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8권, 영조 32년 1756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5.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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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병인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갇혀 있던 전 정언 조영진(趙榮進)을 놓아 주었다. 애초 호서백 조돈(趙暾)이 조영진이 부름을 받았을 때 함부로 역마(驛馬)를 탔다고 치문(馳聞)하자, 왕부(王府)로 하여금 감률(勘律)하게 했던 것인데, 판의금 조영국(趙榮國)은 조영진이 공사(供辭)에서 스스로 변명한 말을 끌어대어 종인(從人)이 범한 바라며 공죄(公罪)로 돌려버렸던 것이다. 대저 대신(臺臣)이 부름을 당하여 역마를 타도록 허락하는 것은 그 몸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장차 그의 말을 듣고자 해서이다. 그러나 조영진이 올 적에는 의기 양양하게 역마를 달려 마치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있는 것 같았지만, 도성에 들어와서는 아무 정세(情勢)도 없이 세 번이나 패초(牌招)를 어겼고 삭직의 벌까지 입게 되었으니, 대각(臺閣)의 풍채가 땅을 쓴 듯 없어졌다 할 만하다. 종인의 범죄 유무는 어찌 족히 물을 것이나 있겠는가?

 

9월 2일 정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유사 당상을 소견하였다. 동부승지 장지풍(張志豊)을 특별히 통우후(統虞候)에 보임(補任)시키고 당일로 도성을 떠나게 하였으니, 대개 소패(召牌)를 재차 어긴 죄가 금추(禁推)에 그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9월 3일 무진

큰비가 쏟아졌다. 임금이 영제(禜祭)를 설행하라 명하고, 문신 당상관을 제관(祭官)으로 택차(擇差)하게 하였다.

 

민백행(閔百行)을 대사간으로, 이최중(李最中)을 부응교로, 정순검(鄭純儉)을 집의로, 김응순(金應淳)을 지평으로, 정옥(鄭玉)·심발(沈墢)을 승지로, 이응협(李應協)을 동의금으로 삼았다. 이응협은 미쳤다고 소문이 나서 동료들이 그와 한 패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요행으로 인해 마침 2품에 올라 은대(銀臺)139)  의 장석(長席)을 차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관사(官師)가 서로 규정함을 또한 다시 볼 수 없었으니, 명기(名器)가 날로 가벼워졌으므로 사람들이 개탄스럽게 여기지 아니함이 없었다.

 

9월 4일 기사

밤에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꼬리의 길이가 2, 3자쯤 되었다.

 

감시(監試)의 복시(覆試)를 일소(一所)·이소(二所)140)  에서 설행(設行)하였다.

 

9월 5일 경오

충청 감사 조돈(趙暾)이 전 부사 홍태배(洪泰培)가 소금 장수 다섯 사람과 함께 청주강(淸州江)에서 빠져 죽었다고 신문(申聞)하였다.

 

임금이 동조(東朝)께 문후하였다. 이때 고전(古篆) 3매(枚)를 대내(大內)의 구장(舊藏)에서 얻었는데, 하나는 ‘체천지보(體天之寶)’라 하여 옥으로 만들었고, 하나는 ‘칙명지장(勅命之章)’이라 하여 은으로 만들었으며, 나머지 하나 역시 옥장(玉章)으로 끈이 있었다. 특별히 종이로 전(篆)의 겉면을 봉해 쌌는데, 위에는 숙묘(肅廟)의 어압(御押)이 있고, 곁에는 언자(諺字)로 ‘상서사인(尙書司印)’ 네 글자가 써 있었다. 임금이 그것에 어압이 있다 하여 감히 열어 보지 못하고 또 어느 대(代)의 물건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언자와 진서(眞書)141)  가 음(音)이 비록 비슷하였지만, 뜻이 같지 않은 것이 많으니, ‘서’가 ‘서(瑞)’자인지 ‘서(書)’자인지 ‘사’가 ‘사(事)’자인지 ‘사(司)’자인지를 모두 판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영부사 김재로(金在魯)와 판부사 유척기(兪拓基)에게 묻게 했는데, 두 신하가 고사(古事)를 많이 알고 또 평소 금석첩(金石帖)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모르는 바를 알고 있을까 하여 하문(下問)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신하는 모두 상세히 알지 못한다고 우러러 대답하였다. 그 뒤 유척기가 입시하여 아뢰기를,
"고 부사 신상(申恦)이 기록한 바 가운데 ‘병자년142)   여름 경복궁(景福宮)의 성 서쪽 오래 된 우물에서 고전(古篆) 1매를 얻었는데 ‘칙명지장(勅命之章)’이라 써 있기에 그것을 바쳤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이 물건이 그것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직접 명(銘)을 짓고 또 그 일을 기록하여 모두 양지당(養志堂)의 어의장(御衣欌) 속에 간직해 두게 하였으니, 양지당은 금중(禁中)의 선조(先朝)의 어의(御衣)를 간직해 두는 곳이다. 두 대신이 말하기를,
"체천(體天)·칙명(勅命)은 본조(本朝)에서 쓰는 바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심양관(瀋陽館)에 볼모가 되어 계실 때 병화(兵禍)를 겪은 끝에 황조(皇朝)의 유물(遺物)을 많이 얻어 가지고 돌아와 대내에 간직했다고 하니, 어찌 그때 간직했던 것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자못 그렇게 여기고, 황단(皇壇)143)  의 봉실(奉室)에 간직하려고 하였으나 능히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대신이 임금에게 상서사인(尙書司印)을 열어보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선조께서 어압하신 바’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상서원 소장의 옛 마패(馬牌) 1매는 곧 선덕(宣德)144) 9년145)  에 주조(鑄造)한 것인데, ‘상서사인(尙瑞司印)’이라 새겼으니, 아마도 국초(國初)에는 상서원을 상서사(尙瑞司)로 일컬었던 것인가 생각되는데, 옥장에 새긴 것은 끝내 알 수 없었다. 【황조(皇朝)의 연호(年號)를 쓴 마패 13매[顆]를 임금이 또 대내(大內)에서 얻었으므로, 모두 상서원의 옛 마패를 간직하던 궤 속에 간직해 두라고 명하였다. 옛 마패는 모두 황조의 연호가 있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30면
【분류】왕실(王室) / 외교(外交) / 출판(出版)


[註 141] 진서(眞書) : 한자.[註 142] 병자년 : 1636 인조 14년.[註 143] 황단(皇壇) : 조선조 때 명(明)나라의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을 제사지내던 대보단(大報壇)을 말함. 숙종 30년(1704)에 대궐 안에 설치했음.[註 144] 선덕(宣德) : 명나라 선종(宣宗)의 연호.[註 145] 9년 : 1434 세종 16년.

 

고 상신 정탁(鄭琢)의 화상(畵像)에 대한 찬(贊)을 친히 지어 정탁의 5대손 정옥(鄭玉)에게 내렸으니, 이때 정옥이 승지로 입시했기 때문이었다. 또 영부사 김재로(金在魯)의 화상에 대한 찬을 지어 하사했으니, 특별한 은전이었다.

 

9월 6일 신미

임금이 몸이 불편하여 약원에서 번갈아 입직하였다. 강서원(講書院)과 조정(朝廷)에서 문안(問安)하였는데 이날부터 아침·저녁으로 행하게 되었다. 임금이 간간이 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감히 폐하지 못하였다.

 

9월 7일 임신

약방에서 함께 입직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감시(監試)의 복시(覆試) 방(榜)을 내걸었다. 임금이 시관(試官)을 소견하고 승지에게 방목(榜目)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그 중 나이 78, 79세인 사람은 며칠 뒤 특별히 본조(本曺)로 하여금 제직(除職)하게 하였다.

 

9월 8일 계유

약방에서 연달아 입진하였다.

 

9월 9일 갑술

약방에서 연달아 입진하였다.

 

유신을 불러 《시전(詩傳)》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선전관(宣傳官)을 동교(東郊)·서교(西郊)에 나누어 보내어 벼가 열매를 맺었는지 여부를 살펴보게 하고, 재차 유신을 불러 창 밖에서 《시전》을 읽으라 명하고 들었다. 임금은 비록 정섭(靜攝) 중에 있었으나 백성을 위하는 뜻과 전학(典學)의 공력이 이처럼 부지런하니, 세상이 조금 편안히 다스려짐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9월 10일 을해

약방에서 연달아 입진하였다.

 

김상중(金尙重)을 특별히 대사간에 제수하였다. 또 서경(署經)146)  을 행하라고 명하고, 만약 패초(牌招)를 어기는 대신(臺臣)이 있으면 모두 곧바로 투비(投畀)하게 하였다.

 

이때 박문수(朴文秀)에게 시호를 내리게 되었는데, 응교 서명응(徐命膺)과 교리 홍자(洪梓)가 ‘충(忠)’자가 적당하다 하여 낙점을 받은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서경(署經)을 거치지 못하였다. 임금이 혹시나 의견을 달리하는 자가 박정(駁正)할까 염려하여 연달아 중비(中批)로 대관(臺官)을 제수하고, 또 패초를 어겨 개좌(開坐)를 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엄한 하교를 연달아 내렸다.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찬선 민우수(閔遇洙)에게 따로 하유하고 함께 오게 하였으나,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9월 11일 병자

약방에서 연달아 입진하였다.

 

9월 12일 정축

약방에서 연달아 입진하였다.

 

유신을 불러 《훈서(訓書)》를 읽으라 명하였다.

 

9월 13일 무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이날은 곧 탄일(誕日)이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있었던 탄일에는 자성(慈聖)께서 언제나 나를 위해 옷을 지어 내리셨으므로 내가 입고 배례(拜禮)하였는데, 오늘은 옷이 이미 내려졌지만 병 때문에 능히 배례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9월 14일 기묘

약방에서 연달아 입진하였다. 유신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9월 15일 경진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9월 16일 신사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은 기운이 조금 나으니, 약원에서는 번갈아 강서원(講書院)에서 직숙하라"
하였다.

 

유최기(兪最基)를 대사헌으로, 이종백(李宗白)을 형조 판서로, 민백상(閔百祥)을 판윤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예문 제학으로, 정광한(鄭光漢)을 지평으로, 심관(沈鑧)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약원의 도제조 이하에게 질(秩)에 따라서 차등 있게 상을 내렸으니, 임금의 환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윤음을 내리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 자(字)이었는데. 동궁(東宮)에게는 학문과 서무(庶務)에 부지런하라고 경계하고, 신공(臣工)들에게는 나랏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보라고 신척한 것이었다.

 

유신을 불러 《시전(詩傳)》을 읽게 하였다.

 

9월 17일 임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불러 전교(傳敎)를 쓰라 명하고, 팔도와 삼도(三都)에 하유하여 수령에게 신칙해 답험(踏驗)을 상세히 살펴서 실시함으로써 공사(公私)간에 폐를 받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9월 18일 계미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진하(陳賀)는 전례에 의거해 거행하라 명하고, 여러 도(道)에서 봉진(封進)하는 방물(方物)은 그만두고 경과(慶科) 또한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예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의 진달로 인해 과거의 설행은 허락하고, 방물은 허락하지 않았으니, 흉년이기 때문이었다.

 

9월 19일 갑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신을 불러 《자성편(自省編)》을 읽게 하였다.

 

9월 20일 을유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수백 자의 전교를 내렸는데, 동궁(東宮)을 강학(講學)에 부지런하고 묘당(廟堂)에서는 온갖 일을 다스리는 것이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병을 낫게 하는 좋은 방문(方文)이 된다 하였다.

 

전교를 내려 여러 도에 신칙해 곡식을 저장하게 하였으니, 대개 명년의 용도(用途)를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앉으니, 여러 승지들이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는데 대개 임금의 하교로 인해서였다.

 

9월 21일 병술

어둑새벽에 서리가 내렸다. 밤 5경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육군자탕(六君子湯)을 들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비록 약 이름이기는 하지만, 이미 ‘군자(君子)’라 했으니 먹을 때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도제조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기(氣)와 담(痰)은 비유하자면 소인(小人)과 같습니다. 소인을 다스림에 있어 어찌 군자로써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다고 칭찬하였다.

 

9월 23일 무자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신을 불러 《심감(心鑑)》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9월 24일 기축

유신을 불러 《시경(詩經)》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9월 25일 경인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남태제(南泰齊)를 이조 참판으로, 정홍순(鄭弘淳)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26일 신묘

임금이 익선관(翼善冠)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았다. 왕세자가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전(箋)·치사(致詞)·표리(表裏)를 의식대로 올렸고, 이어 치사·표리를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과 중궁전(中宮殿)에 올렸으니, 성후(聖侯)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구두로 전교(傳敎)를 불러 쓰게 했는데, 방백·수령에게 백성들을 위하는 데 부지런하라고 신칙하고, 사문(赦文)을 반포할 때 일체로 하유하게 하였다.

 

정휘량(鄭翬良)을 이조 판서로, 이휘중(李徽中)을 지평으로, 홍자(洪梓)를 교리로, 남태저(南泰著)를 부수찬으로, 이태중(李台重)을 호조 판서로, 이담(李潭)을 검열로 삼았다.

 

9월 27일 임진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9월 29일 갑오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인정전(仁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대왕 대비전에 표리(表裏)를 바쳤고, 왕세자가 또 치사(致詞)와 표리를 바쳤으니, 이날이 곧 대왕 대비전의 탄일이었던 것이다. 예(禮)를 행하고 나자, 임금이 숙묘(肅廟)의 옛 신하 가운데 종신(宗臣)으로서 옛날 봉작(封爵)을 받은 사람, 문신으로서 옛날 시종반(侍從班)을 지낸 사람, 음관으로서 옛날 주목(州牧)을 지낸 사람, 무신으로서 옛날 당상관을 지낸 사람을 모두 가자하라 명하고, 성천 부사 김효대(金孝大)와 청주 목사 윤면교(尹勉敎)를 특별히 통정(通政)에 승진시키도록 하였다. 김효대는 동조(東朝)의 친조카이고 윤면교는 동조의 제부(弟夫)였기 때문이었다.

 

김시묵(金時默)을 장령으로 삼았다.

 

금오와 추조의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9월 30일 을미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도기 유생(到記儒生)의 강경(講經)·제술(製述)을 시험하였다. 한종찬(韓宗纘)에게 등제(等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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