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4권, 영조 31년 1755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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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갑술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상참을 행하였다. 판부사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대조께서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하교하시기를, ‘내가 아이 때에 작은 벌레 한 마리를 죽였더니, 늙은 궁인이 보고 경계하기를,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까닭 없이 죽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내가 이에 감동하여 항상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먹었는데, 하늘이 돌보시어 이런 원량(元良)을 낳았다.’라고 하시어 신은 실로 이 하교를 흠앙하였습니다. 하늘은 항상 우로(雨露)만 내릴 수 없고 때때로 상설(霜雪)로 위엄을 내립니다. 천벌에 관계된 자는 엄징하지 않을 수 없으니, 큰 교화로 변화시켜 도야(陶冶)해 스스로 소융(消融)하게 한다면 저절로 사진(邪沴)이 그 사이에 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큰 덕은 살리는 것이라 하지만 형벌이란 것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방금 새로 큰 옥사를 겪어 뒷수습을 잘하기가 어려우니,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대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본받으시어 끝없는 아름다움을 도모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가납(嘉納)하였다.

 

5월 2일 을해

임금이 춘당대에 나아가 토역 정시(討逆庭試)를 베풀어 이시민(李時敏) 등 10인을 뽑았다.

 

임금이 바야흐로 친림하여 시사(試士)하는데 한 시권(試券)이 처음에는 과부(科賦)를 짓는 것처럼 하다가 그 아래 몇 폭(幅)에다가는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씨를 썼는데 모두 난언 패설(亂言悖說)이었다. 고관(考官)이 앞으로 나와 그 글을 진달하니, 임금이 열어 보기를 명하였는데, 바로 무신년159)  에 정법한 죄인 심성연(沈成衍)의 동생 심정연(沈鼎衍)이었다. 즉시 수색하여 붙잡아 대령하라 명하였다. 또 위소(衛所)의 하리(下吏)가 시권을 축(軸)으로 만들 때 과제(科題)를 쓰지 않은 한 종이를 보았는데 첫 행에 ‘상변서(上變書)’라 쓰여 있었으나 그의 이름은 없었다. 하리가 부장(部將)에게 주고, 부장은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에게 주었다. 홍상한이 크게 놀라 급히 달려가 고하여 올렸다.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니, 대신들이 그 대략을 듣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종이 가득히 장황하게 쓴 것이 음참(陰慘)하기가 헤아릴 수 없어 비단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땅에 떨어지는 듯하다. 방자하게 휘(諱)를 쓰기까지 했으니,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유시를 받들고서야 아주 패악하고 흉한 말이 있음을 알고 모두 분통하여 죽고자 하였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 쉽게 찾아낼 수가 없었다. 임금이 홍상한 및 삼군문(三軍門)의 대장 김성응(金聖應)·홍봉한(洪鳳漢)·구선행(具善行)에게 즉시 조사해 잡게 하니, 홍상한 등이 심정연이 의심스럽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흉서와 시권 끝에 쓴 글의 뜻이 서로 같으니, 이것이 참으로 의심스럽다."
하고, 즉시 내일 친국할 것을 명하였다.

 

이성규(李聖圭)를 정언으로, 이기경(李基敬)을 필선으로, 정상순(鄭尙淳)을 부수찬으로, 이수훈(李壽勛)을 지평으로, 박홍준(朴弘儁)을 집의로, 홍양한(洪良漢)을 부교리로, 남태저(南泰著)를 수찬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지의금으로, 정익하(鄭益河)를 판윤으로, 이은춘(李殷春)을 전라 우수사로, 오혁(吳)을 회령 부사로 삼았다.

 

5월 3일 병자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무과 1방(榜)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이 과거는 다른 것과 다름이 있으니, 자원하는 이외에는 특별히 부방(赴防)을 면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내사복시(內司僕寺)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심정연(沈鼎衍)에게 묻기를,
"친림하여 시사(試士)하는 사체가 어떠한데 응제(應製)하는 이외에 감히 난언(亂言)으로써 은연중에 협잡하였으니, 이미 무엄한 데에 관계되고 너는 심성연(沈成衍)·심익연(沈益衍)의 아우로 이제 이런 일을 하였으니, 더욱 통분스럽고 놀랍다."
하니, 심정연이 공초하기를,
"이는 바로 신의 일생 동안의 마음이기 때문에 과장(科場)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써 두었습니다. 황진기(黃鎭紀)가 도망하여 붙잡을 수가 없는데, 만약 명첩(明牒)이 있으면 붙잡을 수 있기 때문에 운운한 것입니다."
하였다. 형추(刑推)한 후 다시 추문하니, 심정연이 공초하기를,
"금산사(金山寺) 창업연기(創業宴記)에서는 다만 언책(諺冊)만 보았습니다. 칙사(勅使)가 오면 접대하는 곳이 모화관(慕華館)이 있는 홍제원(弘濟院)이기 때문에 남별궁(南別宮)은 즉시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의 겁이 많은 정상으로 얼마 후 익명으로 투서(投書)했다는 일을 듣고는 마음이 떨려 자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대개 흉서의 말 뜻이 창업연기와 비슷하고, 또 남별궁을 들먹여 말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네가 일찍이 이 기록을 보았는가?’의 여부 및 ‘칙사의 접대는 어디에서 하는가?’ 하고 물으니, 공초하기를,
"일찍이 그 기록을 보았습니다."
하고, 남별궁에 이르러서는 거론하지 않아서 그 정상이 더욱 의심스럽기 때문에 재차 물어 공초한 바가 이러하였다.

 

5월 4일 정축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였는데, 역적 심정연(沈鼎衍)이 복주(伏誅)되었다. 심정연을 형신(刑訊)하니, 심정연이 공초하기를,
"익명서는 과연 신이 만들었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바로 신의 원수입니다. 신은 심성연(沈成衍)과 심익연(沈益衍)의 아우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훈척(勳戚)인 사람과 임금의 권우(眷遇)를 받는 사람은 모두 미워하여 먼저 제거하고자 하여 이처럼 음참하고 망측한 계책을 낸 것입니다. 신은 역적 윤지(尹志)의 일족(一族) 윤혜(尹惠)와 함께 모의하였는데, 윤혜는 바로 윤취상(尹就商)의 아우인, 윤오상(尹五商)의 양아들이요, 윤근(尹懃)의 아우이며 춘천 사람 유명두(柳明斗)의 사위입니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종손(從孫) 김도성(金道成)이 우두머리가 되어 윤혜와 함께 이 글을 지어 신에게 주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신이 역모하고자 하여 이미 익명서를 올렸는데, 또 신의 이름을 경륜(經綸)에 써서 올린 것은 익명의 자취를 가리고자 한 것입니다. 또 역적 김일경의 종손 가운데 성명을 바꾸고 중이 된 자가 있습니다. 또한 시급한 사기(事機)가 있었는데, 윤혜가 바야흐로 군사를 모아 춘천에서 역모를 하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결안초(結案招)에 말하기를,
"과거 이전에 도동(桃洞)에서 글을 지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훈척과 권우를 받는 신하들을 제거하고자 하여 이 사람들을 무함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음흉하고 부도(不道)한 말로써 임금을 향해 망측한 계책을 내었으니, 신의 흉한 마음이 탄로났습니다."
하고,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지만(遲晩)하였다. 하교하기를,
"역적이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는가마는, 어찌 심정연 같은 자가 있었겠는가? 숭례문(崇禮門) 밖의 무신년에 목을 벤 곳에서 금오 당상이 친히 가서 정법(正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임금의 노여움이 심하여 날이 저물었는데도 아직 어손(御飡)을 올리지 못하였다. 선인문(宣仁門) 밖으로 나아가 동궁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다가 심정연을 정형한 후에야 비로소 환어(還御)하였다. 내사복시에서 이성술(李聖述)을 형신하였다. 이성술은 일찍이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로 있을 때 김일경의 소하(疏下)에 든 여러 여적160)  의 묵벌(墨罰)161)  을 해제하였고, 또 그의 할아비 이익주(李翊周)가 임인년162)  에 위훈(僞勳)으로 증직된 관직을 장적(帳籍)에 쓴 자이다. 전에 이미 형조에 가두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친히 신문하여, 역적을 비호하였다는 것으로 자복하니, 처참(處斬)하였다. 전효증(全孝曾)·전효순(全孝舜)을 신문하여 전효증은 호서로 정배하고, 전효순은 호남의 연해로 정배할 것을 명하였다. 전효증과 심정연은 서로 아는 사이인데, 전효순이 글씨를 잘 쓴다고 심정연에게 천거하여 과장(科場)에 들어가기 전에 과제(科製)를 써 주게 한 자이다. 그러나 전효증과 전효순은 모두 그들의 역모가 극도로 흉악한 것인 줄을 몰라 처음부터 옥사의 정황과는 무관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심정연은 심성연과 심익연의 아우로서 항상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흉서를 모의해 지어 난권(亂券) 가운데에 냈으며, 또 과제(科題)를 지어 시권(試券)을 올려 그의 투서한 형적을 감추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일이 발각되어 국문을 받아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이 낭자하게 탄로났으니, 아! 통분하다. 사람들이 그 누군들 그의 고기를 먹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항상 이치란 믿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이제 심정연의 일로 살펴보건대, 천도(天道)를 더욱 증험할 수가 있다. 처음 심정연이 투서하였을 때에 스스로는 귀신도 알지 못하니 천지를 속일 수 있다고 여겼는데, 발꿈치를 돌리기도 전에 국옥에 잡혀와 정절을 스스로 털어놓고 흉역이 다 드러나 몸이 부질(斧鑕)163)  에 죽고 죄가 처자에게 미쳤으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옛 성현이 하늘을 자세히 논하여 ‘밝고 밝은 하늘이 위에서 내려다 보고, 옆에서 듣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천인(天人)의 이치를 통찰하여 한 말이다. 더군다나 저 흉역의 무리들처럼 이치에 어긋나고 윤리를 업신여김이 천하에 더 할 수 없는 자들이겠는가? 비록 모르는 곳에서 계책을 모의함이 컴컴한 가운데 지극히 비밀스럽다 하더라도 어찌 귀신이 미워하여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도거(刀鉅)와 정확(鼎鑊)에 몰아 넣어 빠뜨릴 줄 몰랐는가? 이런 이치가 매우 분명하여 고금에 어긋나지 않으니, 모든 세상의 얼신(孼臣)·난적(亂賊)들은 두려워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사간 윤동도(尹東度)가 소회를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소하에 든 여러 역적은 역적 김일경과 같은 마음이었는데, 박필몽(朴弼夢)과 이명의(李明誼) 두 역적이 복법(伏法)된 후에 이르러서는 비록 평일에는 당을 위해 죽기를 맹세한 무리라 하더라도 마땅히 놀라서 통분하게 여겨 토벌하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이에 도리어 함부로 정계(停啓)하고 이성술(李聖述)로 하여금 장전(帳殿)에서 공초(供招)를 바친 말을 하도록 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여론이 분개해함이 지금에 와서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무신년 이후 소하에 든 여러 역적의 일을 정계한 대신(臺臣)을 빨리 멀리 찬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런 때 이런 종자(種子)들은 연곡(輦轂)에서 숨을 쉬게 할 수 없으니, 이성술의 아들을 빨리 해부(該府)로 하여금 영동으로 정배하게 하라. 역적 심정연은 지난 사첩에도 없는 자로서 비록 역적 이괄(李适)과 같은 율을 시행했지만 그 분통을 풀기에는 부족하다. 법에 없는 법을 비록 갑자기 시행하기는 어렵더라도 응당 연좌시켜야 할 사람은 예사로 처리할 수는 없다. 그의 처는 흑산도의 비(婢)로 삼고, 그밖에는 모두 영남으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원(院)에서 아뢴 것에 따라 해남현(海南縣)에 정배한 죄인 윤광찬(尹光纘)을 거제부(巨濟府)로 안치하였다.

 

5월 5일 무인

정언 정광한(鄭光漢)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윤광찬은 감히 위훈(僞勳) 때에 증직한 관질(官秩)을 함부로 장적(帳籍)에 쓴 정상이 아주 흉패하여 결코 섬으로 유배하는 것에 그칠 수는 없으니, 청컨대 거제부에 안치한 죄인 윤광찬을 대조께 품하여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해 엄중히 신문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따르지 않겠다. 윤광찬의 일은 진달한 바가 비록 옳으나, 대조께서 처분하신 후이니, 다시 품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장령 이세태(李世泰)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정배한 죄인 전효증(全孝曾)과 전효순(全孝舜)은 역적 심정연(沈鼎衍)과 주무(綢繆)하고 체결하여 시문(試文)을 써 주었으니, 그 소행을 보건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법이 지극히 엄하여 결코 정배에 그칠 수는 없으니, 청컨대 전효증과 전효순을 대조께 품하여 빨리 왕부로 하여금 다시 엄중히 국문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따르지 않겠다."
하였다.

 

5월 6일 기묘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는데, 역적 윤혜(尹惠)가 복주(伏誅)되었다. 윤혜의 문서에 열성(列聖)의 어휘(御諱)가 한 종이에 나란히 쓰여 있는 것이 있어 임금이 놀라고 통분해 그 까닭을 국문하니, 윤혜가 공초하기를,
"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 상고하느라 썼습니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주장(朱杖)으로 때리게 하였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간하기를,
"전하께서 매양 급하시기 때문에 자세한 실정을 알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하게 해도 오히려 실토하지 않는데, 더군다나 느슨하게 해야 하겠는가?"
하고, 즉시 보여(步輿)를 타고 선인문(宣仁門)을 나가서 종묘를 지나 가마에서 내려 엎드려 울면서 말하기를,
"나의 부덕(不德)으로 인해서 욕이 종묘에까지 미쳤으니, 내가 어떻게 살겠는가?"
하니, 대신과 여러 재상들이 같은 말로 간절하게 간하니, 이에 가마에 올라 광통교(廣通橋)에 이르러 구경하는 부로(父老)들에게 유시하기를,
"임어한 지 30년에 덕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였는데, 올해에 재차 남문(南門)에 임어하니 내가 너희들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이다."
하고, 마침내 숭례문(崇禮門)의 누각에 나아가 갑주(甲胄)를 입고 대취타(大吹打)하면서 다시 윤혜를 형신하였다. 윤혜가 공초하기를,
"흉서는 심정연(沈鼎衍)이 짓고 신이 썼습니다."
하고,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지만(遲晩)하였다. 백관을 차례대로 서도록 명하고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으로 하여금 효수(梟首)하여 헌괵(獻馘)하게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말하기를,
"이는 바로 원범(元犯)이기 때문에 6월에 군사를 일으키는 뜻을 써서 몸에 갑주를 입었으나, 내가 어찌 즐거이 하는 것이겠는가?"
하니, 판부사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죄인에게 형을 시행하는 것은 유사(有司)의 일일 뿐인데 지존(至尊)으로서 어찌 친히 이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심히 노하여 상을 치고 말하기를,
"이종성은 나를 감형(監刑)하는 도사(都事)라 하는가?"
하고, 충주목(忠州牧)에 부처(付處)하라 명하였다. 즉시 헌괵하지 않은 것으로써 훈련 대장 김성응을 잡아다 곤장을 치고 면천군(沔川郡)에 부처하고, 어영 대장 홍봉한(洪鳳漢)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총융사 정찬술(鄭纘述)을 어영 대장으로, 통제사 이장오(李章吾)를 총융사로 삼았다. 이때 임금이 이미 크게 노한데다가 또 아주 취해서 윤혜의 수급(首級)을 깃대 끝에다 매달도록 명하여 백관에게 여러 차례 조리 돌리게 하고 유사하기를,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의 생각을 품은 자는 나와서 엎드리라."
하였는데, 승지 채제공(蔡濟恭), 교리 홍명한(洪名漢) 등이 간하니, 중지하였다. 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는데 경루(更漏)164)  가 다하도록 취타는 오히려 그치지 않았었다. 날이 샐 무렵에야 임금이 비로소 소차를 나와 취타를 그치게 하고, 갑주를 입은 채 환궁하였다. 이날 죄인 김요채(金耀采)와 김요백(金耀白)이 윤혜와 함께 동시에 효시되었는데, 김요채와 김요백은 바로 김일경의 종손이다. 처음에는 김일경이 출계(出繼)하였기 때문에 본생(本生)의 지친(至親)이 연좌(緣坐)되는 데 들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심정연이 고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종손이 실로 흉서를 주관하였고, 또 역적 김일경의 지친 중에 성을 바꾸어 망명(亡命)한 자가 많습니다."
하니, 이에 수색해 체포하기를 명하였다. 김요채와 김요백이 먼저 붙잡혀 왔는데, 한차례 형추(刑推)한 후에 모두 효시하였다. 윤혜의 형 윤근(尹懃)과 윤신(尹悥) 및 윤취상(尹就商)의 서종자(庶從子) 윤경(尹憼) 역시 국문을 받다가 장폐(杖斃)하였다.

 

대사간 윤동도(尹東度)가 소회를 말하기를,
"무신년165)   이후에 역적 김일경의 소하(疏下)에 든 여러 역적을 정계(停啓)한 대간을 멀리 찬축하는 일을 윤허하셨습니다. 양사에서 현고(現告)한 가운데 무신년 이후의 소하에 든 세 역적166)  을 정계하였는데, 헌부에서는 장령 허옥(許沃)이고, 간원에서는 처음에 ‘빨리 나라의 형률을 바로 잡아야 한다.’라고 발계(發啓)하였다가 대사간 조석명(趙錫命)이 고쳐서 ‘국청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해야 한다.’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그후 잡아다 국문해 엄중히 신문하는 사이에 우선 정지하자는 글이 나왔으니, 이는 정계와는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대각(臺閣)의 예이다."
하였다. 승지 정광충(鄭光忠)이 말하기를,
"이미 대간의 청을 윤허한 후이니, 멀리 찬축하라는 전지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나, 허옥은 이미 작고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두라."
하였다.

 

장령 정순검(鄭純儉)이 상서하여 청하기를,
"윤광찬(尹光纘)은 잡아다 국문하고, 전효증(全孝曾)·전효순(全孝舜)은 섬에 유배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윤지(尹志)가 음흉한 변을 빚어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육지로 나오게 한 소치이니, 당초 품질(稟秩)에 둔 자는 용납해 옹호한 죄를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대신이 조사해 내어 죄를 정하자는 청은 참으로 체통을 얻은 것인데, 제주 3읍(邑)의 죄인은 목사가 오로지 스스로 주관하여 매양 사전(赦典)이 있을 때마다 직접 장문(狀聞)합니다. 그때 품청한 것도 목사에게 있고 도신(道臣)에게 있지 않으니, 지금의 이 대간의 계달은 참으로 살피지 않은 잘못이 있습니다. 신은, 해당 목사는 대조께 품하여 조사해 내어 죄를 정하고, 아뢰었던 대신(臺臣) 역시 견책해 파직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앙품하기가 어렵다. 대신을 견책하라는 청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5월 7일 경진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여 강몽협(姜夢協)·유봉린(柳鳳麟) 등을 신문하였다. 강몽협은 바로 심정연(沈鼎衍)이 끌어댄 자이고, 유봉린은 역적 윤혜의 처남으로 유명두(柳明斗)의 아들이다.

 

대사간 윤동도(尹東度)가 아뢰기를,
"풍양(豊壤) 땅에 역적 김일경의 정자가 있는데, 호조에서 적몰해 들인 후 사들인 자가 있다고 합니다. 역적 김일경의 흉역은 온 나라의 인심이 그 고기를 먹고 가죽을 베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비록 나라에 값을 바쳤다고는 하나 흉적의 옛집을 사들여 자기 것을 삼아 지금껏 그대로 두고 있으니,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해당 사들인 사람은 해조로 하여금 적발해 엄중히 처단하고, 이른바 정자에는 못을 파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전라 감사 조운규(趙雲逵)를 체직하였는데, 실로 병 때문이었다.

 

5월 8일 신사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여 강몽협을 형신하고, 인하여 백육창(白六昌)과 유봉린(柳鳳麟)을 면질(面質)하였는데, 백육창은 심정연의 밥집 주인이다. 유봉린이 말하기를,
"강몽협과 심정연이 서로 친하여 자주 왕래하면서 함께 역모하여 심정연을 장수로 삼고, 강몽협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거사를 모의하였습니다. 사막동(沙幕洞)에서 소를 잡아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향하고자 하여 60여 인을 모아 배에 싣고 가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하므로, 강몽협에게 형신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심정연과 윤혜가 나라를 원망하여 반역을 하였는데 신이 나라를 원망하는 놈들과 서로 친하여 흉언에 참여하였으니, 이는 신이 죽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미 소를 잡아 군사를 먹이고, 화적(火賊)이 되어 춘천부(春川府)를 공격하여 군기(軍器)를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흉서의 글 첫머리는 신이 ‘상서우(上書于)’라는 세 글자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강몽협에게 형신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신이 심정연·윤혜 등과 함께 주무하여 서로 결탁하고 함께 흉모를 하였고, 또 흉언에 참여하였습니다."
하고, 대역에 동참한 것으로 지만(遲晩)해 정형(正刑)과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강몽협의 아들 강학수(姜鶴壽) 역시 심정연과 함께 장옥(場屋)에 들어갔기 때문에 국문을 받다가 장폐하였다. 강몽협의 사촌 아우 강몽상(姜夢相) 역시 대역에 동참한 것으로 지만하여 정형하였다.

 

5월 9일 임오

박기채(朴起采)를 장령으로, 유한소(兪漢蕭)를 헌납으로, 민백상(閔百祥)을 전라도 관찰사로, 이종백(李宗白)을 경기 관찰사로, 이방수(李邦綏)를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민백상은 바야흐로 경기 관찰사를 맡고 있었는데,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그가 재능을 갖추고 있어 호남의 방백(方伯)에 합당하다고 천거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면서 이익보(李益輔)를 동의금으로 제수하여 유명두(柳明斗)를 형신하였다. 유명두가 공초하기를,
"윤혜와 심정연이 함께 역모하였고, 이하징(李夏徵)과 윤지 역시 함께 들어갔는데, 윤혜가 또한 신의 아들을 몰아넣으려고 하였습니다."
하고, 다시 유명두를 형추하니, 공초하기를,
"이하징이 남쪽 수령이 되어 윤지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올라오고자 하였으며, 양식과 군기는 나주에서 가져오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하징이 일찍이 춘천에 있었기 때문에 춘천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유명두에게 형신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심정연과 윤혜가 함께 흉서를 만들었는데, 심정연이 짓고 윤혜가 쓴 것입니다. 심정연과 윤혜가 항상 말하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을 하지 못하니,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번 과거에 심정연이 흉서를 투서해 그 뜻을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또 형신을 가하자 얼마 후 물고되었다. 유명두의 아들 유봉린(柳鳳麟)에게 여러 차례 형신을 가하니, 정상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것으로 지만하여 정형하였는데, 유봉린은 매우 허망하여 이끌어 댄 것에 무고(誣告)가 많았다고 한다.

 

5월 10일 계미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여 김도성(金道成) 등을 신문하였는데, 김도성은 바로 심정연이 고한 바 역적 김일경의 종손이다.

 

하교하기를,
"죄인 최수인(崔守仁)은 심정연의 시지(試紙)가 입장(入場)하기 전에 대신 베꼈는데, 그가 비록 무상하기는 하나 전효순(全孝舜)을 이미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니, 서로 다를 수가 없다. 단천부(端川府)로 정배하라."
하니, 대사간 윤동도(尹東度), 지평 이수훈(李壽勛)이 다시 엄중히 국문을 더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개 최수인은 심정연을 위해서 그 글 첫머리를 입장하기 전에 대신 썼으나 그 뒷면의 흉모를 알지 못했던 자였다. 윤동도가 말하기를,
"죄인 김도성(金道成)의 수색 문서 가운데 진주(晉州)에 사는 최기진(崔基晉)이란 자가 자칭 김도성의 문생(門生)이라고 하면서 김도성에게 편지를 썼는데 입설(立雪)167)  의 말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먼 고을의 인심이 비록 우매하다고는 하지만 역적 김일경에게 배운 유얼(遺孼)과 감히 사생(師生) 사이로 일컬은 것도 이미 통분스럽고 놀라운데 정문(程門)168)  의 일까지 끌어다 비유했으니, 더욱 극도로 놀랍습니다. 이처럼 엄중히 제방(隄防)하는 날을 당하여 이런 무리는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먼 지방의 인심으로 하여금 모두 역얼(逆孼)은 서로 가까이 할 수 없음을 알게 해야 합니다. 신은 최기진을 마땅히 먼 곳으로 정배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11일 갑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니, 역적 김도성이 복주(伏誅) 되었다. 김도성을 형신하니, 김도성이 공초하기를,
"신은 심정연과 서로 알아서 함께 흉서를 만들었는데, 흉서 가운데 제일 부도(不道)한 말이 신에게서 나왔으니, 실로 신이 주장한 것입니다. 심정연의 시권(試券)에 이르러서는 올봄 동가(動駕) 때에 심정연이 이것을 상소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이번 과거에서 시권에 써서 올린 것입니다."
하였다. 김도성에게 형신을 가하니, 공초하기를,
"흉서 가운데 조정을 무함하는 말이 많이 있는데, 그 초본(草本)을 신이 이교항(二橋項)의 심정연이 기거하고 있는 여관 주인 집에서 보고 신이 흉서 가운데 더 보태어 쓴 것이 있었습니다. 심정연은 신이 역적 집안의 사람이기 때문에 와서 말한 것입니다. 또 신치운(申致雲)도 동참하였는데, 대개 심정연이 힘이 있기 때문에 주장한 것이며, 신치운은 비록 글을 짓지는 않았으나 함께 상의하였습니다. 신은 갑진년169)                   이전부터 신치운과 서로 알았으며, 윤혜(尹惠) 역시 흉서를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흉서를 2월 동가(動駕) 때 상언(上言)하는 가운데 바치고자 하였으나 마침 윤지의 일이 급해 미처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함께 흉서를 만든 대역(大逆)으로써 지만하니, 정형(正刑)과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명하기를,
"죄인 이범석(李範錫)·윤상익(尹尙益)·윤상호(尹尙浩)를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범석은 바로 강몽협(姜夢協)의 매부(妹夫)이며, 윤상익과 윤상호는 바로 유명두(柳明斗)가 끌어들였다가 문득 거짓으로 공초하였다고 자복하였기 때문이었다. 장령 이세태(李世泰)가 청하기를,
"이범석을 그대로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은 물을 만한 단서가 없으니, 쟁집(爭執)하지 말며, 또 사단을 일으키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윤동도가 말하기를,
"윤상익과 윤상호는 윤수(尹邃)의 아들이며, 윤상백(尹尙白)의 종제요, 이하징(李夏徵)의 생질로 이미 국옥(鞫獄)에 들었습니다. 처지가 그와 같은데 정절(情節)을 따지지 않았고, 완전히 석방할 수 없으니, 마땅히 섬에 유배하는 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령 이세태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정배한 죄인 최수인(崔守仁)은 역적 심정연의 글을 베낀 자로 평상시 친밀했던 정상이 남김없이 탄로났으니, 청컨대 대조께 품하여 최수인을 정배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다시 엄중히 신문을 가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따르지 않겠다. 최수인의 일은 진달한 바가 비록 옳으나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5월 12일 을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여 심성사(沈聖泗)와 조동성(趙東星)을 섬에 유배하였다. 심 성사는 유봉린(柳鳳麟)이 고하였는데, 유봉린이 문득 무고하였다고 자복하여 임금이 백방(白放)하려고 하였다. 그의 문서 가운데 호적이 있었는데 그의 외조 역적 민암(閔黯)을 급제로 써 놓아 임금이 무엄하다고 하교하여 종성부(鍾城府)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조동성은 역적 심정연과 친한 것으로 붙잡아 와 여러 차례 형신을 가하였다. 별다른 단서는 없었으나 책궤에 어제(御製) 한 장이 있었는데, 어지럽게 비점(批點)이 찍혀 있었다. 조동성이 처음에는 그의 아우를 핑계했으나 그 근본을 끝까지 따지니 바로 그의 13세 된 아이 조문복(趙文福)의 소행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동성은 그의 아들만 사랑할 줄 알았지 그 아비의 아들을 사랑할 줄을 모른다. 아들이 일률(一律)을 범하였는데, 동생에게 돌리려고 하였으니, 어찌 심히 무상하지 않겠는가?"
하고, 남쪽 연해(沿海)로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조문복은 나이가 어리다는 것으로써 일률을 감하여 임피현(臨陂縣)으로 정배하였다. 대사간 윤동도가 심성사와 조동성의 율이 너무 가볍다 하여 쟁집하니, 고쳐 명하기를,
"심성사는 거제부 섬에 유배하고, 조동성은 지도(智島)로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이정황(李廷煌)이 김일경의 정자를 사들인 것으로써 방금 스스로 와서 심문에 응하여 신이 그 곡절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그 정자는 이정황의 선산(先山) 안에 있어 다른 사람이 차지할 수 없는 땅인데, 사위에게로 넘어가 마침내 역적 김일경의 소유가 되고 이에 이정황의 집안에서는 매양 분통해 하였는데, 그것을 적산(籍産)하는 때에 이르러 호조에서 사들였다고 합니다. 이는 본주인에게로 돌아간 것이어서 다른 백성이 사들인 것과는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분간(分揀)하여 풀어주도록 명하였다.

 

명하기를,
"강원·전라·경상·함경·경기의 다섯 도의 감사는 사민(士民)을 효유(曉諭)하여 안정시키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난역(亂逆)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어찌 금년과 같은 것이 있었겠는가? 역적 이하징(李夏徵)·역적 윤지(尹志)·역적 윤광철(尹光哲)·역적 박찬신(朴纘新)·역적 심정연(沈鼎衍)은 이미 왕법(王法)을 바루어 난적이 거의 징계되었다. 그러나 역적 심정연·역적 윤혜·역적 김도성은 지난 사첩에 없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번 이하징과 윤지가 나온 후 도신에게 하유하여 안정시키도록 하였었다. 이제 심정연과 윤혜 때문에 관동의 춘천이 거의 호남의 나주와 같게 되어 체포함이 온 도에 두루 미쳐 우리 민심(民心)을 동요시켰다. 지금은 체포가 이미 끝났으니, 도신에게 하유하여 호남의 예에 의해 친히 본부에 가서 효유하고 진정시키도록 하라. 이로 인하여 호남 역시 체포 및 정배한 자가 있었고, 영남과 북도(北道) 역시 그러하였는데, 이는 응당 연좌시켜야 할 무리들로서 본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을 세 도의 도신으로 하여금 일체로 도내에 효유하게 하라. 경기에 이르러서는 폐해를 입음이 더욱 심하였으니, 경기의 방백에게 분부하여 마음을 붙여 안정시켜서 내가 날마다 장전(帳殿)에서 피곤한 중에도 백성을 위하는 권권(眷眷)한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 훈련 대장 홍봉한(洪鳳漢) 등이 임금 앞에서 병권(兵權)을 힘껏 사양하였는데, 대개 심정연의 글 가운데 조정에서 임용한 신하들을 두루 들먹였는데 말이 아주 헤아리기 어려웠었다. 그 가운데 홍봉한에게 미친 말이 더욱 심하였고, 또 그의 처지가 특별함이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위로해 유시하였다.

 

이종성(李宗城)과 김성응(金聖應)을 풀어주도록 명하였는데, 좌의정 김상로의 진달에 의한 것이었다.

 

5월 13일 병술

대신을 보내어 종묘에 토역(討逆)을 고하게 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반교(頒敎)하였는데,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법망(法網)을 높이 매달아 놓고 이미 의리의 근본을 밝혔는데, 난역(亂逆)이 겹쳐 나와 다시 징토하는 법을 써서 한 꿰미에 서로 연달아서 세 번이나 고하게 되었다. 내가 임어한 이후 매양 관대함을 앞세우고 천지가 만물을 생성시키는 인(仁)을 본받아 우선 효경(梟獍)의 무리를 용서하였으나, 춘추(春秋)의 토적(討賊)하는 의리를 잡아 마침내 경예(鯨鯢)170)  에게 주륙(誅戮)을 행하였다. 상형(常刑)을 쾌히 베풀어 분위기가 맑게 개이기를 기다렸는데, 흉악한 모의가 더욱 함부로 나와서 다시 추악한 무리가 날뛰게 되었다. 역적 심정연·윤혜·김도성은 혹 김일경과 윤지의 지친이거나 혹은 심성연·심익연과 한 어미의 형제로 당을 맺어 난리를 꾸몄는데, 어찌 수삼 명만 함께 하였겠는가? 익명의 투서는 또 천만고에 없던 바로서 방자하게 흉악하고 사나운 부도(不道)의 말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훈척(勳戚)과 의지할 만한 신하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니, 아! 참혹하다. 찾아 기록하여 밝혀진 아주 패악한 죄는 뼈에 사무치고 놀란 마음을 어찌 감당하겠으며, 때를 엿보면서 망측한 모의를 쌓아오다가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범하려 했다. 강몽협(姜夢協)·강몽상(姜夢相)·유봉린(柳鳳麟)은 심정연과 윤혜의 친밀한 친구가 되길 달갑게 여겨 차마 이웅좌(李熊佐)·이인좌(李麟佐)의 역모를 뒤따라 교활한 계책을 몰래 품어 큰 고을의 기계의 잇점을 엿보아 여러 추악한 무리를 널리 모아 깊은 산 바위 사이에다 수장(首將)과 부장(副將)의 명칭을 두어 아주 긴밀하게 배포시켜 큰 고을과 작은 고을의 대중을 아울러 깊이 췌마(揣摩)171)  하였다. 술과 고기를 즐비하게 준비해서 군사를 먹인 자취가 다 드러났고, 자웅(雌雄)이 창화(倡和)하여 주무한 형적이 드러났다. 대개 윤지·이징하·박찬신·심정연의 무리가 마음이 서로 관통되었기 때문에 모의하여 지시하는 즈음에 맥락이 서로 통하였다. 김요백(金耀白)·김요채(金耀采)의 비밀스런 자취에 이르러서는 본디 거괴(渠魁)의 여얼(餘孼)로서 근교에 살면서 드나들었으니, 이것이 참으로 무슨 마음이었는가? 극심한 역적에게 붙어 뒤따랐으니, 그 형적을 감추기가 어렵다. 저 요적(妖賊) 이성술(李聖述)의 작용 역시 흉소(凶疏)의 파류(派流)로 왕법을 무시하고, 역적을 옹호하였다. 신하로서 감히 이미 지워버린 묵적(墨籍)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호적에다 쓰고, 몰래 이미 삭제한 벼슬을 그냥두어 천백 가지 괴변이 번갈아 생겼으니,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사물의 법칙이 어두워져 내가 실로 가슴 아프게 여기며, 글로도 다 쓸 수 없고, 말로도 끝까지 할 수가 없어 한 장에 다 쓰기가 어렵다. 사람이 반드시 죽이고 귀신도 반드시 죽이려 드니, 법을 어찌 피하겠는가? 그밖에 갖가지로 관련된 자들은 하나하나 숫자를 헤아릴 겨를이 없다. 이미 역적 심정연·윤혜·김도성·강몽협·강몽상·유봉린 및 김요백·김요채·이성술을 모두 법에 의해 정형(正刑)하여 간사한 정상과 역절(逆節)을 숨기어 도망하지 못하고, 난령 요요(亂領妖腰)가 모두 법의 처벌을 받아 인심이 거의 모두가 두려움을 알게 되고 세도(世道)가 평온하게 되고 위기가 안정된 것은 실로 천지와 조종이 묵묵히 도와준 데 힘입은 것이다. 큰 아름다움이 이에 이르러 나라의 운명이 영원히 융성할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정사를 혁신하고 옛풍속을 혁신하는 것은 풍우(風雨)와 상로(霜露)의 모든 가르침에 스스로 관용과 준엄의 마땅함이 있으며, 귀신과 일월(日月)이 비추어 보고 있으니, 역순(逆順)의 구별을 어찌 어둡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자세히 알라."
하였다. 【예문 제학 조명리(趙明履)가 지어 올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0책 8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77면
【분류】왕실(王室) / 변란(變亂) / 사법(司法) / 어문학(語文學)


[註 170] 경예(鯨鯢) : 수코래와 암코래. 고래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므로 악인의 우두머리를 비유하는 말로 쓰임.[註 171] 췌마(揣摩) : 자기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림.

 

지평 이수훈(李壽勛)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죄인 조동성(趙東星)은 심정연과 서로 친함이 난만하여 마치 형제와 같았다는 말이 이미 심정연의 조카 심내복(沈來復)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역적 심정연의 음흉한 정절을 마땅히 모르는 것이 없을 터인데, 미처 끝까지 조사하지 못하고 지레 먼저 섬에 정배하니 국문하는 체통을 엄히 하는 방도가 크게 아닙니다. 청컨대 조동성을 대조(大朝)께 앙품하여 다시 엄중히 국문을 가해 기필코 실정을 알아 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따르지 않겠다. 끝의 일은 진달한 바가 비록 옳으나, 내가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5월 14일 정해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고 하교하기를,
"죄인 홍계문(洪啓文)·강덕준(姜德俊)·박경응(朴慶應)은 강몽협(姜夢協)의 초사에서 나왔으나 달리 증거가 없으니, 참작하여 사형을 감해서 모두 섬으로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이수훈(李壽勛), 정언 정광한(鄭光漢)이 소회를 말하기를,
"홍계문과 강덕준·박경응은 이미 대역적인 강몽협의 초사에서 나왔고,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하겠다는 말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그 정절(情節)이 참으로 매우 흉참합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홍계문·강덕준·박경응에게 마땅히 다시 엄중한 국문을 가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죄인 심내복(沈來復)은 응당 연좌하는 율로써 거제부에 안치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심내복은 바로 심정연의 조카이며, 심익연(沈益衍)의 아들이다. 지평 이수훈, 정언 정광한 등이 쟁집하니, 정의(旌義)로 정배하라고 명을 고쳤다.

 

하교하기를,
"죄인 이광신(李光臣)은 김도성(金道成)에게 홍천(洪川)으로 내려가 학장(學長)을 하라고 권한 사람으로 아주 무엄하나 별다른 단서가 없으니, 종성부(鍾城府)로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역적 윤혜(尹惠)의 형 윤근(尹懃)의 책궤 가운데 종의 이름으로 된 소장이 있었는데, ‘감궐(減闕)’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대개 윤근이 칠원현(漆原縣)에 정배되었는데, 죄인의 점고를 받을 때 노예로 대신해서 관아에 올린 것이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신하된 자가 역적 윤취상(尹就商)에게 응당 연좌된 자에게 대신 점고를 허락하였으니, 해당 현감 김붕운(金鵬運)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국문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제방(隄防)이 엄하지 못해서 역적 윤취상에게 응당 연좌된 사람에게 감히 종을 대신해서 정소(呈訴)하게 해 감궐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무엄한 소치에 말미암아서이다. 이후에 만약 다시 이렇게 하면 마땅히 해당 수령을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햇수를 한정하지 않고 섬으로 유배할 것이다. 이런 죄인이 만약 청포(靑袍)를 입고 조관(朝官)이라고 칭하는 일이 있으면 해당 수령은 마땅히 역적을 옹호한 율을 시행할 것이니, 일체로 엄칙하라. 해당 도신이 만약 즉시 장문(狀聞)하지 않으면 역시 마땅히 무거운 율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괴산(槐山)의 사인(士人) 이현보(李顯輔)는 무신년172)  의 역변을 당해서 격문(檄文)을 전하고, 의병을 일으켜 역순(逆順)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포상을 청하니, 임금이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역적 김일경·역적 윤지·역적 윤혜·역적 심정연의 종자(種子)는 가깝고 먼 것과 나이가 차고 차지 않음을 막론하고 모두 역적 민암(閔黯)의 예에 의해 제주목에 나누어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전 판부사 이종성(李宗城)이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미 알았으니, 첩(牒)을 주어 서용하고 김성응(金聖應) 역시 일체로 서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을 판중추부사로, 임시척(任時倜)을 충청 수사로, 김시찬(金時粲)을 대사간으로, 이경철(李景喆)을 통제사로 삼았다.

 

5월 15일 무자

의금부에 추국을 명하였다.

 

정언 정광한(鄭光漢)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죄인 홍계문(洪啓文)·강덕준(姜德俊)·박경응(朴慶應)은 대조께 품하여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인하여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소서. 죄인 심내복(沈來復)은 바로 역적 심정연의 친조카로서 역적 심정연이 과거 때 와서 머문 정상이 이미 백육창(白六昌)의 초사에서 나와 응당 연좌되는 율만 시행할 수 없으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안치한 죄인 심내복은 대조께 품하여 발배(發配)하라는 명을 환수하고, 인하여 엄중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소서. 윤수(尹邃)에 대한 형이 잘못되어 인심이 지금까지 분개해 하고 있습니다. 윤상익(尹尙益)·윤상호(尹尙浩)는 윤수의 아들로 이번 옥정(獄情)에 비록 별로 관련된 바가 없다고는 하나 어지러움이 싹트는 염려를 엄하게 제방하는 도리에 결코 뒤섞어서 온전히 풀어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윤상익과 윤상호를 빨리 절도로 정배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따르지 않겠다. 끝의 일은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5월 16일 기축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는데, 역적 김인제(金寅濟)·이준(李埈)·이전(李佺)을 복주(伏誅)하였다. 김인제는 역적 김일경의 본생(本生) 조카로서, 여러 차례 형신을 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초하기를,
"세교(世交) 집안이기 때문에 합동(蛤洞)에 사는 이대운(李大運) 및 양천(陽川)에 사는 여광학(呂光學)과 지금까지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자(字)를 부르면서 ‘너’라고 부릅니다. 이대운은 바로 이준의 아들인데 신이 발배(發配)할 때 이준 부자가 와서 보고는 말하기를, ‘처음에는 출계(出繼)한 것으로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연좌시키니, 이는 법밖의 일이다.’라고 하고, 여광학은 신이 불쌍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신이 발배할 때에 여광학이 말하기를, ‘너의 사촌형제가 4, 5인만 겨우 남아 있는데 이제 정배되어 김가(金哥)는 망하였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라고 하였으며, 이준은 항상 역적 김일경을 아동(丫洞)이라고 불렀습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신이 발배할 때에 이준이 편지 하나를 써서 신으로 하여금 신의 형에게 전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과연 가지고 갔으며, 이준이 새벽에 말을 세내어 와서 이별하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애매하게 정배된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이준의 말을 듣건대, 여광학의 아들 여선여(呂善餘)가 말하기를, ‘이번 소하(疏下)에 든 여러 역적은 적몰(籍沒)함이 너무 지나치다.’라는 등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발계(發啓)한 여러 신하들에 이르러서는 욕하였다고도 하고 죽여야 한다고도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연달아 형을 시행하니, 승복하면서 공초하기를,
"나라에서 신의 집안을 이에 이르도록 하였기 때문에 신이 항상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이준 등과 함께 체결하여 왕래하면서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고 함께 불궤(不軌)한 모의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하징(李夏徵)과 함께 일을 하고자 하였는데, 이하징이 복법(伏法)되어 미처 계책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비록 친구가 적지만 이준은 친구가 많기 때문에 신이 이준과 함께 모의하여 8월 안에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이준이 말하기를, ‘매양 신치운(申致雲) 집에 가서 함께 역모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역적 김일경의 조카로서 섬으로 유배되었기 때문에 이준이 와서 신을 보고 서로 수작하여 말하기를, ‘이번의 처분은 바로 법 밖의 일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저절로 방환(放還)될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들은 모두 음흉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모역에 동참한 것으로 지만(遲晩)하여 정형(正刑)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이준을 형신(刑訊)하기를,
"이번 대처분(大處分)을 한 후에 역적 김일경의 종자에게 비록 역적 이괄(李适)의 율을 시행하였으나 그 누가 감히 지나치다고 하겠는가? 그런데도 감히 법 밖의 일이라 하였는가? 무신년 이후 여러 역적의 음흉한 계책은 강도(强盜)의 무리를 모집한 것에 불과한데 네 책궤 가운데 강도 방언(强盜方言)이란 제목이 있었으니, 더욱 망측하다. 찾아낸 장물(贓物)이 이처럼 낭자하니, 너에게 묻지 않고 누구에게 하겠는가?"
하니, 이준이 공초하기를,
"김인제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서 발배할 때에 가서 보아 역적의 종자와 서로 사귄 것으로써 지만(遲晩)합니다. 이 편지는 김인제의 형에게 준 것인데 ‘말하지 않는 가운데 운운(云云)했다.’는 말은 우연히 쓴 것입니다."
하니, 형신을 가하여 직초(直招)로써 결안(結案)한 후 하교하기를,
"죄인 이준은 감히 역적 김일경의 조카이며 김요경(金堯鏡)의 아들과 친밀하게 자라 골육과 다름이 없는데, 응당 연좌되어 정배될 때 방자하게 위문(慰問)하면서 법 밖이라고 하고, 또한 ‘저절로 방환될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요경의 아들 김유제(金有濟)에게는 편지로 위문하였는데, 그 가운데 ‘말하지 않는 가운데[不言中]’라는 세 자는 말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저절로 방환될 때가 있을 것이다.[自有放時]’라는 네 자는 말의 맥락이 일관된다. 또 이번의 대처분 후에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의 소하(疏下)에 든 역적에게 역률을 추시(追施)한 것에 불만의 마음을 품고 여선여(呂善餘)의 무리와 함께 방자하게 수작한 정상은 김인제와 여선여가 이미 낱낱이 직초하였고, 면질 때에도 감히 스스로 감추지 못하고 그 역시 지만하였다. 그리고 책궤의 책자 가운데 강도 방언(强盜方言)이라는 것은 더욱 음참(陰慘)하다. 이러할 때 엄중히 제방하고 의리를 엄격하게 하며 국법을 바루는 도리에 있어서 이미 받은 결안(結案)으로 처단할 수 없으니, 전지(傳旨)로써 때를 기다리지 말고 빨리 나라의 형을 바루어 해동(海東)의 신하로 하여금 모두 군신(君臣)이 있음을 알게 하라."
하였다. 이전(李佺)을 신문하니, 이전이 공초하기를,
"신은 과연 이준과 서로 친한데, 이준은 평상시 편벽된 논의가 매우 심하였습니다. 여광학(呂光學)은 과연 알고 있으며, 여선여가 날마다 이준의 집을 왕래하였기 때문에 만나 보았습니다. 여가(呂哥)가 왕래할 때에 이준이 매양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하여 신도 함께 나라를 원망하였습니다. 조정의 동정과 정사(政事)를 매양 서로 헐뜯어 논의했는데, 이준이 또 말하기를, ‘임금이 긴요하지 않은 거둥을 한다.’라고 하여, 신이 어느 곳 거둥을 말하느냐고 묻자 이준이 처음에는 송현궁(松峴宮)을 가리키다가 나중에 가서는 육상궁(毓祥宮)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하교하기를,
"죄인 이전은 장전(帳殿)에서 친문하는데, 함부로 망측하고 부도(不道)한 말을 하였다. 병조 판서로 하여금 우선 남문 밖에서 사지를 찢어 효시하는 것 및 역률을 한결같이 역적 윤혜(尹惠)의 예에 의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정법(正法)한 죄인 이준은 비록 본 사건의 일로 말하자면 마땅히 역률을 시행해야 하였으나 참작하여 단지 역적을 옹호한 율만 시행하였었다. 지금 역적 이전의 망측하고 부도한 말로 보건대, 그 역적은 이준이니, 해부로 하여금 빨리 대역률(大逆律)을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 김시찬(金時粲)과 헌납 이수훈(李壽勛)을 삭직하여 문외 출송하였는데, 이준에게 역률을 시행하기를 청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광충(鄭光忠)을 대사간으로, 원인손(元仁孫)을 지평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정광충 등이 아뢰기를,
"역적 윤취상(尹就商)과 역적 김일경은 바로 예전에도 없던 역적인데, 윤취상의 조카를 위해 점(占)을 친 황윤(黃潤) 귀(龜)라는 사람은 이미 엄중히 형문하여 탐라로 정배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그러니 김일경의 조카에게 점을 가르친 조인(趙璘)이라는 사람 역시 일체로 엄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조인을 황윤귀의 예에 의해 엄중히 형문한 후에 탐라로 정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안치한 죄인 윤광찬(尹光纘)은 목호룡(睦虎龍)의 위훈(僞勳) 때 증직한 관작을 그의 장적(帳籍)에 썼으니, 그 마음을 둔 바가 이성술(李聖述)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이성술은 이미 방형(邦刑)으로 복주되었습니다. 그런데 윤광찬만은 아직껏 숨을 쉬고 있어서 형이 잘못됨이 크니, 청컨대 윤광찬은 빨리 대신(臺臣)의 진달을 윤허하시어 국청을 설치해 엄중히 신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학(李壆)173)  을 멀리 찬축하라는 부달(府達)은 실로 온 나라의 공공(共公)의 논의에서 나온 것인데, 전 집의 조경(趙擎)은 공의(公議)를 무시하고 갑자기 제 마음대로 정계하여 일이 매우 무엄하니, 청컨대 조경은 대망(臺望)에서 영원히 삭간(削刊)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역적 김도성(金道成)은 바로 역적 김일경의 친조카이니 누군들 감히 친밀하게 지내겠습니까만, 사인(士人) 서철수(徐哲修)·어석기(魚錫耆)·정석린(鄭錫麟)·한사급(韓師伋)의 아들은 난만(爛漫)하게 뒤따라 모시고 다니면서 여러 해 동안 함께 연마(硏磨)한 것도 이미 놀랍고 분통한데, 더군다나 역적 김도성이 이미 복법(伏法)되었으니 결코 멀리 정배하는 데에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서철수 등 네 사람은 모두 절도(絶島)로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원인손이 아뢰기를,
"이증(李增)174)  이 지은 죄는 권혜(權嵆)·권집(權䌖)과 한가지인데, 지난해에 지평 박성원(朴盛源)의 피혐하는 말 가운데 끊임없이 혈성(血誠)을 바친 말이 있어 듣기에 놀라웠습니다. 학(壆)의 일을 정달(停達)한 대신(臺臣)을 이미 영원히 삭간할 것을 청하였으니, 박성원 역시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전 지평 박성원은 삼사(三司)의 망(望)에서 영원히 삭간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광충이 또 아뢰기를,
"역적 유봉휘(柳鳳輝)의 한 상소가 오늘날 난역의 근본이 되었습니다. 유봉휘의 당질(堂姪) 유수원(柳壽垣)은 그 상소를 대신 베꼈고 신축년175)  ·임인년176)   사이의 흉패한 장주(章奏)에 참섭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엄중히 징토하는 날을 당해서 그로 하여금 연곡(輦轂) 아래에서 숨을 쉬게 할 수 없으니, 청컨대 전 헌납 유수원을 절도로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광충과 원인손이 아뢰기를,
"지난번 권혜와 권집은 지난 사첩에 없던 요악한 역적이었는데,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증(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권혜·권집에게 역률을 추시(追施)하는 날을 당하여 증의 동생 학(壆)은 하루라도 연곡 아래에서 숨을 쉬게 하여 무궁한 근심을 끼치게 할 수 없으니, 청컨대 학을 절도(絶島)로 안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광충이 이르기를,
"서철수 등의 죄는 멀리 정배하는 데에 그칠 수는 없는 것인데, 대신(臺臣)의 청한 바 의율(擬律)함에 실로 너무 가벼운 잘못이 있습니다. 청컨대 그날 입시한 헌신(憲臣)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교리 홍명한(洪名漢)이 말하기를,
"홍천(洪川)에 사는 정성린(鄭聖麟)은 비록 시골 사람이기는 하나 이미 역적 김도성(金道成)이 역적 김일경의 종손인 줄을 알면서도 이에 감히 데려다 살게 하면서 잘 대접해 학장(學長)을 삼고 매번 과거 때마다 짐바리를 싣고 와 경향(京鄕)을 드나들어 그 친밀하게 사귄 자취가 남김없이 탄로났으니, 엄중히 제방하고 말속(末俗)에 힘쓰게 하는 도리에 있어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정성린을 빨리 먼 곳으로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준(李埈)과 이전(李佺) 등이 이미 복주(伏誅)되었는데, 임금이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말하기를,
"연달아 뽑아 내어 다스렸는데 조금도 징계되지 않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큰 소굴이 있어서 역적 무리들이 이를 믿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에는 이 무리들이 반드시 격동하여 흉악한 꾀가 더욱 급할 것이니, 내가 반드시 그 소굴을 찾아 낸 후에야 편히 잠잘 수가 있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죄인 조영항(趙榮恒)은 역적 이전(李佺)을 그 아들의 학장(學長)으로 삼았으니, 예사로 처리할 수 없다. 정의현(旌義縣)으로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7일 경인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여, 여광학(呂光學)·여선여(呂善餘)·조윤(趙棆) 등을 신문하였는데, 여선여는 바로 여광학의 아들이다.

 

죄인 이대운(李大運)은 역적 이준의 아들로 연좌되어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장령 박기채(朴起采)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18일 신묘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조윤(趙棆)·정권(鄭權) 등을 신문하였다.

 

죄인 김요덕(金耀德)이 물고되었는데, 김요덕은 김일경의 종손이다. 김일경의 종자(從子) 김유제(金有濟)·김인제(金寅濟)·김덕제(金德濟)·김홍제(金弘濟)·김대재(金大再)·김우해(金佑海)와 종손 김천주(金天柱)·김요백(金耀白)·김요채(金耀采)·김요옥(金耀玉)·김요덕(金耀德) 등은 심정연(沈鼎衍)의 초사 때문에 모두 국문을 받았는데, 김인제는 승관(承款)하여 정형(正刑)되었고, 김요백·김요채는 역적 윤혜(尹惠)와 함께 효시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장(杖)을 맞다 죽었다.

 

5월 19일 임진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여 이세현(李世鉉)을 신문하였다. 이세현은 정권(鄭權)·신치운(申致雲) 등과 친밀하게 주무(綢繆)한 형적이 있어서 여러 번 형신을 가하였다.

 

이영휘(李永暉)를 특별히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는데, 이영휘는 권집(權䌖)의 생질이다. 임금이 역적과 인척인 것 때문에 사람을 버리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영휘를 발탁하여 쓴 것이다.

 

홍명한(洪名漢)을 부교리로, 홍양한(洪良漢)을 수찬으로, 박도원(朴道源)을 부수찬으로, 이창임(李昌任)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간 정광충이 소회(所懷)를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족속은 사람들이 피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하물며 더불어 결혼을 하겠습니까? 영남의 신겸모(申謙模)는 김일경의 친조카 김팽명(金彭命)을 역적 김일경이 복법 된 후에 그의 매부로 삼았습니다. 그에게 만약 조금이라도 엄외(嚴畏)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본도의 도신으로 하여금 그 혼사를 주관한 가장(家長)을 조사해 내어 엄형하여 정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광충이 말하기를,
"근래에 무신들이 체통을 전혀 몰라서 어제 한 비국 당상이 의막(依幕)에 앉아 있었는데 부총관 김형로(金亨魯)가 통지(通知)하지 않고서 곧바로 신을 벗기를 조금도 거리낌없이 하였다고 합니다. 청컨대 김형로를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 역시 평상시 무신에게 사정을 보아 용서해 준 소치이니, 비국 당상 이익보(李益輔)를 종중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0일 계사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여 역승(逆僧) 김창규(金暢奎)가 복주(伏誅)되었는데, 김창규 역시 역적 김일경의 종자(從子)이다. 자취를 감추고 승려가 된 정상을 형신하여 물으니, 공초하기를,
"먹고 살 길이 없어 중이 되어 걸식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여러 차례 형신하니, 갑자기 소리치기를,
"어서 빨리 나를 죽이시오."
하니, 임금이 그 말이 흉패한 것으로 어영청에서 효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역적 김일경의 종자 김대재(金大再)는 비록 어리석어서 물을 것이 없으나, 만약 제주로 편배(編配)하면 또 장차 동종의 무리들을 만들 것을 걱정하였다. 좌의정 김상로가 포청에 부쳐 장문(杖問)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죄가 투서(投書)하여 모역(謀逆)한 데에 관련된 자 이외에는 죽음을 한정하여 장문(杖問)함은 미안합니다."
하니, 임금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신치운(申致雲)을 신문하였다. 처음에 김도성(金道成)이 공초하기를,
"심정연(沈鼎衍)의 흉서는 실로 신치운과 함께 의논하여 한 것입니다."
하고, 또 역적 이준(李埈)의 문서 가운데도 신치운을 칭찬하는 말이 많이 있어 이때에 이르러 형신하니, 공초하기를,
"윤상백(尹尙白)을 끊어버리지 못한 것이 신의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죄를 씻어줌이 너 역시 지극하였다고 할 것이다. 네가 승지로 있었을 때 내가 늙은 것을 민망히 여겨 여러 해 동안 침체되었다는 하교까지 있었으니, 마땅히 감읍(感泣)했어야 했는데도 너는 얼굴도 꿈쩍하지 않아 내가 그때에 이미 네 마음을 알았었다."
하니, 신치운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177)  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다시 같은 당의 사람을 물으니, 공초하기를,
"신과 같은 마음으로 일한 자는 유봉휘(柳鳳輝)·박사집(朴師緝)·조재민(趙載敏)·이철보(李喆輔)입니다."
하니, 임금이 꾸짖기를,
"이철보는 네가 무고(誣告)한 것이다."
하고, 엄형하기를 명하니, 신치운이 이에 무고로 자복하였다. 대사간 정광충(鄭光忠)이 나아가 말하기를,
"조재민은 비록 우상과 가까운 친속이기는 하나 의논은 아주 다르며, 이철보는 신이 청컨대 백 사람의 말로 보장하겠습니다."
하고, 정광충이 또 소회를 말하기를,
"역적 신치운의 흉언의 근본은 바로 역적 김일경입니다. 갑진년 처분 후에 복역(覆逆)한 승지와 옥당으로 살아 있는 자는 우선 절도(絶島)로 위리 안치하고, 이미 죽은 자는 마땅히 관직을 추탈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정광충의 말이 훌륭하다. 내가 ‘충(忠)’으로 사명(賜名)한 것이 헛일이 아니었다."
하고, 정광충에게 한 자급을 더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소론(少論)의 준론을 하는 자가 국문 초사에 연달아 나왔다. 이종성(李宗城)·박문수(朴文秀)·이철보(李喆輔) 등이 전후하여 더욱 많이 원인(援引)되었는데, 임금이 끝내 불문에 부치고 매양 고한 자를 엄형하여 무복(誣服)을 받아내고는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 벼슬한 신하를 만약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역적으로 의심한다면 그 누가 기꺼이 믿고 나를 섬기겠는가?"
하였다.

 

도승지 김선행(金善行)을 파직하고, 정홍순(鄭弘淳)을 도승지로 제수하였다. 김선행은 이영휘(李永暉)와 사사로운 혐의가 있어 의(義)를 끌어 글을 진달하였기 때문이었다.

 

판부사 이종성, 영성군 박문수가 이름이 국문 초사에서 나온 것으로써 대명하니, 임금이 소견하여 위유하였다.

 

5월 21일 갑오

역적 신치운(申致雲)이 복주되었다. 임금이 또 형을 가하도록 명하니, 신치운이 공초하기를,
"신과 같은 당에 또 이거원(李巨源)이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죄인 신치운은 장전(帳殿)에서 친히 하문했을 때에 감히 차마 무신년178)                   역적의 망측한 말을 다시 거론하였다. 이번 심정연의 흉서를 그가 주장하였다고 자복하였으니, 음참하고 부도한 말 역시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역률(逆律)로 정법(正法)하고 처노(妻孥)는 역적 이괄(李适)의 예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임금이 숭례문의 누각에 나아가 복주(伏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세도가 불행하여 난역(亂逆)이 거듭 일어나 아주 흉악하고 절패(絶悖)하였는데, 신치운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갑진년179)                           8월에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다 낫지를 않고, 수라(水剌)를 들기 싫어하는 징후가 점차 더했기 때문에 궁중에서 근심한 나머지 20일에 어주(御廚)에서 수라에 게장을 올렸었다. 이는 가을철 신미(新味)인데, 경묘께서 이 게장으로 수라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었다. 그후에 지나치게 많이 들었다는 말이 밖으로 전해지자 이유익(李有翼)과 박필현(朴弼顯)의 무리가 이를 가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말을 만들어 내고, 몰래 심유현(沈維賢)을 사주하여 전파시켰다. 또 이천해(李天海)를 꾀어 어가(御駕) 앞에서 난언(亂言)을 하게 하여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를 핍박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역적 신치운의 흉언의 근본인데, 게장에 대한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이천해 같은 흉역도 말하지 못한 바였다. 아! 통분스럽다. 그 역시 사람인데 차마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때 동조(東朝)께서 설사 게장을 보냈다 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예사 일이요, 더군다나 올린 바가 또 어주(御廚)에서 올린 것이겠는가? 오직 우리 동조의 인자한 덕은 우리 경묘와 전하를 돌보아 사랑하는 깊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경묘의 천성은 효심이 돈독하고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여, 어린 나이부터 우리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모시면서 밤낮으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임오년180)                           이후에는 또 인현 성모를 모시던 것으로써 우리 자성(慈聖)을 지성으로 받들어 애경(愛敬)을 다하였다. 즉위한 후에는 전하께서 진현(進見)할 때마다 기쁘고 사랑하는 뜻이 애연(藹然)하게 얼굴에 나타났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효제(孝悌)와 지성(至誠)이 천성이어서 정성을 바침이 성실하고 한결같아 한 때 잠시라도 늦추지 않았고, 삼가고 예를 갖춤이 자세하고 간곡해 역시 한 가지 일도 미진함이 없었으니, 옛사람이 말한 바, ‘효제(孝弟)가 신명(神明)에 통하였다.’라고 한 것은 우리 전하를 두고 한 말이다. 경묘께서 이미 후사가 없어서 위로 자성의 교책(敎冊)을 받들어 전하께서 세제(世弟)가 되었으니, 그 의리가 정대하고 주고받는 것이 광명(光明)하여 참으로 천지 사이에 내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質正)해도 의심이 없어 백세 후에라도 미혹됨이 없다. 그런데 저 흉당(凶黨)들이 우리 전하가 저위(儲位)를 잇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반드시 위란을 도모하고자 했기 때문에 흉패한 말로써 성궁(聖躬)을 욕한 것에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또 저위를 세워 대리시키라는 전교가 모두 우리 자성에게서 나왔는데도,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차마 이처럼 음참하고 망측한 말을 돌려가면서 서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신치운에게 이른 것이다. 그들이 우리 전하가 저위를 잇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전하가 숙묘의 아들이며 경묘의 아우로서 반드시 숙묘와 경묘의 뜻과 일을 계술(繼述)하게 되면 그들에게 불리해서이고, 그들이 우리 자성의 지극히 인자한 덕(德)을 무함함은 바로 경묘의 지극히 효성스런 덕을 무함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자성과 전하의 역신(逆臣)일 뿐만 아니라 실로 숙묘와 경묘의 역신인 것이니, 아! 통분스럽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신치운은 출신(出身)하는 처음에 김일경과 박필몽에게 아첨해 붙어 그들의 비호를 받아 박필몽이 사관(史官)의 천거를 주관하면서는 신치운을 말천(末薦)으로 하는 데에 이르렀다. 신치운은 성품이 본디 사납고 요망한데, 그가 대관(臺官)이 되자 선정(先正)을 더럽게 무함하여 사문(斯文)에 죄를 얻어 더욱 세상의 배척을 받았다. 마침내 마음에 차지 않고 원망하게 되어 몰래 다른 뜻을 쌓아 역얼(逆孼)이나 폐족(廢族)인 윤상백(尹尙白)·김도성(金道成)·심정연(沈鼎衍)의 무리와 역모를 체결하였으니, 윤상백이 공초한 바, ‘신치운이 불우하게도 세상에 쓰임 받지 못하게 되자 경상(卿相)을 도모하려고 했다.’고 하였다. 처음 국문을 받게 되자 거짓 풍(風)으로 말을 못하는 형상을 짓다가 다시 국문하기에 미쳐서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서는 이에 이천해의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언을 답습하여 그의 역심(逆心)을 드러내려 하였다. 처음 김일경과 박필몽이 감히 함부로 무핍(誣逼)하여 갑진년 전에 역모를 빚어낼 때에 이유익과 심유현이 흉언을 만들어 내어 갑진년 이후에 역적 이천해를 꾀었으니, 그 근본과 맥락이 본래 이러하였던 것이다. 신치운은 이미 김일경과 박필몽의 심복이요, 이유익·심유현과는 죽음을 함께 하기로 한 벗이었다. 그가 또 공초하기를, ‘유봉휘(柳鳳輝)와 마음이 같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신문을 받아 장차 죽게 되었을 즈음에 함부로 흉악을 부린 것에서 난역과 심술이 한 테두리 안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그가 이미 무신년에 통고문(通告文)을 찬진(撰進)할 때에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이제 천고에 없는 대역(大逆)으로서 스스로 천벌을 받게 되고, 효경(梟獍) 같은 성품과 시랑(豺狼)같은 마음은 본디 스스로 교화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어찌 이처럼 음참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역적이 또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0책 84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79면
【분류】사법(司法) / 변란(變亂) / 역사-사학(史學)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註 178]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179]              갑진년 : 1724 경종 4년.[註 180]              임오년 : 1702 숙종 28년.
사신(史臣)은 말한다."세도가 불행하여 난역(亂逆)이 거듭 일어나 아주 흉악하고 절패(絶悖)하였는데, 신치운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갑진년179)                           8월에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다 낫지를 않고, 수라(水剌)를 들기 싫어하는 징후가 점차 더했기 때문에 궁중에서 근심한 나머지 20일에 어주(御廚)에서 수라에 게장을 올렸었다. 이는 가을철 신미(新味)인데, 경묘께서 이 게장으로 수라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었다. 그후에 지나치게 많이 들었다는 말이 밖으로 전해지자 이유익(李有翼)과 박필현(朴弼顯)의 무리가 이를 가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말을 만들어 내고, 몰래 심유현(沈維賢)을 사주하여 전파시켰다. 또 이천해(李天海)를 꾀어 어가(御駕) 앞에서 난언(亂言)을 하게 하여 감히 말하지 못할 자리를 핍박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역적 신치운의 흉언의 근본인데, 게장에 대한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이천해 같은 흉역도 말하지 못한 바였다. 아! 통분스럽다. 그 역시 사람인데 차마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때 동조(東朝)께서 설사 게장을 보냈다 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예사 일이요, 더군다나 올린 바가 또 어주(御廚)에서 올린 것이겠는가? 오직 우리 동조의 인자한 덕은 우리 경묘와 전하를 돌보아 사랑하는 깊은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경묘의 천성은 효심이 돈독하고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여, 어린 나이부터 우리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모시면서 밤낮으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임오년180)                           이후에는 또 인현 성모를 모시던 것으로써 우리 자성(慈聖)을 지성으로 받들어 애경(愛敬)을 다하였다. 즉위한 후에는 전하께서 진현(進見)할 때마다 기쁘고 사랑하는 뜻이 애연(藹然)하게 얼굴에 나타났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효제(孝悌)와 지성(至誠)이 천성이어서 정성을 바침이 성실하고 한결같아 한 때 잠시라도 늦추지 않았고, 삼가고 예를 갖춤이 자세하고 간곡해 역시 한 가지 일도 미진함이 없었으니, 옛사람이 말한 바, ‘효제(孝弟)가 신명(神明)에 통하였다.’라고 한 것은 우리 전하를 두고 한 말이다. 경묘께서 이미 후사가 없어서 위로 자성의 교책(敎冊)을 받들어 전하께서 세제(世弟)가 되었으니, 그 의리가 정대하고 주고받는 것이 광명(光明)하여 참으로 천지 사이에 내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質正)해도 의심이 없어 백세 후에라도 미혹됨이 없다. 그런데 저 흉당(凶黨)들이 우리 전하가 저위(儲位)를 잇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반드시 위란을 도모하고자 했기 때문에 흉패한 말로써 성궁(聖躬)을 욕한 것에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또 저위를 세워 대리시키라는 전교가 모두 우리 자성에게서 나왔는데도,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차마 이처럼 음참하고 망측한 말을 돌려가면서 서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신치운에게 이른 것이다. 그들이 우리 전하가 저위를 잇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전하가 숙묘의 아들이며 경묘의 아우로서 반드시 숙묘와 경묘의 뜻과 일을 계술(繼述)하게 되면 그들에게 불리해서이고, 그들이 우리 자성의 지극히 인자한 덕(德)을 무함함은 바로 경묘의 지극히 효성스런 덕을 무함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자성과 전하의 역신(逆臣)일 뿐만 아니라 실로 숙묘와 경묘의 역신인 것이니, 아! 통분스럽다. 신은 삼가 살펴보건대, 신치운은 출신(出身)하는 처음에 김일경과 박필몽에게 아첨해 붙어 그들의 비호를 받아 박필몽이 사관(史官)의 천거를 주관하면서는 신치운을 말천(末薦)으로 하는 데에 이르렀다. 신치운은 성품이 본디 사납고 요망한데, 그가 대관(臺官)이 되자 선정(先正)을 더럽게 무함하여 사문(斯文)에 죄를 얻어 더욱 세상의 배척을 받았다. 마침내 마음에 차지 않고 원망하게 되어 몰래 다른 뜻을 쌓아 역얼(逆孼)이나 폐족(廢族)인 윤상백(尹尙白)·김도성(金道成)·심정연(沈鼎衍)의 무리와 역모를 체결하였으니, 윤상백이 공초한 바, ‘신치운이 불우하게도 세상에 쓰임 받지 못하게 되자 경상(卿相)을 도모하려고 했다.’고 하였다. 처음 국문을 받게 되자 거짓 풍(風)으로 말을 못하는 형상을 짓다가 다시 국문하기에 미쳐서 면하기 어려움을 알고서는 이에 이천해의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언을 답습하여 그의 역심(逆心)을 드러내려 하였다. 처음 김일경과 박필몽이 감히 함부로 무핍(誣逼)하여 갑진년 전에 역모를 빚어낼 때에 이유익과 심유현이 흉언을 만들어 내어 갑진년 이후에 역적 이천해를 꾀었으니, 그 근본과 맥락이 본래 이러하였던 것이다. 신치운은 이미 김일경과 박필몽의 심복이요, 이유익·심유현과는 죽음을 함께 하기로 한 벗이었다. 그가 또 공초하기를, ‘유봉휘(柳鳳輝)와 마음이 같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신문을 받아 장차 죽게 되었을 즈음에 함부로 흉악을 부린 것에서 난역과 심술이 한 테두리 안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그가 이미 무신년에 통고문(通告文)을 찬진(撰進)할 때에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이제 천고에 없는 대역(大逆)으로서 스스로 천벌을 받게 되고, 효경(梟獍) 같은 성품과 시랑(豺狼)같은 마음은 본디 스스로 교화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어찌 이처럼 음참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역적이 또 있겠는가?"

 

여선여(呂善餘)와 송수악(宋秀岳)이 복주되었다. 송수악은 이준(李埈)과 서로 친해 이준의 집에 임시로 거주한 자인데 여러 차례 형신을 가하자, 여선여가 공초하기를,
"신의 처가가 근동(芹洞)에 있어 역적 김일경의 조카의 집과 가깝기 때문에 서로 알고 지냈으니,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이대운(李大運)은 일찍이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이준과 조윤(趙棆)은 서로 친하며, 이전(李佺)이란 자는 이준과 친밀하게 왕래하면서 세상의 소문을 귓속말로 나누었습니다."
하고, 또 이준과 면질시키니, 이준이 말하기를,
"내가 편벽된 논의를 했는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하니, 여선여가 말하기를,
"네 아들 이대득(李大得)이 항상 너에게 경계하기를, ‘지금 세상에는 소론(少論)을 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니, 네가 꾸짖지 않았는가? 그리고 김인제(金寅濟) 역시 네가 준론(峻論)을 한다고 말하였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김인제는 바로 신의 처남(妻娚)의 처남이며, 역적 김일경은 바로 신의 아비의 먼 친척입니다. 이준과 주무(綢繆)한 자는 이전인데 안면이 있습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이준과 이전은 혹 시상(時象)에 대해 말하기도 하였는데, 은밀한 말은 다만 이준과 이전이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준의 집에 왕래한 사람은 이준의 사촌 아우 이용(李墉) 이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정권(鄭權)은 정해(鄭楷)의 족속이며 이유익(李有翼)의 매제인데 혹 이준의 집에 와 조용히 서로 말을 나누었고, 김인제와도 서로 알아서 이준·이전과 함께 서로 모일 때 김인제 역시 함께 모였습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신은 날마다 한두 번씩 이준의 집에 갔는데, 조윤은 김천주(金天柱)의 집에 기숙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신과 이준은 일찍이 함께 모역의 말을 하였고, 나라를 원망하고 있는 이준의 집을 왕래하였으니, 이는 바로 역적입니다."
하였다. 송수악은 공초하기를,
"신은 이준의 집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었는데 조윤이 자주 왔었고, 여광학(呂光學)과 여선여를 모두 알고 있는데 여광학은 양천(陽川)에 삽니다. 정권은 이준의 동네에 살고, 이세현(李世鉉) 역시 아는데 그 근동에 있으며, 김인제는 이준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보았는데 역적 김일경의 조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추문하며 형을 가하니, 송수악이 승복하여 공초하기를,
"신은 몇 해 전에 역적 이준의 집에 와서 의접하고 있어 이준과 친밀하였는데 역적 이준이 항상, ‘역적 김일경이 교문(敎文)을 비록 잘 짓지는 못했으나 신축년181)  의 소(疏)는 김일경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공이 있는데, 역적 김일경의 족속이 모두 폐기되었으니, 매우 불쌍하다.’라고 한 말을 신과 이준의 아들 이대운(李大運)이 함께 앉아서 들었습니다. 이준과 김인제의 형제 및 김일경의 족속으로 풍양(豊壤)에 사는 자가 대여섯 집인데, 김일경의 외사촌 여광학 등과 서로 주무(綢繆)하게 함께 모의하고, 조윤 역시 함께 들어간 것이 확실합니다. 북도에서는 북병사 조동하(趙東夏)가 응하기로 하고, 춘천에서는 심정연(沈鼎衍)·강몽협(姜夢協)·강몽상(姜夢相) 등이 응하기로 하였다고 했습니다. 심정연은 그의 형 심성연(沈成衍)·심익연(沈益衍)의 일 때문에 항상 나라를 원망하여 이처럼 불궤(不軌)스런 모의를 하였습니다. 그들 무리의 거사에는 심정연이 대장이 된다고 하였는데, 군병(軍兵)은 그 무리들이 노속(奴屬)을 합쳐 각자 군기(軍器)를 모으기로 하였습니다. 심정연·강몽협 등은 향리에서 초군(哨軍)을 얻기를 도모하여 대략 금년 8월 사이에 명화적(明火賊) 차림으로 밤을 틈타 먼저 춘천부를 침범해 군기를 빼앗고자 하였으며, 또 김화(金化)와 낭천(狼川)·철원을 침범해 그대로 상경하겠다는 말을 신이 과연 이준의 집에 있는 화적에게서 들었습니다. 방언(方言)과 책제(冊題)를 묘법으로 한 것은 신이 과연 목격하였는데, 이준이 말하기를, ‘이는 거사할 때 마땅히 군호(軍號)로 사용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모의할 때부터 신이 이런 일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이준의 무리들이 매양 웃으며서 말하기를, ‘너를 어찌 충신(忠臣)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이준 등이 역모하는 것을 알고서도 즉시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실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것으로 지만(遲晩)하니, 임금이 모두 정형(正刑)할 것을 명하였다. 여선여는 결안(決案)을 기다리지 않고 정형하라 하교하고, 여선여의 아비 여광학 및 조윤·이용·정권 등은 모두 국문을 받다가 장폐(杖斃)되었다.

 

하교하기를,
"죄인 이세현(李世鉉)은 용렬하고 무식한 무리로서 역적의 무리들의 응견(鷹犬)이 되어 신치운과 친한 친구가 되어 그 아들로 하여금 공부를 배우게 하였고, 상집(商楫)과 강몽협(姜夢協)은 남매가 되어 은밀하게 모의를 주무(綢繆)하여 이름이 역적의 계(稧)에 들었으며, 서오(瑞五)는 장전(帳殿)에 투서하였는데 심정연과 몸은 비록 둘이나 마음은 하나이니, 모두 결안을 기다리지 말고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남문(南門)에서 돌아와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여 이공윤(李公胤)에게 역률(逆律)을 추시(追施)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아! 이공윤이 갑진년182)   8월 24일 환취정(環翠亭)에서 한 한마디 말은 음참하고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그가 비록 무상하다고는 하지만 역시 한 사람의 신하여서 ‘어찌 다른 뜻이 있겠으며, 광패(狂悖)한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무신년183) 심유현(沈維賢) 이후에야 마음으로 의심하였으나, 관계된 바가 막중하여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차마 유시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역적 신치운의 공초를 보건대, 그 맥락이 서로 관통되어 오늘에야 탄로되었으니, 이공윤에게는 해부로 하여금 빨리 역률을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역적의 처(妻)를 정형(正刑)하는 법을 없애도록 명하였다. 처음에는 임금이 신치운의 연좌를 역적 이괄(李适)의 예에 의해 거행하도록 명했었는데, 이날 대신과 금오 당상에게 유시하기를,
"고 이상(貳相) 이귀(李貴)가 아뢴 바를 내가 마음으로 옳게 여겼는데, 참으로 곽현(霍顯)184)  과 같은 자가 아니라면 주륙함이 부인에게 미치는 것은 마땅히 삼가야 한다. 지금부터는 역적의 처에게 정법(正法)하지 말고, 잡직(雜職) 양반 이상의 처는 비록 살인죄를 범하여 정법하더라도 검시(檢屍)하지 말라."
하였다.

 

헌납 유한소(兪漢蕭), 지평 원인손(元仁孫)이 소회를 말하기를,
"송수악(宋秀岳)이 역모한 정절은 비록 그의 공초로 보더라도 남김없이 탄로났으니, 실정을 알았었다는 율로는 실형(失刑)을 면치 못합니다. 청컨대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동참한 율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소회를 말하기를,
"역적 여광학, 역적 조윤은 역적 이준과 역모를 주무(綢繆)한 정상이 여러 역적의 초사에 탄로되었으니, 청컨대 여광학과 조윤에게 역률을 추시(追施)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유한소가 말하기를,
"무신년185)  ·경술년186)  의 흉역(凶逆)은 지난 사첩에도 없던 바여서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관련되었으면 갑작스레 신리(伸理)를 의논할 수 없는 것인데, 작년에 역적 유내(柳徠) 등을 신리하라는 명은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德)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처럼 엄중하게 징토하는 날을 당해서 이런 흉적을 이미 지난 일이라 하여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유내 등 여러 역적을 신리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원인손이 말하기를,
"근일에 제방(隄防)이 엄하지 못한데, 비록 지난번 당후(堂后)의 천거로 보더라도 감히 역적 박필현의 형 박필룡(朴弼龍)의 사위 성기주(成箕柱)를 함부로 등용하기를 조금도 거리낌없이 하여 물정이 크게 놀라고 공의가 더욱 격렬하니, 청컨대 빨리 성기주의 주천(注薦)을 삭거하고, 주천한 사람을 멀리 찬축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유한소와 원인손이 말하기를,
"무신년의 흉역은 고금에 없던 바로 역적 이탄(李坦)187)  의 친속은 결코 경성(京城) 가까운 곳에 살아 있도록 할 수는 없으니, 청컨대 역적 탄의 아들과 아우와 조카를 모두 절도(絶島)로 안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유한소가 말하기를,
"역적 윤지(尹志)의 범죄는 예사로운 일과 달라서 죄를 입고 귀양을 갔으니, 비록 평일에는 서로 친했던 자라 하더라도 마땅히 다시는 서로 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전 승지 유수(柳綏)는 서찰을 왕복하여 역적 윤지의 문서 가운데 낭자하였으니, 그 친숙한 정상이 난만하여 참으로 지극히 통분하고 놀랍습니다. 청컨대 유수를 아주 먼 곳으로 찬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조명리(趙明履)를 형조 판서로, 신사건(申思建)을 예조 참판으로, 윤동성(尹東星)을 교리로, 남운로(南雲老)를 사서로 삼았다.

 

5월 22일 을미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박사집(朴師緝)·유봉성(柳鳳星)을 친히 국문하였다. 박사집이 공초하기를,
"박필현(朴弼顯)·박필몽(朴弼夢)은 바로 신의 종숙부(從叔父)이며, 남태징(南泰徵)은 바로 신의 외숙부이며 신치운은 어려서부터 친밀하였습니다."
하였다. 박사집을 형추하니, 공초하기를,
"신치운은 바로 도마 위에 오른 고기였기 때문에 감히 흉언을 하여 항상 김일경·박필몽·조태구·유봉휘 및 소하(疏下)에 든 여러 역적을 칭찬하면서 역적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흉언은 감히 장전(帳殿)에서 아뢸 수가 없습니다만, 목호룡과 박필몽의 흉언은 모두 신치운이 한 것입니다. 역적 김일경의 흉소(凶疏)를 ‘충절(忠節)이 있다.’라고 일컬어 마치 이하징(李夏徵)의 말처럼 하였는데, 신 역시 ‘나도 그렇게 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치운은 항상 준론(峻論)을 말하였는데, 그 중에 큰 것은 ‘이광좌(李光佐)는 거두(巨頭)이고, 심악(沈)은 반드시 절의가 있어 비록 김일경의 상소 같은 것도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거원(李巨源)이 김일경을 신구한 일을 크게 칭찬하였는데, 심악과 이거원은 더욱 여러 번 칭찬한 자입니다. 신이 신치운과 흉언을 할 때에 그 아우 신치항(申致恒)·신치흥(申致興) 및 이거원과 이거원의 아들 이운화(李運和)·김호(金浩)·김홍석(金弘錫)·유수원(柳壽垣)이 함께 앉아서 수작하였는데, 이러한 흉언을 어찌 사람마다에게 하겠습니까? 윤상백(尹尙白) 및 김홍석의 손자 김정리(金正履)는 모두 그의 혈당(血黨)이며, 이거원·유수원은 바로 그의 평생의 친구입니다. 김정리는 흉언을 수작할 때에 비록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신치운이 항상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하니, 대역(大逆)에 동참한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정형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유 봉성이란 자는 관동 사람인데, 이보다 앞서 강원 감사 한광조(韓光肇)가 그의 종적이 의심스러워 유봉성을 붙잡아 취복(取服)해 보고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친히 국문하니, 유 봉성이 말을 바꾸어 억울하다고 일컫자 임금이 노하여 형추를 명하였다. 유봉성이 비로소 자복하기를,
"심정연(沈鼎衍)·윤혜(尹惠)·강몽협(姜夢協)의 무리가 과연 반역을 모의하느라 서로 모여 계(稧)를 맺었는데, 신은 그들을 위해 성패(成敗)를 점쳤을 뿐입니다."
하니, 모역에 동참한 것으로 결안하여 정형하였다.

 

사간 박치문(朴致文)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권첨(權詹)은 무신년188)   역적의 변이 일어난 때를 당하여 이인좌(李麟佐)와 손천영(孫天永)이 먼저 청주를 함락하던 날에 그가 도신(道臣)으로 있었는데 이미 체직되었다는 것으로 병사(兵使)와 영장(營將)이 적에게 해를 당했는데도 끝내 군사를 내어 주토(誅討)하지 못하고 편히 앉아서 건너다보고만 있었습니다. 이제 옛 역적들을 추토(追討)하는 날을 당해서 그만 어찌 유독 누락시키겠습니까? 청컨대 죄인 권첨을 빨리 대조(大朝)께 품하여 역률을 추시(追施)하소서. 무릇 죄인으로 외방에 있는 자는 선전관을 파견해 병부(兵符)를 빼앗은 후 도사(都事)가 잡아 오는데 그 법이 매우 엄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죄인 김주태(金柱泰)가 방영(防營)에 있었을 때 선전관이 도사와 나장(羅將)이 이미 체포한 후에 뒤쫓아와 중도에서 서로 만나 거조가 이상하였는데, 보고 듣기가 매우 놀라웠습니다. 청컨대 그때의 선전관을 조사해 내어 정배하소서. 삼도(三道)의 통어(統禦)하는 직임은 사람마다에게 함부로 제수할 수 없는 것인데, 새로 제수된 원중회(元重會)는 평소 칭송하는 소리가 없었고, 일찍이 곤임(閫任)을 지낸 것도 이미 매우 외람됩니다. 전에 여주 목사로 재임하고 있었을 때 재해가 든 해에 적곡(糴穀)을 받아들이면서 매질을 낭자하게 해 경내가 시끄러운 것이 수화(水火) 속에 있는 듯했습니다. 지금의 도헌(都憲) 민우수(閔遇洙)의 집이 본부(本府)에 있는데 낭노(廊奴)의 죄 때문에 민우수를 곤란하게 핍박하여 무식하고 패망(悖妄)함이 이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전 훈장(訓將) 김성응(金聖應)이 부임할 수 없다는 뜻으로 분부했으나, 거짓으로 듣지 못한 체하고서 그가 죄로 귀양가게 된 때를 틈타 의기 양양하게 역사(歷辭)하였습니다. 청컨대 교동 수사(喬桐水使) 원중회를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따르지 않겠다. 권첨의 일은 이처럼 대조께서 임전(臨殿)하신 때에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고, 원중회 및 선전관의 일은 품하지 않고 허락하는 것 역시 어렵다."
하였다.

 

집의 박홍준(朴弘儁)이 상서하여 해직하고 돌아가 봉양하기를 빌고, 또 말하기를,
"역적을 토벌함에는 근본이 있는데, 근본이란 무엇입니까? 조정의 처치가 마땅함을 얻어야 함이 이것입니다. 바로 양생(養生)하는 것과 같아서 본래 역적이 수그러들지 않아도 원기(元氣)가 가득차서 씩씩하게 되면 사(邪)가 침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저하께서 일을 처리하는 즈음에 위로는 대조께 품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시어, 지당하게 되기를 힘쓰시어 털끝만큼의 구차스런 폐단도 없게 되면 국가의 원기가 날로 가득차서 씩씩하게 될 것이니, 사기(邪氣)가 그 사이에 낄 것을 어찌 근심하겠습니까? 저하께서 매양 여러 신하들의 청에 대해 ‘앙품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심이 많아서 비록 지극히 옳고 정당한 일로 급급히 시행해야 할 것이 있더라도 역시 시행되는 것을 보기가 어려우니, 어찌 민망스럽지 않겠습니까? 제왕은 사직을 보존하는 것이 효이니, 문침(問寢)·시선(視膳)은 비록 효자의 작은 예절이라고 말해도 되지만, 만약 성심(誠心)을 쌓기에 힘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러한 절목(節目)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문침·시선하는 즈음에 지성으로 행하고, 이를 밀고 나아가 일용(日用)의 시봉(侍奉)하는 절차에 이르러서도 지성이 아닌 것이 없게 된다면 양궁(兩宮)의 사이에 성의(誠意)가 유통되고 일체로 합쳐져서 저하께서 품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께서 반드시 즐겁게 듣고 기꺼이 따르시어 장차 일마다 마땅함에 합치되고, 하늘이 기뻐하고 화기(和氣)가 다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신은 아래 땅에서 올라와 아래 백성들의 일과 백성들의 곤췌(困悴)함을 보아 왔는데,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부역의 편중함 역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니, 곤췌한 백성들이 편중한 부역을 당해서 어찌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없겠으며, 이미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있다면 어찌 근심할 단서가 없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전부(田賦)는 옛날에는 적게 거두어 들인다고 일컬었으나 근래에는 민간에서 세금을 내기 어려움이 거의 〈섭이중(聶夷中)189)  의〉 상전가시(傷田家詩)에 가깝습니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팔방의 전토가 모래에 덮이고 떠내려갈 근심이 많아서 옛날의 양전(良田)·미토(美土)가 지금은 척박한 땅으로 변한 곳이 곳곳마다 있어서 그 등급이 비록 높고 복(卜)190)  의 숫자가 많더라도 생산된 곡식은 매우 적어서 우리 나라 백성에 부자는 아주 적고 가난한 자는 모두 일년 내내 부지런히 힘을 써도 추위와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이것이 부세는 박한데도 응하기가 어려운 까닭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전세(田稅)와 대동세(大同稅) 두 세는 조종조 이래로 유정지공(惟正之供)이기 때문에 민간에서 비록 동서에서 꾸어서 바치더라도 원망한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이르러 균역청에서 결역전(結役錢)을 더 받아들인 이후부터는 가난한 집에서 근심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대개 백성들의 어려움이 이러한데 이미 원세(元稅)를 징수하고 또 더 받아들이니, 백성들이 원망함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염려되는 바는 지난번 한 역적 윤지(尹志)가 오히려 호민(湖民)을 잘못된 방면으로 이끌어 이처럼 혹심한 데에 이르게 하여 지금 팔방에 편배(編配)된 자가 얼마인지 알지 못합니다. 역적 윤지의 잘못된 방면으로 이끌었던 염려가 전보다 백배나 더할 뿐만이 아니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무지하여 근심과 원망이 지금 일어나고 있으니, 위기와 화(禍)의 싹이 모르는 가운데 잠복해 있지 않을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신이 조정의 처치가 미진하고 마땅하지 못하였다고 말한 것을 이로 미루어서도 그 일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장차 신의 이런 말을 대조께 품하시고, 대신에게 물으시어 근년에 받아 들인 결역전을 영원히 견감(蠲減)하시고, 또 분명한 지휘를 내려 한 나라의 신민들로 하여금 모두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보살피는 덕의(德意)를 알게 하소서. 지금의 제일 급선무는 민심을 수습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민심이 단단하게 맺어져 해이해지지 않으면, 비록 흉역의 종자(種子)와 잘못된 방면으로 이끄려는 무리가 어찌 우리 백성들을 흩어지게 할 염려가 있겠습니까? 신이 또 의논하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결전(結錢)을 만약 감하면 1필(疋)을 대신 충당해 줄 방도가 없겠으나 이는 또 충당할 만한 것이 있으니, 각 고을의 환상 모곡(還上耗穀)191)  이 이것입니다. 모곡을 실시한 것은 근년부터 시작되어 해마다 회록(會錄)하였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아 크게 백성들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그 폐단의 작은 것은 우선 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가난한 백성들이 채곡(債穀)을 많이 먹게 되어 실로 보존되기 어려운 단서가 됩니다. 백성은 적고 곡식이 많은 고을에서는 비록 먹고자 원하지 않더라도 가호(家戶)마다 억지로 주어 한 가호에서 바치는 것이 많게는 혹 20석에 이르고 적게도 6, 7석을 밑돌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등 가호로 농사에 부지런한 자는 폐단이 없이 다 바치지만 이보다 못한 자들은 그 어렵고 곤란을 받는 정상을 모두 말할 수가 없으니, 이는 모두 환곡이 너무 많은 소치입니다. 이렇게 백성을 해치는 곡식을 옮겨서 저 베를 주는 대신에 충당하게 하면 양쪽 모두 그 폐단을 제거해 양쪽이 편리하게 될 것이니, 어찌 마땅히 변통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또한 품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깊이 유념하겠다. 균역(均役)의 일은 대조께서 누차 임문(臨門)하시어 이제 이미 반포해 행하게 되었으니, 실로 만세토록 지켜 행하고 바꾸지 못할 법인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 너는 돌아가 봉양하라."
하였는데, 수일 후에 임금이 그 글을 보고 크게 노하여 좌의정 김상로에게 유시하기를,
"성의(誠意)가 유통(流通)한다는 말은 심정연(沈鼎衍)의 흉서와 같다."
하였다. 붙잡아다 교사(敎唆)한 사람을 물으니, 박홍준이 말하기를,
"특별히 신을 교사한 자는 없습니다. 신은 단지 고서(古書)에서 보았고, 선정신 이황(李滉)의 무신년192)  의 소장에도 역시, ‘참소하는 이간질을 막아서 양궁(兩宮)이 친해야 한다.’는 말이 있으니, 신의 글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니, 임금이 더욱 노하여 형추한 후에 난언(亂言)으로 범상(犯上)한 것으로써 사형을 감하여 섬으로 유배하였다.

 

5월 23일 병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지평 이창임(李昌任)이 소회를 말하기를,
"나라에 큰 논의가 있으면 삼사(三司)에서 반드시 먼저 해야 하는데, 전 부제학 오수채(吳遂采)는 전에 토역(討逆)을 청할 때에 자신이 옥서(玉署)의 장이 되어 경재(卿宰)들의 항장(抗章)을 보고도 일찍이 스스로 출사(出仕)하지 않아 이미 목욕하고 토역을 청하는 의리193)  를 본받음이 적었고, 이에 처분이 이미 내려진 후에는 구차하게 음재(蔭宰)의 상소에 뒤따라 참여하여 자취가 군색하고 경악(經幄)에 부끄러움을 끼쳤으니, 청컨대 오 수채를 삼사의 망(望)에서 영원히 삭간(削刊)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뜻은 비록 옳지만 그 청은 지나치다. 삭출(削黜)하는 법을 시행하라."
하였다. 이창임이 말하기를,
"난(亂)의 근본을 뽑아버리지 못해 요역(妖逆)이 겹쳐 일어나고 있으니, 신하인 자는 그 누군들 함께 분노하여 토벌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지위가 높은 반열에 있으니 의리상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하는데도 진신(搢紳)들이 연달아 상소하는 즈음에 이미 동참하지 않았고, 제일 늦게서야 글로 인혐하여 성실함이 크게 부족했습니다. 처음 반교(頒敎)하는 날에도 달려오지 않았고, 전후의 주대(奏對) 역시 아주 잘못 되었으니, 청컨대 빨리 변방으로 내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달려와 참여하지 않음은 미처 들어서 알지 못한 소치이니, 청한 바가 지나치다."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이 이미 진달하였는데, 행 사직(行司直) 윤득재(尹得載)는 자신이 재신(宰臣)으로 가까운 경기(京畿)에 있으면서 일찍이 한마디 글도 진달하지 않아 외간의 여론이 지금도 놀라고 있습니다. 나라의 형장(刑章)을 고르게 하지 않음은 마땅하지 않으니, 윤득재에게 삭출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은 아마도 그만 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창임이 말하기를,
"신이 조금전 오수채에게 죄주기를 청하는 일을 진달해 윤허를 받았는데, 물러가서 여론을 들었더니 부교리 윤득우(尹得雨)는 자신이 관각(館閣)의 관직을 띠고 있으면서 역시 진신의 상소 아래에 뒤따라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윤득우는 이미 옥당(玉堂)으로 자처하지 않으니, 본디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으나, 이미 삼사(三司)의 반열에 있으니, 구차스럽다는 잘못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윤득우를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에 심악(沈)이 재신(宰臣)으로서 박사집(朴師緝)의 초사에서 신치운(申致雲)의 당(黨)이라고 원인(援引)되었다. 임금이 대신에게 물으니, 좌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심악은 글을 읽고 몸을 단속했으나 편벽된 논의가 아주 준엄하여 대핵(大核)이 이제야 비로소 나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를 원망하는 자는 본디 말할 것이 없으나, 심악 역시 그렇다면 이는 당습(黨習)의 해이다. 지난해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신하 그 누가 전하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남태량(南泰良)만 유독, ‘아는 자가 본디 많습니다.’ 하였으니, 그 말이 정밀하였다."
하자, 김상로가 말하기를,
"남태량은 나라에 불충한 자이니, 떼어 버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태량은 일찍이 나의 어린 손자를 위해서 종일 소식(素食)을 했으니, 충성이 환히 빛나서 특별히 정경(正卿)을 내렸던 것이다. 오광운(吳光運)·홍경보(洪景輔)는 지금 조정에서 마음에 들어 임용한 신하들과 달라서 무신년194)  에 대의(大義)를 지켰으니, 지금까지도 더욱 그 사람들 생각이 난다. 오광운과 홍경보에게는 모두 사제(賜祭)하고 그 자손은 승서(陞敍)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4일 정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유수원(柳壽垣)·조재민(趙載敏) 등에게 물었는데, 조재민은 신치운이 고한 자이다. 조재민이 공초하기를,
"신이 과연 신치운을 알지만 일찍이 추종하지는 않았고, 그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신이 동래 부사로 있을 때에 숙경재(肅敬齋)를 지어 향리의 인사(人士)들을 가르쳤는데, 후에 듣건대, 유생들이 신치운에게서 글을 받아 장차 현판으로 걸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부사 임상원(林象元)에게 글을 보내 그로 하여금 걸지 못하게 했는데, 신치운이 어찌 혹 이 때문에 신을 미워하여 무고하는 데에 이를 것이 있겠습니까? 이거원(李巨源)처럼 폐기되어 막힌 자는 그들과 서로 친하게 지낸 것이 괴이할 것도 없지만 신은 조정의 반열에 출입하여 기쁨이 있을 뿐 괴로움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신치운과 서로 친하게 지내겠습니까? 신이 벼슬에 나온 19년 동안 외람되게 여러 차례 삼사(三司)에 있으면서 합달(合達)을 정지하지 않아 죄를 입기까지 하였으니, 이에서 신의 본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죄인 이감(李堪)은 별달리 범한 바가 없으나 이미 역적 이준(李埈)과는 사촌 형제가 되니, 낭천현(狼川縣)으로 정배하도록 하라. 허구(許構)역시 범한 바가 없으니, 회양부(淮陽府)로 정배하고, 오명우(吳命佑)는 김해부(金海府)로 정배하고, 오중관(吳重觀)은 웅천현(熊川縣)으로 정배하라."
하였는데, 대개 허구와 오명우·오중관 등은 여러 죄수의 초사에 뒤섞여 나왔으나, 모두 옥정(獄情)과 관계되지 않아 이때에 이르러 경중에 따라 참작하여 처리한 것이다.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 등이 연경에서 돌아왔다.

 

지평 원인손(元仁孫)이 소회를 말하기를,
"역적 신치운이 한림(翰林)으로 있을 때의 시정기(時政記)의 초(草)가 수색해낸 문서 가운데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하는데, 흉악한 역적의 사초(史草)는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니, 청컨대 다시 그 집을 수색하도록 명하여 기필코 반드시 찾아내도록 하여 역적 윤상백(尹尙白)의 사초의 예에 의해 불태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25일 무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유수원(柳壽垣)과 김성(金渻)이 복주되었다. 유수원에게 묻기를,
"너 역시 하나의 신하인데 무슨 마음을 두어 역적 유봉휘의 지휘를 받아 방자하게 소장을 베꼈느냐? 그 마음을 따져 보면 이미 무상한 데에 관계되고, 역적 신치운·박사집과 함께 역적 김일경과 같은 음참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을 쌓아서 난만하게 주무한 정상이 역적 박사집의 초사에서 남김없이 탄로되었다. 너는 몸이 반열에 있으면서 역적 김일경을 조술(祖述)하였으니, 절절이 통분하고 놀랍다."
하고, 마침내 형신하니, 유수원이 승복하여 공초하기를,
"신은 신치운·박사집과 친밀하게 사귀어 침체된 바가 신치운과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제(調劑)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성상을 비방하고 아래로는 조제한 여러 신하를 욕하여 몰래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왔습니다. 그리고 매양 서로 만날 때마다 흉언과 패설을 많이 하기를 김일경과 박필몽처럼 하였고, 때로는 혹 김일경과 박필몽보다 더 하였는데 신도 거기에 난만하게 수작하여 참여했습니다. 대개 신은 여러 역적 가운데 비단 흉적을 알 뿐만 아니라 이는 실로 당준(黨峻)의 마음에서 말미암아 나라를 원망하기에 이르렀으며,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항상 헤아리기 어려운 패설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고, 대역 부도로 지만(遲晩)하여 정형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김성(金渻)은 김호(金浩)의 사촌 아우로 역시 박사집이 고한 자인데, 형신하니 김성이 공초하기를,
"신치운과는 친족의 분의(分誼)가 있고, 또 철원의 원[倅] 을지냈기 때문에 친숙하게 되었으며, 박사집은 평생의 동접(同接)입니다. 신이 일찍이 신치운과 박사집이 앉아 있는 자리에 갔는데, 그들이 무슨 글인가를 보다가 신을 보고는 감추었습니다. 이는 반드시 역모의 일이어서 신이 묻기를, ‘너희들이 보던 글이 어떤 글인가? 생각건대, 이는 괴이한 글인 듯한데 내가 비록 보더라도 어찌 사람들에게 말하겠는가?’라고 하니, 신치운은 좋은 벼슬을 얻지 못해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하였고, 박사집 역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 항상 거리낌이 없이 방자하였습니다. 신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박사집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무신년195)   역적 박필현(朴弼顯)의 일을 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지금은 형세가 무신년과 다른데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라고 하니, 박사집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나 다만 도모해야 마땅하다.’ 하고, 인하여 심유현(沈維賢)을 위하는 흉악한 말을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심유현은 이미 위를 무함한 부도(不道)로써 자복하였는데, 네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비록 그러하나 나 역시 마땅히 함께 들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모역으로 지만하였다. 하교하기를,
"죄인 김성은 역적 신치운·박사집과 함께 무신년의 음참하고 부도한 말을 난만하게 수작하였음을 낱낱이 지만하였으니, 역적 이전(李佺)의 예에 의하여 병조 판서로 하여금 수구문(水口門) 밖에서 먼저 효시하고, 사지를 가른 후 모두 강원 감영으로 보내어 10일 동안 현수(懸首)하고 도내에 회시(回示)하게 하고, 해부로 하여금 대역의 율을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김성의 효시가 지체되었다 하여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의 파직을 특별히 명하고 홍봉한(洪鳳漢)으로 대신하였으며, 또 김성응(金聖應)을 훈련 대장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남도는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북도는 무습(武習)을 숭상하는데, 북관(北關)은 옛날과 다름이 있다. 이것이 비록 고(故) 상신(相臣)이 유술을 권하는 뜻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동래(東萊)에 이르러서는 바로 변방의 땅이니, 절의(節義)를 돈독히 숭상하는 것은 옳지만 어찌 3백 년 동안 없었던 서재(書齋)가 있어야 하겠는가? 이제 듣건대, 조재민(趙載敏)이 서재를 세우고 신치운이 기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서재의 이름을 물었더니 비단 〈‘숙(肅)’자의〉 처음 한 글자를 살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재민은 이미 붙잡혀 오고, 신치운 역시 이미 정법되었으니, 그대로 둘 수는 없다. 해부에 분부하여 즉시 그 서재를 철거하고 그 서재의 명호를 불태우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개 ‘숙경(肅敬)’의 ‘숙(肅)’ 자가 선조(先朝)의 묘호(廟號)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무신년196)  의 역적은 당습(黨習)에 근본한 것을 내가 일찍이 말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은 믿지 않았는데, 이제 유수원(柳壽垣)의 초사로 보건대, 더욱 징험할 수가 있다. 조영순(趙榮順)의 함사(緘辭)는 전록(全錄)을 피로 더럽히고자 한 것이니, 비록 이번의 여러 역적과는 취미(趣味)가 같지 않으나 사(私)를 끼고 준론(峻論)을 한 자는 마땅히 친히 국문하여 역률을 시행해야 한다."
하였다. 처음에 홍문록(弘文錄)197)  에 든 30여 인이 조영순의 ‘상문(相門)의 사객(私客)이다.’라는 말로써 인혐하고 기꺼이 행공(行公)하려 하지 않았다. 임금이 홍명한(洪名漢)의 말을 따라서 조영순에게 함문(緘問)하니, 조영순이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함답(緘答)하여 심관(沈鑧)·송문재(宋文載)·정광충(鄭光忠)·심수(沈鏽)·심발(沈墢)·김시묵(金時默)·이준휘(李儁徽) 등을 두루 열거하면서 더욱 알맞지 않다고 하였는데 실제는 통틀어 대체가 불공정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전록을 피로 더럽히려 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대사간 정광충(鄭光忠), 지평 원인손(元仁孫)이 아뢰기를,
"이증(李增)198)   집안의 요망한 글은, 증과 이학(李壆)199)  이 함께 본 바인데 여러 날을 감추어 두고 즉시 위에 보고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증은 이미 경폐(徑斃)되어 정절을 알아내는 것은 오직 학에게 달려 있으니, 청컨대 안치(安置)한 죄인 학을 국청을 설치해 엄중히 신문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태학의 여러 유생들이 권식당(捲食堂)200)  하고 글로 대사성에게 소회를 바치기를,
"김적희(金績熙)는 일찍이 반임(泮任)으로 재(齋)에 들어왔는데, 역적 유봉휘(柳鳳輝)·권익관(權益寬)·신치운(申致雲)·이헌영(李獻英) 등 8인을 함부로 해묵(解墨)하였으니, 그 죄가 역적 이성술(李聖述)보다 더한데, 이성술은 이미 복법되고, 김적희만 유독 누락되었으니 여론의 분개해 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마침 두 장의(掌議)가 모두 없어서 대궐에 호소할 길이 없는데 마음 편하게 식당에만 있는 것은 신들의 본분에 어긋납니다."
하였는데, 대사성이 이를 소조(小朝)께 아뢰니, 답하기를,
"많은 선비들이 토역(討逆)을 청하여 권당(捲堂)에까지 이른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뜻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때에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고, 또 하룻밤 권당하여 이미 목욕하고 토역을 청하는 의지를 폈으니, 즉시 다시 들어가라는 뜻을 성균관으로 하여금 권유하게 하라."
하니, 이에 여러 유생들이 다시 들어갔다. 처음에 김적희가 국문을 받았는데, 갑자기 풀어주었기 때문에 사론(士論)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5월 26일 기해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는데, 심악(沈)이 복주되었다. 심악을 신문하기를,
"이번 역적은 무신년201)  에 비할 바가 아닌데 그 수창(首倡)한 자는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로 효경(梟獍)과 같은 종류였다. 역적 신치운과 박사집은 역적 김일경을 음참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말로 조술(祖述)하였는데, 네 이름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역적과 주무하여 몰래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을 쌓아 왔는가? 이번 처분 후의 상서(上書) 역시 수상한데 이런 마음을 갖고 역적과 친하게 지냈으니, 이는 바로 유래한 바의 조짐인 것이다."
하니, 심악이 공초하기를,
"신치운은 근년 이래 네댓 번 와서 만났는데, 지난 겨울 그가 김해에서 체직되어 왔을 때에 눈에 막혀 신의 집에서 유숙하고 갔습니다."
하였다. 다시 추문하니, 심악이 공초하기를,
"조태구와 유봉휘가 이하징(李夏徵)과 윤지(尹志)의 근본인데, 대처분 후에 어찌 감히 근본의 설(說)이 아닌 것을 아뢰겠습니까? 다만 한 칼에 베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죄입니다. 신이 이번에 남은 찌꺼기의 말로써 처분 후에 앙달하면 신은 조태구·유봉휘와 같은 데로 돌아가기 때문에 차마 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신년 이후에 조태구와 유봉휘의 죄를 어찌 몰랐겠습니까마는, 범홀(泛忽)하였기 때문에 다만 밖으로 형언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니, 다시 묻기를,
"박사집의 초사에, 신치운이 항상 너는 마땅히 절의를 지킬 것이라고 일컬었다 하였고, 박 사집 역시 말하기를, 역적 김일경의 음참하고 부도한 말을 너 역시 하였다고 했다. 몸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이런 흉악한 마음을 품었으니, 이번 역적의 괴수는 네가 아니고 누구인가?"
하고, 형추한 후 다시 추형(推刑)을 가하니, 심악이 공초하기를,
"유수원(柳壽垣)을 정법(正法)한 것을 신은 그 이유가 흉언 때문인 것으로 알았지 대역(大逆)으로 정법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신은 유수원의 역절(逆節)을 나라를 향한 정성이라 생각하였고, 유수원의 흉언(凶言)을 대역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고, 역적을 옹호한 것으로 지만해 결안(結案)하였다. 심악이 또 말하기를,
"유수원과 함께 죄를 입는다면 죽더라도 기쁘겠습니다."
하므로, 즉시 법대로 정형하였다.

 

대사간 정광충(鄭光忠)과 집의 송덕중(宋德中)을 체직하였는데, 심악에게 대역의 율을 적용할 것을 청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윤동섬(尹東暹)을 대사간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승지로 제수하였다. 윤동섬이 소회를 말하기를,
"박홍준(朴弘儁)의 상서한 말이 아주 놀랍고 패악한데, 장전(帳殿)에서 공초한 말도 또한 그릇되고 망령됨이 많았습니다. 이미 난언(亂言)으로 범상(犯上)한 것으로 지만하였는데, 비록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으로 특별히 일률(一律)을 용서하셨으나 그의 범죄로 논하면 섬에 유배하는 것에 그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거제부 섬에 유배한 죄인 박홍준에게 빨리 천극(栫棘)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윤동섬이 말하기를,
"역적을 비호한 것으로 지만한 죄인 심악의 음참한 정절이 남김없이 탄로났는데, 승복하는 즈음에 미쳐서 심지어 ‘흉언(凶言)은 대역(大逆)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여 역적 유수원(柳壽垣)에게 정성이 있다고 허여하였고, 끝에서는 ‘유수원과 함께 죽는 것을 기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음참하고 헤아리기 어려움은 유수원보다 더한데 마침내 율을 정한 것이 역적을 옹호한 것에 그쳤으니, 왕장(王章)이 너무 가벼워 여정(輿情)이 펴지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역적을 비호한 죄인 심악에게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대역의 율에 의해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윤동섬이 여러 차례 쟁집하고, 지평 원인손(元仁孫)이 계속하여 힘써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장을 이미 폈는데, 어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5월 27일 경자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는데, 김정관(金正觀)이 복주되었다. 김홍석(金弘錫)과 그의 손자 김정리(金正履)는 모두 박사집이 끌어들인 자들로 김홍석은 죽은 지 이미 오래였고 김정리는 바로 붙잡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아우 김정관을 잡아다 그의 조부의 일을 형신한 것이다. 김정관이 말하기를,
"신의 조부가 항상 김일경은 역적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유수원·신치근(申致謹) 등과 함께 상소하여 김일경을 위해 호소하였습니다. 신의 조부와 마음이 같은 자에는 또 윤광찬(尹光纘)·윤광소(尹光紹)·이하집(李夏集)·이지항(李址恒)·박문수(朴文秀)·윤상임(尹尙任)·박사극(朴師極) 등이 있는데, 신은 글을 모르고 무식하여 이는 모두 신의 형 김정리에게서 들은 것일 뿐입니다."
하니, 뭇 신하들이 박문수를 체포하기를 청하였다. 좌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비단 박문수뿐만 아니라 무릇 죄인이 끌어댄 자는 모두 마땅히 잡아다 신문해야 합니다. 또한 박문수는 지난날 경연(經筵)에서 아뢴 국옥(鞫獄)의 일이 놀라웠고, 동궁의 환후를 장황하게 앙달하고 왕손에 대한 말로 전하를 의심하기에 이르렀으니, 심히 무엄하였으며, 또 그의 언의(言議)가 아주 준엄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군(靈城君)의 언론이 우상과 다르기 때문에 여러 번 역적의 초사에 나온 것이니, 역시 그가 자초한 것이다."
하니, 도승지 정홍순(鄭弘淳)이 말하기를,
"무신년 역적을 다스림이 느슨하여 마침내 이하징과 윤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미 역적의 초사에 나왔는데, 어찌 그 사람이 아깝다고 하여 체포하지 않겠습니까? 대신(臺臣)이 붙잡아 오기를 청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하고, 승지 남태회(南泰會)가 대신들을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사간 윤동섬(尹東暹)과 장령 박기채(朴起采) 등이 피혐하면서 체직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고 유언민(兪彦民)을 대사간으로, 서명응(徐命膺)을 집의로, 심수(沈鏽)를 승지로 제수하였다. 유언민·서명응 등이 청하기를,
"박문수를 체포하고, 윤동섬과 박기채를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박문수와 윤광소 등이 이미 붙잡혀 오자 김정관과 면질시켰는데, 양쪽이 서로 알지 못하였다. 김정관이 말하기를,
"당연합니다. 신은 단지 신의 형의 말을 들은 것일 뿐입니다."
하므로, 형을 가하여 무복(誣服)을 자복받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박문수와 윤광소를 풀어주고, 박문수를 소견하여 위유(慰諭)하였다. 마침내 김정관을 결안 정형(結案正刑)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다. 이하집은 이하징의 족제(族弟)이며 이지항(李址恒)은 이하집의 조카인데 모두 국문을 받다 장폐(杖斃)되었다.

 

임금이 태학(太學) 동서재(東西齋)의 반수(班首)를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너희들의 소회가 실로 제방을 엄히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어서 내가 가상하게 여겼는데 권당(捲堂)한 하룻밤 만에 염우(廉隅)를 폈다고 여겨 처분이 있기 전에 다시 들어갔으니, 너희들의 도리가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다. 이는 이른바 선(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정언 정광한(鄭光漢)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역적 심악(沈)은 음참한 역절(逆節)을 이미 모조리 승복(承服)하였고, 흉언을 대역(大逆)이 아니라 하고 역적 유수원(柳壽垣)에게 정성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미 흉악하고 간특합니다. 또한 함께 죽는 것이 기쁘다는 말에서 더욱 마음이 흉적과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흉악한 성품으로 항상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수십 년 동안 몰래 쌓아온 것이 이제야 비로소 장전(帳殿)에서 친히 신문하는 아래에 다 탄로되었습니다. 나라에 일정한 법도가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적을 위해 설치한 것인데, 지금의 역적을 비호한 율은 너무 가벼운 잘못이 있습니다. 왕장(王章)을 쓰지 않아 여정(輿情)이 더욱 격렬하니, 신은 역적 심악을 빨리 왕부(王府)에 명하여 대역의 율로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김적희(金績熙)의 범죄는 실로 이성술(李聖述)과 다름이 없는데 지난번 붙잡혀 왔을 때에 거짓말을 꾸며서 요행히 면하였으니, 참으로 놀랍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태학의 소회를 보건대, 소하(疏下)의 역적에 대한 생도(生徒)들의 묵벌(墨罰)의 의논이 이미 김적희에서부터 창도되었습니다. 유봉휘(柳鳳輝)·권익관(權益寬) 〈신치운(申致雲)·이헌영(李獻英)〉 등 여러 역적의 해묵(解墨)이 또한 김적희가 손수 범한 것인데, 이성술을 정법한 후에 그만 유독 왕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니, 신은 김적희에게 국청을 설치하여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권혜(權嵆)·권집(權䌖) 같은 요역은 전고에 없던 바인데 그 근본을 따져보면 실로 이증(李增)에게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권혜와 권집은 이미 대역의 율을 썼는데 증에게만은 유독 응당 시행해야 할 율을 면해 주었으니, 형정(刑政)의 잘못이 커서 신인(神人)의 분개해 함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종사를 위하는 깊은 염려로 빨리 역률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심악의 일에 대해 진달한 바 말이 엄하고 뜻이 바르다. 어제 부원군의 청에 윤허를 아낀 것은 뜻이 비록 있기는 하나, 역적의 토벌을 엄중히 하고 그 소굴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결같이 윤허를 아낄 수는 없으니,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김적희의 일 역시 아뢴 대로 시행하되, 끝의 일은 그 청이 지나치다."
하였다.

 

5월 28일 신축

진휼청에서 아뢰기를,
"보리가 익는 때가 이미 지났으니, 오부(五部)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던 건량(乾粮)을 지금부터 철폐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언 정광한(鄭光漢)이 전달을 거듭 상달하고, 또 아뢰기를,
"권혜(權嵆)와 권집(權䌖) 같은 요망한 역적은 실로 지난 사첩에도 없던 바인데, 그 난(亂)의 근본을 따지면 바로 이증(李增)입니다. 권혜와 권집에게는 이미 역률을 시행했는데, 증만이 유독 피했으니, 국법으로 논하면 실형(失刑)함이 큽니다. 청컨대 증을 대조께 앙품하여 빨리 왕부로 하여금 대역의 율로 시행하게 하소서. 신치근(申致勤)·윤상임(尹尙任)이 흉언에 참여하여 수작했다는 말이 이미 역적 김정관(金正觀)의 초사에서 나왔는데, 신치근과 윤상임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따져 물을 곳이 없으나 이처럼 엄중히 제방하는 날을 당해서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고 교리 신치근과 고 대사간 윤상임에게 빨리 추탈(追奪)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따르지 않겠다. 여천군(驪川君)의 일은 대조께서 이미 유시하셨으며, 신치근 등의 일은 청한 바가 비록 옳으나 번거롭게 품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5월 29일 임인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대사간 유언민(兪彦民), 집의 서명응(徐命膺)이 소회를 말하기를,
"역적 이탄(李坦)202)  을 노적(孥籍)하라는 청이 이미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아직껏 윤허를 아끼시어 신인(神人)의 분노가 오랠수록 더욱 간절해집니다. 지난번 대신(臺臣)의 청으로 인하여 비록 아들과 조카를 나누어 정배하라는 명이 계셨으나 그래도 왕장(王章)을 쾌히 펴지 못해 여정(輿情)이 갈수록 더욱 격분해 하니, 청컨대 역적 탄을 노적하라는 양사(兩司)의 청을 빨리 윤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가 오래 된 일을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판의금 신만(申晩)이 아뢰기를,
"대역 죄인 유봉성(柳鳳星)의 아들과 송수악(宋秀岳)의 아우와 조카는 모두 출계(出繼)하여 만약 특별한 하교가 없으면 일은 마땅히 법에 의해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법대로 하라."
하였다. 신만이 말하기를,
"유봉성의 아들 유철(柳徹)은 출계하였기 때문에 비록 교형(絞刑)에 처하지는 않더라도 연좌의 율로써 단지 안치(安置)하기만 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흑산도의 종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집의 서명응이 소회를 말하기를,
"역적 김홍석(金弘錫)은 본디 김일경과 박필몽의 혈당(血黨)으로서 집에서 늙어 죽었는데, 아직껏 천망(天網)에서 누락되어 왕장을 펴지 못하여 여정의 분해함이 오랠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이제 역적 박사집(朴師緝)과 그의 손자 김정관(金正觀)의 초사로 보건대, 흉소(凶疏)를 의리(義理)라 하고 역적 김일경을 역적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여러 역적과 체결하여 흉언을 수작한 정상이 남김없이 탄로되었습니다. 청컨대 김홍석은 즉시 왕부로 하여금 대역의 율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광수(金光秀)를 문초하니, 김광수가 공초하기를,
"유봉휘의 상소는 역적인 듯싶지만, 만약 유봉휘의 상소가 역적인 듯싶다는 말 때문에 신을 역적이라고 한다면 신은 역률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김홍석은 김일경의 상소를 의리라 하고 역적 신치운과 음참하고 부도한 말을 난만하게 수작한 정상이 여러 초사에서 탄로되어 대신(臺臣)이 이미 역률을 청해 윤허하여 따랐다. 그의 아들 김광수 역시 엄중히 신문하는 아래에서 역적 유봉휘를 역적과 역적 아닌 듯하다는 사이에 두어 역심(逆心)이 탄로되었으니, 응당 연좌해야 할 율로 시행할 수 없다. 때를 기다리지 말고 빨리 나라의 형벌을 바루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유언민(兪彦民)이 소회를 말하기를,
"역적 윤수(尹邃)는 역적 이하(李河)의 초사에 나왔고, 또 이유익(李有翼)과 함께 공부한 친한 친구여서 주무(綢繆)한 정절이 남김없이 탄로났습니다. 그런데 흉악하게 버티면서 불복하여 마침내 참작하여 처리하기에 이르렀으니, 왕장을 펴지 못하여 여정(輿情)이 오래도록 울분해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윤수에게 역률을 추시(追施)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치다."
하였다. 조재민(趙載敏)을 문초하기를,
"이번 처분이 있기 전에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를 어떻게 여겼는가?"
하니, 조재민이 공초하기를,
"조태구와 유봉휘는 합계(合啓)하였는데 유봉휘에 이르러서 세상 사람들이 혹 역적이 아니라고 여겼으나 신은 역적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 이광좌(李光佐)는 세상의 반이 존앙(尊仰)하였기 때문에 신이 어릴 때에는 그가 역적임을 몰랐으나 자란 후에 점차 알게 되었으며, 이 광좌가 30년 동안의 하늘을 뒤덮는 화를 양성하였으니 천고에 어찌 이러한 역적이 있겠습니까? 신이 갑작스럽게 색목(色目)을 바꾸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심악(沈) 같은 자가 사대신(四大臣)을 복관시킬 때 진달한 상소는 본래 아주 층(層)이 있었습니다. 신은 가주서(假注書)로 있을 때부터 모두 직분에 따라 공사(供仕)했기 때문에 심악이 매양 신을 대하여 업신여기고 짓밟으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죄인 조재민은 비록 이름이 역적 신치운의 초사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그 처음의 초사는 유수원과 심악에 비해 이미 차등이 있었는데, 관계됨이 막중하였기 때문에 신문했던 것이다. 유수원과 심악의 초사에 다른 단서가 없었고, 오늘 그의 초사도 당심(黨心)을 떨쳐 버리지 못해 이광좌의 소행을 보기에 미쳐서도 끝내 스스로 반성하지 못했었는데, 점차 당론을 준엄하게 한 자들이 빠져 든 상황에 이르자 이에 비로소 처음의 잘못을 깨닫고 정도(正道)로 돌아온 뜻으로 지만(遲晩)하고, 역적 신치운과 원한이 있었던 정상 역시 직초(直招)하였다. 신치운·유수원·심악·박사집의 책궤 가운데 서로 주무했던 정상이 남김없이 탄로되었으나 조재민의 서찰은 한 장도 적발되지 않았으니, 이에서도 그 초사가 거짓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스스로 역적질을 범한 자는 쾌히 왕법(王法)을 바루어야 하고, 거기에서 벗어난 자는 참작하는 것 역시 세도(世道)가 보고 느끼게 하는 뜻이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심악의 소행은 더욱 음참하다. 조재민은 특별히 참작하여 거제도로 정배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유언민(兪彦民)·집의 서명응(徐命膺)이 소회를 말하여 거듭 역적 이증(李增)의 노적(孥籍)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집의 서명응, 지평 원인손이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습니까만, 어찌 오늘날 같이 흉한 역적이 있겠습니까? 주륙(誅戮)의 법은 한때에 행하는 것이지만, 군주의 위엄은 백세를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에서 난적(亂賊)을 제거하는 데에 있어 처음에는 형장(刑章)으로 간귀(奸宄)를 죽이고, 나중에는 간책(簡策)에다 그 역절(逆節)을 밝혔으니, 이것이 성인이 《춘추(春秋)》를 지은 까닭입니다. 아! 통분합니다. 이번의 흉역은 지난 사첩에 없던 바로서 대개 신축년203)  ·임인년204)  에 싹이 터서 무신년205)  에 화란이 빚어져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갖가지 귀역(鬼蜮) 같은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조태구·유봉휘는 김일경·목호룡의 근본이 되었고, 박필몽·심유현은 신치운·박사집의 마음과 관통되었습니다. 그 효경(梟獍)과 같은 성품과 사갈(蛇蝎) 같은 마음이 아래로는 부리에서 부리가 생기고 위로는 가지에서 가지가 뻗어 30년 동안 만연되고도 아직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실로 《주역》의 이른바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진 까닭이 아니요, 그 유래가 점차로 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제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과단성 있는 결단을 하시어 역모와 흉계가 저절로 천벌을 받고, 난령 요요(亂領妖腰)들이 모두 나라의 형벌을 받았으나, 참으로 그 난(亂)의 근본을 제거하고 역적의 싹을 드러내어 책자로 만들어 《춘추》무장(無將)206)  의 주륙을 엄중히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신들은 일종의 흉얼이 몰래 일어나 장차 소멸되어 꺾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시어 빨리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국(局)을 열어 전후 난역(亂逆)의 원류를 찬술하고, 주토(誅討)의 전말을 자세히 기록해 갖추 싣도록 하소서. 그중 한 본(本)은 궤실(櫃室)에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고, 한 본은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뭇 백성들을 효유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음을 알게 하면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대의(大義)가 지금과 후세에 찬란히 빛나게 될 것이니,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 효경(梟獍)처럼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의 마음을 비록 헤아리기가 어려우나 드러나는 대로 징토(懲討)하는 데 불과할 뿐이었는데, 아! 역적 김일경이 지은 망극한 교서(敎書)와 역적 심유현의 초사 가운데 망측하고 부도한 말은, 만약 조금이라도 천성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의 신하 된 자로서 누가 감히 마음에 쌓아두고 말로 나타내겠는가? 그런데 역적 신치운의 초사를 듣고는 마음이 무너졌으며, 역적 심악(沈)의 초사는 이보다 더하였다. 역적 신치운은 혹시 나라를 원망하여 그렇다 하더라도 역적 심악은 나라를 원망할 일이 무엇이 있기에 이런 마음을 마음속에 깊이 쌓아 둔 것인가? 비단 분개함이 마음에 사무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오늘의 여러 신하들이 만약 내가 근본이 되는 실상을 엄중히 조사하여 그 소굴을 영원히 없애지 않는다면 무슨 얼굴로 나를 섬기겠는가 싶다. 이번의 차자로 진달한 바는 의리가 참으로 그러하고, 깊이 가상하여 특별히 그 청을 윤허하니, 국(局)을 설치한 후에 대신을 도제조로 삼고, 당상과 낭청을 차출해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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