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신축
밤에 천둥이 쳤다.
왕세자(王世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백관들이 정배(庭拜)하고 곧 물러갔다. 하령(下令)하기를,
"이 재해를 맞아 수성(修省)하는 때를 당하는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에서 반드시 상달(上達)할 일이 많을 것인데 마침내 한마디 말도 없이 물러났으니,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사간(司諫) 정한규(鄭漢奎)가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장령(掌令) 유수(柳脩)가 천둥의 재변으로 인하여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의 위에 현·우(賢愚)가 구분이 없어 정주(政注)가 효잡(淆雜)하고, 거듭 기근(饑饉)이 든 나머지에 민생은 굶주려 쓰러져 가고 있는데 구제할 대책이 없습니다. 공도(公道)는 시행되지 않아 거의가 구차히 따르려는 마음이 있고, 조정(朝政)이 궐(闕)함이 있으나 구언(求言)의 영(令)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러고서도 수성하는 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답을 내렸다.
10월 2일 임인
밤에 번개가 쳤다.
하교(下敎)하기를,
"이미 친제(親製)로써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께〉 아뢰었으니, 금번의 대제(大祭)부터 예주(醴酒)를 사용하라. 동조(東朝)에 올리는 것도 예주로 할 것이며, 남은 술은 내의원(內醫院)에서 술로 법제(法製)하는 데에 사용하라."
하였다.
영남 어사(嶺南御史) 윤동성(尹東星)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불러 보고 수령(守令)들의 능력 여부를 물은 다음, 좌병사(左兵使) 유주기(兪胄基) 등 12인을 금오(金吾)343) 에 내려 감처(勘處)하게 하고, 영덕 현감(盈德縣監) 이근(李瑾) 등 5인에게 혹은 새서 표리(璽書表裏)344) 를 내리고 혹은 말[馬]을 내려 포장(褒奬)하였다. 이때 조가(朝家)에서 조곡(糶穀)345) 을 임의로 나누어 주는 일을 금하였는데, 임금이 윤동성에게 명하여 살피게 하였다. 윤동성이 연로(沿路) 백성들의 일이 급박함을 보고, 또 임의로 조곡을 나누어 주어 구제하고 돌아와서는 자핵(自劾)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급암(汲黯)과 같은 일346) 이다.’라고 하였다. 뒤에 상신(相臣)이, ‘후일에 따를 폐단이 있다.’고 아뢰어 윤동성을 파직하였다.
10월 3일 계묘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도제조(都提調) 이천보(李天輔)에게 이르기를,
"금년에 한쪽 사람들은 그 당(黨)에서 역신(逆臣)이 나오자 능히 징계로 삼았고 한쪽 사람들은 이러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단단히 하려고 하여 헐뜯기를 마지 않았으니, 내가 그러므로 그 소통(疏通)을 권하여 이루려 한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성심(聖心)을 움직이지 마시고 대체(大體)를 총괄하시어, 주·객(主客)의 분의(分義)를 굳게 지켜서 소통하는 정책을 크게 행하시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근일의 거조는 참으로 지나치십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들의 당심(黨心)을 징계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기탕(大承氣湯)을 쓴 뒤에야 삼귤다(蔘橘茶)를 쓰려고 한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조 판서(吏曹判書) 신만(申晩)은 조재민(趙載敏)이 죄를 입을 때를 당하 여 그 아우를 서둘러서 초사(初仕)에 의망(擬望)하였으니, 그 마음이 매우 공정합니다. 이와 같이 비방(誹謗)을 스스로 맡고 나서는 신하를 오래도록 전조(銓曹)에 두어야만 그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칭찬하였다. 조재민은 이해 봄에 역수(逆囚)의 고(告)하는 바가 되었는데, 임금은 그가 본래 당론(黨論)에 거센 것을 미워하여 해도(海島)로 형배(刑配)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천보가 또 신구(申救)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임금이 동래 부사(東萊府使) 임상원(林象元)을 체직(遞職)하라고 명하였다. 임상원은 신치운(申致雲)과 친밀하여, 동래(東萊)에 부임하였을 때에 그 글을 받아 새겨서 관사(官舍)에 걸었었다. 신치운이 복주(伏誅)하게 되자 대신(臺臣) 서유량(徐有良)에게 논박(論駁)을 받게 되매, 임상원이 해직(解職)을 바라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상원은 정사(政事)를 함에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지난번에 하교하시기를, ‘어진 자가 위(位)에 있고 능한 자가 직(職)에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임상원의 경우 능한 자라 할 수 있으니, 임용되어야 합니다."
하였다.
10월 4일 갑진
우박이 내렸다.
10월 5일 을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갔으니, 장차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친행(親行)하기 위해서였다. 임금의 춘추가 높았으나 향사(享祀)에 대한 정성이 더욱 두터워서 비록 한더위나 한추위에도 대고(大故)가 아니면 일찍이 섭행(攝行)을 명하는 일이 없었고, 절하고 꿇어앉고 추창(趨蹌)함에 있어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었다. 숙종(肅宗) 묘실(廟室)에 들어갈 때마다 문득 오랜 동안 부복(俯伏)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었다.
10월 6일 병오
임금이 대제(大祭)를 의식(儀式)과 같이 친행(親行)하고 환궁하였다.
10월 7일 정미
사간원(司諫院)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황해도 유학(幼學) 이면유(李勉儒)가 상서(上書)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8일 무신
밤에 번개가 쳤다.
부수찬(副修撰) 조엄(趙曮)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명채(曹命采)가 대변(對辨)한 글의 추한 행동 한 조항에 있어서는 스스로 변명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로지 두찬(杜撰)347) 만을 일삼고, 분결에 함부로 떠들어 댔으니, 그가 공상(空桑)348) 에서 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마음이 있겠습니까? 가장 애석한 일은 지위가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어찌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공청(公廳)이나 사실(私室)을 막론하고 영록(瀛錄)349) 에 대하여 사사로운 글을 왕복하면서 심지어 권좌(圈座)에까지 전하였으며, 열을 올려서 변명하기를, 마치 나이 젊은 사람들이 서로 겨루듯이 하여 언관(言官)을 깔아뭉갰습니다. 이것이 만약 대료(大僚)의 본 뜻이라면, 지난 겨울에 언로(言路)를 열어야 한다고 한 차자(箚子)는 어찌하여 나왔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예사 답을 내렸다.
10월 9일 기유
밤에 번개가 쳤다.
임금이 〈《천의소감(闡義昭鑑)》의〉 찬수(纂修)를 맡은 여러 신하에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찬수 당상(纂修堂上)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찬집(纂輯)할 때에 아래에서 감히 조사(措辭)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위에서 지휘하는 하교가 있어야만 신 등이 비로소 찬출(撰出)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어린 임금을 세워서 제멋대로 흉억(胸臆)을 자행(恣行)함은 환시(宦侍)들이 이롭게 여기는 바이다. 그러므로 들은즉 목묘(穆廟)350) 께서 처음 대내(大內)에 들어오셨을 때에 이 무리들이 역시 불만스러운 빛이 있었다 한다. 내가 동위(銅闈)351) 로 들어오자 박상검(朴尙儉)의 무리가 처음에 나에게 빌붙으려 하였다. 그때 대계(臺啓)에 목내선(睦來善)의 복관(復官)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박상검이 나에게 떠보려고 말하기를, ‘위에서 어찌 「빨리 정지하라,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였다. 황형(皇兄)352) 은 갑술년353) 부터 성후(聖后)354) 께 이른 아침과 깊은 밤에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간혹 대조(大朝)께 책벌(責罰)을 받을 경우 반드시 바지를 걷고 뵈었었다."
하고, 임금이 한동안 목이 메어 울다가 말하기를,
"황형이 성후께 효도를 하였으니, 자성(慈聖)355) 께도 어찌 차이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가 말하기를,
"이 부분은 아래에서 말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어제(御製)가 있어야만 의란(疑亂)을 깨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부르는 대로 받아 쓰라.’ 하고, 찬수를 맡은 여러 신하에게 하유(下諭)하였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아! 여러 역적들이 망측한 말로 나를 핍박한 것은 하늘이 아시고 조종(祖宗)의 영령이 굽어보시며, 황형이 자세히 아신다. 비록 가슴은 쓰리나 나에게 누(累)가 되겠는가? 다만 말이 동조(東朝)에 핍박이 된 것은 사람의 아들이 된 자로서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으니, 죽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좋을 성싶다. 황형의 지효 지우(至孝至友)의 덕에 누를 끼침에 있어서는 자제(子弟)가 된 자로서 마땅히 눈을 크게 뜨고 가려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스스로 집성(輯成)함이 마땅하니, 어찌 여러 신하를 기다리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아 목이 메인다. 대략을 조목조목 다음에 나열하여 찬수하는 신하에게 붙인다. 아! 우리 황형의 지효(至孝)는 7세에 성후(聖后)를 섬김에 있어 이른 아침이나 깊은 밤에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후께서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 형제가 입시하였을 때에, ‘세자(世子)가 나를 섬김은 소생(所生)보다 낫다.’는 하교까지 계셨고, 임오년(任午年)356) 에 미쳐서는 이와 같은 지극한 효성으로 자성(慈聖)을 섬겼으니, 자성의 지극한 사랑과 황형의 지극한 효성으로 화기(和氣)가 금중(禁中)에 가득하여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칭송하였으니, 이는 바로 사람들이 헐뜯고 이간(離間)할 수 없는 경우인 것이다. 아! 슬프다.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폐일(吠日)357) ·석천(射天)358) 의 마음을 품고 교문(敎文) 가운데 감히 음참(陰慘)하고 망측한 행배(行盃)359) 등의 말로써 무신년360) 의 역란(逆亂)을 빚어냈으니,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대역(大逆)이다. 그리고 금번의 역적 신치운(申致雲)의 게장[蟹醬]에 관한 초사(招辭)에 있어서는 더욱이 가슴이 선득하고 뼈가 시려서 차마 들을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이는 역적 김일경의 교문에 비길 일이 아닌데, 이 일은 전혀 알지 못하였었다. 그러므로 신치운을 정형(正刑)361) 에 처한 뒤에 울며 우리 자성께 아뢰었는데, 자성의 하교를 듣고서야 그때 황형께서 〈게장을〉 진어(進御)한 것이 동조(東朝)에서 보낸 것이 아니요, 곧 어주(御廚)에서 공진(供進)한 것임을 알았다. 우리 황형의 예척(禮陟)362) 은 그후 5일 만에 있었는데, ‘무식한 시인(侍人)이 지나치게 진어하였다.’는 말로써 효경(梟獍)363) 의 무리가 고의로 사실을 숨기고 바꾸어 조작하여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핍박하였다. 이천해(李天海)가 앞에서 창론(倡論)하였고 신치운이 뒤에서 결말을 지었으니, 금번의 일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를 알았겠는가? 아! 비단 나의 마음만이 아픈 것이 아니라, 우리 황형도 반드시 저승에서 송구해 하고 슬퍼하실 것이다. 지금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과연 사람의 자식이 된 도리라 하겠으며 사람의 아우가 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 황형이 어찌 한갓 우리 두 성후(聖后)께만 지효로 섬기셨겠는가? 계술(繼述)하는 효성은 백왕(百王)을 뛰어넘었다. 아! 경자년364) 이전은 불령(不逞)의 무리가 소인(小人)의 마음으로써 성인(聖人)의 마음을 억측(臆測)하여 감히 ‘그 시기가 있다.’고 하였는데, 경자년 이후 우리 황형께서는 선왕(先王)의 뜻과 일을 계술하여 정사(政事)나 명령에 하나도 변경한 것이 없었으니, 지극하고 위대하시다. 그리고 초년의 세초(歲抄)365) 에 부첨(付籤)366) 한 것은 황형이 뜻을 두었던 바가 아니라 옛날에도 이런 일은 있었는데, 그때에 고집스럽게 다투는 일이 있었으므로 감히 역적 박상검(朴尙儉)으로 인하여 ‘빨리 정지하라,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하교를 얻어내려 하였는데, 이는 박상검이 필정(必貞)과 교결(交結)하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그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공성(孔聖)께서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를 것이다. [履霜堅氷至]367) ’라고 한 바로서, 이는 내가 역적 박상검의 말을 몸소 들은 것이다. 이들은 효경의 마음을 참지 못하고, 박상검·필정과 은밀히 체결하여 먼저 윤지술(尹志述)을 제거하였다. 아! 우리 황형의 지인 성덕(至仁盛德)으로서 결코 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니, 바로 가정 황제(嘉靖皇帝)368) 가 ‘황형(皇兄)369) 의 본뜻이 아니다.’라고 한 하교와 같은 것이다.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고 〈황형께서〉 승하하시니, 못하는 짓이 없는 효경의 마음으로써 우리 황형의 계술하는 대효(大孝)를 은밀히 가리우고는 감히 우리 자성께서 언문 교지(諺文敎旨)로 국책(國策)을 결정하신 일을 원망하고 망측한 말을 조작하여 전하고 또 전해서, 신치운은 그 부도(不道)의 말을 토로하였고 심악(沈)은 그 부도의 마음을 드러내었으니, 분통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분통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불러 쓰는 일이 이에 이르니,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이 두 조목은 30년 동안 하유(下諭)하려다가 차마 하지 못한 일이다. 여러 신하가 나를 위하여 분명히 밝히려고 하는데 내가 만약 차마 못하는 마음만을 지켜서 찬수가 끝나기 전에 하유하지 못한다면, 그 무슨 낯으로 삼조(三朝)370) 에 우리 자성을 뵈오며, 또한 무슨 낯으로 우리 황형께 돌아가 뵙겠는가? 지금 이 하유는 간략하고 곡진한 것이니, 아! 찬수하는 신하들은 윤문(潤文)하여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조중직(趙重稷)을 집의로, 홍준해(洪準海)를 지평으로, 이의철(李宜哲)을 수찬으로, 유언민(兪彦民)을 승지로, 황경원(黃景源)을 호조 참판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10월 10일 경술
밤에 번개가 쳤다.
10월 12일 임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기판(騎判)371) 과 편차인(編次人)을 불러 보았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근일 천둥의 이변(異變)은 비상(非常)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분위기는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이 뒤로 다시는 당론(黨論)을 주장할 자가 없을 듯싶습니다. 그러나 또한 다른 당이 생기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은 색목(色目)에 치우치는 것이 주색(酒色)보다 심하다. 그러나 세상에 권신(權臣)이 없음도 또한 당론에서 말미암았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만약 백관(百官)이 서로 규정(規正)하는 일을 당론으로 돌린다면, 나라 일이 역시 염려됩니다. 지금은 거의 초두(初頭)의 정사(政事)와 같은데, 일찍이 당론의 일로 죄를 입은 사람이 아직도 용서를 입지 못하였으니, 매우 가엾은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영순(趙榮順)의 일은 진실로 영상(領相)과 관계가 없으나, 나는 조영순을 결코 석방할 수 없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신은 문언박(文彦博)이 아니므로 조영순이 당개(唐介)에 해당되는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372) 석방하는 것이 실로 성덕(聖德)에 빛이 날 것입니다."
하였고, 김상로는 말하기를,
"신위(申暐)도 멀리 유배(流配)되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칙할 자는 신칙하고 신칙하지 않을 자는 신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주역(周易)》에,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음에 있어 소인(小人)은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조영순의 지난번 함답(緘答)373) 은 곧 소인의 태도였다. 기타 연루자 외에 유배·문출(門黜)374) 이하 석방할 자는 석방하고 직첩(職帖)을 줄 자는 직첩을 주되 검의(檢擬)하지 말 것이며, 시종(侍從)의 망(望)에서 삭제된 자는 모두 탕척(蕩滌)하라."
하였다.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조영순이 만약 해도(海島) 가운데서 죽기라도 한다면, 전하께서 어찌 고(故) 상신(相臣)375) 을 추념(追念)하는 일이 없으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을 나는 시위(侍衛)할 때에 보았다. 그 사람은 여유가 있어 보여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었는데,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흠을 잡다가 얻지 못하니 다만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린 일로 얽어서 죽였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대신이 비록 말하였으나 마음에 내키지 않아 미루었었는데, 중신(重臣)의 아룀을 들으니 마음에 슬픈 생각이 든다. 특별히 석방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금년 농사는 여러 도가 비록 더하고 덜한 것은 있으나, 흉년임은 일반이다. 정봉(停捧)하라는 명령을 도신(道臣)의 장문(狀聞)을 기다린다면 장차 연말이 다가와서 진위(眞僞)가 혼동될 것이니, 백성들에게 실질 혜택이 없다. 어찌 대리(代理)라 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팔도(八道)와 삼도(三都)의 미·포(米布)로서 묵은 포흠(逋欠)은 모두 정봉하라."
하였다. 원경하(元景夏)가 찬집한 책자를 받들어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단(沈檀)의 일은 나도 자세히 알고 있는데, 어찌해서 이 책에 실었는가?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신 등에게 옳지 않은 일이 있는 경우, 저하(邸下)께서 반드시 신에게 하교하소서.’ 하였고, 또 말하기를, ‘동궁(東宮)을 위하여 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본다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으니, 빼는 것이 좋다."
하였다. 유신(儒臣)에게 억시(抑詩)376) 를 진강(進講)하라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위의(威儀)와 언어(言語)는 비록 두 가지 일이나, 모두 안자(顔子)의 ‘사물(四物)’ 가운데에 있다. 위(衛)나라 무공(武公)이 나이 백세에도 공부에 매우 독실하였으며 기운도 또한 쇠퇴하지 않았다. 내 비록 늙었으나 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강하고 있다."
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박치륭(朴致隆)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고, 또 상달하기를,
"죄인 윤동성(尹東星)은 역적 심정연(沈鼎衍)과 친밀하기가 형제와 같고, 음흉한 정상은 형장(刑杖)을 참고 저뢰(抵賴)377) 하였으니, 그 제방(隄防)을 엄중히 하는 방도에 있어 이미 죽었다고 하여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노적(孥籍)의 율(律)을 시행하소서. 홍명원(洪命源)이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온 것은 그 당시 옥(獄)의 다스림이 느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 홍성(洪晟)이 폐고(廢錮)됨은 진실로 마땅한 일인데 조용(調用)하라는 명이 계시니, 물의가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대조(大朝)께 여쭈어 그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아산 현감(牙山縣監) 유언종(兪彦宗)은 도임한 지 두어 달이 되었는데 백성들은 그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을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하리(下吏)에게 위임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김해 부사(金海府使) 유현장(柳顯章)은 여러 번 군읍(郡邑)을 맡았었으나 청렴하다는 소문이 전혀 없고 칭찬할 만한 착한 일이 없음에도 갑자기 큰 고을에 제수되었으니, 물정(物情)이 크게 놀라워합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전주 부사(全州府使) 이협(李埉)은 재물을 탐하여 불법을 저지르고 백성들을 수탈(收奪)하여 윗사람을 잘 섬기니, 흉년든 해에 백성의 목숨을 활리(猾吏)에게 맡겨 그 고통을 거듭 받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영구히 삭제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모두 따르지 않았는데 유언종의 일은 ‘이 큰 기근을 당하여 수령들을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나문(拿問)하라’고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와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일찍이 홍성(洪晟)의 조용(調用)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한 바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의 상달로 인하여 모두 차자(箚子)를 올려서 면직(免職)을 바랐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신만(申晩)과 참의 박상덕(朴相德)이 상서하여 면직을 바랐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지평 유수(柳脩)가 재해를 만나 글을 올려 이르기를, ‘조정의 위에 현·우(賢愚)가 구분이 없어 정주(政注)가 효잡(淆雜)합니다.’라고 하였었다. 신만 등이 이 일로 인하여 인책(引責)하니, 유수가 또 상서하여 이르기를,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지 전지(銓地)를 풍자하여 논박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여 누누이 변명하였다.
팔도(八道)와 삼도(三都)의 묵은 포흠(逋欠)을 정봉(停捧)하라고 명하였으니, 농사가 흉년이기 때문이었다.
10월 13일 계축
필선(弼善) 서명응(徐命膺)이 상서하여 동·정·이·욕·근·태(動靜理慾勤怠)의 육잠(六箴)을 올리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잠규(箴規)의 말은 글자마다 절실하니, 아침저녁으로 경성(警省)하고 더욱 힘쓰겠다."
하고, 이어 원서(原書)를 궁중에 머물러 두도록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는데, 찬집 당상(纂輯堂上)도 같이 입시하였다. 제조(提調) 이철보(李喆輔)가 내자시(內資寺)의 정조(正朝) 조반주(早飯酒)와 단오(端午)에 새로 달인 향온(香醞)과 명일(名日)의 물선주(物膳酒)와 제석(除夕)의 방포주(放砲酒)의 존폐를 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조(東朝)에 올리는 것 외에는 모두 혁파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찬집하는 책 가운데에 공사(供辭)를 넣는다면 감란록(戡亂錄)과 다름이 없다. 찬수하는 뜻은 대개 그릇된 것을 점점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무신년378) 의 일에 대하여 너무 관대함을 주장하였는데, 지금 한 역적으로 인하여 이와 같이 만연(蔓延)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즐겨서 하는 일이겠는가? 내가 어렸을 때에 파리채[蠅拂子]를 쓰기 좋아하였는데, 지금은 차마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 비록 하나의 미물(微物)이라도 차마 죽일 수 없는데, 더구나 사람을 죽여서 법을 바르게 함을 어찌 즐겨서 하는 것이겠는가? 책자의 법의(法意)는 신중하여 떳떳한 마음이 있는 자가 보면 모두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되는데, 한번 이 가운데에 들어가면 실로 사람 구실을 하기 어렵다. 근년에 이위보(李渭輔)는 박상검(朴尙儉)의 일로써 이태좌(李台佐)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굳게 지키는 것이 많아 김용택(金龍澤)과 이천기(李天紀)에게도 지켰는데, 경 등이 알고 있는가? 내가 진정시키지 않았으면 어느 경지에까지 이를지 모를 일이다."
하였다. 임금이 책자를 열람하다가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의 일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이를 쓴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찬수 당상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밤을 새워서 체포되었으니, 어찌 의심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당시 판금오(判金吾)는 누구인가?"
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강현(姜鋧)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현과 이태좌가 어찌 같이하였겠는가?"
하매, 찬수 당상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이정신(李正臣)도 옥사(獄事)를 다루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민진원(閔鎭遠)과 이의현(李宜顯)이 그 억울함을 알고 석방을 청하였으며, 정수기(鄭壽期)도 또한 국문(鞫問)에 참여하였는데, 신이 모두 책 가운데서 뽑아버렸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묵세(墨世)에게는 매우 잔인하였다. 백망(白望)의 4촌이라 하여 반드시 얽어 넣으려 하여 장폐(杖斃)하기에 이르렀다. 이의연(李義淵)의 일을 어찌 기록하였는가?"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홍계희(洪啓禧)가 기록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의연은 경묘(景廟)를 위할 마음이 없었는데, 홍계희의 이러한 곳들은 매우 잘못이다. 이봉명(李鳳鳴)은 비록 사람은 한미(寒微)하나 곧 소장(疏章)을 처음 발단(發端)한 사람이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유응환(柳應煥)의 소장과 같은 것도 모두 실렸다면, 방만규(方萬規)의 소장도 또한 넣어야 하겠는가? 이는 대개 이광좌(李光佐)를 끌어들이려는 뜻이지마는, 이광좌를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과 같이 취급함은 옳은 일인가?"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이광좌는 비록 조태구·유봉휘와는 다르나, 어찌 기록할 만한 일이 없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책자를 두루 열람하고 어필(御筆)로 깎고 지우며 말하기를,
"가을의 숙살(肅殺)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봄의 따스함이 있는 것이니, 살리는 법을 사용해야 한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박필주(朴弼周)의 수차(手箚)는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야(山野)의 글을 어찌 이들 문자에 실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명리가 말하기를,
"이광좌의 말에 ‘연명 차자(聯名箚子)는 정상은 반역(反逆)이 아닌 듯하나, 마음은 반역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윤(伊尹)의 고사(故事)379) 에 비겨서 말하기를, ‘이러한 마음이 있으면 옳거니와 이러한 마음이 없으면 반역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광좌를 어떻게 뺄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원경하는 말하기를,
"이광좌가 대리(代理)의 일에 대하여 끝내 꺼림칙한 뜻이 있었으니, 싣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의리를 밝히려 하는데, 이로 인하여 또 허다한 사람을 영구히 막아놓는다면 이것이 어찌 처음의 마음이겠는가?"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성의(聖意)가 이에 미치시니,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광좌에 이르러서는 전혀 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관직을 추삭(追削)하는 것만도 또한 일률(一律)인데, 어찌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과 같은 죄벌을 준 뒤에라야 마음에 흡족하겠는가?"
하였다. 이천보 및 원경하와 조명리가 말하기를,
"신 등도 또한 그 죄율(罪律)을 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뿌리를 파헤치지 않을 수 없는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광좌를 애석히 여기겠는가? 일찍이 관일(貫日)의 충성으로써 말하였는데 지금 와서 극적(劇賊)의 죄를 더한다면, 앞뒤의 일이 어찌 크게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오로지 나의 원량(元良)과 원손(元孫)을 위하여 깊이 논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광좌에게는 실로 인심을 선동한 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광좌를 와주(窩主)380) 로 삼아 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단 말인가?"
하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성교(聖敎) 가운데 ‘와주’ 두 자(字)가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생 천자(門生天子)381) 의 말을 또 어찌 수록(收錄)하였는가?"
하고, 옥음(玉音)이 목이 메어 울먹이며 말하기를,
"경 등이 이런 문자를 억지로 실어서 나에게 욕이 되게 함은 무엇 때문인가?"
하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성교가 이러하시니, 신 등의 아픈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천둥의 이변을 들어서 진계(陳戒)하니, 답하기를,
"마땅히 아뢴 바와 같이 하겠다."
하였다.
10월 14일 갑인
유척기(兪拓基)를 영중추로, 이이장(李彛章)을 대사간으로, 서명응(徐命膺)을 부응교로, 홍준해(洪準海)를 교리로, 남태저(南泰著)·정존겸(鄭存謙)을 부교리로, 이최중(李最中)을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찬집 당상(纂輯堂上)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찬집한 책자를 보고 말하기를,
"조영국(趙榮國)이 지은 총론(總論) 가운데 이광좌(李光佐)의 일을 약간 고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광좌와 최석항(崔錫恒)은 그 당시 그 실상(實狀)에 자세하지 못한 점이 있었으니, 이 점이 용서할 만한 것이다."
하니, 원경하(元景夏)가 말하기를,
"신이 신절(申晳)의 말을 들으면 최석항은 처음에 받들 뜻이 없었는데, 이광좌는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는 말로 공동(恐動)하였다고 하니, 이것으로 논한다면 어찌 반역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좌가 무신년382) ·기유년383) 양년에 만약 자수(自首)하는 말을 하여서 전날의 미혹(迷惑)을 뉘우쳤더라면, 어찌 좋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가 끝내 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의 죄이다. 내가 조정(調停)할 뜻이 있어 민진원(閔鎭遠)과 이광좌를 같이 들어오게 하고, 내가 그 손을 잡으니, 민진원이 역심(逆心)을 들어서 곧바로 이광좌를 배척하였고, 이광좌 역시 말하기를, ‘신도 저 사람의 마음을 모르나, 조금도 저버린 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선(善)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뒷날 경사(慶事)가 있는 법이다. 내가 이광좌를 애석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만연(蔓延)시켜서 남은 종자도 없게 한다면 인인 군자(仁人君子)의 마음이 아니다."
하였다.
10월 16일 병진
하교하기를,
"자성(慈聖)의 성수(聖壽)가 명년에 꼭 칠순(七旬)이 되신다. 사람의 아들로서 애일(愛日)384) 하는 정성에 어찌 의조(儀曹)의 청함을 기다리겠는가? 세수(歲首)에 마땅히 원량(元良)과 백관을 거느리고 칭경(稱慶)하는 하례를 드릴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조엄(趙曮)을 특별히 교리로 제수하고, 정상순(鄭尙淳)·남태저(南泰著)를 부교리로, 이최중(李最中)을 수찬으로, 이석상(李錫祥)·홍준해(洪準海)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이때에 유신(儒臣)들이 조영순(趙榮順)이 관선(館選)에 대하여 논한 일로 인하여 모두 인혐(引嫌)하고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출사(出仕)를 독촉하기 위하여 특별히 6인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조엄 등은 궐하(闕下)에 나와서 들어가지 않았다. 임금이 주서(注書)를 시켜 하유(下諭)하기를,
"군부(君父)가 수라(水剌)를 들지 않고 밤에 추운 궁전(宮殿)에 앉아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끝내 들어오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부가 있는 것을 아느냐?"
하고, 또 육진(六鎭) 변장(邊將)의 결원(缺員)을 묻고 폄직(貶職)시키려 하니, 정상순·이 석상·남태저는 명을 받들었고, 조엄·이최중·홍준해는 그래도 들어오지 않았다. 임금이 매우 화를 내어 연달아 엄명(嚴命)을 내리니, 조엄 등이 비로소 들어왔다. 임금이 화를 풀지 않고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한갓 조영순만 알고 군부는 모른다. 지난번에 소장(疏章)을 올리고 지금 또 당(黨)을 찾으니, 그 임금을 속이는 짓이다."
하고, 그 소장을 사각(史閣)에서 가져오라 명하여 3인의 이름을 지웠다.
10월 17일 정사
이세택(李世澤)을 지평으로, 김상도(金相度)를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20일 경신
임금이 대신(大臣)과 균역 당상(均役堂上)을 불러 보고 강원도의 금년 결전(結錢)을 탕감하라고 명하였으니, 강원도가 가장 흉년이기 때문이었다. 전교하기를,
"금년 연사(年事)가 걱정이다. 새해를 위한 비축(備蓄)을 우선으로 하지 않을 수 없으나, 현재 중외(中外)가 텅 비었으니 세초(歲初)부터 절생(節省)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감생(減省)할 수 있는 것을 탁지(度支)와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으로 하여금 예를 상고하게 하여 후일 등대(登對) 때에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천망(薦望)에 유한소(兪漢蕭)·이중호(李重祜)·홍명한(洪名漢)을 의망(擬望)하여 들이니, 하교하기를,
"삼망(三望)이 모두 어버이를 받들고 있는 사람이니, 효(孝)로써 다스림을 삼는 처지에 있어 붓[筆]을 대기 어렵다. 공주 목사(公州牧使) 이유신(李裕身)을 제수하라."
하였다.
10월 22일 임술
회양 부사(淮陽府使) 임순(任珣)이 상서하여 본부(本府)의 재해를 자세히 진달하고, 고(故)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가 부사로 있을 때에 상소로 대동미(大同米) 및 여러 종류의 가포(價布)를 탕감하도록 청한 고사(故事)를 다시 인용하니, 왕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비답(批答)하였다.
10월 23일 계해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는데 소두(小豆)와 같았다.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죄인 이성(李𣛮)과 이원하(李元夏)·박세검(朴世儉) 등을 친국(親鞫)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원달(鄭遠達)의 집에 투서(投書)한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 지극히 요악(妖惡)하였다. 임금이 포도청으로 하여금 기포(譏捕)하도록 하여, 무릇 두어 달 만에 체포하였으므로 드디어 친국을 명한 것이다.
10월 24일 갑자
김선행(金善行)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죄인 권소(權邵)와 이성·이원하 등을 친국하였으나, 불복(不服)하였다.
10월 25일 을축
밤에 번개가 쳤다.
10월 27일 정묘
우박이 내렸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권소와 이성·이원하·박세검을 친국하여 복주(伏誅)하였다. 권소가 공초(供招)하기를,
"신의 집안은 대대로 여러 총중(叢中)에서 뒤처지진 않았으나, 신의 아비는 침체(沈滯)를 벗어날 수 없어 평소에 늘 나라를 원망하였습니다. 또 학제(學製)의 일로 원한을 품고 있었으므로 처부(妻父) 이성(李𣛮) 및 이성의 아들 이원하(李元夏)와 같이 흉서(凶書)를 만들었는데, 신과 이성이 짓고 이원하가 썼으며, 오로지 조정(朝廷)을 어지럽게 하려는 계획에서 나왔습니다. 또 심정연(沈鼎衍)과는 서로 아는 사이입니다. 심정연이 바친 흉서도 일찍이 참견(參見)한 바 있었는데, ‘남별궁(南別宮) 들보 위 운운(云云)’한 한 부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금번의 흉서는 심정연이 못한 말을 쓴 것이며, 글 가운데에 ‘구로(九老) 운운’한 말과 ‘가문에서 대대로 전하는 심법(心法)’이란 말 등이 있었고, 조신(朝臣)을 열 지어 쓴 아래에 ‘근실(謹悉)’ 두 글자를 썼으며, 글은 무릇 4층이었습니다. 첫 글은 7월 28일 새벽에 신이 별배(別陪)라 일컬어 스스로 투입(投入)하였고, 두 번째 글은 이성이 박세검(朴世儉)을 시켜서 투입하였는데 흉측한 정상(情狀)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므로 대역(大逆)으로써 지만(遲晩)합니다."
하니, 정형(正刑)에 처하고 노적(孥籍)을 법과 같이 하였다. 이성이 공초하기를,
"권항(權抗)이 투서를 한 일은 세상 사람이 모두 압니다. 권소(權邵)도 과격한 말과 패려(悖戾)한 행동으로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권소가 끌어들인 많은 사람 가운데 혹 신도 같이 들어 있다고 한다면, 신은 마땅히 원범(元犯)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박세검의 공초는 모두가 거짓입니다."
하고, 여러 번 형신(刑訊)을 더하였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는데, 특지(特旨)로 서문(西門) 밖에서 정법(正法)하게 하여 역률(逆律)로써 시행하였다. 이원하가 공초하기를,
"권소와 같이 흉서를 만들었습니다. 신은 상단(上段)을 쓰고 권소는 하단을 썼으며, 글자는 소책(小冊)의 글자보다 작았습니다. 모역(謀逆)으로써 지만합니다."
하니, 정형에 처하였다. 박세검이 공초하기를,
"신은 이성의 유제(乳弟)로서 이성의 사주(使嗾)를 받아 과연 흉서를 전달하였으나, 그 글의 내용은 몰랐습니다."
하니, 역률로써 문 밖에서 정법(正法)하도록 명하였다. 권항은 권소의 아비로서 형신에 불복하였는데, 연좌율(緣坐律)로써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권굉(權宏)은 권소의 할아비로서 나이 늙었으므로,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한 뒤에 본률(本律)에 의하여 대정현(大靜縣)의 종으로 삼았다. 정희보(鄭熙普)와 정육(鄭稑)은 이원하의 인친(姻親)으로서 원인(援引)되어 체포되었는데, 정희보는 삼척부(三陟府)에 정배(定配)하고, 정육은 여러 차례 형신을 시행한 후 종성부(鍾城府)에 멀리 정배하였다. 정도삼(鄭道三)은 길에서 들은 소문을 가벼이 누설하였다 하여 강진현(康津縣)에 정배하였고, 이만육(李萬育)과 이현급(李賢汲)은 투서의 일로 권항에게 의심을 받아 서로 수작(酬酢)하였는데, 이만육은 곧바로 진술하지 않았으므로 해남현(海南縣)에 정배하였으며, 이현급은 공술한 바가 숨김이 없으므로 특별히 조용(調用)을 명하였다. 신사범(申思範)·박상록(朴相祿)·윤정렬(尹正烈)·홍집(洪楫)·권위(權瑋)·황최언(黃最彦)은 권소가 무고(誣告)하여 끌어대어 체포되었으므로 모두 특별히 석방하였다.
10월 28일 무진
밤에 안개가 끼었다.
이길보(李吉輔)를 장령으로, 정창성(鄭昌聖)을 정언으로, 이경옥(李敬玉)을 사서로, 윤동승(尹東昇)을 문학으로, 심발(沈墢)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10월 29일 기사
왕세자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접(引接)하였다. 정언(正言) 정창성(鄭昌聖)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역적 권소(權邵)의 흉서(凶書)에 대한 정상은 그지없이 요악합니다. 그 아비 권항(權抗)은 반드시 모를 리가 없고, 또 ‘가정의 수훈(受訓)’이란 말이 권소의 공초(供招)에서 나왔으니, 평일에 나라를 원망하여 역자(逆子)를 지휘한 자취가 분명하여 가리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악독하게 형장(刑杖)을 참아, 마침내는 시행되어야 할 율(律)을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대조(大朝)께 품하여 빨리 노적(孥籍)의 율을 거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조께서 처분하여 내리신 일을 번거로이 품하기 어렵다."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지평(持平) 유수(柳脩)의 ‘정주(政注)가 효잡(淆雜)하다’는 말은 과연 범연히 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전관(銓官)이 지나치게 인혐(引嫌)하고 있으니, 유수의 입장으로는 그 본마음을 격의 없이 털어놓음도 불가할 것이 없음에도, 그 대변(對辨)한 바는 스스로 책문(策問)을 가지고 가정해서 말한 것이라고 일컬었으니, 구차스럽고 의젓하지 않음이 이보다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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