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임신
공주(公州) 사람 박진귀(朴震龜)가 그의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잡혀 죽은 것을 통분하게 여겨 산 아래에다 집을 짓고 함정을 설치해 호랑이를 많이 죽였다고 감사가 장문(狀聞)하니, 복호(復戶)하였다.
9월 5일 병자
명하기를,
"평안도 동림성(東林城)을 병영(兵營)에 소속시키어 병사(兵使)의 행영(行營)을 삼되 매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바람이 세게 부는 여섯 달 동안 다른 곳 예에 의해 우후(虞候)가 들어가 방어하라. 성사(城舍)의 수리 및 향곡(餉穀)을 조적(糶糴)하는 등의 일은 병영에서 담당하여 거행하라."
하였는데, 대개 동림에 성을 쌓은 지 이미 3년이 되었으나 주관하여 성을 지키는 사람이 없어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김상로가 아뢰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좌의정 김상로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흉년을 당하면 곡식이 있은 연후에야 구제해 살릴 수가 있는데, 금년의 농사가 비록 혹심한 수재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심하고 심하지 않은 구별이 없겠습니까? 적곡(糴穀)을 받아들이는 방도는 수령에게 엄히 신칙하여 다 받아들이기를 기해야만 사의(事宜)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윤동섬(尹東暹)과 집의 서명응(徐命膺)이 시소(試所)에 있으면서 상서하여 무인(武人) 이재춘(李再春)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무과 시험장에서 폐단을 일으켜 장신(將臣)에게 욕을 한 때문이었다. 임금이 보덕 이기경(李基敬)에게 유시하기를,
"근래에 조정의 신하들을 보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기에 힘을 써서 동궁(東宮)에게 한 번도 진계(陳戒)한 자가 없었는데, 간장(諫長)과 헌신(憲臣)이 한 무변(武弁)의 일 때문에 장황하게 진장(陳章)하였으니 내가 매우 개탄한다. 너는 모름지기 동궁에게 입대하여 진계하거라."
하였다.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윤학동(尹學東)을 교리로, 정상순(鄭尙淳)을 부교리로, 이득종(李得宗)·윤동섬(尹東暹)을 승지로, 홍상한(洪象漢)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9월 7일 무인
임금이 좌의정 김상로에게 유시하기를,
"동궁이 매양 질환(疾患)이 많은데, 이목(耳目)의 관원이 절제하라고 진계하지 않고 있다. 명나라 때 여러 신하를 뜰에서 곤장을 쳐서 뼈가 드러나 보이기까지 했는데도 오히려 직언(直言)을 하는 자가 있었으니, 마땅히 이로써 우리 조정 신하들을 면려해야 한다. 듣건대 선조(先朝)의 고사(故事)는 서연(書筵)에서 만약 약생(略栍)302) 을 받으면 반드시 매를 맞았다 하며, 나 역시 대리(代理)할 때에 일이 있어 독서(讀書)를 하지 못하면 협실(夾室)에 앉아서 밤을 새워가며 외어서 약생(略栍)을 면하였으니, 우리 나라의 법도 이처럼 엄했던 것이다."
하였다.
해주와 공주를 승격시켜 목사(牧使)로 삼고, 전주와 함흥·평양·대구를 승격시켜 부사(府使)로 삼았다. 임금이 감사(監司)가 이미 권속(眷屬)을 거느리지 않는데도 영하(營下) 고을에 아직도 판관(判官)을 두고 있어 명호(明號)가 바르지 않다 하여 승격시켜 옛 규정을 복구한 것이었다.
선정신 장현광(張顯光)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여러 차례 장현광의 사람됨이 질야(質野)하다고 칭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렇게 명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한(漢)나라에서 포덕후(褒德候)303) 를 봉(封)한 뜻이다."
하였다.
9월 8일 기묘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질병을 조심하고 학문과 정사에 부지런 할 것을 진계하였다.
평안도 평양 등 여섯 고을에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 가고 사람과 가축이 깔려 죽었다고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니, 명하기를,
"휼전(恤典)을 시행하고, 당년조 환곡을 집이 떠내려 간 자에게는 받는 것을 중지하고, 사람과 가축이 깔려 죽은 경우는 탕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각사(各司)에 구임(久任) 낭관(郞官)을 소견하고 각기 직무에 대한 소회를 물었다.
명년 정월부터 경외(京外)에서 술빚는 것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하우(夏禹)가 비록 의적(儀狄)304) 을 소원하게 대하였으나 그가 만든 술은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술을 달게 먹고 즐겨 마시는 경계가 있었지만 하(夏)나라 말기에는 걸(桀)이 있게 되었다. 아! 성품(性品)을 해치고 몸을 상하게 하는 물건임은 단지 전철(前轍)이 밝을 뿐만 아니라 경외에서 곡식을 소모하고 싸우다 살인(殺人)을 하는 것도 모두 이 술에 말미암은 것이다. 전후로 금주(禁酒)하자는 청을 매양 오활하다 하여 듣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는 본말(本末)이 있게 마련인데, 나라에서는 쓰고 민간에만 금하다면 어찌 근본이 먼저하고 말단이 나중에 하는 뜻이겠는가? 봄·여름에 영(令)을 하지 않다가 가을·겨울의 영(令)을 갑자기 행한다면 가난한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하여 술동이와 술항아리를 반드시 개울에 쏟아버리고 말 것이다. 술이 비록 좋지 않은 것이나 이 역시 하늘이 낸 물건이 아니겠으며, 우리 백성들이 고생해서 생산한 곡식이 아니겠는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세력이 있는 자는 요행히 면하고 세력이 없는 자만 붙잡히게 되니 어찌 내 뜻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술의 폐단을 익히 알면서 어찌 금하고자 하지 않으랴만 태상(太常)305) 에서 현주(玄酒)를 쓰기 전에는 참으로 금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문단(紋緞)은 비록 금했으나 술은 금하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금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를 기다려서 금하랴. 시험삼아 내주방(內酒房)의 술독을 보니, 색이 칠흑(漆黑)과 같아 까마귀나 까치 역시 앉지 않고 있었다. 아! 질그릇이 오히려 이러한데 연한 피부와 창자이겠는가? 갑자기 좋은 계책이 생각났으니 바로 예주(醴酒)가 그것인데, 아! 예주가 어찌 현주보다 낫지 않겠는가? 먼저 이런 뜻을 태묘(太廟)에 고하고, 세초(歲初)부터는 위에서는 왕공(王公)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제사와 연례(宴禮)에는 예주만 쓰고 홍로(紅露)·백로(白露)와 기타 술이라 이름한 것도 모두 엄히 금하고 범한 자는 중히 다스리겠다. 내주방(內酒房)과 내자시(內資寺)·종묘(宗廟)에 봉진(封進)하는 것은 예주로 진헌하고, 대전(大殿) 이하는 날짜나 명일(名日)을 물론하고 고묘(告廟)한 후부터는 일체 아울러서 봉진하지 말라. 호군(犒軍)과 농민(農民)은 다름이 있어 공자(孔子)가 향인(鄕人)의 사제(蜡祭)306) 에 대해〈《예기(禮記)》에서〉 말하기를, ‘한 번 당기고 한 번 늦추는 것이 문무의 도이다. [一張一弛 文武之道]’라고 하였다. 군문(軍門)의 호궤(饋饋)에는 단지 탁주(濁洒)만을 쓰고, 농민들의 보리술과 탁주 역시 금하지 말아야 한다. 이 윤음(綸音)을 중외(中外)에 반포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예주(醴酒)를 쓰도록 명한 것은 제사와 연례(宴禮)를 중히 여기고 그 맛이 담백한 것을 취한 것이나 후일에 맵고 독하게 하는 폐단으로 유행함이 없지 않을 것인데, 이렇게 된다면 어찌 금주하는 뜻이 있겠는가? 일체로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이때에 형조 판서 이후(李)가 흉년인 것으로써 동궁(東宮)에게 외방에서 술 빚는 것을 금할 것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듣고서 말하기를,
"나라의 정령(正令) 이 경외(京外)를 어찌 다르게 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었다.
금오(金吾)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박치륭(朴致隆)를 장령으로, 홍준해(洪準海)을 문학으로, 정홍순(鄭弘淳)을 광주 부윤으로 삼았다.
9월 9일 경진
왕세자가 수서(手書)로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도타이 불렀다. 이천보가 지평 조종부(趙宗簿) 등의 탄핵을 받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상직(相職)을 제수받고도 머뭇거리며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불렀으나, 이천보가 상서하여 사양하였다.
집의 서명응(徐命膺)이 대조(大朝)의 칙려(飭勵)로 인해서 상서하여 인구(引咎)하고 인하여 강연(講筵)을 중지하고 정사(政事)가 지체되는 것을 진계(陳戒)하였다.
왕세자가 승지를 보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부르고, 이어서 여러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入對)하도록 하였다. 하령(下令)하기를,
"이미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도록 하였는데 가지고 온 자가 매우 적어 아주 하령한 뜻이 없으니, 승지를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다.
9월 10일 신사
밤에 우레와 번개가 쳤다. 임금이 승지와 춘방(春坊)을 불러 전교하기를,
"인심과 세도(世道)가 어찌 금년과 같은 적이 있었겠는가? 지금은 조금 잠잠해졌으나 이 마음은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근일 날씨가 상도에 어긋나는 가운데 우렛소리와 번개빛이 갑자기 소리를 그쳐야 하는 달에 들리니, 이는 바로 상하가 경계하고 단속해야 할 날이다. 오로지 덕이 없는 내가 늙어 쇠약해진 소치인가 싶어 바야흐로 두려워하고 있는데, 원량(元良)은 대리(代理)하면서 혹 정사에 부지런하지 못한 것이나 아닌지, 대소 신료들이 혹 정백(精白)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피곤함을 꺼리지 말고 먼저 스스로 부지런한 뜻을 보여야 한다. 너희 원량과 대소 신료들은 각기 힘써서 내 만년의 정사를 돕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세자를 불러 유시하기를,
"내가 동궁으로 있을 때에는 거의 휴식할 겨를이 없었고, 또 두 연강(筵講)을 폐한 적이 없었다. 옛날 황형(皇兄)307) 께서 하루 안에 공사(公事)를 가지고 소대(召對)하는 것이 두세 차례에 이르렀고, 그렇지 않은 날이 없었음은 네가 어찌 들어서 알지 못하겠는가?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나와 네가 국사를 하지 않는다면 조선(朝鮮)은 어떻게 되겠는가?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바로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종(高宗)을 가르친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마음을 써 읽어야 한다. 오늘 이후에는 매월 초1일에 쓰기 시작하여 그믐날에 이르기까지 어느 날에는 소대(召對)하였고, 어느 날에는 차대(次對)하였으며, 어느 날에는 서연(書筵)하고 어느 날에는 공사(公事)를 보았으며, 어느 날에는 무슨 책 무슨 편(篇)을 읽었으며, 어느 날은 하지 않았는지와 강관(講官) 및 강생(講栍)을 열서(列書)하여 내가 볼 수 있도록 대비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내가 술마시기를 즐기지 않음은 너 역시 알 것이다. 종묘(宗廟)에 고하고 술을 금한 것은 그 뜻이 있는 바이어서 후일을 위한 계책인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나중에 주방(酒房)을 다시 설치하려고 할 것인데, 무릇 우리 조정의 신하들이 그때 간쟁(諫爭)하지 않는다면 이는 너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은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 한림(翰林)·주서(注書)·춘방(春坊)의 여러 연소한 신하들은 내 말을 자세히 기억해 두라."
하고, 이어서 명하기를,
"정신(廷臣)으로 일찍이 술을 경계한 자인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에세 숙마(孰馬) 1필을, 전 수찬 조엄(趙曮)에게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라."
하고, 이어서 명하기를,
"삼사(三司)에 신칙하여 금년 안에는 금주(禁酒)로 백성들을 침해하지 말게 하라. 어긴 자는 죄를 주겠다."
하였다.
임금이 또 동궁에게 묻기를,
"듣건대 네가 영상에게 수서(手書)로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라고 유시하였다는데, 참으로 그러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참으로 밥을 먹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하니, 내시(內侍)가 승지의 말로써 아뢰기를,
"영상은 병이 있어서 내일 아침을 기다려서 숙명(肅命)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동궁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네가 반성할 점이다. 영상이 만약 네가 밥을 먹지 않고 있다는 말을 믿었다면 어찌 내일 아침을 기다리겠는가?"
하고, 이에 승지를 보내 도타이 유시하였는데, 밤이 이미 5고(鼓)였다.
9월 11일 임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숙명하니, 임금이 소견하고 유시하기를,
"금주는 내 평소의 마음이었는데, 어제 세자에게 유시한 것은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세자가 국사에 생소하니, 경은 매양 나에게 분발하기를 권려하여 비록 애써 따르고자 하나 어려웠다."
하니, 이천보가 아뢰기를,
"금주는 본디 왕정(王政)의 큰 것이니, 이로써 스스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금년 봄 역변(逆變) 이후 국가의 안위(安危)와 존망(存亡)의 기미가 털끝만큼의 사이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분려하신다면 신은 마땅히 아래에서 보좌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할 만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하니, 이천보가 아뢰기를,
"오직 전하께서 권강(權綱)을 총람(總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정원이 우레의 이변으로써 대조(大朝)께 진계하니, 우악하게 답하였다. 또 소조(小朝)께 아뢰기를,
"아! 이 달은 우레가 소리를 거두는 계절인데 큰 우레가 치고 비가 오는 것이 한여름과 다름이 없어 농사를 망치고 팔도에 흉년이 들었는데,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어떤 시절이라고 여기십니까? 저하께서 대리(代理)하신 이후 정사에 부지런히 하시는 마음이 없지는 않으셨으나 빈연(賓筵)에서 인접(引接)하심을 혹 비우기도 하여 정사에 부지런한 실제가 드러나지 않았고, 학문에 돈독히 할 뜻을 두지 않은 바는 아니나 강석(講席)을 때없이 정지하여 학문에 부지런하신 실제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후(睿候)가 자주 편안하지 못하시어 문득 성상의 마음에 근심을 끼치셨으니, 평소 굴신(屈伸)하시는 가운데 혹 절제하시는 방법이 어긋나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소하여 아뢴 것에 단지 ‘체념(體念)하겠다.’라는 두 글자만을 내리신다면 청납(聽納)할 즈음에 혹 기뻐하며 도리를 다함에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나쁘게 생각하시는 성상의 덕을 본받으시어 일념(一念)이라도 게을리 하지 마시고 항상 엄한 스승을 대하여 훈계를 따르듯 하시고 면려하라는 성지(聖旨)를 체념하시며, 더욱 깊은 곳에 홀로 계실 때를 삼가시는 것을 마치 어좌(御座)에서 모시고 성상의 훈계를 받고 있듯이 한다면 이번의 재이(災異)가 어찌 저하를 옥성(玉成)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였다.
헌납 이수덕(李壽德), 사간 정한규(鄭漢奎), 정언 이시건(李蓍建), 집의 서명응(徐命膺)이 서로 잇따라 상서하여 진계하니, 왕세자가 모두 우악하게 답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우레의 이변으로써 대조(大朝)께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로 면직을 바라니, 우악하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또 동궁에게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정성(鼎盛)하시어 만기(萬機)를 대리하신 7년 동안에 천심(天心)이 응할 만한 무슨 정사가 있었으며, 성상의 맡기신 바에 부응할 일이 무엇이 있으며, 사방에서 바라는 바에 답할 만한 조치를 베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예후(睿候)가 편치 못할 때가 많았으니 절선(節宣)308) 이 그 방도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으며, 한결같이 너무 지나치게 말씀을 하지 않으시니 정지(情志)가 막힌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연(書筵)을 열고도 빠져서 하지 않을 때가 있었으니 전학(典學)에 힘썼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일에 수응함이 점차 처음만 못하니, 정사에 부지런하였다고 하겠습니까?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과 상소문에 충성스러워 받아 들일 말이 있는데도 단지 ‘유의하겠다.’ ‘깊이 유념하겠다.’라고 예사 비답하였으니, 흔쾌히 받아들이고 힘껏 행하는 실효가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하루 이틀이라도 혹시 게을리 해서는 안되고, 보답(報答)하는 정성(精誠)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항상 폭풍이나 맹렬한 우레가 칠 때처럼 한다면 천심에 응할 수가 있으며, 성상께서 맡기신 뜻에 부응할 수 있고, 사방의 바람에도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우악하게 답하고, 원차(原箚)는 유중(留中)하게 하였다.
영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를 도타이 유시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차자(箚子)로써 소유(疏儒) 신경일(申敬日)을 구하려다 삭직되었는데, 얼마 후 서용되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부른 것이다.
9월 12일 계미
초저녁에 유성(流星)이 남두성(南斗星)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이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대사간 송창명(宋昌明)이 상서하여 진계하였다. 이때 임금이, 조신(朝臣)들이 근학(勤學)·근정(勤政)·절선(節宣) 등의 말로 진달해 면려하지 않는다고 꾸짖었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세 조항을 갖추어 간략하게 면계(勉戒)하여 마치 책임을 때우는 것처럼 하였는데, 동궁이 모두 우악하게 답하였다.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대궐에 들어가 청대하니, 임금이 모레 영상·좌상과 함께 입시하기를 명하였다. 조재호는 재상에 제배된 지 몇년이었으나 항상 병을 핑계하여 조회(朝會)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대(求對)한 것이었다.
9월 13일 갑신
영중추부사 김재로가 인질(引疾)하여 사양하고 들어오지 않으니, 임금이 또 사관을 보내 불렀다.
9월 14일 을유
임금이 세 대신을 불렀는데, 영의정 이천보는 인질하여 들어오지 않고, 좌의정 김상로와 우의정 조재호가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에서 동비(銅碑)를 세운 일이 있었는데 마침내는 위충현(魏忠賢)309) 이 나와 당나라 소종(昭宗)이나 한나라 헌제(獻帝)처럼 머리를 숙이고 제재를 받아 자유를 얻지 못함이 아주 괴이하다."
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처음에 조짐을 막지 못하여 대세가 한번 기울어진 후에는 끝에 가서 어쩔 줄울 모르게 됩니다. 《명사(明史)》를 보건대 명나라는 분당(分黨)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는데, 당 안에서 문득 4, 5개의 당이 생겨 서로 죽였습니다. 웅정필(熊廷弼)310) 이나 원숭환(袁崇煥)311) 같이 유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당이 아니면 서로 경솔히 죽여 산동(山東)과 절강(浙江)의 여러 적(賊)이 창궐(猖獗)하게 하여 오삼계(吳三桂)312) 가 부득이 장성(長城) 한 모퉁이를 헐어 청병(淸兵)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가 비록 당습(黨習) 때문에 나라가 명하였다고 하지만, 절사(節死)한 신하 역시 명나라처럼 많은 적이 없는 것은 왜 그런가?"
하니, 조재호가 대답하기를,
"명나라에서 호원(胡元)313) 을 소탕하여 사유(四維)314) 가 다 펼쳐졌기 때문에 절사한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올봄 역옥(逆獄)이 있은 후에 처음으로 경을 보는데, 경은 이미 역적의 변이 이러한 줄을 헤아리고 있었는가? 경은 모름지기 통렬하게 진달하라."
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올봄에 역적으로 죽인 자는 당습에 불과하다가 엎치락 뒤치락 하여 이에 이른 것입니다. 당(黨)과 역적은 두 갈래가 아니어서 그 습성을 쓰지 못하면 울분이 쌓이고, 울분이 쌓이면 나라를 원망하게 되며, 나라를 원망하면 역적질을 하기에 이르니, 피차를 물론하고 모두 경계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금연의 여러 적은 심악(沈) 하나만을 논해보면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있습니다. 성상께서 심악을 매우 후하게 대우했는데도 그가 마침내 역적이 된 것은 그 처한 바가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심악은 관(官)에 있으면서 청렴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집에 있으면서는 《소학(小學)》을 힘써 행한 것은 다른 사람이 따르기 어려운 바였습니다. 유독 그 논의가 매우 괴이했기 때문에 학문이 더욱 돈독해질수록 논의는 더욱 괴이해져서 경호(京湖) 지역 세족(世族)의 연소배들이 모두 잘못되게 되었습니다. 심악이 만약 뜻을 얻었더라면 큰 일이 장차 나왔을 것인데, 다행히 하늘의 주륙을 받았지만 그러나 심악은 대신의 아들로 크게 등용되기를 바랐으나 시의(時議)가 힘껏 막아 그의 마음을 격발시켰으니 그 형세가 유수원(柳壽垣)과 교결(交結)하여 함께 악역(惡逆)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논하기를, ‘그의 학문은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장유(長幼)의 윤리는 없고, 오직 붕우(朋友)의 한 윤리만 있어서 역적으로 빠져 들었으니, 이는 오로지 당습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이후에 소론(小論)은 이로 인해서 뉘우치고 깨달아서 좋아지게 되었고, 노론(老論)은 모조리 남김없이 죽이고자 하였으나, 유독 이조 판서 신만(申晩)의 뜻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이 종기(腫氣)를 치료하는 예로 신만에게 말하기를, ‘여러 적은 종기이며, 심악은 종기의 핵(核)이다. 핵을 이미 뽑았으니 혈(穴)은 완전하지 못하다. 마땅히 조합(調合)하는 술(術)을 써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침(鍼)을 들고 한 곳을 어지러이 찔러보고자 하는 자들이 많다. 종기를 터뜨린 것만도 이미 불행한데 어찌 온몸을 두루 찔러야 하겠는가? 하였는데, 온몸은 전하의 나라이니, 성상께서 깊이 염려하여 선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다만 내가 신치운(申致雲)을 승지로 삼아서 내 곁에서 시중들도록 하였는데도 오히려 흉심(凶心)을 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서 생각해 보아도 내가 실로 마음이 떨린다. 심악과 심정연(沈鼎衍)이 서로 이어 나왔으니, 이 무리들이 반드시 많을 것이어서 신치운의 마음으로 나를 보는 자들이 몇 사람이나 될지 몰라 내가 실로 마음이 아프다."
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도리는 마땅히 내 원기(元氣)를 충실하게 해야 하니, 원기가 이미 충실하면 사특한 기운은 저절로 물러가게 되니 너무 지나치게 스스로 의심하고 염려해 흉언에 동요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은 중간에 있어서 피차의 잘못을 분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이런 마음을 보이시면 사람마다 모두 일어나 한쪽에 억울하게 죽은 자가 많게 될 것입니다.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아서 오늘 죄가 없으면 등용하고 내일이라도 죄가 있으면 죄를 다스려야 하니, 전하께서는 반드시 눌러 안정시키는 도리를 생각하소서. 작년에 성상의 꿈이 지금 참으로 부합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꿈이 어찌 부합된다고 하는가?"
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그때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꿈속에서 한쪽 사람들이 다른 한쪽 사람을 모조리 죽여 그 한쪽 부녀(婦女)들이 곡(哭)을 하면서 호소하였다.’라고 하셨으니 이로써 보면 어찌 부합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서로 부합된다. 이 시기를 잃어서는 안되니, 경은 사직하지 말고 오늘날의 규모(規模)를 세워야 옳다."
하니, 조재호가 질병으로써 굳이 사양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은 원경하(元景夏)이 말을 듣건대 지금 수찬(修纂)하고 있는 책이 그 뜻과는 아주 달라서, 그의 아들 원인손(元仁孫) 역시 찬수청(纂修廳)에 사진(仕進)하지 않고 있다 합니다. 책자가 만일 완성되거든 상세히 살펴보소서."
하니, 임금이 놀라며 말하기를,
"찬수하자는 청이 처음으로 원경하 부자에게서 나왔는데, 이제 이런 말을 듣게 됨은 무엇 때문인가? 마땅히 원경하를 불러 물어야 하겠다."
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올해에 역적으로 죽은 자가 5백여 명인데, 만약 찬수함으로 인해서 또 폐족(廢族)이 생기면 참으로 불행하니, 모름지기 신축년315) ·임인년316) 의 일은 다시는 제기하지 말아서 연루(連累)되어 막히지 않도록 분명한 효유(曉諭)를 내려 반측(反側)하는 무리들이 스스로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뭇 신하들에게 신칙하겠다."
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역적 집의 전답(田畓)을 충훈부(忠勳府)와 호조 이외에서 차지하지 못하게 한것은 뜻이 있는 바입니다. 지난번 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훈국(訓局)에서 서로 잇달아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장차 그 폐단을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후에는 이들 초기(草記)는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는데, 조재호가 다시 인질(引疾)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이때에 찬수청에 이미 도제거(都提擧)를 설치하여 김재로(金在魯)가 서문(序文)을 지으면서 기사년317) 이후 역론(逆論)의 원위(源委)를 두루 서술하고, 당상 홍계희(洪啓禧)가 흉당(凶黨)의 소장(疏章) 사실을 아주 자세하게 찬집하였다. 원인손이 이때 낭관으로서 홍계희와 쟁론(爭論)하여 맞지 않아 이때에 이르러 조재호가 원경하의 말로써 아뢴 것이다. 조재호가 경각 사이에 수천 마디 말을 누누이 진달함은 대저 모두 조정을 안정시키려는 뜻이어서 임금이 경청(傾廳)하고, 깊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전라 우수사 허급(許汲)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구례(舊例)에 도신(道臣)이 수령의 전최(殿最)를 행하고 그런 연후에 수신(帥臣)이 비로소 변장(邊將)의 전최를 시행했었다. 이때 호남의 도신 조운규(趙雲逵)가, 그의 아비 조영국(趙榮國)이 역수(逆囚)의 고(告)한 바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상소하고 명을 기다리면서 전최를 행하지 않자 허급이 홀로 행하였었다. 조운규가 일을 보기에 미쳐서 그 일을 장문(狀聞)하니, 조재호가 말하기를,
"허급이 조운규가 역적 쪽으로 몰아 넣으려고 거만하게 영(令)을 따르지 않았으니, 그 정상이 매우 악합니다. 엄히 다스리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향촌(鄕村)의 탁주(濁酒)는 바로 경중(京中)의 지주(旨酒)이니, 위로 고묘(告廟)하고 아래로 반포한 후에는 한결같이 해야 마땅하다. 경외의 군문(軍門)을 논하지 말고 제사(祭祀)·연례(讌禮)·호궤(犒饋)와 농주(農酒)는 모두 예주(醴酒)로 허락하되 탁주와 보리술은 일체로 엄금하라."
하였다. 이때에 여러 신하들이 진현(進見)하여 모두 금주령을 칭송하였는데, 전 사간 이민곤(李敏坤)만이 유독 글을 올려 말하기를,
"태묘(太廟)의 제향에는 술을 없애서는 안됩니다."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막아 들이지 못하였다.
외읍(外邑)은 명년 가을을 한하여 사객(使客)이 다담(茶啖)을 정지하고, 아울러 유밀과(油蜜果)도 함께 금하라고 명하였는데, 흉년 때문이었다.
함흥(咸興)·전주(全州)·평양(平壤)을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장령 안복준(安復駿)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금년은 농사가 아주 잘되지 않았으니 어찌 말을 하겠습니까? 음산한 장마에 상하여 백가지 곡식이 모두 병들고, 언덕이 무너져 모래가 뒤덮어 영원히 전답의 모양을 잃은 것이 절반 이상이 되며, 여름부터 가을이 오도록 맑은 날이 보이는 것이 아주 적어서 남아 있는 곡식 역시 익기를 바랄 수가 없게 되었으며, 이미 핀 이삭도 절반은 꼿꼿하게 서있습니다. 목화(木花)에 이르러는 이름만 한전(旱田)일 뿐 석 달 동안의 장맛비에 단지 빈 열매만 남아 있어서 1백 세 먹은 노인이 그의 생애에 처음 본 일이라고 탄식하고 있어 백성들의 의식(衣食)의 근본이 이에서 삭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서울의 쌀 한 말의 값이 거의 1백 전(錢)에 이르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가을이 이러하니, 봄 일은 알 만한데 위를 섬기고 아랫사람을 기를 가망이 없게 되어 노인과 장정이 다 죽게 되는 것을 서서 기다려도 됩니다. 앞으로 구제해 살릴 계책을 미리 강구하기를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자를 구하듯 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비록 탁지(度支)의 연분(年分) 조(條) 사목(事木)으로 보건대, 그 비총(比摠)318) 한 바가 경기·호서의 경신년319) 과 호남의 임술년320) , 해서의 기미년321) , 관동·관서의 계유년322) , 관북의 무오년323) 과 과연 금년 농사와 서로 비슷한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영남의 비총으로 추측하건대 영남의 신유년324) 농사는 흉년을 면한 것보다 나아서 금년에 비교해 논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에 함께 비교했으니, 다른 도의 비총도 또 영남의 비총이 아주 넘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단지 영남이 원총(元摠)만으로 계산하면 원총 이외에 마땅히 급재(給災)해야 할 것이 22분의 1에 불과한데, 우선 대동(大同)의 재결(災結) 예(例)를 빌려 계산하면 22결(結)의 땅에서 바야흐로 1결만의 급재를 얻을 수 있고, 22부(負)의 땅에서 바야흐로 1부의 급재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저 예전대로 익은 것도 1백의 1, 2에 불과하며 깎은 듯이 재해를 입은 것이 10중 7, 8은 되어 비록 10분의 3, 4의 급재를 얻더라고 오히려 넉넉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더군다나 22분의 1로 한 도(道)의 재황(災荒)을 마감해야 하겠습니까? 또 한전(旱田)은 1년에 두 번씩 수확하기 때문에 원래 급재하는 예가 없지만 금년에는 봄에 보리가 전혀 없었고 가을 곡시 역시 또 흉작이어서 전재(全災)에 들게 되었고, 목화(木花)가 재해를 입음이 또 진달한 바와 같습니다. 이처럼 농사가 아주 안되었는데 평년의 세(稅)를 책임 지운다면 불쌍하게 겨우 살아 남은 우리 백성들은 반드시 장차 솥과 집을 팔아서 눈앞에 닥친 역(役)에 응해야 하고, 결국에는 골짜기로 떨어져 흩어져 도적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먼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농사 형편을 자세히 조사해서 거기에 해당되는 비총(比摠)을 비교해 장문(狀聞)하게 한 후, 묘당에서 다시 더 참작해 크게 매달리듯 부족함이 없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바야흐로 간절히 두려워하고 있는데, 진달한 바가 매우 절실하니 경성(警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결(災結)에 대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부조(賦租)의 법을 주현(州縣)에서 민전(民田)의 재실(災實)을 구별하여 감사에게 보고하면, 감사가 그 총수(總數)를 탁지에 보고하였었다. 근년 이래로 나라의 쓰임이 많아져 탁지가 고갈되었고, 묘당에서 또 수령들이 재상(災傷)을 지나치게 보고할까 염려해서 아뢰어 호조로 하여금 매년 가을에 멀리서 제도의 풍흉(豊凶)을 헤아려 풍년이면 전의 어느 해 총수(總數)에 비교되고, 흉년이면 또 전의 어느 해 총수에 비교된다고 미리 제도에 반포하여 비총(比摠)이라 이름하였다. 주현에서는 감히 이것을 어기거나 넘지 못하여 재황(災荒)의 전결에서 비로소 억지로 징수하는 근심이 많아졌다.
9월 15일 병술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9월 16일 정해
구일제(九日製)를 실시하여 수석을 차지한 진사 남기로(南綺老)에게는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명하고, 차석인 유학 박지원(朴志源)은 탁봉(坼封)325) 한 후 역시 급제를 내렸다.
9월 18일 경인
밤 1경(更)에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은 작은 콩과 같았다.
임금이 영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와 지사 원경하(元景夏)를 불러 유시하기를,
"내가 신치운(申致雲)의 흉언(凶言)을 들으면서부터 실로 임금 노릇을 할 마음이 없었는데 이는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흉도의 지내온 내력을 만약 부연(敷衍)하지 않는다면 찬수하는 체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책을 만들게 된 것은 원경하 부자의 뜻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듣건대 이의(異議)가 있다고 하니, 무엇 때문인가?"
하니, 원경하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신치운을 정법(正法)할 때 신의 아들 인손(仁孫)이 문랑(問郞)이 되었는데 신이 흉서에 한 말을 물었더니, 인손이 울먹이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다가 말하기를, ‘이는 의리(義理)가 분명하지 못하고 인심이 함닉(陷溺)됨을 말미암아서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자(文字)를 지어서 성상의 무함받은 것을 통렬하게 변명하고자 하여 이에 차자를 올려 청하고, 윤허를 받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신의 아들이 근래에 당상(堂上)과 논의가 어긋나서 오랫동안 사진(仕進)하지 않아 찬수하는 일을 신은 실로 모르고 있습니다. 근래에 듣건대 조재호(趙載浩)가 말하기를, ‘금년에 복법(伏法)된 자가 이미 많다.’라고 하고, 또 ‘찬수하는 책으로 폐족(廢族)이 많이 나와 인심이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홍계희(洪啓禧)가 편집한 것이다."
하였는데, 원경하가 말하기를,
"당상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이 책이 이루어진 것을 단지 성상께서 잘되었다고 칭찬해야 할 뿐만이 아니라 오르내리는 경묘(景廟)의 영혼 역시 잘되었다고 생각한 연후에야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편집한 소장(疏章)이 참으로 신축년·임인년에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할 때의 일이 아니니 넣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어찌 현명하지 않습니까? 조명리가 명을 받들고 외방에 나갔기 때문에 홍계희가 흉역의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편집해 기록하고자 하였는데, 신은 너무 만연(蔓延)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의 생각 역시 마땅히 흉역들이 조짐을 쌓아온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말미암은 바를 밝혀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신이 서문(序文)을 지어 남구만(南九萬)·유상운(柳尙運)의 죄를 두루 서술하였는데, 이들이 없었다면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가 어찌 공공연하게 전하를 미워하였겠습니까? 본래 지내온 내력이 있었으니, 후세에 전할 책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무신년326) 역변(逆變)이 어찌 기사년327) 에서 말미암았겠습니까? 신은, 동조(東朝)의 성덕(聖德)과 경묘(景廟)의 지덕(至德)의 마음씨, 전하의 효우(孝友)의 행실로 인하여 이 책의 두뇌(頭腦)를 삼아서 그 사실을 대략 기록하고 의론을 많이 붙인 연후에야 빛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의 서문을 성상께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자, 승지에게 읽기를 명하고, 김재로에게 말하기를,
"바람이 불지 않는 물에 물결을 일게 해서는 안되므로 원경하로 하여금 찬수하게 하고자 한다."
하였는데,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망극한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감히 회피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김재로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마땅히 경을 다시 도제거(都提擧)로 차출하겠으니, 모름지기 내 말을 따르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 일에 만약 두뇌(頭腦)가 없게 한다면 성상께서 비록 신을 임명하고자 하더라도 신은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찬술하는 자에게는 본디 의견이 있어야 마땅히 후세로 하여금 이 글을 보고서 상상(想像)하게 할 수가 있는데, 성상께서 잠깐 보시고 고치기를 명하시면 역시 폐단이 있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몇 년 동안 조제(調劑)해 왔는데 오늘 나와는 다르게 하려는가?"
하였는데,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은 평상시 의논을 좋아하는 자가 아니지만 이 일은 신의 의견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대신이 거취(去就)를 내걸고 쟁론(爭論)하니, 신 역시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은 충역(忠逆)을 명백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신은 충역을 흐리멍덩하게 하는 사람이 됨을 면치 못하니, 신의 신명(身名)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은 감히 찬수하는 직임을 감히 사양합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그냥 두라. 경과 원경하가 뜻을 내가 알았다."
하자, 김재로가 물러나 자리에 엎드렸다. 원경하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영부사는 비록 이 일을 맡고자 하지 않으나 신은 마땅히 성교(聖敎)를 받들겠습니다. 신의 부자가 망극한 은혜를 입었는데 만약 이런 일들이 아니면 어떻게 나라에 보답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좋다고 말하고, 드디어 원경하를 찬수 당상(纂修堂上)으로 삼고, 정원으로 하여금 조명리(趙明履)를 독촉해 올라오게 하였다.
유한숙(兪漢蕭)을 승지로, 이우(李堣)를 집의로, 한사직(韓師直)을 헌납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예조 참판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20일 신묘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여, 호남과 영남의 군포(軍布)를 돈으로 절반을 참작해 상납하게 하였는데, 목화(木花)가 흉작이어서 백성들의 바라는 바를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지사 원경하(元景夏), 사직 홍계희(洪啓禧)를 불렀는데, 홍 계희는 사직하고 들어오지 않으면서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찬수(纂修)하는 일에 본디 미견(微見)이 있어서 그윽이 생각하기를, ‘책을 지어 후세에 전하는 것은 아래에 있는 사람의 일인데, 다만 이렇게 의리를 천명(闡明)하는 것은 실로 나라의 체면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명을 받들어 편찬(編纂)하는 일을 했으니, 이미 중도에서 그만두기가 어려워 분수에 따라 힘을 바쳤습니다. 삼가 듣건대 중신(重臣)이, 신이 책자에다 많이 첨가해 넣어 한 세상이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책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여 여러 당상이 두서(頭緖)를 상확(商確)하여 대략 중초본(中草本)의 역(役)을 정하여 신이 실로 감독해서 대략 수개(修改)를 행하였는데, 소세(梳洗)328) 를 채 반도 못하고 중신(重臣)이 갑자기 신을 죄주니, 실로 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바입니다. 또 삼가 듣건대 대신이 지은 첫머리의 논설(論說)을 중신의 아룀으로 인해서 쓰지 않기로 했다고 하는데, 신의 의견은 대신과 서로 부합됩니다. 대신이 이 때문에 다시는 찬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하니, 신의 거취는 그 의리가 혼자만 달라서는 안됩니다. 더군다나 신은 거기다가 또 첨가해 넣은 죄가 있으니 이 일을 간여해 들어야 할 이치가 더욱 없습니다. 대조(大朝)께서 전교하시어 신의 입시를 명하였으나, 정세가 위태로워 나가서 받들 길이 없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이천보와 원경하에게 유시하기를,
"찬수하여 실은 바는 모두 《정원일기(政院日記)》에서 나왔는데, 흉역배들이 어찌 이를 모르고서 역적질을 하였겠는가? 이 책은 마땅히 자성(慈聖)과 경묘(景廟)의 지극히 어진 성덕(聖德)을 부연해 글을 만들어야 하며, 나 역시 양궁(兩宮) 사이에서 간연(間然)할 것이 없다. 또 당습(黨習)의 기미가 《가례원류(家禮原流)》에서 나온 것인데 권상하(權尙夏)가 서문을 지으면서 미워하는 것이 너무 심하였다. 인심은 불울(拂鬱)하게 해서는 안되는데 불울하면 역적질을 하게 된다. 만약 김재로의 서문을 사용하면 시배(時輩)들이 반드시 서문 가운데 든 사람을 낱낱이 논죄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자들로 하여금 더욱 불울하게 할 것이다. 내가 비록 지내온 내력을 기록하라고 명하였으나 어찌 이처럼 자세히 해야 하겠는가? ‘심정연(沈鼎衍)의 무욕(誣辱)함이 망극했다.’고 한 것은 반드시 서인(西人)이 일컫는 바 육상궁(毓祥宮)이 몰래 도왔다는 등의 일 때문에 나를 미워해서 그랬다고 한 것이다."
하고, 인하여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이제 또 서문을 지어서 나를 사서 욕먹게 하겠는가? 만약 억제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근본이 될 것이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아주 지당합니다."
하자, 이천보가 말하기를,
"김재로는 자세히 기록한 연후에야 책을 펼치면 요연(瞭然)하게 된다고 말한 것이며, 원경하의 말은 상쾌하게 하지 않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성상의 뜻하시는 바를 신 역시 아는데, 한번 품재(稟裁)를 거친 연후에야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니, 성상께서는 더는 번뇌(煩惱)하지 마소서."
하였다. 임금이 또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이 책에서는 어찌 세 궁(宮)의 덕(德)을 강령(綱領)으로 하지 않고 도리어 많은 사람을 첨가해 넣고자 하였는가? 서문에 흉역(凶逆)을 기록했으면 어찌 각 궁(宮)을 그 가운데다 나열해 기록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는 모두 신들의 죄입니다."
하자, 임금이 홍계희(洪啓禧)의 상서를 들이라 명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읽도록 했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가 말하기를, ‘찬수(纂修)함은 나라의 체면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빨리 이 책을 중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어찌 김재로와 홍계희 때문에 갑자기 이 일을 중지하겠습니까? 신과 이천보가 마땅히 완성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술잔을 나누면서 유감(有感)을 풀어버린 경우가 있었으니, 경들은 오늘 지난 일을 씻어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이천보가 원경하는 젊어서 서로 좋게 지냈는데 오랜 후에 크게 혐의로 틈이 생겼기 때문에 임금이 언급한 것이었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은 이 책을 반드시 완성하고야 말겠습니다. 사람들이 신을 비록 탄박(彈駁)하더라도 신은 떠나지 않고 완성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염치가 없는 일이니, 어찌 옳겠는가?"
하였다. 이천보와 원경하가 번갈아서 중단하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또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김재로와 홍계희가 서로 이끌어서 당습(黨習)을 하니 이는 무슨 마음인가? 이 책도 당습을 하기 위해서 지은 것인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 숨을 죽이고 물러났다.
영부사 김재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찬수 도제(纂修都提)의 명을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되지 않아 그윽이 생각하기를, ‘신하로서 성의를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은 오직 이 일에 있다. 반드시 제일 먼저 원두(源頭)를 논하여 흉역이 나오게 된 조짐을 밝힌 연후에야 백대(百代)까지 징신(徵信)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하게 알도록 할 수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어제 연중(筵中)에서 찬술한 본의를 대략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품이 본디 고집스럽고 막힌데다가 말 역시 무뚝뚝하고 어눌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교(聖敎)에 어긋나고 성상의 마음을 괴롭혀 드렸습니다. 누누한 하교가 매우 엄중하셨으니, 이미 신하로서 감히 들을 바가 아니며, 신 때문에 약(藥)과 수라(水剌)를 드시지 않는 일까지 있게 되었으니, 신은 비록 만번 죽어도 그 죄를 때우기에 부족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하얀 머리로 오늘의 하교를 듣고서도 노론(老論)의 영수(領袖)가 되겠다는 것인가? 이 상소는 돌려 주라."
하였다.
조운규(趙雲逵)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는데, 이는 금년 봄에 조운규가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 맨처음 윤지(尹志)의 역절(逆節)을 발각해 조정에 보고했기 때문에 이로써 임금이 아주 융숭하게 대우했던 것이다.
9월 21일 임진
밤에 번개가 쳤다.
찬수청(纂修廳)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약원(藥院)의 여러 신하 및 영의정 이천보를 소견하여 하교하기를,
"이번 일이 있은 후에 황형(皇兄)을 뵐 낯이 없게 되었다. 나를 위해서 의리(義理)를 천명(闡明)하면서 황형(皇兄)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황형께서 만약 내내 묻는다면 내가 실로 대답할 말이 없다. 이를 위해 찬수하는 것은 내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후세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김재로의 서문을 보건대 실로 약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여러 차례 하교하였는데도 끝내 뜻을 알지 못하니, 이후에는 또 어떤 광경이 나올지 모르겠다. 내가 4당(黨)으로 하여금 살육(殺戮)을 하지 않게 하고자 하였으나 이번 봄 역옥(逆獄)은 이미 큰 살육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또 서문을 지어서 살육을 열려고 하니 무슨 마음인가? 이제 노론(老論)이 없어진 연후에야 나라가 편안하게 된다. 남인(南人)은 흉역을 범한 자 이외에는 편벽된 논의가 없는데, 유독 노론만이 굳게 고집하여 즐겨 중지하지 않았다. 내가 어찌 바람이 없는 데도 풍랑(風浪)을 일으킨 것이겠는가? 유 판부사(兪判府事)는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면서 노론의 영수(領袖)가 되고 있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유척기(兪拓基)는 본래 충후(忠厚)한 사람이어서 지난번 화락(花駱)329) 으로 분당(分黨)될 때에도 이 사람만은 초연하게 들어가지 않았으니, 사람마다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관빈(趙觀彬)만이 영수가 아닌가? 이광좌(李光佐)가 죄를 입은 것은 소론(少論)의 영수였기 때문인데 어찌 경계할 줄을 모르는가? 내가 보건대 노론이 당론(黨論)을 하지 않은 연후에야 다른 날 눈을 감을 수 있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어찌 이처럼 번뇌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일이 어찌 사문(斯文)에 해당되겠는가?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도 실로 마음이 아프다. 노론이라 하여 어찌 유독 흉역이 없었기에 이처럼 코를 높이고 거리낌없이 말을 하는가? 노론의 진신(搢紳)들이 만약 다시는 당론을 하지 않겠다고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고백하면 내가 마땅히 진전(眞殿)에 아뢰겠다. 나랏일을 위하지 않음이 참으로 이와 같다면 노론이 어찌 역신(逆臣)을 면하겠는가? 오늘날은 바로 노론 사람들의 죽고 사는 관문(關門)이다."
하고, 인하여 폐합(閉閤)하고 응하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모두 물러나왔다.
영중추부사 김재로와 지사 홍계희, 영의정 이천보가 금오(金五)에서 명을 기다리니, 하교하기를,
"대명(待命)하지 말라."
하였는데, 김재로가 재차 상소하여 인죄(引罪)하였다.
약방(藥房)에서 구전(口傳)으로 세 번 아뢰어 입진(入診)하기를 바라니, 하교하기를,
"노론을 이기지 못하니, 장차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해야 할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노론이 내 말을 듣고도 벙어리처럼 하고 있는데, 약원(藥院)은 참으로 의약청을 설치하고자 하는가? 속히 물러가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광경을 보건대 단지 영수(領袖)만 알고 있을 뿐 군부(君父)는 알지 못한다. 60세 늘그막에 태아검(太阿劍)330) 이 손에 있으니, 정원은 잘 알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새벽에 진전(眞殿)에 고하고 대처분(大處分)이 있을 것이니, 백관 이하는 홍화문(弘化門) 밖에 모이라."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 이하 조신(朝臣) 70여 명이 혹 홀로 상소하기도 하고, 혹은 연명 상소하여 모두 당론(黨論)을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고백하였는데 모두 노론이었다. 이날에 임금이 약을 중지하고 음식을 물리치며 연달아 엄명을 내려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대궐문 밖에 초승(軺乘)이 길을 메우고 초저녁부터 정원(政院)에 정소(呈疏)하기 시작해서 새벽까지 끊어지지 않아 마치 과옥(科屋)에 시권(試券)을 올리는 형상이었다. 이해 봄에 소론으로 조정에 있는 자들이, 역적이 그 당에서 많이 나온 것으로써 모두 두려운 마음을 품고 분분하게 진소(陳疏)해서 후회하여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을 허락해 달라고 빌어 국시(國是)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안정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노론이 시세(時勢)를 타고 뜻을 쾌히 하여 다시 살육의 단서를 열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또 상소하여 스스로 고백하기를 마치 증빙서처럼 하였는데, 모두 조제(調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9월 22일 계사
동영(東營)의 입직군(入直軍)에게 명하여 홍화문(弘化門)을 호위(扈衛)하라고 하였다. 어제 하교한 뒤로 대신 가운데 진소하지 않은 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는데, 얼마 후 중지시켰다. 임금이 진전(眞殿)에 배알(拜謁)하고 전정(殿庭)에서 아뢰기를,
"불초(不肖) 소신이 30년 동안 사복(嗣服)하고 있으나 다스리는 효과가 막연하고, 당습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경자년331) 이후에는 군부를 모르고 각기 그들의 당을 세워 서로 경알(傾軋)하여 그 흐르는 폐단이 심지어 신축년·임인년에는 문호(門戶)마다 뜻을 제각기해서 살육을 서로 행하여 무신년의 화(禍)를 빚었습니다. 금년에 이르러 그 유래한 바를 따져 보면 고장 난명(孤掌難鳴)으로 노론·소론·남인·북인에게 모두 그 허물이 있습니다. 지난 을묘년332) ·병진년333) 에 큰 살육을 하였다교 세상에서 말하고 있으나 금년에는 정법(正法)한 자가 거의 2백 명이나 됩니다. 그들이 비록 효경(梟獍)이어서 스스로 왕장(王章)을 재촉한 것이지만 나라의 원기(元氣)가 이로 인해서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국문을 마쳐 중외가 조금 잠잠해졌으니, 마음을 정백(精白)하게 가져 동인 협공(同寅協恭)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원인손(元仁孫)이 차자로 청한 것을 인하여 의리를 천명하기 위해서 찬수청을 설치하여 찬집(纂輯)하고 있는데, 황구 대신(黃耉大臣)이 자질구레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임무를 위임받은 중신(重臣)이 온축(蘊蓄)됨을 감내(堪耐)하지 못하고 지난날의 일을 언급하고 말이 막중한 곳을 핍박하였으니, 교목 세신(喬木世臣)이 한결같이 이에 이른 것은 모두 신의 죄입니다. 오늘 노론이 상소하여 자신의 죄를 털어놓았으니 비(否)를 돌려 태(泰)334) 로 돌릴 수 있는 큰 기회입니다. 마땅히 전대(殿臺)에 앉아서 중외에 유시(諭示)를 반포하면, 지금 이후부터는 노론·소론, 남인·북인이 다시 당습을 하겠습니까? 노론은 정인중(鄭麟重)·이천기(李天紀)가 다시 살아나고 소론에서는 신치운(申致雲)·김일경(金一鏡)이 다시 살아나고, 남인과 소북(小北)에 이르러서도 만약 조정에 선다면 어찌 다른 마음을 두겠습니까? 신은 염려하지 않으나 만약 마음을 씻지 않는다면 이 역시 민암(閔黯)과 윤휴(尹鑴)의 무리입니다. 이후에 대신 이하에 이러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조온(操溫)335) 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오늘 반포한 이후에는 각기 그 당을 찾아서 혼인(婚姻)한 자는 일체 통렬히 금하며, 만약 당습이 마음에 싹트는 자는 영령께서 굽어 살피소서. 전후의 대소 진장(陳章)은 모두 사각(史閣)에 보관하여 후세에 남기겠습니다. 고유(告由)한 후에 진장(陳章)하지 않은 대신과 중신은 경중을 나누어 엄히 처분하겠습니다. 문신(文臣)이 붓끝으로 서로 다투어도 오히려 난역(亂逆)이 생기는데, 더군다나 무신(武臣)들이 궁시(宮矢)로 서로 다투면 그 폐단을 말로 다하겠습니까? 이러한 자는 마땅히 모래밭에서 군율(軍律)을 쓰겠습니다. 오늘 위로 고유하고 아래에 반포한 후에는 사왕(嗣王)이 된 자가 어찌 범연하게 소홀히 하겠습니까? 이는 소신(小臣)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령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앞으로 가까이 와서 자세히 기록하게 하였다. 이어서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반교(頒敎)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내가 덕(德)이 없이 임어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 다스림이 뜻에 맞지 않았으니 금일에 이르러 무슨 얼굴로 영령께 절을 하겠으며 무슨 면목으로 신민(臣民)을 대하겠는가? 아! 물(物)이 극도에 이르면 반드시 뒤집어지게 마련이며, 박괘(剝卦)336) 가 다하면 양(陽)이 회복되게 마련이다. 금년의 난역(亂逆)은 지난 사첩에도 없던 바인데 이로 인해서 다행히 한쪽 사람들이 꿈에 빠져 드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번의 갈등(葛藤)은 실로 겉으로 드러난 것을 헤아려서 이로 인해서 한쪽 사람들이 혼몽(昏夢)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모두 효경(梟獍) 같다고 말하지만 자신들이 효경이며, 당습이라고 말하지만 자신들이 당습을 한다. 또 각자 충(忠)이라 하고 군자(君子)라고 말하지만, 아! 조선(朝鮮)의 당은 충(忠)·역(逆)이나 군자(君子)·소인(小人)의 당이 아니라 바로 노론·소론·남인·북인의 당이다. 그래서 비록 군자라 하더라도 각기 당은 하고 소인도 각기 당을 하는데, 공성(孔聖)337) 께서 어찌 ‘군자는 보편적으로 하고 편당(偏黨)을 하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을 하고 보편적으로 하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편당하는 것이 어찌 당이 아니랴? 내가 본 것이 옳으며, 당이란 말이 맞지 않은가? 몇 년 동안 고심(苦心)한 것을 본받지 않고서 각자 붕당(朋黨)을 좋아하기를 마치 추환(芻豢)과 조제(調劑)처럼 해서 빙탄(氷炭)338) 이 되고 있으니, 아! 오늘의 세도(世道)는 비록 요순(堯舜)이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거의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혹시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성하여 장차 공성께서 말한 ‘이르지 않는 바가 없게 된다.[無所不至]’라는 지경에 이르지 않겠는가? 다행하게도 하늘이 동방(東邦)을 돕고 영령께서 우리 나라를 보호하여 한 해 봄·가을에 서로 이어서 깨닫게 하였으니, 지금 이후부터는 우리 나라가 거의 잘 되게 되었으나 관계된 바가 막중하기 때문에 위로는 진전(眞殿)에 고하고 아래로는 경외에 반포하였는데, 모두 말로 아뢴 내용에 있으니, 이제 어찌 많은 유시를 하겠는가? 그 아뢴 말에 운운(云云)하였다. 【아뢴 말은 위에 보인다.】 아! 오늘날 신하된 자로서 이 말을 듣고서도 먼 외방 사람을 가려 쓰지 않는다면 어찌 신하의 절조가 있다고 하겠는가? 지금 고유하고 반포한 후에 다시 지난 일을 제기하는 자는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역률(逆律)로써 다스리겠다. 아! 이번의 정형(正刑) 추율(追律)에 응당 연좌(連坐)될 자 이외에 혹 ‘이 사람은 누구의 지친(至親)이고 인척(姻戚)이다.’ ‘누구의 친구이고 문생(門生)이다.’라고 하여 이로써 끌어들여 구애(拘碍)하고 이로써 얽어 넣으면 마땅히 남을 무함하는 율로 처벌하겠다. 내가 비록 늙었으나 태아검(太阿劍)339) 은 무디지 않으니, 모두 잘 알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모든 소장(疎章)은 모두 석실(石室)에 보관하라. 마치 화로(火爐) 안에다 금(金)을 녹이는 것과 같아서 비록 금과 철(鐵)이 같지 않더라도 저절로 합쳐져 하나가 될 것이다."
하였다.
명하기를,
"판부사 유척기(兪拓基)를 파직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고 전 판서 조관빈(趙觀彬)·박치원(朴致遠)을 파직하라."
하였는데, 반교(頒敎) 전에 진장(陳章)하지 않은 것에 좌죄(坐罪)되었기 때문이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와 지사 홍계희(洪啓禧)가 이름이 구주(口奏)에 오른 것으로써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경재·장신을 불렀는데, 이조 판서 신만(申晩)에게 유시하기를,
"이때가 바로 기회이니 사람을 임용하는 즈음에 더욱 힘을 써야 마땅하다."
하고,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에게 말하기를,
"무변(武弁)으로 당습을 한 자는 내가 마땅히 한 사람을 베어 대중에게 보이겠으며, 비록 경들이라 하더라도 역시 그 법을 쓰겠다."
하니, 김성응이 말하기를,
"무인들은 시비(是非)를 모르고 한갓 관작(官爵)만을 알아서 각기 임용하는 사람에게 붙게 마련입니다. 당습을 버리는 것은 오로지 양전(兩銓)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정사(政事)의 주의(注擬)는 색목(色目)을 잊는 것이 최상이며, 그 다음은 따져서 분배(分排)하는 것이니, 성상께서 항상 모름지기 정망(政望)을 조사해 살피시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게 하셔야 합니다."
하니,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근래에 대신과 비국 당상을 드물게 만나보시는데, 바라건대 자주 불러서 책면(責勉)하셔야 합니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이 기회를 잃지 말고 모든 정무를 총람(總攬)하기를 아뢰었습니다. 이번 대처분 후에 조정의 기상을 잊지 마셔야 하니, 비유하자면 마치 그릇은 항상 모름지기 닦고 씻어서 이끼가 끼지 않게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왕세자가 대리하면서부터 대조(大朝)께서 상참(常參)·차대(次對)·경연(經筵)을 폐지하였기 때문에 신만 등의 말이 이러한 것이었다. 이날에 비로소 약원(藥院)의 입진(入診)과 진약(進藥)을 허락하였다.
다시 찬수청(纂修廳)을 다시 설치하여 김재로(金在魯)를 도제조(都提調)로 삼았다.
신만(申晩)·서명빈(徐命彬)·이정보(李鼎輔)·남태제(南泰齊)를 찬수청 당상으로 삼았는데, 원경하(元景夏)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9월 23일 갑오
초저녁에 유성(流星)이 실성(室星) 아래에서 나와 북방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와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 쯤이었으며, 빛깔을 붉은 색이었다.
9월 24일 을미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전번 연경(燕京)의 예부(禮部) 자문(咨文)에 말하기를, ‘흠천감(欽天監)에 항성(恒星)의 경위도(經緯度) 표(表)를 중수(重修)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좌(星座)의 차례와 순서를 분명하게 조사했더니, 28수(宿) 가운데 자(觜)·삼(參) 두 별을 개정(改定)해서 위치를 바꾸었는데 건륭(乾隆) 19년340) 칠정서(七政書)는 바로 이 표로써 추보(推步)한 것입니다. 계유년341) 절행(節行) 때 연경에 간 관상감 관원인 이동량(李東樑)이 사재(私財)를 많이 들여서 서양국(西洋國) 사람을 인연하여 신법(新法)인 《항성표(恒星表)》 및 《교식칠요추보(交食七曜推步)》 등의 책을 24책(冊)이나 간신히 얻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때부터 항성(恒星)의 수도(宿度)가 더는 착오가 없게 되었으니 마땅히 포상하는 전례(典禮)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이동량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김재로가 상소하여 인죄(引罪)하니, 승지에게 명하여 도타이 유시하여 개석(開釋)하게 하였다.
9월 25일 병신
크게 우레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은 작은 콩알과 같았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庭試)를 친림(親臨)하였는데, 이는 순강원(順康園)을 봉한 경과(慶科)였다. 심이지(沈履之) 등 15인을 뽑았는데, 탁봉(坼封)하다가 박상철(朴相喆)의 이름에 이르러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손자가 등과(登科)한 것이다."
하였다. 임금의 둘째 딸 화평 옹주(和平翁主)가 일찍 죽어 박상철을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이때 19세였다. 임금이 유시하기를,
"너는 우선 돌아가서 독서(讀書)를 하고 영원히 청현직(淸顯職)을 사양하고, 조경(躁競)을 억제하는 것을 내 외손(外孫)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다. 이날의 명관(命官)은 바로 이천보(李天輔)였는데, 과방(科榜)에 대해 남의 말을 많이 들었다.
영의정 이천보가 재이(災異)로써 면직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준휘(李儁徽)를 정언으로 삼았다.
9월 26일 정유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정원에서 재이로써 진계(陳戒)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의 나랏일은 가는 곳마다 재변이 아닌 곳이 없어서 비단 어젯밤 우레만 그럴 뿐 아니라 인심이 그릇되어 국옥(鞠獄)의 일이 연달아 있었으니, 이는 요역(妖逆)의 변인 것입니다. 홍수가 져서 물이 하늘까지 닿아 주현(州縣)이 떠내려 가고 물에 빠졌으니, 이는 우료(雨潦)의 변인 것입니다. 팔도가 흉년이라고 고하여 백성들이 흩어져 없어졌으니 이는 흉황(凶荒)의 변인 것이니, 오늘의 우레만 비로소 놀라고 두려워한다면 너무 늦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우레란 하늘의 호령(號令)인데 봄이나 여름에 호령을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가을이나 겨울에 있으면 호령이 상도에 어긋난 것입니다. 전하의 자리는 바로 하늘의 자리이니 전하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은 어찌 하늘을 본받고 하늘을 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정령(政令)을 논하는 것이 병(病)의 근원이 되어 즉시 이에서 폭발하여 말이 혹 격렬하면 성상의 노여움이 혹 갑자기 나오고 혹 행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전선(傳宣)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대저 기상(氣象)과 광경(光景)이 모두 급하고 갑작스러움을 면하니, 오늘의 때아닌 우레는 전하의 하신 일을 미루어 모든 일을 헤아리기[擧一隅三隅反]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였다.
9월 27일 무술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의례(儀禮)대로 서계(誓戒)342) 를 행하였는데, 장차 태묘(太廟)에 친히 제사를 지내려 하기 때문이었다.
9월 28일 기해
이정보(李鼎輔)를 우빈객으로, 조운규(趙雲逵)를 동경연으로, 정상순(鄭尙淳)을 부교리로, 조엄(趙曮)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9월 29일 경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동조(東朝)께 진하(陳賀)하였는데, 대왕 대비의 탄일(誕日)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86권, 영조 31년 1755년 11월 (0) | 2025.10.04 |
|---|---|
| 영조실록86권, 영조 31년 1755년 10월 (1) | 2025.10.04 |
| 영조실록85권, 영조 31년 1755년 8월 (0) | 2025.10.04 |
| 영조실록85권, 영조 31년 1755년 7월 (0) | 2025.10.04 |
| 영조실록85권, 영조 31년 1755년 6월 (1) | 2025.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