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1권, 영조 30년 1754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3. 14:26
반응형

5월 1일 기묘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영릉(寧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고, 이어서 예방 승지 한광회(韓光會)에게 명하여 봉심(奉審)하고 오게 하였다.

 

이규채(李奎采)를 승지로 삼았다.

 

5월 4일 임오

임금이 각릉(各陵)의 단오제(端午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이어서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재전(齋殿)에서 청재(淸齋)하였다.

 

5월 5일 계미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영희전의 단오제를 행하고 오시(午時)에 환궁(還宮)하였다. 임금이 재전에 있을 때에 전관(殿官)으로 하여금 전내(殿內)를 봉심(奉審)하게 하고 곧 또 친히 가서 봉심하였다. 세 번 이렇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친히 보는 것만 못하다. 내 나이가 이미 예순이니, 다시 오기를 기약하기 어렵다."
하고, 전관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영희전지(永禧殿志)가 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지(志)를 지을 때에 어느 해 어느 달에 세 번 봉심하였다고 써서 사왕이 보게 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전(殿)은 다른 곳과 달라서 내가 장차 제5실(第五室)에 따라 들어간다면 나에게는 영광이겠으나, 뒤에 제6실·제7실을 더 설치하여 잇달아 들어가 마지않는다면 이 폐단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미 하교한 것이 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6년 동안에 단오제의 친향(親享)이 이제 이미 세 번인데, 더구나 이제 삼다(蔘茶)를 마시면서 한여름에 제사를 지내니, 참으로 뜻밖이다. 특이한 은전(恩典)을 보여야 하겠으니, 전관 두 사람을 모두 6품 벼슬로 올리라."
하였다.

 

5월 6일 갑신

민백상(閔百祥)을 부제학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허급(許汲)을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5월 7일 을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입시하여 면직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여 영중추부사로 삼는다고 명하였다.

 

조명채(曹命采)·성천주(成天柱)·한광조(韓光肇)를 승지로, 채제공(蔡濟恭)·이현중(李顯重)을 교리로, 이후(李)를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이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를 소견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신은 양역(良役)을 변통하는 일에 본디 정성을 기울였는데, 전하께서 신의 말을 굽어 채택하고 위임하여 성취하도록 책임지우셨으므로, 신이 우러러 성의(聖意)에 감동하여 반드시 힘을 다하려 하였습니다마는, 비방이 치열하여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오직 일을 끝내고 물러갈 것을 청하려고 마음먹었었기 때문에 일찍이 임신년050)   균청 사목(均廳事目)이 끝난 뒤에 글을 올리고 하직을 고하였는데, 이제 물러갈 것을 청한 끝에 갑자기 전형(銓衡)의 벼슬을 받았으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또 이제 조급히 권세를 다투는 폐습이 나날이 심해져서, 저녁에 옮겨야 할 것인데 반드시 아침에 거두려 하고, 첫째가 앞에 있는데 반드시 둘째를 올리려 하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교묘히 직무를 게을리하는 것이 미련한 듯하고 미친 듯합니다. 신이 무릅쓰고 출사(出仕)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여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고 바라지 않는 것을 얻었다고 마음먹을 것이니, 얼마 안가서 곧 좌절당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균역(均役)에서도 능히 비방을 견디었으니, 전지(銓地)에서도 그렇게 하도록 하라. 능히 공도(公道)를 넓히다가 이 때문에 비방을 받는다면, 내가 경을 위하여 돕겠다."
하자, 홍계희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홍계희의 간사한 꼴은 온 세상이 그 마음속을 보듯이 잘 아나, 여우처럼 홀려서 총애를 굳히는 술책은 이날의 연주(筵奏)보다 교묘한 것이 없었다. 먼저 균역의 일을 말하여 원망을 견디면서 봉공(奉公)한 것을 밝히고, 중간에 세태(世態)와 인정(人情)에 언급하여 속으로 뒷날 스스로 해명할 여지로 삼으며,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며 명을 따라서 마치 은교(恩敎)에 감격하여 억지로 힘쓰는 것처럼 하였다. 아! 그 마음이 참으로 그 말과 같다면 어찌하여 그 행하는 것이 일체 상반되는가? 그 스승이 매우 꾸짖은 말을 꺼리면 마음대로 몰래 원고(原稿)에서 빼고, 문형(文衡)을 꾀할 만한 길을 엿보면 체면을 차리지 않고 비밀히 요얼(妖孼)에게 붙었으니, 이 두어 가지는 그의 평생을 단정할 만하다. 그러나 또 집에 있을 때에는 학문를 자처(自處)하고 조정에 서서는 욕심 없고 조용한 것을 자부(自負)하였으니, 누구를 속이려는가? 하늘을 속이려는가? 그렇다면 그가 말한 세태와 인정이라는 것은 바로 자신을 말한 것이니, 참으로 한탄할 만하다.

 

승지 이경조(李景祚)·최성대(崔成大)를 파면하였다. 이때 포청(捕廳)의 장교가 작은 일로 정원(政院)의 하인과 다투어 결박하기에 이르렀는데, 승지가 듣고 패(牌)를 내어 포청의 장교를 나오게 하였더니, 정원의 하인이 포청의 장교를 때려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연신(筵臣)이 임금에게 아뢰어 그때 정원에 있던 승지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시좌(侍坐)하게 하고 교리 남태회(南泰會) 등을 불러 순전(舜典)051)  을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요순(堯舜)의 심법(心法)과 역대(歷代)의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졌던 자취를 가지고 세자에게 가르쳐 일렀다. 강이 끝나고서 검토관(檢討官) 채제공(蔡濟恭)이 육진(六鎭)의 수령이 자주 갈려 폐단을 끼치는 상황을 아뢰고, 이제부터 갈리려고 꾀하는 자에게는 그 곳에 정배(定配)하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채제공은 막 북평사(北評事)에서 갈려 돌아왔다.

 

5월 9일 정해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서 소대하여 관저장(關雎章)052)  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잠 못 이루어 엎치락뒤치락하고 자나깨나 생각하였다는 것은 문왕(文王)의 일인가?"
하니, 교리 채제공이 말하기를,
"금슬(琴瑟)·종고(鍾鼓)로 친애하고 즐겼다는 것을 보면 바로 문왕의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 성천주(成天柱)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도 어렸을 때에는 문왕의 일로 보았으나, 뒤에 대주(大註)를 보니 자나깨나 생각하고 잠 못 이루어 엎치락뒤치락하였다는 것을 풀이하여 ‘찾아도 얻지 못하면 군자(君子)에게 짝하여 내치(內治)의 아름다움을 이룰 수 없으므로 매우 근심스러운 생각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하고, 금슬과 종고를 풀이하여 ‘다행히 얻으면 군자에게 짝하여 내치를 이룰 수 있으므로 그 희락(喜樂)하고 존봉(尊奉)하는 뜻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말의 뜻을 상세히 음미하면 분명히 궁인(宮人)의 일입니다. 문왕이 어찌 스스로 군자라 칭할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문왕이 후비(后妃)에 대하여 어찌 존봉한다 하겠습니까? 고(故) 집의 김창흡(金昌翕)의 문집(文集)에 이 뜻을 논한 것도 신의 뜻과 같으니, 신은 더욱이 자신(自信)합니다."
하였다. 교리 남태회(南泰會)가 말하기를,
"주자(朱子)의 소주(小註)로 보면, 궁인을 형용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문왕의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신은 소주를 옳게 여깁니다."
하니, 성천주가 말하기를,
"대주는 주자가 말년에 확정한 논설이고 소주는 초년에 확정하지 못한 논설입니다. 경서(經書)의 소주는 본디 유현(儒賢)이 편집한 것이 아니라 영락 연간(永樂年間)053)  에 설국(設局)하여 만든 것입니다. 설국하여 만든 것은 본디 지극히 정밀하기는 어려운 것이니, 중국인들 어찌 우리 나라와 다르겠습니까? 신이 춘방관(春坊官)으로서 영(令)을 받들어 홍범(洪範)054)  의 소주를 촬요(撮要)하여 써서 바칠 때에 본문(本文)의 출처를 상고하여 보았더니, 소주가 틀린 곳이 매우 많았습니다."
하자, 남태회가 말하기를,
"참으로 승지의 말과 같다면 금슬이 부부(夫婦)에게만 쓰이지 않고 또한 장차 노주(奴主)에게 쓰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유신(儒臣)의 말이 매우 시원하다."
하였다. 성천주가 말하기를,
"유신의 말과 같다면 부부를 칭하는 데에 또한 ‘종고’ 두 글자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금슬’ 두 글자에 얽매여 이 장(章)을 오해하는 것은 속된 의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신이 깨닫지 못한 것이 또한 어찌 괴이하겠습니까? 숙종조(肅宗朝) 경신년055)   주강(晝講) 때에 이 장을 강하였었는데, 고 부제학 임영(林泳)은 옥당(玉堂)으로서 진강(進講)하였고 산림(山林)의 유현도 입시하여 다들 문왕의 우락(憂樂)이라 하였으나, 김창흡의 문집에 칠성(七聖)이 다 헷갈렸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문의(文義)를 다투는 것을 보면, 시상(時象)의 두 마음 가졌음을 또한 추측할 만하다."
하였다. 임금이 춘방관 이수봉(李壽鳳) 등을 불러 묻기를,
"동궁(東宮)의 강학(講學)에는 요즈음 진취하는 보람이 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예학(睿學)이 고명(高明)하여 때때로 혹 묻는 것은 다 뜻이 깊은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이 매우 오래 서연(書筵)을 멈춘 것을 내가 매우 민망히 여겼었는데, 일전에 내가 꾸짖어 가르쳤더니 동궁이 자못 뉘우치는 뜻이 있었다. 그대들이 보도(輔導)하는 도리로서는 본디 서연에 임하여 권강(勸講)하고 일에 따라 규면(規勉)해야 한다. 오늘 그대들이 주달한 것은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성안으로 도로 들어와 숙명(肅命)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위유(慰諭)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계상(階上)에서 태종 황제(太宗皇帝)의 기신(忌辰)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5월 10일 무자

호랑이가 경덕궁(慶德宮)에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온 변이 있었다. 이제 사씨(史氏)가 이것을 쓰면 반드시 ‘호랑이가 대궐 안에 들어왔으니, 이것은 음(陰)이 성(盛)할 조짐이다.’ 할 것이다. 천진교(天津橋)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 요부(堯夫)056)                  가 탄식하였고, 변경(汴京)의 홍수를 이강(李綱)057)                  이 근심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그 형상을 보지 않고 그 그림자를 살피기를 바란다.’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그림자를 살필 방도가 없겠는가?"
하였다.

 

5월 10일 무자

교리 남태회·채제공 등이 동궁에게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호랑이는 산림(山林)의 나쁜 짐승입니다.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다니어 감히 사람과 섞일 수 없으므로, 옛사람이 반드시 없어야 할 일을 말할 때는 ‘저자에 호랑이가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저자의 호랑이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도성의 거리를 통과하여 금중(禁中)의 매우 엄한 곳에 느닷없이 뛰어든 것이겠습니까? 높은 담과 깊은 궁궐은 백신(百神)이 지키는데, 이것이 어떻게 이르렀습니까? 예전 당(唐)나라 대력(大曆)058)   4년에 호랑이가 경사(京師)에 들어오고 송(宋)나라 건중(建中)059)   4년에 호랑이가 선양리(宣陽里)에 들어왔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에 호랑이가 수녕궁(壽寧宮)에 들어오고 우왕(禑王) 때에 경사에 들어와 인물(人物)을 많이 해쳤는데, 화란(禍亂)이 뒤따르는 것이 부응(符應)하여 어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저하(邸下)께서는 그 세상을 어떠한 세상으로 여기십니까? 송나라가 거울삼아야 할 것은 당나라인데 거울삼을 줄 모르고, 우왕이 거울삼아야 할 것은 충렬왕인데 거울삼을 줄 몰라서 마침내 서로 잇따라 위망(危亡)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어찌 매우 딱하지 않겠습니까? 그윽이 보건대, 저하께서 대리(代理)하신 수년 동안에 이미 일의 시초를 이어받지 않을 조짐이 있습니다. 백관(百官)이 직무를 게을리하여 모든 일이 산만해져 정사(政事)하는 당(堂)에는 먼지가 쌓이고 대각(臺閣)에서는 망설이는 것이 버릇이 되었으니, 조정(朝廷)을 알 만합니다. 풍속이 날로 어지러워지고 인심이 날로 무너져 벼슬하지 못한 선비는 한 글자도 읽지 않고 글을 잘하는 무리를 길러서 과갑(科甲)을 꾀하며 벼슬한 선비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세력 있는 길을 뚫어서 자급(資級)을 다투니, 세도(世道)를 알 만합니다. 오늘의 재앙도 어찌 오게 한 까닭이 없는데 그렇겠습니까? 저하께서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로서는 빨리 천심(天心)을 따르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을 것인데, 대조(大朝)는 곧 저하의 하늘이니, 대조의 마음이 기쁘시면 천심이 반드시 기쁠 것이고 대조의 마음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천심이 반드시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대조께서 면려(勉勵)하신 가르침을 본받아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어 먼저 다스리는 근본을 세우고 뭇 신하를 독려하여 공적을 이루는 보람을 책임지게 하며, 풍속을 닦는 데에는 예의(禮義)·염치로 먼저 하고 세도를 돌이키는 데에는 명절(名節)·학문으로 북돋우어 힘써 성심(聖心)을 기쁘시게 하고 우러러 천견(天譴)에 보답하신다면, 하찮은 한낱 짐승이 어찌 재앙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5월 11일 기축

임금이 병조 판서 이창의(李昌誼)·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 등을 인견하고 재앙을 그치게 할 방책을 물었다. 우부승지 성천주가 아뢰기를,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근본은 본디 만화(萬化)의 근원에 달려 있습니다마는, 오늘날 융정(戎政)이 허술하고 변비(邊備)가 오활한 것은 모두 근심스러우니,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자주 불러 함께 강구하여 확립하셔야 하겠습니다. 훈련 대장이 바야흐로 입시하였으니, 먼저 융정을 신칙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김성응에게 이르기를,
"우리 동방이 병비(兵備)가 허술한 것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임진란(壬辰亂) 때에 오성 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이 도승지로서 불을 잡고 중전(中殿)을 앞에서 인도하였으니, 경상(景像)을 상상할 만하다. 인묘(仁廟) 때에 의병을 일으킨 공신(功臣)은 모두 곰이나 호랑이처럼 용맹한 무리인데, 일찍이 《남한일기(南漢日記)》를 보매 ‘신하들이 성에 들어올 때 다들 혼미하여 일을 살피지 못하였다.’ 하였으니, 그때의 일도 알 만하다."
하였다. 성천주가 말하기를,
"임진란 때에는 서울에 오위(五衞)의 군사가 있었을 뿐이므로 숙위(宿衞)가 외롭고 약하였으나, 이제는 오위의 군사가 적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외방(外方)의 속오(束伍)는 거의 어린아이 장난과 같고 변지(邊地)의 방어(防禦)는 더욱이 매우 허술하니, 이것은 1백 년 동안 태평하였기 때문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전하께서 일찍이 융정에 유의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옛말에, ‘천자(天子)에게 도(道)가 있으면 지키는 일은 사방의 오랑캐에 있고 제후(諸侯)에게 도가 있으면 지키는 일은 사방의 국경에 있다.’ 하였습니다. 서울에만 유의하고 변지의 일에 유의하지 않으면 좋은 계책이 아닐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성응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뒤로 차대(次對)할 때에 경은 반드시 호환(虎患)과 변비의 허술함을 원량(元良)에게 말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해야 한다."
하였다. 성천주가 말하기를,
"신이 병인년060)   겨울 소대(召對) 때에 ‘분발 진려(奮發振勵)’ 넉 자로 우러러 권면(勸勉)하였더니, 성상께서 하교하시기를, ‘기운이 없기는 하나 9년 동안 이어지는 홍수가 있으면 산을 따라 나무를 벨 것이고, 강역(壃域)에 일이 있으면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쓸 것이다.’ 하셨으므로 성인(聖人)의 지기(志氣)가 쇠약해지지 않은 것을 지금까지 흠탄(欽歎)하고 있는데, 근년 이래로 쇠퇴가 심하십니다. 이제 한 표범의 재앙 때문에 갑자기 경동(驚動)하는 뜻을 가지셨으니, 이것이 바로 좋은 기회입니다. 이제부터 진려 분발하여 병인년 겨울에 하교하신 스물 여섯 글자를 대궐 안에서 편히 계실 때에도 늘 간직하신다면 무슨 일인들 하실 수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이 매우 좋다.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다스림에 현묵(玄默)061)  을 숭상하였으나, 한번 감천(甘泉)의 봉화(烽火)를 보고는 친히 세류영(細柳營)에서 고생하였으니, 과연 현묵만 하였을 뿐이 아니다. 이제 혹 일이 있으면 나도 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다마는, 어찌 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천주가 말하기를,
"하루에 임금이 보살피는 여러 가지 정무(政務)는 절반 이상이 부서(簿書)의 번거롭고 수없이 많은 일인데, 이제는 잗단 것을 모두 동궁(東宮)에게 맡기고 전하께서는 군국(軍國)의 큰일만 맡으셨으니, 이때에 멀고 큰 것에 유의하시면 천고(千古)의 큰 사업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을 굳게 맺고 강역을 삼가 지키며 인재를 얻고 저축을 많이 하는 것이 지금 긴요한 방도가 될 것이다."
하였다.

 

5월 12일 경인

정휘량(鄭翬良)을 부제학으로, 정홍순(鄭弘淳)을 승지로, 이게(李垍)를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소견하고 《시경(詩經)》 소남편(召南篇)을 강하였다. 교리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시경》에 이르기를, ‘양의 가죽에 흰 실로 다섯 곳을 꿰맸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절검(節儉)한 교화가 조정(朝廷)에 있는 자에게 미친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전하의 검덕(儉德)은 참으로 천고에 드문 바인데, 궐문(闕門)에서 한 걸음만 나가면 한 사람도 본받는 자가 없어서, 의복·저택에 앞다투어 지나친 사치를 숭상하여 장차 나라를 망치게 되었으니, 신은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
하고, 교리 남태회(南泰會)가 말하기를,
"전하의 검덕은 높으실지라도, 신은 아직 탐욕 때문에 한 사람을 죄주거나 청렴 때문에 한 사람을 표창하셨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사치하는 풍습을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하자, 채제공이 말하기를,
"신이 장로(長老)의 말을 들으니, 옛사람은 다 부유한 생활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고 조정에서도 이런 사람을 밉게 여겨 배척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힘쓰려고 생각하고 사치를 부끄러워하였다 합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아서 다들 의복·저택이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사람을 취하는 것도 이것으로 우열(優劣)을 삼으므로 서로 본떠서 풍속이 날로 무너지니, 신은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야강(夜講)을 행하였는데,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나는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예전에 경현당(景賢堂)에서 시강(侍講)하던 때가 생각나서 번번이 못 견디게 슬프므로 조강(朝講)·주강(晝講)도 차마 하지 못하는데, 이제 동궁(東宮)을 위하여 특별히 야강을 여니, 이는 또한 목동(繆彤)이 스스로 매질한 뜻062)  이다마는, 야대(夜對)라 하지 않고 야강이라 한 까닭은 경연(經筵)이 있고 나서야 소대(召對)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임금이 친히 주남(周南)063)  을 읽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요전(堯典)064)  을 나누어 읽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무릇 인산(因山) 때의 봉폐관(封閉官)과 입묘(入廟) 때의 대축(大祝)은 마찬가지인데, 임신년065)   정월의 봉폐관과 계유년066)   5월의 봉폐관은 가자(加資)하기도 하고 준직(準職)하기도 하였으니, 일이 매우 들쭉날쭉하다. 의소(懿昭)의 현궁(玄宮)을 내릴 때의 봉폐관 박사눌(朴師訥)은 마찬가지로 가자하고 입묘 때의 대축도 경술년067)   정월의 대축의 전례에 따라 가자하라."
하였다.

 

5월 13일 신묘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대략 호랑이의 재난으로써 경계를 아뢰었다. 공조 참판 김한철(金漢喆)이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 여러 신하들을 인접하실 때에 듣는 대로 답할 뿐이고 한마디 말도 논란하지 않으시니, 뭇 신하의 심정이 답답합니다. 예전에 우리 선조 대왕께서 조정에 임하여 말이 적으시므로 선정신 이이(李珥)·성혼(成渾)이 이 때문에 여러 번 권면(勸勉)하니, 문득 가납(嘉納)을 입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마음을 열어 논란하여 신하와 함께 논의하는 아름다움을 다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념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밤에 왕세자에게 명하여 시좌하게 하고 입직(入直)한 옥당(玉堂)의 관원을 불러 《소학(小學)》 입교편(立敎篇)을 강하였다. 끝나고나서 임금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소학》의 근본은 무엇인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경(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을 경이라 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본심(本心)을 지키고 방심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과연 괄목(刮目)할 만한 상대(相對)로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제 이 글을 강한 것은 한편으로는 원량(元良)을 힘쓰게 하고 한편으로는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아! 진신 대부(搢紳大夫)와 경외(京外)의 사서(士庶)가 《소학》으로 자제를 가르치는데, 학례강(學禮講)·조흘강(照訖講)이 근래 매우 해이하니, 이 뒤로는 옛 제도를 더욱 밝혀 한결같이 승보(陞補)의 예(例)에 따라 국자장(國子長)068)  이 추생(抽栍)하여 시강(試講)하는 것으로 영구히 정식(定式)하라."
하였다.

 

5월 14일 임진

유성(流星)이 심성(心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았으며 꼬리의 길이가 2, 3 척쯤이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강계(江界)에서 삼(蔘)을 사는 폐단을 물었는데, 의논들이 같지 않았다.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연례(年例)로 사는 50근(斤) 중에서 15근은 감제(減除)하고 10근은 본부(本府)의 호삼(戶蔘) 중에서 대동고(大同庫)에 옮겨 주는 것을 본조(本曹)에 정식(定式)에 따라 값을 주고 가져다 쓰면 줄이는 것이 꼭 25근이 되므로 강계 백성에게 혜택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서산(瑞山)의 관노(官奴) 성진(聖眞)이 본군(本郡)의 화약(火藥) 2백 80괴(塊)를 훔쳐 팔았으므로 본도(本道)의 장계(狀啓)가 있었습니다. 《속대전(續大典)》에, ‘군기(軍器)를 훔쳐낸 자는 계품(啓稟)하여 효시(梟示)한다.’ 하고, 소주(小註)에, ‘활 30장(張), 조총(鳥銃) 3병(柄) 이하는 사형(死刑)을 감면하여 정배(定配)한다.’ 하였으나, 화약·연환(鉛丸)은 거론한 것이 없으니, 위에서 재결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는 율(律)을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이번 사행(使行) 때에 시민(市民)이 으레 왜장검(倭長劍) 2병(柄)을 사서 바쳐야 하는데 1병은 겨우 4백 냥으로 샀으나 1병은 살 길이 없었고, 또 시민은 말하기를, ‘호조에 이미 통검계(通劍契)가 있는데 어찌하여 시민으로 하여금 사서 바치게 하는가?’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나의 검 값이 그렇게 많은가? 이 때문에 시민에게 폐해를 끼칠 수 없으니, 특별히 내장(內藏)의 왜장검 2병을 주고 시민이 비싼 값으로 사서 바친 것은 도로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수령(守令)으로서 하고(下考)를 받은 자는 반드시 다시 수령을 제수(除授)하여 고과(考課)를 지낸 뒤에야 비로소 승직(陞職)을 허락하므로 하고를 받았어도 세력이 있는 자는 이것을 빙자하여 수령이 될 수 있으나, 열 번의 고과에 열 번 상고를 받거나 다섯 번의 고과에 다섯 번 상고를 받은 자는 도리어 다시 제수되지 못하니, 이것은 매우 합당하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대전(大典)》의 2년을 지내야 서용(敍用)한다는 법을 엄수(嚴守)하여 사유(赦宥)를 당하더라도 탕척(蕩滌)할 수 없고 주년(周年)을 지내야 비로소 다시 수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열 번의 고과에 열 번 상고를 받으면 내직(內職)으로 옮기는 법은 음관(蔭官)에게만 시행하고 무관(武官)에게는 시행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엄히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행 사직(行司直)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호남(湖南)에서 진상하는 어종(魚種)은 영주인(營主人)이 방납(防納)하는 규례가 있으므로 당초에 포민(浦民)에게 침탈(侵奪)이 미치지 않았는데, 이제 금단(禁斷)하면 봉진(封進)을 빠뜨리는 폐단이 있을 뿐이 아니라 함부로 거두는 걱정도 끼칠 듯하니, 진상보(進上保)라는 명색의 4보(保)는 혁파하지 말고 전대로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균역청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좌의정이 천보가 말하기를,
"전 판서 이기진(李箕鎭)은 바야흐로 모상(母喪)을 당하였는데, 접때의 처분은 지나쳤습니다. 전 대제학 조관빈(趙觀彬)·전 유수 홍봉조(洪鳳祚)와 함께 모두 서용하소서."
하자,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서 묻기를,
"이기진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과연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그 어미가 앓을 때에 손가락을 끊기까지 하였고, 나이가 칠순(七旬)을 지냈어도 3년 동안 죽을 먹었습니다."
하였다.

 

이천보(李天輔)를 영의정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좌의정으로, 유척기(兪拓基)를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로, 서명구(徐命九)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윤득재(尹得載)를 병 때문에 갈고 김한철(金漢喆)로 차대하였다.

 

5월 15일 계사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장령 유건(柳健)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밤에 유신(儒臣)을 불러 친히 《자성편(自省編)》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누워서 유신을 본다면 늘 볼 수 있겠는데, 내가 일찍이 눕는 것을 경계하였으므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
하였다.

 

평안 감사 이태중(李台重)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도배 죄인(島配罪人) 조동제(趙東濟)를 작처(酌處)할 때에 연신(筵臣)이 조목조목 신구(伸救)하면서 몸소 살펴보았다고 대조(大朝)께 아뢰기까지 함을 보았는데, 신은 놀라움을 못 견디겠습니다. 신이 장계(狀啓)하여 조동제를 논한 것은 곧 초서(貂鼠)·인삼(人蔘)·환은(換銀)·수전(收錢) 네 가지 일입니다. 초서피에 대하여 세(稅)를 거두는 규례는 첫겨울에 산에 들어가는 수를 성책(成冊)하였다가 산에서 내려온 뒤에 그 잡은 것에 따라 한두 영(領)을 나누어 거두는 것이 본디 예전부터 행해 온 고을의 규례인데, 이제 조동제는 그 잡은 초서의 좋고 나쁜 것이 섞이는 것을 걱정하여 장교(將校)를 많이 정하여 좁은 어귀에서 기다렸다가 모두 거두어 모아 어느 사람이 잡은 것을 물론하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물건을 가려서 그 세를 받아들이고 그 나머지도 싼값으로 억지로 샀으니, 편비(褊裨)·아객(衙客)이 따라서 나쁜 짓을 본뜨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길목에서 기다려 억지로 거두어 모두 관가에 들이는 일이 마치 해마다 행해야 하는 규례인 것처럼 하였으니, 사람의 무상(無狀)한 것이 어찌 이런 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세삼(稅蔘)에 관한 일은 조동제가 탐욕하지 않더라도, 국역(國役)이 점점 많아지고 백성이 캐는 것은 점점 적어지므로 이미 강계(江界) 백성의 뼈아픈 폐단이 되었는데, 이러한 때에 잔인하게 그 호수(戶數)를 늘리고 그 저울을 무겁게 하여 몹시 괴로운 백성을 거듭 괴롭히어 엄한 곤장을 치는 일이 남자에게 두루 미치고 칼을 씌워 가두는 일이 부녀에게 미치므로, 처자를 팔아 다른 곳에서 사서 가져와도 오히려 채우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따라서 고향을 떠나 흩어진 자가 겨울·봄 이래로 이미 천수(千數)를 넘었다 합니다. 신이 입경(入境)할 때에 늙은이와 아이들이 달려와서 앞을 막고 뒤를 가려 변통할 것을 허락받았는데, 강한 자는 노여움이 낯빛에 보이고 약한 자는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니, 그 침학(侵虐)이 물불보다 참혹하였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2천 6백 냥의 은자(銀子)를 부상(富商)에게서 바꾼 것은 그도 숨기지 못하여서 간 곳이 분명하다고 명백히 공초(供招)하였으나, 그 나열한 여러 가지를 살펴보면 참으로 이른바 욕교 반졸(欲巧反拙)이라는 것입니다. 원금(原金)이 다 있다면 서울의 영문(營門)과 본부(本府)의 각고(各庫)에서 수를 셈하여 나누어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것인데, 조태훈(趙泰勳) 등 여러 사람에게 어찌하여 다시 은을 바꾸어 받아들이게 하였겠습니까? 시임(時任)인 부사(府使)와 임장(任掌)인 여러 사람에게 물었더니, 다들 돈과 곡식으로 채워 받아들이고 문서에는 은자라고 가짜로 적었다 하는데, 그가 문안(文案)을 살피지 않았다 하여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은 도리어 우습습니다. 창고에 있는 것이 이미 이러하다면 여러 상사(上司) 영문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돈으로 내어 주고 요리하여 은을 바꾸어 서울 영문의 여러 곳에 상납한 것이 분명하여 틀림없는데, 강계에서 바꾼 은자가 끝내 간 곳이 없는 죄는 장차 어떻게 핑계하겠습니까? 연수(宴需)로 돈을 거둔 것으로 말하면 그에게는 하치않은 물건의 작은 일이고 신도 그것이 잗단 일인줄 압니다마는, 본부의 풍유(豊腴)는 팔도의 고을들 중에서 으뜸이 될 것이므로 이런 일을 하지 않더라도 넉넉히 기쁨을 나타내고 경축할 수 있을 것인데, 과외(科外)로 거둔 것이 있으니, 신이 끝에 거론한 것은 대개 그 이익이 있는 바가 작건 크건 곳에 따라 모아 들여 근심하는 백성이 괴로움을 갖추 받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온갖 계책으로 변명하는 것은 진실로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한스러운 것은 중신(重臣)이 일마다 변명하고 화랑(花郞)이니 반인(泮人)이니 하는 따위 말로 주광(黈纊)을 우러러 번거롭히기까지 한 것입니다. 신은 참으로 몹시 아깝게 여기고 또 연석(筵席)의 체례(體例)가 엄하지 않은 것을 슬프게 여깁니다."
하였다. 대개 가리킨 중신은 홍상한(洪象漢)인데, 그 뒤에 홍상한이 상서하여 연석에서 아뢴 것이 사실과 틀렸음을 변명하니, 예사로운 답을 내렸다.

 

5월 16일 갑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전경 문신강(專經文臣講)을 행하였다.

 

5월 17일 을미

땅이 흔들렸다.

 

임금이 당상 무신 삭시사(堂上武臣朔試射)에 친림(親臨)하려 하다가 비가 내리기 때문에 멈추라고 명하였다. 연생문(延生門)에 나아가 무신들에게 하유하기를,
"군중(軍中)에서는 신(信)을 주로 삼으므로 위문후(魏文侯)와 우인(虞人)이 회렵(會獵)한 고사(故事)에 따라 스스로 정지하였으니, 쾌청(快晴)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밤에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하였다. 교리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북도(北道)는 잇달아 참혹한 흉년을 당하였는데, 온성(穩城)이 더욱이 심하여 사방의 들판이 쓸쓸하고 닭이나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지난해에 농사가 조금 잘되었다고 하나 복구할 희망이 까마득히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우공(禹貢)069)  에 이른바 ‘치수(治水)하고 13년이 지난 다음에 부세(賦稅)를 다른 고을과 같게 한다.’는 뜻으로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논밭에 대해서는 넉넉히 급재(給災)하고 다시 일구는 대로 세를 매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북도 사람은 곡식을 천하게 여기므로 갑자기 흉년이 들면 온 도내가 어쩔 줄 모르니, 농사가 조금 잘되었을 때에 신칙해 곡식을 저축하여 뒷날에 대비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도신에게 신칙하여 착실하게 곡식을 교제창(交濟倉)에 저축하게 하도록 하라."하였다. 승지가 의주 부윤의 장계(狀啓)를 읽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는 청황(淸皇)이 몽고(蒙古) 지경과 흑룡강(黑龍江)으로 해서 심양(瀋陽)에 이르렀으므로 사신(使臣)이 여러 날 체류하였으나, 올해에는 심양에 먼저 온다 하니 사사(使事)가 매우 편하겠다."
하였다.

 

5월 18일 병신

이창수(李昌壽)를 승지로, 윤득재(尹得載)를 대사간으로, 최익수(崔益秀)를 장령으로, 윤학동(尹學東)을 수찬으로 삼았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를 보내어 숭릉(崇陵)의 사초(莎草)가 무너진 곳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봉심하라는 명이 내려졌으나 영상(領相)이 미처 들어오기 전에 임금이 잇달아 엄한 분부를 내렸는데, ‘내가 몸소 봉심하겠다’는 분부까지 있었다. 영상은 이미 명에 따랐는데, 또 좌상(左相)이 들어오지 않았다 하여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좌상은 반드시 명에 따를 줄 알았는데 이제까지도 이러하니, 반드시 연고가 있는 듯하다. 내가 친히 가서 물으려 하니, 임금이 친히 상신(相臣)을 방문한 전례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상고해서 여쭙게 하라."
하였다. 그래서 김상로(金尙魯)가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곧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김상로가 사교(辭敎)가 지나치다고 말하니, 임금이 상고해서 여쭈라고 한 하교를 도로 거두었다. 이천보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능침(陵寢)이 중하기 때문에 경들을 볼 수 있었다."
하였다.

 

5월 20일 무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친림하여 무신 당상 삭시사(武臣堂上朔試射)를 행하였다.

 

박사눌(朴師訥)을 승지로 삼았다.

 

부제학 정휘량(鄭翬良)이 춘당대에 입시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 늘 삼대(三代)의 황극(皇極)의 정치를 기약하셨는데, 신의 형(兄)070)  이 살았을 때에 전하를 모시고 한 번 세도(世道)를 행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춘추가 만년이 되시고 전후에 일을 맡기셨던 신하는 거의 다 늙거나 죽어서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고 점점 해이해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지(聖志)를 분려(奮勵)하고 뭇 신하를 독려하여 황극의 정치를 끝내 이루소서. 이것은 신의 형이 끝내지 못한 사업이므로 우러러 아룁니다."
하고, 이어서 반복하여 아뢰었는데, 모두가 총애를 바라고 아첨하는 말이어서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5월 21일 기해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 비가 이미 사흘을 넘어 내리어 민사(民事)가 걱정스러우므로 영제(禜祭)의 전례를 살펴서 품처(稟處)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효묘(孝廟) 때 임진년071)   5월 26일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하였습니다. 입추(立秋) 이전에 기청하는 것은 이미 전례가 있으니, 사문(四門)의 영제를 길일을 잡지 말고 곧 설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부제학 정휘량(鄭翬良)·교리 채제공(蔡濟恭)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講)하였다. 수수피의장(漱水避蟻章)에 이르러 정휘량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이러합니다마는, 접때 포도 대장 조동하(趙東夏)는 그 군관(軍官)을 위하여 죽어 가는 사람을 곤장을 쳐서 죽였으므로 이 때문에 대간(臺諫)이 삭직(削職)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서울이 이러한데, 더구나 외방(外方)이겠습니까?"
하고, 채제공이 말하기를,
"삭직만 하고 말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동(嶺東)에 귀양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자강불식장(自强不息章)에 이르러 정휘량이 말하기를,
"신이 어제 다하지 못한 말을 하겠습니다. 조제(調劑)하는 것을 그르게 여긴다면, 기자(箕子)는 어찌하여 무당 무편(無黨無偏)하라고 하였겠으며, 선정신 이이(李珥)·박세채(朴世采)는 어찌 조제에 대하여 간절하였겠습니까? 조제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감히 드러내어 배척하지는 못할지라도 혹 거행을 잘하지 못한다고도 말하고 스스로 한 당(黨)을 만들었다고도 말하고 이굴(利窟)이라고도 말하여 나무라고 비웃는 것이 어지러우나, 일월(日月)이 위에 계시므로 감히 그 계책을 부리지 못할 뿐입니다. 이제는 혹 입으로는 옳다 하고 마음으로는 그르게 여기는 자와 속으로는 가식하면서 겉으로는 진실한 체하는 자가 있으니, 전하께서 유구(悠久)히 행하시면 반드시 점점 사라지게 되겠으나, 성지(聖志)가 혹 점점 게을러지신다면 막고 비웃고 해치고 이간하는 것이 어디엔들 이르지 않겠으며 나라의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右相)은 서로 대하는 것을 상회례(相會禮)로 여긴다."
하자, 정휘량이 말하기를,
"선치가 이루어져 제도를 만들어 정한다면 또한 이 규례를 쓸 것도 없으며, 재목이라야 쓴다고 하는 것도 사정(私情)을 따르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전혀 의거할 바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5월 22일 경자

전 경기 감사 김상익(金尙翼)과 여러 도의 수령으로서 아직 사조(辭朝)하지 않은 자를 소견하여 농사의 형편을 물었다.

 

5월 23일 신축

전라 감사 조운규(趙雲逵)와 경기 감사 이후(李)가 제배(除拜)되고 아직 부임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소견하여 조운규에게 신칙(申飭)하기를,
"영남의 전세(田稅)는 반이 왜(倭)한테 들어가므로 나라의 근본은 오로지 호남에 있으니, 혹 뜻밖의 경급(警急)이 있으면 양곡(粮穀)을 예비하여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도 수성(守城)하는 긴요한 방도이다."
하였다. 균청 당상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호남에서 진상(進上)하는 일은 큰 관절(關節)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조충국(趙充國)072)  은 금성(金城)에 가기를 원하여 방략(方略)을 그려 올렸는데, 경은 4세(世)를 이어 호남백(湖南伯)이 되었으니, 반드시 이미 사정에 익숙할 것이다. 무슨 좋은 방책이 있는가?"
하자, 조운규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진상하는 일에 대하여 획급(劃給)하는 것이 있기는 하나 이것은 10분의 1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의 아비가 내려갔을 때에 사색보(四色保)를 충정(充定)하여 이것으로 보태어 썼습니다. 신이 감영(監營)에 부임한 뒤에 많은 것은 줄이고 적은 것은 늘리고 또한 비국 당상과 상의하여 선처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상보(進上保) 한 명색(名色)은 그대로 두고 그 나머지 명색은 없애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포민(浦民) 중에는 한가히 노는 자가 많이 있으니, 육민(陸民)으로서 충정된 자는 진상보에 옮겨 충정하고 그 밖의 보(保)들은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기백(畿伯)은 전에 호남백을 지냈고 또 균세사(均稅使)도 되었으니, 반드시 사색보(四色保)의 일을 잘 알 것이다."
하자, 이후가 말하기를,
"신은 사색보의 일에 대하여 늘 염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균세사로서 다녀온 뒤에 묘당(廟堂)에서 정식(定式)하였는데, 근래 전라도·경상도에서는 혹 이 법령을 범하였습니다. 이정사(釐正使)가 이 때문에 수령을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이제는 또 이 보를 적당히 줄이는 것을 허락하니, 이것은 당초의 정식과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기백의 말이 옳다. 당초 사색보 때문에 수령을 죄주어 파직시켰는데, 이제 또 사색보를 허락한다면 어찌 모순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고성 현령(固城縣令) 심관(沈鑧)은 어버이가 늙었다 하여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심관이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임금이 그 어버이의 나이가 예순 아홉이고 또 함께 갈 수도 없다는 말을 듣고는 하교하기를,
"법전에 어버이의 나이가 일흔이면 3백 리 밖에다 서용하지 않는다 하였다. 심관의 어머니는 일흔에서 한 살이 모자라기는 하나, 고성은 1천 리에 가까운 곳이므로 3백 리에 비하면 두 곱일 뿐이 아니고 또 3년 동안 갈지 않으면 그 어머니가 절로 일흔이 될 것이다. 아!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뿐이다."
하고, 이어서 심관의 벼슬을 체차하였다.

 

5월 23일 신축

유신(儒臣)을 불러 《서전(書傳)》 우공(禹貢)을 강하였다. 승지 이창수(李昌壽)가 말하기를,
"당론(黨論)의 해독은 홍수보다 심합니다. 전하께서 몇 해 동안 조제(調劑)하시어 거의 보람을 이룰 수 있는데, 이제 중지하시면 어찌 오랜 수고가 아무 보람이 없게 되는 한탄이 없겠습니까?"
하고, 교리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우(禹) 임금이 홍수가 산을 둘러싸고 언덕을 넘는 형세를 보고 문득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켰다면 어떻게 성공하였겠습니까? 조제의 보람은 능히 죽이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시씨(柴氏)073)  를 죽이지 않고 사대부(士大夫)를 죽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천고의 성대한 일이니, 후세의 임금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074)  ·임인년075)   이후에 내가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을 죽이거나 저 말을 듣고 이 사람을 죽였다면 사대부가 어찌 남았겠는가?"
하였다.

 

5월 24일 임인

임금이 호남 구관 당상(湖南句管堂上) 원경하(元景夏)를 소견하고 말하기를,
"오랫동안 경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제 민사(民事) 때문에 경을 불렀다. 듣건대, 경은 호남의 일에 대하여 마음이 간절하다 하니, 강교(江郊)에서 한가히 노는 것보다 나를 위하여 호남에 가서 양전(量田)의 일을 이정(釐正)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일찍이 정묘년076)  에 신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개량(改量)하게 하기를 청하고, 또 ‘개량사(改量使)가 자주 가면 폐단이 있으므로 이 뒤로 양전하는 일은 오로지 도신에게 맡기고 개량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신이 한 번 가서 이정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더니, 그때 성상께서도 윤허하셨습니다. 그 뒤에 도신이 혹 한두 고을 또는 서너 고을을 개량하여 7년 동안에 이정한 것이 겨우 스물 세 고을인 것은 일이 매우 게을렀습니다마는, 국가의 일은 체면을 지켜야 할 것인데 이미 도신으로 하여금 개량하게 하고 나서 또 신으로 하여금 내려가게 한다면, 사체에 장애되는 것이 있고 소요도 많으며 도신에게는 분권(分權)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호남에 한 번 가고 싶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일인가?"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호남은 곧 국가의 근본입니다. 쌀과 무명이 오로지 여기에서 나오니, 참으로 이른바 근본인 곳이라는 것입니다. 지리(地理)로 말한다면 강도(江都)에서 한 번 순풍에 돛을 달아 안흥(安興)에 이르고 안흥에서 한 번 순풍에 돛을 달아 격포(格浦)에 이릅니다. 신의 선조(先祖)가 안번(按藩)할 때에 격포에 행궁(行宮)을 창건하였고, 검영(檢營)을 인묘(仁廟) 때에 설치하였는데, 그때 묘당(廟堂)의 신하들이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고 상신 송인명(宋寅明)에게 군작미(軍作米) 1만 석을 옮겨서 검영미(檢營米)를 만들고 그 대신 비국에서 구관하는 순영(巡營)의 별비전(別備錢)을 가져다 경용(京用)으로 하기를 권하였습니다. 전 도신 서명구(徐命九)가 격포 행궁을 중수하고 신에게 글을 보내어 행궁중수기(行宮重修記)를 청하였으므로, 신이 양전의 일로 말미암아 한 번 가서 보고 싶었습니다마는, 개량으로 말하면 사체에 장애되는 것이 있어서 먼저 도신에게 맡겼으니, 전대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삼남(三南)에 곡식을 저축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곡식을 저축하는 것은 참으로 좋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무엇으로 곡식을 사려 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영 대장은 군포(軍布)로 군작미를 만들고 싶어한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영 대장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균역(均役)한 이후로는 각 아문(衙門)과 각 군문(軍門)이 다 감포(減布)하고 균역청에서 댓가를 지급하는데, 어찌 남은 저축이 있어서 쌀로 바꾸는 데에 미치겠습니까?"
하였다. 원경하가 또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국가에 병난(兵難)이 있을 때에 적정(賊庭)에 머리를 조아리는 자 중에는 평일 귀근(貴近)한 신하가 많고, 나라를 위하여 순절(殉節)하는 자로 말하면 모두 임금이 그 얼굴이 어떠한지 모르는 사람이다.’ 하였는데, 주자의 이 말은 참으로 매우 절실합니다. 예로부터 인재는 흔히 소원(疏遠)하고 미천한 가운데에 침체되어 있으니, 평소에 북돋우어 길러서 장려하고 발탁하고서야 급할 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근년 이언세(李彦世)의 상소는 참으로 괴이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일찍이 절의(節義)를 지키다 죽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나라에 일이 있으면 이 사람이 종사관(從事官)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10년 동안 폐고(廢錮)되어 마침내 굶어 죽었으니, 어찌 가엾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지나치다. 어찌 굶어서 죽었겠는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여러 날 동안 굶주리고 술에 상하여 마침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굶어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참으로 잔인하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에게는 놀랍고 뼈아픈 것이 있습니다. 신축년·임인년의 무옥(誣獄) 이후에 유봉휘(柳鳳輝)가 목호룡(睦虎龍)의 흉악한 말인 삼수(三手)077)   따위 설(說)로 주문(奏文)을 만들었습니다. 원본(元本)은 저 나라에 있으나, 등책(謄冊)이 승문원(承文院)에 있는데 서덕수(徐德修) 같은 자가 다 주문 가운데에 들어 있습니다. 이런 아주 흉악한 글은 하루도 우주(宇宙) 사이에 머물러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여 읽고 나서 승지에게 명하여 합문(閤門) 밖에서 불사르게 하였다.

 

5월 25일 계묘

사간 박치문(朴致文)이 상서하여 서연관(書筵官)을 초치(招致)하고 과거에 급제한 자 가운데에서 경술(經術)이 있는 자는 문벌을 논하지 말고 춘방(春坊)에 차의(差擬)하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서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5월 28일 병오

전 전라 감사 서명구(徐命九)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균역(均役)의 일에 대하여 아닌게 아니라 삼가서 법을 지켰습니다마는, 오직 식견이 미치지 못하여 수령이 속여서 신보(申報)한 글에 붓을 대어 이미 제사(題辭)를 쓰고 나서도 조정(朝廷)에 여쭙지 않은 것은 모두가 신의 죄입니다. 신의 죄는 견파(譴罷)도 가볍습니다마는, 수령이 신의 제사를 빙자하여 법에 어그러지는 일을 어지러이 행한 것은 수령의 죄입니다. 그 거조(擧措)가 이미 신이 쓴 제사의 내용과 상반된다면 신은 속은 죄를 받아야 할 것이고, 수령은 절로 법을 어긴 죄로 돌아갈 따름이니, 제사를 받았다 하여 수령의 죄를 가감하여 그 요행히 면할 길을 열어 주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이극록(李克祿)이 ‘사색보(四色保)의 설치와 혁파(革罷)는 다 영문(營門)에 말미암은 것이고 그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고 공초(供招)하여 마치 신이 간책(刊冊)에 없는 명색(名色)을 새로 설치하는 것을 허락한 것인 듯이 한 것도 이미 뜻밖인데, 더구나 그 신보와 제사에 본디 사색보에 영향이 서로 미칠 일이 없었으니, 바로 속인 것입니다. 신이 어찌 팔리는 것을 꺼려서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사색보의 명색은 기사년078)   균역 이전에 창설하였는데, 조정에서 양민의 폐해를 염려하여 각 고을에서 모집해 붙인 무리를 혁파하고 그 가운데에서 혁파할 수 없는 자를 짐작하여 헤아려서 그대로 두게 하니, 그때의 도신(道臣)이 그 고을 형편의 풍박(豊薄)과 대소(大小)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비국(備局)에 신보하여 수를 정한 것입니다. 이른바 진상보(進上保)·군기보(軍器保)·관장보(官匠保)·지물보(紙物保)라는 것이 이것인데, 모두 사천(私賤)으로 충정(充定)하였고 혹 양군(良軍)을 침정(侵定)하면 전결(田結)을 사용(私用)한 율(律)을 시행하였습니다. 법을 세운 것이 이처럼 엄한데도 각 고을은 조금도 준수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번번이 한계를 넘을세라 걱정하였습니다. 한번 균역이 실시된 뒤로는 포촌(浦村)이 균역청에 전속(專屬)되어 관가에서는 어염(魚鹽)의 이익을 보지 못하므로 매우 잊지 못하여 포민(浦民)은 한가히 놀고 육민(陸民)은 치우치게 괴로운 폐단을 앞다투어 설명하였습니다. 신은 실로 그 뜻은 다른 데에 있으면서 말을 다르게 하는 것을 모르고 다만 육민이 치우치게 괴로운 것을 염려하여 양정(良丁)의 자손으로서 투속(投屬)하여 신역(身役)을 피하는 자를 정군(正軍)에 초정(抄定)하라는 뜻으로 제급(題給)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이 강진(康津)·순천(順天)·무안(務安) 등 세 고을에서 이 제사를 빙자하여 곧바로 포촌에 달려가서 노약(老弱)을 헤아리지 않고 모두 인구를 셈하여 돈을 거둔 것은 신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정사(釐正使)가 내려와서 각 고을을 돈 뒤에 신에게 글을 보내어 ‘각 고을에서 감영(監營)의 제사를 빙자하여 진상보인(進上保人)이라 하고 억지로 정하여 돈을 거두었다.’ 하게 되어서야 신이 비로소 수령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놀라서 관문(關文)을 보내어 혁파하고 그 본전(本錢)을 돌려주게 하였습니다. 이제 전 무안 현감(務安縣監) 이극록의 공사(供辭)에 따라 ‘속았다[見欺]’는 두 자 때문에 가볍게 견파하는 법을 시행한 것은 신이 본디 안온하게 여깁니다마는, 이극록이 제사를 받았다고 공초한 것 때문에 죄를 감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전 강진 현감(康津縣監) 여선응(呂善應)과 전 순천 부사(順天府使) 이수덕(李壽德)의 공초에 모두 감영에 신보하였다는 말이 있는 것은 신이 더욱이 놀랍게 여깁니다. 균역법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데 그 근사(近似)한 제사를 빙자하여 상반되는 일을 방자하게 범하고서 다들 제사를 받았다고 핑계하여 죄를 감할 수 있다면 도신 노릇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기사년에 각 고을의 진상보인을 정액(定額)한 수를 상고해 보았더니, 순천의 진상보는 1백 명이고 무안의 진상보는 50명이고 강진의 진상보는 20명이었는데, 저 수령이라는 자가 처음에는 양역(良役)의 폐단을 대단하게 말하더니, 나중에는 보인을 정하여 돈을 거둔 것이 20명이던 고을은 7백 86명이 되고 50명이던 고을은 4백 12명이 되고 1백 명이던 고을은 6백 50명이 되었습니다. 정액(定額) 외에 함부로 정한 것이 이처럼 많은데도 문득 순영(巡營)에 신보하라고 하였다고 말하여 죄를 면할 거리로 만드니, 어찌 매우 미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의 소(疏)를 조당(朝堂)에 내리고 금령(禁令)을 범한 수령은 고율(考律)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5월 30일 무신

평명(平明)에 임금이 몸소 갑주(甲胄)를 입고 보여(步輿)를 타고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삼영(三營)의 대장(大將)의 군례(軍禮)를 받고 나서 융복(戎服)으로 갈아 입고 나아가 금부 도사 윤광(尹珖)과 전 황해 수사 신사언(申思彦)을 결곤(決棍)하였다. 이에 앞서 황당선(荒唐船)이 백령진(白翎鎭)에 정박하여 호인(胡人) 18명이 뭍에 내렸으므로, 수사 신사언이 육로로 돌려보내기를 장청(狀請)하니, 표류하여 온 호인이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다른 당선(唐船) 10여 척을 결속하여 끌고 왔는데 그 수가 5, 6백 명이었다. 백령진을 에워싸고 18명을 내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첨사(僉使) 이백령(李栢齡)이 먼저 이미 7명을 장연(長淵)에 보냈는데, 호인이 그 나머지 11명을 빼앗아 가고 장연의 장교(將校) 한 사람도 함께 그 배에 잡아 두었다. 신사언이 또 이 때문에 장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선(胡船)이 많기는 하나 짧은 병기(兵器)도 없고 백령진이 잔약하기는 하나 군사와 기계(器械)가 있으니, 뜻대로 죽일 수는 없더라도 어찌 막을 수 없겠는가? 수사도 군사를 징발하여 쫓아가 그 잃은 것을 빼앗아 와야 할 것인데 이런 생각을 내지 않고 도리어 두려워서 장문(狀聞)하였으니, 일이 매우 놀랍다. 특별히 이진숭(李鎭嵩)을 수사로 삼고 조위진(趙威鎭)을 백령 첨사로 삼아 길을 갑절로 하여 임소(任所)로 가게 하고, 전 첨사 이백령은 이진숭으로 하여금 50도(度)를 결곤하고 그 곳에서 충군(充軍)하여 물간 사전(勿揀赦前)하며, 선전관(宣傳官) 전광훈(田光勳)과 금부 도사 윤광을 보내어 길을 갑절로 하여 가서 신사언을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잡아왔으나 날짜가 오래 걸렸으므로, 임금이 노하여 무신년079)  의 전례에 따라 갑주를 갖추고 명정문에 나아가 승장포(升帳砲)를 쏘고 숙정패(肅靜牌)를 세우며 소개문(小開門)하고 대취타(大吹打)한 다음,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금위 대장 이창의(李昌誼)를 먼저 군례로 참견(參見)하고 나서 명하여 전광훈을 잡아들이게 하여 묻기를,
"너는 며칠에 올라왔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새 수사가 교귀(交龜)한 뒤에 부신(符信)을 빼앗았으므로 절로 지체되었습니다마는, 신이 가고 돌아올 때에는 모두 길을 갑절로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의 전말을 물으려 하였으므로 잡아들였는데, 이미 죄주지 않는다면 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고, 특별히 현궁(弦弓) 1장(張)을 내렸다. 윤광을 결곤하고 신사언을 잡아들여 양손을 뒤로 묶고 낯에 회를 칠하여 삼군(三軍)에 돌려 보인 뒤에 15도를 결곤하였는데, 임금이 전석(全釋)하려 하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이미 이 큰 거조(擧措)를 하셨으니, 결곤만 하고 말 수 없겠습니다."
하니, 남해현(南海縣)에 충군하라고 명하고, 이진숭의 도임(到任)이 지체되었다 하여 또한 먼저 갈고 나서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대개 호인이 육로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 것은 앞서 저 나라에서 표선(漂船)이 바람을 만났다고 거짓말하며 우리 나라에 폐해를 끼친다 하여 전쟁에 종사하게 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육로로 연경(燕京)에 돌아가면 정상이 드러나 저 나라에서 죄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