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1권, 영조 30년 1754년 윤4월

싸라리리 2025. 10. 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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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4월 1일 경술

강원도 평강현(平康縣)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복숭아만하였다.

 

윤4월 3일 임자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친림하여 증광 전시(增廣殿試)를 설행하고 문과에 홍종해(洪宗海) 등 40인과 무과에 김백령(金栢齡) 등 1백 18인을 뽑았다. 고 목사 서종협(徐宗浹)에게 부제학을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서종협은 서종급(徐宗伋)의 아우이다. 증광 복시(增廣覆試)에 참여하여 미처 창제(唱第)하기 전에 죽었는데, 연신(筵臣)이 으레 증직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윤4월 3일 임자

이득종(李得宗)을 교리로, 이유수(李惟秀)를 수찬으로, 신만(申晩)을 판윤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김양택(金陽澤)을 대사성으로, 이사선(李思先)을 경상 우병사로, 김주악(金柱岳)을 전라 우수사로, 최진해(崔鎭海)를 전라 좌수사로, 이주국(李柱國)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충청 수사 서종급을 내직(內職)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지난 겨울에 서종급이 홍문 제학으로서 인의(引義)하였으므로 특지(特旨)로 외직(外職)에 보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신(大臣)이 그 아우 서종협이 죽어서 정리(情理)가 가엾다고 말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총융사 구성임(具聖任)이 본영(本營)의 기읍 수미(畿邑需米)는 이미 성역(城役)에 다 썼다 하여 진청(賑廳)의 쌀 1천 석을 다른 예(例)에 따라 총융청에 팔 수 있도록 하여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는 일에 보태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최성대(崔成大)를 승지로 삼았다.

 

윤4월 4일 계축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문안사(問安使)가 갈 기일이 매우 촉박하므로 외방(外方)에 요구하면 준비되기 어려우니, 예물로 가져가는 것과 경반전(京盤纏)을 모두 계해년042)  의 전례대로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서연관(書筵官) 윤봉구(尹鳳九)가 상서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간원 【정언 민증(閔增)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는 끝없이 재물을 탐내어 이익을 불리는 것을 일삼으며 공법(公法)을 업신여겨 제멋대로 매질하여 집을 부수고 재산을 팔므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는 백성이 한둘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 홍대성(洪大成)의 집 여인이 원한을 품고 자살한 것은 더욱이 매우 놀랍고 슬픕니다. 그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하고 왕법(王法)을 범하여 어지럽힌 것은 중벌을 주어야 하겠으니, 청컨대 서평군 요를 귀양보내소서. 동료 대간(臺諫)이 종신(宗臣)을 논죄한 것은 참으로 대체(臺體)에 맞습니다마는, 그 의율(擬律)은 마땅하지 못한 것을 면할 수 없으니, 정언 정유(鄭楺)를 체차하소서. 여주 목사 구문영(具文泳)이 탐학하고 침탈(侵奪)하는 것은 이루 열거할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 획급(劃給)하여 이전한 쌀 수백 석을 마음대로 돈을 만들어 죄다 제 주머니에 돌리며, 또 경내(境內)의 세력 있는 집에 잘 보이기 위해 혹 50석을 주기도 하고 30석을 주기도 하였으나, 잔민(殘民)에게는 몇 되나 몇 말을 나누어 주어 책임을 면하고 문부(文簿)를 거짓으로 꾸며 감히 어지럽힐 생각을 하였으니, 구문영을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해주(海州) 사람 박경룡(朴慶龍)이라는 자는 박익성(朴益成)의 재산을 탐내어 동성(同姓)이라 거짓말하고 두 번씩이나 허위를 꾀하였으므로, 일찍이 대신(臺臣)이 상소하여 논죄하였고 또 도신(道臣)이 장문하여 파양(罷養)하였는데, 박경룡이 이미 죽은 뒤에 그 조카 박창문(朴昌文)이 제 아우 박창수(朴昌壽)를 부추겨 또 박익성의 집을 차지하고 박익성의 제사를 맡게 하였으니, 그 인기(人紀)를 더럽히고 국체(國體)를 업신여긴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겨울에 헌부(憲府)에서 상달하여 도배(島配)를 청하였는데, 국가에서 이미 감죄(勘罪)한 뒤에 박창문 등이 곧 체포에 응하지 않고 달아나 숨어서 사유(赦宥)할 날을 기다려 뇌물을 써서 사유받았습니다. 대저 박창문 등은 이미 윤기(倫紀)를 어지럽힌 죄가 있고 또 달아난 죄를 범하였으니, 대사(大赦)를 당하여도 탕척(蕩滌)할 수 없습니다. 박창문·박창수 등을 빨리 도배하여 물간 사전(勿揀赦前)043)  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평군의 일은 대조(大朝)의 처분이 이미 엄하였으니, 어찌 더할 수 있겠는가? 세 가지 일은 모두 상달한 대로 하겠다."
하였다.

 

윤4월 5일 갑인

좌의정 이천보(李天輔)에게 하유하기를,
"사관(史官)이 지켜 기다린 지 이제 며칠인가? 신하의 분의(分義)는 그 임금이 한때 하교한 것 때문에 감히 고집부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접때 타이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나라를 깊이 생각하는 정성이 있는 경으로서 어찌하여 이것을 헤아리지 않고 이처럼 언짢아하는가? 의소(懿昭)의 입묘(入廟)가 사흘 남았을 뿐이니, 나에게는 언짢아할지라도 어찌 세 살인 내 손자의 담제(禫祭) 날을 생각하지 않고 시골에서 머뭇거리겠는가? 경은 헤아려야 한다."
하고, 또 우의정 조재호(趙載浩)에게 하유하기를,
"날마다 사은 단자(謝恩單子)를 기다리나 조정에 나올 기약은 막연하다. 아! 효순(孝純)의 담사(禫事)에 경이 이미 참여하지 않았으니, 내 손자의 담제 날에는 더욱 슬플 것이다. 경은 스스로 헤아려 곧 사명(謝命)해야 한다. 걷기가 혹시 어렵더라도 대관(大官)이 일을 돌보는 것이 어찌 분주하는 데에 있겠는가?"
하였다. 조재호가 발의 병으로 사직하였으므로 돈유(敦諭)할 때에 언급한 것이다.

 

윤4월 6일 을묘

강원도 안협(安崍)·금성(金城)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려 땅에 쌓인 것이 거의 한 자쯤이었다.

 

임금이 의소(懿昭)의 혼궁(魂宮)에 나아가 탁지(度支)의 신하를 불러 서쪽 소합문(小閤門)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문을 헐고 작은 담으로 막아 안팎을 구별하고 싶다마는, 공역(功役)이 매우 어려우므로 나는 민력(民力)을 번거롭히려 하지 않는다. 저 청제(淸帝)는 무슨 마음이기에 토목일을 지나치게 크게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였다.

 

윤4월 7일 병진

경상도 청도군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밤만하고 작은 것은 새알만하였다.

 

광주 유수 홍계희(洪啓禧)가 이미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유수를 오래도록 차대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영상에게 하유하여 그 차대할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또 도당록(都堂錄)의 권점(圈點)을 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거하는 한 가지 조항에 대하여 신이 이미 누워서 기무(機務)에 응하라는 하교를 직접 받았으니, 이것은 조당(朝堂)에 나아가는 것과 다르므로 전에 이미 집에 있으면서 비의(備擬)하였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이제 와서 고집해야 하겠습니까마는, 일전에 이판(吏判)·호판(戶判)·병판(兵判)에 대하여는 성상께서 신이 천거하기에 어려운 것을 굽어살펴 주시어 전망(前望)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명이 잇달아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이후에는 신이 다시 무릅쓰고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남한(南漢)의 벼슬자리를 일임하고 지체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죄이거니와, 이제 성유(聖諭)를 받았으니 신이 어찌 감히 허튼 말을 하고 다시 지체할 수 있겠습니까? 도당록으로 말하면 신이 사직을 청하기 전에 본디 명을 받았으므로 동료 정승과 함께 한두 번 조당에 나아가 행하려 하였으나, 제학(提學)의 유고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신의 정세가 전과 크게 달라서 사직을 청하고 인퇴(引退)하였으므로 얼마 안가서 갈릴 것인데, 성상께서 정승 자리가 모두 비었다 하여 특별히 근심하시어 수서(手書)로 돈면(敦勉)하시고 반드시 갈겠다고 윤허하면서 내가 경을 속이지 않는다고 여러 번 하유하시고, 또 내가 경에게 공직(供職)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직을 멈추고 동료 정승이 나오기를 기다렸었는데, 직명(職名)으로 말하면 온 세상이 다 곧 갈릴 것으로 알고 신도 성상께서 다시 직무를 보살피라고 신에게 요구하실 것을 다시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또 예전부터 동료의 자리가 다 갖추어졌어도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권록(圈錄)하는 규례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해직을 허락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도당록은 세손(世孫)의 담사를 지낸 뒤에 거행하라. 내 손자의 입묘(入廟)를 생각하여 오늘 제반(祭班)에 입참(入參)해야 한다."
하였다.

 

당하관(堂下官)의 전도(前導)를 금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효장(孝章)의 상제(祥祭)·담제(禫祭) 때에는 옛 요속(僚屬)이 입참한 일이 없었으나, 이번 의소(懿昭)의 상제·담제 때에 특별히 명하여 배제(陪祭)하게 한 것은 의리로 시작한 것이다. 이미 담제에 참여하였다면 입묘할 때에도 예(禮)로서는 지송(祗送)해야 하겠으나, 발인(發靷)하는 날과는 다르므로 반드시 배종(陪從)할 것 없으니, 다만 궁문(宮門) 밖에서 지송하라."
하였다.

 

임금이 의소 세손이 입묘할 때의 의주(儀註)를 보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무릇 정문(正門)을 출입할 때에 세자가 동협문(東夾門)을 거친다면 세손은 서협문(西夾門)을 거쳐야 할 것이다."
하자, 판부사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세손은 감히 세자와 같은 문을 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고,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 등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오례의(五禮儀)》를 고쳐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고치라고 명하였는데, 이조 참판 조명리(趙明履)가 아뢰기를,
"무릇 전례(典禮)는 대조(大朝)·소조(小朝)에는 본디 강등(降等)이 있으나 세자와 세손에는 구별하여 꺼리는 의리가 없고 신하들과는 등급이 매우 다르므로 동협문을 거치고 서협문을 거치지 않습니다. 《속오례의(續五禮儀)》를 지을 때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상고해서 만들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잊었다. 《대명회전》에 황태자(皇太子)·황태손(皇太孫)이 같이 동협문을 거치게 되어 있으니, 고치지 말라."
하였다.

 

윤4월 8일 정사

임금이 의소 세손의 담제(禫祭)에 친림하고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과 옛 사부(師傅), 옛 요속(僚屬)이 입참하였다. 대축(大祝)이 신위(神位)를 받들어 연여(輦輿)에 모시고 장차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묘(廟)에 옮겨 봉안하려 할 때에 옛 요속이 차례로 연여를 배종(陪從)하였는데, 강서원(講書院)의 관원은 오른쪽에서 배종하고 위종사(衞從司)의 관원은 왼쪽에서 배종하여 나갔다. 임금이 섬돌을 내려가 강림하여 보면서 눈물이 그치지 않으니, 궁중(宮中)에서 모두 곡하였다. 신여(神轝)가 이미 나가며, 임금이 궁문(宮門)에 노립(露立)하여 배웅하였다.

 

의소 세손이 입묘할 때의 여러 신하들에게 상전(賞典)을 내렸는데, 신주(神主)를 출납한 대축 이득종(李得宗)에게는 가자(加資)하고 충의(忠義) 이신규(李信圭)·홍응성(洪應盛)은 승서(陞敍)하였으며, 예모관(禮貌官)·인의(引儀)·향실 충의(香室忠義) 등에게는 현궁(弦弓)을, 헌관(獻官)에게는 숙마(熟馬)를, 대축에게는 아마(兒馬)를 내리고, 원역(員役)·수복(守僕) 등에게는 쌀과 베를 주었다.

 

윤4월 9일 무오

서명빈(徐命彬)을 광주 유수로, 김상복(金相福)을 수원 부사로, 송능상(宋能相)을 집의로, 박치문(朴致文)을 사간으로, 신대수(申大脩)를 지평으로, 홍양한(洪良漢)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판부사 김상로(金尙魯)에게 안주(安州)의 동림(東林)을 막아서 지키는 편의를 물으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동림에 성을 쌓는 것은 신이 건청(建請)한 것인데, 성이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성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쌓기 시작할 때에 신이 성을 지키는 편의를 여러 가지로 헤아렸는데, 청강(淸江)의 진(鎭)을 옮겨서 성을 지키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청강 첨사(淸江僉使)는 본디 동림의 옛 성에 있었는데, 근년에 철산(鐵山) 고을을 옮긴 뒤로 준해 일로(遵海一路)를 방수할 사람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청강에 옮겨 설치하고 극우(棘隅) 밖에 진사(鎭舍) 하나를 설치하였을 뿐이어서 거의 길가에 있는 빈 역원(驛院)과 같은데, 그 생활하는 길은 삭료(朔料)인 좁쌀 한 섬뿐이며 진하(鎭下)에는 또 영솔(領率)이 없으니, 뒷날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이 진을 둔 것이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이른바 준해 일로라는 것이 청강평(淸江坪)에 이르는데 이 평(坪)이 동림의 왼쪽에 있고 이제는 동림이 스스로 조관(照管)할 수 있으니, 청강 첨사로 하여금 준해 일로를 방수하게 하더라도 형편으로 말하면 이 곳이 저 곳보다 낫습니다. 이제 청강진(淸江鎭)을 동림에 도로 옮겨 성을 지키는 데에 전념하고 이어서 순영(巡營)에서 관장하는 관향(管餉)과 둔전(屯田)이 선천(宣川)·철산에 있는 것을 청강에 전속(專屬)하며, 또 태복(太僕)에서 관장하는 정주(定州)의 둔전을 청강의 둔세(屯稅)에 붙여 첨사로 하여금 규례에 따라 상납(上納)하게 하면, 태복에는 잃는 것이 없고 그 진에는 크게 보탬이 있어서 비로소 방수하고 수비하는 책임을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듣건대, 서림(西林)의 예(例)처럼 선천의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방수하게 할 것을 비국(備局)에서 복주(覆奏)하였다 합니다. 이것은 간편한 듯하나, 서림이 이제까지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대개 방수하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동림의 관방(關防)이 중요한 것은 서림과 비등하지 않은데, 더구나 중군으로써 방수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아뢴 대로 시행하라. 둔전은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윤4월 10일 기미

경상도 안동부(安東府)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달걀만하였다.

 

윤4월 11일 경신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친림하여 증광 문무과(增廣文武科)의 과방(科榜)을 발표하였다.

 

병조 판서 이창의(李昌誼)가 무과의 신방 출신(新榜出身)은 구례에 따라 모두 서북(西北)에 부방(赴防)하게 하기를 주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경과(慶科)이니 특별히 부방을 면제하되, 이 뒤로는 영구히 구례를 준수하라."
하였다. 이창의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사람을 뽑는 것은 본디 인재를 수용하여 기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무직(武職)은 벼슬자리가 적어서 구처(區處)할 수 없으므로 늙어서 머리가 희어도 적은 녹(祿)도 받지 못하여 홍패(紅牌)를 안고 길에서 구걸하니,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하기에 알맞습니다. 각 군문(軍門)의 장관(將官)들 이외의 모든 녹을 주는 자리에 반드시 출신을 주재(主宰)로 삼아 조용(調用)한다면, 과거를 중시하고 잡기(雜技)를 천시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윤4월 12일 신유

헌부(憲府)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왕자·왕손이 다 내정(內庭)에 들어가 행례(行禮)하였다. 이제는 행례할 때에 부마(駙馬)도 다 내정에 들어가고 종반(宗班)은 신문(神門) 밖에서 행례하라."
하였다. 효장묘(孝章廟)·의소묘(懿昭廟)에 들러 밤에 환궁(還宮)하였다.

 

윤4월 13일 임술

전 참판 윤심형(尹心衡)이 졸(卒)하였다. 윤심형은 청렴하고 지조를 지켜 벼슬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의리가 펴지지 않았다 하여 결심하고 벼슬하지 않아서 조식(粗食)도 자주 걸렀으나 기쁘게 자처하였으니, 용퇴(勇退)한 일은 사람들이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윤4월 14일 계해

심성진(沈星鎭)을 대사헌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대사간으로, 최재흥(崔載興)을 지평으로, 조숙(趙)·송문재(宋文載)를 교리로, 이익정(李益炡)을 판의금으로, 조동진(趙東晉)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필선(弼善) 권기언(權基彦)이 상서하여 서연(書筵)을 자주 열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조동제(趙東濟)를 진도군(珍島郡)에 정배(定配)하였다. 이에 앞서 평안 감사 이태중(李台重)이, 조동제가 전에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맡았을 때 담비·인삼[貂蔘]을 더 받아들이고 연수(宴需)를 백성에게서 거둔 따위 일을 장문(狀聞)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동제는 전에 곤수(閫帥)를 지낸 자로서 변방의 수령(守令)이 되어 범한 것이 이러하니, 이것을 엄히 징계하지 않으면 어떻게 변방 백성을 위로하겠는가?"
하고, 금부(禁府)의 남간(南間)에 가두고 위엄을 베풀어 엄히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공사(供辭)가 올라오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이에 가득히 장황한 것이 한편으로는 교만하고 한편으로는 속이는 것이다. 끝내 직고(直告)하지 않으면 종가(鐘街)에서 팽형(烹刑)에 처해야 할 것이다."
하자, 홍상한(洪象漢)·홍봉한(洪鳳漢) 등이 힘껏 조동제를 감쌌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만 정배하고 금고(禁錮)하라고 명하였다.

 

윤4월 15일 갑자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윤4월 16일 을축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친히 관학 도기 유생(館學到記儒生)을 시험하고, 강(講)에서 으뜸을 차지한 이수(李遂)와 제술(製述)에서 으뜸을 차지한 윤경룡(尹慶龍)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유생 양우범(梁禹範)의 강이 끝났을 때에 임금이 통생(通栍)을 내려 하였으나, 시관(試官) 남유용(南有容)이 귀가 먹어서 임금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약생(略栍)을 내니, 임금이 노하여 남유용을 갈라고 명하였다. 시관 이유수(李惟秀)가 구제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유수는 할아비를 저버리고 아비를 저버리고서 당습(黨習)을 달갑게 여기니,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
하였다. 그 뒤에 연신(筵臣)의 말에 따라 하교를 도로 거두었다.

 

윤4월 17일 병인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본감(本監)의 관원 안국빈(安國賓)·이세연(李世淵)·김태서(金兌瑞) 등이 《신법중성기(新法中星記)》와 《오야배시법(五夜排時法)》을 얻어서 옛 방법을 참고하여 신법(新法)에서 밝혀 《누주통의(漏籌通義)》 1본(本)을 지어 냈는데, 지금 행용(行用)한 데에 차이가 없으니, 청컨대 모두 가자(加資)하여 노고에 보답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윤4월 18일 정묘

상존호 도감(上尊號都監)의 의궤(儀軌)가 완성되었다.

 

윤4월 19일 무진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진상(進上)하는 전복[鰒魚]이 날이 더우면 썩어서 입에 가까이 할 수 없다."
하자, 대답하기를,
"이는 기강이 해이한 탓이니, 엄히 신칙하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부(海夫)에게 폐해가 됨이 없겠는가? 나는 바다 속의 전복 하나하나가 다 대단히 고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대내(大內)에서 자전(慈殿)께 잔치를 베풀 때와 의소(懿昭)의 입묘(入廟) 때에 전복을 쓰려 하였으나, 폐해가 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하였다.

 

효자(孝子) 서태금(徐太金)·한수재(韓守材)의 여문(閭門)에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경기 지방에 호환(虎患)이 심하여 한 달 안에 먹혀 죽은 자가 1백 20여 인이었다. 이천(利川) 백성 서차봉(徐次奉)이 호랑이에게 물려 갔는데 서태금이 그 꼬리를 잡고 따라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죽었다. 한수재의 어머니도 호랑이에게 물려 갔는데 한수재가 막대기를 잡고 호랑이를 쫓다가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죽었다. 도신(道臣)이 이 일을 아뢰니,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고 뒤에 또 여문에 정표하라고 명하였다.

 

윤4월 22일 신미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친림(親臨)하여 문신 한학강(文臣漢學講)을 행하였다.

 

윤4월 23일 임신

금오(金吾)에 지체되어 있는 수인(囚人)을 소결(疏決)하고, 전라 감사 서명구(徐命九)를 파면하였다. 임금이 전 무안 현감(務安縣監) 이극록(李克祿)이 편죽 가미(片竹價米)를 이미 결역(結役)에서 거두고 또 호역(戶役)에서 받아들였다 하여 고신(告身) 3등을 삭탈하는 율(律)을 시행하고, 또 감사가 그릇된 전례를 답습하여 허가하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하여 그 벼슬을 파면하였다.

 

윤4월 25일 갑술

이득종(李得宗)을 승지로, 이창수(李昌壽)를 대사간으로, 이택징(李澤徵)을 장령으로, 이창임(李昌任)을 정언으로, 남태회(南泰會)를 교리로, 조운규(趙雲逵)를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장령 권신(權盡)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에서 언책(言責)을 둔 것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고 관원의 부정을 규명하기 위한 것인데, 요즈음 대각(臺閣)에 있는 자는 오직 규피(規避)를 일삼아서, 한번 대각에 나아가거나 한번 글을 올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렇게 하여 마지않으면 장차 이목(耳目)인 관원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은 까닭 없이 패초(牌招)를 어긴 자는 모두 견파(譴罷)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서(中書)의 벼슬은 후설(喉舌)의 임무를 맡아 백료(百僚)를 감독하므로 사의(私意)를 품고 공론을 업신여길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정고(呈告)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지럽고 정사(政事)를 여쭙는 것이 잇달아서, 친분에 끌리어 예쁘게 보이려고 힘쓸 줄만 아니, 전후의 해방(該房) 승지를 견책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헌납 유건(柳謇)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탐오의 풍습이 크게 방자해져서 백성이 날로 고달퍼 갑니다. 대조(大朝)께서 전후에 탐오를 징계하신 법이 지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장오(贓汚)를 범하는 관리는 오히려 그칠 줄 몰라서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조동제(趙東濟)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가 본부(本府)에 있을 때에 탐오를 비방하는 것이 낭자하여 온 경내가 시끄러웠습니다. 다행히 도신(道臣)이 들추어냄에 따라 왕부(王府)에 명하여 신문하고 가두게 하시기에 이르렀으므로, 관서(關西) 백성이 비로소 법이 있는 줄 알고 인정(人情)이 모두 시원하다고 하였는데, 미처 구핵(究覈)하기 전에 문득 짐작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셨으니, 형정(刑政)은 마땅함을 잃고 징려(懲勵)할 방도가 없습니다. 신은 조동제를 엄히 신문하여 그 죄를 명백히 바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관(言官)이 말 때문에 죄를 얻은 것을 동료 대간(臺諫)이 상달하여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것이 대간의 체례(體例)로는 당연합니다. 접때 김회원(金會元)이 죄받은 뒤에 정술조(鄭述祚)가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었겠습니까? 전 정언 정유(鄭楺)는 공의(公議)를 업신여기고 문득 정달(停達)하였으니, 이러한 대풍(臺風)은 일찍이 듣지 못한 것입니다. 신은 정유에게 파직의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기의 산골에 있는 고을은 가장 심한 흉년을 당하였으니, 그 어루만지고 돌보는 책임은 수령(守令)에게 있는데, 양근 군수(楊根郡守) 임수관(任守寬)은 이미 정신이 흐리고 병들었으며 게을러서 직무를 힘쓰지 않고 조적(糶糴)에 관한 문서를 모두 향임(鄕任)에게 맡겼으며 백성이 그 낯을 보지 못한 것이 몇 달인지 모르므로 온 경내의 근심과 원망이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신은 임수관을 빨리 갈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앞서 홍경보(洪鏡輔)와 허채(許采)가 함께 조태상(趙台祥)을 추기어 조중회(趙重晦)를 논하게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홍경보가 시위(侍衞)로 나온 것을 임금이 보고 그 늙은 것을 가엾이 여겨 수령으로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윤4월 26일 을해

경상 감사 이이장(李彛章)이 거제(巨濟)에 여역(癘疫)이 치성(熾盛)하여 죽는 사람이 잇달고 사천(泗川)에서 농우(農牛)가 들에 나가면 곧 절로 죽는다고 장달(狀達)하였다.

 

윤4월 28일 정축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해민(海民)은 전에 일차 진상(日次進上)의 역(役)이 있으므로 본관(本官)에서 그 신역(身役)을 면제하였으나,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한 뒤에 여러 가지 책응(策應)을 모두 면제하였으니, 대동(大同)과 양역(良役)을 어찌 다시 면제하여 힘들고 덜한 것이 고르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뒤로는 각 고을의 포민(浦民)도 등록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홍봉한이 또 아뢰기를,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은 무신년044)  의 훈신(勳臣)으로서 나이가 늙고 가난하여 자활(自活)하지 못하니,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훈신이 장신(將臣)에게서 걸식(乞食)하니, 가엾다."
하고, 균역청에서 관장하는 충익목(忠翊木) 10동(同)을 주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훈부(勳府)의 재물로 훈신의 곤궁을 구제하는 것은 본디 잘못이 없으니, 그 급한 것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세자(世子)에게 보이고 말하기를,
"오자지가(五子之歌)045)  에 어찌 ‘집을 높이 짓고 담에 아로새긴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목릉(穆陵)046)  의 옛일을 본받아 어원(御苑)에 두 칸의 초옥(草屋)을 지어 글을 읽으며 소요하고 싶으나, 오늘의 초옥이 내일에 혹 와옥(瓦屋)이 될 수도 있으니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터를 살펴보면 큰 나무를 베야 할 것이니 또한 ‘바야흐로 자라는 것을 꺾지 않는다.’는 뜻에 어그러지므로, 몇 해 동안 뜻이 있어도 하지 않았다. 요즈음 동랑(東廊)의 중수(重修) 때문에 호야성(好邪聲)을 듣고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옛날의 경궁(瓊宮)·요대(瑤臺)는 또한 무슨 마음이었는가? 아! 원량(元良)이 이 뜻을 본받는다면 어찌 한 집을 짓고 한 백성을 부리겠는가? 추성(鄒聖)047)  은 말하기를,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은 자가 일통(一統)할 수 있다.’ 하였다. 임금은 구오(九五)048)  의 자리에 있어 생살(生殺)의 권세를 잡았으니, 그 기(氣)에 일임(一任)한다면 팽형(烹刑)을 면할 자가 드물 것이다. 근래에 이정사(釐正使)를 보내어 불법(不法)을 살피게 하여 힘드는 것을 꺼리지 않고서 친히 결단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백성을 위하고 한편으로는 형벌을 신중히 하기 위한 것이다. 예전에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한 아 대부(阿大夫)049)  를 팽형에 처하였으나 그 뒤에는 다시 팽형에 처한 자가 없었다. 성심(誠心)으로 기강을 세운다면 한 관리를 팽형에 처하더라도 그 나라가 크게 다스려지겠으나, 법을 엄하게 하는 것을 숭상하기만 한다면 하루에 열 사람을 팽형에 처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또 혹 임금이 싫어하는 낯빛을 하는데도 직간하였다 하여 죽이거나 참소(讒訴)를 믿고 죽인다면, 어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뜻이겠는가? 아! 원량은 힘쓰고 삼가라."
하였다. 이어서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에게 명하여 정서하여 병풍을 만들어 동궁(東宮)에 바치게 하고, 하교하기를,
"뒤에 사왕(嗣王)이 토목 일을 힘쓰려 하거든 탁지(度支)의 장(長)이 된 자가 이것으로 규면(規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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