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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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갑인

종부시(宗簿寺)에서 상달(上達)하기를,
"육상궁(毓祥宮)096)  에 거둥하실 때에 중궁전(中宮殿)을 배종(陪從)할 자를 각 품계(品階)마다 초계(抄啓)한 뒤에, 그 가운데에서 4원(員)이 거만스레 집에 있으면서 끝내 배종해 가지 않았으니, 영천군(靈川君) 이야(李壄)·안릉군(安陵君) 이계(李烓)·광춘령(光春令) 이권(李棬)·운계령(雲溪令) 이절(李梲)을 모두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왕세자(王世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윤급(尹汲)이 여러 도에 신칙(申飭)하여 도배(徒配), 유배(流配)된 무리에게 일체 말미를 주지 말고 엄히 보수(保授)를 더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집의(執義) 최성대(崔成大)가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혼궁(魂宮)에 임(臨)하였다.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밤 꿈에 세손을 보았다."
하였다. 어제(御製) 《육상궁기회명병서(毓祥宮紀懷銘幷序)》를 친히 써서, 현판(懸板)이 다 만들어진 뒤에 승지가 의장(儀仗)을 갖추고 배종해 가서 걸라고 명하였다.

 

7월 2일 을묘

봉원 도감 당상(封園都監堂上)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해서, 정자각(丁字閣), 전사청(典祀廳)과 비석(碑石), 양마석(羊馬石)의 공역(工役)을 우러러 아뢰니, 진청(賑廳)의 쌀 1천 2백 석(石)을 획급(劃給)하라고 명하였다.

 

7월 3일 병진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이지억(李之億)·김상성(金尙星)·이중경(李重庚)은 이틀 사이에 모두 말한 것 때문에 초자(超資)097)  되었습니다. 그 말이 과연 상줄 만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상주는 것도 오히려 쉽사리 해서는 안될 것인데 더구나 자급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다. 그날 유상(兪相)098)  을 논구(論救)한 일은 조명정(趙明鼎)이 담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매, 김 상로가 말하기를,
"말이 이지억에게서 나왔으므로 전하께서 받아들이셨습니다. 조명정이 말하였다면 아마도 반드시 받아들이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7월 4일 정사

유성(流星)이 북극성(北極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3척(尺)쯤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7월 5일 무오

왕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접(召接)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접때 남부(南部)에 사는 송성(宋姓)인 사람의 집에서 도둑질한 자는 사족(士族)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이유재(李有載)는 송철손(宋哲孫)의 사위입니다. 송철손의 아내인 윤씨(尹氏)도 사족이고 윤성동(尹星東)과 동기(同氣)입니다. 윤성동은 처신이 도리에 어그러지므로 동기들이 서로 용납하지 않았는데, 점점 더 심해져서 원수처럼 되었습니다. 도둑맞게 되어서는 윤씨가 윤성동을 의심하여, 윤성동이 포청(捕廳)에 들어간 뒤에 그 종으로 하여금 언문 서장(書狀)을 써서 바치게 하여 빨리 죽이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유재가 한 짓이라 하더라도 윤씨가 참섭한 자취를 엄폐할 수 없고, 윤성동이 참으로 도둑질을 하였다 하더라도 동기의 도리로서는 오직 엄폐하고 변명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그럴 듯한 일을 가지고 반드시 죽을 곳으로 몰아 빠뜨리려 한 것은 천리(天理)가 없어진 것입니다. 또 윤씨가 어버이가 죽었을 때에 분상(奔喪)하지 않은 정상이 포청에서 도둑이 공초(供招)한 데에 나타났습니다. 윤씨의 두 가지 죄는 모두 윤기(倫紀)에 관계되므로 아무리 부녀자라 하더라도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먼 지방으로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좌상(左相)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윤녀(尹女)의 죄는 윤기에 관계되니, 먼 지방으로 정배하는 것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또 말하기를,
"윤성동은 사족으로서 처신이 도리에 어그러지고 그 성을 바꾸어 최성(崔姓)으로 행세하기까지 하였으니, 청컨대 조율(照律)하여 엄중히 감죄(勘罪)하소서."
하고, 이천보가 말하기를,
"윤성동은 고(故) 도위(都尉)099)  의 자손으로서 윤성·최성을 봉사(奉事)한다고 일컬으면서 집주름[家儈] 노릇을 생업으로 삼았으니, 이런 무뢰배가 도둑의 무리에 들어가지 않았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왕성(王城) 안에 머물러 둘 수 없으니, 추조(秋曹)100)  로 하여금 엄중하게 감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봉원 도감 당상(封園都監堂上)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여 정자각(丁字閣)과 양마석(羊馬石)의 공역(工役)을 하문하고, 비석(碑石)을 높고 크게 만들지 말라고 명하고, 또 하교(下敎)하기를,
"도잠(陶潛)101)  이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저들도 사람의 아들이니 잘 대우해야 한다. 모군(募軍)도 우리 백성이고 공장(工匠)도 우리 백성이니, 어루만지고 돌보며 한 번도 채찍질하지 않으면, 이것도 소심(小心)하는 뜻을 본받는 것이다."
하였다.

 

7월 7일 경신

봉원 도감 당상(封園都監堂上)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여 정자각(丁字閣)의 터를 하문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기임각(祈稔閣)을 옮겨 세운다면 정자각이 바르게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 이 터를 잡을 때에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면, 이곳으로 정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익보(李益輔)가 말하기를,
"각내(閣內)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로 만지송(萬枝松)이다."
하였다. 이 익정이 말하기를,
"잡목(雜木)은 없애지 않을 수 없으나, 이 소나무는 성상께서 손수 심으셨으므로 남겨 두었습니다."
하니, 《육오당기문(六吾堂記文)》을 베껴 오라고 명하였다.

 

7월 9일 임술

내국(內局)102)  에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이정 당상(釐正堂上)에게 명하여 같이 들어오게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상성(金尙星)에게 명하여 해면(解免)을 허락하였으니, 김상성이 시애(撕捱)103)  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일은 반드시 이름을 바루어야 하는데, 은여결(隱餘結)104)  을 균역청(均役廳)에 붙이는 뜻은 실로 백성을 위하는 것이나, 이름은 바르지 않다. 이제부터 균청(均廳)에 붙여진 은여결은 그 결수(結數)대로 면세(免稅)로 삼고 전대동(田大同) 및 각세(各稅)와 함께 균청에 붙인다면, 전안(田案)은 절로 탁지(度支)105)  에 있게 되고 그 세(稅)는 균청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야 그 이름을 바르게 하고 그 일을 충실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절목(節目)의 본조(本條)에 실으면 이 뒤로는 물론이고 경오년106)   전후에 은결(隱結)이 더 나타난 것도 절로 탁지와 균청으로 돌아가서 감히 그 사이에서 손댈 수 없고 면세된 균청의 전토(田土)도 감히 다른 곳에서 절수(折受)107)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전(陳田)108)  도 탁지에서 구관(句管)하게 하되, 탁지나 균청에서 만약 혹 영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본청(本廳)은 이미 삼공(三公)이 구관하는 것이거니와 해조(該曹)·해청(該廳)의 당상(堂上)을 초기(草記)109)  하여 엄중히 신칙(申飭)하도록 하는 일을 정식(定式)하여 시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자전(慈殿)과 대전(大殿)·세자궁(世子宮) 밖에 모두 낙죽(酪粥)110)  이 없었는데, 중궁전(中宮殿)에 을해년111)   이후 명하여 바치게 하였고, 그 뒤에 현빈(賢嬪)112)  이 옛일을 슬퍼하므로 무신년113)  에 동궁(東宮)에 들이던 것을 계속하여 진배(進排)하였다. 세손궁(世孫宮)으로 말하면 이미 책봉된 뒤에는 사체(事體)가 세자궁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진배하게 하였으나, 원손궁(元孫宮)으로 말하면 정례(定例) 가운데에서 이미 왕자(王子)와 같게 되어 있는데 내의원(內醫院)의 낙죽을 잘못 알고 진배하였다. 낙우(酪牛)가 비록 짐승이기는 하나 예전부터 봄갈이를 위하여 봉진(封進)을 멈추었으므로 낙우가 이토록 많지 않았는데, 이제 책자(冊子)를 보니 열여덟 마리나 되어 그 송아지를 아울러 서른여섯 마리이다. 《예기(禮記)》에 말하지 않았는가? 봄에 왕자(王者)가 알[卵]과 둥지를 아끼어 주었는데, 이제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위하여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가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다. 원손궁에는 책봉(冊封) 뒤에 거행하고 그 소는 내의원으로 하여금 수를 줄이게 하여, 한편으로는 《예기》를 따르는 뜻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시민(市民)의 폐단을 덜라."
하고, 어제(御製) 균역청 윤음(均役廳綸音)과 소지(小誌)를 써서 절목에 실으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통영(統營)의 일은 어떠한가?"
하매,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어장(御將)114)  은 수를 줄여서 주려 하고, 영상(領相)은 1만 냥(兩)을 죄다 주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영성(靈城)115)  의 말을 옳게 여긴다. 지금 균청에 남은 돈[錢]이 있더라도 앞으로 이 절목에도 넓히거나 좁히는 일이 없지 않을 듯하니, 삼가서 쓰지 않아야 한다."
하였다. 이후(李)에게 명하여 강계 책자(江契冊子)를 읽게 하였다. 이후가 말하기를,
"강전(江廛)은 단연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박문수(朴文秀)가 말하기를,
"이는 바른 논의입니다마는, 삼강(三江)116)  의 다섯 시전(市廛)은 다 3백 년 동안 내려온 시전입니다."
하였다.

 

이후를 승지로, 신만(申晩)을 병조 판서로, 이성경(李星慶)·이덕해(李德海)를 지평으로, 이현중(李顯重)을 부교리로 삼았다.

 

영부사(領府事)        김재로(金在魯)가 진차(陳箚)하여 호위청(扈衞廳) 군졸의 난전(亂廛)을 금하지 말아서 자생(資生)을 삼게 하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7월 11일 갑자

응교(應敎) 한광회(韓光會)가 상서(上書)하여 산림(山林)의 선비를 불러 예우(禮遇)를 너그럽게 하여 그 진출할 길을 열어 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것이 절실하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7월 13일 병인

이조 참판(吏曹參判) 조명리(趙明履)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여 어제(御製) 속육오당기임각시(續六吾堂祈稔閣詩)를 쓰게 하여 육오당에 걸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올해 나이가 성조(聖祖)의 갑술년117)  과 똑같은데 이처럼 노쇠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기사(耆社)118)  에 가서 전알(展謁)하는 일은 내년 봄에 하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모든 일이 점점 예전만 못하여 사대부(士大夫)는 글을 읽는 자가 없는데도 문집(文集)은 예전보다 많다."
하였다.

 

7월 16일 기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자(王世子)가 수가(隨駕)하였다.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나서 왕세자는 먼저 환궁(還宮)하고 임금은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예를 행하고 삼락당(三樂堂)에 나아가 이조 참판 조명리(趙明履)에게 말하기를,
"소녕원(昭寧園)119)  에 계명산(鷄鳴山)이 있는데, 예전에 감여(堪輿)120)  를 잘 아는 자가 이곳을 지나다가 한 글귀를 외어 ‘금계가 울며 활개를 치니 왕기가 옹장에 감추어 있구나![金鷄鳴而搏翼王氣藏於甕匠]’ 하였다. 옹장은 그 마을에 옹기장이가 많으므로 그 마을에 이름붙인 것이니, 어찌 기이하지 않겠는가?"
하매, 조명리가 말하기를,
"이 뜻을 어제(御製) 가운데에 넣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상도(常道)에 맞지 않는 일에 가까운데, 어찌하여 반드시 글에 나타내야 하겠는가?"
하였다.

 

7월 17일 경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관학 도기 유생(館學到記儒生)의 제강(製講)을 시험하고, 제술(製述)에 으뜸을 차지한 생원(生員) 김화택(金和澤)과 강경(講經)에 으뜸을 차지한 유학(幼學) 김재욱(金再郁)과 그 다음인 유학 권종수(權鍾秀)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121)  를 명하였다. 독권관(讀券官)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민백창(閔百昌)이 접때 한 일은 비록 그르다 할지라도 그 실정은 또한 용서할 만합니다. 성조(聖朝)에서는 버리는 것이 없는데, 여러 해 동안 폐고(廢錮)되어 있으니 가엾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백창은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신(臣)이 전조(銓曹)에 있을 때에는 다만 사성(司成)의 망(望)에 주의(注擬)하였을 뿐입니다마는, 이제는 공의(公議)가 자못 용서하여 이따금 아장(亞長)과 수찬(修撰)의 망에 통의(通擬)합니다. 응교(應敎)의 망은 비록 이와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마는, 전지(銓地)의 공의에 일임하여 점차 통의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또 고(故) 판부사(判府事)122)  가 이때문에 한을 머금고 삶을 마쳤다 하니, 어찌 가련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들에게 또한 늦추고 죄는 것이 있다. 민백창에게는 그리 심하게 하려 하지 않으나, 이형만(李衡萬)으로 말하면 내가 그 부자를 사랑하였는데 그는 그른 무리와 함께 서로 노형(老兄)을 일컬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전관(銓官)이 혹 검의(檢擬)한다면 내가 마땅히 그르게 여길 것이다."
하고, 전 좌랑(佐郞) 고유(高裕)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용(調用)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고유는 영남(嶺南) 사람이다.

 

7월 18일 신미

유성(流星)이 하늘 복판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5척(尺)쯤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윤봉오(尹鳳五)를 집의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김조윤(金朝潤)을 장령으로,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이기경(李基敬)을 정언으로, 한광조(韓光肇)를 부교리로, 박도원(朴道源)을 문학으로, 이천보(李天輔)를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로, 윤급(尹汲)을 좌참찬으로, 낙풍군(洛豊君) 이무(李楙)를 사은 정사로, 이성중(李成中)을 부사로, 홍경보(洪鏡輔)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7월 19일 임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이정 당상에게 명하여 같이 들어오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부터 동궁(東宮)이 시좌(侍坐)할 때에는 대신(大臣)과 약원(藥院)123)  의 신하가 먼저 나에게 문후(問候)하고 다음에 동궁에게 문후하는데, 이것은 압존(壓尊)의 혐의가 없지 않으니, 이 뒤로 시좌할 때에는 함께 나에게 문후를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하교하기를,
"공시인 폐막 이정 책자(貢市人弊瘼瘼釐正冊子)는 이미 보고 고쳐서 내렸으나, 강계 책자(江契冊子)로 말하면 한 조목에 대하여 중재(重宰)의 의견이 같지 않으므로 버려두게 하였다. 오늘 대신이 입시하였을 때에, 먼저 중신(重臣)의 뜻을 따라 시행한 뒤에 전인(廛人)이 옛 버릇을 계속하여 강민(江民)에게 폐해를 끼치거든 해당 전인을 엄히 형신(刑訊)하여 도배(徒配)하고 재신(宰臣)이 당초에 책자에 대하여 의논한 것을 다시 시행하라고 이미 하교하였다마는, 대저 갑자년124)  의 절목(節目)을 준행(遵行)하였다면 어찌 이번 책자가 있게 되었겠는가? 이것은 오로지 나라에 기강이 없어서 비국(備局)에서 경조(京兆)125)  의 모든 일을 도외(度外)에 버려둔 탓에서 말미암았으니, 이 뒤에 강민에게 다시 폐해가 있어도 비국에서 경조를 문책하지 않고 또 돕는다면 나라의 기강은 이로부터 아주 없어질 것이다. 또 이제 법을 세우면 당초에 절목을 신칙(申飭)하지 않은 것도 신칙해야 할 것인데, 이제 듣건대, 갑자년의 절목이 정해진 뒤에도 경조에서는 난전(亂廛)을 받아들여 시행한 일이 있다 하니, 일의 한심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 이것을 엄중히 징계하지 않으면 어떻게 법을 세우겠는가? 범한 경조의 해당 당상(堂上)을 모두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천보(李天輔)가 강을 막아 촘촘한 그물을 치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대신이 아뢴 것을 듣건대, 이른바 촘촘한 그물이라는 것은 예전에 성탕(成湯)이 삼면(三面)의 그물을 해제하였고126)  , 추성(鄒聖)127)  도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넣지 않는다.’ 한 것이다. 이러한 촘촘한 그물이 강을 막아서 설치되면 물고기가 어찌 씨가 남아 있겠는가? 《예기(禮記)》의 둥지를 엎지 않는다는 뜻에 어그러지고, 또한 못[池]에 방생(放生)하는 마음도 없는 것이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예전에 《예기》 월령편(月令篇)에 따라 내국으로 하여금 청두압(靑頭鴨)을 들이지 말게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아! 이 그물을 만든 자는 작용(作俑)128)  한 자와 다를 것이 없고, 이 그물을 쓰는 자도 사면에 그물을 두른 자와 다를 것이 없다. 아! 어별(魚鼈)은 비록 강이나 바다 가운데에서 사는 짐승일지라도 또한 조선의 수토(水土) 가운데에서 난 것인데, 이처럼 매우 심하게 죄다 잡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그 근본은 작더라도 차마 못할 것은 크니, 엄히 신칙하지 않는다면 이는 차마 못할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 신칙하여 이 뒤로 그물을 만드는 자는 도배하게 하라."
하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 한가지 일은 왕정(王政)의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바로잡으려 하였는데 은택이 어별에 미치니, 전하께서 한 번 마음을 쓰신 보람은 미치는 바가 멉니다."
하였다. 제조(提調) 박문수(朴文秀)가 여름철의 찬미(饌味)가 매우 어렵다 하여 산 전복을 봉진(封進)하라고 각도(各道)에 알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전복을 따는 그림을 보았는데, 지극히 어렵다고 할 만하였다. 어찌 차마 구복(口腹)을 위하여 이처럼 백성을 괴롭힐 수 있겠는가? 자전(慈殿)에만 봉진하게 하라."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유척기(兪拓基)는 모든 조정의 의논에 관계되는 일에 한 번도 참섭하지 않고 전에 시호(諡號)를 의논할 때에도 나와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날도 나오지 않았으나, 그 일을 어떻게 여겨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마음을 밝히기 전에는 도문(都門) 밖으로 한걸음도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어찌 감히 시골 사는 것에 스스로 편히 여긴단 말인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채삼(菜參) 1년조(一年條)를 아무 일 없이 순조롭게 주었다 하니, 다행입니다. 그 조치한 것을 듣건대, 일일이 온 정신을 쏟아 구차하게 청하지도 않았거니와 억지로 협박하지도 않았고 다만 예단(禮單)의 ‘예’ 자 때문에 조용히 다투기를 ‘이미 예단이라 하였으면 이는 우리 나라에서 예로 주는 물건인데, 너희들이 무식하더라도 어찌 감히 무례하게 점퇴(點退)할 수 있는가?’ 하였다 합니다. 대개 그가 주장하는 것이 이미 정대(正大)하므로 저들이 감히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고 말없이 순조롭게 받은 것이니, 그가 늦췄다 당겼다 한 것을 보면 참으로 한 방면을 맡을 만한 재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이장(李彛章)은 사람됨이 굳세고 분수(分數)가 명백하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비국 당상(備局堂上)의 직임은 사사(使事)보다 더욱이 중하니, 동지 부사(冬至副使) 이성중(李成中)을 청컨대 개차(改差)하여 비국에 전념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이명곤(李命坤)으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7월 20일 계유

엄우(嚴瑀)를 승지로, 조영국(趙榮國)을 형조 판서로 삼고, 부사직 오수채(吳遂采)·대사성 유최기(兪最基)를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오수채와 유최기는 다 오래 정체되어 있었으므로 대신(大臣)이 아뢰었기 때문이다.

 

문학(文學) 박도원(朴道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구택규(具宅奎)는 신축년129)  ·임인년130)   즈음에 흉악한 상소와 패악한 논계(論啓)에 모두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두 대신(大臣)을 죽게 한 논계에 이르러서는 처음 낸 자는 역적 김일경(金一鏡)이고 계속한 자는 구택규입니다. 또 그 아비 구혁(具爀)은 위훈 도감(僞勳都監)이 설치되었을 때에 심유현(沈維賢)과 더불어 그 낭속(郞屬)이 되어 속마음이 서로 통하였습니다. 구윤명(具允明)의 도리로서는 면모(面貌)를 고치고 마음을 고쳐야 할 것인데, 조금도 흠이 없는 것으로 자처하려고 말하는 자를 거짓을 꾸미고 없는 것을 꾸며내었다는 죄에 몰아넣었으니, 실로 세도(世道)가 크게 변한 것이, 아! 두렵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글에 다른 말을 끼워 넣어 속이는 것은 매우 그르다."
하였다.

 

7월 21일 갑술

달무리가 화성(火星)을 둘렀다.

 

좌부승지(左副承旨) 구윤명(具允明)이 상소하여 대변(對辨)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휘일(諱日)이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삼황(三皇)131)  의 휘일에 망배하는 일이 이미 끝나니, 비풍(匪風)·하천(下泉)132)  이 마음에 한층 더하다. 더구나 오늘이 어느 날인가? 청구(靑丘)의 오늘은 우리 황제가 내려 준 것이니, 더욱이 슬픈 느낌이 절실하다. 선무사(宣武祠)133)  ·무열사(武烈祠)134)  에 특별히 치제(致祭)하여 내가 황은(皇恩)을 느끼는 뜻을 나타내라."
하고, 이어서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제문(祭文)을 써서 내리게 하였다.

 

7월 22일 을해

부사직(副司直) 홍봉한(洪鳳漢)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에서 관(官)을 설치하고 법을 제정한 것은 매우 엄합니다. 이 때문에 혜청(惠廳)에 두 당상(堂上)이 있더라도 모든 일을 한결같이 수석 당상의 재결(裁決)을 따르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사(政事)에 통서(統緖)가 없어서 견제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균청(均廳)을 혜청에 붙여 합하여 한 청을 만들었으니, 신이 차석 당상으로서 무릅쓰고 전관(專管)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우료(右僚)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구관(句管)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사문(四門)의 영제(禜祭)135)  를 설행(設行)하라고 명하였다.

 

7월 23일 병자

열흘 동안 감선(減膳)136)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접때 무신년137)   가을 새벽에 빗소리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듣고 특별히 감선하라고 명하였다. 아! 큰물이 지거나 가뭄이 드는 것은 참으로 덕이 없는 데에서 말미암는다. 이제 노쇠한 것을 어찌 무신년에 견주랴마는, 백성을 위하는 마음과 스스로 힘쓰는 뜻이 어찌 쇠퇴하였다 하겠는가? 한밤 이후로 아직까지 비가 내리니, 무신년과 다를 것이 없다. 주원(廚院)138)  으로 하여금 열흘 동안 감선하게 하여 내가 자신을 경계하는 뜻을 나타내라. 자전(慈殿)에 대하여는 일찍이 이미 거행하는 가운데에 들어 있지 않는다고 분부하였거니와, 원량(元良)에 대해서는 바야흐로 청정(聽政)하니 같은 예(例)로 하고, 그 밖의 각전(各殿)도 줄이지 말라."
하였다.

 

사직(司直) 이성중(李成中)과 예조 참판 한익모(韓翼謨)를 비국 유사 당상(備局有司堂上)으로 차출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아뢴 것이다.

 

해당 전관(銓官)을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의 망(望)에 이종성(李宗城)을 주의(注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로소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에게 명하여 대명(待命)하지 말게 하였다.

 

본관록(本館錄)139)  을 행하였는데 유한소(兪漢蕭) 등 15인을 뽑았다.

 

한권(翰圈)140)  을 행하였는데, 신경항(申景沆) 등 17인을 뽑았다.

 

하교하기를,
"공시인(貢市人)의 폐막(弊瘼)은 마찬가지인데, 시인(市人)은 이미 하교하였으나 공인(貢人)은 신칙(申飭)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특별히 명하여 바로잡는 뜻이겠는가? 혹 공물 아문(貢物衙門)의 낭속(郞屬)이 되면 이것을 믿고서 융복(戎服)·반과(盤果)를 요구하거나 자신이 사대부(士大夫)이면서 공인으로 하여금 차제(差祭)를 탈면(頉免)하게 하는 것은 결코 사대부가 할 짓이 아니니, 범하는 자는 곧바로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141)  을 시행하라."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상로(金尙魯)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왕세자(王世子)가 우악한 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5일 무인

승지(承旨)가 입대(入對)하였을 때에 우승지(右承旨) 황경원(黃景源)이 황해 수사(黃海水使)의 장달(狀達)을 읽기를,
"신이 황당선(荒唐船)의 일로 아뢸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연해(沿海)의 각진(各鎭)에서 왜선(倭船)과 당선(唐船)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전례에 의하여 정상을 묻고 쫓아보냈는데, 근래 간사하고 거짓된 일이 갖가지로 나와서 정상을 묻고 쫓아보낸다는 핑계로 바다 가운데나 섬 같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 끌어가서 금지하는 물건을 팔고 사는 우려가 없지 않으니, 청컨대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연해의 읍진(邑鎭)에 신칙(申飭)하게 하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7월 27일 경진

이성중(李成中)을 이조 참판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이조 참의로, 오수채(吳遂采)를 대사간으로, 서명빈(徐命彬)을 판윤으로, 김상성(金尙星)을 판의금으로, 심발(沈墢)을 보덕으로, 조관빈(趙觀彬)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대신(大臣)·경재(卿宰)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술회시(述懷詩)를 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자성(慈聖)께 고할 것이다. 내가 사친(私親)을 위하여 감히 옥인(玉印)을 바랄 수는 없더라도 어찌 은인(銀印)을 만들 수 없겠는가?"
하고 잇달아서 엄한 분부를 내렸는데,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우의정(右議政) 김상로(金尙魯) 등이 다 관(冠)을 벗고 뜰에 엎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성(李宗城)도 괴이하다. 조명리(趙明履)를 내국(內局)의 망(望)에 뽑아야 마땅하다. 접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이진망(李眞望)으로 하여금 짓게 하였으나 지으려 하지 않으므로 종신(宗臣)으로 하여금 짓게 하였다. 이익정(李益炡)이 선개(扇蓋)의 일로 아뢴 것이 있었는데도 여러 신하들은 다 말이 없었다. 《역경(易經)》의 상경(上經)은 건(乾)·곤(坤)으로 시작하고 하경(下經)은 함(咸)·항(恒)으로 시작하거니와, 성인(聖人)이 어찌 뜻이 없었겠는가?"
하고, 임금이 드디어 집서문(集瑞門)으로 걸어 들어갔다. 승지(承旨)·사관(史官)이 따라가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따라오는가?"
하였다. 승지가 환어(還御)하기를 힘껏 청하니, 임금이 드디어 환어하여 대신에게 명하여 입시하게 하고 누누이 수천여 마디의 엄한 분부를 내렸다. 승지에게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기를,
"책인(冊印)을 올리는 것은 다음달 초엿샛날에 거행하되, 하루 전에 내가 몸소 본궁(本宮)에 나아가서 새벽에 고유제(告由祭)를 행하고 이튿날 아침에 인(印)을 올린 뒤에 이어서 제사를 행하겠다. 고유제는 속제(俗祭)의 의식에 의하고 책인을 올리는 의식은 효순궁(孝純宮)142)  의 의식에 의하며 제사를 행하는 의식은 시제(時祭)의 의식에 의하여 하라는 일로 의조(儀曹)143)  에 분부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은인장(銀印欌)과 죽책궤(竹冊櫃)는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라는 일로 도감(都監)에 분부하고, 책인을 올릴 때에는 다만 본궁에서 고유제를 행하라는 일로 분부하고, 책인을 만든 뒤에는 세장(細仗)과 고취(鼓吹)가 본궁에 배종(陪從)하여 나아가라는 일로 분부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시 도감(上諡都監)이 있고서야 봉원 도감(封園都監)이 있을 수 있는데, 여러 신하들은 이 일에 대하여 다 벙어리와 같다."
하고, 하교하기를,
"시호(諡號)를 올리고 나서는 죽책(竹冊)과 은인(銀印)이 있어야 할 것이니, 도감으로 하여금 효순궁의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라. 봉원 도감을 상시 봉원 도감(上諡封園都監)이라 칭하되, 사체(事體)가 더욱 중하니 도제조(都提調)·도청(都廳)·감조관(監造官)을 차출하라."
하였다.

 

김상로(金尙魯)를 상시 봉원 도감 도제조로, 한광조(韓光肇)를 도청으로 삼고, 김종정(金鍾正)·홍술해(洪述海)·이창현(李昌顯)을 감조관으로 차출하였다.

 

7월 28일 신사

죽책문(竹冊文)을 대제학(大提學)이 곧 지어 바치도록 하는 일을 분부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책인관(冊印官)은 으레 찬성(贊成)으로 차출하나 참찬(參贊)이 대행하는 전례가 있으니, 이에 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7월 29일 임오

대제학(大提學) 조관빈(趙觀彬)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죽책문(竹冊文)을 지어 바치라는 명은 본디 곧 봉행해야 하겠습니다마는, 다만 어리석은 소견에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 시호를 올리는 일은 실로 우리 대조(大朝)께서 추보(追報)하는 지극한 효성에서 나왔으니, 무릇 뭇 신하로서 누구인들 공역(工役)을 감독하는 일에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그윽이 생각건대, 죽책(竹冊)이 옥책(玉冊)에 비하여 비록 경중(輕重)이 있기는 하나, 국조(國朝)의 대소 책문(冊文)은 승통(承統)한 비빈(妃嬪)이 아니면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혹 조금이라도 열조(列朝)의 전례(典禮)에 어그러지는 것이 있는데 다시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명에 따라 지어 바친다면, 이는 국가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조께 여쭈어 제때에 미쳐 재처(裁處)하소서."
하였다.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제학(大提學)이 지은 죽책문(竹冊文)은 얼마나 된다 하던가?"
하매, 우승지(右承旨)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대제학이 상서(上書)하였는데 아직 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일인가?"
하매, 황경원이 말하기를,
"대소 책문은 승통(承統)한 비빈(妃嬪)이 아니면 일찍이 없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마음은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차라리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을지언정 차마 유척기(兪拓基)와 뜻을 달리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처음에는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는데, 곧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여 임금이 말하기를,
"조관빈(趙觀彬)은 무상(無狀)하니, 대신이 마땅히 토죄(討罪)를 청해야 할 것이다.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졌는데, 그가 어찌하여 감히 이럴 수 있는가? 어제 관(冠)을 벗지 않고 좌우를 돌아본 것도 이미 수상하였다."
하고, 명하여 친문 전교(親問傳敎)를 쓰게 하고, 또 판부사(判府事) 유척기를 파직(罷職)하여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모두 체차(遞差)하였는데, 절목(節目)에 착오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조관빈(趙觀彬)을 친국(親鞫)하였다. 금부 도사(禁府都事) 윤광렬(尹光烈)·신대손(申大孫)이 곧 거행하지 않고 문랑(問郞) 김광국(金光國)이 문목초(問目草)에 ‘죄인’이라는 두 자를 쓰지 않았다 하여 모두 죄수를 국문(鞫問)하는 예(例)에 의하여 시위(施威)하였다가 곧 풀어 주고 이어서 국문에 참여하게 하였다. 조관빈에게 시위하고 불만(不滿)하였다고 지만(遲晩)하게 하였는데, 조관빈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사람됨이 경망하고 용렬하여 불만하는 죄과로 돌아가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깨닫지 못하였다.[不覺]’는 따위의 글자를 빼고 다만 불만하였다는 공초만을 받으라고 명하였다. 조관빈이 공초하기를,
"성교(聖敎)가 이러하시니, 마땅히 하교대로 하겠습니다."
하니, 드디어 삼수부(三水府)에 천극(栫棘)144)  하라고 명하였다. 판돈녕(判敦寧) 박문수(朴文秀)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조관빈은 참으로 그릅니다마는, 전하께서 어찌 그 아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박문수를 파직하라고 명하고 조관빈이 정배(政配)된 뒤에 직명(職名)이 있는 자로서 가서 문안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에게 명하여 죽책문(竹冊文)을 짓게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관빈(趙觀彬)의 서본(書本)을 신이 비록 미처 보지는 못하였으나, 대개 들으니, 의절(儀節) 사이의 일을 가지고 그 소견을 한 번 아뢰었는데 본디 조금도 악역(惡逆)을 범한 말이 없다 합니다. 비록 필부(匹夫)·천례(賤隷)일지라도 오히려 악역이 아닌데 국문(鞫問)을 베푸는 것은 마땅치 않을 것인데, 더구나 국사를 돕는 높은 지위의 재상(宰相)이 한마디 말한 것이 합당하지 않다 하여 문득 삼목(三木)145)  을 채우고 자루를 씌우고 묶어서 궐정(闕庭)에 데려오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사방에서 듣게 하거나 후세에 본보기로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노신(老臣)의 혈성(血誠)을 굽어살펴 빨리 친국(親鞫)하신다는 명을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살피지 않았다.

 

오수채(吳遂采)를 특제(特除)하여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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