하였는데,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사친(私親)에 대해 이와 같이 했으니 만족하다. 가숭(加崇)하는 데는 선왕(先王)의 유교(遺敎)가 있으셨다."
하였다.

 

6월 27일 신해

오수채(吳遂采)·구윤명(具允明)을 승지로,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최성대(崔成大)를 집의로, 유한소(兪漢蕭)를 헌납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응교로, 이득종(李得宗)을 수찬으로, 황경원(黃景源)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6월 28일 임자

봉원 도감(封園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 등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내국(內局)에서 입시하였는데, 예조 판서도 함께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는 자성(慈聖)의 존호(尊號)와 선조(先朝)의 세실(世室)을 모두 내가 했었다. 신하들 가운데 누가 했는가?"
하고, 이어 궁원(宮園)의 식례(式例)를 쓰라고 명하였다. 내국 제조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소녕원(昭寧園)의 산주(山主)는 황조(皇朝)의 고사에 의거하여 수원관(守園官)에게 세습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돈녕 정(敦寧正)은 긴요하지 않은가?"
하니, 예조 판서 이익정이 말하기를,
"그런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봉사(奉祀)할 사람을 낸다면 구애되는 곳이 많이 있게 된다. 축문에도 구애가 있게 된다. 만약 종실을 제관(祭官)으로 삼는다면 봉사할 사람을 내지 않더라도 항상 봉사할 사람이 있게 될 것이다."
하니, 이익정이 말하기를,
"참봉(參奉)을 마땅히 차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동부승지 임순(任珣)이 말하기를,
"참봉은 좀 어떨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효장묘(孝章墓)의 축식(祝式)을 들여 보내라고 명하여 친히 궁원(宮園)의 사명일(四名日) 절제(節祭)의 축문을 지어서 향실(香室)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혜릉(惠陵)095)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6월 29일 계축

봉원 도감 당상(封園都監堂上)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원소(園所)의 정자각(丁字閣) 계단은 3층(層)을 넘지 않게 하고 청룡(靑龍)·백호(白虎) 안에 있는 고총(古塚)도 그대로 두게 하라."
하니, 도감 당상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정자각은 의소묘(懿昭墓)의 예에 의거하여 하라고 하교하셨는데, 너무 작은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오히려 크다고 여긴다."
하였다.

 

육상궁(毓祥宮)에서 친제(親祭)할 때의 집사(執事)인 오도위(五都尉)에게 각각 숙마(熟馬) 1필(匹)을 면급(面給)하고, 찬례(贊禮) 이하의 제관(祭官)에게는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고, 수직 내관(守直內官) 이하에게도 시상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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