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해
밤에 유성(流星)이 심성(心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새벽에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서계(誓戒)를 받았으니, 장차 친히 사직(社稷)에 제사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문정공 송시열과 문정공 송준길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라고 명하였다. 성균 생원(成均生員) 안종철(安宗喆) 등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東方)은 멀리 은사(殷師)014) 때부터 이륜(彛倫)이 비로소 퍼졌으나, 삼한(三韓)·삼국(三國)은 모두 이속(夷俗)을 면치 못했으며, 승국(勝國)015) 에 이르러서는 아침에는 금(金)나라를 저녁에는 원(元)나라를 섬기며 오직 강약(强弱)을 살펴 향배(向背)를 결정했습니다. 오직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에 이르러서는 전조(前朝)의 신 정몽주(鄭夢周) 등과 더불어 존주(尊周)의 의(義)를 맨 먼저 세웠고,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어지러움을 안정(安定)시켰으며, 왕업(王業)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 열성(列聖)께서 태조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고, 목릉(穆陵)016) 에 이르러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마침내 재조(再造)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 인묘(仁廟)의 마음은 곧 목릉의 마음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천지가 무너지고 갈라지는 변란을 만나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이를 계술(繼述)하여 대의(大義)를 밝힐 것을 임무로 삼아 겸손한 말로 어진 이를 불러들여 연(燕)나라 소왕(昭王)의 사업을 기약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학문에 깊은 큰 유자(儒者)로서 연빙(延聘)의 예(禮)에 응해 나온 사람이 바로 우리 두 선정(先正)이 아니겠습니까? 성조(聖祖)의 명철(明哲)하심으로서 반드시 두 선정을 허례(虛禮)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 세대를 추앙하여 논하였으니, 두 신하의 어짊이 일대(一代) 제유(諸儒)들의 미칠 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큰 꾀를 세우고 명(命)을 정하여 나라 안을 다스리고 외이(外夷)를 물리치려고 한 것은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법문을 준수하여 털끝만치라도 잡백(雜伯)·가인(假仁)하거나 구차(苟且)·고식(姑息)함이 없었으나, 그 대업(大業)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늘이 실로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다만 그 강명(講明)하고 병집(秉執)한 것은 아홉 번을 죽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일찍이 태조께서 존주(尊周)한 공을 미루어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여 만세의 기강을 바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임하여 내렸던 여덟 자(字)의 훈계에 이르러서는 오직 ‘의(義)’ 한 글자를 생사(生死)의 가계(家計)로 삼았음을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천지에 세워도 어긋남이 없고,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으며,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선정(先正)의 평소 학문이자 평소 뜻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우리 열조(烈祖)께서 종주(從周)했던 가전(家傳)·심법(心法)은 두 선정에 힘입어 천명되었던 것입니다. 근래 세강 속말(世降俗末)한 데에 이르러서도 사람들이 오히려 명의(名義)를 범할 수 없고 난역(亂逆)을 반드시 토벌해야 할 것을 알아, 옛날에 갑을(甲乙)을 논하던 자들이 선정의 도를 받들어야 함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어 한 사람도 이의(異議)가 없으니, 공렬(功烈)의 큼과 수립(樹立)의 탁월함이 실로 동유(東儒)의 집대성(集大成)이라고 하겠습니다. 왕자(王者)가 일어나 안팎의 믿을 만한 사적을 채방(採訪)한다면 공자·주자의 《춘추(春秋)》의 통서(統緖)를 두 선정에게 돌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신하의 도는 다만 동방의 종사(宗師)가 될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천하 만세의 종앙(宗仰)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성묘(聖廟)에 제향(躋享)하는 전례(典禮)에 의심을 둘 수 있겠습니까? 아! 그 땅으로 말하자면 하늘 동쪽의 한 모서리이고, 그 크기로 말하자면 중국의 일개 주현(州縣)이 되지 못하나, 이에 묘연(眇然)한 한낱 몸으로 만세의 강상(綱常)을 임무로 삼았으니, 이는 실로 동방의 큰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선정의 도를 표장(表章)함은 곧 이른바 열조(烈祖)의 뜻을 환히 밝히는 것이니, 이는 신 등이 한 번·두 번 글을 올리고 다섯 번·여섯 번 올리고서도 그만둘 줄을 모르는 바입니다. 아! 천운(天運)은 순환하여 구갑(舊甲)이 거듭 돌아오니, 오직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때에 촉감(觸感)되어 감회(感懷)가 일어나 무릇 사절(死節)한 신하에게 사제(賜祭)하여 추도(追悼)하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독 두 신하를 종사(從祀)하는 일만은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소대(昭代)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대조(大朝)께 품(稟)하여 즉시 시행토록 해 주시어 사문(斯文)을 빛내소서."
하였다. 이날 임금이 대신(大臣)·예관(禮官)·태학 장의(太學掌議)를 소견하고 하유하기를,
"전날 종향의 허락을 아낀 것은 대개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고, 공론이 아니면 할 수 없으며, 기회가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소(疏)를 올린 유생을 불러 보고서 비로서 대동(大同)의 논(論)임을 알았는데, 이것이 그때이고 이것이 공론이며 이것이 기회이니, 내가 특별히 그 청을 윤허한다."
하였다. 이에 국시(國是)가 비로소 크게 정해졌고 사림(士林)이 더욱더 빛나게 되었다.
예조 판서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문묘(文廟)의 종향은 이미 날을 잡았으나 팔도의 지방은 멀고 가까움이 같지 않아 들어가야 할 모든 기구를 창졸간에 마련하기 어려우니, 외읍(外邑)의 향교는 특별히 가을 석채(釋菜)017) 를 기다려 고유(告諭)하고 봉안(奉安)하도록 허락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도승지를 보내어 기자전(箕子殿)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제 막 ‘건극(建極)’이라는 존호(尊號)를 받고 감격하여 제사한 것이다.
고 상신(相臣) 박세채(朴世采)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으니, 박세채가 숙묘(肅廟)갑술년018) 에 건극소(建極疏)를 올렸었기 때문이다. 원경하(元景夏)가 아뢰어 그 소를 취해 보고는 탄복하여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임경업(林慶業)을 증직(贈職)하고 봉사손을 우직(右職)019) 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임장군전(林將軍傳)》을 들여오라고 명하고 연신(筵臣)을 불러 읽게 하고는 감개하여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원경하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육상궁(毓祥宮) 축문(祝文)에 다만 ‘국왕 소고(國王昭告)’라고 칭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근래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보니, ‘선후(先后)’라고 칭한 것이 있었고, 고(故) 판서 이정귀(李廷龜)의 《남궁록(南宮錄)》에는 ‘선비(先妣)’라고 칭한 것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의거할 만합니다. 이미 ‘선비’라고 칭했으면 축문에는 마땅히 ‘자 감소고(子敢昭告)’라고 칭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주 오랜 옛날에는 왕비(王妣)의 축문에도 또한 다만 ‘국왕’이라고 칭했으니, 구습을 따르는 것이 옳다."
하니,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생각한 바가 있어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충원 현감(忠原縣監) 원경렴(元景濂) 등을 잡아들이라 명했는데, 별조(別糶)에 저촉되었기 때문이었다. 별조란 통호(統戶)로 백성에게 지급하지 않고 별도로 첩소(牒訴)에 대해 지급을 허락한 것을 일컫는 것인데, 임금이 흉년에 조미(糶米)가 적다 하여 금했던 것이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정하언(鄭夏彦)은 3곡(斛)에 저촉되어 파직되고 잡혔는데, 이에 이르러 어사(御史) 원인손(元仁孫)이 ‘충원에서 범한 것이 백 곡이 된다.’고 아뢰었던 것이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별조를 금하는 것은 《속전(續典)》에는 실리지 않았으니, 청컨대 금년부터 입법(立法)하소서."
하니, 임금이 잡아다 신문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정하언이 범한 것은 적으나 이미 죄를 입었는데, 원경렴은 범한 것이 많음에도 도리어 잡아다 신문하지 말라고 하시니, 마땅히 이동(異同)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만 잡아다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2월 4일 임인
이언형(李彦衡)을 정언으로, 홍경해(洪景海)를 부교리로, 남유용(南有容)을 예문 제학으로, 권혁(權爀)을 우부빈객으로, 조돈(趙暾)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의 대아(大雅)를 강하였다.
별조(別糶)로 잡아다 신문하지 말라고 했던 명을 정침(停寢)하였다. 임금이 여주와 충원의 처분이 서로 뒤섞인 것을 뉘우치고 마침내 원경렴을 파직하였다.
2월 5일 계묘
왕세자가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청하기를,
"영남 도신(嶺南道臣)에게 엄하게 신칙하여 포항(浦項)의 곡식을 꾸려보내어 북민(北民)을 구제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대개 조가(朝家)에서 북도(北道)의 흉년이 가장 심하다 하여 포항의 곡식을 획급(劃給)하고 배로 운반해 구휼하게 하였는데, 영남 도신이 환침(還寢)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함경 감사 서지수(徐志修)가 치달(馳達)하여 기민(饑民)의 황급함을 갖추어 아뢰고 포항의 곡식을 얻기를 더욱 간절히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의〉 대아(大雅)를 읽도록 하였다. 충청 감사 조돈을 소견(召見)하여 기세(饑歲)에 백성을 무마(撫摩)하는 도리로써 면유(勉諭)하였다.
임금이 문정공 송시열·문정공 송준길을 부조(不祧)하는 것으로 정하라고 명하였는데, 대개 예조 판서 홍봉한이 우리 나라에서 종사(從祀)한 제현(諸賢)은 모두 부조하였으니 이번에도 또한 이 전례에 비추어 행할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2월 6일 갑진
임금이 육상궁(毓祥宮) 축문(祝文)에 ‘자 국왕 모 감소고(子國王某敢昭告)’라고 쓰고, 이후로 ‘손(孫)’이라 칭할 때에도 이 예에 따라서 행하며, 저경궁(儲慶宮) 축문에는 ‘증손(曾孫)’이라 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외조(外祖) 한유량(韓有良)에게 찬성(贊成)을 추증하여 치제(致祭)하고 그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2월 7일 을사
임금이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를 불러 경기 어사(京畿御史) 정상순(鄭尙淳)의 서계(書啓) 중에서 금도(禁屠)·결역(結役)·대동 상납(大同上納)·수어 아병(守禦牙兵) 등 4건(件)의 일에 대해 묻고, 그 가운데 폐단이 심한 것을 이개(釐改)하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을 불러 〈《시경》의〉 대아(大雅)를 강하였다.
2월 8일 병오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을 배알하고 지나는 길에 저경궁(儲慶宮)에 거둥하였다.
2월 9일 정미
임금이 사직(社稷)에 나아가 시루(市樓)의 춘첩(春帖)을 보았는데, ‘관(官)이 맑으면 백성은 절로 편안하다.[官淸民自安]’는 구절이 있으니, 탄식하며 말하기를,
"지금의 요도(要道)라고 할 만하다."
하고, 이 뜻을 수령에게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밤에 사단(社壇)에 제사를 지냈으니, 기곡제(祈穀祭)였다. 이때 봄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제사하려 할 즈음에 문득 병이 나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축해 막차(幕次)에 들어가 삼탕(蔘湯)을 드니 약간 나았다. 여러 신하들이 당황해 하며 섭행(攝行)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연 3일간 목욕했는데, 조금 전에 정신이 갑자기 혼미(昏迷)했었던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지금 기곡제를 지내어 만약 풍년이 든다면 비록 몸으로써 백성들을 대신한다 하더라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
하고, 다시 단(壇)으로 나아가 예를 마치고 막차로 돌아왔다. 동조(東朝)께서 놀라 걱정할까 염려하여 경덕궁(慶德宮)으로 나아가 조섭(調攝)하였다.
2월 10일 무신
환궁(還宮)하였다.
2월 12일 경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정언 김상도(金相度)가 상서(上書)하여 시폐(時弊)를 논했는데, 3개 조목으로 되어 있었다. 첫째는 ‘명절(名節)에 힘쓸 것’이고, 둘째는 ‘청렴과 검소를 장려할 것’이며, 셋째는 ‘재황(災荒)을 구휼할 것’이었다. ‘명절에 힘쓸 것’에서는 대략 이르기를,
"근래 사기(士氣)가 소망(消亡)하고 풍속이 비루(鄙陋)하여 조정에서는 올바르고 자중(自重)하는 기풍(氣風)이 없으며, 세상에는 머뭇거리며 구차하게 투합하는 태도가 많습니다. 분주하게 명리(名利)를 좇아 염치가 모두 없어졌고, 권요(權要)에 아첨해 붙어 검방(檢防)이 쓴 듯 없어져, 위에서는 궐실(闕失)을 광정(匡正)하는 것을 볼 수 없고 아래서는 관사(官師)가 상규(相規)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조정의 기상이 날로 무너지고 나라의 형세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러한 쇠망(衰亡)의 형상이 있단 말입니까? 이는 진실로 뭇 신하의 죄로 돌릴 것이나, 또한 온 세상 사람을 모두 다 속이기는 어려우니, 어찌 국가에서 도솔(導率)하고 부식(扶植)하는 방법에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청렴과 검소를 장려할 것’에서는 대략 이르기를,
"지금 지나친 사치가 풍속을 이루었고 탐독(貪黷)이 조정에 가득합니다. 경재(卿宰)가 되자말자 옛날의 오막살이가 구름에 닿을 듯한 거창한 집이 되고, 한번 수령을 지내면 옛날에는 명아주와 콩잎을 먹다가 진수 성찬(珍羞盛饌)이 상에 쌓이며, 의복은 제한이 없고 안마(鞍馬)는 법도를 넘고 있습니다. 현임 재상 한 사람에게 드는 것이 거의 중인(中人) 열 가구의 재산을 넘으니, 이런 허다한 재물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근원을 추구(追究)한다면 또한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재물은 팔도 백성들의 재산에서 나온 것이니, 번곤(藩閫)·수령들이 이를 착취하여 요로(要路)·권문(權門)에 폭주(輻輳)한 것입니다. 조정 권귀(權貴)의 경우 뇌물을 받음에 있어 값을 받고 청촉(請囑)하여 외임(外任)에 차견(差遣)하면 위로는 섬기기를 잘하고 아래로는 사복(私腹)을 채우니, 안팎이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있어 피차간에 나누어 누리는 이익이 있습니다. 한정이 있는 재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채우자니, 어찌 백성이 곤궁하고 피폐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제(齊)나라 왕이 뭇 신하들의 탐욕과 청렴을 살피고 한 사람을 팽형(烹刑)에 처하고 한 사람은 등용했더니 그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오늘날에도 또한 이 법을 써야 한다고 여깁니다.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가장 불법(不法)한 것을 엄히 신칙하고 명백하게 금지시켜 옛것을 고쳐 새로운 데로 나아가도록 하고, 탐탁(貪濁)이 더욱 무상(無狀)한 자는 준엄한 법으로 무겁게 다스려 한 가지를 벌하여 백 가지를 계칙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청렴한 관리를 발탁하는 법에 이르러서는 안으로 1백 관원을 비록 능히 다 잘 가릴 수는 없더라도 대관 요직(大官要職)은 반드시 그 사람을 신중히 선택해야 할 것이며, 외방의 여러 수령들을 비록 두루 잘 가려 뽑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방백(方伯)·곤수(閫帥)는 반드시 그 적절한 사람을 얻어야 하니, 고적(考績)하는 방도를 거듭 밝히고 출척(黜陟)의 법을 크게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며, ‘재황(災荒)을 구휼할 것’에서는 대략 이르기를,
"작년 가을의 큰 흉년은 실로 팔도에 똑같은 재앙이었습니다. 굶주리고 추위가 이미 심한데다 여역(癘疫)까지 겸해 극성을 부렸으니, 사망(死亡)의 혹독함이 온 가족에 이르렀고 유개(流丐)의 참혹함은 자식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도성에 파리한 백성과 굶어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었으니, 온 나라의 백성이 어떠한지는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인호(人戶)는 이산(離散)하여 마을은 쓸쓸하고 강도의 겁탈이 횡행하여 장사꾼과 나그네는 〈길이〉 막혔습니다. 상황의 근심스러움과 아픔이 거의 병화(兵火)의 정상과 같았으니, 말하자면 기가 막히고 먹어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우리 대조 전하께서 지난날 정월(正月)에 문에 임하여 조하(朝賀)를 받으시고 새로 덕음(德音)을 내리시기를, ‘진실로 제민(濟民)할 방책이 있으면 관직이 낮은 것에 구애하지 말고 모두 상문(上聞)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들은 아직까지도 한마디 말이 없고, 진정(賑政)에 대해 아직까지도 좋은 방책이 없으니, 어찌 또한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인재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에서 말미암아 그런 것이겠습니까? 무릇 상을 주고 하사하는 은전과 영선(營繕)·흥조(興造)하는 일 중에 만약 혹 그만둘 것이 있다면 일체 파(罷)하시고, 군국(軍國)의 경비를 제외하고는 비록 한 포대의 쌀과 한 조각의 베라도 모두 기민을 진휼하는 용도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상평(常平)·진휼(賑恤) 양청(兩廳)의 곡식은 마땅히 헤아려 획급(劃給)하여 먼저 거의 다 죽게 된 기민을 살리고 다음으로 농량(農粮)이 없는 빈호(貧戶)에 지급하여 눈앞의 위급함을 구제하고 내년의 근심을 방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진달한 바가 지극히 간절하니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정언 이언형(李彦衡)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한철(金漢喆)은 평소 성망(聲望)이 모자라는 사람인데 외람되게 사유(師儒)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이미 남우(濫竽)020) 의 기롱이 많습니다. 더욱이 그의 평생은 다만 용렬하고 비루한데 이[虱]처럼 붙고 파리처럼 분주히 다녀 외람되게 재열(宰列)을 차지하였으며, 지난번 북관(北關)에 부임(赴任)했을 때에는 추문(醜聞)과 비방을 크게 초래하였습니다. 청컨대 대사성 김한철을 개정(改正)하소서. 지난번 새해 아침의 경례(慶禮) 때에 승지(承旨)의 방단(房單)을 입계(入啓)하였는데, 이방(吏房)·예방(禮房) 양방은 아래서부터 곧바로 써넣어 도승지가 상(賞)을 받음에 있어 이방의 여부(與否)에 관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방에 이르러서는 감히 은전(恩典)을 바란 나머지 오히려 혹시라도 바뀔까 두려워하여 뜻을 써서 주선하여 차례를 뒤집어 방(房)에 메꾸게 하였으니, 그 자취가 방자한 데 관계됩니다. 일이 지극히 잘못되고 망령되었으니, 그때 예방 승지인 이득종(李得宗)에게 빨리 사판(仕版)에서 간삭하는 율을 시행하여 두려움을 알게 하소서. 이번에 노직(老職)으로 승자(陞資)된 사람을 차례차례 서추(西樞)에 의차(擬差)한 것은 실로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성대한 은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구애될 만한 하자가 있는 자와 지벌이 심히 낮은 자를 만약 구별하지 않고 같은 예로 아울러 지사(知事)·동첨(同僉)의 과(窠)에 제수한다면, 어찌 혼잡함이 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따로 서전(西銓)에 신칙하여 주의(注擬)할 즈음에 약간 재택(裁擇)을 더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왕세자가 김한철의 일은 지나치니, 메꾸어 넣은 승지는 파직하라고 답하였다. 이때 이득종이 비록 예방으로서 승자(陞資)하여 방단(房單)을 메꾸어 넣기는 했지만 이득종 스스로 한 것이 아니었는데, 외언(外言)이 사실과 어긋남을 면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것 때문에 3일간 감선(減膳)하였다.
임금이 충청 감사 조돈(趙暾)·강원도 어사 이최중(李最中)을 소견(召見)하였다. 수령을 칙려(飭勵)하여 나의 백성을 보호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조돈을 면칙(勉飭)하고, 이최중에게 명하여 서계(書啓)를 읽도록 하였다. 읽다가 회양(淮陽)의 일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임순(任珣)을 순실(純實)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지금 곧 이와 같으니, 사람이란 참으로 쉽게 알 수 없는 것이다. 황장목(黃腸木)의 일은 문서에 현착(現捉)된 경우가 있는가?"
하니, 이최중이 말하기를,
"차례차례 수송하였기 때문에 문서에는 있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적(糶糴)021) 에 있어서 부정(釜鼎)을 가지고 섬[石]을 만든 것을 어사는 과연 직접 보았는가?"
하니, 이최중이 말하기를,
"신이 과연 가져오게 하여 눈으로 보았는데, 혹은 부(釜)로 혹은 정(鼎)으로 빈 섬에 가득 채워 넣었으니, 보기에 해괴하고 이상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결전(災結錢)을 돈으로 바꾸어 관청에 이송했다 하니, 지극히 수상하다."
하니, 이최중이 말하기를,
"재결전(災結錢)을 원결(元結)에서 통틀어 징수하여 옮겨오고 옮겨감에 끝내 귀속처가 없습니다. 또 봉납(捧納)한 환곡에 빈껍질이 많아 1섬에 남는 것은 1두(斗) 3승(升)에 불과했으니, 백성들이 장차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읽는 것이 김성(金城)의 일에 이르러, 이최중이 말하기를,
"김성의 전 수령 정박(鄭樸)은 환곡(還穀)에 허록(虛錄)이 있었기 때문에 후관(後官)으로 징수하는 자는 피잡곡(皮雜穀)이나 빈껍질을 물론하고 숫자 채우는 것을 위주로 하여 유폐(流弊)가 지금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현령 이규명(李奎明)에 대한 백성의 원망이 또한 회양(淮陽)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前) 현령 신경(申暻)의 다스림은 어떠한가?"
하니, 이최중이 말하기를,
"치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였다. 읽는 것이 영평(永平)의 일에 이르러, 이최중이 말하기를,
"현령 김준(金焌)은 날마다 《주역(周易)》 외우기를 즐기는 나머지 밥을 잊을 지경이라 진정(賑政)에 대해서는 과연 뜻을 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기근이 든 해를 당하여 수령이 된 자는 마땅히 백성의 일에 급급해야 하거늘 어느 겨를에 무릎을 끼고서 책을 읽는다는 말인가?"
하였다. 이어서 회양의 전(前) 부사 임순을 잡아다 신문해 구초(口招)한 뒤 등대(登對)해 품처(稟處)하고, 김성 현령 이규명은 먼저 파직한 뒤 잡아들여 종중 감처(從重勘處)하고, 영평 현령 김준은 먼저 파직한 뒤에 잡아들이고, 김성의 전 현령 정박은 잡아다 신문하여 구초하고, 정박의 후임자와 이규명의 전임자 중에 빈껍질로 조적한 수령을 아울러 잡아다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어사 이최중을 회양·김성의 사정 어사(査正御史)로 특별히 차임하여 즉일로 사조(辭朝)하고, 영평으로 달려가 빨리 진정(賑政)을 베풀고 나서 새 현령이 도임하기를 기다려 교부(交付)한 뒤, 회양·김성으로 가서 적정(糴政)을 상세히 조사하고 진곡(賑穀)을 지휘하도록 명하였다. 또 3일 동안 감선(減膳)을 명하였으니, 대개 이최중의 서계에 ‘굶주린 백성들이 아들을 버려 돌[石]로 눌러 놓았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성중(李成中)·김치인(金致仁)에게 해서(海西)의 내노(內奴) 복호(復戶)를 사정(査正)하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 상번(上番)·하번(下番)을 불러 《시전(詩傳)》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2월 13일 신해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음홍(陰虹)이 태양(太陽)을 꿰뚫은 이변이 있었으니, 하늘의 뜻이 어찌 우연하겠습니까? 무릇 음양과 이욕(理慾)은 본래 두 가지 이치가 아닙니다. 하늘에서는 음양이 되고 사람에게서는 이욕이 되는 것이니, 크게는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요, 작게는 일용(日用)·사위(事爲)가 됩니다. 이(理)로 말미암아 발동하는 것은 양(陽)의 움직임이요, 욕(慾)으로 말미암아 발동하는 것은 음(陰)의 싹입니다. 천리(天理)는 기르기 어렵고 인욕(人慾)으로 흐르기는 쉬우니, 한번이라도 혹 놓아 버리면 인욕이 이(理)를 이기는 데 이르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하께서 시험삼아 생각해 보소서. 동정(動靜)·시조(施措)의 사이와 편안하고 홀로 있는 곳에서 생각할 적마다 인욕을 막고 징계하며 일마다 경계하고 신중히 하여 능히 천리(天理)로 하여금 유행(流行)토록 하고 인욕을 모두 없애셨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진선(盡善)하지 아니함이 있다면, 하늘이 우리 저하께 경고하는 바가 또한 어찌 괴이하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깊이 유념하여 경성(警省)하겠다고 답하였다.
수찬 정순검(鄭純儉)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며칠 전 등연(登筵)했는데, 강(講)이 《시경(詩經)》의 정료장(庭燎章)에 이르자 대조(大朝)께서 그림으로 그려 올리라고 특별히 명하시고, 또 1본(本)을 본떠서 동궁께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이미 성교(聖敎)를 받들어 세 개의 족자를 만들어 각각 족자 위쪽 면에 본장(本章)을 써서, 그 두 개는 대조께 올리고 이제 한 개를 저하께 받들어 올립니다. 지금 우리 대조께서는 일에 권태로움을 느끼실 해를 당하셨으나, 한가하게 지내려는 마음이 없어 자강 불식(自强不息)하며 한 생각도 해이해지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이 정료시(庭燎詩)를 그리라는 명은 대개 근정(勤政)의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항상 자리 곁에 두고 스스로 칙려(飭勵)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궁께 그려 올리라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더욱 연익(燕翼)022) 의 계책을 물려주시려는 성의(盛意)를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척연(愓然)히 반성하고 게을리 지내는 때가 없도록 하여 우리 대조께서 은근히 면계(勉戒)하시는 뜻에 부응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니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2월 14일 임자
이성중(李成中)을 예조 판서로, 서명신(徐命臣)·채제공(蔡濟恭)·이이장(李彛章)·유언국(兪彦國)·홍종해(洪宗海)를 승지로, 김시묵(金時默)을 교리로, 윤동승(尹東昇)을 수찬으로, 송문재(宋文載)·심발(沈墢)을 부수찬으로, 홍익삼(洪益三)을 대사간으로, 홍중효(洪重孝)를 헌납으로, 정광한(鄭光漢)을 정언으로, 정창성(鄭昌聖)·남운로(南雲老)를 지평으로, 이기덕(李基德)을 장령으로, 이민곤(李敏坤)을 집의로 삼았다.
정언 이언형(李彦衡)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천재(天災)가 있음에 뭇 신하들이 차자(箚子)로 아뢰고 진계(陳戒)하는 것이 비록 혹 문구(文具)에 가깝더라도 개발(開發)·광구(匡救)하는 유익함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번 흰 무지개의 이변이 이처럼 예사롭지 아니한데도, 근밀(近密)한 반열과 논사(論思)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고요히 한마디 말도 없어 문구마저도 아울러 폐(廢)해버렸으니, 신은 개연(慨然)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흰 무지개의 이변 때문에 대조에게 차자를 올려 진면(陳勉)하였는데, 이르기를,
"천하의 일이란 소홀히 여기는 데서 환난이 생깁니다. 안으로는 조정에 밖으로는 강장(疆場)에 비록 일이 없더라도 이시부척촉(羸豕孚蹢躅)023) 의 염려와 이상견빙(履霜堅氷)024) 의 근심이 또 어찌 반드시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하였다. 교리 이세택(李世澤)·수찬 정순검(鄭純儉)이 또 대조에게 차자를 올렸는데, 이르기를,
"원컨대 전하께서는 성경(誠敬)의 학문에 힘써 다만 화평하고 광명(光明)한 것으로써 근본을 바로 하여 출치(出治)하는 바탕으로 삼으며, 인명(仁明)의 정치를 시행하시어 항상 허송 세월하는 것을 나라가 병들고 백성을 해치는 경계로 삼으시며, 황극(皇極)의 대중 지정(大中至正)함에 뜻을 더 두시어 사사로이 좋아하거나 한쪽으로 치우치는 잘못이 없어야 합니다. 곤궁한 백성들이 어려운 지경에서 신음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성실한 마음과 실질적인 은혜를 베풀 계책을 구(求)하시고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시되, 널리 베푸시어 귀에 거스린다 하여 멀리 듣지 말고, 널리 펼치고 널리 찾으시며 소원하고 비천하다 하여 버리지 않으신다면, 성덕(聖德)이 밝게 빛나 왕화(王化)가 환히 비춰질 것이며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져 민막(民瘼)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곧은 말이 날마다 들려 아첨의 풍습이 영원히 끊어지며, 어질고 빼어난 사람이 날로 나와 용렬하고 아둔한 부류는 모두 물리쳐질 것입니다. 조정은 맑고 밝으며 온 나라는 편안하게 되어 애연(藹然)히 크게 화평한 기운에 위아래에서 서로 조화될 것이니, 하늘은 휴화(休和)로 응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재이(災異)가 드러나도 그 소멸되지 아니함을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우악한 비답으로 답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서경》의〉 무일편(無逸篇)을 가지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는데, 입직(入直)하고 있는 유신들이, 이언형(李彦衡)의 상서에서 ‘삼사(三司)가 재이를 만나고도 진계(陳戒)하지 않았다.’고 논박한 것으로 인하여 모두 진서(陳書)하고 지레 나간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언형의 상서를 가지고 들어와 읽으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그 글의 말을 보니, 이 앞에 또 글이 있을 것이다."
하니, 도승지 윤득재(尹得載)가 말하기를,
"앞 글은 김한철(金漢喆)을 개정(改正)할 것을 논하고, 이득종(李得宗)의 삭판(削版)을 청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언형은 어찌해서 이처럼 시끄러움을 야기하는가?"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들어가 그 글을 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지고 들어와 읽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이언형에게 와서 기다릴 것을 명하고, 또 묻기를,
"청대(靑臺)025) 에서 보고한 뒤에 정원(政院)에서는 달사(達辭)가 없었는가?"
하니, 윤득재가 말하기를,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서울에 있는 유신(儒臣) 및 대신(臺臣)을 아울러 파직하고 여러 승지도 모두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차자를 올린 유신은 비록 때를 넘기기는 했지만 글이 없었던 것과는 다름이 있다고 하여 다만 체차만 시키고, 정언 이언형도 또한 때를 넘겨 진장(陳章)했다고 하여 체차시켰다. 이어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데, 하나는 자신을 책한 것이었고, 하나는 신료를 면칙한 것이었다.
유시(酉時)에 임금이 이언형을 소견(召見)하여 묻기를,
"너의 앞서의 글 가운데 이른바 ‘동첨추(同僉樞) 중에 흠이 있는 자’란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하니, 이언형이 말하기를,
"박징빈(朴徵賓)·윤동로(尹東輅)는 곧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참 뒤에 말하기를,
"진전(眞殿)에서 구주(口奏)한 것과 반교(頒敎) 및 《천의소감(闡義昭鑑)》을 너는 보았는가? 지금 내가 자성(慈聖)을 받들어 진하(陳賀)를 받고, 추은(推恩)하여 가자(加資)한 것은 뜻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너는 끝내 저버리고 말았다. 김한철의 일은 어떤 일을 가리키는가?"
하니, 이언형이 말하기를,
"김한철이 북관(北關)에 있으면서 도시(都試)를 치를 때 비장(裨將)이 뇌물을 받고 합격하지 못한 사람을 직부(直赴)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추문·비방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이[虱]처럼 붙고 파리처럼 돌아다녔다.’고 한 말은 과연 어디에 붙었다는 것인가?"
하니, 이언형이 말하기를,
"그 사람됨이 비루하여 세력이 있는 집이라면 도처에 이처럼 붙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한마디 말로 조정을 혼탁하게 하는구나."
하고, 이어서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박징빈의 근년의 일은 이미 지나간 일로 부치겠지만, 윤동로에 이르러서는 아들 때문에 그 아비에게 누(累)를 입게 되었으니, 구주(口奏)·반교(頒敎)의 뜻이 아니다. 예로부터 당습(黨習)의 일어남은 본래 큰 것에 있지 않았다. 이번의 경우 글은 비록 약간이지만 협잡(挾雜)을 행함이 깊었다. 정언 이언형을 먼저 체직하고 교동부(喬桐府)에 내쳐서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해(江海)에서 마음을 씻게 하라."
하였다. 이어 이언형에게 하유하기를,
"너는 동원군(東原君)의 손자이며 청릉군(靑陵君)의 아들이 아닌가? 내가 사단(社壇)에서 돌아와 아직도 옛날에 어제(御製)한 ‘인부각서동(忍復各西東)’의 구절을 외우고 있거늘, 네가 차마 이럴 수 있는가? 너를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니, 모름지기 심장(心腸)을 씻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태중(李台重)을 보양관(輔養官)으로 삼았으니, 영의정 이천보의 말을 따른 것이다.
2월 15일 계축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친림(親臨)하여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다. 대개 문정공 송시열과 문정공 송준길을 14일 사시(巳時)에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했기 때문이었다.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많은 선비를 내어 문왕(文王)을 편안케 하니 청아(靑莪)026) 는 누조(累朝)의 교화를 흡족케 하였고, 양현(兩賢)을 높여 부자(夫子)께 종향함에 조두(俎豆)는 온 나라의 의논을 채택한 것이로다. 이에 십행(十行)의 사륜(絲綸)을 드날려, 사방(四方)에서 모두 보고 듣게 하노라. 생각건대 세교(世敎)를 부식(扶植)함은, 단지 오도(吾道)를 표장(表章)함에 있도다. 전철(前哲)을 계승하고 후생(後生)을 열어준 공(功)을 본떠 융숭히 포상하는 전례(典禮)를 극진히 하였고, 후학(後學)이 본받을 바탕을 열어 작흥(作興)의 아름다움을 밝혔노라. 아! 성조(聖祖)께서 문치(文治)를 크게 펼치시매, 대현(大賢)이 한 세상에 함께 났도다. 선정(先正) 문정공 송시열은 우뚝 솟은 기상과 바다를 담을 만한 흉회(胸懷)를 가졌으니, 문로(門路)는 정대했고 연원(淵源)은 깊어 지극한 가르침을 일찍이 함장(函丈)027) 에게서 이어받았고, 규모는 크고 문리가 조밀하여 성법(成法)은 한결같이 고정(考亭)028) 을 기준으로 삼았다.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변환(變換)을 겪었어도 평소의 지조는 이험(夷險)에 변치 않았으며, 춘추(春秋)의 존양(尊攘)하는 의리를 맡음에 촌심(寸心)은 오직 강상(綱常)을 밝혔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계합(契合)에 의탁하였으니 요순(堯舜)의 군민(君民)이요, 빈사(賓師)의 높은 자리에 처했으니, 이윤(伊尹)029) ·여망(呂望)030) 과 백중지간(伯仲之間)이었다. 경륜(經綸)은 사학(斯學)을 벗어나지 않아 왕도(王道)·패도(覇道)의 구분을 환히 알았고, 전례(典禮)는 제가(諸家)의 것을 절충(折衷)했으니 피사(詖辭)·음사(淫辭)를 확연히 쪼개었다. 뒷사람을 열어 줌에 있어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대유(大儒)로서 심의(深衣)031) 의 전(傳)함을 받았고, 통서(統緖)가 소전(紹前)에 더욱 빛나니 온 세상이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았다. 재주는 왕자(王者)를 보좌했고, 학문은 성인(聖人)의 무리가 되었다. 또한 선정 문정공 송준길은 누항(陋巷)에 오는 봄이나 염계(濂溪)에 개인 달과 같았다. 자질(資質)이 금정(金精)·옥윤(玉潤)과 같아 사림(士林)이 모두 스승으로 추앙하였고 출처(出處)는 기린이 나타나고 봉황이 숨듯 하여 여자와 어린애도 또한 상서로운 줄을 알았다. 복설(復雪)을 스스로 집안의 계책으로 삼았으니, 종당(宗黨)에서 덕을 같이하는 어진 이를 얻었고, 강설(講說)은 자신의 말을 암송하듯 하였으니 빈석(賓席)에서는 임금의 마음을 모두 계옥(啓沃)하는 책임을 다하였다. 순수한 한 덩어리 화기(和氣)가 어린 곳에 훌륭한 재질(才質)이 9분(分)은 성현의 경지에 이르렀도다. 예(禮)를 도타이 하고 풍속에 모범을 보인 것이 실로 수신·제가에 근본을 두었으니 은택이 후세에 끼쳤으며,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도(道)를 호위한 것은 격물(格物)을 궁구(窮究)한 데에 힘입었으니 사문(斯文)에 공이 컸도다. 안정(安定)032) 의 4조(條)는 인재를 가르쳐 각각 성취에 이르게 했고, 속수(涑水)033) 의 한결같은 정성은 자신을 단속하여 평생에 다 쓰지 못했노라. 이는 명세(命世)의 자태로 승당(升堂)의 반열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아! 하남(河南)의 양정(兩程)034) 이 나온 것은 송나라의 덕이 아름답고 밝을 때였고, 낙민(洛閩)035) 의 일파가 전해짐은 주학(周學)의 진실됨에 의지하였다. 그 글을 외고 그 세대를 논하매 고금이 서로 부합됨을 알겠으며,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스승에게 도를 배웠으니, 또한 하늘의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도다. 대개 그 충실한 광휘(光輝)의 아름다움은 언어나 문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조예(造詣)가 모두 지극히 고명(高明)한 데 이르렀으니 문(文)으로 넓히고 예(禮)로 요약하였고, 공화(功化)가 오래도록 민멸되지 않았으니 살아서는 영화로우며 죽어서는 슬퍼했노라. 조가(朝家)의 이증(貤贈)이 비록 융숭하다 할지라도 어진 이를 포상하는 상전(常典)에 불과하고, 향사(鄕社)의 연사(禋祀)를 거의 두루 행했으나 어찌 덕을 사모하는 깊은 정성에 걸맞는다 하겠는가? 이에 현관(賢關)의 연장(連章)이 있어, 곧 성묘(聖廟)의 제향(躋享)을 청했도다. 한번 허락을 아낀 지 이미 3기(紀)가 지났으니 대개 신중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요, 공의(公議)가 정해짐은 백년을 기다리지 않아 과연 다같이 호소함을 보게 되었다. 보묵(寶墨)은 원우(院宇)의 게판(揭板)에 빛나니 존상(尊尙)은 선조(先朝) 때부터 시작되었고, 훌륭한 제기(祭器)를 상무(庠廡)에 진설한 것이 엄연하니 숭봉(崇奉)함은 마치 이날을 기다린 듯하다. 온 나라가 고무(鼓舞)함은 이에 말미암은 것이요, 사도(斯道)를 주장함이 나에게 달려 있다. 이에 문정공 송시열·문정공 송준길을 문묘의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종사(從祀)하노라. 아! 예의(禮儀)가 이루어지니 달과 별이 밝았고, 반서(班序)에 질서가 있으니 금신(衿紳)이 용동(聳動)하는도다. 대덕(大德)은 반드시 향사(享祀)함을 얻으니 누구인들 보고 느끼는 마음이 없겠는가? 유풍(流風)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새로운 교화를 지음을 기다려 보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마땅히 모두 다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예문 제학 남유용(南有容)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7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10면
【분류】왕실(王室) / 사상(思想)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교육(敎育) / 어문학(語文學)
[註 026] 청아(靑莪) : 청아는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靑靑者莪)에 나온 ‘다북쑥이 무성하다’는 것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뜻임.[註 027] 함장(函丈) : 스승.[註 028] 고정(考亭) : 주자(朱子).[註 029] 이윤(伊尹) : 은(殷)나라의 현상(賢相). 처음에 농부(農夫)였는데, 탕왕(湯王)이 세 번이나 초빙(招聘)하여 마침내 출사(出仕)하였고, 탕왕을 도와 하(夏)의 걸왕(桀王)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였음. 탕왕이 죽은 뒤에 그 손자 태갑(太甲)이 무도(無道)하게 행동하므로 이를 3년 동안 동궁(桐宮)에 추방하였다가, 태갑이 다시 회개하자 맞아들였음.[註 030] 여망(呂望) : 본성은 강씨(姜氏)이며 이름은 상(尙)으로, 그 선조를 여(呂) 땅에 봉했으므로 여씨(呂氏)가 되었음. 위수(渭水) 가에 숨어 낚시질로 소일했는데, 주나라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태공(太公)이 그대 만나기를 바란 지 오래이다."라고 했으므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칭호하였음. 후에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그 공적으로 제(齊)나라에 봉해졌음.[註 031] 심의(深衣) : 선비의 웃옷. 흰 베로 소매는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선(線)을 두르는데, 위는 사시(四時)를 상징하여 4폭으로 하고, 아래는 1년 열두 달을 상징하여 12폭으로 만들었다 함.[註 032] 안정(安定) : 호원(胡瑗)의 호.[註 033] 속수(涑水) : 사마광(司馬光)의 호.[註 034] 양정(兩程) : 정호·정이.[註 035] 낙민(洛閩) : 정자(程子:정호(程顥)와 정이(程頣))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자(朱子:주희(朱熹)는 민중(閩中)) 사람이므로 일컬음.
2월 16일 갑인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부교리 홍경해(洪景海)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며칠 전 간신(諫臣)의 상서는 일 때문에 상규(相規)한 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겨우 문폐(文陛)에 오르자마자 최절(摧折)함이 너무 지나쳤고, 바다를 건너 귀양 보내고 사교(辭敎)가 지극히 엄하였으며, 예사롭지 않은 죄명을 더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지금 이후로 대각(臺閣)에 있는 자들이 장차 더욱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을 일삼고 말하는 것을 조심하여 관사(官師)의 규잠(規箴)조차 아울러 다시 볼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어서 대조(大朝)께 앙품(仰稟)하여 간신(諫臣)을 엄하게 견책(譴責)하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대조의 처분이 지극히 엄명(嚴明)하였는데, 그 어찌 감히 비호하는가라고 답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간신(諫臣) 김상도(金相度)의 서본(書本)을 얻어 보니 근래 탐독(貪黷)의 폐단과 사치의 풍습을 성론(盛論)한 것으로, 그 말한 바가 지극히 추예(醜穢)하여 엄히 신칙하고 명백하게 금할 것을 청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언로가 막혀 대풍(臺風)이 적료(寂廖)한데, 이번 간신의 말은 그 직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합니다. 애석한 것은 청조(淸朝)의 진신(搢紳)에게 과연 대언(臺言)과 같이 불법(不法)함이 있었다면, 분명히 말하고 드러나게 배척하여 그 죄를 바로잡아야 마땅한데, 흐리멍덩하게 말을 하고 단지 조가(朝家)에서 징려(懲勵)하기만 청했으니, 신은 그윽이 개연(慨然)스럽게 생각합니다. 또 그 글에 이르기를 ‘대관(大官)·요로(要路)는 반드시 그 사람을 신중히 써야 한다.’ 했는데, 신은 외람되게도 백료(百僚)의 머리에 있으니, 대계(臺啓)가 일어남은 바로 신의 몸에 해당된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이런 말로 괘혐(掛嫌)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대조(大朝)에게 차자를 올려 ‘김상도의 상서 가운데 대관(大官) 운운한 일단의 말로 인구(引咎)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김성(金城) 전(前) 현령(縣令) 신경(申暻)을 여러 수령과 뒤섞어 진지(盡地)에 나아가게 한 것은 유신(儒臣)을 예우하는 도(道)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지난번 이언형의 상서로 인해 마음으로 그윽이 스스로 ‘건극(建極)’ 두 글자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번 김상도의 글은 참으로 후천(後天)에 앉아 선천(先天)을 듣는 말과 꼭 같았으니, 김상도는 곧 건극 이전의 사람이다. 그 대략을 처분한 가운데에 유시하였는데, 차자의 답을 어찌 번거로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 유신을 대우하는 도리에 대해서는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경기 암행 어사 정상순(鄭尙淳)과 비국 당상 이성중(李成中)·김치인(金致仁)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방납(防納)과 양호(養戶)의 폐단을 물으니, 정상순이 말하기를,
"이 일은 고을마다 모두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제읍(諸邑)이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물었는데, 금천(衿川)에 이르러 정상순이 말하기를,
"현감이 사재(私財)로써 번번이 민역(民役)에 대비하니 백성들은 국역(國役)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계속하기 어려운 방도이다."
하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명예를 노리는 데 불과하며 선치(善治)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성중이 말하기를,
"일은 비록 그러하나 그래도 침학(侵虐)하는 관리보다는 낫습니다. 이는 위에 있는 자들의 간여(干與)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방납(防納)에 폐해가 있다 하여 통진(通津)·진위(振威)·금천(衿川)·부평(富平)·양천(陽川)·김포(金浦) 등 여섯 고을의 수령을 아울러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치하게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진위는 적미(糴米)에 빈껍질이 많다 하여 먼저 파직하고, 도신(道臣)은 능히 양호(養戶)를 신칙하지 못하였다 하여 중추(重推)하게 하였다.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경외(京外)에서 상납할 때 조종하는 쓸데없는 비용을 일체 금하라고 엄히 신칙토록 하였다. 또 8도·3도(三都)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진정(賑政)을 거듭 신칙하였다. 어사·비국 당상에게 먼저 물러 나가라 명하고 이어서 전교(傳敎)를 내려 김상도를 대정현(大靜縣)에다 면직시켜 서인(庶人)으로 삼되 즉시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그리고 검열 김화택(金和澤)은 김상도의 숙부로서 그를 진장(陳章)토록 유도하고 달가운 마음으로 당습을 했다 하여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라 명하였다. 또 승지 홍종해(洪宗海)를 전교를 쓰라고 명할 때에 김상도를 영호(營護)했다 하여 체직시켰다. 대개 좌상이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므로 이로 인하여 김상도가 동궁에게 올린 글을 들이라고 명하여 보았는데, 그 글 가운데 무한한 의사(意思)를 포함하고 옛날의 당습을 이루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같은 명이 있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왕령(王令)이 이미 내려진 뒤이니, 김상도·이언형에 대하여 수재(守宰)인 자가 혹 감히 명관(名官)이라 하여 궤문(饋問)하거나 고을의 백성이 만약 사부(士夫)라고 부른다면, 수령은 마땅히 종신토록 금고(禁錮)하고 그 백성들은 마땅히 엄형(嚴刑)하고 노비로 삼을 것이니, 이로써 엄중히 신칙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원량(元良)이 김상도에게 속임을 당하여 나에게 알리지 않은 채 온화한 비답으로 답하였으니, 차후로는 원량이 비록 하답(下答)하더라도 반포(頒布)하지 말고 하룻밤 동안 기다렸다가 승지가 가지고 들어와 아뢰도록 하라. 그리고 부름을 명하지 않았을 경우 다음날 아침 상서(上書)의 하답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8일 병진
초저녁에 유성(流星)이 하늘 한가운데에서 나와 손방(巽方)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부교리 홍경해(洪景海)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엎드려 대조(大朝)께서 내리신 전교(傳敎)를 보건대, 간신(諫臣)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바다로 가게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저 몇 신하들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지마는, 신이 아까워하는 바는 곧 그 직책입니다. 또 면직시켜 서인으로 만드는 율(律)은 근고(近古)에 드물게 있는 바이며 아침에 간신이었다가 저녁에 서인이 되는 것은 아마도 청조(淸朝)에서 대각(臺閣)을 중히 여기는 도가 아닌 듯하니, 신은 그윽이 근심스럽습니다. 대조께 품(稟)하여 처분을 환수케 하소서."
하였다.
지평 정창성(鄭昌聖)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께서 천의(天意)에 우러러 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바람에 부응하는 것은, 오로지 학문을 부지런히 강하고 조정의 정사를 종핵(綜核)하며 언로(言路)를 넓히는 데 달렸습니다. 그런데 신년 이후로 저하께서 강연(講筵)을 연 것이 7일에 불과하며 비록 강연에 임했을 때라 해도 또한 어려운 뜻을 발의함이 없이 오직 그 판항(板行)을 간략히 하고 대충 형식에 응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떻게 나아가 덕업(德業)을 닦고 수시로 예공(睿工)을 민첩히 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만기(萬機)를 대리(代理)하신 지 지금 몇 년이 되었는데 빈대(賓對)와 상참(常參)에 한갓 침묵(沈默)을 숭상하고, 일에 의심할 만한 것이 있지만 한결같이 부순(俯詢)하지 않으며, 아래에서 아뢰는 바가 있으면 다만 예사 비답만을 내리십니다. 관사(官司)에서 관장하는 바와 격례(格例)에 응당 행해야 할 것도 거의 다 범연하게 보아 넘겨 조검(照檢)이 모자란 듯하니, 무릇 수응(酬應)·주조(注措)하는 사이에 일찍이 정신을 가다듬어 성찰(省察)하지 않음을 또한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저하께서는 전후로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고 놀라 수성(修省)하신 것이 과연 어떠한 일이었습니까? 일언 반구도 자신을 돌이켜 자책(自責)하여 널리 보조(輔助)의 가르침을 구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한갓 장주(章奏)에 대해 ‘경계하고 유념하겠다.’는 등의 말로써 전례(前例)를 좇아 책임을 때웠습니다. 따라서 전혀 효험이 없었으니, 강직한 기풍을 어디에서부터 보겠으며 초야(草野)의 말이 어디로부터 이르겠습니까? 이언형이 죄를 입음은 마침 구징(咎徵)036) 이 거듭 발생하고, 상하가 수성(修省)하는 때를 당하여 말로써 명분을 삼는 자로 하여금 거듭 죄를 입게 했으니, 신은 실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김상도를 대정현(大靜縣)에 보내어 서인으로 삼으라는 명이 있었는데, 그 말이 흐리멍덩하고 황란(荒亂)하여 과연 성심(聖心)에 맞지 않았다면, 유방(流放)의 법이 돌아보건대 어찌 아까워할 바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는 조모(祖母)를 승중(承重)037) 하여 받들고 있는데 나이 여든에 가까워 병이 위급한 지경에 있으니, 한번 큰 바다를 건넌다면 곧 영결(永訣)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유우석(劉禹錫)은 그 어미가 늙었기 때문에 당종(唐宗)이 내이(內移)를 허락하였는데, 사책(史冊)에서 아름다운 정치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아울러 앙품(仰稟)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이천보가 대조에게 차차(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밤에 내리신 비망기(備忘記)을 보았는데, 김상도에 대한 처분이 너무 지나친 데 관계되는지라, 신은 개연(慨然)히 근심과 탄식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상도의 상서는 근래의 시폐(時弊)를 성론(盛論)하여 종이 가득히 조목조목 아뢴 것이 마음에 품은 것을 반드시 진달한다는 데에 스스로 붙좇은 것인데, 그가 잘못한 바는 흐리멍덩하게 말하고 명백한 말로 드러내어 배척하지 않았으니, 간관(諫官)의 기풍에 자못 어긋난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大臣)에 대한 한 구 절의 말에 이르러서는 신의 처의(處義)로는 안연(晏然)히 있을 수가 없으니, 진장(陳章)하여 자인(自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한 자의 마음을 궁구(窮究)해 보면 무릇 조목조목 나열한 바가 오로지 대관(大官)만을 지적한 것은 아니며, 신의 인의(引義)도 또한 ‘대관’ 두 글자가 자신(自身)에게 당착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을 죄로 삼아 절해(絶海)로 보내는 엄한 견책(譴責)이 있게 된다면, 이것은 한마디 말이 대관을 핍박한 때문에 언관(言官)을 죄주는 것이니, 전하의 형정(刑政)이 과중(過重)함과 위노(威怒)가 평정을 잃음이 과연 어떠하겠으며, 대관이 된 자가 성세(聖世)에 누를 끼침이 또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더욱이 그 말은 시폐를 범연히 논한 데 불과하거늘, 전하께서 지나치게 당론(黨論)으로 의심하여 예사롭지 아니한 율명(律名)을 가하였으니, 신은 아마도 전하께서 미처 그 본래 정상을 굽어살피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며칠 전 이언형에 대한 처분은 성명(聖明)의 도량(度量)이 너그럽게 용납하심에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신은 전석(前席)에서 광구(匡救)를 다하고자 했지만 밤이 이미 깊어 다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바야흐로 마음이 아주 편치 못하였는데, 일찍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또 이 명이 있었습니다. 그 말의 옳고 그름은 논할 것도 없이 오늘 한 사람의 언관(言官)을 죄주고 내일 한 사림의 언관을 죄주시니, 돌아보건대, 이제 제도(諸道)에 기근이 들고 천재(天災)가 자주 발생하여 상하가 진실로 마땅히 서로 힘쓰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대각(臺閣)의 신하를 견책하여 쫓아냄이 서로 잇달으니 경색(景色)이 참담합니다. 이것이 어찌 재앙을 만나 놀라고 두려워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두 대신(臺臣)을 도배(島配)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그리고 김화택(金和澤)의 견파(譴罷)에 이르러서는 조카 때문에 숙부를 죄주는 것이니, 진실로 법을 벗어난 것입니다. 아울러 바라건대, 환침(還寢)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대조에게 차자를 올리기를,
"며칠 전 성상께서 이언형(李彦衡)을 처분하신 것은 정형(政刑)의 득실(得失)에 크게 관계가 있는지라, 조만간 등대(登對)하기를 기다려 한번 어리석은 소회(所懷)를 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밤에 내린 전교(傳敎)를 보았는데, 또 김상도(金相度)를 해도(海島)에 보내어 서인(庶人)으로 만들라는 명이 있어 신은 더욱 지극한 경악과 근심스런 한탄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김상도의 상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논열(論列)한 바는 언로(言路)가 적료(寂廖)한 나머지에서 나왔으니, 진실로 그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조정에 탐독(貪黷)·사치가 방자하게 행해져 거리낌이 없는 것이 언자(言者)의 말과 같다면, 나라가 망하지 않고서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진실로 또한 늠연(凛然)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땅히 명백한 말로 드러내어 배척함으로써 그 죄를 바로잡아야 할 것인데, 흐리멍덩하게 말하고 다만 신칙해 다스릴 것을 청한 것은 일장(一場)의 빈말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대관(大官)’이란 한 구절의 말이 마음에 불안하여 차자 가운데 덧붙여 대략 인혐(引嫌)한 것도 또한 대언(臺言)을 소중히 여긴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이제 곧 ‘자신이 대관(臺官)이 되어 말에 직절(直截)이 부족하다.’고 김상도를 꾸짖는다면 옳을 것이지만, 만약 말이 대관(大官)을 핍박했다고 하여 위노(威怒)를 지나치게 더해 언관을 죄주는 데 이른다면, 대관(大官)에게 죄가 되고 성세(聖世)에 누를 끼침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만약 일편(一篇)의 사의(辭意)가 당심(黨心)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김상도에게 역시 억울함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그 상서에 이미 ‘아무개가 이와 같고 아무 일이 이와 같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그 말의 시비(是非)와 허실(虛實)은 지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에 당(黨)이 있고 없음을 무엇으로써 알 수 있겠습니까? 성주(聖主)가 말을 듣는 도리는 연충(淵衷)에 의심을 두어 억측하는 바가 있을 수 없으며, 조가(朝家)에서 벌을 사용하는 정사는 또한 그 자구(字句)를 들춰내어 그 마음의 자취를 결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세도(世道)를 겪어 물태(物態)를 통관(洞觀)하시었으니, 금년 이후로는 치의(致意)를 조심하시어 일찍이 하루라도 해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의 처분도 진실로 기미를 방지하고 조짐을 미리 막자는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습니다만, 이는 그렇지 않음이 있습니다. 김상도는 말한 바가 다만 시폐(時弊)를 범연히 말한 때문일 뿐이고, 이언형이 견책을 당한 것은 또한 다만 ‘하루(瑕累)’ 두 자(字) 때문이었으니, 방지할 만한 기미가 없고, 미리 막을 조짐이 없으며, 더듬어 잡을 만한 당심(黨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갑작스레 뇌정(雷霆) 같은 위엄을 베푸시어 해도(海島) 가운데에 정배(定配)하였으니, 형정(刑政)으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너무나도 과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야흐로 지금의 때에 가령 무상(無狀)한 신하가 있어 이에 감히 당심을 싹틔우고, 당언(黨言)을 올려 부월(鈇鉞)의 죽임을 스스로 범하더라도 국가에 있어서는 진실로 불행한 일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하필 지나치게 의심하고 지레 죄를 주어 사방(四方)의 청문(聽聞)으로 하여금 성화(聖化)가 바야흐로 융성한데 조정에는 아직도 당(黨)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검열 김화택(金和澤)에 있어서는 조카로 인해 벌이 견파(譴罷)에 이르렀고, 전(前) 승지 홍종해(洪宗海)는 한마디 말 때문에 파관(罷官)·발망(拔望)이 되었으니, 모두 처분이 공평함을 잃은 데 관계됩니다. 혹시 전하께서 신의 말이 여러 신하들의 처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리신다면, 반드시 뜻을 돌이켜 깨달으심이 있어 즉시 반한(反汗)038) 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영의정 이천보와 좌의정 김상로를 파직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당인(黨人)이 기회를 타고 날뛰는데, 고굉(股肱)의 대신(大臣)은 자신을 돌보아 위로할 것을 생각하였고 훈계를 받은 유신(儒臣)은 이에 감히 영호(營護)하였으며, 원량(元良)의 하답(下答)도 또한 엄하게 물리치지 못하였다. 아! 지난번의 진장(陳章)에서 모두 말하기를, ‘만약 당습(黨習)을 다시 하면 다만 마음을 저버릴 뿐만이 아니라 임금을 저버리는 것이요 조상을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교인(校人)이 자산(子産)을 속이는 것039) 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런 뜻으로 진전(眞殿)의 뜰에서 구주(口奏)하고 중외(中外)에 반교(頒敎)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은 당(黨)을 생애(生涯)로 삼아 비록 이 당은 없다 할지라도 반드시 한 당이 있다. 이언형의 진장(陳章)은 이미 옛 버릇을 드러내었고, 김상도는 황란(荒亂)하고 흐리멍덩하였으니, 그 속에는 뜻이 깊었던 것이다. 내가 비록 사단(社壇)에서 혼미(昏迷)할 때와 같았으나 결코 이러한 무리에게 속지는 않을 것이다. 아! 이언형이 등대(登對)했을 때 이[虱]처럼 붙어 사는 무리가 조정에 가득하다고 아뢴 것과 김상도의 진장(陳章) 가운데 ‘조귀(朝貴)·요직(要職)’ 등의 말로써 수컷이 부르면 암컷이 화답하듯 하여 안팎이 딱 들어맞았으니, 넌지시 떠보는 뜻은 간부(肝腑)가 드러났다. 아깝도다. 재상의 차자(箚子)가 장황하였으니, 나라를 위함인가, 자신을 위함인가? 세도(世道)를 위함인가, 관첨(觀瞻)을 위함인가? 내 비록 쇠모(衰耗)하나 지금의 정사는 결코 구차하지 않다. 이언형·김상도가 만약 다시 사부(士夫)가 된다면 내가 장차 무슨 얼굴로 남면(南面)하여 ‘고(孤)040) ’라 칭하겠는가? 영의정 이천보·좌의정 김상로를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아 오늘날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모두 다 임금이 있고 법이 있음을 알게 하라. 교리 홍경해를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헌신(憲臣) 정창성(鄭昌聖)은 감히 영호하지는 않았으나 승중(承重)임을 들어 풀어 주고자 하였으니, 당직(讜直)함이 매우 부족하였다. 특별히 삭직(削職)의 율을 시행하라."
하고, 이어서 감선(減膳)을 명하였다. 승지 서명신(徐命臣)이 환수(還收)할 것을 힘써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좌상은 나에게 ‘건극(建極)’ 두 글자를 올리고도 지금 다시 이와 같단 말인가? 지난날 이언형을 처분할 때 영상은 끝까지 묵묵히 있다가 갔는데, 이제 도리어 ‘밤이 깊었다.’는 말로 얼버무리려 하는가? 비록 좌상으로 말하더라도 처음에는 나에게 차자를 올려 제성(提醒)의 계책을 하고자 하였지만, 처분한 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악성(惡聲)이 이를까 두려워하여 이와 같이 영호하는 것을 자기를 위하는 도(道)로 삼았다. 그리고 말한 바는 ‘흐리멍덩하고, 수상(殊常)하다고 말한 데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그 흐리멍덩함과 수상함은 유독 당론의 소치가 아니란 말인가? 이미 흐리멍덩함과 수상함을 알았다면 대신(大臣)의 도리로서도 오직 마땅히 죄를 청하여 합당한 데로 돌아가게 힘써야 옳다. 그러나 지금 도리어 이와 같으니, 이는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일041) 과 다름이 없다. 대저 조선 사람은 비록 조보(朝報)를 볼 때에라도 당론이 있으면 ‘볼만한 것이 있다.’ 하고, 당론이 없으면 ‘맛이 없다.’ 한다. 지금 김상도의 말을 영상·좌상은 애초에 필시 범연히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와서 ‘대관·요직 등의 말에 과연 깊은 뜻이 있으니 혐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모두 차자를 올려 제성(提醒)했던 것이고, 그 처분이 내려진 뒤에 또 어떤 한 사람이 와서 ‘이 일은 대신의 제성에 의해서 이와 같은 데 이르렀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모두 다시 차자를 올려서 스스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비록 그러하나 승지의 말은 옳다. 감선은 환수한다."
하였다. 판윤 홍계희(洪啓禧)는 아들을 가르치지 못하였다 하여 경성 부사(鏡城府使)에 특제(特除)하였으니, 홍계희는 홍경해의 아비이다. 서명신(徐命臣)이 김화택은 조카 때문에 죄를 입고 홍계희가 그 아들 때문에 죄를 입은 것은 모두 과중(過中)하다고 진달하니, 임금이 목소리를 돋구어 말하기를,
"감히 영호하는가?"
하고, 영의정 이천보·좌의정 김상로에게 모두 삭출(削黜)의 율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함께 오게 한 승지에게 명하여 우의정 조재호(趙載浩)에게 전유(傳諭)하기를,
"구주(口奏)·반포(頒布)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장차 위를 속이고 아래를 저버리는 데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진실로 말을 하지 않고자 한다. 지금 정석(鼎席)042) 에는 다만 경(卿)만이 있을 뿐이다. 아! 임금과 재상이 비록 날마다 민사(民事)를 다스려도 혹 때에 뒤질까 두렵거늘, 지금 임금은 있으되 재상이 없으니, 우리 백성들을 돌아보건대, 아픔이 나에게 있는 것 같다. 경의 도리로서는 비록 부축을 받아 조정에 나온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국사(國事)를 괄시하겠는가?"
하였는데, 조재호가 병을 핑계대고 명을 받들지 않았다.
밤 4경에 임금이 진전(眞殿)의 동쪽 뜰에 나아가 단석(單席)를 펴고 북향하여 엎드리니, 좌승지 김상복(金相福)과 사관(史官)이 허둥지둥 입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여러 신하들이 다시 붕당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진전에 입으로 고했다. 그런데 이제 오르내리시는 선조의 혼령을 속였기에 사과하고자 하니, 통탄스럽고 통탄스럽다. 또 이른바 ‘공화 건극(功化建極)’이란 무슨 뜻인가? 이미 나에게 여덟 글자를 씌우고 또다시 이와 같이 하니, 대신들이 과연 잘못이다. 속담에 ‘비록 성(城) 위에서 떨어져도 손 안의 유자(柚子)를 차마 놓지 못한다.’ 했는데, 지금 사람은 비록 역률(逆律)에 들어도 당습을 차마 놓지 못하니, 심히 괴이하다."
하였다. 승지가 대내(大內)로 들어가기를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궐문이 이미 열려 약방(藥房)의 여러 신하들이 속미음(粟米飮)을 올렸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 판서 이성중(李成中)이 허둥지둥 구대(求對)하여 말하기를,
"어제 저녁 어떤 사람이 종이를 펴서 의릉(懿陵)의 능 위에서 전반(奠飯)하다가 수복(守僕)에게 붙잡혔으므로, 구류(拘留)하고 있다고 능관(陵官)이 보고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매우 놀라 비로소 양지당(養志堂)으로 나아가 태복시(太僕寺)에서 친국(親鞫)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2월 19일 정사
정항령(鄭恒齡)을 정언으로, 조중명(趙重明)을 지평으로, 이의철(李宜哲)·홍준해(洪準海)를 수찬으로, 원인손(元仁孫)·정상순(鄭尙淳)을 교리로, 이정보(李鼎輔)를 판윤으로 삼았다.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죄인 이온(李昷)을 국문하였는데, 이온은 실성한 사람으로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가지고 의릉에서 기도하다가 능예(陵隷)에게 붙잡힌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일률(一律)을 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마땅히 다시 국문하겠다."
하였다.
2월 20일 무오
임금이 또 태복시에 나아가 이온을 국문하였으나, 이온에게는 별로 캐낼 만한 실정(實情)이 없었으므로 왕부(王府)에 내려 장폐(杖斃)시켰다. 대사간 홍익삼(洪益三)이 아뢰기를,
"곤장을 금하는 명을 전후로 여러 번 내리셨으니,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또 신이 일전에 총부(摠府)에 입직(入直)하였다가 삼가 벽에 붙어 있는 전교(傳敎)를 보았더니, ‘군무(軍務)가 아니면 곤장을 쓰지 말라.’ 하였고, 이어서 전날에 금부 도사(禁府都事)에게 곤장을 베풀었던 일을 들어 뉘우치는 뜻을 밝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하교하여 ‘차후로 내가 만약 군무가 아닌데 곤장을 쓴다면 이는 정장(庭杖)으로 후손에게 물려 본보기를 내려 주는 것이니, 좌우와 이목(耳目)의 관원은 집주(執奏)하여 광구(匡救)하고 만약 광구하지 못하면 대관(大官)이 규정(規正)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금부 도사의 나래(拿來)가 지체된 것은 진실로 죄가 있으니, 일을 마땅히 금오(金吾)에 내려 엄히 처리해야 하므로, 이에 허물을 기록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번의 가도사(假都事)는 비록 무인(武人)이라 하나 직책이 금부 도사이며, 또 군무(軍務)가 아니면 결코 전정(殿庭)에서 곤장을 쓸 수 없으니, 청컨대 가도사 두 사람을 의금부에 내려보내어 종중 감처(從重勘處)하고 특별히 잘못을 기록하라는 명을 정침(停寢)하소서."
하니, 임금이 홍익삼이 아뢴 바가 체모를 얻었다 하고 호피(虎皮) 1령(令)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이천보(李天輔)·김상로(金尙魯)를 성문(城門) 밖으로 내쫓았다.
임금이 평안 감사 이후(李)를 인견(引見)하고 계칙(戒飭)하기를,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르니 마음속에 항상 피중(彼中)에 일이 있는 것처럼 여겨, 군기(軍器)·군정(軍政)·저축에 대비가 있어 근심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본도(本道)의 흉황(凶荒)이 비록 영남에 미치지는 않으나, 진읍(賑邑)은 오히려 많을 것이다. 백성의 일은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 있고 수령의 능력 여부는 전적으로 고적(考績)을 밝게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도신(道臣)은 매번 신관(新官)이 구관보다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라고 하여 짐작한 바가 많다. 그러나 한 관리가 다스리지 못함이 백성에게 폐를 끼침은 크니, 경은 모름지기 노력하고 면칙(勉飭)하여 어리석은 자를 능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2일 경신
임금이 경기 감사 이종백(李宗白)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종백이 기내(畿內) 34개 고을 중에서 설진(設賑)한 곳이 29개 고을인데 진곡(賑穀)의 태반이 부족하다고 진달하고, 이어서 해서(海西)의 소미(小米) 4천 석을 더 획급(劃給)해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부교리 원인손(元仁孫)·수찬 홍준해(洪準海)에게 명하여 〈《시경》의〉 주송(周頌)을 읽게 하였다. 원인손이 이어서 황일호(黃一皓)의 일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일호가 혹 화를 입은 위절(委折)을 나는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니, 원인손이 말하기를,
"최효일(崔孝一)이 오랑캐 땅에 잡혀 있을 때에 황일호가 만윤(灣尹)으로서 최효일의 가족들을 우휼(優恤)하였는데, 최효일이 죽자 오랑캐 용골대(龍骨大)가 최효일의 편지를 가짜로 써서 최효일의 집에 보내고 답서(答書)를 보내 오도록 유인(誘引)한 뒤에 황부윤(黃府尹)이 최효일의 집을 무휼(撫恤)했음을 알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사단을 빚어 냈던 것인데, 당시에 황일호가 이미 만윤에서 체차(遞差)되었고 황씨 성을 가진 자가 다시 만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책임지우려고 하자, 황일호가 몸을 던져 스스로 담당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일호는 과연 어질구나."
하였다. 원인손이 말하기를,
"최효일은 관서(關西)의 일개 냉족(冷族)으로 능히 황조(皇朝)를 위하여 분기(奮起)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끝내 대절(大節)을 세웠으니, 영원히 강상(綱常)을 세운 것입니다."
하고, 비국 당상 이성중은 말하기를,
"최효일이 오랑캐들 사이에 있을 때 잡혀갔던 여러 사람들과 힘을 다해 적을 섬멸하려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화를 입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어느 책에 있는가?"
하니, 원인손이 말하기를,
"최효일의 일은 고 판윤 이덕수(李德壽)가 그 실상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조(銓曹)에 명하여 황일호·최효일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였다. 이성중이 호남 도신(湖南道臣)이 진곡(賑穀)을 더 줄 것을 청한 것으로 주달(奏達)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서에 이미 2만 석을 허락하였으니, 호남에도 역시 이에 의거해 시행할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특별히 영남 대동미(大同米)의 절반을 물려받으라고 명하였으니, 도신(道臣) 이익보(李益輔)가 장계로 청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정언 정항령(鄭恒齡)을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정항령이 동궁에게 진서(陳書)하여 조용히 개달(開達)하여 대신·삼사(三司)를 견출(譴黜)하라는 명을 환수(還收)토록 할 것을 청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들여와 보고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2월 23일 신유
이성경(李星慶)·윤재겸(尹在謙)을 정언으로, 이세택(李世澤)을 부수찬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진맥이 끝나자, 도제조 유척기(兪拓基)가 황단(皇壇)의 봄제사를 섭행(攝行)토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누누이 진청(陳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정사(正史)를 보니 의종 황제(毅宗皇帝)가 조선을 돕지 못한 것으로 도수(島帥)를 통렬히 책망하였으니, 이는 실로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재조(再造)한 은혜와 다름이 없다. 조금도 우리 나라에 노여움을 더하지 않고 구하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 어찌 백세(百世)토록 잊지 못할 은혜가 아니겠는가? 현기증이 비록 간혹 있지만 만약 재전(齋殿)에 간다면 몸을 잊을 것이다."
하였다.
문정공 송시열을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2월 24일 임술
임금이 편차(編次)를 맡은 사람인 이철보(李喆輔)를 소견(召見)하여 황조(皇朝)에서 은사(恩賜)한 망의(蟒衣)·보장(寶章)과 어제(御製)·어필(御筆)·어화궤(御畵櫃)에 친히 소지(小識)를 짓기를,
"내가 동조(東朝)께 문침(問寢)할 때에 자성(慈聖)께서 나에게 하교하시기를, ‘집상전(集祥殿) 가운데에 황조에서 은사한 옷과 어필의 궤를 얻어 한 궤에 봉안하였으니 모름지기 다 알도록 하시오.’ 하시기에, 내가 봉심(奉審)한 뒤에 궤를 열어 완상(玩賞)하기를 청하였다. 한 개의 궤는 곧 황조에서 은사한 망룡의(蟒龍衣)였으니, 이는 바로 옛날 망의를 입고 선왕(先王)을 뵙던 것이었고, 한 개의 궤는 고황제(高皇帝)의 어제 어필(御製御筆)로 된 황릉 비문(皇陵碑文)의 인첩(印帖)이었으며, 한 개의 궤는 곧 신종 황제의 어필첩(御筆帖)이었고, 한 개의 궤는 선종 황제(宣宗皇帝)의 어화축(御畵軸)과 헌종 황제(憲宗皇帝)의 어화축을 동봉(同封)한 것이었다. 또 한 개의 궤는 황조에서 은사한 보(寶)를 안치(安置)할 때의 주문(奏文)·자문(咨文)을 첩으로 만든 것 2본(本)이었는데, 이는 옛날 고(故) 상신(相臣) 이이명(李頣命)이 아뢰었던 것이다. 승문원에 옛 자문을 봉치(奉置)한 것이 있었는데, 해창 도위(海昌都尉)가 구해서 첩으로 만든 것으로 우리 성고(聖考)께서 특별히 들여오라 명하시어 그 전(篆)을 본떠 금보(金寶)로 주조한 것이다. 내갑(內匣)에는 아패(牙牌)를 달고 ‘모주 황조 은사 보장(模鑄皇朝恩賜寶章)’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긴 것인데, 경자년043) 이후로 전국보(傳國寶)로 삼은 것이다. 아! 갑진년044) 사복(嗣服) 때에 선정전(宣政殿) 뜰에서 면복(冕服) 차림으로 받은 것이 바로 이 보(寶)이다. 아! 이 궤를 공경스럽게 치장하여 보물로 간직해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모두 정섭(靜攝)하는 중에도 황조의 성의(盛意)를 못잊어 하시던 것이며, 내가 시탕(侍湯)하는 중에서 일찍이 우러러 보던 것인데, 어찌 몇 십년 뒤 나이 이제 예순 셋, 또 세 번째 병자년이 되는 해에 봉람(奉覽)하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주도(周道)045) 를 돌아보니 비풍(匪風)·하천(下泉)046) 의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고 창오산(蒼梧山)을 멀리 바라보니, 따라 올라가지 못하는 아픔이 더욱 절실하다. 자성께 품(稟)하고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한 개의 커다란 궤를 만들어 함께 삼가 간직하여 진전(眞殿) 왼쪽, 양지당(養志堂) 서쪽 협실(夾室)에 봉안하고, 자전께서 언문(諺文)으로 기록한 글도 역시 아울러 간직하게 하노라."
하였다.
임금이 부교리 원인손(元仁孫)을 소견(召見)하여 《최효일전(崔孝一傳)》을 읽으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미관(彌串)이 어느 지방인가?"
하니, 원인손이 말하기를,
"최효일이 선천(宣川) 차여량(車汝良)의 집에 머물렀다가 행장을 꾸려 북쪽으로 떠났으니, 아마 선천 지방일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차여량은 최효일과 어떻게 되는 사람인가?"
하니, 원인손이 말하기를,
"최효일과 종형제(從兄弟)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효일 역시 용력(勇力)이 있는 것 같구나."
하니, 승지 이이장(李彝章)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눈을 뜨면 고리처럼 둥글고 여력(膂力)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읽는 것이 최효일이 적들을 꾸짖는 일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능히 정노(鄭奴)를 직접 욕한 것이다."
하고, 읽는 것이 저들 가운데서 설시(設施)한 일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일찍이 저들에게로 가서 본 자가 있었는가?"
하니, 원인손이 말하기를,
"그 당시 세자를 따라서 환국(還國)한 사람이 보고 전한 것인데, 이야기가 하단에 있습니다."
하였다. 읽는 것이 최효일이 화를 당하는 일에 이르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오삼계(吳三桂)047) 가 부끄러워할 만하구나. 황일호(黃一皓)는 봉사손(奉祀孫)이 없는가?"
하니, 이 이장이 말하기를,
"비록 입후(立後)하여 종통(宗統)을 이었으나, 반드시 후손(後孫)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차원철(車元轍)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이이장이 말하기를,
"신도 또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에 어떤 사람이 몰래 눈짓을 하며 뜻을 보이자, 차원철이 ‘죽으면 죽었지 어찌 성(姓)을 바꾸어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끝내 그 화를 피하지 않았다 합니다."
하였다.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황일호·최효일의 후손(後孫)을 녹용하라는 명이 이미 있었는데, 지금 최효일의 기사(記事)를 보건대, 차원철이 어떤 사람인지 비록 알 수 없으나 그 충의(忠義)가 늠연(凛然)하다. 도신(道臣)에게 분부(分付)하여 그 후손을 장문(狀聞)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5일 계해
이천보·김상로에게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敍用)하였으니, 이천보는 영돈녕으로, 김상로는 판중추로 삼았다.
임금이 예조 판서 이성중(李成中)·광주 유수 홍봉한(洪鳳漢)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태뢰(太牢)로서 공자(孔子)를 제사지내기 전에 또한 능히 성사(聖師)를 존숭(尊崇)할 줄을 알았겠는가? 진(秦)나라에서는 반드시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고 진나라 이전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하니, 승지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한나라 고조 이전에 누가 능히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뢰 제사는 한나라 고조가 아니면 능히 할 수 없었다. 경(卿)들은 또한 한나라 고조의 문장을 보았는가? 내가 일찍이 고인(古人)의 난편(爛編)을 보니, 한나라 고조의 작품이 많이 있었는데 문장이 높았다."
하니, 이성중이 말하기를,
"신 등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채제공은 말하기를,
"비록 대풍가(大風歌)로서 보더라도 그 문장이 후세 사람의 미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고조가 어찌 일찍이 남에게서 글을 배워 그렇게 능했었겠는가?"
하니, 이성중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말을 꺼내면 문장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윤음(綸音)을 쓰라고 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번 작헌(酌獻)을 보았더니, 석채(釋菜)와 다름이 없었다. 한나라 고조는 황제의 존귀(尊貴)함으로서 선사(先師)께 태뢰로 제사를 지냈다. 작헌할 때는 사성(四聖)에게 친히 전작(奠酌)하여 사성의 도를 밝힐 것이니, 의조(儀曹)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그러나 이는 특교(特敎)이니, 평상시에는 한결같이 《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그리고 계성사(啓聖祠)에 특별히 승지를 파견하여 전작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옛날 광무제(光武帝)는 능히 문교(文敎)를 숭상하여 한나라 말기의 청절(淸節)이 간웅(奸雄)을 즙복(戢伏)케 하였다. 문교를 숭상하는 도(道)는 왕정(王政)에서 마땅히 먼저 해야 할 것인데, 문교를 행하려면 마땅히 근본을 먼저 해야 한다. 해동(海東)의 도학(道學)은 포은(圃隱)048) 에게서 시작하였으니, 지금 몸소 사성(四聖)에게 전작하는 날에 받들어 사모하는 도가 있어야 마땅하다. 포은의 사당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여 내가 유도(儒道)를 존숭하고 충절(忠節)을 포양(褒揚)하는 뜻을 표하게 하라."
하였다. 이어 《오례의》 서례권(序例卷)을 들여오라고 명하고 열람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의 문서에도 오히려 이같이 착오(錯誤)가 있다. 배위(配位)에 초헌(初獻)은 의정(議政)이 하도록 하고, 아헌(亞獻)·종헌(終獻)은 정위(正位)의 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으로 하게 한다면, 왕세자는 마땅히 의정 아래에 있어야 하는가? 정위의 아헌관·종헌관을 배위의 초헌관·아헌관으로 한 뒤에야 옳게 될 것이다. 계축년049) 에 비로소 시학(視學)을 행하였지만, 아직도 고례(古例)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설찬(設饌)과 강학(講學)을 한다 했는데, 강학하는 사람들이 어느 겨를에 먹는단 말인가? 지금 《오례의》를 보았지만 역시 알 수가 없다. 시강관(侍講官)의 뜻은 또 어떠한가? 주강(晝講)과 비슷하기도 하고 혹 전강(殿講)과 비슷하기도 하다."
하니, 이성중이 말하기를,
"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제 처음 그것을 보았는데, 과연 그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강의 뜻은 끝내 알 수 없구나. 만약 《오례의》와 같다면 생첨(栍籤)과 시관(試官)이 없는 것 같다."
하고, 이어서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유척기(兪拓基)·김재로(金在魯)에게 가서 물어 아뢰라고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광주(廣州)의 군향(軍餉)은 대개 완급(緩急)의 수요(需要)가 되는데, 병자년050) 이후로 백여 년간 저축한 것이 겨우 십수 만 석(石)이니, 곡식 모으기의 어려움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연달아 흉년을 당하여 태반이 줄어들어 지금 남아 있는 숫자는 6만여 석에 불과하니, 진실로 한심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또 이 수량 가운데에서 만 석을 덜어내어 기읍(畿邑)에 조곡(糶穀)으로 지급한 일을 일전에 비국에서 복주(覆奏)하여 계하(啓下)하였습니다. 신이 마땅히 이유를 갖추어 방계(防啓)051) 했어야 하나 조정의 명령이 이미 반포되었으니, 환침(還寢)하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기민(畿民)이 황급한 형편에 있어 의리상 함께 구제해야 할 것이니, 이제 비록 힘써 거행하겠지마는, 추수(秋收)를 기다렸다가 각 해읍(該邑)으로 하여금 백성을 거느리고 본성(本城)에 환납(還納)케 함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26일 갑자
진시(辰時)에 임금이 집춘문(集春門)을 거쳐 문묘(文廟)에 나아가 면복(冕服) 차림으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자, 이어서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윤음(綸音)을 지어 내렸는데, 이르기를,
"옛날 우리 황조(皇朝)의 고황제(高皇帝)는 전무(殿廡)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써서 단청(丹靑)을 대신하였으니, 아! 거룩하도다. 오늘날 사습(士習)이 옛날 같지 아니한 것은 오로지 《대학(大學)》·《소학(小學)》의 가르침이 행해지지 아니한 데서 말미암아 그런 것이다. 지난 임인년052) 에 내 나이 스물 아홉에 학문을 시작하여 《대학》 1장(章)을 강(講)하였다. 우리 나라 시학(視學)의 법(法)은 한(漢)나라 명제(明帝)의 횡경(橫經) 문난(問難)의 뜻을 본뜬 것이다. 지금 내가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억지로 이를 행하는 것은 옛날 문교(文敎)를 숭상하던 성대한 뜻을 본받는 것이다. 원량(元良)에게 대리(代理)를 명하고 비록 법강(法講)을 그만두었으나, 근래에 때때로 혹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였으니, 또한 공성(孔聖)의 학문을 좋아하던 뜻을 본받는 것이다. 지금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나라 고조가 공자께 태뢰(太牢)로써 제사를 지낸 뜻을 본받아 몸소 사성(四聖)께 작헌(酌獻)하고 이 명륜당에 앉아 시학(視學)하노라. 대저 선비가 독서하지 않는 것은 금세(今世)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아! 내가 비록 부덕하나 원량에게는 군부(君父)의 위치에 있으며 여러 유생(儒生)에게는 군사(君師)의 도(道)가 있다. 나의 기력으로 이후 다시 시학(視學)함이 어찌 쉽겠는가? 비록 얕은 학문이지마는 몸소 시범(示範)하는 의(義)를 먼저 행하여, 우선 주부자(朱夫子)의 《대학》 서문(序文)을 읽고 난 다음 강서관(講書官)과 본관(本館)의 관원 및 유생(儒生)을 시험하려고 먼저 이 뜻을 하유하노라. 아! 청금(靑衿)053) 은 모름지기 다 알아 각각 힘쓰도록 하라."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이를 뜰에 있는 여러 유생들에게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또 하유하기를,
"지금 사람들이 독서하지 않으니, 《소학》의 ‘쇄소(灑掃)’·‘응대(應對)’ 등의 절차는 비록 미세한 듯하나 모두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근본이다."
하고, 임금이 직접 《대학》 서문을 읽었다. 읽기를 마치자, 유신과 여러 유생 중에서 강생(講生)으로 뽑힌 사람들에게 차례로 《시전(詩傳)》을 강하게 하고, 임금이 어려운 문의(文義)를 물었다. 날이 저물자 대사성(大司成)에게 명하여 두 장의(掌議)를 인솔해 입시하도록 하고, 직접 소서(小序)를 지어 《대학》 책머리에 써서 태학에 하사하였다. 드디어 하교하기를,
"대리한 뒤로 법강(法講)의 일이 없다가 이제 내가 시학(視學)하니, 또한 깊은 뜻이 있다. 유생이 독서하지 않음은 진실로 고질적인 병폐이다. 대성전(大成殿)이 앞에 있으며 더욱이 이 책은 선사(先師)의 심법(心法)이 실려 있으니, 읽지 않고 스승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황조(皇朝)’ 두 글자는 금년에 더욱 깊은 뜻이 있으니, 너희들은 힘쓰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대사성에게 명하여 유생을 인솔하여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예를 마치고 환궁하다가 비각(碑閣)에 연(輦)을 멈추어 승지 채제공(蔡濟恭)에게 높은 소리로 비문을 읽으라 하고 장의에게 하유하기를,
"원량이 입학(入學)했을 때 이 비를 세웠으니, 금년에는 더욱 마땅히 신칙해야 할 것이다. 비면(碑面)은 종사(宗師)의 가르침이니, 여러 유생들은 나의 말이라 보지 말라. 오늘날의 조정을 보건대, 성공(成功)을 고하는 기상이 없는 듯하다. 공자가 소정 묘(小正卯)를 죽인 것054) 은 난정(亂政) 때문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난국(亂國)의 징조가 있으니, 공성(孔聖)이 만약 살아 있다면 몇사람의 소정 묘를 죽일지 알 수 없다. 마땅히 현관(賢關)055) 에서 먼저 너희들에게 신칙하니, 자자 손손에 이르기까지 소정 묘가 있게 하지 말라. 또 금번 종향(從享)을 행운으로 여기지 말고 그 본원(本源)을 생각하는 것이 옳다. 돌아가 독서하라. 책속에 자연히 너의 스승이 있다."
하였다.
2월 27일 을축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친히 시학(視學)에 입참(入參)한 유생을 시험하였다. 이어서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직접 입격 시권(入格試券)을 뜯어 윤경조(尹景祖)·김기대(金器大)에게 모두 급제를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땅히 빨리 가서 자전(慈殿)께 고하리라."
하였으니, 대개 김기대는 자전의 조카였기 때문이었다.
2월 28일 병인
하교하기를,
"이번 황단(皇壇)의 친제(親祭)를 지내고 난 다음날 선무사(宣武祠)에 도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평양에 있는 명장(明將)의 사우(祠宇)에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할 것이며, 향과 축문(祝文)은 서울에서 내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9일 정묘
유신(儒臣)에게 〈《시경》의〉 상송(商頌)을 강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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