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1권, 영조 30년 1754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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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신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명을 받고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右相)은 병을 칭하고 나라의 일은 끝이 없다. 경은 늙었으니 와합(臥閤)에서 논도(論道)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대답하기를,
"신은 정력이 없어져서 온갖 일이 다 전과 같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는다면 길이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노성(老成)한 정승을 쉽사리 갈 수 없으니, 다시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3월 2일 임자

김윤(金潤)을 통제사로 삼았다.

 

3월 3일 계축

헌부(憲府) 【지평 김회원(金會元)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병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은 이번 대정(大政) 때에 부정한 길을 넓게 열어서 뇌물이 방자하게 행해져, 강상(江上)의 부호(富戶)는 맨 먼저 초사(初仕)에 주의(注擬)되고 영장(營將) 네 자리는 죄다 한산(閑散)에게 돌아갔으며 변장(邊將)의 구근(久勤)은 오래 사진(仕進)한 자를 취하지 않았으니, 무부(武夫)들이 실망한 것은 참으로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고, 숙질(叔姪)은 부자(父子)와 같은데 일전에 능창(綾昌)016)  과 서로 힐책하여 거의 윤리가 없었으니, 청컨대 이익정을 파직하소서. 형조 참판 구성필(具聖弼)은 별로 재주와 국량도 없고 한낱 일을 잘하는 자일 뿐입니다. 우리 조정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문관(文官)·남행(南行)·무관(武官) 세 길뿐인데, 그는 어떤 사람이기에 내직·외직을 논할 것 없이 두루 다니며 옮기고 승진하여 마치 초개(草芥)를 줍는 것 같이 하여 함부로 초헌(軺軒)을 탔으니, 명기(名器)가 문란합니다. 관방(官方)을 중시하고 외람됨을 억제하는 도리에 있어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청컨대 구성필을 파직하소서. 대사성 조운규(趙雲逵)는 본디 학문이 없다고 알려졌는데 외람되게 이 직임에 통하였으니, 어찌 유생(儒生)들에게 웃음을 끼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개정(改正)하소서. 전 현감 이정중(李廷重)은 성질이 본디 망령되고 악독하며 비루하고 어그러진 행동이 많습니다. 현관(賢關)017)  에서 소란을 일으켜 장보(章甫)018)  를 때렸고 괴원(槐院)019)  에서 검(劍)을 뽑아 권점(圈點)할 것을 공동(恐動)하였으니, 전후에 외람되게 벼슬한 것이 모두 분수 밖의 것입니다. 대망(臺望)에 외람되게 통하여 공론이 분개하며 욕하는 것으로 말하면 명기의 오욕(汚辱)이 이에 이르러 극진하였습니다. 청컨대 이정중을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임금이 능창군 이숙을 불러 묻기를,
"대서(臺書)에 다투어 힐책하였다고 경의 숙질을 논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숙이 대답하기를,
"이 일에는 대개 유래가 있습니다. 월전에 신의 집 종이 야순(夜巡)에 잡혔는데 장교(將校)가 신에게 말하지 않고 규례에 따라 결죄(決罪)하였으므로, 신이 과연 조카인 이익정에게 말하였더니 이익정이 그 고하지 않은 장교를 추치(推治)하였습니다. 그때의 사실은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부자가 다투어 힐책하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비록 병조 판서의 숙부일지라도 집 종이 금령(禁令)을 범하였으니, 경의 조카에게 말하기를, ‘법을 지키는 것은 집에서부터 시작해야 될 것이니 너는 내 종을 다스려 법을 잘 지켰다.’ 하였다면, 어찌 체면이 유지되지 않았겠으며 다투어 힐책하였다는 말이 어디에서 생겼겠는가?"
하고, 또 김회원과 병조 정랑 구윤옥(具允鈺)을 불러 김회원에게 묻기를,
"너는 병조 판서의 잘못을 두루 아뢰도록 하라."
하자, 김회원이 어느 자리와 어느 자리에는 전혀 구근을 쓰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구윤옥에게 묻기를,
"과연 김회원의 말과 같은가?"
하니, 구윤옥이 말하기를,
"여러 영(營)에서 맨 먼저 구근으로 천전(遷轉)해야 할 자가, 변장 자리가 잔박(殘薄)하다 하여 혹 머물러 뒷날의 정사 때를 기다리기를 바라므로 그 다음 구근을 많이 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구윤옥에게 묻기를,
"김회원이 ‘내삼청(內三廳)의 구근도 쓰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너는 아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두 자리에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김회원의 말은 절로 빈말이 될 것이다."
하였다. 김회원이 말하기를,
"이것은 사실과 다르니, 사실과 다른 곳은 신이 지만(遲晩)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사(供辭)가 아닌데, 자신이 대신(臺臣)이면서 문득 지만을 말하니, 대풍(臺風)이 떨어졌다. 저 대각(臺閣)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김회원을 개정(改正)하고 대망에 길이 다시는 주의(注擬)하지 말아서 3백 년 내려온 대풍을 맑게 하라."
하였다. 이익정은 본디 인망(人望)이 없었는데 외람되게 서전(西銓)020)  을 차지하고서 대정을 행하게 되어서는 잗단 비방을 많이 받았다. 김회원의 말이 사실과 다르기는 하나 여론이 자못 시원하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삼황(三皇)의 즉위일(卽位日)과 기신일(忌辰日)에 망배(望拜)한다는 것을 전에 이미 하교하였는데, 이제 상고하여 아뢴 것을 보니 고황제(高皇帝)가 즉위한 것은 정월 초4일 을해(乙亥)이어서 이제 이미 지났으니, 이 마음이 송구스럽다. 그러나 봄철이 다 가지 않았으니, 이달 25일 을해에 뒤미처 망배하여 이 마음을 조금 펴겠다. 즉위일의 망배는 길복(吉服)으로 하겠으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알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치평요람(治平要覽)》은 예전에 우리 세종(世宗)께서 엮으신 것인데 이제 다 흩어져 없어졌으니, 홍문관과 춘방(春坊)으로 하여금 널리 중외(中外)에서 구하여 바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중관(中官)을 의율(議律)할 때에 금오(金吾)에서 번번이 공률(公律)로 감정(勘定)하여 석방하므로 잠깐 갇혔다가 곧 석방되어 양양(揚揚)하게 모자를 쓰고 좌우에서 아첨하는 것은 고요(皋陶)021)  가 법을 집행하던 뜻이 아니라고 하여 전후의 판의금을 중추(重推)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사사로운 뜻으로 가감하여 고율(考律)하는 율관(律官)을 경계하였다.

 

3월 4일 갑인

임금이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대상(大祥)에 친림(親臨)하여 옛 사부(師傅)와 요속(僚屬)을 모두 입참(入參)시켰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 혼궁(魂宮)의 상전(賞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입번(入番)한 종실(宗室) 하릉군(夏陵君) 이적(李樀) 등은 가자(加資)하고 충의(忠義) 이신규(李信圭)·홍응성(洪應盛)은 승서(陞敍)하였으며, 수묘관(守墓官) 동양군(東陽君) 이탱(李樘)은 가자하고 구마(廐馬) 1필(匹)과 노비(奴婢) 5구(口)와 전(田) 40결(結)을 내렸으며, 시묘관(侍墓官) 김이재(金以載)는 가자하고 구마 1필과 노비 3구와 전 30결을 내렸으며, 수위관(守衞官) 이언신(李彦藎)·이정환(李晶煥)과 충의 박태수(朴台秀)는 승륙(陞六)하고 수복(守僕)·반감(飯監) 등은 2년 동안 면역(免役)하였으며, 차비 내관(差備內官)은 아마(兒馬)나 혹은 현궁(弦弓)을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해동(海東)의 신하가 어찌 감히 우리 세손의 대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행 사직(行司直) 이기진(李箕鎭)은 왕년의 구신(舊臣)으로서 감히 외방(外方)에 있다고 핑계하니, 이것이 무슨 분의(分義)인가? 접때 승자(陞資)한 데에는 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데 이제 이미 넉 달이 되었어도 숙배(肅拜)하지 않으니, 더욱이 매우 한심하다.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이규채(李奎采)를 대사간으로, 이수관(李壽觀)을 사간으로, 현광우(玄光宇)를 장령으로, 안복준(安復駿)을 지평으로, 홍인한(洪麟漢)·이창임(李昌任)을 정언으로, 홍상한(洪象漢)을 우빈객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서연관으로 삼았다.

 

3월 5일 을묘

임금이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와 영성군 박문수를 소견(召見)하였다. 원경하가 근일의 사교(辭敎)가 지나치다고 하여 경계를 아뢰고 이어서 재용(財用)은 반드시 절약을 생각해야 하고 구법(舊法)은 고쳐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법을 지키는 것은 내가 귀하게 여기는 바이나, 구법을 수정하여 명확하게 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그것에는 사마광(司馬光)의 말이 있습니다. 큰 집을 수리하는 자는 헐린 데에 따라 보수해야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매우 아름답습니다마는, 양공(良工)을 얻지 못하여 용렬한 자에게 맡기면 무너져 버릴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박문수에게 이르기를,
"영성(靈城)의 소견이 전보다 조금 바뀌어 ‘개천을 파서 소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자,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처음에 생각한 것은 먼저 그 근원을 다스린 뒤에 그 흐르는 곳을 트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마는, 이제는 수환(水患)이 더욱 심해져서 작은 비가 내려도 인가가 문득 떠내려가고 묻히며 또 물길이 막혀 괴어서 토질(土疾)을 만드니, 급히 트이게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수양제(隋煬帝)가 도랑을 판 일에 견줄 것이 아니고 참으로 백성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겠으나, 지금의 인심으로서는 혹 원망을 부를까 염려되니, 어찌하는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몹시 급한 일이므로 사람들이 다 바라는데, 원망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3월 6일 병진

승지를 보내어 남한(南漢)에 있는 온조왕(溫祚王)의 묘(廟)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3월 8일 무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소녕원(昭寧園)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승지 김상복(金相福)을 보내어 원소(園所)를 봉심하게 하고, 돌아와서 김상복을 소견하였다. 창회 소지(愴懷小識)를 친히 짓고 보경당(寶慶堂)에서 재숙(齋宿)하였다. 보경당은 임금이 탄강(誕降)한 곳이고 이날은 소녕원의 기신(忌辰)이다.

 

3월 10일 경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가 여러 종신(宗臣)들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명정전에서 소견하였다. 요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위로 동조(東朝)를 받들고 아래로 문자 문손(文子文孫)을 두셨으며 즉위하신 지 30년이 되고 또 주갑(周甲)인 해를 당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사첩(史牒)에 드문 경사입니다.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에 힘써 따라서 동조께 진연(進宴)하시는 것이 신 등의 큰 소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 선조(先朝) 때에 신축년022)  이 한 해를 사이에 두었을 뿐이었는데, 승하하시는 슬픔이 경자년023)  에 있었으므로 내 지극한 한탄이 마음에 있으니, 경들은 내 마음을 헤아리고 다시는 이런 청을 하지 말라."
하였다.

 

3월 11일 신유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일식(日蝕)·월식(月蝕)이 하늘가에 보이면 으레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3월 15일 을축(乙丑)의 망월식(望月食)을 4편(篇)의 역법(曆法)으로 추산하건대, 《대명력(大明曆)》의 역법으로는 월식이 없어야 할 것이고 《칠정내외편(七政內外篇)》으로는 월식이 지하(地下)로 있어야 할 것인데, 《시헌력(時憲曆)》의 역법에는 다시 둥글게 되는 것이 유정(酉正) 1각(刻) 8분(分)에 있으니 그날의 해넘이 때와 서로 가깝습니다. 달돋이 때에 미처 다시 둥글게 되지 않는다면 보이는 대로 구식(救食)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특별히 본감(本監)의 관원을 정하여 남산(南山)에 올라 바라보다가 달돋이 때에 다시 둥글게 되지 않거든 곧 화전(火箭)으로 서로 알리어 구식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월 12일 임술

임금이 명정전의 월대(月臺)에서 각릉(各陵)에 한식(寒食) 때 쓸 향(香)을 지영(祗迎)하고, 하교하기를,
"순회묘(順懷墓)·소현묘(昭顯墓)에 쓸 향을 전하는 것은 명묘(明廟) 때와 기해년024)   이전에는 서서 전하고 꿇어앉아 주는 것이 옳으나 이제는 옳지 않으니, 꿇어앉아 전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순회묘(順懷廟)·소현묘(昭顯廟)의 치제문(致祭文)에는 치고(致告)라 하고 여러 신하들의 치제문에는 유제(諭祭)라 하라. 이제 효장(孝章)·의소(懿昭)에게는 그 중간을 써서 다 치고라 칭하여야 마땅하나 이것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치유(致諭)라 칭하였다가 뒷날에는 모두 치고라 칭하게 하고 이것을 향실(香室)의 의궤(儀軌)에 실으라."
하였다.

 

3월 13일 계해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상서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젊을 때에 글을 읽지 않아서 학식이 전혀 없으며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여 남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묘당(廟堂)은 온갖 책임이 모이는 곳인데 신은 극무(劇務)를 견디지 못하는 병이 있고, 두루 다스려 조화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때에 맞는 조치인데 신은 강경하여 일을 일으킬 염려가 있습니다. 스스로 아는 것이 명백하니, 결코 이 벼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세도(世道)로 말하면 저 치우친 소견으로 당(黨)을 좋아하는 자는 본디 논할 것도 없거니와, 학문이 없고 행실이 없으면서 요행한 급제를 차지하려고 힘쓰는 자가 세력 있는 집안에서 많이 나와서 당류(黨類)가 모여드는 곳에 굳게 자리잡아 서로 함께 벼슬길에 빨리 나아가는 술책으로 삼는데, 관직에는 한정이 있고 인원은 끝이 없으므로 처음에는 자기와 뜻이 다른 자를 배척하고 같은 무리를 도와 감싸서 반드시 그 이로운 것을 독차지하려 하나 그 요로(要路)에 대립하게 되어서는 같은 동류까지도 배척하여 방향과 사정의 선악에 따라 무리로 모이고 떼로 나누어져,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고 조상(朝象)이 어지러운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인데, 국가에서 이것을 처치하는 방도는 조금도 진려(振勵)하지 않고 오로지 포용하는 것을 일삼아 시비를 우선 버려두고 작록(爵祿)을 나누어 주어서 조정하여 한때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방도로 삼으니, 비록 당을 없애려 하더라도 당이 날로 더욱 많아져서 언로(言路)가 막히고 공의(公議)가 고요하여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징계되는 것이 없어서 나라의 형세가 날로 낮아져 망연(茫然)하게 쉴 곳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비록 재지(才智)와 덕행(德行)이 일찍부터 나타나서 명망과 실속이 모두 높은 자로 하여금 신이 외람되게 차지한 벼슬에 있게 하더라도 혹 머뭇거릴 것인데, 신처럼 변변치 못한 자가 더욱이 어떻게 직임을 감당하겠습니까? 신 자신이 비록 출사(出仕)하지 않았더라도 구구히 충성하기를 바라는 생각으로는 저하(邸下)께서 먼저 예학(睿學)을 힘쓰고 능히 예덕(睿德)을 삼가서 이것으로 뭇 신하를 인도하여 시서(詩書)·문학의 종류로 북돋우고 예의·염치의 과(科)에 들이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공정한 자가 과시(科試)를 주관하면 요행히 급제를 바라는 자가 힘을 쓰지 못할 것이고, 평온한 자가 등용되면 간교한 관리가 손을 거둘 것입니다. 조정(朝廷)에 예양(禮讓)이 성행함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음이 없어 모두 명절(名節)이 귀중하고 쟁탈(爭奪)하는 것이 부끄러운 줄 알면, 당습(黨習)이 절로 사라져서 군자(君子)가 덕(德)을 같이하는 것이 있을 뿐이고 조정이 절로 안정하여 치도(治道)가 평명(平明)하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도를 바로잡을 방도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우악하게 비답하고 출사하도록 권면하였다.

 

지평 김원행(金元行)과 전 현감 신경(申暻)이 상서하여 서연관(書筵官)을 사직하니, 왕세자가 모두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묻기를,
"달밤에 입직(入直)한 향군(鄕軍)을 소견한 것은 성묘(成廟) 때의 일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밤에 내가 입직한 금위 향군(禁衞鄕軍)을 소견하려 하니, 초관(哨官)이 거느리고 광정문(光政門) 밖에서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3월 14일 갑자

임금이 충청 감사 조명정(趙明鼎)과 균역 당상(均役堂上) 홍봉한을 소견하였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신은 바야흐로 부임하는데, 군문(軍門)에 이획(移劃)한 호서(湖西)의 저치미(儲置米)는 곡량(斛量)이 고르지 않고 또 가승(加升)이 없으니, 상납(上納)하고 준봉(準捧)025)  하는 데 모두 민폐(民弊)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균청에 신칙하여 군문의 두곡(斗斛)을 교량(較量)하여 함부로 받아들이는 폐단을 없애라고 명하였다.

 

3월 17일 정묘

남태온(南泰溫)을 승지로, 김시찬(金時粲)을 사간으로, 이육(李堉)을 장령으로, 임희교(任希敎)를 지평으로, 심관(沈鑧)·윤득우(尹得雨)를 정언으로, 이중조(李重祚)를 교리로 삼고, 전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를 특지(特旨)로 서용(敍用)하여 판중추부사를 부직(付職)하였다.

 

3월 18일 무진

왕세자가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이때 행공(行公)하는 대신(大臣)이 없어서 묘당의 계책이 적체되었기 때문이었다.

 

3월 19일 기사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춘당대(春塘臺)에서 명나라 고황제(高皇帝) 즉위일(卽位日)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이어서 흑원령포(黑圓領袍)로 갈아 입고 의종 황제(毅宗皇帝) 기신(忌辰)의 망배례를 행하였다. 임금이 시신에게 말하기를,
"처음에는 을해일(乙亥日)에 망배하려 하였으나, 이제 의종 황제의 기신이기 때문에 두 예(禮)를 겸하여 행하니, 이 마음이 한층 더하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내일 선무사(宣武祠)에 치제한다. 이총독(李摠督)·전상서(田尙書)의 자손으로서 벼슬이 없는 자는 양전(兩銓)으로 하여금 군문(軍門)에 조용(調用)하게 하고 어의동(於義洞)에 사는 한인(漢人)의 자손에게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먹을 것을 주게 하라."
하였다.

 

3월 21일 신미

봉상시(奉常寺)에서 아뢰기를,
"본시(本寺)의 신실(神室)은 이제 바야흐로 고쳐 짓습니다. 신여(神輿)를 간직하여 둘 곳을 다시 호조(戶曹)로 하여금 조성(造成)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월 22일 임신

심성진(沈星鎭)을 대사헌으로, 박필균(朴弼均)을 대사간으로, 이우(李堣)를 집의로, 심발(沈墢)을 사간으로, 윤방(尹坊)·신근(申)을 장령으로, 이후달(李厚達)·구수국(具壽國)을 지평으로, 송덕중(宋德中)을 헌납으로, 윤동성(尹東星)·정술조(鄭述祚)를 정언으로, 권적(權樀)을 판의금으로, 김상성(金尙星)을 좌빈객으로, 민우수(閔遇洙)를 찬선으로 삼았다.

 

임금이 명정문(明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명하여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을 불러 개천을 파는 것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물었는데, 혹 파는 것이 편리하다고도 하고 파지 않는 것이 편리하다고도 하여 의결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위사(衞士)·악공(樂工)에게 이르기를,
"개천을 파는 것을 옳게 여기는 자는 앉고 옳지 않게 여기는 자는 서라."
하였는데, 뭇사람이 다 한꺼번에 앉았으나, 악공 가운데에서 장구를 멘 한 사람만이 섰다. 임금이 앞으로 나오게 하여 묻기를,
"너는 개천을 파지 않는 것을 옳게 여기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신은 개천을 파고 안 파는 것은 모두 이롭고 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냇가의 인가(人家)가 떠내려가고 묻히는 것을 염려하기는 하나, 이것은 집 주인이 어떻게 수호(守護)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다 뭇사람을 좇는데, 이 사람만은 제 소견을 지키니, 매우 귀하게 여길 만하다."
하고, 드디어 상주었다.

 

특지로 개성 유수 민백상(閔百祥)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민백상이 조참(朝參) 때에 아뢰기를,
"신이 내려갈 때에 송도(松都)의 두 살옥 죄인(殺獄罪人)을 작처(酌處)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사람을 죽인 것이 이미 명백해졌으니, 살리는 의논에 붙일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감히 봉행(奉行)할 수 없어서 바야흐로 장청(狀請)하려 하는데 마침 입시(入侍)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이미 살리고자 하였는데, 한낱 개성 유수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난 겨울에 특별히 심휼사(審恤使)를 보내어 작처한 죄인이 아직도 영어(囹圄)에 있으니, 고금에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는가? 더욱이 한심스러운 것은 막중한 임금의 명을 몇 달이 지나도 버려 두고 펴지 않은 것이다. 진실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어찌하여 소조(小朝)에 상서하지 않았는가? 또한 어찌하여 장청하지 않고 이제 마침 입시하였다고 아뢰는가? 이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한 탓이다. 민백상은 그 벼슬을 파면하고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파발마(擺撥馬)를 타고 내려가 김복동(金福同)·어인노미(於仁老味)를 오늘 안에 영어에서 석방하여 내보내게 하고 또한 추조(秋曹)로 하여금 배소(配所)를 정하게 하라."
하였다. 그 뒤에 송도의 피살된 사람의 아내가 그 지아비를 위하여 승지 김상복(金相福)이 신퇴(申退)026)  할 때에 말[馬]을 막고 호소하였는데, 김상복이 이것을 말하니, 임금이 은택을 간구하는 것이라 하여 김상복의 벼슬을 갈았다.

 

연신(筵臣)이, 서연관(書筵官)이 아직도 명에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는 대신(臺臣)이 외방(外方)에 있기 때문에 변통할 때에 초선인(抄選人)은 논하지 않았으나, 이제 서연관으로 돈소(敦召)하는데 대직(臺職)을 갈지 않는다면 이것은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문을 닫는 것과 같다. 정성으로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모두 대직을 해면하는 것을 허락하여 원량(元良)을 보도(輔導)하는 길을 열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길주(吉州)의 전패(殿牌)에 변을 일으킨 죄인의 일 때문에 추국(推鞫)하기를 청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길주의 죄인을 본도(本道)에서 장문(狀聞)한 것은 단지 목사(牧使)가 신보(申報)한 것을 등본(謄本)한 것뿐이고 또 《속대전(續大典)》의, ‘금부(禁府)에 옮겨서 설국(設鞫)한다.’는 글을 인용하였는데, 동추(同推)하여 고핵(考覈)하고 친문(親問)하는 등 절차는 행하지 않고서 지레 먼저 장문하였고 또 일이 대벽(大辟)027)  에 관계되면 계(啓)라 해야 할 것인데도 잘못 달(達)이라 하였으며, 또 곧바로 형조(刑曹)에 내려야 할 것인데 형조에서 금부에 옮길 것을 아뢰어 곧바로 금부에 내렸으니, 막중한 옥사(獄事)의 체례가 매우 허술합니다. 병진년028) 충주(忠州) 죄인의 전례에 따라 도신(道臣)이 친문하여 고핵한 뒤에 추고 경차관(推考敬差官)을 내려 보내어 복초(服招)를 받고 격식을 갖추어 법대로 설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신과 판금오(判金吾)029)  는 모두 추고하라. 그 죄인은 추조(秋曹)에서 본도에 압송하여 격식을 갖추어 장문한 뒤에 경차관을 내려 보내어 규례에 따라 복초를 받은 뒤에 거행한 다음 입계(入啓)해야 할 것인데, 소조(小朝)에 주달한 전후의 승지들도 추고하라."
하였다.

 

전 판부사 이종성(李宗城)을 특별히 석방하여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조용히 임금에게 말하기를,
"대신(大臣)을 견벌(譴罰)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대한데, 접때 판부사 이종성은 30년 전의 일로 중간에도 이미 견벌을 받았었고 또 다시 뒤미처 제기하여 중벌을 주기에 이르러서는 신이 간쟁하여 잘 되지 않았었는데, 이제 이미 여러 달이 지났으니 마땅히 은유(恩宥)를 내리셔야 하겠고, 같은 때에 죄받은 두 신하도 거두어 서용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에 이희운(李熙運)의 글 때문에 슬픈 생각이 마음에 차서 그런 처분이 있었으나, 그 뒤에 생각하니 잘못이었다. 접때 전 좌상(左相)을 서용할 때에 아울러 하유(下諭)하려 하였으나 말하지 않은 데에는 뜻이 대개 있었다. 이제 경이 아뢴 것을 들으니, 참으로 옳다. 전 판부사 이종성은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하고, 조관빈(趙觀彬)·홍봉조(洪鳳祚)도 마찬가지로 직첩을 주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전하의 전후에 있었던 지나친 거조는 이루 바로잡을 수 없었는데, 신하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 다시 도로 그만두신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멀지 않아 다시 하시는 것은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는 것만 못하고 또 이례(吏隷)에게 붙여 다스리게 했어야 할 따름인데, 접때 호조의 이례를 대내(大內)에서 치죄(治罪)한 것은 임금의 체모에 어그러지는 듯하므로 신은 그윽이 민망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나, 경의 말이 참으로 옳으니, 유념하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김회원(金會元)의 달사(達辭) 가운데에서 조운규(趙雲逵)에 관한 한 가지 일 밖에는 다 괴이한 일이 아닙니다. 병조 판서는 대정(大政) 뒤에 과연 비방하는 말을 많이 받았으나, 윤리에 어그러졌다는 말을 한 것은 김회원도 그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만(遲晩)이라 한 것이 어찌 괴이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김회원이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무엄하다 하여 지만을 독촉하셨다 하니, 이것도 전하께서 지나치게 하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말을 전한 자가 잘못한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강원도는 전결(田結)이 다른 도에 비하여 가장 적은데, 상정(詳定)의 법이 근래에 매우 문란합니다. 비록 삼폐(蔘弊)로 말하더라도 참으로 관동(關東) 백성이 지탱하기 어려운 걱정거리인데, 상정하여 주는 것은 반값도 못되므로 각 고을에서 어쩔 수 없이 민결(民結)에서 더 거둡니다. 또 전에는 은여결(隱餘結)이 방역(防役)의 한 도움이 되기도 하였는데, 조사하여 찾아낸 뒤에는 관가에서 손을 댈 데가 없어서 백성이 더욱 폐해를 받으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감사 윤득화(尹得和)는 여러 번 방백(方伯)을 지내어 평소부터 익숙하다고 일컬어졌는데, 듣자니 바야흐로 폐단의 근원을 깊이 구명하여 반드시 바로잡아 고치려 한다 합니다마는, 결전(結錢)·삼가(蔘價)에 관한 일은 균역청 당상 신만(申晩)·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소상히 바로잡게 해서 관동 백성의 절박한 폐해를 구제하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홍봉한이 말하기를,
"듣건대, 본도(本道)에서 상정하여 획급(劃給)한 것은 고을마다 모자라서 더 거두게 되는데, 한 결(結)에서 거두는 것이 많으면 수삼십 냥이나 되어 다른 도보다 두 곱 또는 세 곱이라 합니다. 대개 양전(量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까지 감당하였으나 민정(民情)이 참으로 매우 불쌍합니다. 폐해를 구제하는 방도로 말하면 마땅히 위를 더는 정사(政事)를 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를 덜고 아래를 더하는 것이 본디 왕정(王政)인데, 어찌 여기에 얽매이겠는가?"
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천보(李天輔)를 다시 좌의정으로 삼고, 이종성(李宗城)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봉태(封胎)하는 한 가지 일은 원손(元孫) 이외에 대군(大君)·왕자(王子)도 차등을 두어야 한다. 세자(世子)의 여러 중자(衆子)·군주(郡主)·현주(縣主)의 장태(藏胎)에는 안태사(安胎使)를 차출하지 말고 다만 중관(中官)이 관상감(觀象監)의 관원과 함께 묻어 두되 석함(石函)은 쓰지 말 것이며, 석물군(石物軍)에 5명을 쓰고 담여군(擔舁軍)에 2명을 써서 가자(架子)에 담아 유둔(油芚)으로 덮고 돌을 세워 두었다가 봉태하기를 기다려 거행하라. 무릇 장태하는 곳은 번번이 먼 도(道)로 의정(擬定)하여 들이는데, 이 뒤로는 반드시 가까운 도에 정하여 민폐(民弊)를 덜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5일 을해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친림(親臨)하여 인일제(人日製)를 설행하였다. 책제(策題)를 내어 개천을 트는 것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물었는데, 으뜸을 차지한 이담(李潭)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나머지는 각각 분수(分數)를 주었다.

 

3월 27일 정축

윤학동(尹學東)을 부수찬으로, 윤급(尹汲)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무비(武備)는 허술한 것이 매우 많습니다. 신이 도백(道伯)이었을 때에 삭시사(朔試射)를 행하여 자못 보람이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도신에게 신칙하여 호위청(扈衞廳)의 요사법(料射法)에 따라 무사(武士)에게 권과(勸課)하고 사계삭(四季朔)에 근만(勤慢)을 비국(備局)에 신보(申報)하게 하면 반드시 연습을 흥기(興起)시키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월 29일 기묘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서하여 사직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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