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5권, 영조 31년 1755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4.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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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계묘

이정보(李鼎輔)를 우참찬으로, 영부사 김재로(金在魯)·영돈녕 이천보(李天輔)·우의정 조재호(趙載浩)를 천의리편감(闡義理編鑑) 찬수청 도제조(纂修廳都提調)로 삼았는데, 임금이 천의리편감이라 명명(命名)하였다가 후에 《천의소감(闡義昭鑑)》으로 고쳤다.

 

서종급(徐宗伋)·조영국(趙榮國)·이성중(李成中)·조명리(趙明履)·정휘량(鄭翬良)·남유용(南有容)을 찬집 당상으로, 이양천(李亮天)·홍명한(洪名漢)·서명응(徐命膺)·황인검(黃仁儉)·이최중(李最中)·송문재(宋文載)·이길보(李吉輔)·홍인한(洪麟漢)·홍경해(洪景海)·남태저(南泰著)·원인손(元仁孫)·이성경(李星慶)을 찬집 낭청으로 차정(差定)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역적의 태생(胎生) 고을을 금부에서 조사해 냈는데, 강몽협(姜夢協)은 춘천부 태생이고, 강몽상(姜夢相)은 양주목 태생이며, 유수원(柳壽垣)은 충주목 태생이요, 김인제(金寅濟)는 양주목 태생이며, 유봉성(柳鳳星)은 춘천부 태생이요, 송수악(宋秀岳)은 양천현 태생이며, 조윤(趙棆)은 고양군 태생이요, 김정관(金正觀)은 해미현 태생이라고 합니다. 수령을 파직하지 말라는 것은 전에 정탈하였고, 양주와 고양은 능침(陵寢)이 있는 곳이어서 예(例)가 강호(降號)할 수 없으니, 춘천 부사·충주 목사·양천 현령은 모두 강등하여 현감으로 하고, 해미현은 순서를 여러 현의 아래에다 두어 폄강(貶降)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임희교(任希敎)를 장령으로, 서유량(徐有良)을 지평으로, 심발(沈墢)을 사간으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동적친경전(東籍親耕田)의 대맥(大麥)을 친히 받았다.

 

6월 2일 갑진

이학(李壆)207)  이 복주되었다. 처음에 임금이 역옥(逆獄)이 치만(熾蔓)한 것으로써 추대(推戴)함이 있는가 의심하였는데, 역적 김성(金渻)이 승복한 후에 과연 추대하려 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김성이 이미 숨이 끊어져 미처 끝까지 조사하지 못했는데, 이때 대신(臺臣)이 학을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김상로(金尙魯)에게 물으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학은 참으로 죄가 있으나 이미 이 옥사와는 상관이 없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간 역시 반드시 종신(宗臣)으로 죄가 있는 자가 단지 그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렇게 청한 것이다."
하고, 이천보(李天輔)에게 물으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대론(臺論)이 이미 나왔으니 지체하며 윤허하지 않아 혹시 다른 변이 있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아 있는 종신(宗臣)이 얼마 되지 않으니, 슬프지 않은가?"
하고, 마침내 대간의 청을 윤허하고, 영기(令旗)로써 밤에 서소문(西小門)을 열고 학을 체포하였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학을 국문하니, 학이 공초하기를,
"무진년208)   동짓달에 신의 형 집에서 시제(時祭)를 지냈는데, 권혜(權嵆) 형제를 맞이하였습니다. 제사 지내기를 마치고 신의 형이 신주(神主)를 받들고 사당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횃불을 들고서 신을 불러 봉서(封書) 하나를 보였습니다. 그 봉서 겉에는 ‘간표신사(看標信使) 오명항(吳命恒) 봉교(奉敎) 경봉(敬封)’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날 동지(冬至) 문안(問安)에 입참하였다가 집으로 돌아온 후, 신의 형이 또 신을 불러 말하기를, ‘이 글 가운데 「풍운(風雲)이 변화하는 상(象)이다.」라고 한 것은 아주 괴이하니, 마땅히 불태워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처음 신의 형제가 이 글을 보는 즈음에 권혜 형제가 집 모퉁이에 서 있다가 몰래 보았습니다. 초4일에 권혜가 갑자기 와서 신의 형에게 묻기를, ‘집안에 전해오는 가훈(家訓)이 있는가, 몽조(夢兆)가 있는가, 천서(天書)를 얻었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세 가지 설문(設問)으로 초5일에 신의 형이 청대(請對)하여 주달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추형하니, 학이 공초하기를,
"그 봉서의 다른 한쪽 가에는 ‘간표신사 오명항 봉교 경봉’이라 쓰여 있었고, 한쪽 가에는 ‘풍운이 변화할 상이다.’라고 쓰여 있었으며, 또 ‘열어 보면 만인(萬人)이 화열(和悅)할 것이요,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조용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신의 형이 곧바로 불에 넣어버렸다고 앙달하였기 때문에 신이 처음에 숨기고 거짓말을 하였지만 지금은 바른 대로 고합니다. 그 글의 뒷면을 신이 과연 보았습니다."
하고, 이어서 그 글 가운데에 있는 말을 외었는데, 들먹인 몇 구절은 마치 자신이 지은 것처럼 술술 외었다. 처음에 임금이 학을 문초하면서 차마 나와서 보지 못하고 문을 닫고 앉아 있었는데 학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이 표독스러웠다. 또 스스로 요사한 그 글을 외우겠다고 하였는데, 말의 뜻이 아주 음흉하여 역절(逆節)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권혜와 권집에게 있어서도 아주 아까워하는 뜻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주공(周公)이 관채(管蔡)에게 한 일209)  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대사간 유언민(兪彦民), 장령 임희교(任希敎), 교리 홍명한(洪名漢)이 아뢰기를,
"이번의 흉적은 지난 사첩(史牒)에 없던 바인데, 소굴이 비록 드러났지만 뿌리를 뽑지 않아 귀신과 사람들이 근심하고 분해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장전(帳殿)에서 친히 물으실 때 역적 학 형제가 권혜·권집과 체결하여 요서(妖書)를 꾸며내 몰래 불궤(不軌)를 도모한 정상이 이미 모조리 밝게 나타났습니다. 더군다나 역적 학은 공초를 바칠 때에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으니, 그 패만하고 흉악함에서 더욱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나타났습니다. 초사 가운데의 망측한 말과 이번의 흉서(凶書)는 맥락(脈絡)이 서로 관통합니다. 이증(李增)210)  이 죽은 후에 그가 여러 적에게 의해 추대된 것이 남김없이 탄로났습니다. 왕법(王法)이 지엄하여 결코 잠깐이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니, 청컨대 빨리 왕부(王府)211)  로 하여금 율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명하기를,
"이해(李垓)212)  ·이기(李圻)213)  의 예에 의해 거행하고 처교(處絞)한 후 노적(孥籍)은 법대로 하라."
하였다. 삼사에서 또 아뢰기를,
"청컨대 역적 증에게 대역률(大逆律)을 추시(追施)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김적희(金績熙)를 국문하고 전교하기를,
"이번에 김적희의 일을 인하여 《태학일기(太學日記)》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물고(物故)된 이징하(李徵夏)를 또 멋대로 묵벌(墨罰)에서 해제시켰으니, 그때의 재임(齋任)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삼수부(三水府)에 연한을 정하지 말고 정배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죄인 김적희가 역적 유생(儒生)의 묵벌을 해제시킨 것은 일기 가운데 이름을 들어 기록된 자가 없어 이성술(李聖述)과는 차이가 있으니, 참작하여 남해현(南海縣)의 섬으로 정배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원묘(元廟)의 옛집인 송현(松峴) 본궁(本宮)에 나아가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사우(祠宇)를 봉안(奉安)하였는데, 인빈 김씨는 바로 원종 대왕을 낳은 친(親)으로 사우가 예전에는 이증(李增)의 집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이미 증에게 역률(逆律)을 시행해 그대로 봉안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날에 임금이 도승지 정홍순(鄭弘淳)에게 명하여 사우를 송현궁으로 받들고 가게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본궁(本宮)으로 가서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예관(禮官)을 불러 전교하기를,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있어 어찌 추숭(追崇)과 승통(承統)이 다르겠는가? 육상궁(毓祥宮)의 예에 의해서 궁원(宮園)으로 인빈을 모시고자 하며, 이렇게 한 연후에야 내가 원묘를 만나 뵈어 절을 할 수 있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다른 말이 없었다. 임금이 입궁(入宮)하여 참포(黲袍)를 입었는데 바로 기신(忌辰) 치재복(致齋服)이다. 사우에 의장(儀仗)과 고취(鼓吹)를 갖추고 이르렀으며, 명하여 연석(筵席)과 상탁(床卓)을 갖추도록 재촉하였다. 또 명하여 궁원(宮園)의 호(號)를 의논해 올리게 했는데 궁은 저경(儲慶)이라 하고, 원(園)은 순강(順康)이라 하였다. 봉행이 늦어진 것으로써 예조의 세 당상을 파직하고, 승지 이경조(李景祚)를 체직하였으며, 각사(各司)의 낭리(郞吏)로서 죄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정보(李鼎輔)를 예조 판서로, 송수형(宋秀衡)을 예조 참판으로, 윤동섬(尹東暹)을 예조 참의로, 임위(任瑋)·홍명한(洪名漢)을 승지로 삼았는데, 계속해서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고, 김상로(金尙魯)를 상시 봉원 도감 도제조(上諡封園都監都提調)로 삼았다.

 

이날에 어가(御駕)가 종묘를 지나게 되었는데, 임금이 어가에서 내려 엎드려 눈물을 흘리니, 대신들이 위로하며 만류하였다. 한참 후 가마에 올라 판의금(判義禁) 신만(申晩)에게 말하기를,
"풀을 제거하면서는 마땅히 뿌리를 없애야 하니, 이관(李爟)과 이당(李爣)은 그 〈유배간〉 땅에서 정법(正法)해야 한다.
하였는데, 관과 당은 이학의 서숙(庶叔)으로서 함께 요서(妖書)를 보아 전에 이미 정배하였었다.

 

하교하기를,
"저경궁(儲慶宮)에 시호를 올린 후 고묘(告廟)·반교(頒敎)·진하(陳賀)를 예에 의해 거행하라."
하였다.

 

승지를 보내 의창군(義昌君)214)  과 낙선군(樂善君)215)   묘(廟)에 치제(致祭)하였다.

 

경성(鏡城)·부령(富寧) 등의 고을에서 청(淸)나라 차사(差使)에게 바치는 해호(海戶)에서 받아들이는 어곽(魚藿)을 혁파하고 육진(六鎭)의 선두세(船頭稅) 예에 의해 참작하여 감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박치문(朴致文)이 원중회(元重會)를 논한 일을 듣고서 하교하기를,
"조적법(糶糴法)216)  이 엄중하여 비록 향리에 있는 대신의 집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먼저 독촉해야 하는데 하물며 다른 곳에서 이겠는가? 지금 듣건대 사간 박치문이 한 재신(宰臣)을 위하여 원중회의 파직을 청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대간의 체모이겠는가? 박치문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라. 경기 수사 원중회는 이제 머뭇거릴 단서가 없으니, 비국으로 하여금 신칙하여 직임을 살피게 하라."
하였다.

 

6월 3일 을사

임금이 저경궁(儲慶宮)의 고유제(告由祭)를 친히 행하고 환궁하였다.

 

6월 4일 병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대사간 유언민(兪彦民), 집의 서명응(徐命膺)이 연명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아! 무신년217)   이래로 역적을 징토(懲討)하는 법이 너무 관대한 잘못을 면치 못하여 원악(元惡)에게 상형(常刑)을 똑바로 시행하지 못해 흉악한 무리들이 더욱 꺼림이 없게 되었습니다. 역적 이탄(李坦)218)   이후에 또 이증(李增)이 있었고, 역적 증 이후에 또 이학(李壆)이 있게 되었습니다. 대개 그 흉악한 모의와 역절(逆節)이 전후 서로 관통한 것은 오로지 난리의 근본을 징계하지 못하고 주토(誅討)가 엄하지 못한 때문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 더군다나 역적 탄의 아주 흉한 정절(情節)은 옛날에 없던 바로서 양사에서 진청한 것이 거의 30년이나 되도록 아직껏 한번의 윤허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손으로 요서(妖書)를 꾸미고 몰래 불궤(不軌)한 일을 도모한 증과 학은 비록 해당되는 율을 시행했다고 하더라도 이름이 흉한 격문(檄文)에 올라 감히 방자하게 난리를 꾸민 역적 탄은 아직껏 왕법에서 도피하고 있으니, 어떻게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풀고 난역(亂逆)을 무서워하는 마음을 두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역적 탄에게 노륙(孥戮)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거의 10년 동안 서로 버티어 온 것은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지금 학 이후에는 마침내 억지로 마음을 억제하기가 어려워서 애써 윤허한다."
하였다.

 

죄인 윤광찬(尹光纘)을 다시 배소(配所)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윤광찬의 공초한 바에 별달리 교묘하게 꾸밈이 없고, 경오년219)   식년(式年)에 비로소 깨달아 추증(追贈)한 위훈(僞勳)을 버리어 족보(族譜)와 시권(試券)에 모두 기록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참작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다. 여러 식년동안 몽롱하여 비록 그 스스로가 살피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제방(隄防)을 엄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엄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대로 전의 배소로 압송해 보내라."
하였다. 대사간 유언민, 집의 서명응 등이 윤광찬을 빨리 신문하도록 명하라고 같은 말로 앙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주대(奏對)가 잘못된 것으로 유언민을 체직하고, 임위(任瑋)를 대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승지에 제수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순강원(順康園)의 수호군(守護軍)을 궁원(宮園)의 식례(式例)에 의해 거행해야 하니, 수호군 원호(元戶) 30명을 예에 의해 병조로 하여금 충정하여 입역(立役)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관(李爟)과 이당(李爣)의 검시(檢屍)를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친국을 파하고, 의금부에서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6월 5일 정미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인빈(仁嬪)의 죽책문(竹冊文) 제술(製述)을 사양하기를,
"신은 변려문(駢儷文)을 익히지 못하였고, 또 관각(館閣)을 지내지 않아서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비답하기를,
"내가 다시 뭐라고 유시(諭示)하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멀리 장릉(章陵)220)  을 바라보라."
하고, 시신(侍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비록 이 글을 짓더라도 어찌 이름이 손상되는 데 이르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에 나아가 봉원 도감 제조(封園都監提調) 이하를 인견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원소(園所)의 도형을 올리고 아뢰기를,
"원소의 사초(莎草)221)  로 들어갈 양을 지방관 및 인근 고을에 나누어 정했으니, 청컨대 한결같이 계유년222)  의 예에 의해 저치미(儲置米)를 획급하여 민폐를 없애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은인(銀印)의 제양(制樣) 및 죽책(竹冊)의 서식(書式)은 모두 계유년의 예에 의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원소의 구 표석(表石)과 석물(石物) 역시 계유년의 예에 의해야 하고, 곡장(曲墻)은 옮기지 말며 또한 구례에 의해 단지 기와만 고쳐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원소의 국내(局內)에 있는 촌사(村舍)는 철거하게 하고, 전답은 묵히게 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묘(墓)를 지키는 노복(奴僕)은 이미 면천(免賤)하게 하였으니, 더불어 살고 있는 양민(良民)과 함께 수호군에 충정해서 그대로 살게 하고, 국내의 전답은 본래 원소에 속한 것이며, 국외의 백성들 전답은 모두 해조로 하여금 사들여 위전(位田)을 만들어 묵히지 말게 해야 한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저경궁(儲慶宮)의 상시 고유제(上諡告由祭) 및 봉안제(奉安祭)를 마땅히 친히 행해야 하니, 독책 독인관(讀冊讀印官)을 종신(宗臣) 가운데서 차출해 채우라. 진하(陳賀)할 때에는 단지 정부(政府)·육조(六曹)에서는 표리(表裏) 물선(物膳)만을 거행하고, 외방에서는 단지 전문(箋文)만 봉진(封進)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미 원소(園所)를 봉하고 시호를 정했으니, 어첩 보략(御牒譜略) 및 팔고조도(八高祖圖)를 예에 의해 수정하라. 선대의 증직(贈職) 역시 계유년의 예에 의해 거행하고, 증 영상의 봉사손(奉祀孫)은 즉시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지금은 사체가 전일과 다르니, 증 영상과 이부인(李夫人)의 묘에 예관을 보내 치제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숙의(李淑儀)와 의창군(義昌君)223)  의 묘는 금후 한결같이 용성 대군(龍城大君)의 예에 의해 수진궁(壽進宮)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고, 의창군방(義昌君房)의 전답과 노비는 수진궁으로 보내 제수(祭需)에 보태게 하라."
하였다.

 

안흥군(安興君) 이숙(李琡)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는데, 숙은 바로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봉사손(奉祀孫)이다. 날 때부터 귀가 먹고 벙어리였기 때문에 주대(奏對)에 모두 문자로 하였는데 이날 글로 아뢰기를,
"소신이 어제 갑자기 두 왕손(王孫)의 제사를 임시로 주관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의리와 분수로 헤아리면 마땅히 봉행해야 하나 제주(題主)를 고치는 한 절차는 의난(疑難)이 없지 않습니다. 의창군 신(臣) 이광(李珖)은 바로 선묘(宣廟) 때의 왕자로 신의 고조부(高祖父) 능창 대군(綾昌大君) 신 이전(李佺)의 삼촌숙(三寸叔)이니, 신의 오대 방조(旁祖)입니다. 낙선군(樂善軍) 신 이숙(李潚)은 바로 인묘(仁廟) 때의 왕자로 신의 증조부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의 동생이니, 신의 오촌(五寸) 증대부(曾大父)입니다. 두 대(代)의 신위를 이제 마땅히 제주(題主)를 고쳐야 하는데 일이 변례(變禮)에 관계되니,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재처(裁處)를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써서 보이게 하기를,
"의창군의 신주에는 ‘오대 방조고(五代旁祖考)’라 일컫고, 방제(旁題)에는 ‘오대 방손(五代旁孫)’이라고 일컬으라. 낙선군의 신주에는 ‘증계조고(曾季祖考)’라 일컫고 방제에는 ‘증질손(曾姪孫)’이라 일컫도록 하라."
하니, 숙(琡)이 물러갔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안흥군(安興君)에게는 제사가 많으니, 의창군과 낙선군의 사패 전답(賜牌田畓)을 안흥군 집으로 보내 제수(祭需)에 보태게 하라."
하였는데, 대개 두 왕자의 제사 역시 이증(李增)의 집에서 받들었기 때문이다.

 

서종급(徐宗伋)을 우참찬으로, 조영국(趙榮國)을 우부빈객으로, 남태저(南泰著)를 문학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좌부 빈객으로 삼았다.

 

이때 봄가뭄이 들어 곡식이 상하였고, 여름에 들어선 후에 비록 비가 왔지만 양맥(兩麥)이 흉작이 되었으며, 관서에 우박이 내린 것이 또 매우 예사롭지 않았는데 오직 관북만이 조금 나았다. 경기와 삼남에는 여역(癘疫)이 또 크게 치성해서 죽은자가 잇달았다.

 

6월 7일 기유

임금이 명릉(明陵)의 기신제(忌辰祭)에 쓸 향(香)을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서 친히 전하였다.

 

6월 8일 경술

임금이 저경궁(儲慶宮) 고유제(告由祭)에 쓸 향을 명정전에서 친히 전하였다.

 

이창수(李昌壽)를 승지로 삼았다.

 

6월 9일 신해

임금이 순강원(順康園) 고유제에 쓸 향을 명정전에서 친히 전하였다.

 

6월 10일 임자

사간 심발(沈墢)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신 적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어찌 이번의 역변(逆變)과 같은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조술(祖述)하고 전법(傳法)함이 하루 아침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대개 이광좌(李光佐)는 본디 음험한 성품으로는 오랫동안 오로지 와주(窩主)의 권한을 쥐고서 자신이 무신년224)  의 변을 겪고도 조금도 징계되는 뜻이 없어 단단히 굳히고 가리고 막아서 신축년225)  ·임인년226)  의 남은 논의를 사수(死守)하고 아래로 종자(種子)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신치운(申致雲)과 심악(沈) 등 여러 적의 천고에 없는 난역(亂逆)을 길들이게 했으니, 그 근본을 따지자면 실로 화란의 괴수가 됩니다. 신은 대조(大朝)께 우러러 품하여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와 함께 아울러 역률(逆律)을 시행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조태억(趙泰億)의 죄상에 이르러서는 이미 전후의 합달(合達)에 자세하여 지금 다시 조목으로 나열할 필요는 없지만 그 부범(負犯)으로 논하면 결단코 용서할 수가 없는데, 직첩(職牒)을 환수한 박벌(薄罰)로 감단(勘斷)함이 너무 관대함을 면치 못했으니, 역시 마땅히 대조께 우러러 품하여 빨리 추탈(追奪)하는 법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지평 서유량(徐有良)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승지 윤광소(尹光紹)는 천성이 간사하고 마음가짐이 사특하여 모든 공(公)을 등지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에 팔뚝을 걷고 담당하지 않음이 없어서 식자들이 걱정해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을 만남에 있어서는 성명(性命)이 학(學)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향리에 살면서는 도척(盜跖) 같은 행실이 있었으며, 심지어 이름이 돈을 사사로이 주조(鑄造)한 옥사에 들기까지 했으니, 평일의 행실이 형편없는 형상을 대개 볼 수가 있습니다. 또 윤광찬(尹光纘)을 형으로 두어 위훈(僞勳)의 증직(贈職)을 쓰도록 내버려 두었고, 역적 심악(沈)을 벗으로 삼아 서로 추중(推重)해 원류(源流)와 맥락(脈絡)을 교결함이 서로 분명하게 관통해서 그의 얄팍한 글이나 말로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속이고 꾸미는 것을 일삼아 마침 인심을 무너뜨리고 세도(世道)를 함몰(陷沒)시키는 밑천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이처럼 엄히 징토(懲討)하여 소굴을 깨뜨리는 날을 당해서 용납해 그냥 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동래 부사 임상원(林象元)은 평일의 기량(伎倆)이 ‘편당(偏黨)’이란 두 글자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번 연중(筵中)에서 의리(義理)에 대해 아뢴 것은 그 마음을 따져보면 본디 헤아리기가 어려웠으며, 더군다나 역적 신치운(申致雲)이 지은 재기(齋記)를 관전(官錢)으로 판에 새겨 장차 걸려고 한 형상에서 그가 평소 사모하고 좋아했음이 범연치 않았음을 알 수 가 있어 듣는 사람들이 일제히 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은, 전 승지 윤 광소와 동래 부사 임상원에게 아울러 아주 먼 변방으로 찬축하는 법을 시행하기를 결단코 그만두어서는 안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6월 11일 계축

헌납 남학종(南鶴宗)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찬집(纂輯)하라는 명은 실로 성상께서 윤강(倫綱)을 바로잡고, 난역을 막으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으로 참으로 훌륭하고 아름답습니다. 대저 역적을 다스리는 방도는 오직 그 소굴을 모조리 깨뜨리고 뿌리를 뽑는데 있는데, 저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 세 괴수가 소굴이 되고 뿌리가 되어 실로 조태구(趙泰耉)·유봉휘(兪鳳輝)와 한 꿰미로 관통되어 원래 말할 만한 차등이 없는데 유독 어찌 요행히 해당되는 법을 도피하여 차등을 두어 기록해 싣겠습니까? 신은 이광좌·최석항·조태억을 빨리 대조께 품하여 한결같이 조태구·유봉휘의 예에 의해 마땅히 시행해야 할 율을 시행하고, 고루 찬집(纂輯)해 싣기를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어제 심발(沈墢)의 글에서도 감히 다른 의견을 내었음을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대저 세 괴수의 흉악한 마음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니,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 글이 한번 나오자 여정(輿情)이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신은 심발에게 마땅히 멀리 찬축하는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여러 대간의 글을 가져다 보고 하교하기를,
"이제 세 대간의 글을 보니, 그 말이 어찌 그리 매서운가? 오늘 한 가지를 더 청하고, 내일 한 가지를 더 청하니, 언제 그칠 것이며 율(律)인들 어찌 감당하겠는가? 새롭게 하기만을 힘써 한번 돌고 또 돌아서 이처럼 과중(過中)하게 되니, 여러 대관을 위해 개탄한다."
하였다.

 

금부(禁府) 및 전옥(典獄)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했는데, 날씨가 무더워서였다.

 

조중직(趙重稷)을 집의로, 이기덕(李基德)을 장령으로, 유수(柳脩)를 지평으로, 홍경해(洪景海)를 정언으로, 정상순(鄭尙淳)을 부교리로, 홍준해(洪準海)를 수찬으로 삼았다.

 

구성임(具聖任)을 판의금(判義禁)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6월 13일 을묘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여러 대간이 말한 토역(討逆)의 일을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에게 물으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무신년227)   흉역(凶逆) 이순관(李順觀)의 무리가 차마 듣지 못할 흉언을 한 것은 오로지 이광좌가 잘못을 감추어 숨긴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광좌가 만일 스스로 죄를 이끌어 흙탕에 머리를 묻고 죄를 청했더라면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거의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 상신 조문명(趙文命)이 이를 권유하자, 이광좌가 처음에는 허락했다가 나중에는 배신(背信)하여 금년에 신치운이 또 나왔으니, 그 죄가 어찌 추탈에만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6월 14일 병진

예조에서 아뢰기를,
"역적 이학(李壆)을 정법(正法)하였으니, 이는 실로 종사(宗社)의 막대한 경사여서 응당 행하여야 할 법을 폐할 수 없습니다. 고묘(告廟)·반교(頒敎)·진하(陳賀) 등의 절차를 마땅히 날짜를 가려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숙의(淑儀)        이씨(李氏)를 추증하여 경빈(慶嬪)으로 삼았다. 숙의는 바로 명종(明宗)의 후궁이며 인빈(仁嬪)의 표자(表姊)228)                  로 인빈이 어려서부터 의지하였었는데, 인하여 선조(宣祖)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 왔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인빈에게 이미 시호를 올리고 봉원(封園)한 것으로써 숙의도 마땅히 근본을 소급해서 증직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인하여 친히 묘갈(墓碣)을 써서 기백(畿伯)으로 하여금 세우게 하였다.

 

정광충(鄭光忠)을 형조 참판으로, 한사직(韓師直)을 헌납으로 삼았다.

 

6월 15일 정사

경상도 유생 강유(姜維) 등이 상서하여 청하기를,
"이광좌·최석항·조태억에게 아울러 역률(逆律)을 추시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6월 18일 경신

황해 감사 김양택(金陽澤)이 상서하기를,
"예로부터 흉추(凶醜)를 절도(絶島)로 편배(編配)한 것은 대개 나라 안에서 함께 살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저들처럼 감률(減律)하여 노예를 삼은 역얼(逆孼)들은 으레 모두 거친 섬으로 보내 엄히 수금(囚禁)했던 것입니다. 다만 본도의 백령도(白翎島)와 초도(椒島) 등지는 다른 도와 다름이 있어서 빙둘러서 등주(登州)와 내주(萊州)가 바라보여 한 번의 항해로 통할 수가 있으며, 매년 봄·여름 고기를 잡을 때면 황당선(荒唐船)이 출몰하지 않은 날이 없어서 섬 사람들이 항상 보아 괴이하게 여겨 놀라지 않아 습속처럼 서로 익숙해 물정(物情)이 생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도망한 도적이나 주인을 배반한 노예가 모여 드는 숲이 되어 복용(服用)과 언모(言貌)가 교화(敎化) 밖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뭇 역얼을 성교(聲敎)를 드물게 입은 땅에 내쳐서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져 한 촌락(村落)을 이루었습니다. 저들 나라를 원망하고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이미 세상에 끼이지 못할 것을 알고서 효경(梟獍)229)  같은 성품과 살무사 같은 독(毒)을 몰래 품고 있으니 어찌 뜻밖의 근심이 없을 줄을 알겠습니까? 더군다나 이 두 섬에 백성을 모아서 진(鎭)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황당선을 막아 내쫓을 터전을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농기구와 창자루를 잡고 오랫동안 추격하여 쫓는 역을 하느라 생산하는 일을 할 겨를이 없어 자신의 호구(糊口)도 오히려 곤궁함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제 수십명의 역적 종자를 이들에게 주어 접대하고 지키게 한다면 그 형세가 반드시 아침 저녁 사이게 지탱하지 못하고 서로 잇달아서 흩어지게 될 터이니, 이는 해방(海防)을 중히 여기고 섬 백성을 돌보는 도리에 있어서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대조(大朝)께 우러러 품하여 유사(有司)에게 하령하여 금년 두 섬에 편배(編配)한 자를 한결같이 다른 도의 절도(絶島)로 이배(移配)하고, 이후에는 마땅히 편배해야 할 무리를 다시는 초도(椒島)와 백령도(白翎島) 두 도에 보내지 말아서 변방의 근심을 끊고 민폐를 없애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5월부터 큰 비가 내려 충청도는 평평한 육지가 바다가 되고 산등성이와 골짜기가 바뀌어 강변 18개 고을의 인가(人家)가 무너지고 떠내려간 것이 9백여 호였으며, 전라도에서는 각종 곡물이 해를 입고 떠내려가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6월 19일 신유

예조에서 아뢰기를,
"육상궁(毓祥宮)의 중삭제(仲朔祭)는 춘분(春分)·하지(夏至)·추분(秋分)·동지(冬至) 날에 설행하니, 이번 저경궁(儲慶宮)의 중삭제 역시 이에 의해 정식(定式)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경상도 유생 이윤복(李允復) 등이 상서하여 다시 거듭 이광좌·최석항·조태억 등에게 역률(逆律)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따르지 않았다.

 

6월 21일 계해

임금이 세자를 거느리고 저경궁에 전배(展拜)하고, 인하여 재숙(齋宿)하였는데 세자에게 먼저 환궁(還宮)하면서 효장묘(孝章廟)에 들러 전배하게 하였다.

 

6월 22일 갑자

새벽에 좌참찬 서종급(徐宗伋)에게 명하여 경혜 인빈(敬惠仁嬪)에게 시책보(諡冊寶)를 올리라 명하고, 이어서 친제(親祭)를 행하고 육상궁에 들러 전배하고, 또 효장묘(孝章廟)·의소묘(懿昭廟)를 둘러보고 환궁하였다. 이날에 빈궁(嬪宮)이 저경궁의 묘현례(廟見禮)에 대가(大駕)를 따라 갔다가 효장묘와 의소묘를 들러 내전으로 돌아왔다.

 

죽책문(竹冊文)에 이르기를,
"유세차(維歲次) 을해년 6월 계묘삭(癸卯朔) 22일 갑자에 국왕 【어휘(御諱)이다.】 은 머리를 조아리며 책문(冊文)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큰 복을 만대에 물려주셨으니, 그 의범(懿範)을 그리워하여 백년이 지난 오늘날 전례(典禮)를 닦아 시호(諡號)를 올려 감히 아름다움을 밝히기 위해 경건히 정성을 표고자 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인빈(仁嬪)께서는 행실이 단정하고, 성품이 온순하시어 어린 나이에 명가(名家)의 간택(揀擇)에 응하셨을 때는 장추궁(長秋宮)230)  의 기이한 꿈과 일치되었고, 현철한 의범은 육궁(六宮)231)  의 칭송이 자자하여 후비(后妃)의 덕화(德化)를 도우셨습니다. 복된 자리에 처하셨으나 두려운 마음을 가져 아름답고 길한 일이 더욱 이르게 하고, 위태로운 처지를 당하여서는 끝내 형통하게 해 화순(和順)의 심덕(心德)이 더욱 드러나셨습니다. 그리하여 경사(慶事)를 쌓아 나라가 넉넉해지게 하셨고, 풍성한 복을 내려 왕손(王孫)이 번창하게 하셨는 바 성자(聖子)께서 그 음덕(陰德)을 이어 연익(燕翼)232)  의 공적을 남기셨고, 신손(神孫)께서는 보위(寶位)에 올라 마침내 용비(龍飛)233)  의 위업을 이룩하셨습니다. 그 기조(基祚)가 오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계도하고 보우해 주신 덕택 때문이니, 아득한 옛일이라 하여 어찌 물려 주신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높이 받드는 전례(典禮)가 합당하다 할지라도 그 덕에 비추어 표장(表章)이 부족하여 사제(私第)에서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었으니 어찌 사모하는 마음을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의문(儀文)이 열조(列朝)에 미치지 못하니 의당 추보(追報)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므로 작년에 장릉(章陵)의 구저(舊邸)를 수리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지난 봄에 풍양(豊壤)234)  의 높은 언덕으로 찾아가 뵈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일어났습니다. 어버이를 드러내는 전례에 의거하여 궁원(宮園)의 호를 올리고 사묘(祠廟)를 더욱 빛내어 신령(神靈)을 이곳에서 제사하오니 이 일이 오늘에 이루어진 것은 하늘의 뜻인 듯하여 이 마음에 거의 유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시호를 ‘경혜(敬惠)’라 올리오니 삼가 바라건대, 작은 정성을 살피시어 아래로 강림(降臨)하시어 이 아름다운 일을 역사에 기록하여 전해지도록 해주시고 왕실(王室)을 음덕(陰德)으로써 도와 경사가 이어지게 하소서. 재배하며 시책을 올립니다."
하였는데, 영돈녕부사 이천보(李天輔)가 짓고, 겸 이조 판서 신만(申晩)이 썼다. 은인(銀印)의 전문(篆文)에는 ‘경혜인빈지인(敬惠仁嬪之印)이라 썼는데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썼다.

 

저경궁 상시 제집사 절목(儲慶宮上諡諸執事節目). 상책인관(上冊印官) 【찬성(贊成)이 유고(有故)이면 참찬(參贊).】  독책관(讀冊官) 1명 【종신(宗臣).】 , 독인관(讀印官) 1명 【종신(宗臣).】 , 봉책관(捧冊官) 【문신(文臣) 6품(六品) 안에서는 종신 및 내시.】 , 봉인관(捧印官) 2명 【문신 6품 안에서는 종신 및 내시.】 , 책안(冊案)을 드는 자 2명 【참외(參外) 안에서는 내시.】 , 인안(印案)을 드는 자 2명 【참외 안에서는 내시.】 , 집사자(執事者) 각 2명 【충찬위(忠贊衛).】 이다.

 

상시책인 의주(上諡冊印儀註). 시책인(諡冊印)이 도감(都監)에서 대궐 안으로 들어올 때에 도감의 당상·낭청과 봉책관(捧冊官) 이하가 흑단령(黑團令)을 갖추어 입고 책인(冊印)을 받들어 각기 채여(彩轝)에 넣어 모시고 명정전(明政殿) 동쪽 섬돌 위 2악(幄)으로 가 승지에게 전해 받들어 들어간다. 같은 날 나올 때에는 승지가 또 상책인관(上冊印官)에게 전해주면 상책인관이 책인을 받들고 채여에 담아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본궁(本宮)으로 가는데, 이때 도감의 당상과 낭청 이하가 함께 모시고 가 임시로 본궁 중문(中門) 밖 악차(幄次)에 안치한다.

 

책인(冊印)이 대궐로 들어갈 때 및 본궁으로 들어갈 때에 앞서 가는 세장(細仗)·고취(鼓吹)·고훤(考喧)235)  하는 군사, 금도 부장(禁導部長) 및 임시로 악차(幄次)를 배설(排設)하는 등의 일은 모두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예(例)를 살펴 거행하게 한다.

 

시호와 책인을 올리기 하루 전에 상시책인관(上諡冊印官) 및 여러 집사관(執事官)은 하룻밤 깨끗하게 재계(齋戒)한다. 22일 자시(子時)에 시호와 책인을 올릴 때 상시책인관 이하는 흑단령을 갖추어 입고, 묘문(廟門) 밖으로 들어가 책인을 받들어 상전(尙傳)에게 전해 주어 들어가 의주(儀註)대로 예를 행하고, 상시책인관이 대차(大次) 앞에 나아가 복명(復命)한다.

 

상시책인 친제 의주(上諡冊印親祭儀註). 기일 전에 전설사(典設司) 및 액정서(掖庭署)에서 전하의 대차(大次)를 저경궁(儲慶宮) 중문(中門) 안에 설치하고, 왕세자는 대차 동쪽에 설치하는데 모두 지세의 편리함에 따른다. 전하의 망묘례(望廟禮) 판위(版位)는 저경궁 묘(廟) 안 중앙에 북향(北向)으로 설치하고, 왕세자의 배위(拜位)는 판위의 뒤쪽 동쪽 가까운 곳에 북향으로 설치하며, 왕세자를 지영(祗迎)하는 막차는 집영문(集英門) 밖에 설치한다. 전하는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를 갖추어 입고, 궁을 나설 때에 종친(宗親)과 문무관은 흑단령 차림으로 초엄(初嚴)236)   전에 돈화문 밖에서 동서로 나누어 차례로 선다. 이엄(二嚴)이 치면 왕세자는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승여(乘輿)로 나아가 집영문 밖으로 가 막차(幕次)로 들어간다. 대가가 이르면 막차에서 나와 지영(祗迎)하고, 그대로 승여로 돈화문 밖에 이르러 승여에서 내려 연(輦)을 타고 대가를 따른다. 종친과 문무 백관은 국궁(鞠躬)하며 지영하여 차례로 시위(侍衛)한다. 저경궁에 이르면 고취(鼓吹)하고, 출궁할 때에는 진열만 하고 진작(振作)하지 않으며, 환궁할 때에는 진작한다. 망묘례(望廟禮) 때가 이르면 종친과 문무 백관은 그대로 흑단령 차림으로 먼저 신문(神門) 밖으로 가고, 전하와 왕세자는 그대로 곤룡포를 갖추어 입은 채 묘(廟) 안으로 들어가 재배례(再拜禮)를 행하며, 백관 역시 재배례를 행한다. 22일 자시(子時)에 전하께서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찬례(贊禮)·승지(承旨)·사관(史官)·헌관(獻官)·제집사(諸執事) 및 백관은 흑단령을 갖추어 입고 예문(禮文)대로 제사를 행한다.

 

빈궁(嬪宮)이 저경궁(儲慶宮)을 알현하는 의주(儀註). 전설사 및 액정서에서 빈궁의 막차를 저경궁 안 편리한 땅에 설치하고, 배위(拜位)는 묘의 섬돌 위 중앙에 북향으로 설치한다. 22일에 빈궁이 출궁할 때에 시강원(侍講院)과 익위사(翊衛司)의 관원이 예에 의해 흑단령 차림으로 배위(陪衛)한다. 저경궁에 이르러 먼저 백관동(百官洞) 어귀 안으로 들어가 국궁하며 지영한다. 묘현례(廟見禮) 때가 이르면 수규(守閨)가 빈궁을 인도하여 배위로 들어가면 전찬(典贊)이 꿇어앉아 찬(贊)하여 국궁(鞠躬)·재배(再拜)·흥(興)·평신(平身)하기를 청한다. 빈궁이 예(禮)대로 재배하고, 마치고는 빈궁이 다시 막차로 들어간다. 환궁할 때가 이르면 빈궁이 연(輦)을 타고 올 때의 의례대로 환궁한다.

 

6월 23일 을축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니,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인빈에게 시호를 올리고 원(園)을 봉한 것을 하례하였다. 반교(頒敎)와 반사(頒赦)를 의례대로 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궁원(宮園)의 제도가 이미 정해져 공역(工役)을 마쳤다. 책인(冊印)의 전례(典禮)를 먼저 행하여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에 합당하게 하는 것을 이른바 보본(報本)이라 하는데 이제야 그 정성을 펴게 되었다. 우리 경혜 인빈(敬惠仁嬪)께서는 일찍부터 유순하고 온화한 의범(懿範)이 드러나시어 동관(彤管)237)  으로 자신을 단속하여 육궁(六宮)의 칭찬이 자자하였고, 청규(靑規)238)  를 가까이서 모시어 이남(二南)239)  의 큰 덕화(德化)에 도움을 주셨다. 신중하고 검속(檢束)하는 법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하고, 겸허하고 순종하는 마음은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모두에게 믿음을 받으셨는데, 곤전(壼殿)께서 병석에 계실 때에는 지극한 정성으로 시약(侍藥)하셨고, 석희(錫禧)240)  의 아름다운 명을 맞이할 때에는 태릉(泰陵)241)  의 기이한 꿈과 일치하셨다. 이것은 대개 깊고 도탑게 쌓으신 인덕(仁德)을 황천(皇天)이 밝게 살피시어 이에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을 탄생하시어 밝은 윤세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열조(列祖)를 지나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여경(餘慶)이 후손을 크게 돕고 있어서 만대의 큰 왕업(王業)이 길이 편안한 것도 돌봐주시고 보호해 주신 덕택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백년 전의 아름다운 자취들이 점차 사라지게 되어 항상 이를 천명하고 선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이미 보휘(報暉)의 정성을 지극히 펴서 그 예를 능히 갖추었는데, 추원(追遠)의 전례를 아름답게 거행하려는 마음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궁원(宮苑)에서 사당을 바라보며 양월(陽月)242)  을 당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많았고, 연로(輦路)를 따라서 사당을 배알(拜謁)하면서 봄 이슬을 밟으니 그리운 마음이 일어났다. 이에 숭봉(崇奉)의 법에 의거하여 길이 사모하는 정성을 폈으나 아직은 남아 있는 옛 궁(宮)을 사당으로 삼고 제향에 따른 의물(儀物)도 사당에 맞추어 경건히 바쳤다. 아름다운 시호를 공경히 올리니 은장(銀章)과 죽책(竹冊)의 글이 밝게 빛나고 풍양(豊壤)의 언덕을 삼가 수리하니, 염각(簾閣)과 석수(石獸)의 제도가 우뚝이 갖추어졌다. 춘관(春官)243)  이 예(禮)를 품정하고, 지관(地官)244)  이 감독하여 공역을 마쳤는데 궁호(宮號)를 저경(儲慶), 원호(園號)를 순강(順康)이라 하니 지극하고 극진하다 할 것이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을 당하여 어찌 윤음(綸音)을 반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청묘(淸廟)245)  에 고유(告由)하는 일을 이미 유사(有司)가 거행하여 법전(法殿)에서 하례(賀禮)를 받자니, 옛날을 회상하여 감동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다.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똑 같으니 온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있음을 알겠으며, 뇌우(雷雨)가 풀리니 혜택이 골고루 베풀어지기를 바란다. 이 달 23일 새벽 이전까지의 사죄(死罪)를 제외한 잡범들은 모두 사유(赦宥)하노라. 아! 방례(邦禮)에 허물이 없어 아름다움을 선양하는 도리를 이미 다했으니, 뭇 백성들이 듣고 모두 기뻐하여 후하게 하는 풍교(風敎)를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이 뜻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 제학 조명리(趙明履)가 지어 올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1책 85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88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어문학(語文學)


[註 237] 동관(彤管) : 붉은 빛의 대붓. 옛날 여사(女史)가 궁중의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할 때 쓰던 붓.[註 238] 청규(靑規) : 동궁(東宮)을 말함.[註 239] 이남(二南) : 《시경(詩經)》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篇名). 주남(周南)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수신 제가(修身齊家)한 일을 노래한 것이고, 소남(召南)은 남국(南國)의 제후(諸侯)가 후비(后妃)의 덕화(德化)를 입은 것을 읊은 것임.[註 240] 석희(錫禧) : 복(福)을내림.[註 241] 태릉(泰陵) : 중종의 비 문정 왕후(文定王后).[註 242] 양월(陽月) : 10월.[註 243] 춘관(春官) : 예조.[註 244] 지관(地官) : 호조.[註 245] 청묘(淸廟) : 종묘(宗廟).

 

정한규(鄭漢圭)를 사간으로, 이길보(李吉輔)·이하술(李河述)을 장령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지의금으로, 정상순(鄭尙淳)을 지평으로, 이수덕(李壽德)을 헌납으로, 이상윤(李尙允)·이의암(李宜馣)을 정언으로 삼았다.

 

우승지 이창수(李昌壽)에게 가자(加資)하였는데, 예방 승지로서 노고한 때문이었다. 경주 부윤 홍익삼(洪益三)은 계유년246)  에 원(園)을 봉할 때 예방 승지로 상전(賞典)에서 누락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울러 가선(嘉善)을 가하였다.

 

전 좌참찬 김진상(金鎭商)이 졸(卒)하였다. 김진상은 김익훈(金益勳)의 손자이다. 신축년247)  ·임인년248)   이후에 벼슬하지 않고 여주(驪州)로 퇴거하여 향당(鄕黨)이 칭찬하였으며, 산수(山水)를 유람하다 일생을 마친 것이다.

 

6월 24일 병인

충훈부에서 상달하기를,
"무릇 공신으로 실직(實職)이 없이 봉군(封君)만 되었다가 몸이 죽으면 으레 실직을 증직합니다. 이번 언성군(彦城君) 김중만(金重萬) 역시 가의(嘉義)로서 실직도 없이 죽었으니, 청컨대 예에 의해 추증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허락하였다.

 

6월 25일 정묘

유언민(兪彦民)을 승지로 삼았다.

 

6월 27일 기사

전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졸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기진은 집에 있으면서 행검(行檢)이 있었고, 조정에 서서는 염간(廉簡)을 지켰으며 순실(純實)하고 곧은 말을 잘하여 아주 고가(故家)의 전형(典刑)이 있었다. 60세에 후모(後母)의 상(喪)에 복을 입으면서 예를 다하다 병이 나 죽어 사람들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61책 85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88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기진은 집에 있으면서 행검(行檢)이 있었고, 조정에 서서는 염간(廉簡)을 지켰으며 순실(純實)하고 곧은 말을 잘하여 아주 고가(故家)의 전형(典刑)이 있었다. 60세에 후모(後母)의 상(喪)에 복을 입으면서 예를 다하다 병이 나 죽어 사람들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

 

6월 28일 경오

임금이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기신(忌辰)에 쓸 향(香)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친히 전하였다.

 

6월 29일 신미

북도 어사 윤득우(尹得雨)가 복명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수령의 다스리는 여부를 묻고서 북청 부사 윤붕거(尹鵬擧)를 잡아다 처리하고 문천 군수 성헌조(成憲祖)는 먼저 파직한 후 잡아 오도록 명하였다. 대개 윤붕거는 흉년에 백성을 진휼하면서 문서를 위조하여 환곡(還穀)의 분수(分數)를 더한 것이 1만 석 가까이 되었고, 성헌조는 균역(均役) 후에 사염분(私鹽盆)을 금하지 않고 구제곡과 바꾸어 곡식 섬이 많이 축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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