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88권, 영조 32년 1756년 윤9월

싸라리리 2025. 10. 5.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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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9월 1일 병신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지평 이휘중(李徽中)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하께서는 매번 연대(筵對)를 품할 때마다 번번이 몸이 편찮으시다는 하교를 내리시고, 주연(胄筵)을 열 때면 말씀하심이 매우 간단하며 어려운 곳을 물으시고 듣는 것이 드뭅니다. 그리하여 전후 2년 동안에 한 부(部)의 《추서(鄒書)》147)  는 아직도 끝마치지 못하였고, 몇 권의 《강목(綱目)》을 겨우 초두(初頭)만 보셨으니, 생각하건대, 예학(睿學)의 성취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래도 이차적인 일일 뿐입니다. 무릇 사람이란 다른 병이 없고 일신이 편안한 뒤에라야 온갖 일을 해나갈 수 있는 법입니다. 이번에 서연(書筵)을 설치했다가 폐기(廢棄)한 것이 어찌 저하께서 즐겨서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기(氣)가 조화되지 않고 뜻을 혹 이기지 못하여 억지로 하고자 하나 억지로 하기 어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절선(節宣)·보색(保嗇)하는 방도를 누누이 우러러 진달하였으니, 전하께서 번연히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시지 아니한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심신(心身)을 보양(保養)할 방도까지 물으셨으니, 우리 저하의 극기(克己)하시는 공력과 도움을 구하는 정성이 옛날의 그 누구보다 탁월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정성이 얕고 말이 보잘것없어 끝내 현저한 실효를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억제하고자 하나 억제하지 못하고 확충시키고자 하나 확충시키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한결같이 세월이 가도록 내맡겨 둔 채로 끝내 하루아침에 두려워 삼가며 이양(頣養)하는 방도를 갖추어 다 하지 않는다면, 그 근심이 어찌 기울어지는 집의 위험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하니, 왕세자가 가납하였다. 임금이 써서 들이라 명하고 승지로 하여금 읽어 아뢰게 한 뒤에 ‘적막한 세상에서 쟁쟁하게 울리는 쇳소리 같다.’고 하유하고, 말을 하사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윤9월 4일 기해

간원 【정언 윤시동(尹蓍東)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지난번 성후(聖候)가 편찮으셨을 적에 신민(臣民)들이 애를 태우며 근심히였으니, 무릇 생명이 있는 무리들은 꼭 같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원·진사의 방(榜)이 나붙은 뒤에 약원에서 함께 직숙할 때 낭자하게 풍악을 잡히는 일이 많았으니, 의분(義分)이 땅을 쓴 듯하여 듣는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청컨대 각부(各部)로 하여금 낱낱이 조사해내어 무겁게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대각(臺閣)의 선발이야말로 얼마나 지중(至重)한 것이며, 통청(通淸)의 규례(規例)야말로 얼마나 지엄(至嚴)한 것입니까? 그런데 지난날 정목(政目)에서 전 현감 이정철(李廷喆)은 난데없이 지평(持平)의 망(望)에 주의(注擬)되었습니다. 산함(散銜)이 새로 통의(通擬)된 것은 진실로 이미 너무 외람되었고, 해유(解由)148)  에 구애되지 아니함도 또한 상격(常格)을 잃었으니, 물정(物情)이 놀라고 의혹스럽게 여겨 오래되면 오래 될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정철은 대망(臺望)에서 개정(改正)토록 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조정에서 유현(儒賢)을 예(禮)로 대우함은 체례(體例)가 본디 남다른 것입니다. 며칠 전에 찬선 민우수(閔遇洙)는 대조(大朝)께서 별유(別諭)를 내리신 데 대해 병 때문에 명을 받들지 못한다고 현도 봉소(縣道封疏)149)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원에서는 금령(禁令)이 있다 하여 마음대로 스스로 돌려보냈습니다. 성상께서 바야흐로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시어 정성스런 마음으로 부르고 계시는데, 승선(承宣)은 그 사장(辭章)을 물리치기를 보통 신료와 다름이 없게 하였으니, 이미 대조께서 예로 대우하는 뜻을 어겼으며 출납을 오직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책임을 전적으로 상실한 것입니다. 사체상 신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해당 승지를 파직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에 소중히 여기는 바는 윤상(倫常)일 뿐이니, 한번 혹시라도 거꾸로 되면 사람이 사람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작년 흉변(凶變) 이후로 의(義)에 어긋난 부류들이 많이 있어 하늘이 내린 법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습니다. 외조(外祖)가 역(逆)이 되자 홍정보(洪靖輔)는 본종(本宗)으로 도로 돌아갔으니, 부자의 윤리가 끊어졌고 처부(妻父)가 역을 범하자 원경렴(元景濂)은 죽은 아내와 이혼하였으니, 부부의 윤리가 무너졌습니다. 이성중(李成中)의 경우는 그 누이가 역적의 처자로서 연좌를 당하자 그녀가 자살한 날 국청의 좌기(坐起)에 나아가 술과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 등 보통 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렬(同列)에 있던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이서(吏胥)들이 침을 뱉으며 욕을 하였으니, 이것은 또 형제의 의(義)에 죄를 얻은 것입니다. 교화를 도타이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홍정보는 먼 곳에 정배하고, 원경렴은 사판(仕版)에서 삭거하며, 이성중은 관작을 삭탈하소서."
하고, 또 상달하기를,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지고 탐풍(貪風)은 날로 번지고 있습니다. 우리 대조(大朝)께서 전후로 칙려(飭勵)하신 것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유배·금고(禁錮)의 율은 보잘것없는 음관(蔭官)이나 한미한 무반(武班)에게만 베풀어지고 숭반(崇班)·준질(峻秩)에게는 미치지 아니하므로, 죄를 입는 자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복종하는 마음이 없고, 탐묵(貪墨)하는 자는 감히 제멋대로 간악하고 외람된 수단을 부리고 있습니다. 민생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곤궁해지고 기강이 이로 말미암아 서지 아니하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예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은 누차 기름진 지방을 맡아 본디 추악한 비방이 많았고, 심도(沁都)150)  를 다스릴 적에는 오로지 사복을 채우는 것 만을 일삼았습니다. 전 유수 정형복(鄭亨復)은 진자(賑資)에 보태고자 군향미(軍餉米) 3천 석을 얻기를 청해 장차 싼값으로 본부(本府)의 백성에게 팔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전을 세우고 이자를 취해 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진휼하기로 구획(區劃)이 이미 이루어져서 백성들이 모두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영국이 후임으로 부임한 이후 경상(京商)과 송도(松都) 사람들을 데려가서 매 석마다 7냥으로 값을 정해 팔도록 허락하고 배에 실어 보냈으니 그 수가 거의 2만여 냥을 넘었는데 문서로 본전을 세울 때는 곧 전 유수가 정한 바 매 석마다 3냥 1전(錢)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른바 진정(賑政)이라 약간의 기민(飢民)만을 뽑아내어 약간의 미곡(米斛)만을 나누어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1만여 냥은 공중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온 섬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한 됫박의 곡물도 혜택을 입지 못하였고, 군수(軍需)의 획급(劃給)은 죄다 개인의 주머니를 윤택하게 하는 데로 돌아가 굶어죽은 사람이 즐비하였고 노하고 욕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또 뭇사람이 눈으로 본 바로서 말하건대 통진 부사(通津府使)가 사간 1백 70여 석의 쌀을 창고 뜰에 내어두고 미처 운반해 가지 않았던 것이 있었는데, 그 쌀 빛깔의 좋음을 듣자 그 서녀(庶女)의 남편인 김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가져와 마치 제 물건을 가지듯 실어가게 하였으니, 이 한가지 일만 보더라도 그 불법하고 꺼림이 없음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 밖에도 군수목(軍需木)·진청미(賑廳米)를 진휼한다며 청해 얻자 시가(市價)에 준하여 팔고 줄여서 기록하여 사용(私用)한 것이 또한 1만여 냥의 수를 밑돌지 아니할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먹여 살려주기를 바라는 백성들에게는 필경 한 톨의 쌀 한 푼의 돈의 혜택도 입지 못하였고, 한갓 수신(守臣)이 빙자하여 이익을 독차지하는 밑천이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섬 안의 생재(生財)는 다른 곳과는 달라서 재해가 든 해에 백성들이 생활하는 바는 전적으로 관의 환곡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응당 돌아갈 몫까지 빼앗고 굶어 죽어 구덩이를 메우는 것을 우두커니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으니,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팽아(烹阿)의 법151)  을 베풀어야 마땅한 것인데, 죄를 가하지 않고 이름이 매복(枚卜)152)  에 올랐으니 이 어찌 탐욕스런 자를 징계하고 세상을 격려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청컨대 엄하게 실상을 밝혀내어 통쾌히 해당한 율을 베푸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해부(該部)의 조사할 일과 승지를 파직하는 일은 모두 상달한 대로 하라. 대망(臺望)을 개정하는 일은 또한 지나치다. 홍정보·원경렴·이성중의 일은 이미 역률(逆律)에 관계되어 보통 사람과 다름이 있으니, 또한 지나치다. 전 유수의 일은 결코 이와 같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미 대각의 상달이 올랐으니, 관계됨이 무겁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윤시동(尹蓍東)이 피혐(避嫌)하기를,
"이정철은 노음직(老蔭職)의 상조(常調)로서 해유(解由)가 나오지 않아 바야흐로 산지(散地)에 있는데, 난데없이 대망(臺望)에 주의(注擬)되었으니, 정사(政事)의 체례를 완전히 잃은 것입니다. 논박해 시정하고자 하는 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홍정보는 본종(本宗)으로 돌아가기를 도모하여 스스로 대륜(大倫)을 끊었으니, 그 인기(人紀)와 풍교(風敎)를 무너뜨림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홍정보와 처지가 서로 같았던 사람들을 조정에서 자신의 수조(守操)함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으니, 홍정보 같은 사람이야 더욱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원경렴은 자신에게 누가 될까 염려하여 죽은 아내와 이혼해 억지로 나랏법에 벗어난 일을 행함으로써 오륜의 하나를 무너뜨렸으니, 옛말에 이른바 ‘잔인하고 야박한 행실’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이성중의 경우는 동기간이 노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자살하도록 방임한 것은 그래도 혹 용서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 죽은 뒤라면 애달파하고 슬퍼하는 것은 마땅히 상정(常情)이 참을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친구를 찾아가 앉아서 스스로 아무런 일이 없는 것과 같이 술과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하고 웃었으니, 도무지 사람의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가 먼 곳에 유배보내고 벼슬을 깎는 법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이번에 논열(論列)한 것은 오로지 구구한 우분(憂憤)의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께서 반드시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고 즐겨 들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비지(批旨)는 의도했던 바를 크게 잃었으니, 이는 신의 성의가 천박하며 능히 위에 미덥지 못한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한 시각인들 태연히 대차(臺次)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직임을 갈고 물리치라 명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필선 홍중효(洪重孝)를 홍주 어전 사정 어사(洪州漁箭査正御史)로 삼았다.

 

윤9월 5일 경자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조재홍(趙載洪)을 이조 참의로, 남유용(南有容)을 대사헌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대사간으로, 홍자(洪梓)를 교리로 이석상(李錫祥)을 수찬으로, 이의엄(李宜馣)을 정언으로, 박상덕(朴相德)을 대사성으로, 구윤명(具允明)·한광조(韓光肇)·이익원(李翼元)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여러 도의 도적의 우환을 아뢰고, 여러 도의 병사(兵使) 및 토포사(討捕使)를 추고할 것을 청하였다. 이장오(李章吾)가 아뢰기를,
"이제 막 충청 도신의 이문(移文)을 보았더니, ‘큰 도적이 창과 칼을 들고 성환(成歡)의 주막(酒幕)에 돌입하여 사람을 쳐 다치게 하고 공주·영동 두 고을에서 상납하는 군포전(軍布錢)을 약탈하였다.’ 했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하니, 임금이 병사와 토포사를 우선 중추(重推)하라 명하고 만약 체포하지 못할 경우에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장문(狀聞)하고 곤장을 치게 하였다. 임금이 근일에 대각(臺閣)의 상서가 있었는가를 물으니, 도승지 신회(伸晦)가 윤시동(尹蓍東)이 새로 상달한 것을 아뢰었다. 임금이 윤시동을 불러 큰소리로 말하기를,
"네가 석갈(釋褐)153)  하고나서부터는 마땅히 공정한 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 이번에 탄박(彈駁)한 것은 무슨 뜻이냐? 당습(黨習)은 고사하고 너의 종조(從祖)가 관서백이 되지 못하자 조운규(趙雲逵)에게 앙심을 품고 그런 것이다. 장차 어찌 너를 쓰겠는가? 너의 집에서 늙어 죽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이어서 윤시동을 방귀 전리(放歸田里)시키라 명하였다. 대개 조운규는 조영국(趙榮國)의 아들이고 윤시동은 윤급(尹汲)의 종손(從孫)이다. 지난번에 관서백을 의천(擬薦)할 즈음에 대신은 윤급을 수망(首望)으로 하였으나, 임금은 조운규에게 주었다. 윤시동이 조영국을 탄핵하자 임금은 그가 앙심을 품었는가 의심하였기 때문에 엄한 하교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해중(李海重)을 강도 어사(江都御史)로 삼았으니, 대개 조영국의 일의 허실을 조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친정(親政)할 때 주서(注書)를 출육(出六)154)  하는 규정을 혁파하였다. 대개 윤시동(尹蓍東)이 친정할 때 주서로 출육하여 이번에 새로 상달했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정휘량(鄭翬良)과 참판 남태제(南泰齊)를 불러 하교하기를,
"비와 이슬은 땅을 가려 내리지 않는 법이다. 임금은 하늘의 도를 몸받아 정사(政事)를 행하니 관작을 어찌 반드시 경화(京華)의 문벌(門閥)로만 하게 하랴? 이제부터 재주가 있으면 쓸 것이고, 먼 지방임에 구애하지 말라."
하였다. 남태제는 말하기를,
"신 등이 만약 경화의 자제(子第)를 먼저 쓰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놀랄 것이니, 어떻게 이 직임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휘량은 말하기를,
"시골 사람이 벼슬에 있을 경우 거개 불미스런 일이 많아 경화의 자제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따로 관안(官案)을 작성해 먼 지방 사람으로 침체된 자를 기록해 들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찬선 민우수(閔遇洙)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찬선 민우수는 예우하던 유신으로서 벼슬이 재열(宰列)에 이르렀고 보양관(輔養官)이 되었다. 지난번 몸이 피곤하여 누워 있던 중에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같이 오게 했던 것은 종국(宗國)을 위한 것이었는데, 듣자니 병이 있다 하므로 약물(藥物)을 보내고 사관을 소환하여 조섭(調攝)에 편토록 했었다. 어찌 신문(申聞)이 이르고 예단(禮單)이 올라올 줄 생각했으랴? 문득 사실이 아닌가 의심하노라. 슬픔을 어찌 말로 다하랴? 상수(喪需)와 부의(賻儀) 등의 일은 후한 데에 따라 거행하고, 담지군(擔持軍)155)   역시 제급(題給)하여 나의 뜻을 표하게 하라."
하였다.

 

윤9월 6일 신축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강경(講經)을 행하였다. 친히 《중용(中庸)》 제10장을 읽고 하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음에도 억지로 강연(講筵)을 열었으니, 여러 신하들은 각각 문의(文義)를 진달하라."
하였다.

 

윤9월 7일 임인

임금이 승지를 불러 전교를 쓰라 명하고 서북인(西北人)을 그 재주에 따라 지평과 정언의 망에 통의(通擬)하라고 신칙하였다. 이어서 대주첩(代柱帖)156)  을 준행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고례(古例)였다. 문관으로서 수령을 거치지 아니하여 통청(通淸)되지 아니한 자는 따로 안(案)을 만들어 들이게 하였는데, 무신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윤9월 8일 계묘

임금이 유신에게 주송(周頌)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일감재자(日監在玆)’ 네 글자를 친히 써서 숭문당(崇文堂) 벽에 새겨서 걸게 하고, 하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옷을 입을 때면 일찍이 띠를 매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앉을 때면 감히 동쪽을 등지지 않았으니, 동쪽은 곧 해가 떠오르는 곳이고 해는 임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송덕중(宋德中)을 집의로, 심익성(沈益聖)을 사간으로, 이수덕(李壽德)을 헌납으로, 정항령(鄭恒齡)을 지평으로, 이인원(李仁源)을 교리로, 황합(黃柙)을 부교리로, 이석상(李錫祥)을 수찬으로, 윤학동(尹學東)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윤9월 10일 을사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윤9월 11일 병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식년 전시(式年殿試)를 행하고, 한종찬(韓宗纘) 등 38명을 뽑았다.

 

윤9월 12일 정미

이수훈(李壽勛)을 지평으로, 이세택(李世澤)을 헌납으로, 이시민(李時敏)을 정언으로 삼았다.

 

윤9월 15일 경술

강도 어사(江都御史) 이해중(李海重)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불러 묻기를,
"조영국(趙榮國)이 과연 장죄(贓罪)에 빠지지 않았던가?"
하니, 이해중이 말하기를,
"군관(軍官)과 아객(衙客)은 분란(紛亂)함이 많았으나, 조영국은 장죄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문서에 인장과 서압(暑押)이 없는 것은 몹시 의심스러운 데 관계된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조영국에게 함문(緘問)케 하라."
하였다. 조영국의 함사(緘辭)가 올라오자, 군관과 아객을 단속하지 못하였다 하여 조영국을 삭직하고, 군관과 아객은 혹은 정배하거나 혹은 소재지의 관원에게 명해 형장(刑杖)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윤9월 16일 신해

달이 필성(畢星)을 범했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친히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 《시전(詩傳)》을 읽게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였다. 우상 신만(申晩)에게 하유하기를,
"이언형(李彦衡)·김상도(金相度)·유당(柳戇)·윤시동(尹蓍東)이 잇따라 날뛰어 마디마디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 그 마음이 이미 드러났다. 이것은 유당이나 윤시동이 스스로 꾸민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영수(領袖)가 있을 것이다. 임어(臨御)한 지 30년 동안 피차 간의 영수를 익히 알고 있으니, 만약 다시 방자하게 날뛴다면 장차 태아(太阿)157)  를 들겠으니, 경 등은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임금이 윤급(尹汲)이 윤시동을 사주한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에 하교의 뜻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윤9월 22일 정사

광주 유수(廣州留守) 홍봉한(洪鳳漢)을 선혜청 당상에 제수하였다.

 

간원 【사간 이민곤(李敏坤)이다.】 에서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조영국이 좌죄(坐罪)된 바는 비록 어사의 서계(書啓)와 그의 함사(緘辭)로 보더라도, 쌀과 포(布)를 팔아 이익을 취한 것이 거의 만수(萬數)가 넘었는데 필경에 섬 사람에게 돌아갈 혜택은 겨우 9백 냥에 그쳤으니, 그 나머지는 공장(公贓)·사장(私贓)을 물론하고 진자(賑資)에 들어가지 아니하였음이 명백합니다. 직책이 숭반(崇班)에 있어 나라로부터 무거운 임무를 받았는데, 어찌 감히 이럴 수 있으며 또한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대조(大朝)께서 특별히 삭직(削職)하라고 하교하신 것은 비록 징려(懲勵)하는 성대한 뜻이기는 하나, 다만 생각하건대, 법을 반드시 시행해야 함은 귀근(貴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할 것인데, 이런 짓을 했음에도 말감(末勘)에 그쳤으니, 장차 소관(小官)을 징계하고 두렵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조영국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율을 상고하여 중감(重勘)토록 하소서. 상주 목사 원경렴(元景濂)은 경사(京司)를 맡고부터 이미 비루하고 잗달다는 비방을 불러일으켰고, 수령이 되어서는 탐학스런 정사를 제멋대로 베풀었으며, 집에서는 잔인하고 야박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남이 천거하고 이끌어주는 데 빌붙어 마침내 상주 목사를 얻게 되었는데, 도임(到任)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원성(怨聲)이 이미 파다하였습니다. 청컨대 상주 목사 원경렴을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소서. 근년의 농사 형편은 기전(畿甸)의 경우 지난해에 비해 더욱 심하니, 구제해서 실릴 방책을 마땅히 때에 맞추어 구획(區劃)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진자(賑資)에 보충할 물자는 환모(還耗)를 제외하고, 또한 많이 저축해 두어 뜻밖의 일에 대비한 것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절약한다면 또한 한두해의 흉년은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매번 흉년을 당하면, 요리하여 진자에 보충한다고 핑계대고 군수(軍需)의 돈과 포(布)를 많이 청합니다. 따라서 탐욕스런 관원과 교활한 아전이 기회를 타서 간사한 짓을 하는 것이 허다히 이에서 말미암아 끝내 실질적인 혜택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군국(軍國)이 잃는 바가 심히 큽니다. 또 이익을 도거리하고 침탈하는 것이 도리어 잔약(孱弱)한 백성들의 해가 되고 있습니다. 비록 요사이 강도(江都)의 일로 말하더라도, 허다한 쌀과 돈이 모조리 이익을 노리는 개인의 주머니로 돌아갔고, 섬 사람은 혜택 받는 바가 없었으니, 이것은 심히 경계할 만합니다. 청컨대 올해의 진자는 반드시 현재 있는 곡식으로 적절히 헤아려 획급토록 하고, 경외에 신칙하여 돈과 포를 요리하는 폐단을 막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새로 상달한 내용의 말에 슬며시 윤시동(尹蓍東)을 비호하는 뜻이 있다.’고 하교하고, 먼저 이민곤을 체직시키고 이어서 고신(告身) 3등을 빼앗았다.

 

윤9월 23일 무오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이이장(李彛章)을 대사간으로, 이성중(李成中)을 예조 판서로, 오언유(吳彦儒)를 대사성으로, 김치인(金致仁)을 부제학으로, 이후(李)를 우빈객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좌부빈객으로, 이기경(李基敬)을 사간으로 삼았다.

 

정언 이경옥(李敬玉)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윤시동(尹蓍東)에 대한 처분은 혹 과중(過中)한 데 관계되는 듯하며, 이민곤(李敏坤)의 고신(告身) 3등을 빼앗는 것은 율명(律名)이 너무 지나칩니다. 청컨대 모두 도로 정침(停寢)하도록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승지로 하여금 그 상서를 읽게 하고 하령(下令)하기를,
"대조(大朝)의 처분이 지극히 윤당(允當)한데,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는가? 나의 처분은 성의(聖意)를 우러러 깊이 유념한 것이었으니, 또한 어찌 감히 이렇게 비호할 수 있단 말이냐?"
하였다. 그리고 그 글을 돌려주고 이경옥을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였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 상송(商頌)을 읽게 하였다. 그리고 홍봉한(洪鳳漢)을 불러 하교하기를,
"비록 2품이라도 함문(緘問)하는 규정이 없는데, 하물며 조영국(趙榮國)은 매복(枚卜)한 중신(重臣)임에랴! 그 함사의 첫머리를 보고 마음이 심히 편치 못했다. 내가 조운규(趙雲逵)를 관서백으로 삼은 것은 대개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였다. 그런데 윤시동(尹蓍東)이 논한 바는 조영국을 증오하여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조운규가 도(道)의 경계에 도착하는 것을 저지하여 중간에서 낭패를 보도록 만들려는 것이었으니, 통탄스런 일이다."
하였다, 밤 5고(五鼓)에 승지를 불러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였는데, 조관빈(趙觀彬)·윤봉조(尹鳳朝)·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네 사람을 당괴(黨魁)로 여겨 모두 방귀 전리(放歸田里)시켰다가 얼마 안있어 도로 정침(停寢)하였다.

 

이민곤(李敏坤)을 육진(六鎭)에 방귀(放歸)시키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영국(趙榮國)은 그 탐오(貪汚)하다는 허물이 이미 씻겨졌고, 처분한 것은 아랫사람을 잘 선택하고 단속하지 못한 것에 불과하였는데, 윤시동(尹蓍東)의 뜻을 거두어 주워서 이미 씻겨진 일을 감히 고율(考律)토록 청한 것은 껍질이 없으면 〈털이 붙을 데가 없는 것과〉 같은 격이니, 어찌 고율할 것이 있겠는가? 흰 머리의 늙은 나이에 오로지 당습(黨習)만을 일삼고 있으니, 늙어갈수록 더욱 교활해진다고 이를 만하다. 《서전(書傳)》에 이른바 ‘방류(放流)’란 이런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하고, 이어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육진으로 방귀(放歸)시키라고 명하였으니, 육진은 북쪽 극지(極地)이다.

 

이경옥(李敬玉)을 기장현(機張縣)에 투비(投畀)하라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경옥은 윤시동(尹蓍東)과 이민곤(李敏坤)을 비호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마음이 단지 당(黨)이 있는 것만 알고 군부(君父)가 있음은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이어서 투비를 명했던 것이다.

 

특별히 이정철(李廷喆)을 정언에 제수하고 해유(解由)에 구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정철이 윤시동(尹蓍東)의 탄핵에 들어 대망(臺望)을 개정(改正)할 것을 청했기 때문에 임금이 윤시동을 미워하여 이 같은 명을 내렸던 것이다.

 

임금이 전교(傳敎)를 쓰라하고 명하기를,
"근래 윤시동의 일로 인해 연달아 수응(酬應)했는데, 또 이민곤·이경옥의 무리가 생겨났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기(氣)’란 한 글자로 임금의 마음을 돋군 것이다. 아! 당(黨)이 아무리 그 임금보다 낫다 한들 윤리를 지키려는 마음을 사람마다 모두 갖고 있을 것인데,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처럼 날뛴단 말인가?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마땅히 재실(齋室)로 가서 사각(史閣)에 소장된 여러 신하들의 면전에서 거짓말을 늘어놓은 글들을 가져다 뜰에서 태워버릴 것이니, 대소 신료들은 모두 모름지기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윤9월 24일 기미

밤에 번갯불이 번쩍였다.

 

윤9월 26일 신유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친림하여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정원달(鄭遠達) 등 8명을 뽑았다.

 

윤9월 27일 임술

유신을 불러 소아(小雅)를 읽게 하였다.

 

윤9월 29일 갑자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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