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임오
일식(日蝕)이 있었다.
10월 3일 갑신
사간(司諫) 김이만(金履萬)이 상서(上書)하기를,
"오늘날 백성의 피폐가 심합니다. 왕년의 돌림병과 지난 겨울의 홍역으로 죽은 자가 잇단 것은 팔도가 같고, 남은 백성은 논밭이 황폐하고 집이 무너져 본토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흔히 유랑하니, 마을이 쓸쓸하여 다시는 풍부하던 전일과 같지 않습니다. 불행히 또 올해도 가뭄과 장마의 재해가 있었으므로, 양남(兩南)192) 은 비록 조금 곡식이 잘되었다 하나 경기와 각도가 대체로 여물지 않은 것이 많고 전해 들은 말로는 혹 웃자란 것도 있다 하는데, 호서(湖西)의 제천(堤川)과 관동(關東)의 원주(原州)와 경기의 지평(砥平)·양근(楊根)·양주(楊州)·광주(廣州) 등지에 이르러서는 신이 부름받고 오는 길에 지나다가 눈으로 직접 본 것입니다. 논은 태반이 황폐하고 기장·조 등속의 곡식도 또 풍재(風災)에 손상되었으므로 가을 곡식이 성숙할 때가 되어도 항아리나 섬에 담을 거리가 못되니, 가엾은 우리 백성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니, 백성을 따르게 하여 보전하는 방책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그 요체는 오직 수령(守令)을 신중히 간택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대조(大朝)께서 신칙하신 명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거니와, 열읍(列邑)을 두루 살펴보건대, 대체로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선택한 것이 많고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선택한 것은 드뭅니다. 백성을 벗겨 자기를 살찌우는 자도 이따금 있는데 도신(道臣)의 전최(殿最)193) 는 반드시 죄다 공의(公議)를 따르지 못하고, 탄핵하는 글[白簡]에 거론하거나 수의(繡衣)가 논계(論啓)하는 것은 특히 그 천백(千百) 중에서 하나뿐입니다. 혹 장오(贓汚)를 범한 것이 다 드러나더라도 결국 감죄(勘罪)하는 것은 두어 해 동안 금고(禁錮)하거나 도형(徒刑)에 처하거나 유배(流配)하고 마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탐오(貪汚)한 관리가 징계되어 두려워할 것이 없어서 더욱 노략질을 일삼으므로, 백성의 고통 소리가 달로 더하고 날로 심해진 것은 실로 장법(贓法)이 엄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 한(漢)나라의 구양흡(歐陽歙)은 당세의 유종(儒宗)으로서 지위가 삼사(三事)194) 에 올랐어도 장죄(贓罪)로 사형(死刑)을 논하게 되었을 때에 제자 1천여 인이 대궐을 지키며 불쌍히 여겨 용서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나 광무제(光武帝)가 끝내 용서하지 않아〈옥중에서 죽었습니다.〉 법이 진실로 이러하다면 탐욕이 많은 자가 있더라도 또한 감히 탐학(貪虐)을 부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 대조(大朝)께 여쭈어, 모든 수령을 차견(差遣)할 때에 먼저 전관(銓官)을 신칙하여 각별히 선택하게 하되 각별히 선택하지 못하면 전관을 죄주고, 그 다음에 도신을 신칙하여 태거(太去)하게 하되 태거하지 못하면 도신을 죄주며, 한번 장오를 범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법으로 재결하여 가벼운 자는 귀양보내고 무거운 자는 죽이되 오래도록 계속하고 조금도 느슨히 하지 않아서 사람마다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하소서. 그러면 탐오의 풍속이 조금 고쳐지고 유랑하는 백성도 또한 안정하게 될 것입니다. 대개 백성을 가까이하는 것은 수령만한 자가 없으니, 수령이 어질고 어질지 못한 데에 백성의 기쁨과 슬픔이 달려 있고 백성의 기쁨과 슬픔에 또 국가의 안녕과 위란(危亂)이 따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바는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0월 4일 을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생원(生員)·진사(進士)를 방방(放榜)195)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난삼(欄衫)의 제도는 고황제(高皇帝)196) 의 유제(遺制)인데, 당화(唐畵)에 그려진 것이 이와 같다."
하였다.
10월 5일 병술
햇무리하였는데, 양이(兩珥)가 있었다.
왕세자(王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접(召接)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수원 부사(水原府使) 이의풍(李義豊)은 백성을 잘 다스리고 또 아전을 잘 단속하므로 감사(監司)가 순도(巡到)할 때에 관리 80여 명이 짐짓 일을 일으키려고 한꺼번에 달아났는데, 이의풍이 이것을 감영(監營)에 알리고 곧 올라왔습니다. 마음대로 떠난 것은 비록 죄가 있으나, 이 때문에 체직시키면 아전들의 원하는 바에 적중하는 것이니, 청컨대 추고(推考)한 뒤에 재촉하여 내려보내어 잡아서 징계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지난번 저하(邸下)께서 시좌(侍坐)하였을 때에 대조(大朝)께서 적체된 공사(公事)를 재결하시면서 몸으로 가르친다고 하교하셨으니, 성의(聖意)는 보통과 아주 다른 데에서 나왔습니다. 그뒤에 저하께서는 차대(次對)를 오래 멈추셨으니, 대조께서 몸으로 가르치신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이 뒤로는 잇달아 차대하고 혹 무시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召見)하여 치도(治道)를 자문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8월에 천둥한 일을 가지고 옥당(玉堂)에 있을 때에 경계를 아뢰었는데, 지난번 9월에 천둥 소리가 있었으니, 어찌 재이(災異)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정승의 직에 있으므로 사면(辭免)해야 할 것인데 하지 못하니,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둘 곳이 없습니다. 그때 삼사(三司)에서 또 경계를 아뢴 일이 없었던 것도 또한 매우 개연(慨然)합니다."
하였다.
안집(安𠍱)을 대사간으로, 민우(閔堣)를 장령으로, 이덕해(李德海)·윤동성(尹東星)을 정언으로, 서명빈(徐命彬)을 판윤으로, 이익정(李益炡)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10월 6일 정해
남태제(南泰齊)를 대사간으로, 유건(柳健)·신근(申)을 정언으로, 이명환(李明煥)을 문학으로, 남태회(南泰會)를 수찬으로, 이중조(李重祚)를 부교리로 삼았다.
10월 9일 경인
우박이 내리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조명리(趙明履)에게 명하여 구양수(歐陽脩)197) 의 추성부(秋聲賦)·취옹정기(醉翁亭記)를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글은 다 절작(絶作)이거니와, 이것은 이른바 글 가운데의 그림이라는 것이다마는, 그러나 종내에는 말세의 글이다. 우공(禹貢)198) 같은 것은 천하의 산천(山川)·재부(財賦)가 한 편(篇) 가운데에 포괄되어 있고 글이 간명하고 상세하니, 우공을 읽고 이 글을 보면 높낮이가 하늘과 땅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동필(金東弼)에게 증직(贈職)하였는가? 내가 달성(達城)199) 에게 증직하고 김동필에게 증직하지 않으면 이는 동기(同氣)를 저버리는 것이다."
하고, 상고하게 하였더니 이미 찬성(贊成)을 증직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제 도헌(都憲)200) 심육(沈錥)이 서거한 정상을 들으니, 슬픈 마음을 어찌 말하겠는가? 모든 일들은 정좨주(鄭祭酒)201) 의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10월 10일 신묘
우박이 내리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사서(司書) 이의철(李宜哲)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후에 재직(在職)하고부터 이미 넉 달이 지났으나 강연(講筵)을 연 횟수는 겨우 한 번의 강연과 네 번의 소대(召對)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비록 예후(睿候)가 편찮으심으로 말미암아 점차 이렇게 되기는 하였으나, 뜻이 가는 곳에 기(氣)가 반드시 가니, 진실로 저하(邸下)께서 학문에 뜻을 도타이 하시면 잗단 병환이 공부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글을 읽는 공(功)은 중간에 끊기는 것을 가장 꺼리거니와, 이제 하루에 열 줄을 읽어 열흘을 쌓으면 1백 줄을 다할 수 있고 누적하여 함영(涵泳)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사리가 익숙해질 것인데, 이제 저하께서 글을 읽는 법은 중간에 끊기는 것이 이미 오래 되었고 또 뒤미처 채우는 것도 없습니다. 뭇 신하가 간언(諫言)을 아뢰면 문득 유념하겠다고 말씀하시나 끝내 유념하시는 실속을 보지 못하니, 도리어 유념하겠다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잘못으로 인하여 그 경계를 받아들이시는 것만 못합니다. 공자(孔子)가 이른바 ‘따르고 고치지 않는다’는 것이 혹 이것에 가까울 듯합니다. 혹 병환이 있어서 강연에 나아갈 수 없다면 궁관(宮官)을 침소에 불러들여 조용히 강론하시는 것이 또한 늘 학문에 종사하는 한 가지 방도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날마다 부지런하여 예학(睿學)을 새롭게 하기에 힘쓰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뢴 바가 절실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 11일 임진
정원(政院)에서 아뢰기를,
"지난달 그믐에 이미 뇌변(雷變)이 있었는데 간밤의 비바람 가운데에서 천둥·번개의 이변이 또 있어 우르르 소리나고 번쩍 빛나는 것이 한두 번뿐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괘(卦)의 기(氣)로 보면, 9월에는 비록 뭇 양기(陽氣)가 이미 떨어졌더라도 오히려 간(艮)의 한 양획(陽畵)이 남아 있으나, 10월에 이르면 산(山)·지(地)가 변하여 중곤(重坤)이 되어 순음(純陰)이 충색(充塞)하는데 이때에 천둥·번개가 일어나면 그것이 재변이 되는 것이 9월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또 지난달에 이러하고 이달에 이러하여 마치 하늘이 거듭 경계를 고하는 듯하였으니, 그 두려워할 만함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재변은 헛되이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까닭이 있는데, 지금 기강이 느슨하고 풍속이 어지럽고 기무(機務)가 풀어지고 민생(民生)이 곤궁하여 지친 것이 모두 천재(天災)를 부르고 시변(時變)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 단서는 하나가 아닙니다마는, 가장 큰 것은 언로(言路)가 일체 막힌 것입니다. 위로는 군덕(君德)의 궐유(闕遺)로부터 아래로는 신료의 선악까지 능히 말하는 자가 없고 보고 듣는 데에 익숙하여 함호(含糊)하여 분명하게 결정짓지 못하는 것이 이미 한때의 규례를 이루었으니, 이러하여도 치도(治道)를 도울 수 있겠으며 이러하여도 국세(國勢)를 굳혀서 억만년의 기업(基業)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예전 명철한 임금과 아름다운 덕이 있는 임금의 세상에 충직한 선비가 모여 나오는 때에 있어서도 또한 간쟁(諫諍)하는 말과 규핵(糾劾)하는 일이 있었으니, 성명(聖明)의 때라 하여 그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또한 다시 생각하면, 언로가 막히는 것은 신도(臣道)가 위에 행하여지지 못하고 군도(君道)가 아래로 미치지 못하여 위아래가 막히는 것을 이릅니다. 대저 양(陽)이라는 것은 하늘이고 임금이고 위이며, 음(陰)이라는 것은 땅이고 신하이고 아래인데, 천둥·번개라는 것은 음양이 사귀지 못하여 가져오는 것이니, 때를 보고 상(象)을 살피면 어찌 더욱이 크게 민망스럽지 않겠습니까? 또 대저 재변을 당하여 구언(求言)하는 것은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반반(斑斑)한데, 삼가 전하를 보건대, 비록 비상하여 놀랄 만한 재변을 당하더라도 일찍이 구언하시는 하교가 없었습니다. 성의(聖意)에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마는, 고사가 매우 오래 폐기되었으니, 그 또한 크게 근심스러운 것입니다. 신들이 상고하여 보니, 진괘(震掛)의 단사(彖辭)에 ‘천둥이 올 때에는 혁혁(虩虩)202) 하다. 웃으며 말하는 것이 액액(啞啞)203) 하다.’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풀이하기를 ‘진동(震動)이 올 때를 당하면 두려워서 감히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고 주선하며 고려하는 것이 혁혁하니, 생각을 두는 것이 이러하면 그 안유(安裕)를 보전할 수 있으므로 웃으며 말하는 것이 액액하다.’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천둥에 대처하는 도리는 두려워하며 천둥을 고려하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오늘날 고려할 만한 것은 언로가 막힌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척연(惕然)히 두려워하며 깊이 생각하고 멀리 염려하여 빨리 분명한 분부를 내려 언로를 환히 열어서 수성(修省)204) 을 구하여 안유의 복을 보전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참으로 내가 늙었음으로 말미암아 뭇 신하의 해이함을 이루었으니, 바야흐로 마음에 두렵다. 힘쓰는 것이 옳거니와, 더 힘쓰라."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또 달사(達辭)205) 로 권면을 아뢰어 학문에 힘쓰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기를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 등이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을 바라니, 비답하기를,
"이미 정원에 대한 비답에 일렀거니와, 경(卿)에게 무엇을 이르겠는가? 그 힘써야 할 것을 힘쓰라."
하였다. 이천보 등이 또 동궁(東宮)에게 차자를 올리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14일 을미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였다. 제조(提調)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성안의 천거(川渠)가 날로 막혀 낮아져서 근년의 장마 때에 백성이 혹 떠내려가고 빠지기도 하였으니, 이제 바닥을 쳐내지 않으면 그 근심이 매우 클 것입니다."하고, 도제조(都提調)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홍봉한의 말이 옳습니다. 신도 또한 늘 근심합니다마는, 도하(都下)에 요즈음 수토(水土)의 질병이 많은데, 이 또한 수도(水道)가 막힌 데서 말미암은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공사를 일으키려 하지 않으나, 백성에게 이롭다면 무엇을 꺼리겠는가? 진실로 천천히 의논하겠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신은 바야흐로 인죄(引罪)하기에 겨를이 없으니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마는, 다만 크게 분발하고 크게 진작(振作)하시기를 전하께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창의궁(彰義宮) 이후로 마음이 이미 재처럼 식었으니, 어찌 다시 나라의 일에 의욕이 있겠는가? 내가 지난번에 우연히 동환(銅丸)을 보고 마음에 느낀 것이 있어 부(賦)를 지으려다가 못하였다. 하늘과 땅이 비록 크기는 하나 한 알[丸]에 견줄 수 있고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므로 한 알 안에 있는 것과 같은데, 혹 당습(黨習)을 하기도 하고 분경(奔競)206) 하기도 하여 분운(紛紜)하여 마지않으니, 또한 무슨 뜻인가? 또 소자(邵子)207) 의 원회설(元會設)로 말하면 12회(會)가 곧 천지의 일대몽(一大夢)이니, 사람의 사생(死生)은 또한 일소몽(一小夢)이다. 혼돈(混沌)한 세상에 어떤 세계가 있었는지 어찌 알겠으며, 12회 뒤에 또 어떤 세계가 있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매양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마음이 입정(入定)208) 한 듯하니, 다만 말라 죽은 나무나 화기가 없는 재와 같을 뿐이 아니다. 비록 내년이 되더라도 여러 신하들은 삼가서 나를 괴롭히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참상(參上)인 인의(引儀) 한 자리를 일찍이 참하(參下)인 인의를 지낸 사람의 자리로 만들라고 명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아뢴 바로 인한 것이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태중(李台重)이 상서(上書)하기를,
"해조(該曹)에서 반포한 절목(節目)을 보고 신은 악연(愕然)히 놀랍고 부끄러워 못 견디겠으나, 실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모두 무상(無狀)한 천신(賤臣)의 성의가 천박하여 위로는 예청(睿聽)에 미덥게 느껴지지 않고 중간에서는 묘당(廟堂)의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유사(有司)의 저지를 받았으니, 신은 실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책망하는데 또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농가(農家)의 풍흉(豊凶)의 구분에 절로 정해진 수(數)가 있어, 열로 나누어 여물지 않은 것이 일여덟이면 적지(赤地)라 이르고, 반반이면 대무(大無)라 이르고, 서넛이 되어도 또한 흉년이 됨을 면하지 못하며, 그 한두 분(分)이 익지 않으면 풍년이라 하여도 해롭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제 본도(本道)는 봄·여름 사이에 잇달아 가뭄과 장마의 재해가 있었고 게다가 벌레와 바람의 손상으로 논과 밭을 물론하고 처음부터 씨를 부리지 못하여 전혀 낫을 대어 거두지 못하는 것이 과반수인 것은 많은 사람의 눈이 보는 것이어서 숨길 수 없습니다. 시기전(時起田)의 원총(元總)은 7만여 결(結)인데 마땅히 급재(給災)해야 할 것은 다만 4천 결 영(零)일 뿐이니, 재결(災結)은 10분의 1의 반분(半分)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풍성한 대풍의 해일지라도 또한 어찌 내가 터져 모래가 덮이는 따위의 이 수에 견줄 만한 잗단 재해가 없겠습니까? 신은 이미 분등(分等)한 장계(狀啓)에 열읍(列邑)의 재황(災荒)의 실상(實狀)을 상세히 아뢰었으므로 이제 자세히 거듭할 것은 없습니다마는, 그 부끄럽고 답답한 것은 끝내 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대략 이렇게 아룁니다. 신이 동서로 순찰하여 지나는 길에서 매양 들판의 거친 풀이 우거진 곳과 시냇가의 모래와 자갈이 덮인 곳을 만나면, 남녀 노소가 앞뒤를 막고 혹 말을 끌고 가거나 교자(轎子)를 메고 달려가서 곳곳이 가리켜 보이고 또 울며 하소연합니다. 신은 본디 마음이 약하여 그 형색(形色)을 보고 거의 눈물을 흘릴 뻔한 것이 하루에도 몇 번인지 알지 못합니다. 위유(慰諭)하여 말하는 바는 ‘대조(大朝)와 소조(小朝)께서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고 돌보시기를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이러한 흉년에는 반드시 자애(慈愛)하여 덮어 주는 은전(恩典)을 더욱 베풀고 백지 징세(白地徵稅)할 염려가 결코 없을 것이니, 너희들이 능히 전려(田廬)를 보전하고 남은 이삭을 거두어 겨울철을 참고 지내면 이른 봄에 곧 진소(賑所)를 설치하여 구제해서 살리고 반드시 너희들로 하여금 끝내 구덩이를 메워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민간에서 서로 믿고 곧 유망(流亡)하지 않은 자들이 바라는 바도 또한 오직 여기에 있었을 것인데, 이제는 미리 생각하던 것을 크게 어겨서 반분의 수를 가지고 예닐곱 분의 재상(災傷)에 대하여 나누어 주려 하니, 어리석은 백성이 밤낮으로 기대를 건 끝에 이 명령을 한번 들으면 다들 ‘도신(道臣)이 아뢰지 않았다. 조가(朝家)에서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 하고 장차 물고기가 놀라고 새가 흩어지듯이 하여도 금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닥친 적곡(糴穀)을 받아들이는 일과 이른 봄에 부세(賦稅)를 거두는 일을 장차 어느 곳에 요구하겠습니까? 신도 또한 한 도를 안찰(按察)하는 관원으로서 뭇 백성과 거듭 서로 약속한 것이 어떤 일이었는데, 며칠 안되는 사이에 이것을 열읍에 나누어 주어 민간에 펴게 한다면 그 조정의 명령을 봉승(奉承)하는 데에는 다행히 죄가 없을 수 있겠으나, 무슨 낯으로 다시 이민(吏民)을 대하겠습니까? 근래 번임(藩任)209) 에 있는 자 중에 혹 이러한 때를 당하여 더 청하였다가 얻지 못하면 마음대로 나누어 주고 죄를 받은 자도 있으니, 신도 또한 어찌 옥에 갇혀 한때 감죄(勘罪)받는 것을 꺼리겠습니까마는,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조가에서 허락하지 않았는데 도신이 마음대로 사사로운 혜택을 베풀면 원망이 돌아갈 곳이 있을 것이므로 분수에 감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져서 갖가지로 생각하여도 참으로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도내(道內)에서 재상을 당한 고을의 분등으로 말하면, 해주(海州) 이하 열 고을이 함께 더욱 심한 데에 들어가는데, 그 가운데에서 말하면 해주·강령(康翎)·옹진(瓮津) 등 세 고을은 전혀 씨를 붙이지 못하거나 애초에 패지 않은 것이 이미 일여덟 분이고 그 이른바 나머지라는 것도 처음부터 이미 때늦게 씨를 붙여서 여물지 않은데다 마침내 또 바람과 벌레에 손상되어 문득 적지(赤地)가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더욱 심한 가운데에서도 더욱이 심한 것입니다. 이른바 재령(載寧)·신천(信川)·문화(文化)·안악(安岳)·연안(延安)·평산(平山)·봉산(鳳山) 등이 더욱 심하다는 것도 그 다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해조의 절목에는 다만 연안·봉산 등의 약간의 수재(水災)만을 논하고 그 밖의 고을들은 다 조금 여문 데로 돌렸으므로 신이 전후에 장달(狀達)한 것과 서로 다를 뿐이 아니라 또 더 청할 길을 막은 것이니, 신은 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병신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내년은 우리 성상의 주갑(周甲)이니, 곧 태조(太祖) 이후에 처음 있는 나라의 경사입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동조(東朝)를 받들고 아래로 성자 신손(聖子神孫)을 두셨으니, 신민이 경축하고 기뻐하는 것이 거의 옛날보다 성대합니다.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하는 예는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주갑을 어찌 고묘까지 하겠는가?"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천리(天理)는 인정(人情)에 벗어나지 않으니, 오르내리시는 신명께서 어찌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홍봉한이 말하기를,
"내년은 주갑일 뿐만이 아니라 또 임어(臨御)하신 지 30년입니다. 신자(臣子)의 정례(情禮)에 어찌 이 해를 헛되이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행하지 않은 예를 내가 어찌 차마 받겠는가? 경들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홍봉한에게 말하기를,
"경은 바로 균역청 당상(均役廳堂上)이다. 지금 저축이 얼마나 되는가?"
하매, 대답하기를,
"올해에 급대(給大)한 나머지가 아직 30여 만 민(緡)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참으로 여유가 있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지금은 비록 이러하더라도 한번 흉년을 겪으면 문득 죄다 없어질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미덥게 여기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있고서야 정사가 행해지는 것인데, 나와 경은 모두 백 살을 못 살 것이니, 다른 날의 폐단을 어찌 미리 알겠는가? 균역청(均役廳)의 재물이 죄다 없어지면 폐해가 반드시 백성에게 미칠 것이니, 경은 삼가 지키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조명리(趙明履)에게 명하여 어제(御製) 동환서(銅丸序)를 읽어 아뢰게 하고, 이어서 하문하기를,
"팔음(八音)210) 의 이름을 경은 아는가?"
하매, 대답하기를,
"금(金)·석(石)·사(絲)·죽(竹)·포(匏)·토(土)·혁(革)·목(木)입니다."
하였다. 그 악기를 하나하나 헤아려 보라고 명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금(金)은 종(鐘)이 되고, 석(石)은 경(磬)이 되고, 사(絲)는 금슬(琴瑟)이 되고, 죽(竹)은 생황(笙簧)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박식으로도 오히려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죽(竹)은 바로 소(簫)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포(匏)는 이것이 무슨 악기인가?"
하매, 대답하기를,
"잘 모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史官) 가운데에 아는 자가 있는가?"
하였다. 검열(檢閱) 홍양한(洪良漢)이 대답하기를,
"신이 들은 바로는 포는 바로 생황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한림(翰林)이 아는구나. 일찍이 그 학문이 넓고 글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다."
하였다.
신회(申晦)를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王世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가 천둥의 이변 때문에 면직되기를 바라니, 답하기를,
"이것은 실로 나의 불민함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대신(大臣)이 무엇을 혐의하는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재변을 당하여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도리로는 학문에 부지런하고 정사에 부지런한 것보다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깊이 예념(睿念)에 두어서 천견(天譴)에 답하소서."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대신이 아뢴 것이 절실합니다마는, 학문에 부지런한 것은 또 정사에 부지런한 근본이 됩니다."
하고, 이천보가 말하기를,
"예후(睿候)가 요즈음 많이 편찮으시므로 강학(講學)에 방해가 있습니다. 학문에 부지런하려면 가장 먼저 병을 조심해야 하는데, 병을 조심하는 방도는 오로지 음식과 여색에 있으니, 때맞추어 조절하는 데에 유의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더 힘쓰겠다."
하였다. 우승지(右承旨) 김상중(金尙重)이 말하기를,
"재변을 당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이때에 여러 신하들로서 한마디 말도 아뢰지 않고 물러가는 자들이 많이 있으니, 청컨대 중추(重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持平) 남학로(南鶴老)가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16일 정유
춘방(春坊)211) 의 상하번(上下番)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고 동궁(東宮)이 오늘 강한 것을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현기(眩氣) 때문에 강연(講筵)을 멈추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강연을 멈추었으면 궁관(宮官)이 마땅히 합문(閤門)에 나아가 문후(問候)해야 할 것이다. 어찌 예사처럼 여겨야 하겠는가? 이 뒤로는 영(令)에 나타내라."
하였다.
10월 17일 무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선비를 시험하여 이현옥(李鉉玉) 등 15인을 뽑았다. 신은(新恩)212) 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여 공심(公心)으로 임금을 섬기라고 권면(勸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시직(侍直) 홍자(洪梓)는 사만(仕滿)213) 하고 등과(登科)하였으니, 서명천(徐命天)·조엄(趙曮)의 전례를 써서 승륙(陞六)214) 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한 거자(擧子)가 시권(試券)에 상소하였는데, 우승지(右承旨) 김상중(金尙重)에게 명하여 읽어 아뢰게 하였다. 김상중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제 지위를 벗어나 상소하였으므로 일이 비록 광망(狂妄)하기는 하나, 말이 충애(忠愛)에서 나왔으면 추요(芻蕘)의 천한 사람의 말도 또한 취택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10월 20일 신축
왕세자(王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접(召接)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가 경기의 재결(災結) 1천 결(結)을 더 주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교리(校理) 한광회(韓光會)가 말하기를,
"근래 사습(士習)이 날로 어그러집니다. 지난번 정시(庭試)에 친림(親臨)하신 날에 한 거자(擧子)가 땅에 엎드려 선조(先朝)의 어필(御筆)을 바친다고 하므로 바치게 하였더니, 어필이 아니라 제 녹권(錄券)이었습니다. 뜻이 바라는 데에 있으므로 죄가 기망(欺罔)한 것으로 돌아가니, 마땅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무겁게 다스려서 뒷사람을 징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민우(閔堣)가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22일 계묘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봉한(洪鳳漢)·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육상궁(毓祥宮)에 이미 관제(官祭)를 지냈으니, 축문(祝文)에 사친(私親)이라 칭하는 것이 어찌 미안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번 이익정(李益炡)이 ‘비(妣)’ 자를 더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조(先朝)에서 내리신 작호(爵號)를 내가 감히 고칠 수 없다. 그러나 사가(私家)에서도 또한 어머니를 선비(先妣)라 칭하니, 이제 사친을 선비라 칭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매, 도승지(都承旨)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비(妣)’ 자는 후비(后妃)의 ‘비(妃)’ 자와 다를 듯합니다."
하고, 원경하가 말하기를,
"사친이라 칭하는 것은 경전(經典)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신은 일찍이 미안하게 여겼습니다. 삼가 《이아(爾雅)》를 살펴보건대, 부모를 고비(考妣)라 하는데, 곧 상하(上下)의 통칭(通稱)입니다. 그러므로 명나라 효종(孝宗)이 생모(生母)를 추존(追尊)하여 모비(某妣)라 하였다가 뒤에 다시 황모(皇母)라 칭하였으니, 대개 《이아》의 뜻을 취한 것입니다. 신은 선비라 칭하여도 예의(禮意)에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것으로 정호(定號)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은 바로 예관(禮官)입니다마는 본디 전례(典禮)에 어둡고 돌아보건대 사체(事體)는 매우 중대하니,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결정하는 것이 신중히 할 수 있는 방도일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내 뜻으로 두 정승에게 가서 묻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나갔다가 돌아와 아뢰기를,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는 의논하기를, ‘《이아》에 이른바 살았을 때에는 부모라 하고 죽으면 고비라 한다고 한 것은 상하의 통칭이기는 하나, 축문 가운데에는 반드시 효자(孝子)·효손(孝孫)이라 칭하고서야 고비·조고비(祖考妣)라 칭하니, 대개 비(妣)와 고(考)는 대칭(對稱)하는 말입니다. 이 때문에 종묘(宗廟)의 축문에는 다 황조고비(皇祖考妣)·황고비(皇考妣)라 칭하니, 이것으로 보면 이제 이 제문(祭文)에 병칭(竝稱)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성의(聖意)가 사친 두 자를 쓰지 않으려 하신다면 선자친(先慈親)이라 고쳐 칭하는 것이 예의(禮義)에 무방할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는 의논하기를, ‘비(妣) 자가 상하의 통칭인 것은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마는, 비록 여염의 사서(士庶)로 말하더라도 남의 후사(後嗣)가 된 자는 낳은 어버이에 대하여 고(考)라 칭하거나 비라 칭하지 못하니, 대개 그 높이는 것이 소후가(所後家)에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극히 엄한 국가의 예(禮)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어받고 위로 종묘를 받드시니, 이번 궁원(宮園)의 예는 오로지 근본을 잊지 않고 보답하시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든 예절에 관계되는 것은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마는, 비 자에 이르러서는 이미 중한 바가 있으므로 병칭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전하께서 사친 두 자에 대하여 끝내 미안한 바가 있으시다면 혹 선자(先慈) 또는 자친(慈親)이라 갈음하여 쓰시는 것이 예의에 어그러지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보고 나서 말하기를,
"거자(擧子)의 호봉(糊封)에도 또한 생부(生父)를 쓰니, 이제 이 ‘비’ 자에 무슨 병칭을 꺼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비라 칭하는 것은 마침내 모(母)라 칭하는 것과 다르니, 영상(領相)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영상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경기의 신포(身布)·대동(大同)을 적당히 줄이는 일을 대신이 등대(登對)할 때에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는데, 원경하의 말을 따른 것이다. 원경하가 인하여 말하기를,
"신의 정적(情蹟)은 이미 죄인을 이루었으니, 비록 차마 밝게 다스려지는 때를 문득 떠날 수 없기는 하나, 오직 물리쳐질 것을 일찍 생각하여 해기(駭機)를 피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윤봉오(尹鳳五)의 일 때문에 이러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윤봉오는 오히려 나타내어 말하여 공척(公斥)하므로 매우 두려워할 것도 못됩니다마는 어두운 곳에서 쇠뇌[弩機]로 쏘는 데 이르러서는 반드시 신을 죽이려는 자가 있을 것이니, 신이 어떻게 스스로 용납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임금이 밝게 살피면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매, 원경하가 말하기를,
등보(滕甫)215) 가 말하기를, ‘폐하(陛下)께서도 신을 여러 번 용서하기 어려우시니 신이 어찌 감히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태화(李泰和)가 나이 열여덟에 등제(登第)하여 주서(注書)의 말의(末擬)로서 낙점(落點)받은 일이 있었다. 이제 이현지(李顯祉)도 또한 열여덟에 등제하였으므로 내가 이 전례를 썼다."
하매, 도승지 조명리가 말하기를,
"시제(試題)가 은벽(隱僻)한 문자에서 많이 나옵니다. 지난번 정시(庭試)의 어제(御題)는 다만 시관(試官) 중에 아는 자가 없을 뿐이 아니라 비록 널리 알아서 막힐 것이 없는 홍양한(洪良漢)으로서도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있었으니, 유생(儒生)이 어찌 어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알더라도 어떻게 그 재주를 다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유생에도 스스로 아는 자가 있다."
하였다. 고(故) 좌상(左相) 송인명(宋寅明)의 아내의 상(喪)에 전례를 상고하여 부물(賻物)을 내리라고 명하였는데, 홍봉한이 아뢴 것이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23일 갑진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신들이 하교를 받고 영상(領相)에게 의논하였더니, 결전(結錢)은 법을 세운 처음에 변동할 수 없으니, 신포(身布)와 대동(大同)을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 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신포는 이미 한 필(匹)을 줄였으므로 이제 죄다 줄이는 것은 마땅치 않고 전세(田稅)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므로 쉽사리 의논할 수 없으니 줄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동뿐일 듯합니다. 또한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한 처음에 수시로 견감(蠲減)하라는 영(令)이 있었거니와, 이제 이미 수년이 지났고 저축이 조금 넉넉하니, 비록 여러 도를 죄다 감면하지는 못하더라도 먼저 경기부터 비롯하면 백성에게 믿음을 보일 수 있고 백성도 또한 실혜(實惠)를 입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내 뜻에 매우 맞는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결전을 견감하면 혜택과 믿음이 함께 서는데 경기의 결전은 2만 5천 민(緡)에 지나지 않으니,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에서 어찌 이것을 아끼고 선정(善政)을 행하지 않겠습니까? 신포는 결단코 죄다 줄일 수 없으나, 대동은 더욱 심한 고을을 가려서 몇 말을 적당히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누구와 함께 넉넉하지 않겠는가? 만년에 백성을 돌보는 것이 차라리 지나친 데에 빠지는 것이 낫다마는, 다만 은혜가 다하면 느슨하여질 것인데, 어떻게 이어 가겠는가?"
하고, 경기의 결전을 견감하고 경기의 춘대동(春大同)을 더욱 심한 고을은 두 말을 줄이고 그 다음 고을은 한 말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백성이 실혜를 입을 뿐이 아니라,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균역 이후로 소민(小民)이 위의 뜻을 알지 못해서 혹 취렴(聚斂)이라고 지목하였으나, 이제부터는 거의 백성을 위하는 뜻이라는 것을 환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잠저(潛邸)에서 나왔고 임어(臨御)한 지 세월이 오랬으므로 민간의 이해(利害)를 자못 안다마는, 원량(元良)과 같은 경우에는 깊은 궁 안에서 나고 자랐으니, 어떻게 알겠는가? 경들은 차대(次對)할 때에 이 일을 상세히 전달해야 한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영남의 어염세(魚鹽稅)가 올해는 매우 적은데, 거제(巨濟) 등 세 고을의 세액(稅額)에는 간사한 폐단이 더욱이 많다 하니, 본도(本道)의 사정을 익히 아는 자를 보내어 한번 안핵(按覈)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가 괜찮은가?"
하매, 홍봉한이 말하기를,
"민백상(閔百祥)이 새로 방백(方伯)을 지내서 영남의 일을 익히 알고, 또 그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어찌 한번 가는 것을 꺼리겠습니까?"
하니, 민백상에게 명하여 입시하게 하여 하문하기를,
"영성(靈城)이 균세사(均稅使)가 되고 네가 도신(道臣)이 되어 세법(稅法)을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어찌하여 폐단이 있는가?"
하매, 대답하기를,
"박문수(朴文秀)가 균세사가 되어 아래를 이롭게 하는 정사를 많이 행하고 통수(統帥)와 수사(水使)가 침노하는 정사를 일체 폐지하여 백성이 그 이익을 받았으므로 법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오래 되니 폐단을 일으켰다는 것은 신도 또한 들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오일세(五一稅)라 하는 것은 무엇을 이르는 것인가?"
하매, 대답하기를,
"어전세(漁箭稅)·선세(船稅)는 관가에서 5분의 1을 거두는데 이것을 오일세라 합니다. 통영(統營)에서 처음에는 3분의 1을 거두었으나 균세 이후에는 줄여서 5분의 1로 정하였으므로 백성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습니다마는, 감색(監色)의 무리들이 중간에서 농간하고 수령(守令)이 엄히 막지 못하여 근일의 폐단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라의 큰 정사인데, 오로지 이번 행차에 맡기니, 위임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김상성(金尙星)에게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제수(除授)하였다.
10월 25일 병오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익릉(翼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아! 신포(身布)를 줄이는 정사는 열조(列朝)에서 백성을 위하여 강구한 것이고 왕년에 또 가엾게 여기는 하교가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반드시 줄이고야 마는 까닭이다. 신포를 줄인 뒤에는 그 대충(代充)이 있어야 할 것인데, 줄인 정사가 있고 어염(魚鹽)의 세(稅)가 있고 군관포(軍官布)가 있고 결전(結錢)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좋아서 하겠는가? 어염의 세는 진실로 해민(海民)을 위하여 은결(隱結)을 거두는 것이니 또한 마땅히 행해야 할 바이며, 몇 번 문(門)에 나아가고 몇 번 전(殿)에 나아가는 것은 진실로 군민(軍民)을 위하는 것이지 위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균청(均廳)의 사목(事目)에 이미 여유가 있으면 마땅히 줄여야 한다는 뜻을 유시하였고 왕년의 대동(大同) 때에도 또한 이런 뜻이 있었으나, 이제 이미 1백 년이 되어도 한번 줄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비록 이런 하교가 있었더라도 다른 날에 줄여줄지 어찌 알겠는가? 이제 경기의 흉년 때문에 먼저 이 정사를 시행하니, 아! 만년에 거의 백성을 속이지 않을 수 있다. 이 뒤로 여러 도(道)에서 거의 따라 행할 수 있을 것이며, 군관포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 방도가 있어 지금에 행하여 뒤에 끼칠 수 있을 것이니, 뒷날에 균청에 비록 여유가 있더라도 위로는 승여(乘輿)부터 아래로는 제수(諸需)까지 또한 손을 대서는 안된다. 탁지(度支)·군문(軍門)·제사(諸司)를 물론하고 혹 감히 그 법을 늦추고 당기는 자가 있거나 또한 균청에 저축된 것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자급(資級)에 구애하지 말고 상신(相臣)이 엄히 징계하기를 청하여 곧바로 제서유위(制書有違)의 율(律)을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결전을 이미 견감(蠲減)하고 나면 반드시 동요(動搖)할 마음을 일으키는 무리가 있을 것이고, 뒷날에 이 법이 한번 어지러워지면 반드시 먼저 도신이 가족을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사관(史官)이 만약 내 말을 기록하면 다른 날에 반드시 그 증험을 볼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요즈음에 편할 대로 하는 것이 많으며 진기하고 맛있는 음식이 늘 뒤에 따르나, 나는 무신년216) 이후로 오반(午飯)을 들지 않고 밤에 혹 옷을 벗지 않고 자기도 하니, 비록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철장(鐵杖)·목마(木馬)217) 처럼 하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어지러운 때를 당하면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나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10월 27일 무신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성중(李成中)의 체직(遞職)을 허락하여 조명리(趙明履)로 갈음하고, 유복명(柳復明)을 승지(承旨)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조(吏曹)의 아당망(亞堂望)218) 에 든 자는 곧바로 도승지(都承旨)에 주의(注擬)하고 그 나머지는 장관(長官)의 신통(新通)을 기다리되 이미 경연망(經筵望)에 통한 자는 곧바로 대헌(大憲)에 주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도정(都政)219) 에 친림(親臨)하였다. 이조 판서 조영국(趙榮國)·병조 판서 신만(申晩)이 나아가 참여하였다. 권해(權賅)를 장령으로, 이우(李堣)를 사간으로, 김양택(金陽澤)을 승문 부제조로, 이정보(李鼎輔)·윤급(尹汲)을 좌빈객·우빈객으로, 유언술(兪彦述)을 필선으로, 이익보(李益輔)를 대사성으로, 남혜로(南惠老)를 헌납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예조 참판으로, 서명빈(徐命彬)을 좌참찬으로, 심발(沈墢)을 보덕으로, 한덕필(韓德弼)을 우윤으로, 이석상(李錫祥)을 지평으로, 최태형(崔台衡)·남태기(南泰耆)를 정언으로, 최진해(崔鎭海)를 창성 부사로, 최진형(崔鎭衡)을 충주 영장으로, 박재해(朴載海)를 전라 좌수사로, 송덕상(宋德相)을 세마(洗馬)로, 김상성(金尙星)을 지경연(知經筵)으로, 한광조(韓光肇)를 승지로, 이성중(李成中)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이철보(李喆輔)를 동춘추(同春秋)로 삼았다.
친정(親政)에 입시(入侍)할 때에 왕세자(王世子)에게 명하여 시좌(侍坐)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좌하게 한 데에는 뜻이 있다. 근년에 너와 함께 진전(眞殿)에 갔을 때에 제4실(第四室)에 이르러 입으로 고하기를, ‘오늘 입정(入庭)한 여러 신하들 중에 당(黨)을 만드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진신(搢紳)에 끼지 못하게 하여 오르내리시는 신명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여러 신하들의 이름을 적어 내라고 명하여 하나는 내 곁에 두고 하나는 너한테 두었는데, 너에게 아직 있느냐?"
하매,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삼가 간직하여 두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료(臣僚)도 오히려 속일 수 없는데, 더구나 진전이겠느냐? 윤봉오(尹鳳五)는 바로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번에 방출(放黜)한 것은 바로 전에 말한 것을 실천한 것이다. 비록 사유(赦宥)로 인하여 탕척(蕩滌)하여 주었더라도 어찌 검의(檢擬)할 수 있겠는가? 아까 이미 망단(望單)에서 말소하여 내리고 전관(銓官)을 중추(重推)하였다마는, 근래 한편 사람이 함정을 놓고 조금이라도 이의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망측한 죄로 몰고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당으로 지목하니, 이것은 오로지 당습(黨習)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 대소(大小)를 물론하고 대훈(大訓) 이전의 일을 다시 제기하는 자는 신자(臣子)가 아니다. 근일 합달(合達)한 것으로 말하면 옳거니와, 정론(停論)하였다 하여 사람을 기색(枳塞)하는 자도 또한 모두 금고(禁錮)를 시행해야 한다. 겉으로는 관원이 서로 경계하는 것인 체하고 속으로는 계략을 감추어서 사당(私黨)을 구제하는 자로 말하면 변환이 빨라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네가 어떻게 그 정상을 알겠느냐? 오늘 너에게 시좌하라고 명한 것은 장차 이 일을 경계하려 한 것이다. 네 뜻에는 어떻게 여겨지느냐?"
하매, 왕세자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감히 마음에 새기고 가슴에 지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 하교를 따르지 못하면 내가 오르내리시는 신명을 저버리게 하는 것이 된다."
하매, 왕세자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하교가 이러하시니, 신이 비록 불민하기는 하나 어찌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답한 것이 착하다. 사관은 상세히 적으라."
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영남의 이광정(李光庭)과 호남(湖南)의 이의경(李毅敬)은 다 한 도의 명망이 있는 자인데 오래 참하(參下)에 움츠려 있는 것은 인재를 장려하는 도리가 아니니, 청컨대 승륙(陞六)하여 등용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사서(士庶)의 나이 아흔인 자를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9일 경술
유성(流星)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의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尺)쯤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전시(殿試)를 설행(設行)하여 권세구(權世矩) 등 34인을 뽑았다.
과차(科次)를 매기기 위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올해의 두 방(榜)에는 이현지(李顯祉)와 김봉길(金鳳吉)이 다 18세로 등제하였으니, 기특하다."
하고, 한림(翰林) 홍양한(洪良漢)에게 말하기를,
"신방(新榜)의 주서(注書)는 한림이 으레 초망(初望)을 내는가?"
하매, 홍양한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창임(李昌任)·김봉길을 초망에 주의(注擬)하라."
하매, 홍양한이 말하기를,
"신방의 주서를 반드시 한림으로 하여금 망(望)을 내게 하는 것은 대개 한 방 중에서 극진히 선택하여 다른 날의 사관의 재목에 갖추기 때문입니다. 한림은 이제 비록 천거하는 것을 바꾸어 권점(圈點)하게 되기는 하였으나, 돌아보건대, 그 직무는 전과 똑같습니다. 김봉길은 이 선택에 합당하지 않을 듯하니, 신은 감히 하교를 받들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네가 하는 대로 맡긴다. 한원(翰苑)220) 의 고풍(古風)은 으레 신방의 간택(揀擇)을 행하였는데, 요즈음에도 또한 폐기하지 않았는가?"
하매, 홍양한이 말하기를,
"신의 방도 일찍이 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방을 너도 또한 행하도록 하라."
하고, 승지(承旨) 신회(申晦)에게 말하기를,
"한림이 김봉길의 초망을 허용하지 않으니, 승지는 주서로 하여금 차망(次望)에 주의하게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상성(金尙星)이 말하기를,
"이번에 결전(結錢)을 탕감한 것은 다만 조가(朝家)의 막대한 은혜일 뿐이 아니라 또한 팔방의 백성에게 믿음을 보일 수 있는 것이므로 신은 참으로 흠앙(欽仰)합니다마는, 지금 외방(外方)의 민사(民事)가 황급한 것은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도하(都下)의 민정(民情)은 진념(軫念)하시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비록 풍년일지라도 가을·겨울 이전에는 경기의 미곡(米穀)이 도민(都民)이 의지하는 길인데 경기의 흉년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그 먹여 주기를 바라는 것은 공가(貢價)에 지나지 않는데, 본조(本曹)로 말하면 9월 이후로 별고(別庫)에 저축된 쌀이 이미 남김없이 다하였으므로 두 혼궁(魂宮)의 제수(祭需)의 공가로 지급해야 할 것을 돈과 무명은 비록 이미 지급하였으나 쌀쪽은 우선 그냥 두었습니다. 공인(貢人)이 원망하는 것은 오히려 여사(餘事)이고, 미곡이 유통된다면 도민도 또한 다급한 것을 풀 수 있으므로 일찍이 국가에서 반드시 귀할 때에 지급하는 것을 법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좋은 법입니다마는, 이미 저축된 쌀이 없으니 실로 옮겨 쓸 길이 없습니다. 전일 성교(聖敎) 가운데에 혜청(惠廳)에서 대용(貸用)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마는, 본조는 혜청이 아니니 어찌 대용할 곳이 있겠습니까? 10월 이후에는 별영(別營)·군자감(軍資監)에 지급해야 할 것이 또 다시 핍절(乏絶)될 것이므로 비록 3만 석(石)을 얻더라도 결코 3월 이전까지 대어 쓰기 어려운데, 이 수량은 또한 감히 곧바로 청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근년조(近年條) 2만 석을 얻고서야 세전 대등(歲前大等)의 공물(貢物)과 군자감·별영의 방료(放料)221) 등의 일들을 겨우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대신(大臣)에게 품의(稟議)한 것이 이미 있거니와, 번번이 혜청에서 빌리기를 바라는 것도 또한 매우 민망합니다. 만약 공가 가운데에서 더 쓰는 1분(分)의 쌀 안에서 반은 본조에 지급하고 반은 혜청에 지급하도록 하여 이것으로 정식(定式)하면, 본조에서도 또한 번번이 빌리기를 청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본조의 사세가 참으로 그렇다. 2만 석을 빌려 주도록 허락하되 혜청 당상(惠廳堂上)이 만약 지난(持難)하는 것이 있으면 마땅히 더 쓰도록 하는 일로 하교하겠다."
하였다.
10월 30일 신해
왕세자(王世子)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접(召接)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경기는 근본이 되는 곳인데 이런 흉년을 당하였으므로 대조(大朝)께서 특별히 진념하여 결전(結錢)을 탕감하셨거니와, 그 수량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오직 혹 적을까 염려하여 더욱 심한 고을의 대동미(大同米) 두 말씩과 그 다음 심한 고을의 대동미 한 말씩을 또한 견감하셨으니, 백성을 돌보시는 덕의(德意)가 매우 성대합니다. 결전을 탕감하신 데 이르러서는 성의(聖意)를 두신 것이 더욱이 있습니다. 양역(良役)의 폐단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화기(和氣)를 손상하는 것이 있으므로 대조께서 특별히 균역(均役)하셨는데, 그 때에 갑론 을박하여 이의하는 것이 없지 않았으나 단연코 시행하셨습니다.〈신포(身布)의〉 필수(匹數)를 줄인 뒤에 다만 급대(給代)할 방도가 없을 뿐이 아니라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 대비할 남은 저축이 없어서는 안되므로 이에 결전을 창설하였는데, 무지한 소민(小民)이 혹 조금 여유를 남겨서 국용(國用)에 밑천으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목(節目)을 만들 당초에 수시로 줄여 주라는 하교가 이미 있었습니다. 올해에는 경기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특별히 결전을 줄였으니, 이로부터 경기 백성이 법을 세운 본의를 우러러 알 수 있을 것이고, 다른 도의 백성도 또한 반드시 뒤에는 마땅히 혜택을 고루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뻐서 따를 것입니다. 그 이튿날 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균청(均廳)의 재물은 비록 승여(乘輿)에 쓰는 것일지라도 또한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하교하셨으니, 저하(邸下)께서도 또한 마땅히 대조께서 백성을 돌보시는 성대한 뜻을 우러러 본받으셔야 하며, 비록 신들 중에 또한 균청의 재력을 옮겨 쓸 일로 우러러 상달(上達)하는 자가 있더라도 원컨대 굳게 지키고 허락하지 마소서. 대저 국가의 재물은 서로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마는, 균청은 오로지 백성을 위한 것이므로 그때에 대조께서 여러 차례 하교하셨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장령(掌令) 권해(權賅)가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12월 (0) | 2025.10.03 |
|---|---|
|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11월 (0) | 2025.10.03 |
|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9월 (0) | 2025.10.03 |
|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8월 (0) | 2025.10.03 |
| 영조실록80권, 영조 29년 1753년 7월 (0) | 2025.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