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계축
집의(執義) 박치문(朴致文)·헌납(獻納) 채제공(蔡濟恭)을 파직하였다. 이날 왕세자(王世子)가 상참(常參)을 행하라고 하령(下令)하였으나, 양사(兩司)에서 끝내 패초(牌招)를 받들지 않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상참을 정지하기에 이르렀는데,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려 파직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참판 오수채(吳遂采)를 체차(遞差)하고 홍봉한(洪鳳漢)을 예조 판서로 삼고, 심성진(沈星鎭)을 참판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대명회전(大明會典)》 배제의(陪祭儀)를 상고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明)나라 조정에서는 역대(歷代)의 제왕묘(帝王廟)에 친제(親祭)할 때에 배종(陪從)하는 여러 신하들이 따라서 배례(拜禮)를 행하였다. 이제 소녕원(昭寧園)에서 제사지낼 때에 수가(隨駕)한 백관(百官)이 융복(戎服)을 입고 벌여 선 것은 매우 이를 데 없다. 그 임금이 배례하여 제사하는데 그 신하가 배례하지 않아도 되는가? 원(園)과 능(陵)이 다르므로 사배(四拜)는 안되더라도 재배(再拜)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올해에 예순이므로 비록 노쇠하기를 하였으나 어버이를 위하는 중대한 의례(儀禮)는 결코 구차하게 할 수 없는데, 어제 의주(儀註)를 품정(稟定)한 것은 마침내 한심한 데 관계되었으니, 예조 판서 이익정과 참판 오수채를 금부(禁府)에서 추문(推問)하라."
하고, 다시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과 2품(二品) 이상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신하들이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니, 임금이 먼저 중관(中官)을 시켜 하교하기를,
"이번 원행(園幸) 때에는 대신 이하 백관(百官)이 호종(扈從)하지 말라."
하고, 이어서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시호(諡號)를 올리고 봉원(封園)하였으면 사체(事體)가 중하거니와, 군부(君父)가 제사지내는데 신자(臣子)는 절하지 않았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는가?"
하매, 우의정(右議政)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신들이 미처 참여하여 의주(儀註)를 듣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품정(稟定)할 수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절하지 않는 것이 그른 줄 알았다면, 그전에 어찌 청대(請對)하여 바로 잡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이 나를 대우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다시 무엇을 하교하겠는가?"
하였다.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신들은 대명(待命)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타이르기를,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은 마침내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반드시 대명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엄한 하교가 있었으니, 감히 태연할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먼저 추창(趨蹌)하여 나가 대죄(待罪)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소리내어 우러러 아뢰기를,
"의절(儀節)을 고치기를 청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신들의 죄입니다마는, 절하려 하지 않았다고 이르신 것은 실로 신들의 본의(本意)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비단 이번 의주뿐이 아니다. 지난번 궁(宮)과 원(園)에 두 번 거둥하였는데, 배종해 간 여러 신하들은 다 벌여 서서 절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예(禮)이겠는가?"
하매, 여러 신하들이 머뭇거리고 물러가 엎드렸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봉한(洪鳳漢)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번 원행의 의주에는 대저 미처 겨를이 없었던 것이 많이 있습니다. 고유(告由) 등의 절차도 마땅히 의정(議定)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생각하였다. 고하지 않고 원이라 칭한 것은 매우 의리가 없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이것은 원역(園役)의 일이 끝난 뒤에 할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일에 앞서 고유하는 것이 예이다."
하고, 이어서 미안한 분부를 내렸다. 여러 신하들이 비로소 다 뜰에 내려가 관(冠)을 벗고 청죄(請罪)하니, 모두 물러가라고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우의정(右議政) 김상로(金尙魯)와 궁과 원에 배종해 갔을 때에 벌여 서서 절하지 않은 여러 신하들을 한결같이 모두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의 하교는 사기(辭氣)가 아니며 억누르는 것이 아니다. 여러 신하들이 비록 스스로 옳게 여기려 하더라도 어찌 될 수 있겠는가? 아!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의리가 어찌 나로 인하여 쇠퇴하겠는가? 이제 만약 용서하여 경계하지 않는다면 오륜(五倫)이 이로부터 무너질 것이다. 두 번의 〈거둥에〉 배종한 여러 신하들 가운데에서 승지(承旨)·사관(史官)·종신(宗臣)·음관(蔭官)·무관(武官)의 당하(堂下)와 유도(留都)한 장신(將臣)과 시위(侍衞)를 제외하고 임금을 따라서 절하지 않은 대신(大臣)과 모든 신하들을 모두 파직하게 하고 의주(儀註)를 그르친 예관(禮官)을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9월 2일 갑인
승지(承旨)·사관(史官)이 입시(入侍)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철보(李喆輔)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번에 하신 일은 어버이를 위한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사람들이 누구인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가장 민망스러운 것은 상하의 뜻이 막힌 것입니다. 대신은 곧 전하의 복심(腹心)이고 예관은 곧 영을 받들고 하교를 따르는 유사(有司)이니, 전하께서 진실로 하셔야 할 일이 있다면 대신과 예관을 불러 조용히 이르시면 누가 받들어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번 처분은 조정(朝廷)을 비우는 것이라 이를 만합니다. 좁은 우리 나라로서 조정이 겨우 모양을 이루었는데, 어찌 비워야 하겠습니까? 헤아려 처치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에 대신이 없는 것은 비록 민망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어버이를 위하여 어찌 돌볼 것인가? 왕자(王者)가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온갖 유사(有司)를 갖추어 낼 수 있는데, 어찌 사람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철보가 말하기를,
"반교(頒敎)는 일이 중한데 제학(提學)은 다 파직한 가운데에 들어 있으니, 이것이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밖에 있는 양관(兩館)161) 의 제학을 신칙(申飭)하여 성안으로 들어와 반교문(頒敎文)을 오늘 안으로 지어 바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9월 3일 을묘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태묘(太廟)의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일이 있으면 고하는 것이 떳떳한 예(禮)인데, 더구나 사체(事體)가 중대한 것이겠는가? 시호(諡號)를 올려도 고하지 않고 봉원(封園)하여도 고하지 않고 안제(安祭)하여도 고하지 않는다면, 일이 있으면 고한다는 의리가 어디에 있는가? 왕자(王者)가 어버이를 위하여 예(禮)를 펴는데 결코 이렇게 할 수 없으니, 날을 가려 태묘에 고유(告由)하고, 반교(頒敎)하고 진하(陳賀)하는 예를 모두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에 드디어 초나흗날 병진(丙辰)에 고유하고 진하하되 소녕원(昭寧園)의 고유제도 또한 같은 날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김재로(金在魯)를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제배(除拜)하라고 명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하유(下諭)하기를,
"나이 일흔인 기구(耆舊)로서 휴치(休致)162) 한 신하를 이제 다시 제배하는 것이 어찌 즐거워서 하는 것이겠는가? 한편으로는 나랏일을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사체(事體)를 중히 여기는 것이다. 경(卿)의 나이가 비록 많기는 하더라도 신기(神氣)는 쇠약하지 않았거니와, 대례(大禮)가 내일 있으니 곧 일을 돌보아야 한다."
하였다.
서명빈(徐命彬)을 이조 판서로, 신만(申晩)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능엄경(楞嚴經)을 중흥사(中興寺)에 두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 옛 강서원(講書院)의 서책(書冊)을 치부(置簿)한 것을 보니, 능엄경이 있었다. 이것은 내 손자를 가르치는 도리가 아니니, 북한(北漢) 중흥사에 보내어 두게 하라."
하였다.
장악원(掌樂院)에서 이원(梨園)이라는 고호(古號)를 이어 쓰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원은 곧 당(唐)나라 때의 바르지 못한 이름이다. 이제 듣건대, 악원(樂院)에서 이것으로 칭호한다 하니, 이 뒤로는 금하라."
하였다.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신하들에게 모두 군직(軍職)을 주고 불참한 자는 곧바로 금부(禁府)에서 추문(推問)을 받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진하(陳賀)하는 반열(班列)에 참여하고 불참하는 것은 하교하여 신칙(申飭)할 일이 아닌 듯합니다. 금부에서 추문하라는 명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신(宰臣)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휘중(李徽中)에게 설서(說書)를 제수하였는데, 처의(處義)를 잘하였기 때문이다.
9월 4일 병진
유성(流星)이 제좌(帝座)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3,4척(尺)쯤이었다. 태백성(太白星)이 헌원 대성(軒轅大星)을 범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집의로, 김이만(金履萬)을 사간으로, 박홍준(朴弘儁)을 헌납으로, 이석상(李錫祥)·심수(沈鏽)를 정언으로, 남학로(南鶴老)·이현조(李顯祚)를 지평으로, 홍봉한(洪鳳漢)을 내국 제조(內局提調)로, 정희신(丁喜愼)을 장령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예조 참판으로, 이광세(李匡世)를 공조 참판으로, 정홍순(鄭弘淳)을 겸필선(兼弼善)으로, 이중조(李重祚)를 겸문학(兼文學)으로, 이정보(李鼎輔)·윤심형(尹心衡)을 동의금(同義禁)으로, 홍중징(洪重徵)을 호조 참판으로, 이일제(李日躋)를 한성 좌윤으로, 이보혁(李普赫)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화경 숙빈(和敬淑嬪)에게 시호(諡號)를 올리고 봉원(封園)한 일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진하하고 반교(頒敎)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선교(宣敎)하니, 왕세자(王世子)가 문무 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치사(致詞)하고 진하하였다.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진책(進冊)하는 의식이 막 거행되었는데 능히 정문(情文)에 맞고, 봉원(封園)하는 예(禮)가 이미 이루어져 비로서 윤음을 펴니, 숭보(崇報)는 이미 지극하고 미성(微誠)은 조금 펴졌다. 생각건대, 우리 화경 숙빈께서는 참으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영덕(令德)을 나타내셨으니, 기쁨과 슬픔을 기사년163) 과 갑술년164) 에 함께 하여 정성이 곤위(壼闈)165) 에 미쁘고, 공경과 경계를 아침부터 밤까지 늦추지 않아서 교화가 신극(宸極)166) 을 도왔다. 추모하는 마음은 오히려 기임각(祈稔閣)에 어렴풋하고 지극한 아픔은 길이 옛 장렴(粧匳)167) 에 맺혀 있다. 돌아보건대, 이 미미한 몸이 기업(基業)을 이어받은 것은 또한 끊임없는 여경(餘慶)에 힘입은 것이다. 큰 기업을 길이 만세에 굳히셨으니 감히 이끌고 도와 주신 은혜를 잊으랴마는, 성대한 전례(典禮)를 오히려 30년 동안 늦추어 온 것은 대개 겸손하신 뜻을 본받은 것이다. 지난해에 묘(廟)·묘(墓)의 호(號)를 바쳤으나 마침내 현양(顯揚)하는 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있었고, 만년에 육아(蓼莪)168) 의 편(篇)을 욀 때마다 돌보아 길러 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였다. 그래서 숭봉(崇奉)의 전례를 거행하여 추모하는 정성을 대강 다하니, 죽책(竹冊)과 은장(銀章)에는 이미 두 자의 아름다운 시호를 바쳤고, 정자각(丁字閣)과 의석(儀石)은 만세의 길강(吉岡)에 수선(修繕)되었다. 내가 봉헌(奉獻)하는 것은 태상(太常)169) 에 명하여 갖추게 하고, 측량하여 세우는 것은 뭇 신하에게 칙려(飭勵)하여 이루게 하니, 실로 경사를 도타이하여 복을 주신 데에 힘입어 이제 다행히 덕(德)을 밝혀 조상에게 보답한 것이다. 한(漢)나라·당(唐)나라·송(宋)나라의 고사(故事)는 내가 행하려 하지 않았거니와, 경사 대부(卿士大夫)에게 하문하니 다들 합당하다 하였다. 아름다움을 현양하는 성대한 전례가 잘 갖추어졌으니, 조상을 추모하는 정을 어찌 견디겠는가? 고명(誥命)을 받으신 지 주갑[舊甲]이 마침 돌아오니, 옛날을 생각하는 정성이 더욱 간절하다. 이에 의례를 끝낸 날을 당하여 어찌 탕척(蕩滌)하는 명이 없겠는가? 비궁(閟宮)170) 에 고유(告由)하매 다행히 의문(儀文)에 흠결이 없고, 법전(法殿)171) 에서 하례를 받으매 슬픔과 기쁨이 함께 깊어짐을 깨닫는다. 기쁨을 나타내고 기쁨을 같이할 때에 널리 사유(赦宥)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하거니와, 허물을 씻고 새로워지면 모두가 생성(生成)의 은혜를 입을 것이다. 아!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내리신 복을 생각하면 감히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늦출 수 있겠는가? 도리어 사방의 신민(臣民)이 삼가 들으면 거의 효제(孝悌)가 일어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잘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지제교(知製敎) 정실(鄭實)이 지어 바쳤다.】 선전관(宣箋官) 정홍순(鄭弘淳)이 하전(賀箋)을 읽었다. 끝나니, 임금이 눈물을 머금고 말하기를,
"몇 해 동안 경영한 일이 오늘에야 이루어졌으니, 슬프고 기쁜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하고, 군병(軍兵)들에게 선온(宣醞)172)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육순인 만년에 사친(私親)을 위하여 예(禮)를 다하였다. 일진이 좋은 때에 대례(大禮)가 순조로이 이루어졌으니, 내가 무엇이 섭섭하겠는가?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한 뒤에 응당 행해야 할 은전으로 대과(大科)가 있어야 할 것이니, 정시(庭試)로 설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조(吏曹)·병조(兵曹)의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말게 되었거나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삭제된 무리를 모두 탕척하라."
하고, 또 승지(承旨) 조명정(趙明鼎)에게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기를,
"이조·병조의 세초(歲抄) 가운데에서 대리(代理)하기 전에 점하(點下)된 것 이외는 모두 당척하라."
하였는데, 조명정이 붓을 멈추고 말하기를,
"그 가운데에서 지극히 중대한 것을 범한 사람도 모두 탕척하는 데에 넣는다면 경솔히 미리 하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선(承宣)173) 이 버티는 것은 다만 이광의(李匡誼) 때문이다. 오늘 어찌 감히 당습(黨習)을 부릴 수 있는가? 승지를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이천보(李天輔)를 다시 제배(除拜)하여 좌의정으로 삼고, 이창의(李昌誼)를 호조 판서로 삼았다.
9월 5일 정사
하교하기를,
"상시 봉원 도감 도제조(上諡封園都監都提調) 우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는 안구마(鞍具馬) 한 필을 면급(面給)하고, 제조(提調) 이익정(李益炡)·이창의(李昌誼)·이익보(李益輔)와 도청(都廳) 한광조(韓光肇)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낭청(郞廳) 이식(李埴)·이시중(李時中)·이규명(李奎明)·송흠명(宋欽明)·이종덕(李宗德)은 모두 승서(陞敍)하고, 원역(員役)·공장(工匠) 이하에게는 모두 각각 차등을 두어 시상하라."
하였다.
9월 6일 무오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체해(遞解)하여 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경의 나이는 비록 늙었으나 기력은 오히려 씩씩하니, 보호(保護)하는 중임(重任)을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9월 7일 기미
소녕원(昭寧園)의 수원관(守園官)을 수봉관(守奉官)이라고 고쳤는데,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의 계청(啓請)을 따른 것이다.
김상성(金尙星)을 예문 제학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예조 참판 홍문 제학으로, 조영국(趙榮國)을 한성 판윤으로, 김한철(金漢喆)을 좌윤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우윤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 등에게 묻기를,
"봉원(封園)을 이제까지 늦춘 뜻은 대개 바른 예(禮)를 얻고자 한 데에 있었는데, 이제는 이미 행하였으니, 조천(祧遷)할 것인지 조천하지 않을 것인지를 의논하여 정해야 할 것이다."
하매, 여러 신하들이 다 말하기를,
"육상궁(毓祥宮)은 우리 성궁(聖躬)을 탄생하게 하셨으니, 백세(百世)에 조천하지 않는 사당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은 위로 세실(世室)을 따라 예를 정하고 싶다."
하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만약 위로 세실을 따르는 것으로 말한다면 서로 막혀 난처한 일이 또 있을 것이니, 다만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해진다는 의리를 따르는 것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뜻이 이러하니, 내가 마지못하여 따르겠다."
하였다.
국구(國舅)의 예(例)에 의하여 증(贈) 영의정(領議政)부터 위로 두 대(代)를 증(贈) 찬성(贊成)은 우의정으로 올려 추증(追贈)하고 증(贈) 판서(判書)는 찬성으로 올려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9월 10일 임술
우박이 내렸다.
판부사(判府事) 김약로(金若魯)가 졸(卒)하였다. 부문(訃聞)하니, 3년 동안 녹봉(祿俸)을 그대로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의 제상(祭床)을 만들라고 명하고, 인하여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이제 상탁(床卓)을 만들되 특히 좁고 작게 하라. 넓고 크게 하고 싶지 않다."
하매,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근래 지나친 사치가 풍속을 이루어 여염의 필부(匹夫)일지라도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다투어 숭상하는데, 이번의 모든 의절(儀節)은 간략하게 하도록 힘쓰시니, 신들은 못 견디게 흠탄(欽歎)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림(翰林) 이세택(李世澤)에게 묻기를,
"선정(先正)의 묘(墓)의 석물(石物)은 어떠한가?"
하매, 이세택이 말하기를,
"신의 선조인 문순공(文純公) 신(臣) 이황(李滉)이 유언하여 예장(禮葬)을 사양하도록 경계하였으므로, 신의 육대조인 신 이준(李雋)이 두 번 상소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드디어 예장하였습니다마는, 석물은 다 간략하게 하여 그리 높고 크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이 예장을 사양한 뜻은 후세에서 본받을 만하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공인(貢人)의 월령(月令)의 폐단을 조가(朝家)에서 변통한 뒤에도 오히려 분운(紛紜)의 폐단이 있다 하니, 법을 세운 처음에 버려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장무 감찰(掌務監察)을 나문(拿問)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11일 계해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여 전배례(展拜禮)를 행하고 나서 이어서 소녕원(昭寧園)에 거둥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여 하교하기를,
"태묘(太廟)에는 진현(進見)하고 이미 고유(告由)하였으나, 육상궁에는 아직도 고유하지 않았다. 원(園)에 거둥하여도 궁(宮)에 고하지 않는 것이 예(禮)이겠는가? 오늘 밤에 먼저 본궁(本宮)에 고유한 뒤에 동가(動駕)해야 할 것인데, 진전(眞殿)의 예(例)에 의하여 구전(口傳)으로 고유하고 전배(展拜)하는 한 절목은 전례대로 거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원에 거둥하는 것은 정례(情禮)가 당연한 것이다마는, 원과 묘(墓)는 10여 리 사이이고 이제 와서 예를 펴는데, 더구나 13일이 어떤 날인가? 슬픈 마음이 매우 절실하니, 효장묘(孝章墓)·효순묘(孝純墓)·의소묘(懿昭墓)에는 이달 13일에 종신(宗臣)을 보내어 같은 날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귀주(貴主)의 묘에는 이달 14일에 내시(內侍)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라."
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또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174) 과 증(贈) 영상(領相)의 묘에도 15일에 치제하라고 명하고 다 친히 제문을 지어서 내렸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서 고유제(告由祭)를 행하였다. 임금이 융복(戎服)을 갖추고 여(輿)를 타고 정문(正門)을 나서니, 왕세자(王世子)가 융복을 갖추고 파자교(把子橋)에 나가 있다가 지송(祗送)한 뒤에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임금이 궁문(宮門)을 들어가 면복(冕服)으로 고쳐 갖추고 제사지냈다. 끝나고서 이어서 소녕원(昭寧園)에 나아가서 천담복(淺淡服)으로 고쳐 갖추고 판위(板位)에 나아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먼저 비각(碑閣)을 봉심(奉審)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비석이 크다."
하였다. 그 다음에 원(園)을 봉심하고 드디어 재실(齋室)로 돌아왔다.
9월 12일 갑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하교하기를,
"협련 뇌자(挾輦牢子)와 순령수(巡令手)에게는 여기에서 죽을 장만하여 먹이고 수가 군병(隨駕軍兵)에게는 어영청(御營廳)·훈국(訓局)175) ·용호영(龍虎營)에서 또한 죽을 장만하여 먹이게 하라."
하였다.
9월 13일 을축
임금이 친제(親祭)를 행하니,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배제(陪祭)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어제 제문(御製祭文)에 이르기를,
"아! 지난 신축년176) 에 배묘(拜墓)하고 입궐(入闕)하여 33년의 세월이 빨리 지나갔습니다. 그 뒤에도 전배(展拜)는 때때로 혹 있었으나, 스스로 초심(初心)을 돌이켜보면 한층 더 슬픕니다. 이제 봉원(封園)함에 따라 길일(吉日)을 가리도록 명하여 몸소 와서 정자각(丁字閣)에서 친제합니다. 왕년에 힘들여 길러 주신 은혜에 대하여 만분의 일을 조금 갚는 것이니, 고개를 쳐들고 숙이며 배회하면 감회가 매우 절실합니다. 송백(松柏)은 예전과 같고 상설(象設)을 새롭게 하니, 비록 정례(情禮)를 펴기는 하였으나 서글피 한밤을 지냈습니다. 나무는 비록 멈추려 하더라도 바람이 멈추지 않음을 어찌합니까? 아들은 비록 봉양하려 하더라도 뜻대로 하지 못합니다. 아! 오늘이야 더욱 어떻게 스스로 억누르겠습니까? 오는 길에 선릉(先陵)을 지나 또 원(園)에 전배(展拜)하니, 저녁 구름을 멀리 바라보며 스스로 눈물을 삼킬 뿐입니다. 슬픔을 머금으며 봉심(奉審)하고 몸소 잔을 올리니, 작은 정성을 굽어살펴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원례(辭園禮)를 행하고, 이어서 원(園)을 봉심(奉審)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천약(崔天若)이 천지송(千枝松)을 뽑으려 한 것은 참으로 괴이하다."
하매, 동부승지(同副承旨) 한광조(韓光肇)가 말하기를,
"김가(金哥)의 무덤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옮기려 하였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그 동구(洞口) 안에서 망제(望祭)하는 것을 허락하였거니와, 봉심(奉審)할 때에 내가 옆으로 해서 올라간 것은 남의 무덤을 밟을까 염려한 것이다."
하였다. 회가(回駕)할 때에 유민(流民)을 보고 물으니 곧 철원(鐵原) 사람이었는데, 하교하기를,
"예전에 이윤(伊尹)177) 은 비록 한 지아비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면 저잣거리에서 종아리를 맞는 듯이 부끄럽다 하였는데, 오늘 길가에서 우연히 걸인(乞人)을 보니 마음에 매우 측은하다. 이것은 바로 《맹자(孟子)》에 이른바 곤궁한 사람이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한 것인데, 자목(字牧)하는 신하가 어루만져 돌보지 못하여 유리(流離)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내가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여기는 뜻을 본받은 것이겠는가? 해당 부사(府使)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라."
하였다.
대가(大駕)가 환궁(還宮)할 때에 왕세자(王世子)가 파자교(把子橋)에서 지영(祗迎)하였다.
9월 14일 병인
예조 판서(禮曹判書)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육상궁(毓祥宮)의 삼문(三門)의 홍초장(紅綃帳)과 신탑(神榻)을 16일에 모시고 가서는 마땅히 고유제(告由祭)를 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달 29일은 곧 동조(東朝)의 탄신(誕辰)이다. 이날에 친림(親臨)하여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할 것이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9월 15일 정묘
왕세자(王世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판윤(判尹)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도성(都城) 안의 천거(川渠)가 근래 특히 심하게 막혀서 큰비를 만날 때마다 물길이 넘쳐 피해가 적지 않고 시민(市民)이 익사할 걱정까지 있으니, 청컨대 내년 봄을 기다렸다가 쳐내게 하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심수(沈鏽)가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패초(牌招)를 어긴 대신(臺臣)을 파면하기를 청하니, 하령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서명빈(徐命彬)을 파직하였으니, 패초(牌招)를 어겼기 때문이다.
9월 16일 무진
신위(申暐)를 대사간으로, 최성대(崔成大)를 집의로, 이홍직(李弘稷)을 장령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좌참찬으로, 김진상(金鎭商)을 우참찬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좌빈객(左賓客)으로, 신만(申晩)·서명빈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9월 18일 경오
진사 복시(進士覆試)를 설행(設行)하였다. 하루 건너서 생원 복시(生員覆試)를 설행하였다.
9월 19일 신미
전라도 어사(全羅道御史) 한광회(韓光會)가 입시(入侍)하였다. 영암 군수(靈巖郡守) 이양중(李養中)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으니, 수계(繡啓)178) 에 칭찬하였기 때문이다.
권이형(權二亨)의 아내 홍씨(洪氏)가 상언(上言)하여 그 지아비가 은(銀)을 만들었다는 억울한 죄를 하소연하니, 하교하기를,
"예전 한(漢)나라 때에는 제영(緹縈)을 위하여 순우의(淳于意)의 죄를 감하였거니와,179) 지난 〈경오년180) 에는〉 이종림(李宗林)의 효성 때문에 이애(李愛)의 죄를 특별히 감하였다. 어제 홍조이(洪召史)가 지아비를 위하여 억울한 죄를 하소연하는 것이 8년 동안 한결같았으니, 그 마음이 숭상할 만하다. 권이형이 범한 것은 한나라 고조(高祖)의 삼장(三章)181) 의 법을 범한 것과 다르니, 이러한 무리는 비록 그 아내가 없었더라도 의리로써 참작하여 처치할 것이 있다. 효자를 위하여 이애의 사죄[一律]를 용서하였으니, 의부(義婦)를 위하여 그 지아비를 참작하여 처치하는 것이 어찌 지나치다 하겠는가? 추조(秋曹)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그 뒤에 여러 신하들이 다 ‘권이형의 죄는 실로 대벽(大辟)182) 을 범하였으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특별히 명하여 사형을 감면하여 멀리 정배(定配)하게 하였다.
9월 23일 을해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는데, 명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도 같이 들어오고 왕세자(王世子)도 시좌(侍坐)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동의보감(東醫寶鑑)》과 《증보만병회춘(增補萬病回春)》을 영영(嶺營)으로 하여금 간판(刊板)하게 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또 각릉(各陵)·각전(各殿)의 조과(造果)에 쓸 기름과 꿀을 더 마련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동의금(同義禁)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전 곡산 부사(谷山府使) 유언국(兪彦國)이 중고(中考)에 들어서 파직(罷職)된 뒤에 그 아비의 병 때문에 유장(由狀)183) 을 내고 곧 떠났는데, 도신(道臣)이 장계(狀啓)하여 그 마음대로 떠난 것을 죄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이제 바야흐로 금오(金吾)에서 나문(拿問)을 청합니다마는, 그 아비의 병은 마침내 구료(救療)하지 못하였다 하니, 효리(孝理)의 정사(政事)로서는 불쌍히 생각할 방도가 있을 듯합니다."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영장(營將)을 겸한 수령(守令)은 비록 면간 교대(面看交代)184) 하는 규례가 있기는 하나 이것은 문법(文法)의 죄에 지나지 않는데, 이미 친상(親喪)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분간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분간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비국(備局)에 내린 거행 조건(擧行條件)에 대하여 좌상(左相)이 초기(草記)로 회계(回啓)하였습니다마는, 미처 써 들이지 못한 것이 네 건입니다. 그 첫째는 일찍이 경기 어사(京畿御史) 정홍순(鄭弘淳)의 아뢴 바로 인하여 나룻배의 몸집이 커서 가는 것이 더디므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구획(區劃)하게 하는 일인데, 변통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근래는 배를 만드는 것이 전의 제도와 다르다 하니, 청컨대 버려두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둘째는 일찍이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상성(金尙星)의 아뢴 바로 인하여 무변(武弁) 가운데에서 비록 수령을 지내지 않았더라도 만약 우후(虞候)를 지냈으면 마땅히 전례에 의하여 시행하게 해야 한다는 일인데, 의논하여 처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근래 무변이 적체된 것은 비록 매우 민망스럽기는 하나, 한 번 우후를 지낸 것을 곧 이력으로 삼는다면 관제(官制)의 변통에 관계되는 것이고, 또 우후 가운데에서 수령 한두 자리를 조용(調用)하라는 일로 이제 막 특별히 하교하여 신칙(申飭)하셨으니, 청컨대 버려두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예전에는 무변은 본디 수령을 지내고 당상(堂上)에 오르는 법이 없었으므로 명무(名武)라고 칭하는 자는 수년이 못되어 당상에 올랐으니 그 갑자기 승진하는 것이 제한이 없었거니와, 중간에 변통하여 반드시 수령을 지내야 승자(陞資)하게 한 것은 대개 조급히 벼슬을 다투는 것을 누르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수령과 우후는 같은 외임(外任)이므로 전에 아뢴 바에 의하여 정식(定式)하여도 안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셋째는 일찍이 사직(司直) 김성응(金聖應)이 아뢴 바로 인하여 군기시(軍器寺)의 별파진(別破陣)을 줄인 수를 변통하기를 청한 것인데, 서울에서 모아 들여 더 배정하라는 일로 명하(命下)하셨습니다. 본시(本寺)의 별파진은 이미 액수를 줄였는데 또 급대(給代)하지 않으면 원군(元軍)이 지탱하기 어려운 것은 형세가 본디 그러할 것이니, 청컨대 혁파된 수어청(守禦廳)의 표하군(標下軍) 중에서 가려서 배정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군기시의 별파진은 경오년185) 에 액수를 줄인 뒤로 구차함을 면하지 못하므로 서울에서 더 배정하기를 청하는 일까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마는, 도하(都下)의 소민(小民)은 군병(軍兵)·이례(吏隷)를 제외하고는 신역(身役)이 없는 자가 없으니, 이제 만약 충정(充定)하여 베[布]를 걷는다면 민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군병을 더 충정하는 일은 쉽사리 허락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버려두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넷째는 일찍이 균역사(均役使) 이후(李)가 아뢴 바로 인하여 호남의 송전(松田)이 있는 곳의 소나무 그늘에 덮이거나 솔방울이 떨어지는 곳은 장적(帳籍)에 등록된 논밭이 묵는 것이 아까우므로 다시 경계를 정하는 일인데, 변통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각도(各道)의 송전의 정해진 경계 밖의 장적에 등록된 양전(良田)이 섞여 들어가 묵는 폐단은 전후에 신칙한 것이 엄명할 뿐 아니라 정묘년186) 사이에도 또한 본사(本司)에서 낭청(郞廳)을 따로 보내어 호남의 송전을 곳곳마다 적간(摘奸)한 뒤에 금표(禁標) 밖의 양안(量案)에 등록된 논밭으로서 묵은 것을 한결같이 모두 도로 일구라는 일로 복계(覆啓)하여 분부하였습니다. 조정의 명령이 내려져도 착실히 거행하지 못하여 폐단이 다시 전과 같아진 것은 일이 매우 놀라우니, 청컨대 본도(本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좌도(左道)·우도(右道)의 수신(帥臣)에게 왕래하여 살펴서 신보(申報)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조영국(趙榮國)을 이조 판서로, 김상성(金尙星)을 호조 판서로, 조명리(趙明履)·김상중(金尙重)을 승지로, 이천보(李天輔)를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로, 임위(任瑋)를 헌납으로, 이후달(李厚達)을 지평으로, 정창성(鄭昌聖)·박기채(朴起采)를 정언으로, 한광회(韓光會)를 부교리로, 이득종(李得宗)·민백창(閔百昌)을 수찬으로, 정기안(鄭基安)을 보덕으로, 이의철(李宜哲)을 사서로, 유언민(兪彦民)을 겸 사서로, 김성응(金聖應)을 지사(知事)로, 정익량(鄭益良)을 경상 우병사로, 이한응(李漢膺)을 전라 우병사로 삼았다.
9월 24일 병자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예조 판서(禮曹判書)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고, 《궁원식례보편(宮園式例補編)》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는 내 마음에도 꼭 맞는다."
하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강목(綱目)》을 보니, 한(漢)나라 장제(章帝)가 마태후(馬太后) 때문에 외친(外親)의 자제를 사랑하였는데, 사관[史氏]이 장제의 효성이라 일컬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늘 광성 국구(光城國舅)187) 와 여양 국구(驪陽國舅)188) 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라는 뜻을 여러 번 하교하셨으니, 우리 성상의 효성은 장제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 신은 그윽이 못 견디게 흠앙(欽仰)합니다."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25일 정축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결전(結錢)을 설행한 뒤에는 어느 전토(田土)를 물론하고 다 각 고을에서 사실대로 균청(均廳)에 신보(申報)합니다마는, 경역(京驛)의 위전(位田)은 전 병조 판서(兵曹判書) 홍계희(洪啓禧)가 진달하여 병조의 낭청(郞廳)으로 하여금 답험(踏驗)하여 신보해 오게 하라는 일로 윤허받았습니다. 이제 그 사상(事狀)을 듣건대, 가령 실전(實田)이 5백 결(結)이라면 매결(每結)마다 다만 1전만을 거두고는 이어서 1백 결이라고 균청에 신보하여 마치 실결이 그러할 뿐인 것처럼 하였다 합니다. 조가(朝家)에서 역졸(驛卒)을 염려하여 특별히 줄이도록 허락하였으면 혹 괜찮겠으나, 어찌 아래에서 이렇게 사사로이 줄일 수 있겠습니까? 이 뒤로는 본관(本官)과 병조의 낭청이 함께 살펴서 사실대로 성책(成冊)하여 신보하게 하고, 역졸이 만약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으면 또한 좋은 방법을 따라 염려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결역(結役)이 이미 정해진 뒤에 위전을 어찌 사사로이 줄일 수 있겠는가? 역졸을 지탱하여 보존할 방도를 편리한 방법을 따라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양서(兩西)189) 의 해마다 회록(會錄)한 무명을 조금 날라 와서 급대(給代)하는 수요(需要)에 보태고 그 나머지는 청컨대 이르든 늦든 물론하고 곡식이 흔할 때를 기다려서 적당히 쌀로 바꾸어 홍수와 가뭄의 수용(需用)에 갖추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9월 28일 경진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가 조관빈(趙觀彬)을 석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내가 삼수(三水)에서 단천(端川)으로 옮길 때에 대개 석방할 뜻이 없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생원(生員)·진사(進士)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여 각각 한 구(句)를 읽어 아뢰게 하고, 기임각관예시(祈稔閣觀刈詩)를 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 이 곳에서 한가히 밭을 갈며 지내려 하였으나 이제는 다시 할 수 없고 또 전원(田園)이 다 이미 묵어 버려졌으니, 생각하면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하였다.
9월 29일 신사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탄일(誕日)이다.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고 왕세자(王世子)가 치사(致詞)하였다. 하교하기를,
"육순(六旬)인 만년에 몸소 자전(慈殿)의 탄일에 진하를 행하였다. 올해에 이 예(禮)가 있을 것을 어찌 미루어 생각하였겠는가? 애일(愛日)의 마음190) 이 속에서 한층 더하다. 자전의 동기(同氣) 가운데 고(故) 군수(郡守) 이덕린(李德隣)의 아내에게 아들이 있으나 아직 일명(一命)191) 의 벼슬도 없으니, 어떻게 그 조상을 제사하겠는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11월 (0) | 2025.10.03 |
|---|---|
|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10월 (0) | 2025.10.03 |
|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8월 (0) | 2025.10.03 |
|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7월 (0) | 2025.10.03 |
| 영조실록79권, 영조 29년 1753년 6월 (0) | 2025.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