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2권, 영조 30년 1754년 10월

싸라리리 2025. 10. 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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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병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이성규(李聖圭)를 검열로 삼았다.

 

10월 2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예전에는 금군(禁軍)이 대궐 안에 입직하면 3일마다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참알(參謁)하고,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그 궁시(弓矢)·전복(戰服) 등속을 점고하게 하였는데, 선조(先朝) 임신년169)  에 특별히 폐지하고 대내(大內)에서 하교하기를, ‘중관의 권세를 초래할까 두렵다.’ 하셨으니, 성려(聖慮)가 깊고 원대하였다. 신축년170)  의 환국(換局) 때에 중관이 무예청(武藝廳)으로 하여금 각문(各門)을 호위하게 했었는데, 경들은 아는가?"
하였는데, 모두 대답하기를,
"모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접때 금군이 참알하는 법을 복구하기를 청한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일부러 윤허하지 않았으나, 한번 참알을 없앤 뒤로는 군장(軍裝)이 한심하므로, 늦추고 당기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되겠다. 이 뒤로는 해마다 네 계절의 가운데 달 10일 이전의 사고가 없는 날에 병방 승지는 입직한 금군의 군장을 점고한다는 것을 곧바로 아뢰고, 명정전(明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병조에서 지급한 군장을 점열한 뒤에 곧 탈이 있고 없는 것을 아뢰되, 그대로 정식(定式)을 삼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금군의 봄·가을 도시(都試)는 뜻이 대개 깊은 것인데, 요즈음 오랫동안 행하지 않았으니, 이 뒤로는 양사(兩司)가 갖추어지지 않더라도 의정(議政)이 가면 반드시 고례대로 행하되, 육냥전(六兩箭)의 보수(步數)는 한결같이 증광시(增廣試)·식년시(式年試)의 예에 의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를 부조(不祧)171)  의 신위(神位)로 삼으라고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의 상달(上達)로 인한 것이었다. 선정신 조헌(趙憲)에게 의정(議政)을 추증하였는데,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호조에서 경용(經用)이 모자라기 때문에 선혜청의 쌀을 빌려 쓰기를 청하니, 명하여 1만 석을 허락하고, 또 별영(別營)의 봉료(俸料)로 나누어 줄 좁쌀이 떨어졌기 때문에 선혜청의 좁쌀 2천 석을 빌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무예 별감(武藝別監)들이 성밖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창기를 끼고 풍악을 벌였는데, 대신이 감선(減膳)하는 때에 행락하였다 하여 수창(首唱)한 자를 형배(刑配)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동몽 교관(童蒙敎官)을 불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도리를 신칙하고 동몽 교관에게 차등을 두어 지필(紙筆)을 상주었다.

 

10월 3일 무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서지수(徐志修)를 승지로,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을 진하 겸 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이성중(李成中)을 부사로, 임사하(任師夏)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청주(淸主)가 환경(還京)한 뒤에는 으레 별사(別使)가 있었기 때문이다.

 

팔도 유생 황종렬(黃宗烈)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 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능마아 당상(能麽兒堂上) 구선복(具善復) 등과 능마아로 뽑힌 자 14인을 불러 앞에서 진도(陣圖)를 시험하였는데, 약생(略栍)172)                  을 얻은 자가 겨우 한 사람이었다.

 

10월 5일 경술

유성이 천절성(天節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았다.

 

약방에서 원손(元孫)에게 반점의 증후가 있기 때문에 의관(醫官) 두세 사람이 특별히 입직(入直)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0월 6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보여(步輿)를 타고 빈양문(賓陽門)으로 나가 명정문(明政門) 밖에 이르러 연(輦)을 탔다. 승지가 규(圭)를 바치니 임금이 규를 잡고 태묘(太廟)의 문에 나아가 연에서 내려 보여를 타고 동협문(東挾門)으로 좇아서 재실(齋室)에 들어갔다.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고 서협문(西挾門)으로 나가 망묘례(望廟禮)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묘(廟)에 들어가 봉심(奉審)하고, 이어서 성기례(省器禮)를 행하였다. 걸어서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예를 행하였는데, 봉심하고 성기례를 행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어서 성생소(省牲所)에 가서 희생을 살펴보고 도로 재실로 들어갔다.

 

장마(仗馬)가 놀라 달아나서 묘문(廟門)으로 들어갔으므로 해시(該寺)의 관원을 나처(拿處)하게 하였다.

 

10월 7일 임자

밤에 번개가 쳤다.

 

임금이 태묘(太廟)의 동향(冬享)을 친히 행하였다. 밤 사고(四鼓)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재실(齋室)의 서협문(西挾門)을 나가니 예의사(禮儀使) 홍상한(洪象漢)이 인도하여 판위(板位)에 나아가 의식대로 제사를 지내고, 이어서 환궁하였다. 이때 보령이 이미 회갑인데 추위를 무릅쓰고 일을 행하여도 예도(禮度)가 어그러지지 않으니, 부족하지 않은 효성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10월 8일 계축

사학 유생 김성환(金星煥)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9일 갑인

사학 유생 황재곤(黃載坤)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0일 을묘

번개가 쳤다.

 

10월 11일 병진

유학(幼學) 강주악(姜柱岳)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3일 무오

경상도 유생 성헌주(成憲柱)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4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응협(李應協)을 대사간으로, 남학종(南鶴宗)을 장령으로, 황인검(黃仁儉)을 헌납으로, 심각(沈殼)을 지평으로, 최태형(崔台衡)·이영휘(李永暉)를 정언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대사성으로, 김상석(金相奭)을 진하 겸 사은 부사로 삼았다.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 유척기(兪拓基) 등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홍명원(洪命源)의 아들 홍성(洪晟)을 구애받지 말고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또 무신년173)  에 장폐(杖斃)된 사람 유내(柳徠)의 직첩을 주라고 명하였다. 대개 유내의 아내가 상언하였는데, 판의금 홍상한(洪象漢)이 먼저 단서를 끌어내고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와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서로 이어서 힘껏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유내의 집은 장서(藏書)가 만 권(卷)이고 적화(積貨)가 천 금(金)인데, 유내의 조카 유경종(柳慶鍾)이 다 뒷구멍을 통하여 흩어 주었기 때문에 두 대신으로 하여금 말하게 할 수 있었다.’ 하였다.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이 임진 절목(臨津節目)을 수정하여 바쳤다. 이에 앞서 임진의 수비(守備)가 허술했기 때문에 홍봉한에게 명하여 절목을 다시 만들게 하였었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병조 판서가 금위 대장(禁衞大將)을 아울러 거느리는 제도를 폐지하기를 힘껏 청하니, 임금이 따르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의 오영(五營)의 제도는 곧 전 도설(圖說)의 오위(五衞)의 제도이니, 임술년174)   이전의 예에 따라 병조 판서는 오영을 총괄하여 대중군(大中軍)이 되어 용호영(龍虎營)만을 거느리고, 금위 대장은 한결같이 어영청의 예에 따라 거행하되 절목은 힘써 간략한 데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팔도의 유생 정사덕(鄭思德)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6일 신유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경상도 유생 윤면정(尹勉貞)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7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이번 별사(別使)를 진하 겸 사은사(陳賀兼謝恩使)라고 이름하였습니다마는, 심양사(瀋陽使)가 돌아오고 있는데 이미 조서(詔書)를 보낸 것이 없었으니, 사은사라고 이름을 고치소서. 계해년175)  의 전례를 상고하건대, 이듬해 사은사가 들어갔을 때에는 사신이 연회에 참석하는 일 때문에 따로 표문(表文)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이 예에 의거하여 방물(方物) 없이 표문 1도(道)를 지어 사행(使行) 편에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요즈음 보건대,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는 오로지 한편 사람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그르다.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써야 마땅하고, 더욱 사기(士氣)를 막히게 해서는 안되는데, 한편 선비들이 어찌 불평하지 않겠는가? 만약 저희들 안에서 비방받는 것을 염려한다면, 비록 말망(末望)·부망(副望)으로 주의(注擬)하더라도 대사성이 어찌 뜻대로 할 수 없겠는가? 유생들은 장의를 화현(華顯)으로 여기는데, 사학(四學)의 장의까지 모두 순색(純色)으로 삼는다 하니, 더욱이 매우 그르다. 이 하유가 있고 나서 또다시 전과 같다면 어찌 나의 신하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금영(禁營)을 나누어 내보낸 것이 마땅한 지의 여부를 승지 서지수(徐志修)에게 물었는데, 서지수가 대답하기를,
"금영을 나누어 내보내기 전에는 병판이 겸대(兼帶)하였으므로, 양영(兩營)과 함께 서로 제어할 수 있었지만, 자주 체임되므로 또한 군사를 관장하는 권세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성안에서 장차 군사를 거느릴 일이 있을 것이므로, 세 대장이 이미 민망스러운데, 병판이 또 총관하면 그 염려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의 말이 질박하고 정직하다."
하였다.

 

10월 18일 계해

저녁에 무지개가 동쪽에 나타났다.

 

10월 19일 갑자

우박이 내렸다.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경상도 유생 박홍(朴洪)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0일 을축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대간(臺諫)은 법을 지키는 벼슬입니다. 숙명(肅命)하기 전에는 으레 직무를 행할 수 없는데, 일전에 정언충(鄭彦忠)은 헌관(憲官)이 되었을 때 미처 숙명하지 않고서 금리(禁吏)를 내보냈습니다. 영상이 듣고 그르게 여겨서 헌리(憲吏)를 가두었더니, 정언충이 이 때문에 인피(引避)하였는데, 피사(避辭) 가운데에 얕보였다고 한 것은 체통에 관계되니, 정언충을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21일 병인

김시찬(金時粲)·서명신(徐命臣)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22일 정묘

행 사직 서명구(徐命九)가 졸(卒)하였다. 서명구는 달성 부원군 서종제(徐宗齊)의 종자(從子)인데, 임금이 그가 졸한 것을 듣고 하교하기를,
"이 사람의 바른 절조(節操)를 내가 익히 아는데 벼슬이 아경(亞卿)에 그쳤으니, 내가 애석하게 여긴다. 휼전(恤典)은 후하게 하는 데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3일 무진

임금이 대신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병판 이창의(李昌誼)의 병이 심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그 체직을 윤허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금영(禁營)을 나누어 설치하는 일을 힘써 주장하고, 아뢰기를,
"금영의 절목은 비록 미처 모두 만들지 못하였지만, 이 기회에 먼저 대장을 차출하는 것 또한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바야흐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나 막히는 데가 있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일찍이 조용히 연충(淵衷)에서 생각해 보시기를 앙달(仰達)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대개 두 상신이, 구선행(具善行)이 대장에 합당하다고 천거하였으나, 구선행의 아버지 구성임(具聖任)이 바야흐로 총융사의 직임을 띠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막히는 것으로 여긴 것이었다. 이때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어서 정망(政望)을 장차 들이려고 하는데, 김 상로가 임금에게 두 번째 말하기를,
"병판은 빨리 출사(出仕)할 자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 뜻은 홍상한(洪象漢)을 가리킨 것인데, 임금은 판돈녕 김상성(金尙星)을 병판에 제수하고자 하여 묻기를,
"김상성은 병이 이미 나았는가?"
하였는데, 우참찬 홍봉한(洪鳳漢)이 그가 지팡이를 짚고도 다니지 못한다고 성대하게 말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그렇다면 이창의(李昌誼)의 해직을 윤허한 뜻에 어그러진다."
하고, 드디어 홍상한을 병판으로 삼았다. 수일 뒤에 김상성이 비국 당상으로서 입시하여 전폐(殿陛)를 오르내리며 걸어다니는 것이 어렵지 않으므로, 임금이 자못 주시하였다. 김상로가 또 구성임에게 아직 판돈녕을 제수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추은(推恩)하지 않은 것이라고 자못 장황하게 아뢰자, 임금이 김상성에게 예조 판서를, 구성임에게 판돈녕을, 홍봉한에게 총융사를, 이의풍(李義豊)에게 어영 대장을, 구선행에게 금위 대장을 제수하고, 특별히 세 장신(將臣)을 불러, 홍봉한에게 하유하기를,
"임진(臨津) 일대는 내가 근심을 잊을 수 있다."
하였는데, 대개 임진이 총영(摠營)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이의풍에게 하유하기를,
"전 어영 대장과 영성군(靈城君)이 과연 잘 지켰으니, 두 장수의 규모는 좋았다."
하니, 이의풍이 대답하기를,
"신이 삼가 한결같이 준행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하였다. 구선행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세 정승의 천거에 따라서 특별히 제수하였으니,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다. 예전에 상자를 열어 비방하는 글을 보인 자가 있었으니176)  , 모쪼록 비방을 견디고 해야 한다."
하니, 구선행이 대답하기를,
"신의 영(營)은 새로 설치하였으나, 어영은 이미 규모를 이루었으니, 신도 어영을 표준으로 삼겠습니다."
하였는데, 장신이 다른 영의 예를 한결같이 본받는 것은 전혀 주장이 없는 것이므로 사람들이 많이 비웃었다.

 

특지(特旨)로 조엄(趙曮)에게 수찬을, 윤동성(尹東星)에게 부수찬을 제수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오늘 친히 당록(堂錄)을 행하였는데, 두 사람이 어찌 감히 다시 인의(引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본관록(本館錄)에 대하여 사람들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모두 인혐하고 함께 패초(牌招)를 어겼으므로, 임금이 면대하여 신칙하겠다는 뜻을 알리게 하였으나, 두 사람이 그래도 명에 따르지 않으니, 임금이 감히 들을 수 없는 엄한 하교를 내렸다. 그래서 나와서 숙명(肅命)하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였다. 조엄이 문의(文義)를 설명하고 나서 아뢰기를,
"대관(大官)·소관(小官)을 물론하고 근래 중비(中批)하는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전하께서 임어하신 뒤로 일이 드물었는데, 한번 고 상신 송인명(宋寅明)이 주장하셔야 한다는 말을 아뢴 뒤부터 비로소 특제(特除)가 많아졌으므로, 그때 신의 아비가 이판으로 있다가 상소하여 인혐하였습니다. 대저 중비는 격려하기 위한 정사(政事)인데, 이제 도리어 외람되어 잗달게 되었으니, 명기(名器)가 어찌 가볍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이 나에게 주장하기를 권한 것은 금세(今世)에서 공심(公心)을 가진 자를 아는 것으로는 나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아비가 인혐한 것은 진실로 옳지만, 그대의 아비는 반드시 지하에서 이 일을 이미 잊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대는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었으니, 그대의 아비에게 잘 배우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뒤로는 모쪼록 그대 아비의 평소의 마음을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3일 무진

안집(安𠍱)을 대사간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사간으로, 심수(沈鏽)·이준휘(李儁徽)를 교리로, 권상일(權相一)을 병조 참판으로, 윤득재(尹得載)를 도승지로, 이득종(李得宗)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24일 기사

한사득(韓師得)을 도승지로, 박사눌(朴師訥)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영성군 박문수를 소견하였다. 이때 바야흐로 병조와 금영(禁營)의 절목을 만드는데 박문수가 경험이 많은 장수이어서 일을 의논할 만하기 때문에 특별히 부른 것이었다. 임금이 묻기를,
"금영을 나누어 설치하는 것을 경은 옳게 여긴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박문수가 대답하기를,
"신이 처음에는 옳게 여겼습니다마는, 다시 생각해보건대, 작은 우리 나라에서 무장(武將)이 각각 중병(重兵)을 거느린다면, 뒷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뜻이 어찌하여 전과 달라졌는가?"
하자,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본병(本兵)이 다시 하나의 영문(營門)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은 경의 염려가 지나친 것이다. 병조가 다시 하나의 영문이 된다면 세도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박문수에게 명하여 총융사 및 삼영(三營)의 대장·비국 당상 김치인(金致仁)과 함께 대신에게 물어서 절목을 만들게 하였다. 박문수가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과도 함께 의논하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0월 26일 신미

하교하기를,
"원손(元孫)은 바야흐로 어린 나이이지만, 보양관(輔養官)과 상견례를 행할 때에는 한결같이 원량(元良)·원자(元子) 때의 예에 따라 쌍동계(雙童髻)에 평소의 진현복(進見服)을 입는 것인데, 보양관은 원자 보양관(元子輔養官)과 차이가 있으니, 상견례 때에도 시복(時服)으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뒤에 대내와 조금 멀리 떨어졌다 하여 양정합(養正閣)에서 행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7일 임신

보덕 이게(李垍) 등이 상서하기를,
"지금 진강(進講)하는 것을 보건대, 《논어》를 거의 마쳤으니, 《맹자》를 이어서 강(講)해야 하겠지만, 이 책은 전에 진강했던 것입니다. 성문(聖門)의 공부는 반드시 먼저 학문을 넓히고 나서 옛것을 익혀야 하니, 《근사록(近思錄)》을 진강하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대조(大朝)께서 명한 것이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팔도 유생 권채형(權采衡)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과 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28일 계유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함경도 유생 주원순(朱遠舜)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9일 갑술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영성군 박문수와 여러 장신(將臣)들을 소견하고 홍봉한(洪鳳漢)에게 명하여 병조의 새로 만든 절목을 읽어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의 당상 군관(堂上軍官)이 몇 원(員)이며, 구근과(久勤窠)는 전에 견주어 준 것이 없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당상 군관이 12원이고 교련관(敎鍊官)·기패관(旗牌官)이 합하여 10원인데, 당상 군관과 교련관 3인을 번갈아 천전(遷轉)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병조의 요포(料布)에 대하여 혹 쓴 것이 1백 동(同)에 밑돌지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이제 그 절목에 적힌 것이 4, 5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총융사가 마음을 쓴 바로서 신은 기쁘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제부터 이후로 해마다 병조에서 급대(給代)할 쌀이 수천여 석이 될 것입니다. 균청(均廳)에서 이로 인하여 새로 수조(收租)할 것에 더 획정(劃定)하면 삼남(三南)의 각청(各廳)에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당초에 아주 상세히 정수(定數)를 구획하면 또한 쉽게 옮겨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진청(賑廳)과 균청을 한 청으로 만들면, 진청의 쌀을 옮겨서 통용하게 하고, 이봉조(移捧條)를 숫자에 준거하여 서로 알리게 하면 일이 매우 편의할 것이니, 청컨대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고, 삼남의 쌀은 수시로 더 획정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영(禁營)은 이미 나누어 설치하였으므로 나라의 큰 일은 거의 다 수거(修擧)되었으나, 오히려 근심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시노비(寺奴婢)이다."
하자, 박문수가 말하기를,
"성념(聖念)이 여기에 미치신 것은 참으로 영구한 역년(歷年)을 비는 방도이지만, 좋은 방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물러갈 무렵에 아뢰기를,
"신이 마음속으로 슬프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어찌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박지문(朴趾文)·권서경(權敍經)이 참으로 억울한 것이 있는데도 풀지 못하였다면, 또한 화기(和氣)를 감상(感傷)할 만한 일입니다. 원경하(元景夏)도 일찍이 권서경이 가장 억울하고 박지문이 그 다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신은 박지문이 더욱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이때 여러 죄인들의 자녀가 능행(陵幸) 때에 상언(上言)하였으므로, 박문수가 말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대신과 금오 당상에게 명하여 상언과 추안(推案)을 가지고 등대(登對)하게 하였는데, 박지문·이정(李檉)은 모두 직첩(職牒)을 도로 주라고 명하고, 권서경·오상억(吳尙億)·심상관(沈尙觀)·심종연(沈宗衍)도 신설(伸雪)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등이, 이정 등이 범한 것은 의심스러운 형적이 있고 벗어날 만한 증거가 없다 하여 다시 어렵게 여겼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정원에서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격앙된 사교(辭敎)가 많았다고 진계(陳戒)하니, 대조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또 욕심을 적게 하고 병을 삼갈 것을 진계하니, 소조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김양택(金陽澤)을 승지로, 박필원(朴弼遠)을 정언으로, 심발(沈墢)을 사은 서장관으로 삼았다.

 

보양관(輔養官) 남유용(南有容)이 상서하여 사직하니, 예사 답을 내렸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천둥의 이변 때문에 대조에게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되기를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상서하여 체직을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10월 30일 을해

형조에서 정배 죄인(定配罪人)으로서 달아나 경중(京中)에 돌아온 무리를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하고 지방관은 추고하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특별히 중추(重推)하게 하였다.

 

간원에서 전달(前達)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안집(安𠍱)이 천둥의 이변 때문에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주자(朱子)가 당시의 재상(宰相)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조정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비용을 매우 아끼는 것만 못하고, 명공(明公)이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이 자신을 몹시 사랑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신도 오늘날의 조정에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이 과연 자신을 사랑하고 비용을 아끼는 것보다 간절한지 모르겠습니다. 대궐이 얼마나 지극히 엄한 곳인데, 아뢰는 말이 혹 버릇없어 자못 삼가고 공경함이 모자라며, 주사(籌司)177)                  의 우모(訏謨)가 성실하고 부지런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방백(方伯)과 고을에서는 겉치레처럼 보고 있으며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워 다스리는 정사에 있어서 성심(聖心)은 극진할지라도 과연 편당이 죄다 없어졌는지 모르겠으며, 어사의 행차가 염찰을 계속하지만 또한 탐오가 징계되어 두려워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기강이 서지 않은 탓입니다. 지금 급선무는 크게 분발하여 기강을 진작시키는 것보다 앞세울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예사 답을 내렸다.

 

임금이 대신을 소견하였다. 말이 병조의 절목(節目)에 미쳐 하교하기를,
"병판의 권세가 이제는 더욱이 중하여졌다."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병판이 처음에는 오군문(五軍門)과 서로 대등하였으나, 절목이 이루어진 뒤에는 사체(事體)가 매우 중하여졌으므로 각영(各營)에 행관(行關)하고 절제(節制)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군문에서 병조에 첩정(牒呈)178)  하지 않는가?"
하였는데, 이천보가 말하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일찍이 오군문에서 병판에게 해서(楷書)로 첩정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듣건대, 첩정이 아니라 행관한다 하니, 매우 체통에 어그러진다. 이 뒤로는 각영에서는 첩정하고 병조에서는 행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춘방에서 바친 고사를 보고 누가 지은 것인지를 물었는데, 사서 임희교(任希敎)가 말하기를,
"서명응(徐命膺)·이게(李垍)가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세자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말이 매우 좋은데, 너는 어찌하여 은혜를 베풀지 않는가?"
하고, 특별히 서명응에게 겸사서(兼司書)를 제수하고 이게에게 아울러 표리(表裏) 1습(襲)을 내렸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시좌(侍坐)하게 하고, 수찬 조엄(趙曮)·부수찬 윤동성(尹東星)을 불러 실솔장(蟋蟀章)179)  을 강하였다. 조엄이 말하기를,
"신에게 마음에 잊혀지지 않는 염려가 있는데, 여러 번 연석(筵席)에 등대하면서 끝내 한번 아뢰지 않는다면 살아서는 전하를 저버리고 죽어서는 선신(先臣)을 저버리는 것이니,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술과 여색(女色)은 사람을 죽이는 도끼이니, 젊은 자도 경계해야 하는데 더구나 노인이겠습니까? 내주방(內酒房)을 폐지하지 않으면 전하께서 맛 좋은 것을 꺼리는 덕에 부끄러울 것입니다. 후궁의 봉작이 혹 노쇠하신 뒤에 있다면 전하께서는 또한 여색에 대한 경계에 부족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정성으로 감히 이 두 자[酒色]를 우러러 권면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이 이런 말을 하니, 참으로 가상하게 여긴다.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원량이 바야흐로 시좌하였는데, 또한 풍자하는 뜻이 있으니, 참으로 그 아비의 아들이다. 유신은 바야흐로 젊으니, 모쪼록 뜻을 거스르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자주 이것을 원량에게 면계(勉戒)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자주 술잔을 들고 내총(內寵)도 대단하였는데, 조엄이 남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능히 말하였으므로, 여론이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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