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경자
임사하(任師夏)를 집의로 삼았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에 나아가니, 예조 판서와 호조 판서가 입시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자전(慈殿)께 칭경(稱慶)하는 날을 맞이하여 전하께서는 양지(養志)419) 하는 방도를 다하셔야 합니다. 또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외조 송국택(宋國澤)에게 추증(追贈)한 고사(故事)가 있습니다.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외조 고(故) 현령(縣令) 조경창(趙景昌)에게 특별히 은전(恩典)을 내려, 한편으로는 자성(慈聖)의 마음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계술(繼述)하는 효성을 빛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 조경창에게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명하였다.
12월 2일 신축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감귤(柑橘)을 반사(頒賜)하고, 시사(試士)하였다. 대사성 유최기(兪最基)를 파직하라 명하고 특지(特旨)로써 이창수(李昌壽)로 대신하게 하였으니,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를 한쪽 사람만으로 순전히 차출하였기 때문이다. 거수(居首) 이석재(李碩載)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3인에게는 각각 급분(給分)420) 하도록 명하였다.
김양택(金陽澤)을 부제학으로, 윤학동(尹學東)을 보덕으로, 오언유(吳彦儒)·채제공(蔡濟恭)·조재홍(趙載洪)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3일 임인
임금이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명년이 가까우니 비풍(匪風)·하천(下泉)421) 의 마음이 곱절이나 더하여서 명나라 사람의 자손을 불러 보았다. 그 가운데 한산인(閑散人)은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12월 4일 계묘
예조 당상(禮曹堂上)이 입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저경궁(儲慶宮)422) 을 궁원(宮園)으로 봉한 뒤에, 자전(慈殿)께서 하교하시기를, ‘육상궁(毓祥宮)423) 의 사체(事體)는 전과 다름이 있으니, 시호를 가상(加上)하는 거조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는 왕년에 수봉(受封)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속히 논의하여 들이도록 하라. 내가 어렸을 때에 궁중에서 나를 불러 봉작(封爵)하매, 선자친(先慈親)께서 반드시 근심스런 모양으로 불안해 하셨으니, 그 겸손한 덕은 능히 삼종(三宗)424) 에 경사를 기르시어 향화(香火)를 만대(萬代)에 잇게 하셨다."
하였다. 대신(大臣)과 관각 당상(館閣堂上), 정부(政府)·육조(六曹)에서 육상궁의 시호를 ‘휘덕(徽德)’이라 의논하여 올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비록 대신에게 묻긴 하였으나, ‘선자친’ 3자는 고금의 전례(典禮)에 없는 것으로서 축문을 읽을 때에 늘 겸연쩍었다. 지금 시호를 가상(加上)할 때에는 죽책(竹冊)에 먼저 이정(釐正)해야 마땅하겠으므로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의 《남궁록(南宮錄)》을 가져다 본즉, 그때의 하교 가운데 창빈(昌嬪)425) 과 저경궁(儲慶宮)에 모두 ‘선비(先妣)’라 일컬었으니, 이는 실로 준행할 만한 것이었다. 《주례(周禮)》 춘관(春官)에 이미 일컬은 바 있으니, 금번 죽책문 및 모든 축문에 모두 ‘선비’로 쓸 것이며, 저경궁은 부조지위(不祧之位)426) 이니 역시 《주례》에 의하여 앞으로 축문에 있어 일체 ‘선비’로 쓸 일을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편차인(編次人)을 불러 보고 고(故) 상신(相臣) 홍치중(洪致中)·이집(李㙫)·조문명(趙文命)·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김약로(金若魯)·정우량(鄭羽良)·이태좌(李台佐)에게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30년 동안 고심(苦心)하였던 일을 오늘에야 이루었으니, 이는 누구의 공인가! 협찬(協贊)한 여러 신하이다. 《천의소감(闡義昭鑑)》을 이미 반포하였고, 음붕(淫朋)을 세척(洗滌)하였다. 아! 고(故) 상신(相臣)은 지금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내 매우 슬프다."
하고, 이어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12월 5일 갑진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이 상서하여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존호(尊號)를 올리는 날 대조(大朝)께 존숭(尊崇)하는 예(禮)를 아울러 행하기를 청하였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는 여러 종신(宗臣)을 거느리고 상서하여 진청(陳請)하였으며, 대신(大臣)은 예조 당상 및 여러 재신(宰臣)을 거느리고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종신의 글을 가져다 보고, 하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령께서〉 굽어보시고, 저 하늘이 마음을 비추신다. 철석(鐵石)은 뚫을 수 있으나 이 마음은 풀기 어렵다. 늙은 종신(宗臣)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 다만 도로 주라고 명한다면 역시 박절한 데 가깝다. 정원(政院)에서는 종친부(宗親府) 녹사(錄事)를 불러서 가져가게 하라."
하였다.
12월 6일 을사
판중추 이종성(李宗城)과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등이 2품관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나아가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성상께서 간험(艱險)한 일을 두루 겪고 능히 흉역(兇逆)들을 처단(處斷)하셨습니다. 신축년427) 이래로 무너진 윤강(倫綱)이 바로 서고 어두워진 의리가 밝아졌으니, 아! 거룩하십니다. 대저 난역(亂逆)이 발생함은 실은 모두 붕당(朋黨)에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후 ‘파붕당(破朋黨)’ 3자로써 다스리는 방도의 제1의(第一義)로 삼아, 자나 깨나 고심(苦心)하신 지 지금 30년에 수백년 동안 내려오던 음붕(淫朋)을 하루아침에 타파하여 징토(懲討)는 엄격하고 대의(大義)는 밝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가 극치(極致)의 덕화(德化)에 함께 젖어 있으니, 마땅히 존호(尊號)를 올려 성상의 공렬을 드러내고 사책(史策)에 밝게 실려 만세에 전하여 길이 성자 신손(聖子神孫)의 업적(業績)이 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그 진하(陳賀)를 청함에 있어 내 슬픈 마음이 곱절이나 더하다. 어제 〈‘존숭(尊崇)’〉 2자(字)를 듣고 이 마음이 이미 탈진해버렸다. 양년(兩年)의 거조는 마음에 오히려 부끄러운 일인데, 더구나 세 번이란 말인가? 어제 밤 이후 어찌 잠이 오며 어찌 수라를 들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을 헤아려서 곧 중지하면 백 첩(貼)의 보중익기탕(補中益氣蕩)보다 나을 것이다."
하였다.
이시민(李時敏)을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7일 병오
빈청(賓廳)에서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역(亂逆)은 응징하기 어려움에도 지금 이미 응징하였고, 의리(義理)는 마땅히 천명(闡明)되어야 하는데 지금 이미 천명되었으며, 붕당(朋黨)은 혁파하기 어려우나 지금 이미 혁파되었으니, 이는 천하 만세(天下萬世)에 할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에 참담(慘憺)함을 풀어주고 어진 교화(敎化)를 이룩하신 것은 곧 대성인(大聖人)의 중도(中道)를 세우는 다스림에서 나온 것이니, 잊지도 말고 조장(助長)도 말아서 오랠수록 더욱 견고히 하여서 기필코 뭇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 다함께 대도(大道)로 나간 것입니다. 그 공렬에 따라 천양(闡揚)하려 한 것이 두세 차례에 이르러 이루 셀 수 없으니, 삼가 원하건대, 뭇사람의 심정을 막을 수 없음을 생각하시고 특별히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제 이미 마음이 돌과 같다고 하유(下諭)하였으니, 비록 날마다 청하더라도 나는 단정한 바가 있다."
하였다.
12월 8일 정미
빈청(賓廳)의 첫 아룀에 대하여 철석(鐵石) 같은 마음이라고 답하였다.
빈청에서 또다시 아뢰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와 편차인(編次人)을 불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조정(朝廷)이 이에 이른 것은 협찬(協贊)한 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비록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으나, 이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한다. 여덟 상신(相臣) 가운데 홍영상(洪領相)428) 과 조 영돈녕(趙領敦寧)429) 외에 특별히 원보(元輔)430) 를 추증(追贈)하여 충의(忠義)를 백대에 세우라."
하였다. 도승지 오언유(吳彦儒)가 아뢰기를,
"고(故) 판서(判書) 박사수(朴師洙)는 지위는 비록 육경(六卿)이나 조정(調停)한 공이 대관(大官)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잊은 것은 바로 진 문공(晉文公)이 개지추(介之推)를 잊은 것431) 과 같다."
하고, 이어 박사수에게 1품을 추증하고, 일체로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전 참판(參判) 정석삼(鄭錫三)에게도 또한 숭품(崇品)을 증직(贈職)하고, 고(故) 찬성(贊成) 박필주(朴弼周)에게 특별히 의정(議政)을 추증하고 치제하라 하였으니, 총재(冢宰)432) 로서 명에 부응(副應)하고 수차(袖箚)를 올려 의리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이날 술시(戌時)에 임금이 눈이 내린 전정(殿庭)에 자리를 펴고 부복(俯伏)하여 일어나지 않거늘, 승지 이득종(李得宗)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 지나친 거조를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성(慈聖)께서 전혀 감당할 수 없는 하교를 내리셨으므로, 내가 장차 봉(封)하여 바치고 또 글을 올려서 조금이나마 이 마음을 밝히려 한다."
하고, 이어 자전(慈殿)의 언서 하교(下敎)를 내 보이고, 주서(注書)에게 번역(飜譯)하여 쓰도록 명하였으니, 자교(慈敎)에 이르기를,
"지극한 효성으로 청하므로, 금번에도 어쩔 수 없이 들어주었오. 조신(朝臣)들도 청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 정조(正朝)에 선원전(璿源殿)을 어찌 우러러 뵈올 것인지? 심사(心事)가 더욱 불편하구려. 대전(大殿)께서도 나의 뜻을 몸받아 존호(尊號)를 받으면 나의 받는 마음도 편안할 것이오."
하였다. 임금이 또 올릴 글을 내 보이니, 그 글에 이르기를,
"소신(小臣)의 마음을 자성께서 굽어살피시고, 열성조(列聖朝)께서도 내려다보십니다. 신축년433) 의 일을 잊고 한 글자의 ‘하례[賀]’를 받는다면, 무슨 낯으로 후일에 돌아가 뵙겠습니까? 조신 등이 요즈음 청하는 바가 있으나 이로 인하여 먹는 것도 줄었는데, 천만 꿈 밖에 자교(慈敎)를 받들었습니다. 지금 소신의 마음은 만분의 일이라도 아뢰려 하였으나, 정성이 부족하여 전일에도 능히 믿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전정 가운데 엎드려서 자교를 받들어 도로 올리니, 삼가 바라건대, 자성께서는 특별히 천지(天地)와 같은 대덕(大德)을 내리시어 소신의 지극한 바람을 펴게 하소서."
하고, 또 승전색(承傳色)에게 명하여 자전께 구두(口頭)로 아뢰게 하였으니, 이르기를,
"소신의 마음은 이미 진달한 글에 소상히 밝혔습니다. 소신이 비록 무상(無狀)하나 지금 어찌 받들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진전(眞殿)에 구두로 고한 바 있습니다. 지금 만약 이 하교를 받든다면, 무슨 낯으로 명릉(明陵)434) 에 돌아가 뵙겠습니까? 이도 소신이 불효한 소치이니, 소신의 마음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득종이 말하기를,
"이미 자전의 마음을 돌려 휘호(徽號)를 받들어 올렸고, 또 자교를 받아 시호를 가상(加上)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드물게 있는 경사입니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이종성(李宗城) 등이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밀치고 들어가 엎드리니,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자교를 읽게 하였다. 자교를 읽기를 마치자, 이종성 등이 말하기를,
"자교는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어찌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는 말하기를,
"신 등의 아룀에 한 ‘윤(允)’ 자만 내리신다면, 전혀 일이 없어집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목묘(穆廟)435) 와 선조(先朝)께서도 3일의 아룀에 ‘윤’ 자를 내리셨던가? 지금 만약 다시 여덟 자의 〈존호를〉 더한다면 선조에 비교하여 어떠하며, 목묘에 비교하여 어떻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비록 대성인(大聖人)이라도 그때에 사공(事功)을 이룬 것이 없으면 진실로 성공(聖功)을 드러낼 수 없으며, 뭇 신하로서도 또한 구실을 삼아 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은 드러낼 만한 것을 따지면 어찌 한두 가지뿐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하교하기를,
"자전께서는 회갑(回甲)을 들어서 하교하시고 경 등은 사공을 들어서 청하니, 장차 두 문제가 되어 일이 더욱 어렵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중정(中正)을 세우신 공은 30년이 하루와 같았다는 뜻으로 청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傳)436) 에 이르기를, ‘탕탕(蕩蕩)하고 평평(平平)하여 능히 무어라 이름지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경 등이 오늘날 이름을 규정지으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잠시 뒤에 자전이 하교하기를,
"비답(批答)은 마땅히 할 것이나, 날씨가 이와 같이 차가운데 어찌 찬 전정(殿庭)에서 오래 있을 수 있겠소? 곧 전(殿)으로 돌아와 나의 마음을 편안케 하오."
하니, 임금이 이어 월랑(月廊)에 나아가, 앞뒤 계사(啓辭)를 읽도록 명하였는데, ‘역적의 소굴(巢窟)을 숙청하였다.’는 구절에 이르러서 임금이 말하기를,
"역적의 소굴을 과연 숙청하였는가?"
하였다. 자전이 언서(諺書)로 내린 답을 주서(注書)에게 쓰도록 명하였으니, 자교(慈敎)에 이르기를,
"내 비록 이와 같이 될 것을 알았으나 곧 지난날의 효성을 생각한 것이요, 나도 이미 정묘년437) 을 지났고 지금 곧 칠순이 다가오는데, 대전께서 청하므로 다시 들어준 것이오. 대전의 춘추(春秋)가 높으신데 내 생전에 희이(稀異)한 일을 보고자 하니, 나의 뜻을 몸받기를 그지없이 바라오. 날씨가 차가우니, 곧 전(殿)에 올라오시오."
하였다. 임금이 이를 보고는 미처 다 보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며 봉하여 바치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자교가 이러하시니, 전하께서 어찌 뜻을 굽히고 받들어서 자전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이종성은 말하기를,
"옛사람이 봉격(奉檄)하고서 기뻐한 일438) 이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 만약에 자교를 받드신다면 자성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기뻐하시는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승전색에게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소신이 신축년을 생각할 때마다 이 마음은 통박(痛迫)합니다. 자교가 이러하시니, 눈물을 흘리며 받들겠습니다."
하매, 여러 신하가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일어났다가 부복하여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쾌히 윤허하시니, 실로 성효(聖孝)에 빛이 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좌승지 채제공(蔡濟恭)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서 두 번째 올린 계사(啓辭)에 대한 하답(下答)을 쓰도록 하였으니, 이르기를,
"아! 신축년을 추억(追憶)하매 꿈속에서도 목이 메인다. 몇 년을 굳게 지킴은 또한 무슨 마음이었던가? 천만 꿈 밖에 전연 뜻하지 않은 자교(慈敎)를 받드니, 마음과 기운이 뚝 떨어져 이 마음이 곱절이나 더 슬프다. 또 천만 뜻밖에 〈‘존숭(尊崇)’〉 2 자(字)의 하교를 받드니,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눈물을 흘리며 받든다. 이미 자교를 받들었으니, 어찌 경 등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아래 위로 부끄러워 진실로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밤에 도감 당상(都監堂上)의 입시(入侍)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자성(慈聖)을 나아가 뵈니, 기쁜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등을 어루 만지며 하교하시기를, ‘춥지 않으시오. 의호(議號)439) 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마땅히 취침(就寢)하겠소.’라고 하교하셨다."
하니,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자교가 이러하시니, 전하께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늘을 몸받아 중정(中正)을 세운다고 함은 과연 어떠한 일인가?"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성덕(聖德)이 하늘을 몸받아 하신 것이므로, 중정을 세운 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공(聖功)과 신화(神化)란 또한 무슨 일인가?"
하니, 예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금년의 징토(懲討)가 어찌 성공이 아니며, 오늘날 중정을 세운 일이 어찌 신화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이후에 의리(義理)가 더욱 밝혀졌는데, 이 어찌 박덕(薄德)한 내가 이룩한 것이겠는가? 열성조(列聖朝) 및 지난날의 성심으로 조제(調劑)한 데에서 온 것이다. 지금부터 돌아가 뵈올 낯이 있게 되었다. 아! 여러 신하들은 이 뜻을 몸받아 자식과 손자를 신칙하여 우리 나라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이철보(李喆輔)를 파직하라고 명하였으니, 아뢸 말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2월 9일 무신
정휘량(鄭翬良)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13일 임자
지평(持平) 이복원(李福源)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지금 재이(災異)가 달마다 발생하고 기근(饑饉)이 팔도에 들었습니다. 조가(朝家)의 기강은 해이되고 백성들의 생계는 곤궁한데, 임금은 위에서 수고로우나 신하들은 아래에서 안일(安逸)하며, 외방(外方)의 재물은 고갈되었으나 중앙의 쓰임은 번거롭습니다. 관직(官職)을 임명하는 자는 적임자를 구하지 않고 사람으로 하여금 관직을 구하게 하며, 관리(官吏)된 자는 백성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수탈(收奪)하여〉 관리를 살찌웁니다. 공도(公道)는 막혀 옥송(獄訟)은 점점 번거로우며, 청탁(請託)의 길은 넓어져 화뢰(貨賂)가 버젓이 행해집니다. 화목과 예양(禮讓)의 풍습은 조정에 행해지지 않고, 탄식과 원망의 소리가 여항(閭巷)에 끊이지 않으니, 참으로 일모 일발(一毛一髮)이 병들지 않은 곳이 없다고 이를 만하지만, 이는 모두가 말절(末節)의 일입니다. 오직 우리 저하(邸下)께서는 주창(主鬯)440) 의 지위에 계시고 선조(先朝)의 업적을 계술(繼述)할 책임을 받으셨으니, 신하로서 군도(君道)가 있고 아들로서 부도(父道)가 있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기탁(寄托)하시는 바는 오직 저하요, 뭇 신하가 우러러 받드는 바도 오직 저하입니다. 모든 일의 이장(弛張)441) 과 사방의 휴척(休戚)도 오직 저하께서 한번 마음쓰고 한번 손을 놀리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저하를 위하여 말씀 드리려 하는 바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정사(政事)를 묻는 데에 겨를을 두지 말고, 오직 근본을 단정히 하고 근원을 깨끗이 하는 데에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 대체(大體)만을 추리면 그 항목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문(學問)에 힘쓰는 일입니다. 제왕(帝王)의 학문은 위포(韋布)442) 와 달라서 배우는 방법은 오로지 독서(讀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실로 독서를 하지 않아 이치(理致)에 밝지 못하면, 성의(誠意)·정심(正心)과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가 모두 앞을 향하여 손을 쓸 곳이 없습니다. 독서하는 법도도 반드시 엄격히 규모(規模)를 세워서 맹렬히 살피고 정세하게 가려서, 과정(課程)에 따라 행하고 몸과 마음에 적응시켜야만 비로소 개발(開發)하는 공효가 있어 전진하고 수양되는 이익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지난 무진년443) 여름에 신이 마침 외람되이 계방(桂坊)444) 에 있으며 야연(夜筵)에 입대(入對)한 일이 있었는데, 강설(講說)을 마치자 저하께서 맑은 목소리로 하문(下問)하시기를, ‘광무제(光武帝)가 경서(經書)의 이론을 강론함에 있어 「즐거워서 피로함을 몰랐다.」 함은 무슨 방법을 쓴 것인가?’ 하시므로, 천신(賤臣)이 외람되이 응대하기를, ‘모름지기 신고(辛苦)를 겪으며 쾌활하게 지내지 않아야 바야흐로 즐거운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라고 하였으니, 구구(區區)한 뜻이 대개 격려 분발(激勵奮發)하여 때로 힘쓰고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를 저하께 소망한 것입니다. 그후 세월은 흘러 어느덧 7, 8년이 되었으니, 그윽이 예학(睿學)의 조예(造詣)는 반드시 고명(高明)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떠도는 소문을 들으면 ‘강독(講讀)하는 규모가 너무 허술하여 법연(法筵)을 자주 정지하고, 송독(誦讀)은 비록 익숙하나 사색(思索)이 따르지 않으며, 응답은 시원스레 하나 질의(質疑)하는 일이 전혀 적으며, 은미(隱微)한 말과 심오(深奧)한 뜻 사이에는 간삽(艱澁)해 하는 마음이 있고, 혹 서연에 임하거나 아랫사람을 접하는 즈음에는 권태로운 빛이 드러나기도 하며, 서연관(書筵官)에 대한 돈유(敦諭)에는 으레 한결같은 투식 문자(套式文字)를 사용하고, 성의를 다하여 도움을 구하는 뜻은 볼 수 없으며, 온역일(溫繹日)445) 의 소대(召對)에는 겨우 3, 4장의 문단(文段)을 뒤적임에 그쳐서 형식에 응하고 수나 채우는 데로 돌아감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일취 월장(日就月將)함이 바로 이때임에도 일폭 십한(一曝十寒)446) 을 사람들이 혹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저하께서 말달리고 사냥하는 즐거움이 없으며, 또 놀이와 풍류·여색(女色)에 빠지는 실수가 없으신데, 어디에 마음을 써서 이와 같이 소홀하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만기(萬機)에 응하느라 학문에 방해가 된다.’라고 하나, 옛 명왕(明王)은 비록 군중(軍中)에 있더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또 더구나 독서와 강학(講學)은 곧 사무에 수작(酬酢)하여 평생 이용하는 것이니, 어찌 마음가짐을 담박(澹泊)하게 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어 하는 일이 없어야만 바야흐로 배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서경(書經)》의 〈진서(秦誓)에〉 이르기를, ‘내 마음의 걱정은 해와 달이 흘러가서 오지 않을 듯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하께서는 이를 생각하소서. 하나는 정사(政事)에 부지런한 것입니다. ‘근태(勤怠)’ 두 글자는 곧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의 한 대기관(大機關)입니다. 이른바 정사에 부지런하다는 것은 비단 소의간식(宵衣旰食)447) 뿐이 아니니, 반드시 권강(權綱)을 총람(摠攬)하고 사공(事功)을 종핵(綜覈)하며, 나라 보기를 내 집과 같이 하고 백성 보기를 자식과 같이 하여 늘 중외(中外)와 상하의 혈맥(血脈)과 기식(氣息)이 서로 유통이 되도록 하여야만 바야흐로 직무를 비우거나 뭉그러뜨릴 우려가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하께서는 대리 청정(代理聽政)하신 지 지금 몇몇 해가 되었는데 조종(祖宗)의 양법 미제(良法美制)를 과연 강구하셨고, 신료(臣僚)의 현우(賢愚)와 근태(勤怠)를 과연 식별하셨으며,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의 일을 모두 생각해 보았고, 수한(水旱)과 도적의 아룀을 모두 마음에 담아 두셨습니까? 이는 진실로 신처럼 소천(疎賤)한 자로서 감히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난 것을 시험삼아 말씀드리자면 침묵이 너무 지나쳐서 우불(吁咈)448) 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고, 인접(引接)이 매우 드물어 막혀 있다는 탄식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경대부(卿大夫)가 나아가 뵘에 있어 일찍이 치도(治道)의 자문을 입은 일이 없었고, 조근관(朝覲官)이 와서 뵘에 있어 질고(疾苦)에 대하여 일찍이 물은 바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빈연(賓筵)에서 복주(覆奏)함에 있어서는 일례로 의가(依可)의 답을 내려 혹 일의 타당함을 확정짓지 못하며, 상참(常參)의 대회(大會)는 잠깐 사이에 파하니, 매양 옥안[淸光]을 바라보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호소하려는 자는 각기 정세(情勢)가 있는데 모두 예에 따른 비답(批答)을 내리고, 거슬러 어기는 자는 스스로 적용할 형률(刑律)이 있음에도 문득 격례(格例)에 벗어난 은전(恩典)을 베푸십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정은 존엄하지 않고 기강은 엄숙하지 못하며, 백료(百僚)는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니, 서무(庶務)는 정체가 됩니다. 정신과 기상을 진작시키고 격려(激勵)하는 데에 결흠(缺欠)이 있고, 형정(刑政)과 풍채(風采)는 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용동(聳動)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신은 진실로 저하께서 묵묵히 앉아 자신을 공겸(恭謙)함으로써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심은 대개 《주역(周易)》의 곤(坤)이 건(乾)을 받드는 뜻을 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강령(大綱領)을 총람하는 것은 비록 대성인(大聖人)께서 운용(運用)하시는 데에 달려 있으나, 걱정을 나누고 대리(代理)하는 것이 실은 원자(元子)의 직책이란 것을 유독 생각지 않으십니까?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지금부터 분발하고 정려(精勵)하여 스스로 물러서지 말고, 보필하는 시종신(侍從臣)을 자주 인접(引接)하여 정치의 요체(要諦)를 강확(講確)하고 말마다 반드시 그 실상을 규명(糾明)하며 일마다 반드시 그 마땅함을 구하여 계속 노력하여 게으르지 않음은 반드시 은(殷)나라 탕(湯)임금의 먼동이 트기도 전에 큰 덕을 밝히려 함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해가 기울어 겨를이 없어 하듯 하며, 국사(國事)를 밝게 익히는 것은 반드시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전곡(錢穀)과 결옥(決獄)을 묻고, 당(唐)나라 선종(宣宗)이 주현(州縣)의 이해(利害)를 살핀 것처럼 하여야 합니다. 또 지금 황정(荒政)은 더욱 긴중(緊重)한 데 관계됩니다. 혹 주대(籌對)할 즈음에 어느 곳의 재해가 어떠하고 어느 고을의 사망(死亡)이 얼마이며, 진곡(賑穀)은 마땅히 몇 개월을 유지할 수 있고, 견감(蠲減)은 마땅히 어느 해에 비길 것인가를 물어서, 이와 같이 사리를 따져서 계획하여 시행하면 곧 진심으로 실속 있는 정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저하의 명예(名譽)로운 자질로써 능히 일상 생활에 미루어서 시행한다면,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있으며 어찌 이룩하지 못할 정사가 있겠습니까? 하나는 질병을 삼가는 일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저하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이시고 혈기가 바야흐로 왕성하시니, 마땅히 질병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듯하나, 천화(天和)도 간혹 어긋나는 일이 있고, 외기(外氣)의 감염(感染)이 자주 됩니다. 5일에 한번 하는 빈대(賓對)도 문득 조섭(調攝)하시는 중에 번거롭다 하여 탈품(頉稟)하고, 1일에 두 번 하는 강연(講筵)은 몸이 회복될 때까지 우선 정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신의 어리석음은 죄에 죽어야 하나, 생각건대, 기거(起居)의 절도(節度)가 혹 제때에 어긋난 것이 아니겠으며, 기욕(嗜慾)에 대한 싹이 혹 소멸되지 않은 것이 아니겠으며, 안일(安逸)에 대한 경계를 혹 소홀히 하여 신체의 조절에 흠이 있는 것이 아니겠으며, 이목(耳目)의 즐거움을 추구하여 정신을 기르는 데에 방해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하의 예덕(睿德)과 영명(令名)으로서 반드시 이와 같은 우려는 없을 것이나, 만에 하나 이와 흡사한 일이 있다면 모두 족히 성령(性靈)을 손상하고 체기(體氣)를 해롭게 할 수 있으니, 견마(犬馬)449) 의 걱정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위항(委巷)의 백성으로서 약간 자애(自愛)할 것을 아는 자는 모두 자신을 진중(珍重)히 아끼고 그 섭생(攝生)에 신중하며, 평소에 서로 위로함에 있어 또한 반드시 식사(食事)를 더하고 의약(醫藥)을 가까이 하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저하께서는 위로 종사(宗社)의 소중한 부탁(付託)과 아래로 신서(臣庶)들의 간절한 기대가 어떠하기에, 스스로 보호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다하지 못하십니까?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일이 곧 병이란 것을 알았으면 곧 이와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깊이 이에 유의(留意)하소서. 하나는 바른 말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옛 제왕(帝王)으로서 장차 큰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이는 반드시 정사를 듣는 초두에, 첫째로 진언(進言)하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대개 그 자신이 성지(聖智)로 자처하지 않고, 겸손하고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이 애연(藹然)히 지성(至誠)에서 나와서 비록 추요(蒭蕘)450) 의 미천한 자일지라도 각기 그 견해를 다 말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이목(耳目)이 모두 나의 쓰임이 되어서 국계(國計)와 민폐(民弊)가 모두 위에 통달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저하께서 대리(代理)하신 이후, 일찍이 한번도 구언(求言)의 영(令)이 내려진 일이 없었으니, 진실로 이미 명목 달총(明目達聰)451) 의 뜻에 어긋났으며, 간혹 대각(臺閣)의 언사(言事)에 관한 글과 초야(草野)의 면학(勉學)에 대한 말이 있었으나 두어 자의 예사 비답이 있을 뿐, 조금도 채택함이 없었습니다. 낭묘(廊廟)452) 를 통절하게 논란하면 반드시 협잡(挾雜)이라 배척하고, 수령(守令)을 탄핵하는 경우에는 문득 풍문으로 돌려버리며, 말이 경계[箴戒]에 관련되면 깊이 유념하겠다는 평범한 답을 내리고, 일이 큰 계책[訏謨]에 관계되면 어물어물 품처(稟處)로 돌려서, 비록 최절(摧折)·염박(厭薄)의 뜻은 없었으나 또한 끝내 받아들이고 채택하는 실상이 없었습니다. 주자(朱子)의 이른바 ‘부드러운 도(道)로써 충의(忠義)의 말을 꺾는다.’는 것에 거의 가깝기도 합니다. 민국(民國)의 대계(大計)로써 대조(大朝)께 품하라는 청에 있어서는, 그 말의 천심(淺深)과 득실(得失)을 막론하고 모두 정섭(靜攝)하시는 중이므로 품하기 어렵다고 하유(下諭)하였습니다. 아! 하나같이 근년에 오면서 한두 집정(執政)이나 두셋의 근신(近臣)을 제외하고는, 비록 우리 임금의 옥안[耿光]을 한번 뵙기를 원해도 이룰 길이 없었으며, 크고 작은 글월이 마침내 주광(紸纊)453) 앞에 통달이 될 수 없으니, 이는 지사(志士)들이 아래에서 울분하여 길이 탄식하는 바입니다. 우리 저하께서 또 그 정성을 유도(誘導)하여서 그 말을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지 않으니, 이는 군신(君臣)이 서로 어우러지는 뜻이 거의 끊어진 것입니다. 상하의 막힘이 이러하니 곤직(袞職)454) 이 어찌 궐(闕)함이 없겠으며, 천공(天工)455) 이 어찌 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꺼리지 않는 문을 활짝 열어 사람마다 각각 모두 말할 수 있게 하여서 말의 옳은 것은 반드시 살피고, 그 옳은 것을 보아서 채용하며, 말의 옳지 않은 것도 반드시 살펴서 그 불가함을 보고서 폐기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부(可否)나 종위(從違)의 사이에 있어 예지(睿旨)를 명시하여 흐리멍덩한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혹 대조(大朝)께 품할 것을 청한 경우에도 마땅히 문침(問寢)·시선(視膳)할 즈음에 조용히 아뢰어 뭇사람의 마음을 널리 채택하여 예덕(睿德)에 도움이 되게 한다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학문에 힘쓰는 것은 덕의에 나아가고 업적을 닦는 일로서 정사를 부지런히 하는 기반이 되며, 정사에 부지런함은 법제(法制)를 세우고 기강(紀綱)을 바로잡는 것으로서 학문에 힘쓰는 공용(功用)이 되고, 질병을 삼가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고 정신을 기르는 일로서 학문에 힘쓰고 정사에 부지런한 근본이 되며, 바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총명을 넓히고 사려(思慮)를 돕는 일이니, 이 네 가지를 종합한다면 이는 모두 전 사람이 이미 기술(記述)한 바요, 여러 신하가 이미 아뢴 바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급선무(急先務)를 구한다면 이 네 개의 제목(題目)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저하의 배움은 진실로 이미 힘쓰고 계시나 신은 오히려 더욱 힘쓰기를 원하고, 저하의 섭양(攝養)은 이미 지극하시나 신은 오히려 영위(榮衛)에 혹 손실이 될까 두려우며, 저하의 바른 말을 듣고 받아들임은 이미 넓으나 신은 오히려 이목(耳目)에 혹 가리운 것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의 망령된 근심이요, 지나친 계교(計較)이오나, 그 권권(惓惓)456) 해 마지않는 것은 다만 저하께서 진선 진미(盡善盡美)하여 위로 성명(聖明)의 부탁에 부응하고, 아래로 조야(朝野)의 소망에 위로가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 저하께서 이 어찌 그 참람하고 외람됨을 용서하고 그 정성을 이해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원서(原書)를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
임금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유신(儒臣)을 불러 보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교(慈敎)를 받들어 어쩔 수 없이 존호(尊號)를 받았으나, 실로 지나친 즐거움[大康]의 경계가 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큰 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큰 혜택이 있어야만 민심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균역청의 재물을 따져 보면 자못 여유가 있을 것이니, 만약 금년 여러 도의 결전(結錢)을 감한다면 실로 재물을 흩어 백성을 모으는 정사(政事)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임금이 교리(校理) 이세택(李世澤)에게 묻기를,
"선정(先正)457) 의 적손(嫡孫)이 누구인가?"
하니, 이세택이 이세덕(李世德)의 아들 이구응(李龜應)이라고 대답하매,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전 참판(參判) 권상일(權相一)에게 식물(食物)을 내리라고 명하였으니, 권 상일은 영남(嶺南) 사람이다. 수년 사이에 갑자기 발탁(拔擢)의 은혜를 가하였는데, 그 늙어 병들었음을 듣고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임금이 지평(持平) 이복원(李福源)의 글을 가져다 보고, 춘방관(春坊官)을 부르라 명하고 하유(下諭)하기를,
"원량(元良)은 비록 병이 있더라도 또한 강관(講官)을 와내(臥內)에 불러 보아야 하니, 너는 곧 구대(求對)하여 근면(勤勉)을 진달하라. 내일 내가 친히 강경(講經)하여 몸소 가르치는 본보기가 되게 하겠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헌신(憲臣)의 글 가운데 4건은 곧 내가 원량을 위하여 밤낮으로 걱정스러워 하던 바이다. 근래 이목(耳目)의 관원이 머뭇거리는 것으로 능사(能事)를 삼으니, 이것이 어찌 여러 신하의 허물이겠는가? 곧 원량이 스스로 반성(反省)하지 못한 과오이며, 또한 어찌 원량의 허물이겠는가? 이는 내가 계술(繼述)을 하지 못하고, 가르쳐 신칙하지 못한 소치이다. 원량의 하답(下答)에 스스로 반성하는 구절도 없고, 포장(褒奬)한 사실도 없었다. 이복원을 특별히 준직(準職)458) 에 제수하라."
하고, 구전(口傳)으로 하비(下批)459) 하였다. 또 전 판서(判書) 이철보(李喆輔)의 서용(敍用)을 명하였다.
12월 14일 계축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을 강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세택(李世澤)이 말하기를,
"‘소기무일(所其無逸)460) ’ 네 글자는 한 편(篇)의 강령(綱領)이 되고, ‘일(逸)’ 자의 대(對)는 곧 ‘경(敬)’ 자이니, 은(殷)나라 고종(高宗)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모두 ‘안일[逸]’로써 경계로 삼았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동궁(東宮)이 대리(代理)하고 있어 비록 ‘전하께서 안일하게 지낼 시기라’고는 하나, 이미 다스려졌고 이미 안정되었다고 하지 마시고, 부지런히 더욱 제왕(帝王)의 학문에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무일도(無逸圖)로 인하여 개원(開元)461) 의 치적(治績)을 이루었고, 산수도(山水圖)로 인하여 천보(天寶)의 난을 가져왔는데, 현종이 앞뒤로 양절(兩截)의 사람이 된 것은 또한 안일함과 안일함이 없는 데에서 가져왔다. 정유년462) 의 일을 추억하건대, 차마 보책(寶冊)을 받을 수 없었다. 오늘 몸소 가르치는 본보기로 삼았으므로 이 강(講)을 억지로 열은 것이다."
하였다. 대리 이후에 임금이 법강(法講)에 나오지 않다가 이날 비로소 〈강을〉 행하였으니, 뭇 신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고(故) 판서(判書) 권적(權𥛚)을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권적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계모(繼母)를 잘 섬겼다. 나이 80에 이르렀고, 지위가 태좌(台座)463) 에 이르렀는데, 봉록(俸祿)은 모두 계모에게 받들었고, 처자[妻孥]에게는 사재(私財)가 없었다. 계모가 화를 내면 곧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주기를 기다렸으며 화가 풀린 뒤에야 물러났다. 사망함에 미쳐 진신(搢紳)들이 예조(禮曹)에 정문(呈文)하여 그 행적(行績)을 정려(旌閭)하도록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허락한 것이다.
이성규(李聖圭)를 지평으로 삼았다. 이성규는 역수(逆囚)의 고한 바가 되었으나, 임금이 죄 없음을 밝혀 주었다. 전조(銓曹)에서 다시 관직에 의망(擬望)하지 않자, 임금이 특별히 이 관직에 제수한 것이다.
교리(校理) 이세택(李世澤)이 상소하고 선정(先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편찬한 《성현도학연원(聖賢道學淵源)》을 올리니, 임금이 포장(褒奬)하여 답하고, 친히 서문(序文)을 지었으며, 《성학십도(聖學十圖)》에도 아울러 서문을 친제(親製)하고, 영남 도신(嶺南道臣)에게 간행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을 보내어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치제(致祭)하고, 이세택에게 초모(貂帽)를 내렸으니, 이세택은 이황의 후손이요, 도산(陶山)은 이황의 제향(祭享)을 받드는 곳이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익보(李益輔)가 상서하여 표재(俵災)464) 를 더하기를 청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임금이 고(故) 상신(相臣) 송인명(宋寅明)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부음(訃音)을 듣고, 호조(戶曹)에 후하게 돌보아 주라고 명하고, 또 송인명에게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균역 당상을 인견하고, 여러 도의 금년 결전(結錢)을 특별히 그 절반을 감면하라고 명하였으니,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의 말에 따른 것이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4대신(四大臣)465) 은 선조(先朝)의 고명 대신(顧命大臣)으로서 동시에 국가를 위하여 죽었으니, 지금 의리를 밝히는 날을 맞이하여 포장(褒奬)하는 은전(恩典)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그 사우(祠宇)인 〈사충사(四忠祠)를〉 복설(復設)해야만, 순국(殉國)한 충절(忠節)로 하여금 천하 후세에 분명히 보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건저 대리(建儲代理)의 일466) 로써 나로 말미암아 죽었으니, 어찌 창연(愴然)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정려(旌閭)하고 사우를 세움은 분수에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지사(知事)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의리를 밝힌 뒤에는 일의 체통이 자별(自別)하니, 포장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병조 판서 홍봉한은 말하기를,
"사충(四忠)에 대한 표장(表章)은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성의(聖意)에 반드시 정려하고 사우를 다시 세우는 두 가지 일이 어렵다고 하신다면, 사우를 세우는 일이 정려하는 것보다 나으니, 먼저 사우를 복설하고 천천히 정문을 논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사우를 복설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재로(金在魯)에게 수서(手書)를 내리기를,
"20년을 태각(台閣)467) 에 있었고 10년을 원보(元輔)468) 로 있었으니, 오늘의 공에 경을 어찌 빠뜨릴 수 있는가? 고(故) 상신(相臣)이 근년에 ‘동지(同志)’라는 두 글자로써 그 당시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좌우에서 같이 협찬(協贊)하였고, 나와 함께 정성을 다하였는데, 임금과 상신이 머리가 희도록 〈제회(際會)함은〉 드물게 듣는 일이다. 56자로써 경의 충성을 표한다[廿年台閣 十年元輔 今日之功 卿何遺焉 故相頃年同志二字 其時筵奏 尙今在耳 左右同贊 與予同效 君相白首 可謂罕聞 五十六字表卿之忠]."
하고, 그 아들 참의(參議) 김치인(金致仁)에게 주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뭇 신하들이, 흉역(凶逆)이 복주(伏誅)되고 조정에 편당(偏黨)이 없어졌다 하여 존호(尊號)를 올리니, 임금이 그 공을 조정(調停)에 힘쓴 여러 신하에게 미루었다. 김재로가 오랫동안 보상(輔相)으로 있었으며, 그 공이 크므로 포장한 것이다.
뭇 신하들이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명년에 수(壽)가 칠질(七耋)469) 에 오르므로 여러 번 진연(進宴)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흉년은 들고 백성은 곤궁한데 지나친 즐거움[大康]은 옳지 않다. 내가 자성(慈聖)을 위하여 헌복(獻福)하리라."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6일 을묘
지평(持平) 이시민(李時敏)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서울과 외방에 도둑이 출몰(出沒)함은 곳곳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강촌(江村)의 큰 고갯길에는 무덤을 파서 옷을 훔치는 근심이 있었고, 도성(都城) 가까운 곳에서는 또 길에서 물건을 약탈하는 폐단이 있었으니, 일의 놀라움은 이보다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칙령(飭令)을 엄중히 내려서 통찰(洞察)을 더하도록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2월 17일 병진
임금이 아직 부임(赴任)하지 않은 수령(守令)을 불러, 흉년든 해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힘쓰라고 하유(下諭)하여 보냈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시전(詩傳)》을 강하고, 무신(武臣)은 《병학지남(兵學指南)》을 강하였다.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아뢰기를,
"고(故) 학사(學士) 윤집(尹集)의 조부 윤섬(尹暹)은 임진년470) 에 순절(殉節)하였고, 윤집은 또 병자년471) 에 순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이 궁핍하여 살 수 없게 되자 그 집을 팔아 해동(解凍)한 뒤에 헐리게 되어 있는데, 명년은 곧 윤집이 순절한 해입니다. 마땅히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위징(魏徵)472) 의 옛집을 속환(贖還)한 일에 의하여 조가(朝家)에서 속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절(忠節)을 기리는 도리에 있어 어찌 그 값의 다과를 논하겠는가?"
하고, 이어 호조(戶曹)에서 그 집을 속환하고, 봉사손(奉祀孫)을 수령(守令)으로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8일 정사
오시(午時)와 미시(未時)에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고, 해 위에 관(冠)이 있었으며, 관 위에 배(背)가 있었다. 신시(申時)에 해에 양이가 있었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詩經)》의 문왕편(文王篇)을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문왕(文王)의 정치는 곧 소민(小民)을 감싸주고 보호하는 것으로서, 그 첫째는 사민(四民)473) 에 있다. 근일 기운이 고달픈 가운데 들은즉, 바람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 편전(便殿)에도 찬 기운이 침투(侵透)하니, 더구나 곤궁한 백성과 걸식하는 아이들이야 더욱 어떻겠는가? 선혜청에 분부하여 거지들을 모아 밤에 그 추위를 막아주고 다음날 양식(糧食)을 지급하라."
하였다.
12월 19일 무오
경기도(京畿道)에서 여역(癘疫)으로 사망한 자가 8백여 인이었다.
12월 20일 기미
밤 4경(四更)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이철보(李喆輔)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경서(經書)를 강하였다. 입시(入侍)한 영사(領事) 이천보(李天輔)가 아뢰기를,
"고(故) 지평(持平) 채성귀(蔡聖龜)는 여러 번 상소하여 척화(斥和)하였고, 병자년474) 이후에는 이어 벼슬에 나오지 않고 폐인(廢人)으로 자처하였는데, 지은 시율(詩律)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존주 절의(尊周節義)475) 는 실로 표장(表章)할 만하니, 통정(通政) 직(職)을 추증(追贈)하여 풍교(風敎)를 세움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천보가 또 아뢰기를,
"고(故) 대사헌(大司憲) 이목(李楘)이 병자년에 척화를 한 것은 윤황(尹煌) 등 여러 사람과 명성이 같으니, 마땅히 증시(贈諡)의 은전(恩典)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예조 판서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척화인(斥和人)과 절사인(節死人)을 지난번에 뽑아서 아뢰었는데, 또다시 뽑아 내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척화인은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 고 참판 유계(兪棨), 고 부제학 김경여(金慶餘), 고 대사헌 이목(李楘), 고 참판 조한영(曹漢英), 고 사부 홍우정(洪宇定), 고 지평 채성귀(蔡聖龜),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이고, 순절인은 고(故) 부윤(府尹) 황일호(黃一皓), 고 주부 최효일(崔孝一), 고 부사 지해남(池海南), 이증(李贈) 찬성(贊成) 이돈오(李惇五), 증 참판 이돈서(李惇敍), 고 감찰 김수남(金秀南)이며, 전망인(戰亡人)은 고 병사 이의배(李義培)·민영(閔栐)·허완(許完), 고 영장 최진립(崔震立), 고 찰방 이상재(李尙載), 고 현감 김홍익(金弘翼)·이경징(李慶徵)·이건(李楗), 고 부사 황박(黃珀), 고 감사 홍명구(洪命耉), 고 군수 구현준(具賢俊), 고 현령 허노(許輅)로서 합하여 26인이니, 아울러 일체로 치제(致祭)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오언유(吳彦儒)가 말하기를,
"고 참찬 유백증(兪伯曾)의 병자년 척화는 절의(節義)가 뛰어났고 수립(樹立)이 매우 높았는데, 지금 홀로 누락되어 들어가지 않았으니, 실로 흠전(欠典)이 되는 일입니다."
하였고, 이정보는 말하기를,
"정뇌경(鄭雷卿)도 마땅히 들어가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일체로 치제하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 판서 김동필(金東弼)은 그 사람을 이미 익히 알고 있는데, 이름이 《천의소감(闡義昭鑑)》에 올라 있고, 그 아들은 조태구(趙泰耉)의 외손(外孫)이 되었으니, 어찌 왕자(王者)가 흑백(黑白)을 가리는 도리이겠는가? 전 군수 김광진(金光進)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본종(本宗)에 돌아가게 하라."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는 곧 대륜(大倫)이니, 본종으로 돌아가게 해서는 부당합니다."
하였고, 지사(知事) 홍봉한(洪鳳漢)은 말하기를,
"예관(禮官)은 반드시 어렵다고 여길 것이니, 위에서 특별히 파양(罷養)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위(任瑋)를 대사간으로, 원인손(元仁孫)을 겸 보덕으로 삼았다.
12월 21일 경신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야대(夜對)를 행하고, 빈풍(豳風)476) 의 칠월편(七月篇)을 강(講)하였으며, 이어 찬(饌)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밀(近密)의 신하에게는 비록 찬을 내리라고 명하였으나, 오늘 밤 바람 소리가 매우 싸늘하게 느껴지는데, 오직 저 걸식(乞食)하는 자들은 장차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고, 윤음(綸音)을 쓰라 명하여 묘당(廟堂)에 내려서 백성을 구제할 방법을 강확(講確)하라고 하였다.
12월 22일 신유
밤 4경(四更)·5경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장달(狀達)하기를,
"이국인(異國人) 8명이 함평(咸平) 땅에 표류하여 도착하였는데, 3명은 익사(溺死)하고 탔던 배는 파손되었으니, 육로(陸路)를 통하여 송환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와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병을 이유로 인입(引入)하였다. 옥당(玉堂) 정상순(鄭尙淳)과 이최중(李最中)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의 기근(饑饉)은 근래에 없던 바입니다. 입을 옷이 없고 먹을 양식도 없어 길거리에 쓰러지는 자가 즐비하니, 비록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심려(心慮)를 다하여 힘써 강구하더라도 미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주사(籌司)477) 의 좌기(坐起)를 폐한 지 이미 달포가 넘고 여러 도의 첩보(牒報)에는 먼지가 쌓였으니, 개연(慨然)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강확(講確)하라는 하교(下敎)는 성의(聖意)의 가엾게 여기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상과 좌상의〉 두 차자가 함께 도착하였으니, 특히 나라를 몸받는 도리에 흠결이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다시 돈면(敦勉)을 더하여 제때에 상확(商確)하여 만민(萬民)에게 혜택이 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차자에 이어서 올리니 체례(體例)를 얻음이 가상하다. 그러나 자구(字句) 사이 정당(停當)함에 흠결이 있으니, 경(經)을 인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학사(學士)들은 더욱 면려하라."
하였다.
임금이 전 감사(監司) 이이장(李彛章) 등을 불러 여러 도(道)의 일을 물었다. 이이장이 말하기를,
"왜정(倭情)은 매우 교활하여 늘 관문(館門)을 함부로 나와서 동래 부사(東萊府使)에게 공갈(恐喝)하므로 그 청을 모두 들어줍니다. 당초의 약조(約條)는 관왜(館倭)로서 함부로 나오는 자는 참(斬)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조정(朝廷)에서 함부로 나온 사유를 조사하여 허물이 동래 부사에게 있으면 동래 부사를 죄주고, 관왜가 고의로 범한 경우에는 관왜를 참해야만 뒤에 따를 폐단을 막을 수 있습니다. 또 대마도(對馬島)는 매우 작아 기장현(機張縣) 한 고을과 비슷합니다. 늘 우리 나라를 일컬어 대조정(大朝廷)이라 하니, 이 뒤로는 위에서 윤음(綸音)을 번거롭게 내리지 마시고 묘당(廟堂)에서 품지(稟旨)한 뒤에 동래 부사로 하여금 효유(曉諭)하게 하여 국위(國威)를 펴게 할 것이며, 또 이 섬은 두 나라 사이에 있으므로 늘 7푼의 은혜와 3푼의 위엄으로 제어(制御)하여 그들이 감히 조정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을 내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좋다. 나는 왜인(倭人)을 제어하는 요도(要道)를 얻었다."
하고, 이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잘 알게 하라고 하였다. 이이장이 동래(東萊)에 부임하였을 때에 능히 위엄과 명찰(明察)로써 관왜(館倭)를 제어하여 그 교활한 습성을 징즙(懲戢)시켰으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발탁하였는데, 방금 교체되어 돌아왔으므로 아뢴 바가 이와 같았다. 여러 도의 적곡(糴穀)478) 을 정봉(停捧)하라 명하였으니, 임금이 내년 봄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진하(陳賀)함을 맞이하여, 부옥(蔀屋)479) 의 백성을 옥(獄)에 가두어 포흠(逋欠)을 독촉하여 징수함은 동경(同慶)하는 뜻이 아니라 하여 정봉을 명한 것이다. 또 북관(北關)의 기근(饑饉)이 우심한 고을의 노비 신포(奴婢身布)도 정봉하고, 경흥부(慶興府)의 내사 노비(內司奴婢)의 신포도 감하라고 명하였으니, 경흥은 국초(國初)에 왕업(王業)을 일으킨 땅으로서 전 함경 감사 김한철(金漢喆)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12월 23일 임술
강화 유수(江華留守) 정형복(鄭亨復)을 파직하였다. 임금이 정형복을 불러 민사(民事)를 묻고, 또 말하기를,
"적곡(糴穀)으로서 수봉(收捧)되지 못한 것이 어찌 이리 많은가?"
하니, 정형복이 말하기를,
"연사(年事)가 흉년이어서 백성들이 모두 빈곤하여 차마 곤장(棍杖)을 쳐서 독징(督徵)할 수 없었고, 백성들은 또 해마다 정봉(停捧)하라는 명령이 내리므로 관망(觀望)하는 자도 많았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도신(道臣)과 수령(守令)들은 준봉(準捧)하라는 명령을 믿지 않고 또한 관망했단 말인가?"
하고, 파직을 명한 것이었다. 정형복은 근신 염결(謹愼廉潔)하여 부임한 고을마다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으며, 이서(吏胥)는 그 청렴을 두려워하였는데, 대답을 잘못하여 면직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개성부(開城府) 사람 임서추(林瑞樞)를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으니, 그는 두문동(杜門同) 충신(忠臣)의 후예이기 때문이었다.
12월 24일 계해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옥당(玉堂)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상서하여 인책(引責)하였는데,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詩經)》의 대아(大雅)를 강론하고, 밤에 또 유신과 강독(講讀)을 하였다.
하교하기를,
"춘방관(春坊官)이 스스로 독서를 않으니, 어떻게 권강(勸講)할 수 있겠는가? 월봉 1등(越俸一等)480) 을 시키라."
하였으니, 대개 임금이 춘방(春坊)에서 독서하지 않는 것을 살펴서 알았으므로, 이하교가 있은 것이었다.
12월 25일 갑자
경상도의 거창(居昌)과 개령(開寧) 백성들이 결당(結黨)하여 관창(官倉)에 돌입하여 조부(糶簿)481) 를 불태웠으므로, 감사(監司)가 장문(狀聞)하고 두 고을의 수령(守令)을 파직하도록 청하였다.
12월 26일 을축
윤득우(尹得雨)를 헌납으로, 박창윤(朴昌潤)을 사간으로, 심이지(沈履之)를 정언으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상달(上達)하기를,
"도성(都城) 안의 거지들을 각부(各部)에서 진휼청(賑恤廳)으로 잘 보내지 않아 도문(都門) 밖에 주검이 즐비하여 자그마치 1백여 인에 달합니다. 경조(京兆)의 낭청(郞廳) 및 해당 부관(部官)을 아울러 나처(拏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왕세자(王世子)가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인책(引責)하였는데, 그 끝에 말하기를,
"삼사(三司)와 묘당(廟堂)은 서로 항례(抗禮)하는 위치에 있으니, 삼사에서 묘당을 논박하는 일은 체통(體統)을 들어서 책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비지(批旨)를 고쳐 내려서 후사(後嗣)에 끼쳐 주는 규모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이조 당상을 불러서 입시하니, 하교하기를,
"시호(諡號)를 올리고 원(園)으로 봉(封)한 뒤에는 체통이 전날보다 무겁다. 저경궁(儲慶宮)과 육상궁(毓祥宮)의 외친(外親)에게 해조(該曹)로 하여금 우찬성(右贊成)을 증직(贈職)하게 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하였다.
수찬(修撰) 이최중(李最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 증직(贈職)하는 전례(典禮)에는 절차에 한계가 있습니다. 고비(考妣)로부터 조부모·증조부모에 이르기까지 점차 강등(降等)하는 규식이 있으며, 본종(本宗)에게는 미치나 외친에게는 미치지 않음은 곧 우리 조정의 3백 년의 전장(典章)입니다. 고(故) 전주 부윤(全州府尹) 송국택(宋國澤)에게 특별히 이상(貳相)482) 을 증직한 것은 대개 선조(先朝)의 특별한 은전에서 나왔습니다. 지난번 동조 전하(東朝殿下)의 외친인 〈고(故) 현령(縣令) 조경창(趙景昌)에게 좌찬성의〉 증직을 명하신 일에 이를 원용(援用)하여 예로 삼음은 지나친 일이니, 지금 이 하교는 곧 성헌(成憲) 밖에서 나왔습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으나 어찌 우리 성상께서 옛날을 생각하는 효성을 모르겠습니까만, 예(禮)에 벗어나는 은전을 시행함은 족히 영예가 되지 못합니다. 옛날에 이른바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위하여 천자(天子)의 예악(禮樂)을〉 내려 준 것과 백금(伯禽)483) 이 그것을 받은 것은 모두 예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에 혹 가깝지 않을런지요? 삼가 비옵건대, 저하(邸下)께서는 빨리 대조(大朝)께 품하여 우선 성명(成命)을 정지하고, 널리 대신(大臣)과 예관(禮官)에게 물어서 국가의 전례로 하여금 바르게 되도록 하소서."
하니, 하령(下令)하기를,
"지금의 이 증직은 곧 우리 성상의 지극한 효성과 성대한 덕의(德意)에서 나왔는데,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대조의 효성에서 하신 일을 어찌 감히 품하겠는가? 그 글을 도로 주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8일 정묘
조영국(趙榮國)을 강화 유수로, 이후(李)를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보았다. 교리(校理) 조엄(趙曮)이, 비국(備局)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걸인(乞人)이 굶주려 죽은 일을 아뢰니, 임금이 측은히 여겨 말하기를,
"도성(都城) 문 밖은 백성들이 사는 곳인데, 굶어 죽은 주검이 이러함은 곧 나의 허물이다. 경조(京兆)의 낭청(郞廳)과 부관(部官)은 죄가 없으니 아울러 석방하고, 곧 매장(埋葬)할 것이며, 부관으로 하여금 여제(厲祭)를 베풀어 넋을 위로하고 그 족속(族屬)을 돌보도록 하라."
하고, 이어 상진곡(常賑穀)을 제주(濟州)에 보내어 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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