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 1755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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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을사

임금이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 두 공주의 사당에 나아갔다가 지나는 길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집에 들렀다. 명선 공주·명혜 공주는 바로 현종(顯宗)의 따님으로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다. 임금이 그 묘우(廟宇)가 황폐하고 쓸쓸하다고 여겨 직접 임어(臨御)하여 경계시켰다.

 

내시를 보내어 명안 공주(明安公主) 및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전 세마(洗馬) 오재순(吳載純)·전 현감 오재유(吳載維)를 소견(召見)하고, 특별히 오재순은 6품으로 승진시키고 오재유는 견복(甄復)하도록 명하였는데, 오재순과 오재유는 바로 명안 공주의 손자이다.

 

교리 이최중(李最中)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소보(小報)를 보니, 명선 공주·명혜 공주 두 공주의 묘우(廟宇)가 쓸쓸하다는 것으로 친히 임어하겠다는 명을 내리는 데 이르렀습니다. 우리 대조(大朝)의 선대(先代)를 추모하는 돈목(敦睦)한 의리를 누군들 공경하며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인군(人君)이 한번 움직이는 데는 저절로 의도(儀度)가 있으니 만일 수거하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유사(有司)가 받들어 행할 수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성궁(聖躬)이 스스로 수고로움을 끼치려고 하는 데 이르십니까? 영(令)이 갑작스럽게 내려져 삼군(三軍)이 미처 대열(隊列)을 이루지 못하며, 모든 관사가 일을 추진할 겨를이 없어 청문(聽聞)이 요란하고 기상(氣傷)이 허둥지둥하니, 아마도 길가의 먼지를 깨끗이 하고 화란(和鑾)036)  을 울리는 절차에 부족함이 있을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조(大朝)께 우러러 품(稟)하여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성명이 내려졌으면 우러러 품하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답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임금의 이번 일은 보고 듣는 이를 크게 놀라게 하였으니, 직임이 논사(論思)하는 데 있다면 어떻게 한마디도 없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소조(小朝)께서 감히 우러러 품하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서 문서로 대응하여 진달하였으니, 정성스럽지 못함이 이보다 더 클 수는 없다. 어찌 직접 대조(大朝)께 차자를 올리거나 혹은 청대(請對)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보탬이 없는 말을 하는가? 애석하도다.

 

2월 2일 병오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지난번에 각 고을에서 꼴을 쌓아 두는 일로 대조(大朝)께 우러러 품(稟)하고 제도(諸道)에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러나 들으니, 각 고을에서 이 영(令)을 빙자하여 볏짚[藁草]을 민결(民結)대로 바치게 하므로 민간에서 소란스러운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각 고을로 하여금 봄에 대여해 준 뒤에 관에서 쓰던 빈 멱서리[空石]를 그 쓰고 남은 대로 해마다 쌓아 두게 해서 급할 때를 대비하도록 하여 민폐(民弊)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통신사(通信使)에 대하여 그 물자를 후하게 하고 그 행차를 사치스럽게 한 것이 연경(燕京)에 가는 사신과 비교하면 대우를 받음이 특이하였습니다. 그래서 각도의 영읍(營邑)에서 백성들에게 강제로 재물을 빼앗는 것과 연로(沿路) 주현(州縣)에서 제공하는 비용이 엄청난데, 영남에 이르러서는 통신사의 행차가 한번 지나가면 한 도의 재력(財力)이 거의 떨어진다고 하니, 이는 관부(官府)만 폐해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가 백성들이 피땀흘려 얻을 이익에서 나온 것이니, 조정에서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 바로잡아 고치는 것이 마땅하겠으니, 홍봉한(洪鳳漢)·이성중(李成中)·한익모(韓翼謨)·김치인(金致仁)으로 하여금 각도의 식례(式例)를 가져다 열람하게 하여 상의하여 줄이도록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총융사(摠戎使) 홍봉한(洪鳳漢)이 영남의 무인(武人) 유이주(柳爾胄)의 용력(勇力)이 매우 뛰어나 일찍이 조령(鳥嶺)에서 채찍으로 호랑이를 쫓아냈음을 성대하게 말하니, 임금이 유이주를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조령에서 호랑이를 쫓아낸 상황을 진달하도록 하였으며, 또 그로 하여금 병서(兵書)를 읽어보게 하고, 이어서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2월 4일 무신

민우수(閔遇洙)를 대사헌으로, 권상일(權相一)을 대사간으로, 이득종(李得宗)을 승지로, 조명리(趙明履)를 우윤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조운규(趙雲逵)가 나주의 객사(客舍)에 흉서(凶書)가 걸린 변고를 치달(馳達)하니, 임금이 좌포장(左捕將)·우포장(右捕將) 및 본도 감사에게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기찰하고 체포하도록 하였다. 당시 신축년037)  ·임인년038)   때의 여당(餘黨)과 무신년039)   때의 유얼(遺孼)로 번성한 무리가 있어 나라를 원망함이 날마다 심각하고 근거없는 말이 날마다 일어나므로 식견이 있는 자가 걱정을 하였었지만 상하(上下)가 편안하게 여기고 걱정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흉서를 걸어 둔 변고가 있었다. 글의 내용 가운데 간신(奸臣)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임금이 좌의정 김상로(金尙魯), 우참찬 홍봉한(洪鳳漢), 형조 참판 이성중(李成中) 등을 불러 장달(狀達)한 것을 보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황건적(黃巾賊)의 유인데, 틀림없이 무신년 때의 여얼(餘孼)이다. 그러나 무신년에 최규서(崔圭瑞)가 고변(告變)하였을 적에도 나는 오히려 동요되지 않았으며, 오광운(吳光運)·홍경보(洪景輔)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마음이 동요되겠습니까? 이는 오로지 인심을 동요시켜 동정(動靜)을 관찰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흉서의 자획(字畫)이 찍어낸 것과 같은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자, 승지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본래 쓴 필적을 감추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니,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 구선행(具善行)·우변 포도 대장(右邊捕盜大將) 이장오(李章吾)를 입시하도록 명하고, 흉서의 자획을 보이며 기한을 정하여 염탐해서 체포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이제 회갑을 지냈는데,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한 가지도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없어 마음에 늘 스스로 부끄러웠었다. 백수(白首)가 된 늙은 나이에 장차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역경(易經)》의〉 함(咸)·항(恒)·괘(卦)에 남녀가 있은 연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연후에 부자(父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 부부의 즐거움을 모르는 자로는 시노비(寺奴婢)만한 자가 없으니 더러는 나이 이미 50세인데도 아직 처녀로 있기도 하고 더러는 심지어 다른 사람을 남편이라고 말하기도 하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밥이 어찌 목구멍으로 내려가겠는가? 비국 당상 가운데 홍봉한·이성중·김치인을 구관 당상(句管堂上)으로 삼아 공천(公賤)·사천(私賤)을 논하지 말고 공포(貢布)를 줄여 주도록 강정(講定)하고 서울에 있는 대신들과 의논하여 등대(登對)해서 품하여 처리 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당시 양역(良役)은 모두 절반을 감해 주었으되 유독 공천·사천의 신공(身貢)만 치우치게 과중하였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다.

 

2월 6일 경술

지평 조엄(趙曮)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하께서는 대조(大朝)의 부탁하신 중대함을 받으셨으니 서정(庶政)을 대리(代理)하는 도리는 반드시 학문을 부지런히 하는 한 일에 근본합니다. 그래서 연대(筵對)를 하거나 그만둠이 일정함이 없으면 강마(講磨)하고 토론하는 공부가 날마다 진취하기를 바라기 어려우며, 궁료(宮僚)를 인접함이 매우 적으면 환관과 궁녀를 가까이하는 시간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건대, 양연(兩筵)을 정지한 것은 예후(睿候)가 불편하신 원인이 많은데 질병에 걸리는 것은 진실로 성인도 모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저하의 경우는 바야흐로 한창인 시절을 당하여 원기(元氣)가 여러 번 어긋났으니, 진실로 손상을 입은 근원이 없으면 어떻게 법도를 실수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자질로 죽을 죄를 지으면서 가만히 생각건대, 절선(節宣)하는 방법에 실수가 있고 보호하고 아끼는 도리가 미진해서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도 나이가 젊은 때에는 기욕(嗜欲)에 손상당하는 바가 되기 쉬운데, 하물며 제왕가에서 화려한 가운데 거처하는 경우이겠습니까? 가령 신의 말이 혹시라도 지나친 염려에서 나온 것이라면 참으로 그것이 다행이겠으나 만일 그것이 근사하다면 어찌 종사(宗社)의 근심이 아니겠습니까? 저하께서 오직 병이 날까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더욱 근신하고 조섭하는 방법을 염려한다면 신민(臣民)의 매우 다행스러움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아! 오늘날 국가의 일은 끝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해와 달이 빛을 가리웠으며 별과 무지개가 요사스러움을 펴서 상천(上天)의 경고가 거의 없는 해가 없는데, 하늘에 대응하기를 성실한 정치로 하는 것은 지금까지 보질 못했습니다. 대낮에 성문 사이에서는 맹수가 이리저리 다니니 음기(陰氣)가 성함을 징험할 만하며, 밤에는 곤방(坤方)040)  과 손방(巽方)041)  에서 화기(火氣)가 가끔 나타났으니, 점(占)으로 구경할 수 있는 형상은 알 만합니다. 그 밖에 다른 놀라게 여길 만한 변고는 이루 손가락을 꼽아가며 셀 수 없을 정도인데, 잠자코 조정의 기상을 관찰해 보면 어떤 한 가지 일을 계획하고 한 가지 계책을 진달하여 재앙을 없애고 그치게 하는 방법으로 삼는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만약 선정신 조헌(趙憲)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면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리는 거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 조정은 사방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조정이 올바릅니까, 올바르지 않습니까? 징계와 성토가 엄격하지 않아 난역(亂逆)이 두려워함이 없으며, 기강이 진작되지 않아 여러 가지 공적이 좀스러우며, 용렬한 사람이 등용되어 명기(名器)가 크게 모람되었고, 아첨하며 진출하기를 다투어 청렴한 절개가 크게 무너졌으며, 세금은 번거롭고 역사는 과중하여 백성들의 고달픔은 구제할 수 없고, 문관과 무관은 직무를 게을리하여 강도와 절도가 생겨나는 근심을 금하기 어려우니, 이는 바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밤낮으로 힘을 쓰며 두루 다스릴 계책을 강구하여야 하는데, 저하께서는 위에서 잠자코 팔짱만 끼고 있으며 뭇 신하들은 아래서 눈앞의 안일만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대(次對)는 바로 국가의 정무를 재단(裁斷)하는 하나의 큰 정사(政事)인데도 낭묘(廊廟)에서의 큰 모의가 자질구레한 일로 책임이나 모면하고 그치는 데 불과하니, 이와 같이 하고서 어떻게 국가의 형세를 튼튼히 하고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아! 오늘날에 대각(臺閣)이 되기도 또한 어렵습니다. 곤직(袞職)042)  에 궐원(闕員)이 있는데도 감히 보임(補任)하도록 하지 못하고 공경(公卿)의 실수도 감히 바로잡지 못하며 간혹 말을 발설한 자가 조금이라도 대관(大官)에 관계되면 반드시 협잡이라고 배척하고, 당습(黨習)으로 귀착되게 합니다. 앞뒤로 귀양을 보내어 남이 하는 일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하게 되니, 저 국사를 말하는 언관(言官) 또한 사람입니다. 어찌 그 당(黨)을 사랑하기를 자신보다 심하게 하며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을 달갑게 여김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대각의 세력은 빼앗기게 되고 재상의 권력은 더 커지게 되어 거의 남의 말을 염려할 만한 것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는 데 이르렀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습니까? 신이 영의정의 전후에 스스로 변명한 글을 얻어다 보았는데, 어찌 그렇게도 대신이 지녀야 할 체모를 잃어버렸습니까?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을 써야 할 뿐인데 대단한 기세를 뿜어내어 이미 듣는 이를 놀라게 한 것이 많으며, 인용한 바 구양 수(歐陽脩)의 고사(故事)는 은연중에 언관을 힐문하라는 뜻이 있으니, 만약 대신을 논박하였다고 하여 번번이 힐문하기를 청한다면 뒷날 끝없는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김상도(金相度)의 글 가운데 한 귀절의 내용은 참으로 과거에 대한 보편적인 말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괜찮을 것인데, 시의(時議)가 갈수록 더욱 엄중히 하려고 한다 하니 어찌 그리도 지나치게 염려합니까? 나에게 의심할 만한 자취가 없다면 편안하게 한번 웃고 말아야 할 터인데 간신(諫臣)이 제기하지 않은 일을 또 무엇 때문에 먼저 의심하면서 제기하여 혹시라도 말이 있을까 두려워합니까? 당록(堂錄)을 회권(會圈)하는 것은 그 법이 아주 엄격하니 공좌(公座)에 편지를 전하는 묘당(廟堂)의 추천은 옳습니다. 하지만 영선(瀛選)의 경우 옛날에는 이런 사례가 없었으며 또 그가 천거한 바는 곧 인척과 매우 가까운 친구였으니, 조중명(趙重明)이 사사로운 편지라고 이른 것은 진실로 그것이 당연한데 지나치게 의심과 노여움을 더하여 장황하다는 것으로 말을 하고 마침내는 언관을 처벌하는 데 이른 뒤에야 그만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 대각의 중요함은 재상과 같습니다. 말이 승여(乘輿)043)  에 관계되면 현명한 군주는 오히려 얼굴빛을 고치는데, 대신이 된 자가 만약 다른 사람의 말이 자신을 핍박한다고 하여 번번이 얼굴빛과 말을 허비하면서 천청(天聽)을 놀라게 하고 동요되게 하여 언관(言官)의 기세를 꺾어 기필코 중한 처벌에 빠뜨리려고 한다면 일이 낭묘에 관계되는 것은 한 세대에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터이니, 이것이 어찌 대신이 세상을 염려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옛날의 대신은 비록 탄핵하는 논의가 있어도 오히려 말하는 사람이 혹시라도 다칠까를 두려워하였는데 오늘날 삼사(三事)044)  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일체 이하는 반대가 되니, 이와 같이 하고서 언로(言路)가 어디로 말미암아 열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실로 걱정스러워 탄식합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조정에 곧은 말을 하는 이가 없으며 남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함이 없고 한갓 이처럼 권세가 있는 집안에 아부하여 작록(爵祿)을 요행수로 취하기를 일삼으면서 인간에게 수치심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마음이 상함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조명채(曹命采)는 동서로 붙따르고 아부하여 지목(指目)이 낭자하니, 진실로 행실이 바르지 않고 부끄럼을 모르는 비루한 자인데도 통신사의 행차에 함께 수고한 것을 인연하여 외람되이 경연(經筵)에 통망(通望)되었으므로 공의(公議)가 놀라고 분해함이 많았으며, 일찍이 해서(海西)에 있으면서 잘 다스리고 있는 통판(通判)045)  을 파직시키도록 하여 내쫓고 그가 돌보던 바를 빼앗아 총애를 오로지하려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바랐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리고 황경원(黃景源)의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은 참으로 이른바 아첨 잘하는 사람으로 차마 바로 보지 못할 자입니다. 요로(要路)에다 발을 붙여 자신이 청현직(淸顯職)에 올랐으니, 조정을 높게 여기지 않음은 바로 이런 무리들 때문입니다. 국가의 전례(典禮)는 서로 회피하면서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며 하고 싶어하는 바를 행하고 부유한 역관(譯官)을 공(公)이라고 칭하는 일은 이서(吏胥)도 부끄럽게 여기는 바인데 만족스러워하니, 그 심술(心術)이 올바르지 못한 것과 정태(情態)가 미워할 만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도, 경월지반(卿月之班)046)  에 아직도 이렇게 용렬한 부류들이 있으니, 요행을 바라는 문이 어떻게 열리지 않을 수 있겠으며 세상의 도의가 어떻게 낮아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이조 참판 조 명채와 안변 부사 황경원은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법을 시행하여 말속(末俗)을 갈고 닦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총재(冢宰)047)  의 직책과 사마(司馬)048)  의 장(長)은 국가의 중대한 직임입니다. 그러므로 의망(擬望)하는 즈음에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하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이창의(李昌誼)는 명성과 인망이 없고 이철보(李喆輔)는 결점이 있는 자인데도 모두 외람되이 통망하여 물정(物情)이 놀랍게 여긴 지 오래 되었는데도 그치지 않으니, 아울러 의망에서 빼버리도록 하여 전선(銓選)을 소중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시끄럽고 사리에 어긋난다고 책망하여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번 광릉(光陵)에 거둥할 때에 공상(供上)하는 다담(茶啖) 등의 일은 청컨대 병진년049)  의 예에 의거 경사(京司)에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백상(閔百祥)을 도승지로 삼았다.

 

2월 7일 신해

정홍순(鄭弘淳)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균역청 당상관 홍봉한(洪鳳漢)을 불러 하문하기를,
"시노비(寺奴婢)에 대하여 공포(貢布)를 감해 주는 일은 두서(頭緖)가 잘 잡히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직 다 잡히지는 못하였지만 대략의 숫자로 말한다면 급대(給代)해야 할 사람은 애당초 헤아린 것보다 줄어들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반 필을 감하여 주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역시 잘하지 않았는가? 팔포(八包)050)  의 세 사람을 아울러 정한 것은 어떻게 바로잡아 고쳤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바치던 것을 네 사람에게 아울러 정하였는데, 관서(關西)의 경우 모두 복호(復戶)051)  가 있으니 감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복호는 바로 신공(身貢)을 면제해 주는 의미인데 노(奴)인 경우는 복호해 주고 비(婢)에게는 복호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전역(田役)은 복호를 해주고 신역(身役)은 면포를 징수하기 때문에 이것은 감해 줄 수 없으니, 북관(北關)·서관(西關)에는 단지 비(婢)의 신공만 감하여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수사(內需司)의 노비가 매우 많으니 우선 개정하여 식례(式例)를 정하고 여러 가지 물품을 바치는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것은 그대로 두고 바치지 말게 하며 지나친 것은 감해 주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비록 그 숫자는 감하여 준다 하더라도 명목은 영영 감해 줄 수 없으며, 면제해 주거나 감해 준 수를 내수사에 나누어 준 연후라야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수사 노비에 대해 급대(給代)한 수는 경오년052)  의 조목이 가장 많은 것으로 표준을 삼아 한 필이나 반 필 외에는 비록 1백 구(口)를 얻었다 하더라도 다시 묻지 말도록 하라. 내수사에서 이미 이렇게 하였으면 제궁(諸宮)에서는 미루어 이 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병조에서 급대(給代)를 마련할 때에 윤달은 논하지 말도록 한 것이 바로 경오년의 정한 제도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급대를 언제나 두 달치를 수송하는 것은 단지 구분하여 획정하기에 편리해서인데, 해조(該曹)에서는 당번(當番)의 분배(分排)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어서 매번 윤달이 든 해를 만나게 되면 번번이 윤달에는 급대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을 하니, 전후의 연청(筵請)이 비록 막힘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세월이 조금 오래 되어 법의 의미가 점차로 해이해지면, 해조에서 끝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과 본청(本廳)에서 끝내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릇 윤달은 5년에 두 차례가 되며 5년에 30번 분배하던 것을 31번으로 고치고, 뒤에 30번 올리고 내리던 것을 31번으로 올리고 내리는 수를 고친다면 윤달이 없는 해에는 비록 분배하는 수가 조금 줄어든 듯하지만 윤달이 든 해에는 문득 더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청의 1년 급대를 해조의 1년 응하(應下)053)  와 비교하면 본래 저절로 여유가 있으니, 비록 윤달의 급대가 없다 하더라도 충분히 미루어 계산해서 쓸 수가 있습니다. 다만 윤달을 계산하는 성법(成法)이 이와 같이 명백한 연후라야 해조에서 다시 청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이조 판서 김상성(金尙星)이 졸(卒)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조 판서가 정밀하고 자상하게 국가를 위한 일은 이미 알고 있다. 지난번에 입시하였을 때에 보고서 민망하게 여겼었는데, 이런 보고가 있을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매우 슬프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일들은 후히 하는 쪽을 따라 거행하며 나의 뜻을 표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김상성은 몸가짐이 정밀하고 대범하며 일 처리는 명백하고 민첩하게 하였다. 전후로 올린 말에 또한 곤직(袞職)이 비었다고 바로 진달한 것이 많아 임금이 의뢰하며 소중하게 여겼었는데, 미처 그의 기용을 강구하지 못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0책 83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58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김상성은 몸가짐이 정밀하고 대범하며 일 처리는 명백하고 민첩하게 하였다. 전후로 올린 말에 또한 곤직(袞職)이 비었다고 바로 진달한 것이 많아 임금이 의뢰하며 소중하게 여겼었는데, 미처 그의 기용을 강구하지 못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2월 8일 임자

임금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육상궁(毓祥宮)의 중삭제(仲朔祭)에 쓸 향(香)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또 명정전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기내(畿內) 백성으로 성(城)에 들어온 자를 불러다가 칠릉(七陵)의 비(碑)를 세우는 역사 및 능에 거둥하는 모든 일들이 민간에 폐단을 끼치지 않을 수 있느냐고 친히 하문하자, 모두들 폐단이 없다는 것으로 대답을 하니, 임금이 진실되지 못하다는 것으로 책망하며 말하기를,
"내가 당장 어사(御史)를 보낼 터이니, 만약 폐단을 끼친다는 말이 염탐하며 묻는 데 들어온다면 응당 너희 무리는 엄중하게 다스릴 것이다."
하고, 이어 필선 이기덕(李基德)에게 명하여 경기 지역을 암행(暗行)하여 염탐하며 살펴 오도록 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이때에 조정에서는 오로지 잘 보이고 기쁘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기 때문에, 무릇 백성을 불러다가 폐단을 하문하는 즈음에도 밖으로는 경기 감영, 안으로는 한성부에서 틀림없이 임금이 기쁘게 들을 말을 미리 백성들에게 가르쳤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진실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것도 임금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다. 대체로 홍수와 가뭄, 그리고 도적과 기근으로 병들어 괴로워하는 말을 일체 듣기를 싫어 했었기 때문에 신민(臣民)이 서로 본받아 상하가 서로 속이니, 이것이 어찌 주민들이 즐겁게 여기며 그렇게 하였겠는가? 그리고 어사인 자가 폐단을 몰래 살피기는 하지만 지금 백성들에게 대면하여 타이르며 또 응당 중벌이 있을 것이라고 말을 한다면 돌려가며 서로 전달하고 알릴 터인데, 누가 기꺼이 사실대로 어사에게 말을 하겠으며 어사 또한 누구를 따라 그 자취를 감추겠는가? 거듭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길 만하다.

 

권항(權抗)을 승지로 삼았다.

 

승지 송수형(宋秀衡)을 승진시켜 부총관으로 삼았다. 송수형은 문학(文學)과 재망(才望)이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는데, 특별히 나이가 많다는 것으로 임금이 가련하게 여겨 중비(中批)054)  하는 임명이 있었다.

 

2월 9일 계축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차자를 올려 조엄(趙曮)이 인용한 글을 혐의스럽게 여기며 심지어 이창의(李昌誼)의 자질과 명망, 그리고 언어와 논의는 쉽사리 많이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으로 말을 하여, 그가 전관(銓官)의 의망을 잘못 추천한 실수를 엄폐하려고 하므로 그를 비웃는 사람이 많았다.

 

2월 10일 갑인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자가 대가(大駕)를 수행하고 예(禮)를 집행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임금이 돌아와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 비국 당상 홍봉한(洪鳳漢)을 잡아 들이도록 하고서 조금 있다가 붙잡아 나가게 하였다. 임금이 대가를 돌릴 때에 금위(禁衛)의 진중(陣中)에 함부로 들어온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본병(本兵)이 단속하고 경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홍상한을 잡아 들이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본병(本兵)이 이미 중군(中軍)이 되었으면 법을 세우는 초기에 진실로 총괄하여 휘어잡아 즉시 나가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데, 명정전 문 밖에 앉아 있었으니, 금위 대장을 잡아다 엄중히 경계시키도록 하라."
하였는데, 총융사(摠戎使) 홍봉한(洪鳳漢)이 비국 당상으로 입시(入侍)하여 나아가 말하기를,
"명목은 비록 중군(中軍)이라고 하지만 이는 교장(敎場)과는 차이가 있는데, 병조 판서로 하여금 금위 대장을 잡아들이게 한 것은 아마도 불가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장수의 직임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이 많은가? 매우 방자하다."
하고, 홍봉한을 잡아들여 장차 곤형(棍刑)을 집행하도록 명하자, 비국 당상 이익정(李益炡)·조영국(趙榮國)·이성중(李成中)·한익모(韓翼謨)·김치인(金致仁) 등이 모두 홍봉한의 말이 자기의 의사를 잘 드러나게 진술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변명하며 구원하니, 임금이 홍봉한에게 아부한다고 책망하면서 혹은 체임시키고 혹은 파직시키도록 명하였다. 승지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홍봉한이 비국 당상으로 입시하였다가 총융사라고 하여 곤형을 집행하게 한 것은 아마도 지나친 일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진실로 공정한 말이다."
하고, 홍봉한을 잡아 끌어내어 그의 관직을 파면하여 의금부에 회부하게 하고, 정홍순은 한 자급(資給)을 승진하도록 하였으며, 여러 비국 당상을 체임하거나 파면시키도록 한 명을 도로 정지하게 하였다.

 

2월 11일 을묘

정언 김시묵(金時默)·부수찬 유한소(兪漢蕭)가 서로 잇달아 상서하여 조엄(趙曮)을 변명하며 구원하니, 왕세자가 변명하고 비호한다는 것으로 책망하였다.

 

홍봉한을 석방하여 전임(前任)을 다시 임명하고, 정홍순의 자급을 도로 거두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어가의 거둥이나 열무(閱武) 때에 대사마(大司馬)055)  가 중군(中軍)으로서 절제(節制)를 행하는 것은 임금의 명을 받드는 것이고, 여러 장령(將領)이 영장(營將)이 되어 절제를 받는 것은 임금의 말을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는 단지 오영(五營)을 통솔하여 거느릴 수 있게 할 뿐이었는데, 만약 일의 대소와 경중을 묻지 아니하고 일체를 그로 하여금 관장하고 단속하게 한다면, 이는 장령(將領) 위에 또 장령이 있는 격입니다. 본병(本兵)이 비록 중하지만 장령 또한 중합니다. 그래서 장령에게 죄가 있으면 성상께서 잡아오게 하는 것도 가하며 곤장을 집행하게 하는 것도 가하지만 본병에게 회부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고, 이어서 홍봉한을 잡아들인 실수 및 정홍순의 자급을 승진하도록 한 지나침을 말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전 지평 조엄을 전리(田里)로 방귀(放歸)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조엄의 상서를 가져오게 하여 열람하고 말하기를,
"조엄이 틀림없이 당론(黨論)의 그르친 바가 되어 조제(調劑)하는 사람을 모두 배척하였다."
하고, 이어서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전리(田里)로 방귀(放歸)하도록 명하였다.

 

금부 도사를 나주로 내려 보내어 윤지(尹志) 등 제적(諸賊)을 체포하게 하였다. 윤지는 역적 윤취상(尹就商)의 아들이다. 나주에 귀양을 가서 있으면서 몰래 역모를 품고 조정을 원망하며 같은 무리들과 체결하여 흉서(凶書)를 펼쳐서 걸었으므로, 전라 감사 조운규(趙雲逵)가 그 정황을 알아내어 조정에다 치주(馳奏)하니, 임금이 즉시 발포(發捕)하도록 명하였다.

 

2월 12일 병진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동경연(同經筵) 오수채(吳遂采)가 말하기를,
"장신(將臣)에게서 밀부(密符)056)  를 빼앗을 적에는 으레 표신(標信)057)  을 내리는데, 장신과 선전관(宣傳官)이 각기 칼을 빼어 교부(交付)하니, 사체(事體)의 중대함이 어떠하다고 하겠습니까? 며칠 전에 금위 대장 구선행(具善行)을 잡아들일 때에는 단지 영전(令箭)만 보고서 밀부를 풀어서 바쳤다고 하니, 구선행의 일은 장신의 체모를 크게 상실하였기에 책벌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구선행을 중추(重推)하도록 명하였다. 오수채가 또 말하기를,
"홍봉한이 조복(朝服)으로 입시하였다가 군율(軍律)로 잡혀 들어갔으니, 온당함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리고 홍봉한의 지처(地處)가 과연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처(地處)’ 두 글자는 사체(事體)를 크게 상실하였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홍계희(洪啓禧)에게 하문하기를,
"경(卿)이 균역법 시행 때문에 고생하였는데, 시노비(寺奴婢)에 대하여 신공을 감해 주는 일은 어떠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급대(給代)한 자는 달리 출처가 없으니, 아마도 성취할 기약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신만(申晩)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이상윤(李尙允)·구수국(具壽國)을 지평으로, 남태회(南泰會)·홍명한(洪名漢)을 교리로, 윤득우(尹得雨)를 부교리로, 황인검(黃仁儉)을 부수찬으로, 권일형(權一衡)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2월 13일 정사

경기 어사 이기덕(李基德)·함경도 어사 서명응(徐命膺)이 복명(復命)하였다. 서명응은 갑술년058)   겨울에 명을 받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조정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소견하고 서계(書啓)를 읽도록 명하였는데, 의거할 데 없는 돈[無依錢]이란 조목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의거할 데 없다[無依]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자, 서명응이 대답하기를,
"정익하(鄭益河)가 함경 감사로 있을 적에 교제창(交濟倉)의 돈을 민간에 나누어주고 그 이자를 받아서 썼는데, 해가 오래 되고 주민들이 가난해져 한층 더 바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아직 거둬 들이지 못하고 모두 의거할 데가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의거할 데 없다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측연(惻然)하게 여기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북쪽의 백성들이 만약 이 때문에 보전할 수 없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풍양(豊壤)의 구지(舊址)를 보겠는가?"
하고, 즉시 탕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병사(兵使) 정여직(鄭汝稷)에게는 특별히 숙마(熟馬)를 내려 주고, 영흥 부사 이방수(李邦綏), 길주 목사 이은춘(李殷春)에게는 새서 표리(璽書表裏)059)  를 내려 주었으며, 이성 현감 이숙(李潚), 삼수(三水)의 전 부사 김광백(金光白)은 아울러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조처하도록 하였는데, 서명응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포폄(褒貶)한 것이었다. 이기덕은 서계가 없고 단지 한두 가지의 민폐(民弊)를 구두로 진달하였다.

 

2월 14일 무오

김형로(金亨魯)를 경기 수사로, 정덕명(鄭德鳴)을 황해 수사로, 이방수(李邦綏)를 충청 수사로 삼았다.

 

2월 18일 임술

임금이 광릉(光陵)을 배알(拜謁)하였다. 인시(寅時)에 임금이 융복(戎服)을 갖추고 빈양문(賓陽門)에서 출발하여 대가(大駕)가 주정소(晝停所)에 이르자 예방 승지를 보내어 강릉(康陵)과 태릉(泰陵)을 봉심(奉審)하게 하고, 인빈(仁嬪)의 묘소가 가까이 있으므로 숭품(崇品)의 종신(宗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이어서 친히 풍양(豊壤)의 비각(碑閣)을 살펴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오늘날 성조(聖祖)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볼 줄을 헤아렸겠는가? 마음이 매우 서글프다."
하고, 인해서 풍양의 백성들에게 3년 동안 급복(給復)060)  하게 하고 영건(營建)한 여러 신하들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려 주었다.

 

교량(橋梁)이 무너진 것 때문에 경기 감사 심성진(沈星鎭)의 직임을 파면하고 민백상(閔百祥)으로 대신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조명리(趙明履)를 도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능소(陵所)에 나아가 봉심하기를 마치고 하교하기를,
"봉릉(封陵)이 너무 높고 사대(莎臺)가 견고하지 않아 마음에 늘 민망스럽게 여겼는데, 오늘 광릉(光陵)을 봉심하니 모르는 사이에 흠모하는 마음이 든다. 이 뒤로 봉릉 때에는 한결같이 이 예를 준수하여 거행하도록 예조 등록(禮曹謄錄)에 기재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9일 계해

임금이 친제례(親祭禮)를 행하기를 마치고 마침내 환궁하였다. 지나는 길에 인빈(仁嬪)과 영빈(寧嬪)의 묘소에 들렀는데, 당시 임금이 도중에 인빈의 묘소를 바라보고 갑자기 전배(展拜)할 명을 내려, 의장(儀仗)이 전도(顚倒)되고 반행(班行)이 착란(錯亂)되었으므로,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였다.

 

2월 20일 갑자

임금이 동룡문(銅龍門)에 나아가 윤지(尹志)를 친국(親鞫)하며 신문하기를,
"너는 바로 역적 윤취상(尹就商)의 아들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 먹고 숨쉬도록 용납한 것도 이미 관대한 은전인데, 감히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흉서(凶書)를 망화루(望華樓)에 걸어 둔 음흉하고 참담한 정절은 남김없이 탄로가 났으니 반드시 주무(綢繆)한 자가 있은 연후에 이를 하였을 터이며, 더구나 너의 서롱(書籠)을 임국훈(林國薰)에게 전하여 간직하게 한 것을 임국훈이 현납(現納)하였음을 너의 집 종이 또한 벌써 모두 고발하였으니, 아무리 속이려고 한들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지가 공초(供招)하기를,
"이효식(李孝植)이 신이 ‘간신(奸臣)’이란 두 글자를 쓰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나주의 관리가 많은 포흠(逋欠)을 부담하여 이렇게 사형당하는 가운데서 살아날 계책으로 삼아 신에게 미루고 핑계대니 어찌 흉칙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의 집안 종이 고발한 것은 공갈과 협박으로 이루어진 데에 불과하니, 어찌 종으로써 주인을 증거댈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형추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기언표(奇彦杓)를 신문하니, 기언표가 공초하기를,
"신이 어렸을 적에 윤지의 집에 가서 글을 배우고 청사(廳事)에서 노닐 때에 들으니, 윤지 부자(父子)가 방 안에서 사사로이 말하기를, ‘우리 부자가 응당 나주의 귀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라에 어찌 오래도록 아무런 일이 없겠는가?’ 하였으므로 신이 이 말을 듣고서 가련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흉서를 걸어 둔 사건이 터졌음을 들은 뒤에 신이 관(官)에서 떠날 때에 김중재(金重才)가 신에게 묻기를, ‘조정에 흉서를 걸어 둔 변고가 있는데, 그것을 아는가?’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이것은 어리석은 백성이 한 짓이 아니고 틀림없이 윤지가 한 짓인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효식을 신문하니, 이효식이 공초하기를,
"정월 20일 즈음에 윤지의 집에 가니, 윤지가 혼자서 글씨를 쓰고 있다가 신이 이른 것을 보고 손 안에 구겨 넣을 즈음에 ‘간신(奸臣)’ 두 글자를 보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예사로 보았습니다. 24일 시장에서 임천대(林天大)가 흉서를 베껴서 신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너는 이것을 보았는가?’ 하였는데, 신이 그것을 보니 내용이 흉칙하고 참담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적발하여 좌수에게 주었다는 것으로 대답하기에 신이 보니 ‘간신’ 두 글자가 서로 합치되었습니다. 때문에 틀림없이 이것은 윤지가 한 짓이라고 여겼으며, 좌수에게 준 것을 잘 처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윤지는 병진년061)  에 제주에서 와서 신이 살고 있던 동네에 머물러 살았으므로 신이 윤지에게 《통감(通鑑)》을 배웠습니다."
하였다. 임천대를 신문하니, 임천대가 공초하기를,
"신은 나주의 하리(下吏)로 정월 20일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객사(客舍)인 망화루의 동변(東邊) 제2주(第二柱)에 흉서 한 장이 걸려 있었는데 박순(朴順)이 이미 뜯은 것을 신이 빼앗아 좌수 유이태(柳頣泰)에게 전해 주었으며, 마침 하리 이효식을 만나 그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이효식이 그 흉서가 어떠하더냐고 묻기에 그 흉서는 이와 같았다는 것으로 대답을 하였더니, 이효식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윤지가 수상한 문자를 써내는 것을 보았는데, 들으니 네가 전한 것은 틀림없이 윤지가 한 짓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지의 종 개봉(介奉)을 신문하니, 개봉이 공초하기를,
"흉서를 걸어 둔 사건은 알지 못하지만 이효식과 신의 상전(上典)의 첩남(妾娚) 독동(禿同)이 가장 친밀하였으니, 응당 그 사건을 알 것이며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장령 이시희(李時熙) 또한 서로 가까이 지내면서 가끔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주고받았었습니다."
하였다. 임국훈을 신문하니, 임국훈이 공초하기를,
"뜻밖에 나주에 괴상한 일이 있으므로 신의 아비가 말하기를, ‘나주에 사는 놈은 틀림없이 나주에 있으면서 그렇게 할 리가 없고 이는 반드시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가 하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감사(監司)가 나주에 들어왔을 때에 윤지의 종이 농(籠)을 지고 신의 집에 왔었습니다. 윤지에게는 일찍이 계안책(稧案冊)이 있었는데 농 속에 들어 있지 않았으며, 신이 한 가지도 꺼낸 것이 없고 본 뒤에는 다시 뚜껑을 닫아 묶어서 감영(監營)에 바쳤습니다. 잡혀 올 적에 공주의 객사(客舍)에 이르러 윤지가 쪽지로 책자(冊子)를 보여 달라고 하기에 신이 모두 관가에 바쳤다는 것으로 대답했더니 윤지가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그 속에 시상(時象)을 말한 것으로 죄를 얻을 만한 것이 많이 있다.’고 하므로, 신이 남김없이 모두 바쳤다고 하였는데도 윤지는 오히려 신이 혹시라도 빼낸 것이 있을까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허다한 문서(文書)는 틀림없이 조그마한 농에 모두 간직하지 못하고 더러는 다른 곳으로 나누어 보낸 듯합니다."
하였다. 윤지의 아들 윤광철(尹光哲)을 신문하니, 윤광철이 공초하기를,
"신의 할아버지의 소장(疏章) 등 문자는 서로 친한 집에 보내어 간직해 두도록 하였는데, 신의 할아버지의 가장(家狀) 및 연보(年譜) 속에는 시상(時象)에 저촉되고 꺼리는 말이 있기 때문에 신의 아비가 이것을 염려했었습니다. 이른바 계안(稧案)이라는 것은 바로 신이 임국훈·김항(金沆)과 함께 계를 만들었는데, 아전(衙前) 몇 사람이 그 계에 들었습니다. 신의 아비가 매번 공을 세우고 충성을 다하려고 하면서 다시 기용되기를 바랐었는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러 부자가 장차 함께 사형을 당할 터인데 다시 무엇을 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독동을 형신(刑訊)하니, 독동이 공초하기를,
"신이 방(榜)을 나주 객사의 대문에다 붙였는데, 종이는 반 장에는 미치지 못하고 3분의 1은 되었을 것이며 너비는 제법 넓었으며 줄은 세 줄이었고 글자의 크고 작음은 엽전보다는 작고 바둑알보다는 컸었습니다. 꼭두 새벽에 붙였는데 날짜는 정월 22일인 듯하였으며, 윤지가 그의 종 개봉을 시켜 신을 부르기에 이튿날 새벽에 나아가니 윤지가 등불을 밝혀 놓고서 신에게 흉서를 걸도록 시켰으며, 그 당시 이효식·이제춘(李齊春)과 송포(松浦)에 살고 있는 임가(林哥), 이정하(李鼎夏)도 함께 있었는데, 윤지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귀양지에 있었으므로 귀양에서 풀려나려고 방(榜)을 걸게 한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이는 중대하여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해야 할 일이니 말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라. 죽게 되면 내가 죽을 것이고 결단코 너에게 미루거나 핑계대지 않을 것이다.’고 하기에 신이 이미 붙인 뒤에 윤지에게 가서 말하기를, ‘한 사람도 보는 이가 없었습니다.’고 하였더니, 윤지가 매우 잘하였다고 여겼으며, 또 말하기를, ‘네가 반드시 말을 누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너를 시켰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징원(林徵遠)을 신문하니, 임징원이 공초하기를,
"신이 살고 있는 곳이 윤지가 우거(寓居)하는 곳과 10리쯤 되는 거리이기 때문에 가끔 왕래하면서 시율(詩律)을 부르기도 하고 화답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죽을 죄가 됩니다."
하였으며, 윤지의 아들 윤희철(尹希哲)을 신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임국훈이 바친 서롱(書籠) 속에 나주 전 목사 이하징(李夏徵)의 편지가 가장 많았으며, 감싸고 친밀한 것이 골육과 다름이 없었고 심지어 윤지가 스스로 칭한 별호(別號)을 불렀으며, 또 윤지에게 준 편지에서 꿈에 선대감(先大監)을 배알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윤취상을 가리킨 것이었다. 임금이 열람하고 노여워하여 종성(鍾城)으로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2월 21일 을축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이하징(李夏徵)을 형신(刑訊)하기를,
"윤취상 부자의 죄상은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인데, 네가 무슨 마음으로 함께 감싸며 친밀하게 지냈는가?"
하자, 이하징이 공초하기를,
"윤취상이 역모를 한 것은 신이 정말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아비가 비록 역모를 했다 하나 그 자식 또한 어떻게 역모를 했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천대를 형신하니, 임천대가 공초하기를,
"신이 윤지와 계(稧)를 함께 하였는데 22일 밤에 윤지가 그의 내방(內房)에 있으면서 신을 불러 들어오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훈련 대장의 아들로 2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있으면서 석방되지 못하고 있으니,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흉서를 걸어 인심을 동요시키려고 하는데, 인심이 동요된 연후라야 바야흐로 〈뜻한 바를〉 할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윤지가 김항(金沆) 형제와 임국훈(林國薰) 부자, 이제춘(李齊春)·나귀영(羅貴永)·기언표(奇彦杓)·오시대(吳時大) 부자, 이종무(李宗茂)·이효식(李孝植)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모의하였으며, 작년 6월 계회(稧會) 뒤에 신이 밤에 윤지를 찾아갔더니, 윤지가 말하기를, ‘이곳의 양반이나 상한(常漢) 할 것 없이 모두 내가 오래도록 귀양살이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일을 함께 하려고 한다. 내가 대궐을 침범하려고 한다면 너 또한 기꺼이 마음을 같이할 수 있겠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진다면 어찌 좋아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윤지를 찾아가 보니, 윤지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 집안과 친한 사람은 거의 모두 체결(締結)되었는데 단지 모두 30인뿐이니 이 30인을 가지고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적으면 일을 성취시킬 수 없으니, 계를 만든다는 명목을 삼아 30인이 각기 수십 인을 얻는다면 일을 할 수 있다. 이효식·나귀영·이제춘·기언표 등 여러 사람들이 바야흐로 각각 그들의 힘대로 함께 일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으니, 너 또한 모집하는 데 들어가되 서로 가까운 아무개와 아무개의 처소에 그것을 모두 말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우선 흉서를 걸어 인심을 소란하게 동요시키고 이런 때를 틈타 행동한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 이 일은 자못 성취시킬 수 있는 형세가 있으니, 재력은 관리가 모두 관장하고 있으므로 창고의 것을 가져다 쓸 수 있을 것이며, 군기(軍器)는 창고 안에 잘못 불을 냈다는 것으로 훔쳐다 쓸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윤지를 추문하기를,
"임천대(林天大)의 공초에 네가 임천대와 계의 명목을 핑계대고 사람들을 모집하여 교결(交結)하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임천대로 하여금 구하도록 했다고 하였으니, 교활하고 악독한 정상이 더욱 드러났는데, 또 임천대에게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지면 응당 영장(營將)을 삼을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이 다시 태어난 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먼저 흉서를 걸어 인심을 동요하게 하고 차례로 그 뜻한 바를 이루려고 한 것은 무신년062)  의 역적이 한 짓을 그대로 배운 것이다."
하였는데, 윤지가 공초하기를,
"신의 아들 윤광철(尹光哲)이 경내(境內)의 사람들과 계를 만들면서 임천대·이효식을 하계(下稧)로 삼고, 김항·임국훈을 상계(上稧)로 삼았었습니다."
하였다. 윤지와 임천대에게 형신을 가하며 면질(面質)하도록 하였다. 임천대가 말하기를,
"작년 6월 계회(稧會)가 끝날 무렵 네가 나를 머물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귀양살이한 지 20여 년인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많이 얻어 좋은 일을 하겠는가? 네가 비록 아전(衙前)이기는 하지만 만약 우영장(右營將)이 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효식이 나에게 윤지평(尹持平)이 말한 바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22일에 나를 불러다 말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하니, 윤지가 말하기를,
"나는 그때에 낙상(落傷)하여 안방에 누워 있었다."
하자, 임천대가 말하기를,
"네가 그때에 정말 낙상하여 누워 있으면서 나를 불러다 상의하고 계획하였다."
하니, 윤지가 말하기를,
"네가 근래에는 세배도 하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나를 보러 왔다는 것인가?"
하였다. 임천대가 말하기를,
"경오년063)   이후로 잇달아 세배를 하였으며, 대사(大事)는 작년 6월에 처음으로 상의하였고 금년 세배 때에는 기생(妓生) 및 정성교(鄭成敎)·나복세(羅卜世)와 함께 앉아 있지 않았는가?"
하니, 윤지가 말하기를,
"입계(入稧)한 뒤에 처음으로 세배를 하였는데, 그 전에 네가 언제 왔다는 것인가?"
하였다. 임천대가 말하기를,
"너의 전후 정절을 고발한 자가 나뿐만이 아니다. 이효식의 말이 어찌 증거와 참고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네가 이미 감사(監司)가 염탐하며 사정을 물어보는 가운데 들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잡아다 가둔 것이다. 어찌 이효식의 말을 기다렸겠는가? 이효식이 너에게 10년 동안 글을 배웠는데 네게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이효식이 어찌 너를 무함하겠는가? 작년 9월과 10월에 네가 연달아 나를 불러다 흉사(凶事)를 모의한 것을 내가 벌써 모두 고발하였는데 네가 어찌 감히 속이려고 하는가? 네가 이효식을 대하여 어찌 흉언(凶言)이 없었던가? 나귀영(羅貴永)이 옥중에서 내게 말하기를,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나귀영이 만약 온다면 어찌 알 만한 일이 없겠는가? 이정하(李鼎夏)도 참여하여 들었었다."
하니, 윤지가 말하기를,
"22일 저녁에는 내가 병이 들어 누워 있었는데, 어느 겨를에 내다 걸 글을 썼겠는가?"
하자, 임천대가 말하기를,
"잠깐이면 쓰는 글자를 가슴과 배가 아픈 것으로 어떻게 쓸 수 없단 말인가? 대사(大事)를 모의할 때에 너의 장자(長子)를 충청도에 보내어 사람들을 모집한다는 말 역시 하지 않았던가? 금년에 내가 세배를 하니 금년 세시(歲時)는 심사(心事)가 별로 좋지 않다고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 나귀영·이효식이 마음을 같이 하였는데 네가 어떻게 할말이 있겠는가? 네가 내게 말하기를, ‘나의 무리 10여 인이 계를 핑계대고 사람을 모으면서 가기 구변(口辯)으로 찾아 모집하되 정의(情義)가 서로 합해진 뒤에야 사실을 알려 준다.’고 하였다."
하니, 윤지와 이효식을 면질시켰다. 이효식이 말하기를,
"정월 20일에 내가 너의 집에 가니, 네가 내다 걸 글을 써서 보이면서 민심을 동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하니, 윤지가 말하기를,
"네가 감영(監營)에서 공초를 바칠 때에는 내가 바야흐로 글을 쓰다가 구겼기 때문에 단지 윗 부분의 ‘간신(奸臣)’ 두 글자만 보았다고 하더니, 이제는 내가 직접 너에게 내다 걸 글에 대한 일을 말하였다고 하니 공초의 내용이 서로 틀린다."
하자, 이효식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죽기에 다달았는데, 어찌 감히 군부(君父)를 속이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네가 또 일이 이루어지면 나를 나주 목사로 삼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로 하여금 군량(軍粮)을 맡아 나누어 먹이게 하고 그 공(功)으로 목사를 삼을 것이라고 하였다."
하니, 윤지가 말하기를,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곳에서 이 말을 하던가?"
하자, 이효식이 말하기를,
"너의 집이 동내(洞內)에 있었기 때문에 한가할 적이면 가서 보았는데, 네가 어찌 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계곡(稧穀) 및 해마다 거둔 곡식을 군량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 그런 의도가 아닌가?"
하니, 윤지가 말하기를,
"어느 때에 이 말을 하였던가?"
하자, 이효식이 말하기를,
"작년에 달마다 한두 차례 찾아갔었는데, 네가 번번이 그 말을 하였었다."
하였다.

 

2월 22일 병인

유최기(兪最基)를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역적 윤지(尹志)를 빨리 전형(典刑)으로 바로잡도록 청하니, 다시 끝까지 조사를 더하게 명하였다.

 

다시 이효식(李孝植)·임국훈(林國薰)·이하징(李夏徵)·윤광철(尹光哲)·윤희철(尹希哲)을 추국하고 이시희(李時熙)·김준(金浚) 등을 신문하였다.

 

2월 23일 정묘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역적 이하징(李夏徵)이 복주(伏誅)되었다. 이하징을 형신하니, 이하징이 공초하기를,
"신이 갑진년064)   3년 전에 윤성시(尹聖時)의 손자를 사위로 삼았는데, 혼인을 맺은 3년 뒤에 윤성시가 화를 당하였습니다만, 신은 김일경(金一鏡)의 상소가 있은 뒤에야 비로소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말할 만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이어서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지만(遲晩)065)  하여 정형(正刑)066)  하고, 노적(孥籍)067)  하기를 법대로 하였으며, 이시희·윤지·임국훈·이효식 등을 형신하였다.
신은 삼가 살펴 보건대, 역적 이하징은 이명의(李明誼)·이명언(李明彦)의 가까운 친척으로 얼굴 생김새가 요사스럽고 괴이하며 속에 흉측한 생각을 품고서도 남을 속이고 실정을 숨기면서 일반 사람들의 부류에 섞여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그가 국문을 받음에 이르러서 역적 윤지와는 사우(死友) 사이였으며, 왕래하면서 친밀하게 감싸고 비밀을 숨긴 정절(情節)이 남김없이 모두 드러났는데도 심지어 감히 역적 윤취상을 역적이 아니라고 하며, 역적 김일경의 상소를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말하며 몹시 흉측하고 아주 사리에 어긋나는 난역 부도(亂逆不道) 한 말을 여기에 이르러 낭자하게 하니, 그가 음흉하고 교활함을 품고서 화를 내고 간특하며 흉측하고 사나움이 자못 김일경·박필몽(朴弼夢)의 제적(諸賊)보다 지나침이 있다. 그래서 통쾌하게 전형(典刑)을 시행하여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조금은 줄였다. 대체로 윤취상·윤지 부자가 비록 역절(逆節)이 모두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왕장(王章)이 미처 가해지기도 전에, 사람들이 그를 보기를 마치 더러운 물질이 혹시라도 몸에 접근할까 싶어 모두 멀리 피하고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대상의 사람이었는데도, 아주 가까운 친구라고 자처하면서 조금도 꺼려하거나 두려워함이 없었고 별호(別號)로 흉측한 윤지를 일컬었으며, 심지어 꿈에 역적 윤취상을 배알(拜謁)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그의 마음과 자취가 음흉하고 더러움을 여기서 더욱 볼 수가 있다. 다만 그가 모습을 감추고 마음을 숨긴 채 어두운 길로 출입하였는데, 사람들이 비이(鄙夷)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그의 개파리[狗蠅]처럼 비천함만 말하고 효경(梟獍)068)  처럼 흉악함은 살필 수 없어 몰래 숨겨 온 역절(逆節)이 이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됨을 이루었으며, 사시(肆市)069)  하는 법이 그 또한 시행이 늦어졌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신회(申晦)·안집(安𠍱)·이경조(李景祚)·민백창(閔百昌)을 승지로, 이성중(李成中)을 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대명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윤지(尹志)의 문서(文書) 가운데 이하징(李夏徵)의 서찰이 있음을 보고 임금이 잡아다 국문하려고 하자, 김상로 등이 사건이 이 옥사(獄事)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잡아오지 말도록 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하징이 복주(伏誅)되자,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인구(引咎)하며 대죄(待罪)한 것이었다.

 

지평 홍양한(洪良漢)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하징의 역절(逆節)은 역적 윤지와 편지를 주고받는 즈음에 낭자하였으니, 국문에 참여한 대신(臺臣)은 곧바로 엄중히 국문하도록 주청해야 마땅한데도 단지 섬에다 귀양 보내도록 청하였으니, 그 당시 헌신(憲臣)은 파직시킴이 마땅하며, 간신(諫臣)에 이르러서는 인아(姻婭)의 혐의가 있음을 핑계대고 아무 생각없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니, 헌납 이육(李堉)은 삭직(削職)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처음에 임금이 이하징을 귀양 보내도록 명하자 집의 정광진(鄭光震)은 섬으로 귀양 보내기를 청하고, 헌납 이육은 인아의 혐의가 있다고 하며 우물쭈물 명확하지 않은 말을 하였기 때문에 홍양한이 그것을 논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4일 무진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는데, 박찬신(朴纘新)·유현장(柳顯章)은 신문하고서 조금 있다가 석방시켜 내보냈으며, 이명조(李明祚)는 신문하고서 멀리 귀양을 보내었다. 윤광철(尹光哲)의 공사(供辭) 가운데 이르기를, ‘연화(筵話)는 이명조·유현장에게서 얻어 보았으며 조보(朝報)070)  는 박찬신에게서 얻어 보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박찬신 및 유현장·이명조를 잡아다 신문하였는데, 박찬신이 공초하기를,
"신의 집에 충훈부(忠勳府)의 조보가 있었는데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이 빌려다 보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윤광철이 전차(轉借)해 간 여부는 신이 정말 모르고 신이 본래 윤광철의 얼굴을 모릅니다."
하므로, 유현장과 윤광철을 면질(面質)하게 하니, 윤광철이 유현장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공초하기를,
"연화(筵話)는 유현장의 족친인 유동원(柳東垣)에게서 얻어다 보았습니다."
하였다. 박찬신·유현장은 아울러 석방시켜 내보내도록 명하고, 이명조는 정직하지 못한 말이 많다고 하여 멀리 기장현(機張縣)에다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김항(金沆)을 신문하니, 김항이 공초하기를,
"경오년071)  에 신이 임국훈·윤광철·이효식·임천대 5인과 계(稧)를 만들었는데, 사인(士人)은 전곡(錢穀)을 길거(拮据)072)  할 수 없기 때문에 관리 두 사람을 그 계중(稧中)에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하므로, 김항과 개봉(介奉)을 면질(面質)하게 하였는데 개봉은 바로 윤지(尹志)의 종이다. 개봉이 말하기를,
"네가 이효식·임천대와 계회(稧會)를 핑계대고 밤마다 와서 모였으며 금년 정월의 어느날 밤에도 와서 모였고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갔는데, 나주의 온 성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것을 수상히 여겼다."
하였다. 김항과 임천대를 면질하게 하니, 임천대가 말하기를,
"지난 12월 소를 잡았을 때에 여러 사람들이 술을 마시려고 나간 뒤에 네가 내게 말하기를, ‘너와 내가 윤지평(尹持平)의 집안과 모두 친하다고 하여 윤지가 자주 긴요하지 않은 말로 내게 말을 하였는데, 그 일 또한 해롭지 않기 때문에 내가 바야흐로 모집하는데 너도 몇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사람을 얻는 방법은 실제로 다른 데에 있지 않으니 계를 만든다고 핑계대면서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좋다.’고 하기에, 내가 ‘구하기는 진실로 어렵지만 시험삼아 모집해 보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하였다."
하니, 김항이 말하기를,
"소를 잡은 일은 정말로 있었지만 그 날은 바람이 심하게 불고 눈이 내렸는데 어떻게 이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임천대가 말하기를,
"그때에 네가 나에게 ‘윤지평이 아무런 까닭도 없는 일로 오래도록 귀양살이 하는데, 다른 사람은 모두 귀양에서 풀렸지만 그만 유독 풀려나지 않으니 가엾게 여길 만하다. 그가 말하는 바는 자못 방해되지 않지만 거사(擧事)는 혼자서 할 수 없기에 내가 바야흐로 사람을 구하고 있으니, 너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니, 김항이 말하기를,
"설사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술을 마시려고 모인 자리에서 어떻게 이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임천대가 말하기를,
"윤지가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너도 모름지기 사람을 모아 김 생원계(金生員契)처럼 하라.’고 하였는데, 경오년에 계(稧)를 만든 것은 처음에는 돈을 늘리는 데 불과했을 뿐이며, 작년 뒤로부터 처음으로 이런 의논이 있었는데 네가 어찌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였다. 김항과 임천대를 형추(刑推)하고 또 면질하게 하니, 임천대가 말하기를,
"네가 밤에 윤지의 집에 오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너무나 근거가 없으며, 정월에 쇠고기를 먹던 날 혼자 밤에 모이지 않았던가?"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 섣달에 네가 이효식과 밤에 윤지의 집에 모였다가 인해서 함께 돌아갔으며, 밤에 갔을 뿐만 아니고 낮에도 가지 않은 날이 없었고, 윤지는 늘 내사랑(內舍廊)에 거처하였는데, 네가 가면 반드시 조용히 끌어들였었다. 어느날 내가 너를 찾으려고 하니, 네가 윤지의 내사랑에 있기에 밤에 더러 만나 물으면 윤지평의 집에서 왔다고 하였었다."
하였다. 김항이 말하기를,
"계회(稧會)는 1년에 두차례에 불과한데, 이것을 가지고 내가 늘 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자, 임천대가 말하기를,
"두 차례의 계회에는 늘 가는 일이고, 그 밖에 또 몇 차례나 왕래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였는데, 김항이 말을 못하였다. 형신을 가하자 악한 성질을 마구 부려 이름을 붙일 수 없어 ‘형살(刑殺)’ 두 글자를 썼는데 말이 매우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더니 얼마 있다가 물고(物故)되었다. 양사(兩司)에서 노적(孥籍)하도록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난언율(亂言律)에 의거하여 단지 재산만 적몰(籍沒)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윤지·임천대·기언표·개봉·김준 등을 추국하였다.

 

2월 25일 기사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조명정(趙明鼎)을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역적 윤지(尹志)가 물고(物故)되었다. 지평 홍양한(洪良漢), 정언 송문재(宋文載), 교리 남태회(南泰會)·홍명한(洪名漢), 수찬 채제공(蔡濟恭) 등이 아뢰기를,
"역적 윤지는 역적 윤취상의 아들로 불궤(不軌)한 마음을 쌓았다가 방자하게 흉서(凶書)를 거는 변고를 만들고, 결탁 모의하며 배포(排布)하고 몰래 계획하며 감싼 형상은 여러 역적들의 초사(招辭)에 낭자하고, 심지어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흉측하게 말한 글을 상자 속에 비치하였으니, 그가 또한 지만(遲晩)하는 내용은 없으나 다만 그가 흉측하고 미련하며 악독하고 간특한 마음으로 곤장을 참다가 경폐(徑斃)073)  하여, 역적 이하징(李夏徵)과 같이 사시(肆市)하는 법을 시행할 수 없게 되어 신명(神明)과 사람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기참(跽斬)074)  하는 형벌은 비록 시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저택(瀦宅)075)  과 노적(孥籍)하는 법은 잠시라도 늦추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신 등은 역적 윤지는 마땅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대역률(大逆律)로 거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언 홍자(洪梓)가 아뢰기를,
"유동원(柳東垣)이 유현장(柳顯章)에게 연설(筵說)을 빌려 윤지(尹志)의 아들 윤광철(尹光哲)에게 전하여 주었다는 말이 윤광철의 초사(招辭)에 나와, 유현장이 벌써 이것으로 체포되었는데 유동원 혼자만 모면하고 있습니다. 연화(筵話)의 사체(事體)는 어떠한 종류라도 엄중한 것인데, 중간에서 찾아내어 역적의 집안에 전달하여 보여 준 실정과 자취는 의심할 만하니, 한차례 신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유동원을 잡아다 국문하고 엄중히 신문하소서. 그리고 유현장은 허위이건 사실이건 간에 연설(筵說)을 가서 누설했다는 말이 이미 역적의 초사에서 나왔다면, 이렇게 장전(帳殿)에서 친국(親鞫)하는 때를 당하여 조금이라도 시위(侍衛)하는 반열에다 배치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병조 참의 유현장을 먼저 파직시키고 유동원을 잡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체로 추궁하며 신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가 유현장을 파직하지 말도록 명하고, 조금 있다가 하교하기를,
"지금 들으니, 윤광철이 유동원의 얼굴을 안다고 말했다고 하며, 연설을 베껴서 전한 것이 비록 경계하는 영(令)을 범하였다고는 하나 얼굴을 아는 사이에 서로 빌려 보는 것이 무슨 큰 허물이 있겠는가? 유동원을 특별히 참작하여 강계부(江界府)로 귀양 보내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기력이 쇠약하고 고달픈 것을 돌보지 않고 날마다 친국(親鞫)을 하는데 내가 어찌 즐거워서 그렇게 하겠는가? 진실로 그 흑백(黑白)을 분변하려는 것이다. 죄수를 신중하게 심리하라고 《상서(尙書)》에 이른 바를 내가 비록 쇠모하기는 하지만 결단코 흑(黑)을 가지고 백(白)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아! 도신(道臣)은 나의 뜻을 가지고 온 도(道)에 유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 하교 한 통은 동궁(東宮)에 올렸다. 홍자(洪梓)가 말하기를,
"윤광철이 비록 연설을 유동원에게 빌려 보았다고 말하였지만 유동원에게 보내어 보도록 한 자는 바로 유현장입니다. 유동원이 벌써 먼 변경에 정배(定配)되었다면 유현장 또한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유현장이 연설을 빌려다 보여 준 것은 아무런 실정이 없는 데서 나왔는데 기필코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니, 이는 바로 당심(黨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노론(老論)의 이러한 풍습을 나는 매우 가슴 아프게 여긴다. 홍자를 먼저 체차(遞差)하여 먼 국경 지역에다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홍양한(洪良漢) 등이 신구(伸救)하니, 임금이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임징원(林徵遠)·이정하(李廷夏)·김항(金沆)·이제춘(李齊春)·윤광철(尹光哲)·윤희철(尹希哲) 등을 추국하였다.

 

2월 26일 경오

오시(午時)에 햇무리가 지고, 미시(未時)에 해에 겹으로 무리가 졌으며 무리 위에는 관(冠)이 있었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임징원을 형신하니, 임징원이 공초하기를,
"지나간 무신년076)  에는 남태징(南泰徵)이 대장(大將)이 되고 이사성(李思晟)이 병사(兵使)가 되었으며, 정사효(鄭思孝)·권첨(權詹)이 감사(監司)가 되었으면서도 오히려 할 수 없었는데, 신 및 고달프고 잔약한 뜻의 소유자와 같은 자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시례(詩禮)를 가지고 선비를 죽이지 마소서."
하며, 말이 매우 흉측하고 도리에 어긋나므로 삼사(三司)에서는 정형(正刑)하도록 청하고, 대신(大臣)과 의금부 당상은 끝까지 조사하여 실정을 얻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시희(李時熙)를 형신하였는데, 이시희는 이홍모(李弘模)의 아들로 성격이 본래 음흉하고 참혹하였으며, 출신(出身)으로 벼슬길에 올라서는 흉론(凶論)에 부합하였다가 일찍이 죄에 저촉되어 귀양을 갔었는데도 마음을 고치지 않았고, 이때에 이르러 윤지와 계획을 꾸민 자취가 있었으므로 여러 차례 형신을 가하였는데 장폐(杖斃)되었다.

 

2월 27일 신미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가에서 역적을 다스림이 엄중하지 않고 하늘에서 악인(惡人)을 잡는 그물이 매우 넓어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이사상(李師尙)·윤취상(尹就商) 및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077)  의 여러 역적들에게 아직도 해당 형률(刑律)을 시행하지 않아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이것을 구실로 삼았으며, 심지어 이하징(李夏徵)·윤지(尹志)의 무리가 맥락이 서로 관통이 되어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바가 없고, 그 이른바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말한 것 역시 여기서 말미암은 것이니, 실로 반측자(反側者)078)  를 안심하게 할 가망이 없습니다. 신은 아울러 대역률(大逆律)을 추가하여 시행함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에 마땅히 하순(下詢)해서 처리하겠다."
하고, 기언표(奇彦杓)·이제춘(李齊春)·김준(金浚) 등을 다시 추국하였다.

 

임금이 총융사 홍봉한(洪鳳漢), 호조 참판 이성중(李成中), 비국 부제조 김치인(金致仁)에게 명하여 시노비(寺奴婢)의 감포 절목(減布節目)을 강확(講確)하게 하고 윤음을 내리기를,
"아! 국가의 큰 폐단으로는 하나는 양역(良役)이고 하나는 노비(奴婢)인데, 양역의 폐단은 인족(隣族)뿐만이 아니고 심지어 백골(白骨)에게까지 징수하며, 노비의 폐단은 더욱 몹시 잔인하여 남자의 경우는 장가를 들 수 없고 여자의 경우 시집을 갈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 《주역(周易)》〉 함괘(咸卦)에서 이른바 남녀가 있은 연후에 부부(夫婦)가 있고 부부가 있은 연후에 부자(父子)가 있다는 의미이겠는가? 왕정(王政)에서 차마 하지 못할 바일 뿐만 아니라 또한 화기(和氣)를 감응하게 하고 손상시키는 한 단서이다. 양역에 대해서는 이미 면포를 줄여 주었으나 노비에 대한 신공은 지금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였으니, 다시 어느 날을 기다리겠는가? 쇠약하고 늙었음을 돌보지 아니하고 먼저 신공을 감해 주는 영(令)을 내리니, 노(奴)는 한 필(疋)을 감해 주고 비(婢)는 반 필을 감해 주도록 특별히 정한 당상관이 그 절목(節目)을 만들었을 것이다. 요즈음에 많은 일 때문에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였겠지만 생각하건대 반드시 작업을 마쳤을 것이기 때문에, 8일 동안 장전(帳殿)에서 친국하는 여가에 고달픔을 꺼리지 아니하고 소견하고 바로잡아 고치게 하였으니, 지금부터 이 뒤로는 노비가 거의 조금은 회복될 것이다. 이 초단(抄單)을 가지고 한결같이 규례를 정하여 활자로 인쇄해서 반포하도록 하고 그것을 영구토록 준행하게 하여 내가 늙은 나이에 부지런히 힘쓰는 뜻을 쇠하게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8일 임신

죄인 김준(金浚)이 물고(物故)되었다.

 

2월 29일 계유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나귀영(羅貴永)·박동량(朴東亮)·김창대(金昌大)·오영근(吳永瑾)·임주악(林柱岳)·이종무(李宗茂) 등을 신문하고, 다시 임천대(林天大)를 추국하였다.

 

죄인 임징원(林徵遠)이 물고되었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죄수들이 형신을 받은 것이 수삼차에 불과한데 차례로 물고되었으니 참으로 의심스럽고 괴이한데도 한결같이 전례를 따라 검험(檢驗)하였으니, 한성부의 해당 낭청(郞廳)을 잡아다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목호룡(睦虎龍)의 두 아들이 아직까지 호남의 육지에서 살고 있으니, 참으로 이는 실형(失刑)한 것의 큰 것입니다. 청컨대 낙안군(樂安郡)에 종이 된 죄인 목덕복(睦德福)은 정의현(旌義縣)으로 이배(移配)하고, 보성군(寶城郡)에 종이 된 죄인 목덕성(睦德成)은 대정현(大靜縣)으로 이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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