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1권, 영조 30년 1754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3. 14:39
반응형

6월 2일 경술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올해 삼황(三皇)의 즉조일(卽阼日)과 기신일(忌辰日)에는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신다고 일찍이 성명(成命)이 있었는데, 이 6월 초 10일은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즉조일입니다. 망배례의 복색은 태조(太祖)의 즉조일 망배례의 전례를 따라야 하겠는데, 처소는 어느 곳으로 정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서 행해야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무신년080)  의 공신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 등 및 오광운(吳光運)의 손자 오숙(吳璹)과 홍경보(洪景輔)의 아들 홍명한(洪名漢)을 소견하고 홍 명한을 특제(特除)하여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이보혁 등에게 이르기를,
"훈신(勳臣)이 쇠퇴하였구나."
하고, 사찬(賜饌)하라고 명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사찬은 대개 뜻이 있는데, 풍은(豊恩)과 영성(靈城)081)  은 불참하였으니, 내린 두 상의 음식을 두 신하의 집에 보내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풍원(豊原)082)  의 담월(禫月)이 지나고 나니, 내 마음이 슬프다. 고 해은(海恩)083)  ·풍릉(豊陵)084)  ·풍원의 집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그 나머지 친공신(親功臣)으로 집이 서울에 있는 자에게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며 외방(外方)에 있는 자에게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며, 풍원의 아들 조재득(趙載得)이 상을 벗거든 등용하고 그 나머지 훈신들의 자손을 찾아서 조용(調用)하게 하되 어려서 미처 벼슬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경외(景外)에서 먹을 것을 주게 하여 내 뜻을 나타내라. 무신년의 원훈(元勳) 최규서(崔奎瑞)는 훈적(勳籍)에 들어야 할 것이나, 그 마음을 다하게 하려고 다만 ‘일사 부정(一絲扶鼎)085)  ’이라는 넉 자를 내렸다. 이제 듣건대, 그 아들 최상정(崔尙鼎)이 여든 살로 산관(散官)을 삼았다 하니, 특별히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제수(除授)하라."
하고, 홍명한·오숙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음식을 내린 것은 대개 네 아버지와 네 할아버지의 무신년의 공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옛사람은 거(莒)에 있었을 때를 잊지 않았는데086)  , 이제 비록 주갑(周甲)이 되었을지라도 어찌 무신년을 잊겠는가? 아! 증(贈) 판서 오광운·홍경보는 무신년에 사직(社稷)에 공이 있었으나, 그때 녹훈(錄勳)을 청하는 것을 내가 따르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 사람이 이미 작고하였으니 그 충성을 포장해야 할 것이므로 특별히 명하여 증직(贈職)하고 마음으로 늘 생각하였다. 홍경보의 아들 홍명한이 올해에 소과(小科)에 오르고 또 대과에 급제하였으므로 사람을 얻은 것을 마음에서 기뻐하였으나 이제까지도 침체하여 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을 등용하는 도리이겠는가? 홍명한을 부수찬으로 삼고, 직장(直長) 오숙도 6품 벼슬에 올리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마실 수 있는 자는 마시되, 마시지 못하는 자는 굳이 권할 것 없다."
하고, 드디어 친히 가사(歌詞)를 짓기를,
"훈신을 얻어 마음이 일치하니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도다. 임금과 신하가 함께 늙으니 오늘에 모이게 되었도다. 거에 있었을 때를 잊지 않으니 〈나라가〉 앞으로 반석처럼 튼튼하리라."
하고, 승지(承旨)·사관(史官)에게 화답(和答)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원경하(元景夏)가 홍명한이 아직도 기랑(騎郞)087)  이 되지 못하였다 하여 임금 앞에서 아뢰기까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곧바로 옥당(玉堂)에 제수하였다.

 

6월 3일 신해

유성(流星)이 하늘 복판에서 나와 북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았고 길이가 3,4 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이수득(李秀得)을 승지로, 남혜로(南惠老)를 헌납으로 삼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서경(書經)》 고요모(皋陶謨)를 강하였다. 교리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세상을 격려하는 도리는 위에서 이끄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조정은 3백 년 동안 예악(禮樂)과 문학(文學)으로 이끄는 방도를 삼아 왔는데, 이제는 사대부(士大夫) 사이에서 학문하는 무리가 장차 끊어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관(名官)이 글을 읽지 않고 명무(名武)가 활쏘기를 익히지 않으니, 이것이 오늘날의 깊은 폐단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인물을 알아보는 데에 달려 있는데, 3백 60 고을에 대하여 인물을 가리지 못하는 것은 전조(銓曹)의 허물이고 고적(考績)이 엄하지 않은 것은 방백(方伯)의 허물이며, 전조와 방백이 이러하여도 입을 다물고 경계하지 않는 것은 묘당(廟堂)의 허물이고, 묘당에서 입을 다물어도 바로잡아 이끌지 않는 것은 내 허물이다. 아! 묘당·전조·방백은 내 만년의 간절한 뜻을 본받아 조심하여 봉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비로소 참판 윤심형(尹心衡)이 졸(卒)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교하기를,
"조급히 권세를 다투는 것을 신칙하려면 욕심이 없어 마음이 화평하고 단아한 자를 장려해야 한다. 지난 겨울에 김진상(金鎭商)과 윤심형을 특별히 승자(陞資)하도록 명한 데에는 뜻이 있었는데, 이제 듣건대, 윤심형이 이미 작고하였다 하니, 원래 치부(致賻)하는 것 이외에 후하게 제급(題給)하게 하라. 심악(沈)은 어찌 줄곧 하읍(下邑)에만 침체하여 둘 수 있겠는가? 또한 내직(內職)으로 옮기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령 이택징(李澤徵)은 조숙(趙)이 대축(大祝)이었을 때에 임금의 휘(諱)를 읽지 않았다 하여 개정하기를 원량(元良)에게 청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을 업신여기고 아버지를 업신여긴 것이다. 이지억(李之億)이 특별히 승자(陞資)된 것은 뜻이 대개 깊은 것인데, 전 정언 정술조(鄭述祚)는 감히 논박하여 개정하였으니, 모두 파직하고 세 번 세초(歲抄)를 넘겨서 그 마음을 칙려(飭勵)하라."
하였다.

 

6월 5일 계축

사간 박치문(朴致文)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적(亂賊)이 어느 세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흉악한 상소로 근거 없는 말을 하여 사류(士類)를 해치려고 꾀한 것으로 말하면 이잠(李潛)보다 더 참혹한 자가 없습니다. 신인(神人)의 분개가 오래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는데, 중간에 뭇 간사한 자들은 도리어 감싸서 증직(贈職)하려는 청까지 있었고, 그 집의 자손은 이제까지도 그 작호(爵號)를 외람되게 쓰니, 방자하고 무엄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신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엄히 살펴 무겁게 감죄(勘罪)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그 재주를 취하고 많고 적은 것을 계교하지 말아서 오직 물정에 맞게 해야 할 것인데, 피차를 섞어서 양편을 같이 거용(擧用)한다는 논의를 하는 것은 참으로 당세(當世)의 깊은 폐단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이익을 독차지하고 사욕을 꾀하려면 문득 피차를 섞는다고 말하면서 겉으로는 아울러 취한다는 명목을 빌리고 속으로는 당(黨)을 감싸는 계책을 성취하니, 그 자취를 자세히 밝혀 보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근본이 되기에 알맞습니다. 이번의 한권(翰圈)으로 말하더라도 피차의 인재가 많고 적은 것은 절로 분수(分數)가 있는 것인데, 그 사람이 마땅한지를 헤아리지 않고 오직 대등하게 대우하는 것을 일삼아서, 이편이 많으면 억제하고 삭감하여 유기된 좋은 인재가 많이 있고, 저편이 적으면 긁어 모으고 추켜세워 추천하여 재주 없는 자가 함부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컬을 것이 없는 김시구(金蓍耉)나 그럴 듯하지도 못한 심욱지(沈勖之)도 다 부당하게 한선(翰選)에 들었습니다. 사의(私意)를 따르고 공론을 억지하여 절로 당을 만드는 데로 돌아갔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 대조(大朝)께서 공평하게 가려 뽑으시려는 본의이겠습니까? 신은 한권을 주관한 사람에게 견책(譴責)하는 벌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이잠의 일은 풍문을 죄다 믿을 수 없다. 한권을 주관한 사람을 견책하는 일은 지나치다."
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병조 판서 이창의(李昌誼)가 말하기를,
"내삼청(內三廳)의 예목(禮木)과 낭비를 조정에서 신칙한 것이 엄절할 뿐이 아닌데, 근래 금령(禁令)이 행해지지 않아서 각청(各廳)의 선진(先進)들이 신래(新來)에게 음식을 요구하고 물건을 요구하는 것이 점점 더욱 커지므로, 가난한 무사(武士)가 한번 면신(免新)을 겪은 뒤에는 가산을 탕진하여 지탱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불쌍할 뿐이 아니라 참으로 무사를 염려하여 돌보시는 성의(盛意)에 어그러지니, 청컨대 모두 매우 금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이잠의 일을 대신에게 물으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이잠의 흉악한 상소는 참으로 신축년088)  ·임인년089)  과 무신년090)  에 있었던 일의 장본(張本)입니다. 숙묘(肅廟)께서 진노하여 친국(親鞫)하셨는데, 그 뒤에 조태구(趙泰耉)가 아뢰어 장령을 추증(追贈)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이잠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또 대간(臺諫)이 상소하여 추탈(追奪)을 청함에 따라 어제 장적(帳籍)을 상고하게 하였더니, 경오년091)  에 학생(學生)이라 쓰고 증직(贈職)을 쓰지 않았다 합니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우의정 조재호(趙載浩)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경에게 정승을 제배(除拜)한 지 이제 몇 달이 되었다. 지난날의 신병은 거의 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인데, 승선(承宣)과 서로 버티니 나라의 일이 민망스럽다. 마침 이달을 당하여 마음이 무너지는 듯한데, 나라의 일을 위하고 세도(世道)를 위하여 오늘 하유하지 않으면 어느 날을 기다리겠는가? 굳이 수서로 하유하여 경이 함께 들어오기를 기다리니, 경은 내 은근한 뜻을 본받고 선경(先卿)이 나라와 한몸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여 곧 함께 들어와서〈내가〉 마루에 나아가 기다리는 뜻에 부응하라."
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명하여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약방에서 진대(診對)를 행하였다. 도제조 김상로(金尙魯)가 태묘(太廟)의 추향(秋享)을 친행(親行)하는 것을 그만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조고(祖考)께서 오신다.’ 하였고, 공자(孔子)는,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친행과 섭행(攝行)은 큰 차이가 있다. 또 내년 봄 상신(上辛)에 친히 기년(祈年)을 행하려 하는데, 왕년에 ‘피부를 어찌 아끼겠느냐?’고 하신 말씀을 늘 생각하고 있다. 내 몸이 상할지라도 어찌 돌보겠는가?"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일전에 잡인(雜人)이 함부로 들어왔다 하여 기랑(騎郞)을 결곤(決棍)하라고 명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마는, 이는 거둥하실 때와 다르니, 입직(入直)한 당상으로 하여금 결곤하여 다스리게 하신 것은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옳다. 이 뒤로는 기랑이 잘못이 있더라도 군무(軍務)에 관한 일이 아니면 병조(兵曹)로 하여금 결곤하게 하지 말도록 정식(定式)하라."
하였다.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간 수문(二間水門) 상류의 수도(水道)를 파서 트더라도 이는 광희문(光熙門)의 직로(直路)이므로 곧 메워지니, 여기서 훈련원 앞을 가로 흘러 오간 수문(五間水門)으로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작은 돌다리를 설치하고서야 이 폐단을 없앨 수 있으므로 영선(營繕)에 넘겨야 할 것인데, 지금 호조(戶曹)에서는 이런 역사(役事)를 감당하기 어렵고, 그 곳은 하도감(下都監)에서 가까우므로 훈련 대장이 재력을 담당하여 처리하려 한다 하나 군문에서 홀로 다리 놓는 일을 맡는 것도 뒷 폐단에 관계됩니다. 비국에서 각사(各司)에 약간의 재력을 분정(分定)하여 보태게 하면 사면(事面)이 조금 바르고 일도 쉽게 성취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5일 계축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에게 수서와 호피(虎皮)를 내렸다. 박문수가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마침 입시(入侍)하여 임금에게 말하기를,
"궐내(闕內)는 군중(軍中)과 다르므로 갑주(甲胄)를 갖추고 대취타(大吹打)하기에는 참으로 마땅한 곳이 아니니, 전하께서 이것을 하고자 하신다면 사장(沙場)에서 열무(閱武)할 때에 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찌 엄숙하고 화평한 곳에 합당하겠으며, 더구나 종묘(宗廟)를 놀라게 할 염려가 있는 곳이겠습니까? 또 갑주는 마상(馬上)에서는 합당하나 여상(輿上)에서는 합당하지 않으니, 신은 이 뒤로 후원(後苑)에서 습진(習陣)할 염려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때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다 지나친 거조인 줄 알면서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었으니, 어찌 조정에 신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시골에 있을 때에 듣고 놀라 탄식하였는데, 이제 마침 입시하였으니, 아뢰지 않고 돌아가면 신도 또한 무상(無狀)할 것입니다. 문자로 정식(定式)을 만들어 뒷 폐단을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암(汲黯)092)  의 말을 오래 듣지 못하였다. 아뢴 것은 과연 옳다."
하고, 글로 장유(奬諭)하기를,
"이제 경이 아뢴 것을 듣고 내 잘못을 깨달았다. 이는 호위(扈衞)할 때가 아니었으니, 내가 뜻이 있어서 행하였더라도 후세에서 이 전례를 인용하여 기분 좋게 행함이 없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경이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서 보충한 것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호피 1령(領)을 내리니, 경은 받으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 뒤로는 호궤(犒饋)할 때 이외에는 비록 호위할 때일지라도 성내(城內)·궐내에서 취타(吹打)하지 말도록 정식하라."
하였다.

 

6월 6일 갑인

이달의 세초(歲抄)에서 한환(韓桓)의 직첩(職牒)을 도로 주었는데, 한환은 무신년(戊申年)093)  의 역옥(逆獄)에 관련되어 귀양갔다가 석방된 자이다. 정원(政院)에서 한환은 죄명이 지극히 중하므로 관례에 따라 휘지(徽旨)를 봉입(捧入)할 수 없다고 상달하니, 하령(下令)하기를,
"대조(大朝)께 여쭈어 점하(點下)하였으니, 이제 번거롭게 여쭐 수 없다."
하였다. 정원에서 여러 번 상달하여 복역(覆逆)094)  하고 사간 박치문(朴致文)도 상서하여 논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이미 정원에 일렀다."
하였다.

 

전 전라 감사 서명구(徐命九)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균역청 당상이 포촌(浦村)의 양민(良民)을 첨정(簽丁)할 것을 아뢰어 윤허받았다 합니다마는, 그 사이에는 도내(道內)의 사정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저 본도(本道)는 해리(海利)가 여러 도 가운데 으뜸이어서 균역(均役) 전에는 수령(守令)이 된 자가 해호(海戶)가 점점 늘어나 관가의 수입이 따라서 많아지는 것을 이롭게 여겨 한 가지 역(役)도 침정(侵定)한 것이 없었으므로 3백 년 동안 이른바 포촌이라는 것은 곧 전쟁을 보지 못한 고장과 같았는데, 균역의 일이 나오게 되어서는 해촌(海村)이 균역청에 전속되었으므로 포민은 관부(官府)에 보탬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남과 나의 구분이 있기 시작하여 온갖 계책으로 손댈 방도를 만들었으니, 대개 하루도 포민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의 수령이 신의 영제(營題)를 받고는 오히려 빙자해 침탈(侵奪)하여 폐해가 포촌에 미쳤습니다. 더구나 조정에서 첨정하라고 한 명령을 받고서 방한(防限)이 없다면, 신은 이로부터 육민(陸民)의 정군(正軍)의 역이 죄다 포민에게 돌아갈 듯합니다. 신이 처음에 생각한 것은 다만 균역 뒤에 양민의 자손으로 투속(投屬)하여 신역(身役)을 피하는 자를 정군에 초정(抄定)하여 육군(陸軍)이 도피하는 폐단을 막으려 하였을 뿐이고 일찍이 크게 변통하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는데, 한때 살피지 못한 제사(題辭)가 마침내 수령의 핑계거리가 되어 뒷날의 염려가 절로 깊어지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균역청에 내려 사정을 참작하게 하소서. 그 찾아 모아서 보충하는 것을 연수(年數)로 정식(定式)하거나 양사(良私)로 구별하여 조금 한계를 두고서야 포민이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소사(疏辭)는 균역청 당상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6월 7일 을묘

명릉(明陵)의 기신(忌辰)에 쓸 향축(香祝)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참포(黲袍)를 갖추고 빈양문(賓陽門)을 나가 명정전의 계상(階上)에 나아가니, 승지가 향축을 받들어 바쳤다. 임금이 친압(親押)하고 나서 헌관(獻官)에게 공경히 주고 빠른 걸음으로 판위(板位)에 나아가 국궁(鞠躬)하여 지송(祗送)한 다음 승지에게 명하여 능소(陵所)를 봉심하게 하고, 도로 옛 홍문관(弘文館)의 재실(齋室)에 나아가 추모 서회문(追慕敍懷文)을 부르며 받아 쓰게 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내가 금성(禁城) 안에서 취타(吹打)한 데에는 뜻이 있었다. 진연(進宴)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으므로 혼조(昏朝) 때에 번번이 진연을 거행하지 않는 것을 물었다 한다. 무신년095) 남문(南門)에서 헌괵(獻馘)096)   할 때에 취라(吹螺)해야 할 것인지를 그때의 영상 이광좌(李光佐)에게 물었더니, 노반(魯泮)097)  의 헌괵한 뜻을 아뢰었으나, 이것도 반드시 인습(因襲)하여 폐단이 될 것이니, 성안에서 취타하는 것을 모두 금지하고서야 이러한 길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둑제(纛祭)로 말하면 전례대로 해야 하겠으며, 사습진(私習陣) 때의 천아성(天鵝聲)·눌함(吶喊)·호적(號笛)도 금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6월 8일 병진

영부사 김재로(金在魯)·판부사 유척기(兪拓基)를 소견하니, 이날은 곧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기신(忌辰)이다. 임금이 옛 홍문관에 나아가 김재로 등에게 이르기를,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서 대신(大臣) 가운데에서 남은 자는 단지 두 사람이 있을 뿐이니, 오늘 소견하는 것은 대개 옛일을 생각하는 슬픈 마음 때문이다. 자성(慈聖)께서 경들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나에게 하교하기를, ‘왕년의 구신이 오늘 들어오니, 내 마음이 슬프다. 음식을 내려야 하겠다.’ 하셨는데, 여기에서 내리면 술을 먹이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경들은 예원(藝苑)에 물러가 쉬다가 내리는 것을 받고 물러가라."
하였다.

 

6월 9일 정사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형조(刑曹)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니, 날이 덥기 때문이었다.

 

박성원(朴聖源)을 장령으로, 신응현(申應顯)을 검열로 삼았다.

 

정언 민증(閔增)이 상서하기를,
"한환(韓桓)은 직첩(職牒)을 도로 주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전 현감 이광우(李光佑)는 다스리지 못한 정상이 이미 수의(繡衣)098)  의 서계(書啓)에 들었는데, 말을 꾸며서 공초(供招)하였으므로 방자하고 무엄하니,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구초(口招)로 엄히 묻게 하소서."
하니, 이광우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답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제 들으니, 민증이 이광우를 구초하라고 청하자 원량(元良)이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하는데, 나에게 묻지 않고 곧바로 구초를 청한 것은 흐릿하니, 대신(臺臣)을 체차하라. 세초(歲抄) 중의 한환은 그날 날이 저물고 기운이 지쳐서 깨달아 살피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그 청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호남백(湖南伯)의 신문(申聞)을 보니, 편죽 가미(片竹價米)를 받기 시작한 자는 이극록(李克祿)이다. 특별히 엄히 물으라고 하교하였는데, 곧바로 아뢰지 않고 자신이 시종신(侍從臣)이면서 고윤(高允)의 의리099)  를 생각하지 않았으니, 흐릿한 것이 아니면 속인 것이다. 엄히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되니, 이극록을 한 해 더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6월 10일 무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에서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즉조일(卽阼日)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도로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친히 억황은(憶皇恩)의 시를 지었다.

 

6월 11일 기미

처음에 임금이 선전관(宣傳官) 민육(閔錥)에게 명하여 유서(諭書)를 받들고 백령진(白翎鎭)에 가서 당인(唐人)의 표선(漂船)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상세히 아뢰게 하였다. 민육이 말하기를,
"신이 수영(水營)에 달려가서 수사(水使) 이진숭(李鎭嵩)과 함께 전선(戰船)을 타고 기치(旗幟)를 크게 벌이고서 백령진에 가니, 호인(胡人) 가운데 두목 세 사람을 첨사(僉使) 조위진(趙威鎭)이 이미 잡아 가두고서 기다렸습니다. 신이 수사·첨사와 함께 나룻가의 당선(唐船)이 있는 곳에 가서 42인을 결박하여 진두(陳頭)에 꿇어앉히게 한 다음, 전 첨사 이백령(李栢齡)을 잡아들여 50도(度)를 결곤(決棍)하고, 또 나졸(羅卒)로 하여금 당인(唐人)을 잡아들이어 한꺼번에 함성을 지르게 하였더니, 저들이 혹은 엎드러져서 낯빛이 변하기도 하고 혹은 발을 구르며 살려 달라고 애걸하기도 하였습니다. 역학(譯學)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기를, ‘너희들의 죄는 국법(國法)에 있어서 사형을 면하여 주기 어려우나, 우리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이 천지(天地)와 같으므로 너희들을 용서하여 석방하여 돌려보내니, 이 뒤로는 삼가서 우리 지경에 가까이 오지 말라.’ 하고, 이어서 유서의 말뜻을 선포하되 그 가운데에서 ‘수령(守令)·변장(邊將)의 잘못’이라는 한 구절의 말은 뺐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서는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한데, 네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빼어 버렸는가? 유서 가운데에 양식을 주라는 하교가 있는데 또한 주었는가?"
하였다. 민육이 말하기를,
"역학은 세 끼의 양식을 청하였으나, 세 끼는 너무 지나치므로 두 끼를 셈하여 주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 끼 양식을 주는 것이 무슨 아까울 것이 있기에 깎아 줄였는가?"
하였다. 민육이 말하기를,
"신이 유서에서 말뜻을 과연 뺀 일이 없는데 갑자기 잘못 대답하였습니다. 신의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감히 앞뒤에 말을 바꾸는가?"
하였다. 교리 채제공(蔡濟恭)이 엄히 처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는데, 뒤에 또 해남(海南)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6월 12일 경신

홍자(洪梓)를 정언으로, 민우수(閔遇洙)를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김성응(金聖應)에게 향화인(向化人) 안오창(安五昌)의 일을 물으매, 김성응이 말하기를,
"안오창의 증조 안기추(安起秋)는 본디 연일(延日) 사람으로서 어릴 때에 당선(唐船)이 그가 살던 곳의 강변에 정박하였는데, 배에 올라 놀 즈음에 그대로 싣고 갔습니다. 장성하게 되어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하였더니, 중국에서 그 성의를 아름답게 여겨 돌려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인(漢人)의 예(例)에 따라 한아병(漢牙兵)의 천거에 들었습니다마는, 본디 한인의 자손이 아니니, 한아병에 속하게 하여 두는 것은 뜻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할아비가 이미 중국에서 자랐으니, 한아병에서 빼더라도 한결같이 한인의 예에 따라 신역(身役)을 면제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중국 사람 초(楚)·전(田)·반(潘) 세 성은 대대로 신역을 면제하니, 초해창(楚海昌)의 손자는 특별히 면천(免賤)하고, 이훤(李萱)은 군문(軍門)에서 조용(調用)하게 하라. 향화인의 성책(成冊)은 한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예조(禮曹)와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장적(帳籍)을 상고하여 진위(眞僞)를 가려서 정초(精抄)하여 성안(成案)하고 화인록(華人錄)이라 이름하여 한 건(件)은 예조에 두고 한 건은 본도(本道)에 두어 영구히 베를 거두지 말게 하라."
하였다.

 

고 충신 심현(沈誢)·이시직(李時稷)·송시영(宋時榮)의 손자를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숙묘(肅廟)의 어제(御製)에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한 네 사람을 칭찬한 시(詩)가 있는데, 임금이 받들어 보고 감동하여 이 명이 있었다. 고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의 자손은 이때 조정(朝廷)에 있는 자가 많으므로, 세 사람의 손자에게만 언급하였다.

 

유연(遊宴)을 경계하는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아! 일찍이 이미 일렀거니와, 이제 또한 늙었다. 이제 말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올해에 고심(苦心)하는 것은 추모(追慕) 때문이기는 하나, 술편(述編)에 이미 내 마음을 알 것이다 하셨으니, 후사왕(後嗣王)으로서 더욱이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왕년에 부묘(祔廟)하고 회가(回駕)할 때에는 채붕(彩棚)·가요(歌謠)를 베푼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국초(國初)의 성사(盛事)이다. 아! 성조(聖朝)에서 특별히 명하여 그만두게 하였으나 그 뒤에 예조에서는 오히려 여쭈었으므로, 영구히 정제(定制)하여 여쭈지 말게 하였다. 그러나 《오례의(五禮儀)》 가운데에 오상사(五上司)의 진연(進宴)이 있으니 이것도 국초의 성사인데, 그때 오상사의 신하는 종영(宗英)100)  과 기구(耆舊)가 아니면 임금을 따라 공명(功名)을 세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오상사에서 가인(家人)의 예(禮)처럼 행한 것을 중세(中世) 이후에는 이 일이 없었으니, 이는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인데, 그 이름이 오히려 《오례의》에 남아 있으므로, 후왕(後王)이 된 자는 이것을 전장(典章)으로 여기고 신하가 된 자는 이것으로 아첨하여, 위에 있는 자는 구전(舊典)을 닦아 거행한다 하고 아래에 있는 자는 성거(盛擧)를 뒤좇아 따른다고 한다면, 그 널리 퍼지는 폐해가 장차 유연을 절제하지 못하는 데에 이를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근년에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서문(序文) 가운데에 병술년101)   외연(外宴) 때에 진현관(進賢冠)으로 성악(聲樂)을 대신하신 성덕(盛德)을 찬양하였으니, 뜻이 또한 깊다. 그러나 이것도 절제가 없다면 기(妓)와 동(童)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뒷사람을 권면하려면 근본을 바루어야 할 것이니, 이미 실려 있는 것은 감히 빼지 못하더라도, 내가 이제 하교로 빼는 것을 대신한다. 아! 후왕과 후신(後臣)은 내 이 뜻을 본받아 《오례의》에 이 한 조목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라. 아! 이것은 오상사라는 이름을 위한 것일 뿐이 아니라, 실로 유연을 매우 경계하려는 뜻을 위한 것이다. 아! 전감(前鑑)이 분명하고 그 경계가 명백하다.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며 해가 기울어도 겨를 없이 힘썼으므로 은(殷)과 주(周)는 흥하였고, 여색(女色)과 사냥에 빠지며 주연(酒宴)에 빠졌으므로 걸(傑)과 주(紂)는 망하였으니, 이제 내가 특별히 오연(五宴)이라는 이름을 없애는 까닭은 뜻이 대개 깊었다. 범연히 보고 소홀히 하지 말라. 대대로 잘 지키면 참으로 우리 동방의 무강(無疆)한 기초가 될 것이다."
하였다.

 

6월 14일 임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서 태묘(太廟)·육상궁(毓祥宮)의 망제(望祭)에 쓸 향과 영희전(永禧殿)·문묘(文廟)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춘방관(春坊官)에게 명하여 왕세자에게 받들어 보이게 하기를,
"들으니, 네가 《사물잠(四勿箴)》을 세 번 다시 강하여 확실하게 하였다 하는데, 사물(四勿) 가운데에서 ‘물(勿)’ 자가 근본이 되니, 한 가지 일이라도 예(禮)가 아닌데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이는 ‘물’ 자의 기치(旗幟)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학문이 천박하다 하지 말고 사실대로 대답하라."
하자, 세자가 글로 우러러 대답하기를,
"공경히 성교(聖敎)를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대저 사욕(私慾)이 일어나는 것에는 크고 작고 깊고 얕은 것이 있습니다. 큰 것은 올 봄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것에 삼가지 못하여 엄한 하교로 권면하시게 하였으니 자신의 사욕을 이기지 못한 첫째이며, 자주 서연(書筵)을 멈추어 스스로 안일(安逸)로 돌아갔으니 자신의 사욕을 이기지 못한 둘째입니다. 그 나머지 작은 것은 일용 행사(日用行事)하는 사이에도 어찌 사욕이 일어나는 것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큰 것의 해독이 작은 것보다 깊을지라도 혹 작은 것을 소홀히 하여 신중히 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해독이 도리어 큰 것보다 심할 것입니다. 예전에 소열제(昭烈帝)가, ‘악(惡)이 작다 하여 행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지언(至言)입니다. 신은 본디 학문이 천박하니, 잘못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원량(元良)의 글은 이치가 맞으니 기쁘다."
하였다.

 

6월 16일 갑자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장태(藏胎)하는 법에 여태(女胎)는 석 달로 한정되어 있는데, 새로 태어난 옹주(翁主)의 태(胎)는 오는 7월에 석 달이 차니, 날을 가려 거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6월 17일 을축

정홍순(鄭弘淳)을 승지로, 심성진(沈星鎭)을 대사헌으로, 심발(沈墢)을 사간으로, 이정보(李鼎輔)를 형조 판서로, 신만(申晩)을 판의금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예문 제학으로, 조명채(曹命采)를 동경연으로, 이기덕(李基德)을 장령으로, 유한소(兪漢蕭)를 헌납으로, 남태온(南泰溫)을 대사간으로, 황인검(黃仁儉)을 정언으로, 장계군(長溪君) 이병(李棅)을 동지 진하 겸 사은 정사(冬至進賀兼謝恩正使)로, 이종백(李宗白)을 부사로, 심발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승지로서 경연(經筵)을 겸대(兼帶)할 수 없으니, 행 도승지(行都承旨) 조명채는 규례에 따라 감하(減下)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이달 20일에 시작하여 약방(藥房)에서는 번갈아 직숙(直宿)하고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도 직숙하라."
하였다. 대개 빈궁(嬪宮)의 산기(産期)가 임박하였기 때문이었다. 각사(各司) 가운데에서 오부(五部) 같은 곳은 백성에게 폐해가 되므로 대령(待令)하지 말게 하였는데, 그대로 정식(定式)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대신(大臣)도 같이 들어갔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전라도(全羅道)의 전최(殿最)102)  를 봉진(封進)해야 할 것인데, 전 감사(監司) 서명구(徐命九)를 이제 이미 서용(敍用)하였으니, 교귀(交龜)하기 전에 법에 따라서 곧 봉진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춘방(春坊)의 관원은 구임(久任)해야 할 것인데, 이최중(李最中)·홍자(洪梓)·서명응(徐命膺)·홍양한(洪良漢)·황인검(黃仁儉)·윤동성(尹東星)·이명식(李命植)·박성원(朴聖源)·유정원(柳正源) 등은 모두 문학(文學)으로 이름났습니다."
하고, 도제조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조영순(趙榮順)·홍경해(洪景海)도 문학에 넉넉한데 바야흐로 참하(參下)에 있으니, 모두 출륙(出六)하여 춘방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서 이천보에게 이르기를,
"경은 지위가 원보(元輔)에 있는데 천거하는 것은 국외(局外)의 사람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하여 공평을 지키는 뜻이 없는가?"
하고, 여러 번 엄한 하교를 내렸는데, 이천보는 두려워 움츠려서 부복(俯伏)하여 있을 뿐이었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구성필(具聖弼)이 초헌(軺軒)을 탄 것은 그릅니다마는, 무관(武官)으로 쓰면 일에 막히는 것이 많을 것이니, 음관(蔭官)으로서 장천(將薦)하는 예(例)로 쓰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나삼(羅蔘)은 계방(桂坊)103)  의 관원이 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먼저 출륙하도록 허락하고 사송(詞訟)이 지나면 수령(守令)을 제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의 학문이 중하다. 아직은 계방에 두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의 벼슬을 파면하였다. 탱은 늙어 병들었기 때문에 문안사(問安使)를 갈았는데, 호조(戶曹)에서 준 반전(盤纏)104)  을 이미 죄다 썼다 하고 끝내 새 사신(使臣)에게 갖추어 보내지 않았으므로, 대신(大臣)이 아뢰어 파면하였다.

 

6월 18일 병인

어떤 별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 색이었다.

 

대신과 관각 당상(館閣堂上)을 명초(命招)하여 한림 회권(翰林會圈)을 행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겸춘추 정상순(鄭尙淳)과 검열 이수훈(李壽勛)·신응현(申應顯)이 회권하여 12인을 뽑았는데, 박치문(朴致文)의 상서(上書)가 나오게 되어 신응현·이수훈이 상서하여 대변(對辨)하니, 임금이 박치문은 한림 회권을 방해하였다 하여 파직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권점(圈點)은 비록 정밀하게 하였더라도 이제 패권(敗圈)이 되었으니, 관각으로 하여금 회권하게 하라."
하였다. 그래서 대신과 춘추관(春秋館)의 당상이 회권하여 22인을 뽑았는데, 임금이 종실(宗室)의 아들 이정렬(李廷烈)·이현지(李顯祉)를 더 넣으라고 명하였다.

 

6월 21일 기사

찬선(贊善) 민우수(閔遇洙)가 상서하여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6월 22일 경오

유성(流星)이 천시 항시원(天市亢市垣)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쯤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헌부(憲府) 【지평 신대수(申大脩)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귀양보낸 죄인 윤광찬(尹光纘)은 목호룡(睦虎龍)의 위훈(僞勳) 때에 준 벼슬을 방자하게 그 판적(版籍)에 써서 흉역(凶逆)의 마음으로 심법(心法)을 오히려 전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엄폐하다가 마침내 드러났으므로 여정(輿情)이 들끓고 대간(臺諫)이 상달하여 죄를 성토하였는데, 좋은 곳에 귀양보내어 법률의 적용을 잘못한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윤광찬을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소서. 윤광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무거운데, 마침내 가볍게 감죄(勘罪)하여서 끝내 너무 가볍게 되었다면 대각(臺閣)에 있는 자는 진실로 쟁집(爭執)하여 연달아 상달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접때 일종(一種)의 당(黨)을 비호하는 무리가 틈을 타서 정달(停達)하며 조금도 염려하고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마음을 주책(誅責)하는 의리로 논하건대, 모두 역적 편의 사람입니다. 청컨대 정달한 대신(臺臣)을 먼 곳에 정배(定配)하소서. 춘방(春坊)은 권강(勸講)하는 벼슬이므로 책임이 매우 중하니, 진실로 단정하고 정직한 선비로 좌우에서 보도(輔導)하게 해야 마땅한데, 필선(弼善) 이수봉(李壽鳳)은 성질이 간사하고 행실이 비뚤어졌습니다. 전에 초야에 있을 때에 화수전(花水殿)의 상량문(上樑文)을 지어냈는데, 허황한 말을 떠벌리어 일세(一世)를 선동하고 현혹하여 스스로 뽐낼 생각을 하였으니, 그 마음이 요망한 것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음사(陰邪)한 무리는 하루도 궁료(宮僚)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필선 이수봉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서연관(書筵官)의 직임은 지망(地望)이 절로 구별되므로 산림의 숙덕(宿德)한 선비가 아니면 진실로 사람마다 함부로 그 벼슬에 있을 수 없는데, 최재흥(崔載興)은 전혀 학식이 없어 더럽고 패려하여 바른 품행이 없으며 도위(都尉) 집 행랑에서 추악함을 드러낸 것은 입이 있는 자가 모두 말하고, 지난번 남읍(南邑)에 있을 때의 행사(行事)가 추악하고 비루한 것은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족하며, 도인(屠人)의 딸을 억지로 빼앗아 관비(官婢)로 정속(定屬)하고 이어서 함께 간통하여 매우 빠지고 이웃 고을에 갈 때에 짐바리가 따르기까지 하였으므로, 정법(政法)이 문란하고 거조(擧措)가 해괴한 것을 온 도내(道內)의 사람이 모두 침을 뱉고 욕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처럼 추악하고 도리에 어그러지는 무리는 결코 초선(抄選)의 반열에 채워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최재흥의 서연관을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따르지 않겠다. 윤광찬의 일은 대조(大朝)께서 이미 엄히 처치하셨으니, 다시 의논할 것 없다. 정달한 대신과 이수봉의 일은 지나치다. 서연관을 개정하는 일은 지금 대조께서 특별히 하교하여 불러온 때인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빨리 정달하고 번거롭히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듣고 하교하기를,
"신대수는 누구의 자손인가? 정원(政院)에서는 알아서 들이라."
하였는데, 신대수가 바야흐로 대청(臺廳)에 있다가 스스로 그 사조(四祖)를 써서 바치자, 임금이 신대수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힐책하였다. 하교하기를,
"신대수가 논한 것은 모두 당(黨)이다. 윤광찬은 그르나 이번에 의율(擬律)한 것은 매우 맞지 않고, 권해(權賅)는 삭파(削罷)하면 되는데 귀양보내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모변(某邊)’이라는 두 자는 당이 성할 때에 피차가 남을 몰아치는 조목인데, 신대수가 어찌 감히 본뜨는가? 이수봉이 보도를 잘하지 못하면 논핵(論劾)하는 것이 옳은데, 이제 망탄(妄誕)한 글로 논하여 상달하려 하였다. 내가 비록 쇠약하더라도 어찌 예(禮)가 아닌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최재흥의 일로 말하면 이존중(李存中)이 논한 것을 따른 것에 지나지 않는데,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려 하였으니, 아! 당봉(黨鋒)이 어찌하여 글을 읽는 사람에게도 미치는가? 또 대신(臺臣)이 사조를 써서 바치는 것은 고금에 들은 바가 없으니, 대풍(臺風)이 죄다 없어졌구나. 특별히 그 벼슬을 삭탈하라."
하고, 이어서 전 호남백(湖南伯) 서명구(徐命九)에게 명하여 최재흥(崔載興)의 일을 엄히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임금이, 윤태연(尹泰淵)이 천총(千摠)이 된 일이 명백히 입증되지 않으면 진용(進用)하기 어렵다 하므로,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윤태연을 나수(拿囚)할 것을 의논하였다. 윤태연이 공초(供招)하기를,
"도감(都監)의 장교(將校) 김도증(金道曾)이, ‘대신(大臣)이 저를 시켜 훈련 대장에게 분부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김도증에게 물었는데, 김도증도 공초하기를,
"조 영돈녕(趙領敦寧)이 과연 이런 분부를 저를 시켜 훈련 대장에게 전하게 하였으므로 전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김성응에게 함문(緘問)하라고 명하였는데, 김성응이 비로소 말하기를,
"김도증이 와서 조 영돈녕의 말을 전하였으므로 윤태연을 천총으로 차출하였습니다."
하였다. 조 영돈녕은 고 상신 조현명(趙顯命)을 가리킨 것이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제 함답(緘答)을 보니, 그 잘못이 셋이 있다. 대신이 이미 공회(公會)에서 말하지 않았으니 김도증의 말을 듣고 곧바로 윤태연을 차출한 것이 그 잘못의 첫째이고, 친히 듣지 않았으니 접때 연중(筵中)에서 모두 곧바로 아뢰지 않은 것이 그 잘못의 둘째이고, 조재득(趙載得)의 말도 김도증이 속여 전하였다 하는데 연대(筵對)에서 마치 친히 들은 듯이 하였으니 그 잘못의 셋째이다. 김성응의 관직을 파면하라."
하고, 또 윤태연은 그 고신(告身)을 삭탈(削奪)하며 김도증은 갑산(甲山)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김도증은 막속(幕屬)으로서 전하는 말을 널리 퍼뜨리어 그 대장을 속였더라도, 윤태연이 과연 탐하지 않고 깨끗하였다면 김도증의 말이 처음부터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이 있었다.

 

6월 23일 신미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근래 송금(松禁)이 해이하므로 잇달아 신칙하였는데, 일전에 산지기들이 한 사대부(士大夫) 집에서 산 소나무를 마구 베어 낭자하게 쌓아 둔 것을 보고 잡으려 하였더니, 세 사람이 산지기를 마구 때리고 도끼로 정강이를 찍어서 바야흐로 죽을 지경에 있고 또 금패(禁牌)를 빼앗았습니다. 이러한데도 버려두면 법을 어지럽히는 무리를 금지할 수 없으니, 사대부라 하는 이후채(李厚埰)·이후춘(李厚春)·이후혁(李厚赫) 등을 법을 적용하여 엄히 처치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파춘군(坡春君) 이목(李穆)의 관직을 삭탈하였는데, 작은 일로 강가에 사는 여인에게 혹형(酷刑)을 시행한 것이 다른 일로 말미암아 나타나서 형조 참판 신회(申晦)가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6월 24일 임신

이성중(李成中)을 부제학으로, 조영순(趙榮順)·서명응(徐命膺)을 정언으로, 한사직(韓師直)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25일 계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친림(親臨)하여 한림 소시(翰林召試)105)  를 행하였다.

 

김시구(金蓍耉)를 검열로 삼았다.

 

정언 서명응(徐命膺)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해조(該曹)에서 해가 저물어 바쁨으로 인하여 신의 교지(敎旨)를 어보(御寶)를 찍을 때에 빠뜨렸다 합니다. 대저 지금의 교지는 오히려 옛 고칙(誥勅)과 같아서 벼슬을 제수하는 부신(符信)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처음 벼슬한 이후로 무릇 제배(除拜)가 있을 때에 감히 정목(政目)을 준거(準據)로 삼지 않고 반드시 교지를 보고서야 비로소 배명(拜命)하였으니, 군명(君命)을 중히 여기고 보적(寶蹟)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이 아직 교지를 보지 못하였으면 감히 현직(現職)으로 자처할 수 없을 것이니, 바라건대, 후원(喉院)으로 하여금 다시 출패(出牌)하지 말게 하소서. 해랑(該郞)이 살피지 못한 잘못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을 내리고 전랑(銓郞)은 나처(拿處)하게 하였다.

 

여러 승지들의 벼슬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가 이윽고 도로 거두었다.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이 아직도 정원 일기(政院日記)에 있다 하여 청대(請對)하고 승지도 구대(求對)하였으나, 임금이 인견하지 않고, 이튿날 하교하기를,
"원경하와 여러 승지들이 청대한 것은 참으로 그르다. 어느 일이 선왕(先王)의 본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없애기를 청한다면, 정원 일기에 어찌 남는 장(張)이 있겠는가? 비록 일기에서 없애더라도 실록(實錄)에는 있는데, 실록도 고칠 수 있겠는가? 원경하는 사람됨이 조용하지 못하므로 이런 해괴한 행동이 있었는데, 여러 승지들이 구대하였으니, 더욱이 매우 놀랍다. 모두 그 관직을 파면하라."
하였다. 대신(大臣)과 옥당(玉堂)이 처분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니, 도로 거두었다.

 

6월 27일 을해

남태제(南泰齊)를 대사헌으로, 이유수(李惟秀)를 동지 겸 사은사 서장관(冬至兼謝恩使書狀官)으로 삼았다.

 

경조(京兆)106)  에 신칙하여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금령(禁令)을 더욱 엄하게 하였다. 금령을 범한 자가 20여 인인데 모두 정배(定配)하고, 판윤(判尹) 어유룡(魚有龍)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6월 28일 병자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서 의릉(懿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회갑편록(回甲編錄)》을 친히 지어서 세자(世子)를 가르쳤는데,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는 것[敬天]이고, 둘째는 조상을 받드는 것[奉先]이고, 셋째는 백성을 위하는 것[爲民]이고, 넷째는 당을 없애는 것[袪黨]이고, 다섯째는 사치를 억제하는 것[抑奢]이었다.

 

하교하기를,
"이원(梨園)이라 칭한 것은 곧 당 명황(唐明皇) 때의 일이다. 후세에서 본받을 것이 아니니, 이 뒤로는 장악원(掌樂院)을 이원이라 부르는 것을 없애라."
하였다.

 

6월 29일 정축

이익정(李益炡)을 판윤으로, 김상성(金尙星)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지사 원경하의 관직을 파면하고, 전 지평 박기채(朴起采)를 관동(關東)에 정배하였다. 하교하기를,
"원경하는 자신이 중신(重臣)이니, 이미 여염집에 들어갔으면 곧 자수(自首)해야 할 것인데, 이제 다시 적간(摘奸)할 때에 비로소 나타났으므로, 그 칙려(飭勵)하는 것은 이 사람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니,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박기채는 시종신(侍從臣)으로서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 않았으니, 관동에 정배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민가(民家)를 사들인 사인(士人)을 영구히 청직(淸職)·현관(顯官)이 되는 것을 금하고 대과(大科)·소과(小科)의 참방(參榜)도 빼어 버려야 할 것인데, 사정(私情)에 얽매여 이 하교를 준수하지 않는 전관(銓官)·예관(禮官)은 이 율(律)과 같이 시행한다는 것을 이조(吏曹)·예조(禮曹)·정원(政院)에 게시하라."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