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축
왕세자가 시민당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헌납 김조윤(金朝潤)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2일 무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민우수(閔遇洙)·남유용(南有容)을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반드시 이름을 바룬다.’ 하였는데, 탕춘대(蕩春臺)의 이름은 바르지 않다. 이미 경영(京營)을 설치하고는 때때로 나아가기도 하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다시 연융대(鍊戎臺)라고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긴요하지 않은 약재(藥材)로서 영동에서 바치는 것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바야흐로 본도의 상정(詳定)을 바로잡는데, 균역 당상 홍봉한(洪鳳漢)이 그 폐단을 말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세자에게 명하여 시좌(侍坐)하게 하고 실솔장(蟋蟀章)160) 을 강독하였다. 임금이, ‘너무 태강하지 않은가[無已太康]’라는 뜻을 들어 경계하였다.
9월 3일 기묘
유성(流星)이 두성(斗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경상도 유생 이승해(李昇海)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을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5일 신사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오수채(吳遂采)를 대사헌으로, 이수관(李壽觀)을 사간으로, 남학로(南鶴老)·정상순(鄭尙淳)을 지평으로, 서명응(徐命膺)을 헌납으로, 이세태(李世泰)·이성경(李星慶)을 정언으로, 홍경해(洪景海)를 수찬으로, 홍상한(洪象漢)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파할 무렵에 승지 송수형(宋秀衡)이 대략 규면(規勉)하는 말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이를 듣고 특별히 호피(虎皮)를 내렸다.
9월 6일 임오
경상도 유생 신광조(申光朝)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을 성무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7일 계미
하교하기를,
"이달 13일에 대내(大內)에서 진전(眞殿)에 전알(展謁)한 뒤에 육상궁(毓祥宮)에 전배(展拜)하겠다."
하였다.
9월 9일 을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남학로(南鶴老)가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수봉(李壽鳳)의 일은 정달(停達)하였다.
강원도 회양 등지에서 범에게 물려 죽은 자가 1백여 인인데, 모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9월 10일 병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정언 이성경(李星慶)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부연(敷衍)하고, 상서하여 면려하기를 아뢰었는데, 답하기를,
"근심하고 사랑하여 정성을 아뢰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1일 정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유성(流星)이 천름성(天廩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이었다.
전라도 부안현에 지진이 있었다.
이수봉(李壽鳳)을 장령으로, 심발(沈墢)을 부교리로, 유한소(兪漢蕭)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경상도 유생 곽수범(郭守範)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을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3일 기축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9월 13일 기축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전배(展拜)하고 창의궁(彰義宮)에 들렀다가 밤에 환궁(還宮)하였다. 이날은 임금의 탄신(誕辰)이었다. 회란(回鑾)할 때에 연추문계(延秋門契)의 부로(父老)를 소견하여 폐단을 묻고, 하교하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풍패(豊沛)161) 와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대읍(代邑)162) 에는 항상 생각하는 뜻이 있었었다. 나도 고사(故事)에 따른다."
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다. 선전관 5인에게 명하여 오부(五部)의 사대부 집 종들이 좌경(坐更)163) 하는지 그 여부를 적간(摘奸)하게 하였다.
사헌부에서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를 파직할 것을 청하고, 사간원에서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기를 청하였다. 이요가 교자(轎子)를 타고 일산(日傘)을 편 채 곧바로 배호(陪扈)하는 반열(班列)에 들어갔기 때문인데, 임금이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9월 14일 경인
우박이 내리고 천둥하며 번개가 쳤다.
정원에서 언로(言路)를 열고 조정(朝廷)을 안정시키며 국본(國本)을 견고하게 하고 만정(晩政)을 힘쓸 것을 대조(大朝)께 진계(陳戒)하고, 또 학문에 부지런하고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소조(小朝)에게 진면(陳勉)하였다. 홍문관에서도 차자를 올려 소조에게 권면하였는데, 천둥의 이변 때문이었다.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린 것은 체례(體例)가 중한데, 적절한 말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애석해 하였다.
9월 15일 신묘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저하께서는 성품이 드레지고 말이 적은 것이 너무 지나쳐서 서연(書筵)에서 강독할 때에 청수(聽受)는 있으나 문난(問難)이 없으시니, 거의 겉치레로 채우고 마는 것 같습니다. 대저 말이 적은 것은 사람의 미덕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치우치게 말이 없으면 또한 병통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저하께서는 총명을 타고나셔서 경전(經傳)의 의리의 근원과 역대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번거롭게 강독하지 않더라도 소상하게 이해하실 수 있겠지만, 또한 어찌 의심스러워 막히는 부분과 이해하지 못하여 표현하지 못하는 단서가 없겠습니까? 안연(顔淵)은 아성(亞聖)인데, 지식이 많은 사람으로서 지식이 적은 사람에게 묻고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서 재능이 없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더구나 의심스러워 막히는 부분이 있어도 캐묻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여 표현하지 못하는 단서가 있어도 계발(啓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을 진취시키고 학업을 닦겠습니까? 정사(政事)에 이르러서는 대조(大朝)께서는 그 강령(綱領)을 통괄하시고 저하께서 그 조목(條目)을 맡으셨으므로, 모든 법문(法門)·제도의 종핵(綜核)과 전곡(錢穀)·갑병(甲兵)의 호번(浩繁)한 것과 팔방의 문장(文狀)과 백사(百司)의 직무가 모두 저하의 한 몸에서 재품(裁稟)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저하께서 대리하신 지 오래 되지 않았으니, 어찌 낱낱이 두루 알고 환히 살피실 수 있겠습니까? 성심으로 자문하고 부지런히 힘쓰시되, 이미 알고 있는 것은 훤히 깨달아 익숙해질 수 있게 하고 미처 모르는 것은 환히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것을 정령(政令)과 사업에 조치하여 자세히 널리 통달하여 각각 극진한 데에 이르러야 진실로 마땅할 것입니다. 신이 5일의 빈대(賓對)를 보건대, 뭇 신하들이 일을 아뢰었을 때에 한 번도 상의하여 확정한 답을 받지 못하고 다만 관례에 따라 분부를 받고 물러 갔습니다. 아! 저하께서 더불어 나라의 일을 다스리기를 도모하는 자는 묘당의 여러 신하들인데, 저하께서는 엄연히 연대(筵對)하여 예경(禮敬)만 보일 뿐이고 더불어 마음을 열고 묻지 않으시니, 정사의 도리를 깊이 강구하는 실속이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마지 않으신다면, 저하께서 혹 기무(機務)에 유궐(遺闕)하는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지우(智愚)·장단(長短)을 저하께서는 또 무엇을 연유하여 다 살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놀며 세월을 보내는 데 일임하여 백관이 퇴폐하게 하시겠습니까? 신은 민망스럽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근심하고 사랑하여 면계(勉戒)를 아뢰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6일 임진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대조(大朝)께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의 나랏일 중에서 말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뿐만이 아니지만, 모두 전하의 한 몸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대저 분노와 사욕을 억제하여 참는 것이 첫째 요결(要訣)입니다. 이제부터 이후로 무릇 천노(天怒)가 격렬히 일어나는 것을 반드시 억눌러 혈기(血氣)가 일을 처리하는 데 이르는 바가 없이 성의(聖意)가 하고자 하는 것을 깊이 살펴서 능히 천리(天理)에 혹 이그러지는 것을 경계하시며, 옳은 말과 경알(傾軋)을 반드시 밝게 가려서 처치하시고 기절(氣節)과 당습(黨習)을 조금이라도 혼동하지 말고 다스리시며, 따뜻하고 부드럽게 돌보는 것을 인(仁)으로 여기지 마시고 궁녀·내시의 작태를 충(忠)으로 여기지 마시어 한결같이 정령(政令)·시조(施措)가 순수하고 정대(正大)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실속으로 하고 겉치레로 하지 않으신다면 하늘과 사람이 서로 함께 하여 한 가지도 막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재변(災變)을 그치게 하는 도리는 참으로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팔도의 유생 안세광(安世光)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門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경상도 유생 박중종(朴重宗) 등이 상서하여 빨리 대조(大朝)께 여쭈어 특별히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을 종사하라는 명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7일 계사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왕세자가 약원의 신하들을 접견하였는데, 반점의 증후(症候)가 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약원의 신하들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동궁(東宮)의 증후(症候) 때문에 의관(醫官)에게 특별히 직숙(直宿)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경상도 유생 허흡(許潝)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문정공 송시열을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18일 갑오
밤에 천둥하였다.
9월 19일 을미
지진이 있었다. 우박이 내리고 천둥하며 번개가 쳤다.
팔도의 유생 최익화(崔益和)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좌의정 김상로(金尙魯)를 소견하였다. 이때 천둥과 지진의 이변이 있었으므로, 이천보 등이 대략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권면하고, 이어서 책면(策免)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스스로 힘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하였다. 이때 청주(淸主)가 바야흐로 심양에 이르렀는데 서달(西㺚)은 강포(强暴)가 심하였다. 임금이 청주가 반유(盤遊)하는 것이 절도가 없어서 화(禍)가 우리 나라에 미칠까 근심하여 하교하기를,
"강역의 근심이 이러한데, 지금의 인심을 믿을 수 있으며, 병력을 믿을 수 있으며, 기강을 믿을 수 있겠는가? 현재의 급선무는 저축을 넓히는 한 가지보다 앞설 것이 없다."
하니, 대신들이 모두 성교가 지당(至當)하다고 하였다. 이천보가 세 도(道)에 이정사(釐正使)를 보내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마땅한 사람을 물으니, 김상로가 윤동도(尹東度)·이익보(李益輔)·김양택(金陽澤)을 천거하여 대답하였다. 이익보·김양택은 영상에게 내외(內外)의 지친(至親)이 되므로 김상로가 대답한 것이었다. 임금이 윤동도를 호서(湖西)에, 이익보를 해서(海西)에, 김양택을 영동(嶺東)에 차출하고, 이어서 봄이 되거든 내려가라고 명하였다. 대개 이정사는 폐단을 바로잡는다는 이름이 있으나, 백성을 소요하게 하는 폐해가 있는데, 대신이 반드시 차출하여 보내기를 청하니, 사람들이 많이 괴이하게 여겼다. 김상로가 동림성(東林城)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힘써 말하니, 임금이 자못 어렵게 여겨 말하기를,
"경의 말과 같다면 동림에 첨사(僉使)를 두어야 할 것인데, 다시 서림(西林)과 같아진다면 조정의 처분이 어찌 전도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대개 서림에 성을 쌓은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이제 서림을 버리고 동림을 취하자는 의논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천보가 총융사 구성임(具聖任)은 쇠약하고 병들어서 직임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총융사는 연석(筵席)에 자주 들어오는 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뜻은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을 가리킨 것인데, 말은 분명하지 않았다. 임금이 한참 생각하고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깨달았다."
하였다. 김상로가 경학(經學)과 재행(才行)이 있는 유생과 지략(智略)과 용력(勇力)이 있는 무사를 팔도의 감사·통제사·병사로 하여금 각각 두세 사람씩 천거하게 하기를 청하자, 이천보가 말하기를,
"정경(正卿)도 각각 두 사람씩 천거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20일 병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번개가 치고,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9월 20일 병신
부수찬 홍자(洪梓) 등이 대조(大朝)에게 차자를 올려 재이(災異) 때문에 경계를 아뢰고, 이어서 숙묘(肅廟)의 고사(故事)에 따라 비록 대리하는 때일지라도 대조에게 관계되는 일은 뭇 신하들이 곧바로 대조에게 아뢸 수 있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전경 무신강(專經武臣講)164) 을 시험하였다.
궐내(闕內)에 입직하는 장교(將校)의 침구(寢具)를 금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능행(陵幸) 때에 장교의 군막(軍幕) 가운데에 안석(案席)이 있는 것을 보고 그 편안한 것을 매우 그르게 여겨서 이러한 금령이 있었다.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지평·정언의 청직(淸職)에 통하는 것이 혼잡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때 임금이 장령의 통청(通淸)하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미천한 자도 모두 지평·정언에 통하여 더욱 방한(防限)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김상석(金相奭)을 우윤으로 삼았다.
9월 21일 정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수찬 홍경해(洪景海)·부수찬 홍재(洪梓)가 소조(小朝)에게 차자를 올려 재이(災異)가 있고 나서 말하지 않은 대간(臺諫)을 파직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학 유생 윤행엄(尹行儼)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두 선생을 아울러 제향(祭享)할 것을 청한 지 이제 40여 년이 되었는데, 저 영남의 유생들만이 사체(事體)의 중대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 사람만을 거론하여 청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던 것은 모두 저하께서 지나치게 신중하여 마땅히 허락해야 할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 공론이 정해지지 않고 사풍(士風)이 예전 같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으니, 빨리 대조(大朝)께 여쭈어 흔쾌하게 유음(兪音)을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9월 22일 무술
천둥하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9월 23일 기해
윤음(綸音)을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내가 덕이 없는 몸으로 또 더욱 쇠약해져서 기운이 갈수록 피곤해지고 마음이 갈수록 차가워지므로, 수거(修擧)해야 할 것을 수거하지 못하고 신칙해야 할 것을 신칙하지 못하니, 어찌 성탕(成湯)의 육책(六責)165) 만할 뿐이겠는가? 한 번 대리(代理)한 뒤로 나의 책임은 오직 제사(祭祀)·융사(戎事)와 사람을 등용하는 데 있었을 따름인데, 세 계절이 이미 다 가도 막중한 사전(祀典)을 모두 몸소 행하지 못하여 희생(犧牲)이 살찌지 못하고 자성(粢盛)166) 이 깨끗하지 못하니, 신칙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변보(邊報)가 이르지 않으므로 장수는 교만하고 군졸은 게을러져서 융정(戎政)이 날로 무너지고 변방이 허술하고 군기(軍器)가 썩고 무디니, 신칙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제(經濟)의 방략(方略)을 가진 자가 한갓 집안에서 늙어가고 간성(干城)의 재주를 가진 자도 능히 알 수 없으니, 신칙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이 세 가지도 모두 능히 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나 한 사람의 허물이니, 어찌 신하들을 책망하겠는가? 아! 당습(黨習)을 몇 해 동안 조제(調劑)하여 겉으로는 당이 없는 듯하나 속으로는 실로 예전 그대로이니, 한밤에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두려워진다. 사치한 버릇이 날로 치성해져서 백성의 재물이 날로 없어지고, 온갖 일은 세월만 보내어 모든 공적이 좀스럽고, 이목(耳目)167) 은 주저하며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일삼고, 탐관 오리(貪官汚吏)는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사복을 채우고, 뇌물을 쓰며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는 일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다. 공자(孔子)가 ‘상주더라도 훔치지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 전(傳)에도 ‘요순(堯舜)·걸주(桀紂)를 백성이 다 따랐다.’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다 덕이 없어서 그렇게 되게 한 것이다. 오늘부터 10일 동안 감선(減膳)하여 스스로 삼가는 뜻을 보이겠다."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좌의정 김상로(金尙魯)·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을 불러 먼저 강역(疆域)의 근심을 유시하고, 인하여 수성(守城)의 방책에 관해 언급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수성하려면 먼저 개천을 파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천보가 말하기를,
"내가 막히는 것은 산의 나무를 베었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사산(四山)의 감역(監役)을 참군(參軍)으로 고치고 무관(武官)을 가려서 차출하여 군문(軍門)에 붙이라고 특별히 명하였는데, 모두 김상로와 홍봉한의 찬성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임금이 장수가 교만하고 군졸이 게으른 폐단을 말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금위 대장은 다만 한 번 출관(出官)하는 좌기(坐起)를 행하고 다시 영문(營門)에 나아가지 않으니, 이 영문은 따로 한 군문을 만들고서야 본병(本兵)도 존중될 수 있을 것이다."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이것은 사리가 분명하므로, 신이 병판으로 하여금 절목을 만들게 하였으나, 아직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대개 금위영(禁衛營)을 나누어 내보낸 것은 김상로가 힘써 주장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수찬 홍경해(洪景海)에게 명하여 고 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문집(文集)의 심적편(審敵篇)을 읽게 하였다. 홍경해가 글로 인하여 뜻을 해설하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기를 주장한 의리와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이 대의(大義)를 함께 협찬한 공을 성대하게 말하고 종사(從祀)하자는 청을 윤허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한참 있다가 하교하기를,
"눈앞에 재이가 거듭 나타나니, 선정의 일은 오히려 부질없는 말에 속한다. 유신은 이것을 오늘날 재앙을 그치게 할 방책으로 여기는가?"
하였다.
9월 24일 경자
사학 유생 김일순(金日淳)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5일 신축
유성이 하늘 복판의 옅은 구름 사이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사학 유생 이상숙(李商肅)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총융사 구성임(具聖任) 등을 소견하여 변란의 대비에 대해 물었으나, 여러 신하들이 별로 건의한 것이 없이 물러갔다.
9월 26일 임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6일 임인
판돈녕 김상성(金尙星)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재(天災)가 비상하여 온갖 근심이 마음속에 교차하는데, 궁빈(宮賓)에 대죄(待罪)하였으므로 대략 한 말씀을 아뢰겠습니다. 학문에 부지런하고 정사에 부지런한 것이 비록 오늘날 제일 중요한 뜻이지만, 반드시 신체가 안건(安健)해야 오랫동안 쉬지 않는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병을 삼가는 도리에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는데, 그 요체는 단지 하나의 경(敬) 자에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한적하여 외로운 곳에서도 늘 상제(上帝)를 대하듯이 하고, 한 번 먹고 마시거나 한 번 기거(起居)하는 동안에도 늘 깊은 못에 다가선 듯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한 경계를 지니신다면, 온몸이 시키는 대로 따라서 효용이 신묘(神妙)하여 저절로 천연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사람에게는 병중에 심기를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었는데, 또한 이 경(敬) 자일 뿐이었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뢴 것이 절실하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팔도의 유생 안형(安衡)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聖廡)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7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8일 갑진
이기경(李基敬)을 장령으로, 이길보(李吉輔)·조종부(趙宗溥)를 지평으로, 남태회(南泰會)를 헌납으로, 한사직(韓師直)을 정언으로, 서명천(徐命天)을 교리로, 윤동성(尹東星)을 수찬으로, 이세택(李世澤)·김시묵(金時默)을 부수찬으로, 윤득우(尹得雨)를 부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한 기예(技藝)에 능통한 무사(武士)이어야 비로소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9월 28일 갑진
장령 정언충(鄭彦忠)이 붕당을 타파하고, 기강을 세우고, 언로를 열고, 용사(用捨)를 삼가고, 백성을 보전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라는 등의 일을 상서하였는데, 답하기를,
"진면(陳勉)한 것은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사치하는 버릇을 금하지 않으면 어떻게 염치를 힘쓰게 하겠으며, 어떻게 이 백성을 구제하겠으며, 어떻게 저축을 넓히겠는가? 이 뒤로는 강변의 일곱 고을과 삼수(三水)·갑산(甲山)과 육진(六鎭)과 동래부·탐라(眈羅)의 모든 궤유(饋遺)를 일체 엄금하되, 준수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주고받은 자를 같은 율로 다스리도록 하라. 비록 이 밖의 고을이라도 나라 안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면 감히 궤유하지 못하게 하고, 범한 자는 이목(耳目)인 신하가 탄핵하여 중률(重律)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9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새벽에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명정전에서 동향 대제(冬享大祭)의 서계(誓戒)168) 를 행하였다. 이어서 면복(冕服)으로 갈아 입고 인정전에 나아가 대비전의 탄신의 하례를 행하고, 자전 탄일지희송(慈殿誕日志喜頌)을 친히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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