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3권, 영조 31년 1755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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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갑술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나침(羅沈)·임천대(林天大) 등을 친국(親鞫)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고성현(固城縣)에 종이 된 죄인 김윤흥(金允興)은 바로 김일경(金一鏡)의 아들이니, 그로 하여금 육지에서 살도록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제주목(濟州牧)으로 이배(移配)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2일 을해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나침(羅沈)·임주악(林柱岳) 등을 친국하였다.

 

장령 이길보(李吉輔), 정언 송문재(宋文載), 교리 남태회(南泰會)·홍명한(洪名漢), 수찬 채제공(蔡濟恭) 등이 아뢰기를,
"역적을 다스리는 법은 우두머리를 주벌(誅罰)하기를 엄중히 하는 것이 마땅하며, 간교함을 꺾어버리는 방법은 뿌리를 잘라버리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번의 이하징(李夏徵)과 윤지(尹志)의 흉역(凶逆)은 바로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는 바이며, 진실로 그 근본을 캐어보면 실제로 신축년079)  과 임인년080)  의 제적(諸賊)에게서 근원하였으니, 대체로 역적 김일경의 소하(疏下)는 역적 이하징이 흉언(凶言)한 전모(前茅)081)  가 되었고, 이사상(李師尙)·윤취상(尹就商)은 역적 윤지가 음모하게 된 근저(根柢)가 되었으며,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 등 뭇 흉적(凶賊)은 전후 역적들이 숨는 소굴의 효시(嚆矢)가 되어 마침 인연이 되었지만, 하늘에서 악인을 잡는 그물은 너무 넓고 왕정(王政)에서의 성토(聲討)도 이렇게 늦어져 난역(亂逆)을 징계할 수 없도록 해서 흉변(凶變)이 겹겹이 생기다가 오늘처럼 극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대료(大僚)082)  를 징토(懲討)하는 주청은 실로 온 나라 공공(公共)의 논의에서 채택이 된 것인데도 귀를 기울여 들으신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하문하는 일이 없어 군정(群情)이 오래도록 답답해 하며 여론이 더욱 격렬합니다. 신 등이 욕되게 삼사(三司)의 반열에 있으면서 걱정스럽고 분한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감히 이렇게 같은 목소리로 우러러 청원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과단성 있는 정치를 행하시어 빨리 하문을 내려 엄중히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여러 의금부 당상과 문사 낭청(問事郞廳) 그리고 시위(侍衛)하는 반열에까지 하문하자, 여러 신하(臣下)들이 합사(合辭)하여 함께 청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진신(搢紳)이 연명(聯名)하여 진소(陳疎)하였다. 행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 전 감사 심성진(沈星鎭), 행 부사직 정휘량(鄭翬良), 행 부사직 이창수(李昌壽), 전 승지 정홍순(鄭弘淳), 이조 참의 조재홍(趙載洪)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무신년083)   역변(逆變)의 극도로 흉악함은 실로 재적(載籍)에 없었던 바인데도, 성조(聖朝)에서 그들을 다스린 것은 죽이지 않는다는 신무(神武)를 우선하고 정성으로 환고(渙誥)를 거듭하여, 따뜻하게 젖게 하며 점차로 감화되게 한 지 30년이란 오랜 기간에 이르렀으니, 이는 흉추(凶醜)들이 잘 복종하고 반측(側測)에서 고무(鼓舞)되어야 마땅한데, 유독 어찌하여 크나큰 적(賊)이 마침 제거되자 여얼(餘孼)이 오히려 불어나 오늘날 이하징·윤지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루아침이나 하루 저녁의 사고이겠습니까? 그 유래한 바가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조태구·유봉휘 두 흉물이 앞에서 인도하고 김일경·박필몽(朴弼夢) 제적(諸賊)이 뒤에서 계승하여 체결하고 감싸며 기필코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하여, 3백 년의 종사(宗社)를 거의 말하기 어려운 근심을 갖게 되는 데 이르렀으니, 아! 당시의 일을 차마 더 말하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우리 자성(慈聖)의 지극하신 자애와 경묘(景廟)의 지극한 우애를 의뢰하여 오늘날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두렵고, 한심해집니다. 오직 고달프고 어렵게 오래도록 쌓아 점차로 배양하여 이룬 것이 비로소 무너지고 하늘에 닿을 듯한 화(禍)가 저절로 이루어졌으니, 이것은 무신년의 변란이 무신년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신축년과 임인년에 기초한 것이며, 그 화(禍)를 만들어 낸 근본과 변란에 앞장선 우두머리는 진실로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아는 바입니다. 애석합니다. 최초에 죄를 성토하는 논의가 이미 성의(誠意)를 쌓도록 힘쓰고 공정하게 성토를 이룰 수 없었으며, 성상께서는 포황(包荒)하는 인애를 오로지 힘쓰고, 받아들여 용서하는 정치를 지나치게 행하여 간혹 협잡한다는 사사로움으로 의심하기도 하며, 엎치락뒤치락 부딪고 번뇌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윤허를 아끼셨고, 마침내는 하늘이 악인을 잡는 그물이 매우 넓어지는 데 이르러 제적들이 요행히 도망하였으며, 무신년의 성토도 거개가 그물에서 빠져 나갔고 병인년084)  의 법도 직질(職秩)을 빼앗는 데 불과하여 마침내는 징치(懲治)한다는 것이 경중(輕重)이 거꾸로 되는 데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반역할 마음과 흉측한 생각을 서로 본을 받게 되고 폐족(廢族)과 요얼(妖孼)이 더욱 규합하고 결탁하여 겉모양은 같지만 마음은 달라 바야흐로 닥쳐올 변고를 예측할 수 없으며, 다시 어느 곳에 잠복하여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이는 반드시 원악(元惡)에 대한 주벌(誅罰)을 크게 행하여 왕장(王章)의 엄중함을 분명히 게시한 연후라야 얼종(孼種)이 거의 저절로 그치도록 할 수 있으며, 화맹(禍萌)을 거의 되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대신이 조태구·유봉휘 등의 제적에 대하여 역률(逆律)을 추가하여 시행할 것을 주청하였는데, 이는 실로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는 내용에서 나온 것인데, 귀를 기울여 들으신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처분이 없으니 신 등은 그윽이 매우 억울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생각건대, 이광좌(李光佐)의 부범(負犯)은 합사(合辭)에서 모두 진달하였는데도 한차례의 윤허를 아직까지 아끼시며, 최석항(崔錫恒)에 대해서는 추삭(追削)하게 했다가 얼마 뒤에 신원하도록 하셨으므로 여정(輿情)이 분하게 여기는데도 관질(官秩)을 도로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인신(人臣)으로 이런 죄명을 부담하고서 왕법에서 도망할 수 있었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성념(聖念)을 깊이 유의하시어 아울러 재단(裁斷)과 조처를 내리소서."
하였는데, 판서 이춘제(李春躋) 등도 이익정(李益炡) 등의 상소 내용을 모방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외모만 고치고 본심은 고치지 않은 것이다."
하고, 이어서 동궁(東宮)에게 말하기를,
"이는 모두 소론(少論)인데도 징토(懲討)를 잘하니, 기이하다. 내가 너의 다른 날 일을 제거해 주는 것이 마땅하며 앞으로 조처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조태억(趙泰億)의 죄범이 이광좌·최석항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으로 그 형률을 너그럽게 하려고 하였는데, 김상로(金尙魯)가 아주 극력 간하므로 엄중한 하교를 두는 데 이르니, 김상로가 물러나서 명을 기다리다가 하교를 받고 다시 입시(入侍)하자, 하교하기를,
"지금 이하징을 제외하고 만약 조금이라도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려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김일경·박필몽과 소하(疏下) 및 윤취상·이사상 같은 자를 아끼겠는가? 그런데 역적 이하징과 역적 윤지가 스스로 반역을 범하고서 감히 나라를 원망하니, 이것은 오로지 방지를 엄격히 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 이하징과 윤지를 정법(正法)한 뒤에 마치 긴 꿈에서 깬 듯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이는 바로 징토하기를 엄중히 하지 않은 데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고 하였다. 이번에 역적 이하징이 스스로 악역을 범하고, 역적 윤지가 방자한 생각으로 날뛰며 무식한 시골 백성으로 하여금 협박을 당하게 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바로 한 사람을 아끼다가 1백 사람을 형벌하게 된 격이니, 그 근본이 어지럽게 뒤섞였는데 어찌 지엽적인 것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지난 무신년에 남태징(南泰徵)을 효시(梟示)하자 도하(都下)가 침착하고 편안하게 여겼었다. 지금 종일토록 친국하여 비록 와주(窩主)는 찾아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처분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난역(亂逆)하는 불궤(不軌)한 마음을 떨어뜨리고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신하는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의의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우의정이 아뢴 바를 내가 지나치다고 말을 하였는데, 지금 즉경(卽景)을 보니 한결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이제야 지난 날의 형정(刑政)이 너무 너그러웠음을 깨닫겠다. 입시한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 그리고 군병(軍兵)에 이르기까지 두루 하문하여 모두가 다른 말이 없었다면, 이는 이른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죽여야 할 만하다고 여긴 것이다. 더구나 그 근본은 바로 유봉휘·조태구이니, 이것은 위에서 이른바 근본이 다스려지지 않고서 지엽적인 것이 다스려진다는 것은 내가 듣지를 못하였다. 유봉휘·조태구·윤취상·이사상, 소하(疏下)의 제적(諸賊)에게 역률(逆律)을 추가해서 시행하라는 주청은 정말로 옳도다. 김일경·박필몽·목호룡에게는 이미 역률을 시행하였으니, 윤취상·이사상과 역적 김일경 소하의 이진유(李眞儒)·이명의(李明誼)·정해(鄭楷)·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 및 유봉휘·조태구를 아울러 역률을 추가해서 시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광좌는 임용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그 마음이 다른 것은 없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역적 이하징이 신하로서의 절개라고 일컬은 것은 징토하기를 엄중히 하지 않아서 이루어진 것이니, 이광좌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졌겠는가? 더구나 그 근본은 바로 조태구의 차자(箚子)와 유봉휘의 상소이니 이 때문에 세력이 대단하여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였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다행스럽게도 건도(乾道)085)  가 분명하여 역적 이하징이 스스로 토로하였으므로 여정이 일제히 들끓었다. 이하징이 이미 정법(正法)되었는데도 그 근본을 엄중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이하징이 비록 음흉하다고는 하나 형정(刑政) 또한 어떻게 거꾸로 되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유봉휘와 조태구에게 일체로 역률을 추가해서 시행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광좌에게 어찌 허물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더구나 일변(一邊)이 빠져 들어간 것은 전적으로 이광좌로 말미암았기에 삼사(三司)의 주청을 특별히 윤허한다. 그리고 조태억은 그를 익숙하게 아는데 이광좌가 없었다면 결코 여기에 빠져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때에 그에게도 엄중히 징계함이 마땅하니, 특별히 그의 직첩을 거두도록 하라. 그리고 최석항은 비록 조태구와 유봉휘가 범한 것과는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광좌에게 밑돌지 않는데도 관작을 회복토록 한 것은 지나치다. 아울러 이광좌와 같이 시행하게 하라. 아! 30년 동안 윤허를 아꼈던 것은 그 무슨 뜻이었겠는가? 그것은 바로 인명(人命)을 소중하게 여겨서이다. 해를 기다렸다가 추율(追律)하는 것은 이미 법 밖인데, 더구나 역률을 추가하여 시행하면서 그 자식에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겠는가? 비록 역률을 시행하더라도 한결같이 나이가 차지 않았다는 형률에 의거하여 아울러 종으로 삼는 데 그치도록 하라. 아! 오늘 처분한 뒤로는 군강(君綱)이 통쾌하게 시행되고 의리가 바로잡아질 터이니, 아! 대소(大小)의 신하들은 모두들 모름지기 다 알고서 이 뜻을 가지고 중외(中外)에 전파하여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길보(李吉輔)에게 명하여 그의 형 이철보(李喆輔)에게 토역소(討逆疏)를 올리도록 유시하게 하자, 이철보가 그날로 상소하였다.

 

정광진(鄭光震)에게 정광충(鄭光忠)이란 이름을 내려 주고 병조 참지에 승진시켰으며, 정홍순(鄭弘淳)을 발탁하여 참판으로 삼았다. 정광진은 대신(臺臣)으로 이하징을 섬으로 귀양 보내도록 청하였으며, 또 문사 낭청으로 징토(懲討)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면서 심지어 눈물을 흘리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정홍순은 이익정(李益炡)의 상소에 따라서 참여하였으므로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포상하는 뜻에서 이런 명이 있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광진은 행실이 매우 거칠고 또 그의 지론(持論)도 시기를 따라 고개를 숙이거나 쳐드는 데 불과하였으며, 정홍순은 단지 나이 젊고 인망이 가벼운 자인데도 일시에 승진 발탁하여 공의(公議)에 크게 어긋났지만 정신(廷臣)으로서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0책 83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62면
【분류】왕실-사급(賜給) / 사법(司法) / 인사(人事) / 변란(變亂) / 가족-성명(姓名)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광진은 행실이 매우 거칠고 또 그의 지론(持論)도 시기를 따라 고개를 숙이거나 쳐드는 데 불과하였으며, 정홍순은 단지 나이 젊고 인망이 가벼운 자인데도 일시에 승진 발탁하여 공의(公議)에 크게 어긋났지만 정신(廷臣)으로서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세자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장령 이길보(李吉輔)가 전달(前達)한 이하택(李夏宅)·이색(李穡)·이염(李濂)을 노적(孥籍)하는 일 및 이계강(李戒剛)을 잡아다 국문하는 일을 전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하택은 바로 이명언(李明彦)의 아들인데 일찍이 국옥(鞫獄)에 들어 섬으로 귀양갔었으며, 이염과 역적 이색은 모역(謀逆)을 자백하고서 경폐(徑斃)된 자이다.

 

이규채(李奎采)·유현장(柳顯章)을 승지로 삼았다.

 

3월 3일 병자

이명언에게도 역률(逆律)을 추가하여 시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유신(李裕身) 등이 연명(聯名)한 상소 가운데서 청한 바를 따른 것이었다. 당시 추율(追律)이 크게 시행되어 소굴이 모조리 깨뜨려졌으며, 소론(少論)으로 평소 이광좌(李光佐)의 언론(言論)을 사표(師表)처럼 여겨 아비는 전해 주고 자식은 받았었는데, 그러한 자들이 모두 겁을 내어 어쩔 줄을 모르고 변액(便液)을 함께 쌌으며, 진신(搢紳)의 상소라고 일컬은 것은 위로는 경재(卿宰)로부터 통적(通籍)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나열하여 기록하지 않음이 없어 지난날 합계(合啓)를 마음대로 정지시키던 것과 같은 부류에 이르렀고, 또 그 이름이 혹시라도 소록(疏錄)에 누락될까 두려워하여 직접 서로 공갈하기를 반세(半世) 동안 미친듯이 하였으며, 이광좌의 무리를 징토(懲討)한다로 핑계대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상소문[公車]이 무더기로 쌓였었는데, 임금이 모두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지금부터 뒤로는 이런 등의 상소를 올리지 말고 잡되게 떠드는 것을 그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그 사람이 만약 살아 있다면 나라를 위하는 도리로 다투는 것이 가하겠지만, 그 사람이 이미 죽고 없다면 무엇 때문에 특별히 석방한 것을 다투며 고집하는가? 어제 이미 지난번에 눈물을 흘린 뜻을 유시하였으며, 이관(李爟)086)  의 사건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서로 다투면서 해를 넘기기보다는 윤허하여 따라주어 종력을 짓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원량(元良)을 대신해서 특별히 윤허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여 보니 관(爟)과 이당(李爣)087)  은 똑같으니 대간이 청한 대로 관은 단천부(端川府)로 정배(定配)하고 당은 홍원현(洪原縣)으로 정배하도록 윤허한다."
하였다. 관과 당은 권혜(權嵆)와 권집(權䌖)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었다는 것으로 사헌부에서 진달하여 먼 곳으로 귀양 보내도록 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윤허를 받았다.

 

장령 이길보(李吉輔)가 소회(所懷)를 진달하기를,
"윤광철(尹光哲)은 이것이 어떤 등류의 흉역(凶逆)인데 전 부사 이양중(李養中)·전 영장 유무(柳懋)가 몸소 관장(官長)이 되어 역적 윤광철의 집에 왕래하였으며 서찰이 끊기지 않았던 정상이 윤광철의 문서(文書)와 일기(日記) 속에서 탄로(綻露)되었습니다. 청컨대 이양중·유무를 아울러 아주 먼 변경으로 귀양 보내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다시 나침(羅沈)·이제춘(李齊春)·이종무(李宗茂) 등을 추국하였다.

 

3월 4일 정축

정언 송문재(宋文載)가 전달(前達)을 전하고 또 진달하기를,
"역적을 수좌(收坐)하는 삼척법(三尺法)이 매우 엄중하여 결단코 때에 따라 낮추거나 올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전교(傳敎) 가운데 제적(諸賊)을 추율(追律)하게 하면서 당연히 연좌된 자도 범인과 같은 형벌에 처해야 하는데 사형을 감하라는 명이 있으셨으니, 이것이 비록 대조(大朝)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지극히 어진 마음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흉얼(凶孼)이 제거되지 않으면 화란(禍亂)의 근원이 되기에 적합하며 왕장(王章)이 한번 굽혀지면 실제로 뒷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윤취상(尹就商)·이진유(李眞儒)·이사상(李師尙)·이명의(李明誼)·정해(鄭楷)·윤성시(尹聖時)·서종하(徐宗廈) 등에게 노륙(孥戮)하는 법을 왕부(王府)로 하여금 빨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3월 5일 무인

1품의 중신(重臣)을 보내어 토역 고유제(討逆告由祭)를 태묘(太廟)에서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친제 교문(親製敎文)을 반포하였는데,
"왕은 말하노라. 모든 일에는 근본과 지엽적인 것이 있으니, 근본이 다스려지지 않고서 지엽적인 것이 다스려진다는 것은 내가 듣지 못하였다. 아! 난역(亂逆)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어찌 무신년088)  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으며, 그 근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조태구의 차자(箚子)와 유봉휘의 상소였던 것이다. 아! 만약 우리 황형(皇兄)의 지극히 어지시고 우애하는 성덕(盛德)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겠는가? 조태구·유봉휘가 앞에서 먼저 인도하였지만 그 계책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경·박필몽·이진유·이명의·정해·윤성시·서종하의 상소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역적 목호룡의 흉측하고 참혹한 고서(告書)와 같은 것이었다. 김일경·박필몽·윤취상·이사상의 무리가 부시(婦寺)와 몰래 교통하고 배포(排布)를 체결하여, 더러는 그해 겨울에 상소하기도 하고 더러는 남이 모르는 곳에서 가만히 계획하여 역적 목호룡의 계책이 시행되도록 꾸며낸 뒤에야 그만두었는데도, 성덕(聖德)이 미치는 바에 오직 단련(鍛鍊)한 자만 죽이고서 그쳤기 때문에 마음에 답답하게 맺혔는데, 갑진년089)  에 이르러 또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을 쌓아 심유현(沈維賢)과 교결(交結)하여 음참(陰慘)하고 불궤(不軌)한 계제(階梯)를 삼으려고 하였으며, 또 효경(梟獍)처럼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과 결탁하여 무신년에 재적(載籍)에도 없었던 역란(逆亂)을 빚어내게 하였으니, 이는 바로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의 사고가 아니며, 말미암아 온 것은 점차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 내가 비록 부덕(不德)하기는 하지만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아 한결같이 고심하였기 때문에 단지 드러난 자만 거론하여 왕법을 바로잡으면서, 협박에 의하여 따른 자는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근본을 묻지 않았으므로 소하(疏下)의 제적(諸賊)이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는 데 그쳤으며 역적 윤취상은 단지 형장을 맞다가 죽었는데도 역률을 더하지 않았으며, 역적 이사상 또한 차율(次律)을 시행하게 하였으니, 아무리 흉도(凶徒)와 역종(逆種)이라 하더라도 거의 그 관대함에 감동하여 징계되는 바가 있어야 가한데, 징계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도륭(鄭道隆)·박도창(朴道昌)처럼 차마 말하지 못할 난역이 있었고, 그 뒤에 또 이색(李穡)과 이염(李濂)이 있었으며, 또 권혜(權嵆)·권집(權䌖)이 있었는데, 이색과 이염은 역종을 모아 감히 불궤를 도모하였고, 권혜와 권집은 교묘하게 음서(陰書)를 만들어 그 뜻을 행하려 하면서, 거의 10년 동안 몇십 명의 역적이 사건은 비록 다르다고 하지만 마음은 똑같았으니, 이것은 마음이 서로 연관되었다고 말할 만하다. 기타 종종 경외(京外)에서의 음휼한 부류와 위를 무함하는 부도(不道)한 짓 또한 이 무리들의 종자(種子)이니, 그것을 비록 마음 아파한들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연고 때문에 효경처럼 나라를 원망하는 외에 중외(中外)에서 그릇되게 협박을 당하여 왕법에 복주(伏誅)된 자가 그 얼마이겠는가? 아! 지난날 엄중히 다스리기를 일삼지 않았던 것이 비록 관대하게 하려고 힘쓴 뜻에서 연유하였다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반역하려는 마음을 고치지 않고 역적 이하징(李夏徵)과 역적 윤지(尹志)에 이르러 극성하였다. 역적 이하징은 역적 윤지와 교통(交通)하였으니 그것이 비록 의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처음에 엄문(嚴問)한 것은 말세(末世)의 이런 무리들을 바로잡고 난역의 근본을 엄히 다스리려는 데 불과하였었는데, 그를 심문함에 이르러 역적 윤취상을 역적이 아니라고 이르며, 김일경과 박필몽을 신하로서의 절개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마음의 음흉함이 김일경·박필몽보다 지나치다. 역적 윤지는 가만히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향당(鄕黨)의 무식한 사람과 교결(交結)하여 무신년의 〈반역을〉 본받아 먼저 흉서를 내걸어 인심을 동요시키고, 역적 이인좌(李麟佐)와 역적 정희량(鄭希亮)을 본받아 군대를 핑계대며 대궐을 침범하려고 하였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건도(乾道)가 분명하여 그 그물에서 도망하지 못하고 차례로 체포되었으며, 불궤가 탄로나 음흉하고 참혹한 데 대한 분통은 비록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지만, 그 근본을 캐어 보면 한마디로 조태구·유봉휘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역적 이하징과 역적 윤지의 사건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일제히 분하게 여기면서 징계하고 성토하라는 주청이 번갈아 올라오니, 지금부터 이 뒤로 해동(海東)에 다시 천지가 있게 될 것이며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의리와 신하는 신하로서의 의리가 쾌하게 바로잡아질 것이다. 아! 지금의 하교는 한갓 즉흥적인 일로 인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안 지가 오래 되었지만 지금에서야 처분하는 것은 나의 생각 또한 따로 있어서인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몇번의 난역이 오로지 내가 관대한 은전을 너무 지나치게 시행하면서 그 근본을 다스리지 않았던 잘못에서 연유하였던 것이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살리려는 도리를 〈강구하다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였는데, 이따금 나의 처분이 이 도리에서 반대가 되니 무엇 때문인가? 갑진년 왕위를 계승하였을 적에 만약 근본을 징계하였더라면 어떻게 이인좌·정희량이 있었겠으며, 그때에 만약 그 근본을 징계하였더라면 또한 어떻게 정도륭·박도창이 있었겠으며, 그때에 만약 그 근본을 징계하였더라면 또한 어떻게 이색·이염이 있었겠으며, 그때에 만약 그 근본을 징계하였더라면 또한 어떻게 권혜·권집이 있었겠으며, 그때에 만약 그 근본을 징계하였더라면 지금 어떻게 이하징·윤지가 있겠는가? 이러한 일 때문에 한 사람을 아까워하다가 열 사람을 형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의 잘못이다. 이미 깨닫고서 또 근본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앞서 잘못한 것을 뒤에 반복하지 않는 뜻이겠는가? 그리고 무신년에 남태징(南泰徵)을 정법(正法)하였을 적에 도하(都下)에서 편안하게 여겼으니, 이번의 처분은 그 또한 이런 의미이다. 조태구·유봉휘·윤취상·이사상·이진유·이명의·정해·윤성시·서종하에게는 아울러 역률을 시행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로 하여금 모두 이런 등류 제적(諸賊)의 반역을 알게 하고,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과 순종의 구분을 명백히 알도록 하라. 그러나 해를 기다렸다가 추율(追律)하는 것이 이미 법 밖인데, 더구나 역률을 추가하여 시행하는 데 있어서 그 자식에게 미치도록 하겠는가? 비록 역률을 시행한다 하더라도 그 자식의 경우는 한결같이 나이가 차지 않았다는 율(律)에 의거 모두 종으로 삼는 데 그치도록 하라. 처분을 이렇게 하였는데, 이광좌의 마음을 내가 비록 알기는 하지만 이광좌가 아니었으면 김일경·박필몽의 무리가 그 어떻게 방자하기를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이광좌가 그 당시 영수(領袖)가 되었었는데 무신년 역란 뒤와 기유년090)   폐합(閉閤)하던 때에 이광좌가 만약 크게 깨닫고 뉘우쳐 자열(自列)에서 이수(泥首)091)  하였다면 비록 당습(黨習)이 모함하고 빠뜨리는 시기라 하더라도 누가 이와 같이 논쟁을 하였겠으며, 역적 이하징과 역적 윤지가 어떻게 이와 같이 날뛸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미 그 근본을 다스렸다면 이광좌가 어디로 도망하겠는가? 지금 삼사(三司)의 주청을 특별히 따르도록 청하였는데 최석항(崔錫恒)이 비록 조태구와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옛날에 나라의 은혜를 받았었고 지위 또한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조태구와 마음을 같이하여 그 일을 단련(鍛鍊)하였으니 관작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지나치다는 의논은 참으로 옳으니, 이광좌와 같이 일체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량(元良)을 불러 시좌(侍坐)하게 하고서 승선(承宣)에게 교문(敎文)을 베끼도록 명하고는,
"이 처분을 가지고 위로는 태묘(太廟)에 고하고 아래로는 중외(中外)에 알리니, 아! 신민(臣民)들은 모름지기 알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뭇 신하들의 하례를 받기를 마치고 세자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여 하교하기를,
"30년 동안 고심했던 일을 이제야 비로소 성과를 맛보게 되었으니,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이 모두 한 덩어리로 돌아가 옛날에 충성했던 자는 편안하게 그대로 있을 것이며 옛날에 역적 같기도 하면서 역적이 아닌 자 또한 이미 마음을 고쳤을 터이니, 내가 장차 저승에서 성고(聖考)와 황형(皇兄)을 찾아 뵙고 절할 면목이 있게 되었다. 이 뒤의 일은 네게 달려 있으니, 너는 그것을 굳게 지키며 흔들리지 말고 세도(世道)를 진압시키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윤음을 내리기를,
"열성조께서 돌보시고 도우시어 천지가 다시 밝아지고 인심(人心)이 한결같이 씻겨져 모두 대정(大正)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지금부터 뒤로는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도리와 신하는 신하로서의 도리가 펼쳐지고,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다툼이 그칠 것이니, 아! 비덕(否德)이 거의 마음을 느슨히 할 수 있겠다. 만약 이 뒤에 혹시라도 다시 지난 일을 제기하여 일변(一邊)의 마음을 달갑게 하거나 장주(章奏)하는 무렵에 협잡을 한다면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않고 당장 진전(眞殿)에서 아뢴 율(律)로 시행할 터이니, 이는 바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인만큼 모두들 이 유시를 듣고 방헌(邦憲)을 범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으며, 또 대신 이하 문관(文官)·음관(蔭官)으로 반열에 참가한 자들을 함인정(涵仁亭)으로 불러 마음을 바꾸는 뜻으로 경계하고 유시하였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세희(李世熙)·나침(羅沈) 등을 형신(刑訊)하고 의금부(義禁府) 가도사(假都事) 유한수(柳漢秀)를 무장현(茂長縣)에다 형배(刑配)하였는데, 그가 죄인과 노중(路中)에서 서로 말을 하여 옥정(獄情)을 누설하였기 때문이었다.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이 상서(上書)하여 자송(自訟)하였는데 그것은 몇 해 전에 그가 한차례 상소하여 이광좌(李光佐)를 신구(伸救)하면서 심지어 친척으로 따지면 단문(袒免)하는 관계이지만 의리로는 사표(師表)와 같다는 말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경(卿)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성상께서 환하게 알고 계시며 나도 역시 알고 있는데, 하필이면 이와 같이 인구(引咎)하시오.’ 하는 것으로 답을 하였다.

 

3월 6일 기묘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광사(李匡師)·윤상백(尹尙白) 등을 신문하였는데, 그들이 윤지(尹志)와 서로 교통한 자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광사는 이진유(李眞儒)의 조카이며, 윤상백은 윤연(尹㝚)의 아들이고 윤수(尹邃)의 조카인데, 윤연·윤수 모두 무신년092)   옥사에 들어 있었다.

 

3월 7일 경진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임금이 집영문(集英門)에서 여(輿)를 멈추고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에게 돈유(敦諭)하였다.

 

임국훈(林國薰)을 형신하니, 임국훈이 공초하기를,
"윤지(尹志) 부자(父子)와 서울 사람으로 서로 친한 사람은 신이 모르지만 이하징(李夏徵)은 일찍이 윤지와 서로 친하였으며, 이하징이 나주에 있었을 때에는 윤지의 아들이 늘 관아(官衙)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골 사람으로 서로 친한 자는 임징원(林徵遠)이며 유봉휘(柳鳳輝)의 친족인 유상전(柳尙轉) 및 유상전의 아들 유봉태(柳鳳泰) 또한 윤지의 집에 왕래하였습니다. 서울 사람인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자(字)가 제백(濟伯)인 자 또한 윤지와 서로 친하였었는데, 경오년093)  에 신이 서울에 있는 윤지의 집에 왔을 적에 제백이 와서 수작(酬酢)하는 것을 보았는데 친밀한 듯하였습니다. 그때에 앉아 있었던 손님으로는 윤희철(尹希哲)의 처남(妻男)인 이성(李姓)의 사람이었으며, 신이 윤희철의 집안에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이성인 두 사람이 자주 왔었고 윤희철의 처남 형제도 번갈아가며 왕래하였는데, 그 중에 이름이 이명조(李明祚)로 이보욱(李普昱)의 계자(繼子)가 된 자는 나주에 있을 때에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금구(金溝)의 도중(道中)에서 이효식(李孝植)이 ‘나는 흉서(凶書)를 내거는 기미를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제백(濟伯)은 대체로 이사상(李師尙)의 손자 이수경(李修敬)이다. 임국훈이 또 공초하기를,
"이른바 윤수찬(尹修撰)이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며 이른바 서문(序文)이란 그 뜻은 모르지만 제목은 몽금당서(夢錦堂序)였는데 몽금은 바로 윤지의 당호(堂號)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이하징의 사위는 이하징이 상처(喪妻)했을 때에 윤지의 집에 왔었는데, 윤지가 마호(馬虎)의 재액(災厄)을 듣고 근심하거나 즐거워함이 없었으며, 일찍이 별이 떨어진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윤지가 ‘이것은 천고성(天鼓星)으로 임진년094)   전에도 이런 변고가 있었는데, 지금 이런 변고가 있었다고 하니 햇수가 찰 것 같으면 틀림없이 난리가 있을 것이며, 난리가 있게 되면 나는 반드시 석방이 되어 돌아갈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안(務安)의 옥산동(玉山洞)에 살고 있는 윤가(尹哥)인 양반(兩班)은 이름은 모르지만 나이 60세에 가깝고 천수(天數)를 잘 추산(推算)했었는데 일찍이 나주에 와서 신에게 말하기를, ‘모년(某年)에는 조정에 반드시 변고가 있어 피차간의 일변인(一邊人)이 틀림없이 많이 죽을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이 말을 윤광철(尹光哲)에게 하였더니 윤광철이 매우 좋아하는 빛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국훈이 또 공초하기를,
"언젠가 윤지의 집에 갔더니 윤지가 ‘충청도에서 화약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소란스러움이 있다.’고 하며, 이어서 비기(秘記) 속의 말을 하였는데, 그가 틀림없이 뜻한 바가 있어서 말한 것입니다. 윤지가 일찍이 허리를 다쳐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지 않은 것은 진실로 긴요하지 않으나 다만 오래 살다가 시인(時人)이 출장(出場)하는 것을 보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굴원(屈原)의 원유부(遠遊賦)095)  를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윤지가 또 ‘시세(時勢)가 점차로 그릇되니 피차가 서로 단합해야 하는데 나는 먼 지방에 있어서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하였으며, 윤광철은 경중(京中)의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윤지의 첩(妾)은 바로 나윤학(羅允學)의 비(婢)였으며 나윤학 또한 윤지와 서로 친하였습니다. 윤광철은 산송(山訟)을 핑계로 작년에 상경(上京)하였는데 형제가 그의 늙은 아비를 떠나 일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것은 일이 매우 수상스럽습니다."
하였다. 임국훈이 또 공초하기를,
"이만강(李萬江)이 귀양살이하면서 윤지와 서찰을 왕복(往復)한 상황은 신도 압니다."
하므로, 임국훈과 윤응진(尹應振)을 면질(面質)하게 하였다. 임국훈이 말하기를,
"네가 나주에 왕래하였을 때에 나의 신수(身數)가 3년 동안 좋지 않았다고 말하였고, 또 모년(某年)에 일변인(一邊人)이 많이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내가 ‘모변(某邊)인가?’라고 말하자, 네가 ‘모변이다.’고 말하면서 다가오는 모년(某年)이나 혹은 뒤에 모년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윤광철에 대한 추수(推數)는 일찍이 윤광철의 말을 들으니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윤응진이 말하기를,
"단지 너의 신수가 모년에 좋지 않다고 말하였을 뿐이고 원래 일변인이 많이 죽는다는 말은 없었다."
하였다. 윤광철을 신문하자, 윤광철이 공초하기를,
"신이 윤상백(尹尙白)에게 서문(序文)을 청구하자 윤상백이 지어 주었으며, 이른바 기수(箕叟)는 윤득구(尹得九)의 자(字)이니 바로 윤단(尹澶)의 아들이고 윤성시(尹聖時)의 손자이며, 제천(堤川) 이가(李哥)의 사위입니다. 신이 윤득구와는 서로 알고 지낸 지 10여 년이며 윤득삼(尹得三)은 바로 윤득구의 형이고 이하징의 사위인데, 윤득구가 간혹 신의 집에 와서 시(詩)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무안(務安)의 술사(術士) 윤응진은 보이지 못했지만 일찍이 추수(推數)는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작년에 서울에 왔을 적에 분발(分撥)096)  을 보고서 호재(虎災)가 있었음을 알았으며, 갑자년097)  에 조보(朝報)와 장계(狀啓)를 보고서 별이 떨어졌다는 말이 있었음을 알았으나 천고성에 대한 말은 신이 하지 않았습니다."
하므로, 윤광철과 임국훈을 면질(面質)하게 하자, 임국훈이 말하기를,
"네가 서울에서 내려왔을 적에 어찌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하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정말 말하였다."
하자, 임국훈이 말하기를,
"네가 또 말[馬]이 들어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하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이것을 내가 언제 말하던가?"
하자, 임국훈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호랑이가 들어오고 말이 들어온 것은 큰 변괴(變怪)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에 별이 떨어진 일이 있었기 때문에 네가 또 말하기를, ‘임진년 전에 별이 떨어졌었고 그 뒤에 난리가 있었는데, 조중봉(趙重峰)098)  은 미리 그 일을 알았었다. 갑자년에서 계산하여 몇 해에 이르면 반드시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었다."
하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별이 떨어졌다는 말을 내가 언제 주고받았는가?"
하면서, 피차가 서로 다투었다. 윤광철이 말하기를,
"네가 일찍이 영암(靈巖) 사람이 미리 피란(避亂)을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 망령되게 말하는 것을 책망하였는데, 어찌 난리가 있을 것이란 말을 너에게 말하였겠는가?"
하였다. 임국훈이 말하기를,
"그때에 네가 조그마한 방(房)에 와서 분명히 말하였으며, 또 오래가지 않아 의당 난리가 있을 것이고 내가 의당 석방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임국훈이 또 말하기를,
"그때에 내가 윤가(尹哥)의 말을 전하면서 모년(某年)에 조정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이며, 피차간의 일변인이 모두 죽을 것이라고 말을 하자, 네가 귀를 쫑긋거리며 듣지 않았는가?"
하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말하였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같은 말은 일을 일으키기 쉬우니 망령되이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윤응진(尹應振)이 일찍이 나에게 틀림없이 관액(官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나에게 어찌 관액이 있겠는가? 윤응진의 말은 징험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하였다. 임국훈이 또 공초하기를,
"윤광철이 일찍이 한 절구(絶句)를 외우면서 전하기를, ‘철마가 서쪽에서 한강가로 왔다.[鐵馬西來漢水濱]’고 하였는데, 이 시(詩)는 바로 당저(當宁)께서 꿈속에 숙종에게 바친 시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몹시 분노하고 마음이 아파 정좌(定坐)할 수 없었다. 승지 김선행(金善行)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고려의 공민왕(恭愍王) 때 일이며 시참(詩讖)은 이미 홍건적(紅巾賊)099)  에게서 징험이 되었고 신 등도 일찍이 듣고서 외우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놀랍게 여기십니까?"
하니,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그러한가?"
하고, 즉시 김선행의 자급을 더하여 도승지로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또 윤광철과 임국훈을 면질하게 하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임국훈이 이 시(詩)를 외워서 전하였습니다."
하니, 임국훈이 도리어 말하기를,
"일찍이 화순(和順)에 살고 있는 최언항(崔彦恒)에게서 들었습니다."
하였다. 대체로 윤광철이 흉측한 마음으로 고려 말엽의 시(詩)를 거론하면서 억지로 끌어다 말을 하며 임국훈의 무리와 난만(瀾漫)하게 수작하고 심지어 감히 말하지 못할 입장까지 언급한 것이 남김없이 탄로되었으므로 임금이 즉시 결안(結案)하도록 명하였다. 그 결안에 이르기를,
"신은 윤취상의 손자이고 윤지의 아들로,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이 극도로 낭자한데도 반역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여, 엄히 국문하는 아래에서도 감히 고려 말엽의 시구(詩句)를 가지고 망측하게 견주었으니, 대역 부도(大逆不道)를 지만(遲晩)합니다."
하였다.

 

정언 송문재(宋文載)가 아뢰기를,
"며칠 전 경재(卿宰)의 상소는 새롭게 하는 뜻에서 나왔으며, 처분이 광명(光明)하고 천토(天討)가 빨리 시행되었으니, 가장 늦게 추정(追呈)한 상소는 이미 시기적으로 뒤진 혐의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직 이일제(李日躋)에 이르러서는 소하(疏下)의 흉적(凶賊)들과 불행하게도 출신이 가까우니 오직 놀랍게 여기며 두려워하고 물러나 위축되어 공의(公議)를 받아들여야 마땅한데, 자신이 노적(孥籍)하는 주청에 참여하여 간섭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좌랑 이우화(李宇和)는 그의 아비가 진장(陳章)한 것이 승정원에 의하여 기각되자 이에 감히 그 아비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대신 그의 이름을 채워 넣어 바쁘게 정납(呈納)하였는데, 제가 그 아비의 아들로 어찌 감히 징토(懲討)하는 논의에 참여하여 듣겠습니까? 청컨대 사직 이일제와 전 좌랑 이우화를 모두 사적(仕籍)에서 이름을 삭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지평 유사흠(柳思欽), 정언 송문재(宋文載)가 아뢰기를,
"여러 역적들을 추토(追討)하고 〈처자를〉 연좌시키는 일을 모두 왕부(王府)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죄인 나침(羅沈)이 물고(物故)되었다.

 

3월 8일 신사

하교하기를,
"윤광철(尹光哲)은 전례를 따라 사형을 집행할 수 없으니, 마땅히 숭례문(崇禮門)에 친림(親臨)하여 왕법을 통쾌하게 바로잡아 도성의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보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다."
하고, 이에 보련(步輦)을 타고 선인문(宣仁門)을 경유하여 출발하면서 왕세자에게 뒤따르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숭례문에 나아가 백관(百官)에게 차례대로 서도록 명하고 윤광철을 청파(靑坡) 앞 길에서 참형(斬刑)하게 하고 노적(孥籍)하기를 법대로 하도록 하였으며, 수급(首級)과 지각(肢脚)을 전시(傳示)하기를 한결같이 역적 남태징(南泰徵)의 예와 같이 거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지나는 길에 송현궁(松峴宮)에 들러 도승지 신회(申晦)를 보내어 구전(口傳)으로 동조(東朝)에 진달하기를,
"지금 차마 듣지 못할 흉언(凶言)을 듣고 흉적(凶賊)을 정법(正法)하였으나 실로 자성(慈聖)에게 돌아가 배알(拜謁)할 낯이 없기에 이 궁에 와서 있으면서 삼가 하교를 기다립니다."
하자, 동조(東朝)가 언교(諺敎)를 신회에게 주어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이제 흉적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매우 아프오. 진실로 엄중히 다스려 국법을 바로잡아야 마땅한데 어찌 대내(大內)로 돌아가지 않고 송현궁(松峴宮)에 머물 수 있겠오?"
하였는데, 임금이 그제야 환궁(還宮)하여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광사(李匡師)·윤상백(尹尙白)·이만강(李萬江)·윤득삼(尹得三) 등을 형신하게 하였다.

 

장령 이길보(李吉輔), 정언 송문재(宋文載)가 소회(所懷)를 진달하기를,
"유동원(柳東垣)이 이미 연설(筵說)을 역적 윤지(尹志)에게 빌려 준 일로 발배(發配)되었는데, 그 뒤에 윤광철(尹光哲)과 서로 친밀한 형상들이 또 역적 윤광철의 초사에 나타났으니 한차례 신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유동원은 설국(設鞫)하여 엄히 국문하소서. 그리고 한세량(韓世良)의 상소 가운데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다[天無二日]는〉 네 글자의 흉언은 실제로 조태구(趙泰耉)의 차자나 유봉휘(柳鳳輝)의 상소와 한 꿰미처럼 관통되었으므로 신명(神明)과 사람들의 분노가 아직도 쾌하게 씻기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한세량에게 대역률(大逆律)을 거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권혜(權嵆)와 권집(權䌖)처럼 요망한 역적은 옛날에 없었던 바인데, 흉완(凶頑)이 앞질러 죽어버려 천주(天誅)를 가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권혜·권집에게 대역률을 거행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권익관(權益寬)의 흉모(凶謀)와 역절은 그 당시 안무사(按撫使)의 장계(狀啓)에 낭자했었는데도 죄인을 잡는 하늘의 그물이 너무 성글어서 왕법(王法)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권익관에게 대역률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또 소회를 진달하기를,
"오시대(吳時大)가 스스로 목을 맨 것은 문득 결안(結案)한 것이며 김항(金沆)의 흉언(凶言)은 실제로 범상(犯上)100)  에 관계되니, 왕법(王法)으로 논해야 하며, 결단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거나 혹은 경폐(徑斃)되었다고 하여 해당 형률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오시대와 김항을 아울러 왕부(王府)로 하여금 형률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김항의 일만 윤허하였다. 시대(時大)는 바로 오시대(吳時大)인데 역적의 초사(招辭)에 갑자기 나왔으며, 도사(都事)가 체포하러 출발했음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김항의 흉언이란 대체로 ‘형살(刑殺)’ 두 글자의 초사를 가리킨 것이다.

 

3월 10일 계미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이수경(李修敬)·윤득삼(尹得三)·윤득구(尹得九)·이만강(李萬江) 등을 신문하였는데, 윤득삼은 윤성시(尹聖時)의 손자이다. 이만강이 공초하기를,
"신에게 조금의 문예(文藝)가 있었지만 자신이 대죄(大罪)에 빠져 당시에 용납되지 않고 멀리 섬으로 귀양을 갔었기 때문에 원한이 마음속에 가득하였었습니다. 작년 10월 초에 역적 윤지(尹志)를 찾아갔더니, 윤지가 말하기를 ‘내가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고 한다.’고 하기에, 신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내가 무신년101)  부터 내려오면서 오래도록 답답하게 귀양살이를 하고 있으며, 자네 또한 말단의 관원으로 요도(潦倒)102)  하였다가 지금 또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서로 의논하여 무신년에 있었던 것과 같은 거사를 일으키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하기에, 신이 거절할 수 없었으며, 그 뒤에 윤지가 또 사람을 보내어 신을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에 다시 찾아갔더니, 윤지가 말하기를, ‘무신년의 경우는 경솔하게 육지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일이 마침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섬을 근거지로 삼는 것만 못하다.’고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식량이 없는 것은 어떻게 하려는가?’ 하였더니, 윤지가 말하기를, ‘먼저 탐라(眈羅)의 연해(沿海)를 점거하여 출몰하면서 세선(稅船)을 약탈하고 이어서 진도로부터 곧바로 강화에 닿는다면 일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므로, 형신을 가하도록 명하였다.

 

유정(柳綎)의 관작을 추탈(追奪)하도록 명하였다. 유정은 연설(筵說)을 역적 윤지에게 전하여 보여 주었고, 또 역적 윤취상(尹就商)의 초헌(軺軒)을 빌려 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역적의 초사에서 드러났으므로 대신(臺臣)이 추죄(追罪)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박문수(朴文秀)·이철보(李喆輔)를 소견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흉역(凶逆)이 또 생겨났기에 이런 대처분이 있었습니다. 신은 당론(黨論) 속에서 태어나고 당론 속에서 자라났고 당론 속에서 늙으면서 오늘날에 이르렀지만 사리에 어두워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죽을 죄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역적을 성토하는 소(疏)를 올렸음을 듣고 신은 당습(黨習)에 병(病)이 들어 감히 갑작스럽게 시비(是非)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속으로 불평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 미봉(彌縫)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난만(爛漫)하게 생각하고 헤아리고서, 마음속으로 국가의 처분이 옳으면 당연히 따르고 그르면 비록 뇌정(雷霆) 같은 위엄을 당하더라도 결단코 면종(面從)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고서 반나절 동안 생각하고 헤아리며 도리(道理)로 짐작하여 흉중(兇中)을 씻어내고서야 비로소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문득 퇴휴(退休)를 함께하였기 때문에 반교(頒敎)하는 뜰에 들어가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연중(筵中)에서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은 부류에 대하여 엄중히 하교한 바가 있었다고 하니, 이것이 죽을 죄입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이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모두 근거지를 잃어버렸으니, 만약 상신(相臣)이 현명하고 전관(銓官)이 현명하다면 10년의 계획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이철보가 말하기를,
"신이 사리에 어둡고 살피지 못하여 미처 역적을 성토하는 소(疏)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만, 신의 아우가 와서 성교(聖敎)를 선포하기에 혹시라도 천신(賤臣)이 죄려(罪戾)에 빠질까 염려하였는데, 나라의 은혜가 이와 같으니 실로 죽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처신하기 어려움은 과사(科事)입니다. 돌이켜보건대, 지금 처분이 크게 정해지고 국시(國是)가 잘 바로잡혔으니, 이런 과목(科目)은 실제로 용납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과명(科名)은 참으로 불행하지만 지난일은 모름지기 말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을 집의로, 박치문(朴致文)을 사간으로, 이육(李堉)을 장령으로, 윤동성(尹東星)을 헌납으로, 정상순(鄭尙淳)을 정언으로, 홍경해(洪景海)를 문학으로, 남태제(南泰齊)를 동지의금부사로, 정익하(鄭益河)를 지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11일 갑신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만강(李萬江)을 신문하고 다시 이효식(李孝植) 등을 추국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명을 받고 입견(入見)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천보가 탄핵을 받은 것은 심상(尋常)한 사건과 비교가 되지 않는데도 탄핵하는 먹물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수문(脩門)으로 들어왔으니,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60책 83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65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천보가 탄핵을 받은 것은 심상(尋常)한 사건과 비교가 되지 않는데도 탄핵하는 먹물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수문(脩門)으로 들어왔으니,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만하다."

 

집의 채제공, 헌납 윤동성 등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3월 12일 을유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고 다시 이만강(李萬江)·이수경(李修敬) 등을 문초하다.

 

장령 이육이 아뢰기를,
"목호룡(睦虎龍)의 흉역(凶逆)은 지난 역사에서도 없었던 바인데, 이거원(李巨源)이 그 교문(敎文)을 지었으니 그 마음을 알 만합니다. 청컨대 먼 곳으로 귀양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섬으로 귀양 보내도록 하였다.
아! 이거원의 부범(負犯)은 문득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동일한데 지금까지 편안히 살고 있으니, 춘추(春秋)에서 당여(黨與)를 먼저 다스린 뜻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신(臺臣)이 된 자가 단지 변방으로 귀양 보내도록 청하였으니, 무엄하다고 말할 만하다.

 

죄인 이만강이 물고(物故)되었다.

 

이정보(李鼎輔)를 지의금부사로, 조위진(趙威鎭)을 황해 수사로 삼았다.

 

3월 13일 병술

밤 1경(更)에 유성(流星)이 성성(星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西方)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쯤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정수헌(丁守憲)을 신문하니, 정수헌이 공초하기를,
"신이 파자(破字)하는 술수를 조금 알고 있었는데, 계해년103)  에 역적 윤지(尹志)를 나주에 가서 보니, 윤지가 말하기를, ‘내가 어느 시기에 석방이 되겠는가?’ 하며 ‘전(田)’ 자를 써서 보이므로, 신이 시(詩)로 그것을 해석하기를, ‘입에 십자(十字)를 머금고 있으니 10년을 헛되이 보냈으며, 좌우(左右)의 요새를 막고 있으니 왕인들 또한 어떻게 하리요. 어디로 말미암아 머리를 내놓을 길이 없으니, 마음에 돌아갈 생각을 끊으시오.’ 하였으며, 또 해석하기를, ‘고기의 머리와 꼬리가 잘렸으니 기필코 그물에서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먹고 살기에 핍박되어 잡술(雜術)을 가지고 흉적(凶賊)과 문답(問答)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죽을 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국문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내가 이미 큰 처분을 하였다. 모든 일을 통쾌하게 하면 폐단이 생기게 되니, 병(病)에다 비유하는 것이 적당하다. 지나치게 보충하는 것도 불가하고 지나치게 쏟도록 하는 것 또한 불가하겠기에 지금은 대승기탕(大承氣湯)을 써서 그 보익(補益)해야 할 약재를 생각한 연후라야 그 원기(元氣)를 조화(調和)시킬 수 있는데, 또 한 첩(貼)을 쓴다면 그 지나침과 적당함이 어떠하겠는가? 요즈음의 의금부의 초기(草記)를 내가 모두 보지 않는다. 이순관(李順觀)과 권익관(權益寬)의 아들이 어떻게 그 아비의 역모(逆謀)를 알았겠는가? 조종에 있는 여러 신하들은 모름지기 이 마음을 본받아 하나의 ‘쾌(快)’ 자(字)를 마음으로 삼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물고(物故)된 죄인 김항(金沆)을 대간(臺諫)의 진달로 인하여 범상 부도(犯上不道)로 처단하셨는데, 범상에 대해서는 본래 율문(律文)이 없으므로 《대전(大典)》 난언조(亂言條)의 윗사람을 간범(干犯)한 정리(情理)가 아주 위태로운 것은 참형(斬刑)하는데, 단지 가산을 적몰(籍沒)하는 율문에 의거 거행하도록 하는 일을 명하셨습니다. 무상(誣上)이나 범상(犯上)은 논할 것 없이 죄가 부도(不道)에 관계되는데도 그 적용한 법은 도리어 강도(强盜)를 다스리는 형률보다 가벼우니, 결단코 역적을 신문하여 처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김항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산을 적몰하는 외에 그의 처노(妻孥)를 연좌시켜 노비로 삼는 것을 그대로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항의 처노는 단지 섬으로 귀양을 보내되 사유(赦宥) 전을 가리지 말도록 하고 이 뒤로는 여기에 의거 시행하게 하라."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권익관(權益寬)의 손자가 한 사람인데 출계(出繼)하였다는 것 때문에 역시 당연히 연좌되어야 할 형률을 모면하였으니,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조태구(趙泰耉)의 손자 및 이진유(李眞儒)의 제질(諸姪)의 사례에 의거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죄인 윤희철(尹希哲)과 이수경(李修敬)이 물고(物故)되었다.

 

3월 14일 정해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김주천(金柱天)을 신문하였는데, 김주천은 바로 김일경(金一鏡)의 당(黨)인 김호(金浩)의 아들이다. 그의 서롱(書籠) 속에 김호의 일기(日記)가 있었는데, 김일경의 역절(逆節)이 이미 드러난 뒤에도 아태(丫台)104)  라고 일컬었고, 또 역적 김일경이 정법(正法)되어 결안(結案)을 기다리지 않아야 하는데도 또 김일경·박필몽(朴弼夢)에게 우익(右翼)이 있다는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있었으며, 또 이보욱(李普昱)이 귀양 갈 때에 준 시(詩)가 있었는데, 마지막 귀절에 ‘어찌하여 천일이 다시 어두운가[如何天日更昏昏]’ 하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삼사(三司)에서 김호의 더할 나위 없이 흉측한 정절(情節)이 낭자하여 그의 아들 김주천의 현착 문서(現捉文書) 가운데서 모두 드러났으니, 그 심장(心膓)을 추구하여 보면 흉특(凶慝)하기가 견줄 데가 없지만 생전(生前)에 현륙(顯戮)을 시행하지 못한 것이 이미 신명(神明)과 사람의 분노가 대단했었는데, 오늘날 추토(追討)를 빨리 시행하는 것은 거의 난적(亂賊)의 두려움이 된다고 아뢰고, 김호도 대역률(大逆律)에 의거 거행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주천(金柱天)이 공초하기를,
"신이 윤광철(尹光哲)과는 이웃에서 5, 6년을 살았기에 자연히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하므로, 김주천을 형추(刑推)하니, 공초하기를,
"이수경(李修敬)·이수범(李修範)·윤득정(尹得貞)·윤득명(尹得明)·윤득삼(尹得三)·윤득구(尹得九)·이재하(李載夏)·민효달(閔孝達)·윤상백(尹尙白)은 모두 신 등의 도당(徒黨)이며, 윤광철과 감싸며 함께 모의하여 일변(一邊)의 사람을 제거하려고 하였습니다. 4, 5년 전에 신이 윤광철의 집에 갔더니 이수경이 윤광철과 서로 말을 하다가 신을 보고서는 중지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군(君)의 무리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였더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너같이 용렬한 군사가 하필이면 이를 알려고 하는가? 방금 피차가 칼을 어루만지며 서로 노려보고 있으니 일변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제거하는 방법은 불궤(不軌)하는 외에는 다른 계책이 없다.’고 하였으며, 윤상백·민효달 또한 일찍이 윤광철의 집에서 만나 보았는데, 윤광철이 입으로 신을 가리키며 윤득정의 형제에게 말하기를, ‘우리 무리가 하는 바를 이 사람도 알고 있다.’고 하였는데, 신이 윤득삼·윤득구 형제를 보자 그들이 말하기를, ‘네가 윤광철의 말을 들었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바로 일변을 제거하려고 하는 계획이다.’ 하니, 윤득삼이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면서 윤광철은 나주에서 이미 모두 체결하였으며, 경중(京中)은 윤상백·윤득정·이수경 등 여러 사람들이 주장하여 사람을 모은다고 하였습니다. 윤광철이 말하기를, ‘우리 무리가 미워하는 사람이 방(榜)을 내다 걸면 좋겠다.’고 하였으며, 또 명화적(明火賊)과 체결하여 군기(軍器)를 훔져내려고 하며 거사(擧事)하는 시기는 단지 해를 쌓아가면서 경영(經營)하려고 하였지만 당초에 날짜를 약속하지는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이 술을 잘 마셨기 때문에 이 무리들이 술에 취하여 말하는 즈음에 그것을 누설시킬까 염려하여 늘 외면적으로 대우하였고 이면(裏面)의 일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므로, 다시 김주천을 추문하니, 공초하기를,
"윤광철이 신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누설시킬 것이다.’고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누설시킬 자이겠습니까? 그 일은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였더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나는 호남(湖南)을 담당하여 초적(草賊)과 체결할 터이니, 너는 서울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주장하는 것이 적합하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신 또한 전재(錢財)를 내어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며, 김주천이 또 공초하기를,
"윤광철은 말하기를, ‘제 집 값은 응당 6백 냥(兩)이 되고, 윤상백의 전답(田畓)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돈으로 환산한 숫자 또한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효달(閔孝達)은 말하기를, ‘내가 윤광철을 보았더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너 또한 어찌하여 논을 팔아 일을 함께하지 않는가?」 하므로, 내가 답하기를, 「통진(通津)의 논값이 매우 헐한데 어떻게 속히 팔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주천이 또 공초하기를,
"윤광철이 정법(正法)되고 윤희철이 물고(物故)된 뒤에 신이 민효달을 가서 보았을 적에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는 기색이 있었다고 한 것은 정말 민효달의 말과 같았습니다."
하였다.

 

헌납 윤동성(尹東星), 지평 홍양한(洪良漢)이 아뢰기를,
"이보욱(李普昱)이 역적의 집안과 연달아 혼인하여 교결(交結)하며 친밀한 형상은 여러 역적의 공초에 낭자하니, 그의 부범(負犯)을 논한다면 실로 유정(柳綎)보다 줄어들 것이 없는데 유정의 경우는 이미 추탈(追奪)을 시행하였지만 이보욱의 경우는 아직도 관작을 보존하고 있으니, 형정(刑政)이 얼룩이 짐을 모면하지 못하며 공의(公議)가 갈수록 더욱 마음에 불안하게 여깁니다. 청컨대 고(故) 승지 이보욱의 관작을 추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한사직(韓師直)을 장령으로, 채제공(蔡濟恭)을 교리로, 홍경해(洪景海)를 수찬으로 삼았다.

 

이장오(李章吾)를 특별히 임명하여 통제사로 삼았다.

 

술사(術士) 정수헌(丁守憲)을 효시(梟示)하여 머리를 호남에 전하고, 호남의 잡술(雜術) 및 수령으로 잡류(雜流)를 맞아들이는 자를 엄금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도신으로 하여금 드러나는 대로 장문(狀聞)하여 〈사적(仕籍)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형률을 시행하게 하였다.

 

통제사가 아뢰기를,
"바닷물의 색깔이 피와 같이 붉고, 사람들 가운데 바닷 고기를 먹고 중독되어 죽은 자가 18인 입니다."
하였다.

 

3월 15일 무자

밤에 유성(流星)이 저성(氐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尺)이었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윤상백(尹尙白)을 형신하니, 윤상백이 공초하기를,
"신이 정말 윤광철과는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는데, 윤지(尹志) 부자(父子)가 역적을 모의하면서 시골 사람들을 많이 모아 심복으로 삼았고, 윤광철은 경중(京中)에 왕래하면서 역시 체결한 사람이 많았으니, 통제사 김윤(金潤) 및 박찬신(朴纘新)·조동하(趙東夏)·민후기(閔厚基)·민효달(閔孝達)·김주천(金柱天)·이시희(李時熙)·이명조(李明祚)가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윤광철의 말이 이들은 모두 그와 함께 모의하는 자들로 더러는 병량(兵糧)을 구하고 더러는 군기(軍器)를 구하는데 대강의 배치가 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므로, 다시 윤상백을 추국하니, 공초하기를,
"신 또한 그 가운데 들어가 신과 윤광철이 괴수가 되었으며, 작년 8월에 윤광철이 올라와서 그의 아비와 장차 거사(擧事)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윤광철이 또 김윤의 아들을 보고 권하였으며, 이명조(李明祚)는 신이 그의 동생 이양조(李陽祚)를 시켜서 권하여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금년 초봄에 신이 조동정(趙東鼎)의 집에 가서 이 일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남쪽 지방에 군사를 일으킬 일이 있는데 그대 또한 안에서 일으키려고 하는가?’ 하니, 조동정이 형세를 관찰한다는 것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조동정이 바야흐로 훈국(訓局)의 중군(中軍)이 되었기 때문에 신의 생각으로는 조동정으로 하여금 그 관하(管下)를 거느리고 내응(內應)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라 여겼으며, 신치운(申致雲)도 함께 가담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윤상백을 추국하자, 공초하기를,
"이하징(李夏徵)이 군기(軍器)를 찾아서 지급한 일은 윤광철에게 들었습니다. 신치운은 뜻은 컸지만 세상에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공경(公卿)의 지위를 도모하려고 이 일에 가입하였으니, 신의 마음이 신치운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신이 편지로 신치운에게 서로 약속하기를, ‘남쪽 지방에 귀양을 가서 있는 사람의 부자(父子)가 합심 모의하여 군사와 양식 등의 일을 동원하고 있으니, 형(兄) 또한 착실하게 돌보고 돕도록 하시오.’ 하였으며, 박찬신이 함께 가입했다는 말은 윤희철(尹希哲)에게 들었습니다."
하였는데, 당시 윤상백은 장독(杖毒)이 눈에까지 치밀어 올라 미친 개와 같았으며, 남의 이름을 생각해서 번번이 입에서 뱉어 내므로 좌우에서 시위(侍衛)하는 신하들이 오직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이름을 생각하며 모두들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훈련원·금위영·어영청 삼영(三營)에 명을 내려 궁성을 호위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윤상백의 초사(招辭)에 끌어다댄 바가 많았으니, 밖으로는 김윤이고 안으로는 조동정·박찬신의 무리가 서로 잇달아 나왔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어영 대장 조동점(趙東漸)을 체임하고 홍봉한(洪鳳漢)을 대신하게 하였으며, 정찬술(鄭纘述)을 홍봉한 대신 총융사로 삼았는데, 조동점은 바로 조동정의 사촌 형제이다.

 

내의원 제조 원경하(元景夏)를 특별히 체임하고 이철보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원경하가 환후(患候)를 염려하는 뜻으로 대내(大內)에서 수라(水剌)를 진어(進御)하도록 주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의 동정(動靜)을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진달한 바가 놀랍도다."
하고, 체차하게 하였다.

 

박찬신(朴纘新)을 신문하기를,
"네가 대려 훈신(帶礪勳臣)105)                  으로 나이가 백수(白首)에 이르렀는데, 그 임금을 어떻게 저버리고 역적과 감싸며 모의(謀議)하였는가? 몇 해 전에 아뢴 한 귀절의 말에서 이미 신하로서의 절개가 없음을 알았지만 마음속에 간직한 채 말하지 않았으며, 지난날 체포되었을 적에도 특별히 분간(分揀)하여 석방하였으니, 너에게 조금이라도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 당시 추문(推問)하였을 적에 당연히 눈물을 흘리며 본 사건에 대하여 통렬히 진달하였을 터인데 그 초사가 이미 교만한 데 관계되었으며 지금 윤상백의 초사는 서롱(書籠)에서 얻은 것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니, 네가 만약 날마다 불만스러운 마음이 없었으면 그 어찌 바람이 없는데 물결이 생기겠는가?"
하였으나, 박찬신이 자복하지 않았다. 조동정·신치운을 신문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았다.

 

3월 16일 기축

장릉(章陵)의 왕후 능상(王后陵上)에 실화(失火)하였으므로 임금이 천담복(淺淡服)을 갖추고 3일 동안 정전(正殿)을 피하였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신치운(申致雲) 등을 신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김두행(金斗行)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김두행이 거짓으로 어사(御史)라고 일컫다가 호남에서 체포되었는데, 역적 윤지(尹志)가 흉서를 내다 건 사건을 대략 고하더니 잡혀와서 국문을 당함에 이르러서는 언어와 용모가 교활하고 악독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부대시(不待時)로 정법(正法)하도록 명하였는데, 그때에 이미 날이 저물었었다. 그러자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죄인에 대하여 밤 시간을 침해하면서 행형(行刑)할 수 없음은 저절로 정해진 법전입니다. 오늘 김두행에 대하여 빨리 행형하도록 하신 일이 비록 특별 하교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문을 잠그는 자물쇠가 이미 내려진 뒤에 황급히 거행하는 것은 상법(常法)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추조(秋曹)106)  의 당상을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월 17일 경인

해가 뜰 때에 해의 빛깔이 붉은 색이었으며, 밤에 달이 뜰 때에 달의 빛깔도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역적 이명언(李明彦)의 아들 이하관(李夏寬)을 홍주목(洪州牧)에서 교형(絞刑)에 처하도록 하였는데, 의금부에서 아뢴 것을 따른 것이었다.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였다. 이종성이 궁성(宮城)을 호위(扈衛)하라는 급보를 듣고 도성(都城)에 들어가 명(命)을 기다리니, 임금이 소견하여 위유(慰諭)하자, 이 종성이 말하기를,
"신은 본래 학력(學力)도 없이 당고(黨錮)107)  의 세대에 살면서 스스로 대죄(大罪)에 빠뜨려짐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당초의 뜻이야 어찌 나라를 저버리고 당(黨)을 위해 죽으려는 뜻에서 나와 그러하였겠습니까? 몇 해 전에 한차례의 상소로 죄인을 신구(伸救)하였습니다. 청컨대 견벌(譴罰)을 받아 지난날의 허물을 씻어 버린 연후에 전하께서 기용하신다면 신이 의당 진사(進謝)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다시 조정의 반열에 들어가기가 어렵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국문에 참여한 여러 대신에게 하문하자 영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전번의 상소와 나중의 아룀에 현재의 사실을 전혀 빠뜨려 버리고 단지 ‘죄인을 신구하였다.[伸救罪人]’는 네 글자로 자책(自責)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히 여기지 않을 터이기에 아마도 전부 용서하기는 불가할 듯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의 대답은 김재로와 같았으며,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의 대답은 모호하였으므로, 임금이 이 명을 내리게 되었다. 임금이 유척기에게 유시하기를,
"경은 조금 머물면서 조정을 진정시키고 편안하게 할 수 없겠는가?"
하면서 손을 잡고 머물도록 권면하자, 유척기가 뒷날 소회(所懷)를 진달하겠다는 것으로 대답하고서 물러났다.

 

죄인 윤상백(尹尙白)이 물고(物故)되었다.

 

3월 18일 신묘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박찬신(朴纘新) 등을 신문하였다.

 

헌납 윤동성(尹東星), 지평 홍양한(洪良漢)이 소회(所懷)를 진달하기를,
"윤상백(尹尙白)은 윤연(尹㝚)과 윤수(尹邃)의 자질(子姪)로, 성상의 관대한 은전(恩典)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역적 윤지(尹志)의 부자와 경외(京外)에서 체결하고 감싸며 역적을 모의하여 전후의 납초(納招)에서 그가 이미 자복하였으니, 비록 정절(情節)을 모두 캐어 조사하지 못하였음으로 인하여 즉시 전형(典刑)을 시행할 수 없었던 차에 그대로 경폐(徑斃)하였다고 하더라도, 역절(逆節)을 자복한 뒤라면 정법(正法)에 미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당 형률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역적 윤상백에 대하여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대역률(大逆律)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봉령(李鳳齡)을 강진현으로 귀양을 보내고 이봉령의 손자 이금성(李金聲)을 진도군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봉령이 당시 장릉 참봉(章陵參奉)에 임명되어 꿩과 노루를 잡으려고 포수(砲手)를 시켜 능소(陵所) 근처에서 사냥을 하게 하였었는데, 그의 손자 이금성은 열세 살 난 동자(童子)로, 포수에게서 화승(火繩)을 얻어 능상(陵上)에서 장난하다가 이어서 실화(失火)하였다. 사실이 알려지자 임금이 친히 이금성을 신문한 뒤에 일률(一律)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가 않은가를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는데, 영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와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는 말하기를,
"나이 10세 가 넘었으니, 국가에서 법을 적용함에 있어 차등이 없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만약 나이가 차지 않았다는 것으로 성상께서 특별히 하교하시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겠지만, 아래에서 우러러 청할 일은 아닙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금성이 화승을 가지고 막중(莫重)한 지역에서 장난을 하다가 잇달아 태운 일이 있었으니 제가 어떻게 일률을 피하겠는가마는, 보건대, 그의 키가 1척(尺) 남짓하고 그의 나이를 물으니 또한 열세 살에 불과한데, 이는 바로 본률(本律) 가운데서 임금의 재가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특별히 사형을 감하여 진도군으로 정배(定配)하게 하고, 이봉령은 강진현으로 해를 기한하지 말고 정배하도록 하며, 포수 방차봉(方次奉)은 형조로 하여금 한차례 형추(刑推)한 뒤에 삼척부로 정배하게 하고, 입번(入番)한 수복(守僕)·서원(書員) 및 능군(陵軍)은 아울러 영동(嶺東)으로 도배(徒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동정(趙東鼎)을 국문하였다. 당초에 조동정이 총관(摠管)으로 입시하다가 김주천(金柱天)이 국문당하는 것을 보았는데, 앞서 김주천은 본래 거짓되고 사리에 어긋나는 사람이라고 늘어놓으면서 행동이 당황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스럽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윤상백(尹尙白)이 고한 것으로 국문을 받았다. 조동정을 형추(刑推)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편론(偏論)하는 무부(武夫)로 당심(黨心)이 있었기 때문에 불만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신이 23일 입직(入直)하는 길에 역적 이하징(李夏徵)을 만나 보았는데, 바야흐로 행형(行刑)하러 나가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대궐에 들어갔으나 진흙탕 때문에 장전(帳殿)의 후문을 따라 시위(侍衛)하는 반열에 섰는데, 병조 판서 및 여러 문사 낭청의 신을 주시하는 것이 이미 뜻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승지가 신에게 어느 날 출직(出直)하였느냐고 물었으며, 금위 대장이 신에게 어느 곳에 서 있었느냐고 물은 것도 뜻이 있는 듯하였고, 약방 제조가 입직했을 때 잠시 보았다고 한 것과 승지가 훈국(訓局)은 다른 곳과 다르다는 것도 또한 모두 신을 가리키는 듯하였기 때문에 신이 정말 이것으로 수작한 바가 있었습니다. 신이 만약 잘못 들었다면 반드시 죽을 시기가 임박하여 스스로 의심하여 겁먹고 얼굴빛이 창황해질 것이라는 것은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는 ‘원래 이런 등의 수작이 없었느냐?’고 묻고 다시 ‘여러 신하들이 진달하지 않은 일과 수작하지 않은 말을 가지고 스스로 마음에 부족하게 여기고 뜻이 있었던 것으로 의심하였으니, 이 한 가지 일이 너에게는 단안(斷案)이 되는데 어찌 감히 속이려고 하는가?’고 신문하자, 조동정이 공초하기를,
"신이 후문을 따라 둘러서 들어간 것이 바로 신이 죄안(罪案)이기 때문에 저절로 허겁지겁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약방 제조가 진달한 바는 신이 듣고 의심한 듯합니다만 신이 저절로 의심이 생겨서 그랬던 것이고, 금위 대장이 들어와서 신에게 어디 있었느냐고 묻고 도승지가 여러 문사 낭청에게 지시하는 것을 또한 모두 익숙하게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어 그러하였습니다. 작문(作門)108)  한 곳이 바로 궁성(宮城)인데도 신이 감히 넘어서 들어갔으니, 죄가 참형(斬刑)에 해당합니다."
하므로, 형신을 가하자 조금 있다가 물고(物故)되었다. 신경훈(申景勳)을 신문하였는데, 신경훈은 바로 훈국(訓局)의 장교(將校)이다. 조동정이 잡혀가던 날에 신경훈의 아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기에 정절(情節)이 의심할 만하였으므로 신문하니, 신경훈이 공초하기를,
"신이 본래 조동정을 알지 못했었는데, 2월 초에 조동정이 신을 불러 저 자신의 운명을 점쳐 보도록 하고 이어서 환로(宦路)109)  를 물었기 때문에 신이 남쪽이나 북쪽이나 불가한 데가 없다는 것으로 대답하였더니, 조동정이 말하기를, ‘통제사도 할 수 있겠는가?’고 하기에 신이 ‘할 수 있다.’고 대답하니, 조동정이 또 말하기를, ‘대장·병조 판서·정승도 모두 할 수 있겠는가?’고 하므로, 신이 못할 바가 없다는 것으로 대답하였더니, 조동정이 또 말하기를, ‘훈련 대장을 먼저 제거한 연후라야 그 일을 할 수 있으니, 혹시라도 대가(大駕)가 움직이는 때를 만나 훈련 대장이 장막(帳幕)에서 숙위(宿衛)할 때에 네가 수청 집사(守廳執事)로 때를 틈타 살해한다면 앞으로 자연히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고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내가 막비(幕裨)110)  로 차마 하지 못한다.’고 하였더니, 조동정이 말하기를, ‘이것은 천천히 하는 것이 좋으며, 그 사이에 어찌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겠는가?’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동정이 또 말하기를, ‘북병사(北兵使) 조동하(趙東夏)는 바로 나의 지친(至親)이며, 통제사 김윤(金潤)은 바로 나의 가까운 친구인데 각기 남쪽과 북쪽에 있으니, 한쪽에서는 남쪽으로 오고 한쪽에서는 북쪽으로 오며 내가 또 안에서 호응한다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며 너는 응당 중군(中軍)으로 임명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실정을 알면서 고발하지 않고 지만(遲晩)한 것으로 정형(正刑)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아뢰기를,
"조동정의 역정(逆情)은 이미 역적 윤상백의 초사에 탄로되었는데도 그가 시위하는 때를 당하여 먼저 스스로 의심하고 겁을 내어 소란스럽게 행동한 형상은 제가 또 친히 신문하는 아래에서 하나하나 자복하였으니, 이것이 벌써 그를 단안(斷案)하기에 충분하지만 단지 음흉하게 속이면서 머금고 토로하기를 성실히 하지 않고 갑자기 경폐된 것으로 인연하여 전형을 바로잡지 못하였기에 왕장(王章)을 펴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며, 신경훈의 초사가 나옴에 미쳐 그가 체결하고 배포(排布)하며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한 자취가 더욱더 낭자하게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당연히 시행해야 할 형률을 한 시각이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청컨대 역적 조동정을 빨리 왕부(王府)에 명하여 대역률(大逆律)에 의거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박찬신(朴纘新)을 다시 추국하기를,
"네가 훈신(勳臣)으로서 사체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충훈부에서 한가하게 마음을 기르면서 남은 해를 마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데도 이것을 하지 아니하고, 문밖에는 거기(車騎)가 날마다 떠들썩하고 수응(酬應)이 날마다 혼잡하니, 이것이 벌써 노훈신(老勳臣)이 처신하는 체모가 아니다. 옛날의 고윤(高允)은 임금을 속이지 않았으니111)  , 더구나 너의 처한 바가 어떠한데 몇번의 엄중한 신문에도 곧바로 진달하지 않아 신하로서의 절개가 모두 상실되었고, 역적 윤지의 집안에 조보(朝報)를 빌려 준 것에 대하여 너는 전부 속이지만 지금은 증거가 상세히 갖추어졌다. 이른바 조문(弔問)하러 온 사람 또한 곧바로 불러들인 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이른바 거촉(炬燭)을 행하(行下)했다는 자는 그 또한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자, 박찬신이 공초하기를,
"신의 자부(子婦)의 상(喪) 때에 조문하러 왔다고 하는 자는 틀림없이 윤지의 사위인 홍가(洪哥)였는데 홍가는 신과 삼종(三從)이 되며 자부의 상 때에 정말로 조문하러 왔었고, 거촉을 행하하였었는데 와서 구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며 홍가 역시 틀림없이 얻어서 갔을 터이지만 기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윤지의 집에 조보를 빌려 주었다는 것을 신의 종의 초사에서 비록 고지(告知)하였다고 하였지만 빌려서 보냈다는 것은 실제로 잘못된 말이며, 윤상백(尹尙白)은 신이 본래 알지 못하였고 윤상백의 집에 거촉을 행하했던 것은 사람을 시켜서 간접으로 청하였기에 보냈던 것입니다."
하였다.

 

윤상백의 시체를 검사하여 약물에 의해 죽은 것을 알아내고 포도청에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3월 19일 임진

해가 뜰 때에 해의 빛이 붉은 색이었으며, 밤에 달이 뜰 때에도 달의 빛이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면서 다시 조동하(趙東夏)·신치운(申致雲) 등을 추국하였다.

 

이효식(李孝植)이 복주(伏誅)되었는데, 이효식을 실정을 알면서 고발하지 않은 것으로 결안하여 정법(正法)하였다.

 

금부 도사를 보내어 역적 이염(李濂)의 아들 이만우(李萬宇)·이만주(李萬宙)를 영변부의 이산(耳山)에서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고 나이가 차지 않은 자는 제주목(濟州牧)의 종으로 삼도록 하였는데, 의금부에서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이성중(李成中)을 특별히 임명하여 지의금부사로 삼고, 신회(申晦)를 동지의금부사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죄인을 체포하러 내보낼 때에 포도청의 포교와 포졸의 무리가 으레 한성부의 자내(字內)112)  에 머무는데, 지금 들으니, 외방(外方)에 가는 대로 여러 가지로 폐단을 끼친다고 하니, 그것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염탐하고 살펴서 아뢰도록 하고 나타나는 대로 엄중히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함경도 도과(道科)에서 참봉 오상현(吳尙顯) 등 7인을 뽑았다.

 

조명리(趙明履)를 도승지로 삼았다.

 

3월 20일 계사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당시 박찬신(朴纘新)이 버티면서 자복하지 않으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하필이면 그의 결안(結案)을 기다리십니까? 성상께서 곧바로 전지(傳旨)를 내려 정법(正法)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하교하기를,
"죄인 박찬신은 대려 훈신(帶礪勳臣)으로 일찍이 장임(將任)을 거치면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었는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몇 해 전의 주대(奏對)에서 이미 신하로서의 절개가 없었는데, 감히 역적 윤지(尹志)·윤광철(尹光哲)과 체결하고 교통하며 감싸서 불궤(不軌)를 음모(陰謀)한 형상은 역적 윤상백(尹尙白)이 이미 낱낱이 바로 공초하였는데도 장전(帳殿)에서 친히 신문하는 아래에서 자복하지 않고 심상(尋常)히 여겼으며, 조보(朝報)를 빌려 주고 행하(行下)한 일도 숨겼으며, 납공(納供)하는 즈음에 언사가 사리에 어긋나고 거만스러웠다. 지금 조동정(趙東鼎)이 이미 물고(物故)되었는데 박찬신이 만약 또 물고된다면 이런 등류의 사람을 정법하지 못할 터이니, 장차 어떻게 인심(人心)을 두렵게 하겠는가? 지금은 호위(扈衛)가 이미 철수하였으니, 박찬신을 훈국(訓局)으로 하여금 즉시 남문(南門) 밖에서 효시(梟示)하도록 하라."
하였다.

 

궁성(宮城)의 호위(扈衛)를 철수하도록 명하였다.

 

유동원(柳東垣)을 석방하여 환배(還配)하도록 명하자, 헌납 윤동성(尹東星)이 불가하다고 고집하니, 거제부(巨濟府)에 도배(島配)하도록 고쳐서 명하였다.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의 관직을 파면하고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에게 겸찰(兼察)하도록 명하였는데, 번(番)을 교대하는 군사가 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전라 감사 조운규(趙雲逵)가 상소하여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네 역적의 아들을 모두 형률에 의거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익관(李翼觀)은 옛날에도 없었던 역적이니, 그의 아들도 해부(該府)로 하여금 일체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장령 이길보(李吉輔), 헌납 윤동성(尹東星)이 아뢰기를,
"김일경·목호룡·이인좌·정희량 네 역적을 노적(孥籍)하는 일은 바로 양사(兩司)에서 여러 해 동안 진청(陳請)한 것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윤허를 받아 왕장(王章)이 통쾌하게 거행되고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다만 도신(道臣)이 청한 바는 단지 본도(本道)에 지금 남아 있는 적노(賊孥)일 뿐인데, 대신(臺臣)이 계달한 중에는10괴(十魁)113)  의 여얼(餘孼)은 아직도 모두 형률을 시행하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그러니 네 역적을 육노(戮孥)하는 때에 이들만 유독 상형(常刑)에서 누락시킬 수 없습니다. 청컨대 무신년114)   적괴(賊魁)의 아들로 다른 도(道)에 흩어져 있는 자는 한결같이 호남의 사례(事例)에 의거하여 조사해 내어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월 21일 갑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임국훈(林國薰)·김주천(金柱天)·박혁초(朴赫初)·이정하(李挺夏) 등이 복주(伏誅)되었다. 김주천은 바로 윤상백(尹尙白)이 끌어들인 바이고, 박혁초는 호남의 술사(術士)로 역적 윤지(尹志)와 교결(交結)하여 흉언을 수작하였으며, 이정하는 윤광철(尹光哲)의 가까운 친구로 사람을 모아 계(稧)를 만들어 어지럽게 모의를 함께하였으므로 여러 번 형신(刑訊)을 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실정을 알고서도 고하지 않은 것으로 지만(遲晩)하여 정형(正刑)하였다.

 

문사 낭청(問事郞廳) 채제공(蔡濟恭)을 특별히 임명하여 승지로 삼았다.

 

조동하(趙東夏)를 신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묻기를,
"조동하가 곤장을 맞다가 죽을까 염려스러우니 오늘 효시(梟示)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겠다."
하자, 영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비록 자복을 받지 못하고서 곤장을 맞다가 죽는 데 이른다 하더라도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군사를 일으키는 때가 아닌데도 날마다 효시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한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중추부사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어제 박찬신(朴纘新)을 효시한 일도 어쩌나 하고 여기며, 당시 죄수들이 납공(納供)하여 스스로 변명하는 즈음에 윤상백(尹尙白)이 광역(狂易)115)  했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상백이 어찌 광역한 자란 말인가?"
하자, 김재로가 일어나서 대답하기를,
"윤상백에게는 본래 광역하는 병이 있었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판의금부사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유봉휘(柳鳳輝)에게 연좌된 자 가운데 출계(出繼)한 자가 있었는데, 그들도 조태구(趙泰耉)의 예에 의거 거행하여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역적을 수노(收孥)하는 가운데 출계한 자는 연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그전부터 내려온 법전(法典)입니다. 그러나 만일 가장 중대한 역적이 있는데도 연좌를 모면하는 자가 많다면, 대계(臺啓)의 분배(分配)하는 예에 의거하여 따로 병배(幷配)하도록 진달한 경우는 옛날에도 전례가 있으며, 이번에 좌상(左相) 또한 이미 거행하도록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잇달아 구애하지 않고 병배하여 만약 당연히 행해야 할 신구(新舊)의 연좌자가 변방에 두루 가득하게 된다면 이것은 실제로 번민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바가 참으로 옳다. 역적 김호(金浩)에게 연좌된 자 가운데 출계한 자에 대해서는 시행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3월 22일 을미

충훈부에서 아뢰기를,
"박찬신(朴纘新)의 성명(姓名)을 하루라도 훈안(勳案)에 둘 수 없으므로 전례를 상고하니, 공신(功臣)으로 범역(犯逆)하여 삭훈(削勳)된 자는 반사 교문축(頒賜敎文軸) 및 화상축(畵像軸)·회맹록권(會盟錄券)을 회수하여 모아 명정전(明政殿) 문 밖에서 태웠으며, 대내(大內)에 소장하고 있는 회맹축(會盟軸) 및 회맹록권은 꺼내도록 청하여 역적과 여러 아들의 성명을 삭제하여 버린 뒤에 대내로 들여 보내되, 자서(子婿)·형제·질(姪) 등의 이름이 원종록권(原從錄券)에 기재되어 있는 자 역시 가져다 상고하여 성명을 삭제하고 그대로 본부(本府)에다 간직하며, 그 은사(恩賜)한 전민(田民)은 본부에다 도로 귀속시켰습니다. 청컨대 여기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3월 23일 병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박태신(朴泰新) 등을 신문하였는데, 박태신은 바로 박찬신(朴纘新)의 아우이다. 박찬신의 적몰한 재산 가운데 붉은 무늬의 융의(戎衣)116)  가 있었으므로,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인신(人臣)의 집안에서 어찌 감히 이런 옷을 지을 수 있습니까? 이는 바로 역장(逆贓)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왕장(王章)으로 직접 체포하였으니, 이는 역적 이괄(李适)과 다름이 없다."
하고, 사국(史局)에 명하여 역적 이괄에게 적용한 형률을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박태신 및 박찬신의 아들 박태엽(朴台燁) 등을 잡아다 신문하니, 모두 붉은 무늬의 융의는 바로 음사(淫祀)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복하지 않았는데, 이튿날 붉은 무늬의 융의를 들여오게 하여 앞에서 펼쳐 보도록 명하였더니, 그 길이가 두 자[尺]에 불과하였으므로 임금이 웃었다.

 

지평 홍양한(洪良漢)·정언 송문재(宋文載)가 아뢰기를,
"역적 김호(金浩)에 당연히 연좌되어야 할 여러 사람들이 출계(出繼)하였다는 것 때문에 어제 원임 대신(原任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모두 연좌를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법례(法例)를 따르는 뜻에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이런 등류의 역얼 지친(逆孼至親)은 서울[輦轂]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역적 김호의 지친으로 출계한 것 때문에 연좌를 모면한 자는 일제히 먼 지역으로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박태신(朴泰新)을 형신(刑訊)하였다. 이어서 효시(梟示)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박찬신이 정법(正法)된 뒤에 박태신은 해부(該府)의 문 밖에서 사죄하는 뜻으로 머리에 진흙칠을 하지 않고 그의 집에서 편안히 누워 있었으니 이것이 그의 첫째 죄이고, 박찬신이 비록 역적이기는 하지만 저에게는 형이 되는데도 조금도 비통해하는 뜻이 없이색깔 있는 옷을 입었으니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죄이며, 꿈에 특이한 부류들과 간계를 꾸미고서 그 꿈속의 일을 기록하여 간직해 두었으니 이것이 그의 세 번째 죄이다. 이미 당연히 연좌시켜야 할 전례가 있고 또 범한 바가 있으니, 훈련 도감으로 하여금 사장(沙場)에서 효시하여 머리를 3일 동안 달아두도록 하라."
하였다.

 

박재하(朴載河)를 대정현(大靜縣)에다 햇수를 정하지 말고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박재하가 일찍이 전라 좌수사를 거쳤는데 윤상백(尹尙白)의 끌어들인 바가 되었으며, 잡혀와서 국문을 받는 데 이르렀지만 일이 마침내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임금이 처음에는 석방시키려 하였었는데, 그의 초사(招辭) 가운데 색목(色目)이라는 내용이 있었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3월 25일 무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박찬신(朴纘新)은 충청도 덕산현의 태생이니, 여기에 관계된 현감에게는 강등할 칭호가 없겠지만, 청컨대 반차(班次)를 제현(諸縣)의 끝에다 두어 깎아내리고 강등시키는 뜻을 보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수범(李修範)을 형신하였는데, 이수범은 이사상(李師尙)의 손자이다. 공초하기를,
"재작년에 윤광철(尹光哲)이 신을 보러 와서 말하기를, ‘그의 아비가 귀양살이한 지 30년이 되어 감당할 수 없으므로 변통(變通)하는 방법을 갖고자 한다.’고 하기에 신이 어떻게 변통하려고 하는가를 물었더니, 윤광철이 말하기를, ‘나주의 이웃 고을에는 서로 아는 사람이 많고 모두들 나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으며, 만일 서로 대응할 뜻이 있으면 곧 글로 서로 통한다.’고 하였으며 윤광철의 경중(京中) 친구는 신보다 갑절이나 많았고, 이광사(李匡師)와는 서로 뜻이 맞는 절친한 사이였으며, 청주에도 역시 친구 10여 인이 있는데, 윤희철(尹希哲) 및 그의 사돈이 주장하여 수합(收合)하였으므로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므로, 여러 번 형신을 가하자 물고(物故)되었다.

 

판의금부사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박찬신의 아우 박재신(朴再新)이 출계(出繼)하였기 때문에 그의 여러 아들은 역적 박찬신에게는 5촌 조카가 되며 장차 연좌를 모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박찬신의 형률 적용이 이미 다른 죄인과는 다르니, 청컨대 대신(臺臣)에게 하순(下詢)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출계한 자에게 연좌를 따르게 하는 것은 진실로 법의(法意)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악역(惡逆)의 종족을 서울[輦轂]에 둘 수 없으니, 특별히 처분하심도 불가함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역얼(逆孼)로 서울에 둘 수 없는 자에 대해서는 응당 다른 항목을 연좌시켜 이미 발배(發配)하도록 진달하였으니, 이 일 또한 이 전례를 적용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이만(金履萬)을 집의로, 원중회(元重會)를 경기 수사로 삼았다.

 

사간 박치문(朴致文)이 상서하기를,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두 역적에게 노적(孥籍)을 추시(追施)하도록 하자, 인심이 모두 쾌하게 여겼습니다. 대체로 역얼(逆孼)은 모두 사나운 기운이 모인 대상들로 나이가 찬 뒤에는 스스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함을 알고 원망하며 비방하는 마음을 깊이 품고서 근거없는 사실을 꾸며 모함하고 규합하며 체결하기를 오늘날 제적(諸賊)이 하는 것과 같이 하니, 뒷날의 근심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나이가 차기를 기다리는 법이 신은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릅니다만, 이번에 허다하게 연좌된 죄인으로 종이 되어 극변(極邊)이나 절도(絶島)에 안치(安置)된 자가 그 수가 매우 많아, 더러는 같은 고을에 종이 된 경우가 심지어 수삼 인이 되니, 그것 또한 근심을 막는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남북으로 정송(定送)한 자가 더욱 많으니, 이것은 매우 염려할 만합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여인(女人)으로 종이 된 자를 제외하고 남자로 종이 된 자는 대조(大朝)께 우러러 품(稟)하고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여 일체 남김없이 진멸해서 화근을 끊어버리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을 내려 따르지 않았다.

 

3월 26일 기해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금부 도사를 보내어 역적 이염(李濂)의 아들 이만인(李萬寅)을 전라도 순창군에서 교형(絞刑)에 처하였는데, 의금부의 아룀을 따른 것이었다.

 

다시 김성응(金聖應)을 임명하여 훈련 대장으로 삼았다.

 

김진웅(金振雄)을 신문하였는데, 김진웅은 바로 충훈부의 아전으로 역적 박찬신(朴纘新)과 친밀한 자였다. 포도청에서 윤상백(尹尙白)을 독살(毒殺)한 상황을 알아내고 김진웅을 잡아다 국문하니 김진웅이 공초하기를,
"박찬신이 잡혀 온 뒤로 그의 아들 박태엽(朴台燁)이 그의 아비가 윤상백의 끌어들인 바가 되었다고 여기면서 만약 윤상백을 살해하면 벗어날 것이라고 말하였기에 신이 과연 은자(銀子)를 나졸(羅卒) 신상윤(申尙潤)에게 전급(轉給)하면서 경분(輕粉)117)  으로 윤상백을 독살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하므로, 박태엽을 신문하니, 박태엽이 공초하기를,
"은자를 정말로 김진웅 및 포도청의 하속(下屬)인 김상구(金尙九)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윤상백을 독살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신상윤을 형신하니, 신상윤이 공초하기를,
"박태엽이 정말로 김진웅·김상구를 시켜 은자를 신에게 뇌물로 주게 하였으며, 신이 정말 외직 나졸(外直羅卒) 김흥도(金興道)를 시켜 윤상백을 독살하게 하였습니다."
하니, 김진웅을 마침내 국수(鞫囚)를 독살한 것으로 결안(結案)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물고(物故)되었다. 임금이 박태엽을 응좌 본율(應坐本律)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3월 27일 경자

칠릉(七陵)의 표석(表石)이 이루어졌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인진(印進)한 족자(簇子)를 봉람(奉覽)하고 영건(營建)한 당상관과 낭청에게 상을 차등 있게 베풀었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면서 김윤(金潤)·이명조(李明祚) 등을 신문하였다.

 

3월 29일 임인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하교하기를,
"비가 내리고 이슬이 내리며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림에 있어 교훈이 아닌 것이 없다. 이번 사건 이전에는 비록 조신(朝臣)이라 하더라도 그의 반역하는 마음을 알 수 없었는데 더구나 여대 하천(輿儓下賤)이나 항오 군병(行伍軍兵)이겠는가? 무신년118)  의 난역(亂逆)은 옛날에도 없었던 바이지만 역시 겸종(傔從)이나 이서(吏胥) 그리고 항오(行伍)는 신문하지 않았었는데 신축년119)  과 임인년120)  의 괴상했던 세상에서는 이서와 겸종에서부터 심지어 근장 군사(近仗軍士)에까지 그 근본을 캐물어 제거하고 도태시켰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은 초기에 이미 엄중히 금지시켰는데, 남태징(南泰徵)이 충훈부의 이서를 일제히 도태시켰으므로 연주(筵奏)를 인하여 특별히 파직하도록 명하였었다. 이번에는 제역(諸逆)의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깊이 염려가 되어 신경훈(申景勳)·김진웅(金振雄) 같은 무리를 국문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상규(尙圭)의 족속이 도태되고 제거된 자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조용(調用)하도록 하였으니, 그 뜻은 대체로 깊은 것이었다. 아! 겸종의 무리는 신역(身役)을 면하려고 하거나 더러는 강제로 잡혀서 모시는 자에 불과하며, 그 중에는 시민(市民)도 있고 항민(恒民)도 있어 관원을 수종한 지 여러 해가 되어 빈자리를 따라 메꾸어지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며, 항오(行伍)에 이르러서는 더러는 취재(取才)하여 승부(陞付)하기도 하고, 더러는 그 사람됨을 보고 승부하기도 하여 모두 별다른 마음이 없는 데 불과한데도 지금 지목하기를 이 사람은 아무개 겸종이었으며 더러는 이서, 더러는 승부하였다고 하면서 그 사람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제거하며 도태시키는 것이 서로 잇따르니, 아! 한 사람이 도태당하면 열 식구가 굶주리는데 이것이 어찌 왕정(王政)에서 차마 할 바이겠는가? 엄중히 신칙(申飭)을 더하여 이런 폐단이 없도록 하라. 그래서 비록 윤지(尹志)의 무리와 날마다 서로 알고 지냈다 하더라도 그를 감싼 것이 없다면 모두 참작해서 처결해야 한다. 더구나 이하징(李夏徵)·김호(金浩)의 무리는 이번 사건 이전에는 바로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사람이니, 이런 정치가 한번 일어나면 진실과 거짓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이 서로 가까웠던 것은 진실로 이상한 일이 아니며, 만약 이 사람은 이하징·김호와 서로 가까우니 이 사람도 역당(逆黨)이라고 하며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이 또한 당심(黨心)이니, 남을 무함한 형률로 처단하는 것이 적당하다. 그리고 무변(武弁)에 이르러서는 더욱 다른 것이 있으니, 그 사장(射場)에서는 사대부(士大夫)와 중서(中庶)가 간격이 없이 함께 활을 쏘게 되니, 정분이 두터워 친숙해지고 서로 가까워지는 것은 진실로 형세인 것인데, 그 서로 가깝다는 것으로 그 당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더욱 어떻게 가하겠는가? 박찬신(朴纘新)·조동정(趙東鼎)·박태신(朴泰新)은 더러는 장임(將任)을 맡기도 하였고, 더러는 아장(亞將)이 되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곤임(閫任)을 맡기도 하였으니, 무릇 내삼청(內三廳)에서 추천한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이 뒤에 만약 혹시라도 이것을 조정에 등문(登聞)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군율을 시행할 터이니, 이것을 엄중히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채제공(蔡濟恭)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국옥(鞫獄)의 사체(事體)는 어떤 등류의 엄밀히 하고 신중히 해야 할 바인데, 이번의 국수(鞫囚)가 장전(帳殿) 앞에서 범죄 사실을 인정하며 자복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포도 대장에게 출부(出付)하여 포도청에서 자복을 받아 올리도록 한 뒤에 국정(鞫庭)으로 이상(移上)하게 하고, 이어서 정법(正法)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저 포도청은 바로 도둑을 다스리는 곳으로 의금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도둑을 다스리는 곤장을 가혹하게 시행하며 어지러이 신문한다면, 죄수가 묻는 대로 무복(誣服)하는 경우가 기필코 없다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우며, 이런 폐단은 설령 포도 대장이 방자한 생각으로 사건을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삼사(三司)의 관원이 곁에 둘러서서 보지 않았으니, 누가 그것을 알겠으며 누가 그것을 탄핵하겠습니까?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어 감히 이를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아니면 누가 이 말을 진달하겠는가? 내가 실로 흠복(欽服)한다."
하고, 마침내 윤음을 내리기를,
"한제(漢帝)가 말하기를, ‘자른 목은 다시 이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옛날 사람이 또 말하기를, ‘형구(刑具)를 채우고 고문하는 아래서 무엇을 구하여 얻지 못하겠는가?’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왕위를 계승한 뒤에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을 없애도록 《속대전(續大典)》에 기재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의 난역이 도리어 무신년보다 심한데도 단서가 나타나지 않고 국가의 일은 한이 없기 때문에 비록 어쩔 수 없기는 하였지만 평상의 격식을 벗어났는데,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이것 또한 뒷날의 폐단을 열게 하는 것이다. 뒤에 만약 권신(權臣)이 당조(當朝)에서 단련(鍛鍊)하여 성안(成案)하려고 하면서, 더러는 왕부(王府)에서 더러는 포도청에서, 더러는 형신하고 더러는 곤장을 친다면 어느 사람이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한갓 아랫사람뿐만이 아니고 인군(人君)이 된 자가 한결같이 기개를 부려 자복받기를 쾌하게 여겨 만약 이 예를 활용한다면, 압슬과 낙형을 다시 사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뒤로는 포도청에서 체포한 사람 외에 이미 국청(鞫廳)에서 추문(推問)하는 자는 포도청에 회부하지 말도록 하는 일을 영영 정제(定制)로 삼아 해부 등록(該府謄錄)의 수편(首編)에다 크게 쓰도록 하고, 이 뒤로 위에 있는 자가 만약 혹시라도 이 예를 어기고 하교를 하거나 아래에 있는 자가 혹시라도 정제를 알지 못하고 주청이 있을 경우 해부(該府)의 제당(諸堂)이 이것으로 간해야 하며, 해부의 당상관이 만약 그것을 간하지 않는다면 대신(臺臣)이 죄를 청한다는 뜻을 일체로 수편에다 기재하게 하고 또 양사(兩司)로 하여금 승전(承傳)을 받들어 재록(載錄)하고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상신(相臣) 김상로(金尙魯)·유척기(兪拓基)에게 하문하기를,
"조동하(趙東夏)·김윤(金潤)에게 비록 단서는 없다 하더라도 역적의 초사가 매우 빈틈이 없으니, 장차 어떻게 처결하여야겠는가?"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신경훈(申景勳)의 공초는 바로 단안(斷案)인 것이니, 아무리 온전히 살리려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유척기는 말하기를,
"조동하 등이 박찬신(朴纘新)·조동정(趙東鼎)에 비하여 더러는 차이가 있는 듯하기는 하지만, 역시 그 참작하여 처결하는 일을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판의금부사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역적 이색(李穡)의 아들 이적일(李積一)은 부평(富平)에서 입적(入籍)하고 남포(藍浦)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남포에서 잡아다 가둔 뒤에 부평 부사 정석교(鄭錫敎)가 장교(將校)를 보내어 잡아오게 해서 옮겨다 가둔 이튿날에 옥중(獄中)에서 죽었는데, 죽은 사실을 조사한 글에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고 현록(懸錄)121)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이적일이 비록 역적 이색의 아들로 입적은 되었지만 예사(禮斜)122)  는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장계로 보고한 내용이 극도로 괴상하고 의아한 데 관계되기 때문에 경기 감영에 공문을 발송하여 따로 강명(剛明)한 관원을 정하여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였더니 이적일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것이 엄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낭자하며, 또 그가 이색의 아들이 됨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으니, 정석교가 한 짓은 참으로 너무나 놀라워 엄중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해부(該府)에 잡아다 신문하라고 명하고 종중 감처(從重勘處)하게 하였다.

 

3월 30일 계묘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민후기(閔厚基)를 신문하니, 민후기가 공초하기를,
"신이 흥덕 현감(興德縣監)이 되어 성당창(聖堂倉)에 갔을 적에 윤상백(尹尙白)이 와서 모였으며 그 뒤에 또 성당창에 갔었는데 전후하여 모두 세 차례 윤상백을 보았고 윤상백이 신과 함께 역적을 모의하자고 하면서 말하기를, ‘팔도에서 모두 일어나는데 너만 가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너 또한 장정 50명만 얻는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므로, 신 또한 모집하겠다는 것으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보름이 지난 뒤에 윤상백이 또 와서 말하기를, ‘지금 사기(事機)를 조금 늦추었으니 급하게 도모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였었는데, 그 뒤에 일이 곧장 드러나버렸기 때문에 그도 역시 다시 말하지 않았으며, 이는 바로 임자년123)  과 계축년124)   사이에 수작한 것이었습니다."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민후기가 물고(物故)되었다. 사간원에서 진달하여 동참한 형률로 거행하도록 청하였다. 허계(許㻑)를 형신하였는데, 허계는 바로 윤상백이 이른바 나주 영장(羅州營將)이며 또 나주 겸관(羅州兼官)으로 흉서를 내다건 사건을 즉시 보고하지 않았던 자였는데,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자복하지 않았다. 신치운(申致雲)을 형신하니 신치운이 미치광이인 양 벙어리인 양하면서 정상(情狀)이 교활하고 악랄하였으며, 처음에는 실정을 알았다는 것으로 지만(遲晩)하였다가 또 역적 모의를 한 것으로 지만하면서, 머금고 토로하기를 번뜩이고 끝내 곧게 공초하지 않았다.

 

친국(親鞫)을 파하고 여러 죄수를 참작하여 처결하였으며, 의금부로 하여금 조동하(趙東夏)·김윤(金潤)·허계(許㻑) 및 정적(情跡)을 추궁하지 못한 자를 추국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죄인 신치운(申致雲)은 전후의 너그러운 은전이 어떠하였는데 감히 윤상백(尹尙白)과 서로 친밀하였으며, 이름이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니 그것이 매우 놀라운 데 관계되지만, 그의 사람 됨됨이를 살펴보니 지금은 일반 사람의 모습이 없으므로 특별히 참작하여 흥해군(興海郡)으로 정배(定配)하도록 하고, 죄인 윤득구(尹得九)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본율(本律)대로 발배(發配)하도록 하며, 죄인 이재하(李載夏)는 역적 윤지(尹志)와 서로 알기는 하였지만 다른 단서가 없으니 경성부(鏡城府)로 멀리 귀양보내도록 하고, 죄인 박혼원(朴混源)은 다른 단서가 없으니 통천군(通川郡)으로 정배하도록 하며, 죄인 이양조(李陽祚)는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하도록 하고, 죄인 김효온(金孝溫)은 윤광철(尹光哲)과 서로 알고 지냈으니 온성부(穩城府)로 정배하도록 하며, 죄인 유한기(柳漢箕)는 광양현(光陽縣)으로 정배하도록 하고, 죄인 윤득정(尹得貞)·윤득명(尹得明)은 해부로 하여금 본율대로 거행하도록 하며, 죄인 홍익원(洪益源)은 역적 윤지의 사위로 역시 죄가 없음이 판명되지는 않았지만 사람됨이 용렬하고 어리석어 결단코 역적 모의에 동참한 자는 아니지만 울산부(蔚山府)로 정배하도록 하고, 죄인 기언표(奇彦杓)는 이미 윤지에게 글을 배웠었고 또 흉서를 내다 건 사실을 임천대(林天大)에게서 들었으니 울산부로 정배하도록 하며, 죄인 권두령(權斗齡)은 지난번에 고한 것으로 정법(正法)한 자가 많기에 이미 일률(一律)을 용서하였는데, 대신(臺臣)이 간한 바로 인하여 몇 년을 체수(滯囚)하였기 때문에 오늘 특별히 대신의 청을 윤허하며, 준차(準次)의 엄형을 가하되 그를 만약 다시 가둔다면 이것이 어찌 왕자(王者)의 신의(信義)이겠는가? 대정현(大靜縣)에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도록 하고, 죄인 임천대(林天大)는 범한 바가 비록 극도로 음흉하고 참혹하기는 하지만 고발한 5인계(五人稧) 가운데 세 사람이 이미 정법되었으니 사형을 감하여 삼수부(三水府)로 정배하도록 하며, 죄인 이광사(李匡師)는 본율대로 유(流) 3천 리에 처하고, 포도청의 죄인 임세무(林世茂)·유시화(柳始華)·개봉(介奉)·우돌이(佑乭伊)·제한(濟漢)·금남(金男)은 모두 석방하여 내보내며 포도청에 구류시키고 있는 자도 일체로 석방하여 내보내고, 죄인 임귀하(林龜夏)가 비록 윤광철과 서로 알고 지냈다 하더라도 어리석고 부랑(浮浪)스런 모습이 친문(親問)하는 아래에서 모두 드러났으니, 단천부(端天府)에다 참작하여 정배하도록 하며, 죄인 민효달(閔孝達)·민효술(閔孝述)은 비록 단서가 없다 하더라도 이미 김주천(金柱天)·윤상백의 초사에 나왔으니, 민효술은 웅천현(熊川縣)에다 정배하도록 하고, 민효달은 곤양군(昆陽郡)에다 정배하도록 하며, 죄인 이서조(李瑞朝)·조정로(趙廷魯)·유환구(柳煥九)·이재선(李在善)·윤흡(尹恰)·이정섭(李鼎燮)·이세효(李世孝)·유한규(柳漢奎)·목성관(睦聖觀)·목성익(睦聖益)·목조감(睦祖鑑)은 모두 석방하여 내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헌납 윤동성(尹東星)이 말하기를,
"죄인 조정로(趙廷魯)를 옥사(獄事)의 정상(情狀)으로 말한다면 별도로 신문할 만한 단서가 없겠지만, 그가 이름난 조상의 손자로 스스로 보잘것없는 재주를 팔고 두루 병이 든 집을 찾아다니며 심지어 이수경(李修敬)의 내실(內室)에까지 출입하였으니, 그 행신(行身)을 삼가하지 않은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조정로를 추조(秋曹)에 회부하여 정배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부제학 오수채(吳遂采), 장령 임희교(任希敎)가 차자를 올려 참작해서 처결한 여러 죄인들을 모두 엄중하게 국문을 가하여 요행히 도망하지 못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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