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4권, 영조 31년 1755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4.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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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갑진

간원 【정언 송문재(宋文載)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죄인 권두령(權斗齡)을 국문하라는 청을 해가 넘도록 쟁집하여 다행스럽게도 특별히 윤허를 받았는데, 한차례 신문한 후 갑자기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청컨대 대조(大朝)께 품하여 죄인 권두령을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인하여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죄인 임천대(林天大)는 역적 윤지(尹志)와 체결하여 스스로 흉서(凶書)를 붙인 정상을 이미 자복하였으니,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죄인 임천대를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하여 왕법을 쾌히 바루소서. 죄인 홍익원(洪益源)은 역적 윤지의 사위로 윤광철(尹光哲)의 집에서 함께 살았으니, 흉역의 실정을 모를 리 만무하고, 더군다나 윤광철의 책궤에 있는 문서를 몰래 빼내어 불태운 정상이 이미 탄로되었으니,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죄인 홍익원을 정배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다시 엄중히 국문을 더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죄인 신치운(申致雲)의 요사(妖詐)한 정상은 이미 추문했을 때에 드러나서 실로 민후기(閔厚基)가 거짓으로 임금을 속인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하물며 형신(刑訊)하여 지만(遲晩)125)  한 후에 결코 그 말이 황홀하다 하여 용서할 수 없으니,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죄인 신치운을 정배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다시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결안 정법(結案正法)하소서. 죄인 이광사(李匡師)는 역적 이진유(李眞儒)의 조카로서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고, 윤광철과 주무(綢繆)하고 친밀한 정상은 또한 윤광철의 일기에도 실려 있으니,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죄인 이광사는 다시 엄중히 국문을 더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죄인 김주천(金柱天)은 역절(逆節)에 동참한 것이 낭자하여 숨기기가 어렵고, 집을 팔아 재물을 내놓았다는 말을 이미 그가 공초하였습니다. 또한 집에 감추어 둔 흉서가 아주 흉악하고 참혹한데, 율이 정상을 알고 있었다는 데에 그쳤으니, 크게 형정(刑政)을 잃은 것입니다. 청컨대, 죄인 김주천을 대조께 앙품하여 동참한 율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따르지 않겠다."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서(上書)하여 고귀(告歸)126)  하였는데, 국옥(鞫獄)이 이미 끝나고 종전의 정세가 머물러 있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청나라에서 보내 온 문단(紋緞) 21축(軸)을 호조에 내리고, 초피(貂皮) 4백 령(令)은 상방(尙方)에 내렸다.

 

4월 2일 을사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여 《서경(書經)》 요전(堯典)을 강하였다. 수찬 홍명한(洪名漢)이 말하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순종하기를 마땅히 요임금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번 일로 말하더라도 음양의 관대함과 엄준한 도리가 갖추어졌으니, 뭇 신하가 그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지금부터 더욱 성심을 분발해 상하가 서로 힘쓴다면 탕평의 효과를 눈을 닦고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승지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요 임금 때에도 또한 공공(共工)127)  이 변하지 않았는데, 이는 바로 당악(黨惡)의 해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 역시 시종 변하지 않는 자를 많이 보았다."
하니, 채제공이 말하기를,
"고(故) 참판 오광운(吳光運)의 상소 가운데 ‘겉은 거울 표면처럼 고쳐졌으나, 속에는 호랑이 꼬리를 감추고 있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일대 기회인데 만약 이번 기회를 잃는다면 표준을 세워 다스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진실한 마음으로 해나가신다면 비록 공공처럼 변하지 않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한 세대의 탕평의 다스림에 해가 되겠습니까?"
하고, 홍명한은 말하기를,
"조금 전 화유 옹주(和柔翁主)가 출합(出閤)128)  한다는 하교가 계셨는데, 무릇 절차를 절약하기에 힘쓴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영남에서 봉진(封進)하는 생복(生鰒)과 숙복(熟鰒)을 정지하라 명하였다. 이때에 바닷물이 갑자기 붉고 흐려져 해물(海物)을 먹은 자들이 수독(水毒)에 중독되었다고 통제사가 계문했기 때문이었다.

 

남태경(南泰慶)·홍경보(洪鏡輔)를 승지로, 박기채(朴起采)를 장령으로, 심곡(沈穀)을 지평으로, 정상순(鄭尙淳)을 정언으로, 홍인한(洪麟漢)을 부교리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번 역적을 토벌한 후에 전례의 근거를 상고하여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하는 뜻을 초기(草記)129)  하여 품청(稟請)했었습니다. 비지(批旨)에 비록 그만두라는 명이 계셨으나, 성문에 친림하시어 악역(惡逆)을 정법(正法)하고, 달이 지나도록 장전(帳殿)에 계시면서 이미 적괴를 죽였으니, 무신년130)  의 징토와 다름이 없어 이는 실로 종사(宗社)의 더할 수 없이 큰 경사입니다. 종묘·영녕전·사직에 고한 후, 경외의 진전(進箋)·반교(頒敎)·진하 등의 절차를 청컨대, 예에 따라 진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후에 대신의 진청(陳請)에 따라 허락하였다.

 

지평 홍양한(洪良漢)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권두령(權斗齡) 같은 요역(妖逆)을 갑자기 참작해서 처리하여 해도(海島)에 안치하였으니, 어찌 여얼(餘孼)들과 체결하여 다시 전일의 흉악한 일을 꾀하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임천대(林天大)는 역적 윤지(尹志)의 심복으로 스스로 흉서를 붙인 정상을 그가 이미 직초하였으니, 나라에는 상헌(常憲)이 있어 결코 그가 고발하였다 하여 속죄할 수는 없습니다. 홍익원(洪益源)은 바로 역적 윤지의 사위로 책궤의 책을 몰래 꺼내었으니, 정적이 흉악하고 교활하였습니다. 이광사(李匡師)는 역적 이진유(李眞儒)의 조카로서 윤광철(尹光哲)의 일기에 좋게 사귄 것이 난만하니, 연좌율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신치운(申致雲)은 이미 지만(遲晩)을 공초하였으니, 말이 황란(慌亂)하다는 것으로써 갑자기 용서하기를 의논할 수 없으며 마땅히 엄중히 신문하여 정법해야 합니다. 조동하(趙東夏)와 김윤(金潤)은 모두 장곤(將閫)의 신하로서 역적의 초사에서 중요하게 나왔습니다. 허계(許㻑)는 역적 윤지와 사귀면서 흉서를 머물러 두었으니, 청컨대 아울러 형을 가하여 끝까지 조사하소서."
하였는데,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의금부에서 조동하·김윤·허계·이명조(李明祚) 등을 추국하였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가 아뢰기를,
"역적 집안의 전토(田土)를 훈부(勳府)에서 청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양향청(糧餉廳)의 세입(歲入)이 해마다 줄어들어 판적사(版籍司)의 전목(錢木)을 매양 많이 호조로 이송하고 있어 이 때문에 더욱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적몰한 가운데 박찬신(朴纘新)과 이하택(李夏宅) 두 역적 집안의 전답을 하나같이 양향청에 소속시키면 보태 주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박찬신의 채전(債錢)으로 백성들에게 있는 것은 모두 탕척하도록 명하였다. 박찬신은 재산 늘리기를 한정 없이 빚을 놓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8천여 냥이나 되었는데,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한결같이 탕척하고 그 문권을 불태우게 하였다.

 

4월 3일 병오

간원 【 헌납 윤동성(尹東星)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죄인 민후기(閔厚基)가 역모에 동참했음이 이미 역적 윤상백(尹尙白)의 초사에서 드러났습니다. 장전(帳殿)에서 친문했을 때에 감히 거짓으로 정신을 잃고 헛소리하는 모양을 지었는데, 요체는 현혹시켜 속일 계책을 한 것이니, 더욱 극도로 흉악하고 간휼합니다. 정절이 이미 탄로났는데, 갑자기 경폐(徑斃)하여 상형(常刑)을 가하지 못해 여론이 더욱 분개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죄인 민후기를 대조께 앙품하여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동참한 율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따르지 않겠다."
하였다.

 

4월 4일 정미

종부시에서 아뢰기를,
"이번의 흉역은 지난 사첩(史牒)에 없던 것으로서, 여러 역적의 이름이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체를 소중히 여기고 엄중히 징토하는 도리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늦출 수는 없습니다. 역률을 추가로 시행한 자 및 복법(伏法)되었거나 장폐(杖斃)된 자, 연좌된 무리는 청컨대 본시에서 즉시 주(註)를 달아 수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서지수(徐志修)를 부제학으로, 이최중(李最中)을 부수찬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헌부 【지평 심각(沈瑴)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당초에 역적 윤취상(尹就商)이 역률을 면하였기 때문에 역적 윤지를 감사(減死)하여 섬에 유배했던 것입니다. 국법으로 논하면, 이미 실형(失刑)한 것인데, 중간에 육지로 내보내어 오늘날의 변을 빚게 되었으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역적 윤지를 육지로 내보내도록 품청(稟請)한 도신을 대조께 앙품해서 조사하여 정죄하게 하소서. 죄인 조동하(趙東夏)·김윤(金潤) 등은 역적 조동정(趙東鼎)·역적 김호(金浩)의 지친으로서 역적의 초사에서 긴요하게 나와 정절이 이미 극도로 환하게 밝혀졌습니다. 허계(許㻑)는 영장(營將)의 몸으로서 흉서를 지체시켰으니, 마음의 자취 역시 의심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청컨대 조동하·김윤·허계 등을 대조께 앙품하여 다른 죄인들과 함께 일체로 신문하여 왕법을 흔쾌히 바루소서. 죄인 기언표(奇彦杓)는 역적 윤지와 친밀하게 지낸 정상이 남김없이 탄로되었고, 이양조(李陽祚)는 역적 윤광철(尹光哲)의 가까운 인척으로 주무(綢繆)한 정상을 감추기가 어려운데, 모두 좋은 땅으로 정배되었습니다. 청컨대 죄인 기언표와 이양조를 대조께 앙품하여 다시 엄중히 국문을 더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따르지 않겠다."
하였다.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시사(試射)하였다. 임금이 달이 지나도록 친국하여 장사(將士)들이 수고하였으므로 친림해 시사하고, 차등을 두어 논상(論賞)하였다.

 

특별히 승지 남태기(南泰耆)를 제수하여 부총관으로 삼고, 교리 남태회(南泰會)를 승지로 삼았는데, 남태기와 남태회는 형제이다.

 

4월 5일 무신

이세태(李世泰)를 장령으로, 박성원(朴盛源)을 지평으로 삼았다.

 

사간 박치문(朴致文)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작처한 여러 죄인은 의심스러운 자취가 본디 많아서 전후 대신(臺臣)들이 서로 잇달아 쟁집하였으니, 공의를 볼 수가 있는데, 끝내 허락하여 시행하기를 아끼시며, 권첨(權詹)의 역절에 이르러서는 일이 여러 해가 되었고, 또 나라를 위해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대조께서 장차 어떻게 기억하여 특별한 처분을 내리겠습니까? 도신의 몸이 되어 적의 형세를 관망만 하면서 끝내 한 명의 군사를 내어 성토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편안히 앉아 있었으니, 그 정절이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범한 극적(劇賊)과 다름이 없는데, 이런 자를 관대히 용서한다면 난역의 무리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대조께 품하여 역률을 추가해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참작하여 일은 대조께서 처분한 것으로 지극한 인(仁)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우러러 본받지 않겠는가? 권첨의 일은 마땅히 조용히 앙품하겠다."
하였다.

 

죄인 김윤(金潤)이 물고(物故)되었다.

 

박찬신(朴纘新)의 조카 박태정(朴台炡)이 붙잡혀 오다가 철원 땅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명하기를,
"붙잡으러 간 도사(都事)를 국수(鞫囚)의 예에 의해 거행하고, 나장(羅將)은 형조로 하여금 엄중히 형신하여 취복(取服)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9일 임자

지평 심각(沈瑴)이 상서하여 청하기를,
"박태신(朴泰新)과 김윤(金潤)을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법에 의해 노적(孥籍)하게 하소서."
하고, 정언 정상순(鄭尙淳)·송문재(宋文載)가 상서하여 청하기를,
"박태정(朴台炡)을 잡아오던 도사를 잡아다 국문하여 엄중히 신문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4월 10일 계축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태학(太學)의 원점 유생(圓點儒生)을 시험하여 수석을 차지한 진사 정언휘(鄭彦輝)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명하였다.

 

4월 11일 갑인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이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4월 12일 을묘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갔는데, 장차 토역(討逆)을 고유(告由)하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여러 실(室)을 봉심(奉審)하였는데, 숙종의 실에 이르러서는 엎드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으며, 제사 때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삭망(朔望)과 고유(告由) 친행 때에는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이 없으니, 망예례(望瘞禮)에는 마땅히 친행해야 한다. 이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3일 병진

임금이 고유제(告由祭)를 친행하고, 드디어 육상궁(毓祥宮)에 전배(展拜)하였다. 명정전 월대(月臺)로 돌아와 대왕 대비전에 진하(進賀)하고 이어 전으로 나아가니,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의례대로 진하하였다. 대사면을 반교(頒敎)하였는데,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성인(聖人)의 춘추 필법(春秋筆法)이 엄중하여 난적의 죄를 엄하게 주벌하고 왕강(王綱)이 일월(日月)처럼 밝아 징토(懲討)의 법을 크게 거행했으니, 이 열 줄의 교서로서 팔방(八方)이 모두 듣도록 하노라. 덕이 없는 내가 이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았는데, 다스리는 도리의 근본이 인(仁)이라고 생각하여 포용하는 정사를 많이 행하였다. 그래서 비록 교화되기 어려운 추악한 무리들이라도 구별하는 규정을 쓰지 않고 포용하였으며, 변란을 거듭 겪은 나머지여서 마음으로 복종하게 하는 도리를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은택이 지나쳐서 우로(雨露)의 은혜가 상설(霜雪)의 위엄보다 많아서 징계할 방법이 없어 효경(梟獍)131)  의 무리들이 봉채(蜂蠆)132)  의 독을 겸하게 되었다. 역적 윤지(尹志)는 윤취상(尹就商)을 아비로 하고, 윤광철(尹光哲)을 아들로 두어 흉패(凶悖)하고 불궤(不軌)한 꾀를 전하여 천지 사이에 용서하기 어려운 죄를 지었고, 마음에 항상 원망을 쌓아 오랫동안 석천(射天)133)  의 모책을 품어 왔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목숨을 부지해 왔는데 다시 바다에서 내보내 준 은택을 잊고서 먼 지방의 무뢰배들을 꾀어 교분을 빙자하여 교제하고, 불령(不逞)한 역얼(逆孼)의 무리와 체결해서 함께 악을 행하였다. 먼저 괘서(掛書)의 변을 행한 것은 민중을 속일 계제를 삼기 위해서였고, 전쟁이 일어난다는 불안한 말을 전파하여 스스로 소란을 피웠고, 마을이 흩어지는 날을 기다려 장차 협박하여 따르게 하고자 하였다. 금정(禁庭)에서 신문하는 날에 은밀한 형적이 탄로나자 승국(勝國)의 구어(句語)를 외어 흉악한 마음이 더욱 드러났다. 박찬신(朴纘新)·조동정(趙東鼎) 등은 높은 반열에 있어 기린각(麒麟閣)에 초상이 그려져 있는데134)   어찌하여 괴롭게 반역을 하며, 중곤(重閫)을 지내 용호(龍虎)를 거스렸는데도 부족하였단 말인가? 오직 그들의 마음이 서로 이어져서 역모로써 서로 합친 바, 이렇게 밖에서 응하고 안에서 응하여 간성(干城)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누구는 북쪽에서 일어나고 누구는 남쪽에서 일어나 장차 서울을 범하려고 옷을 바꾸어 입혀 숨겨 두었으니 거의 역적 이남(李枏)135)  의 암계(暗計)와 가깝고, 어로(御路)를 몰래 지나가려고 했으니 이는 역적 신광원(愼光遠)이 틈입(闖入)한 것과 같다. 연석(筵席)에서 패악하고 거짓된 말을 함부로 하여 이미 두 마음이 싹텄고, 시위(侍衛)하면서 무서워했던 형적이 드러난 것은 많은 눈을 속이기가 어렵다. 윤상백(尹尙白)과 김주천(金柱天)은 윤연(尹㝚)과 김호(金浩)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나고 이 땅에서 자랐는데 음흉한 꾀를 주장하여 마치 보거(輔車)136)  가 서로 의지하듯 하였다. 돌아보건대, 아깝게도 원악(元惡)이 편록(編錄)을 서로 전하고 길고 짧은 편지를 왕래하였으니, 그 자취를 감추기가 어렵다. 흉서(凶書)와 패설(悖說)을 감추어 둔 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인가? 더군다나 도적을 꾀어 병기(兵器)를 훔치려고 모의한 것은 군사를 일으켜 난리를 일으키려는 뜻이 아님이 없었다. 몇 사람이 무리를 맺은 것은 이정하(李鼎夏)가 그 거사를 실토하였고, 모르는 곳으로 책궤를 옮긴 것은 임국훈(林國薰)이 죽기를 결심한 뜻이었다. 박혁초(朴赫初)의 현술(衒術)은 정수헌(丁守憲)에 비해 더하고 신경훈(申景勳)이 정상을 안 것은 이효식(李孝植)과 다름이 없다. 김준(金浚)과 김항(金沆)은 죄가 같은데 김항은 침범하는 말이 있었다. 이세희(李世熙)와 이시희(李時熙)는 마찬가지이나 이시희가 더욱 교활하고 간특한 형적이 드러났다. 이밖의 갖가지로 관련된 무리들은 낱낱이 따질 수는 없지만 논하자면 역변이 이미 그쳤다가 다시 생긴 일이 예전에도 있었던가, 없었던가? 돌아보건대, 여러 역적들이 은혜를 잊고 덕을 배반한 것이 내가 더욱 통분하다. 가령 흉추(凶醜)가 아울러 일어났다 하더라도 왕사(王師)가 초멸(剿滅)시키는 것이 어찌 어려웠겠는가? 그러나 다행히 단서가 먼저 발각되어 음모가 저지 소멸되었다. 대개 죄수들의 공초에서 남김없이 드러났으니, 간사한 무리들을 차례로 붙잡아 와야 한다. 이하징(李夏徵) 같은 자는 요사한 윤지와 친한 벗이 되기를 달갑게 여겨 매사를 함께 모의하여 차마 흉적 윤성시(尹聖時)의 인척이 되었으니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며,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신절(臣節)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역적 윤취상을 꿈꾸었고 재상이라고 일컬었으니, 그 역시 방자하다고 하겠다. 대개 일찍이 이것으로 저것을 추측하고, 또 처음으로 말미암아서 끝을 알 수가 있는 것인데, 이들은 지엽과 파류(派流)로서 갖가지 괴이한 일이 겹쳐 일어났는데, 그 근본은 신축년137)  ·임인년138)  ·무신년139)  ·경술년140)  에서 일관하여 내려온 것이다. 만약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 등 여러 흉적이 앞에서 창도하여 화란을 빚지 않았더라면 어찌 심유현(沈維賢)과 이유익(李有翼) 무리의 여당(餘黨)이 지금에 이르러 멋대로 날뛰며 소굴을 근거로 하여 심복을 포치(布置)하였겠는가? 그러니 이진유(李眞儒)·박필몽(朴弼夢)·이사상(李師尙)·이명의(李明誼)가 스스로 소차(疏箚)를 올려 무기를 삼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정희량(鄭希亮)·이사성(李思晟)·이웅좌(李熊佐)·이인좌(李麟佐)는 모두 황형(皇兄)의 성은을 입었는데, 오늘날에 지나간 과거의 일을 생각해 보면 지난 사첩(史牒)에 없던 방자한 바여서 이에 전후의 논청을 서둘러 따르고, 상하에 이미 포고를 마쳤다. 이명언(李明彦)·한세량(韓世良)·권익관(權益寬)·김호(金浩)·이하택(李夏宅)에 이르러서는 상소하여 모두 윤기(倫紀)를 범하였음을 길 가는 사람들 역시 모두 그들의 흉악한 마음을 알고 있다. 배를 만들어서 바다를 거쳐 오려고 한 모의는 순무사가 이미 그 간악한 정상을 적발하였다. 상자 안에 역적을 존경한다는 말이 있었으니 어찌하여 패악함이 이에 이르렀으며, 옷 사이에다 살기를 도모하는 글을 넣어 두었으니 과연 교악(巧惡)함이 그와 같았다. 이색(李穡)과 이염(李濂)의 패악하고 간특함은 저절로 드러나서 수미가 서로 연결되었으며 권혜(權嵆)·권집(權䌖)의 요사함 역시 드러나 맥락을 볼 수가 있었으니, 마땅히 여러 신하의 청을 따라서 모두 추시(追施)하는 법을 행하였다. 역적 조태구 등 지난번 이미 선포한 자 이외에 역적 윤광철·박찬신·이효식·임국훈·김주천·신경훈·박혁초·이정하·이하징은 모두 법에 의해 정형(正刑)하고, 윤지·윤상백·조동정·김항은 비록 장폐하였으나 역시 역률을 시행한다. 나머지는 바야흐로 국신(鞫訊)하고 있으며, 이명언·한세량·권익관·김호·이하택·이색·이염·권혜·권집은 또 모두 역률을 추시한다. 난령 요요(亂領妖腰)141)  를 모두 형을 받게 해서 간사한 역적의 마음이 싹트는 그 계제를 영원히 끊는다. 천지의 큰 덕은 살리는 것이니 어찌 살육할 마음을 두겠으며,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이니 군신의 윤기가 달려 있다. 전헌(典憲)이 엄숙하여 어리석은 백성들도 강상(綱常)이 중함을 알며, 건곤(乾坤)이 청랑(淸朗)하여 어두운 밤이 지나면 다시 밝은 대낮이 와 세도(世道)가 평화롭게 되고 인심이 거의 모두 바른 데로 돌아가니, 천리 밖 살아 있는 것이면 누군들 기뻐하지 않겠는가? 억만년 끝이 없을 계책이 이에 있는 것이다. 신인(神人)이 분함을 나타내니, 이는 나라의 큰 기쁨이요 종사의 경사인데, 어찌 큰 은택을 널리 베푸는 것을 아끼겠는가? 이달 13일 새벽 이전의 잡범 사죄 이하는 모두 사유(赦宥)한다. 아! 위엄이 이미 이치에 맞았으니 은혜 역시 사사로운 것이 아니며, 음양은 엄준하기도 하고 관대하기도 하여 저절로 생살(生殺)의 도가 있는 것이다. 역적에게 화를 내리고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는 방법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 제학 조명리(趙明履)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0책 84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7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司法) / 어문학(語文學) / 변란(變亂) / 가족(家族)


[註 131] 효경(梟獍) :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 먹는 파경(破獍)이라는 짐승.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임.[註 132] 봉채(蜂蠆) : 벌과 전갈.[註 133] 석천(射天) : 옛날 은(殷)나라 무을(武乙)이 무도(無道)하여 인형(人形)을 만들어 천신(天神)이라고 하면서 그와 장기[博]를 두되 사람을 시켜 대행(代行)하게 하고는 천신이 이기지 못할 경우 곧 욕을 보이겠다 하면서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우러러 보고 쏘아 맞히면서 하늘을 맞혔다고 한 고사(故事).[註 134] 기린각(麒麟閣)에 초상이 그려져 있는데 : 기린각(麒麟閣)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기린을 얻고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인데, 선제(宣帝)가 여기에다 공신(功臣) 11명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걸어 두었음. 여기서는 공신의 자리에 올라 있다는 뜻으로 쓰였음.[註 135] 이남(李枏) : 복선군(福善君).[註 136] 보거(輔車) : 수레의 덧방나무와 바퀴.[註 13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38]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139]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140] 경술년 : 1730 영조 6년.[註 141] 난령 요요(亂領妖腰) : 허리를 자르고 목을 베어 죽여 마땅한 요악(妖惡)한 자를 말함.

 

김조윤(金朝潤)을 장령으로, 홍인한(洪麟漢)을 헌납으로, 최태형(崔台衡)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6일 기미

헌부 【장령 김조윤(金朝潤)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김윤(金潤)은 자신이 통제사가 되어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긴요하게 나왔는데, 미처 확실히 조사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경폐(徑斃)하게 하여 지금은 캐어 물을 계제가 그의 아들 김주태(金柱泰) 뿐입니다. 청컨대 죄인 김주태를 대조(大朝)께 품하여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종일 엄중히 국문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기를 기약하게 하소서. 포청의 경폐한 죄인 박천우(朴天遇)는 성명을 변환(變幻)하여 정적이 이미 아주 요악하며 문서 가운데 음흉하고 불궤(不軌)한 정상이 낭자해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취복(取服)하지 못하고 경폐시켜 여정(輿情)이 분개하여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경폐한 죄인 박천우를 대조께 품하여 빨리 응당 행해야 할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따르지 않겠다. 두 가지 일은 참으로 옳으나, 내가 어렵게 여기는 것은 정섭(靜攝)하고 계시는 중에 번거롭게 품하는 것이다."
하였다. 천우는 즉 박천우인데 이만강(李萬江)의 아들이 편지로 끌어 들인 바 되었다. 대개 이만강과 더불어 흉패한 말이 많았으나 버티면서 불복하다가 포청에서 경폐되었다.

 

4월 17일 경신

초저녁에 유성이 북두성에서 나와 북방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이세택(李世澤)을 부수찬으로, 송형중(宋瑩中)을 부교리로, 이양천(李亮天)을 필선으로 삼았다.

 

이종성(李宗城)을 서용하여 판중추부사로 삼도록 명하였다.

 

승지를 보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돈유(敦諭)하였는데, 말하기를,
"경이 상직(相職)을 사직하려면 오직 입시하는 데 달려 있으니, 즉시 들어와 내 면유(面諭)를 들으라."
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에게 돈유하기를,
"지난번 장전(帳殿)에서 어찌 돈면(敦勉)하지 않았겠는가? 그때 주대(奏對)에서 이미 경을 위해 서운하게 여겼었는데, 사반(赦班)을 막 마치자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가? 나는 경의 잘못이 세 가지라고 여긴다. 아! 경은 양조(兩朝)의 구신(舊臣)으로서 나를 섬기기에 이르러 지금 군신(君臣)이 다함께 수염이 다 희게 되었고, 지금 첫정사를 당해 이처럼 돌아보지 않으니 그 잘못이 하나이다. 옛날에는 경의 처신이 항상 어버이를 위하는 데에서 나왔는데, 지금 경의 처신을 경은 무슨 뜻으로 여기는가? 옛날 이밀(李密)142)  이 임금을 오랫동안 섬겼다고 말하는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지금 경에게는 단지 임금을 섬기는 일만 있고 그 임금의 나이 역시 늙었으니, 이 밀의 마음을 추념한다면 경은 반드시 마음이 근심되고 두려워질 것인데, 어찌 돌보지 않음이 이에 이르는가? 이는 그 잘못의 두 번째이다. 지난번 장전에서 내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면서 눈물까지 흘렸었는데, 지난날의 일을 경은 어찌 차마 마음속에 남겨 두어 그 거취를 이처럼 돌보지 않는가? 이는 그 잘못의 세 번째이다. 알고도 유시하지 않으면 어찌 성(誠)이라 하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지난날의 은근한 유시를 본받고 지금 마음에서 나온 하교를 생각하여 즉시 다시 도성으로 들어와 나의 면유를 들으라."
하였는데, 대개 유척기가 하반(賀班)에 참여한 이튿날 글을 진달하고, 성밖으로 나갔기 때문이었다. 또 사관을 보내 우의정 조재호(趙載浩)를 돈유하였다.

 

임금이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를 소견하였다. 이 보혁이 윤상백(尹尙白)의 초사에 나왔으나 곧 무고(誣告)라고 자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소견하여 위로해 유시한 것이다. 박문수가 스스로 일찍이 당론(黨論)을 한 일이 없다고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신은 이번 여러 역적들에 대해 아까운 마음은 없으나 다만 금년에 한 사람을 죽이고 명년에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통쾌하다면 통쾌한 것이지만 나라의 원기(元氣)가 상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혁심(革心)·혁면(革面)의 의심을 마음속에 두지 마시고, 오직 재능에 따라 등용해 털끝만큼도 치우치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시 동인(一視同仁)하여 오직 재능에 따라 임용하는 것은 내가 30년 동안 고심해 온 것이다. 다만 군자와 소인은 마땅히 주객의 구분이 있어야 하는데, 경은 혼동하여 구별하려 하지 않으니 불가하다."
하였는데, 박문수가 미소하면서 말하기를,
"신이 진달하고자 하는 말이 있으나 전하께서 엄교가 계실까 두려워 감히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처럼 진달하고자 하는 말이라면 내가 어찌 엄교를 하겠는가?"
하므로, 박문수가 말하기를,
"노인에게 있어 술은 무익하지는 않으나 지나치게 마시면 해가 되니,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절제해서 마시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술을 마시지 않는데 지난번 친국했을 때에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어서 과연 조금 마신 일이 있었으나 어찌 과음하였겠는가? 그러나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깊이 반성하겠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가 듣건대, 소조(小朝)께서 불안한 일이 있는데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것은 대조께 근심을 끼칠까 염려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모름지기 조용히 살피시어 더 중해지지 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외간의 말이 지나치게 전해진 것뿐이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왕손(王孫)이 두 사람있는데 전하께서 앞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시고, 또 탁지(度支)에서 정례(定例)로 주는 것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참봉(部參奉)에게도 역시 늠록(廩祿)이 있는데 왕손에게만 없을 수 있겠습니까? 또 전하께서는 청컨대 동궁에 계실 때를 생각하소서. 지금은 자손이 번성하니, 이는 실로 국가의 끝없는 경사입니다. 제왕가(帝王家)에 어찌 적서(嫡庶)의 구분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유모(乳母)를 가려 잘 기르소서. 또 해조로 하여금 예에 따라 진배(進排)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인하여 명하기를,
"해조에서 정례에 의해 진배하되, 매월의 진배 및 사맹삭(四孟朔)·절일(節日)·유두(流頭)·교년(交年)에는 연례(年例)로 진배하고, 소설 진배(掃雪進排)는 우선 10년을 기다리고 유모 1인과 각시 1인만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박문수가 또 청하기를,
"급하지 않은 일을 파하여 흉년에 대비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금년의 영선(營繕)하는 역사를 파하도록 하라."
하였다.

 

죄인 이세희(李世熙)가 물고되었다.

 

4월 18일 신유

밤 1경에 유성이 방성(房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경성의 사산(四山)143)  에 송충이가 크게 번져 가지와 잎을 다 먹는다고 각 군문(軍門)에서 계달하니, 방민(坊民)을 내어 잡아 묻게 하였다.

 

의금부의 추국을 파하였다. 죄인 허계(許㻑)와 조동하(趙東夏)가 물고되었다. 대신과 금오 당상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박천우(朴天遇)는 이미 대계(臺啓)에 나왔으니, 역률로 논할 수 있습니다."
하니, 지의금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박천우는 마땅히 역률을 시행해야 하나 다만 포청의 죄인은 국청의 죄인과는 달라서 역률을 시행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김상로가 버티어 힘껏 주장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대간의 청을 윤허하니, 역률을 시행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죄인 김주태(金柱泰)는 윤상백(尹尙白)이 고한 바 이미 긴밀하게 붙은 정상이 없으니 특별히 참작하여 종성부(鍾城府)로 정배하도록 하라. 죄인 이명조(李明祚)는 윤광철(尹光哲)과 친밀한데, 그가 비록 무상하니 윤희철(尹希哲)의 처남이어서 다른 사람과 다르니 참작하여 거제부(巨濟府)로 정배하도록 하라. 죄인 이창익(李昌翼)은 윤광철과 혼인을 맺어 마음은 비록 헤아리기 어려우나 별로 증거가 없으니, 경성부로 정배하고, 포청의 죄인 김봉수(金鳳壽)는 단천부(端川府)로 정배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성망(李聖望)이 역적 윤지에게 빚을 준 것이 비록 일이 있기 전이었으나, 영장(營將)인 몸으로 역적 윤취상(尹就商)의 아들과 친밀하게 지내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기장현(機張縣)으로 멀리 정배하도록 하라. 정석교(鄭錫敎)는 수령인 몸으로 막중한 검험(檢驗)을 속여서 보고하였으니, 당진현(唐津縣)으로 정배하고, 가도사(假都事) 박치후(朴致厚)는 죄인을 검찰하지 못해 박태정(朴台炡)이 중도에서 스스로 목을 매게 하였으니, 엄하게 한차례 형신하여 삼수부(三水府)에 정배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국문하는 일을 이미 마쳤으니, 호남의 여러 죄수를 경중을 구분해 참작하여 처리할 만한 자는 참작하여 처리하고, 곧바로 풀어줄 만한 자는 곧바로 풀어 주어 즉시 거행한 후에 장문하도록 하라."
하니,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여러 조카들은, 역적 김일경이 출계(出繼)한 까닭으로 처음부터 연좌하는 가운데 들지 않아서 지금껏 경향(京鄕)에서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경조(京兆)의 보고에 의해 비로소 발각되었으니, 실형(失刑)의 심함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김용경(金龍鏡)의 아들 김홍제(金弘濟) 및 서자 김동이(金同伊), 김구경(金九鏡)의 아들 김팽명(金彭命), 김요경(金堯鏡)의 아들 김유제(金有濟)·김인제(金寅濟) 및 서자 김대재(金大再) 등 여섯 사람을 청컨대 모두 왕부(王府)로 하여금 탐라의 세 읍에 나누어 정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듣건대 농가에서 매양 을병(乙丙)을 걱정하고 있다는데, 곡식을 저장하는 도리는 마땅히 낟알을 아껴야 한다. 각도의 공곡(公穀)을 비국 낭관으로 하여금 추생(抽栍)하여 적간(摘奸)하게 하되, 만약 손을 댄 자가 있으면 공사(公私)의 용도를 물론하고 마음대로 쓴 율을 시행하게 하라. 나에게도 또한 어사와 비국 낭관이 있으니, 근만을 적발해 알 수 있다. 이렇게 엄히 신칙하고, 제언(堤堰)과 저수(儲水) 등의 일도 일체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각처의 원당(願堂)과 사찰(寺刹)은 일찍이 조령(朝令)으로 한결같이 모두 혁파했었습니다. 그 가운데 성균관에 소속된 다솔사(多率寺)는 처음부터 보고하지 않아서 누락되었다가 후에 발각되어 일체로 혁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균관의 장(長)이 슬그머니 억지로 환속시켜 달라고 연주(筵奏)하였으니, 사체가 미안합니다. 또 태학(太學)에 소속된 절이 있는 것은 옳지 않으니, 청컨대 대사성 서명신(徐命臣)을 중추하고, 소속된 사찰은 전대로 혁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아뢰기를,
"을해년144)  은 다른 해와 달라서 영흥의 준원전(濬源殿)145)  은 예조 당상이 이미 봉심하였으니, 전주의 경기전(慶基殿)146)  도 청컨대 일체로 봉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영흥 흑석리(黑石里)의 비(碑)와 각(閣)이 완성되어 영흥 부사 이방수(李邦綏)에게 숙마(熟馬)를, 감사 김한철(金漢喆)에게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는데, 역사를 감독한 공로 때문이었다. 조명리(趙明履)를 가자(加資)하였는데, 비음(碑陰)을 베껴 쓴 노고 때문이었다.

 

헌납 홍인한(洪麟漢)이 상서하여 청하기를,
"대조(大朝)께 앙품하여 김주태(金柱泰)·이명조(李明祚)·이창익(李昌翼) 등을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4월 21일 갑자

김시묵(金時默)을 정언으로, 이성중(李成中)을 공조 판서로, 송수형(宋秀衡)을 우윤으로 삼았다.

 

헌부 【집의 김이만(金履萬)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김윤(金潤)·조동하(趙東夏)는 엄중히 형신하는데도 한결같이 버티면서 불복하다가 경폐되었으니,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김윤·조동하에게 아울러 응당 시행해야 할 율을 시행하소서. 죄인 김주태(金柱泰) 부자(父子)는 윤상백(尹尙白)의 초사에서 긴밀하게 나왔는데, 그의 아비는 이미 경폐되어 조사해 알아낼 단서가 단지 김주태에게 있습니다. 이명조와 이창익은 역적 윤광철(尹光哲)과 난만하게 주무(綢繆)한 정상이 여러 차례 역적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종일 엄중히 형문하여 반복해 철저히 조사해야 하는데 갑자기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김주태·이명조·이창익을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다시 엄중히 국문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율에 의해 처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따르지 않겠다. 김윤 등의 일은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면직되었다. 이천보가 도성을 나간 후에 또 상소하여 해직을 비니, 임금이 억지로 할 수 없음을 알고는 입시하면 허락하겠다고 유시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천보가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직(相職)으로도 경을 이르게 하지 못하니, 내가 경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이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신은 실로 오활하여 평탄하고 험한 것을 모르고 몸이 큰 죄에 빠져 조정에 욕을 끼쳤으니, 전하께서 신의 체직을 허락하심이 신의 목숨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만약 완론(緩論)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상(時象)이 전과 달라서 경이 비록 서울에 머물러 있더라도 반드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당론(黨論)을 타파함은 한당(漢唐)이래로 없었던 것으로서, 크게 통쾌하게 타파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크게 통쾌하게 타파하는 가운데에서도 깊은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권강(權綱)을 총람하시고 깊이 살피시어 잘 처리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군(靈城君)이 말하기를, ‘혁심(革心)·혁면(革面)의 의심을 두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옳지만, 그러나 주객(主客)의 분수가 없을 수는 없다."
하자,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미 모조리 혁심하였다고 믿을 수도 없고, 또 모조리 혁면했다고 의심할 수도 없으니, 주객의 분수가 있는 것과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을 여는 것은 그 책임이 오로지 전관(銓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이천보의 면상(免相)을 허락하여 서울에 머물러 있도록 하고 다시 임용하겠다고 면유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서경》의 무일편(無逸篇)을 읽었다.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권농(勸農)에 마음을 쓰도록 하고, 조정 신하를 신칙하기를,
"다시는 지나간 일을 거론하지 말고, 오직 재능에 따라 임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이조 판서 신만(申晩)에게 신칙하기를,
"경은 대간(臺諫)의 말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대간이 말을 하면 내가 마땅히 엄히 처리할 것이며, 이렇게 하는데도 오히려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을 다스리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4월 22일 을축

임금이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을 소견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신이 산 같은 죄를 지었는데도 은혜가 바다와 같아 지금은 편안히 무고(無故)한 사람처럼 되었으니, 어찌 감읍(感泣)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무고한 사람이 있으니 좋지 않은가?"
하였다.

 

4월 23일 병인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당하관이 교자를 타는 것은 본래 법으로 금한 것이 있는데 근래에는 기강이 해이해져 금한 것을 쉽게 범하니, 청컨대 다시 엄하게 신칙을 가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군자창(軍資倉)·광흥창(廣興倉) 두 창고는 바로 매월 요록(料祿)을 나누어 주는 아문(衙門)입니다. 사체로 보아 어찌 조적(糶糴)147)  을 하겠습니까만, 근래에는 원역배(員役輩)들의 정소(呈訴)로 인해 환자(還子)를 허락해 주어 전에 없던 잘못된 예를 처음 열었습니다. 봄에는 많은 곡물을 받아서 먹고는 가을에는 전부를 바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단지 명색이 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창고의 곡식이 공공연하게 축나 참으로 매우 한심합니다. 이후에는 이런 폐단을 각별히 엄하게 금하여 만일 범한 자가 있으면 드러나는 대로 엄중히 다스리소서."
하니, 왕세자가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제도(諸道)의 구관 당상(句管堂上) 및 제언 당상(堤堰堂上)을 소견하고 제언(堤堰)에 대해 신칙하였다. 윤득우(尹得雨)를 함경도 어사로, 윤동성(尹東星)을 경상도 어사로 삼아 암행(暗行)하면서 고을 수령들의 잘잘못을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금위영·어영청 두 영의 기사(騎士) 가운데 세 번 추천을 받은 사람은 시사(試射)·시강(試講)하여 자리가 있는 대로 조용(調用)하는 것이 이미 절목이 있으나, 해당 영은 구근(久勤)으로 삼망(三望)을 정하기를 자벽(自辟)148)  하는 규정처럼 하고, 병조는 일찍이 시예(試藝)하지 않고서 혼동시켜 의망해 넣으니, 설시한 본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신이 절목을 만들기 전에 해당 영에서 한 보고를 보니, 세 사람 중에 시재(試才)의 우열로 의망의 차례를 갖추었는데, 참으로 인순(因循)한다면 신은 재능이 없는 자는 앉아서 벼슬을 얻고, 재능이 있는 자는 수고로워도 공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지금부터는 두 영의 기사 가운데 이미 시재를 거친 자는 도목(都目)149)   때마다 해당 영에서 이름을 기록해 병조에 보고하고, 병조에서는 다시 고시(考試)하여 그 중 뛰어난 자를 선발해 격식에 의해 거두어 임용하면 기사에게 있어서는 자리를 잃는 탄식이 없게 되고, 나라에 있어서는 배양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어영 대장의 견해 역시 신과 같습니다."
하니,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 역시 홍상한의 말과 같게 대답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지난번 대신이 아뢰기를, ‘균역청의 무명 2동(同)을 총융청에 획급(劃給)하여 임진(臨津)·장산(長山)의 접제(接濟)에 보태게 하소서.’라고 하였는데, 균역청에서는 단지 대신 지급하기만 해야지 만약 직접 지급하는 길을 열어 놓으면 크게 후일의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니, 임진의 선박에 대한 복호(復戶) 30결(結)을 이 숫자에 의해 장산의 둔전(屯田)으로 면세(免稅)를 옮겨 주는 편리함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무릇 적몰(籍沒)한 전토(田土)를 각 아문에 나누어 소속시켜 그대로 면세해 준다고 합니다. 이런 규례가 언제 처음으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정부(正賦)는 사체가 매우 중한데 어찌 한결같이 몰입한 수에 따라 모조리 면세하겠습니까? 또 각사에서 이미 전토를 얻고 또 공부(公賦)를 면제받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후에는 역적 집안의 전토를 각처에 나누어 소속시킬 때 면세 한 조항은 특별히 혁파해야만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신(臺臣) 김조윤(金朝潤)·박성원(朴盛源)·김시묵(金時默) 등을 호서의 연해(沿海)로 찬축하였다. 이때에 동궁의 정령(政令) 및 뭇 신하들이 동궁에게 아뢴 일을 임금이 문득 물어보곤 했는데, 이날 비국의 차대(次對)에 양사(兩司)에서 한 사람도 입참(入參)하지 않아 임금이 노하여 모두 변방으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교리 홍명한(洪名漢)이 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3일 후에 임금이 김시묵의 조모가 연로하다는 것으로써 모두 석방하였다.

 

집의 김이만(金履萬)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여러 해 동안 태평하여 백성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올해에 전염병이 돌아 죽은 자가 많아서 살아남은 백성들이 연달아 흩어져 달아나 마을이 쓸쓸하고, 전야(田野)가 개척되지 않아 마치 병란을 겪은 것과 같습니다. 보는 바가 이와 같고, 들은 바가 보는 것 같습니다. 가까운 곳이 이와 같으니, 먼 곳도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인정은 서로 그리 멀지 않아서 만일 먹을 것이 충분하여 배를 채우게 되고, 의복이 몸을 감추기에 충분하다면 어찌 괴롭게 친척과 이별하고 분묘를 버리고서 이처럼 도로에 떠돌아 다니겠습니까? 그 실정을 알고나면 참으로 불쌍하여 장탄식이 이어집니다. 그런데도 여러 주(州)의 공부(貢賦)는 전일과 같고, 팔도의 판적(版籍)은 지난해와 같으니, 비록 저하의 명철하심으로 살피시더라도 어찌 그 유망(流亡)함이 이와 같음을 다 살피시겠습니까? 유망함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공부는 전과 같으니 그 박할(剝割)함을 알 수 있으며, 유망함이 이와 같은데도 판적은 지난해 준하여 그 거짓됨을 상상할 수 있으니, 이는 모두 수령들의 죄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것이 어찌 수령들의 본심이겠습니까? 참으로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죄를 얻게 되기 때문에 끌어다가 모자란 것을 보태어 구차히 목전의 책임을 면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대조(大朝)께 앙품하고 묘당(廟堂)에 머리를 숙여 물으시어 무릇 위로하여 편안하게 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어야 합니다. 혹 진전(陳田)의 세를 감하여 경작을 권하기도 하고, 혹 포흠(逋欠)을 진 집의 조세를 견감하기도 하여 돌아오게 하기를 항상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듯 급하게 하며, 역내(域內)가 조금 편안하다 하여 조금도 소홀히 하지 마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4일 정묘

이창의(李昌誼)를 광주 유수로, 정형복(鄭亨復)을 강화 유수로, 이태상(李泰祥)을 북도 병사로, 이후(李)를 이조 참판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대사간으로, 정순검(鄭純儉)을 장령으로, 안복준(安復駿)을 지평으로, 이시건(李蓍建)을 정언으로, 조명리(趙明履)를 판윤으로 삼았다.

 

북도의 별견 시관(別遣試官) 조영국(趙榮國)이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불러서 북도의 일을 물었다. 조영국이 경원 개시(慶源開市)의 폐단을 갖추 아뢰기를,
"대개 회령(會寧)은 해마다 개시하는데, 남북의 각 고을에서 힘을 합쳐 서로 돕기 때문에 간신히 지탱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원에 이르러서는 한해 걸러 개시하여 호차(胡差)가 회령에서 종성(鍾城)·온성(穩城)을 거쳐 경원에 이르고, 개시가 끝난 후에는 또 경원에서 종성으로 들어가는데, 들어갈 때에 거느리는 사람이 거의 1백여 명이나 되어 유련(留連)을 주구(誅求)하는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이른바 별도로 주는 물건도 해마다 증가하여 근일에는 다른 물종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한 고을에서 주는 세포(細布)에 이르러서는 거의 1백여 동(同)에 이르러 관에서 스스로 홀로 담당하여 만들어 낼 수가 없어 여러 공억(供億)의 수요와 주어 보내는 물건을 한결같이 모두 민간에 책임지워 징수해 비록 땅과 집을 다 헐어내도 그 구하는 데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이 행차를 겪고 나면 마치 난리를 만난 것과 같기 때문에 백성들이 명(命)을 감당하지 못하고 유리되어 흩어짐이 이어져 세 고을의 민호(民戶)가 점차 감축되어 거의 고을의 모양을 이루지 못해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대저 회령 개시는 이제 1백여 년이나 되도록 오래 되어 이제 갑자기 그만두기를 청할 수 없습니다. 경원 개시에 이르러서는 바로 중간에 창설되어 비록 영구히 혁파하기를 청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는 할 말이 있지만 이 역시 쉽게 할 말이 아닙니다. 비록 그러하나 후춘(後春)은 회령에서 2백여 리에 불과하여 하룻밤을 묵으면 왕래할 수가 있습니다. 후춘 개시를 만약 회령에 다 합쳐 설치하면 세 고을의 쌓인 폐단을 영원히 없앨 수가 있으며, 저들에게 있어서도 역시 편리하지 못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세 고을에 10년 동안 흉년이 든 나머지 민력(民力)이 지탱하기 어려워 편리를 따라 합쳐 설치해야 한다.’는 뜻으로 잘 사명(辭命)을 만들어 자문으로 변통하기를 청한다면 저들 역시 어렵게 여기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조영국이 말하기를,
"일찍이 이민곤(李敏坤)이 상소함으로 인하여 북도(北道)에 있는 사왕(四王)150)  의 자손으로 하여금 1년에 베 1필씩을 바치게 하고 그대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하여 ‘사왕자손청(四王子孫廳)’이라고 이름하였는데, 후에 묘당의 아룀으로 인하여 사왕의 자손에게 역(役)을 지우지 못하게 하였으나, 한 도 안에 사왕의 자손이 장차 수만 명에 이르게 되고 불법으로 속한 자 역시 많습니다. 비단 북도의 첨정(簽丁)이 아주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만 명의 장정(壯丁)을 한가로이 놀도록 할 수도 없을 듯합니다. 지난번 예조에서 중국인으로 귀화한 사람의 자손을 장적(帳籍)을 자세히 상고하여 성관(姓貫)을 조사해 책자로 만들어 보고하라는 뜻을 계품하여 각도에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북도에는 귀화한 사람의 자손이 매우 많아서 조사해 내는 즈음에 비단 소란스러운 폐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 등주(登州)와 태원(太原)을 성관으로 하는 자들을 한결같이 모두 중국인의 자손이라 하여 조사해 보고하게 하였는데, 지금의 안변(安邊)이 등주이고 충주(忠州)가 태원이라는 고사(古事)를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체 중국인으로 하여 책자를 만들면 어찌 억울하다고 호소할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듣건대, 명나라 사람을 혼동하여 귀화한 사람이라 일컬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역을 지우지 말도록 명했었는데, 이제 아뢴 바를 듣건대, 하교한 바와 어찌 서로 어긋나는가? 예조 판서로 하여금 후일 등대할 때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례의(五禮儀)》 가운데 서직(黍稷)의 모속(茅束)은 구덩이에 묻도록 되어 있는데, 생각건대 대개 서직을 중히 여긴 것이다. 내가 40년 전에 헌관(獻官)이 되어 망예례(望瘞禮)를 행할 때에는 그것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번 친향(親享) 망예 때에 비로소 구덩이 안에 모석(茅碩)151)  이 있는 것을 보고 괴이해서 물었더니, 《오례의》에 의해서 사용한 것인데 묶은 서직은 자성(粢盛)152)  으로 올린 것이 아니라 바로 올리고 남은 서직이라고 하였다. 아주 예의 뜻은 아니지만 만약 《오례의》의 뜻대로라면, 마땅히 변두(邊豆)153)  를 거둔 후에 대축(大祝)이 제1실(第一室)에 가서 서직 한 숟가락을 떠서 접시에 담고 또 모석(茅碩)에 담아 축폐(祝幣)를 망예할 때 함께 구덩이에 넣어야 하니, 이로써 정식으로 삼아 거행하게 하라. 접시와 수저 각 2개씩은 공조로 하여금 정성을 다해 만들어 본서(本署)에 보내 전묘(殿廟)의 제기고(祭器庫)에 나누어 두고, 대제(大祭) 때 쓸 모석 역시 예문(禮文)에 의해 백모(白茅)를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문무과(文武科)의 천동군(天童軍)은 으레 본조(本曹)에서 각사(各司) 공인(貢人)에게 분배하는데 구례는 단지 알성시(謁聖試)에만 거행했었습니다. 갑자년154)   이후부터는 친림 정시(親臨庭試)에도 역시 주도록 명하셨는데, 이번 직부(直赴)가 마땅히 3백 30여 인이요, 본과 초시(本科初試)가 6백 인이며, 전시(殿試)의 참방자(參榜者)는 몇 사람이나 될지 모르나 반드시 수백 명은 밑돌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천동군 1천 2백 명을 나누어 정했습니다. 이렇게 숫자가 많은 것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공인들이 누누이 호소하고 있으니, 마땅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과는 을과(乙科)에 한해서 주는 것이 옳다."
하므로, 홍계희가 말하기를,
"무과가 만약 5, 6백 명이 넘으면 태복시(太僕寺)에서 비록 말을 세내어 주더라도 사단이 생기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을 주는 것 역시 을과를 한정해서 주는 것이 옳다."
하니, 홍계희가 말하기를,
"사수(死囚)를 신문하는 규정이 서울은 한 달에 여섯 번 동추(同推)155)  하고, 외방은 한 달에 세 번 동추합니다. 만약 법식에 차지 않으면 본조에서 법전에 의거해 추고합니다. 본조에 이르러서는 비록 날마다 개좌(開坐)하더라도 금형(禁刑)하는 날에 구기(拘忌)됨이 많으니, 허다한 죄수를 취복(取服)할 기약이 없어 실로 옥체(獄體)를 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속대전》에 종묘·사직·영희전(永禧殿)의 봉심 및 수개일(修改日), 각릉의 봉심일, 능의 사초(莎草)를 다시 하는 날에는 일이 지나간 후에 개좌하여 형을 쓰며, 기우제·기설제·영제(禜祭)156)  를 행하는 날, 각릉의 명일(名日)·제일(祭日), 종묘 이하의 여러 곳의 선고사유제(先告事由祭) 및 수향일(受香日), 때없이 올리는 별고일(別告日), 풍운 뇌우 산천 우사일(風雲雷雨山川雩祀日), 선농 선잠 제일(先農先蠶祭日), 각릉·각전의 이환안제일(移還安祭日)에는 개좌해도 형을 쓰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 형을 쓰고 쓰지 못함이 섞인 듯합니다. 이미 재계일(齋戒日)이 아니면 형을 쓸 수 없다는 뜻이 없으니, 이상 각일에는 모두 일이 지난 후에 개좌하여 형을 쓰는 예가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살옥(殺獄)을 검험(檢驗)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근래에는 잘못된 예가 있습니다. 본조에서 경조(京兆)에 이문(移文)하여 검험하게 하면 해당 부(部)에서 초검(初檢)하고 경조에서 복검(覆檢)하여 본조와 경조가 같은 날 개좌 하기를 기다려 비로소 문안을 이송합니다. 한 사(司)가 개좌하고 한 사는 개좌하지 못하면 이송하지 못하여 혹 달을 넘기기까지 하며, 또 해당 부의 검장(檢狀)을 경조에 보내기 때문에 초검과 복검이 반드시 뇌동(雷同)하게 되어 거듭 검험하는 뜻이 거의 없습니다. 이후에는 본조에서 곧바로 해당 부에 공문을 보내 급급히 검험하여 검장이 곧장 본조에 고하게 하면, 본조에서는 곧바로 경조에 이문하고, 경조 역시 급급히 복검하여 즉시 본조로 보내 일각이라도 지체하는 일이 없도록 정식을 삼아 시행하는 것이 사의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동점(趙東漸)을 포도 대장에 특제(特除)하였다. 조 동점은 조동정(趙東鼎)의 사촌 형제로서 놀라 병이 나 명을 받들지 못하니, 임금이 약물(藥物)을 내렸으나 얼마 안되어 조동점이 졸(卒)하였다.

 

4월 25일 무진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았는데, 여러 승지의 입대(入對)를 명하였다.

 

4월 26일 기사

어영청의 새 번군(番軍)인 울진(蔚珍)의 간만창(簡萬昌) 등 여섯 명이 중도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 하교하기를,
"그들의 처자들이 문에 서서 기다리는 마음을 생각하니, 내가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 이외에 후히 돌보아 주도록 하라."
하였다.

 

종묘의 서직(黍稷)을 담는 숟가락을 개조하도록 명하였다. 종묘에는 예전에 수저가 있었으나 작아서 쓰기에 합당치 않아 유성중(兪性中)이 본서(本署)의 영(令)으로 있을 때에 밥주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주걱을 버리고 수저를 사용하라 명하여 그 제도를 후하게 해 밥을 뜨기에 알맞게 하였다.

 

4월 27일 경오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8일 신미

조명채(曹命采)를 예조 참판으로, 홍상한(洪象漢)을 판의금으로, 조관빈(趙觀彬)을 좌빈객으로, 이익정(李益炡)을 우부빈객으로, 이후(李)를 동경연으로, 정광한(鄭光漢)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약방의 입진을 명하였다. 도제조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삼가 의관의 말을 듣건대, 동궁이 근래에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후(症候)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이런 증세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의관이 대조(大朝)께 품하여 고할 것을 청하였더니, 우선은 앙달하지 말고 탕제를 먼저 조제해 들이라고 하교하셨기 때문에 온담탕(溫膽湯) 20첩으로 의논해 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증세를 대조께 우러러 아뢰지 않고 갑자기 약명(藥名)을 써서 아뢰면 관계된 바가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이름을 고쳐 가미이진탕(加味二陳湯)으로 조제해 드렸다고 합니다. 대개 동궁께서 약을 드시려면 반드시 대조께 진달한 후에 비로소 조제해 올려야 하나 온담탕은 바로 문호(門戶)의 약이기 때문에 심상하게 드시는 이진탕으로 바꾼 것이니, 사세는 비록 부득이하나 끝내 미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히 괴이할 것이 무엇인가?"
하였다.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이, 근래에 대왕 자손(大王子孫)이 혹 천역(賤役)에 들기도 한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대왕의 적손은 대수(代數)를 한정하지 말고, 서손(庶孫)은 9대를 한정으로 하고, 외손은 7대를 한정으로 해서 공천이나 사천을 물론하고 한도 내에서 곧바로 면천하는 것이 예이다. 지금 듣건대, 북도의 사왕손(四王孫)으로 공천이나 사천이라 이름한 자가 많다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사왕 이후는 알 수가 있다. 아! 승국(勝國)의 자손도 만약 천역에 들게 되어 등문(登聞)하면 오히려 면천을 허락하는데, 더군다나 선파(璿派)이겠는가? 이는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되는데, 도신과 수령이 된 자는 예사로 보아 넘기니, 어찌 나라의 녹(祿)을 먹는 뜻이 있겠는가? 제도에 신칙하여 종부시에 조사해 보고하여 법전에 의해 거행 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 내시(內侍)가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서로 떠들며 싸웠는데, 형조에 정소(呈訴)하니, 형조 판서 홍계희(洪啓禧)가 결송(決訟)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서 하교하기를,
"일찍이 근시(近侍)를 지낸 자가 법조(法曹)의 뜰에 들어간 것이 이미 매우 무상(無狀)하고, 또 본래 내부(內府)에서 감단(勘斷)하여 처리하는 것이 있는 것인데 해조에서 재판한 것은 불찰이라 할 수 있다. 해당 당상을 엄중히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 당풍(唐風)을 강독하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당풍을 매우 좋아하는데, 성인(聖人)의 유풍(遺風)이 있기 때문이다."
하니, 시독관 홍명한(洪名漢)이 글의 뜻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에 이르기를, ‘오늘밤이 무슨 밤인가, 그대와 만나는 밤이다.[今夕何夕 與子邂逅]’라고 하였는데, 비록 정풍(正風)을 말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서로 만나는 즐거움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시노비(寺奴婢)는 늙도록 장가를 들지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하였다.

 

하교하기를,
"30여 명의 옥당(玉堂)이 행공(行公)할 기약이 없으니, 이른바 상문(相門)의 사객(私客)이란 말을 추조로 하여금 조영순(趙榮順)에게 함문(緘問)157)  하여 등대해 아뢰게 하라."
하였다.

 

4월 29일 임신

왕세자가 여러 서연관(書筵官) 및 진선(進善)·찬선(贊善)에게 별유(別諭)를 내려 올라오도록 하였다.

 

정찬술(鄭纘述)을 우변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찬선 윤봉구(尹鳳九)가 상서하여 사직하고 나오지 않으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지평 심곡(沈穀)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조(大朝)께서 하교하여 추조로 하여금 조영순(趙榮順)을 함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은 격례(格例)가 어떠한지 모르나 이 일은 조영순이 논사(論思)하는 때에 있었으니, 비록 찬적(竄謫)된 가운데 있더라도 추조에서 함문하는 것은 실로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만일 한 번 묻고자 한다면 어찌 다른 방도가 없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대조께 앙품하여 성명(成命)을 환수하게 하소서. 나라의 장률(贓律)이 매우 엄하여 참으로 범한 바가 있으면 용서할 수 없는데, 안복준(安復駿)이 장죄(贓罪)를 범한 것이 낭자하여 가리기가 어렵습니다. 팽아(烹阿)의 법158)  을 피한 것만 해도 그에게 있어서는 다행인데, 이번에 대직(臺職)을 제수하여 여론이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신은, 지평 안복준을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깎아내버리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맨 먼저 진달한 것은 앙품하기가 어렵고, 안복준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헌납 홍인한(洪麟漢)이 상서하기를,
"역옥(逆獄)에 응당 좌죄(坐罪)된 여러 사람을 정배시키기 전에 예에 의해 구속해 가두는 것은 법에 있어 당연하나, 부녀자를 붙잡아다가 포청에 가두는 것은 고례(古例)가 아닌데, 어찌하여 조령(朝令)에 없는 새 규례를 처음으로 만들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지금 이후부터는 일체 금지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바에 의해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왕세자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안복준은 비록 장죄(贓罪)를 범해 금고(禁錮)되었으나, 연한이 이미 지났는데 어찌 영원히 폐할 수 있겠습니까? 심곡의 상서는 협잡을 면치 못하니, 다시 처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심곡의 상서에 대한 답을 고쳐 말하기를,
"안복준의 일은 지나치다."
하였다. 장령 이세태(李世泰)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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