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5권, 영조 31년 1755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4.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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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계유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였다.

 

정언 이의암(李宜馣)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역(亂逆)을 다스리는 법에 반드시 거괴(巨魁)를 먼저하는 것은 그 원류(源流)를 막아 끊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저 이광좌·최석항·조태억 세 흉역(凶逆)은, 위로 조태구·유봉휘와 관통되고 아래로는 심유현·박필몽보다 더하여 실로 신축년249)  ·임인년250)  ·무신년251)  의 원악(元惡)입니다. 그리고 이하징·신치운 등 여러 역적에까지 이르렀으니, 아주 방자하고 흉패(凶悖)한 말이 모두 세 흉적의 여론(餘論)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또 어찌 이하징·신치운의 효시(嚆矢)가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청(廳)을 설치하여 찬집(纂輯)하게 한 성의(聖意)는 실로 난역의 본말을 베어내고 춘추(春秋)의 무장(無將)252)  을 엄히 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데 어찌하여 법을 그릇되이 낮추거나 올리어 세 흉인의 악을 도리어 조태구·유봉휘·이하징·신치운의 아래에 기록하겠습니까? 원류(源流)가 거꾸로 되고 편찬하는 차례가 예(例)를 잃어 결문(缺文)이 되었으니, 당세에 반시(頒示)하여 분명히 알게 하겠으며 후세에 전해 보이면 미혹되지 않겠습니까? 대조께 우러러 앙품하여 이광좌·최석항·조태억 세 흉적에게 빨리 노적(孥籍)하는 법을 시행하고, 한결같이 조태구와 유봉휘를 결단한 예(例)에 똑같게 찬집하는 가운데 기록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포도 대장 정찬술(鄭纘述)이 청대(請對)하기를,
"전주 사람 김연수(金延壽)란 자가 하동 화개천(花開川)에 갔는데 그곳에 있는 윤봉환(尹鳳煥)·이주(李澍)란 자가 말하기를, ‘오는 가을에 반드시 남쪽에 난리가 있게 된다.’라고 하였다고 김연수가 상경(上京)하여 사인(士人) 유선중(兪善中)에게 고하였고, 유선중이 신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에 감히 그 형상을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친국을 명하였다.

 

박사눌(朴師訥)을 헌납으로, 이성중(李成中)을 지의금으로 삼았다.

 

7월 2일 갑술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친국하여 유선중(兪善中)을 방면(放免)하고, 김연수를 형신하라고 명하였다.

 

또 중관(中官) 선우신(鮮于愼)을 국문하였다. 처음에 선우신이 거짓으로 내국(內局)에 표지(標紙)를 내려 삼료(蔘料)를 구했는데, 즉시 표지를 찾아들이고 제조 이철보(李喆輔)가 그 상황을 아뢰었다. 임금이 노하여 친국하여 실정을 알아낸 후에 마침내 복주(伏誅)되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친히 역옥(逆獄)을 신문하는 것이 근래에 이루어진 예이기는 하나 역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더군다나 저 선우신이란 자는 그 죄가 바로 절도이니, 그 실정을 알아내어 정법(正法)하는 것은 유사(有司) 하나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어찌하여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 친히 신문까지 해야 하겠는가?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당연한 것처럼 보고 묵묵히 한 마디도 없었으니, 아! 개탄스럽다."


【태백산사고본】 61책 8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88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친히 역옥(逆獄)을 신문하는 것이 근래에 이루어진 예이기는 하나 역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더군다나 저 선우신이란 자는 그 죄가 바로 절도이니, 그 실정을 알아내어 정법(正法)하는 것은 유사(有司) 하나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어찌하여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 친히 신문까지 해야 하겠는가?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당연한 것처럼 보고 묵묵히 한 마디도 없었으니, 아! 개탄스럽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청하기를,
"이관(李爟)253)  과 이당(李爣)254)  의 여러 아들을 아주 먼 변방으로 정배하소서."
하니, 영남의 연해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7월 3일 을해

밤 1경(更)에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다.

 

도망한 죄인 강몽복(姜夢福)이 복주(伏誅)되었다. 강몽복은 바로 강몽협(姜夢協)의 동생인데 이때에 이르러 횡성(橫城) 땅에서 붙잡아 그 땅에서 정법하라고 명한 것이다.

 

이수득(李秀得)을 대사간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사간으로, 안복준(安復駿)을 장령으로, 이성경(李星慶)을 지평으로, 이시건(李蓍建)을 정언으로, 이석상(李錫祥)·이의철(李宜哲)을 부교리로, 윤동도(尹東度)를 대사성으로, 신사건(申思建)·정휘량(鄭翬良)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삼았다.

 

7월 4일 병자

임금이 여러 승지에게 명하여 공사(公事)를 가지고 세자궁(世子宮)에 입대(入對)하라고 하였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아뢰기를,
"본 도감은 당초 설립할 때에 군제(軍制)를 처음으로 창설하느라 모든 수용(需用)이 구차스러웠습니다. 마병(馬兵)·보병(步兵)의 급료(給料)는 탁지(度支)255)  에서 관리하여 삼수량(三手糧)으로 포(布)를 방하(放下)하면 본국에서는 포보포(砲保布)로 나누어 주었는데, 이밖에는 재력이 나올 곳이 없었습니다. 두 갑자(甲子)이전의 경술년256)  에 비로소 복마군(卜馬軍)을 두어 매 대(隊)에서 1명씩 원하는 자로 스스로 말을 준비해 수행할 자를 모집해 합계가 3백 34명이 되었는데, 삭료(朔料)의 경우 별대(別隊)의 나머지 보(保)로 각도에 흩어져 있는 자를 군향보(軍餉保)로 정하여 매년 거두는 쌀의 합계가 4천여 석으로 1년동안 받아들여 겨우 1년의 급료(給料)를 지탱하나 마태(馬太)는 처음부터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군행(軍行) 치중(輜重)의 긴요함과 평시 사역하는 치우친 괴로움은 다른 군에 비할 바가 아닌데 유독 마태가 없는 것은 참으로 불쌍하였습니다. 그후 군문(軍門)에서 마땅히 변통하여 마태를 나누어 주고자 하였으나 계책이 나올 곳이 없어 지금까지 그대로 따라오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경비가 어려운 때를 당해서 비록 감히 경비 가운데서 조치해 주라고 번거로이 청할 수는 없으나 만약 달리 조치할 길이 있다면 어찌 한결같이 그대로 보면서 변통함이 없어야 하겠습니까? 시험삼아 한 달에 매 필(匹)에 콩 6두(斗)로 해서 대략 마련하면 1년에 주는 것이 1천 6백여 석에 불과합니다. 이번 역적 집에서 적몰(籍沒)한 전답 가운데 호조로 들어온 숫자가 많으니, 그 가운데서 3백 결(結)을 한정해서 도감(都監)의 양향청(糧餉廳)으로 옮겨주어 거기에서 거둔 세금으로 매월의 마태를 마련해 지급한다면 경비를 축내지 않고도 군정(軍情)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가 있습니다. 또 이미 금위영(禁衛營)에서 청해서 얻은 예가 있으니, 마땅히 이로써 호조에 분부하여 즉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지평 이성경(李星慶)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바야흐로 찬수청 낭청으로 대죄(待罪)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짓는 것은 대개 장차 의리(義理)를 천명하고, 난역(亂逆)을 징토(懲討)하여 영원히 천고에 없어지지 않을 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니, 그 책이 참으로 중차대합니다. 이미 중차대하다면 그것을 지으면서 근엄(謹嚴)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완성을 갑작스럽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일을 맡은 신하들이 정신을 집중하여 주야로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개국(開局)한 이래로 한 달 동안에 범례(凡例)의 규모도 아직 완전히 마치지 못하였고, 필삭(筆削)·취사(取捨)를 적당하게 하지 못함이 많아서 아직 언제쯤 간행하게 될지 모릅니다. 다만 듣건대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반교문(頒敎文)을 대조께서 실으라는 명이 계시어 본청에서 바야흐로 그중 한두 구절의 말을 뽑아 넣어 역적 김일경을 징토한 본말(本末)을 삼고자 하며, 역적 김일경의 임인년257)   4월 20일의 상소문 가운데 몇 구절 역시 초록(抄錄)한 가운데 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개 역적 김일경의 흉역한 정절이 이 몇 단락의 말 가운데 더욱 분명히 드러나서 이처럼 징토를 엄히 밝히는 때를 당해서 싣지 않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의 천박하고 어리석은 견해는 유독 이와 다르기 때문에 신이 청(廳) 안의 일을 주관하는 당상과 그것을 써서는 안된다고 논하였는데, 의논하는 자가 ‘죄를 성토(聲討)하는데 이 사실을 빼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그 말이 본디 맞습니다. 그러나 또 그렇지 않음도 있으니 그것은 왜냐하면 역적 김일경의 문자 그 어느 것이 흉악하고 참혹하지 않겠습니까만 이 몇 단락은 더욱 천고의 지난 사첩에 없던 흉언이어서 우리 나라의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언인데, 이를 간책(簡策)에 오히려 써서 중외에 반포해야 하겠습니까? 작년에 중신(重臣)들이 구대(求對)하여 불태우기를 청한 것은 실로 뼈를 새기는 분통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것을 따르고 어기는 여부가 각기 하나씩의 의리(義理)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태우지 말라고 명하셨으니, 성의(聖意)가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완성하기에 이르러서는 장차 팔도(八道)에 반포해 보이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아주 흉패한 말을 또다시 기록에 편찬해 선포한다면 오늘의 신민(臣民)이 된 자는 반드시 죽고자 하면서 보려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차마 그 글을 읽고 그 말을 언급하겠습니까? 이제 한가지 일을 들어서 증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여항(閭巷)의 사서(士庶)가 그의 어버이를 욕하는 자를 만나게 되면 그 아들 된 자는 마음이 무너지고 뼈에 사무치게 분해 하며 살고자 하지 않을 것이며 남에게 말하면서는 반드시 ‘어떤 사람이 우리 어버이를 욕했다.’라고 할 뿐이지 어찌 그의 입으로 들먹이며 외어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기를,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말로 욕을 하였다.’라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깊지 않아서 알기 쉬운 일이니, 신하들의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써야 할 것인지 써서는 안될 것인지 말을 다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역적 김일경의 일자 일구(一字一句)와 일동 일정(一動一靜)은 모두 흉역 아님이 없는데 신축년258)   겨울의 소장(疏章) 하나는 그 흉역의 마음이 낭자하여 감추기가 어려워 이 몇 구절의 글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그 가득찬 죄는 본디 이미 나라 사람의 이목(耳目)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편찬하는 가운데 쓰기를, ‘어느 달 어느 날에 김일경이 교문(敎文)을 지었는데 흉언의 망측함은 전대(前代)의 사책(史冊)에도 없던 바였다.’라고 하고, 또 쓰기를, ‘어느 달 어느 날에 김일경이 상소하였는데, 흉언의 망측함은 지난 사첩에도 없던 바였다.’라고만 한다면 그의 역절(逆節)이 어찌 매우 환히 밝게 되지 않겠습니까? 대저 간책(簡策)의 체제는 글이 많아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이 엄하고 뜻이 바른 데 있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난신 적자가 문자로써 임금을 욕한 것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만 전대의 사책에 개략적인 것만 보이는 것이 적지 않음은 참으로 흉역의 문자로 필설(筆舌)을 더럽혀서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책을 담당한 신하가 흔히 간단한 자구(字句)로서 분명한 단안(斷案)을 내려 이곤(李鯀)259)  의 죄는 ‘명을 어기고 일을 그르쳤다.[方命圮族]’라고 쓰는 데 불과했고, 희화(羲和)260)  의 죄는 ‘예(羿)261)  의 당여(黨與)였다.’라고만 쓰는 데 불과했는데도 그 주륙(誅戮)이 부월(斧鉞)에 늠연(凛然)하였으니 이로써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며, 그 죄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이 이로써 밝혀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 옛날을 보는 것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이를 삭제하지 않는다면 신은 오직 빨리 죽어 모르고자 할 뿐이며, 감히 이를 더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등대할 때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7월 5일 정축

임금이 태묘(太廟)의 추향 대제(秋享大祭)에 쓸 향(香)을 명정전(明政殿)에서 친히 전하였다.

 

7월 7일 기묘

유생 장진욱(張震煜) 등이 상서하여 이광좌·최석항·조태억의 죄안(罪案)을 분명하게 게재하여 후세에 보이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종성(李宗城)은 이광좌를 사표(師表)라고 일컬어 방자하게 장주(章奏)에 썼습니다. 박문수(朴文秀)는 지난번 반교(頒敎)하는 날에 그의 집에 누워 있으면서 홀로 입참(入參)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이종성과 박문수의 당역(黨逆)한 죄를 바루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7월 8일 경진

비가 오래 내려 사문(四門)에서 영제(禜祭)를 설행하였다.

 

급제한 조윤옥(趙潤玉)을 방(榜)에서 빼기를 명하였다. 처음에 조윤옥이 신미년262)   문과 정시(庭試)에 합격하였는데, 대신(臺臣)이 시해(豕亥)263)  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으로써 방에서 빼기를 청하였다. 조윤옥이 상서해 면전에서 시험하기를 자청하니, 임금이 듣고서 능부(能否)를 구별하고자 하여 숭문당(崇文堂)에 친림해 제목을 명해 시험했으나 지은 글이 문리(文理)를 이루지 못해 이에 방에서 빼라고 명한 것이다.

 

함경 감사 김한철(金漢喆)을 파직하였다. 이때 북도의 군현(君縣)에서 조적(糶糴)의 절반을 남겨 두는 법을 따르지 않음이 많았는데, 대신이 감사가 검칙을 잘못한 것으로써 죄를 주라고 아뢴 때문이었다.

 

이영휘(李永暉)를 승지로, 서명빈(徐命彬)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9일 신사

임금이 유생 강유(姜維) 등이 동궁에게 상서했다는 말을 듣고서 불러 앞에 와서 읽게 하였는데, 바로 이광좌(李光佐)·최석항(崔錫恒)·조태억(趙泰億)의 죄를 성토하는 내용이었다. 임금이 상소 가운데 있는 ‘암매하여 밝히기 어렵다.[暗昧難明]’라는 네 글자가 기기(忌器)264)                  의 혐의에 저촉된다는 것으로써 조옥(詔獄)에 잡아 넣고 친림하여 형신(刑訊)해 강유·신경일(申敬日)·허익(許) 등 세 사람을 장유(杖流)하였는데, 신경일과 허익은 글을 지을 때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영부사(領府事)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명색이 장보(章甫)265)                  로 의리상 역적의 토벌을 청해야 하는데, 자구(字句)를 뽑아내어 곧바로 역적을 다스리는 법으로써 다스리니 참으로 형정(刑政)의 대체에도 어긋납니다. 성교(聖敎)에서 끄집어 내어 죄를 준 것은 바로 ‘암매(暗昧)’ 등 네 글자인데, 대저 ‘그것을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청하여 암매한 가운데로 돌아가게 한 것은 최석항(崔錫恒)이 저지른 죄여서 전후에 삼사(三司)에서 여러 번 나온 말입니다. 그것을 향유(鄕儒)가 답습한 것이 유독 무슨 큰 죄이기에 이처럼 유관(儒冠)을 벗기고 국정(鞫庭)에서 신문까지 하시기에 이르니, 혹 건덕(建德)266)                  을 위해서 원수를 갚는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노하여 김재로의 파직을 명하였다.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말하기를,
"상소한 유생을 형신함은 보고 듣기에 놀랍습니다."
하니, 답하지 않았다. 태학(太學)의 제생(諸生)이 권당(捲堂)하니, 왕세자가 대사성으로 하여금 권하여 들어가게 하였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이거원(李巨源)을 친국하였다. 이거원은 일찍이 목호룡(睦虎龍)의 위훈(僞勳) 교서를 지었고, 갑진년267)   겨울에는 옥당관(玉堂官)으로 힘껏 조태구·유봉휘·김일경·박필몽을 구원하였으며, 김일경의 교문(敎文)에 있는 흉악한 말을 주석(註釋)을 달아 변명하면서 김일경을 성토하는 자들을 유자광(柳子光)에게 비교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차례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왔고, 신치운(申致雲) 역시 스스로 ‘이거원과 같은 마음이다.’라고 말하여 섬에서 붙잡혀 온 것이었다. 임금이 친히 신문하여 정절(情節)이 이미 탄로나 더 물을 것이 없으니, 효시(梟示)하는 역률(逆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10일 임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이주(李澍)를 신문하니, 이주가 공초하기를,
"신이 과연 비기(秘記)를 윤봉환(尹鳳煥)에게 내어 보이고 이어서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반드시 남쪽에 난리가 있게 되고, 피난한 후에는 장차 좋은 벼슬을 얻게 된다.’라고 서로 수작했습니다."
하니, 역률로 정법하라고 명하였다. 윤봉환을 신문하니, 윤봉환이 공초하기를,
"신이 이주를 가서 보았는데, 이주가 비기를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우선은 하동(河東) 땅으로 피난하여 좋은 때를 기다리라.’라고 하였기 때문에 함께 수작하였습니다."
하니, 비기를 의탁해서 난만하게 흉모를 한 정상이 남김없이 탄로나 모역(謀逆)으로 지만(遲晩)해 정형하였다.

 

7월 11일 계미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도정(都政)을 친히 행하였다. 홍익삼(洪益三)을 대사간으로, 황최언(黃最彦)을 장령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부제학으로, 서명응(徐命膺)을 부응교로, 박상덕(朴相德)을 대사성으로, 조재홍(趙載洪)·김상구(金尙耉)를 승지로, 이유수(李惟秀)를 응교로,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참의로, 김치인(金致仁)을 대사성으로, 해봉군(海蓬君) 이인(李橉)을 동지정사로, 정광충(鄭光忠)을 부사로, 김광국(金光國)을 서장관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이조 참판으로 삼고, 유척기(兪拓基)를 영부사로 제배하였는데, 이조 판서 신만(申晩)과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의 정사(政事)였다. 이조 참판 이후(李)를 지경연으로, 정휘량(鄭翬良)을 지중추부사로, 서지수(徐志修)를 동경연으로 발탁하였는데, 모두 특지(特旨)이었다.

 

수찬 홍양한(洪良漢)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영남 유생의 상서는 말을 잘 가리지 못하여 참으로 망령되고 경솔했는데 그 명색을 물으니 장보(章甫)였고, 그 정성을 살폈더니 역적을 성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처분이 지극히 엄해서 형벌과 찬축이 서로 이어져 저 백수(白首)인 원로(元老)의 신하가 병을 무릅쓰고 천위(天威)의 노여움이 뜰에 가득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날에 글로 진달한 것이 어찌 한 유생을 위해서였겠습니까? 정성이 이르지 못하여 위벌(威罰)이 갑자기 가해졌으니, 《중용(中庸)》 구경(九經)의 가르침에 손상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오늘날의 신하로서 그저께의 하교를 듣고도 어찌 감히 이처럼 옹호하는가?"
하였다.

 

7월 12일 갑신

의금부에서 김정리(金正履)를 추국하였다. 김정리가 공초하기를,
"금년 정월에 박사집(朴師緝)·신치운(申致雲)·심악(沈)과 함께 이거원(李巨源)의 집에서 만났는데, 박사집과 이거원이 말하기를, ‘조태구·유봉휘의 소차(疎箚)와 김일경(金一鏡)의 교문(敎文), 박필몽(朴弼夢)의 흉역은 모두 옳았다’라고 하기에 신도 그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또 이명조(李明祚)와도 이런 말을 하였고 역적 윤지(尹志)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역적질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모역(謀逆)으로 지만합니다."
하니, 법대로 정형하고 노적(孥籍)하였다.

 

7월 13일 을유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은 이 일로 소일(消日)하게 되어 다만 장전(帳殿)에 친림하느라 고될 뿐 아니라 나라 일이 장차 어느 지경에서 탈가(稅駕)268)  하게 될지 몰라 밤늦도록 생각해도 한심함을 깨닫지 못하겠다. 이번에는 크게 징창(懲創)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당론(黨論)의 소치이다. 사람들이 모두 당(黨)과 역(逆)을 둘로 나누지만 그 원류(源流)의 머리를 아는 자는 오직 원인손(元仁孫)의 아비 한 사람뿐이고, 전후해서 매양 섭향고(葉向高)269)  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한쪽에서는 무신년270)   이후부터 스스로 득의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오늘날의 역적을 격성(激成)한 것이 장구령(張九齡)271)  이 말한 바 왕연(王衍)272)  이 석늑(石勒)273)  의 난을 격성했다.’라는 것과 같다. 한쪽에서는 검푸른 색을 흰 색이라고 우기는 자가 있으니, 심악(沈)에 이르러서 극에 다다랐다. 이는 오로지 양쪽에서 양성(釀成)함을 말미암았기 때문에 내가 이번에 하찮은 한세량(韓世良)이나 이공윤(李公胤) 같은 무리에게도 이미 역률(逆律)을 시행하여서, 이후에는 더 이상 남은 자가 없게 되었으니, 이제는 제방(隄防)이 엄하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정계(停啓)한 대신(臺臣)까지 모두 죄주기를 청하면 장차 그칠 날이 없게 될까 염려된다. 한번 사문(斯文)이 대립(對立)한 후에는 바뀌어 살육(殺戮)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나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했으나 추후에 말한 자는 아주 매서웠다. 지금은 이미 승기탕(承氣湯)274)  을 내렸으니 마땅히 보제(補劑)해야 하는데도 도리어 대황(大黃)275)  과 파두(巴豆)276)  를 보태 넣으려 한다. 전일에 독한 약제(藥劑)를 쓰자고 청했던 자는 오히려 할 말이 있겠으나 전일에 보제를 쓰고자 했던 자가 도리어 대황과 파두를 보태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으니, 내 말이 매우 정미(精微)할 것이다."
하였다.

 

남태회(南泰會)를 도승지로, 정기안(鄭基安)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6일 무자

칙사(勅使)의 패문(牌文)이 나와 이후(李)를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7월 17일 기축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이형(李浻)·김연수(金延壽)를 친국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형은 그의 형 이주(李澍)가 수작한 것을 낱낱이 직초(直招)하였지만 무식함이 저절로 탄로나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동생으로서 형을 고발하여 참작할 바가 없지 않으니, 연좌율을 거행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김연수는 그 사람됨을 보면 용서할 수 없으나 국법(國法)으로 논하자면 참작함이 있어야 하니, 흑산도(黑山島)로 정배하라."
하였다.

 

이천보(李天輔)를 영의정에 특배(特拜)하고, 이기경(李基慶)을 동지사 서장관으로 삼고, 전 목사 홍감보(洪鑑輔)에게 통정(通政)을 가자하였다.

 

밤에 비바람이 크게 불어 문묘(文廟) 서정(西庭)의 큰 잣나무 한 그루가 부러져 서무(西廡)의 기둥과 처마가 상했다. 예조에서 아뢰어 위안제(慰安祭) 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7월 18일 경인

태학 유생이 서두(書頭)·서색(書色)이 죄를 입은 것으로써 인의(引義)하여 각자 흩어져 떠나가 재(齋)를 비운 지 이미 6일이나 되었으므로 위안제를 장차 지낼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교하기를,
"내가 비록 덕(德)이 얇으나 군사(君師)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렇게 하교하는데도 사자(士子)들이 반드시 대립해 이긴 후에 그만두고자 한다. 다른 유생을 즉시 들어가라고 권하라. 나는 답하기가 부끄러우니, 이후에는 품할 일이 있으면 동궁에게 품하라."
하였다.

 

7월 22일 갑오

영의정 이천보가 사직하는 글을 올리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고, 출사하기를 권면하였다.

 

7월 23일 을미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이명조(李明祚)를 친국하였다. 이명조가 공초하기를,
"신은 신치운(申致雲)과 서로 친하여 그가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들었고, 또 윤광철(尹光哲)·박사집(朴師緝)과도 친밀합니다. 윤광철이 일찍이 신의 집에 와 자면서 함께 역적 모의를 해 신으로 하여금 내응(內應)하게 하였습니다. 모역(謀逆)으로 지만(遲晩)합니다."
하니, 법대로 정형(正刑)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세에 난역(亂逆)이 자주 일어났는데 천백 가지 괴변이 모두 당론(黨論)에 뿌리하여 그것이 번져서 임금을 꾸짖어 욕하고 군부(君父)를 원수처럼 여겼으니, 이것이 어찌 상정(常情)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우리 나라에 당색(黨色)이 있어온 지 2백 년이어서 시비(是非)가 호오(好惡)를 낳고, 호오가 은원(恩怨)을 낳으며, 은원이 득실(得失)을 낳고, 득실이 살육(殺戮)을 낳아 제(齊)나라와 초(楚)나라가 다투듯이 날마다 싸웠다. 신축년277)  에 이르러 한 종류의 불령한 무리들이 마침내 난역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달갑게 여겼으니, 누가 당론의 폐해가 이에 이르도록 심할 줄을 알았겠는가? 부끄러워하고 경계해야 할 바이다." 


【태백산사고본】 61책 85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590면
【분류】왕실(王室) / 사법(司法) / 변란(變亂)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註 277]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근세에 난역(亂逆)이 자주 일어났는데 천백 가지 괴변이 모두 당론(黨論)에 뿌리하여 그것이 번져서 임금을 꾸짖어 욕하고 군부(君父)를 원수처럼 여겼으니, 이것이 어찌 상정(常情)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우리 나라에 당색(黨色)이 있어온 지 2백 년이어서 시비(是非)가 호오(好惡)를 낳고, 호오가 은원(恩怨)을 낳으며, 은원이 득실(得失)을 낳고, 득실이 살육(殺戮)을 낳아 제(齊)나라와 초(楚)나라가 다투듯이 날마다 싸웠다. 신축년277)  에 이르러 한 종류의 불령한 무리들이 마침내 난역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달갑게 여겼으니, 누가 당론의 폐해가 이에 이르도록 심할 줄을 알았겠는가? 부끄러워하고 경계해야 할 바이다."

 

정극성(丁極星)을 문초하니, 정극성이 공초하기를,
"신은 애초에 잡술(雜術)을 못하는데, 지금 책 표지를 보니 거기에 ‘용(龍)’자가 있어 그것이 잡술책임을 알았으며, 신은 처음부터 화개(花開)에 간 일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여러 차례 형신하였으나, 끝내 지만하지 않아서 어영청에 명하여 효시(梟示)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 역적 윤지(尹志)가 있은 뒤에 도신(道臣)에게 하유(下諭)하였는데, 그 뒤에 또 체포함이 있었으니, 저 호남쪽을 바라보면 밤중에도 민망스럽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별도로 진정시키게 하라."
하였다.

 

지평 정창성(鄭昌聖)과 정언 이상윤(李尙允)이 소회(所懷)하기를,
"급제한 송유(宋瑜)는 사부(士夫)로서 감히 무신년278)   이후에 멋대로 역적 이탄(李坦)279)  의 집에서 아내를 맞았으니, 청컨대 먼 변방으로 찬축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송유가 아내를 맞이한 것은 가장(家長)에게 죄가 있으니, 송유의 아비를 정의현(旌義縣)으로 정배하고, 송유는 종성부(鍾城府)로 정배하라."
하였다.

 

7월 24일 병신

봉원 도감 도제조 김상로(金尙魯)에게 안구마(鞍具馬) 1필을 면급(面給)하고, 제조 홍봉한(洪鳳漢)·이정보(李鼎輔)·이철보(李喆輔), 도청 유한숙(兪漢蕭)에게 모두 가자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있게 시상(施賞)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金在魯)를 서용하여 다시 영중추로 제배(除拜)하고, 윤시동(尹蓍東)을 설서로 삼도록 명하였다.

 

7월 25일 정유

장령        안복준(安復駿)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사기(士氣)란 나라의 명맥(命脈)이어서 그 성쇠에 따라서 나라가 융성하고 침체되는 것입니다. 초야에 있는 사람이 한갓 목욕 성토(沐浴聲討)하는 의리만 중히 여기고 말을 하는 체모를 몰라서 스스로 큰 견책을 받게 됨을 깨닫지 못해 형벌과 찬축이 잇달아 경색(景色)이 처참한데, 이는 나라의 이해에 매우 중요하게 관계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조용히 아뢰어 감회(感回)하게 하소서. 또 심발(沈墢)이 등급을 나누어 율(律)을 청한 것은 이미 매우 잘못되어서 남학종(南鶴宗)이 감론(勘論)한 말과 의리가 매우 엄정하였는데도 이기덕(李基德)이 체차까지 청한 것은 말이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청컨대 전 장령        이기덕을 파직하소서. 한광협(韓光協)의 제매(弟妹)로 이하징(李夏徵)의 며느리되는 이가 늙은 어머니 보기를 원하여 문에 가서 결별(訣別)을 고하였는데, 한광협이 등을 떠밀어 내쫓았으며, 심지어 울부짖으며, 가도록까지 했습니다. 이는 이일재(李日躋)가 생질로서 외숙을 성토한 것과 함께 모두 세변(世變)에 관계되고 아울러 윤기(倫紀)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한광협과 함께 일체로 감죄(勘罪)하여 말세의 풍속을 격려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첫째 건(件)의 일은 오늘날의 신하로서 대조(大朝)의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차마 영구(營救)하는가? 둘째 건의 일은 지나치며, 셋째 건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찬수 당상(纂修堂上)과 편차(編次)하는 사람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찬수하는 대략을 들었었는데 그 예(例)가 《감란록(勘亂錄)》과 같은가?"
하니, 편차하는 사람인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이는 징토(懲討)이기 때문에 매양 그 일을 기록하고, 끝에는 반드시 단론(斷論)이 있는데 신축년280)                  ·임인년281)                   이후의 옥사(獄事)와 경술년282)                  ·을축년283)                  에서부터 금년에 이르기까지를 합쳐 통일해서 만들었습니다."
하고, 찬수 당상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머리말에 이정소(李廷熽)의 상소를 쓰고, 조태구(趙泰耉)의 차자와 유봉휘(柳鳳輝)의 상소를 실었는데, 총론(總論)은 김재로와 함께 상의해 확정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조명리(趙明履)에게 명하여 초본(草本)을 읽게 하였다. 이성중이 말하기를,
"유봉휘의 상소는 단지 말이 음참(陰慘)했을 뿐만 아니라 끝내 경하(慶賀)하는 말이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사직소(辭職疏)가 모골(毛骨)이 송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아도 역시 그렇다."
하였다. 한세량(韓世良)의 상소에 이르러 이성중이 말하기를,
"끝에 가서 한가지 일 운운(云云)한 것은 참으로 매우 흉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뒤에 말하기를,
"내가 비로소 과연 아주 흉악함을 깨닫게 되었다."
하였다. 김일경(金一鏡)의 상소에 이르러서 조명리가 말하기를,
"김일경의 상소는 신이 차마 읽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박상검(朴尙儉)의 옥사에 이르러 이성중이 말하기를,
"여러 날 동안 형신을 가했는데도 즉시 자복(自服)을 받지 못했으니, 그 옥사를 다스림이 느슨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심정옥(沈廷玉)의 아비 심익창(沈益昌)은 과적(科賊)인데 역적 김 일경의 사촌 매부(妹夫)가 됩니다. 원휘(元徽)와 김일경은 모두 영변(寧邊)의 원을 지냈기 때문에 체결하여 맥락(脈絡)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열 여섯 사람의 대계(臺啓)는 역적 김일경이 주장하여 마침내 목호룡(睦虎龍)이 꾸며 낸 것이다."
하였다. 임인년의 사위(辭位)하는 대목을 읽기에 이르러 이성중이 말하기를,
"신축년의 사위하는 이야기는 고 판서 김동필(金東弼)과 고 상신 송인명(宋寅明)이 강관(講官)으로 있으면서 《춘방일기(春坊日記)》에 갖추어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곧바로 말하겠다. 건저(建儲)하는 것은 나라의 대사인데 어찌 이정소(李廷熽) 한 사람으로 하여금 청하게 하였겠는가?"
하니, 찬수 당상 정휘량(鄭翬良)이 말하기를,
"송나라 인종(仁宗) 때 범진(范鎭)284)                  이 간관(諫官)으로서 역시 청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정소를 승지로 임명한 것은 용감하게 말을 잘해서가 아니었으며, 송나라 태조(太祖)가 도곡(陶穀)285)                  을 임용하지 않음은 송나라 태조를 위해서였다."
하니, 이성중이 말하기를,
"대신(臺臣) 이성경(李星慶)이 상서하여 역적 김일경의 교문(敎文)을 쓰지 말기를 청하여 동궁(東宮)께서 대신에게 품처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역적임을 밝히겠는가? 흉언(凶言)을 뽑아 실어야 옳다."
하였다. 조명리가 말하기를,
"최석항(崔錫恒)이 대리(代理)함을 전선(傳禪)이라고 하였으니, 흉악합니다. 심정연(沈鼎衍)의 흉악한 말을 뭇 신하들은 모르고 있으니, 그 다음 말이 매우 어렵습니다."
하자, 임금이 그만 쓰라고 외치고는 안상(案床)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여러 신하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종이에 가득한 장황한 말이 음참하고 억측하여 마음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참으로 이른바 차마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방자하게 휘(諱)를 썼으니 족히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7월 26일 무술

유성(流星)이 우성(牛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7월 28일 경자

지사 정휘량(鄭翬良)이 청대하여 말하기를,
"신의 조카 집에 오늘 첫새벽에 어떤 사람이 글을 전하면서 스스로 창동(倉洞) 정 참판(鄭參判) 집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간 곳을 몰랐으며 역시 글을 전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계집종이 물을 길으러 다니는 길에서 글 하나를 얻었는데 종이 겉에 ‘미천효려(尾泉孝廬)’라 쓰여 있고 말 뜻이 아주 흉참하여 놀라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이에 감히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글을 가져다 보고는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가소로운데, 어찌 즉시 부병(付丙)286)  하지 않았는가?"
하니, 정휘량이 말하기를,
"정광충(鄭光忠)이 지난번 징토(懲討)에 매우 힘을 썼기 때문에 한 종류의 유감을 품은 무리들이 반드시 앙갚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광충·송문재(宋文載)·홍명한(洪名漢)·채제공(蔡濟恭)이 모두 처음 징토하기를 발론한 자들이니 그 혈성(血誠)을 알 수가 있는데, 이것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에게서 미움을 받은 것이다."
하고, 이어서 좌·우포장(左右捕將)에게 명하여 함께 길가에 앉아서 그 글을 태우게 하였다.

 

임금이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갔는데, 장차 봉안제(奉安祭)와 고유제(告由祭)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7월 29일 신축

임금이 예(禮)대로 제사를 행하고 봉안한 후에 전교하기를,
"지금 이후에는 돌아가 절을 할 면목이 있게 되었다."
하고, 이어서 도감 당상과 낭청에게 아울러 입시를 명하여 선온(宣醞)하고, 날이 저물어서야 환궁하면서 육상궁(毓祥宮)에 들러 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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