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사
임금이 존호(尊號)를 받았다. 이날 묘시(卯時)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서 뭇신하들을 인솔하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휘호(徽號)를 가상(加上)하여 ‘융화(隆化)’라고 하였다. 임금이 사배(四拜)하고 꿇어앉아 옥책(玉冊)·옥보(玉寶)를 올리고 치사(致詞)·진전(進箋)을 마치자 또 사배하고 나왔다.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을 받들어 칠순을 축하하니, 실로 드물게 있는 경사이다. 영어(囹圄)를 활짝 열라."
하였다. 드디어 태묘(太廟)에 배알하고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서 시호를 더 올렸는데, ‘휘덕(徽德)’이라 하였다. 임금이 재배(再拜)하고 꿇어앉아 죽책(竹冊)·은보(銀寶)를 올렸다. 먼저 관천(祼薦)을 행하고 이어 삼헌례(三獻禮)를 행하였다. 예(禮)가 끝나자 근정전(勤政殿)의 옛터로 거둥했는데, 근정전은 곧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열성(列聖)들이 청정(聽政)하던 곳인데, 왜란(倭亂) 때 불탄 이후로 터만 남고 전(殿)은 없어졌다. 임금이 중관(中官)에게 궤장(几杖)을 받들고 전도(前導)하라고 명했는데, 막차(幕次)를 설치하고 나아갔다. 이에 뭇신하들이 전하의 휘호를 가상(加上)하여 ‘체천 건극 성공 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라 하고 중궁전(中宮殿)의 휘호는 ‘강선(康宣)’이라 하였다. 옥책(玉冊)·옥보(玉寶)를 의식대로 올리고,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이하에게 상을 차등 있게 내렸다. 그리고 죄를 입은 조신(朝臣)을 서용(敍用)하여 하반(賀班)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난가(鑾駕)를 길가에 멈추고 영어(囹圄)의 죄수를 불러 위유(慰諭)하여 석방해 보냈다. 또 이달 15일 이전까지 제사(諸司)에서는 금패(禁牌)001) 를 내지 말라 명하고, 조신(朝臣)으로서 70세 이상인 사람과 사서인(士庶人)으로서 80세 이상인 사람을 모두 가자(加資)하게 하였으니, 대개 추은(推恩)한 것이었다.
김상복(金相福)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월 2일 경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들을 불러 하교하기를,
"어제 휘호를 받은 것을 두고 그 ‘성공(成功)을 고한 것’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30년 동안 고심하신 것이 오늘에야 비로소 효험을 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작년의 일이 없이 세도(世道)가 저절로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다면, 이른바 ‘성공을 고함’을 내가 어찌 반드시 사양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무위이화(無爲而化)’가 아니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작년의 일은 국맥(國脈)에도 손상됨이 있었지만 세도에 효험이 없지 않습니다. 비록 신 등이라 할지라도 또한 어찌 찌꺼기를 모두 없앤 줄 알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때때로 칙려(飭勵)를 더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제도(諸道)에 신칙하여 사단(社壇)을 깨끗하게 하고, 윤음(綸音)을 내려 팔로(八路)의 수재(守宰)는 다 전준(田畯)002) 이 되게 하였으며, 감사는 전최(殿最)003) 에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고과(考課)하게 하였다. 또 비국(備局)에 명하여 시민(市民)의 폐단을 혁파하게 하고, 배를 치패(致敗)시킨 사공과 곁꾼으로서 오래 갇혀 있는 자들을 방면케 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詩經)》의 대아(大雅)를 강(講)하게 하였다.
1월 3일 신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고 중외(中外)에 대사(大赦)를 내리니, 뭇신하들이 치사(致詞)하고 진전(進箋)·진하(陳賀)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하유(下諭)하기를,
"팔로에서 굶주림을 고하고, 조정의 일이 지체됨이 많다. 오늘은 개벽(開闢)하는 날과 거의 같으니, 경(卿) 등은 면려(勉勵)하라."
하고, 6부(六部)의 장(長)에게 하유하기를,
"6부는 천지와 사시를 겸하는 이름이니, 힘쓰도록 하라.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양전(兩銓)004) 에 달려 있으니, 내가 위임(委任)하는 것에 대해 마음을 해이하게 가지지 말라."
하고, 국자장(國子長)005) 에게 하유하기를,
"《시경》에 이르기를, ‘제제(濟濟)한 선비가 많아 문왕(文王)이 편안하다.’ 하였으니, 어찌 이것으로 여러 유생(儒生)을 권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5일 계유
경상 감사 이익보(李益輔)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도(本道)의 금년 재상(災傷)은 논과 밭, 산협(山峽)과 들을 막론하고 이미 우열(優劣)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무·미나리 따위로 백성이 먹을 수 있는 것조차 전혀 된 것이 없어, 시장에는 곡식이라고 이름할 만한 것이 거의 씨가 끊어졌으니, 궁박한 백성들이 위망(危亡)에 떨어져 있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만약 차마 그들의 살과 뼈를 깎아 푸른 물결이 아득한 가운데서 모래와 자갈이 퇴적(堆積)해 있으며 풀만 우거진 땅에다 강제로 징세(徵稅)하게 한다면, 아마도 대조(大朝)의 자식처럼 은혜를 베풀고 부세(賦稅)를 관대하게 해주는 덕의(德意)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실로 백성을 몰아 구렁에 밀어넣게 될 것이니, 신이 어찌 차마 이 일을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을 무겁게 감죄(勘罪)하시고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제수하시어 즉시 표재(俵災)006) 하도록 하여 70주(州)의 생령(生靈)을 구제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대개 이익보는 지부(地部)007) 에서 획급(劃給)한 재결(災結)로는 골고루 널리 미치지 못한다 하여 재결을 더 획급해 줄 것을 청했는데, 묘당(廟堂)에서 청한 액수에 대하여 단지 5분의 1만을 허락했기 때문에 상소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니, 왕세자가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반유(泮儒)008) 에게 시험을 보이고, 제술생(製述生) 윤면동(尹冕東)·강경생(講經生) 조몽린(趙夢麟) 등 4인을 뽑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황인검(黃仁儉)을 동부승지로, 이정보(李鼎輔)를 우빈객으로, 홍계희(洪啓禧)를 좌빈객으로 삼았다.
1월 7일 을해
유성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1월 9일 정축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講)하였다. 춘방관(春坊官)을 불러 유시하기를,
"이것은 내가 원량(元良)을 가르치던 책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구대(求對)하여 진강(進講)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심이지(沈履之)가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평범한 진계(陳戒)에도 곧 온화한 비답을 내리시지만, 개역(改繹)의 효험을 볼 수가 없으며, 규잠(規箴)과 헌체(獻替)009) 가 조금이라도 시휘(時諱)에 관계되면 더욱 살펴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저하께서 삼사(三司)를 대우하심이 이미 이와 같으니, 어떻게 천하의 선(善)을 이르게 하고 일세(一世)의 말을 인도하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학(講學)과 근정(勤政)은 곧 지행(知行)010) 과 같으니, 동궁(東宮)의 빈대(賓對)와 비국(備局)의 개좌(開坐)는 비록 재일(齋日)이라도 정지하지 말라. 그리고 대각(臺閣)에서 언사(言事)한 글이 있다면 승지는 구대(求對)하여 답을 받으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봉한(洪鳳漢)·형조 판서 정익하(鄭益河)를 파직하고, 이철보(李喆輔)를 병조 판서로, 정형복(鄭亨復)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전옥(典獄)의 수도안(囚徒案)을 취해 보았는데 병조·형조에 갇혀 있는 죄수가 있었으므로, 하교하기를,
"왕령(王令)은 마땅히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고,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형조 낭관(郞官)이 몰래 사람을 술집에 보내어 술을 사서 마시게 하고 그 술빚은 것을 적발하여 죄를 주게 하였는데, 임금이 듣고 말하기를,
"이는 형(刑)에 걸리도록 유도한 것이다."
하고, 형조 낭관을 파직시켰다.
1월 10일 무인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대사간 임위(任瑋)가 상달(上達)하기를,
"변방은 약조(約條)가 매우 엄한데,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사조(李師祚)는 능히 그것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교시 청차(交市淸差)011) 로 하여금 전에 없던 일을 만들어 행하게 하였습니다. 청컨대 대조(大朝)께 품(稟)하여 국경에서 효시(梟示)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듣고서 임위가 대관(臺官)의 체모를 얻었음을 가상히 여기고 이사조를 충군(充軍)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북병사(北兵使) 이태상(李泰祥)은 단지 이사조를 파직시킬 것만을 청하였으므로 나약하고 위엄이 없다 하여 파직시켰다. 대개 청차(淸差)가 우리 나라의 군용(軍容)을 보려고 하자, 이사조가 친기위(親騎衛)를 출동시켜 청차로 하여금 시사(試射)하여 시상(施賞)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1월 12일 경진
전라도 유생(儒生) 김여(金礪) 등이 상서하여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13일 신사
이규휘(李奎徽)·정언충(鄭彦忠)을 장령으로, 오봉원(吳奉源)·남운로(南雲老)를 지평으로, 이석상(李錫祥)을 헌납으로, 김면행(金勉行)을 정언으로, 이중경(李重庚)을 공조 판서로, 홍상한(洪象漢)을 지경연으로, 유언국(兪彦國)·임위(任瑋)를 승지로 삼았고, 교리 이세택(李世澤)·수찬 이최중(李最中)은 잉임(仍任)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철보(李喆輔)를 판의금으로 삼고, 최상정(崔尙鼎)을 좌윤으로 삼았는데, 〈최상정은〉 고(故) 상신(相臣) 최규서(崔奎瑞)의 아들이었다.
금년 봄의 수군·육군의 조련(操鍊)을 정지토록 명하였으니, 흉년인 때문이었다.
팔도(八道)·삼도(三都)에 하유(下諭)하여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임금이 약방(藥房)에 입진(入診)을 명하였다. 하유하기를,
"궁원(宮園)을 조천(祧遷)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김재로(金在魯)는 ‘마땅히 사왕(嗣王)을 따라야 한다.’고 하고, 나는 ‘선왕(先王)을 따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말하지 않는 가운데에 저절로 황형(皇兄)에게 우러러 보답할 바가 있었던 것인데, 그 당시 여러 신하들은 내 뜻의 소재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다만 ‘부조(不祧)’라는 두 글자로 말할 것이니, 이는 곧 황형에게 보답하는 바이다. 여러 신하들은 모름지기 상세히 듣고 승지와 사관(史官)은 일기(日記)에 상세히 실어서 훗날 전례(典禮)를 고거(考據)하는 자료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인질로 있을 때의 일기를 읽게 하고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망할까 망할까 하여 무더기로 산 뽕나무에 매듯 한다.012) [其亡其亡 繫于苞桑]’고 하였다. 금년은 병자년이니 군신(君臣)은 마땅히 이 일기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하고, 강개한 감회를 나타낸 글과 원량(元良)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춘방관(春坊官)에게 하유하기를,
"모름지기 일기와 나의 글을 동궁에게 보이라."
하였다. 임금이 이로부터 서정(庶政)에 더욱 더 힘쓰고 경사(經史)를 자주 강(講)하였으며, 매번 동궁의 차대(次對) 뒤에 입대(入對)했던 여러 신하들을 소견하고 어떠한 정령(政令)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1월 14일 임오
김상중(金尙重)을 대사간으로, 심발(沈墢)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상신(相臣)·장신(將臣)을 소견하고 삼황(三皇) 기신(忌辰)의 망배(望拜) 때 내릴 윤음(綸音)을 쓰라고 명하였다. 삼황은 곧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신종(神宗)·의종(毅宗)이다. 이로부터 무릇 기신(忌辰)인 날 새벽에는 임금이 반드시 재결(齋潔)하고, 황조인(皇朝人)의 유예(遺裔) 및 병자난 때 절개를 세운 여러 신하의 자손을 이끌고 정전(正殿)의 섬돌 위에서 망배하는 것을 해마다 상례로 삼았다.
동궁에게 탑전(榻前)에 입시(入侍)하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원량을 경계한 글을 너는 보았는가 못보았는가? 이것을 보고 울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다. 너의 춘첩시(春帖詩)에 ‘경화(慶華)는 편안함으로 말미암아 시작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경사(慶事)와 영화(榮華)는 모두 편안함에서 말미암는다는 말인가?"
하니, 동궁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통명전(通明殿)을 보았느냐? 옛날에는 ‘안일하지 말 것[所其無逸]’으로 게판(揭板)하였는데, 너는 지금 ‘안(安)’ 자로써 춘첩에 썼으니, 내 이를 보고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두려워하였다."
하니, 동궁이 일어나 엎드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을 하자마자 즉시 일어나 엎드리니, 이는 통달(通達)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병자년013) 호란 때의 일에 언급(言及)하여 감개함을 금치 못하고, 여러 장신(將臣)에게 면려(勉勵)할 것을 신칙하였다. 금위 대장(禁衛大將) 구선행(具善行)이 말하기를,
"근래 무인(武人)이 병서(兵書)를 읽지 않고 사장(射場)에 나아가지 않으며, 다만 재상(宰相)의 문(門)에서 벼슬을 구하는 데 분주할 뿐이니, 쓸 만한 인재가 없습니다."
하고,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문관 역시 그러합니다. 근래 요행의 문이 크게 열려 글을 알지 못하는 자도 모두 등과(登科)하여 청현직(淸顯職)에 오르니, 세도(世道)가 어찌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일 감개(感慨)하여 여러 신하들을 불렀는데, 독서하지 않고 활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웃 나라에 알려지게 할 수 없다. 여러 신하들이 궐문을 곧 나가기만 하면, 어찌 국사에 생각이 미치는 자가 있겠는가?"
하였다.
제도(諸道)에서 군작미(軍作米)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과 수령이 요판(料販)하는 폐단을 금하도록 하였다.
1월 15일 계미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호서(湖西)와 기내(畿內)에 도적이 절발(竊發)하여 길이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청컨대 경외(京外)에 신칙하여 별도로 기포(譏捕)를 더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수찬 이최중(李最中)이 말하기를,
"저하께서는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것에 대하여 하나도 옳다 그르다 함이 없이 모두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십니다. 이제 도적이 절발함에 대하여 들으시고도 어디에서 발생했는지를 묻지 않으시며 깜짝 놀라는 뜻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깊이 유념하는 실상이라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간원(諫院) 【대사간 김상중(金尙重)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청컨대 서연관(書筵官)을 불러 강연(講筵)에서 번갈아 모시게 함으로써 예학(睿學)에 보탬이 되게 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 간(諫)하는 자를 받아들이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고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16일 갑신
유신(儒臣)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경화(京華)의 자제들이 책을 읽지 않고 벼슬을 조경(躁競)하는 습관을 통렬히 말하고 이어서 묘당과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무릇 사람을 씀에는 문벌을 보지 말고 오직 독서에 능한 자와 활쏘는 데 능한 자를 쓰도록 할 것이며, 만약 잘못 천거하면 비록 대신(大臣)이라도 중법(重法)을 시행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또 수령을 택하는 법을 논하였는데, 수찬 이최중(李最中)이 ‘세력 있는 자는 피폐한 고을에 차견(差遣)하고, 세력이 없는 자는 좋은 고을로 차견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 말을 가상히 여기고 초모(貂帽)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그 말을 베껴서 비국과 전조에 붙여 두고 이에 비추어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사족(士族)의 부녀자들의 가체(加髢)를 금하고 속칭 족두리(簇頭里)로 대신하도록 하였다. 가체의 제도는 고려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곧 몽고의 제도이다. 이때 사대부가의 사치가 날로 성하여, 부인이 한번 가체를 하는 데 몇백 금(金)을 썼다. 그리고 갈수록 서로 자랑하여 높고 큰 것을 숭상하기에 힘썼으므로, 임금이 금지시킨 것이다.
1월 17일 을유
유신을 불러 《자성편》을 강하였다. 굶주림과 추위를 하소연하는 유개(流丐)를 선혜청(宣惠廳)에 맡겨 죽을 먹이고 거적을 나눠 주라고 명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유한사(兪漢師) 등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고, 고(故)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頣命)·조태채(趙泰采)·이건명(李健命)을 정려(旌閭)하여 충절(忠節)을 권장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세자가 따르지 않았다. 이에 앞서 성균관과 사학에서 종사(從祀)에 대한 의논을 발론하자 소론가(少論家)의 자제들이 곧 피해 떠나고, 사대신(四大臣)에 대해 공척(攻斥)하는 자들이 거의 나라의 반이나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지자 전날 피해 달아났던 자들이 다투어 들어와 서록(書錄)하였으니, 임금이 그 글을 보고서 장려하고 타일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의〉 소아(小雅)를 강하고 이어 《송사(宋史)》를 논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종(高宗)의 도리로서 말하자면, 흠종(欽宗)이 만약 돌아왔다면 마땅히 양위(讓位)해야 했을 것이고, 흠종이 듣지 않는다면 또 마땅히 울며 청해야 했을 것이며, 흠종이 만약 스스로 태상황(太上皇)이 되었다면 매사를 반드시 품(稟)한 연후에야 자제의 도리를 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뭇신하들이 진실로 앙청(仰請)하기 어려웠더라도 고종으로서는 이것이 당연한 도리였다. 나는 항상 고종을 바르지 못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흠종을 영접한 이후에 ‘나를 어디에 둘 것인가?’라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간원(諫院) 【사간 박창윤(朴昌潤)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지난번 종성(鍾城)의 일은 너무나도 해괴하고 분통합니다. 수신(帥臣)의 도리는 마땅히 부사(府使)를 잡아다 곤장으로 다스리고 통사(通事) 및 병비(兵裨)를 효시(梟示)하여 저들을 움츠려들게 했어야만 했거늘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크게 변방을 진압하고 변율(邊律)을 엄하게 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청컨대 북병사 이태상(李泰祥)을 잡아다 신문하여 엄하게 처분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19일 정해
관학 유생 황채(黃采) 등이 상서하여 두 선정(先正)의 종사(從祀)와 사대신(四大臣)의 정려(旌閭)를 거듭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20일 무자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사조(李師祚)의 일은 정달(停達)하였다.
호랑이가 전생서(典牲署)의 희생장(犧牲場)에 들어왔다.
1월 21일 기축
임금이 명정문에 임하여 백관의 조참(朝參)을 받고, 하유하기를,
"진실로 백성을 구제할 계책이 있으면 비록 서관(庶官)이라도 모두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청하기를,
"경외(京外) 백성의 구포(舊浦)를 견감(蠲減)하소서."
하고, 사직(司直) 이명곤(李命坤)이 말하기를,
"대리(代理) 이후로 소장(疏章)을 대조(大朝)에 들이지 아니하니, 전하께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어디로부터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며, 오위 장(五衛將) 민원(閔源)은 말하기를,
"마땅히 수령(守令)들에게 신칙하여 별조(別糶)를 금지하고 첨정(簽丁)을 정밀(精密)하게 하소서."
하고, 훈련원 주부 신대형(申大亨)은 말하기를,
"흉년이라 백성들이 굶주리니, 바라건대, 금년의 전세(田稅)를 감하여 주소서."
하였으며, 직강(直講) 김운(金運)은 말하기를,
"불급(不急)한 벼슬은 덜어내고, 작은 고을을 합하고 큰 고을을 나누며, 민전(民田)에 한하여 적모(糴耗)를 없애고, 설과(設科)를 드물게 하며, 술사(術士)를 금하소서."
하고, 예조 좌랑 김의채(金義采)는 말하기를,
"마땅히 8가(家)로서 작통(作統)하여 경작을 서로 돕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김운·김의채에게 상현궁(上弦弓)을 하사하였다.
8년을 한정하여 백성의 구포(舊逋)를 제거하고, 금년을 한정하여 아홉 가지 영선(營繕)을 파(罷)하라고 명하였다.
진사(進士) 이인빈(李寅彬)이 상서(上書)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종향(從享)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암행 어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경기·강원·경상·충청 등의 도(道)를 염찰(廉察)하도록 하였다.
1월 23일 신묘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세자를 부르고,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강목(綱目)》을 진강(進講)하고 문의(文義)를 토론케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형조 판서 정형복(鄭亨復) 등을 불러 살옥(殺獄)의 추안(推案)을 보고 결안(結案)에서 사면(赦免)하기로 한 자 몇 사람을 차율(次律)로 시행케 하였다.
유최기(兪最基)를 대사간으로, 유언술(兪彦述)을 집의(執義)로, 송덕중(宋德中)을 사간으로, 정술조(鄭述祚)를 지평으로, 송문재(宋文載)·김상도(金相度)를 정언으로, 이인원(李仁源)을 교리로, 유정원(柳正源)을 부교리로, 서명천(徐命天)을 부수찬으로, 조숙(趙)을 수찬으로, 이성중(李成中)을 판윤으로, 신경(申暻)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김상로가 신경의 학행(學行)을 누차 천거하고 또 신경이 곧 고 상신(相臣) 박세채(朴世采)의 외손임을 말하자, 임금이 박세채가 곧 당론(黨論)을 조제(調劑)한 주인(主人)임을 생각하여 신경에게 이 직을 제수한 것이다.
아비를 죽인 죄인인 김이도리(金伊道里)가 복주(伏誅)되었다.
1월 25일 계사
홍양한(洪良漢)을 수찬으로, 홍봉한(洪鳳漢)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사직(司直) 남유용(南有容)이 상서하기를,
"원손(元孫)을 보양(輔養)하는 도리상 청컨대 보양관(輔養官) 2인을 더 차임(差任)하고, 또 유선관(諭善官)을 두소서."
하니, 왕세자가 유의(留意)하겠다고 답하였다.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1월 26일 갑오
청나라 사람이 표해인(漂海人) 40명을 돌려보내니, 자문(咨文)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생원(生員) 채항하(蔡恒夏)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송준길의 종향(從享)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27일 을미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의 소아(小雅)를 강(講)하고, 정료장(庭燎章)을 그려서 족자를 만들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이어 홍안장(鴻雁章)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팔도(八道)·삼도(三都)에 진정(賑政)을 신칙하라."
하였다.
1월 28일 병신
청나라 복건성(福建省) 상인(商人) 24명이 영광(靈光) 등지에 표박(漂泊)하니, 자문(咨文)을 보내고 돌려보냈다.
1월 29일 정유
왕세자가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고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갔는데,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보여(步輿)에 탈 것을 청하니, 대답하기를,
"숙경(肅敬)해야 하는 곳이거늘 어찌 보여를 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를 불러 하유하기를,
"근래 너희들이 올린 글을 보니 피차(彼此)가 한 가지로 돌아갔으므로, 내가 가상히 여기고 있다. 다만 사대신(四大臣)의 정려(旌閭)는 지나치며, 또 유생들이 청할 바가 아니다. 두 선정(先正)을 종향하자는 청은 내가 금하지 않는다."
하고, 이어서 《시전(詩傳)》 한 질(帙)을 태학에 하사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심양일기(瀋陽日記)》를 읽게 하고,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심양에 인질로 있을 때 배종(陪從)했던 여러 신하들의 후손(後孫)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1월 30일 무술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으로 일찍이 아경(亞卿)의 실직(實職)을 거친 사람 이외는 시호를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문관으로 시종(侍從)을 거치지 않은 자와 음관으로 판결사(判決事)·동지(同知)를 거치지 않은 자 및 무관으로 곤수(閫帥)를 거치지 않은 자는 조제(弔祭)·치부(致賻)를 허락하지 말도록 하였다.
김한철(金漢喆)을 대사성으로, 이정보(李鼎輔)를 판의금으로 삼았다.
임금이 중관(中官)을 부리는 데 자못 준엄하여 조금만 잘못을 저질러도 곧 죄를 주고 용서하지 않았다.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일체가 되므로 환시(宦侍)로서 죄가 있는 자는 반드시 왕부(王府)·추조(秋曹)로 하여금 감률(勘律)하도록 하게 하였으니, 무릇 부자·형제를 서로 얽어 이간하는 자들이 이 무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즉위한 지 30년에 참언(讒言)에 동요되지 않았음을 질언(質言)할 수 있다. 어제 협시 내관(挾侍內官)의 제복(祭服)을 보았더니 패옥(佩玉)을 차고 있었다. 이들 무리가 어찌 감히 조신(朝臣)들과 같을 수 있겠는가? 내가 패옥을 제거하라고 명하였으니, 또한 싹트는 조짐을 미리 막으려 한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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