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을사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서 상참을 행하였다.
12월 1일 을사
대사간 신위(申暐)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을 돌아보건대, 인심이 착하지 못하여 세도(世道)가 날로 어긋나고 있습니다. 진신(搢紳)은 암지(暗地)에서 서로 무함하여 서로 공경하여 협력할 희망이 없고, 대관(大官)은 금해(禁廨)에서 서로 다투어 보고 듣기에 놀라운 바가 있는데, 더구나 지금 처분이 알맞지 않으니, 매우 청조(淸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아! 대신과 언관은 모두 나라의 고굉(股肱)이고 이목(耳目)이므로, 세력이 편중되어서는 안되며, 가부(可否)에 대해서는 반드시 서로 도와야 합니다. 또한 위에서 처분하는 방법도 반드시 지극히 공정한 감별을 지켜 대중(大中)한 도리에 맞아서 뭇사람들이 상도에 어긋난다는 한탄이 없어야 국가가 화평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인데, 마침내 부식(扶植)하고 배양(培養)하는 데 따르는 것은 또 오로지 언로(言路)를 넓게 여는 데 달려 있으니, 이것은 옛 성제(聖帝)·명왕(明王)이 다스리던 지극한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날을 돌이켜보면, 원보(元輔)는 좌전(佐銓) 때부터 정권을 잡을 때까지 공도(公道)를 어기고 제방(隄防)을 무너뜨렸으므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으니, 어찌 지나치게 의심하여 완전하게 허물이 없기를 바라는 자의 말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포청의 일에 이르러서는 이미 조사하여 죄가 없음이 밝혀졌지만, 당초에 이미 대신(臺臣)의 풍문에 들어왔다면 거론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니, 원보가 국가를 위하여 언로를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그 유무(有無)를 가려야 할 뿐이고 갑자기 불평을 보이는 것은 마땅치 못한데, 말이 혹 격렬하게 질책하여 체모가 아주 부족하였습니다. 규정(規正)하는 말도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겁쟁이니 남면(藍面)이니 하는 지목에 대해서는 꾸짖어 욕하며 풍속을 손상시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기(李芑)·이양(李樑)은 임금을 바꿀 만하였다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비유한 것이 합당하지 못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보궤 불식(簠簋不飾)201) 의 의리로 논하면 어찌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이렇게 간파(看破)한 뒤에야 득실이 함께 나타나고 좌우가 서로 공평하여 바야흐로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한 도리에서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언로는 사람의 혈기와 같아서 한때라도 막혀서는 안되는데, 더구나 심지어 기를 꺾기까지 하는 것이겠습니까? 말이 혹 지나치게 과격해도 반드시 장려하고 타이르는 것은 앞으로 공정한 논의가 있게 하려는 것이고, 혹 사실과 다른 것이 있어도 가볍게 배척하지 않는 것은 슬기롭게 들어주는 길을 넓히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의 말에 혹 중도에 지나친 것이 있더라도 가르쳐 깨우치는 뜻을 조금 보여서 적당해지도록 힘쓰는 것이 불가(不可)하지 않을 듯한데, 위노(威怒)를 거듭 가하여 삭직(削職)하고 귀양보내는 일이 잇달아서 거조(擧措)가 황급하고 경색(景色)이 침울하니, 이것이 어찌 성세(聖世)에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겠습니까? 저 길에 널리 전파되면 반드시 한 상신(相臣)으로 인하여 네 언관(言官)을 죄주었다 할 것이니, 또한 어찌 중외에 들리게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빨리 예사(睿思)를 더하고, 대조께 여쭈어 네 신하를 삭직하고 귀양보내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셔서 성덕을 빛내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하답(下答)하여 감싼다고 꾸짖었다. 당초에 조영순(趙榮順)이 언관이 되어 이천보(李天輔)를 논하려 하자 사람들의 말이 크게 퍼졌는데, 김상로(金尙魯)가 작은 일로 아뢰어 파직하니, 이천보가 그 일이 자기에게 관계되는데 요상(僚相)이 청하여 파직하였다 하여 크게 혐의하여 금중(禁中)에서 쟁난(爭難)한 일이 있었다. 신위의 상서 가운데 서로 다투었다 한 것은 대개 이를 가리킨 것이었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병중에 듣건대, 한두 신하가 수상을 맹렬하게 탄핵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글에서 권문(權門)에 대해 말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이제까지 병축(秉軸)한 지 가장 오래 되었는데, 이 두 자를 보니 오히려 곡목(曲木)이라는 놀라움이 있습니다. 아! 수상은 출신한 처음부터 명망이 가장 앞섰으니, 어찌 남에게 힘입은 자이겠습니까? 또 그 전후에 발탁한 것은 성상께서 간선하신 데에서 나온 것이 많은데, 혹 신이 지위를 떠난 뒤에 있어서는 진실로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정보(李鼎輔)의 일에 이르러서는 이보다 앞서 대신이 이미 연석(筵席)에서 아뢰었을 뿐만 아니라, 신도 이정보의 마음이 공정하고 염정(恬靜)함을 알고 있으며, 또 오래 같은 벼슬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아뢴 바가 있는데, 이제 아울러 수상의 죄안(罪案)을 만들어 권세로 지시하여 부렸다고 지목하였으니, 신이 모욕받은 것이 또한 극도에 달했습니다. 어찌 부끄러움을 안고 욕을 견디며 편안히 스스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온화하게 유시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옥당(玉堂)의 상서 가운데에 있는 네 가지 일은 말을 한 것이 매우 심각하고 죄를 성토한 것이 매우 엄중한데, 신리(伸理)의 논의에 신이 일찍이 뒤따랐고 본병(本兵)의 의망에 신이 일찍이 참여하였으며, 당록(堂錄)의 회좌(會坐)에 신이 일찍이 같이하였고 중신의 진용(進用)에 이르러서는 신이 또한 일찍이 맨먼저 천거하였습니다. 아! 신은 수상과 함께 3년 동안 정승으로 뒤를 이어 주선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위욕(危辱)을 받아 황급히 나라를 떠난 데 대해 신이 상심하는 바이고, 일을 같이하였는데 그 죄가 똑같지 않은 것에 대해 신이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여기에서 신이 처신할 바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온화하게 유시하였다.
12월 2일 병오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왔다.
12월 2일 병오
대사간 신위(申暐)를 종성(鍾城)에 귀양보내고 이어서 천극(栫棘)202) 을 가하였다. 임금이 좌상이 대간의 상서로 인하여 소장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 신위의 글을 가져다 보았다.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中正)해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나를 공정하지 않다 한 것이다."
하고, 불가하지 않을 듯하다는 말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신위가 이미 원량(元良)에게 소장을 올렸으면 아들을 대하여 아버지를 말한 것인데, 어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가?"
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시좌(侍坐)하게 하고, 또 신위를 패초(牌招)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과 서로 다툰 것은 무슨 일인가?"
하자, 신위가 말하기를,
"신이 참여하여 듣지 않았으니, 어떻게 상세히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을 배알하는 앞에서 대리하는 원량이 시좌하고 있는데, 네가 감히 속여서 감추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는가? 수령은 풍문이 혹 있겠지만, 대신의 일을 어떻게 풍문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신위가 말하기를,
"듣건대, 조영순(趙榮順)이 대간(臺諫)의 벼슬을 체차하기를 청한 일 때문에 서로 힐문(詰問)하기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면(裏面)에 대해서는 신은 진실로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원량에게 상서하여 나를 공정하지 않다고 한 것은 아들을 대하여 그 아버지를 헐뜯은 것이니, 이것은 신하의 절조(節操)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하고, 이어서 종성으로 귀양보내되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아들을 두는 것은 장차 효도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60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여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문자에 대하여 어찌하여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
하고, 이어서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리매, 세자가 관(冠)을 벗은 것이 두 번이고, 뜰에 내려가서 석고 대죄(席藁待罪)한 것이 두 번이고 관을 벗고 고두(叩頭)한 것이 한 번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법을 적용하지 못하더라도 신위에게 해당되는 율을 청해야 마땅한 것이다."하자, 세자가 대답하기를,
"죽일 만합니다."
히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량(元良)이 이미 죽이기를 청하였으니, 신위는 멀리 귀양보내는 데 그칠 수는 없다. 천극을 더하는 것이 옳다. 대리하는 원량이 관을 벗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의 대신(臺臣)이 토죄(討罪)를 청하지 않는다면 이는 조선에 신하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4경(更)이 되어 파하였는데, 이윽고 승지는 입대(入對)하라는 영(令)이 있었으므로 우부승지 심수(沈鏽)가 사관(史官)을 기다리지 않고 빨리 달려 들어갔다. 왕세자가 관을 벗고 시민당(時敏堂) 앞뜰 벽돌 위에서 석고 대죄하고 있다가 승지로 하여금 아뢰게 한 말이 있으므로, 심수가 청대(請對)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세자가 대명(待命)하면서 신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기를, ‘신은 이미 불민하여 군국(軍國)을 대리할 수 없으니, 대리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심수에게 명하여 세자를 인도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세자가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임금이 다시 하유(下諭)한 뒤에야 비로소 추주(趨走)하여 나아갔는데, 임금이 또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리자,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어둑새벽에야 파하였다.
12월 3일 정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문신의 제술(製述)을 시험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되기를 원하였다. 신위(申暐)의 상서 가운데 있는 다투었다는 말 때문인데, 왕세자가 위유(慰諭)하였다.
12월 5일 기유
전 대사헌 남태제(南泰齊)·장령 정광운(鄭廣運)·지평 임희교(任希敎)를 모두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세자가 세 대신(臺臣)이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지 않았다 하여 거제부(巨濟府)에 연수(年數)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게 하기에 이르렀는데,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이 일을 임금에게 아뢰고, 또 신위(申暐)에 대한 처분이 지나침을 말하니,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서 특별히 신위의 천극(栫棘)을 감면하게 하고, 또 세자에게 명하여 세 대신을 도배(島配)하라는 영(令)을 거두고 다만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12월 7일 신해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12월 7일 신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여 다시 사핵(査覈)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조영순(趙榮順)의 상소에서 사핵한 것이 어두워 알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인데, 임금이 돈독하게 하유(下諭)한 것이 거의 수백 마디이였고, 해래 승지(偕來承旨)로 하여금 선유(宣諭)를 전하게 하였다.
12월 9일 계축
어영 대장 이의풍(李義豊)이 졸(卒)하였다. 금위 대장 구선행(具善行)으로 하여금 겸찰(兼察)하게 하였다.
12월 10일 갑인
조동점(趙東漸)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서하여 면직되기를 원하니, 왕세자가 온화하게 유시하였다.
12월 12일 병진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도둑이 충청도 목천현(木川縣)의 화약(火藥) 2백 근(斤)을 훔쳐 갔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정홍순(鄭弘淳)을 대사간으로, 이기경(李基敬)을 사간으로, 이만회(李萬恢)를 장령으로, 여선형(呂善亨)을 지평으로, 김원행(金元行)을 장악 정(掌樂正)으로 삼았는데, 김원행은 초선(抄選)이었다.
교리 홍인한(洪麟漢)이 상서하여 조영순(趙榮順)을 신구(伸救)하니, 왕세자가 특별히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라고 하였다.
박사눌(朴師訥)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현릉(顯陵)·광릉(光陵)·경릉(敬陵)·창릉(昌陵)의 표석(表石)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이때 각릉(各陵)의 표석을 아직 세우지 않은 것이 많았는데, 네 능은 특별히 먼저 일을 시작하라고 명하였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같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내년에는 선조(先朝) 을유년203) 의 전례(典禮)에 의거하여 칭경(稱慶)하고 진하(陳賀)함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수서(手書)를 김상로에게 내려 이르기를,
"눈물을 머금고 하교하니, 나의 이 뜻을 본받도록 하라. 모쪼록 조금 헤아려서 나의 슬픈 마음을 편하게 하라."
하고, 또 수서를 이익정에게 내려 이르기를,
"이미 상신에게 유시하였으니, 모쪼록 헤아리도록 하라. 다시 청대하지 말아서 나의 모년(暮年)을 편하게 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왕세자의 후궁(後宮)이 지난해에 왕손(王孫)을 낳았는데 아직 칭호가 없으니, 작호(爵號)를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내년은 성조(聖祖)께서 탄강하신 해이고 광묘(光廟)204) 께서 등극신 해이다.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면 이 마음이 한층 더하니, 내후년 중춘(仲春)에 있을 진전(眞殿)의 작헌례(酌獻禮)를 내년 2월로 당겨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4일 무오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납향 대제(臘享大祭)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정홍순(鄭弘淳)·임위(任瑋)를 승지로, 박상덕(朴相德)을 대사간으로, 박성원(朴盛源)을 교리로, 심발(沈墢)을 사은 서장관으로, 김양택(金陽澤)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간직해 둔 금보도식(金寶圖式)을 가져다 보고 도로 망묘루(望廟樓)에 봉안하게 하였다.
12월 17일 신유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하교하기를,
"관동(關東)의 상정(詳定)이 편리한지를 내가 묻고자 하니, 영동(嶺東)·영서(嶺西)의 시종(侍從)을 지낸 수령 가운데에서 그 일을 익히 알아서 주대(奏對)할 만한 자를 각각 한 사람씩 올려보내라는 뜻으로 본도의 도신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능(陵)·전(殿)에서 피울 향(香)은 이미 수압(手押)을 받았으면 승지가 마땅히 친히 전해야 할 것인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 예(例)에 의거하여 향실(香室)에서 주고받으니, 사체(事體)가 옳지 못하다. 이 뒤로는 한결같이 제향 때에 향을 전하는 예에 의거하여 승지가 친히 전하되, 문묘(文廟)·궁(宮)·원(園)도 마찬가지로 거행하고, 효장묘(孝章廟)·의소묘(懿昭廟)의 삭망제(朔望祭) 때에 향을 전하는 것은 승지가 또한 친히 전하되, 꿇어앉아 전하고 서서 전하는 것은 한결같이 제사 때 향을 전하는 예에 의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8일 임술
송수형(宋秀衡)을 승지로 삼았다.
사은사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 등을 보내어 연경(燕京)에 가게 하였다. 임금이 소견하고 보냈다.
12월 20일 갑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에워쌌다.
12월 23일 정묘
사복시에서 아뢰기를,
"본시(本寺)에 속한 강령현(康翎縣) 옛 등산도(登山島)의 묵은 논밭과 일군 논밭을 귀인방(貴人房)에서 절수(折受)하여 올해부터 세(稅)를 거둔다는 것을 내수사(內需司)에서 이첩(移牒)하였습니다. 강령 목장(康翎牧場)은 본디 본시의 목장 가운데에서 가장 요긴한 곳인데, 두 번 지난 갑자년205) 에 도신의 치계(馳啓)로 인하여 목장을 순위도(巡威島)에 옮겨 설치하였었습니다. 대개 이 섬은 해로(海路)의 요충지(要衝地)가 되므로, 첨사(僉使)를 두어 관방(關防)의 중지(重地)로 삼고, 인하여 감목관(監牧官)을 겸하게 하여 본목(本牧)이 관장하는 기린도(麒麟島)·연평도(延坪島) 등을 방목(放牧)하는 곳으로 삼았었는데, 순위·기린·연평 세 섬은 본디 경작해서 세를 거두는 땅이 없으므로, 제도(諸島)의 목자(牧子)의 위전(位田)과 목관(牧官)의 양료(粮料)와 여러 가지 책응(策應)은 오로지 등산도의 옛 목장에 의지하였으니, 이 목장을 없앤다면 등산도의 한 목장은 곧 헛되이 설치한 것이 되고 첨사 또한 장차 폐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두 번 지난 계유년206) 에 궁방(宮房)에서 절수하였을 때 본시에서 초기(草記)하여 본목에 도로 붙였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궁방에 붙인다면 궁방에서 얻는 것은 매우 적은데, 본시에 있어서는 목자의 위전과 목관의 양료를 달리 내도록 요구할 곳이 없어서 세 섬에서 방목하는 정사(政事)는 장차 철파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계유년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궁방에서 절수하게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의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또 상소하여 다시 사핵(査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돈독하게 유시하고 다시 사핵하도록 윤허하였는데, 마침내 사실이 없었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같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관동 이정사(關東釐正使) 김양택(金陽澤)은 외임(外任)이 되었으니, 서지수(徐志修)를 대신 차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지금 미처 표석(表石)을 세우지 않은 능(陵)이 모두 열두 곳입니다. 현릉(顯陵)·광릉(光陵)·경릉(敬陵)·창릉(昌陵)은 이미 비(碑)를 세우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신의 생각으로는 네 능 밖에 후릉(厚陵)·선릉(宣陵)·정릉(靖陵)도 내년 봄에 마찬가지로 비를 세우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고 상신 송인명(宋寅明)이 일찍이 서인수(徐仁修)에게 곧바로 수령을 제수하기를 청했었습니다. 전 주부 서유호(徐有祜)도 서인수의 예에 따라 곧바로 수령을 제수하여 관향(官享)으로 국구(國舅)의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고 진사 신경(申炅)은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아들로 일찍이 선정신 김집(金集)을 사사(師事)하며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한때에 뚜렷이 일컬어졌는데, 병자년207) ·정축년208) 의 난리 후에는 뜻을 끊고 벼슬하지 않은 채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를 지었습니다. 의리를 지키고 강상을 부지한 것이 이처럼 뛰어난데도 지금까지 묻혀 있었으니, 참으로 성세(聖世)의 흠전(欠典)입니다. 특별히 벼슬을 추증하여 장려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또 추영(追榮)209) 이 남잡(濫雜)한 것을 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각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병조에 첩정(牒呈)하게 한 것은 대개 체통을 존중하는 까닭인데, 단지 대장이 첩정하면 일에 막히는 것이 많고, 또 묘당에 견주어 도리어 존중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뒤로는 낭청으로 하여금 첩정하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의 비국은 곧 묘당입니다. 묘당은 체통이 저절로 다른데, 다른 관사에서 이관(移關)하면 사체가 미안하니, 이 뒤로는 여러 상사(上司)와 도제조의 아문(衙門)을 물론하고 모두 낭청으로 하여금 첩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고 동의금 정광제(鄭匡濟)는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는데, 어버이를 잃고 주갑(周甲)이 되는 해에는 뒤좇아 3년을 복상(服喪)하였습니다. 고 판서 김유경(金有慶)의 예에 의거하여 정려(旌閭)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하교하기를,
"이최중(李最中)·송영중(宋瑩中)·홍준해(洪準海)·송문재(宋文載)·이의철(李宜喆) 등은 벌을 이미 베풀었으니, 구애하지 말고 옥당(玉堂)에 주의(注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다섯 사람이 모두 당록(堂錄)에 들었으나, 일찍이 뜻을 거슬렀다 하여 전조에 명하여 가장 뒤에 수용(收用)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관이 아룀으로 인하여 이 명이 있었다.
12월 25일 기사
호랑이가 국사(國社)에 들어갔다.
박사눌(朴師訥)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이때 이천보(李天輔)를 조사하는 일로써 사람들이 모두 법관(法官)을 싫어하여 피하였으므로, 네 번 참의를 바꾸었으나 모두 외방에 있다고 핑계하니, 국가의 기강이 해이한 것을 식자가 한심하게 여겼다.
형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국가를 위하여 대체(大體)를 매우 아깝게 여기는 구구한 소견이 있습니다. 대저 대신의 체모가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참으로 사핵하게 한 일은 어두워 알 수 없는데, 대신이 오히려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면 이는 대신이 임금을 속인 것이니, 대신의 반열에 있더라도 당당한 국가에서 죄줄 수 있어야 마땅합니다. 더구나 대조(大朝)께서 깊은 밤에 정섭(靜攝)하시는 가운데 세 당상에게 회좌(會坐)하여 사핵(査覈)하도록 명하시기에 이른 것은 그 사체의 중함이 과연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정승이 차자를 올려 스스로 다시 사핵하기를 청함으로 인하여 이 처분이 있게 되었으니, 대신이 비록 중하지만 오히려 국가의 체통이 지극히 중한 것만 못한데, 조정에서는 이미 포장(捕將)에게 함문(緘問)하였습니다. 강가(姜哥)·고가(高哥)를 물론하고 그 사이의 곡절을 포장인 자가 결코 모를 리가 없는데, 이제 또 고가 놈의 미천한 딸들을 가지고 이미 사문(査問)한 무리를 한 번 사문하고 다시 사문하는 경우 국가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이 극도에 달할 것이니, 신은 사방에서 듣는 것이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언자를 위할 처지도 아니고 대신을 위할 처지도 아닙니다마는,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대체입니다. 오로지 저하께서 대조께 여쭈어 재처(裁處)하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임금이 듣고 가져다 보고 그 체통을 유지한 것에 대해 가탄(嘉歎)하였다.
지평 김시묵(金時默)이 상서하여 조영순(趙榮順)을 신구(伸求)하니, 왕세자가 감싼다고 꾸짖었다.
12월 26일 경오
형조 판서 김상성(金尙星) 등에게 명하여 이천보(李天輔)의 일을 다시 사핵(査覈)하게 하였다. 김상성이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참판 이성중(李成中)·참의 박사눌(朴師訥)과 함께 이천보의 첩 이녀(李女)의 의육촌(義六寸)인 고대성(高大成)의 족속을 사문(査問)하였는데 공초(供招)가 처음과 같았으며, 그때의 포장 정찬술(鄭纘述)에게 함문(緘問)하였는데 대답이 또한 처음과 같았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영상이 반드시 신백(伸白)하고자 하므로, 다시 사핵하는 일이 있었으나, 나라의 체통을 손상한 것은 크다."
하고, 관련되어 사문한 자를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 김상성이 말하기를,
"대신이 다시 사핵하기를 스스로 청하고, 성상께서 특별히 명하여 다시 사핵하게 하시고, 신이 명을 받아 다시 사핵한 것은 군신 상하가 모두 쇠미(衰微)한 세상의 일을 한 것임을 면하지 못하나, 이것은 오히려 작은 일일 뿐입니다. 대신·경재(卿宰)가 법을 어겨서 논할 만한 일이 있으면, 오직 대각(臺閣)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대각으로서 죄를 받은 자가 전후에 서로 잇달았는데, 저들이 과연 당심(黨心)에서 나왔다면 진실로 죄줄 수 있겠지만 일을 가리켜 논열(論列)하였다면 그 허실(虛實)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처치해서 재상과 대각이 서로 견제하게 한 후에야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귀양보내는 것은 사지(死地)에 두려는 것이 아닌데, 한추위·한더위에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하면, 또한 어찌 길에서 죽을 걱정이 없겠습니까? 이것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가 이미 뉘우쳤으니, 뒤에는 명심하겠다."
하였다.
12월 27일 신미
평안 감사 이태중(李台重)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영(本營)은 전포(錢布)의 번식(繁殖)이 본래 우리 나라에서 첫째로 일컫고 있는데, 조정에서 이 때문에 그 선임(選任)을 더욱 중하게 여겼고, 종전에 직임을 받은 신하들도 모두 재지(才智)와 계모(計謀)가 넉넉하여 용도(用度)에 절제가 있어서 잉여(剩餘)를 많이 쌓았으므로, 드디어 별비(別備)라는 지목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소(多少) 풍약(豊約)은 사람마다 달랐지만, 별비 두 자는 등록(謄錄)에 굳게 정해져서 조정에서 가져다가 쓰는 것이 마치 상공(常貢)·정부(正賦)가 변하지 않는 법에 실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의 졸렬하고 모자라는 계책으로는 능력을 다하려 하더라도 참으로 미칠 수 없으나, 평소의 구구한 소견에는 또한 지키는 것이 있습니다. 전에 공무로 가거나 귀양가는 길에 이 곳을 왕래한 것이 여러 번이었는데, 그때의 도신과 이 일을 언급하였더니, 망령되게 말하기를, ‘대저 재화(財貨)는 위에 있지 않으면 아래에 있으므로, 위에서 모으려 한다면 백성에게서 가져가야 할 것이다. 또 그 이름이 번진(藩鎭)에서 남은 것을 바치는 것과 비슷하여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모두 불편한데, 어찌하여 선처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부임한 이래로 해마다 회록(會錄)한 것을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들어올 수에서 지급할 것을 계산하여 제하면 매우 현격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만악 이름을 바꾸어 이식을 취해서 사단(事端)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노심 초사하여 조금도 남기지 않더라도 참으로 그 10분의 1을 감당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또 절생(節省)하고 검약(儉約)하지 못하여 이제 열 달이 지났지만, 상봉(常俸)을 감소한 것이 거의 천계(千計)를 넘었으며, 경비(經費)도 따라서 군색합니다. 재능이 넉넉하여 절약하는 데 알맞은 자로 담당하게 하면, 또한 어찌 절약하고 바꾸어 용이하게 변통하여 국가의 수용(需用)에 보탬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떠나야 하는 까닭입니다."
하였는데,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28일 임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친림(親臨)하여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이최중(李最中)·홍준해(洪準海)를 교리로, 이의철(李宜哲)·심관(沈鑧)을 수찬으로, 윤득양(尹得養)을 부수찬으로, 김상경(金相慶)·원인손(元仁孫)을 정언으로, 정석천(丁錫天)을 지평으로, 남학종(南鶴宗)·남혜로(南惠老)를 장령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집의로, 서명신(徐命臣)을 대사성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대사간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대사헌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홍계희(洪啓禧)와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정사(政事)를 주관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관동(關東)의 상정(詳定)에 관한 일을 묻고자 하여 수령을 올려보내라는 명이 있었는데, 횡성 현감(橫城縣監) 정존겸(鄭存謙)이 차원(差員)으로서 올라왔다. 임금이 불러서 묻기를,
"관동에 상정법을 반포하여 시행한 뒤에 백성이 과연 편리하게 여기는가?"
하자, 정존겸이 말하기를,
"근래에 삼 값은 날로 올라 가고 부렴(賦斂)은 절제가 없으므로, 백성이 지탱하여 감당하지 못하고 거의 다 유망(流亡)하였었는데, 이번에 새로 상정한 뒤에는 각 고을의 출부(出賦)를 그 고을의 규모에 따라 균등하게 하고, 여러 가지 공용(公用)은 낱낱이 수효를 정하여 재절(裁節)하니, 푼돈이나 됫쌀도 수령이 마음대로 그 사이에서 가감할 수 없으며, 부족한 수는 국가에서 여러 가지 돈 1만 7천 8백 50여 냥을 획급(劃給)하여 민폐를 막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다 편리하게 여겨서 오로지 오래 시행되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돌아가거든 관동 백성에게, ‘우리 임금이 영구히 준행할 것이니 너희들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라."
하였다. 정존겸이 상정의 홀기(笏記)를 읽어 아뢰었는데, 제3조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인삼 1냥 값을 이제 60냥으로 규례를 정하였으나, 이 뒤로 인삼이 혹 비싸지면 1백 냥에 이르도록 많아질 것이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균역 당상(均役堂上)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이번 상정에 가감하지 못하게 한 것은 백성을 위하여 폐단을 없애려는 까닭입니다. 삼 값이 비싸지면 혜청에서 마땅히 좋은 데 따라 구획할 것입니다. 어찌 백성에게서 더 거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존겸이 또 환곡(還穀)은 많은데 백성은 적은 폐단을 말하니, 임금이 묘당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관동의 삼공(蔘貢)은 한 도의 큰 폐단이었다. 대개 땅에서 생산되는 삼은 한정이 있는데, 세상에서 삼을 쓰는 것은 절제가 없어서 그 형세가 날로 비싸지고 해마다 비싸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 획급하는 값이 60냥에서 80냥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에서 획급하는 것은 80냥에서 그쳤는데, 민간에서 거두는 것은 점점 더하여 1백 20냥이 되고, 또 점점 더하여 1백 5, 60냥이 되었다. 성상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관동 백성이 대부분 매우 위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날마다 묘당에 호소하였으나, 묘당에서도 어찌할 수 없어서 버려둘 뿐이었다. 그렇다면 성상께서 뒷날 비싸질 것이라고 염려했던 것은 대성인(大聖人)의 장구한 계모(計謀)를 볼 수 있는 것인데, 일을 맡은 신하는 오직 그 재능을 자랑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영구히 폐단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아! 변변치 못한 사람이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12월 29일 계유
승문원에서 아뢰기를,
"황력 재자관(皇曆齎咨官)이 예부의 자문(咨文) 2도(道)를 가져왔는데, 그 하나는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가 갈 때에 가져간 주문(奏文)과 방물(方物)을 받은 것을 알리는 것이고, 그 하나는 사신에게 상을 내려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이는 일이 지난 뒤 추후에 자문을 보낸 것이지만, 이미 온 뒤에는 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따로 회자(回咨)를 지어 정서(正書)하여 안보(安寶)210) 하고 특별히 금군 기발(禁軍騎撥)을 정하여 사은사(謝恩使)가 도착해 있는 곳에 보내 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2월 30일 갑술
정언 원인손(元仁孫)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 이래로 인심이 날로 나빠지고 세도(世道)가 날로 더러워져서 변괴가 갖가지로 나타나고 국법이 어지러워지고 있으니, 아! 또한 한심합니다. 이번에 추조(秋曹)에서 다시 사핵(査覈)한 것은 조리가 명백하여 처음 사핵한 것과 아주 다른데, 일월(日月)이 혁연히 비추어 밝히지 못하는 물건이 없으시니, 황홀(怳惚)한 정상이 어찌 감히 도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정승 집의 주혼(主婚)한 사람이 갑자기 옥에 들어가 마침내 병들어 죽었으니, 포장(捕將)인 자가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저 포장은 무변(武弁)으로서 머리가 하얗게 되고 칠순(七旬)에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지만, 특교(特敎)를 내렸는데도 그 함대(緘對)한 것은 돌아보며 군색하게 피하는 것으로서, 명백하고 정직하게 임금에게 고하는 의리가 전혀 없었으므로 진실로 이미 놀라운데, ‘양제(亮濟)를 염탐하느라 다른 일에는 겨를이 없었다.’고 한 것은 더욱 사리에 맞지 않았습니다. 대저 염탐은 포교(捕校)·포졸(捕卒)들을 지휘하는 데 지나지 않으므로 몸소 거행하는 것이 아닌데, 긴 수순(數旬) 동안에 어찌 잠시 반문(盤問)할 틈이 없었겠습니까는, 묻지도 않고 놓아 보내지도 않은 채 일부러 굳게 가두어 저절로 죽게 하였으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포장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은 전 포장 정찬술(鄭纘述)을 삭출(削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도둑을 다스리는 법이 근일보다 해이한 적이 없고 도둑을 빙자하는 폐단이 근일보다 참혹한 적이 없으므로, 눈을 부릅뜬 포교를 마치 염라(閭羅)의 귀졸(鬼卒)처럼 여기니, 불쌍한 죄 없는 백성이 장차 손을 댈 데가 없어질 것입니다. 국가에서 포청을 설치한 것이 어찌 참으로 그렇게 하게 한 것이겠습니까? 이 폐단은 엄히 막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요얼(妖孼)·폐첩(嬖妾)이니 뇌물이 날마다 모여든다느니 하는 등의 말이 이미 옥당의 상서에 올랐고 대관(大官)이 이예보(李禮輔)의 성명을 연석(筵席)에서 제기하여 아뢰었는데도 그가 감히 의관(衣冠) 반열에서 뽐내고 있으니, 나라에 법이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간사하게 속이는 것을 의지하여 믿고 추악한 짓을 저지르는 온갖 정상에 대해 원망하여 분개하고 비웃는 것이 물끓듯이 시끄러워서 막기 어려운 입과 움킬 수 있는 손가락을 가려 막을 수 없습니다. 아! 유신(儒臣)은 멀리 바다를 건넜는데 하찮은 이예보는 오히려 왕법(王法)을 피하였으니, 풍속을 어지럽히고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이 무엇인들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신은 빨리 명하여 도배(島配)하게 하시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천(木川)의 화약(火藥)을 잃은 과실은 얼마나 놀랍고 염려되는 것이겠습니까? 무신년211) 담양(潭陽)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오싹해집니다. 기한을 작정하여 잡으라고 엄한 조정의 명령이 있었는데, 두어 달 동안 옆에서 얻어 들은 것은 아직도 고요하여 기한을 어겨 지체하고 있으니, 경책(警責)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신은 당해 수신(帥臣)·영장(營將)을 모두 견벌(譴罰)하여 삭직(削職)하고, 본도에 다시 신칙해서 곧 염탐하여 잡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상서가 들어가니, 왕세자가 승지로 하여금 읽게 하였다. 묻기를,
"양제가 누구인가?"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양제는 왕년의 국수(鞫囚) 이양제(李亮濟)인데, 정찬술의 함사(緘辭)에, ‘양제를 잡느라 고대성(高大成)을 구문(究問)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대신을 무함하려는 데에 뜻이 있었다 하여 그 상서를 도로 주고 원인손을 체차하였는데, 뒤에 삭직시키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년은 광묘(光廟)께서 즉위하신 해이다. 쇠약한 내가 어찌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겠는가? 2월에 광릉(光陵)에 전알(展謁)할 것이니, 본릉(本陵)의 표석(表石)을 세우는 일을 먼저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나의 작년은 옛 경자년212) 과 같고, 명년은 곧 옛 을유년213) 과 같은데, 한 해가 이제 저물어가고 있으니, 나의 슬픈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다. 세초(歲初)에 태묘에 전알할 것이니, 마땅히 을유일에 하도록 하고, 원량(元良) 또한 수가(隨駕)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의 재실(齋室)에 나아가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열조(列祖)와 우리 성고(聖考)께서 부덕한 나에게 백성을 맡기셨는데, 돌보지 않는다면 참으로 오르내리시는 신명을 저버리는 것이니, 이제 만년에 어찌 차마 그럴 수 있겠는가? 특별히 진전(眞殿)의 재실에 앉아 제도(諸道)에 권농(勸農)하니, 아! 도신·유수·수령들은 나의 뜻을 본받아 제언(堤堰)의 정사(政事)와 곡식을 저축할 방도에 각각 척념(惕念)하라. 아! 원량(元良)도 공경히 따라야 마땅하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팔도의 어전(漁箭)·염분(鹽盆)을 다 균청(均廳)에 붙인 것은 대개 백성을 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듣건대,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과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 다시 사사로이 어전·염분을 사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하여 그치지 않으면 해부(海夫)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모두 엄중히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군문(軍門)의 낭청(郞廳)이 체례(體例)를 엄중히 하지 않는 것은 장막(將幕)을 존중하는 뜻이 아니라 하여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아울러 종사관(從事官)으로 계하(啓下)하고, 정식(定式)을 삼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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