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7권, 영조 32년 1756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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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경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황단(皇壇)에 나아갔다. 재전(齋殿)에 들어가 면복(冕服)을 입고 규(珪)를 잡고, 단소(壇所)에 이르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단소에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봉심(奉審)을 마치고 하교(下敎)하기를,
"배석(拜席)은 황색으로 할 수 없으니, 그것을 바꾸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자리에서 내려와 제기(祭器)와 희생(犧牲)을 살폈다. 예조 판서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향례(享禮) 때는 예조 판서가 예의사(禮儀使)가 되고, 희생을 살필 때는 전생 제조(典牲提調)가 예의사가 되니, 한번의 향례에 두 예의사가 있는 것은 어떤 것과 관계가 되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개 《대명집례(大明集禮)》와 《오례의(五禮儀)》를 참용(參用)한 소치이다."
하고,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나가 대신(大臣)에게 묻게 하였다. 대신이 《대명집례》에 ‘태상경(太常卿)이 황제를 인도한다.’는 것으로 증거를 대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명집례》가 이와 같기 때문에 희생을 살피는 의례(儀禮)를 증수(增修)할 때에 봉상 제조(奉常提調)로서 태상경의 임무를 맡게 한 것이다. 그러나 제조는 이미 실직(實職)이니, 희생을 살필 때에도 또한 예조 판서를 예의사로 삼는 것을 지금부터 규식(規式)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재전에 도로 돌아와 승지를 입시하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축문(祝文) 가운데 고황제(高皇帝)의 휘호(徽號)가 효종 대왕의 가상 존호(加上尊號) 두 글자와 서로 비슷하니, 마음이 몹시 미안하다.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승지는 그것을 보라."
하니, 채제공(蔡濟恭)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보고서 엎드려 말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불안해 할 뜻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영돈녕 이천보(李天輔)를 영의정에 제배하고, 판중추 김상로(金尙魯)를 좌의정에 제배하였다.

 

3월 3일 신미

4경에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황단(皇壇)에 나아가 규(珪)를 잡고 의식대로 삼헌(三獻)을 행하였다. 이날 밤 하늘이 맑고 기운이 엄숙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저녁 바람의 기세가 염려스러웠는데 밤기운이 맑게 개었으니, 진실로 다행이다."
하였다. 조(胙)를 받아 음복(飮福)하고, 축문(祝文)을 불사른 뒤에 재전(齋殿)으로 다시 돌아와 예조 판서를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집사(執事)·전악(典樂)을 불러 묻기를,
"지기(地祇)는 6성(六成)이고 인신(人神)은 9성인데, 황단에 쓰는 음악은 몇 성인가?"
하니, 전악이 꿇어앉아 대답하기를,
"9성을 씁니다."
하였다. 새벽녘에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환궁하였다.

 

3월 4일 임신

집의 이민곤(李敏坤)·정언 윤재겸(尹在謙)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모두 학문에 힘쓰고 질병에 조심할 것을 반복하여 말하였으니, 왕세자가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3월 5일 계유

임금이 평안도 전(前) 도신(道臣) 이태중(李台重)을 소견(召見)하여 말하기를,
"경은 동림(東林)·서림(西林)의 형편을 보았는가?"
하니, 이태중이 말하기를,
"동림·서림 사이에 평탄한 대로가 있는데, 적병(賊兵)이 만약 쳐들어온다면 어찌 대로(大路)를 버리고 이 절험(絶險)한 우회로로 들어올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동림은 대로에서 조금 가까우니, 반드시 다투는 땅이 될 듯합니다. 그러나 만약 지킬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도로에 유개(流丐)가 있던가?"
하니, 이태중이 말하기를,
"무릇 도신의 행차에는 본관(本官)이 죄책(罪責)을 염려하여 관속(官屬)으로 하여금 길 위의 유개를 쫓아내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였다. 이어서 상번(上番) 유신(儒臣) 정상순(鄭尙淳)에게 〈《시경》의〉 비풍장(匪風章)을, 하번(下番) 유신 이세택(李世澤)에게는 하천장(下泉章)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옛 홍문관(弘文館)에 나아가 약방의 여러 신하들과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신만(申晩)·이성중(李成中)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보양관(輔養官) 이태중(李台重)이 상견례(相見禮)를 행할 때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가?"
하니, 승지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전하는 말을 들으니, 이태중이 무슨 책을 읽으시는지를 앙문(仰問)하였더니, 원손(元孫)이 ‘바야흐로 《소학초(小學抄)》를 읽고 있다.’고 답했다 합니다. 이태중이 또 ‘이 책을 읽는 것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를 앙달(仰達)하니, ‘좋다.’고 답하였다 합니다. 이태중이 또 ‘이미 그 좋음을 아신다면 앞으로 성인이 될 지위(地位)를 기약할 수 있으니, 축하(祝賀)를 드립니다.’라고 앙달하였는데, 원손이 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옳게 여기는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 좋은 것을 아는 것이로다."
하였다.

 

4경에 임금이 옛 홍문관에 나아가 승지를 불러 전교(傳敎)를 쓰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오늘 자성(慈聖)께서 나에게 열조(列朝)의 필첩(筆帖)을 보여 주셨는데, 그중 첩 하나는 곧 옛날 능에 거둥하였다가 돌아올 때 부로(父老)들을 위유(慰諭)하신 윤음(綸音)이었다. 십행(十行)으로 말씀하신 뜻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간곡하여 족히 돈어(豚魚)라도 감동시킬 수 있는지라, 두 손으로 공경히 들고 봉완(奉玩)하며 한 글자마다 한 번씩 눈물을 흘렸다. 아! 우리 성고(聖考)의 백성을 위하신 성의(盛意)가 이처럼 진지하셨는데도, 부덕하고 무능하여 만에 하나라도 깊이 유념하지 못하여 옛날 애휼(愛恤)하시던 백성들로 하여금 구렁에 나뒹굴게 만들고 능히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혼을 뵈올 것인가? 우리 자성(慈聖)께 아뢰어 어필(御筆)을 받들고 나서, 진전(眞殿) 문 밖 재실(齋室)에 앉아 특별히 승선(承宣)을 불러 어제(御製)를 받들어 살펴보게 했더니, 어제 가운데 과연 이 윤음이 있었으며, 그 해는 병자년056)  ·정축년057)   즈음이었다. 지난 병자년·정축년을 지금까지도 말을 전하고 있는데, 지난해의 큰 흉년을 겪은 뒤, 이 봄을 당하여 불안해 하는 마음이 밤이나 낮이나 어찌 해이해졌겠는가마는, 경외(京外)의 저축은 바닥이 나고 겨울과 봄 사이에 유개(流丐)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전후에 걸쳐 신칙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그 효험을 보지 못하니 한밤중에 일어나 생각하매 쓰라림이 나에게 있는 듯하다. 그런데 지금에 어필이 어찌 부덕을 가리킨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 여러 도신(道臣)과 삼도(三都)의 유수들은 나의 두려워하는 뜻을 본받아 정성스런 마음으로 구제해 살려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유산(流散)하지 않고 각기 농업(農業)에 힘쓰도록 하라. 종자와 양식이 떨어진 자는 직접 고검(考檢)하되 상격(常格)에 구애되지 말고 뜻을 두어 돕도록 하며, 자신이 몸소 권농관(勸農官)이 되어 농정(農政)에 힘써 가을에 착실한 수확이 있도록 하라. 그러면 어찌 박덕한 나의 다행일 뿐이겠는가? 오르내리시는 혼령도 생각건대, 반드시 아래로 임하시어 기뻐하실 것이다. 아! 그 당시 위유(慰諭)하신 가운데 국가의 정공(正供)도 또한 물려서 바치도록 하셨다. 오늘 충청도 도신이 청한 바 대동미(大同米)를 물려서 바치도록 한 것을 나는 윤허를 아꼈는데, 옛날의 위유와 견주어 본다면 이 또한 부덕(否德)이며 이 또한 본받지 못한 것이니,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그러니 더욱 심한 고을은 특별히 물려서 바치는 것을 허락한다. 환상(還上)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고 실로 백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말을 꾸며 하교(下敎)하고 도신에게 문비(問備)하여, 이제 그 종자와 양식을 도와주라고 명하였는데, 만약 그것의 허락을 아낀다면, 이것은 이른바 ‘밀가루가 없이는 떡국을 만들지 못한다.[無麪不托]’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심한 고을에는 또한 절반을 더 나누어 줄 일을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일체로 분부하게 하라. 아! 옛날의 윤음을 받들어 읽으며 진전의 재실에 앉아 이런 하교를 하니, 이는 오르내리시는 영혼이 양양(洋洋)하시어 우리 백성을 돌보신 뜻이로다. 아!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은 부지런히 강구(講究)하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백성의 일에 대하여 해이해지지 않도록 하라. 만약 혹시 한가지 일이라도 이익됨이 있거든 ‘작다.’고 말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구제하도록 하여, 나의 한밤중에 면칙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3월 6일 갑술

김한철(金漢喆)을 대사간으로, 유한소(兪漢蕭)를 승지로, 유언술(兪彦述)을 집의로 삼았다.

 

3월 8일 병자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시학(視學)을 관광(觀光)하러 온 각도의 수령 및 새로 제수하거나 차원(差員)으로 보내는 수령 44명을 소견(召見)하고, 농사의 풍흉(豊凶)과 진휼(賑恤)할 구수(口數)의 다소(多少)를 물어보고, 간곡히 권면하고 신칙하여 보냈다.

 

3월 10일 무인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 환궁(還宮)할 때에 지나는 길에 효장(孝章)·의소 세손(懿昭世孫)의 두 묘(廟)에 들렀다.

 

3월 11일 기묘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서(上書)하기를,
"신은 위로는 성상의 뜻을 본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세도(世道)를 생각하지 아니한 채, 단지 자신을 따르고 남을 따라 감히 일월(日月)의 빛을 가렸으니, 그 심술(心術)에 드러낸 바는 신명(神明)이 밝게 감림(鑑臨)하고 계시는 바입니다. 생각하건대, 어찌 그 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려 출사할 것을 권면하였다.

 

임금이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승지를 불러 쓸 것을 명하고, 이르기를,
"이 실(室)을 옛 모습대로 두고 다시 수리하지 않는 것은 대개 뜻이 있는 것이니, 선조(先朝)의 검박(儉朴)했던 성덕(聖德)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3월 12일 경진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 친정(親政)을 행하였으니, 대개 납월(臘月)의 도정(都政)을 미루어 오다가 이제 비로소 행하였던 것이다. 이조 판서는 신만(申晩)이고, 병조 판서는 이철보(李喆輔)였다.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상서하여 면직(免職)을 바라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답을 내려 출사할 것을 권면하였다.

 

서연관(書筵官) 김원행(金元行)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산림(山林)에는 명유(名儒)·숙덕(宿德)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진실로 저하(邸下)께서 큰 뜻을 능히 힘쓰시어 더욱 실학(實學)에 근면하시며 정령(政令)과 도술(道術)을 순수하게 요순(堯舜)과 삼대(三代)를 법으로 삼아 당대의 어진 선비들을 심복시킬 마음이 있다면, 저 한때의 숱한 인재들이 누군들 양양하게 기를 펴고 아름다운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신과 같은 사람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존재입니다. 저하께서 또한 무슨 돌보고 아낄 것이 있어서 버림을 받아 자정(自靖)하려는 보잘것없는 바람을 이루어 주지 않으시고 감히 받들 수 없는 처지에 성대한 예를 헛되이 욕되게 하기를 이처럼 설월(屑越)하게 하십니까?"
하니, 왕세자가 즉시 빨리 올라와 나의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돕도록 하라고 답하였다.

 

충청 감사 조돈(趙暾)에게 숙마(熟馬)를 내렸다. 이때 각도의 수령이 휴가를 받아 부시(赴試)한 자가 많았는데, 유독 충청 한 도의 수령만은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었으니, 대개 조 돈이 진휼(賑恤)하는 일이 바야흐로 한창이라고 하여 시험을 위한 휴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듣고는 심히 가상하게 여겨 하유(下諭)하고 포상한 것이었다.

 

친정(親政) 때 충청도 어사 조엄(趙曮)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잘 다스리지 못하는 수령이 누구인가를 묻자, 조엄이 말하기를,
"대흥 군수(大興郡守) 김근(金根)·덕산 현감(德山縣監) 정동명(鄭東明)은 혹 불법(不法)을 저지른 일이 있고, 혹은 금법(禁法)을 범하여 몰래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이미 모두 죄를 논하여 파직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또 누가 있는가?"
하니, 조엄이 말하기를,
"공주(公州) 전 판관(判官) 황간(黃榦)은 작년 2월에 화약으로 인해 불이 나자 군향(軍餉) 1천 6백 석을 얻기를 청하여, 발매해 남은 돈 6백 냥은 화약 값으로 들이고, 1천 6백 냥은 사사로이 썼는데, 미처 운반해 오지 않은 것이 1천 1백 냥이었으므로 찾아내어 공물로 귀속시켜 진휼에 보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감사 조명정(趙明鼎)은 역시 군향을 손수 요판(料販)하여 그 발매한 것이 자그마치 4천여 석에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또 아산 현감(牙山縣監) 유언종(兪彦宗)은 늙어 정신이 혼미하고, 공주 영장(公州營將) 장섭(張涉)은 잔약하고 무능하며, 금정 찰방(金井察訪) 김치한(金致翰)은 양가의 부녀자를 겁탈하였다고 아뢰니, 임금이 모두 파직하고 즉시 대신할 사람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물러나올 때 임하여 조엄이 말하기를,
"조명정이 진자(賑資)가 부족함을 염려하고 각읍에서 청보(請報)한 것 때문에 감영의 곡식을 획급(劃給)하여 반은 진자(賑資)에 보태고 절반은 나누어 주어 갑리(甲利)로 이식을 취하고 모곡(耗穀)과 함께 가을에 받아 허제(許題)의 원수(元數)에 채워 넣었습니다. 가령 허제가 10석이라면 5석은 진자에 보태고 5석은 이식을 취하여 가을에는 도로 11석이 되는 것입니다. 우도(右道)로 말하자면 그 수가 3천 2백 석이니, 좌도(左道) 또한 반드시 이 수에서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갑리도 오히려 금령(禁令)인데, 어찌 갑리 외에 또 별모조(別耗條)를 징수할 수 있겠습니까? 명색(名色)이 바르지 못하고 사체(事體)가 구간(苟簡)하니, 다시 변통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보태게 한 진자는 곧 기민(飢民)의 입 안에 들어간 물건이니, 도로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만약 그 갑리를 제하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모곡과 함께 도로 바치게 하되, 한결같이 환곡의 규정과 같게 하고, 감영의 곡식으로서 이미 진자에 보태게 한 것은 감영 곡식 가운데서 진자로 영원히 제감(除減)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철보(李喆輔)가 아뢰기를,
"함경 감사 서지수(徐志修)가 곡식을 운반하는 일로 신문(申聞)한 바 있는데, 획급(劃給)할 곡식은 아득히 영남 우도(嶺南右道)의 연안에 있으니, 만약 영남의 배로 포항(浦項)에 운반해 둔다면 포항 이후로는 북관(北關)에서 마땅히 실어와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간절히 청하였는데, 북관의 사세(事勢)가 심히 급하니, 조정에서 진념(軫念)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의 사세가 또한 매우 급한데, 또 다른 도를 위하여 곡식을 운반하게 한다면, 어찌 딱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영남 도백(道伯)의 도리로는 곡식을 포항에 쌓지 아니하고 우도 연안의 곡식을 획급하여, 이런 수송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허물이 영남에 있으니, 독운 도사(督運都事)로 하여금 포항창(浦項倉)에 한하여 영남의 배로 운반하게 하는 일로 분부하라."
하였다.

 

3월 15일 계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전시(殿試)에 친림(親臨)하였다. 판부사 이종성(李宗城)이 명관(命官)으로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것은 오로지 과목(科目)만을 취하고 있는데, 근래에 인심이 옛스럽지 아니하여 세력이 있는 자 한 사람이 시험에 응시할 경우 글에 능한 자 몇 사람을 얻어 각각 글을 짓게 하고 그 가운데서 잘된 것을 골라 정권(呈券)하기를 도모하므로, 방(榜)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모두들 아무개는 아무개의 글을 얻어 급제했다고들 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얻은들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 폐단을 만약 엄하게 방지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입니다. 한(漢)·당(唐)·송(宋)나라 때부터 으레 면시(面試)하는 규례가 있었으니, 지금 또한 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면시는 심히 어렵다. 지난날 조윤옥(趙潤玉)의 면시 때 내 얼굴이 심히 뜨거웠었다."
하였다.

 

3월 16일 갑신

원경순(元景淳)을 대사간으로, 권혁(權爀)을 부제학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승지로, 최태형(崔台衡)을 지평으로, 정만순(鄭晩淳)을 정언으로, 정휘량(鄭翬良)을 좌부빈객으로 삼았다.

 

사복시 도제조(司僕寺都提調)가 태복시(太僕寺)에서 관리하고 있는 강도(江都) 북일장(北一場)의 둔고(屯庫)를 화완 옹주방(和緩翁主房)에 바꾸어 줄 수 없다고 아뢰었는데, 임금이 초기(草記)를 돌려주었다. 대개 효묘(孝廟)께서 큰 뜻을 가지셨던지라, 강화 섬의 말의 품종이 가장 좋다고 하여 감목관(監牧官)을 설치하고 그 목장을 태복시에 소속시켰다. 그런데 중간에 수신(守臣)의 청으로 인하여 그 목장에다 민정(民丁)을 모집하고 그 말들은 다른 섬으로 옮겼다가 필경에는 다시 태복시에 소속시켰으므로,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에서 감히 차지할 마음을 먹지 못하였다. 그런데 화완 옹주가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여 다른 둔전(屯田)으로 서로 바꾸어 줄 것을 청하여 임금이 허락하였으므로, 태복시에서 다투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경기의 유생 성덕연(成德淵) 등이 상서하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과차(科次)에 친림하여 김성유(金聖猷) 등 20명을 뽑았다. 이때 과장(科場)에서 간사한 짓을 하는 것 때문에 나랏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였는지라, 이종성(李宗城)이 원임(原任) 상신(相臣)으로서 명을 받들고 시험을 주관하여 고교(考較)할 즈음에 여러 시관(試官)들이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는데, 탁호(拆號)058)  할 때에 이르러 온 세상이 모두들 공정함을 일컬었다.

 

3월 17일 을유

우의정 조재호(趙載浩)를 해직하라고 명하였다. 조재호는 정고(呈告)한 지 이미 1백 번이 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면직을 간절히 바라니, 임금이 십행(十行)의 비지(批旨)로 위유(慰諭)하고 인하여 상직(相職)의 해면(解免)을 허락했던 것이다.

 

경기·충청·전라·함경·평안·황해 여섯 도의 유생들이 상서(上書)하여 서울에 기자묘(箕子廟)를 세우고, 제도에 각각 사당 하나씩을 세워 영원히 숭봉(崇奉)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급작스레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호조 판서 정휘량(鄭翬良)·예조 판서 이성중(李成中)·형조 판서 김성응(金聖應)·경기 감사 이종백(李宗白)·호서 어사(湖西御史) 조엄(趙曮)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종백이 아뢰기를,
"남한 산성의 이전곡(移轉穀)은 수신(守臣)의 연백(筵白)으로 인하여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본성(本城)에 환납(還納)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읍(畿邑)의 백성이 비록 눈앞의 굶주림을 구제하는 데 급하여 가서 받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오는 가을 상납할 즈음에 그 허비되는 비용이 올봄에 받아 먹은 수의 몇 곱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북한 산성에서 환자(還子)를 받은 것이 또한 많이 있습니다. 대개 경기의 백성들은 이미 북한 산성으로 실어다 바칠 쌀이 있는데다, 또 남한 산성에 환납할 폐단이 있으니, 가을과 겨울이 바뀔 즈음에 궁박한 백성들이 이리저리 분주히 다니는 것은 참으로 불쌍히 여길 만합니다. 수신(守臣)이 반드시 본래의 장소에 도로 바치도록 하려 함은 또한 보장(保障)을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 신이 비록 감히 봉류(捧留)해 둘 것을 청하지는 못하겠습니다마는, 이번에 이전곡을 받아간 고을 중에서 인천(仁川)·부평(富平) 등 연해의 각 고을은 광주(廣州) 성관창(聲串倉)에 환납하도록 하고, 포천(抱川)·양근(楊根) 등 산읍(山邑)은 광주 송파창(松坡倉)에 실어다 바치게 하여, 본부(本府)에서 내년 봄에 환곡을 나눠주도록 한다면, 남한 산성은 환봉(還捧)하는 실효가 있고, 경기 백성은 성에 올라가야 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실로 양쪽이 다 편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양주(楊州)·고양(高陽)의 경우는 능침(陵寢)을 봉안한 고을이라, 단지 원래의 환곡이 심히 적을 뿐만이 아니니, 두 고을의 민사(民事)는 마땅히 따로 진휼(軫恤)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두 고을은 봉류(捧留)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정휘량이 아뢰기를,
"북한 산성의 어공미(御供米) 3백 석을 재작년에 총융청(摠戎廳)으로 이속시켰는데, 이것은 곧 기읍(畿邑)의 전세(田稅)로서 해를 걸러 개색(改色)한 뒤 호조에서 취해다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청(本廳)에서 행궁(行宮)의 수리를 전적으로 담당한다 하여 이것을 얻기를 청하였으나,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전부터 아무 아문을 물론하고 정공(正供)의 획급(劃給)을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은 사체(事體)가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수리를 본청에서 담당한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핑계를 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본조(本曹)의 미곡이 본래 구간(苟簡)하니, 어찌 경비의 수용을 다른 청(廳)에 옮겨 지급할 수 있겠습니까? 어공미를 획급하는 한 가지 일은 영원히 정파(停罷)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1백 50석을 3년에 한 번씩 총융청에 획급하라고 명하였다. 정휘량이 또 전세와 대동미의 정봉(停捧)의 부당함과 적몰(籍沒)한 전민(田民)을 외방의 역(驛)에 획급하는 일의 부당함을 아뢰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정휘량이 또 아뢰기를,
"올해는 세입(稅入)이 크게 줄어들어 각도에서 조세를 거둔 것이 이제 겨우 일제히 도착하였으나, 쌀이 8만 석 영(零)에 불과하며, 무명과 돈도 또한 따라서 반으로 줄어들었으니, 나라 살림이 가히 망극하다 하겠습니다. 지난번 이미 이런 뜻을 대신(大臣)에게 말한 적이 있었는데, 관서(關西) 별향고(別餉庫)의 별비목(別備木) 3백 동(同)을 만약 가져다 쓴다면 거의 눈앞의 급한 형편을 해결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성중이 제주 목사가 장계로 진곡(賑穀) 5백 석을 더 획급하여 주기를 청하였다는 뜻으로 아뢰니, 임금이 청한 바에 의해 획급하라고 명하였다. 정휘량이 여러 상사(上司)의 수보(修補)하는 등의 일을 모두 정침(停寢)시킬 것을 아뢰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희정당(熙政堂)은 곧 편전(便殿)인데 사복(嗣服)한 뒤 도배한 것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있고, 그 이후로는 수보(修補)한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오늘 전좌(殿座)하는 당(堂)에도 또한 문에 구멍이 있는데도 보수하지 않고 있다. 하물며 아홉 가지 영선(營繕)을 정지하고 어람(御覽)하는 책자의 인쇄를 정지하는 때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금년에 한정하여 여러 상사의 모든 수보(修補)를 일체 정침하도록 하라. 탁지(度支)에서 규례를 정한 대로 한결같이 그 규례를 따르고 있지만, 엊그제 방을 배설(排設)하는 일로 수본(手本)이 있었는데 그 형편이 과연 딱하였으므로 올리는 일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밤중에 생각해 보니,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규례를 정한 것이 장차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 수본을 시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번 대례(大禮) 때에 이미 정해진 규례를 감하여 지출하였고, 그 지출하지 않은 것 중에서 5분의 1은 단지 ‘포장차(布張次)’로 곧장 지출하게 하였다."
하였다. 조엄에게 서계(書啓)를 읽으라고 명하였는데,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신창 현감(新昌縣監) 김원태(金元泰)는 어떻게 9백 석을 마련하였는가?"
하니, 조엄이 말하기를,
"이것은 요리(料理)한 것이 아닙니다. 도임(到任)하던 초기부터 모곡(耗穀)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능히 이 수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부요(富饒)한 고을의 1만 석과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됨이 글을 읽고 몸을 단속하며 집안이 가난함에도 능히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자신을 단속하여 백성을 다스린 것으로써 포상하고 특별히 승서(陞敍)하라고 명하였다. 또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생읍(栍邑) 가운데서 전(前) 대흥 군수(大興郡守) 김근(金根)은 그 범한 바에 이미 해당되는 율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염문(廉問)한 한 조목 가운데서 이름은 비록 금주(禁酒)라 하더라도 술을 가져다 쓴 것은 스스로 범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낭저(廊底)에서 술을 쓰는 자에게 속임을 당한 것보다 심함이 있다. 따라서 이 자에게 적용할 율은 또한 마땅히 무거운 쪽을 따라야 할 것이다. 전 덕산 현감(德山縣監) 정동명(鄭東明)은 비단 술에 빠졌을 뿐만이 아니라 서계로 미루어 보더라도 금주(禁酒)한 이후 그 범한 바를 알 만하다. 그리고 취각(吹角)을 불어 권분(勸分)059)  한 것은 한갓 행동이 해괴할 뿐만 아니라, 부유한 백성들의 곳간을 봉한 것도 또한 수령의 체모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상례(常例)로 처리할 수 없다. 소민(小民)이 사사로이 술을 빚는 경우도 그 율이 있거늘, 하물며 수령이 되어 자신이 직접 범한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비록 염문에 들었다 하더라도 이미 장오(贓汚)를 저지른 것은 없으니, 본률(本律) 가운데서 형추(刑推)를 제외하고 거행하도록 하라. 전 공주 판관(公州判官) 황간(黃幹)의 경우는 그가 불법을 저지른 것이 이와 같이 가리기가 어렵다. 아! 흉년을 만나 자목(字牧)의 관원이 되어 무슨 마음으로 스스로 착복한단 말인가? 팽정(烹鼎)060)  의 율을 베풀지 않으면, 어떻게 탐욕스런 관리를 징계할 수 있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구초(口招)로 엄하게 신문한 뒤 등대(登對)하여 아뢰도록 하라. 금정(金井)의 전 찰방(察訪) 김치한(金致翰)의 경우는, 조정에서 우관(郵官)을 차견(差遣)한 것이 어찌 향품(鄕品)을 위해 중매를 서고 백성을 몰아 역(驛)의 계집종으로 삼는 이런 무상(無狀)한 일을 하도록 한 것이겠는가? 강진현(康津縣)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른바 겁혼(劫婚)한 김유(金濡)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세 차례 엄하게 형신(刑訊)한 뒤 거제부(巨濟府)에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도록 하라. 전 충청 감사 조명정(趙明鼎)의 경우는 당초 두 조목을 범한 것은 마땅히 준엄하게 징계해야 하겠으나, 요행히 사전(赦典)을 만나 분간(分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범한 바는 비록 수령이 범한 것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장문(狀聞)하여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자신이 도신이 되어 제멋대로 범한 것이야 말해 무엇하랴? 만약 엄하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장차 도신이 조정을 가벼이 보고 제멋대로 수단을 쓰는 폐단을 열게 될 것이다. 먼저 파직한 뒤에 잡아들여 초사(招辭)를 받은 뒤에 등대하여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조엄에게 묻기를,
"민정(民情)이 과연 어떠하며, 구제하는 데는 마땅히 어떤 대책을 써야 하겠는가?"
하니, 조엄이 말하기를,
"비록 이른바 조금 곡식이 여문 곳이라 할지라도 대개 허둥지둥 이산(離散)할 뜻이 있었습니다. 바라본 바의 근심스럽고 참담함은 신해년061)  ·임자년062)  보다 심함이 있었으니, 수십 년 안에 또한 인심이 날로 하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해년·임자년은 이미 경술년063)  의 풍년이 있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그래도 의지하는 바가 있었으나, 근년에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듯합니다. 지금 접제(接濟)하는 대책은 다른 좋은 도리가 없는데, 지난번에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여러 가지 상납을 정퇴(停退)하게 한 것은 진실로 바른 도리를 얻은 것입니다. 원하건대, 줄곧 굳게 지키시어 변동하지 마소서."
하였다.

 

임금이 하유하여 영상(領相)과 좌상(左相)을 돈면(敦勉)하고 승지를 보내 함께 오게 하였다.

 

3월 18일 병술

진휼청(賑恤廳)에서, 오부(五部)의 뽑아 보고한 기민(飢民) 남녀 장정 노약자 5천 4백 50명에게 오늘부터 시작하여 닷새에 한 차례씩 건량(乾粮)을 나누어 주겠다는 뜻으로 임금께 아뢰었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받들어 따를 길이 없다는 뜻을 승지의 서계(書啓)에 덧붙여 아뢰니, 임금이 매우 진지하게 위유(慰諭)하고 같이 오게 한 승지에게 기어이 같이 들어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이선제(李善濟) 등이 상서하기를,
"청컨대 우리 태조(太祖)·효묘(孝廟)·숙고(肅考)를 대보단(大報壇)에 배유(配侑)하고,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송시열(宋時烈)을 나란히 정향(庭享)하게 하소서."
하니, 동궁이 임금께 품(稟)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상주(上奏)한 것을 읽으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입에 젖비린내가 나는 무리들이 글은 읽지 아니하고 이런 해괴한 짓을 하였는데, 이것은 부형(父兄)이 잘 교도(敎導)하지 못한 소치이니, 통탄스레 여길 바는 그 부형이다. 만약 이 하교를 받든다면 어찌 저자거리에서 매를 맞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원래의 글을 돌려주라."
하였다.

 

진시(辰時)에 임금이 대내(大內)에서 도보로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이날은 곧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기신(忌辰)이었다. 예가 끝나자,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척화(斥和)하다가 순절(殉節)한 사람의 여러 후손으로서 입참(入參)하여 망배한 사람들을 모두 입시(入侍)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유신(儒臣) 이세택(李世澤)에게 《명사(明史)》를 읽으라고 하고 몸소 윤음(綸音) 한 편을 지었다. 척화한 사람들의 여러 후손이 나아가 엎드려 말하기를,
"신 등의 선조(先祖)의 혼령이 반드시 저 지하에서 감읍(感泣)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각각 윤음 1본(本)을 가지고 가라고 명하였다. 이세택에게는 영남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며 따로 한 건을 하사하였다.

 

좌윤(左尹) 신회(申晦)가 영남에서 북쪽으로 운반하는 곡식 수천 석이 물에 가라앉았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혹하고 참혹하다."
하고, 본도(本道)로 하여금 뱃사람의 아내와 자식들을 고휼(顧恤)하게 하였다.

 

3월 20일 무자

임금이 명정전에 나아가 방방(放榜)하였다. 여러 신은(新恩)들을 불러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묻고는 하교하기를,
"이번 과거에 합격한 향유(鄕儒)를 주서(注書) 초망(初望)의 뒤에 많이 참여시켰는데, 향인(鄕人)을 먼저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명응(徐命膺)을 교리로, 이석상(李錫祥)을 부교리로, 조엄(趙曮)을 수찬으로, 정존겸(鄭存謙)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3월 21일 기축

광주 유수(廣州留守) 홍봉한(洪鳳漢)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경기 감사 이종백(李宗白)이 연주(筵奏)한 거조(擧條)를 보았더니, 이전곡(移轉穀)을 봉류(捧留)하는 일로 심기(心機)를 크게 써서 반드시 이룩하고야 말았으니, 신이 그 우롱을 받음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도신(道臣)을 면대(面對)하였을 때 가을에 환납(還納)하는 것에 대해 정녕히 질언(質言)하였고, 심지어 다시는 봉류하는 일을 말하지 아니하고 함께 구제하는 일에 힘쓰겠다고 하였는데, 말이 진정(眞情)에서 나온 듯하였습니다. 신은 본래 오활(迂闊)하여 남들도 자신과 같은 줄 여겨 드디어 묘당(廟堂)에 헌의(獻議)하고 또 대조(大朝)께 품하였으며, 인하여 본도(本道)로 하여금 열읍(列邑)의 수재(守宰)와 백성들에게 가을이 되면 환납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한 뒤에 비로소 창고를 열어 옮겨가는 것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신은 이미 뜻을 굽혀 따랐는데, 그는 유독 전에 했던 말을 힘써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도신은 전에 이미 북한 산성의 저축에 손을 대었고, 지금 또 남한 산성의 환곡(還穀)에 폐단을 일으켜 두 곳의 불우(不虞)에 대비한 물자가 장차 바닥이 나는 지경에 이른 것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눈앞에 얻은 명예가 아마도 일후의 무궁한 후환을 보상(補償)하지는 못할 것이니, 신은 그윽이 의혹하고 있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사직하지 말고 직임을 살피라고 답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 원인손(元仁孫)에게 《명사(明史)》의 본기(本紀)의 의종 주황후전(毅宗周皇后傳)과 전귀비전(田貴妃傳)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서하여 사직하니,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아 승지에게 답을 쓰게 하였는데, 대조(大朝)께서 누누이 하교하여 돈면(敦勉)하였다는 뜻으로 하고, 이어서 즉일로 출발하도록 하였다.

 

3월 22일 경인

영의정 이천보가 흥인문(興仁門) 밖에 나아와 엎드려 대명(待命)하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는 과천현(果川縣)의 옥(獄)에 나아와 엎드려 대명하니, 왕세자가 대조(大朝)의 하교로써 정원에 하유하기를,
"내가 몸소 임하는 것을 기다리고자 하는가? 내 비록 노쇠하였으나, 좌상이 있는 곳에 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병조 판서 이철보(李喆輔)를 체직시켜 좌참찬으로 삼았고, 홍상한(洪象漢)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3월 24일 임진

임금이 융복(戎服) 차림으로 빈양문(賓陽門)을 나서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하였다. 환궁(還宮)할 때 돌아오는 길에 경기 감영의 선화당(宣化堂)에 임하여 외읍(外邑)의 백성들을 데리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뜰에 들어온 자들이 어느 고을의 백성인가를 묻자, 기백(畿伯) 이종백(李宗白)이 대답하기를,
"고양(高陽)과 부평(富平)의 백성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평의 백성이 어찌 그리 많은가?"
하니, 이종백이 말하기를,
"이전곡(移轉穀)을 받기 위해 남한 산성으로 갔으나, 유수(留守)가 주지 않았으므로 낭패하여 돌아온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허락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주지 않은 것인가?"
하니,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도신(道臣)은 백성으로 하여금 외창(外倉)에 환납(還納)하고자 하나, 유수는 반드시 산성에 봉입(捧入)시키고자 하여, 이로써 서로 버티는 때문입니다."
하였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유수의 고집하는 바가 비록 잘못은 아니지마는, 지금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하건대, 어느 겨를에 환납하는 일을 교계하겠습니까? 우선 외창에 받아 두었다가 오는 봄에 광주(廣州)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면 저절로 남한 산성에 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굶주린 백성으로 하여금 산성에 환납하게 한다면, 그 폐단이 커서 백성들은 반드시 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인데, 부평의 백성들은 받기를 원함이 이와 같으니, 백성들의 사정이 매우 급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런 때에 굶주린 백성으로 하여금 다시 남한 산성의 험한 길을 올라가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상한이 말하기를,
"만약 경창(京倉)의 쌀을 부평의 백성 중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획급(劃給)한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의소 세손(懿昭世孫)을 생각하다 보면 곧 절로 눈물이 흘러내리는데, 이제 굶주린 백성을 보니 마음에 슬프고 안스러움이 더욱 심하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강창(江倉)의 쌀을 지급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하여금 배로 운반해 가도록 한다면 좋겠습니다."
하자, 판부사 이종성이 말하기를,
"참으로 큰 은혜가 되겠습니다만, 현재 나라의 저축이 바닥이 나서 선혜청은 겨우 일년을 버틸 수 있고 호조도 전혀 저축한 바가 없다고 하니, 앞으로의 근심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선혜청 당상 신만(申晩)에게 명하여 강창의 쌀을 획급하되, 부평 부사로 하여금 한 고을의 백성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게 하였다. 이어서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오늘 특별히 경기 감영에 임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소견(召見)한 것은 대개 뜻이 깊은 것이다. 부평 백성들의 말을 듣건대, 하교로 인하여 이전미(移轉米)를 가질러 남한 산성에 갔으나, 유수가 버텼기 때문에 험한 길에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지금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어찌 평상시의 격례(格例)에 구애하겠느냐? 특별히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외창 가운데서 준급(準給)토록 하여 내가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아! 옛날 고황제(高皇帝)께서 공민왕(恭愍王)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만약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왕자(王子)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만약 고황제의 이 뜻을 깊이 유의하여 부지런히 백성을 사랑했다면, 어찌 내 손자의 묘에 임하는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 조금이나마 한 고을의 백성을 구제한 것은 나의 뜻이 아니고 실로 내 손자의 도움이다. 만약 의소묘(懿昭墓)에 임하는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 세록(世祿)의 신하들이 어찌하여 세 살 된 손자가 오늘 나를 돕는 것만 못하단 말인가? 그대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은 백성들의 일에 대해 비록 작고 자질구레한 것이라 할지라도 유유 범범(悠悠泛泛)하게 소홀히 여기지 말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기백(畿伯)이 청한 바로 인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했던 것은 남한 산성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군향(軍餉)이 크게 줄어듦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굶주린 백성을 불러 묻는 일로 인해 부평 백성들이 돌아왔음을 들었다. 비록 처분은 내렸으나,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 외 10여 고을 백성들의 사정도 하나를 들어 나머지 세 모퉁이를 짐작할 수 있다. 춘궁기(春窮期)에 접어들어 백성들이 날로 곤핍해지는데 이처럼 서로 버티기만 한다면, 어찌 특별히 허락한 뜻이 있겠는가? 그 서로 버티는 일이란 둔창(屯倉)에 봉류(捧留)하기 위하여 그러한 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은 거행한 뒤에 조용히 어려운 점을 다시 검토해도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막중한 하교를 이로 인해 서로 버티어 오늘의 거조(擧措)가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산성을 위하는 뜻은 비록 아름다우나,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특별히 하교한 것을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니, 마땅히 신칙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 옛날 명나라의 인종 황제(仁宗皇帝)는 양사기(楊士奇)의 청으로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묻지도 않고 허락한 적이 있었다. 내 비록 늙어 쇠약해지기는 하였으나, 어찌 1만 석의 곡식을 아껴 10여 고을 수만 명의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광주 유수 홍봉한(洪鳳漢)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이미 하교한 이외의 여러 고을에도 즉시 거행한 뒤에 계문(啓聞)하는 일로 분부하라."
하였다. 유척기가 영남에서 상번(上番)하는 금위군(禁衛軍) 중에 염병을 앓는 사람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면서 전례를 인용해 번상(番上)을 정지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모두 물려 보내라고 명하였으니, 유척기가 그 당시 금위 도제조(禁衛都提調)의 직함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혜청 당상 신만(申晩)이 물가가 점차 뛰어오르고 백성들의 형편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하여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다음달 10일 경에 한 번 발매(發賣)토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3월 25일 계사

어영청(御營廳)에서 금위영(禁衛營)의 예를 끌어대어 영남의 어영청 상번 군사에게 일체 번상을 정지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원인손(元仁孫)을 부응교로 삼았다.

 

3월 28일 병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도 유척기(兪拓基)가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섭행(攝行)토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기후(氣候)가 어떠한지를 보아, 할 만하면 하고 못할 것 같으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패초(牌招)를 어긴 옥당관(玉堂官)을 금추(禁推)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근래에 때때로 유신(儒臣)을 소견(召見)하였으나, ‘소대(召對)’니 ‘주강(晝講)’이니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선조(先朝) 정유년064)   이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조께서 행하시지 아니하던 일을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 행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요사이 비록 경연을 열지는 아니하였다만, 유신이 연달아 궐직(闕直)하는 것은 지극히 그릇된 일이다."
하였다. 이어서 여러 승지에게 상언(上言)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이이명(李頣命)은 임금이 몸소 임한다는 하교를 듣고 그날 즉시 도성으로 들어왔지만, 오늘날의 대신은 이런 하교를 받들고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내 비록 몸소 임하고자 하더라도 어찌 과천(果川)의 감옥까지 갈 수 있겠는가? 현옥(縣獄)에서 대명(待命)한 것은 이광좌(李光佐)에게서 시작되었고, 그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이광좌의 모든 일에 대해 죄다 그릇되었다고 하면서도 유독 이 일에 있어서는 본받으니, 내가 그것을 비웃는다."
하였다. 관동 이정 어사(關東釐正御史) 이최중(李最中)으로 하여금 서계(書啓)를 읽으라고 명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회양(淮陽)·김성(金城)의 빈 껍질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이최중이 말하기를,
"회양은 5천 석 안에 빈 껍질이 4천 석이고, 김성은 4천 석 안에 빈 껍질이 1천 석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불태워버리고자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았더니, 비록 빈 껍질이라 하더라도 수천 석을 일시에 불태운다면, 거의 하늘이 내려 준 물건을 마구잡이로 없애는 데 가까울 것 같아 따로 외고(外庫)에 봉해 두고 왔습니다."
하자, 임금이 백성들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어 농우(農牛)에게 먹이고, 모두 탕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또 이최중의 진달로 인하여 관동의 창고에 남겨둔 환곡을 수대로 나누어 더 분배하여 굶주린 백성들의 종자와 양식을 돕도록 하였다. 그리고 진곡(賑穀)을 더 획급(劃給)하는 것도 또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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