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2권, 영조 30년 1754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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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인

좌의정(左議政) 김상로(金尙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과 중신(重臣) 원경하(元景夏)가 장통교(長通橋) 남쪽에 여염집을 사서 이웃이 되어 차례로 들어가 산 것은 모두 10여 년 전의 일인데, 신이 개천 북쪽으로 옮겨 산 지는 겨우 3년이 되었고 중신은 아직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중신은 그대로 살다가 죄를 받았고, 신은 옮겨 살았기 때문에 요행히 면하였습니다. 청컨대 신이 일찍이 법금(法禁)을 범한 죄를 살펴 바루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입시(入侍)하면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대사헌 남태제(南泰齊)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에 중신 원경하가 청대(請對)한 것은 그 일에 대하여 아직까지 처분이 없으므로, 신은 적이 의혹됩니다. 신이 《송사(宋史)》를 살펴보건대, 범충(范沖)이 직사관(直史館)으로서 《신종실록(神宗實錄)》·《철종실록(哲宗實錄)》을 중수(重修)하며, 선인 황후(宣仁皇后)에 대한 무함을 모두 씻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주묵사(朱墨史)라고 일컬었는데, 그때 사관(史館)에서는 찬(贊)하기를, ‘두 사필(史筆)이 그 올바름을 얻어서 간신(奸臣)의 정상이 더욱 드러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우리 나라로 말하면 고 판서 이식(李植)이 주묵(朱墨)하는 뜻을 본받아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하기를 청하였었습니다. 아! 금궤(金櫃)·석실(石室)에 비장(秘藏)한 것도 오히려 개수하기를 청하는데, 더구나 은대(銀臺)107)  의 기거주(起居注)108)  이겠습니까? 더구나 기거주가 아니고, 단지 흉역(凶逆)의 글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실려 있으니, 더욱이 불살라 없애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인년109)   옥사의 무안(誣案)을 이미 명하여 불살랐으면, 이것은 두 가지이면서 한 가지인데, 하나는 불사르고 하나는 남겨 두었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비록 여러 신하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소치로 말미암았다 하더라도 이제 이미 단서가 드러났으니, 더욱 어찌 일각이라도 남겨 두어서 신민의 분통을 더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대조께 앙품하여 빨리 재처(裁處)를 내리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대조께서 이미 아시는데, 내가 어찌 다시 여쭈겠는가?"
하였다.

 

7월 3일 경진

정언 서명응(徐命膺)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염려되는 온갖 일 중에서 예덕(睿德)의 성취보다 더한 것은 없으니, 삼가 1강 8목(一綱八目)으로 아룁니다.
이른바 1강이라는 것은 예지(睿志)를 분발하는 것이며, 강학을 밝히고[明講學], 성실을 힘쓰고[務誠實], 일욕을 경계하고[戒逸慾], 청납을 넓히는[恢聽納] 네 가지는 학문하는 요체이고, 사전을 바루고[正祀典], 학교를 일으키고[興學校], 공거(貢擧)110)  를 고치고[改貢擧], 무략을 씩씩하게 하는[壯武略] 네 가지는 제치(制治)하는 도구입니다. 대저 집안을 잘 다스리는 일을 맡고 아비의 업을 잇는 책임을 이어받은 필부(匹夫)·서사(庶士)도 오히려 지기(志氣)를 분려(奮勵)하여 출세해서 이름을 드날리는데, 더구나 저하께서 계신 지위는 어떠한 것이며, 다스리시는 일은 어떠한 것이며, 이어받으신 책임은 어떠한 것입니까? 한 생각을 삼가지 않으면 정사(政事)에 근심이 생기고 한 일을 살피지 않으면 백성에게 폐해가 미치니, 어찌 예지를 분발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의리를 먼저 살피지 않으면 들은 것이 많아도 현혹되기 쉽고, 지의(志意)를 먼저 정하지 않으면 착한 것을 지켜도 혹 흔들린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신의 말을 믿지 말고 정자의 말을 믿으시어 예지를 분발하여 우뚝하게 자립하시면, 학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제치가 반드시 확립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반드시 예지를 분발하는 것을 가지고 8목의 강으로 삼은 까닭입니다.
그 학문하는 요체는 첫째 강학을 밝히는 것입니다. 신이 매번 궁료에게 예학(睿學)의 실마리를 물어보면, 저하께서 한두 궁료와 음석(音釋)111)  을 주고받으며 대지(大旨)를 강구하는 것이 마치 몽사(蒙士)·유학(幼學)이 과정(課程)에 따라 학업을 익히는 것과 같다 합니다. 저하께서 서연(書筵)을 열어 학문을 강구하신 지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문의(文義)와 대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가르쳐 주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으실 수 있을 것이고, 미처 통달하지 못하신 것은 단지 온갖 만상(萬象)이 한가지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미묘한 곡절의 이치일 뿐일 것인데, 진실로 의심스럽고 어려운 것을 널리 베풀어 두루 참고해서 이해하여 통하지 못하신다면, 아마도 학기(學記)112)  에 이른바, ‘독학(獨學)하면 고루(孤陋)하다.’는 것에 불행히도 가까운 듯합니다. 그러나 신이 늘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사부(師傅)·빈객(賓客) 같은 동궁의 관속을 모두 대신·중신으로 겸하게 하면, 직무가 바쁘기 때문에 강연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므로, 이는 이름은 있으나 실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주자(朱子)가 일찍이 동궁의 관속은 모두 정원(正員)을 두어 겸직시키지 말고 그 직장(職掌)을 밝혀서 공효(功效)를 책임지우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제 대조께 앙품하여 대략 이 방법을 본받아 사부·빈객은 따로 실관(實官)으로 하되, 중추부(中樞府)·돈녕부(敦寧府)를 사부·빈객의 아문(衙門)으로 삼아 해직된 대신에게 곧바로 사부 벼슬을 주고, 빈객도 경재(卿宰) 가운데에서 학문이 있는 자를 뽑아서 힘써 성의를 쌓고 오로지 보도(輔導)에 힘쓰게 한다면, 반드시 볼만한 성효(成效)가 있을 것입니다. 또 춘방(春坊)의 요속(僚屬)은 단지 당하관만 임용하므로 학문이 있는 당상관은 도리어 강연에 참여하지 못하니, 또한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을 널리 뽑는다는 뜻에 어그러집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두 보덕과 두 필선과 두 진선은 당상의 벼슬자리로 고치고, 두 문학과 두 사서와 두 설서는 그대로 당하의 벼슬자리로 두되, 그 겸직을 모두 실직(實職)으로 높이고, 초선(抄選)할 때마다 사부·빈객이 합석하여 권점(圈點)하되, 도당록(都堂錄)113)  의 법과 같이 문벌의 고하를 논하지 말고 오직 행실이 바르고 식견이 고명한 자를 뽑는다면, 궁료의 선택에서 마땅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당상 한 사람과 당하 한 사람이 함께 춘방에 입직하였다가 입시하여 진강(進講)하고, 만 5일이 되면 좌빈객·우빈객이 번갈아 입시하여 진강하고, 또 만 15일이 되면 사부가 여러 빈객들과 궁료들을 거느리고 크게 모여서 합강(合講)하되, 오로지 읽는 것만 일삼지 말고 무릇 행실의 요체와 처사하는 방법과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반복하여 상확(商確)한 다음 해가 기울면 파하고, 춘분 이전과 추분 이후의 밤이 조금 긴 때에는 경루(更漏)가 내리기 시작할 때에 와합(臥閤)에서 궁료를 인접하여 벗들이 학문에 힘쓰며 격려하듯이 조용히 강마(講磨)한다면, 점점 물들어서 반드시 크게 힘을 얻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그대와 함께 하루 동안 이야기하면 10년 동안 글을 읽는 것보다 낫다.’ 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아마도 널리 궁관을 두고 애써서 강학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한갓 겉치레가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둘째 성실을 힘쓰는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살펴보건대, 선왕의 뒤를 잇는 세자는 깊은 궁궐에서 나고 자라서 편안한 것이 버릇이 되었으므로, 격물 치지를 마땅히 힘써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진실로 격물 치지에 대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고, 신심(身心)을 마땅히 바루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나 진실로 신심에 대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합니다. 하루아침에 게으른 욕심이 끼어들고 못된 행실이 침범하면, 스스로 그 마음이 빠지는 것을 몰라서 구마(狗馬)의 성색(聲色)과 말을 달려 사냥하는 일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앞에 다가올 것이니, 이것이 왕도(王道)와 패도(覇道)가 나뉘는 원인이고 치란(治亂)이 터잡는 원인입니다. 지금 세도가 날로 낮아지고 교위(巧僞)가 버릇이 되었으므로, ‘성의(誠意)’ 두 자로 오늘날의 약석(藥石)을 삼아야 하는데, 그 천하의 기준을 세워서 뭇 백성의 표준이 됨으로써 한 세대에 모범을 보이는 것은 오직 저하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셋째 일욕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은 음양(陰陽)이나 주야(晝夜)와 같아서 이것이 번성하면 저것이 쇠잔해지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자라므로, 함께 보존되어 아울러 행해지는 일이 없습니다. 밝은 자는 삼갈 수 있고 용맹한 자는 단절할 수 있겠지만, 평범하고 용렬한 임금은 삼가고 단절하지 못하므로, 남모르게 늘고 남모르게 자라나서 마침내 제어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입니다. 저하께서는 일욕 때문에 마음이 방탕해지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진실로 알고 있으나, 본심을 소반의 물처럼 유지하기 어렵고 바람 앞의 촛불처럼 보존하기 어려울까 매우 두렵습니다. 저하의 마음이 한 번 변하면, 천리에서 떠나 날로 멀어지고 인욕을 향해 가는 것은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전대(前代)보다 개탄할 것은 아닌게아니라 몸소 행하는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근일 전하께서 친히 강연(講筵)에 임어하셔서 몸소 가르치려 하셨다고 하니, 어찌 저하께서 편안히 지내기를 좋아하실 때이겠습니까? 저하께서는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청납을 넓히는 것입니다. 옛 성왕(聖王)은 전후 좌우가 모두 임금의 결점을 바로잡아 보좌하는 사람들이어서 천하의 선(善)이 모두 그의 선이 되었는데, 후세에서는 따로 대각(臺閣)을 세워서 그 법은 이미 멀어졌고, 또 마음을 비워 살펴서 받아들이거나 너그럽게 용납하여 장려하지 못하니, 잘못은 어디로부터 듣겠으며 덕(德)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겠습니까? 제갈양(諸葛亮)이 말하기를, ‘나라에 대하여 충성하는 생각을 가진 자들은 내 잘못을 부지런히 책망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저하께서는 3백 년의 종사를 부탁받으셨는데, 널리 물어서 뭇 선한 것을 아울러 얻어 억만 년 무궁한 사업을 튼튼히 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묻기를 좋아하면 여유가 있다.’ 하였고,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군자는 마음을 비우고 남의 말을 받아들인다.’ 하였으니, 저하께서는 여기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제치하는 도구는 첫째, 사전을 바루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사시(四時)의 대향(大享) 때에 헌관(獻官)부터 제집사(諸執事)까지 천조(天曹)의 한 낭리에게 맡겨서 임시하여 구차하게 차출하므로 청탁이 어지럽고, 피폐한 사람을 많이 섞어 차출하므로 의복이 불결하고 예의가 어그러지는 것이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대략 《주례(周禮)》를 본받아 육조(六曹)의 당상·낭청과 혜청·태복의 무리로 영식(令式)을 정하여 어느 관원은 어느 일을 돕고 어느 관원은 어느 물건을 받들게 하고, 혹 실고(實故)가 있으면 이조에서 아뢰어 본직을 갈고 다시 다른 사람을 의망하여 차출하고, 이조의 낭관을 제관(祭官)에 차출하는 법은 일체 없애고, 기우제의 제관은 대총재(大冡宰)114)  를 시켜 실직과 군함(軍銜)을 물론하고 번갈아 의망하여 차출하게 하소서. 악(樂)·가(歌)에 이르러서는 신은 예전 것에서 삼대의 악을 고증하고, 후세의 것에서 우리 나라의 문소전의 악을 참고하여 그 조리가 절로 나타나게 하기를 바랍니다. 대저 왕자(王者)는 공을 아홉 가지로 질서를 잡으므로[功以九敍] 악을 아홉 가지로 이루니[樂以九成], 《서경》에 ‘소소(簫韶)115)  를 아홉 번 연주한다.’ 하고, 《주례(周禮)》에 구덕지가(九德之歌)와 구소지무(九㲈之舞)를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다만 《시경(詩經)》의 아(雅)와 송(頌)에 태왕(太王)을 제사하는 악이 있고 무왕(武王)을 제사하는 악이 있으나, 이것은 특(犆)116)  ·상(嘗)117)  의 제사 때에 각각 한 묘에서 쓰는 것이고, 구묘(九廟)를 아울러 제사하는 시악(詩樂)이 아닙니다. 신이 삼가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살펴보니, 종묘지악(宗廟之樂)의 주(註)에, ‘어느 실(室)은 어느 곡(曲)이다.’ 하지 않고 다만 악장(樂章)을 열서(列書)하였을 뿐이고, 문소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1실은 어느 곡이고 제2실은 어느 곡이라 하였으나, 각실(各室)이 다만 한 곡뿐이었습니다. 그 뜻은 대개 문소전의 제도를 말한 것인데, 이미 삼대의 오묘(五廟)의 법을 썼으니, 삼대의 특·상의 예를 본받아 한 실마다 각각 1장(章)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마는, 종묘의 제도는 이미 한(漢)·당(唐) 이전의 법을 따랐으니, 사시의 제사 때에 각각 악장을 연주할 수 없으므로 다만 삼대의 협제(祫祭)118)  의 예에 따라 각실에서 각각 한 악을 연주하여 구변(九變)에 이르러 그칩니다. 이 때문에 문소전의 가(歌)는 다섯 실에 각각 여덟 구(句)를 지었는데, 그 각실에서 한 번 헌작(獻爵)하기 때문에 여러 실(室)의 시악의 장단(長短)·지속(遲速)이 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묘는 구에 장단이 있고 글자에 다소(多少)가 있는데, 그 헌작을 끝낸 뒤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만 그 구성(九成)을 취할 뿐이고 그 지속을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뜻은 매우 분명하여 본래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종묘 안에서 구성의 악을 갈라 각실마다 연주하는 것으로 삼아 빠른 것은 그 구를 덜고 느린 것은 그 절(節)을 더하니, 이것은 악사(樂師)들이 구습(舊習)을 따라 착오한 소치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악의 근본이겠습니까? 이제 구성의 예를 따르고자 하면 반드시 《오례의(五禮儀)》의 악이 그치는 절(節)을 없애야 할 것이고, 각실마다 연주하는 법을 따르고자 하면 또 당초 구변의 뜻과 서로 어그러지고 악장의 장단이 맞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신관(晨祼)·궤식(饋食) 때에 각실마다 당(唐)·송(宋)의 법처럼 악장을 만들어 동작을 조절하고 여러 실에서 축문을 읽기를 마치기에 이르러 보태평(保太平)의 구성을 합주(合奏)하고 아헌(亞獻)·종헌(終獻) 때에도 그렇게 하면, 선왕의 구제(舊制)를 회복하고 삼대의 유의(遺意)에 맞출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대조께 여쭈고 예관에게 하문하여 사전의 도리를 모두 정돈하소서.
둘째 학교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주현(州縣)에는 향교(鄕校)는 있으나 이숙(里塾)은 없습니다. 이것은 백성을 가르치는 도구에서 그 반은 얻었으나 그 반은 잃은 것이니, 비록 애초에 학교가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옳을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일찍이 《소학훈의(小學訓義)》를 간행한 뒤에 제도(諸道)의 주현에서 소학생(小學生)을 과시(課試)하여 순영(巡營)에 보고하고, 순영에서 예조에 보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신 것은 대개 글로 말미암아 성실하기를 요구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공(功)으로 점점 나아가려는 것이니, 여기에서 뛰어나신 성지(聖智)가 이를 다스리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팔도의 감사와 수령에게 널리 일러서 한 고을에 하나의 숙(塾)을 세우게 하고, 운각(芸閣)119)  으로 하여금 《소학훈의》를 인쇄하여 내리게 하고, 유신으로 하여금 향당(鄕黨)의 절목을 지어 내리게 하고, 주현으로 하여금 고을 안의 몽사(蒙士)를 뽑고 스승을 세워서 가르치게 하소서. 또 음사(飮射)120)  ·독법(讀法)의 예를 강행(講行)하여 점점 연마하고 바로잡은 뒤에 3년마다 향숙(鄕塾)에서 행실이 바르고 식견이 트여 밝은 선비 한 사람을 가려서 그 고을의 학교에 올리고, 또 3년 뒤에 고을에서 각각 한 사람을 감영의 학교에 올리고, 또 3년 뒤에 여러 감영에서 각각 한 사람을 태학(太學)에 올리고, 대사성이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사서(四書)·오경(五經) 등 여러 책을 번갈아 고강(考講)하게 하소서. 또 그 품행과 재능의 고하를 살펴서 혹 행실이 비열하고 패려하여 한갓 어지러이 다투는 것만 일삼는 자가 있으면 대사성이 곧 초기(草記)하여 출재(黜齋)하되 올린 감사·수령·훈장과 함께 죄주고,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닦인 자가 있으면 대사성이 3년마다 연말에 이조·병조에 천거하여 보내어 교관(敎官)·세마(洗馬) 등의 벼슬에 보임하게 하소서. 대저 이렇게 하면 승출(陞黜)이 합당하고 명실(名實)이 어그러지지 않아서 사람마다 스스로 힘쓰고 착한 데로 나아가기를 좋아할 것이니, 오늘날 태학이 음식만 소비하고 분쟁만 일삼는 것에 견주어 그 보람과 폐해의 차이가 어찌 천백 배뿐이겠습니까?
셋째 공거를 고치는 것입니다. 과거는 입신(立身)하는 시초이고 임금을 섬기는 첫 일인데, 근래에 과장(科場)이 엄숙하지 못하여 차술(借述)하고 표절하는 꼴이 천백 가지이니, 오늘날을 위한 방도에 있어서 변통하지 않으면 사습(士習)이 한결같아질 것입니다. 그 방도에 세 가지가 있으니, 별과(別科)를 마땅히 없애고, 사부(詞賦)를 마땅히 없애고, 명경(明經)을 마땅히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왜 별과를 마땅히 없애야 하느냐 하면, 근년 이래로 경과(慶科)가 겹쳐서 한 해에 적어도 두 차례에 밑돌지 않고, 또 알성시(謁聖試)·반시(泮試) 등 여러 과시(科試)가 전후에 잇달아 있으므로, 선비된 자가 과장을 당할 때마다 공령(功令)을 일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할 여가에 글을 읽는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하니, 심지(心志)가 어그러져 방탕하고 습상(習尙)이 변하여 경박해지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고, 또 그 글을 짓는 것이 마치 근원이 없는 물이 아침에 찼다가 저녁에 마르는 것과 같아서 재필(才筆)이 쇠퇴한 뒤에는 급할 때에 부응하지 못하므로, 남의 손을 빌리고 표절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형세가 당연한 것입니다. 또 더구나 과시로 경사를 꾸미는 것은 의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서, 옛 기록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고 중국에서도 듣지 못한 것인데, 우리 나라의 이 법은 어느 때에 비롯하여 그 전해 온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알성시·반시에 이르러서는 황급하게 짧은 글로 한나절 동안에 과시(課試)하므로, 거의 장구(藏鉤)121)  의 놀이와 다를 것이 없으니, 과시를 베풀어 사람을 뽑는 방도가 아닙니다. 국가에서 인재를 가려 뽑으려면 한결같이 모두 혁파하여 요행을 바라고 어지러이 다투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왜 사부를 마땅히 없애야 하느냐 하면, 역대의 사람을 뽑는 법은 모두 세 번 변하여 빈흥(賓興)122)  에서 효렴(孝廉)123)  이 되고 효렴에서 문사(文詞)가 되었는데, 문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말단입니다. 그러나 문사 가운데에서 책문(策問)은 득실(得失)을 묻고 경륜(經綸)을 자문할 수 있으며, 변려(騈儷)는 교명(敎命)을 꾸미고 인국(隣國)을 사귈 수 있습니다마는, 사부에 이르러서는 치도(治道)에도 보탬이 없고 응제(應製)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송(宋)나라 여공저(呂公著)가 지공거(知貢擧)이었을 때 은밀하게 아뢰기를, ‘천자가 임헌(臨軒)하여 선비를 시험하는데 시부(詩賦)로 하는 것은 어진 사람을 뽑아 잘 다스리기를 구하는 뜻이 아니니, 바라건대 조책(詔策)으로 치도(治道)를 자문하소서.’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천자가 임헌하면 반드시 책(策)으로 시험하였으므로, 마침내 송나라 때에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많았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인재를 얻는 방도는 책에 있고 사부가 표(表)·책만 못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압니다. 왜 명경(明經)을 마땅히 없애야 하느냐 하면, 국가에서 명경으로 사람을 뽑는 것은 본래 의리를 연구하여 자기를 다스리고 남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마는, 오늘날 이른바 명경이라는 것은 구어(句語)로 구업(口業)을 삼고 기억하여 암송하는 것으로 가계(家計)를 삼기 때문입니다. 문의(文義)의 대체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깨닫지 못하여 심지어 사서(四書)·육경(六經)을 자기 말처럼 외면서도 보통 서찰(書札)을 짓지 못하고 쉬운 글도 읽지 못하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이익을 쫓는 마음은 매우 급해지고 벼슬을 구하는 방법은 점점 교묘해지며, 지려(智慮)가 미처 진보되지 못하여 언어가 오히려 막히지만, 책을 펴지 않은 채 먼저 입으로 전수합니다. 또 더구나 외기만 하여 쉽게 잊는 데에 이르고 도리에 어그러진 말을 가지고 경문(經文)에 붙여서 기억하는 묘방(妙方)으로 삼으니, 성경(聖經)을 욕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들 이보다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서울 선비들은 모두 명경을 힘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먼 시골의 궁마(弓馬)에 힘이 부족하고 사장(詞章)에 재주가 부족한 자들은 허둥지둥 이것을 힘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홍패(紅牌)를 받은 뒤에 국가에서 등용하면 참으로 상당한 벼슬이 없고, 동용하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내가 급제하였는데 국가에 대해 무엇을 저버렸기에 국가에서 나를 쓰지 않는 것인가?’ 하며 늘 분노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아! 누가 국가에서 어진 사람을 대우하는 도구가 도리어 사람을 그르치는 바탕이 됨을 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명경을 없애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없어져서 오히려 농상(農桑)을 업으로 삼아 그 본분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저 그런 뒤에 3년에 한 번 대비과(大比科)124)  를 두어 제술과 명경을 합하여 한 과시로 만들되, 제술은 먼저 책 1도(道)를 시험한 다음 표 1편(篇)을 시험하고, 명경은 1서(書)·1경(經)·1례(禮)를 표준 삼아 경·서는 배송(背誦)하고 예는 임강(臨講)하게 하소서. 그리고 가령 오는 식년(式年)에 용학(庸學)125)  ·《시전(詩傳)》·《주례(周禮)》를 강(講)하면, 다음 식년에는 《논어(論語)》·《서전(書傳)》·《의례(儀禮)》를 강하고, 또 그 다음 식년에는 《맹자(孟子)》·《주역(周易)》·《예기(禮記)》를 강하고, 이와 같이 돌려 가며 시험하여 서너 번의 식년이 지나면, 선비들이 여러 경서에 두루 통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표·책에 다 합격한 자와 세 경서에 다 통(通)한 자라야 입격(入格)으로 하고, 그 가운데에서 표에는 합격하였으나 책에는 합격하지 못하였거나 경에는 통하였으나 예에는 불통(不通)한 자는 복시(覆試)에 나아가지 말고 다음 식년을 기다려 다시 책·예를 시험하고, 그 복시에서도 합격하지 못하고 불통한 자는 다음 식년의 복시를 기다리지 않고 세 번의 식년에서도 끝내 입격하지 못한 뒤에야 삭제하여 다시 시험보게 해야 합니다. 대저 이렇게 하면 선비들이 익히지 않은 경서가 없고 또 익히지 않은 글이 없어서 10년이 못되어 온전한 재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는 무략을 장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무신을 뽑는 데에는 세 가지 방도가 있으니, 궁마(弓馬)와 신수(身手)와 구근(久勤)인데, 이 세 가지는 모두 장재(將才)를 잃는 방법이 아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활을 당기고 화살을 노려보며 1백 보 밖에서 사람에 견주어 쏘는 것은 군졸의 재주이고 장수의 재주가 아니므로, 장양(張良)은 일석(一石)의 활을 다루지 못했지만 천리 밖에서 반드시 이겼으니, 이것이 궁마가 불가한 까닭입니다. 장수는 지략(智略)으로 사람의 완력을 부리는 것이지 스스로의 완력으로써 다른 사람을 부리는 것이 아니므로, 제갈양(諸葛亮)은 몸이 옷을 견디지 못하는 듯했지만 삼군(三軍)을 지휘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신수가 불가한 까닭입니다. 구근법(久勤法)에 이르러서는 북제(北齊)에서 비롯하였는데 선유(先儒)가 상세히 논하였습니다. 이것을 군문(軍門)의 장교(將校)·군졸에게 시행한다면 오히려 괜찮겠지만, 어찌 이른바 재략(才略)을 가려 뽑는 방도이겠습니까? 청컨대, 이제부터 이후로는 무신 출신(武臣出身)들은 다 병법(兵法)으로 시험하되, 대략 앞에서 논한 공거법(貢擧法)처럼 이제 현행하는 병서(兵書)인 《육도삼략(六鞱三略)》·《손무자(孫武子)》·《등단필구(登壇必究)》를 기병과(奇兵科)로 하고, 《사마법(司馬法)》·《오자(吳子)》·《울요자(尉繚子)》·《형천무편(荊川武編)》을 정병과(正兵科)로 하되, 육서(六書)는 배송하게 하고 《등단필구》·《형천무편》은 임강하게 할 것이며, 사계삭(四季朔)에 병조 판서와 양국(兩局)의 대장이 회시(會試)를 베풀어 과법(科法)과 같이 우열을 매겨 출방(出榜)한 뒤에 마땅히 천보(遷補)해야 할 사람을 의망(擬望)하여 이조·병조에 보내어 조용하게 하고, 참하(參下)부터 병사·수사까지는 모두 이 방법을 쓰게 하소서. 삼군문(三軍門)에는 따로 척후청(斥堠廳)을 설치하고 서북(西北)과 삼남(三南)의 출신으로서 재략이 있는 자를 가려서 척후 장관(斥堠將官)으로 삼았다가, 그 곳의 변장(邊將)으로 번갈아 보임(補任)하여 도내(道內)의 비상(非常)한 일을 살펴서 군문에 치보(馳報)하게 하고, 그 가운데 잘 정탐하여 공로가 있는 자는 첨사(僉使)·영장(營將)으로 천보하소서. 우리 나라의 군문에서는 방진(方陣) 밖에 다른 진법(陣法)을 몰라서 한 번 기병(奇兵)을 만나면 참으로 반드시 패할 형편이니, 군문의 대장과 유신으로서 병사(兵事)를 아는 자로 하여금 무후(武侯)126)  의 팔진(八陣)과 이정(李靖)의 육화진(六花陣)을 본받아 진도(陣圖)를 새로 만들게 하고, 또 고금의 용병(用兵)과 절제(節制)를 절취(節取)하여 모아서 대질(大秩)을 만들어 참조하여 연습하게 하면, 거의 병모(兵謀)와 군율(軍律)에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신이 앞에 말한 것을 신심(身心)에 증험하고, 뒤에 말한 것을 제도에 시행하여 그 사용에 통달하시면, 신의 이 글이 오늘날 많은 인재를 얻는 골자가 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춘방관(春坊官)의 일과 진면(陳勉)한 것 이하의 네 조목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대조(大朝)께 여쭙게 하겠다."
하였다.

 

7월 4일 신사

다시 김성응(金聖應)에게 훈련 대장을 제수하였다.

 

도승지 조명채(曹命采)를 체차하고, 좌부승지 이수득(李秀得)을 파직하고, 신회(申晦)·홍낙성(洪樂性)을 승지로 삼았다. 도승지가 으레 정고(呈告)를 관장하므로, 승지 이득종(李得宗)과 이수득이 정고를 올려 달라고 조명채에게 청하였는데, 조명채가 청하는 데에는 선후가 있다 하여 이득종의 정사(呈辭)를 먼저 봉입(捧入)하였다. 그래서 이수득이 상서하여 다투자, 조명채가 대변(對辨)하였는데, 임금이 듣고 하교하기를,
"도승지는 한 원(院)의 장관인데, 이수득이 먼저 소란을 일으켜 체통을 손상하였으니, 파직하도록 하라. 조명채는 장관이 된 몸으로 하치않은 일 때문에 스스로 사체를 무너뜨렸고 장주(章奏)하는 사이에 가리지 않은 말이 많았으니, 또한 그 벼슬을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5일 임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서 태묘(太廟)의 추향 대제(秋享大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고, 이어서 태묘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펴보았다. 임금이 처음에 친향(親享)을 명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날이 덥다 하여 도로 거두기를 힘써 청하니 윤허하고, 친히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고 드디어 환궁(還宮)하였다.

 

7월 6일 계미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윤태연(尹泰淵)의 일에 대하여 개탄(慨歎)스러운 마음을 끝내 가슴속에서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한낱 무변(武弁)의 일에 지나지 않는데, 좌상이 끝내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고, 한 번 아뢰고 다시 아뢰어 김성응(金聖應)과 신에게 함문(緘問)127)  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함문이라는 것은 국가에서 말한 자에게 언근(言根)을 묻는 것인데, 이제 추조(秋曹)128)  로 하여금 함문을 보내게 하였으니, 이것은 죄인으로 처치한 것입니다. 신들이 변변치 못하지만 모두 1품의 중신(重臣)인데, 국가에서 3백 년 이래에 이러한 일로 중신에게 함문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국가에서 신들에게 묻고자 한다면 연중(筵中)에서 아뢰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상소하여 아뢰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반드시 함문하기를 청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좌상이 평소에 체통을 스스로 지킨다면, 이 일이 국가의 체모를 손상하고 뒷 폐단을 열게 된다는 것을 반드시 모를 리가 없을 것인데, 도리어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한낱 막비(幕裨)의 처지를 위한 것으로는 지극하겠지만, 체통을 존중하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일이 있고부터 좌상이 연석(筵席)에 나아가면 신의 허물을 주워 모아 말하는 것이 많다고 합니다. 신은 본래 나약하여 수립한 것이 없는데 어찌 근심되고 두렵지 않겠습니까마는,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니 신이 또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지나치다."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도 상서하여 대변(對辨)하였는데, 예사 비답(批答)을 내렸다.
신이 살펴보건대, 윤태연이 대신의 집에 부동하여 친근한 막비가 되어 남몰래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는 정상은 숨길 수 없었으니, 조정의 거조(擧措)에 있어서는 마땅히 우선 윤태연의 벼슬을 막고 다시 그 사람을 관찰하여 쓰거나 버려도 늦지 않은데, 저 상신(相臣)인 자가 도리어 어찌하여 서둘러 사문(査問)하기를 청하여 국가의 사체를 손상하는 것인가?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니, 윤태연의 죄는 또한 피할 데가 없을 것인데, 중신의 글이 어찌 저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7월 7일 갑신

윤득재(尹得載)를 대사헌으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간으로, 이하술(李河述)을 장령으로, 송덕중(宋德中)을 헌납으로 삼았다.

 

7월 8일 을유

홍문 제학 조명리(趙明履)에게 명하여 반궁(泮宮)129)  에 가서 칠석제(七夕製)를 설행하게 하고, 으뜸을 차지한 유생 유서오(柳敍五)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130)  하도록 명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서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형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아뢰기를,
"근래에 법강(法綱)이 해이해져 각 아문(衙門)과 여러 궁방(宮房) 및 세력 있는 집에서 혹 금령(禁令)을 범한 사람을 곧바로 석방시키기도 하고, 금하러 나온 서리(胥吏)를 추치(推治)하기도 하여 국법(國法)을 시행할 수 없게 하니, 이 뒤로 사문(私門)에서 형벌을 베푸는 사람과 금리(禁吏)를 추치하는 일을 초기(草記)하여 논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9일 병술

특지(特旨)로 전 사서(司書) 조재홍(趙載洪)을 발탁하여 승지(承旨)로 삼고, 이익보(李益輔)를 도승지로 삼았다.

 

7월 10일 정해

정언 서명응(徐命膺)의 벼슬을 체차하였다. 태학생이 서명응이 상서(上書)한 가운데에 음식만 허비하고 분쟁만 일삼는다는 구절이 있다 하여 권당(捲堂)하고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치기를,
"서명응은 힘쓸 일을 안다는 태도를 몰래 부려서 출세할 계제를 삼으려 합니다."
하니, 세자가 온화하게 타일러 들어가도록 권하였다. 서명응이 또 상서하기를,
"여러 유생들이 하는 짓은 고친 것이 있어야 권면할 것이 없다는 도리에 어긋납니다."
하니, 세자가 지나치다고 답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권당하고 나가니, 세자가 분부하기를,
"어찌 언로(言路)가 중대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하고, 이어서 유생들에게 들어가도록 권하였으나, 부지하고 억제하는 것이 너무 치우치다는 등의 말로 또 생각하는 바를 써서 바치고, 기꺼이 도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세자가 분부하기를,
"아까 하령(下令)한 것은 지나쳤다. 특별히 정언 서명응의 벼슬을 체차하여 선비들을 위로하라."
하니, 이에 유생들이 비로소 도로 들어갔다.

 

하교하기를,
"원자(元子)·중자(衆子)와 원손(元孫)의 탄생에는 각전(各殿)에 조정의 문안이 있어야 하겠지만, 제손(諸孫)으로 말하면 내국(內局)131)  ·후원(喉院)132)  ·옥서(玉署)133)  만 마땅히 당궁(當宮)에 문안할 따름이다. 재작년에 원손이 미처 정호(定號)하지 않았는데도 조정에서 문안하였으니, 그르다. 이번에는 미리 알아서 다시 착오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유신을 불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講)하였다. 교리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일전에 연중(筵中)에서 강도(江都)에서 순절(殉節)한 신하들의 일 때문에 포가(褒嘉)하라는 명을 특별히 내리셨으므로, 무릇 보고 들은 자로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때에 용명(勇名)을 떨친 사람인 고 승지 홍명형(洪命亨)·생원 김익겸(金益兼)·별좌 권순장(權順長) 등 세 사람만이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입니다. 김익겸의 자손은 바야흐로 급제한 자와 음사(蔭仕)하는 자가 있으나, 홍명형·권순장의 자손에 이르러서는 가난하게 되어 고생하니, 성조(聖朝)에서 표창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녹용하는 것이 풍성(風聲)을 영구히 수립하는 도리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11일 무자

예조에서 아뢰기를,
"6월 이후에 한재(旱災)가 매우 심하면 가을철 이후에도 기우제(祈雨祭)를 설행한 전례가 있으니, 3품인 관원을 보내어 길일(吉日)을 잡지 말고 전례에 따라 설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직 하교를 기다리라."
하였으니, 대개 비가 올 기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신유년134)  에 호조의 경용(經用)이 부족하여 호남 군산창(群山倉)의 조미(漕米) 1천 1백 석과 성당창(聖堂倉)의 조미 6백 석을 가져왔었는데, 그 대곡(代穀)을 아직 채워 주지 않았으니, 청컨대 호조로 하여금 본수(本數)에 의거하여 호조에서 구관(句管)하는 곡식으로 채워 주게 하소서. 또 호서(湖西)의 도신이, 전 감사 김시찬(金時粲)이 임소(任所)에 있을 때 본도 각 고을의 진전(陳田)을 충분히 정밀하게 살폈다 하여 모두 1천 8백 91결(結) 62부(負) 5속(束)을 성책(成冊)을 만들어 해조(該曹)에 올려 보냈습니다. 진전에 대해 근거 없이 징세(徵稅)하는 것은 참으로 한 도의 큰 폐단이 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전정(田政)은 지극히 중요합니다마는, 신미년135)  에 이미 진전을 살피는 정사(政事)를 행하였는데, 겨우 수년이 지나서 청하는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면, 또 수년이 지나서 다시 청하지 않을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대조(大朝)께 여쭈어 도신으로 하여금 진폐(陳弊)가 가장 심한 고을에 대하여 차례로 개량(改量)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의 사체는 다른 벼슬과 저절로 다른데, 근래에 보통의 대체(臺體)도 점점 폐지되어 서경(署經)136)  은 대궐 밖에서 행한다 하여 조방(朝房)에 정세(情勢)가 있으면 대청(臺廳)에 나아가기를 꺼려서 글로 피혐(避嫌)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4, 5년 사이의 잘못된 규례에 지나지 않는데, 그 잘못이 대간에게 있지만 그 책임은 또한 정원(政院)에 있으니, 뒤에 마땅히 각별하게 신칙(申飭)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납 송덕중(宋德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지평 신대수(申大修)는 과감하게 말하는 풍도가 있고, 또 최재흥(崔載興)의 일은 호남 도신의 사장(査狀)이 왔는데 대신(臺臣)이 논한 것에 별로 크게 틀린 것이 없으니, 언로(言路)를 넓히는 도리에 있어서 지나치게 최절(摧折)을 가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신은 신대수를 삭직(削職)하라는 명을 특별히 도로 거두시도록 대조(大朝)께 여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비(中批)137)  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승지 조재홍(趙載洪)은 문학과 지망(地望)으로 보아 어찌 불가하겠습니까마는, 순서에 따라 점차 승진시키면 저절로 뜻밖에 올 것인데, 처음 벼슬살이한 지 반년 만에 갑자기 비옥(緋玉)138)  의 반열에 올랐으니, 국가에서 사람을 등용하는데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며, 당자 또한 석복(惜福)의 도리가 아닙니다. 조재홍에게 새로 제수한 벼슬은 또한 도로 거두시도록 우러러 아뢰어야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사조(四祖)를 써서 바친 대신(臺臣)이 있다는 말은 고금에 듣지 못하였다. 신대수를 비호하려 하더라도 어찌 대각(臺閣)의 사체가 중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중비로 승진시켜 발탁한 것은 조재홍뿐만이 아닌데, 유독 도로 거두기를 청한 데에는 협잡이 없지 않을 것이고, 또 그 일의 시비만을 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석복의 도리가 아니라는 등의 말은 온당치 못한 말이다."
하였다. 이튿날 임금이 하교하기를,
"송덕중의 용의(用意)는 아름답지 못하고 원량(元良)의 답은 착하다. 그러나 신하를 부리는 도리는 그 염우(廉隅)를 신장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동부승지 조재홍은 해직(解職)을 허락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원량이 하답(下答)한 뒤에 마땅히 곧 대청(臺廳)에 나아가 스스로 논열(論列)했어야 하는데, 글로 피혐(避嫌)을 대신하였으니, 이것은 3백 년 동안 없던 일이다. 당습(黨習)을 달갑게 여겨 사체를 돌보지 않았으니, 송덕중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최성대(崔成大)를 승지로 삼았다.

 

7월 12일 기축

임금이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 유척기(兪拓基)를 인견(引見)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저들이 혹 대보단(大報壇)의 일을 묻는다면, 지난날의 잊을 수 없는 은혜가 있었다고 대답하더라도 저들이 또한 반드시 그르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저들이 성후(聖候)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결같다고 대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약방 도제조 김상로가 아뢰기를,
"빈궁(嬪宮)의 산후(産候) 뒤에 정원·옥당·약방에서 마땅히 문안해야 하겠지만, 효묘(孝廟)께서 동궁(東宮)에 계셨을 때인 병술년139)  ·무자년140)   두 해와 현묘(顯廟)께서 동궁에 계셨을 때인 무술년141)  에는 조정에서 동궁에만 문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4일 신묘

예조에서 아뢰기를,
"반가운 비가 시작하였다가 곧 그쳤으니, 기우(祈雨)하는 일을 늦추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날을 잡지 말고 16일에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6일 계사

하교하기를,
"내가 듣건대, 공물(貢物)을 다루는 아문의 관원으로서 공인(貢人)에게 침징(侵徵)하는 자가 매우 많아서, 혹 장복(章服)을 장만하여 바치게 하기도 하고 제관(祭官)을 변통하게 하기도 하고 또 혹 시산(市産)을 가져다 쓰고 끝내 값을 주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훔쳐서 갖는 것과 다르겠는가? 이 뒤로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직의 고하를 물론하고 종신토록 금고(禁錮)시키도록 하라. 제관을 면하려고 꾀하는 자에 이르러서는 3대(代)까지 청현직(淸顯職)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라. 또 내가 잠저(潛邸)에 있었을 때부터 중관(中官)들이 궐내(闕內)의 소속(所屬)들에게 징구(徵求)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니, 드러나는 대로 내시부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가는 것을 금한 것은 성상께서 30년 동안 백성을 돌보신 큰 정사(政事)이고, 이번에 팔고 사는 것을 모두 금하신 하교도 성의(聖意)를 우러러 알 수 있습니다마는, 이보다 앞서 매입한 것을 하루 이틀 안에 모두 도로 물리게 하면 매우 소요스러울 것이며, 그 가운데에서 다행히 적간(摘奸)에 들지 않은 자도 모두 두려워하여 돌아보며 감히 안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대부(士大夫)도 전하의 백성이니, 마땅히 진념(軫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갑술년142)   7월 이후 팔고 사는 것을 금하고부터 적간에 들지 않은 자도 모두 탕척(蕩滌)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간에 들지 않은 자는 탕척하고 그 나머지는 올해 안으로 도로 물리게 하라. 연말에 다시 경조(京兆)로 하여금 적간하게 하여 범한 자가 있거든 조관(朝官)은 2년 동안 금고(禁錮)시키고, 사자(士子)는 6년 동안 정거(停擧)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구성임(具聖任)을 판금오(判金吾)에 의망(擬望)하는 것은 너무 급하지 않은가?"
하였는데,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무장(武將)은 병판(兵判)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의망합니다. 고 상신 이완(李浣)과 고 장신 신여철(申汝哲)이 다 병판을 지낸 뒤에 이 망(望)에 주의(注擬)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례(古例)를 회복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7월 17일 갑오

송징계(宋徵啓)를 대사간으로, 남덕로(南德老)를 장령으로, 이기경(李基敬)을 헌납으로, 홍준해(洪準海)·정상순(鄭尙淳)을 정언으로, 이창의(李昌誼)를 판의금으로, 손진민(孫鎭民)을 남병사로 삼았다.

 

함경 감사 김한철(金漢喆)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김한철이 말하기를,
"신이 전에 평사(評事)로 있다가 체임되어 돌아온 뒤에 이재형(李載亨)·한몽린(韓夢麟)은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이 닦였으므로, 불러서 쓸 만하다는 뜻으로 앙달(仰達)했었습니다. 그 뒤에 이재형은 지평으로 징소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죽었고, 한몽린은 나이가 칠순을 넘었는데 벼슬은 일명(一命)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이 일찍이 전관(銓官)에게 말하였더니 전관도 남대(南臺)143)  에 두어야 하겠으나, 아직 출륙(出六)하지 못하였으므로 검의(檢擬)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선 우직(右職)에 등용하겠다."
하였다. 김한철이 말하기를,
"북방의 무사도 쓸 만한 자가 많습니다. 예전에 선조(先朝)에서 전백록(全百祿)은 벼슬이 곤수(閫帥)에 이르렀었는데, 지금까지 아름다운 일이라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 북방의 무사 중에서 김세유(金世儒) 같은 자는 평소에 중망(重望)을 받았었는데, 이제 이미 연한(年限)이 넘어서 겨우 갈파지 첨사(坡知僉使)가 되었습니다. 주표(朱杓)·최일형(崔一衡)·장제상(張齊尙)과 남관(南關)의 한지(韓祉) 같은 자는 다 북로(北路)에서 뛰어난 자이므로 모두 장려하여 쓸 만한 사람들인데, 이력이 아직 짧은 것이 매우 아깝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영장(營將)이 토포사(討捕使)를 겸하면 당하관으로 차출하지 않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수어청의 세 영장 가운데 죽산(竹山)은 본디 당하관의 벼슬자리이지만, 높여서 당상관의 벼슬자리로 만들었으니, 광주 토포사(廣州討捕使)는 이천(利川)으로 옮겨 보낸 뒤 또한 높여서 당상관의 벼슬자리로 만들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아직 당하관으로 차출하고 있으니, 일이 매우 들쭉날쭉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상관으로 차출하여 보내도록 하겠다."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경강(京江)의 진선(津船)과 각선(各船)의 수세(收稅)를 한강(漢江)·노량(鷺梁)·양화(楊花) 세 진(津)의 별장에게 붙였는데, 이는 균역 사목(均役事目)입니다. 송파진(松坡津)에 이르러서는 곧 대변(待變)하는 곳이므로 사체가 세 진에 견주어 더욱 중요한데, 광주에 속하였기 때문에 균청(均廳)에서 관장하는데 들지 않습니다. 신은 한결같이 세 진의 예에 따라 균청에서 구관(句管)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자기(磁器)의 그림에는 예전에 석간주(石間朱)를 썼는데, 이제 들으니 회청(回靑)으로 그린다고 한다. 이것도 사치한 풍습이니, 이 뒤로 용준(龍樽)을 그리는 외에는 일체 엄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8일 을미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 유척기(兪拓基) 등을 보냈다.

 

장령 이하술(李河述)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을 위한 계책으로는 궁료(宮僚)를 삼가 가려서 자주 강연(講筵)을 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옥당의 상번·하번도 춘방의 강관(講官)과 함께 입대(入對)하도록 허락하면, 듣는 것이 더욱 넓어지고 학업이 더욱 넓어지실 것입니다.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명기(名器)를 중시하여 사풍(士風)을 진작시킨 방도에 세 가지가 있었는데, 한림, 이조 낭청, 생원·진사의 장원(壯元)이었습니다. 10여 년 이래로 차례로 폐지한 것은 오로지 붕당(朋黨)을 미워하고 편사(偏私)를 제거하려는 성의(聖意)에서 나왔습니다마는, 고제(古制)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식자(識者)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나이 젊은 신진(新進)들은 청도(淸塗)에 뜻을 단절한 채 출륙(出六)할 묘방만 생각하고, 많은 명관(名官)들은 숙직(宿直)하는 여사(廬舍)에서 머뭇거리며 늘 승자(陞資)하여 벗어나려 하고, 여항(閭巷)의 사자(士子)들은 과장(科場)에서 실망하면 반드시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려 하므로, 조급히 승진하려는 버릇은 불처럼 더욱 치열해지고 부지런히 힘쓰는 풍습은 물처럼 점점 낮아지니, 오히려 어찌 세도(世道)가 배식(培植)되고 사기(士氣)가 진작되기를 바라겠습니까? 바라건대, 대조(大朝)께 여쭈어 빨리 구제(舊制)를 회복하소서. 대조께서 선왕의 사업을 이어받으신 처음에 여리(閭里)의 고통을 깊이 염려하여 빼앗아 들어가 사는 고질적인 폐단을 통렬하게 금하셨는데, 이것은 참으로 백성을 다친 듯이 돌보시는 덕의(德意)입니다마는, 일전에 적간(摘奸)할 때에 팔고 산 것도 아울러 찾아냈으므로, 가엾은 과부가 죄다 부례(部隷)에게 쫓기고 슬픈 궁생(窮生)이 역졸(驛卒)에게 몰리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이 빼앗아 들어간 죄과를 범하였다면 그 죄는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겠지만, 값을 주고 사서 들어간 자도 그 가운데에 섞여 들어갔으니, 대저 매우 가난한 자들이 겨우 무릎을 용납할 곳을 겨우 장만한 것을 하루아침에 몰아내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청컨대, 대조께 여쭈어 팔고 샀는데도 귀양간 자는 모두 소석(疏釋)하고, 살 곳이 없어서 떠도는 자는 특별히 팔고 사는 것을 허락하여 여염집일지라도 반드시 금하지 말고, 문권(文券)도 관가에서 발급해 주도록 명하여 이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아 중외(中外)에 반포하소서. 기근이 거듭되어 백성이 지탱할 수 없는 형세이니, 국가에서 진구(賑救)할 밑천을 특별히 내려주고 안주할 방책을 특별히 강구해야 마땅합니다. 올해 수영(水營)의 조련(操鍊)은 모두 정지하고, 묵은 환곡(還穀)과 쌓인 포흠(逋欠)도 헤아려 처치하도록 명하여 굶주린 백성이 안도할 수 있게 하셔야 하겠습니다. 통제사 김윤(金潤)은 외람되게 곤수(閫帥)의 직임을 받았으나 이미 청렴하다는 소문이 없었는데, 관서백(關西伯)의 서본(書本)을 보더라도 강계(江界)에서 10건(件)의 돈고(獤袴)를 함께 나누어 썼으니, 탐욕을 부리며 삼가지 않은 것을 이것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때의 부사는 도배(島配)당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편안히 앉아서 자처(自處)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삭직(削職)하는 벌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단천 부사(端川府使) 윤성오(尹聖五)는 정령(政令)이 번거롭고 까다로워서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찼으니, 삭거(削去)하소서. 고원 군수(高原郡守) 여영조(呂榮祖)는 읍기(邑妓)에게 빠져서 조적(糶糴)할 때에 원망을 불렀으니, 또한 마땅히 체파(遞罷)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유신(儒臣)이 강연에 참여하는 일과 세 가지 명기(名器)에 관한 일과 수군의 조련을 정지하는 일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수령의 일은 모두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9일 병신

하교하기를,
"올해는 성조(聖祖)께서 새로 도읍을 정하신 해이고 내년은 성조께서 탄강하신 해인데, 영흥(永興)은 탄강하신 곳이고 함흥(咸興)은 풍패(豊沛)의 고을이니, 특별히 영흥·함흥의 올해 전부(田賦)와 내년 신역(身役)을 감면하고, 내년 봄에 중신을 보내어 도과(道科)를 설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0일 정유

유성(流星)이 부열성(傅說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약방에서 아뢰기를,
"오늘은 빈궁(嬪宮)이 해산한 뒤 이레째가 됩니다. 권초제(捲草祭)를 이미 설행하였으니, 산실청(産室廳)을 파하소서."
하니, 옳게 여겼다. 이어서 산실청의 상전(賞典)을 시행하였는데, 도제조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영의정 이천보(李天輔)·제조(提調) 좌참찬 홍봉한(洪鳳漢)에게 숙마(熟馬) 1필(匹)을, 부제조 조명채(曹命采)·이익보(李益輔)·이창수(李昌壽)에게 아마(兒馬) 1필을, 권초관(捲草官) 홍상한(洪象漢)과 의관(醫官)에게 각각 숙마 1필을, 춘방관(春坊官) 이하에게 현궁(弦弓)을 내리고 이례(吏隷)에게 차등을 두어 쌀과 베를 내렸다.

 

7월 20일 정유

이게(李垍)를 교리로, 채제공(蔡濟恭)을 수찬으로, 남유용(南有容)을 홍문 제학으로, 조재홍(趙載洪)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1일 무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7월 23일 경자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남태저(南泰著)를 정언으로 삼았다.

 

호남 어사 홍자(洪梓)가 복명(復命)하고 서계 별단(書啓別單)을 바쳤는데, 이르기를,
"첫째, 격포 행궁(格浦行宮)을 설치한 것은 장차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행궁의 담 밖은 텅 빈 채 백성의 마을이나 창고의 저축이 하나도 없으니, 청컨대, 크고 작은 격포의 폐기된 둑을 보수하고, 이어서 행궁의 둔전(屯田)을 만들어 백성을 모아 경작하게 하고, 전례대로 세(稅)를 받고 창고를 설치하여 모아들이고 흩어 주어 변란에 대비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둘째, 장성(長城) 일대는 지리(地利)가 가장 좋으니, 청컨대 병영(兵營)을 이 고을에 옮겨 사방을 제어하고 한 방면을 호령하는 방편으로 삼으소서. 셋째, 완영(完營)144)  과 수원(水原) 독성 산성(禿城山城)에 봉수(烽燧)를 설치하여 경보(警報)의 도구를 엄하게 하소서. 넷째, 좌수영과 우수영의 바다 어귀에 쇠사슬을 설치하는 제도를 수거(修擧)하여 바다의 험조(險阻)를 더욱 견고하게 하소서. 다섯째, 조적(糶糴)을 균일하게 해서 민폐를 제거하소서. 여섯째, 저치미(儲置米)를 한 해 걸러 개색(改色)145)  하여 오래 쌓아 두어서 썩는 걱정을 없애소서. 일곱째, 역로(驛路)의 조폐(凋弊)가 근일처럼 심한 때가 없으니, 청컨대 병사·수사로서 다른 도에서 이직(移職)하는 자는 경성(京城)까지만 인마(人馬)를 정하여 보내고, 부임하는 자는 본도의 경계까지만 정하여 보내어 역로의 조폐를 소생시키게 하소서. 아홉째, 금오도(金鰲島)는 황장목(黃腸木)을 봉(封)한 곳으로, 영읍(營邑)·진읍(鎭邑)의 전선(戰船)·병선(兵船)과 통신사의 도해선(渡海船) 및 각 군문의 기계 등의 물건을 오로지 이 곳에 의지하고 있는데, 요즈음 영빈궁(寧嬪宮)에서 절수(折受)하였으니, 특별히 성명(成命)을 거두어 본도에 도로 붙이소서. 열째, 각 군문의 호궤(犒饋)에 쓰는 소는 장교·군졸을 보내어 김제(金堤)·태인(泰仁) 등의 저자에서 사는데, 그 폐단을 끼치는 것이 한없으니, 이제부터 일체 금단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임금이 홍자를 소견하여 해민(海民)의 편부(便否)를 묻자, 홍자가 말하기를,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기 이전에는 배와 어살[漁箭]은 영읍에서 그 자재(資財)를 도와서 제때에 고쳤으나, 한 번 균청(均廳)에 속한 뒤로는 모두 그전대로 버려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해민은 고할 데가 없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신·수령·변장인 자가 자기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하여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면 곧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다. 균청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홍자가 이번 행차에서 김상각(金相珏)을 장살(杖殺)하고 그 나머지 술사(術士) 40여 인을 다스렸는데, 임금이 옳게 여겼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김시영(金始煐)·나주 목사(羅州牧使) 민백남(閔百男)에게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내려 주고, 강진 현감(康津縣監) 여선응(呂善應)·익산 군수(益山郡守) 어사적(魚史績)을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는데, 홍자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정섭(靜攝)하는 중에 혹 유신을 불러 고문(顧問)하며 소일하면 유익함이 없지 않은데, 옥당의 문이 걸린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은가? 도당(都堂)의 선거를 즉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휘량(鄭翬良)을 홍문 제학으로 삼았다.

 

7월 24일 신축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등이 도당 회권(都堂會圈)에서 황인검(黃仁儉) 등 33인을 뽑았다.

 

장령 남덕로(南德老)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 이래로 겨울에 천둥하고, 여름에 서리가 내려 기근이 거듭되니, 가난한 여염집에서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벌(賞罰)은 세상을 다스리는 큰 권세인데 모두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품고 있고, 과목(科目)은 출신(出身)하는 첫길인데 조급하게 승진을 다투는 버릇을 더욱 기르고 있고, 경비(經費)는 매우 많은데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서 내는 것을 보지 못하니, 육전(六典)의 연혁(沿革)은 거의 화살을 따라서 과녁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국가의 치란(治亂)은 언로(言路)의 개폐(開閉)에 관계되는데 망설이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고, 인재의 진퇴는 관방(官方)의 득실에 달려 있는데 현우(賢愚)가 나뉘지 않고 있습니다. 기강이 무너지고 풍속이 경박해지고 명분이 쇠퇴해지는 등 무릇 나라를 병들게 할 만한 일들이 어지러이 함께 나타나서 마치 1백 년 된 큰 집이 겉은 대강 완전하나, 들보와 서까래는 썩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으니, 기울어져 뒤집힐 근심을 서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강학(講學)의 공부에 먼저 힘쓰셔서 수신(修身)의 근본을 바루시고, 사물을 대하는 가르침을 공손히 받들어 제치(制治)의 규범을 밝히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유념하겠다."
하였다.

 

7월 25일 임인

현광우(玄光宇)를 헌납으로, 황인검(黃仁儉)을 부교리로, 서명응(徐命膺)을 부수찬으로, 유주기(兪胄基)를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7월 26일 계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제도(諸道)의 추조(秋操)를 멈추라고 명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이때 호환(虎患)이 더욱 심해지므로,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각 고을의 상진미(常賑米)로 호랑이를 잡은 자에게 큰 호랑이는 쌀 4석(石)을, 중간 호랑이는 3석을, 작은 호랑이는 2석을 상주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또 말하기를,
"관서(關西)에 홍수가 져서 4백여 호(戶)가 표몰(漂沒)되고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으니, 청컨대 경오년146)  의 전례에 의거하여 집이 떠내려간 가호는 환곡(還穀)을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탕감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참찬 조영국(趙榮國)이 말하기를,
"관서에서 특별히 갖추어 창고 안에 쌓아 두었던 각등(各等)의 포목(布木)이 모두 썩어서 상하였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시가로 팔아서 은(銀)으로 바꾸어 두어 쓸데없는 것으로 쓸모있는 것을 만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살옥(殺獄)의 검시(檢屍)는 사체가 매우 중요한데, 시척(屍尺)의 길이가 같지 않아서 준거(準據)하여 믿을 수 없으니, 청컨대 시척을 고쳐서 제도(諸道)에 반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언 남태저(南泰著)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괴원 권록(槐院圈錄)은 곧 신진(新進)의 청선(淸選)이므로, 취사(取捨)는 모두 공론을 따라야 할 것인데, 이번 신권(新圈)에는 지응룡(池應龍)처럼 부정한 길로 청탁한 자와 황인채(黃麟采)처럼 비루하여 글을 파는 자도 다 외람되게 들었습니다. 재주 많고 문벌 좋은 박도천(朴道天)·박종량(朴宗亮)·성영(成潁)·오봉원(吳奉源)·이홍제(李弘濟)·이일증(李一曾)이 어찌 뽑힌 자보다 못하겠습니까마는, 공공연하게 버렸으므로 물정이 시끄러운 것이 오래 되어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대신(臺臣)이 상소하여 청함으로 인하여 괴원(槐院)의 규례로 등용한 전례가 본래 있으니, 이를테면 한이조(韓頣朝)·최대윤(崔大潤)이 그들입니다. 신은 박도천 등 6인을 이 전례에 따라 등용하고 지응룡 등 2인을 모두 간태(刊汰)하여 괴원을 맑게 하고 해당 상박사(上博士)도 견삭(譴削)하는 벌을 시행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림 소시(翰林召試)147)  의 법은 지극히 엄중한 것인데, 심욱지(沈勖之)가 이미 시권(試券)을 바치고 쫓겨난 뒤에 특별히 다음 과시(科試)에 다시 나아가라고 명한 것은 이미 정식(定式)에 어그러지고, 또 뒷 폐단에 관계되니, 성명을 도로 거두시도록 우러러 여쭈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괴원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송징계(宋徵啓)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재(天災)·시변(時變)이 달마다 일어나다가, 흉악한 호랑이가 성문에 횡행하여 궐문(闕門)을 뛰어 들어오기까지 하니, 더욱 막대한 요얼(妖孼)이 되고 있습니다. 대저 호랑이는 여기(厲氣)이고 병상(兵象)입니다. 1백 년 동안 태평하여 문관(文官)·무관(武官)들이 직무를 게을리 하였으므로, 번진(藩鎭)·군읍(郡邑)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장수는 병(兵)을 모르고 관원은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으니, 급한 일이 있으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분발하고 진려(振勵)하여 관원을 독려하고 모든 감사·병사·수령의 직임을 한결같이 공도(公道)에 따라 각별히 선택하소서. 그러면 융정(戎政)이 저절로 닦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유념하겠다."
하였다.

 

7월 27일 갑진

간원에서 전달(前達)을 다시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연신(筵臣)이 추조(秋曹)·경조(京兆)는 이서(吏胥)의 액수가 많다고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은 도민(都民)에 의하여 입고 먹으므로, 한 사람이 액수를 더하면 1백 인의 백성이 폐해를 받으니, 《속대전(續大典)》의 정수(定數) 이외의 것은 모두 간태(刊太)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가 아뢰기를,
"경차관(敬差官)이 검전(檢田)하면 주전(廚傳)의 폐단만 더할 뿐이니, 올 가을의 재실(災實)은 오로지 도신에게 맡기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경차관을 없앨 것인가? 존양(存羊)의 의리에 있어서 영구히 폐지하기는 어려우니, 사람을 가려서 맡기면 또한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호판이 이미 아뢰었으니,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세상에서 을해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고 말하니, 새해의 근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수차(水車)의 이로움을 말하는 자가 있으니, 각 군문(軍門)에 명하여 수차를 많이 만들게 하라."
하였다.

 

7월 28일 을사

평안도 덕천(德川)·영변(寧邊) 등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는 달걀만하였고, 오곡이 문드러졌다.

 

7월 30일 정미

임금이 구관 당상(句管堂上) 홍봉한(洪鳳漢)에게 묻기를,
"각 고을의 저치미(儲置米)는 옮기는 폐단을 없앨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저치하는 뜻은 매우 중대하므로 혜청 당상(惠廳堂上)도 수령이 손대는 것을 쉽사리 허락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령이 죄짓는 것은 흔히 여기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사가 아뢴 바로 논하면 교제창(交濟倉)의 곡물은 이미 많이 줄었고 저치미도 모두 마음대로 썼다 하니, 그 밖의 곡물은 어찌 숫자대로 지금 있으리라고 보장하겠는가? 특별히 어사를 보내어 추생(抽栍)하여 엄중히 핵실해서 범한 자가 있으면 중법(重法)으로 처치해야 마땅하다. 저치미는 비록 1석을 범하였더라도 장률(贓律)로 죄주어야 마땅하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 회갑을 당한 것은 참으로 꿈밖의 일이니, 명릉(明陵)에 전알(展謁)하여 정례(情禮)를 조금 펴려한다. 15일은 성고(聖考)께서 탄강하신 날이므로 이날은 지배(祗拜)해야 마땅하다. 길은 대강 닦아서 민폐를 끼치지 말고 횃불[炬]을 세우는 이외의 모든 일에는 특별히 저치미를 획급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옛날의 은택을 알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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