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1권, 영조 30년 1754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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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경진

홍문 제학 남유용(南有容)이 상서하기를,
"신이 접때 상서한 것은 참으로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때 문임(文任)인 신하가 동벽(東壁)030)  으로서 권점(圈點)에 참여한 사람과 정원(政院)의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수작하였으니, 이것은 사실(私室)의 담화와는 사면(事面)이 매우 다르므로 아래에서 임시 편의에 따라 처치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예전부터 권천(圈薦)하는 일은 더욱이 격례(格例)를 중히 여겼다. 대저 두 번 들어가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데 세 번 들어가는 것을 누가 막겠으며, 뒤미처 권점하는 것을 할 수 있는데 거듭 권점하는 것을 어찌 징계하겠는가? 그 뜻은 완권(完圈)하려는 데에 있기는 하나 그 조짐은 반드시 유폐(流弊)가 될 것이니, 반드시 한 번 아뢰어서 교정(矯正)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신이 들은 바를 대략 아뢰었는데, 일찍이 지난 일을 뒤미처 제기하는 것이 번독(煩瀆)하는 것인 줄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4월 3일 임오

대사간 박필균(朴弼均)이 상서하기를,
"저하(邸下)께서 자주 강관(講官)을 만나 경사(經史)를 토론하시므로 예학(睿學)이 날로 진취합니다마는, 한 번 서연(書筵)을 파하면 좌우에 환관(宦官)·궁첩(宮妾)이 있을 뿐이니, 보시는 것이 어떤 글이며 들으시는 것이 어떤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른바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만날 때는 적고 환관·궁첩을 가까이할 때는 많다는 것이니, 어떻게 학문을 진취시키고 덕을 닦겠습니까? 성경(聖經)·현전(賢傳)은 모두 제왕(帝王)의 사범(師範)이 되는 것으로, 《중용(中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에는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 갖추 실려 있으니, 저하 앞에서 진강(進講)하였더라도 서연을 파하고 한가이 계실 때에 반복해 깊이 생각하여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가 되지 말고, 때때로 또 전사(前史)를 펴 보아 치란(治亂)의 자취를 깊이 살펴서 감계(監戒)의 밑거리로 삼으소서. 국가의 성쇠(盛衰)는 언로(言路)의 개폐(開閉)에 달려 있는데, 근래 모두 입을 다물고 감히 한마디 말도 아뢰지 못하면서 오직 갈리려고 꾀하는 것을 일삼으므로, 전관(銓官)은 개정(開政)하기에 지치고 대조(大朝)께서는 하비(下批)하시기에 노고하시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세도(世道)가 날로 쇠퇴하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은데, 어찌 한 가지 정사에 관해서도 말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마는, 한 사람도 저하를 위하여 진언(進言)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신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꺼리지 않고 직언(直言)할 문을 크게 열어 와서 간언(諫言)할 길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십수 년 이래 사습(士習)이 점점 더 나빠져서 일찍이 한 권의 글도 읽은 적이 없는데 문득 등과(登科)하려는 마음을 일으켜 글 잘하는 자를 널리 구하여 과정(科場) 안에 데리고 들어가 대신 글을 짓게 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등과하게 되면 차례로 핑계 대고 옮겨서 청관(淸官)·화직(華職)에 통하는 것을 조금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아! 이들은 처음 출발할 때부터 그 마음이 이미 바르지 않았으니, 어찌 곧은 도리로 임금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는 으레 인정(人定)으로 한시(限時)하는데, 오후에도 책문(策文)을 죄다 바치기도 하고 또 오시(午時)에도 시권(試券)을 바친다는 말을 들은 듯하니, 어찌 그 재주가 이처럼 신속합니까? 혹 말하기를, ‘글 잘하는 자 너댓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상단(上段)·하단(下段)을 나누어 지어 합하여 써서 바친다.’ 하는데, 과연 이러하다면 그 마음이 교악(巧惡)한 것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 시골의 무식한 무리가 서로 본받아 ‘어(魚)’ 자와 ‘노(魯)’ 자를 가리지 못하는 무리도 앞다투어 과거에 임하여 글귀를 얻어서 시권을 바치면 요행히 뽑히는데, 조윤옥(趙潤玉)·이방린(李芳隣)의 일을 보면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근년에 신의(申嶷) 등을 귀양보내기는 하였으나 그 뒤에도 남의 손을 빌어 글을 짓는 폐단을 조금도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감시(監試)의 회시(會試)는 이틀 뒤에 있으므로 갑자기 변통하기 어려우나, 대과(大科)의 회시는 기일이 아직 머니, 신은 한결같이 명나라에서 선비를 시험하는 방법에 따라 가가(假家)를 만들어 거자(擧子)를 각각 한 칸에 있게 하고 또한 군졸 한 사람이 칸마다 지키게 하여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며, 시권을 바칠 때에도 군졸을 시켜 바치게 하되, 금란관(禁亂官)을 극진히 선택하여 거자가 서로 통하는 것을 살펴서 시소(試所)에 고하게 해 초기(草記)하여 논죄(論罪)하고, 금란관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드러난 자가 있으면 과장에서 사정을 쓴 율(律)을 시행하여야만 거의 혹 남의 손을 빌어 글을 짓는 폐단을 조금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시(初試)에서는 이 법을 시행할 수 없더라도, 회시와 전시(殿試)로 말하면 거자의 수가 적고 수백 칸의 가가는 만들기 어렵지 않으니, 또한 빨리 유사(有司)로 하여금 일찍 거행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 오늘의 선비는 뒷날의 시종(侍從)과 경상(卿相)입니다. 선비일 때에 이처럼 부귀를 다툰다면 등과한 뒤에 지위를 잃을세라 근심하는 마음은 알 만할 것입니다. 염치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허위가 버릇이 되어, 기강이 이 때문에 퇴폐해지고 습속(習俗)이 이 때문에 경박해져서 온갖 폐단이 모두 생기고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어 참으로 위망(危亡)의 조짐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가만히 마음 아파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아뢴 것은 깊이 생각하겠다. 과거의 폐단에 관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듣고 하교하기를,
"근래 고요한 가운데에서 미원(薇垣)031)  의 장이 과거의 폐단 때문에 상서하였는데, 아직 원서(元書)를 보지는 못하였으나, 그 대개를 들으니 오늘의 청금(靑衿)032)  의 정수리에 일침(一針)을 놓은 것이라 하겠다. 사람들이 다 돌아보며 말하지 않는데 흰머리의 늙은 신하가 능히 말하였으니, 특별히 호피(虎皮)를 내려 칭찬하는 뜻을 보이라. 오늘날 교목 세신(喬木世臣)이 자제에게 가르치는 것은 당습(黨習)에 지나지 않아서 바르지 못한 버릇을 금할 수 없는데, 한번 과거에 급제하면 화직을 두루 지내니, 참으로 개탄하고 마음 아플 만하다. 그러나 만약 가가를 설치한다면 화살을 따라 과녁을 세우는 것과 거의 같아서 한 가지 폐단을 없애려다가 또 한 가지 폐단을 일으킬 것이니, 내 생각에는 예전대로 하고 신칙하는 것만 못하겠다. 시관(試官)으로 하여금 과제(科制)를 엄히 밝히게 하고 제술(製述)에서 입격한 사람으로 전시(殿試)에서 시문(詩文)을 지어 내지 못하는 자는 한권(翰圈)·홍록(弘錄)을 한계로 하여 통하는 것을 막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4월 4일 계미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하남 도정(河南都正) 이준(李埈)은 저자의 왕래하는 길에서 까닭 없이 저자 백성에게 탈을 잡아 그가 데리고 다니는 하인으로 하여금 번번이 잡아가서 제멋대로 침학(侵虐)하여 뇌물을 받고서야 놓아 주곤 하다가 저자 백성이 일제히 본시(本寺)에 하소하는 일까지 있으므로 조금 금단하였더니, 종학(宗學)의 고강(考講) 때에 공청(公廳)에 와서 매우 방자하게 능욕하였습니다. 제조(提調)는 강원(講員)에 대하여 체모가 매우 엄한데, 그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청컨대 하남 도정 준을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5일 갑신

간원 【정언 정술조(鄭述祚)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근래 대각(臺閣)은 부드러운 것이 풍습을 이루었으나, 지평(持平) 김회원(金會元)은 말이 적절한 것이 많고 뜻은 바로잡으려는 데에서 나왔는데, 처분이 너무 엄하고 견벌(譴罰)이 지극히 무거웠습니다. 대저 대간(臺諫)이 한 중신(重臣)을 논한 것이 무슨 큰일입니까? 더구나 중신이 본디 일컬을 만한 재지(才智)와 명망이 없고 또 정사(政事)의 주의(注擬)가 어그러진 것이 많았으므로, 대달(臺達)이 나온 데에서 공론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뚜렷이 칭찬을 보여서 꺼리지 않고 직언(直言)할 길을 열어 주어야 할 일이고 지나치게 꺾어서 진언(進言)할 길을 막아서는 안될 것이니, 청컨대 대조(大朝)께 앙품(仰稟)하여 전 지평 김회원을 개정(改正)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강릉 부사 이지억(李之億)은 별로 재지도 공로도 없이 가주서(假注書)로서 승륙(陞六)하였는데 백부(柏府)033)  와 은대(銀臺)034)  의 제수(除授)가 한나절 안에 거듭 내렸으므로, 진용(進用)에 차서가 없어 명기(名器)가 도리어 가벼워지니, 청컨대 이지억의 도승지 망(望)을 개정하소서. 예조 참판 황경원(黃景源)이 이방 승지(吏房承旨)이었을 때에 그 내구(內舅)를 재랑(齋郞)의 망에 비의(備擬)하여 천점(天點)035)  까지 받았는데, 남들의 말이 있게 되어서야 ‘바빠서 소홀하였다.’고 상소하여 스스로 해명하였습니다. 말은 성실하지 못하고 일은 뒷 폐단에 관계되니, 청컨대 황경원을 파직하소서. 사도 첨정(司䆃僉正) 정선(鄭敾)은 천기(賤技)로 이름을 얻고 잡로(雜路)로 몸이 뽑히어 전후의 이력은 이미 지나치고 외람한 것이 많은데, 이번에 새로 제수된 것은 더욱이 터무니없으니, 청컨대 정선을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황경원의 일은 상달한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4월 5일 갑신

이경조(李景祚)·이수득(李秀得)·한광회(韓光會)를 승지로 삼고, 특지(特旨)로 도승지 이철보(李喆輔)를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으며, 좌승지 남태온(南泰溫)을 가선(嘉善)의 자급으로 높였다. 이철보가 이미 형조 판서에 제수되고 나니 남태온이 좌차(座次)가 차례에 해당하기 때문에 도승지로 높였다. 임금이 어필(御筆)로 단자(單子) 가운데에 있는 남태온의 이름 아래에 쓰기를,
"침체되어 있는 지 이미 오랬는데 이미 승서(陞敍)하였으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4월 6일 을유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장령 신근(申)이 상서하여, 힘써 성의(誠意)를 쌓아서 서연관(書筵官)을 초치(招致)하고 시권(試券)을 일찍 바치는 것을 엄히 금하여 과장(科場)의 폐단을 없애며 주금(酒禁)을 더욱 엄하게 하여 황정(荒政)의 도움이 되게 하기를 청하고, 끝에 또 경성(京城)의 집을 헐어 파는 자는 경조(京兆)로 하여금 나타나는 대로 매우 다스리게 할 것을 말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널리 초치하는 일은 깊이 생각하겠다. 두 가지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고, 주금에 관한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4월 8일 정해

경상도 봉화현(奉化縣)에 서리가 내렸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서 태묘(太廟)의 하향(夏享)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고, 이어서 태묘에 나아가 면복(冕服)으로 갈아 입고서 봉심(奉審)하고 희생(犧牲)·제기(祭器)를 살폈다. 또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봉심하고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환궁(還宮)하였다.

 

하교하기를,
"황구(黃口)를 충정(充丁)하는 것은 이미 금령(禁令)이 있는데, 접때 건양문(建陽門)에 입번(入番)한 향군(鄕軍)이 편발(編髮)한 자가 있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공주(公州)의 군사이었다. 공주 판관(公州判官)과 살피지 않은 초관(哨官)을 모두 나처(拿處)하라."
하였다.

 

비국 당상 홍봉한(洪鳳漢)이 진연(診筵)에서 아뢰기를,
"애양 책문(靉陽柵門) 밖에 예전에는 인가가 없었는데, 근래에 청인(淸人)이 땅을 일구어 살고 있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급히 통지하여 금지하려 하니, 청국(淸國)의 통관(通官) 서종순(徐宗順)이, ‘내가 중간에서 주선할 것인데 급히 통지할 것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윽고 또 말을 바꾸어, ‘이 땅은 본디 책문 안이었으니 백성이 살고 안 사는 것은 귀국(貴國)에서 알 바가 아니며 급히 통지하고 아니하는 것은 내가 권하거나 막을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대신(大臣)은, 허둥지둥 급히 통지하면 경계를 넘어가서 엿보았다는 의심을 받을까 염려된다 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하여금 다시 형지(形止)와 원근(遠近)을 탐지하여 치계(馳啓)하게 해야 하겠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을 바라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4월 11일 경인

경기 가평군(加平郡)과 경상도 인동부(仁同府)에 서리가 내렸다.

 

4월 13일 임진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서 비국 당상을 소접(召接)하여 묘당(廟堂)의 계책을 물어 영남(嶺南)의 곡식 3만 석과 호남(湖南)의 곡식 2만 석을 점차로 통영(統營)에 옮기게 하였다. 전 통제사 조동점(趙東漸)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었다.

 

경상 좌병사 손진민(孫鎭民)이 장달(狀達)하기를,
"근래 봉정(烽政)이 가는 곳마다 허술하니, 성을 쌓고 굴을 파서 다섯 군졸이 번갈아 지키되 기계를 갖추어 주고 다른 일을 시키지 말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였다.

 

전 평안 감사 홍상한(洪象漢)이 동림(東林)을 방수(防守)하는 일 때문에 세 방책을 마련하여 장청(狀請)하였는데, 상책(上策)은 선천(宣川)의 읍치(邑治)를 동천(東川)에 옮기려는 것이고, 중책(中策)은 청강 첨사(淸江僉使)를 구기(舊基)에 도로 보내는 것이고, 하책(下策)은 본부(本府)의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방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신(大臣)이, ‘선천은 본디 큰 고을이므로 결코 옮기기 어렵고, 청강은 진(鎭)을 옮긴 지 오래지 않으므로 도로 보내면 폐단이 있을 것이고, 선천은 이미 방어(防禦)를 겸하였으니 중군이 다른 곳과 절로 다르고, 또 듣건대 거느리는 군졸이 자못 많다 하며 평시의 방수도 본디 여유가 있으니, 혹 급한 일이 있더라도 부사(府使)가 스스로 들어가 지킬 것이다.’ 하여, 중군으로 하여금 방수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전 충청 감사 김시찬(金時粲)이 소장을 올려 청하기를,
"정산현(定山縣)의 현치(縣治)036)  를 옮겨 다스리는 일은 대개 물과 토양이 척박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옮겨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니 따랐다.

 

4월 14일 계사

남태제(南泰齊)를 대사헌으로, 이규채(李奎采)를 대사간으로, 이섭원(李燮元)을 집의로, 조경(趙擎)을 사간으로, 유건(柳健)을 장령으로, 홍양한(洪良漢)·민증(閔增)을 정언으로, 이창의(李昌誼)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 홍 상한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관서(關西)는 변방의 중요한 곳이므로 재화(財貨)를 저축하는 데에는 뜻이 대개 있습니다. 예전에 선묘(宣廟) 때 해서(海西)에 참혹한 흉년이 들었으므로 관서의 곡식을 옮기기를 청하였으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변방의 방비를 굳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막아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근래 국가에서 관서의 무명을 가져다 쓰되 마치 외부(外府)037)  처럼 여기니, 참으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이것은 국계(國計)가 아주 없을 때에 호조(戶曹)에서 경비를 보충한 것이므로 급박하여 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타사(他司)·타도(他道)에 빌려 주는 것을 허락하거나 파는 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말하면 의의가 없을 뿐더러 앞으로 있을 염려를 돌보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조일지라도 쉽사리 허락할 수 없는데, 더구나 타사·타도이겠는가? 이 뒤로는 엄히 신칙하여 일체 시행하지 말게 하고 그대로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김제(金堤) 사람 김상각(金相珏)이라는 자가 수절하는 과부 김씨(金氏)를 겁탈하려고 군수(郡守) 최보흥(崔普興)을 부추겨 김씨의 아버지를 가두고 장차 도둑을 다스리는 형벌을 가하려 하므로 김씨가 자살하였는데, 감사(監司)가 그 정상을 아뢰었다. 김상각은 상술(相術)로 평소에 친근한 재상(宰相)이 많은 자이므로 연줄을 따라 살기를 꾀하려고 상경(上京)하게 되었는데, 연신(筵臣)이 이 일을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놀라서 말하기를,
"가뭄이 이러한 것은 반드시 원기(冤氣)가 부른 것일 것이다. 김씨는 효열(孝烈)이 모두 뛰어났으니, 한(漢)나라의 동해 효부(東海孝婦)의 예(例)에 따라 특별히 정려(旌閭)하라. 전 군수 최보흥은 자신이 백리지관(百里之官)038)  이 되어 나누어 다스리는 뜻을 돌아보지 않고 한낱 김상각을 위하여 수절하는 과부에게 억지로 구혼(求婚)하였으니, 해남현(海南縣)에 한년(限年)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라. 그 도신(道臣)은 김상각을 가두고 신문(訊問)하여 효열부(孝烈婦)의 혼(魂)을 위로하지 못하였으니, 우선 중추(重推)하라."
하고, 이어서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홍자(洪梓)를 김제 안결 어사(金堤按決御史)로 차출하여 김상각을 압송하여 내려가 그 곳에서 세 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뒤에 효열부 김씨의 무덤에 가서 제사하게 하고, 또 연로(沿路)를 염방(廉訪)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약방 도제조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종묘(宗廟)의 대제(大祭)를 섭행(攝行)할 때에는 대축(大祝)이 2원(員)뿐이므로 묘주(廟主)를 출납할 때에 구차한 것이 많으니, 두 사람을 더 차출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궁위령(宮圍令)도 두 사람 더 차출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시좌(侍坐)하니, 임금이 서연(書筵)에서 강독(講讀)한 《논어(論語)》를 외라고 명하였다. 세자가 외기를 마치자, 임금이 묻기를,
"자로(子路)가 해어진 솜옷[縕袍]을 입고 호학(狐貉)039)  을 입은 자와 함께 서서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도(道)를 즐기기 때문에 해어진 옷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여곽(藜藿)040)  을 먹을 때인가 천종(千鍾)의 녹(祿)을 먹을 때인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여곽을 먹을 때나 천종의 녹을 먹을 때나 그 마음은 같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송(宋)나라 효종(孝宗)은 어진 임금이고 장준(張浚)은 어진 신하인데, 다시 떨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임금과 신하 위아래가 그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위아래가 한마음이 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일마다 공정하면 한마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였다.

 

임금이 정언 정술조(鄭述祚)의 계(啓)에 김회원(金會元)을 감싸는 말이 있었다는 말을 뒤미처 듣고 특지(特旨)로 그 벼슬을 파면하였다.

 

4월 16일 을미

헌부(憲府) 【장령 유건(柳健)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병조 판서 이익정(李益炡)과 조운규(趙雲逵)의 일은 정달(停達)하였다.

 

사간 조경(趙擎)이 상서하여, 김회원·정술조를 신구(伸救)하고, 또 말하기를,
"포교(捕校) 박창기(朴昌杞)라는 자가 사사로운 혐의 때문에 금란(禁亂)이라 핑계하고 무인(武人) 배두한(裵斗漢)을 때렸는데, 대장(大將) 조동하(趙東夏)가 배두한이 죽어 박창기가 상명(償命)될까 염려하여 숨져 가는 사람을 끌어들여서 매우 곤장을 쳐 숨지게 하였으니, 조 동하를 삭직(削職)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두 사람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처분하셨는데, 아래에서 어찌 감히 감쌀 수 있겠는가? 조 동하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4월 17일 병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친림하여 생원(生員)·진사(進士)의 과방(科榜)을 발표하였다. 신광정(申光鼎)·문연박(文演樸) 등 2백 인을 뽑았는데, 모두 함인정(涵仁亭)에서 소견하였다. 영남(嶺南)은 과방에 든 자가 30여 인이며 유학(儒學)의 고장이고 또 명현(名賢)의 자손이 많다 하여, 전조(銓曹)에서 재주에 따라 조용(調用)하여 침체되지 말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언 유건은 연달(連達)하고 정달(停達)할 즈음에 둘로 나누었으니, 공교하다. 특별히 그 벼슬을 파면하라. 전달(前達) 가운데에서 이정중(李廷重)의 일은 어찌 김회원 때문에 서로 버티었겠는가? 아뢴 대로 시행하라. 구성필(具聖弼)은 이미 장천(將薦)으로 곤수(閫帥)가 되었는데도 초헌(軺軒)을 탄다 하니, 감히 그럴 수 있는가? 이 뒤로는 무변(武弁)의 예(例)에 따라 쓰라."
하였다.

 

4월 18일 정유

김양택(金陽澤)을 승지로, 최성대(崔成大)를 집의로, 조중직(趙重稷)을 사간으로, 권항(權抗)·송시함(宋時涵)을 장령으로, 윤득우(尹得雨)·변치명(邊致明)을 지평으로, 남태저(南泰著)를 정언으로, 남혜로(南惠老)를 헌납으로, 송능상(宋能相)을 장악 정(掌樂正)으로 삼았다.

 

4월 19일 무술

김상구(金尙耉)를 대사간으로, 정희신(丁喜愼)을 장령으로, 유건(柳謇)을 헌납으로, 정유(鄭楺)를 정언으로 삼았다.

 

4월 21일 경자

헌부(憲府)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2일 신축

서리가 내렸다.

 

증광 복시(增廣覆試)의 시관(試官)으로서 패초(牌招)를 어겼다 하여 이조 판서 신만(申晩)과 호조 판서 이창의(李昌誼)를 파면하였다. 홍계희(洪啓禧)를 이조 판서로, 이철보(李喆輔)를 호조 판서로, 권신(權賮)·김조윤(金朝潤)을 장령으로, 유복명(柳復明)을 형조 판서로, 권적(權樀)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이조 판서 신만은 침맞고 뜸뜨느라 말미를 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고, 호조 판서 이창의는 실병(實病)이 위중한 것을 온 세상이 다 알므로 신이 일찍이 갈아 줄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제 어찌 억지로 시킬 수 없는 시역(試役)을 억지로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패초를 어긴 것도 죄가 아닙니다. 신은, 신만은 파면하지 말고 이창의는 갈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내가 어찌 두 신하의 일을 모르랴마는, 아침에 패초를 받고 저녁에 부표(付標)하였더라도 어찌 세 번 패초하게 되었겠는가? 내가 아깝게 여기는 것은 기강이다."
하였다.

 

예조 당상 홍상한(洪象漢) 등이 청대(請對)하여 하연(賀宴)을 청하니, 임금이 굳이 물리치고 윤허하지 않았다. 왕세자에게 명하여 시좌(侍坐)하게 하고 또 춘방(春坊)의 관원을 불러, 세자에게 이르기를,
"이제 예관(禮官)이 청한 것이 있으니, 네가 반드시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또 생각을 낼 것이고 춘방의 관원도 반드시 너에게 권하여 청하게 할 것이므로, 특별히 너와 궁관(宮官)을 불러 이 하교를 듣게 하는 것이다."
하고,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아! 예전부터 아들인 자로서 누구인들 어버이를 잃은 아픔이 없으랴마는, 어찌 나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경자년041)  에 용염(龍髥)을 더위잡지 못하고 이듬해에 신축년을 당하여 한밤에 일어나 생각하고 꿈속에서 목이 메어 울었건만, 원량(元良)이 헤아리지 못하고 신하들이 헤아리지 못하여 심지어 궐정(闕庭)에서 호소하기까지 한 것이 두 번이었다. 아! 내 진심은 하늘이 알 것이다. 또 몇 번의 진연(進宴)에 자성(慈聖)께서는 한번도 몸소 임하지 않으시고 나와 내전(內殿)만이 잔을 받았는데, 이제 또 자전(慈殿)께 진연한다 하고 나만이 잔을 받는다면 고금에 결코 이런 도리가 없을 것이다. 아! 우리 원량과 신하들은 내 이런 마음을 헤아리라."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한 사인(士人) 집에서 1백 세 된 부인(夫人)의 상(像)을 그린 도첩(圖帖)을 사사로이 간직하여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특히 여겨 가지고 들어오라 명하여 친히 보고는 또 연중(筵中)에서, ‘대내(大內)로부터 동조(東朝)에 진찬(進饌)하라’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이날 예관이 다시 힘껏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마음으로 잔치를 받겠는가? 내가 동조를 위하여 진찬하였는데, 원량은 나를 본받으려 한다. 임금이 연회(宴會)를 보통 있는 일로 여기면 겨우 30세가 넘어도 반드시 크게 즐겁게 하려는 거조(擧措)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크게 즐겁게 하려는 것으로 자손을 인도하는 것이니, 더욱이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4월 23일 임인

김시찬(金時粲)을 승지로,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을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로, 심수(沈鏽)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청주(淸主)가 장차 7월에 심양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연관(書筵官) 송명흠(宋明欽)이 어머니의 병 때문에 상서하여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김회원(金會元)의 배척을 받았다 하여 인의(引義)하여 사직하고 체차할 것을 바라므로 이창의(李昌誼)로 대신하였다.

 

4월 24일 계묘

명하여 내농포(內農圃)의 백성을 불러 후원(後苑)의 내포(內圃)에 들어와 밭갈이하게 하고 친림하여 보았다. 어제 편차인(御製編次人) 조명리(趙明履)에게 명하여 《시경(詩經)》의 빈풍 칠월편(豳風七月篇)을 읽게 한 다음 경기 감사 김상익(金尙翼)을 불러 도내(道內)의 농사 형편을 묻고, 이어서 여러 도(道)에 하유(下諭)하여 농사를 권려하고 겸하여 제언(堤堰)의 일을 신칙하였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소녕원(昭寧園)에 가서 살피고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상시(上諡)하고 봉원(封園)한 뒤에는 사체가 더욱이 다른데, 신구(新舊) 비각(碑閣)가에 모두 사람의 무덤이 있으니, 파서 옮기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해골을 덮어 묻어 준 일을 내가 감히 바랄 수 없으나, 어찌 차마 파서 옮기겠는가?"
하였다. 홍상한이 말하기를,
"옮겨 묻는 비용을 후하게 내려 주면 죽은 자가 알고 또한 반드시 감읍(感泣)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무덤이 곧 주인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옮겨 가게 해야 하겠는가? 비록 제사를 지내더라도 금하지 말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홍상한이 말하기를,
"무릇 9품인 벼슬은 다 참봉(參奉)이라 칭하니, 반드시 능관(陵官)에 대해서만 참봉이라 이름할 것이 없습니다. 수봉관(守奉官)을 참봉이라 고쳐도 안될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봉관이 무엇이 해로운가? 이것도 한계를 두는 것이니, 넘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홍상한이 예관(禮官)으로서 망령되게 임금의 뜻을 맞추어 면전에서 아첨하여 마지않았으나, 다행히 임금의 지인(至仁)·달식(達識)에 힘입어 확연(確然)히 흔들리지 않았으니, 임금의 말이 위대하다. 우리 자손과 백성을 보전해야 할 것인데, 홍상한이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는 것이 여기에서 더욱 나타났다.

 

4월 26일 을사

등주(登州)의 어채선(漁採船) 3척이 표류하여 황해도 조니진(助泥鎭)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그들의 소원대로 수로(水路)로 돌려보냈다.

 

4월 28일 정미

간원 【정언 정유(鄭楺)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빚을 거두는 것은 금령(禁令)이 있는데,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는 가멸은 역관(譯官)의 빚을 거두기 위하여 가사(家舍)·전토(田土)·노복(奴僕)·기명(器皿)을 억지로 빼앗고도 모자라서 협박하고 독촉하여 견디지 못하게 하므로, 역관의 며느리가 자살하게 되고 그 제수(弟嫂)도 잇달아 목매어 죽었습니다. 한 빚을 거두는데 두 사람이 목숨을 아울렀으니, 듣기에 놀랍고 슬픕니다. 국법이 엄해야 할 것이니, 서평군 요를 파직하소서. 광주 경력(廣州經歷) 이택징(李澤徵)은 본디 문벌과 명망이 모자라서 진정(賑政)을 책임지기 어렵고, 흥양 현감(興陽縣監) 이한범(李漢範)·희천 군수(熙川郡守) 신사민(申思民)·금구 현령(金溝縣令) 성진석(成晉錫)은 모두 잘 다스리지 못하여 혹 잇달아 폄론(貶論)하기에 이르렀으며, 함부로 술주정하거나 탐비(貪鄙)를 일삼아서 모두 자목(字牧)의 직임에 맞지 않으니, 모두 갈아 파면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세 수령은 나문(拿問)하게 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에게 서평군 요의 일을 물었는데, 홍봉한이 말하기를,
"과연 그런 일이 있습니다. 역인(譯人) 홍대성(洪大成)이 빚 때문에 괴로움을 받으므로 홍 대성의 아들이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집에서 나누어 줄 재산을 얻어서 우리의 급한 일을 구제하기 바란다.’ 하였는데, 그 아내가 그 아비에게 가서 청하였으나 아비가 인색하여 주려하지 않으므로 아내가 돌아가서 볼 면목이 없어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되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는 서평이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아비가 재물에 인색하여 그 딸을 죽게 한 것이니,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다."
하고, 추조(秋曹) 문밖에서 결장(決杖)하고, 요의 벼슬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한 해 뒤에 자살한 두 여인을 초계(抄啓)하여 특별히 휼전(恤典)을 베풀고 3백 냥의 빚을 감면하게 하였다.

 

4월 29일 무신

유언민(兪彦民)을 승지로 삼았다.

 

내농포(內農圃)가 신천(新川)에 있는데 간혹 사복시에서 양전(量田)한 데에 섞여 들어가므로 내농포 사람들이 원망하는 일이 많았는데, 임금이 특별히 필선(弼善) 유한소(兪漢蕭)에게 명하여 다시 양전하여 바로잡게 하였다.

 

호남 이정사 이성중(李成中)이 복명하고 서계(書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각 고을의 환곡(還穀)에 대한 폐단은 여러 도가 다 그러합니다마는, 본도처럼 심한 데가 없습니다. 대개 남토(南土)는 곡식이 많으므로 해마다 잇달아 풍년이 들면 각 영문(營門)의 별비(別備)와 경각사(京各司)의 환록(換錄)이 해마다 점점 더하여 모곡(耗穀)에 모곡을 더 붙여서 곡식의 수량이 백성의 수보다 많아지게 됩니다. 동복(同福)·옥과(玉果) 등 고을로 말하면 민호(民戶)가 겨우 1, 2천인데 환곡은 다 2만 석이 넘으므로 한 집에서 받은 것이 거의 수십 석이나 되니, 이 때문에 시름하고 원망하여 고향을 떠나 흩어집니다. 환곡을 설치한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인데 이제는 백성을 괴롭혀 일이 궁극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변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묘당(廟堂)에서 연품(筵稟)하여 관문(關文)을 보냈으나, 그 뒤에 대신(大臣)이 오히려 재결(裁決)하지 못하였고, 올 가을에 받아들이기 전에는 곧 구획(區劃)하여 옮겨야 하겠습니다마는, 그 중에서 가장 백성이 원망하는 것은 통영(統營)의 곡식입니다. 통제사(統制使)는 삼도(三道)의 상관(上官)이므로 위권(威權)이 본디 중하고 또 도신(道臣)에게 관제(管制)를 받지 않기 때문에 열읍(列邑)이 두려워하는 것이 감영(監營)·병영(兵營)보다 훨씬 더한데, 본도의 서쪽 연해(沿海)에서 통영까지의 수로(水路)는 수천 리가 되어 배로 운반하여 가서 바칠 즈음에 축나고 비용이 드는 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므로 각 고을에서는 혹 백성에게서 다시 거두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영남 이정사의 별단(別單)에는 고성(固城)에 많이 있는 통영의 곡식을 다른 고을로 옮기자고 하였으나, 신은 생각건대, 이제부터 정식(定式)하여 통영에서 쓰는 곡식은 반드시 고성 등 가까운 고을에서 가져가고 본도 각 고을 가운데에서 통영의 곡식이 가장 많은 곳은 가을에 받아들일 때 돈으로 환작(換作)해 버리어 해영(該營)에서 회록(會錄)하며 그 나머지 각 고을의 통영 곡식은 원수(元數) 이외의 새 모곡을 돈으로 환작하게 하면, 영남·호남 두 도의 통영 곡식의 폐단을 한꺼번에 둘 다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본도의 사노비(寺奴婢)의 액수(額數)는 영남처럼 많지 않으나, 그 괴로움을 원망하는 정상은 피차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양역(良役)에 대하여 감포(減布)한 뒤부터는 똑같은 은택을 입기를 바라니, 영남과 아울러 마찬가지로 변통하여 적당히 감면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민결(民結)에서 받아들이는 것에는 전세(田稅)·대동(大同)·균청 결미(均廳結米)가 있는데, 전세는 전세 호수(田稅戶首)에게 말[斗]로 되어 주고 대동은 대동 호수(大同戶首)에게 말로 되어 주며 결미도 그렇게 하므로, 호수가 전세소(田稅所)에 전세를 바치면 전세 감색(田稅監色)이 침징(侵徵)하고 대동소(大同所)에 대동을 바치면 대동 감색(大同監色)이 침징하며 결미를 바칠 때에도 그 감색의 침징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미 많고 각자 욕심을 채우므로 백성이 괴로움을 받는 것은 참으로 여기에 있는데, 백성이 바친 뒤에 감색이 경창(京倉)에 바칠 때에도 그러합니다. 광흥창(光興倉)·군자감(軍資監)·별영(別營)·별고(別庫)·풍저창(豊儲倉)이 있고 선혜청(宣惠廳)·균역청(均役廳)이 있는데, 그 하속(下屬)이 감색에게 침징하는 것도 감색이 백성에게 침징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백성의 쓰는 것이 날로 더해 가는 까닭입니다. 이제 여기에 대하여 조금 더 변통해서 그 해에 거두는 조세의 총계(總計)에 따라 각처에서 받아들일 수를 추이(推移)하여 구획(區劃)해서 각각 원수(元數)를 맡되, 한 도(道)로 말하면 호조(戶曹)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이고 선혜청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이고 균역청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또 얼마인지를 계산한 뒤에, 어느 고을과 어느 고을은 호조에 구획하고 어느 고을과 어느 고을은 선혜청에 구획하고 어느 고을과 어느 고을은 균역청에 구획하여 1결(結)에서 받아들일 것을 통계(通計)해 섬[石]으로 만들어 한 곳에서 같이 받아들이면, 70부(負) 이상의 전토(田土)를 가진 백성에게서 받아들일 것은 한 섬이 차므로 절로 말로 되고 되로 되어 호수에게 줄 것 없고 양호(養戶)의 폐단은 꼭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광주(廣州)의 방법인데 광주 백성은 다른 고을보다 가장 편리하니, 그 방법을 미루어 팔로(八路)에 행하면 농민의 이익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본도의 산읍(山邑)에서 전세를 포구(浦口)까지 내어 가는 것이 가장 백성의 폐해가 됩니다. 한 말[斗]을 해창(海倉)에 나르는 데에 그 비용은 세 곱이 드니, 이제 또한 대동의 예(例)에 따라 해창에서 1백 리 떨어진 곳은 모두 무명으로 환작할 수 있도록 하면, 산읍의 백성이 회생(回生)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역(郵驛)을 두고 명을 전하는 것은 나라의 중대한 정사인데, 근래 역로(驛路)는 가는 곳마다 조폐(凋弊)하여 거의 역참(驛站)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제때에 미쳐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되겠으며, 변통하는 방도는 먼저 역속(驛屬)이 소생되게 하고 나서야 그 마정(馬政)을 책임지울 수 있을 것인데, 지금 역속이 가장 절박한 것은 위전(位田)의 결전(結錢)입니다. 역로가 중대한 것은 다른 것보다 절로 구별되는 것이니, 특별히 줄이도록 허락하여 넉넉히 돌보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단(異端)은 우리 유가(儒家)에서 매우 배척하는 것입니다마는, 우리 나라의 승도(僧徒)는 그렇지 않아서 신역(身役)에 응하는 평민이나 편오(編伍)의 군졸에 지나지 않으니, 그 애호(愛護)하는 것도 평민이나 군졸과 같아야 할 것인데, 남한(南漢)의 의승(義僧)이 상번(上番)하는 것은 승도의 괴로운 폐단입니다. 본도는 큰 절이면 너댓 명이고 작은 절도 한두 명인데, 한 명을 자장(資裝)하여 보내는 데에 거의 1백 금(金)이 들므로 한 절에서 해마다 4,5백 금의 비용을 책임지니, 저 초의 목식(草衣木食)하는 무리가 어찌 바랑을 메고 떠나 흩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한의 수신(守臣)은 팔도의 의승이 상번하는 것은 보장(保障)하는 데에 그 뜻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마는, 양청(兩廳)의 군관(軍官)·졸례(卒隷)도 다 각 고을의 시골에서 사는 자에게는 쌀·베를 거두고 성안에 사는 자를 대신 세우니, 어찌 의승에게만 이 예(例)를 쓸 수 없겠습니까? 이제부터 정식(定式)하여 의승은 상번하지 말고 매명마다 돈 16냥을 대송(代送)하되 ‘의승 방번전(義僧防番錢)’이라 이름하여 각 고을로 하여금 군포(軍布)의 규례와 마찬가지로 거두어 모으게 하면, 승도의 큰 폐해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많이 채용하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다른 도도 다 바로잡아야 하겠으나, 민백상(閔百祥)·이성중만한 자를 어찌 얻기 쉽겠는가?"
하고, 이성중을 소견하였다. 이성중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해민(海民)을 도탄(塗炭)에서 빼어 임석(袵席)에 놓으시니 이것은 큰 혜택입니다마는, 농민이 근본이고 해민은 말단이니, 더욱이 크게 염려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는 육민(陸民)이 더욱 곤궁한가?"
하였다. 이성중이 말하기를,
"세(稅)가 점점 무거워지므로 육민이 더욱 곤궁합니다. 또 해민은 다 기뻐하나 오직 포변(浦邊)에 사는 향화인(向化人)만은 원망합니다. 신이 이후(李)의 세안(稅案)을 살펴보았더니, 과연 전보다 무거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짚·그물까지도 살펴서 독세(督稅)한다는 것이 사책(史冊)에 쓰여지면 어떻게 여기겠는가? 그러나 법이 이미 세워졌는데, 백성이 다 균역(均役)을 믿는가?"
하였다. 이성중이 말하기를,
"오히려 중지될까 염려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직 나에게 달려 있다. 어찌 그럴 염려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성중이 또 선척(船隻)에 대하여 장표(掌標)를 발급하는 법을 엄하게 하여 간위(奸僞)를 막고 망기(網基)가 세안(稅案)에서 빠진 것에 대한 세를 정하여 요행을 막으며, 각 고을의 제향(祭享)에 어염(魚鹽)을 바치는 것은 저미(儲米)로 획급(劃給)하고 호역(戶役)을 향회(鄕會)에서 더 거두는 폐단은 매우 중벌로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본도는 선세(船稅)가 치우치게 무거우니, 대선 1등(大船一等)은 구세(舊稅)가 40냥인 것을 고쳐서 30냥으로 정하고 대선 2등은 구세가 35냥인 것을 고쳐서 26냥으로 정하고 대선 3등은 구세가 30냥인 것을 고쳐서 23냥으로 정하며, 중선 1등(中船一等)은 구세가 25냥인 것을 고쳐서 20냥으로 정하고 중선 중등은 구세가 22냥인 것을 고쳐서 17냥으로 정하고 중선 3등은 구세가 17냥인 것을 고쳐서 14냥으로 정하며, 소선 1등(小船一等)은 구세가 14냥인 것을 고쳐서 11냥으로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 그대로 따랐다. 이때 처음으로 균역법(均役法)을 행하였는데, 간사(幹事)하는 신하들이 다 빠진 것을 찾아내고 가혹하게 거두는 것을 능사로 여겼으나, 민백상·이성중이 서로 이어서 이정사가 되어 민백상은 대체를 지키기를 힘쓰고 이성중은 사정을 지적하여 절실히 논하였으므로 여론이 칭찬하였다.

 

전라 좌수사 박재하(朴載河)·전 수사 정익량(鄭益良)·전 흥양 현감(興陽縣監) 백사문(白師文)·장흥 부사(長興府使) 이광운(李光運)은 모두 나처(拿處)하고 우수사 홍태두(洪泰斗)는 파직하며 강진 현감(康津縣監) 여선응(呂善應)·무안 현감(務安縣監) 이극록(李克祿)은 모두 영문(營門)에서 결장(決杖)하고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자를 나처하니, 이정사(釐正使) 이성중(李成中)이 어세(漁稅)를 함부로 받아들인 것을 논계(論啓)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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