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신해
임금이 태묘(太廟)와 영희전(永禧殿)에 전알(展謁)하고, 이어서 영수각(靈壽閣)에 전배(展拜)하였는데, 영수각은 태조(太祖)와 숙종(肅宗)이 기사(耆社)에 들어간 뒤에 어첩(御牒)을 봉안한 곳이다. 금상(今上) 20년인 갑자년에 고사(故事)에 따라 뒤이어 기사에 들어갔는데, 올해는 성상의 주갑(周甲)이고 또 태조가 기사에 들어간 해에 해당하므로, 특별히 원일(元日)에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어첩에 손수 소지(小識)를 써서 추모하는 뜻을 붙였다. 이날 육상궁(毓祥宮)에 들러 전배하고, 명하여 어제(御製)인 술회시(述懷詩)와 서대기(犀帶記)를 쓰게 하였다. 이에 앞서 관동 어사(關東御史) 이현중(李顯重)이 돌아와 아뢰기를,
"삼척 부사(三陟府使) 이협(李埉)이 부중(府中)에서 홍서대(紅犀帶) 하나를 얻었는데, 전하는 말로는 홍무(洪武)001) 계유년002) 에 태조 대왕께서 삼척은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그때의 호장(戶長)에게 특별히 서대를 내리셨는데 이제 여섯 번째의 계유년이 돌아와서 비로소 얻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본부(本府)에 명하여 호장 김상구(金尙矩)를 올려 보내게 하였다. 김상구가 서대를 가지고 오니, 임금이 특별히 소견(召見)하고 이어서 전조(銓曹)로 하여금 김상구를 참봉(參奉)으로 제수(除授)하게 하였다. 승지 이수득(李秀得)이 아뢰기를,
"김상구에게 이 벼슬을 제수하면 반드시 먼 지방 백성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열어 주게 될 것이니, 마땅한 일이 아닐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화복(禍福)을 주장하는 권세는 임금에게 있는데, 승선(承宣)003) 이 막으려 하는가?"
하고, 이수득을 체차하고 집의 임위(任瑋)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서대의 내력과 내린 연기(年紀)는 모두 상세하지 못하고, 또 김상구가 가져온 것은 본디 상줄 만한 공로가 없다. 그렇다면 이수득이 아뢴 것은 참으로 체례(體例)에 맞는 것인데, 특별히 체차된 뒤에 신구(伸救)하는 사람이 없고 전조 당상(銓曹堂上)은 직접 하교를 받았는데 한마디도 부당함을 복계(覆啓)하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58책 8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11면
【분류】농업-권농(勸農)
[註 001] 홍무(洪武) : 명(明)나라 태조(太祖)의 연호.[註 002] 계유년 : 1393 태조 2년.[註 003] 승선(承宣) : 승지.
사신(史臣)은 말한다."서대의 내력과 내린 연기(年紀)는 모두 상세하지 못하고, 또 김상구가 가져온 것은 본디 상줄 만한 공로가 없다. 그렇다면 이수득이 아뢴 것은 참으로 체례(體例)에 맞는 것인데, 특별히 체차된 뒤에 신구(伸救)하는 사람이 없고 전조 당상(銓曹堂上)은 직접 하교를 받았는데 한마디도 부당함을 복계(覆啓)하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하교하기를,
"새봄이 돌아와 만물이 다 새로운데, 아! 우리 백성도 해[歲]와 함께 다 새로운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자신이 부끄럽다. 더구나 올해는 우리 성조(聖祖)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신 해이므로 더욱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면 그 먼저 힘쓸 일은 농사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권농(勸農)의 요지는 유서(諭書)에 있고 또한 칠사(七事)004) 의 처음에 있다. 아! 거류 도신(居留道臣)은 내 이 뜻을 깊이 유념하라."
하였다.
유복명(柳復明)·어유룡(魚有龍)·윤봉조(尹鳳朝)를 지중추(知中樞)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대개 직질이 자헌(資憲)인 문재(文宰)라야 비로소 기사(耆社)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1월 2일 임자
경조(京兆)에 명하여 우금(牛禁)을 늦추게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재로(金在魯) 등이 2품인 경재(卿宰)와 빈청(賓廳)에 모여 아뢰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 대왕께서는 하늘의 큰 명을 받고서 갑술년005) 에 이르러 성수(聖壽)가 육순(六旬)에 차서 기사에 들어가셨고, 그 다섯 번째 돌아온 갑술년006) 에 이르러 하늘이 또 종팽(宗祊)을 돌보아 성궁(聖躬)을 독생(篤生)하였는데, 전하께서는 큰 덕을 힘써 밝히시어 하늘의 복록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여섯 번째 갑술년을 당하여 보산(寶算)이 바로 주갑(周甲)에 해당하고 나라를 다스리신 것도 3기(紀)에 이르렀으니, 이 갑술년은 우리 동방에서 전후에 큰 경사가 있는 해입니다. 하늘이 이 해에 복을 내린 까닭은 참으로 우연한 것이 아니고 신들이 살아서 성명(聖明)을 만났는데, 끝내 성대한 아름다움을 대양(對揚)하여 빨리 상례(常禮)를 거행하지 못한다면, 신들의 실망은 이미 말할 수도 없거니와, 전하께서도 어찌 오늘날의 방경(邦慶)을 자신의 사사로운 일로 여겨 끝내 하늘이 내린 큰 복록을 저버리시겠습니까? 원컨대, 다시 깊이 생각하시어 빨리 하의(賀儀)를 거행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빈청에서 다시 아뢰어 하의를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1월 3일 계축
빈청에서 다시 아뢰었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1월 4일 갑인
영의정 김재로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진하(陳賀)를 청하려 하였으나, 계청(啓請)이 올라가기 전에 엄한 하교로 인하여 물러나와 명을 기다렸다.
1월 5일 을묘
선원전(璿源殿)을 수리하였다. 선원전은 곧 숙종(肅宗)의 어용(御容)을 봉안한 곳이다. 선원전은 대내(大內)에 있는데 숙종의 유교(遺敎)에 따라 모든 수리하는 일을 다 내사(內司)에 명하고 탁지(度支)007) 에는 비용을 지급하게 하지 않았는데, 이때 불이 나서 일이 조금 크기 때문에 특별히 호조·공조(工曹)에 명하여 거행하게 하였다.
예조 참판 이정보(李鼎輔)를 발탁하여 자헌(資憲)으로 높였다. 당초에 이정보를 대신(大臣)이 아뢴 바에 따라 정경(正卿) 벼슬에 가망(加望)하라고 명하였는데, 망단자(望單子)가 들어오게 되어서는 관례에 따라 수망(首望)을 낙점(落點)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정보가 예조 당상으로서 선원전 수리소(修理所)에 입시(入侍)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영의정 김재로 등이 다시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를 청하였다가, 곧 계(啓)를 봉입(捧入)한 중관(中官)을 나처(拿處)하라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지레 물러갔다.
1월 6일 병진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 등이 상소하여 진하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아! 지금의 내 이 마음을 예양(例讓)이라 한다면, 이는 임금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마음을 안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차마 굳이 청하는가? 진하 때문에 정청(庭請)한다는 것은 예전에 들은 바가 없는 바이고, 종신(宗臣)이 내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그르다."
하고, 이어서 장수(章首)인 종신을 중추(重推)하고 그 소장(疏章)을 도로 주라고 명하였다.
1월 7일 정사
효순 현빈궁(孝純賢嬪宮)의 제(祭)를 행하고, 이어서 입묘(入廟)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의주(儀註)는 이러하였다.
"1. 동련(動輦)을 알리는 고유(告由)는 그날 담제(禫祭) 때에 아울러 고한다.
1. 신련(神輦)이 효장궁(孝章宮)에 나아갈 때에 섭시강원(攝侍講院)·섭익위사(攝翊衞司) 관원 각 2원(員)과 예조(禮曹)의 당상(堂上)·낭청(郞廳) 각 1원과 예모관(禮貌官) 2원이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효순궁(孝純宮) 문밖에 서립(序立)하였다가, 신련이 이르게 되면 국궁(鞠躬)하여 지영(祗迎)한 뒤에 차례로 배위(陪衞)하여 효장묘(孝章廟)에 이르러 의식대로 봉안한다.
1. 각 차비관(差備官)은 모두 흑단령을 입고, 각양 의물(儀物)은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규례를 상고하여 마련해서 거행하게 한다.
1. 신련 및 향정(香亭)과 교명(敎命)·책(冊)·인(印)을 담은 요여(腰轝)·채여(彩轝)는 각 해사로 하여금 진배(進排)하게 하고, 담지군(擔持軍)은 건복(巾服)을 갖추고 또한 병조(兵曹)로 하여금 정제(整齊)하여 거행하게 한다.
1. 연(輦)·여(轝)의 차비인(差備人)과 의장(儀仗)은 모두 길색(吉色)을 쓴다.
1. 입묘할 때에 신주(神主)가 신여(神轝)에 오르내리는 곳 및 종묘 앞길과 창덕궁 동구(洞口)의 연을 멈추는 곳에 차장(遮帳)을 포진(鋪陳)하고 욕석(褥席)을 배설(排設)하는 등의 일 및 이밖에 오르내려야 할 곳에 배설하는 등의 일은 사약(司鑰) 및 각 해사로 하여금 낱낱이 거행하게 한다.
1. 입묘할 때에 신주를 출납(出納)하는 연·여가 오르내릴 즈음에는 섭시강원 관원이 규례에 따라 입참(入參)한다.
1. 입묘할 때에 신주를 출납하는 일은 궁위령(宮闈令)이 봉행한다.
1. 상(箱) 차비관·궤(几) 차비관·대(臺) 차비관 각 1원과 향로(香爐) 차비관·향합(香盒) 차비관 각 1원과 신련 배위 내시(神輦陪衞內侍) 4원과 섭상례(攝相禮) 1원과 섭사복시 첨정(攝司僕寺僉正) 1원과 교명을 받드는 집사(執事) 1원과 죽책(竹冊)·옥인(玉印)과 현빈의 옥인·시책(諡冊)·시인(諡印)을 받드는 집사 각 2원과 교명·죽책·옥인과 현빈의 옥인·시책·시인의 안(案)을 드는 자 각 2원과 집사자 각각 2원 【충찬위(忠贊衞)이다.】 은 이조(吏曹)·병조 및 내시부(內侍府)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고, 양산(陽繖)·선개(扇蓋) 차비관 및 이밖의 각 차비관으로 들어가야 할 인원수는 병조 및 각 해사로 하여금 효순궁 충의(孝純宮忠義)에게 물어 미리 마련하게 하여 임시해서 실의(失儀)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며, 외집사(外執事)는 진설(陳設)한 곳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집사 내시도 내시부로 하여금 차출하게 한다.
1. 효순 현빈의 신주가 입묘할 때에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신주의 서쪽 가까운 곳에 받들어 옮기는 집사 대축(大祝)은 봉안제(奉安祭) 때의 대축으로써 거행하게 한다.
1. 지로 마대(指路馬隊)·적상 마대(赤上馬隊) 각 2쌍과 오장 충찬위(烏杖忠贊衞) 3쌍과 금도 부장(禁道部將) 2원과 흑단령을 갖춘 인로군(引路軍) 등은 각 해사로 하여금 정송(定送)하게 하되, 충찬위가 타는 말은 사복시로 하여금 정송하게 하며, 현빈궁(賢嬪宮)의 의장은 규례에 따라 진열한다.
1. 신련 안을 채워 막는 흰 솜은 해사로 하여금 드는 양을 진배하게 하되, 봉안한 뒤에는 도로 내린다.
1. 입묘한 뒤의 봉안제는 의식대로 설행한다."
전 판부사 정우량(鄭羽良)이 졸(卒)하였는데, 임금이 죽음을 애석히 여기는 전교를 내리고 사제(賜祭)하고 증시(贈諡)하였다. 정우량은 글재주는 있으나 지망(地望)이 없어서 오로지 임금의 뜻을 맞추는 것으로 떳떳하지 않은 길을 뚫어 임금의 사랑을 두텁게 받아서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지내고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다. 그 아들 정치달(鄭致達)은 화완 옹주(和緩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화완 옹주가 임금의 딸들 가운데에서 임금의 가장 깊은 사랑을 받았고 성질도 요사하게 혜민(慧敏)하므로, 염치없이 승진을 다투는 조사(朝士)는 모두 정우량과 그 아우 정휘량(鄭翬良)에게 성기(聲氣)를 통하였다. 그때 또 최익남(崔益男)·이봉환(李鳳煥)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모두 미천하고 요사한 무리로서 그 집에 출입하며 중개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식자는 세도(世道)를 위하여 매우 근심하였다.
행 호조 판서(行戶曹判書) 이창의(李昌誼)가 아뢰기를,
"본조(本曹)는 근년 이래로 잇달아 큰 공역(工役)을 당하였으므로 경비(經費)가 궁핍한데, 올해에 이르러서는 수세(收稅)가 전보다 크게 줄어서 앞으로 지급할 것과 지금 바로 수용(需用)할 것이 매우 급하니, 국계(國計)가 참으로 애통(哀痛)합니다. 전부터 이러한 때에는 으레 흔히 관서(關西)의 은(銀)과 무명을 가져다 썼으나 사체(事體)가 구차하고 명색이 바르지 않습니다. 오직 수세한 갖가지 곡식은 지부(地部)008) 의 소관인데, 혹 은화(銀貨)로 바꾸거나 본색(本色)을 배로 날라 오는 것은 전후의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본도(本道)의 원곡(元穀) 중에서 창고에 남아 있는 수가 거의 20여 만 석이나 되므로 조적(糶糴)할 즈음에 크게 민폐(民弊)가 된다 하니, 이제 덜어내어 옮겨 쓴다면 사세가 양쪽으로 편리하고 명목도 바를 것이며, 묘당(廟堂)의 의논도 그렇게 여기고 있으니, 청컨대 관서 세곡(稅穀)의 쌀과 좁쌀 가운데에서 4, 5만 곡(斛)을 한정하여 돈으로 바꾸어 가져다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월 8일 무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연명(聯名)으로 대조(大朝)께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올해 경축하는 예(禮)는 결코 하루라도 헛되이 미룰 수 없습니다. 성명(聖明)께서 조그마한 정성을 굽어살펴 힘써 윤허를 내리신다면, 동조(東朝)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을 위로할 수 있고 춘궁(春宮)이 삼가 경축하는 뜻에 부응할 수 있으며 백관과 만민이 분주하게 허둥거리고 소요하는 것을 진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빨리 명지(明旨)를 내리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제 주갑(周甲)이 될 줄 몽상(夢想)엔들 어찌 생각하였는가? 나를 안심시키는 것이 숭호(崇號)하는 것보다 낫다. 유유(悠悠)한 이 마음은 하늘에 맹세할 수 있다. 이틀 동안 명을 기다리고 이 차자에 연명한 것은 그저 고요한 것만 못하다. 이제 죄다 개유하였으니 무엇을 달리 개유하겠는가? 경들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정홍순(鄭弘淳)을 승지로 삼았다.
1월 10일 경신
왕세자(王世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승지 임위(任瑋)를 불러 하교하기를,
"오늘의 차대는 이것이 새해의 첫 정사(政事)이다. 원량(元良)과 대신(大臣)이 백성을 돌보는 실정(實政)을 상의한 뒤에 승지가 와서 아뢰라."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달하기를,
"승지의 말을 들으니 아까 하교가 있었다 합니다. 성의(聖意)는 백성을 위하는 데에 성대하십니다마는, 신들이 일을 하는 까닭은 마음이 있기 때문인데 세전(歲前)부터 진하(陳賀)를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답답하고 속이 타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묘당(廟堂)의 계책에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성교(聖敎)가 여기에 미쳤으니 황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성교가 근면하고 지극하시니, 경들은 성의를 저버리지 않을 방도를 찾아 깊이 생각하여 상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다행히 4백 년 동안에 드물게 있는 경사를 만났으니, 동토(東土) 수천 리를 통틀어 누구인들 고무(鼓舞)하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하(邸下)께서는 위로 삼전(三殿)을 받들고 또 이 해를 당하셨으니, 천하에서 이른바 지극히 기쁘고 지극히 즐겁다는 것을 우리 저하께서 아울러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이 지나치면 안일한 뜻이 싹트고 안일한 뜻이 극진하면 게으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상정(常情)이 같은 것인데, 올해의 방경(邦慶)은 지난 사책(史冊)에는 드문 바로서, 이것은 하늘이 돌보아서 돕고 조종(祖宗)께서 내리신 음덕의 아름다움이니, 저하께서는 더욱 마땅히 이를 깊이 생각해서 성실하고 전일(專一)하여 마치 깊은 못에 다가서고 얇은 얼음을 밟은 듯이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하늘이 돌보아서 도운 때에 보답할 방도를 생각하며, 비록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멈추는 사이일지라도 방심하지 말고 살펴서 태만한 뜻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도 싹트지 말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차왜(差倭)에게 잔치를 베풀고 예단(禮單)에 쓸 여러 가지 물건과 도해(渡海)할 역관(譯官)을 차출하여 보내는 일 때문에 장달(狀達)한 것이 있는데,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일을 장계(狀啓)하지 않았고 정원(政院)에서도 살피지 않고서 곧바로 받아들였으니, 그 부사와 승지를 모두 추고(推考)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갖가지 가포(價布)에서 반을 줄인 뒤에 균역청(均役廳)에서 급대(給代)하는 것은 이미 순전히 돈으로 하였으므로 그 나머지 반은 순전히 무명으로 상납해야 할 것인데, 외읍(外邑)에서는 경사(京司)에서 점퇴(點退)할 것을 겁내어 도리어 순전히 돈으로 와서 바치므로 무명과 돈이 고르지 않아서 공사(公私)가 모두 괴롭습니다. 청컨대 금년 갑술년 조(條)부터 시작하여 각 군문(軍門)과 각사(各司)의 가포는 순전히 무명으로, 혹은 무명과 돈을 반씩으로 받아들이고 각사에서 점퇴하는 버릇을 엄히 금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각 고을의 조적(糶糴)은 많고 적은 것이 고르지 않으므로 혹 부족을 걱정하기도 하고 혹 억지로 나누어 주게 되기도 합니다. 기내(畿內)로 말하더라도 광주부(廣州府)의 한 집에 나누어 주는 것이 거의 10여 석(石)이나 되므로 백성이 견디지 못하여 하나의 고폐(痼弊)가 되었으며, 각도의 각 고을 중에서도 이와 같은 곳이 몇 곳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청컨대 여러 도로 하여금 민호(民戶)와 환곡(還穀)이 많고 적은 것을 견주어 헤아려서 부근의 고을에 고르게 옮기고 올 봄 조곡(糶穀) 때에 분배하여 변통해서 그 폐단을 덜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태학(太學)의 하재(下齋)와 사학(四學)의 거재(居齋)는 등과(登科)하는 지름길이 되므로 유생(儒生)들이 청탁으로 관당(館堂)을 차지하려고 꾀하고 사정(私情)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여 강기(講記)의 차례대로 하지 않아서 부정하게 들어가는 자가 매우 많으니, 부정하게 들어간 유생은 모두 출재(出齋)시키고 지난 겨울의 통독 강기(通讀講記)로 차례에 따라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소서."
하고, 대사성(大司成)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대개 기미년009) 에 정식(定式)한 이후로 15년 동안의 취재(取才) 및 통독기(通讀記)를 이제까지도 그대로 두었으므로 번번이 재학(齋學)에 빈자리가 있을 때를 당하면 이름이 구강기(舊講記)에 들은 자가 모두 분경(紛競)을 일으키니, 이는 관학(館學)에서 취사(取捨)에 대한 비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저 재학에서 선비를 양성하는 것은 장차 출신(出身)하여 임금을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런 버릇이 있는 것은 배양(培養)하는 도리에 매우 어그러집니다. 대저 강기(講記)는 당시의 빈자리에 쓰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10년 동안 그대로 두고 임시하여 취사하는 것은 과규(科規)에 어그러지고, 또 취재의 강에서는 반드시 칠서(七書)를 죄다 고시(考試)하지 않으나 통독의 강에서는 칠서를 죄다 고시하므로 경생(經生)이 그 재주를 다하는 것은 이보다 나은 것이 없고, 《속대전(續大典)》에도 ‘통독에서 입격(入格)하지 못한 자는 준분(準分)하여 재학에 들어가는 것을 허가한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올해부터 통독기는 내년 통독 때까지만 쓰고 내년 통독 뒤에는 구기(舊記)를 버리고 신기(新記)를 쓰되, 만일 통독을 행하지 않는 해라면 비로소 별취재(別取才)를 해야 오랜 폐단을 영구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균역청을 설치한 것은 실로 대조(大朝)께서 백성을 돌보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노비(寺奴婢)로 말하면 가장 불쌍합니다. 무릇 양한정(良閑丁)에 든 백성은 혹 면하려고 꾀하는 자도 있으나, 한번 사노비 안(案)에 들면 자자 손손(子子孫孫) 영구히 면할 수 없습니다. 대개 이 법은 기자(箕子) 때에 나왔는데 말폐(末弊)가 이 지경에 이르러 비록 자녀가 있어도 혼가(婚嫁)할 수 없다 합니다. 대조께서 이를 슬프게 여겨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그 공(貢)을 줄이지 않으면 그 폐단을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줄이면 공용(公用)을 이어 갈 수 없을 것이다.’ 하셨는데,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신도 확실히 아뢰기 어려우니, 저하께서는 반드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강구하여 구획(區劃)하게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이에 여러 신하들이 각각 자기 소견을 아뢰었는데, 혹 균역청에서 급대할 것을 청하는 것일 뿐이고 달리 바로잡을 좋은 방책이 없었다. 임위(任瑋)가 돌아와 임금에게 아뢰었는데, 환곡을 고르게 하는 일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변통하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순전히 돈으로 내는 것을 금지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하고, 균역청에서 급대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임금이 말하기를,
"그르다. 이미 가포를 줄이고 균청을 설치하였는데 또 사노비에게 급대한다면 균역청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듣건대, 동궁(東宮)이 균역청 절목에 써 넣게 하였다 한다. 아! 균역의 일은 내 만년의 큰 정사(政事)이다. 그러나 원량(元良)은 대궐 안에서 생장하였으니,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한번 환히 개유하려 하여도 내 신기(神氣)가 뜻대로 하기 어려우니, 내일 서연(書筵)을 멈추고 균역청 당상을 불러 균역 절목을 강연(講筵)의 문의(文義)처럼 강론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균역청 당상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동궁에 입대(入對)하여 영구히 준수(遵守)하고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성의(聖意)를 개유하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진하를 청하는 것은 나라의 한가지 일이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중요한 일은 아닌데, 보필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성지(聖旨)에 맞출 만한 평소에 강구한 묘당의 계책이 이미 없으니, 이것을 핑계 삼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여 마치 안위가 매우 급한 듯이 하였다. 아! 장차 저 정승을 어디에 쓰겠는가?"
【태백산사고본】 58책 8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12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외교-왜(倭)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司法) / 무역(貿易) / 신분-천인(賤人) / 재정-역(役) / 재정-국용(國用)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人事) / 군사-군역(軍役) / 구휼(救恤)
[註 009] 기미년 : 1739 영조 15년.
사신(史臣)은 말한다."진하를 청하는 것은 나라의 한가지 일이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중요한 일은 아닌데, 보필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성지(聖旨)에 맞출 만한 평소에 강구한 묘당의 계책이 이미 없으니, 이것을 핑계 삼아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여 마치 안위가 매우 급한 듯이 하였다. 아! 장차 저 정승을 어디에 쓰겠는가?"
평안 감사 이태중(李台重)이 중번(重藩)에 새로 발탁되었다는 것으로써 상서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특지(特旨)로 홍문 제학 남유용(南有容)을 파면하였다. 당초에 수찬 이현중(李顯重)이 본관록(本館錄)을 권점(圈點)하는 자리에 참여하여 뒤미처 들어가 권점한 잘못이 있었으니, 이는 부제학 김상복(金相福)이 권하였기 때문인데, 김상복이 처음에 이미 권하고 나서 뒤에는 또 이현중의 잘못이라고 남들에게 큰소리하였다. 그래서 이현중과 김상복이 상소하여 서로 다투므로 전후에 제학에 제배(除拜)된 자가 다 머뭇거리고 당록(堂錄)을 피하니 제배가 있으면 곧 갈렸고, 남유용도 상소하여 명을 받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大臣)이 두 사람의 일을 왕세자에게 상달하니, 왕세자가 두 사람을 다 파면하였는데, 임금이 듣고 도리어 남유용이 분쟁을 일으켰다 하여 특별히 그 벼슬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려 남유용의 벌이 지나침을 아뢰고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수령(守令)으로서 장법(贓法)을 범하여 종신 금고된 자를 탕척(蕩滌)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장법은 종신 금고하는 것을 중률(重律)로 삼는데, 봉원(封園)하고 사유(赦宥)할 때에 이미 감등(減等)을 명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또 탕척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장률(贓律)이 엄하지 않아서 금령(禁令)을 범하는 사람이 많았다.
1월 11일 신유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홍낙성(洪樂性)을 승지로, 한억증(韓億增)을 대사간으로, 최성대(崔成大)를 집의로, 남덕로(南德老)를 지평으로, 이세택(李世澤)을 정언으로, 김상성(金尙星)을 판의금으로, 조명채(曹命采)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특지(特旨)로 공조 판서 이보혁(李普赫)을 체차하고 홍중징(洪重徵)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이보혁은 선원전에서 일을 감독하였는데, 임금에게 아뢰기를,
"오늘 또 장차 범야(犯夜)하게 되어 신탑(神榻)을 봉안하는 것이 군색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여드레나 되었는데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하였다. 내 마음은 하루가 급한데, 공판(工判)은 누워서 편안하려 하는가?"
하고, 또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나는 늙었을지라도 감히 늙었다고 말하지 못하는데, 신하가 감히 이럴 수 있는가?"
하고, 이어서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참판 유최기(兪最基)도 연주(筵奏)의 작은 잘못 때문에 그 관직을 체차하였다. 한림(翰林) 홍양한(洪良漢)·정상순(鄭尙淳)과 주서(注書) 이창임(李昌任)·홍인한(洪麟漢)을 6품(品)으로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선원전을 수리할 때에 입시(入侍)한 노고 때문이었다.
1월 15일 을축
선원전의 수리가 끝나서 선조(先朝)의 어용(御容)을 도로 모셨다.
이수훈(李壽勛)을 검열로, 서지수(徐志修)를 이조 참의로, 이득종(李得宗)을 부응교로, 유건(柳健)을 헌납으로, 남태회(南泰會)를 수찬으로, 윤급(尹汲)을 형조 판서로, 이정보(李鼎輔)를 판윤으로, 정권(鄭權)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0일 경오
민백창(閔百昌)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1일 신미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고 창의궁(彰義宮)에 들렀다. 임금이, 대신(大臣)이 굳이 진하(陳賀)를 청한다 하여 머물러 있고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는 하교까지 하였으므로,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구대(求對)하니, 중관(中官)이 문을 들어가는 것을 막기까지 하였다. 이천보가 문을 밀고 들어가 먼저 환시(宦侍)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엄한 분부를 내리고 발호(跋扈)한다는 하교까지 하고 이어서 정승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가 이윽고 도로 거두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회란(回鑾)하기를 여러 번 청하니,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환궁하였다.
지사(知事) 조재호(趙載浩)를 특배(特拜)하여 우의정으로 삼았다. 조재호는 고 좌상 조문명(趙文命)의 아들인데, 조제론(調劑論)을 힘껏 주장하였기 때문에 매우 임금의 사랑을 받아서 이때에 이르러 이 명이 있었다.
엄우(嚴瑀)를 대사간으로, 이사조(李師祚)를 집의로,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이석상(李錫祥)을 지평으로, 이기경(李基敬)을 정언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의 탄일(誕日)에 내가 일찍이 진하(陳賀)를 받지 못하게 한 것은 뜻이 있는데, 춘방관(春坊官) 중에 진하를 멈추기를 청한 사람이 없으니, 보도(輔導)가 본디 이러한 것인가? 시임(時任)인 춘방관을 모두 해직하고, 황인검(黃仁儉)을 겸 문학으로, 홍양한(洪良漢)을 사서로 제수(除授)하라."
하였다. 이날은 동궁(東宮)의 탄신(誕辰)이었다.
1월 23일 계유
충청도 보령(保寧)의 유학(幼學) 이희운(李熙運)이 소녕원(昭寧園)의 추숭(追崇)에 관한 일 때문에 대궐에 나아가 상서하였는데, 임금이 듣고 소견(召見)하여 그 상을 바라는 정상을 엄히 꾸짖고는 본향(本鄕)으로 쫓아 보내라고 명하고, 또 그 글을 정원 일기(政院日記)에 적지 말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신이 동궁(東宮)이 이희운에게 답한 비(批)를 보니, ‘대조(大朝)께 여쭈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막중한 일을 한낱 유생(儒生)이 어찌 감히 청할 수 있겠습니까? 성교(聖敎)에서 사체(事體)로 배척하심은 진실로 성대하십니다마는, 혹 그 현혹하고 농락하는 정상을 오히려 깊이 살피시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글 가운데에 ‘누가 감히 우리 임금의 어머니라 하지 않겠느냐?’고 한 한 구절은 버릇없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고 또 고사(故事)에 이정귀(李廷龜)의 ‘다만 본위(本位)에 그대로 둔다면 숭봉(崇奉)하는 정실이 없고 올려서 모후(母后)와 나란히 한다면 이존(貳尊)의 혐의가 있다.’는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개 혼조(昏朝)에서 공빈(恭嬪)을 추숭할 때의 일인데, 그가 비록 버릇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성조(聖朝)의 일을 차마 견주지 못할 때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어찌 한(漢)나라·당(唐)나라의 전례가 있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능히 아조(我朝)의 오늘날의 가법(家法)을 지키시어 고금을 참작하고 정문(情文)을 절충하여 이미 상시(上諡)하고 봉원(封園)하였으며 모든 향사(享祀)와 존봉(尊奉)하는 절차를 극진히 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나 특별히 선조(先朝)에서 내린 작호(爵號)를 없애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백왕(百王)에 뛰어나신 성대한 일인데, 일종의 음흉한 무리가 함부로 헤아리고 근거 없는 말로 꾸며서 시험하여 전하의 효성을 어지럽히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반드시 엄히 죄주어 물리치고서야 처분이 더욱 밝아서 후세에 할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방문을 닫고 한참 있다가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육아(蓼莪)010) 를 인용한 것과 이세희(李世熙)의 소(疏)는 같은 투인데, 더욱이 통탄스러운 것은 ‘누가 감히 우리 임금의 어머니라 하지 않겠느냐?’라는 한 구절이다. 그러나 경들이 이 말을 듣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나를 섬긴 것이 몇 해인가? 내 마음을 잘 본받았다면 누가 이런 소를 만들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이희운에 대해서만 엄히 처분하기를 청하는가? 예전에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스스로 고황제(高皇帝)의 측실(測室) 아들이라 칭하였는데,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가 조(詔)를 듣고 곧 칭신(稱臣)하였다. 지금의 여러 신하들이 나를 섬긴 지 29년 만에야 비로소 우리 임금의 어머니를 알았으니, 도리어 조타만도 못하다. 예전에 이종성(李宗城)·홍봉조(洪鳳祚)가 아뢴 것은 아주 무상(無狀)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명류(名流)라는 자이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아! 이번에 이희운이 한 짓은 이희운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곧 근본이 있는 것이다. 왕자(王者)의 처분은 근본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그 말단을 다스리겠는가? 지난해 이미 처분하였더라도 이제 와서 더욱이 엄하게 바루지 않을 수 없으니, 판부사 이종성과 개성 유수 홍봉조는 특별히 직첩(職牒)을 거두고 방귀 전리(放歸田里)하라. 이희운의 글 가운데에 ‘궁원(宮媛)’ 운운한 것은 접때 조관빈(趙觀彬)의 소 가운데에 있는 ‘비빈(妃嬪)’ 두 글자의 대거(對擧)이다. 조관빈이 없었다면 이제 어찌 이런 글이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직첩을 거두고 방귀 전리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이종성과 홍봉조는 일찍이 사묘(私廟)의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죄를 받았으나, 그 마음을 돌아보면 숨김이 없는 데에서 나왔을 뿐이다. 어찌 신하로서 짐짓 그 임금의 사친(私親)을 폄굴(貶屈)하려는 자가 있겠는가? 그런데 임금의 마음이 지나치게 의심하여 이희운의 해괴한 소 때문에 신하들에게 허물을 옮기기까지 하였고, 또 조관빈이 죽책문(竹冊文)을 짓기를 사양한 소가 어찌 이희운에게 관계되는 것이 있으랴마는 문자를 들추어내어 억지로 죄주어 크게 성덕(聖德)의 흠이 되었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58책 81권 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13면
【분류】왕실(王室)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註 010] 육아(蓼莪) :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효자(孝子)가 부모의 봉양을 뜻대로 하지 못함을 슬퍼하여 읊은 시(詩)임.
사신(史臣)은 말한다."이종성과 홍봉조는 일찍이 사묘(私廟)의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죄를 받았으나, 그 마음을 돌아보면 숨김이 없는 데에서 나왔을 뿐이다. 어찌 신하로서 짐짓 그 임금의 사친(私親)을 폄굴(貶屈)하려는 자가 있겠는가? 그런데 임금의 마음이 지나치게 의심하여 이희운의 해괴한 소 때문에 신하들에게 허물을 옮기기까지 하였고, 또 조관빈이 죽책문(竹冊文)을 짓기를 사양한 소가 어찌 이희운에게 관계되는 것이 있으랴마는 문자를 들추어내어 억지로 죄주어 크게 성덕(聖德)의 흠이 되었으니, 애석하다."
1월 24일 갑술
영남 이정사(嶺南釐正使) 민백상(閔百祥)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민백상이 폐단을 조목조목 아뢰었는데, 곽전조(藿田條)에 이르러 아뢰기를,
"균역청에 곽전세(藿田稅)가 있는데, 근래 수령이 균역청에 곽전(藿錢)을 미리 바치고 백성을 시켜 미역[藿]을 베어 자기를 이롭게 하므로, 백성이 그 폐단을 견디지 못하여 다들 값을 늘려 균역청에 바치고 이 폐단을 고치기를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미역에도 세가 있는가? 그 정상이 불쌍한데, 더구나 값을 늘릴 수 있겠는가? 위를 덜고 아래를 보태는 정사(政事)로서는 예전대로 두어야 하겠다."
하자, 균역청 당상 홍봉한(洪鳳漢)이 자못 고집하였다. 민백상이 말하기를,
"고성(固城) 한 고을로 말하더라도 균역청의 세는 90냥에 지나지 않는데, 수령이 미역을 사서 생기는 이익은 많아서 2백 냥이나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값을 늘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민백상이 또 사노비(寺奴婢)의 폐단을 말하니, 비국(備局)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조 판서 신만(申晩)이, 북도(北道)의 갑산(甲山)·부령(富寧)은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 차출하는 자리이나 무신이 엄체(淹滯)되었다 하여 격례(格例)에 얽매이지 말고 무신을 차출하여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영남은 이미 이정하였으나,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에도 마땅히 제때에 차출하여 보내야 하겠으니, 경들이 천거해 보라."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성중(李成中)은 호남에 보낼 만하고 이익보(李益輔)는 호서에 보낼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먼저 이성중을 호남 이정사로 삼았다.
전 웅천 현감(熊川縣監) 이징화(李徵華)·영덕 현감(盈德縣監) 이상해(李祥海)·경주 영장(慶州營將) 권의(權䭲)·전 기장 현감(機張縣監) 송재우(宋載遇)·거제 부사(巨濟府使) 최암(崔嵒)·전 개령 현감(開寧縣監) 최태형(崔台衡)·전 영천 군수(永川郡守) 오수엽(吳遂燁)을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죄의 경중에 따라 감처(勘處)하게 하니, 이정사(釐正使) 민백상(閔百祥)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1월 26일 병자
홍상한(洪象漢)을 예조 판서로, 구성필(具聖弼)을 형조 참판으로, 신회(申晦)를 좌윤으로 삼았다.
1월 28일 무인
태학(太學)의 거재 유생(居齋儒生)이 반례(泮隷)가 야금(夜禁)을 범하였다가 금영(禁營)에서 곤장을 맞기에까지 이르렀다 하여 권당(捲堂)하고 들어가지 않았는데, 임금이 대사성에게 명하여 들어가도록 권하니, 반유(泮儒)가 곧 도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효종(孝宗) 때에 태학에 은배(銀杯)를 내렸는데 사태학(賜太學)이라는 석 자를 새겼다. 혹 석전제(釋奠祭)를 당하거나 상소할 때에는 깊은 밤일지라도 반례가 이 잔[杯]을 가지고 나가면 나졸(邏卒)이 감히 묻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금영의 순졸(巡卒)이 잔을 가지고 나온 반례를 잡아 그 사람을 곤장으로 때리고 그 잔을 돌려보냈으므로, 유생들이 능모(凌侮)를 받았다 하여 권당하기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그 대장(大將)을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정고(呈告)하고 사직하였으나, 왕세자가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1월 30일 경진
경기우도 심휼사(京畿右道審恤使) 한광조(韓光肇)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한광조에게 묻기를,
"경이 들른 여러 고을의 백성이 내가 결전(結錢)을 덜고 환곡(還穀)을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게 한 혜택을 알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간 곳에서는 가난한 백성이 다 모여 길을 막고 조정에서 살려 준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도 흔히 있었습니다."
하였다. 한광조가 옥수안(獄囚案)을 읽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휼(審恤)을 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고, 특별히 살옥(殺獄)의 중수(重囚)를 작처(酌處)하니 김복동(金福同) 등 모두 8인이었다.
민백상(閔百祥)을 발탁하여 개성 유수로 삼았다.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개(修改)하기 위한 교정(校正)이 끝났다. 교정한 당상·낭청 들에게 차등 있게 상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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