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1권, 영조 30년 1754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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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신사

진청(賑廳)의 쌀 2만 곡(斛)을 팔아서 경기 백성의 진자(賑資)에 보태는 것을 허락하고, 파주 목사 신종하(申宗夏)에게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내리고, 고양 군수 이석희(李錫禧)·교하 군수 유언탁(兪彦鐸)을 모두 승서(陞敍)하며, 김포 군수 심영(沈坽)·영평 현령(永平縣令) 이시건(李蓍建)·적성 현감(積城縣監) 이현경(李顯慶)·포천 현감 조명욱(趙明勖)·양천 현감(陽川縣監) 정찬교(鄭纘僑)·개성 경력(開城經歷) 이인호(李仁好)를 모두 체개(遞改)하라고 명하였다. 심휼사(審恤使) 한광조(韓光肇)가 아뢴 바에 따른 것이다.

 

경기좌도 심휼사 조명정(趙明鼎)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불러서 진구(賑救)할 방책을 물었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신이 진구하는 일을 감사(監司)와 아주 상세히 의논하였으나 감사가 신의 구획(區劃)을 듣지 않고, 또 진곡(賑穀)이 너무 많은 것을 어렵게 여겼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감사도 괴이할 것이 없다. 초진(初賑)이 너무 많으면 장차 어떻게 이어 가겠는가?"
하자, 조명정이 말하기를,
"지금은 민사(民事)가 매우 급하니, 곡식을 아낄 때가 아닙니다. 기내(畿內)의 환곡(還穀)은 쌀과 좁쌀이 아주 적은데, 경기우도 심휼사가 이미 아뢴 것이 있다 합니다. 삼남(三南)의 군작미(軍作米)를 1, 2만 석을 한정하고 기영(畿營)에 획급(劃給)하여 좌도·우도를 논할 것 없이 열읍(列邑)에 고루 나누어 주게 하면 참으로 큰 혜택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가 이윽고 진청의 묵은 쌀 2천 석을 땅이 없는 굶주린 백성에게 거저 주고 2만 석을 땅이 있는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조적(糶糴)의 예(例)에 따라 가을이 되거든 도로 받아들이게 하되, 그 중에서 7천 석을 감해 주도록 하라고 고쳐 명하였다. 조명정이 용인(龍仁) 조사도(趙思道)의 옥안(獄案)을 읽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힘쓰는 것은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 것이다. 조사도가 제 지친(至親)의 집 종을 때려 죽인 것도 호강(豪强)한 탓이다.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교외에 나갔는데, 고양 군수가 나인지 모르고 벽제(辟除)하였다. 그때 내가 젊었으므로 성난 김에 그 종을 잡아 끌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망령되었다. 듣자니, 조사도는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의 후예라 하는데, 어찌하여 방자하게 사람을 죽였는가?"
하였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과연 선정의 후예이며 무신년011)  의 흉도(凶徒) 조문보(趙文普)의 종질(從姪)입니다."
하고, 이어서 살려 주려는 논의를 힘껏 주장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문보는 대악(大惡)이다. 내가 그 아제비는 마지못하여 죄주었으나, 그 조카를 어찌 살리지 않겠는가?"
하고, 참작하여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조명정이 말하기를,
"신의 이번 길은 원옥(冤獄)을 심리(審理)하고 굶주린 백성을 어루만져 돌보는 것이 그 직무입니다. 수령(守令)이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리는 것은 지나가는 길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설진(設賑)한 때에 수령이 갈리면 맞이하고 보내는 데에 폐단이 있을 뿐더러, 뒤에 오는 자가 도리어 전 사람보다 더할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서계(書啓)에 포폄(褒貶)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전조(銓曹)에 하교하기를, "특별히 근신(近臣)을 보내어 좌도·우도를 살피게 한 것은 대개 깊은 뜻이 있었는데, 진작 돌아와 아뢰고 또 조리가 있으니, 어찌 시험만 하고 말겠는가? 조명정·한광조(韓光肇)를 방백(方伯)에 검의(檢擬)하여 내가 백성을 위하는 뜻을 나타내라."
하였다.

 

조적명(趙迪命)을 좌윤으로, 오혁(吳)을 전라 병사로, 이의벽(李義璧)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정고(呈告)하여 사직하니, 왕세자가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2월 2일 임오

영의정 김재로가 차자를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2월 3일 계미

전 통제사 정찬술(鄭纘述)·구선행(具善行)을 모두 고신(告身)을 삭탈하였다. 영남 이정사(嶺南釐正使) 민백상(閔百祥)이 그 막비(幕裨)를 검칙(檢飭)하지 못한 잘못을 논하였기 때문이었다.

 

2월 5일 을유

원필규(元弼揆)를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임금이 호남 이정사 이성중(李成中)·영남 이정사 민백상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이성중에게 말하기를,
"호남의 일을 모두 경에게 맡겼으니, 나는 근심할 것이 없다."
하고, 민백상에게 말하기를,
"경의 서계(書啓) 가운데에 있는 법을 범한 수령은 이미 엄히 처치하였으니, 어찌 징계만 있고 권장이 없을 수 있겠는가? 경은 다시 착한 자를 아뢰라."
하매, 민백상이 말하기를,
"창원 부사 정익제(鄭翼濟)는 해세(海稅)에 대하여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조금도 손댄 것이 없고, 거창 부사 남학우(南鶴羽)는 치적(治績)이 한 도(道)의 으뜸입니다."
하니, 임금이 정익제에게 숙마(熟馬)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민백상이 전복을 따는 어려움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섭이중(聶夷中)012)  의 시(詩)에 ‘소반의 음식 알알이 다 고생한 것인 줄 누가 아랴.[誰知盤中食粒粒皆辛苦]’ 하였다. 한 개의 날전복도 포민(浦民)이 고생한 것인데, 최암(崔嵒)이 전복을 가져간 일도 보았고 또 이정사가 아뢴 것을 들었으니, 이때에 어찌 차마 전복을 먹겠는가?"
하고, 이어서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봉진(封進)을 멈추게 하였다. 최암은 영남 고을의 수령으로서 싼값으로 전복을 가져가서 죄받은 자이다.

 

임금이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에게 말하기를,
"왕손(王孫)이 태어난 지 이미 닷새가 되었는데 후궁(後宮)이 낳았다."
하니, 홍봉한이 봉태(封胎)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국법이 없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조명정(趙明鼎)을 승지로, 조운규(趙雲逵)를 대사간으로, 임사하(任師夏)를 집의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변치명(邊致明)·이조망(李朝望)을 지평으로, 남혜로(南惠老)를 헌납으로, 이인원(李仁源)·남태저(南泰著)를 정언으로, 이현중(李顯重)을 수찬으로, 김한철(金漢喆)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2월 6일 병술

왕세자가 좌의정 이천보(李天輔)에게 서유(書諭)하기를,
"대조(大朝)께서 경이 줄곧 외방(外方)에 있으면서 올라올 생각이 없다 하여 나로 하여금 도타이 권면(勸勉)하게 하셨다. 아! 경이 평소에 나라를 위하던 뜨거운 정성으로 비록 안정하기 어려운 꼬투리가 있더라도, 접때 대조께서 상소에 대하여 비답하신 사지(辭旨)가 정중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대조께 날마다 탕제(湯劑)를 올리는 때인데 직분이 보호하는 데에 있으면서 더욱이 이렇게 하여서는 안된다. 또 정승 자리가 갖추어지기는 하였으나 수상(首相)이 잇달아 사직하는 글을 올리고 우상(右相)도 조정에 나올 기약이 없으니, 또한 매우 민망하다. 경은 대조의 성대한 뜻을 몸받고 소자(小子)의 말이 마음 속에서 나온 것을 돌보아 다시는 사양하지 말고 곧 길을 떠나 내가 밤낮으로 바라는 바에 부응하라."
하고, 이어서 승지로 하여금 가서 타이르고 반드시 같이 오게 하였다. 이천보가 전일의 엄한 하교 때문에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다가 곧 또 성을 나갔으므로, 이 서유가 있었다.

 

민택수(閔宅洙)를 사간으로, 정유(鄭楺)를 지평으로, 이게(李垍)를 헌납으로, 조재후(趙載厚)를 정언으로, 조숙(趙)을 교리로 삼았다.

 

2월 7일 정해

임금이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하였다. 수위관(守衞官)에게 명하여 나무를 심게 하고 그 근만(勤慢)을 상고한 다음 비로소 승륙(陞六) 천전(遷轉)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사복 정(司僕正) 황합(黃柙)이 병으로 배가(陪駕)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가 감히 명관(名官)인 까닭으로 나에게 교만한가? 또 그가 진편 차비(進鞭差備)로서 누워서 오지 않았으니, 이런 무리에게는 군율(軍律)을 시행해야 마땅하다. 잡아들여 결곤(決棍)하라."
하였다. 시종신(侍從臣)이 곤장을 맞는 것은 황합에서 비롯하였다.

 

임금이 회가(回駕)할 때에 하교하기를,
"삼문(三門) 밖의 옛 경상(卿相)의 집이 이제 다 파괴되어 혹 섶으로 문짝을 만든 것도 있으니, 내가 매우 슬프다.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이 일찍이 이 일을 말하였고, 고 판서 조상경(趙尙絅)도 말하기를, ‘그 할아비가 한 일을 그 손자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착한 사람의 말이다. 이를테면 물이 오래 막히면 반드시 터지는 것과 같으니, 어찌 조금 새게 하여 터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 하겠는가? 전조(銓曹)로 하여금 특별히 거두어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남인(南人)이 형세가 기울어서 삼문 밖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 아버지의 원통한 일을 호소하는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아비의 원통한 일을 하소연하더라도 창가에서 외치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 호소하는 것을 일찍이 엄히 금하였는데, 오늘 신필해(申弼海)의 아들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는가? 이것을 엄히 징계하지 않으면 장차 연(輦)을 막고 원통한 일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하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엄중히 벌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2월 8일 무자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상익(金尙翼)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경기좌도 심휼사가 도내(道內)의 분진(分賑)하는 일 때문에 논주(論奏)한 것이 많이 있는데, 경기 백성을 구제하지 못할세라 매우 염려하여 신을 위해 대신 괴로워하였다 합니다. 가령 신이 면대하여 아뢰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마는, 그 한두 가지 논열한 것은 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졸(迂拙)한 소견에는 전혀 살릴 방법이 없어서 늘 생각하기를 흉년에 진구(賑救)를 의논하는 것은 폐기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근래 백급(白給)이라는 명색이 거의 제한이 없으니, 해마다 이어 가기 어려울 걱정이 있을 뿐더러 은혜가 다하면 업신여기게 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재해를 입은 상황을 깊이 헤아리고 굶주린 사람을 정밀히 뽑아 덜 급한 자는 조곡(糶穀)을 주고 급한 자는 진곡(賑穀)을 주어 분배하고 살릴 방법을 세워 쇠약하고 수척하지 않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신이 수령을 엄히 경계하여 정밀히 뽑는 데에 힘쓰게 한 것은 신의 어리석은 소견이 마침 그러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듣건대, 진청(賑廳)의 쌀 3만 석을 받아 낸 뒤에 반은 각 고을에 나누어 주고 반은 아직 구획(區劃)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당초에 국가에서 진미(賑米)를 획급(劃給)한 것은 1만 석에 지나지 않는데, 가장 심한 곳과 그 다음으로 심한 곳을 물론하고 여섯 역(驛)과 다섯 진(鎭)에 그 크고 작음에 따라 참작하여 나누었고, 남은 것은 1천여 석이 있을 뿐인데 봄 순행(巡行) 때가 되거든 친히 살펴서 더 나누어 주려 합니다. 대개 입본(立本)하고 전매(轉賣)하는 사이에도 허다히 견제하는 꼬투리가 없지 않으므로 각 고을에서 이것을 어렵게 여겨 아직 받아 낸 것이 없는 것이고, 진곡을 한꺼번에 나누어 주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신이 비록 쓰기를 아까워할지라도 어찌 차마 굶주린 백성의 입 안의 물건을 계교하여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오직 그 피재(被災)에는 천심(淺深)이 있고 설진(設賑)에는 완급(緩急)이 있으므로 경중(輕重)과 활협(闊狹)에도 절로 한 권형(權衡)이 있으니, 이것으로 신을 흠잡는 것은 그 본의를 잘 모르겠습니다. ‘조절미(租折米)가 거의 무실(無實)하다.’ 한 것으로 말하면 이것은 실로 지난 가을 새로 받아들인 것이 정실(精實)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고, 6두(斗)의 절미(折米)는 불변의 항식(恒式)에 관계되니, 마음대로 가감하는 것은 뒷 폐단에 관계됩니다. 장(壯)·노(老)·약(弱)의 수를 헤아려 진곡을 나누어 주는 데에도 전부터 내려오는 진법(賑法)이 있는데, 더 주는 길을 한번 열면 뒤에 반드시 관례가 될 것입니다. 조금 해가 길어질 때를 기다려서 임시 방편으로 합당한 정사(政事)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신의 본의가 대개 절로 이러하였습니다."
하였다. 조명정(趙明鼎)도 상서하기를,
"지금 김상익의 서본(書本)을 보니 신이 접때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을 끌어대어 안정하기 어려운 꼬투리로 삼았는데, 신은 참으로 의혹합니다. 신이 봉명(奉命)한 날에 곧 도신(道臣)을 보고 진곡에 관하여 말이 미치자, 도신이 ‘국가에서 획급한 피곡(皮穀)이 3만 석인데 이미 나누어 준 것은 1만 3천 석이니 남은 것이 아직 1만 7천 석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다시는 진곡을 염려하지 않았는데, 여러 고을을 잇달아 다니게 되어서는 도로에서 부르짖는 굶주린 백성이 태반은 진곡을 나누어 준 가운데에 들지 않아서 아침저녁 사이에 또한 죽게 된 것을 직접 보고 번번이 수령을 대하여 그 까닭을 힐문하면, ‘순영(巡營)에서 나누어 준 곡식은 수백 석뿐이므로 굶주린 사람을 뽑은 숫자에 이것으로 한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들어가야 할 것인데 빠진 자가 절로 많아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미 굶주린 백성을 돌보는 것을 직책으로 삼았으니 차마 남의 고난처럼 볼 수 없으므로 과연 진곡을 더 획급하라는 뜻으로 논하여 도신에게 글을 보내고 서계(書啓)에 여쭈었는데, 지금 잘못 끌어댄 것이 이러합니다. 대개 도신의 근심은 해마다 이어가기 어렵다는 데에 있는데 신은 혹 당장 쇠약하고 수척할 것을 염려한 것이며, 도신의 생각은 깊이 헤아리고 천천히 의논하려는 데에 있는데 신은 망령되게 그 늦어서 미치지 못할 것을 근심한 것이니, 이처럼 사람의 소견이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절미에는 절로 정법(定法)이 있다는 것으로 말하면 과연 도신의 말과 같습니다. 신도 어찌 전혀 몰라서 설진(設賑)이라 이름하면서 반이 넘는 빈 껍데기의 피곡(皮穀)으로 수십 만에 가까운 굶주린 백성을 살리려 하겠습니까? 아마도 이러한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11일 신묘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새로 탄생한 왕손(王孫)은 태(胎)를 묻는 절차가 있어야 할 듯한데 의거할 만한 전례(前例)가 없으니, 왕자(王子)의 예(例)에 따라 태(胎)를 묻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러한 전례가 있어서 초기(草記)를 하였는가?"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대조(大朝)께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선지(璿枝)013)  가 번창하지 않아서 나라에 번위(藩衞)가 적은 것을 적이 근심하였었는데, 일전에 왕손이 탄생하였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쁘게 여겼었고 신의 벼슬이 운관(雲觀)014)  을 겸하여서 태(胎)를 묻는 일을 계품(啓稟)한 바가 있었습니다. 아까 또 듣건대, 이에 앞서 거적을 거둬 태를 묻는 일을 거행하지 말라는 명이 이미 있었다 하는데, 운관의 계청(啓請)에 대하여 여러 날 동안 기다려도 아직까지 비답하여 내리지 않으시니, 삼가 생각건대, 성의(聖意)는 그대로 버려두고 답하지 않으려 하시는 듯합니다. 대군(大君)·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는 다 태봉(胎封)이 있는 것은 고례(古禮)가 그러합니다. 왕손은 마침 전례가 없기는 하나 동궁(東宮)이 낳은 왕손은 사저(私邸)에서 태어난 왕손들과 사체가 절로 다르니, 신은 이번 왕손의 태를 묻는 일을 분명히 명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아뢴 것은 본감(本監)에 하교하였다."
하였다.

 

2월 11일 신묘

황해 감사 박상덕(朴相德)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말하고 싶은 것을 물었다. 박상덕이 본도(本道)의 진곡(賑穀)이 적은 것이 민망하다 하면서 더 획급(劃給)하여 진곡에 보태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백성을 위하는 것을 어찌 아끼겠는가? 부임하여 헤아려서 장청(狀請)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3일 계사

좌의정 이천보(李天輔)를 삭출(削黜)하라고 명하였다. 당초 임금이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할 때에 승지를 보내어 이천보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삼다(蔘茶)를 들다가 몸소 가려는 생각을 하였다. 벼슬이 보상(輔相) 자리에 있고 또 약원(藥院)을 겸하였으면서 오히려 성 밖에 있으니, 이제 몸소 도타이 권면하는 수밖에 무엇을 하겠는가? 내 원량(元良)에게 일러 반드시 경(卿)을 데려오게 하였으나 이제 닷새가 되어도 이처럼 소식이 없으니, 나라를 위하여 민망스럽다. 억지로 겨우 하유하니, 경은 번연(幡然)히 마음을 돌려 내가 만년에 겨우 하유하는 것에 따르라."
하니, 이천보가 사직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제 신이 지키는 것은 자신의 염우(廉隅)를 위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거취를 중히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접때 엄한 하교를 받은 것은 참으로 윤리와 의리에 관계되니, 신하로서 혹 이렇게까지 크게 어그러져도 자처(自處)할 줄 모른다면 임금과 신하 사이의 큰 의리가 남김없이 죄다 무너질 것인데, 어찌 대성인(大聖人)이 표준을 세워 세상을 격려하는 정치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몸소 행한다는 하교를 하였는데도 상신(相臣)이 예사로 듣고 있다. 이제 거둥 준비를 시킨 때를 당하여 내 허물을 알게 하였으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몸소 상신에게 가는 고례(古例)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이천보가 크게 두려워하여 성 밖으로부터 들어와 금오문(金吾門) 안에 나아가 엎드려 관(冠)을 벗고 거적을 깔고서 대명(待命)하였다. 임금이 비국 당상 홍봉한(洪鳳漢) 등을 불러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나에게 유감을 품었다. 그때 지나친 하교가 있었더라도 대신이 끝내 마음을 풀지 않고, 거둥 준비를 시켰다는 하교가 있어도 응연(凝然)히 움직이지 않으니, 청구(靑丘)의 신분(臣分)이 땅을 쓴듯이 없어졌다. 한률(漢律)이 있거니와, 우선 삭출하는 법을 시행하여 뭇 신하로 하여금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 의리를 알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재호(趙載浩)를 약방 도제조로 삼았다.

 

임금이 지부(地部)에 두 은궤(銀櫃)를 내하(內下)하여 경비에 보태게 하였다.

 

임금이 수찰(手札)로 영의정 김재로에게 하유하기를,
"임금이 육순(六旬)이 넘고 정승도 나이가 칠질(七耋)이 넘었으니, 노쇠한 나로서 어찌 차마 경에게 권면(勸勉)할 수 있으랴마는, 오늘날의 나라 일이 노 없는 배와 같으니, 이때에 노성(老成)한 사람을 더욱이 의지해야 하겠다. 나라의 일이 조금 안정되면 내가 마땅히 경의 뜻을 따를 것인데, 어찌 차마 경을 속이겠는가? 조금 헤아리라."
하고, 또 수찰로 우의정 조재호에게 하유하기를,
"경을 제배(除拜)하여 정승으로 삼은 것이 어찌 내가 좋아서 한 것이겠는가? 효부(孝婦)의 혼령이 반드시 조심할 것이고 경의 아버지가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고 경의 숙부가 반드시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뜻은 참으로 나라를 위한 것이니, 지금은 경이 선경(先卿)을 이어 도(道)를 행할 때이다. 경은 당일로 함께 와서 오늘의 뜻에 따르라."
하였다.

 

임금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균역청의 일을 마음에서 잊을 수 없다. 전 황해 감사 이태중(李台重)의 장달(狀達)을 경들은 가지고 들어왔는가?"
하였다. 우참찬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해백(海伯)의 장달을 미처 가지고 들어오지는 못하였으나, 신이 아뢰겠습니다. 장달 가운데에 논한 것은 대개 여섯 고을의 공용(公用)은 일찍이 은결(隱結)에 힘입었었는데 한 번 조사하여 찾아낸 뒤부터는 모두 모양을 이루지 못한다 하면서 국가로부터 진념할 것을 청한 것입니다마는, 은결이라 이름하고 이미 조사하여 도로 주는 것은 사체가 구차합니다. 관서(關西)의 전정(田政)으로 말하면 이미 상납(上納)이 없으므로 다른 도와 다르니, 본디 끌어대어 예(例)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관서 각 고을에 준 은결의 수를 다시 살폈더니 대단히 고르지 않습니다. 같은 영하(營下)인데 평양(平壤)에 획급(劃給)한 것은 거의 7백 결(結)에 가깝고 안주(安州)에 획급한 것은 1백 결에 차지 못하며, 같은 강변(江邊)인데 이산(理山)에 획급한 것은 또 7백 결이 넘고 삭주(朔州)·창성(昌城)은 두어 결일 뿐이니, 그 밖의 여러 고을이 고르지 않은 것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국가에서 처음부터 획급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으나, 이미 획급한 뒤에 어찌 이처럼 고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해서(海西)의 여러 고을에 이미 편의에 따라 획급해야 한다면, 관서의 여러 고을에 획급한 결도 많은 것을 덜고 적은 것을 보태어 고루 베푸는 방도로 삼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좌참찬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신이 균역청 당상이었을 때에 ‘관서 각 고을의 은결을 전부 찾아내어 균역청에 붙이면 관서 각 고을이 장차 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이므로 참작하여 내어 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로 아뢴 바가 있었는데, 이미 은결이라 하고 여러 고을에 도로 주는 것은 사체를 매우 손상한다 하여 특별히 균역청으로 하여금 세수미(稅收米)로 작정(酌定)하여 바꾸어 주게 하셨습니다. 그 뒤에 또 주관 당상(主管堂上)이 여쭌 바에 따라 본도(本道)의 은결을 도로 획급하였다 하는데, 그 고르지 못한 폐단은 참으로 중신(重臣)의 말과 같습니다. 또 해서의 직로(直路)는 책응(責應)이 번거롭기가 관서와 다를 것이 없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금천(金川)·평산(平山) 두 고을은 한번 은결을 조사해 찾아낸 뒤부터 조폐(凋弊)가 더욱 심하여 거의 지탱할 수 없다 하니, 늦추고 당기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그러나 만일 은여결(隱餘結)을 여러 고을에 도로 주는 것이 미안하다면 한결같이 관서의 당초에 처분한 예를 따라 본고을의 상정미(詳定米)로 바꾸어 주어도 무방할 듯합니다마는, 그 획급할 때에 반드시 잔폐하고 풍성한 것을 참작하여 가감하는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이름을 바루어야 할 것이다. 해서에 상정미를 준다면 관서도 이 예에 따를 것인가?"
하자, 홍봉한이 말하기를,
"관서는 세수미로 구획(區劃)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고, 조영국이 말하기를,
"해서의 상정미는 이미 혜청(惠廳)에서 맡은 것이었는데, 균역청과 혜청이 합하여 한 청이 되었으니, 그 급대(給代)해야 할 것인지도 절로 헤아려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관서의 세수미로 말하면 이것이 저축하는 군향(軍餉)에 관계되는데, 만일 해마다 여러 고을에 획급하면 줄어들 것이 염려스러우니, 변방(邊方)의 저축을 중시하는 도리로서는 은여결로 바꾸어 그 수량을 채우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관서는 세수미로, 해서는 상정미로 갈음하여 주되, 이제 듣건대 관서는 고르지 않은 폐단이 있다 하니, 다시 본도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서 계문(啓聞)하게 하라."
하였다.

 

2월 14일 갑오

윤태연(尹泰淵)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윤태연은 무변(武弁) 가운데에서 가장 교만하고 간사하기로 세상에 이름났다.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이 윤태연을 당하 천총(堂下千摠)으로 삼으니, 이것은 극선(極選)이었는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매우 그르게 여기자, 김성응이 박문수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영돈녕 조현명(趙顯命)이 일찍이 청한 것이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영돈녕의 말을 들으면 본디 그런 청이 없었다 하는데, 이것은 윤태연이 대신의 말을 만들어 내어 스스로 한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연중(筵中)에서도 극언(極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특지(特旨)로 승지를 제수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서연(書筵)과 소대(召對)는 이미 정당(正堂)이 있으니, 어찌 와내(臥內)에서 행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소대를 보니, 와내에서 행하고 서연도 와내에서 행한다 한다. 자신이 춘방(春坊)의 보도(輔導)하는 신하가 되어 권면(勸勉)하고 경계할 줄 모르니, 이러한 요속(僚屬)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시강원(侍講院)의 관원(官員)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라."
하였다.

 

2월 15일 을미

한광조(韓光肇)를 승지로, 김상구(金尙耉)를 대사간으로, 권항(權抗)을 헌납으로, 이게(李垍)를 검상(檢詳)으로, 권상일(權相一)을 우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경기 도과(京畿道科)를 설행(設行)하여 문과에 이빈(李贇) 등 7인과 무과에 민성중(閔聖中) 등 38인을 뽑았다. 임금이 올해는 성조(聖祖)가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지 여섯 번째 회갑(回甲)이 되는 해라 하여 특별히 과거를 설행해 경기를 위로하여 기쁘게 하고 겸하여 한성(漢城) 사람이 과거보는 것도 허락하였다.

 

임금이 책을 끼고 수종(隨從)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엄하게 하도록 신칙(申飭)하여도 범하는 자가 많으므로, 발각된 자는 5년 동안 정거(停擧)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엄하게 하는 것으로는 과장(科場)만한 것이 없는데,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임금이 신칙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가르치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는다. 아! 진신(搢紳)은 자제를 엄히 경계하여 나라의 금령(禁令)을 범하지 말게 하라. 아! 장보(章甫)는 이제부터 글을 읽고 임시하여 책을 구하지 말라."
하였다.

 

문과에 뽑힌 이방린(李芳隣)이 남의 손을 빌어 제술(製述)하였기 때문에 방목(榜目)에서 빼냈다. 이방린은 안성(安城) 사람인데, 창명(唱名)한 뒤에 임금이 제술한 것을 외라고 명하였으나 이방린이 한 구절도 외지 못하였고, 또 시권(試券)을 읽으라고 명하였는데 이방린이 미미(亹亹)를 첩첩(疊疊)이라고 읽었다. 승지 홍낙성(洪樂性)이 말하기를,
"이방린은 미미를 몰라서 첩첩이라 읽었으니, 학문이 없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과장을 엄하게 하는 도리로서는 결코 급제를 내릴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도과(道科)가 비록 위로하여 기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과장은 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그 말을 따르고 또 10년 동안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박필수(朴弼燧)는 박태보(朴泰輔)의 조카로서 이번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임금이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여 말하기를,
"올해는 우리 성후(聖后)께서 복위(復位)하신 해인데 네가 충신(忠臣) 박태보의 조카로서 방목에 들었으니, 내가 네 숙부를 생각하면 한층 더 슬프게 느껴진다."
하고, 6품 벼슬에 올리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임금이 작은 일로 인하여 병방 승지(兵房承旨) 윤태연(尹泰淵)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우참찬 홍봉한이 그 지나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승지가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은 무신(武臣)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는데, 옷이 근밀(近密)의 조복(朝服)이므로 융복(戎服)을 입고 잡혀 오게 하였다. 이제 경이 윤태연은 무신이기는 하나 벼슬이 근밀에 있다고 말한 것을 듣고 내가 잘못을 깨달았다. 특별히 어영 대장에게 숙마(熟馬) 한 필을 내리고 우리 원량(元良)도 내 지나친 일을 알게 하라."
하였다.

 

2월 19일 기해

고 판서 김유경(金有慶)에게 효정(孝貞)이라는 시호(諡號)를, 고 우의정 정우량(鄭羽良)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시법(諡法)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이러하였다.

 

2월 20일 경자

김상로(金尙魯)를 약방 도제조로 삼았다.

 

2월 21일 신축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상직(相職)에서 해면(解免)되기를 바라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나와 함께 조제(調劑)하는 대신(大臣)으로서 조정에 있는 자가 몇 사람인가? 경이 임금을 섬기는 본말(本末)을 가정(家庭)에서 받았다는 것은 나만 알 뿐이 아니라 나라 사람이 믿는 바이다. 누워서 기다리니 반드시 이 뜻을 본받아야 한다."
하였다.

 

2월 22일 임인

하교하기를,
"황단(皇壇)에서 친제(親祭)할 때에는 남유문(南壝門) 밖에서 행하고 망위례(望位禮)만을 행할 때에는 유문(壝門)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의조(儀曹)로 하여금 알게 하라."
하였다.

 

2월 24일 갑진

전 가주서(假注書) 송영(宋鍈)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간직하여 둔 황조(皇朝)에서 내린 등(燈)과 준(樽)을 가지고 입시(入侍)하게 하였는데, 그 아버지 송양필(宋良弼)이 가지고 들어오니, 임금이 등준명(燈樽銘)을 친히 짓고 이어서 전조(銓曹)로 하여금 송양필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대개 송영의 칠대조인 송석범(宋碩範)이 수로(水路)로 세 번째 경사(京師)에 갔을 때에 마침 상원절(上元節)이었는데 숭정 황제(崇禎皇帝)015)  가 옥등(玉燈)과 주준(酒樽)을 내렸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 중에 이 일을 말한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기이하게 여기고 드디어 가져다가 친히 보았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동궁(東宮)의 서연(書筵)에 임하(林下)의 선비를 불러오면 반드시 도움이 많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금 원량(元良)을 보도(輔導)하는 데에는 글을 읽는 선비만한 자가 없다. 더구나 청정(聽政)한 뒤로는 사체가 더욱 중대하니, 경연관(經筵官)의 예(例)에 따라 이조(吏曹)로 하여금 초선(抄選)된 자 가운데에서 바야흐로 춘방 요속(春坊僚屬)의 벼슬을 띤 자 이외에 서연관(書筵官)이라 이름하여 계하(啓下)받게 하고, 바야흐로 요속의 벼슬을 띤 자도 아울러 정원(政院)에서 조사(措辭)하여 하유(下諭)하라. 아! 선비는 어려서 배우고 장년이 되어 행하는 것이다. 이번의 이 일은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원량을 위하는 것이니, 자신이 임하에 있더라도 대대로 녹을 먹은 신하인데, 어찌 만년의 근간(懃懇)한 마음을 본받지 않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세자(世子)의 사부(師傅)·빈객(賓客)의 직임을 설치한 것은 뜻이 깊다. 예전에 경묘(景廟)께서 동궁에 계시면서 청정하실 때에는 빈객으로서 강석(講席)에 출입하는 자가 많았는데, 이제는 강석에 들어가지 않을 뿐이 아니라 상견례(相見禮)도 아울러 폐기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강석을 중시하는 뜻이겠는가? 고례(古禮)를 무너뜨린 것이 크다. 아! 원량은 바로 더욱더 보도해야 할 때이다. 청정은 청정대로 강연(講筵)은 강연대로, 청정할 때에는 군신(君臣)의 예절이 있고 강연 때에는 빈객의 의리가 있는데, 이것을 당한 자가 무슨 감히 못할 것이 있으랴마는 근래의 관례가 되어 이름만 띠었을 뿐이니, 이렇게 하여 마지 않으면 동궁이 청정할 때에는 빈객을 감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근일 상견례를 행하지 않은 빈객들을 모두 중추(重推)하고, 이 뒤로 서연에 번갈아 입대(入對)하여 감히 빠지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5일 을사

임금이 이조 판서 신만(申晩)과 병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에게 명하여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행하게 하였다. 민우수(閔遇洙)·신경(申暻)·김원행(金元行)·송능상(宋能相)·송명흠(宋明欽)·최재흥(崔載興)을 시강원 서연관(侍講院書筵官)으로, 조명정(趙明鼎)을 충청도 관찰사로, 채제공(蔡濟恭)·이득종(李得宗)을 부교리로, 이창의(李昌誼)를 판의금으로, 송능상을 집의로, 정상순(鄭尙淳)을 정언으로, 이익원(李翼元)을 장령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대사성으로, 권혁(權爀)을 부제학으로, 성천주(成天柱)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전조(銓曹)에 하교하기를,
"향천인(鄕薦人)을 녹용(錄用)하도록 정사(政事) 때마다 신칙하였으나 한낱 휴지(休紙)가 되었다. 일찍이 영동 어사(嶺東御史)가 아뢴 바에 따라 권서동(權瑞東)이 재주가 있어도 침체되어 있는 줄 알았으니, 권서동처럼 궁벽한 시골에서 늙는 자가 몇 사람인지 모를 것이다. 초천(抄薦)하는 법이 분명히 《속대전(續大典)》에 실려 있으니, 천거하지 않는 도신(道臣)은 본디 그르나 그 근본은 또한 전조에 있다. 오늘 정사 때에 찾아서 조용(調用)하라."
하였다.

 

2월 29일 기유

이철보(李喆輔)를 도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정원(政院)에 하령(下令)하기를,
"이런 때에 산림(山林)의 숙덕(宿德)한 선비를 불러오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더구나 대조(大朝)께서 강연(講筵)을 잇달아 신칙하시는 때이겠는가? 본원(本院)에서는 반드시 이 뜻을 본받아 조사(措辭)하여 하유하라."
하였다.

 

2월 30일 경술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빈양문(賓陽門)을 나와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서 황단(皇壇)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단소(壇所)에 나아가 망위례(望位禮)를 행한 다음 생기(牲器)를 살피고 신위(神位)를 봉심(奉審)하였으며, 이어서 재전(齋殿)에 나아가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대내(大內)로 돌아갔다. 3월 초길(初吉)에는 황단의 향사(享祀)가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친향(親享)하려 하였으나 성후(聖候)가 편찮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섭행(攝行)하기를 힘껏 청하였으므로 망위례만을 행하였다.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세 황제를 아울러 배향(配享)한 뒤에 두 번 친제(親祭)를 행하였는데, 이 뒤로는 친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부복(俯伏)하여 눈물을 흘리고 하교하기를,
"회갑(回甲)이 된 만년에 황단의 향사를 몸소 행하려 하였으나 우연히 한질(寒疾)에 걸려 망위례만을 행하였으니, 저 창오(蒼梧)를 우러러보고 어떻게 회포를 풀겠는가? 올해에는 삼황(三皇)의 즉조일(卽阼日)과 기신일(忌辰日)에 어원(御苑)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여 이 정성을 조금 펴겠으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알게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재전에 오래 있었다 하여 대내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서계(誓戒)할 때에 목욕하고 오늘 또 목욕하였는데, 기운이 이처럼 활발한 것은 모두 우리 황제가 내려 준 것 아님이 없다. 이 재소(齋所)에 머물러 종고(鐘鼓) 소리를 들으니, 비록 친제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마음이 조금 위안될 만하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황단의 축문(祝文)을 읽게 하고, 하교하기를,
"향례(享禮)에는 폐(幣)를 중히 여기는데 여기에는 생례 서품(牲醴庶品)이라고 썼으니, 비록 유례(謬例)가 어느 때에 비롯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대제(大祭)의 축식(祝式)에 따라 생폐 예제(牲幣醴齊)라고 고쳐 쓰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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