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5권, 영조 31년 1755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4. 21:01
반응형

8월 1일 임인

임금이 명하기를,
"지금 이후부터 혹 금문(禁門)·성문(城門)과 길거리에 익명서(匿名書)가 있거든 처음 보는 자가 즉시 불 속에 넣으라."
하였는데, 대개 난역(亂逆)을 겨우 잘라서 인심이 조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상이 염려하여 반측(反測)하는 자들을 진정시킴이 이와 같았다.

 

8월 4일 을사

임금이 순강원(順康園)에 거둥하여 친히 제사(祭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빈(慶嬪)의 묘(墓)가 가까이에 있으니, 마땅히 들러 다녀가야 한다."
하고, 드디어 보여(步輿)로 묘에 올라가 전례(展禮)하였다. 이날에 환궁하여 동교(東郊)에서 열무(閱武)하고, 관왕묘(關王廟)에 들렀다.

 

8월 5일 병오

필선(弼善) 이기경(李基敬)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듣건대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은 오로지 독서(讀書)와 궁리(窮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념(一念)으로 허다한 근기(根基)를 배양하는 데 있습니다. 《중용(中庸)》의 ‘근(謹)’·‘독(獨)’ 두 자는 대개 막 움직이는 마음이 발동하는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이른바 ‘독’이란 일념이 싹트는 곳의 선악(善惡)의 기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경(敬)을 하면 선으로 들어가고 게으르면 악으로 들어가는데 털끝만큼의 차이로 천리나 어긋나게 되므로 반드시 학문으로써 개발(開發)하고, 경(敬)으로써 수립(竪立)하기를 사씨(謝氏)의 성성법287)  처럼 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힘을 쓸 바탕이 있게 됩니다."
하니, 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받아들였다.

 

임금이 경기 감사 및 차원(差員)과 수령(守令)을 소견하고 백성들의 폐단과 농사 형편을 물었으나 끝내 명백하게 가리켜 진달한 바가 없고 대답한 바는 단지 역참(驛站)·부병(府兵)의 잗단 폐단뿐이었다.

 

8월 6일 정미

임금이 순강원기(順康園記)를 친히 지어 판(板)에 새겨 걸도록 명하고, 이어서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어제 경빈(慶嬪)의 묘를 들렀을 때 가랑비가 뿌렸으니 어찌 서로 감응되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8월 7일 무신

임금이 칙행 연접 도감(勅行延接都監) 당상 이철보(李喆輔)를 소견하였다. 임금이 청나라 사신이 연로(沿路)에서 폐해를 줄였는지의 여부를 물으니, 이철보가 아뢰기를,
"헌가(軒架) 및 여러 연례(宴禮)를 모두 면제하였습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저들은 우리를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여기는데, 우리 나라에서 저들을 대접하는 것이 참으로 부족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고 유사(有司)에게 더 마음을 써서 접대하도록 신칙하였다.

 

8월 8일 기유

임금이 경상 감영에 명하여 무고(誣告) 죄인 이여호(李如瑚)와 도계흠(都啓欽)을 죽이게 하였다. 처음에 단성 현감(丹城縣監) 조혁(趙㷜)이 어제(御製) 가운데서 ‘해동에 다시 건곤이 있게 되었네[海東復有乾坤]’이란 여섯 자를 제목으로 내걸고 백일장(白日場)을 보였는데, 고을사람 이여호와 도계흠 등이 같은 마을에 사는 이명범(李命範)이 제목을 보고는 글을 짓지 않고 나갔다고 하면서 감영에 정장(呈狀)하니, 바야흐로 조사해 다스렸다. 이여호 등이 또 왕부(王府)에 정장하니, 임금이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게 하였는데, 사장(査狀)이 왔다. 임금이, 이여호 등이 유감을 품고 남을 무고한 것이라 하여 경상 감사 이이장(李彛章)에게 명하여 군위(軍威)를 베풀어 이여호와 도계흠을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이장의 사장(査狀)에 ‘살려 주어야 한다’는 말이 잘못이라 하여 파직시켜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조정에서 새로 역적을 토벌하여 영남의 개두 환면(改頭換面)한 자들이 남과 감정이 있으면 문득 ‘이 사람은 적(賊) 쪽의 사람이다.’라고 하여 시끄럽게 고발하니, 한 도의 사람들이 발을 포개 딛고 불안해 했는데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여호 등을 효시하고서야 비로소 감히 서로 무고할 계책이 싹트지 못하였으니, 이이장이 조정에 돌아와서 매양 말하기를, ‘우리 왕의 명견(明見)은 만리를 본다.’라고 하였다.

 

8월 12일 계축

경상도 경주 및 연해 여러 고을에 홍수가 났다.

 

8월 13일 갑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각릉(各陵)의 제사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윤동섬(尹東暹)을 대사간으로, 박기채(朴起采)를 장령으로 삼았다.

 

8월 14일 을묘

수원부(水原府)에 별효위(別驍衛)를 설치하도록 명하고, 또 삼도(三都)288)  의 예에 의해 결전(結錢)을 영원히 감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수원 부사 김상복(金相福)이, 본부의 마병(馬兵)에 대한 일과 결전의 일을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수원부의 마병을 변통해야 한다는 의논은 고 판서 송진명(宋眞明)에게서 나왔습니다. 본부는 기보(畿輔)의 중진(重鎭)인데, 이른바 6초(哨)의 마병은 유명 무실하여 말을 소유한 자가 아주 드물어 급할 때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도시(都試)를 창설하여 장교(將校)의 아들과 한가로이 노는 자 및 기타 전마(戰馬)와 군장(軍裝)을 갖출 수 있는 자로서 소속되게 허락하여 별효위(別驍衛)라 이름하고 1년에 한 번씩 도시(都試)를 베풀어 뽑아 수석을 한 자는 직부(直赴)하게 하고, 그 다음은 총융청(摠戎廳)의 둔감(屯監) 두세 자리에 차출해 보내며, 가장 우수한 자로서 이미 출신(出身)한 자는 금군(禁軍)의 예에 의해 부방(赴防)을 면제해서 본부의 장교(將校) 직임을 또한 이 가운데에 차출해 오래 근속시켜 거두어 쓰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만약 7백명이나 얻을 수 있다면 이른바 마병을 전부 감해도 무방합니다. 혁파해 감한 마병은 1필씩 신역(身役)을 거두어 봄·가을의 상을 주는 규식으로 쓰면 격려하고 권하는 효과가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상로(金尙魯)가 또 말하기를.
"수원은 선조(先祖)에서 외도감(外都監)이라 일컬어 본래 납부하던 1필(匹)을 전에 이미 감하기를 허락하였고, 서울에 납부하는 것을 또한 모두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균역(均役)한 이후에 제도(諸道)에 고루 은혜를 베풀었는데, 수원 백성들은 별반 은택을 입지 못해 실로 한쪽 구석에서 탄식함이 있습니다.양도(兩都)289)   및 남한(南漢)에는 모두 결전(結錢)이 없는데, 본부의 관방(關防)도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수원은 기보(畿輔)의 중진으로 옛날에 외도감으로 하라는 전교가 있었고, 또 베를 감하라고 명하였다. 백성은 바로 군인이요, 군인이 바로 백성이어서 만약 옛날의 은혜 베풀던 일을 본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성(隋城)290)   백성들을 위로하겠는가? 한결같이 삼도(三都)의 예에 의해 특별히 결전을 감하라."
하였다. 김 상로가 또 아뢰기를,
"양주 토포영(楊州討捕營) 소속의 과천(果川)과 금천(衿川)291)   두 고을을 수원에 소속시키고, 수원에 소속된 용인(龍仁) 한 고을을 죽산(竹山)에 소속시키라는 일을 도신(道臣) 이종백(李宗白)이 전에 이미 아뢴 바 있습니다. 길이 가까우니 이에 의해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팔도 의승(義僧)의 번역(番役) 대포(代布)를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남한 산성(南漢山城)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에 각기 총섭(摠攝) 한 사람을 두어 제도의 승도(僧徒)를 통솔하게 하고 여러 절로 하여금 해마다 총섭에게 의승을 보내 산성의 다급한 용도를 삼았었다. 그런데 나라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여서 의승이 산성승(山城僧)의 침해를 받아 곤란을 받고, 번(番)을 들 때에 여러 절에서 많은 전재(錢財)를 거두어 보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했었다. 이때 호남 이정사(湖南釐正使) 이성중(李成中)이 그런 폐단을 아뢰어 여러 승려들의 소원을 따라서 번드는 역을 면제하고 번전(番錢)을 산성에 바쳐 본래부터 거주하는 승려로 하여금 그 역에 응하도록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었다. 후에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의승을 변통하는 것은 눈앞의 은혜가 될 수는 있지만 만약 산성에 일이 있게 되면 허술하게 됨을 면치 못하게 되며 갑작스런 일이 일어나면 후회를 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근래의 병통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옳게 여겼다.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장산(長山)·임진(臨津) 두 진(鎭)을 시설하는 역이 매우 큽니다. 장산의 돈대(墩臺) 여덟 곳의 둘레 합계가 4백 31보(步)로 1백 25타(垜)292)  며 쌓을 둑이 2백 20보, 진사(鎭舍)가 50칸이며, 임진의 성문 홍예(虹霓)는 높이와 넓이가 16척이며 길이가 23척에 누(樓)가 8칸, 좌우의 익성(翼城)293)  이 80보 27타입니다. 이제 이미 역사를 마쳤으나 다만 장산과 임진은 몇 리를 사이하고 있는 데 불과하여 두 별장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장산을 첨사(僉使)로 승격시키고 이어서 방어하게 한다면 관방을 중히 하는 방도로 마땅하게 될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서 이어서 명하기를,
"파주 목사를 방어사로 승격시키고, 장산 별장은 첨사로 승격시켜 방어 중군(防禦中軍)을 삼으라."
하였는데, 장단은 전에 방어영이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파주로 옮기고 독진(獨鎭)으로 시행하였으니, 어영 대장 정찬술(鄭纘述)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8월 16일 정사

월식(月食)하였다.

 

함경도와 황해도 두 도의 올 가을 습조(習操)를 정지하고 명하였는데, 흉년 때문이었다.

 

8월 17일 무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숭릉(崇陵)294)  의 제사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왕세자가 옥과 현감 송명흠(宋明欽)을 소견하였다. 송명흠은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현손(玄孫)인데, 경학(經學)으로써 천거되어 나라에서 서연관(書筵官)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사양하고 오지 않았었다. 현감을 제수하기에 미쳐 대궐에 나와 사직하니, 왕세자가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인접하여 《대학(大學)》을 강(講)하게 하니, 송명흠이 상세하고 분명하게 주대(奏對)하였다. 왕세자가 말하기를,
"내가 매우 황홀하게 깨달음이 있게 되었으니, 면계(勉戒)하는 말을 듣고자 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엄하지 못함을 염려하지 말고 친하지 못함을 염려해야 합니다. 송(宋)나라의 이천(伊川)295)  과 우리 나라의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이 모두 좌강(坐講)을 청하였는데, 지금의 강연(講筵)은 너무 엄한 듯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나이 20여 세에 절선(節宣)296)  을 잘하지 못해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데 고칠 수 있는 방도가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저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하시고 욕망을 적게 가지시고, 생산(生産)을 잃고 욕망만을 따르는 것을 깊이 부끄러워하시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그 뜻을 듣고자 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밤의 기운은 청랑(淸郞)하여 마음의 본체(本體)이니, 묵묵히 징험해 보고 맑게 반성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요점은 학문을 하는 것이니, 마땅히 기질(氣質)이 편벽을 곳을 생각해 보고, 기욕(嗜慾)이 깊은 것을 먼저 다스려야 합니다. 채우기 어려운 것을 채워서 적게 되고 또 적어져 없게 된 연후에야 바야흐로 학문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스스로 징험하는 때가 있으니 어찌 선단(善端)이 발함이 없겠는가만 곧 잃게 되니, 어떻게 해야 지켜 갈 수 가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함양(涵養)함이 이미 오래되고, 치밀하게 공부를 더하면 저절로 잃지 않게 됩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더하기를 청한다."
하니, 대답하기를,
"저하께서 환관(宦官)과 시첩(侍妾)을 대할 때와 신료(臣僚)를 접견하는 즈음에 마음이 어떠하십니까?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아주 다르다."
하니, 대답하기를,
"저하께서 이미 그런 줄을 아시니, 더욱 체인(體認)하시면 덕(德)이 진보되는 것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밤낮으로 체념하지 않겠는가? 조정에 어찌 문학(文學)의 선비가 없겠는가만, 다만 실행(實行)하는 숙덕(宿德)은 이미 산림(山林)에 있는 사람만 못할 듯하다. 이후에는 소명(召命)을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8월 19일 경신

임금이 모화관(慕華官)에 거둥하여 칙서(勅書)를 맞이하고 돌아와 칙사(勅使)와 함께 인정전(仁政殿)에서 연례(宴禮)를 행하였다.

 

8월 20일 신유

임금이 관소(館所)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과 함께 연례를 행하고, 여러 차례 머물기를 청하고 해시(亥時)에 환궁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우리 임금이 견양(犬羊) 같은 무리에게 절을 한 것도 이미 극도의 수치인데, 또 어찌 스스로 체모를 손상해 가면서 저들의 모욕을 받아야 하겠는가? 사관(舍館)은 가야 할 장소가 아닌데 밤중에 주필(駐蹕)하여 지척(咫尺)의 어가 앞에서 주리(侏離)297)  로 시끄럽게 떠드는데 술을 먹이고 은(銀)을 내리는 등 크게 존엄을 잃었으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호가(扈駕)하는 여러 신하들이 단지 성상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해서 임금의 잘못을 그대로 보아 먼 곳 사람들이 보고 듣도록 맡겨 두었으니, 나라를 엿보는 자가 우리 나라에 신하가 있다고 하겠는가? 아!"


【태백산사고본】 61책 85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592면
【분류】왕실(王室)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註 297] 주리(侏離) : 오랑캐의 언어.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우리 임금이 견양(犬羊) 같은 무리에게 절을 한 것도 이미 극도의 수치인데, 또 어찌 스스로 체모를 손상해 가면서 저들의 모욕을 받아야 하겠는가? 사관(舍館)은 가야 할 장소가 아닌데 밤중에 주필(駐蹕)하여 지척(咫尺)의 어가 앞에서 주리(侏離)297)  로 시끄럽게 떠드는데 술을 먹이고 은(銀)을 내리는 등 크게 존엄을 잃었으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호가(扈駕)하는 여러 신하들이 단지 성상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해서 임금의 잘못을 그대로 보아 먼 곳 사람들이 보고 듣도록 맡겨 두었으니, 나라를 엿보는 자가 우리 나라에 신하가 있다고 하겠는가? 아!"

 

임금이, 해서(海西)에서 청나라 사신을 잘 대접하지 못했다는 것으로써 감사(監司) 김양택(金陽澤)을 파직하고, 남태기(南泰耆)를 대신 특수(特授)하였다.

 

8월 21일 임술

이희원(李禧遠)을 황해 병사로, 남정오(南正吾)를 경상 수사로, 이양중(李陽重)을 전라 좌수사로 삼고, 남병사 이윤성(李潤成)과 충청 병사 최진해(崔鎭海)를 서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이윽고 또 최진해와 황해 병사 이희원을 서로 바꾸도록 명했는데, 최진해는 바로 육상궁(毓祥宮)의 친조카이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최진해는 지금 병이 있는데 만약 해영(海營)에서 약물 치료를 하고자 한다면 재력이 남병영(南兵營)보다 넉넉하니 바꾸어 차출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었다.

 

망명(亡命)한 죄인 이재경(李在敬)을 죽였는데, 이재경은 바로 역적 이명조(李明祚)의 아들로 영천(榮川) 땅에서 붙잡아 율에 의해 정법(正法)한 것이었다.

 

8월 22일 계해

심수(沈鏽)을 승지로, 서유량(徐有良)을 정언으로, 이후(李)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8월 23일 갑자

서연관 송능상(宋能相)이 상서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기를,
"신은 듣건대 옛날의 왕자(王者)는 아랫사람을 예(禮)로 거느리어 병이 심하면 치사(致仕)를 허락하고 어버이가 늙으면 반드시 돌아가 봉양하게 하였으며, 물을 것이 있으면 사람을 시켜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화양처사(華陽處士)298)  를 대우한 것과 송제(宋帝)가 전호(錢湖)의 여러 사람을 대한 것299)  이 이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본디 뜻이 있는데, 어찌 반드시 강박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8월 24일 을축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의릉(懿陵)300)  의 제사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8월 25일 병인

정한규(鄭漢奎)를 사간으로, 이길보(李吉輔)를 장령으로, 서지수(徐志修)를 함경도 관찰사로, 윤구연(尹九淵)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황해 감사 남태기(南泰耆)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할 말이 있는가의 여부를 물었다. 남태기가 말하기를,
"신은 새로 제수되어 도내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나, 전 감사의 장계에서 바람과 서리의 재해가 치성하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봉한이 말하기를,
"서울에는 서리가 내리지 않았으니, 이는 찬이슬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나뭇잎을 보니, 많이 시들어 이 때문에 서리가 내린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니, 홍봉한이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8월 26일 정묘

해운군(海運軍) 이연(李槤)을 진하 겸 사은 정사로 황경원(黃景源)을 부사로, 서명응(徐命膺)을 서장관으로 김한로(金漢老)를 장령으로 삼았다.

 

8월 27일 무진

임금이 청나라 사신을 모화관(慕華館)에서 전송하면서 연례(宴禮)를 행하였다. 마치고 나서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신이 피국(彼國)에 가면 반행(班行)의 좌석 차례가 어떠한가?"
하니, 승지 채제공(蔡濟恭)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신은 외국 반열의 첫자리입니다. 옛날 명(明)나라에서는 우리 나라 사신을 승려와 도사(道士) 아래에 두었는데,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이 사신으로 갔을 때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예의(禮義)의 나라이니 사신을 승려와 도사 아래에 두어서는 부당하다.’고 힘껏 다투어 명나라에서 그의 말을 따라 우리 나라 사신을 마침내 그들 위에 있게 하였습니다. 선정신 이황(李滉)이 그 일을 듣고는 편지를 보내 찬탄(贊嘆)하였는데, 이 말은 그의 문집에 실려 있습니다."
하였다. 돌아올 때에 관왕묘(關王廟)를 들렀다.

 

8월 30일 신미

밤 4경(更)에 화성(火星)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공조 참의 조창래(趙昌來)를 소견하였다. 조창래는 정주(定州) 사람인데 임금이 먼 곳 사람을 위로해 기쁘게 해주고자 하여 이 직을 제수한 것이었다. 조창래가 상경하여 숙명(肅命)하자, 임금이 유시하기를,
"늙었는데도 쇠하지 않았으니 기쁜 일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의 처(妻)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가 졸하였다. 왕세자빈(王世子嬪)의 복제(服制)는 갑인년301)   수의(收議)에 의하여 시행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