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병자
죄인 신필회(申弼晦)·김중기(金重器)·이두삼(李斗三)·김취보(金就寶) 등의 아들과 손자를 정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박지문(朴趾文) 등을 신설(伸雪)하고 나서 하교하기를,
"신필회는 이미 이인좌(李麟佐)의 공초(供招)에 들어 있었는데, 그때 참작하여 처분한 것만도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김중기의 마음은 길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고, 이두삼은 역적의 관문(關文)을 베껴서 신보(申報)하였으므로 이미 정법(正法)하였는데, 그 아들과 손자가 어찌 감히 원통함을 호소할 수 있겠는가? 김취보의 아들도 어찌 감히 등문(登聞)할 수 있는가? 시행하지 않는 데 그칠 수 없으니, 모두 정배하여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여러 죄인의 아들과 손자가 모두 상서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수일 뒤에 임금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불러 묻기를,
"박지문 등을 신리(伸理)한 뒤에 신필회 등의 자손을 정배한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하자, 이천보가 말하기를,
"박지문 등의 일은 제방이 엄하고 역안(逆案)이 중한데 신들이 참으로 경솔하게 봉행한 잘못이 있습니다마는, 다른 죄인의 자손을 정배하신 처분에 이르러서는 지나쳤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는 아비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여도 정배한 일이 없었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억울한 것이 있으면 원통한 것을 풀어 주는 것이 왕자(王者)의 도리이나 제방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일전에 여러 죄인의 아들과 손자로서 상언한 자를 모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는데, 다시 생각하니 왕년에는 이런 일이 있더라도 시행하지 말도록 명하였을 뿐이고 자제(子弟)가 되는 자에게 죄준 적이 없었다. 이제 성전(盛典)을 준봉(遵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정배하지 말게 하고, 이 뒤에 외람된 자가 있으면 정원에서 곧바로 청하여 유사(攸司)에 내려서 엄히 처결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안집(安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대조께서 간밤에 전교하신 것을 삼가 보건대, 박지문(朴趾文)·이정(李檉)은 직첩(職牒)을 도로 주고, 권서경(權敍經)·오상억(吳尙億)·심상관(沈尙觀)·심종연(沈宗衍)은 특별히 신설(伸雪)하라고 명하셨으니, 신은 지극히 놀랍고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옥안(獄案)을 신이 보지 못하여 초사(抄辭)가 어떠한지 상세히 알지는 못하나, 오히려 죄적(罪籍)에 있으니 그 범한 것이 무겁다는 것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천지의 지인(至仁)으로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이 없어서 이러한 특교가 있었다 하나, 무장(無將)180) 의 주벌(誅罰)과 주심(誅心)181) 의 법이 모두 《춘추》에 실려 있는데, 지극히 엄하게 하지 않으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 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 무릇 무신년182) 의 흉역에 관계되고도 그 여얼이 오히려 목을 보전한 것은 성은이 아님이 없었으니 그들에게는 크게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세월이 오래 되었음을 믿고 꾸며서 말을 만들어 연로(輦路)와 대궐에서 격고(擊鼓)하여 번거롭게 어지럽히니, 신은 아마도 이러한데도 버려두면 유종(遺種)과 여추(餘醜)가 뒤를 이어 상언하여 장차 분운(紛紜)함을 금하지 못하게 될 듯합니다. 대조께 여쭈어 직첩을 도로 주고 신설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일이 역안(逆案)에 관계되었는데도 상언하는 자는 엄히 금단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충청도의 유생 박한소(朴漢蕭)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원도 강릉 등 고을에서 범에게 물려 죽은 자가 81명이었는데, 모두 휼전을 거행하였다.
11월 2일 정축
사학 유생 서집수(徐集修)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주현(州縣)에서 꼴[芻]을 쌓아 두는 것은 법을 세운 뜻이 있는데, 근래에 수령들이 전혀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각별히 신칙하여 해마다 비국에 상황을 신보(申報)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교리 심수(沈鏽)·부수찬 윤동성(尹東星)을 불러 《시전(詩傳)》을 강하였다. 심숙 등이 제방(隄防)이 점점 무너진다 하여 박지문(朴趾文) 등을 신설(伸雪)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분은 억울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풀어 주어야 한다는 뜻에서 나왔으나, 유신이 아뢴 것은 옳다."
하였다.
한성부에서 상달하기를,
"서부(西部) 대현(大峴)에 사는 사인(士人) 심해보(沈海普)의 집에 도둑의 무리 5, 6인이 막대기를 들고 불쑥 들어와 창틀의 사슬을 부수고 큰소리로 을러대며 방안에 둔 것을 모두 훔쳐 갔습니다.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도둑의 무리가 이처럼 방자한 짓을 하니, 포청에 엄중히 신칙하여 반드시 염탐하여 잡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3일 무인
봉상시 봉사 양우항(梁禹恒), 급제(及第) 김봉저(金鳳著), 학유(學諭) 강현(康現), 생원 김서욱(金瑞郁)·김현서(金現瑞)·박동즙(金東楫)이 상서하기를,
"저희들의 선사(先師) 이승운(李升運)은 평안도 정주(定州) 사람으로서 학식과 문재(文才)를 천성으로 타고났으므로, 많은 책을 보고 기억력이 좋아서 고향에서 대유(大儒)라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신들이 일찍이 인도받아서 대과(大科)에 오른 자가 세 사람이고 소과(小科)에 오른 자가 세 사람이나 됩니다. 청컨대 국조(國朝)의 전헌(典憲)에 의거하여 전례를 상고하여 은혜를 베푸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11월 4일 기묘
함경도의 유생 손영조(孫榮祖)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남태혁(南泰赫)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재변(災變)을 당하여 수성(修省)하는 도리는 실속으로 하고 겉치레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소장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그 가운데에 혹 급한 데 따라 책임만 면하려는 말도 있으나, 또한 어찌 채택할 만한 말이 하나도 없겠습니까마는, 칭찬하여 장려하겠다는 말씀을 내릴 뿐이고 끝내 시조(施措)하는 실속이 없습니다. 신이 보건대, 명나라 만력(萬曆) 때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는 즉위한 지 오래 되어 뭇 신하들의 진정과 허위를 익히 알았기 때문에 번번이 대성(臺省)에서 조목조목 아뢸 때마다 문득 말하기를, ‘이것은 겉치레이다.’ 하고 덮어두므로, 각신(閣臣) 송훈(宋纁)이 수심에 잠겨 근심하여 말하기를, ‘언관(言官)의 극론(極論)은 바로 주상의 동심(動心)을 요구하는 것인데 일체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비유컨대 수족이 마비된 사람이 아프고 가려운 데가 전혀 없으면 고칠 만한 약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쇠란(衰亂)이 실로 신종 황제 때에 비롯되었습니다. 신이 《명사(明史)》를 읽다가 여기에 이를 때마다 일찍이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불행히도 근일의 시사(時事)가 만력 때와 같으니, 송훈이 근심하던 것을 신 또한 근심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사람에 따라 그 말을 버리지 말고 두려워하여 분발하셔서 속담 가운데에서도 반드시 채용할 만한 것을 찾아서 쓰소서. 그러면 언자(言者)를 권장할 수 있고 시사를 조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기호(畿湖)의 흉년이 거의 지난해보다 심한데, 묘당의 의논은 일찍이 근심하지 않은 채 연분(年分)183) 과 비총(比摠)184) 이 거의 대풍인 해와 같고, 묵은 환곡(還穀)을 징납(徵納)하는 데 대해 바야흐로 사목(事目)을 반포한 것이 있어서 주리(州里)가 소요하여 마치 조석(朝夕)을 보전하지 못하는 듯하니, 신은 그윽이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빨리 묘당의 신하에게 물어서 빨리 변통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재이(災異) 때문에 진계(陳戒)하기를,
"저하(邸下)께서 대조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조께서 책망하시는 하교에 혹 지나친 것이 있더라도 이는 지극히 사랑하여 매우 기대하시는 성의(聖意)이니, 저하께서는 모쪼록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을 잊지 않은 후에야 온갖 일이 다 해이해지지 않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어떤 일로 말미암아 여러 신하들이 입시하였을 때에 세자를 매우 꾸짖었으므로, 이천보가 이 일을 거론하여 진면(陳勉)한 것이었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이어서 말하기를,
"저하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침착하고 말이 적으십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자주 인접하여 사색(辭色)을 보여 위아래의 뜻이 서로 통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가납하였다. 이천보가 또 말하기를,
"전 함경 감사 윤득재(尹得載)가 말하기를, ‘본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치성한 까닭에 회령(會寧)·경원(慶源)에서 청나라 차원(差員)이 개시(開市)할 때에 농우(農牛)를 매매하던 것을 금단하도록 장청(狀請)하였으나, 피인(彼人)들은 개시 때 오로지 소를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한결같이 엄히 막으면 혹 말썽을 일으킬까 염려되며, 근일에 우역도 자못 그쳤다.’고 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조금 팔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본조에서 비록 형옥(刑獄)을 관장하나 경외(京外)의 공천(公賤)과 사천(私賤)도 아울러 관장하므로, 번번이 식년(式年)을 당하여 각 고을에서 노비를 추쇄(推刷)한 뒤에 으레 본조에 속안(續案)을 보내면, 본조에서 마준(磨準)하여 장례원(掌隷院)과 호조에 나누어 보내었는데, 접때 영남 이정사(嶺南釐正使) 이성중(李成中)이 서계(書啓)하여 고을의 폐해가 있다고 함에 따라 옛 규례를 영구히 폐지하여 공천의 생사와 증감을 살펴 알아낼 길이 없어졌습니다. 옛 규례를 도로 회복하고, 대신의 말에 따라 각도의 감영(監營)에서 속안을 거두어 모아 곧바로 형조에 보내게 하여 고을에서 고쳐 바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접때 경용(經用)이 모자라서 대조께 여쭈어 해서(海西)의 상정 전미(詳定田米) 2천 석을 윤허받았는데, 혜청 당상 홍봉한(洪鳳漢)이 경청(京廳)의 전미를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대조께서 경청에 저축된 것이 수량이 차지 않았으면, 소조에게 품의하여 다시 해서의 쌀을 청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이번에 혜청에서 보낸 것은 3백 석뿐이니, 청컨대 대조께서 하교하신 대로 해서의 쌀 1천 7백 석을 가져다 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교리 심수(沈鏽)·부수찬 윤동성(尹東星)을 소견하여 《시경》의 조풍(曹風)을 강하였다. 윤동성이 말하기를,
"신에게 하치않은 생각이 있는데 감히 아뢰겠습니다. 곤장은 본래 군중(軍中)에서 쓰는 형벌이고 조정에서 시행하는 것이 아닌데, 요즈음 곤장을 쓰는 것이 매우 지나칩니다. 접때 황합(黃柙)의 일은 크게 지나친 거조이었습니다. 이조 낭청에 이르러서는 또한 기랑(騎郞)과 차이가 있는데, 접때 잡아들인 뒤에 다행히 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듣건대, 접때 무사(武士)에게 상줄 때에 거행을 조금 지체시켰다 하여 전하께서 편전에 앉아 중관(中官)을 시켜 명을 전하여 호조 낭청을 잡아들이게 하셨다 하니, 이것이 어찌 전좌(殿座) 때와 더욱 다르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은 동궁이 본받는 것인데, 동궁이 이러한 일을 익히 보고 한때 노한 김에 환관(宦官)을 보내고 그 자리에 임하여 조사(朝士)를 결곤(決棍)한다면, 어찌 한없는 폐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국가에서 조사를 대우하는 것은 예교(禮敎)로 어거하고 염치로 길러야 마땅하며, 곤장으로 제어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원컨대 깊이 경계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것이 참으로 옳다. 이제부터 내가 더 힘쓰겠다."
하였다. 수일 뒤에 동가(動駕)할 때 기랑 여선형(呂善亨)이 금훤(禁暄)을 잘못하였다 하여 하교하기를,
"이들이 윤동성을 믿고 더욱 교만해졌다."
하고, 이어서 윤동성을 체직(遞職)시키고 여선형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빛을 보일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그 명을 거두었다.
11월 6일 신사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전배(展拜)하였다. 돌아오려 할 때에 궁문(宮門)에서 연(輦)을 멈추고 하교하기를,
"옛말에 ‘나무는 고요하려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하였는데, 나무는 고요할 수 있으나 어버이를 받드는 일은 할 수 없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머금고 기회문(記懷文)을 지었다.
승지를 보내어 문묘(文廟)를 봉심(奉審)하고, 태학 유생과 사학 유생의 도기(到記)185) 를 거두어 오게 하였는데, 이어서 전강(殿講)과 제술(製述)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강(講)에서 으뜸을 차지한 김용한(金龍翰)·강한(姜翰)과 제술에서 으뜸을 차지한 변득양(邊得讓)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바야흐로 지금은 국사(國事)·시간(時艱)·조정(朝政)·민우(民憂)에 믿을 만한 일이 하나도 없고 병들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어서 이루 다 가리켜 아뢸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 가운데에서 긴급한 데에 대하여 그렇게 된 까닭을 찾아 보면 또한 말할 만한 것이 없지도 않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타고나신 예지(睿智)에 만물을 홀로 어거하는 총명이 있는데, 무릇 하위에 있는 뭇 신하들은 그 정신과 식려(識慮)가 성상의 뜻에 맞을 만한 자가 없으므로, 성심(聖心)이 향하는 바에 대하여 신하들이 봉승(奉承)하는 바는 있어도 복난(覆難)하는 바는 없습니다. 경장(更張)하는 것이 국체(國體)에 관계되고 변통하는 것이 구전(舊典)에 관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번 선입(先入)이 있으면 다시 가부를 의논함이 없이 당장 폐지하고 시행하여 일찍이 망설이신 적이 없습니다. 대저 반드시 변통해야 할 일이 있고 마땅히 고쳐야 할 법이 있으면, 여러 가지 논의를 수용하여 그 중에서 이익이 많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또한 어찌 용감하게 홀로 결단하는 것보다 해롭겠습니까?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온 조정이 서로 경계하고 입을 다물어 말하는 것을 꺼리고, 반드시 성상의 마음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핑계하며, 처분이 마땅하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알아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이 이러하고 두 가지 일이 이러하였는데, 근일에는 문득 뭇 신하들이 작록(爵祿)을 보전하는 방편으로 삼는 방법이 되어 나라의 일이 날로 더욱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 달쯤 전에 삼영(三營)을 처분하신 일을 가지고 시험삼아 말해 보면, 세 대장을 차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번국(翻局)하는 때가 아니고 병란(兵亂)이 일어난 때와 다른데도 한밤에 연석(筵席)에서 천망(薦望)을 거치지 않은 채 한꺼번에 특별히 제수하여 시조(施措)가 갑작스럽고 온화한 모습이 부족하였으므로, 군교(軍校)가 부산하여 온 성안이 들끓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성세(聖世)의 기상(氣象)이 아니거니와 또한 어찌 임금의 덕에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신처럼 대신의 자리에 있는 자도 묵형(墨刑)을 두려워하지 않고 곧 말하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들은 알 만합니다. 오늘날의 막대한 폐단은 언로(言路)가 막힌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이 때문에 격양(激揚)하는 의리는 행해지지 않고 시비의 갈래는 분별이 없으며, 염치는 사라져 가고 조경(躁競)이 풍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과거(科擧)는 인재를 얻고 잃는 데에 관계되는데 세력으로 차지하는 자가 있어도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관직은 국가의 공물(公物)인데 이따금 팔아먹는 자가 있어도 일찍이 논박하여 바로잡는 일을 피하여, 부의(浮議)의 형세는 치성해지고 정론(正論)은 날로 쇠퇴해지며 와언(訛言)을 교묘하게 꾸미어 조정의 기상이 크게 어그러져서 백성의 고혈(膏血)이 이미 마르고 국본(國本)이 여지없이 위태로워지고 있으니, 위망(危亡)의 형편이 조석(朝夕)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무릇 천하 국가의 명맥과 본령(本領)이 되는 것이 모두 깨지고 산산조각이 나서 완전히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고 충성스러운 뜻을 가진 자가 마음 아프게 여겨 근심한 지 진실로 이미 오래 되었으나, 전하 앞에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 사람들이 모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고자 해서 그런 것이겠으며, 또한 어찌 전하께서 금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그 근본을 구명해 보면 이것은 거의 전하께서 일을 막으려는 생각을 지나치게 갖고 착한 말을 오게 하는 길을 넓히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혹 한때 일을 성취하였다 하여 그 폐단이 위아래가 서로 속여서 경계하는 바가 입을 다무는 데 있게 되었음을 아주 알지 못한 것이니, 오늘날 조정의 허다한 병폐는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인심·세도(世道)·기강·풍속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그 나라가 오래 편안할 수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조용히 심사 숙고하시고 공경히 먼 앞일을 살펴보시어 시행하는 처음에 널리 자문하셔서 충직하고 이로운 의논을 받아들이시고, 거조(擧措)할 때에 반드시 황급히 하는 것을 경계하셔서 신중히 하는 뜻을 간직하도록 힘쓰소서. 귀근(貴近)의 말이라 하여 혹 성지(聖志)를 바꾸지 마시고, 소원(疎遠)한 자의 말이라 하여 공평하게 듣기를 소홀히 하지 마시며, 전장(典章)을 지켜서 변경을 어렵게 하시고, 온화하고 고요한 자를 장려하시어 말 잘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시며, 재물이 국가에 모이면 백성이 흩어진다는 교훈을 깊이 생각하시고, 성문 언로(城門言路)의 경계를 잘 생각하시어 하늘에 응답하고 재이(災異)를 사라지게 하는 근본으로 삼으신다면, 우리 나라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대저 언로가 열리고 막히는 것은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데에 관계되므로, 신이 전에 전장(銓長)으로서 입대(入對)하였을 때에 누누이 우러러 아뢰었고 올 가을의 연대(筵對) 때에도 다시 제기하여 아뢰었는데, 이제 또 반복하여 그치지 않는 것은 대개 구구한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입니다. 참으로 임금은 구중(九重)에 깊이 거처하여 함께 나라의 일을 꾀하고 의논할 자는 공경(公卿)으로서 보필하는 신하 밖에 없으므로, 그 직임은 전일(專一)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직위는 존중(尊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전일한 것과 존중한 것이 합쳐지면, 일과 권세를 나누지 않을 수 없고 시비를 엄하게 가리지 않을 수 없으니, 그래서 대여섯 선비를 대각(臺閣)에 두어 탄핵하고 규정(糾正)하는 직임을 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법의(法意)가 깊고 원대한 것을 알 수 있는데, 불행히도 근년 이래로 대신(臺臣)인 자가 점점 그 직무를 그르쳐서 하는 짓이 느른하여 이미 임금이 경시(輕視)하게 하였고, 게다가 각각 색목(色目)이 있어서 마음에 지닌 것이 없지 않아 또 당습(黨習)을 의심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뭇 신하들의 죄입니다마는, 정성된 말과 곧은 말을 가리지 않은 채 전혀 너그럽게 용납함이 없이 한결같이 기를 꺾으시는 것도 대성인(大聖人)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도리에 흠결이 있는 것입니다. 오연 봉황(烏鳶鳳凰)186) 으로 예전에도 비유한 것이 있습니다마는, 먼 뒷날을 생각하여 성상께서는 깊이 유념하시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아! 무신년187) 의 반역은 천지(天地)의 대변(大變)이므로, 무릇 이 옥사(獄事)에 관련된 자는 진실로 마땅히 엄하게 제방(隄防)을 세워야 거의 악을 징계할 수 있을 것인데, 다만 세월이 점점 오래 되어 사실이 흐려졌기 때문에 죄를 받아 죽은 집에서 거짓으로 꾸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서로 어지럽게 잇따르고 있습니다. 국가에는 기강이 있는 바 참으로 놀랍고 마음이 아픈데, 전하께서 지나치게 인자하여 가볍게 용서하시므로, 이 길이 한 번 열리자, 사람들이 모두 요행을 바라게 되어 역적의 집 처자가 분주히 호소하며 요로를 찾아 다니고, 연신(筵臣)은 각각 그 사사로운 인연 때문에 신리(伸理)하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이미 매우 무엄한 일인데, 유내(柳徠)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대저 유내가 신설(伸雪)될 긴요한 증거는 오로지 고 판서 신(臣) 박사수(朴師洙)가 종사관(從事官)으로 데리고 갔던 일에 있었고, 효유문(曉諭文)이 엄정(嚴正)하다는 것과 사서(私書)에 비분(悲憤)한 말이 있었다는 것과 언의(言議)의 변(變)이라는 세 가지도 그 참작한 증거가 되었는데, 신이 일찍이 가정에서 명백하게 참여하여 들었으므로 아직도 그 전말을 기억하고 있으니, 대개 박사수가 안무사(按撫使)가 되어 영남으로 갈 때에 신의 아비가 박사수에게 말하기를, ‘이번 역모에는 민암(閔黯)의 족속이 죄다 참여하였으니 유명현(柳命賢)의 아들이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또 듣건대, 유내는 문사(文詞)와 재지(才智)로 그들에게 중망(重望)을 받고 있고 재산이 매우 많다 하니, 반드시 그 역모의 와주(窩主)가 되었을 것인데, 여러 겹 안에 있어서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수어청(守禦廳)의 장교를 시켜 염탐하게 하였더니 행동이 매우 수상하였다. 아직 진장(眞贓)을 잡지 못하였으므로 미리 다스리기 어려운데, 위태로운 이때에 영남의 막비(幕裨)로 데려가서 서울을 떠나게 하면 잘 처치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고 상신 송인명도 이 계책이 참으로 좋다고 하여 중신(重臣)이 과연 데려갔었습니다. 신의 아비가 또 박사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비록 데려가더라도 이 사람은 마침내 실패하게 될 것이므로 오래 일을 같이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는데, 영남으로 간 뒤에 유내는 과연 이인좌(李麟佐)의 아내 자정(紫貞)의 공초에 나왔으므로, 잡혀서 장폐(杖斃)되었으니, 대개 그 공초는 매우 명백하여 그 무리가 미워하여 무함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중신이 데려간 개략(槪略)과 자정의 초사는 《감란록(勘亂錄)》에 분명하게 있으므로 지금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효휴문이 엄정한 것은 그때에 그가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또 어찌 주장이 지휘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사서(私書)는 이미 관문서(官文書)가 아니므로 준거(準據)하여 믿기 어렵고, 또 대란(大亂) 뒤에 경외(京外)의 길에는 기찰(譏察)이 두루 찼으므로 혹 사서(私書)일지라도 감히 흉악한 말을 하고 스스로 진장을 드러낼 수는 없었을 듯하니, 그 비분한 말은 거짓 꾸민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의의 변이라는 것은 그가 유명현의 아들이므로 이미 상리(常理)에 어그러지고, 또 공공(公共)의 분명한 증거가 될 글이 없으니, 어찌 이것으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오광운(吳光運)·홍경보(洪景輔)가 천거한 사람이라는데 이르러서는 이미 사실과 다르니, 유내가 죽은 뒤에 박사수가 매우 불쌍히 여겨 한 번 연석(筵席)에서 아뢰려 하였다는 것도 소문이 잘못된 것입니다. 신의 아비가 죽은 뒤에 신이 박사수를 만나 안부를 물었더니, ‘평소에 성질이 조급하고 화가 많아서 본디 잘 자지 못하였는데, 안무사로 갈 때에 경계하는 마음이 많이 있고, 유내처럼 요악(妖惡)한 자를 선상공(先相公)의 권유로 가까이 막속(幕屬)에 두고 천리를 동행하므로,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더욱 잠을 잃었다. 따라서 병근(病根)이 되어 근일에는 더욱 심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당초부터 그가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고, 홍의(紅衣)를 입은 자가 영남에 왔다는 말을 듣게 되어서는 마음속으로 이미 알았는데, 유내가 과연 잡혀갔으니, 응당 들어가야 할 사람은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하고, 이어서 그 상모(狀貌)·색사(色辭)가 요악한 것을 말하며 조금도 불쌍하게 여기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있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반복하여 추구해 보아도 끝내 신설할 만한 단서가 없는데, 요상(僚相)·중신이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이 일의 곡절을 잘 모르는 탓일 듯합니다. 신은 유내를 신리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그대로 역안(逆案)에 두어 제방(隄防)을 엄하게 하고, 전후의 말하지 않은 대신(臺臣)은 모두 직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일체로 삭직(削職)하여 경계하여 신칙하는 뜻을 보이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차자가 들어가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읽게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에게 말하기를,
"이 차자를 보았는가?"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들었습니다. 세 대장을 바꾼 것은 신도 그것이 갑작스러운 일인 줄 알았는데, 일의 단서가 이미 나타났으니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내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 이른바 언의의 변이니 사서의 말이니 하는 것에 믿을 만한 것이 없지 않으므로, 접때 하문하심에 따라 신리를 윤허받았으나, 우상의 말이 이러하니 신은 참으로 불안합니다."
하였다. 수찬 조엄(趙曮)이 말하기를,
"역안이 얼마나 관계가 중대한 것인데 전하께서 신설을 가벼이 윤허하셨겠습니까마는, 이제 정승의 차자를 보면 그 가정에서 들은 것이 확실히 있으므로 말한 것이 이러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곧 도로 거두시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을 지키는 자의 말은 마땅히 이러하여야 한다."
하고, 《감란록》을 들여오라고 명하여 자정의 초사를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공초는 과연 분명하다."
하고, 이어서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대사간 안집(安𠍱)이 상서하여 대조께 여쭈어 유내(柳徠)를 신설하라는 전지(前旨)를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11월 8일 계미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잇달아 차자를 올려 자송(自訟)하였는데, 우상이 논한 유내의 일 때문이었다.
11월 10일 을유
충청도 유생 황만심(黃萬鈊)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聖廡)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이승해(李昇海) 등이 한 사람만을 거론한 잘못을 배척하기를,
"저들이 스스로 송시열을 높이고 송준길을 업신여긴다고 한 것은 특별히 주자(朱子)가 이른바 ‘성인은 앞에서 몸을 굽히고 사양하여 피하는데 오당(吾黨)은 뒤에서 팔을 걷어 올리고 떨쳐 일어난다’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11월 11일 병술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고, 이어서 기강을 진작시키고 기욕(嗜慾)을 절제하기를 권면하였는데, 왕세자가 부드럽게 유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13일 무자
하교하기를,
"이제 북백(北伯)의 신본(申本)을 보니, 교제창(交濟倉)의 원곡(元穀) 32만 석 가운데 받아들이지 못한 수가 14만 석에 이를 정도로 많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백성에게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면 혹 용서할 수 있겠으나, 이미 굶주린 백성에게서는 받아들여 교활한 관리(官吏)의 주머니로 사라진 것이라면 더욱 어찌 놀랍고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더 엄히 살펴서 거듭 아뢰고 무겁게 다스리게 하라. 아! 동남(東南)의 곡식이 토의(土宜)라고는 하나 바로 우리 백성의 고혈(膏血)인데, 곡식을 나를 때에 민폐가 더욱 많고 이따금 싣고 가던 배가 가라앉기도 하니, 비록 북민(北民)은 살릴지라도 물에 빠져 죽는 남민(南民)은 과연 무슨 죄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내가 아픈 것 같다. 아! 그 어려움이 이러한데, 또 따라서 교활한 관리의 손에서 사라진다면 어찌 장차 북민을 구제하겠으며 남민에게 너그러울 수 있겠는가? 나에게 어사가 있지만, 수령이 금령(禁令)을 범하였을 경우 도신이 혹 신칙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법이 있는데 어찌 감히 피할 수 있겠는가? 비국은 이러한 뜻으로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고 하교(下敎)의 한 본(本)을 정원에서 써서 원량에게 들여보내어 농사의 어려움을 미리 알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사람들이 늘 하는 말이 반드시 을해년188) 을 일컫고 있는데, 내년에 혹 큰 흉년이 든다면 어떻게 백성을 살리겠는가? 아! 여러 신하들은 각각 근본에 힘쓰라."
하였다.
11월 16일 신묘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목성(木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11월 17일 임진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유생에게 황감(黃柑)을 나누어 주고 이어서 시취(試取)하였는데, 으뜸을 차지한 윤광국(尹光國)과 그 다음인 남현로(南玄老)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보양관(輔養官) 남유용(南有容)에게 묻기를,
"상견례 때에 원손이 절차를 이루었는가?"
하니, 남유용이 말하기를,
"낯설어하지 않고 무릎을 모으고 절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손은 보양관을 얻었으니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남학종(南鶴宗)이 상서하여 국옥 때에 장폐(杖斃)된 사람을 신설(伸雪)하라고 전후에 내린 명을 모두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18일 계사
총융사 홍봉한(洪鳳漢)이 명을 받고 가서 임진(臨津)의 형편을 살폈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와 아뢰기를,
"임진부터 위로 3, 40리는 다 4, 5장(丈)의 적벽(赤壁)이고, 아래도 또한 사방이 막혀서 염려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마는, 내소정(來蘇亭) 근처에 얕은 여울이 있어 옛 장릉(長陵)으로 통하는 길에 막힌 데가 없으므로 이 곳이 허술합니다. 내소정의 얕은 여울부터 장산(長山)까지 모두 7리가 되는 곳에 토성(土城)을 쌓아 막고, 인하여 방수 별장(防戍別將)을 두거나 파주(坡州)의 읍치(邑治)를 옮겨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임진 좌우의 석벽(石壁) 사이에 홍예 석문(虹霓石門)을 설치하는 것도 국위(國威)를 견고하게 하는 방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금위 대장 구선행(具善行)에게 명하여 다시 가서 살피게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아뢰기를,
"영유(永柔)에 있는 와룡사(臥龍祠)에 악무목(岳武穆)189) 을 배향하였는데, 일찍이 비(碑)를 세우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서백(西伯) 이태중(李台重)이 바야흐로 돌을 다듬고서 기다린다 하니, 청컨대 비문(碑文)을 병조 참판 남유용(南有容)으로 하여금 지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북한(北漢)의 환곡(還穀)의 모곡(耗穀)에서 3분의 1을 감면하되, 받아서 본읍(本邑)에 두는 것은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산성(山城)으로 운반하는 노고를 불쌍히 여긴 것이었다.
11월 19일 갑오
임금이 유신을 불러 《시경》 칠월장(七月章)을 강독하였다.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아! 일양(一陽)은 이미 생기고 이양(二陽)이 가까워 오고 있으니, 아! 백성도 시후(時候)를 따라 양기(陽氣)를 회복할 것이다. 어원(御苑)에서 관경(觀耕)했을 때에 일찍이 칠월장을 강하였는데, 이제 양월(陽月)에 또 이 편(篇)을 강독하게 되었다. 왕자(王者)의 강학(講學)은 필서(匹庶)와 다른 것이니, 몸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소강(召講)하는 뜻이겠는가? 승국(勝國) 때에 고황제(高皇帝)가 고려 사신에게 말하기를, ‘왕이 백성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왕자(王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동사(東史)를 보았는데, 지금도 흠송(欽誦)하고 있다. 아! 이제 어떻게 힘쓸 것인가? 다른 것이 없다. 하나는 삼가 힘써서 직무에 종사하여 혹시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고, 하나는 조정에서 공경하고 화합하여 나라의 일에 전심하는 것이고, 하나는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마땅한 사람을 가려서 백성이 그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이고, 하나는 청렴한 자를 장려하고 탐욕한 자를 징계하여 기강을 세우는 것이고, 하나는 사치를 없애고 절약하여 써서 저축을 넓히는 것이고, 하나는 각도에 칙유(飭諭)하여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게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삼가 힘쓸 것을 말하느냐 하면, 온갖 관원이 게으른 것이 힘쓰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고, 기강이 서지 않는 것도 힘쓰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고, 외방(外方)이 해이한 것도 힘쓰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공경하고 화합할 것을 말하느냐 하면, 공경하고 화합한 후에야 정신을 모아 함께 조정에 설 수 있을 것인데, 동으로 남으로 갈라져 서로 비난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마땅한 사람을 가릴 것을 말하느냐 하면, 순(舜)임금은 십륙상(十六相)을 등용하여 모든 일을 확충하였고 한(漢)나라는 법을 지키고 선량한 관리를 임용하여 소강(小康)을 이룰 수 있었으니, 우리 3백 60고을이 다 마땅한 사람을 얻는다면 해동(海東)의 백성이 어찌 화평하고 만족한 즐거움이 없겠는가? 어찌하여 장려하고 징계할 것을 말하느냐 하면, 즉묵 대부(卽墨大夫)를 봉(封)하고 아 대부(阿大夫)를 팽형(烹刑)에 처하여190) 제(齊)나라가 매우 잘 다스려졌던 것이다. 청렴한 자를 장려하고 탐욕한 자를 징계하는 것은 왕정(王政)에 있어서 먼저 할 일이며, 이것이 바로 부자(夫子)가 이른바 곧은 자를 쓰고 굽은 자를 버린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절약하여 쓰는 것을 말하느냐 하면, 공성(孔聖)이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아낀다 하지 않았는가? 절약하여 쓰는 것은 곧 백성을 아끼는 근본이다. 그러나 먼저 사치를 없애지 않으면 어떻게 절약하여 쓸 수 있겠는가? 아! 사치한 버릇이 날로 번성하여 한 사람이 입으면 백 사람이 본받고, 한 사람이 먹으면 백 사람이 본받고 있다. 경사 대부(卿士大夫)는 날마다 사치를 일삼고 있지만, 빈한한 선비와 가난한 백성은 굶주림과 추위에 이기지 못하니, 내가 고계 광수(高髻廣袖)191) 를 하지 않기는 하나 실정(實政)을 행하였다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겠는가? 비록 신하에게 신칙하였으나,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어찌하여 농상을 권과할 것을 말하느냐 하면, 나라의 저축이 비는 것은 오로지 권과하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고 백성이 게으른 것도 권과하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제 칙려(飭勵)하는 데에 이것을 버려두고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아! 모든 신하들은 임금이 노쇠하였다 하지 말고 각각 면려하도록 하라. 아! 우리 원량은 내가 대리케 한 뜻을 본받아 반드시 먼저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이다. 아! 외방 고을의 굶주린 백성으로서 서울에 유리(流離)하는 자는 예전에도 있었으나 이 달은 여느 달과 다르니, 진청(賑廳)으로 하여금 양식을 주어 내려보내게 하고, 또 각 고을로 하여금 감히 예사로 보지 말고 우리 백성을 구제하게 하라."
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신하를 신칙하는 데에는 자수(自修)하는 것만한 것이 없고, 백성을 보전하는 데에는 재산을 절약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그 근본을 힘쓰지 않고 그 말단을 따른다면 겉치레의 작은 혜택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오히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우리 선왕(先王)께서 근심하고 힘쓰신 덕(德)은 5기(紀)가 하루 같아서 비록 옛 성왕(聖王)일지라도 이보다 더 할 수 없었을 듯하나, 그 요체를 얻지 못한 것을 걱정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번 윤음을 내릴 때마다 자칫하면 10장의 종이에 찬 글이 모두 간절하였으나, 몸소 행하여 마음에 터득하는 것은 아주 적었다. 굶주린 백성에게 양식을 주는 것에 이르러서는 은혜를 베푸는 정사의 하나로 해롭지 않으나, 이미 사람마다 구제할 수 없고 보면, 어찌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만하겠는가?
11월 20일 을미
예조에서 12월 초 7일이 중궁전(中宮殿)의 탄일(誕日)이므로 진하를 행해야 마땅하지만, 국기(國忌)의 재계(齋戒)가 3일 동안 잇달았다 하여 초 10일에 진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가 도로 거두었다. 여러 신하들이 힘껏 다투어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진하를 받지 않았는데, 더구나 곤전(坤殿)이겠는가?"
하였다.
11월 20일 을미
임금이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비국 당상 신만(申晩)·김상성(金尙星)·조영국(趙榮國)·홍봉한(洪鳳漢)·이철보(李喆輔) 등을 소견하였다. 이때 지평 조종부(趙宗溥)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지아비를 병들어 죽게 하였다 하여 상서하여 통렬하게 탄핵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 겨울은 봄처럼 따뜻하여 어두운 안개가 사방을 가리고 복숭아·오얏이 꽃피고 천둥과 무지개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양기(陽氣)가 미약한 조짐이 아님이 없으니, 아! 또한 이변입니다. 저 정승은 일을 시작한 처음부터 명환(名宦)을 차지하려고 꾀했다는 비방이 있었는데, 본말(本末)을 공평히 생각하면 백억(百億)이나 되는 화신(化身)으로서, 그 사람은 단지 용렬하고 허름한 한낱 겁쟁이일 뿐이고, 그 행실을 생각하면 이익을 좋아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한낱 비루한 남자에 지나지 않지만, 집안의 세력이 좋아서 지위가 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중서(中書)로 3년 동안에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도 볼 만한 것이 없었고, 말하는 것은 당여를 심고 권세를 파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당당한 성명(聖明)의 세상에서 어찌 한 어진 정승을 얻지 못할 것을 걱정하여 이러한 사람에게 한 나라의 중책을 맡기겠습니까? 백관이 더불어 수상으로 삼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여정(輿情)이 모두 근심하고 한탄하지 않음이 없으니, 빨리 그 벼슬을 고쳐서 각별히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가리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비록 한 가지 일로 말하더라도 여염의 강성(姜姓)을 가진 사람의 아내가 자색(姿色)으로 이름이 났는데, 그 지아비가 멀리 나간 것을 보고 부정한 방법으로 겁주어 데려다가 그대로 첩을 만들었습니다. 그 지아비가 억울함을 호소한다는 말을 듣고는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포장(捕將) 정찬술(鄭纘述)에게 분부하여 때려 죽이게 하였으나, 정찬술이 그 억울함을 알고 기꺼이 거행하지 않으니, 다른 일을 꾸며서 청하여 파직하였습니다. 정찬술을 대신한 자도 그 번거로움을 꺼려서 감히 결장(決杖)하지 못하고, 별간(別間)에 가두고 10여 일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을 견디지 못하여 흙을 긁고 자리를 씹어먹다가 짚을 물고 죽었습니다. 얼마 안 가서 포장이 앓아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 재앙을 받았다고 하고, 지난 여름에 크게 가무니 사람들이 다 원기(冤氣)가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 말은 천 사람이 같이 말하고 만 사람이 함께 전하는데, 신도 처음에 풍문을 듣고는 문득 ‘반드시 이럴 리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렇듯 분간하기 어려운 가운데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마는, 수년 동안 그 전파되는 것이 갈수록 더욱 낭자하여 안으로는 경기부터 밖으로는 팔방까지 어린아이나 주졸(走卒)들도 사람을 굶겨 죽인 정승이라고 말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미에 입동(入冬) 후에 말하지 않은 여러 대신(臺臣)들을 견책할 것과 유내(柳徠)를 신설(伸雪)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그 글을 가져다 보고 나서 도로 주라고 명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이 영상을 만나 보았더니, 대신(臺臣)의 말에는 과연 단서가 있으나 죽은 자는 강(姜)이 아니라 고(高)이고 이 고씨 성을 가진 사람은 곧 영상의 천첩(賤妾)의 친족이며 영상 집 종[婢]의 지아비라 합니다. 영상 집에서 제기(祭器) 따위를 잃었었는데, 고가를 지목한 까닭에 포청에 잡아 가두었더니 병 때문에 죽게 되었으며, 또 고가가 죽은 일은 정찬술이 대장으로 있었을 때에 있었으니 한번 사핵(査覈)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일이 대신에 관계되어 사핵하기 어렵다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가부를 물었다. 신만 등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사핵해야 합니다."
하고, 홍봉한은 말하기를,
"신도 일찍이 이 일을 듣고 영상에게 물었더니 영상이 가슴을 가리키며 하늘에 맹세하므로, 신이 장교로 하여금 변복(變服)하고 포청에 들어가 염탐하게 하였더니, 과연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사핵하여 밝히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정형복(鄭亨復)을 형조 판서로, 유언민(兪彦民)을 참의로 제수하여 참판 심성진(沈星鎭)과 함께 직방(直房)에서 개좌(開坐)하여 사핵하게 하였다. 정형복이 사장(査狀)을 가지고 들어와 아뢰니 임금이 명백하지 않다 하여 또 명하여 사핵하게 하고, 조종부가 말한 것과 서로 다르므로, 특별히 조종부에게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귀양보내는 형전을 시행하게 하였다. 이어서 승지를 보내어 영상에게 별유(別諭)하여 위로하게 하였다. 이때 이천보는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사신은 말한다."정승 집안의 이 일은 듣지 못한 사람이 없으니, 거짓이거나 사실이거나를 물론하고 대관(臺官)으로서 말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으나, 그 마음을 구명해 보면 또한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개 이때 동당(東黨)과 남당(南黨)이 있었는데, 남당이 매우 성대하였다. 조영순(趙榮順)·홍경해(洪景海) 같은 무리가 서로 모여 남을 비방하면서 스스로 청론(淸論)이라 하였는데, 조영순은 일찍이 참하 홍록(參下弘錄) 때문에 이천보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으나 이천보가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조영순이 이 때문에 이천보를 원망하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서로 부추켜 조종부가 그를 탄핵하고 조영순이 또한 뒤를 이어 탄핵한 것이었으니, 옥중(獄中)에서 병들어 죽었다는 것은 그것이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홍경해가 근거 없는 말을 전파하였다 한다."
【태백산사고본】 59책 82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47면
【분류】사법(司法) / 정론(政論) / 변란(變亂) / 인사(人事) / 가족(家族)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정승 집안의 이 일은 듣지 못한 사람이 없으니, 거짓이거나 사실이거나를 물론하고 대관(臺官)으로서 말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으나, 그 마음을 구명해 보면 또한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개 이때 동당(東黨)과 남당(南黨)이 있었는데, 남당이 매우 성대하였다. 조영순(趙榮順)·홍경해(洪景海) 같은 무리가 서로 모여 남을 비방하면서 스스로 청론(淸論)이라 하였는데, 조영순은 일찍이 참하 홍록(參下弘錄) 때문에 이천보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으나 이천보가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조영순이 이 때문에 이천보를 원망하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서로 부추켜 조종부가 그를 탄핵하고 조영순이 또한 뒤를 이어 탄핵한 것이었으니, 옥중(獄中)에서 병들어 죽었다는 것은 그것이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홍경해가 근거 없는 말을 전파하였다 한다."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가 또 경용(經用)이 넉넉지 않다 하여 본조의 돈 2만 냥으로 혜청(惠廳)의 쌀 1만 석을 바꾸어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연융대(鍊戎臺)는 도성(都城)과 북한(北漢) 사이에 있으므로 참으로 요충이 되는 곳인데, 총청(摠廳)을 옮겨 설치한 지 이제 8, 9년이 되어도 근기(根基)가 서지 못하여 일이 허술한 것이 많습니다. 지금의 급선무는 백성을 모집하는 데 있으나, 이미 살아 갈 밑천이 없고 경작할 땅도 없으니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삼남(三南)의 약환계(藥丸契)와 해서(海西)의 총환계(銃丸契)는 오로지 각 고을의 군기(軍器)를 위하여 설치한 것입니다마는, 중간에 사라져서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양쪽의 계인(契人)들이 받는 값을 진청(賑廳)에서 내준 뒤에 총청에서 구관(句管)하여 계인들로 하여금 연융대에서 만들어 그대로 총청에 실어 들이게 하고 총청으로 하여금 각 고을에 나누어 보내고 연말에 성책(成冊)을 만들어 비국(備局)에 신보(申報)하게 하면, 외방 고을의 군기가 착실해질 수 있고 영(營) 밑에 사는 백성도 이로 연하여 모여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1일 병신
보양청(輔養廳)에서 아뢰기를,
"예조의 절목 가운데에 보양관(輔養官)은 상견(相見)한 뒤에 한 달에 세 번 진현(進見)하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였는데, 상견례를 이미 행하였으니, 이제 21일에는 규례에 따라 진현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왕세자가 수서(手書)를 내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에게 별유(別諭)하였는데 이날 이천보가 도성을 나갔기 때문이었다.
11월 23일 무술
김상구(金尙耉)를 대사간으로, 임사하(任師夏)를 집의로, 이민곤(李敏坤)을 사간으로, 이광직(李光溭)·이기덕(李基德)을 장령으로, 조숙(趙)·신명철(辛命喆)을 지평으로, 심수(沈鏽)를 헌납으로, 홍억(洪檍)·이덕해(李德海)를 정언으로, 정광진(鄭光震)·홍양한(洪良漢)을 수찬으로 삼았다.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가 각 궁방(宮房)의 노비 가운데에서 탈이 생긴 자를 대체하는 것에 대해 어지러이 청한다 하여 신해년192) 의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궁방의 노비에 대하여 고쳐 망정(望呈)하는 길을 일체 막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익히 알고 있다. 왕패(王牌)를 만들어 준 뒤에야 노비의 자손에게서도 공물(貢物)을 거두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른바 영구히 노비를 삼는다는 것이지만, 왕패를 만들어 주기 전에는 처음부터 영구히 정한 것이 아니므로 이처럼 탈이 생길 경우 대체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왕패를 반드시 곧 거행하되, 탈이 생긴 자는 곧 대체할 자를 망정한 뒤에 왕패를 만들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노비법은 공사(公私)에 틀림이 없어야 한다. 왕패는 곧 사가(私家)의 문권(文券)니, 마땅히 절급(折給)할 초기에 왕패를 만들어 주어야 하며, 그 뒤에 달아나거나 죽는 것은 해궁(該宮)에서 잃은 것일 뿐인데, 어찌 하나도 모자라는 것이 없기를 바랄 수 있겠으며 여러 해 동안 공물을 거두고 나서야 비로소 왕패를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해궁의 이해(利害)에 있어서는 반드시 장차 모자란 대로 대체할 자를 청하여 한없이 전해 갈 것이니, 어찌 왕패로 하겠는가? 임금이 궁방의 일에 대하여 일체 듣기 싫어하므로 크고 작은 것을 물론하고 이처럼 막으니, 법이 어찌 행해질 수 있겠으며, 백성이 어찌 그 폐해를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임금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에게 별유(別諭)하였다.
11월 23일 무술
임금이 포도 대장 구선행(具善行)·이의풍(李義豊)을 불러 성안에서 걸인(乞人)이 남에게 재물을 억지로 요구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이때 연신(筵臣)이 이 폐단이 있음을 아뢰었기 때문이다.
11월 25일 경자
임금이 양정합(養正閤)에서 초복(初覆)을 행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법복(法服)을 입지 않았는데, 예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나아가 말하기를,
"여수(慮囚)193) 는 중대한 일인데 전하께서 상례복(常例服)을 폐하셨으니, 이것은 후사(後嗣)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곧 일어나 들어가서 동궁(東宮)과 함께 옷을 갈아입고 나와 특별히 김상성에게 숙마(熟馬)를 내려 표창하였다. 승지가 차례로 나아가 문안(文案)을 읽어 아뢰니, 임금이 모두 잠시 삼복(三覆)을 기다려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10여 년이 지나 임금이 대질(大耋)이 되어서도 번번이 죄수를 복심(覆審)할 때를 당하면 그 말을 돌이켜 생각하여 말하기를,
"고(故) 중신(重臣)이 나를 면계(勉戒)한 것을 어찌 차마 잊겠는가?"
하고, 법복을 입었으니, 다른 사람의 좋은 말을 잊지 않는 것이 이러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인심이 가볍고 경박한데도 신의 덕망으로 진정시켜 따르게 하지 못하고 조상(朝象)이 무너지고 갈라지는데도 신의 역량으로 모으지 못하여 밖으로는 시간(時艱)을 구제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자신을 바로잡지 못하였습니다. 지극히 어려운 때에 주선하고 뭇사람들이 다투는 곳을 담당하니, 마음만 믿고 행동에 어두워 남에게 죄를 얻은 것이 많았습니다. 구적(仇敵)이 모여들면 그 독봉(毒鋒)이 반드시 이른다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가운데에서 당여를 심고 권세를 판다[樹黨市權]는 한 구절의 말은 곧 권간(權奸)의 지극한 죄이니, 신하로서 이런 죄를 진 자는 일족을 멸하고 일신을 멸하더라도 어떻게 그 만분의 일이나마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아! 가령 신의 기세가 남을 제어할 만하고 성원(聲援)이 자신을 지킬만한 것이 과연 언자(言者)의 말과 같다면 비록 신에게 앙갚음하려는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이처럼 발로 차고 짓밟으며 능멸하지는 못할 것인데, 저 언자는 도리어 넉 자의 지목을 쉽사리 가하였습니다. 천지의 귀신이 분명하게 벌여 있고 삼엄하게 늘어섰는데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 말단의 일에 이르러서는 가장 그 해치려는 마음을 쏟은 곳입니다. 말하려면 입이 더러워지므로 신이 제기하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마는, 통탄할 만한 것은 근거 없이 거짓말을 만들어 내어 중외(中外)에 전파하여 온 세상을 현혹시킨 뒤에 마지막에는 대각(臺閣)에 의지하여 그 일을 진실이라 하여 위로 천청(天聽)을 어지럽혔으니, 그 계책이 지극히 교묘하고도 음흉하다 하겠습니다. 비록 일월(日月) 같은 성명(聖明)이지만 어떻게 그 정상을 죄다 통촉하시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려 타일렀다. 이천보가 또 소조에게 상서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온화하게 유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 홍억(洪檍)이 상서하여 조종부(趙宗溥)를 사판에서 삭제하고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그 소장을 돌려 주고 특별히 삭직(削職)도록 하령하였다.
11월 26일 신축
임금이 공인(貢人)·시인(市人)을 소견하여 폐단을 물었다.
11월 27일 임인
임금이 화협 옹주(和協翁主) 집에 거둥하였다가 밤이 깊어서 환궁하였다. 행재(行在)에서 경고(更鼓)를 전하지 않았는데, 대개 이날은 옹주의 상일(祥日)이었으므로, 임금이 징소리나 북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공주·옹주·대군·왕자는 비록 친진(親盡)하더라도 부조(不祧)의 신위(神位)로 정하도록 명하고, 정식(定式)을 삼게 하였다.
부수찬 조영순(趙榮順)이 상서하여, 맨먼저 ‘영관(瀛館)194) 의 신록(新錄)은 얼마나 중요한 선출인데, 사람들의 말이 낭자하고 물정(物情)이 놀라며 분노하여도 정승의 집 사객(私客)은 같은 대열로 서서 나란히 계승한다.’는 것으로 사진(仕進)하기 어려운 의리로 삼고, 그 아래에 말하기를,
"신의 처지로서는 진실로 감히 입을 열어 일을 논할 수 없습니다마는, 일이 끝내 입을 다물기 어렵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덧붙여 아룁니다. 아! 오늘날 명의(名義)는 멸절되어 무너지고 염치가 없어져서 조정에는 곧은 풍습이 없고 나라에는 철류(綴旒)195) 의 형세가 있습니다. 위망(危亡)의 징조와 분열되는 형세를 두루 조목조목 들어 써서 올리기는 어렵겠지만, 만약 가장 세상을 그르치고 크게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을 논한다면 정승이 마땅한 사람이 아닌 데에 있을 뿐인데, 또한 오늘날 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수상은 대개 남면(藍面)으로 백안시(白眼視)하며 음흉하고 비루한 성품으로 처음에는 청론(淸論)를 가탁(假託)하여 부당하게 극선(極選)에 들었는데, 마침내 권문(權門)에 붙어서 갑자기 높은 벼슬을 차지하였습니다. 평생의 재주는 남을 배척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자나깨나 경영하는 것은 단지 아첨하여 총애를 굳히는 데에 있었습니다. 시비를 밝히지 않을 수 없는데도 반드시 문란하게 하고자 하였고, 충역(忠逆)을 엄중하게 구분하지 않을 수 없는데도 반드시 뒤섞으려 하였습니다. 삼사의 합달(合達)에 이르러서는 본래 한 나라의 큰 논의인데, 처음 전조에 들어가서는 은밀히 배척하여 제멋대로 정지시키고, 태석(台席)에 올라서는 속여서 말하며 아무렇게나 아뢰고는, 감히 공론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감히 성총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임금에게 따지고 조정에 욕을 끼쳤으니, 그 군색하게 피하는 꼴과 변화무쌍한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통분스럽게 여기게 하였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여기게 하였습니다. 또 근일의 일로 말하면, 역얼(逆孼)을 비호하여 반드시 죄적(罪籍)에서 신설(伸雪)시키고 흉과(凶科)에 아호(阿好)하여 빠르게 본병(本兵)의 망(望)에 천거하였으니, 방자하여 제멋대로 하는 것이 또한 못하는 짓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더구나 그 잔인하여 어질지 못하고 탐욕이 한없는 것이겠습니까? 요사한 여얼(餘孼)과 총애하는 첩 때문에 뇌물이 날마다 모여들고, 친근한 벗과 아첨하는 문객(門客)으로 당여(黨與)가 날로 치성해지니, 위리(威利)에 농락되고 권염(權焰)에 눌려서 사람들이 감히 어찌하지 못하지만, 접때 항간에 퍼진 가시(歌詩)를 보더라도 뭇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종제(從第) 이익보(李益輔)는 또 몹시 잔인한 성질에 버릇없고 간사한 행실까지 있는데, 가까이에 근거를 굳히고서 같은 악인끼리 서로 도와 벼슬을 스스로 차지하고 싶으면 기회를 틈타 다투어 빼앗고, 다른 사람이 핍박하는 일이 있으면 말을 만들어서 물어 뜯었습니다. 그리고 위복(威福)을 빙자하여 진신(搢紳)을 갈라 놓아 어지럽히는데, 마치 올빼미 소리에 수리부엉이가 응답하고 여우가 범의 위세를 빌리듯이 하니, 삼굴(三窟)196) 의 형세가 이루어져 일세(一世)가 붙좇았습니다. 또 그 먹다 남은 음식을 받아 먹으면서 입주출노(入主出奴)197) 하여 마음속으로 하고자 하는 것과 턱으로 가리키는 것은 명령을 받들어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지난 겨울에 이정보(李鼎輔)가 승자(陞資)된 것에서 살펴보면 극도에 달한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이렇게 하기 때문에 군강(君綱)이 날로 해이해지고 사기(士氣)가 날로 더러워져서 다시는 한 개나 반 개도 본색(本色)을 보전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심하면 어두운 밤을 틈타 요로에 애걸하는 자도 있고 줏대없이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는 자도 있으니, 명의(名義)가 어떠한 것이고 염치가 어떠한 것인지 아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것은 오히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평(臺評)이 나온 것도 늦었다 하겠는데, 기세에 몰려서 실마리를 구명하지 못하여 그 일은 끝내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여정(輿情)이 갈수록 몹시 분개하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아! 저 둥근 머리와 가로 놓인 눈은 여느 사람처럼 보이고 푸른 패옥(佩玉)과 붉은 폐슬(蔽膝)을 갖추어 대관(大官)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의 자취를 판단하면 이미 거국(擧國)의 주벌(誅罰)을 용서할 수 없으니, 또한 어찌하여 반드시 사람들의 말이 있고 없는 것과 살핀 일의 허실(虛實)을 가지고 그 죄의 경중(輕重)을 삼아야 하겠습니까? 신은 이를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빨리 대조께 여쭈어 호오(好惡)를 명백히 바루어 권상(權相)을 내치고 대신(臺臣)을 칭찬하고 장려하여 사유(四維)가 펴지게 하고, 백료(百僚)가 힘쓰게 하소서."
하였다. 사간 이민곤(李敏坤)이 또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상신(相臣)이 대신(臺臣)의 상서에 대변(對辨)한 것을 살펴보건대, 스스로 반성하는 뜻이 조금도 없고 문득 분노하여 원망하는 기세를 부렸으니, 어찌하여 옛 명신(名臣)이 용납하던 뜻과 상반되는 것입니까?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이 말하기를, ‘진실로 허물을 들으려면 마땅히 낱낱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여 허실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사람이 능히 자신을 다스리기에 절급할 경우 다른 사람들의 말이 들려 올 때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힘써야 할 것이니, 자기에게 유익지 않음이 없는데 어느 겨를에 그 말의 허실을 비교하겠습니까? 예전에 그 임금에게 간(諫)했던 자는 혹 걸주(桀紂)에 견주기도 하고 환제(桓帝)·영제(靈帝)에 견주기도 하였으나, 그때의 임금은 그들을 죄주지 않았습니다. 임금보다 높은 이가 없으나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는 오히려 꺼리지 않았는데, 하물며 재상의 지위가 임금의 아래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예전부터 잘 다스리는 조정에서는 대각(臺閣)의 권세를 허용하였는데,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는 더욱 크게 한 바가 있었습니다.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이양(李樑)의 흉당(凶黨)은 세력이 대단하여 임금을 바꾸고 나라를 망칠 만하였지만, 오히려 대각의 필봉에 굴복하였었습니다. 오늘날 대신이 진실로 이 의리를 안다면, 자기를 논하는 말에 대하여 또한 몹시 두려워하며 굴복하여 사죄하고 인책하여 죄를 받아야 할 것인데, 드디어 화심(禍心)으로 의심하고 독봉(毒鋒)으로 배척하여 서로 견주어 승부를 다투는 뜻이 뚜렷이 있었습니다. 대저 이렇게 하면 자기를 공박하는 자는 날로 멀어지고 자기에게 아첨하는 자는 날로 가까워질 것이니, 정승의 집에서 인삼·삽주의 저축에 견주는 자들은 누린 고기를 따르는 개미나 썩은 고기를 좇는 파리에 지나지 않고, 남몰래 붕비(朋比)하는 무리들은 여기에서 근본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대조께서 30년 동안 고심하신 것은 오직 붕당(朋黨)을 깨뜨리는 데에 있었고 만년에 의지하시는 바는 한 원보(元輔)에 있을 뿐이었는데, 그 아름다운 뜻을 돕지 못하고 도리어 따로 한 붕당을 만들어 냈으니, 이것이 어찌 대조의 본의(本意)를 우러러 본받는 것이겠으며, 또한 어찌 세신(世臣)의 사문(私門)의 복이겠습니까? 이제 하루아침의 분노 때문에 만세(萬世)의 폐단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신은 저하께서 분명하게 대신에게 유시하셔서 그 분노를 얼른 잊고 의리의 시비를 살펴보게 하신다면, 풍랑이 저절로 그칠 것이고 나라의 일도 오히려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한나라 문제(文帝)는 연(輦)을 멈추고 말을 들어 말이 쓸 만하면 채택하고, 쓸 만하지 않으면 버려두었습니다. 진실로 사람의 말에는 서로 득실(得失)이 있으므로, 한마디 말이 좋다 하여 그 말을 죄다 취할 수는 없겠지만, 한마디 말이 좋지 못하다 하여 그 말을 죄다 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이 전후에 진언(進言)한 것을 보건대, 혹 한마디 말이라도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것이 있으면, 그 나머지 천만 마디 말이 시무(時務)에 절실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두 버리고 쓰지 않았습니다. 이제 헌신(憲臣)의 상서로 말하면, 선정신 조헌(趙憲)의 일을 인용하여 묘당에 언급한 것인데, 문득 위벌(威罰)을 내리고 이 말들도 모두 살피지 않으셨으니, 신은 참으로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신이 일찍이 고(故) 명신(名臣) 이지함(李之菡)의 유집(遺集)을 보건대, 이지함이 일찍이 인천에서 상중(喪中)에 있는 조헌을 조문하였는데, 그날 밤 요사한 혜성(彗星)이 하늘에 뻗쳤으므로, 조헌이 그 조짐이 어떠한지를 물었더니, 이지함이 말하기를, ‘혜성은 길면서 더딘 것과 짧고도 빠른 것이 있는데, 이것은 10여 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하여도 세상에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이니, 그대는 더욱 옛 글을 읽어서 국가에 보답하라.’ 하였는데, 임진란(壬辰亂)에 이르러 그 말이 과연 부합하였습니다. 신이 계해년198) 겨울에 겸사(兼史)로서 금중(禁中)에 입직하였는데, 그때 혜성의 재이(災異)가 한 달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이 목격한 바인데, 걱정하고 탄식하는 것은 이제 연수를 헤아려보니 마침 이지함이 말한 것과 근사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진실로 이지함과 조헌의 미리 아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마는, 두 신하를 깊이 믿기 때문에 늘 남모르게 근심되고 매우 염려됨을 금치 못하였는데, 더구나 수년 이래로 비상하게 놀라운 재이가 또 따라서 거듭 나타나는 것이겠습니까? 무릇 재이가 일어나면 늦고 빠름은 있을지라도 그 응험이 없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으니, 올해에 재이가 있고 내년에 무사하다 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도 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 천지가 경계를 고할 경우 거의 변란이 없는 데에 이르는 일은 없었는데, 시상(時象)으로 말하건대, 아첨하는 자가 다투어 나아가고, 아첨하여 총애받는 자가 위세를 떨치면, 백성이 도탄에 빠져서 방본(邦本)이 무너지고, 변방이 허술해져 급할 때에 믿을 것이 없어질 것이니, 쌓인 땔나무에 불을 놓는다는 말로도 그 위급함을 비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바야흐로 요행히 과거에 급제한 자와 출세하는데 교묘한 재주를 가진 자들이 치무(馳鶩)하기를 서로 숭상하고 있는데, 현철하여 어리석지 않은 자도 휩쓸려 함께 빠져드니, 장차 나라의 일이 어떠한 지경에 이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저하께서는 깊은 곳에 거처하여 단정하게 팔짱을 끼고 계시니 또한 어떻게 오늘날의 세도(世道)가 이토록 극도에 이른 것을 아시겠습니까? 재이를 그치게 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도리는 다시 다른 방법이 없고, 참으로 오직 언로(言路)를 넓혀서 곧은 말을 살펴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반드시 한가히 시좌(侍坐)하시는 즈음에 조용히 앙품하여 언자에 대한 견벌(譴罰)을 도로 거둠으로써 간언(諫言)이 오는 길을 밝히소서. 그러면 참으로 두렵게 여겨 수성(修省)하는 한 가지가 될 듯합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하령하기를,
"이제 조영순·이민곤 두 사람이 상서한 것을 보니 대신을 헐뜯어 욕한 것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처럼 공도(公道)를 저버리고 붕당을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는 무리는 서울에 둘 수 없으니, 모두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일 뒤에 임금이 두 사람이 상서한 일을 듣고 당습(黨習)이라 엄중히 꾸짖고, 이 민곤을 거제(巨濟)에, 조영순을 대정(大靜)에 귀양보냈다.
집의 임사하(任師夏)를 영구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헌납 이세택(李世澤)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계복(啓覆) 때에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일전에 원손이 나를 보기를 청하고는 와서 안으려 하니, 아보(阿保) 복련(福連)이라는 자가 감히 나에게 불쾌한 빛을 드러냈다."
하고, 처음에는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도로 거두고 영구히 내치게만 하였다. 이어서 승지(承旨)에게 묻기를,
"복련에 대하여 하교한 뒤에 대신(臺臣) 가운데에 말하는 자가 있었는가?"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체(臺體)에 있어서 국문하기를 청하더라도 옳을 것인데, 더구나 계복하려고 입시(入侍)했던 대신(臺臣)이 친히 불쾌한 빛을 드러냈다는 하교를 듣고도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이 없었으니, 장차 저 대신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드디어 임사하는 사판에서 삭제하고, 이세택은 뒤미쳐 입시하였다 하여 파직만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8일 계묘
남태제(南泰齊)를 대사헌으로, 김이만(金履萬)을 집의로, 이세태(李世泰)·정광운(鄭廣運)을 장령으로, 임희교(任希敎)·김시묵(金時默)을 지평으로, 홍양한(洪良漢)을 헌납으로, 이창임(李昌任)을 정언으로, 조숙(趙)·서명응(徐命膺)을 교리로 삼았다.
예조 참판 이익보(李益輔)가 상서하여 조영순(趙榮順)이 배척한 것을 변명하기를,
"신에게는 다른 죄가 없으나, 다만 대신의 지친(至親)이기 때문에 한 화살로 아울러 쏘아서 일망 타진할 계책을 이루기 위해 신을 나열하고 신을 무함한 것인데, 극도로 위험하더라도 모두 명확하지 못한 것이니, 참으로 한 번 웃을 것도 못됩니다. 대개 신의 집안이 이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은 유래한 바가 오래 되었는데, 이것은 참으로 온 세상에서 다 아는 것이니, 신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예사 답을 내렸다.
수찬 조엄(趙曮)이 차자를 올려 대조(大朝)에게 여쭈어 조종부(趙宗溥)를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고 조영순(趙榮順)·이민곤(李敏坤)을 귀양보내라는 영(令)과 홍억(洪檍)을 삭직한 벌을 빨리 거두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감싼다고 꾸짖었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서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왕세자가 말하기를,
"초복(初覆) 때에 대조(大朝)께서 형벌을 삼가라고 하신 하교가 정녕하고 간절하셨으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은 유의해서 간과(看過)하여 한 사람이라도 살릴 자를 찾아야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신은 하령(下令)을 듣고 흠앙(欽仰)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저하께서 성의를 우러러 본받으시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살필 만한 자는 대조께서 이미 살피게 하셨고 남은 것은 도수(度數)가 매우 적으니, 살릴 만한 자를 찾기 어려울까 염려될 뿐입니다."
하였다. 진해(鎭海)의 죄인 김무재(金武才)·순천(順天)의 죄인 김유세(金有世)·이천(利川)의 죄인 김호원(金昊元)·평양(平壤)의 죄인 서와달(徐臥達)은 모두 율(律)에 의거하도록 하게 하였다. 공주(公州)의 죄인 이육손(李六孫)은 특별히 참작하여 처치하게 하였는데, 형벌의 적용을 매우 잘못한 것이었다. 임금이 온정(溫井)에 거둥한 뒤에 호서(湖西) 백성에게 두 말의 쌀을 주라고 명하였는데, 이육손은 이보(里保)로서 쌀을 나누어 주지 않고 도리어 요구하는 자를 죽였었다. 증거가 이미 갖추어져 의심할 만한 것이 없었으나, 임금이, ‘내가 온정에 거둥하였기 때문에 이 살인이 있었다.’ 하고 초복 때에 차마 어찌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많이 보이고, 이어서 세자에게 하문하였는데, 세자가 참작하여 처치할 뜻으로 대답하였으므로, 마침내 감사(減死)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대사간 신위(申暐)가 전달(前達)을 다시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무릇 임금에게 무례한 자는 죄가 삼척(三尺)의 주벌(誅罰)을 용서하지 않는 것인데, 대조께서 처분하신 뒤에 복련(福連)의 죄상이 분명히 드러나서 엄폐할 수 없으니, 그 죄진 것을 논하면 천지 사이에서 살려 두어서는 마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당초에 도배(島配)한 것도 이미 너그러운 처벌이었는데, 곧 도로 거두어 곡진히 용서하였으니, 이것이 대조께서 포용하시는 큰 도량에서 나왔다 하지만, 악을 징계하여 법을 엄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일각이라도 버려둘 수 없습니다. 복련을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다 엄중히 국문하여 왕법(王法)을 바루게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대신(臺臣)이 청했을 뿐만 아니라 내 생각도 그렇지만, 대조께서 하교하신 데에 이미 깊은 뜻이 있으니, 우러러 본받는 도리에 있어서 갑자기 허락할 수 없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무신년199) 과 경술년200) 의 흉역(凶逆)은 지난 사첩(史牒)에 없던 것이니, 진실로 털끝만큼이나마 관련된 것이 있다면 미처 실정을 털어 놓지 않았더라도 신리(伸理)를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근래에 인심이 안일에 길들여져 제방(隄防)이 엄중하지 못하여 그 집의 처자가 자책함으로 인하여 용서하자는 논의가 많이 있었는데, 죄적(罪籍)에 있는 흉얼(凶孼)을 차례로 신설(伸雪)하고 망설이는 바가 없으니, 왕법(王法)이 점점 어지러워져 여정(輿情)이 모두 분개하고 있습니다. 빨리 대조께 여쭈어 전후에 역적들을 신리하게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이육손은 살인한 정상이 낭자하여 엄폐할 수 없고, 옥안(獄案)의 전말(顚末)에 털끝만큼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는데, 대조께서 몹시 가엾게 여기신 하교를 우러러 본받아 특별히 참작하라는 영(令)이 있었지만, 삼척(三尺)이 지극히 엄하므로 끝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대조께 여쭈어 율(律)대로 처단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인신(印信)의 위조는 법문(法文)이 지극히 엄하므로, 그 율을 범하면 작거나 크거나 차이가 없습니다. 최집(崔潗)을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하라는 영은 대조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의(德意)를 본받은 데에서 나왔지만, 그 정상이 가엾다 하여 법을 굽힐 수 없으니, 청컨대 최집을 율에 의거하여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금위 대장 구선행(具善行)이 임진(臨津)에 가서 살피고 돌아와 형편을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산성(山城)이라고 일컫기에는 작을 것이다."
하자, 구선행이 말하기를,
"보(堡)를 만들어야 마땅한데, 임진의 좌우에 돈대(墩臺)를 설치하고 의병(疑兵)을 조금 설치하면 급할 때에 염려가 없겠습니다. 낙하(洛河)는 봄·여름·가을 세 철에 다 험준한 나루가 되지만, 얼음이 얼면 한 달 동안 건널 수 있는 것이 5일도 못됩니다. 동파(東坡) 근처는 더욱 저습(低濕)한 땅이어서 발을 딛기 어려운데, 얕은 여울인 곳은 중류(中流)에 돌부리가 들쭉날쭉하므로, 여름에도 걷기가 어려우니, 말은 더욱 건널 수 없습니다. 신이 물가를 따라 장산(長山)에 이르러 형편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참으로 서로(西路)의 요충(要衝)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토성(土城)을 쌓고 별장(別將)을 두면 좋을 듯한데, 파주(坡州) 사람들은 다 이 곳에 고을을 옮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청석동(靑石洞)을 지나면 지킬 만한 곳이 이 곳뿐이다."
하였다. 이어서 별장을 두고 돈대와 홍예석문(虹霓石門)을 설치하라고 명하고, 총융사 홍봉한(洪鳳漢)으로 하여금 경략(經略)하게 하였다. 홍봉한이 윤태연(尹泰淵)을 우선 별장으로 차출하여 장공(將功)으로 속죄(贖罪)할 수 있도록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또 장산에도 임진의 예에 따라 별장을 두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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