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갑신
박문수(朴文秀)를 우참찬으로, 심육(沈錥)을 대사헌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대사간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집의로, 유언술(兪彦述)을 사간으로, 임위(任瑋)·남혜로(南惠老)를 장령으로, 조숙(趙)·이준휘(李儁徽)를 지평으로, 이인원(李仁源)을 문학으로, 정익하(鄭益河)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8월 4일 병술
예조(禮曹)에서 오는 초나흗날을 비롯하여 상선(常膳)을 회복한다는 뜻을 주원(廚院)에 분부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철보(李喆輔)를 승지로 삼았다.
8월 5일 정해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다. 출궁(出宮)할 때에 도승지(都承旨) 이철보(李喆輔)에게 명하여 상책인의(上冊印儀)의 소지(小識)를 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책인(冊印)은 어느 때에 비롯하였는가?"
하매, 내국 제조(內局提調)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한(漢)나라·송(宋)나라와 명(明)나라 때에 다 책인이 있었습니다. 송나라 때에 진관(陳瓘)이 황태후(皇太后)의 책문(冊文)을 지었는데, ‘낳아서 기르느라 애쓰신 망극한 은혜[劬勞罔極之恩]’라 한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 30년 동안 행하지 않은 일을 오늘에야 행하는 것은 또한 기다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궁문(宮門) 안으로 들어가 여(輿)를 멈추고 또 도승지에게 명하여 진책인의(進冊印儀)의 소지(小識)를 읽게 하고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이어서 고유제(告由祭)를 행하였다. 고유제가 끝나고 임금이 풍월헌(風月軒)에 나아가 원경하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신년146) 의 예(例)를 쓰면 4경(四更) 1점(一點)에 제사지내고 계사년147) 의 예를 쓰면 낮에 제사지내야 할 것이다."
하매, 원경하가 말하기를,
"고유제를 이미 행하였으니, 시호(諡號)를 올리는 일은 마땅히 낮에 행해야 할 것이고 반드시 밤에 행할 것은 없겠습니다. 또 아조(我朝)의 문소전(文昭殿)148) 은 명나라 조정의 봉선전(奉先殿)을 본떴는데, 명나라 조정의 사친(私親)의 별묘(別廟)는 시선(時膳)으로 제사하는 것이 봉선전과 같으므로 제물(祭物)을 광록시(光祿寺)에서 바칩니다. 이제 제물을 시선으로 쓰면 명나라 조정의 별묘의 제의(祭儀)와 합치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궁전(中宮殿)에는 두 번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사친에게는 이제껏 결여되었으므로, 오늘의 책인 등 물건은 친히 땀을 흘리며 궤(櫃)에 담았다. 하늘이 위에 있고 열조(列祖)께서 분명히 굽어보시는데, 내가 사친을 위하여 어찌 예(禮)에 지나치는 일을 하겠는가?"
하매, 원경하가 말하기를,
"명나라 효종(孝宗)은 사친의 기일(忌日)에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소식(素食)하였다는 말이 정사(正史)에 실려 있습니다. 정례(情禮)를 펼 만한 것은 이제 마땅히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상로가 말하기를,
"동협문(東挾門)·서협문(西挾門)도 있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반드시 서협문이 있어야 하겠는가?"
하매, 원경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출입하시는 문을 신들이 어찌 감히 출입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삼문(三門)을 세우라."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제사지내는 시각을 신의 생각으로는 어둑새벽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기를,
"일찍이 시호를 올릴 때에는 혹 밤에 하기도 하고 낮에 하기도 하였으므로 재정(裁定)하기 어렵고, 또 오늘 밤은 사직(社稷)의 대제(大祭)와 상치되니, 시호를 올리는 제사는 어둑새벽에 하라는 것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표석(表石) 전면(前面)은 두 줄로 쓰겠다는 뜻으로 여쭈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고, 하교하기를,
"이 뒤의 사체(事體)가 중하니, 기신 단자(忌辰單子)를 주원(廚院)으로 하여금 써 들이게 하라."
하였다.
8월 6일 무자
어둑새벽에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서 친제(親祭)를 행하였다. 시책(諡冊)을 올리기를 의식대로 하고, 또 인(印)을 올리기를 의식대로 하였으며, 아헌(亞獻)·종헌(終獻)하기를 의식대로 하고는 음복(飮福)하였다. 예(禮)가 끝나고서 재실(齋室)에 돌아가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는 한이 없다. 영빈(寧嬪)149) 은 어느 해에 궁에 들어왔는가? 사친과 사이가 가까웠다."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전교를 쓰게 하기를,
"내 어버이를 생각하였으면 마땅히 옛적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백상(閔百祥)을 막힘 없이 조용(調用)하고 영빈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벼슬이 없는 자는 곧 조용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년은 성모(聖母)150) 께서 복위(復位)하신 지 〈일주갑(一周甲)이 되는〉 해인데, 그때에 따라서 복작(復爵)된 것이 어느 빈(嬪)인가? 아이에게 상모(常母)가 없었음을 일찍이 하교하였거니와, 아! 내 어버이를 생각한다면 영빈을 생각해야 할 것인데, 오늘 예(禮)를 펴고서 영빈으로 하여금 외로이 수진궁(壽進宮)에 돌아가게 한다면, 이는 사친을 잊는 것이다. 특별히 화유(和柔)151) 로 영빈의 뒤를 잇게 할 것이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오늘 이 마음을 어떻게 펼 것인가? 갑술년152) 을 추상하니, 한층 더 슬프다. 성모께서 복위하신 〈일주갑이〉 바로 내년인데, 더구나 오늘 어떻게 견디겠는가? 민 백상에게 직첩(職牒)을 주고 서용(敍用)하라."
하였다. 상책인관(上冊印官) 좌참찬 박문수(朴文秀)에게 숙마(熟馬) 한 필을 면급(面給)하고, 죽책문 제술관(竹冊文製述官) 좌의정 이천보(李天輔)에게 숙마 한 필을 면급하고, 죽책문 서사관(竹冊文書寫官)·독죽책관(讀竹冊官)·은인 전문 서사관(銀印篆文書寫官)과 제사지낼 때의 집례(執禮)·대축(大祝)에게 각각 숙마 한 필을 내려 주고, 봉책관(捧冊官)·봉인관(捧印官)에게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고 공장(工匠) 등에게 해조(該曹)로 하여금 쌀과 베를 제급(題給)하게 하고, 궁위령(宮闈令) 이유신(李維新)에게 가자(加資)하고, 수직 중관(守直中官)과 찬의(贊儀) 이하 주시관(奏時官)에게 각각 상현궁(上弦弓)을 내려 주고, 수복(守僕) 등에게 쌀과 베를 제급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 예를 행하니, 한층 더 슬프다. 증(贈) 영상(領相)153) 의 집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그 봉사손(奉祀孫)을 우직(右職)에 조용하라."
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은 위리(圍籬)를 철거하여 단천부(端川府)로 이배(移配)하고 금오(金吾)154) ·추조(秋曹)155) 의 잡범(雜犯)을 모두 석방하고, 세초(歲抄)156) 에서 거중(居中)·거하(居下)로 점하(點下)된 자를 한결같이 모두 탕척(蕩滌)하고 도형(徒刑) 이하를 특별히 석방하고 가벼운 죄수도 또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환궁(還宮)할 때에 하교하기를,
"오늘 예(禮)를 펴니, 내 감회가 한층 더하다. 증(贈) 영상(領相)의 손자로서 진참(進參)한 자는 다만 최진형(崔鎭衡)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곧 준직(準職)에 제수(除授)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미 봉원(封園)하고 나니, 마음이 날개를 떨쳐 나는 듯하다. 더구나 하루가 이틀 같은 내 마음이 어찌 내년을 기다리랴마는, 이번 국역(國役)은 두어 해 동안 거듭되었으니, 만약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사친(私親)께서 옛적에 소심(小心)하시던 뜻을 본받겠는가? 내년에 장릉(長陵)에 전알(展謁)할 때에 소녕원(昭寧園)에 전배(展拜)하겠다. 아! 내년에 전배하는 데에는 뜻이 또한 있는 데가 있다. 아! 이 마음을 저 하늘이 안다."
하고, 여(輿)를 멈추고 외쳐 마음을 나타낼 때에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또 하교하기를,
"육상궁(毓祥宮)에는 결수(結數)에 준하지 못한 것이 3백 결(結)이 있으니, 궁(宮)에서 망정(望定)하기를 기다려 거행하라는 일로 호조(戶曹)에 분부하라."
하였다. 술회시(述懷詩)와 영빈(寧嬪)을 치제(致祭)하는 제문(祭文)을 쓰라고 명하였다. 혜정교(惠政橋)에 이르러 금오(金吾)·추조(秋曹)의 당상(堂上)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장익성(張益成)에 대한 처치를 어느 당상이 하였는가?"
하매,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참의(參議) 신회(申晦)가 처치한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놈은 궁임(宮任)이므로 내가 곧 들었는데, 근래 궁가(宮家) 소속에 대해서는 이러한 처치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참의는 한(漢)나라의 동선(董宣)157) 이라 할 만하다."
하매, 신회가 말하기를,
"그놈은 홍상한(洪象漢)의 종인데 주인을 배반하고 중이 되었다가 머리를 기르고 환속(還俗)하여 여염에 출입하며 하는 짓이 불측하므로, 신이 일전에 자리에 나아갔을 때 엄히 형신(刑訊)하여 배소(配所)로 보냈습니다."
하였다. 종성시(鍾聲詩)와 감회시(感懷詩)를 쓰라고 명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영빈을 치제하는 제문을 읽게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아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내 마음을 느낄 것이다."
하였다.
전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를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8월 7일 기축
하교하기를,
" 증(贈) 영의정(領議政)의 치제(致祭)와 정경 부인(貞敬夫人)의 치제를 일체로 거행하라."
하였다.
김양택(金陽澤)·김상중(金尙重)을 승지로, 권혁(權爀)을 형조 참판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좌윤으로, 민백상(閔百祥)을 호조 참의로, 이민곤(李敏坤)을 필선(弼善)으로, 유척기(兪拓基)를 판부사(判府事)로 삼았다.
8월 9일 신묘
임금이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서 예(禮)를 행하였다. 능과 비각(碑閣)과 정자각(丁字閣)을 봉심(奉審)하고 초헌례(初獻禮)를 행하였다. 아헌(亞獻)·종헌(終獻)이 끝나고서 목릉(穆陵)·휘릉(徽陵)·혜릉(惠陵)·숭릉(崇陵)·의릉(懿陵)에 나아갔다. 환궁(還宮)할 때에 열무(閱武)하고, 수가(隨駕)한 군병(軍兵)에게 전례에 의하여 호궤(犒饋)하라고 명하고, 김귀인(金貴人)의 묘(墓)에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8월 10일 임진
기백(畿伯)158) 과 차사원(差使員)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고, 하교하기를,
"한번 능행(陵幸)하면 서른 일곱 고을과 여섯 역승(驛丞)이 다 차원(差員)이 되니, 이것은 실로 한 도(道)의 큰 폐단이다. 이 뒤로는 온정(溫井)에 거둥할 때의 예(例)에 의하여 모든 차원을 겸차(兼差)하라고 기영(畿營)159) 에 분부하라."
하였다.
8월 13일 을미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재호(趙載浩)를 체차(遞差)하도록 허락하여 주고 민백상(閔百祥)을 비국 유사 당상(備局有司堂上)으로 차출하라고 명하였으니, 도제조(都提調) 이천보(李天輔)가 아뢴 것이다.
조재호(趙載浩)를 형조 판서로, 조영국(趙榮國)을 이조 판서로, 민백상(閔百祥)을 승지로, 윤급(尹汲)을 예문 제학으로, 유한소(兪漢蕭)를 필선으로, 최진형(崔鎭衡)을 훈련 정(訓鍊正)으로 삼았다. 최씨가 현직(顯職)에 등용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하였다.
향실(香室)의 관원을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향(香)과 축문(祝文)을 바꾸어 봉(封)하였기 때문이다.
8월 14일 병신
우의정(右議政) 김상로(金尙魯)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봉원 도감(封園都監)의 장문(狀聞) 가운데에 원(園)을 봉심(奉審)하였다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8월 15일 정유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는데, 김상로(金尙魯)에 대한 처분을 도로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천보(李天輔)가 장문(狀聞)의 두사(頭辭)에 ‘봉심(奉審)’이라는 두 자가 있다고 아뢰었기 때문이다.
동부승지(同副承旨) 민백상(閔百祥)이 상서(上書)하여 사직하니, 예답을 내렸다.
8월 21일 계묘
도감 당상(都監堂上)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김상로(金尙魯)가 누누이 인죄(引罪)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정자각(丁字閣) 뒤에 옛 무덤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버려두라."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평토(平土)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평토하지 말고 다만 좌우에 보토(補土)하여 옛 무덤의 형상을 없애게만 하라. 그 위에 나무가 났으면 내가 마땅히 뽑게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8월 22일 갑진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의릉(懿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8월 27일 기유
김상성(金尙星)을 홍문 제학으로, 신만(申晩)을 지춘추(知春秋)로, 정형복(鄭亨復)을 동춘추(同春秋)로 삼았다.
8월 29일 신해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160) 를 행하여 이세택(李世澤) 등 5인을 뽑았다. 이에 앞서 한권(翰圈)이 처음 이루어지니 물의가 시끄럽되 그 난잡함을 가장 말하므로, 임금이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에게 묻기를,
"이번 한권은 어떠한가?"
하니, 이천보가 대답하기를,
"그 가운데에 알지 못할 자가 한두 사람 있습니다. 대개 권점에 난잡한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뒤에 권점받은 사람들이 ‘알지 못할 자’라고 혼동하여 말하였다 하여 시애(撕捱)하고 시험에 나아가지 않으려 하므로, 이천보가 연석(筵席)에서 사관(史官)이 잘못 전하여 분운(紛紜)함을 이루었다고 아뢰어 사관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응순(金應淳)·유당(柳戇)·이상지(李商芝)는 곧 시장(試場)에 들어가지 않고 이휘중(李徽中)은 논박받았다 하여 들어가지 않으니, 임금이 엄히 하교하여 김응순 등 3인을 독촉하여 들어오게 하고 일이 지난 뒤에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는데, 석 달이 지나서 조율(照律)하였다. 이휘중은 백권(白券)을 냈는데, 신하들이 처의(處義)가 온화하다고 말하고 임금도 칭찬하였다.
8월 30일 임자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김상로(金尙魯) 등이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원역(園役)의 상황을 물으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공역(工役)이 거의 끝나 갑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역이 빨리 이루어진 것은 매우 독촉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들이 비록 빨리 하지 말게 하기는 하였으나, 공인(工人)들이 다 스스로 마음을 다하므로 공역이 쉽게 성취되었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재실(齋室)의 기둥과 벽에 빗물이 새어 색이 변하고 더러워졌음을 아뢰고 고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또 백성을 괴롭힐까 염려되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고쳐야 하겠는가?"
하였다.
이춘제(李春躋)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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