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7권, 영조 32년 1756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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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무술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상서(上書)하여 사직하니, 왕세자가 즉시 들어와 성교(聖敎)를 우러러 받들라고 답하였다.

 

전라 감사 민백상(閔百祥)이 상서(上書)하여 연해(沿海) 여섯 고을의 을해년065)   조의 대동미(大同米)를 추수 때까지 한정하여 절반을 정퇴(停退)해 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라."
하였다.

 

4경 1점(點)에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빈양문(賓陽門)으로부터 나와 명정전(明政殿)에 이르러 친히 임하여 서계(誓戒)를 받았으니, 장차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행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4월 2일 기해

왕세자가 수서(手書)로써 영의정 이천보에게 하유하니, 이천보가 병이 심하다고 사양하였다.

 

4월 3일 경자

임금이 여러 승지와 한림(翰林)의 주서(注書)·옥당(玉堂)·병조의 입직한 당상과 낭관에게 희우시(喜雨詩) 십운 배율(十韻排律)을 지어 올리라 명하고, 제학 정휘량(鄭翬良)으로 하여금 시권(試券)을 평가하여 입격(入格)한 사람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4월 4일 신축

밤 5경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대조(大朝)에 상소하여, 지난번에 올린 치자 하나로 인하여 갑자기 심술을 의심받았으며, 전후에 걸쳐 성교(聖敎)를 받았던 것이 인신(人臣)의 극죄(極罪)가 아님이 없다고 말을 하니, 임금이 동궁에게 명하여 비답을 내리게 하였다. 동궁이 즉일로 길을 떠나 성교를 받들라고 답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과 팔도 구관 당상(八道句管堂上)에게 입시를 명하였다. 상번(上番) 원인손(元仁孫)에게는 《시전(詩傳)》의 청묘습(淸廟什)을, 하번(下番) 정상순(鄭尙淳)에게는 민여소자습(閔予小子什)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승지와 사관들이 차례로 읽기를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술을 빚고 단술을 빚어 조상에게 올린다.’고 하였으니, 옛날에 술과 단술은 각각 그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술이 없다 하여 단술도 또한 따라서 없을 수 없고, 또한 단술이 있다 하여 술도 또한 따라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근래에 술을 금한 이후로 여항(閭巷) 가시(街市)에서 욕을 하며 싸우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믿을 만한가?"
하니,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추조(秋曹)와 경조(京兆)에 쟁송(爭訟)이 영원히 그쳐, 곤장을 시행할 곳이 없으며, 거의 형벌을 쓰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은 술의 금지가 불러온 효험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북도(北道)의 농사 형편에 대해 물으니, 구관 당상(句管堂上)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소문에 실로 놀랍고 참혹한 것이 많습니다. 전미(田米) 1두(斗)의 값이 심지어 1백 전(錢)에 이르는데도 또한 살 수가 없을 지경이니, 민사(民事)가 황급하게도 실로 조석간을 지탱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습니다. 가령 청한 뒤의 진곡(賑穀)을 그 수대로 가져다 먹인다 해도 거의 타는 솥에 한움큼 물을 부은 것과 같을 것인데, 북도의 백성은 복이 없어 조선(漕船)도 치패(致敗)하였습니다."
하였고, 홍상한이 말하기를,
"북백(北伯)은 진곡(賑穀)을 청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 나머지 일찍이 변통하지 못하였고 장청(狀請)도 조금 늦어 때에 뒤진 염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바야흐로 지금 팔도에 흉년이 들어 진휼하지 않을 곳이 없으니, 조정에서 진곡을 넉넉히 지급할 것은 비록 헤아릴 수 없다 할지라도 도신(道臣)의 도리로서는 베풀어 주거나 주지 않거나를 계교하지 말고 때에 맞춰 많이 청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하지 아니하였으니, 도신의 일은 진실로 연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접때 북백이 청한 바는 이미 외람된 것이 아니었다만, 본도(本道)에서 운반하는 곡식으로서 물에 빠진 것이 자그마치 7백 석에 이르렀다. 이것은 도신이 스스로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구처(區處)해야 할 것이나, 남쪽 곡식이 물에 빠진 것이 또 2천 7백 80석에 이르렀다. 한여름이 멀지 아니하니, 지금 구획(區劃)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계속 진휼을 할 것인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한심해진다. 아! 영남의 형편을 어찌 돌아보지 않겠는가마는, 왕이 된 사람이 또한 어찌 차마 북도 백성들을 구렁에 뒹굴게 할 수 있겠는가? 비국(備局)에서는 영남에 분부하여 곧바로 수대로 대신 운반해 준 뒤에 장문(狀聞)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함경 도사(咸鏡都事)로 하여금 일체 운반을 감독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여러 도의 민사(民事)의 늦고 빠름과 비의 많고 적음을 묻자, 구관 당상이 차례로 우러러 대답하였다. 대답을 마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하향 대제(夏享大祭)에는 단지 희생만 살펴보고 곧바로 환궁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채이항(蔡以恒)에게 2품을 증직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채이항은 곧 영남 사람으로 일찍이 병자년066)   난리 때 척화(斥和)하다가 김상헌(金尙憲)·조한영(曹漢英)과 함께 잡혀가 같이 갇혔던 사람인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그 사적을 듣고 이런 명을 내렸던 것이다.

 

김중헌(金重憲)에게 3품을 증직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김중헌은 신천(信川)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활과 말타기에 능하였으며, 생업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무신년067)   봄에 마침 청주(淸州)를 지났는데, 그날 적괴(賊魁) 이인좌(李麟佐)가 병사(兵使)를 죽이고, 성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김중헌이 적괴에게 접근하여 격살(擊殺)하고자 하여 거짓말로 따르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적괴는 계단 아래서 절하게 하고 당(堂)에 오르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그 스스로 당에 올라가 적괴에게 ‘나도 또한 양반이니 나란히 앉고 싶다.’고 하자, 적괴가 의심하고, 그 품안을 뒤져 과연 날카로운 칼을 얻었다. 이에 결박하여 혹독하게 형(刑)을 가하며 그 근각(根脚)068)  을 캐물었으나, 김중헌은 끝내 성명을 말하지 아니하며 단지 의리로 적을 꾸짖기를 그치지 않다가 마침내 피살되었다. 그때 염무 어사(廉撫御史)가 장청(狀請)하였고 해서(海書)에 사문(査問)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 거주와 본말을 알게 되었다. 해조에서 증직을 청하였으나 미처 거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때에 와서 예조 판서 이성중(李成中)이 진달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4월 5일 임인

밤 1경에 유성이 남방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주먹과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다.

 

임금이 돌아온 동지 상사(冬至上使) 해봉군(海蓬君) 이인(李橉)과 부사(副使) 정광충(鄭光忠)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청황(淸皇)이 산동(山東)에 거둥하였다 하는데, 그랬던가?"
하니, 정광충이 말하기를,
"2월에 이미 길을 떠났으며, 황태후도 동행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황태후는 행차가 있으면 언제나 따라간다 하니, 괴이쩍도다. 산동에도 또한 문사(文士)가 많다 하던가?"
하니, 정광충이 말하기를,
"피국(彼國)에서 숭상하는 것은 오직 궁마(弓馬)이니, 어찌 문사를 울흥(蔚興)시킬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학(太學)에 둔 석고(石鼓)는 그 크기가 얼마만 한가? 그리고 자획(字劃)도 또한 분변할 수 있던가?"
하니, 정광충이 말하기를,
"크기는 항아리만 하며, 자획도 또한 볼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시전(詩傳)》 제10권을 읽게 하였다.

 

4월 6일 계묘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편차(編次)를 맡은 사람인 이철보(李喆輔)를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학이 지은 하향(夏享)의 제문(祭文)은 오히려 나의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마땅히 친히 지어야겠다."
하고, 짓기를 마친 뒤 이철보에게 읽어 보라고 명하였다.

 

4월 8일 을사

진시(辰時)에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태묘(太廟)에 나아가 재전(齋殿)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가 면복(冕服) 차림으로 판위(板位)로 나아가 망묘례(望廟禮)를 행하고, 묘(廟) 안을 봉심(奉審)한 뒤에 성기위(省器位)로 나아가 깨끗이 씻었는가를 보니, 집사(執事)가 막(幕)을 들어 깨끗함을 고하였다. 이어서 영녕전(永寧殿)으로 나아가 망전례(望殿禮)를 행하고 성기(省器)의 봉심을 묘의(廟儀)와 같이 하였으며, 성생위(省牲位)로 나아가 희생을 보고 다시 재전으로 들어갔다.

 

4월 9일 병오

4경 1점(點)에 임금이 면복 차림으로 대제(大祭)를 행하였다. 제사를 마치자, 원유관·강사포 차림으로 환궁하였다.

 

4월 10일 정미

영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나아가 치사(致仕)할 해를 넘은 지 이미 6년이 되었다면서 상서(上書)하여 치사(致仕)를 바라니,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향교동(鄕校洞)의 어의궁(於義宮)에 거둥하여 봉안각(奉安閣)에 배례(拜禮)를 행하고 친히 ‘인묘 고궁(仁廟古宮)’이란 네 글자를 써 주며 새겨서 걸게 하였다. 이어서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어제 하향(夏享)을 행하였는데, 이제 봉안각(奉安閣)에 배례하고 뜰에서 전배(展拜)하며, 삼조(三朝)의 어휘(御諱)를 봉심하니,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다. 계해년069)   이후 13년 만에 이곳을 재차 봉심하는 것인데, 올해는 어떤 해인가? 지나간 해를 추억하노라니, 이 마음이 갑절이나 더하다. ‘스스로 힘쓴다[自强]’는 두 글자로 이미 마음속에 다짐하였으니, 후손을 면칙(勉飭)하는 도리에 있어서 이에 임하여 만약 태만(怠慢)하다면, 어떻게 추모하는 속마음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어찌 스스로 힘쓰는 뜻이겠으며, 또한 어떻게 감히 ‘고달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뒤로는 매달 초6일에 강경(講經)을 행하고 16일에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입시하는 것을 정식으로 시행하여 내가 옛날을 사모하고 후손을 면칙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비국 당상은 품정(稟定)할 일이 있으면 비록 정식 외의 것이라 하더라도 내국(內局)에서 입시할 때에 같이 품입(稟入)하는 일을 일체로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환궁할 때 지나는 길에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집에 들러 어가(御駕)를 수행한 장교와 마보군(馬步軍)을 해당 군문(軍門)에서 총과 활쏘기를 시험보여 등급을 나누어 상을 베풀게 하라고 명하였다.

 

4월 11일 무신

3경에 임금이 유신(儒臣)을 소견(召見)하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누차 이 잠(箴)을 강(講)하고 마음속으로 항상 패복(佩服)한 지 이제 10년이 넘었고, 나이 이미 노년이다. 비록 자주 강습(講習)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이것을 가지고 원량(元良)을 경계시켰고 나의 미진한 공부를 닦고 있다."
하였다.

 

4월 12일 기유

임금이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 이성중(李成中)이 전라 감사의 상서(上書)로서 대동미(大同米)를 정퇴(停退)하기를 청했다고 아뢰니, 원래의 상서(上書)를 들여와 읽으라고 명하고, 여러 당상의 뜻을 굽어 물어 보았다. 여러 당상들이 모두 ‘유정지공(惟正之供)은 정퇴할 수 없으니, 뒷날 폐단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저번에 《열성어제(列聖御製)》 가운데서 윤음(綸音)이 있는 것을 보고 내 마음 속으로 감동한 것이 있었다."
하고,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숙종 대왕이 능을 배알하고 부로(父老)를 위유(慰諭)한 윤음을 가져오게 하였다. 승지가 읽어 아뢰자, 하교하기를,
"옛날의 성덕(聖德)이 이와 같으니, 내 어찌 우러러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특별히 상서(上書)하여 청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말하기를,
"이번 삼남(三南)의 대동목(大同木)을 혹은 퇴봉(退捧)하고 혹은 돈으로 내게 한 것은 실로 조정에서 진휼(軫恤)하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수령이 순목(純木)을 준봉(準捧)한 후에 절반을 팔아 돈을 만들어 그 나머지를 취해 쓰기도 하고, 혹은 이미 준봉하고는 퇴봉하라는 명령을 빙자해 상납하지 않기도 하며, 또 민간에 돌려주지 않는 자도 있다고 하니, 한번 엄하게 신칙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입직한 유신(儒臣) 정상순(鄭尙淳)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밀교(密敎)를 주고 나가게 하였다. 판의금 이정보(李鼎輔)가 조명정(趙明鼎)과 황간(黃幹)의 공사(供辭)를 읽어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율문(律文)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정보가 말하기를,
"이미 공용(公用)이고 또 요판(料販)한 것도 아니니, 단지 군향(軍餉)을 제멋대로 유용(流用)한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명정은 제멋대로 군향을 주어 황간으로 하여금 요리하게 했으니, 이것이 요판과 어찌 다르겠는가? 조명정과 황간에게 모두 찬배(竄配)의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4월 13일 경술

전(前) 첨지 윤봉구(尹鳳九)가 동궁에 상서(上書)하여 뜻을 돈독히 하고 학문에 힘써 달라고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홍자(洪梓)를 부교리로, 이인원(李仁源)을 수찬으로, 홍준해(洪準海)를 부수찬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좌참찬으로 삼았다.

 

4월 14일 신해

옥과 현감(玉果縣監) 송명흠(宋明欽)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난 가을에 등대(登對)했던 것은 바로 옆 자리를 비워 재촉하심이 보통 규례를 훨씬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신은 이미 수문(脩門)에 들어가 도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억지로 추승(趨承)하기는 했지만, 진퇴가 법도에 맞지 않고 진달한 말이 적막하기만 하여 또 하문(下問)하심에 대양(對揚)하는 것이 부족하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건대,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하의 총명하고 슬기로움으로써 신의 장단과 허실에 대해 어찌 살피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예우가 지나치게 융숭하고 장유(奬諭)를 가하여 이미 가슴에 새겨 복응(服膺)하심으로써 허여(許與)하고, 또 전 집의 송능상(宋能相)의 상서(上書)에 대한 비답에서 신의 말을 추역(追繹)하여 잊지 못해 하는 뜻을 보이셨으니, 아! 옛부터 소원한 신하로서 윗사람에게 이런 대우를 받은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신은 이미 감격하고 또 두려운 나머지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혹 저하께서 바야흐로 학문에 뜻을 날카로이 두시어 도움을 구하는 데 급하신 나머지 때마침 신이 스스로 온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곽외(郭隗)070)  로부터 시작하라.’는 고사를 쓰심으로써 사방을 감동시켜 어질고 빼어난 사람을 오게 하리라고 생각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신은 한번 죽은 말 뼈다귀가 되어 저하께서 성인이 되시는 공에 기반이 되고 동방의 태평한 다스림을 열 것이니, 비록 죽어 없어지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신의 정성을 드림과 생각하며 바라는 것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 반년 동안 들어보았지만, 서연(書筵)을 드물게 여심은 예전과 같고, 궁료(宮僚)를 드물게 인접(引接)하심이 예전과 같으며, 사령(辭令)에 드러나는 시조(施措)와 사업 중에 입지(立志)·성의(誠意)의 실효(實效)를 징험할 만한 것이 없으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저하께서 깊은 곳에 편안히 거처하시면서 마음쓰는 바가 설어(暬御)·완희(玩戱)에 불과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말을 꾸며 따로 하유한 것도 전례를 좇아 형식적으로 하는 것에 불과하니, 신처럼 비루하고 천한 사람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이 없겠지만, 이와 같이 하면서도 초야의 멀어진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키고자 한다면, 그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놀라 도모할 바를 잃어버리고 얼굴이 붉어져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자처(自處)할 길을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하께서는 하늘이 주신 자질에다 춘추가 또 한창이시니,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것은 단지 입지(立志)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또 더욱이 원손(元孫)이 부쩍 자라 이미 약간척(若干尺)의 옷을 입게 되었으니, 온갖 방도로 보도(輔導)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악한 일을 하고자 하다가도 아들을 보고는 하지 못한다.’ 했던 것입니다. 이른바 ‘악’이란 반드시 대단한 허물이 아니요, 하나의 생각이 해이해지고 나태해지면 곧 악이 되는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깊이 궁구하시고 조용히 살피시어 분발하고 스스로 힘쓰시며, 초야(草野)에 숨은 선비를 널리 구하여 작록(爵祿)에 구애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초빙(招聘)하여 전적으로 보도(輔導)를 맡기신다면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마땅히 일취 월장할 것입니다. 신처럼 하찮은 사람이야 돌아보건대 그 사이에 있고 없는 것이 어찌 족히 영향(影響)이 있겠습니까? 신은 곧 일개 소리(小吏)이니, 입을 놀려 논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민간의 질고(疾苦)와 농사의 어려움과 칠사(七事)071)  에 관계되는 것에 이르러서는 본래부터 저하를 위하여 한번 진달하여 집예(執藝)의 간하는 것072)  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본디 도신(道臣)이 있어 일마다 신문(申聞)하여 빠뜨린 계책이 없으니, 신이 감히 권한을 넘어 거듭 말씀을 드릴 수 없겠습니다만, 삼가 송(宋)나라 때의 문감(門監) 정협(鄭俠)이 기민도(饑民圖)를 그려 올린 고사073)  에 의하여 대략 이목(耳目)에 미친 바를 들어 저하의 인술(仁術)에 한 가지라도 보탬이 될까 합니다. 신이 삼가 올해 실농한 것을 보건대, 신해년074)  ·임자년075)  과 같은 경우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민생의 곤궁함은 도리어 더 심함이 있습니다. 대개 몇 해 동안 백곡이 풍등(豊登)하지 않았고, 목면(木綿)의 경우, 농민이 위로는 공부(貢賦)에 응하고 아래로는 온갖 비용의 밑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7년 동안 재해를 입었음에도 전세(田稅)를 터무니없이 징수하고 기한(饑寒)이 몸에 절박하여 죽음을 면하기에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인데, 환자를 재촉하여 번포(番布)를 징수하는 것이 풍년 때보다 급하여 수갑과 차꼬를 채우는 것이 마치 도적을 다루는 것과 같으니, 이리저리 뒹굴면서 울부짖어 다시는 사람의 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장정들은 흩어지고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나뒹굴어 굶어죽은 시체가 길을 메웠으니, 만약 연말의 애통한 교서와 정봉(停捧)하라는 명령이 없었다면, 백성들은 거의 살아 남지를 못하였을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환자를 정봉하는 일이 빠르지 아니하여 진휼하는 일을 때를 넘기게 만들었던 것이니,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없고, 유리(流離)한 자를 다시 부를 수 없으며, 말라 죽어 귀매(鬼魅)가 된 자는 다시 소생시킬 수 없고, 마지 못해 도적이 된 자는 다시 안집(安集)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여역(癘疫)까지 아울러 번져 굶주린 자들이 먼저 병이 들어 양식을 흩어 주고 죽을 쑤어 먹여도 잇달아 죽으니, 소식(蘇軾)이 이른바 ‘구해 주는 것이 더디어 경비(經費)는 많이 들었으나 도움이 없다.’고 한 것에 불행히도 가깝게 되었습니다. 지금 크나큰 은혜가 흘러 넘치고 만물이 봄기운을 머금고 있습니다만, 이 불쌍한 의지할 때 없는 외로운 백성들은 유독 살아날 뜻이 없습니다. 초근 목피로도 굶주림을 채우지 못하고 농사짓는 달이 이미 다 지나가도 동작(東作)076)  의 희망이 없는데, 봄 조세(租稅)를 다그쳐 독촉하고 거기에다가 채찍질까지 따릅니다. 가장 심한 것은 대동 작포(大同作布)로서 거북이 잔등의 털을 긁는 것과 같은지라, 민정(民情)의 어수선하고 두려움이 겨울보다 심하니, 그 사세로 보아 또 장차 아이를 포대기에 꾸려 업고 사방으로 흩어질 것입니다. 신이 두루 살펴보건대, 국가가 뒤집혀 망하는 화는 도적이 절발(竊發)하는 데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고, 도적이 절발하는 근심은 기한(饑寒)에서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으니, 장각(張角)077)  ·갈영(葛榮)078)  ·이특(李特)079)  ·이자성(李自成)080)  의 부류는 유민(流民) 아님이 없었습니다. 근래에 싸늘한 바람과 서리·우박에 양맥(兩麥)이 모두 시들었는데, 불행하게도 또 사방 수백리에 한재(旱災)가 들었으니, 비록 뜻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미처 도모하지를 못할 형편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몸이 오싹하며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삼가 《주례(周禮)》의 황정(荒政) 열두 가지 인081)  을 살펴보았더니, 첫째는 산리(散利)요, 둘째는 박정(薄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산리는 곧 이미 저장해 둔 공재(公財)를 흩어주는 것이고, 박정은 백성들이 채 바치지 못한 조(租)를 감해 주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두 가지는 황정(荒政)의 큰 강령(綱領)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만, 저하께서 빨리 묘당(廟堂)에 하순(下詢)하시어 우선 올해 봄의 공부(貢賦)로서 미처 바치지 못한 것을 정지토록 해서 각자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특별히 여러 도의 잉여(剩餘)를 따로 준비하는 법을 혁파하여 진대(賑貸)에 전적으로 뜻을 기울이게 한다면, 이른바 박정과 산리의 요점이 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마땅히 검소를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저축의 길을 넓히며 오는 사람을 위로하고 보조해 주어 밭갈고 씨부리는 것을 권하며, 병기를 수리하고 집포(緝捕)하는 길을 넓혀 도적을 막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또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하고 난의 싹을 소멸시키는 급무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정신을 기울여 재단하고 살피소서. 신이 그윽이 호남 한 도를 보건대, 토지가 넓고 비옥하여 해마다 들어오는 조세(租稅)가 경비의 반을 충당하니, 마치 중국의 강회(江淮)지방과 같습니다. 임진년082)  의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칠도(七道)가 판탕(板蕩)되고 삼경(三京)이 폐허가 되었는데, 밖으로는 천병(天兵)을 응접하고 안으로는 행재소(行在所)에 이바지하면서, 병졸을 조련하고 군량을 공급하여 중흥의 대업에 기업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도에 의지했던 것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조종(祖宗)의 배양하신 힘이 심후하고, 뭇 어진 이를 육성(育成)한 공이 바야흐로 새로웠기 때문에 인재가 배출되고 인심이 향상되어 적개심을 가지고 왕사(王事)를 위해 죽는 것을 마치 자제가 부형(父兄)을 호위하듯 하여 끝내 흉봉(凶鋒)을 좌절시켜 대훈(大勳)을 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강이 날로 쇠퇴하고 풍속이 날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무신년083)   이후 인심이 그릇되어, 의리는 캄캄하게 막히고 윤상(倫常)은 썩고 끊어지며, 난적(亂賊)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는가 하면 변괴(變怪)가 서로 잇달았습니다. 대개 그 풍속이 싸움과 송사를 숭상하고, 과시와 거짓을 좋아하며, 명검(名檢)을 천시(賤視)하고 공리(功利)를 귀하게 여겨, 전적으로 의기(義氣)로써 서로 치축(馳逐)하면서 글을 읽고 조용함을 지키는 것을 기꺼이 여기지 않기 때문에 다스리기는 어렵고 어지러워지기는 쉽습니다. 지금 기회를 놓치고 다스리지 못한다면, 장차 백 년을 기다리지 아니하여 오랑캐가 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풍속을 바꾸는 데 교화보다 앞서는 것은 없고, 교화를 세우고 두터이 하는 데는 학교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는 데는 현명하고 덕이 있는 사람을 높이고 본받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삼대(三代)의 성시(盛時)로부터 우리 나라의 열성(列聖)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도리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군현(郡縣)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맨먼저 그 유현(遺賢)을 찾아 비록 한 가지 절행을 가진 선비라 할지라도 반드시 포양(褒揚)하고 사당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실로 쇠퇴한 세상을 위하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신은 부임한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학교를 수흥(修興)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이 다스리는 현(縣)에 이른바 영귀 서원(詠歸書院)이란 것이 있으니, 곧 선정신(先正臣) 김인후(金麟厚)를 향사(享祀)하는 곳이며, 절사신(節死臣) 유팽로(柳彭老)와 집의(執義) 이흥발(李興浡)을 배향(配享)하는 곳입니다. 사당을 건립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사액(賜額)을 하지 아니하였고 묘우(廟宇)는 퇴락되었으니, 선비들이 쓸쓸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간혹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능하지 못한 자가 있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즉 ‘먼 지방의 검박하고 누추한 곳이라 서책을 간직해 둔 것이 전혀 없으며, 비록 대주(大州)의 향교나 서원이라 할지라도 경적(經籍)을 간직해 두지 않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담장을 대한 듯 눈앞이 캄캄하여 허다한 아름다운 자질을 무너뜨렸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한탄하여 아까워할 만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김 인후는 높은 자질과 바른 학문으로서 효릉(孝陵)084)  을 만나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계합(契合)하였으니, 실로 우리 동방의 1천 년에 한 번 있을까 한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다스리고자 아니하여 갑자기 승하(昇遐)하시매, 김인후는 원통한 나머지 피를 머금고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매번 휘신(諱辰)에 혼자 깊은 산속에 들어가 종일 통곡하였고, 여러 번 징소(徵召)하였으나 명에 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묘비(墓碑)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한 마음으로 삼재(三才)085)  를 조화하는 묘(妙)를 포함했고, 한 몸으로 만세 강상(綱常)의 무거움을 맡았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밝고 통달한 지식은 어지러운 사물(事物)의 밖에 초월하였고, 깊이 도달하고 두터이 쌓은 것은 정밀하고 정대한 영역에 나아갔다. 그 맑은 풍채와 큰 절개(節介)는 기운을 용동(聳動)시키고 빛을 떨쳐 완만(頑慢)한 자는 청렴하게 하고 겁쟁이는 바로 서게 하였으니, 비록 백세의 스승이라 해도 가하다.’고 하였으니, 이 몇 구절만으로도 그 조예와 수립이 크게 이루어졌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묘(顯廟)임인년086)  에 장성(長城)의 필암 서원(筆巖書院)에 사액하고 이조 판서, 양관(兩館) 대제학의 추증과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릴 것을 명했던 것입니다. 유팽로는 곧 본현(本縣)의 사람으로서 임진년 난리 때 성균 학유(成均學諭)로서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서행(西行)했는데, 집정 재신(執政宰臣)이 말을 빼앗아 달려가 버리자, 유팽로는 도보로 고향에 돌아와 이웃 고을의 의사(義士) 안영(安瑛)·양대박(梁大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전(前) 참의 신(臣) 고경명(高敬命)을 장수(將帥)로 추대해 문열공(文烈公) 신(臣)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錦山)에서 죽었으니, 선묘(宣廟)께서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좌승지를 추증하고 정려(旌閭)하였으며,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祀)에 사액하였습니다. 이흥발은 곧 문정공(文靖公) 신 이색(李穡)의 후손으로서 글을 읽고 지조(志操)를 지켜 혼조(昏朝) 때 과거를 폐하였다가 계해년087)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병인년088)   겨울에는 동지(同志) 수십 인과 더불어 상소하여 오랑캐 사신을 참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말씨가 늠렬(凛烈)하였습니다. 병자년의 난리 때는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서 남한 산성이 함락되었음을 듣자 통곡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암혈(巖穴)에 은거하였으며, 누차 헌직(憲職)과 큰 고을에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현을 다스림에 유화(儒化)가 크게 있었기에 사민(士民)들이 흥학비(興學碑)를 세워 지금까지 송모(頌慕)함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아! 위에 말한 세 신하는 모두 미관(微官) 원신(遠臣)으로서 변란을 만나자 자정(自靖)하여 충절(忠節)이 빼어났으며, 집에서 효우(孝友)하여 교화가 인리(隣里)에 미쳤으니, 그 덕행과 의열(義烈)은 사전(祀典)에 진실로 합당합니다. 끼친 유풍과 남긴 사랑을 끝내 민멸시킬 수 없을 것인데, 표장(表章)하는 사람이 없어 장차 그 유적(遺蹟)에는 풀만 무성할 것이니, 식견이 있는 사람은 그윽이 탄식한 지 오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조(大朝)께 품하여 은액(恩額)을 내려 주시고 이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송조(宋朝)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과 국조(國朝) 문회 서원(文會書院)의 고사를 상고해 내어 경적(經籍)을 반사(頒賜)하되 역(驛)을 통해 보내주시어 충성을 포장하고 어진 이를 숭상하며 문교(文敎)를 높이고 교화를 숭상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본현의 사민(士民)들이 기뻐 춤추고 거룩한 은택을 노래함은 진실로 말할 겨를도 없을 것이고, 남쪽의 학자들이 반드시 용동(聳動)하고 진작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장수(藏修)·강습(講習)하는 자가 있으면 숙유(宿儒)를 맞이하여 훈적(訓迪)을 맡게 하고 효제(孝悌)와 예의(禮義)를 닦게 하되 윗사람을 친애(親愛)하고 관장(官長)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가르친 뒤에 그 중에서 빼어난 사람을 뽑아 조정에 천거한다면, 10년이 채 되지 아니하여 장차 집집마다 풍악(風樂)이 울리고 마을마다 글 읽는 소리가 들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비의 기습(氣習)이 크게 변하고 의리가 이미 판가름 나서 지기(志氣)가 날로 강해질 것이니, 은연중에 하나의 장성(長城)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십만의 군사를 양성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혹 당연히 김인후와 유팽로는 이미 각각 사원(祠院)이 있으니, 첩설(疊設)할 것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토(南土)는 궁벽하고 멀어 문교(文敎)가 펴지 아니하여 서원이나 향사(鄕社)가 거의 없으며, 약간 있다 해도 내지(內地)의 여러 고을에서 넓게 설치하기를 서로 다투어 도리어 문폐(文弊)가 되는 것에 비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또 본 서원은 이미 금령이 있기 전에 세웠고 특히 사기(士氣)가 미약하여 감히 사액을 청하지 못했던 것이니, 지금 만약 옛집은 그대로 두고 은액(恩額)을 걸기만 한다면, 격례(格例)에도 방해되지 않고 공을 거둠이 클 것이니, 이는 또한 사문(斯文)을 흥기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삼가 예자(睿慈)에 바라건대, 특별히 이해하여 채납(採納)하시고 사람이 불초하다 하여 말을 버리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지(批旨)를 내려 답하기를,
"진달한 바 민사(民事)는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대조께 우러러 품할 일은 또한 등대(登對)하여 품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수찬 이석상(李錫祥)을 불러 봉서(封書)를 주며 말하기를,
"수령 중에 만약 권농(勸農)과 진정(賑政)에 부지런하지 아니한 사람이 있으면, 즉시 봉고(封庫)하고 아뢰어 파직토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교리 홍자(洪梓)에게 《서경》의 주송(周頌)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우연히 한 책을 보았더니 시가 있었는데, 이르기를, ‘세상에서 하고 하는 일이[世上爲爲事] 해도 해도 다하지는 못한다[爲爲不盡爲] 하다가 사람이 떠난 뒤에는[爲爲人去後] 오는 사람이 다시 할 것이다.[來者復爲爲]’라고 하였다. 이 시는 비록 속담(俗談)과 같지만, 그 뜻은 지극히 절실하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술(繼述)이 가장 어려웠는데, 문왕(文王)이 태왕(太王)을 계승하였고 무왕(武王)·성왕(成王)이 능히 계서(繼序)하였으니, 가히 잘 계술하였다 할 수 있다. 지금 흉년을 만나 민생을 구제하는 것이 실로 급무가 되는데, 사단(社壇) 이후로 백성을 위하여 몸을 잊는 뜻은 있건만, 기운이 미치지 못하니, 이것이 염려스럽다. 비록 제갈 양(諸葛亮)의 몸과 마음을 다하는 뜻이 있다 한들 장차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승지 유한소(兪漢蕭)가 말하기를,
"16일에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한다는 정해진 규례가 이미 있습니다. 그러면 삼사(三司)의 입시와 사변 주서(事變注書)089)  를 더 넣는 것도 또한 마땅히 이 예에 의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교리 홍자가 말하기를,
"강경(講經)은 평상시와는 다르니, 강독(講讀)을 어떤 책자로 정해서 행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경연(經筵)이라 이름하지는 않지마는, 한만한 강독과는 다르니, 책은 《중용(中庸)》으로 정해서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4월 16일 계축

임금이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으니, 대개 16일에 비국에서 입시하기로 새로 정식했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기민(飢民)에게 단지 건량(乾糧)만을 지급하므로 거짓으로 서로 속이고 있으니, 연융대(鍊戎臺)에서 죽을 쑤어 먹이는 것만 못하다고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죽을 쑤는 일은 지나치다."
하였다. 광주 유수(廣州留守) 홍봉한(洪鳳漢)이 남한 산성의 지도를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한 산성의 지도를 본 것이 많은데, 이것이 가장 상세하다."
하였다. 홍봉한이 또 수어사(守禦使)가 만약 전처럼 서울에 들어온다면 저절로 폐단을 덜 수 있다고 아뢰자, 임금이 응교 원인손(元仁孫)을 광주 사정 어사(廣州査正御史)로 삼아 사례(事例)의 과람(過濫)한 것을 취하여 상고한 뒤에 모두 이정(釐正)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또 이성중(李成中)·신회(申晦)에게 명하여 안으로는 정원(政院)·옥당(玉堂)·춘방(春坊)·계방(桂坊)부터 밖으로는 각사(各司)의 원역(員役)으로서 《속대전(續大典)》의 원래 수 밖의 증가된 것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정하게 하였다.

 

임금이 매달 강경(講經)할 때 영사(領事)·지사(知事)·동지사(同知事)·참찬관(參贊官)·특진관(特進官)은 전례에 의거하여 입시토록 하고 영사·지사는 비록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2명을 정식으로 하라고 명하였으니, 이성중(李成中)이 진달한 때문이었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17일 갑인

부교리 홍자(洪梓)·부수찬 홍준해(洪準海) 등이 동궁에 차자를 올리기를,
"대조(大朝)께서 자강(自强)의 뜻을 깊이 생각하시고 특별히 매달 초6일에 진강(進講)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대성인(大聖人)의 전학(典學)의 공부와 이연(貽燕)의 계책이 노년이라 하여 혹시라도 해이해지지 않음을 볼 수 있으니, 신 등은 흠앙(欽仰)하고 찬탄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저하께서는 예후(睿候)가 미령(靡寧)하시어 두 연석(筵席)을 정철(停輟)한 지 세월이 오래되었습니다. 신 등은 감히 알지 못합니다만, 오래 끄는 병세가 채 회복됨에 이르지 아니하여 그러한 것이지요? 조섭하는 방도가 신중한 데 힘써서 그러한 것인지요? 아니면 혹 과정(課程)이 오래 이완(弛緩)된 나머지 지기(志氣)가 따라서 편안한 데 익숙해져 수습할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인지요? 신 등이 삼가 열성조(列聖朝)의 고사를 살펴 보건대, 우리 세종 대왕께서는 학문을 좋아하시고 게으르지 아니하시어 일찍이 질병이 있었으나 독서를 그만두지 아니하셨습니다. 문종 대왕께서는 큰 병이 있어 뭇 신하들이 책 보시는 것을 중지하여 안력(眼力)을 쉬도록 할 것을 청하였으나, ‘그만두고자 해도 능히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고 답하셨습니다. 인종 대왕께서는 혹 일이 있어 강(講)을 그만 두게 되면 종일토록 꺼림칙하게 여기셨습니다. 효종 대왕께서는 미령하실 적에 연신(筵臣)들이 잠시 강을 정지할 것을 청하면, ‘연석을 열어 논난(論難)하면 들을 것이 많이 있으니,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답하셨으며, 6월에도 하루에 세 번 연석에 임하셨고, 또 하루에 한 번 진강(進講)을 청하매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현종 대왕께서는 안질이 있었음에도 촛불을 대하여 글을 읽으셨으며, 신료(臣僚)들 중에 더 손상이 될 것을 염려하여 말하는 자가 있으면, ‘겨울 밤이 몹시도 길고 내가 또 잠이 없으니, 글을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아! 거룩하십니다. 오직 우리 열성조(列聖朝)와 저 하늘이 우리에게 끝없는 복록의 근본을 내려주셨습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요순을 본받으려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으라.’고 하였으니, 아! 이것이야말로 어찌 오늘날 저하께서 마땅히 거울삼고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말이 심히 절실하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하였다. 며칠 후 임금이 들어와 보고 하교하여 가장(嘉奬)하고 두 유신(儒臣)에게 태복시(太僕寺)의 말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경조(京兆)의 당상관에게 명하여 시골사람으로서 때마침 서울에 들어온 자를 불러 들이게 하니, 그 수가 60명이었다. 비의 많고 적음과 보리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하순(下詢)하기를 마치자, 직접 윤음(綸音)을 지어 비국 당상에게 명하여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번에 하교한 뒤 만약 그 효험이 없을 것 같으면, 이것은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올해 만약 능히 우리 백성들을 살리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돌아가 뵐 것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대관(臺官)은 모두 귀와 눈이 없으니, 묵형(墨刑)에 처할 자가 많다."
하였다.

 

이길보(李吉輔)를 장령으로, 남운로(南雲老)를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8일 을묘

집의 한사직(韓師直)·지평 조중명(趙重明)·사간 심익성(沈益聖)이 대조(大朝)의 하교 가운데 있었던 ‘귀와 눈이 없으니 묵형에 처할 만하다.’는 말 때문에 인피(引避)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윤동승(尹東昇)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어제 삼가 대조(大朝)의 하교를 받들었는데, ‘여러 대신(臺臣)들이 능히 우리 저하를 광구(匡救)하지 못하여 빈대(賓對)를 오랫동안 비게 만들었다 하였고, 심지어는 성탕(成湯)의 관형(官刑)090)  의 벌을 이끌어 신칙하였으니, 신은 그 명을 듣고 두렵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신의 죄가 묵형에 해당하는 것을 어찌 오늘을 기다린 뒤에야 스스로 알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걸맞지 아니한 직임이라, 본디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가 있었기 때문에 전후에 걸쳐 대직(臺職)에 제수되었으나 한결같이 위포(違逋)하여 일찍이 한 마디 말로도 광구하여 예정(睿政)의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된 적이 없었으니, 관이 임무를 잃어버린 죄는 신이 실로 으뜸이 됩니다. 따라서 마땅히 상형(常刑)을 받아 지위를 가진 자의 경계로 삼아야 함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성상께서 준절하게 책망하시고 심지어 당율(當律)로써 하유하기까지 하셨으니, 비록 함용(含容)의 덕을 입어 요행히 묵형(墨刑)의 율을 모면하였지마는 부월(鈇鉞)의 엄한 하교는 그래도 천속(天屬)의 형벌입니다. 허물과 흠이 낭자하여 스스로 설 수가 없으니, 일각인들 언책(言責)의 반열에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지평 최태형(崔台衡)이 상서하여 인혐(引嫌)하고, 이어서 매일 강연(講筵)을 열어 학업을 힘써 닦고, 매일 뭇 신료를 인접(引接)하여 다스리는 계책을 부지런히 물을 것을 권면하니, 왕세자가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무신 전강(武臣殿講)을 행하고, 병조로 하여금 선전관(宣傳官) 권식(權拭)에게 곤장을 치게 하였다. 대개 임금이 선전관 4명을 파견하여 보리농사의 형편을 살펴보고 오게 하였는데, 권식이 을람(乙覽)091)  에 대비한다면서 이삭이 나는 보리를 뿌리채 뽑아 바쳤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4월 19일 병진

장령 이길보(李吉輔)가 동궁에 상서하여 병을 다스리는 근본은 섭심(攝心)보다 나은 것이 없고, 섭심의 방도는 오로지 강학(講學)에 있다고 권면하니, 왕세자가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판부사 이종성(李宗城), 광주 유수(廣州留守) 홍봉한(洪鳳漢), 사정 어사(査正御史) 원인손(元仁孫)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이 종성에게 묻기를,
"남한 산성의 일을 경이 시험삼아 그 편리 여부를 말해 보라."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이번에 남한 산성에 보낸 어사는 무슨 일로 내 보내셨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수(留守)가 ‘한번 진(鎭)을 나간 이후로 광주가 곧 외공방(外工房)이 되어 여러 가지 폐막(弊瘼)에 손을 대기가 아주 어렵다.’며 어사를 보내 한번 이정(釐正)할 것을 청하였기에 명했던 것이다."
하니, 이종성이 말하기를,
"어사 원인손이 신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남한 산성 원역(員役)의 요과(料窠)가 너무 많아 그것을 이정하기 위해 보낼 것을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원역의 요과는 유수가 스스로 이정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 조정이 엄하다면, 어찌 감히 어사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체통이 크게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지할 수 없으니, 어사로 하여금 다른 일을 이정토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대신은 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신도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뜻은 오로지 어사를 청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단지 요과 때문만이라면 과연 명분(名分)이 작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어사로 하여금 가서 군향(軍餉)을 살펴 보게 한다면 그 명분이 조금 옳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요과는 저절로 그 속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설령 신이 힘을 다해 한다 하더라도 모래를 모아 제방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유수의 지위가 높기 때문에 그 봉직(奉職)하는 바가 끝내 부윤(府尹)만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수어사(守禦使)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영재(營財)를 함부로 쓸 수가 없었으나, 지금은 영고(營庫)가 함께 관청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범하여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유수를 혁파하고 부윤을 복구시키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장신(將臣)의 사체로는 감히 스스로 진달할 수가 없습니다마는, 만약 어사를 보내어 작정해 수를 나누게 한다면 혹 폐단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앙달(仰達)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이종성이 말하기를,
"수어사는 상관이 되기 때문에 유수가 두려워하고 꺼립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어사가 부윤을 겸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으니, 환곡이 날로 모손(耗損)이 되는 것도 또한 반드시 이때문인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본부(本府)를 맡았을 때 12만 석이던 것이 6년 사이에 남은 것은 단지 6만 석이라고 하니, 1년에 1만 석이 줄어든 것입니다. 이번에 어사를 보내어 만약 이 일을 이정한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선신(先臣)이 부윤으로 있을 때는 단지 두 명의 군졸이 주야로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는데, 들으니 그 뒤에 증가하여 5, 6명이 되었다 합니다. 신이 유수가 되었을 때 여섯 개의 촉롱(燭籠)을 말 앞에 늘어 세우는지라 깜짝 놀라 물어보니 ‘훈국(訓局)의 예에 의해 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그 장대(張大)하게 함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사는 군향(軍餉)을 이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원인손이 말하기를,
"군향의 일은 단지 문서만 봅니까? 아니면 번고(反庫)092)  까지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번고하는 것은 어렵다. 군수은(軍需銀)과 별고(別庫)를 직접 적간(摘奸)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어서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이번에 남한 산성 어사의 이른바 이정할 일이란 다음과 같다.
1. 12만 석의 군향이 6년 사이에 겨우 6만석만 남아 있다고 하니, 환곡을 받음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새나간 것이다.
1. 수어사를 광주 유수로 삼은 것은 뜻이 대개 수어사의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균역청(均役廳)에 보태고자 한 것으로, 그때 획급(劃給)한 것이 5백 석에 불과했으니, 마땅히 균역청에 바쳐야 할 것은 곧 4분의 3이 된다. 그뒤 제도(諸道)의 감영(監營)·병영(兵營)의 영속미(營屬米) 외에 제반 복정(卜定)093)  을 탕감해 주었는데 이 또한 뒤섞여 들어갔다고 하니, 이미 수어사를 유수로 삼은 본래의 뜻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1천 5백 석의 곡식을 얻었는데 어찌 그래도 부족하여 근 1천 석의 모곡(耗穀)을 청해 얻었고 이미 얻은 뒤에 그 모곡을 혹은 다 써서 도리어 본래의 군향을 썼으니, 이 또한 모축(耗縮)의 한 단서인 것이다.
1. 그때 하교한 것이 어떠하였던가? 그럼에도 무릇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 너무 장황(張皇)하게 떠벌렸으니 군향이 날로 줄어들고 용도가 텅빈 것은 전적으로 이에 말미암는 것이다. 어사는 이 세 가지 일에 대해 그 폐단을 궁구하고 혁파할 것을 생각하여 조목별로 나열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이종성에게 이르기를,
"뒷날 전강(殿講)의 일차(日次) 때 경도 모름지기 같이 들어오도록 하라."
하고, 또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일후에 비국(備局)에서 입시할 때에 원임(原任)도 또한 일체 입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번에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 두 영(營)에 대해 번상(番上)을 정지시켰기 때문에 도감군(都監軍)만 장번(長番)을 서게 되었으니, 딱합니다. 금위영·어영청의 군사가 병이 난다면, 도감의 군사만 유독 병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에 이홍술(李弘述)이 훈장(訓將)이 되었을 때 금위영·어영청의 번상을 정지시킨 요미(料米)를 훈국(訓局)에 이급(移給)하여 훈국의 번을 갈아드는 군사는 위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에 또한 폐지되었습니다만, 신의 생각에는 금위영·어영청에서 으레 받는 돈을 훈국에 이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므로 앙달(仰達)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훈장(訓將) 김성응(金聖應)·금장(禁將) 구선행(具善行)을 입시하라 명하여 곡절을 하순한 뒤에 이어서 전교를 내려 금위영·어영청 두 영의 여수전(旅需錢)을 초하루가 되기를 기다려 도감에 실어보내어 세 곳의 체직군(替直軍)에게 나누어 주게 하되, 비록 이번 이후에도 두 영의 향군(鄕軍)이 정번(停番)하는 일이 있으면,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는 뜻을 정식으로 삼게 하였다. 유신(儒臣) 홍재(洪梓)가 〈《시경》〉의 대명장(大明章)을 읽고 홍준해(洪準海)가 《시경》의 역박장(棫樸章)의 문의(文義)를 읽기를 마치자, 홍자가 이제 막 북막(北幕)으로부터 오면서 목격한 북민(北民)들이 사망한 정상을 진달하고, 이어 남관(南關) 두 창고의 곡식을 먼저 이획(移劃)해 들여보내어 종자와 양식을 도와 주게 하고, 영남의 곡식을 더 획급(劃給)하여 남관의 이획한 수를 채울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때가 늦은 것 같다. 백성의 급함이 이와 같다면, 유신이 올라온 뒤 즉시 마땅히 써서 올려야 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애초 연석(筵席)에서 마땅히 진달했어야 할 것인데, 이제 비로소 진달하였으니 생색을 내는 뜻에서 나온 것 같다. 모두 베푸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마땅히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내 뜻이 이러하므로 유신을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4월 20일 정사

왕세자가 낙선당(樂善堂)에 앉아 여러 승지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들어오게 하였다. 도승지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것은 곧 심기(心氣)가 침체(沉滯)되는 것인데, 날씨가 점차 뜨거워지니, 원하건대 창호(窓戶)를 굳게 닫아두지 마소서."
하고, 우승지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오늘 공사를 가지고 입대(入對)하게 하시니, 실로 기쁨과 다행함을 이루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정사(政事)가 이에 그치지 아니하니, 원하건대 이것을 가지고 정사에 부지런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마소서. 신 등이 입대하는 것이 감히 저하께 도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인주(人主)가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과 천하게 지낼 때가 적고, 어진 사대부와 친하게 지낼 때가 많으면 훈도(薰陶)를 함양(涵養)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에 대해 깊이 유념한다면 나랏일이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으며, 좌부승지 이이장(李彛章)은 말하기를,
"이처럼 대조(大朝)께서 분발하고 힘쓰시는 때를 당하여 예후(睿候)가 미령(未寧)하시므로, 신이 접때 연석(筵席)에 들어가자 대조께서 심히 고민하고 염려하셨습니다. 대간(臺諫)의 피혐(避嫌)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으나, 또 가지고 들어오라고 명하시니, 지금부터 자주 신린(臣隣)을 인접(引接)하시는 것이 바라는 것입니다."
하고, 우부승지 유한소(兪漢蕭)는 말하기를,
"만약 예후가 평상으로 회복되신다면, 학문에 부지런하고 정사에 부지런히 하는 두 가지가 그 마땅함을 얻을 것이니, 대조께서 오로지 질병을 근심하시는 것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모두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4월 22일 기미

부수찬 홍준해(洪準海)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좌참찬 이창의(李昌誼)의 서본(書本)을 얻어 보았더니, 신이 지난번에 광주(廣州)의 일을 지적하여 논한 것을 가지고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고 심지어는 ‘들은 바가 본 바와 다르다.’고 하는가 하면, 또 ‘분명치 않게 말하였다.’고 하여, 마치 신이 꾸며대고 흐리멍덩하게 말한 것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신은 지극히 의혹스러움을 이루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대개 신이 봉명(奉命)한 행차는 가고 올 적에 모두 남한 산성을 경유하였습니다. 그리고 성 아래 촌락에서 들었던 것은 그 말이 각각 같지 아니하여 믿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억지로 빼앗아 환자를 채운 일에 있어서는 말하기를, ‘군교(軍校)를 풀어 엄하게 독촉하고 몽둥이로 치는 것이 낭자하였으며, 솥과 소와 말을 빼앗아 팔아 환곡을 채웠으므로, 피잔(疲殘)한 사람만 치우치게 그 해를 입었고 재력(財力)이 있는 자는 면하였다.’ 하였고, 창고를 봉하는 것이 기한을 넘긴 일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이 있고 난 이후 비록 민간에 명령을 전하였으나, 빼앗은 잡물(雜物)은 미처 구처(區處)하지 않았고 수봉한 환자는 원래의 수에 절반도 되지 않은 때문에 진짜로 창고를 봉한 것은 기한을 물려 5, 6일 뒤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혹은 날짜를 계교하여 비난과 조롱을 가하였는데, 여러 곳에서 들은 것이 마치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았으니, 진실로 이미 귀에 익숙하고 마음속으로 놀랐던 것입니다. 연대(筵對)할 때에 이르러서는 하순(下詢)하시기를 기다려 비로소 사실에 의거하여 곧바로 진달하였고, 자질구레한 곡절에 이르러서는 아뢴 바가 오히려 그 들었던 바를 남김없이 아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필경에 감단(勘斷)한 것은 성상의 재단(裁斷)에서 나왔으니, 신을 소략하고 유약하다고 책망하는 것은 그래도 혹 옳을지 모르겠으나, 이제 곧장 사실대로 하지 아니하고 곧이 곧대로 하지 않았다는 죄과로 돌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을 처분한 뒤에 중신(重臣)이 인구(引咎)한 것은 진실로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만, 성을 내면서 조절하고 억제하는 것이 너무 지나친 것은 이해할 수가 없으니, 아무리 감싸주고 비호하기에 급급하다 할지라고 유독 사면(事面)이 다름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니, 왕세자가 예사 답을 내렸다.

 

4월 23일 경신

이세택(李世澤)을 집의로, 심발(沈墢)을 사간으로, 김원행(金元行)·이기덕(李基德)을 장령으로, 남태저(南泰著)·윤재겸(尹在謙)을 지평으로, 이수훈(李壽勛)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비국(備局) 유사 당상(有司堂上) 이성중(李成中)·한익모(韓翼謨)와 시독관(侍讀官) 홍자(洪梓), 검토관(檢討官) 홍준해(洪準海)를 소견(召見)하였다. 이성중이 말하기를,
"외방의 적환(賊患)은 진실로 작은 근심거리가 아닌데, 예산(禮山)에는 더욱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전(前) 현감이 죽고 새 현감이 채 부임하기 전에 새 원이라고 가칭(假稱)하고 도임(到任)한 자가 있었는데, 며칠을 지난 뒤에야 비로소 고을 사람들에게 잡혀 갇혔다고 합니다. 이는 심상한 절발(竊發)과는 다름이 있으니, 진실로 일대 변괴(變怪)인 것입니다. 그 죄인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하게 핵실(劾實)하여 처단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도신에게 명하여 엄하게 신문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성중이 말하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익보(李翼輔)의 장달(狀達)에 이르기를, ‘재황(災荒)이 매우 혹독하여 유산(流散)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때에 적정(籍政)을 설행한다면 호구(戶口)의 원총(元總)이 반드시 장차 크게 줄어들 것이니, 보릿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호적을 거두게 한다면 구차하게 허위(虛僞)로 채우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호구의 성적(成籍)을 보릿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는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대신(大臣)이 행공(行公)하지 않고 있으며, 보릿 가을이 장차 다가오고 있으므로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어서 유신(儒臣)에게 《황명강목(皇明綱目)》을 읽으라 명하였고, 또 〈《시경》의〉 대아편(大雅篇)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저녁에 또 유신을 입시하게 하고, 홍자(洪梓)는 생민편(生民篇)을 읽고 홍준해(洪準海)는 행위장(行葦章)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문왕(文王)이 무왕(武王)의 때를 당하여 8백 제후가 기약을 정하지 않고 모였다면, 또한 장차 어떻게 했을 것인가?"
하니, 홍자가 말하기를,
"옛부터 성현들이 문왕·무왕 사이에 대해 약간의 차등은 보였습니다만, 주(紂)의 나라가 스스로 어지러워져 천하가 스스로 돌아왔다면, 역수(曆數)가 있는 바이니, 문왕도 또한 반드시 사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홍준해는 말하기를,
"역수(曆數)에 힘써 응하는 것이 마땅히 무왕과 더불어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물으니, 주서(注書) 유서오(柳敍五)가 말하기를,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돌아가는 바라 비록 ‘면할 수 없다.’ 하지마는 문왕은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둘을 가지고도 은(殷)나라를 섬겼습니다. 성인은 한 번 그 마음을 정하면 시종 일관 반드시 변하지 않을 것이니, 신의 생각에는 무왕의 일을 문왕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4월 24일 신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졸(卒)하였다. 박문수는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임금이 알아줌을 받았으며, 무신년094)   역변(逆變) 때에 조현명(趙顯命)과 더불어 함께 원수(元帥)의 막부(幕府)를 도와 개가를 아뢰고 돌아오니 임금의 권우(眷遇)가 날로 융숭하여 벼슬이 숭품(崇品)에까지 이르렀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호조 양부(兩府)에서 이정(釐正)하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다. 그러나 연석(筵席)에서 때때로 간혹 골계(滑稽)095)  를 하여 거칠고 조잡(粗雜)한 병통이 있었다. 또 이광좌(李光佐)를 사표(師表)로 삼아 지론(持論)이 시종 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다. 그가 졸함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

 

임금이 통명전(通明殿)에 나아가 편차(編次)를 맡은 사람인 이철보(李喆輔)를 소견(召見)하였다. 통명전의 어필 소지(御筆小識)를 짓기를 마치자,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아! 영성(靈城)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나를 섬긴 것이 이제 이미 33년이다. 자고로 군신(君臣) 중에 비록 제우(際遇)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어찌 나의 영성과 같음이 있으랴?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이며, 영성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깊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소하(蕭何)는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일컬었던 바 삼걸(三傑) 중 한 사람이었건만, 도리어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096)  , 언제나 《사기(史記)》를 읽을 때면 마음 속으로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겨왔다. 작년의 일은 한나라 고조의 소하에 대한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미 ‘그 마음을 안다.’고 하였으니, 어찌 그 신문을 기다릴 것이며, 이미 ‘제우가 있다.’고 하였으니, 뭇 의심이 풀리는 것이 어찌 어려우랴? 지금 생각해 보건대, 비단 한나라 고조에 대해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절실히 개탄하는 바가 있다. 그 나이 비록 늙었으나 기력은 쇠하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 빌미가 어디에 있었던가? 이 소식을 듣고 보니, 슬픔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으랴? 더욱 애석한 것은 벼슬이 경재(卿宰)에 그친 것이다. 이것이 어찌된 연유이겠는가? 뜻은 대개 〈당(黨)을〉 곡호(曲護)한 때문이었다. 아! 영성이 이미 갔으니, 그 누가 나의 마음을 알 것인가? 아! 무신년에 충성을 다한 것이 어찌 삼재(三宰)에 그치고 말 것인가? 이미 옛 전장(典章)이 있으니, 어찌 품하기를 기다릴 것인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의정(議政)에 추증하여 나의 옛날의 공을 생각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그리고 시호(諡號)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거행할 것이며, 무릇 여러 가지 일들은 한결같이 숭품(崇品)·친공신(親功臣)의 예에 의해 거행하도록 하라. 그 아들도 또한 전례를 좇아 대호군(大護軍)으로 삼고, 복(服)이 끝나기를 기다려 해조로 하여금 조용(調用)하게 하라. 제문(祭文)은 친히 지어 내릴 것이니, 상례(常例)에 구애되지 말고 성복(成服)이 지난 뒤에 즉시 치제(致祭)토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유신(儒臣)이 입시하였을 때 한 가지 문의(文義)로 논난(論難)한 것이 있었는데, 문왕(文王)이 만약 무왕(武王)의 때를 당하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하니, 편차(編次)를 맡은 사람인 이철보(李喆輔)가 말하기를,
"문왕은 반드시 무왕의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둘을 가졌기 때문에 은(殷)나라를 섬겼던 것인데, 만약 셋으로 나누어 셋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의 견해는 어떠한가?"
하니,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신 또한 문왕이 반드시 무왕의 목야(牧野)의 일097)  을 하지 않고, 마땅히 미자(微子)098)  를 세웠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였다.

 

4월 25일 임술

창릉(昌陵) 정자각(丁字閣)에 불이 났다.

 

예조 판서 이성중(李成中)이 청대(請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능에 화재가 있으니, 반드시 변복(變服)하는 의절(儀節)이 있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성중이 말하기를,
"이것은 능에 불이 난 것과는 다름이 있으니, 변복하는 의절이 없음은 선정신(先正臣)이 이미 정한 예가 있습니다. 단지 위안제(慰安祭)가 심히 급하고 봉심(奉審)과 정자각의 중건(重建)이 또한 급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해야 하겠는가?"
하니, 이성중이 말하기를,
"전의 예는 중건청(重建廳)을 설치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이어서 대신(大臣)에게 봉심을 명하였다. 그리고 해당 참봉(參奉)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하게 신문하여 구초(口招)해 아뢰게 하고, 수복(守僕)과 군인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하게 신문해 취복(取服)하여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좌부승지 이이장(李彛章)에게 명하여 창릉(昌陵)으로 달려가 사건의 정상을 살펴보고 참봉과 수복·하인에게 엄하게 물어 아뢰게 하였다.

 

4월 26일 계해

임금이 창릉을 봉심한 대신과 예조 판서·호조 판서를 인견(引見)하고, 전교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아! 즉위한 지 30년 동안 봉선(奉先)에 한 가지 일도 정성을 드리지 못해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번 창릉 정자각의 화재(火災)는 병진년099)  을 두 번 지난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먼저 승선(承宣)이 봉심하여 상주(上奏)한 것을 들었고 지금 대신이 돌아와 상주하는 것을 들었는데, 비록 전에 없던 예(例)라 하여 담복(淡服)의 제도는 시행하지 않았지만, 아! 이것은 나의 얇은 효성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나의 얕은 효성 때문인 것이다. 막중한 능침(陵寢)의 신각(神閣)을 짓기 전에는 어찌 감히 정전(正殿)에 앉아 있으며, 정문(正門)으로 다니겠는가? 중건(重建)하는 날을 가리되, 예조로 하여금 즉시 가까운 시일 내로 거행하게 하라. 그리고 검소한 덕을 우러러 본받아 목물(木物)은 복정(卜定)하지 않고 서울에 저장해 둔 것을 가져다 쓸 것이며, 석재(石材)는 탁마(琢磨)해야 할 것은 탁마해야 하겠지만, 모두 옛돌을 쓰도록 하라. 제목을 운반하는 데는 군문(軍門)의 거자(車子)를 쓰고, 역군(役軍)은 모군(募軍)을 써서 결코 백성을 부리지 말라. 기읍(畿邑)에 비록 복정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올해 경기 백성들에게 어찌 폐를 끼칠 수 있으랴? 저치미(儲置米)에서 회감(會減)하도록 하라. 그리고 무릇 여러 원역(員役)과 공장(工匠)은 신유년100)  에 비해 간략함을 따르도록 힘쓰라. 중건청 당상(重建廳堂上)은 오늘 정사(政事)에서 계하(啓下)하라."
하였다.

 

정언충(鄭彦忠)을 장령으로, 이태중(李台重)·홍익삼(洪益三)을 창릉 정자각 중건청 당상으로 삼았다.

 

4월 28일 을축

유신(儒臣)을 불러 《시전(詩傳)》을 읽으라 명하였다.

 

4월 30일 정묘

임금이 편차(編次)를 맡은 사람인 이철보(李喆輔)와 광주 사정 어사(廣州査正御史) 원인손(元仁孫), 교리 서명응(徐命膺), 광주 유수(廣州留守) 홍봉한(洪鳳漢)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친히 《숭정정축소사성력기(崇禎丁丑所賜星曆記)》를 지어 이철보에게 읽으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원인손에게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읽으라고 명하고, 조목조목 하순(下詢)하여 전 유수 홍계희(洪啓禧)에게는 탈고신 일등(奪告身一等)의 율(律)을 시행하고, 서명빈(徐命彬)·이창의(李昌誼)는 모두 파직하였다. 홍계희는 군향(軍餉)으로 돈을 만들 것을 묘당(廟堂)에 청하여 허제(許題)를 얻은 뒤에 도리어 수어청의 돈으로 사들였기 때문이고, 서명빈·이창의는 모두 수어청의 재물을 혹은 미리 내려 주기도 하고, 혹은 빌려주기를 허락하여 창고의 저축이 점차 줄어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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