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8권, 영조 32년 1756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5.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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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병인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이익원(李翼元)을 사간으로, 홍자(洪梓)를 헌납으로, 송문재(宋文載)를 교리로, 서종급(徐宗伋)를 판윤으로 삼았다.

 

7월 3일 무진

헌부 【지평 유당(柳戇)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서연관의 직임이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선발입니까? 그런데 전 현감 최재흥(崔載興)은 본래 비열하고 패려한 자로서 외람되게도 초선(抄選)에 끼어들었습니다만, 남쪽 고을에서의 더러운 행실은 지금까지도 웃음거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암행 어사의 계사(啓辭)와 도신의 조사가 이미 공안(公案)을 이루었음에도 아직까지 성세(聖世)의 정초(旌招)를 욕되게 하고 있으니, 사방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합니다. 청컨대 전 현감 최재흥을 초선의 명적(名籍)에서 이름을 깎아버리게 하소서. 음홍(陰虹)이 해를 가린 것이야말로 어떠한 이변(異變)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입직했던 옥당관 이세택(李世澤)·정순검(鄭純儉)은 그 다음날 혹은 상서하여 걸군(乞郡)109)  하기도 하고 혹은 차자를 올려 족자를 바치기도 하였는데 일찍이 한마디도 천재(天災)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었으니, 꼭같이 익직(溺職)의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청컨대 정순검은 파직하고 이 세택을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소서.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하는 일은 사체가 지극히 중대하니, 오로지 한결같이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에 맡겨야 마땅한 것이고, 그 자손된 자가 감히 참견하여 간섭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호조 참의 신경(申暻)은 지난번 한 장의 글에서 선정신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의 도덕과 공렬(功烈)을 거창하게 논하면서 종향(從享)해야 한다는 뜻을 드러나게 보였는데, 신경은 곧 문순공의 외손입니다. 정(情)을 따라 곧바로 청함은 사체를 소중히 여기고 혐의(嫌疑)를 멀리하는 뜻이 아니니, 청컨대 신경을 파직하소서. 차대의 사체는 얼마나 존엄한 것입니까? 간신(諫臣)이 이미 중신의 코를 골며 잔 것을 공척(攻斥)했으니, 조정의 체통을 엄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문비(問備)110)  에 그칠 수 만은 없습니다. 청컨대 해당 중신(重臣)을 파직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최재흥의 일은 그때 이미 대조(大朝)의 하교가 있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두 유신(儒臣)은 모두 파직하는 것이 옳다. 호조 참의의 일은 지난번 진서(陳書)한 것이 본디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산림이 숙덕(宿德)한 선비를 초치해야 할 때를 당하였으니,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논달(論達)한 바가 너무 정도에 지나친 데에 관계된다. 중신의 일은 이미 문비하였으니, 파직은 지나치다. 모두 빨리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신에게 《시전(詩傳)》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요사이 주금(酒禁)이 어떠한가를 물으니, 좌윤 신회(申晦)가 ‘사부가(士夫家)에서 홍로주(紅露酒)를 적발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고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금법(禁法)이 만약 해이해진다면 나라가 어찌 될 것인가?"
하고, 전교를 써서 다시 경조(京兆)와 팔도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7월 4일 기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다. 명릉(明陵)의 전알을 8월 초 길일로 정하였는데, 기영(畿營)에 신칙하여 연로(輦路)는 절대 넓게 닦지 말며 화곡(禾穀)을 범하지 말게 하였다. 그리고 횃불을 꽂고 길을 닦는 등의 역사(役事)는 모두 저치미(儲置米)를 지급하고 민력(民力)을 쓰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법강(法講)을 행하였다. 강을 마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시종신(侍從臣) 중에 걸군(乞郡)하는 사람이 많으니, 사람들이 모두 피해 떠나고자 하는 뜻이 있어 그런 것이다. 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김상로(金尙魯)가 병자년111)  에 순국(殉國)한 사람인 허완(許完)·민영(閔泳)을 일체로 증시(贈諡)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특별히 명하여 남연년(南延年)에게 찬성(贊成)을 더 증직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7월 6일 신미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양지당(養志堂)에 나아가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와 판부사 유척기(兪拓基)·이종성(李宗成)을 소견하였다. 대왕 대비가 어찬(御饌)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임금이 사간 이익원(李翼元)의 글을 보고 특별히 명하여 말[馬]을 하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익원이 동궁(東宮)에 상서하였는데, 대조(大朝)의 《상훈(常訓)》과 《훈서(訓書)》 가운데서 ‘경천 애민(敬天愛民)’ 등의 말을 부연해 헌계(獻戒)하였고, 하단에서는 유일(遺逸)의 선비를 전조(銓曹)의 망(望)에 통의(通擬)하고 먼 지방의 선비를 대각(臺閣)에 통의할 것을 청하였으며, 경기 수사 유주기(兪胄基)와 풍덕 부사(豊德府使) 김양의(金養義)는 혹은 정신이 혼모(昏耗)하고 노쇠하였으며 혹은 뇌물의 문을 넓게 열어 놓는 것으로 모두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가져오도록 명하여 승지로 하여금 읽어 아뢰게 한 뒤 유주기와 김양의는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고, 이익원에게는 말을 하사해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게 했던 것이다.

 

지평 유당(柳戇)을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깎아버리고, 호조 참의 신경(申暻)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유당이 새로 상달한 것이 있음을 아는가?’ 하고 물으니, 이에 신경이 전날 상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승지에게 읽으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신경이 그르다. 이 일은 본디 사림(士林)의 공의(公議)가 있는 법이니, 신경은 간섭의 긴요치 않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뜻을 쓴 곳은 전적으로 종향(從享)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억(扶抑)’ 등의 글자를 말하고자 하여 이에 이런 상서를 했던 것이다. 유당은 비록 외손으로서 간섭함을 그르다고 했지만, 그 뜻이야 어찌 유독 외손의 간섭을 그르게 여긴 것이겠는가? 내가 모두 알고 있다."
하고, 마침내 양쪽을 죄주게 하였다.

 

7월 7일 임신

전 현감 이양원(李養源)이 상서하여 시직하였으나, 왕세자가 우악한 답으로 다시 불렀다.

 

7월 8일 계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였다. 영사·감사·관각 당상에게 참권(參圈)한 여러 사람을 시험하라고 명하여 이담(李潭) 등 6명을 뽑았다.

 

임금이 친히 동조(東朝)께 진하(陳賀)하였다. 이때 성수(聖壽)가 주갑(周甲)을 넘긴 지 이미 2년이었고, 동조의 보령(寶齡)도 또 7순에 꽉 찼으니, 실로 지난 사첩(史牒)에 없던 경사였다. 임금이 원조(元朝)에 책문(冊文)을 올려 진하하는 것만으로는 오늘의 경사를 칭하(稱賀)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익선관(翼善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친히 전문(箋文)을 가지고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와 문무 종친(宗親), 재신(宰臣)으로서 나이 60세 이상을 거느리고 나아가 치사(致詞)와 표리(表裏)를 올렸으며 헌가(軒架)를 만안문(萬安門) 밖에 설치했다. 왕세자는 원유관(遠游冠)과 강사포 차림으로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공손히 맞이하고 예(禮)를 행하였다. 대개 이에 이틀 전에 임금이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들을 진전(眞殿) 재실(齋室)에서 소견하였는데, 동조(東朝)께서 선조(先朝)의 옛 신하들이라 하여 특별히 어선(御膳)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사흘 안에 헌하(獻賀)하고자 하여 이날 거행했던 것인데, 일이 창졸간에 있어 의주(儀註)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예조 판서 윤급(尹汲)을 특별히 해직(解職)시켰다. 이어서 다음날 유무(儒武) 60세 이상의 정시(庭試)를 친히 시행할 것을 명하고, 이름을 ‘기구 정시(耆舊庭試)’라 하였으니, 또한 기쁨을 분식(粉飾)하는 바였다.

 

7월 9일 갑술

밤에 유성(流星)이 패과성(敗瓜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자 쯤이었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이석재(李碩載)를 지평으로, 이태중(李台重)을 부제학으로, 조영국(趙榮國)을 예조 판서로, 정형복(鄭亨復)을 형조 판서로, 조재홍(趙載洪)을 대사성으로, 이성중(李成中)을 좌부빈객으로 삼았다.

 

수원 부사 김선행(金善行)이 상서하여 백성들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형편과 양식이 떨어져 농사를 폐하게 된 정상을 갖추어 진달하고, 유고향미(留庫餉米)를 얻어 농사 지을 물자로 더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기로과(耆老科)를 베풀고 이가우(李嘉遇) 등 6명을 뽑았다. 문무 장원은 특별히 첨중추(僉中樞)에 부직(付職)하였다.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진하(陳賀)를 받았다. 이날 동조(東朝)가 언서(諺書)로 하교하기를,
"주상께서 만약 진하를 받는다면 내 장차 마음이 즐겁겠노라."
하니,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자교(慈敎)가 이와 같으시니, 어찌 감히 사양하랴?"
하였다. 왕세자가 문무 백관을 인솔하여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에 치사(致詞)와 표리(表裏)를 올렸으며, 진하에 참여한 근신(近臣)에게는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진하가 끝나자 팔도와 삼도(三都)에 하유(下諭)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사(政事)를 거행토록 하고, 금오와 추조에서는 관계되는 바가 중대한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모두 석방케 하였으며 도년(徒年) 및 이조·병조의 세초(歲抄)112)  를 용서해 주되 사전(赦典)에 의거해 거행토록 하게 했다.

 

7월 10일 을해

《궁원식례(宮園式例)》가 완성되었다. 감동(監董)한 여러 신하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궁원(宮園)의 의문(儀文)·도수(度數)가 태묘(太廟)와 거의 차이가 없으니, 오늘 찬성(贊成)한 여러 신하들에 대해 뒷날 반드시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26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궁원(宮園)의 의문(儀文)·도수(度數)가 태묘(太廟)와 거의 차이가 없으니, 오늘 찬성(贊成)한 여러 신하들에 대해 뒷날 반드시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7월 11일 병자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부제학 이태중(李台重)이 바야흐로 보양관(輔養官)의 직임을 띠고 있음에도 시골로 내려가 올라오지 않는다.’며 독촉해 조정으로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고, 또 그가 삼사(三司) 벼슬에 대해 자획(自劃)한 까닭을 진달하며 부제학을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태중은 전에 삼사에 있을 때 누차 일을 말하다가 죄를 얻었다. 자신의 말이 실행되지 않는다 하여 제수가 있으면 곧 사직하였으며 중간에 승품(陞品)한 것이 잦았으나 곧 고신(告身)을 다시 바쳐 귀양살이가 이어졌다. 재작년에 엄명(嚴命)에 핍박을 받아 해서 관찰사로 나갔다가 관서백(關西伯)으로 옮겨 승진하였는데, 이때부터 명성이 비록 조금 깎이기는 했지만 그가 조정으로 돌아옴에 미쳐 사람들은 여전히 사모하여 우러러 보았다. 몇 달 공직(供職)하고는 끝내 말 한마디 없이 곧 시골로 돌아가버리니 사람들이 간혹 그가 늙고 기력이 쇠퇴하여 점차 속태(俗態)에 물든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렴하고 확고함으로 칭송하였으니, 요컨대 악착스런 인물이 아니었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26면
【분류】왕실(王室)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태중은 전에 삼사에 있을 때 누차 일을 말하다가 죄를 얻었다. 자신의 말이 실행되지 않는다 하여 제수가 있으면 곧 사직하였으며 중간에 승품(陞品)한 것이 잦았으나 곧 고신(告身)을 다시 바쳐 귀양살이가 이어졌다. 재작년에 엄명(嚴命)에 핍박을 받아 해서 관찰사로 나갔다가 관서백(關西伯)으로 옮겨 승진하였는데, 이때부터 명성이 비록 조금 깎이기는 했지만 그가 조정으로 돌아옴에 미쳐 사람들은 여전히 사모하여 우러러 보았다. 몇 달 공직(供職)하고는 끝내 말 한마디 없이 곧 시골로 돌아가버리니 사람들이 간혹 그가 늙고 기력이 쇠퇴하여 점차 속태(俗態)에 물든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렴하고 확고함으로 칭송하였으니, 요컨대 악착스런 인물이 아니었다.

 

7월 12일 정축

정언 남운로(南雲老)가 상서하여 유당(柳戇)을 구원하기를,
"풍채가 단정하여 볼품이 있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大朝)의 처분이 지엄하거늘 어찌 감히 이처럼 하는가?"
하였다.

 

교리 윤득우(尹得雨), 부교리 조엄(趙曮)·이의철(李宜哲), 수찬 홍준해(洪準海), 부수찬 홍양한(洪良漢)·정존겸(鄭存謙) 등이 대조(大朝)께 차자를 올려 ‘유당(柳戇)을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초선(抄選)한 신하는 조정의 대우가 비록 넉넉하고 남다르다 할지라도, 만약 자신을 검속(檢束)함에 있어 비방을 받거나 장주(章奏)에 실수를 저지른 경우가 있다면, 언관(言官)이 일에 따라 규정(規正)함은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되기에 해로움이 없습니다. 어찌 부러뜨리고 꺾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자신을 검속함에 있어 비방을 받았다.’ 함은 최재흥(崔載興)을 가리킨 것이요, ‘장주에 실수를 저질렀다.’ 함은 신경(申暻)을 가리킨 것이다. 차자가 들어간 지 사흘만에야 윤득우를 불러 수백 자(字)의 비답을 내렸는데, 억지로 같이 흐리멍덩하게 하였음을 책망하고, 겸하여 신경이 그 조부의 뜻을 깊이 유념하지 아니함과 유당이 옛 마음 그대로 협잡하였음에 대해 하유(下諭)하였다. 이어서 신경이 띠고 있는 직임을 체차하였으니, 성의(聖意)는 실로 양쪽 편을 다 그르게 여겨 진정시키는 방도로 삼으려고 나온 것이었는데, 억지로 같이 흐리멍덩하게 하였다 함은 윤득우의 무리가 조엄·이의철과 언의(言議)가 같지 아니함에도 이번에 연명(聯名)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윤득우가 전석(前席)에서 소회(所懷)를 진달하려고 하자, 왕부(王府)에 내리라 명하고, 그 나머지 유신은 모두 현재의 직임을 해임시키고 올해를 한정해서 다시 검의(檢擬)하지 말게 하였다.

 

호랑이가 살곶이다리[箭橋]의 마장(馬場)에 들어왔다.

 

7월 14일 기묘

지평 이석재(李碩載)가 상서하여 ‘연차(聯箚)한 유신을 죄줄 수 없음’을 논하자 왕세자가 답하기를,
"대조(大朝)의 처분이 엄명(嚴明)하고 또 바른데, 어찌하여 감히 이처럼 비호하는가?"
하였다.

 

7월 15일 경진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곤룡포 차림으로 황단(皇壇)에 나아가 단실(壇室)을 봉심(奉審)하고, 비가 새는 곳은 날이 개기를 기다려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7월 16일 신사

왕세자가 장차 상참(常參)을 행하려 하였으나, 양사(兩司)의 대관(臺官)이 모두 세 번의 패초(牌招)에도 나오지 아니하므로, 정침(停寢)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여러 대신(臺臣)들을 삭직시킬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이미 처분하였다.’고 답하였다.

 

7월 17일 임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대신과 예조 당상이 올해의 탄미(誕彌)하신 달은 국조(國朝)의 전례(典禮)에 의거해 칭상(稱觴)113)  의 예를 거행하지 않을 수 없음을 힘써 아뢰었으나, 임금이 굳게 고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전라 감사 민백상(閔百祥)이 병이 무겁다 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고, 또 이종백(李宗白)·한익모(韓翼謨)를 모두 정경(正卿)으로 올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또 민백상과 이태중(李台重)은 크게 쓸만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총융사(摠戎使) 이장오(李章吾)가 돈을 주조하여 본청(本廳)의 수용(需用)에 보탤 것을 청하니, 임금이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에게 물어본 뒤에야 허락하였다.

 

종신(宗臣)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등이 상서하여 동조(東朝)께 진연(進宴)할 것을 청하므로, 왕세자가 대조(大朝)에 품하였다. 임금이 ‘양지(養志)가 큰 것’이라고 하유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왕세자가 드디어 답을 내리기를,
"대조께서 양지를 가지고 하교하셨다. 정(情)과 예(禮)를 펴지 못하니, 마음이 비록 억울하기는 하지만, 나 또한 어찌 성의(聖意)를 우러러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안동 부사 정실(鄭實)이 상서하여 본부(本府) 수재의 혹독함과 보리 흉작의 참담함을 갖추어 진달하고 대동미(大同米)의 절반을 가을을 기다려 물려받도록 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묘당에서 3분의 1로 시행토록 허락할 것을 복주(覆奏)하니, 옳게 여겼다.

 

7월 18일 계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이 청대(請對)하여 함께 들어와 《열성어제(列聖御製)》의 개판(改板) 절목(節目)에 대해 품하고 이어서 진연(進宴)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입직한 유신을 불러 《시경(詩經)》의 대아편(大雅篇)을 읽으라 명하고, 또 춘방관(春坊官)을 불러 서연(書筵)을 열었는가에 대해 물었다.

 

박창윤(朴昌潤)을 집의로, 신근(申近)을 장령으로, 정창성(鄭昌聖)·남기로(南綺老)를 지평으로, 이수덕(李壽德)을 헌납으로, 윤시동(尹蓍東)·박필수(朴弼燧)를 정언으로, 민백상(閔百祥)을 부제학으로, 이게(李垍)를 교리로, 윤동승(尹東昇)을 남태저(南泰著)를 부교리로, 홍인한(洪麟漢)·이인원(李仁源)을 부수찬으로, 윤급(尹汲)을 예문 제학으로, 이창수(李昌壽)를 전라도 관찰사로, 서종급(徐宗伋)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대신과 예관이 진연(進宴) 때문에 청대(請對)하였다. 이에 앞서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상차하기를,
"칭상(稱觴)·상수(上壽)114)  가 예(禮)에 없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예전(禮典)에 있는 바라면 올해에 행하지 않고 언제 행하겠습니까?"
하였고,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등이 또 상소하여 진청(陳請)하니, 이에 임금이 동궁에게 시좌(侍坐)할 것을 명하고, 여러 대신에게 하유하기를,
"자성(慈聖)의 겸양(謙讓)하시는 성덕(聖德)을 받들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자성께서 만약 받으신다면 반드시 나로 하여금 받도록 하실 것이다. 자성께서는 대내(大內)에 계시고 나 홀로 전(殿)에 임하여 받는다면 장락궁(長樂宮)115)  에 기쁨을 바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대내에서 찬(饌)을 차려 기쁨과 경사를 극진히 하는 도리만 못하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전례(典禮)를 들어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대신과 종신(宗臣)에게 비답을 내리기를,
"나라의 형세가 반석같고 나라의 운수가 영장(靈長)116)  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고 우리 백성들이 평안히 산다면, 자성의 지난날을 깊이 유념하시는 성덕(盛德)과 지극한 뜻으로 반드시 장락궁에서 기뻐하실 것이니, 이 즐거움이 어찌 의문(儀文)의 말단적인 예절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고, 누누이 수백 자(字)에 이르렀는데, 첫머리에서는 ‘태강(太康)의 경계’로 하고 중간에서는 농사가 풍년인지 흉년인지 결정되지 아니하였음을 염려하였으며, 끝에서는 ‘풍형 예대(豊亨豫大)117)  의 일을 늘그막에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이어서 유신에게 《시경》의 실솔장(蟋蟀章)118)  을 진강(進講)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성의(聖意)는 전적으로 겸양하거나 자지(慈旨)를 어길 수 없다는 데 있는 것 만이 아니었다. 진실로 기쁨을 분식(粉飾)하는 도리를 장대하게 할 수 없고, 거듭 기근이 든 나머지 편안히 즐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며, 또 뒷날의 왕이 상전(常典)으로 여길 것을 염려해 안락하게 지내지 말도록 경계했던 것이다. 임금의 마음과 말씀이 진실로 만세토록 법으로 전해질 만한데, 뭇 신하들이 능히 그 아름다움을 순종해 따르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임금이 정원에 하유(下諭)하기를,
"종신(宗臣)의 글에 ‘해마다 진연(進宴)하고 날마다 진연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억양(抑揚)하는 데 관계되니 일기(日記)에 써서 뒷날의 임금에게 보여 줄 수 없다. 이 뒤로는 이런 글은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헌부에서 상달한 신경(申暻)·최재흥(崔載興)의 일을 아직도 정달(停達)하지 않았다 하여 다음날 패초(牌招)를 어긴 대신(臺臣)들을 육진(六鎭)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7월 21일 병술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임천(林川)의 전 군수 오언부(吳彦傅)가 재결(災結)을 함부로 쓴 것은 비록 전 감사 조명정(趙明鼎)이 함부로 준 데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수령도 또한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조명정이 일찍이 호서 관찰사가 되었을 때 자못 식리(殖利)를 일삼았는데, 환곡(還穀)과 군향(軍餉)에 이르러서도 함부로 나누어 줌이 많았다. 또 재결의 분급(分給)이 균등하지도 정밀하지도 않았으니 남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말을 전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암행 어사의 장계(狀啓)로 인해 멀리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그 뒤에 이천보가 또 ‘도신(道臣)으로서 재결을 함부로 지급하는 자는 그 죄과(罪科)가 수령과 같다.’고 하면서 영갑(令甲)119)  에 실을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도신은 체모가 무거우니, 단지 적절한 사람을 얻어야 마땅할 뿐이다. 법이 이와 같다면 번기(藩寄)120)  를 중히 여기는 바가 아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부 【장령 신근(申近)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신경(申暻)·최재흥(崔載興)의 일은 정달(停達)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예조 당상을 소견하여 민사(民事)에 대해 물었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진연(進宴)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해 마음이 심히 억울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모름지기 조금 이해하도록 하라. 조정 신하가 외임에 나가도 오히려 그 자제가 방탕함을 면하지 못할까 염려하는데, 하물며 인군이 되어 그 후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德)에 배불렀다.’ 하였다. 나 또한 자못 술맛을 알고 있으나 제방(隄防)을 두고 있기 때문에 방만하고 소홀히 한 데에 이르지 않았다."
하였다. 이어서 별유(別諭)를 내려, 거의 수백 자(字)에 이르렀으니, ‘진연의 예(禮)는 예에 있어서 당연히 행해야 할 바이나, 양지(養志)가 중대한 것이고, 성악(聲樂)은 후손에게 물려줄 바가 아니다’라고 하유하였는데, 대강의 뜻은 전날 대신에게 내린 비답과 같았다.

 

임금이 장차 명릉(明陵)에 배알하고자 특별히 윤음(綸音)을 내려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않도록 하고, 평년에 비해 더욱 뜻을 더하게 하였다. 이어서 내린 윤음을 써서 동궁에 들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시종신(侍從臣)의 걸군(乞郡)을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이전에 시종신의 걸군이 어지럽다 하여 시행치 말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허락했던 것이다.

 

7월 22일 정해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으니,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기신(忌辰)이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경외의 체수(滯囚)121)  를 생각하고는, 《국조보감(國朝寶鑑)》 가운데 ‘사경(四境) 안이 모두 나의 탑(榻) 곁이다.’라는 하교를 인용하여, 금오(金吾)와 추조(秋曹) 당상으로 하여금 수도안(囚徒案)을 가져와 대신과 모레 입시해 소결(疏決)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도의 도신(道臣)과 삼도(三都) 유수(留守)에게는 수도(囚徒)를 조사해 상문(上聞)하게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문종보감(文宗寶鑑)》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그 가운데 백부(柏府)122)  의 상서 다섯 조목이 있었는데, 보고는 한숨을 쉬며 개탄하고 써서 동궁에 들이도록 하고, 또 옥서(玉署)·춘방(春坊)·미원(薇垣)·백부에 반시(頒示)하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하교하여 조정 신하들을 신칙하였는데, 이때 왕세자가 시좌(侍坐)하고 있었다.

 

7월 24일 기축

임금이 대신과 금오·추조의 세 당상관을 소견하여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7월 25일 경인

전 진선 윤봉구(尹鳳九)가 상서 하였는데 전날 자기 자신을 책망한 영지(令旨)를 거론하여 ‘성탕(成湯)이 스스로를 책망한 것이123)   능히 우러러 하늘을 감동시켰다.’ 하고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부연 설명하고나서 끝을 맺기를,
"옛부터 성현들이 반드시 부모께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정성과 선으로 남의 자식된 마음을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상께서 저하께 바라는 것은, 수신(修身)의 경우 문왕(文王)이 세자 노릇을 한 것처럼 하고, 강학(講學)의 경우 요(堯)임금이 공손·총명하고, 우아하며 생각이 깊었던 것처럼 하며, 정사(政事)의 경우 순(舜)임금이 요임금의 정사를 섭행(攝行)했던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저하께서 이에 대해 털끝만큼이라도 세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이것은 저하께서 세가지 일에 있어서 성상의 마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이 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저하의 자기 자신을 책망하신 하교는 참으로 천리(天理)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과연 능히 이 마음을 지켜나가 해이해지거나 나태해지지 말고 안으로는 학문·성정(誠正)의 공부와 밖으로는 언어·동작의 법도에서부터 정령(政令)·시조(施措)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성실·돈독하여 충분한 지경까지 이르되, 세 성인의 업적에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면, 성상께서 저하께 대해 기뻐하심이 또한 저 높은 하늘이 성탕(成湯)의 정성에 굽어 감동했던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글자마다 절실하니, 내 심히 가상하게 생각한다. 어찌 명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7월 26일 신묘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예조에서 찬비가 곡식을 상하게 한다 하여 영제(禜祭)124)  를 지낼 것을 청하니, 임금이 형세를 보아서 지내라고 명하였다.

 

7월 27일 임진

임금이 영제에 쓸 향(香)을 내일 받으라고 명하였다.

 

7월 29일 갑오

정순검(鄭純儉)을 사간으로, 유수(柳脩)를 장령으로, 신사운(申思運)·이항조(李恒祚)를 지평으로, 윤학동(尹學東)을 수찬으로, 한익모(韓翼謨)를 판윤으로, 홍자(洪梓)를 교리로, 이게(李垍)를 부응교로 삼았다.

 

7월 30일 병신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좌의정 김상로(金尙魯)·우의정 신만(申晩)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로서 비가 심하다며 명릉(明陵)의 배알 행차를 물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약방의 세 제조와 예방 승지가 합문(閤門)에 나아가 청대하니, 임금이 하교하여 책망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마땅히 수라를 그만 들겠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연례(宴禮)는 억지로 청하고, 응당 행해야 할 예(禮)는 만류하고자 하니, 이 또한 그 아름다움에 순종하는 것인가?"
하였다.

 

옥당·춘방·시종 가운데 오늘 패초(牌招)를 어긴 자는 북도의 권관(權管)에 차제(差除)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여러 신하들이 거둥을 물릴 것을 청한 일로 인해 임금이 격노(激怒)했기 때문이었다. 사간 정순검(鄭純儉)을 양영만동 권관(梁永萬洞權管)으로, 겸 필선 박도원(朴道源)을 오촌 권관(吾村權管)으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능을 배알하는 예(禮)는 예에 있어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이나, 여러 신하들이 비를 이유로 물릴 것을 청한 것이 또한 어찌 불가하다 하겠는가? 무릇 인주(人主)의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란 옳으면 시행하고 옳지 않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제 성상께서는 신중해야 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억지로 행하고야 말려 하니, 진실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덕에 부족함이 있다. 그리고 이제 또 패초를 어긴 근신(近臣)에게 노여움을 옮겼으니, 더욱 정교(政敎)의 잘못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직책이 후원(喉院)에 있으면서 감히 작환(繳還)하지 못하고 잠자코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군도(君道)가 날로 높아가는데 누가 능히 그것을 바로잡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28면
【분류】사법(司法) / 왕실(王室) / 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능을 배알하는 예(禮)는 예에 있어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이나, 여러 신하들이 비를 이유로 물릴 것을 청한 것이 또한 어찌 불가하다 하겠는가? 무릇 인주(人主)의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란 옳으면 시행하고 옳지 않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제 성상께서는 신중해야 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억지로 행하고야 말려 하니, 진실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덕에 부족함이 있다. 그리고 이제 또 패초를 어긴 근신(近臣)에게 노여움을 옮겼으니, 더욱 정교(政敎)의 잘못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직책이 후원(喉院)에 있으면서 감히 작환(繳還)하지 못하고 잠자코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군도(君道)가 날로 높아가는데 누가 능히 그것을 바로잡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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