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신미
이득종(李得宗)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왕세자(王世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정언(正言) 정창성(鄭昌聖)이 재이(災異)에 대한 경계를 진달하고, 이어 청심 과욕(淸心寡慾)으로써 재해를 그치게 하는 방법으로 삼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광구(匡救)한 바가 절실하니,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정창성이 이어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보고 《시전(詩傳)》의 실솔장(蟋蟀章)을 읽으라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는 당풍(唐風)385) 에 ‘지나치게 즐거워하여 황잡한 데 이르지 말도록 하라[太康無荒]’는 구절에 대하여 느낌이 있다. 아! 그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바는 메밀떡과 질그릇에 담은 술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히려 황잡한 일이 없도록 경계하였으니, 이는 당우(唐虞)의 유전해 오는 뜻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팔도(八道)가 모두 흉년이 들어 저 가엾이 나뒹구는 우리 백성들에게는 이미 즐거움이 없으니, 어찌 ‘황잡한 데 이르지 말게 하라’고 경계할 것이 있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매, 옥식(玉食)인들 어찌 달갑겠는가? 아! 삼도 유수(三都留守)와 팔도 도신(八道道臣)은 마땅히 이 뜻을 본받아 세전(歲前)에 안집(安集)시키고, 세후(歲後)에는 진휼하는 정사를 성의를 다해 거행하여, 나의 백성으로 하여금 구렁에서 벗어나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아! 임어(臨御)한 지 30년에 한 혜택도 백성에게 미치게 하지 못하였다. 풍년든 해는 적고 흉년든 해는 많으니, 과거에 ‘기부(肌膚)도 어찌 아끼겠는가?’라는 하교를 생각건대, 내가 어찌 늙었다고 하여 백성을 위하여 풍년을 기원(祈願)하지 않겠는가? 내년 봄의 기곡제(祈穀祭)를 마땅히 친행(親行)할 것이니, 의조(儀曹)에서는 잘 알라."
하였다.
추조(秋曹)에 갇혀 있는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으니, 날씨가 차가운 때문이었다.
11월 5일 갑술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으니, 장차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행하려는 것이었다.
내자시(內資寺)에 남아 있는 술 4백 병을 훈련 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3영(營)의 수가 군병(隨駕軍兵)에게 나누어 먹이라고 명하였다.
11월 6일 을해
임금이 친제(親祭)를 예(禮)와 같이 행하고, 환궁할 때에 창의궁(彰義宮)에 들렀다.
11월 7일 병자
동지사(冬至使) 해봉군(海蓬君) 이인(李橉) 등을 인견(引見)하고 위로하여 보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홍봉한(洪鳳漢)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선척(船隻)은 납세(納稅)와 면세(免稅)를 막론하고 모두 균역청의 장표(掌標)를 받고 있는데, 조선(漕船)만은 유독 장표가 없어 일이 매우 허술하니, 일체로 장표를 지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아뢰기를,
"나라 안의 어장(漁場)과 어전(漁箭)은 면세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균역청에 매여 있습니다. 유독 사옹원(司饔院)의 두 착어소(捉魚所)는 진상(進上)의 체통이 소중함으로 인하여 주원(廚院)386) 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기지(基址)만은 어디에서부터 어디에까지라고 균역청의 장부에 기재된 뒤에라야만 균역청을 설치하고 해세(海稅)를 총관(總管)하는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아뢰기를,
"호남(湖南)의 진상 첨가(進上添價)387) 의 일은 전에 이정(釐正)하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도신(道臣) 민백상(閔百祥)이 보고한 절목에 의하여 포민(浦民) 1만 명을 진상보(進上保)로 보충하고 돈 2냥씩을 수봉(收捧)하면, 이것도 또한 균역청에서 1필(疋)씩을 보태는 뜻이니, 이로써 정식(定式)을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講)하였다.
11월 9일 무인
유신을 불러 《시전(詩傳)》의 당풍(唐風)을 읽으라 명하였다. 응교(應敎) 이유수(李惟秀)가 말하기를,
"산추(山樞)388) 는 비록 전편(前篇)389) 의 ‘즐거움이 없음[不樂]’을 위로해 준 것이지만, 그 걱정은 더욱 깊고 그 뜻은 더욱 위축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치게 즐거워하지만 말라[無已大康]’는 것은, 임금에 있어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다는 뜻이다."
하였다. 수찬(修撰) 홍준해(洪準海)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한 해가 다되도록 근로(勤勞)하다가 벗과 함께 술을 들며 즐기면서도 오히려 서로 이와 같이 경계하고 신칙하거늘, 하물며 임금은 높은 지위에 있어 연향(宴享)과 안일의 독소(毒素)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이유수가 말하기를,
"유체(有杕)390) 의 시(詩)는 어진이를 좋아하는 뜻이 은연중에 중심(中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이와 같아야만 바야흐로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심으로 좋아해야만 비로소 충(忠)이라 할 수 있다. 충(忠)이란 뜻은 ‘중(中)’ 자 아래에 ‘심(心)’ 자가 아닌가?"
하였다. 이유수가 말하기를,
"이 당풍(唐風)은 혹은 즐김을 좋아함을 경계하기도 하고, 혹은 가정(家庭)이 있음을 즐거워하기도 하며, 혹은 어버이 곁을 떠남으로 인하여 봉양(奉養)을 원하기도 하고, 혹은 어진이를 좋아해서 오게 할 것을 생각하기도 하며, 비방하는 자를 걱정하고 외로운 자를 애처롭게 여겨서, 비록 그 일을 읊었으나 모두가 근검(勤儉)하고 충후(忠厚)한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무장(綢繆章)391) 은 비록 관저(關雎)392) 의 ‘즐기되 지나치지 않고 슬퍼하되 감상(感傷)에 젖지 않는 경우’와는 차이가 있으나, 역시 넘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홍준해가 말하기를,
"전대(前代)의 백성을 괴롭게 한 임금은 반드시 이 당풍(唐風)을 보아야 합니다. 근검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오직 궁실(宮室)의 토목(土木)만을 일삼았으니, 매우 개탄할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에는 욕심이 그득하고 겉으로는 인의(仁義)를 베풀면, 비록 근검하려 하나 가능하겠는가? 이는 욕심이 많은 데에서 말미암은 까닭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성(靈城)393) 이 나를 섬긴 지 몇 해인가? 춘방(春坊)에서부터 일을 맡긴 지 오래여서 익숙히 알고 있으니, 군신(君臣)의 제우(際遇)를 논한다면 영성이 마땅히 먼저일 것이다. 지난번의 일은 국옥(鞫獄)의 체통에 지나지 않는 일로서 내 실로 후회하는 바이니, 그 마음을 내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신하로서 이것을 가지고 폐인(廢人)으로 자처한다면, 어찌 지우(知遇)하는 뜻이겠는가? 벼슬이 숭품(崇品)에 이르렀고 나이도 칠순에 가까우니, 어찌 숙위(宿衛)에 분주할 때이겠는가? 그러나 특별히 제수한 것은 뜻이 있으니, 사단(辭單)을 올리는 것은 지나치다. 사단을 받지 말라."
하였다. 대개 박문수는 금년 여름 이후에 죄인으로 자처하여 문을 닫아걸고 세수(洗手)도 않고 빗질도 않은 채 가묘(家廟)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총관(摠管)에 제수됨에 미쳐 곧 사단을 올렸으므로, 이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
11월 10일 기묘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지사(知事)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요즈음 예후(睿候)가 편치 못하심으로 인하여 비록 법복(法服)을 갖추고 강연(講筵)에 임(臨)하기는 어려우시나, 지금 겨울 밤이 점점 길어졌으니 옛사람의 이른바 삼여(三餘)394) 입니다. 이러한 때에 만약 궁관(宮官)을 자주 와내(臥內)에 불러 평일에 의심스러웠던 바를 강론(講論)하고 문난(問難)한다면, 얻는 바가 강연보다 반드시 나을 것이며, 조금 차도가 있을 때에는 강관(講官)을 인접(引接)하여 공부를 계속하실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병을 다스림은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왕세자가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호조 판서와 선혜청 당상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기곡제(祈穀祭)를 친행(親行)한다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목이 메어 말하기를,
"지금 역내(域內)는 무사하나 오직 백성들에 대한 근심이 마음에 걸리니, 기필코 친행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친행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위로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을〉 저버리고 아래로 백성을 저버리는 일이다. 늘 말이 이에 미치면 눈물이 말에 따라 흐름을 깨닫지 못한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연분 사목(年分事目)395) 을 정한 뒤에 재해는 더욱 참혹하므로, 비총(比摠)396) 에 크게 어긋납니다. 당초 2, 3만 결(結)을 일시에 급재(給災)397) 함은 전에도 드문 일이나, 지금 또한 가결(加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차관(敬差官)이 정밀하게 살폈으면, 비총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비총은 참으로 구간(苟簡)한 일이다. 그 재해를 입은 심천(深淺)에 따라 가결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선혜청 당상 신만(申晩)이 호조(戶曹)에서 별단(別單)으로 기록한 바를 올리며 말하기를,
"이는 근년에 어필(御筆)로 생감(省減)하신 것입니다."
하였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절손(節損)에 관한 정사는 곧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이나, 종전에 생감한 바는 모두 거듭된 흉년으로 인하여 빚어진 것입니다. 막중한 어공(御供)은 가벼이 재감(裁減)할 수 없고, 공인(貢人)의 일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공인들이 물종(物種)을 감하기를 원하는가, 분수(分數)를 감하기를 원하는가?"
하매, 신만이 말하기를,
"분수를 감하면 여러 물종을 고루 감하게 되니, 곧 대동(大同)의 역(役)과 같습니다. 또 흉년이 들면 쌀값이 갑절 오르므로 공인들이 병통으로 삼지 않는데, 만약 물종을 감한다면 치우치게 이롭고 치우치게 괴로운 한탄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분수를 감하는 정사는 겉으로는 고른 듯하나, 위를 덜어서 아래에 더하는 정사가 아니다. 먼저 참작하여 감하되, 우선 앞일을 보아가며 선혜청과 호조로 하여금 한결같이 점하(點下)398) 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할 것이며, 그 가운데 동조(東朝)의 봉진(封進)에 관계되는 것은 감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금번 감한 바는 약석(藥石)과 같으나, 제향(祭享)과 녹봉(祿俸)에 대하여 애당초에 감하(減下)하지 않음은 뜻하는 바가 있다."
하니, 김상로가 말하기를,
"어공은 감하고 백관의 녹봉을 감손(減損)치 않으면, 일의 체통으로 보아 이렇게 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충·신(忠信)에게 녹봉을 후하게 함은 곧 우리 나라의 법인데, 녹봉은 본래 많지 않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시노비안(寺奴婢案)을 이정(釐正)하였는가?"
하니,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3백의 총수(總數)는 유지하도록 하였으므로, 본래 가감(加減)은 없습니다. 비록 각궁(各宮)에 상사(賞賜)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총수 외에서 가져다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 외에서 어떻게 가져다 사용할 수 있는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3백 외에 면세질(免稅秩)이 아직도 많고, 해마다 생산(生産)되므로 자연 여유가 생깁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일에 있어 처음을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각사(各司)의 사정을 잘 살펴서 다시 품하라."
하였다.
11월 12일 신사
임금이 형조 판서 정익하(鄭益河)를 불러 보고, 계복(啓覆)399) 의 일을 하순(下詢)하였다. 이어 유신(儒臣)을 불러 하교하기를,
"법관(法官)은 으레 법을 집행해야 하나, 유신의 경우도 마땅히 경서(經書)에 의거하여 의의(意義)를 이끌어 그 살릴 길을 강구해야 한다. 여러 유신은 모름지기 문안(文案)을 자세히 보고, 계복 때에 같이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를 불러 보니, 박문수가 무고(誣告)를 입은 전말을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반드시 제기(提起)할 것은 없다. 소하(蕭何)는 곧 삼걸(三傑)400) 의 하나임에도 상림원(上林苑)의 일로 구속되기까지 하였으니401) 군신(君臣) 사이에는 옛날에도 이러하였다. 내가 어찌 조금이라도 경(卿)을 의심하는 마음이 있겠는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경을 보기가 부끄럽다."
하고, 이어 서울에서 병을 조리(調理)하라고 권면하였다.
11월 14일 계미
이민곤(李敏坤)을 집의로, 이우(李堣)를 사간으로, 이수덕(李壽德)·유사흠(柳思欽)을 장령으로, 이복원(李福源)을 지평으로, 홍지해(洪趾海)를 정언으로, 심관(沈鑧)을 헌납으로, 이창수(李昌壽)·오언유(吳彦儒)를 승지로, 이은춘(李殷春)을 경상 좌병사로, 이경열(李景說)을 남병사로 삼았다.
초·삼복(初三覆)은 석년(昔年)의 예에 의하여 원량(元良)이 대행(代行)하라고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내 지금 심기(心氣)가 쇠잔하여 비록 흠휼(欽恤)하는 형정(刑政)을 힘써 행하기는 어려우나, 혹시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 두렵다. 먼저 대신(大臣)과 형조 당상(刑曹堂上)을 불러 그 여러 문안(文案)들을 살펴본 뒤에 만약 부생(傅生)의 의논402) 을 할 만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마땅히 지휘할 것이니, 원량으로 하여금 날짜를 가릴 것 없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11월 17일 병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집의(執義) 이민곤(李敏坤)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대조(大朝)께서 주화(酒禍)를 깊이 염려하여 위로 태묘(太廟)에 고하는 데에도 예주(醴酒)를 쓰도록 하였습니다. 대저 국가의 패망은 모두 주화에서 말미암았으니, 성명(聖明)의 이 거조는 누구라 찬탄(贊歎)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향사(享祀)에 술을 씀은 삼대(三代)403) 때부터 비롯되었음이 시서(詩書)에 나와 있습니다. 신이 삼가 주계(酒戒)의 엄격함을 상고해 보면, 주고(酒誥)404)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이르기를, ‘제사에만 술을 쓰게 하였다. 하늘이 명을 내려 우리 백성에게 비로소 술을 만들게 하였으니, 오직 큰 제사에만 쓰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신도(神道)의 흠향(歆饗)은 기취(氣臭)로 느끼는 것을 위주로 하는데, 기취의 방결(芳潔)은 술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쑥[蕭艾]의 향기와 모혈(毛血)405) 의 성기(腥氣)에 비하여 무거우며, 정미(精微)한 뜻은 신명(神明)에 통합니다. 그러하다면 제사를 지내되 술이 없으면 비록 희생과 폐백을 모두 갖추고, 변두(籩豆)406) 를 늘어놓았다고 하더라도 도리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저하(邸下)께서는 사전(祀典)을 가벼이 고칠 수 없음을 특별히 생각하시어 대조께 품하고 정신(廷臣)에게 널리 논의하여, 신의 말이 옳다고 여기시면 다시 태묘에 고하고 열조(列朝)의 구례(舊禮)를 회복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답을 내렸으나 허락하지는 않았다.
황해도(黃海道) 유생(儒生) 이현백(李顯白)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11월 19일 무자
하교하기를,
"명년은 곧 동조(東朝)의 칠순(七旬)이시니, 세수(歲首)에 마땅히 진하(陳賀)하리라. 자전(慈殿)께서 전(殿)에 임(臨)하여 반사(頒赦)하고, 고묘(告廟)는 정조제(正朝祭)에 겸행하며, 경과(慶科)는 정시(庭試)로 거행하겠다. 전(傳)407) 에, ‘내 집 노인을 노인으로 공경하여 남의 집 노인에게까지 미친다.’라고 이르지 않았는가? 지금 이 나라의 경사는 국조(國朝)에 없었던 일이요, 옛 사첩(史牒)에도 드문 일이다. 추은(推恩)408) 의 정사를 어찌 그 청함을 기다리겠는가? 조신(朝臣)으로서 나이 70 이상과, 서민(庶民)으로서 나이 80 이상인 경우는 특별히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문묘(文廟)의 작헌례(酌獻禮)는 그 시행이 이미 오래이니, 예조로 하여금 명년 중춘(仲春)에 택일하도록 하라. 과거(科擧)가 중첩(重疊)되었으니, 금번에는 시학(視學)으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천보(李天輔)가 동조(東朝)에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사(年事)가 이러하여 자성(慈聖)의 겸양이 지나치시므로, 명년 보리 농사를 보아서 진퇴를 결정하겠다."
하였다.
11월 20일 기축
예조에서 황해 감사(黃海監司)의 이문(移文)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수안군(遂安郡)은 두메의 피폐한 고을입니다. 12방(坊)의 화전(火田)이 각 궁방(宮房)의 절수(折受)409) 에 모두 들어가고, 다만 율계(栗界) 1방이 있어 약간의 화전세(火田稅)로 관용(官用)에 보충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의소묘(懿昭墓)의 원당(願堂)인 봉원사(奉元寺)의 위전(位田)을 본고을에 망정(望定)하였다고 합니다. 사위전(寺位田)을 특교(特敎)에 의하여 이미 용인(龍仁)의 땅을 획급하였으니, 지금 이중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수안군의 절수한 곳을 도로 본고을에 소속시키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23일 임진
지평(持平) 이세택(李世澤)이 상서하여 흉년든 상황을 자세히 아뢰고, 이어 청하기를,
"제때에 안집(安集)시키고, 미리 구호할 대책을 강구할 것이며, 요역(徭役)을 경감하고 적미(糴米)의 포흠(逋欠)을 정봉(停捧)하도록 할 것이며, 무명으로 바치는 공부(貢賦)를 돈으로 대신하는 것도 허용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아뢴 바는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식년(式年)의 회시(會試)는 내년 가을로 물려서 행하고, 중시(重試)를 내후년 봄에 거행하라고 명하였으니, 경과(慶科)의 정시(庭試)와 상치되기 때문이었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천보(李天輔)가 입진(入診)하여 아뢰기를,
"성상의 회갑(回甲) 때에 비록 효성이 무궁하심으로 인하여 칭경(稱慶)은 허락하지 않으셨으나, 그때 자성(慈聖)의 칠순(七旬)이 있으니 진하(陳賀)를 아울러서 받겠다는 하교가 계셨으며, 더구나 선조(先朝)에서도 즉위[卽阼] 30년의 하례를 받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성상께서 어찌 홀로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성께서는 경자년410) 이후부터 탄일(誕日)에 하례를 받지 않으셨으며, 나의 탄일에 찬(饌)을 만들어 내리셨다. 나도 자성의 탄일에 역시 찬을 베풀었는데, 먼저 진전(眞殿)에 향사(享祀)하고, 신도 또한 같이 들겠다는 뜻을 품한 뒤에야 비로소 마지못해 따르셨다. 옛날 노래자(老萊子)가 때때옷을 입고 어버이를 즐겁게 하였으니411) 한번 절을 받는 것이 무어 어렵겠는가? 그러나 나는 차마 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내가 자성을 위한 하례를 받으면 이 역시 내가 하례를 받는 것이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조재호(趙載浩)가 첫번 정사(呈辭)를 올리니, 왕세자가 불허(不許)하는 하답(下答)을 대찬(代撰)하게 하였다.
11월 26일 을미
《천의소감(闡義昭鑑)》이 완성되었다. 임금이 찬수 당상(纂修堂上)과 낭청(郞廳)을 불러 보고, 권수(卷首)에 친히 쓰기를, ‘성의를 다하여 찬수하여 의를 밝히는 데에 공이 있다[竭誠纂修功存闡義]’라는 여덟 자를 써서 철권(鐵券)412) 에 대신하고, 이어 다섯 곳의 사고(史庫)에 각각 1건(件)씩을 소장하고, 판본(板本)은 사각(史閣)에 간직하라고 명하였으며, 찬수 당상과 낭청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영부사(領府事) 김재로(金在魯)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등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리고, 《천의소감》을 올렸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아! 내가 몇 년을 가슴에 품었던 일을 이미 찬수청(纂修廳)에 하유(下諭)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자성(慈聖)을 받들고 황형(皇兄)께 뵈올 면목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오늘 곱절이나 더하다. 아! 경 등의 정성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를 할 수 있었겠는가? 그 충성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고, 원차(原箚)를 궁중(宮中)에 머물러 두게 하였다.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와 고(故)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에게 치제(致祭)할 것을 명하였다.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경묘(景廟)의 인현 왕후(仁顯王后)에 대한 성효(誠孝)는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또 인현 왕후의 동기(同氣)인 민진후 형제를 돌보심은 심상(尋常)한 데에서 멀리 뛰어났습니다. 《천의소감》에 이미 경묘의 성효가 실려 있어 지금 책이 완성되었으니, 마땅히 두 신하에게 치제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11월 28일 정유
이봉령(李鳳齡)을 사간으로, 박상면(朴相冕)·이근(李瑾)을 정언으로, 이해중(李海重)을 설서로, 김선행(金善行)을 예조 참판으로, 권혁(權爀)을 호조 참판으로, 홍약수(洪若水)를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조령(鳥嶺) 밑 5읍의 전세(田稅)를 7읍의 예에 의하여 돈으로 바꾸어 상납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조령 밑 7읍의 전세를 상납함에 있어 일찍이 돈으로 바꾸기로 품정(稟定)한 바 있었다. 5읍에서 조령을 넘어 충주(忠州)의 가흥창(可興倉)에 실어다 바치는 일은 민폐(民弊) 또한 더욱 심하였으므로, 도신(道臣)이 장청(狀請)하여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11월 29일 무술
서종급(徐宗伋)을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금년부터 비롯하여 자문감(紫門監)과 경조(京兆)413) 소관의 내빙고(內氷庫)를 두 곳에 설치하지 말고 1고(庫)로 통합할 것이며, 3만 6천 장을 2만 장으로 감축하되 그 부족한 것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면포를 더 지급하게 하여서 민간의 육계(陸契) 방납(防納)의 폐단을 제거하라."
하였으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세수(歲首)의 진하(陳賀) 때에 자전(慈殿)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해야 한다. 의문(儀文)은 말절(末節)이니, 내가 마땅히 보책(寶冊)414) 을 전정(殿庭)에서 몸소 전하여 동조(東朝)에 들일 것이니, 전(殿)에 임하여 책보(冊寶)를 읽는 절차는 그만둘 것이다. 모든 보록(寶盝)과 주록(朱盝)·의장(儀仗) 등 물건은 새로이 준비하지 말아, 자성(慈聖)께서 경비를 줄이는 덕의(德意)를 본받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요즈음 조풍(曹風)과 회풍(檜風) 양풍(兩風)415) 을 읽었다. 명년416) 이 어떠한 해인가? 나의 마음은 곱절이나 더하다.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현절사(顯節祠)417) 와 강도(江都)의 충렬사(忠烈祠)418) 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충렬사에 배향(配享)된 사람 및 척화(斥和)한 여러 신하로서 특별히 2품을 증직(贈職)한 사람은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증시(贈諡)할 것이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의 묘(墓)와 광주(廣州)·쌍령(雙嶺)에 일체로 치제하라.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은 적신(賊臣)의 죽인 바 되었는데, 시민당(時敏堂) 뜰 북쪽이 곧 그 피살된 곳이다. 지금까지 이초(異草)가 난다고 하니, 역시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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