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정유
임금이 명릉(明陵)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자가 어가를 따랐다. 이때 연일 비가 내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물려 행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나, 궁을 나설 때가 되자 날씨가 시원하게 갰다. 어가가 홍제교(弘濟橋)에 이르자 물이 불어 다리가 무너졌으므로, 여(輿)를 타고 물을 건넜다. 경조 윤(京兆尹)이 장작랑(將作郞)을 치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그냥 두게 하고 환궁 때까지 고치라고 명하였다. 명릉에 도착하여 친히 제사를 지냈고, 제사가 끝나자 익릉(翼陵)·경릉(敬陵)·창릉(昌陵)·순회묘(順懷墓)를 두루 배알하고 밤이 깊어서야 환궁하였다.
임금이 주정소(晝停所)에 거둥하여 교리 홍자(洪梓)에게 양주·고양 두 고을을 염찰(廉察)하라고 명하였다.
8월 1일 정유
임금이 주정소(晝停所)에 거둥하여 교리 홍자(洪梓)에게 양주·고양 두 고을을 염찰(廉察)하라고 명하였다.
두 권관(權管)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정침하라고 명하였으니, 두 신하가 패초(牌招)를 어긴 것이 하교 전에 있었다고 임금께 아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원의 문안(問安) 때 동궁(東宮)의 승언색(承言色)이 즉시 내려오지 아니한 일로 인해 임금이 하교하여 정원을 책망하기를,
"내 경자년125) ·신축년126) 이후로 정원에서 중관(中官)127) 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함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으니, 대개 숙묘(肅廟) 경자년을 가리킨 것이다.
8월 2일 무술
부교리 남태저(南泰著)가 옥당의 문안 때에 사약(司鑰)이 즉시 내려오지 않았다 하여, 상서하여 승언색(承言色) 사약을 치죄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추고(推考)함이 옳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나라에게 경악(經幄)을 둔 것은 계옥(啓沃)을 돕고 보도(輔導)를 맡기고자 한 것이다. 남태저는 일찍이 한마디 말과 한가지 일로써 조금이나마 그 직분을 다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성상의 뜻을 받들며 그 논열(論列)한 바가 겨우 형여(刑餘)128) 의 무리와 천한 액예(掖隷)에 그쳤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28면
【분류】왕실(王室) / 역사(歷史) / 사법(司法)
[註 128] 형여(刑餘) : 거세(去勢)를 당한 사람. 내시(內侍).
사신(史臣)은 말한다. "나라에게 경악(經幄)을 둔 것은 계옥(啓沃)을 돕고 보도(輔導)를 맡기고자 한 것이다. 남태저는 일찍이 한마디 말과 한가지 일로써 조금이나마 그 직분을 다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성상의 뜻을 받들며 그 논열(論列)한 바가 겨우 형여(刑餘)128) 의 무리와 천한 액예(掖隷)에 그쳤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8월 3일 기해
임금이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집에 거둥하였으니, 옹주가 바야흐로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창졸간에 명이 내려져서 의장(儀仗)이 열(列)을 이루지 못함이 많았으나, 대신과 삼사에서 한 사람도 간쟁(諫爭)하지 않았으므로, 중외에서 우려하고 한탄하였다.
김제·만경·임피 세 고을은 바닷가의 땅이다. 바닷물이 갑자기 넘쳐 각종 곡식이 물에 잠겼는데, 모양이 마치 소금에 저린 채소와 같았으니, 전라 감사가 그 일을 장문(狀聞)하였다.
8월 5일 신축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북도에서 개시(開市)할 때 문위주(問慰酒)는 교린(交隣)하는 일에 관계되는데, 일찍이 동래·의주의 논보(論報)로 인해 대조(大朝)께 품하였더니, 실상 대로 회유(回諭)토록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에 의거해 함이 옳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허락하였다.
8월 6일 임인
임금이 법복(法服)을 갖추고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중용(中庸)》을 강(講)하였다. 신수장(新授章)을 읽고 유신의 상번·하번으로 하여금 집주(輯註)를 나누어 읽게 하였다. 대리(代理) 이후로 구례(舊例)에 의거해 아침·낮·저녁의 세 차례 강을 폐하였는데, 이번 여름부터 법식(法式)을 받들고 ‘강경(講經)’이라 이름하였다. 매달마다 이날에 행하도록 하고 한번도 폐하거나 빠뜨린 적이 없었으니, 대개 몸소 가르치려고 한 것이었다. 노년의 전학(典學)의 공력과 후손(後孫)에 끼쳐 준 규모가 참으로 거룩하였다.
호조 판서 정휘량(鄭翬良)이 경비가 바닥났다 하여 관서의 세미(稅米) 1만 석을 얻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양주·고양의 어사(御史)와 기백(畿伯)129) 및 차원(差員)·수령을 소견하였다. 어사가 아뢴 바는 모두 자질구레한 일이었고 수령들은 각기 본읍(本邑)의 민사(民事)를 진달하였다. 임금이 두 고을 백성을 걱정하여 가을 대동미(大同米)를 감해 주고자 대신·선혜청 당상·기백에게 하문한 뒤 절반을 감해주도록 정하였다.
8월 7일 계묘
설서 이휘중(李徽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에 저하께서 원릉(園陵)의 어가를 수행하신 것은 진실로 정례(情禮)를 한번 펴는 데서 나온 것이나, 이는 곧 저하께서 처음으로 기전(畿甸)에 출행(出行)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목격하고 도를 보존하는 뜻에 있어서, 산과 내를 보고서 산이 되고 웅덩이를 가득 채우는 공력을 생각하고, 성지(城池)와 농사일을 보고서 방어를 굳게 할 방도를 생각하여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을 걱정하신다면, 접촉하는 사물마다 미루어 아는 것도 또한 지극한 이치가 있는 것이니 강마(講磨)하는 공부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도리가 오로지 문자에만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깊이 유념하겠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양주·고양의 가을 조세의 절반을 감하고, 다른 고을도 또한 5분의 1을 감하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경기의 백성을 균일하게 보았기 때문이었다.
8월 10일 병오
달이 입성(立星)을 범하였다.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8월 13일 기유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무양흑원령포(無揚黑圓領袍)를 갖추고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명릉(明陵)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했으니, 내일이 곧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8월 14일 경술
부제학 민백상(閔百祥)을 발탁하여 지중추부사로 삼고, 부응교 이게(李垍)를 동부승지로 삼았으니, 모두 중비(中批)130) 였다.
8월 15일 신해
임금이 자성(慈聖)의 뜻이라며 내자시(內資寺)에서 봉진(封進)하는 예주(醴酒)를 또한 정지하게 하였다.
8월 16일 임자
이때 영남과 관동에 큰물이 졌다. 안동(安東) 등 33고을에서는 떠내려간 여염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거의 수십, 수백을 헤아릴 정도였으며, 평해(平海) 등의 고을에서는 죽은 사람이 2백 6명, 떠내려간 집이 3백 81호였다. 일이 보고되자 휼전(恤典)을 베풀게 하였다. 여러 도(道)에서 범에 물려 죽은 자와 물에 빠져 죽은 자와 전염병을 앓아 죽은 자를 치달(馳達)하는 것이 종일토록 계속 보고되어 거의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농사일의 참혹함에 대해 어떤 이는 마치 된서리를 맞은 것 같다 하였고, 어떤 이는 마치 짓밟아 놓은 것 같다 했는데, 여러 도가 같았으나, 오직 양서(兩西)만은 조금 낫다고 하였다.
8월 17일 계축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숭릉(崇陵)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했으니, 내일이 곧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정광충(鄭光忠)을 경기 관찰사로, 서명신(徐命臣)을 강원도 관찰사로, 윤학동(尹學東)을 집의로, 김광국(金光國)을 사간으로, 남덕로(南德老)를 장령으로 삼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광충은 일개 비부(鄙夫)로서 평생의 기량이라고는 오직 아첨만 할 줄 아는 것뿐이었다. 처음 이름은 광진(光震)이었는데, 임금이 지금의 이름을 하사했다. 기백(畿伯)의 말망(末望)에 주의(注擬)되자 천점(天點)이 따라서 내려졌으므로 물정(物情)이 크게 울불(鬱怫)하였다. 방악(方岳)131) 의 직임이 이로부터 존엄하지 않게 되었고, 수령이 장차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게 되었다. 서명신은 오로지 산업(産業)만을 일삼아 달리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니, 또한 사람을 잘 골랐다고 할 수가 없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28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註 131] 방악(方岳) : 방악(方嶽)과 같음. 곧 동악(東岳) 태산(泰山), 남악(南岳) 형산(衡山), 서악(西岳) 화산(華山), 북악(北岳) 항산(恒山)의 사악(四岳)으로서, 사방의 제후(諸侯)를 통괄하는 사람인데, 흔히 각도(各道)의 도신(道臣)이란 뜻으로 쓰임.
사신(史臣)은 말한다. "정광충은 일개 비부(鄙夫)로서 평생의 기량이라고는 오직 아첨만 할 줄 아는 것뿐이었다. 처음 이름은 광진(光震)이었는데, 임금이 지금의 이름을 하사했다. 기백(畿伯)의 말망(末望)에 주의(注擬)되자 천점(天點)이 따라서 내려졌으므로 물정(物情)이 크게 울불(鬱怫)하였다. 방악(方岳)131) 의 직임이 이로부터 존엄하지 않게 되었고, 수령이 장차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게 되었다. 서명신은 오로지 산업(産業)만을 일삼아 달리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니, 또한 사람을 잘 골랐다고 할 수가 없다."
임금께서 액예(掖隷)들이 내국(內局)에서 소란을 떤다 하여 치죄하라고 명하였으니,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바야흐로 내국을 관장하였기 때문에 아뢴 바가 있었던 것이다. 유척기는 총명·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나 국량(局量)과 식려(識慮)가 많았으므로 발신(發身) 초기부터 모두들 국기(國器)로 인정하였다. 성상 기미년132) 에 정승에 제배되니, 나이 49세이었다. 얼마 못되어 임금의 뜻을 거슬러 강가로 물러나 산지 10여 년 동안 거친 음식을 싫어하지 않고 청탁이 조정에 미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더욱 어질게 여겼다. 올해 봄에 임금의 명을 받들고 도성에 들어와 바야흐로 보호(保護)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세상에서는 안은 꼼꼼하고 밖은 원만한데 기권(機權) 쓰기를 좋아함을 혐의쩍게 여겼지만, 또한 책비(責備)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8월 18일 갑인
호남과 영남의 상번군(上番軍)을 징집하였다. 초여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하여 금위 도제조 유척기(兪拓基)가 상번(上番)을 물릴 것을 청했었는데, 이제 와서 징집한 것이다.
8월 19일 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여 능행(陵幸) 때 광주(廣州)의 책응(責應)은 한결같이 경기 고을의 예에 의하고, 광주 경내(境內)의 거둥 때에도 또한 경기의 고을에서 힘을 나누라고 명하였으니, 광주 유수 홍봉한(洪鳳漢)이 진달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耆社)의 여러 신하들의 〈초상(肖像)을〉 그리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고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유상(遺像)으로 선조(先朝)께서 하사하신 화본(畵本)이 있어 기사(耆社)에 간직해 두었는데, 신축년133) ·임인년134) 의 사화(士禍)에 거의 잃을 뻔하였으나, 몰래 간직해 둔 사람이 있어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청컨대 옛날에 하사한 화상(畵像)을 도로 〈기사에〉 간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2품 이상에게 각기 주목(州牧)에 적합한 사람을 천거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진달한 것이다.
병조 판서 홍상한(洪象漢)을 파직하였으니, 김상로(金尙魯)가 정사(政事)의 주의(注擬)로 진달한 바가 있어 파직한 것이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선정신 송시열의 자손 중에 녹을 먹는 자가 없다 하여 그 지손(支孫)을 조용(調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의 법전은 어길 수 없다. 봉사손(奉祀孫)이 복제(服制) 벗기를 기다려 조용함이 옳다."
하였다. 또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四賢祠)135) 에 다시 향사(享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휼전(恤典)은 가하나, 포장(褒奬)은 불가하다."
하였다.
사충사(四忠祠)136) 에 제사를 내렸다. 올 봄에 사충사를 고쳐 지으라 명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공역(工役)이 끝났음을 고하자 상신(相臣)의 아룀으로 인해 제사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던 것이다.
전 어사 이석상(李錫祥)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않았다. 이석상은 염찰(廉察)하러 용인(龍仁)에 이르러 부고(府庫)를 봉하고 수령을 파직시켰는데, 그 위 장계(狀啓)를 꾸밀 때는 한마디도 논열(論列)하지 않았으므로, 이때에 와서 동의금 신회(申晦)가 임금께 아뢰어 파직시킨 것이었다. 이석상은 사람됨이 혼암(昏暗)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흐리멍덩하여 한번 왕명을 받들면서 세 번이나 저죄(抵罪)하였으니, 그 직지(直指)137) 에 부끄러움을 끼침이 참으로 컸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은 이석상에게 털끝만큼도 고자(顧藉)함이 없어 거의 수령에게 득죄하여 보복한 것처럼 되어버렸으니, 탐관 오리가 장차 어떻게 징계될 수 있겠는가?
옥천(沃川) 사람이 자신의 동생이 도적질을 하는 데 노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스스로 관(官)에 고하였다. 임금이 잔인하고 행동이 야박한 사람이라 여겨 일률(一律)로 논죄하고자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다투므로 드디어 장유(杖流)하라고 명하였다.
이명곤(李命坤)을 대사간으로, 이후(李)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8월 20일 병진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8월 21일 정사
임금이 예조 당상을 불러 민사(民事)에 대해 물었다. 이때 예조 참판 김한철(金漢喆)이 막 녕릉(寧陵)을 봉심(奉審)하고 돌아왔는데, 임금이 연로(沿路)의 농사형편에 대해 물으니, 곧 여주·이천에 전에 없던 풍년이 들었다고 대답하였다. 대신 이하도 역시 ‘여러 도가 흉년을 면했다.’는 뜻을 우러러 상달하고 ‘연흉(年凶)’ 두 글자는 일체 연석(筵席)에서 숨기었다. 그리하여 홀로 지존(至尊)만 근심하게 하고 묘당(廟堂)의 신하는 성실한 마음으로 나라는 걱정하는 자가 없으며, 봉사(奉使)하는 신하는 재이(災異)를 돌아와 아뢰지 아니하고 오로지 아첨하는 말만 했던 것이니, 한때의 풍습을 알 만하였다.
모레 다시 영제(禜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8월 24일 경신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무양흑원령포(無揚黑圓領袍) 차림으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의릉(懿陵)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으니, 내일이 곧 경종 대왕(景宗大王)의 기신(忌辰)이기 때문이었다.
특지로 장지풍(張志豊)을 동부승지에 제배하였다. 장지풍은 고 무장 장붕익(張鵬翼)의 손자로서 나이 25세에 무과로 진출하여 통적(通籍)한 지 겨우 5년 안에 급작스레 총애하여 발탁하니, 사람들이 놀라지 않음이 없었다.
8월 25일 신유
조운규(趙雲逵)를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애초 관서백의 자리가 비자 임금이 대신에게 천거하라고 명하였다. 삼공(三公)이 합사(合辭)하여 윤급(尹汲)·이종백(李宗白)·조운규로 우러러 대답하고, 수상(首相)이 또 ‘윤급이 평소 강인하여 서변(西邊)을 탄압(彈壓)할 만하다.’고 진달하자,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남방(南方)의 강함인가 북방의 강함인가?"
하였다. 성의(聖意)는 대개 농담에서 나온 것이나 또한 당론(黨論)을 주장하는가 의심한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조운규가 차례를 넘어 낙점을 받았는데, 윤급은 조운규에 견주어 어찌 조금 나은 점이 있지 않았겠는가마는 성간(聖簡)이 잘못된 것이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급은 성격이 기경(機警)하고 밖으로는 교만하였으며 음식과 복색이 지극히 사치스러웠다. 문음(文蔭)과 상서(象胥)138) 들이 몰려들지 않음이 없었으니,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비난이 있었다. 문학(文學)이 넉넉하지 않았으나, 조재호(趙載浩)가 전형을 관장할 때 먼저 제학에 의망(擬望)하였으니, 조재호의 사나움으로도 또한 윤급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29면
【분류】인사(人事) / 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註 138] 상서(象胥) : 역관(譯官).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급은 성격이 기경(機警)하고 밖으로는 교만하였으며 음식과 복색이 지극히 사치스러웠다. 문음(文蔭)과 상서(象胥)138) 들이 몰려들지 않음이 없었으니,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비난이 있었다. 문학(文學)이 넉넉하지 않았으나, 조재호(趙載浩)가 전형을 관장할 때 먼저 제학에 의망(擬望)하였으니, 조재호의 사나움으로도 또한 윤급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신회(申晦)를 도승지로 삼았다. 신회는 우의정 신만(申晩)의 아우로서, 평소 화리(貨利)에 성색(聲色)을 좋아한다는 비방이 있었다. 요행히 과거에 합격하여 화관(華貫)을 두루 역임한 뒤 아경(亞卿)으로 비국(備局) 유사(有司)의 직임에 차정되었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바 요지(要地)였다. 신회는 총명과 재기가 조금 있었으나 재산의 그릇은 아니었는데, 대신의 아우라 하여 때를 타 구차하게 충원된 것이었다. 홍계희(洪啓禧)가 전형을 관장할 때 헌장(憲長)과 경연(經筵)에 주의(注擬)하지 아니하자, 신회 형제가 깊이 앙심을 품었다.
8월 26일 임술
전 참판 홍익삼(洪益三)이 졸(卒)하였다. 홍익삼은 효묘(孝廟)의 외손인 홍치상(洪致祥)의 손자이다. 글과 지식이 없어 남에게 존중받지 못하였고 또 관직에 있을 때 청렴 결백한 몸가짐이 모자랐다. 그러나 사람됨이 기개가 있고 일 처리에 때때로 구차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혹 취하는 자가 있기도 하였다.
임금이 이명곤(李明坤)이 정세(情勢)도 없이 범염(犯染)을 핑계로 단자(單子)를 올리고 말미를 받았음을 듣고는 처음에 도로 돌려주라 명했다가 곧 즉시 정침시켰다. 이명곤은 글을 못하고 염치가 없어 전혀 사대부의 모습이 없었다. 신회(申晦)와 혼인한 집안이 되었기 때문에 그 인아(姻婭)의 힘을 빌어 외람된 직임을 많이 거쳤다. 이명곤 이후로부터 경연과 비국 당상이 마침내 2품을 번갈아 차정(差定)하는 자리가 되었다 한다.
8월 27일 계해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지평 구수국(具壽國)이 상서하여 논하기를,
"장지풍(張志豊)이 재차 부름을 어긴 것은 교만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한심한 일이다. 중추(重推)함이 옳다."
하였다.
성주 유학 성대집(成大集)이 상서하여 백성을 구제할 대책을 논하였다. 첫째는 봉산(封山)의 바람에 쓰러져 절로 말라죽은 소나무로 소금을 구워 그 소금으로 곡식을 살것을 청한 것이었고, 둘째는 북한 산성(北漢山城)과 도성(都城)에도 또한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예에 의해 염산(鹽山)을 만들 것을 청한 것이었으며, 셋째는 성주·대구·청도·김해 등의 고을도 또한 경주의 예에 의해 개량할 것을 청한 것이었고, 넷째는 어염세(魚鹽稅)와 결전(結錢)을 차원(差員)을 정해 영납(領納)토록 할 것을 청한 것이었으며, 다섯째는 영읍(營邑)의 각종 빚을 대신 바칠 경우 민전(民田)은 본리(本利)에 준한 연후에 도로 돌려 줄 것을 청한 것이었는데, 왕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승지에게 여러 상언(上言)을 읽으라 명하고 친히 부결(部決)하였다. 그 가운데 성대집이 이 일로 상언하면서 스스로 봉장(封章)이 막힘을 당했다고 이르니 임금이 ‘그 가운데 오활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같은 예로 물리칠 수 없다.’고 하교하면서 전후의 봉입(捧入)하지 아니한 승지를 책망하고 상서를 고쳐 올리라고 명했던 것인데, 이때에 와서 성대집의 상서가 먼저 전달되었으나 자질구레하여 족히 일컬을 만한 것이 없었다. 만약 우리 성상의 나무꾼이나 꼴꾼의 말로 반드시 선택하시는 성대한 뜻이 아니었다면, 애시당초 철람(徹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아름다운 계책과 훌륭한 의론이 성대집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 한들 또한 어떻게 알려질 수 있겠는가? 성대집은 스스로 성석린(成石璘)의 후손이라 하였다.
삼수(三水)의 강구보 권관(江口堡權管)이 두 물이 합쳐지는 곳에 나가 노닐다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 남병사(南兵使)가 그 일을 보고하였다. 권관은 비록 보잘것 없지만 또한 관인인데,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전에 듣지 못했던 바였다.
8월 28일 갑자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 차림으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육상궁(毓祥宮)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으니, 내일이 곧 중삭제(仲朔祭)이기 때문이었다.
도승지 신회(申晦)가 구수국(具壽國)의 상서를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장지풍(張志豊)을 의금부에 내리고 열흘이 지난 뒤에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대개 승지의 첫 직숙(直宿)은 반드시 10일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8월 29일 을축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예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이 감시(監試)의 복시(覆試)가 멀지 않다 하여 사관(四館)에 신칙해 간위(奸僞)를 방지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이때 큰 전염병이 돌아 시험에 응시하러 오는 사람이 병으로 많이 죽었기 때문에 환명(換名)·모입(冒入)에 관한 소문이 중외에 성행하였으므로, 조영국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장령 이헌묵(李憲默)이 상서하여 여섯 가지 일을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서관(庶官)을 제관(祭官)으로 차정함에 있어서 치우치게 괴롭게 하지말 것’과 ‘빈연(賓筵)에서의 묘모(廟謨)를 상확(商確)하는 것을 싫어하지말 것’과 ‘주(州)·목(牧)의 직임을 잘못 천거했을 경우 반드시 천주(薦主)를 치죄할 것’과 ‘옛 포흠(逋欠)의 징수는 정지하고 물려 풍년이 들기를 기다릴 것’을 청하였다. 또 충청 감사 조돈(趙暾)이 병으로 공무(公務)를 폐하고 수령의 문서 보고에 「퇴(退)」자를 써 보내며, 형위(刑威)가 마땅함을 잃고 민정(民情)이 통하지 아니한 정상’을 논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고, 또 경상 좌병사 이은춘(李殷春)의 불법과 곤기(閫寄)에 적합하지 아니함을 들어 삭직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아뢴 대로 하라.’, ‘깊이 유념하겠다.’, ‘품처(稟處)케 하라.’, ‘잡아다 처리하라.’는 등 예사 비답을 내렸으나, 유독 호서백의 일에 대해서는 ‘풍문을 어찌 다 믿을 수 있는가?’라고 답하였다. 대개 호서는 사부(士夫)의 향리로 평소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져 전후로 방백을 맡은 사람들은 거개 부드러운 방도로 다스렸다. 그러나 조돈은 사람됨이 고집이 있어 환곡을 받음에 있어 독촉이 심히 급하였고, 또 고적(考績)의 정사(政事)에 엄하였으므로 관하 수령들이 모두 성내었다. 그런데 때마침 조돈이 병을 얻어 피를 많이 쏟고 희노(喜努)가 중도를 잃자, 마침내 ‘미쳤다’고 말을 지어내어 토호(土豪)와 더불어 화응(和應)했던 것이니, 이것이 이헌묵의 상서가 나오게 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헌묵이 영외(嶺外) 멀리서 어떻게 능히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겠는가? 반드시 사주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니, 지금의 일은 참으로 어렵다. 조돈은 평소 지망(地望)과 재주가 없었고, 또 대언(臺言)과 재주가 없었고, 또 대언(臺言)이 전혀 실상이 없는데 이르지는 않았으므로, 듣는 자 또한 괴이쩍게 여기지 않았다. 그 뒤에 임금이 이헌묵의 상서를 가져다 보고 ‘이은춘의 일은 사문(査問)하기에 부족하다.’며 잡아오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대신이 도운 것이었다. 그리고 조돈이 인혐(引嫌)하여 체직을 도모할까 염려한 나머지 특별히 별유(別諭)를 내렸는데, 심지어 ‘호서 한 도(道)는 베개를 높이 베고 자도 근심할 것이 없다.’고까지 하며 위안하였다. 대신과 연신(筵臣)들은 조 돈의 병세와 정세(情勢)가 다시 일을 맡아볼 수 없음을 알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한결같은 말로 칭찬했으니, 임금이 체직시키고자 하지 아니함을 알았기 때문에 감히 어기지 못했던 것이다. 임금은 비록 이헌묵의 말을 쓰지는 아니하였으나, 적막하던 가운데 나온 헌언(獻言)이라 하여 또한 가상하게 여기고 장려하는 뜻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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