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2권, 영조 30년 1754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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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일 경술

조명채(曹命采)를 이조 참판으로, 김치인(金致仁)을 대사간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부제학으로, 최익수(崔益秀)를 장령으로, 조엄(趙曮)·홍인한(洪麟漢)을 교리로, 홍자(洪梓)·정상순(鄭尙淳)을 부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비국 당상·경기 감사를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올해부터는 근력이 날로 떨어져서 나라에도 백성에게도 유익함이 전혀 없으니, 무슨 낯으로 선릉(先陵)에 배알하겠는가? 또 동가(動駕)할 때에 경기 백성에게 폐단을 끼치는 것이 많을 것이므로, 내가 올해의 대동(大同)을 감면하고자 한다. 이것을 사책(史冊)에 쓰더라도 후세 사람들이 어찌 내가 명예를 바란 것이라 하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덕의(德意)가 매우 성대하신데, 신이 어찌 감히 이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경기 안의 다른 고을과 고양(高陽)은 차이가 있으니, 차등을 두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양주·고양은 사가(私家)에 있어서는 곧 지주(地主)이니 이제 고양에 혜택을 베푼다면 양주를 버려둘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대동과 환곡(還穀) 중에서 어느 것이 좋을는지 모르겠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대동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자년148)  을 돌이켜 생각하면 이 마음을 어떻게 억제하겠는가? 임어(臨御)한 지 30년이 되었는데, 위로는 성덕을 계술(繼述)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사랑하여 돌보지 못하였으니, 한밤에 생각이 나면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 보아 스스로 부끄럽다. 양주·고양은 가을 대동을 특별히 모두 감면하도록 명하고, 그 나머지 경기 고을도 반을 감면하되 대동이 없는 고을은 비국으로 하여금 상확(商確)하여 품처하게 하고 도내의 가장 오래된 포흠(逋欠) 가운데 한 해의 것도 탕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접때 대신이 저축을 넓히라고 권면하였었다. 내가 비록 노쇠하였지만, 《대학(大學)》의, ‘재물을 모아들이면 백성이 흩어진다.’는 의리를 기억하고 있는데, 저축하는 도리는 마땅히 먼저 비용을 절약해야 하는 것이니, 내년 군기시의 어갑주(御甲胄)는 만들어 바치지 말게 하고, 가미(價米) 1천 석을 상진청(常賑廳)에 옮겨 보내어 저축에 보태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태묘는 각실의 축문이 같은데, 영희전은 각실의 축문이 다르다 하여 그 가부를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한결같이 태묘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옳다는 사람이 많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제향(祭享)의 모든 절차가 이미 태묘와 다른데, 각각 축사를 짓는 것은 예(禮)에 있어서 마땅히 그렇지만, 사체가 지극히 중대하니, 예조 판서로 하여금 입시하지 않은 대신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요즈음 사기를 구워서 만든 지석(誌石) 두 조각을 얻었는데, 모두 영릉(寧陵)이라는 글자가 있고, 또 ‘아! 대행 대왕(大行大王)’이라는 글이 있었는데, 일찍이 영릉의 지(誌)는 돌에 새겼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것은 괴이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혹 신릉(新陵)·구릉(舊陵)이 그 제도를 달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릉은 반드시 사기로 구워 지석을 만들었을 것인데, 이것이 매우 간편하니, 장차 나로부터 다시 행하려 한다."
하였다.

 

전 태인 현감 최재흥(崔載興)을 파직하였다. 최재흥은 읍기(邑妓)를 간음한 것으로 대간의 논박을 받았고, 어사 홍자(洪梓)가 또 태인에 있었을 때 기녀를 싣고 다니며 즐긴 일을 아뢰었으므로, 임금이 사문(査問)해야 할 것인지를 대신과 여러 재신들에게 물었는데, 어떤 사람은 사문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사문할 것이 없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고, 이어서 이 명이 있었다. 대개 최재흥은 초선(抄選)하였다는 이름이 있고 또 고 상신 최규서(崔奎瑞)의 손자이기 때문이었다.
사신은 말한다.
"최재흥의 행실은 진실로 붓을 더럽힐 것도 못되는데, 마침내 역적으로 복주(伏誅)되기에 이르렀으니, 간음 따위의 일은 그에게 있어서 작은 일일 뿐이다. 대개 정우량(鄭羽良)이 전형을 맡았을 때에 편당(偏黨)하는 마음으로 그가 학문이 없고 행실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공론을 업신여기고 조정에 천거하였으니, 정우량이 사의(私意)를 행하고 임금을 속인 죄를 이루 주벌할 수 있겠는가?"

 

병조 판서 이창의(李昌誼)가 주정소(晝停所)의 어막(御幕)이 설치될 곳을 백성이 많이 범하여 경작하였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막을 설치할 터는 매우 작으니 문책하지 말라."
하였다.

 

8월 5일 임자

홍낙성(洪樂性)을 승지로 삼았다.

 

판의금 김성응(金聖應)을 체차(遞差)하였다. 이때 금오(金吾)는 개좌(開坐)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김성응이 정세(情勢)가 있다 하여 하루에 세 번 패초(牌招)를 어겼다. 부수찬 서명응(徐命膺)이, 무장이 소명(召命)을 어기는 뒷 폐단에 크게 관계된다 하여 차자를 올려 논하고 파면하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번거롭게 대조께 여쭈기 어렵다 하여 단지 체직하기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대신에게 물었지만, 영희전에 친제(親祭)할 때의 축문은 고례(古例)에 따라 각실에 지어 바치되 구수(句數)는 다르게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누워서 보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관(冠)을 쓰지 않고는 감히 보지 못한다. 《소학(小學)》을 읽은 뒤로 다리를 펴고 누운 적이 없었는데, 이제 비록 기운이 쇠약해겼지만 오히려 감히 방자할 수 없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예전부터 능지(陵誌)는 으레 석각(石刻)으로 하였으나, 인쇄하여 반포하는 즈음에 설만(褻慢)한 폐단이 많이 있는 것이 불경(不敬)한 첫째이고, 대내(大內)에 들인 뒤에 세월이 오래되면 먼지를 묻히는 것이 불경한 둘째이며, 운반해 가져가는 즈음에 민폐를 많이 끼치는 것이 셋째이고, 광중(壙中)에 묻을 때에도 백성을 괴롭히게 되는 것이 넷째이다. 혹 막중한 일에 어찌 민폐를 돌보겠느냐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다. 국초(國初)에는 산릉의 사방석(四方石)에 모두 전편(全片)을 썼었는데, 우리 태종 대왕께서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산릉 때에 친히 능소(陵所)에 거둥하여 두 조각으로 만들고 이것으로 교훈을 전하시니, 지금까지 준용(遵用)하고 있다. 《오례의(五禮儀)》에 능(陵)은 석장(石葬)으로 하게 되어 있으나, 그 뒤에 회(灰)로 돌을 대신하였다. 이것은 모두 깊고 원대한 뜻이고 검약을 숭상하는 덕이니, 어찌 마땅히 조종을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구원(久遠)한 도리에 있어서 석지(石誌)가 자지(磁誌)만 못하고,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뜻은 있어도 하유하지 못하였다. 요즈음 고장(古藏) 가운데에서 또 자지 두 조각을 얻었는데, 곧 영릉(寧陵)의 지문(誌文)이었다. 이미 그 뜻이 있었고 또 이 지(誌)를 얻었으니, 지시해서 가르치신 듯하다. 명하여 등록(謄錄)을 상고하게 하였더니, 여주의 영릉(寧陵)에는 대개 석지와 자지 둘을 썼는데, 그때의 하교 가운데에 이미 자지를 쓰라고 하신 것이 있으니, 석각은 버금가는 하교이여야 할 듯하다. 이것으로 우러러 생각하면, 일이 선릉(先陵)에 관계되므로 갑자기 자지를 쓰지 않고 특별히 양본(兩本)을 쓰신 듯하다. 아! 몇 해 뒤에 이 자지를 대내에서 얻고 일기(日記)를 다시 수찬(修撰)한 뒤에 오히려 이 하교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 뒤로는 일이 선릉(先陵)에 관계되는 지문(誌文) 외에는 영구히 자지를 쓰고 이것으로 정식(定式)하도록 하라. 아! 이번 하교는 열성(列聖)의 검덕(儉德)을 준수하여 후세에 영구히 전하는 것이니, 뒤의 사왕(嗣王)이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월 6일 계축

임금이 춘당대에서 명릉(明陵)의 고제(告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8월 7일 갑인

조재홍(趙載洪)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8월 8일 을묘

임금이 관풍각(觀豊閣)에 나아가 도목정(都目政)에 친림하였다. 이조 판서 홍계희(洪啓禧)·병조 판서 이창의(李昌誼) 등에게 말하기를,
"무신년149)   친정(親政) 때에 어수당(魚水堂)에 앉았었는데, 이는 곧 인묘(仁廟) 때에 지은 것으로,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이 만나고 임금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한다는 뜻을 딴 것이다. 오늘 이 당에 앉으려 하였으나 조금 멀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하니, 홍계희 등이 말하기를,
"감히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인재를 얻는 날이다. 문무(文武)는 물론이고 홍패(紅牌)를 안고서 집안에서 늙어 죽는 사람이 몇 사람인지 모르겠다. 예전에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안고경(顔杲卿)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으나 능히 대절(大節)을 세웠고, 무신년에 남연년(南延年)을 조정에서는 한낱 늙은 무인으로 여겼으나 능히 국난에 목숨을 바쳤다. 먼 지방에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특별히 등용하라. 이술원(李述原)은 예전 장순(張巡)과 같은 사람인데, 그 아들 이우방(李遇芳)은 접때 수령이 되었다가 곧 하고(下考)에 놓였다. 충신의 아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벼슬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선온(宣醞)150)  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오늘의 선온하는 것은 뜻한 바가 있다. 비록 밤을 새워 날이 밝더라도 신중히 살펴서 의망(擬望)하여 내가 만년에 친정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재홍(趙載洪)을 대사성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이조 참의로, 이세현(李世鉉)을 지평으로, 이시건(李蓍建)·정창성(鄭昌聖)을 정언으로, 이석상(李錫祥)을 수찬으로, 민우수(閔遇洙)를 좨주로, 송수형(宋秀衡)·이훈(李塤)·김선행(金善行)·이규채(李奎采)·홍종해(洪宗海)를 승지로, 이익정(李益炡)을 판의금으로, 한광조(韓光肇)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검열 김시구(金蓍耉)를 보안 찰방으로 출보하여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빨리 부임하게 하였다. 김시구는 사정이 있다 하여 행공(行公)하지 않았는데, 이날 특별히 명하여 패초(牌招)하였으나, 이미 시골로 내려갔다 하므로, 이 명이 있었다.

 

청주(淸主)가 심양(瀋陽)을 순수(巡守)할 때에 서달(西㺚)이 시기를 틈타 난을 일으킨 일을 의주 부윤이 들은 것으로써 치계(馳啓)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요지(瑤池)에서 잔치를 베풀어 빠져 즐겨 놀다가 서언왕(徐偃王)의 반란을 듣고는 얼른 제 나라로 돌아갔으나, 이제 서달이 서쪽으로 와도 건륭(乾隆)은 돌아가지 않았으니, 그 낫고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다시 조재홍(趙載洪)을 이조 참의로 삼고, 서지수(徐志修)를 대사성으로, 이중조(李重祚)를 승지로 삼았다.

 

8월 9일 병진

교리 홍인한(洪麟漢)을 보내어 경기를 암행하여 길을 닦고 다리를 고칠 때에 일하는 백성의 고통을 살피게 하였다.

 

호조 참판 정휘량(鄭翬良)이 박성원(朴聖源)의 상소 때문에 상서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당초에 정휘량이 소조(小朝)의 연중(筵中)에서 예학(睿學)이 날로 진취한다며 아첨하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필선 박성원이 사장(辭章)에 말미암아 근일 아첨하는 폐단을 성언(盛言)하니, 진신(搢紳) 사이에서 모두 박성원의 뜻이 정휘량을 가리킨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상서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답하기를,
"박성원이 상서한 말에는 별로 경을 가리킨 것이 없는데, 인혐하는 것은 또한 지나치다."
하였다.

 

8월 10일 정사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경기 어사 홍인한(洪麟漢)이 복명(復命)하였다. 홍인한이 아뢰기를,
"고양 군수 이석희(李錫禧)가 백성을 부릴 때의 일꾼의 양식을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날짜를 셈하여 주려 하므로 백성이 자못 원망합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미 저치미(儲置米)를 주었는데, 어찌 감히 조종하여 그럴 수 있는가? 이석희는 허물을 기록하여 주정소(晝停所)에서 대령하게 하라."
하였다.

 

8월 12일 기미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김치인(金致仁)이 총명하며 정통하고 숙련하다 하여 비국 부제조로 차출하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은 극선(極選)이었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선정신 박세채(朴世采)는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한 유현인데, 후손이 쇠퇴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자가 없으니, 선정신 정몽주(鄭夢周)의 예에 의거하여 방손(傍孫)을 등용하여 그 제사를 섭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교리 홍인한(洪麟漢)·부수찬 홍자(洪梓)를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독하였다. 홍자가 문의(文義)로 인하여 진계(陳戒)하기를,
"접때 기군세마(旗軍洗馬)를 게을리하여 곧 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진실로 신하의 죄입니다마는, 대성인(大聖人)의 사기(辭氣)도 너무 엄중한 잘못에 빠지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마음이 조급하기 때문이었는데, 이미 뉘우쳤다."
하였다. 이에 앞서 사복 제조가 기군세마를 곧 행하지 않았다 하여 ‘내가 몸소 조마(調馬)를 행해야 하겠다.’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으므로, 홍자가 언급한 것이다.

 

경기 감사 이후(李)를 불러 묻기를,
"길가에 있는 무덤과 밭곡식이 길을 닦는 가운데에 든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횃불[炬]을 세우는 일에도 저치미로 셈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8월 13일 경신

임금이 춘당대에서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고, 승지를 보내어 능소(陵所)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8월 14일 신유

임금이 춘당대에서 능(陵)·원(園)·전(殿)·묘(廟)의 추석제(秋夕祭)와 망제(望祭)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

 

8월 15일 임술

월식이 있었다.

 

8월 15일 임술

임금이 명릉(明陵)에 배알하고 익릉(翼陵)·경릉(敬陵)·순회묘(順懷墓)·창릉(昌陵)에 들러 배알하였다. 축시(丑時)에 임금이 융복(戎服)을 갖추고 삽우(揷羽)를 제거하고 단휘문(端暉門)을 나가 말을 타고 숭례문을 거쳐 주정 막차(晝停幕次)에 이르렀다. 이석희(李錫禧)를 잡아들였다가 곧 놓아 주었다. 명릉동구(明陵洞口)에 들어가 보여(步輿)로 갈아 타고 강여소(降輿所)에 이르러 걸어서 능위에 나아가 봉심하였다. 봉심하기를 마치고 난간석(欄干石) 아래에 부복(俯伏)하여 오래 지나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등이 막차로 돌아가기를 다투어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다가 드디어 입으로 고하기를,
"신(臣)의 마음이 고수(苦守)하는 것을 오르내리시는 신명은 굽어살피소서. 신은 마음을 바꾸지 않고 오르내리시는 신명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적게 하였는데, 이때 회갑을 경축하자는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능 오른쪽에 선조(先朝)에서 봉표(封標)한 곳이 있는데, 대개 동조(東朝)를 위한 수장처(壽藏處)151)  이었다. 혈처(穴處)에 지간(紙竿)을 세우라고 명하고, 후강(後岡)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삽우하고 떠나 창릉점(昌陵店)에 이르렀는데, 관(冠)을 벗고 호소하는 신계(新溪)의 사민(士民) 수십 인이 있으므로 임금이 말을 멈추고 물으니, 현령 조재선(趙載選)을 잉임(仍任)시키기를 청하는 일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재선은 무슨 까닭에 파직하였는가?"
하니, 승지 김선행(金善行)이 대답하기를,
"도신이 치적(治績)에는 이미 칭찬이 있었으나 검험(檢驗)이 격식을 잃었다 하여 중고(中考)에 두었는데, 이조에서 개탁(開坼)할 때에 아뢰어 파직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로 하여금 하유하게 하기를,
"너희들은 각각 물러가라. 내가 처분하겠다."
하니, 백성이 모두 손을 들어 춤추었다. 임금이 도로 주정 막차에 이르러 대신을 불러 조재선을 잉임시키는 것이 마땅한지 그 여부를 물었는데, 대신들이 모두 어렵게 여기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검장(檢狀)152)  이 격식을 조금 잃었다 하여 어찌 파관까지 하는가? 이것은 전조에서 빈 자리를 만들려고 그런 것이다. 나로 하여금 백성을 속이게 하는 것이 옳은가?"
하고, 특별히 임시키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환궁할 때에는 돈의문(敦義門)을 거치겠다."
하였다. 인하여 막차에 오래 머물다가 밤이 깊은 뒤에 거가가 영은문에 이르렀는데, 훈련 도감의 군사는 이미 숭례문으로 들어갔으므로, 임금이 군율을 어겼다 하여 대장 김성응(金聖應)을 파직하고 이어서 허물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있는 금위군(禁衞軍)을 나누어 두국(頭局)을 만들어서 곧바로 돈의문으로 향하였는데, 이때 이미 한밤이 지났는데도 길에 횃불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행군에 질서가 없었다. 임금이 돌아와서 춘당대에 나아가 김성응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는데, 오래 지나도 오지 않으므로 물으니, 이미 집에 돌아갔다고 하자, 임금이 행군을 착오한 잘못을 대략 책망하고는 다시 훈련 대장의 직임을 제수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나라의 기율은 행군보다 엄한 것이 없으니, 군사가 기율이 없으면 군사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훈련 도감의 군사가 곧바로 남문(南門)을 거친 것은 오히려 중도에서 길을 바꾼 것으로 핑계할 수 있겠지만, 대장이 임금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사차(私次)로 돌아간 것은 또한 무엇에 의거한 것인가? 비록 허물을 기록하라는 하교가 없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인데, 더구나 허물을 기록하라는 죄과를 띤 몸으로 제멋대로 앞질러 돌아간 것이겠는가? 4백 년의 기율이 여기에서 죄다 무너졌는데, 도리어 그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또 따라서 그 직임을 도로 주었으니, 유식한 자가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회가(回駕)할 때에 임금이 기백(畿伯)에게 명하여 양주(楊州)·고양(高陽)의 백성이 바라는 것을 묻게 하였는데, 모두 환곡을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기를 바란다고 하니, 하교하기를,
"양주·고양의 지난해 적곡(糴穀)은 이미 받아들이는 것을 정지하였다. 올해 북한(北漢)에서 받아들일 쌀은 특별히 본읍에서 받아 두도록 하고, 양주·고양 이외 경기의 여러 고을들의 북한 쌀도 받아 두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선릉(先陵)에 전알하니 이 마음이 한층 더하다. 아! 왕년에 사랑하고 돌보신 것은 곧 무사(武士)·군병(軍兵)이었으니, 마땅히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수가(隨駕)한 장교(將校)·금군(禁軍)과 훈국(訓局)의 마군(馬軍)은 춘당대에서 친림하여 시사(試射)할 것이니, 보군(步軍)은 모화관(慕華館)에서 명관(命官)이 시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올해 자전(慈殿)의 탄일(誕日)에는 몸소 진하(陳賀)하겠다."
하였다.

 

8월 16일 계해

이응협(李應協)을 대사간으로, 김조윤(金朝潤)을 헌납으로, 이광익(李光瀷)·이기경(李基敬)을 장령으로, 홍명한(洪名漢)·홍양한(洪良漢)을 정언으로 삼았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아뢰기를,
"자전(慈殿)의 탄신에 전하께서 이미 하례를 행하시고 나면 대전(大殿)의 회갑 탄일의 하례를 동궁(東宮) 또한 규례대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30년 동안 권정(權停)한 것을 이제 갑자기 받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회갑이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임금이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오직 정사(政事)에 달려 있는데, 근일의 낙점(落點)은 다 수망(首望)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망(副望)·말망(末望)에도 혹 수망보다 나은 자가 있으니, 이것은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서 한익모(韓翼謨)·정휘량(鄭翬良)이 전임(銓任)에 마땅하다고 힘껏 천거하니, 임금이 머리를 끄덕였다. 또 말하기를,
"이덕해(李德海)는 치밀하고 유식하며 병서(兵書)를 익히 아니, 변방의 직임을 맡길 만합니다."
하였는데, 대개 의주(義州)가 장차 과기(瓜期)가 되어 대신할 자를 뽑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이복해(李福海)와 같은 무리로 본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의 계려(計慮)는 남보다 나은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덕해는 사무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겠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홍봉한(洪鳳漢)도 통달한 재주라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홍낙명(洪樂命)은 빛나는 집안에서 태어나 능히 검칙(檢飭)하는 절조가 있으며, 문사(文辭)가 남보다 낫고 기량과 식견이 깊고 원대한데 참하(參下)의 영선(瀛選)에 들지 못하였으니, 자못 애석하게 여길 만합니다."
하고, 이어서 춘방(春坊)에 구임(久任)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때 이천보가 천거한 바는 인망(人望) 밖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물의(物議)가 이를 비난하였다.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올해는 성모(聖母)께서 복위하신 해인데, 이미 명릉(明陵)에 나아가셨으니, 마땅히 성의(聖意)를 미루어 보이시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양 부원군의 묘소와 충신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이세화(李世華)의 서원(書院)에는 모두 관원을 보내어 치제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세 신하의 봉사손(奉祀孫)으로서 벼슬이 없는 자는 또한 등용하라고 명하고, 민충사(愍忠祠)의 무너진 곳은 호조·병조로 하여금 그 수리를 돕게 하였다.

 

8월 17일 갑자

임금이 명정전에서 현종 대왕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고, 승지를 보내어 능소를 봉심하게 하였다.

 

특별히 권항(權抗)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구(舊) 홍문관에 나아가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을 소견하여 대내(大內)에서 소장했던 산도(山圖)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바친 도본(圖本)을 내보이고 말하기를,
"왕년의 수교(手敎) 가운데에 ‘부지심원(不至甚遠)’이라는 넉 자가 이미 있었는데, 이제 또 자성(慈聖)의 하교를 받았다. 대내에서 소장했던 도본은 곧 내가 신축년153)  에 그려 바친 것인데, 도위(都尉)가 바친 도본을 참조하여 증험해 보았더니, 다시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다."
하고, 이어서 세 본(本)을 모작(模作)하여 하나는 정원(政院)에 두고, 하나는 예조에 두고, 하나는 운관(雲觀)154)  에 두어 뒷날의 고증(考證)에 갖추라고 명하였다. 산도는 곧 명릉(明陵)의 국내(局內)에 있는 자전(慈殿)의 뒷날을 위한 곳을 그린 것이다. 능행(陵幸)하고 회가(回駕)할 때에 김한신에게 명하여 뒤져서 상세히 살펴 아뢰게 하였으므로, 김한신이 산형(山形)을 그려 바쳤던 것이다.

 

8월 18일 을축

임금이 수찬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독하였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은 병사(兵事)를 잘 알지 못합니다마는, 일찍이 들으니 병가(兵家)에서는 군사가 주장(主將)을 향하는 것을 꺼린다 합니다. 접때 어두운데 갑자기 대가(大駕)가 앞질러 신문(新門)으로 들어왔으니, 회군(回軍)할 때에 어찌 곧바로 가전(駕前)을 향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일은 이후로 경계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근심하여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능에 배알하고 돌아온 뒤에 한 꿈을 꾸었다. 한편 사람이 한편 사람을 거의 다 죽였는데, 소론(少論) 집의 한 부인(婦人)이 울며 호소하기를, ‘어찌하여 이토록 심합니까?’ 하므로, 내가 유시하기를, ‘지금의 당습(黨習)은 거의 태교(胎敎)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노론(老論)·소론의 조선이 아니고 바로 내 조선이니, 내가 양편을 처분하겠다.’ 하고, 정신이 몽롱하여 깨니 꿈이었다. 내가 이 일을 자성(慈聖)께 여쭈고 또 진전(眞殿)에 고하기를, ‘이 뒤로 다시 신축년155)  ·임인년156)  의 일을 제기하면 내쳐서 서인(庶人)을 만들어 진신(搢紳)에 끼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전정(殿庭)에 엎드려 있으면 원량(元良)과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듣고 따라서 이를 것이고, 그러면 이로써 유시하려 하였으나, 또한 지나친 거조에 근사하므로 참았다. 근년에 영희전에 고한 뒤에 전정에 들어온 여러 신하들을 기록해 넣었고, 그 뒤에 윤봉오(尹鳳五)를 처분할 때에도 그 율(律)을 적용했었다. 이제 꿈꾸는 사이에 이러한 기이한 일이 있었던 것은 반드시 아래에서 쌓인 원망을 품고 있다가 장차 나타낼 것이 있으므로, 오르내리시는 영령께서 미리 그 조짐을 보이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되려면 어찌 30년을 기다렸겠는가? 내가 평생에 죄없는 세 사람을 죽였는데, 하나는 조관석(趙觀錫)이고, 하나는 이기상(李麒祥)이고, 하나는 왕자를 욕한 사람이다. 이태(李泰)에 이르러서는 죽여도 아까운 자가 아니다."
하였다.

 

8월 19일 병인

임금이 춘당대에 친림하여 수가(隨駕)한 신하들과 군교(軍校)들에게 시사(試射)하였다.

 

8월 20일 정묘

임금이 춘당대에 친림하여 시사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등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전일의 꿈을 이야기하였는데, 도승지 이익보(李益輔)가 갑자기 말하기를,
"사물이 오면 순응[物來順應]……."
하고, 미처 말을 마치지 아니하니,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눈물을 머금고 하교하는데, 감동할 줄 모르고 감히 넉 자로 앙대(仰對)하니, 사물이 거슬러 오면 또한 거슬러 응할 것인가?"
하고, 곧 면천(沔川)에 귀양보내되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라고 명하였다. 총관 민백상(閔百祥)을 나오게 하고, 하교하기를,
"이 뒤로 당론(黨論)을 하면 내가 명릉(明陵)에 고하고 내쳐서 서인(庶人)을 만들겠다."
하였다. 특별히 이지억(李之億)에게 도승지를 제수하였는데, 교지(敎旨)를 곧 내리지 않았다 하여 이조 정랑 이창임(李昌任)을 잡아들여 그 조의(朝衣)를 벗고 융복(戎服)으로 갈아 입으라고 명하였다가, 잡혀오니 곧 놓아 주었다. 시사를 마치고 임금이 친히 상을 내렸는데, 선전관 전광훈(田光勳)은 네 번 명중시켰기 때문에 가자(加資)하여 특별히 내금장(內禁將)을 제수하고, 안종규(案宗奎)는 승륙(陞六)한 지 오래지 않은데 곧바로 당상 선전관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위장필람(爲將必覽)》을 친히 지어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고,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인쇄하여 여러 무신들에게 반포하게 하였다.

 

윤득화(尹得和)를 대사간으로, 정광진(鄭光震)을 사간으로, 정언충(鄭彦忠)을 장령으로 삼았다.

 

8월 22일 기사

밤에 번개가 치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숙명(肅命)하니, 임금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조재호가 엉금엉금 기면서 걷지 못하니, 임금이 내시에게 명하여 부축하게 하였다. 조재호가 먼저 발을 다쳐서 사명(謝命)하지 못한 죄를 말하고, 그 다음에 그의 할아버지가 고 상신 박세채(朴世采)의 문(門)에 조유(從遊)하여 탕평(蕩平)의 연원을 사수(師受)한 것을 아뢰고, 이어서 그 아버지가 입조(立朝)한 본말(本末)에 언급하여 누누이 수백 마디 말을 하였다. 임금이 이종성(李宗城)이 전일 상소한 일을 물으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이종성은 젊어서 성망(聲望)이 있었는데, 급제한 뒤에 신들과 돌아가는 데를 같이하지 않은 것은 이광좌(李光佐)의 가행(家行)과 위의(威儀)·동작이 남을 감동시킬 만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젊을 때부터 좋아하여 따랐는데 차마 죽은 뒤에 저버릴 수 없으므로 이러한 상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종성이 도헌(都憲)으로서 죄를 받았을 때 신이 서로(西路)에 왕래하다가 들러서 보고 말하기를, ‘신세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는가? 가정의 전부터 내려오는 연원을 버리고 구촌숙(九寸叔)을 따라가는 것은 긴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였더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사세에 몰려 자연히 그렇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는 일찍이 이광좌에 대해 희망을 가졌는데, 대개 이광좌가 소론(少論)의 영수(領袖)이고 그 당류가 평소에 믿고 복종하였으므로, 생각을 고쳐 착한 것을 좇으면 준론(峻論)을 하는 소론의 당은 꼭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한편의 세도(世道)의 근심을 덜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아비가 무신년157)   이후에 이광좌에게 전일의 죄를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할 것을 권하였더니, 이광좌가 감사해 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 서로 사랑하는 뜻을 알 수 있으니, 감히 그대의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그 뒤에 이광좌가 그 말을 실천하지 않고, 옛버릇을 고치지 않은 채 반드시 공론과 혈전(血戰)하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사람을 모함하여 해치려 하였습니다. 그 당이 이 때문에 더욱 횡포하여 크게 세도의 해독이 되었으므로, 신의 아비가 그의 무상(無狀)함을 늘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좌는 죄가 있지만, 오히려 조태구(趙泰耉)가 화(禍)를 만들기 사작한 것과 같지는 않다."
하였다. 조재호가 말하기를,
"시작한 자는 조태구이고 맺은 자는 이광좌입니다. 이광좌가 아니면 반드시 무신년의 변에 이르지 않았을 것인데, 이광좌는 탈이 없고 조태구만 유독 죄를 받았으니, 죽은 자가 아는 것이 있다면 그가 반드시 원통하다고 하소연할 것입니다. 성상께서 헤아려 처분하신 후에야 고르지 못하다는 한탄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비록 옳지만, 일전에 꿈꾼 것을 이야기한 뒤인데, 일이 신축년158)  ·임인년159)  에 관계되는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재호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러하니, 신이 감히 다시 말할 수 없습니다마는, 대신이 되어 처음으로 연석(筵席)에 나왔으니, 어찌 말없이 가만히 있고 말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어서 군덕(君德)과 시무(時務)를 권면하여 아뢰었는데, 첫째 위노(威怒)를 삼가서 함양하는 공부를 더욱 극진히 하는 것이고, 둘째는 유현을 예우하여 초래(招來)하는 정성을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이고, 셋째 학문을 숭장(崇奬)하여 사습(士習)을 격려하는 것이고, 넷째 과거를 드물게 설행(設行)하여 요행을 바라는 길을 막는 것이고, 다섯째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서 대신 이하가 늘 대각(臺閣)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또 정휘량(鄭翬良)은 전직(銓職)에 있을 만하고, 구선행(具善行)은 장임(將任)에 제수할 만하고, 김상석(金相奭)은 온화하고 조용한 행실을 지킨다고 힘껏 천거하고, 마지막으로 균역(均役)의 폐단과 여염집에 관한 금령(禁令)을 논하기를,
"신이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일찍이 균역을 논하느라 사흘 밤낮을 보냈습니다마는, 신은 끝내 그 폐단이 반드시 균역하기 전보다 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험삼아 근일의 일로 말하여 보더라도 연해의 수령이 날마다 죄망(罪網)에 걸리니,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의 기상이겠습니까?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간 것에 이르러서는 전후에 성교가 지극히 엄하고도 긴급하므로, 비록 불쌍히 여길 만한 자가 있더라도 과감히 말할 사람이 없었는데, 한미(寒微)한 사족(士族)과 잔약(孱弱)한 서얼(庶孽)로서 매우 가난하여 작은 집에 세든 자와 먼 지방의 문사(文士)·무사(武士)로서 벼슬을 구하여 와서 여염집을 산 자가 한꺼번에 쫓겨나서 길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어찌 매우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고 특별히 여염집을 빼앗아 들어간 것 가운데에서 백문(白文)으로 팔고 사서 귀양간 자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경은 어찌하여 이익보(李益輔)의 일을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또한 특별히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조재호가 이날 해돋이 때에 들어와 신시(申時) 이후에야 물러갔으므로, 임금도 오히려 수라를 들지 못하였다.

 

8월 24일 신미

서리가 내렸다.

 

임금이 익선관·곤룡포를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서 의종 황제의 즉조일(卽阼日)의 망배례(望拜禮)를 행하고, 흉배(胸背)가 없는 흑원령포(黑圓領袍)로 갈아 입고 경종 대왕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균역 당상 홍봉한(洪鳳漢)·강원 감사 한광조(韓光肇)를 소견하였다. 홍봉한이 아뢰기를,
"관동(關東)은 전결(田結)이 본래 적은데 진상하는 무삼(貿蔘) 값을 모두 민결(民結)에서 거두니, 이 뒤로는 각 궁방(宮房)과 각 아문(衙門)의 면세된 것은 일체 관동에 획급(劃給)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이어서 각도에서 바치는 도롱이를 특별히 견감하게 하였다.

 

8월 26일 계유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탄신에 진하(陳賀)하겠다는 뜻으로 반복하여 다시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김상석(金相奭)이 온화하고 조용하다는 것을 여러 번 일컫고 말하기를,
"내가 우상에게서 들었다."
하자, 김상로가 또 정형복(鄭亨復)이 청렴 결백하다는 것을 성대하게 말하니, 임금이 특별히 정형복을 정경(正卿)으로 초탁(招擢)하고, 김상석에게 한 자급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청렴하고 간결하여 스스로 절개를 지켰는데, 한꺼번에 모두 발탁되니 여론이 흡족히 여겼다.

 

임금이 상신(相臣)에게 말하기를,
"원손(元孫)이 점점 지식이 있다. 듣건대, 놀 때에 강관(講官)이 책(冊)을 옆에 낀 모양을 한다 하니, 이것이 몽양(蒙養)이 없어서는 안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본디 엄정(嚴正)한 우리 조가(朝家)의 법(法)이겠는가? 경들은 물러가서 상의하여 보양관(輔養官)을 뽑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9일 병자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언로(言路)가 막힌 것이 근일과 같은 때가 없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저하께서 두려워하실 부분입니다. 전 필선 박성원(朴聖源)이 진계(陳戒)한 지 얼마 안되어 한 번 패초(牌招)를 어기고서 곧 파면되었으니, 이것은 저하께서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시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이 서로 이어서 권면을 진달하니, 왕세자가 가납(嘉納)하였다.

 

헌납 김조윤(金朝潤)이 상서하여 은산 현감 안복준(安復駿)이 일찍이 남방 고을에 있었을 때 탐욕이 많고 교활하여 법을 어긴 일을 논하고, 삭거(削去)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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