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을축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10월 2일 병인
초경(初更)에 임금이 문과 장원(文科壯元) 정원달(鄭遠達)을 인견(引見)하고, ‘삼세금방(三世金榜)’ 네 글자를 면전(面前)에서 하사하였다. 2경에 또 정원달을 불러 ‘삼세책문 내계기조(三世策文乃繼其祖) 임신충장 공존사직(壬申忠章功存社稷)’ 두 구절을 면전에서 하사하였다. 이어서 각(閣)을 세워 어필(御筆)을 걸라고 명하고, 탁지(度支)158) 로 하여금 공역(工役)을 도와주게 하였다. 정원달은 곧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의 형이다. 임금이 일성위 옹주(日城尉翁主)에 대해 사랑을 쏟음이 몹시 깊었기 때문에 정원달을 사치스럽게 해줌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10월 3일 정묘
밤에 번갯불이 번쩍였다.
임금이 대신과 균역청 당상 홍봉한(洪鳳漢)·사정 어사(査定御史) 홍중효(洪重孝)·경기 감사 정홍순(鄭弘淳)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매복(枚卜)한 중신(重臣)에게 팽아(烹雅)의 법을 적용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필경 함문(緘問)한 것은 사체(事體)를 이루지 못하였다. 조영국(趙榮國)이 논박을 당한 것은 전적으로 그 아들에게서 말미암아 나온 것인데, 이것은 윤시동(尹蓍東)이 스스로 꾸민 바가 아니라 혹 사주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단지 윤시동만 논하는 것이 옳으니, 말을 박절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은 작년에 판당(判堂)이 되었을 때 이성중(李成中)이 술과 고기를 먹고 태연 자약하게 굴었던 것을 과연 눈으로 보았는가?"
하니, 좌의정 김상로(金尙魯)는 말하기를,
"신은 그때 이성중이 눈물을 흘린 흔적이 있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눈자위가 벌겋게 부은 일에 대해 신이 괴이쩍게 여겨 물어 보았더니 ‘불행하게도 여차여차한 일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우의정 신만(伸晩)은 말하기를,
"마음이 이와 같을 때라면 설령 술을 마신다 하더라도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대신(臺臣)은 진실로 죄가 있으나, 영남과 육진(六鎭)에 방귀(放歸)시킨 것은 전에 없던 법을 새로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어사 홍중효가 말하기를,
"신이 지나는 길에 기호 지방을 두루 다녔는데, 온갖 곡식이 손상되어 한 줄기라도 벨 만한 곳이 거의 없었으니, 일찍이 보지 못했던 참혹한 재앙이라 할 만하였습니다. 만약 급암(汲黯)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조정의 명령이라 핑계하여 창고를 여는 일이 있었을 것이나159) 신은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조정에서 만약 별달리 우휼(優恤)하는 은전을 내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모조리 죽고 말 것이니, 비록 세전(歲前)에 진휼하더라도 또한 지나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전교를 내려 기전(畿甸)·관동(關東)의 묵은 포흠(逋欠)은 모두 봉납(捧納)을 정지시키고, 다른 도(道)의 우심한 고을의 묵은 포흠도 마찬가지로 봉납을 정지시키도록 하였다. 경기 감사 정홍순이 ‘기내(畿內) 도적의 근심은 실로 앞으로 걱정거리가 된다’고 아뢰고, 이어서 무신(武臣)을 현재 비어 있는 수령 직임에 차견(差遣)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성경(李星慶)·유수(柳脩)를 정언으로, 홍인한(洪麟漢)을 부교리로, 이인원(李仁源)을 부수찬으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헌으로, 이수일(李秀逸)을 지평으로, 원인손(元仁孫)을 승지로, 홍봉한(洪鳳漢)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때 옛 평안도 관찰사 조운규(趙雲逵)는 그 아비가 대간의 탄핵을 당한 때문에 도중에서 머무르며 부임하지 못하고 있으니, 임금이 체직을 허락하고 특별히 명하여 홍봉한으로 대신하게 했던 것이다. 대신이 균역청 당상으로서 그를 대신할 적당한 사람을 얻을 수 없다며 어렵게 여기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후(李)와 민백상(閔百祥)이 할 만하다."
하였다.
필선 홍중효(洪重孝)를 동래 부사로 발탁하였다. 이때 동래 부사 자리가 비었으므로 임금이 적합한 사람을 묻자, 대신이 승지 심발(沈墢)로 대답하였다. 홍중효는 이때 어사(御史)로서 앞에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저 어사는 어떠한가?"
하니, 대신들이 모두 적합한 사람을 얻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10월 4일 무진
민백상(閔百祥)을 좌빈객으로, 김상익(金尙翼)을 대사헌으로, 한익모(韓翼謨)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임금이 평안 감사 홍봉한(洪鳳漢)을 소견하고, ‘관방(關防)을 잘 살피고 재화(財貨)를 저축하라’고 신칙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서북 지방에 문교(文敎)를 펼치는 것은 조정의 뜻이 아니다. 듣자니 관서 지방에 서당(書堂)이 많다 하는데, 반드시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유신에게 소아(小雅)를 읽으라 명하였다.
10월 5일 기사
오시(午時)에 천둥하고 번갯불이 번쩍였으며, 우박이 쏟아졌다. 임금이 천둥의 이변(異變) 때문에 자신을 나무라는 하교를 내리고 7일 동안 감선(減膳)할 것을 명하였다. 삼공(三公)이 차자를 올려 면직을 바라고, 후원(喉院)·옥서(玉署)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면계(勉戒)하였으니, 이것은 의례적인 것이다. 임금이 모두에게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진청(賑廳)에서 진휼을 베푼 뒤에 유개(流丐)들은 모두 고향 땅으로 돌아갔으나, 그 가운데 어리고 의지할 데 없는 자들은 지난번 우상의 진달로 인해 진청에서 주인을 정해 주어 살려주도록 신칙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보건대, 거지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울부짖는 경우가 심히 많으니, 만약 심한 추위를 만난다면 반드시 얼어죽을 것입니다. 진청의 당상관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각부(各部)에 엄하게 신칙해서 일일이 영부(領付)하여 접제(接濟)토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허락하였다.
10월 7일 신미
서명빈(徐命彬)을 발탁하여 판의금으로 삼았다.
임금이 법복(法服)을 갖추어 입고 숭문당(崇文堂)에 앉아 강경(講經)을 행하였다. 사폐(辭陛)하는 여러 도의 수령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내가 백성의 일을 밤낮 잊지 아니하여 깊은 밤 차가운 전(殿)에서 너희들을 소견하는 것이니, ‘깊고 깊은 구중 궁궐이라 들음이 없어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눈이 쌓이고 날이 차가워 바로 범이 횡행할 때이니, 너희들은 부디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날이 추웠으므로, 임금이 기랑(騎郞)과 선전관(宣傳官)을 불러 숙위(宿衛)하는 여러 상번(上番) 군사들을 위로하였고 또 가벼운 죄수들 방송하라 명하였다. 재이(災異)가 있은 뒤 말하지 아니한 대관(臺官)을 파직하라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천자(天子)에게 모두 용감한 장군이 있는 것은 아니며, 장군에게 모두 용감한 군사가 있는 것은 아니니, 인주(人主)의 간관(諫官)에 대한 관계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고 즐겨 들어와서 간(諫)하는 도리를 다한다면, 비위나 맞추고 유약한 자들도 또한 진언(進言)에 동감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아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낯빛으로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부한다면, 한갓 벼슬에서 물러날 뿐만 아니라, 비록 날마다 글을 내려 그 말을 구한다 할지라도 또한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송나라 신하 소순(蘇洵)이 말하기를, ‘능히 간언(諫言)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신하로 하여금 반드시 간하지 못하도록 했다면 진실로 간언을 받아들이는 임금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미덥지 아니한가?"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33면
【분류】과학-천기(天氣) / 사법(司法) / 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군사-휼병(恤兵)
사신(史臣)은 말한다. "천자(天子)에게 모두 용감한 장군이 있는 것은 아니며, 장군에게 모두 용감한 군사가 있는 것은 아니니, 인주(人主)의 간관(諫官)에 대한 관계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진실로 위에 있는 사람이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고 즐겨 들어와서 간(諫)하는 도리를 다한다면, 비위나 맞추고 유약한 자들도 또한 진언(進言)에 동감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아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낯빛으로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부한다면, 한갓 벼슬에서 물러날 뿐만 아니라, 비록 날마다 글을 내려 그 말을 구한다 할지라도 또한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송나라 신하 소순(蘇洵)이 말하기를, ‘능히 간언(諫言)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신하로 하여금 반드시 간하지 못하도록 했다면 진실로 간언을 받아들이는 임금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미덥지 아니한가?"
10월 9일 계유
임금이 대신과 균역청 당상을 불러 황정(荒政)을 강구(講究)하였다. 유신에게 《시전(詩傳)》을 읽으라고 명했는데, 홍안장(鴻雁章)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아! 저 우리 백성들이 한 해가 다가도록 노고하였으나 굶주림에 시달려 길거리에 엎드러지며 편안히 모여 살 때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어찌 크게 불쌍히 여길 바가 아니겠는가? 홍안장은 오늘날의 경산(景像)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또 학명장(鶴鳴章)에 이르러 임금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 학의 울음소리는 그래도 하늘에 들릴 수 있는데, 아! 저 백성들은 아무리 가슴에 가득 원한을 픔고 있다 한들 어떻게 구중 궁궐에 알리겠는가?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전조(田租)의 반을 감하였는데,160) 이처럼 기근이 든 해를 만나 만약 우리 백성들이 모조리 죽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는다면, 어찌 인군(人君)의 도리가 될까 보냐?"
하고, 이어서 기내·관동·삼남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결전(結錢)을 감해 주라 명하고, 또 관동의 명절 물선(物膳)을 정지토록 하였다.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을 선발하고 왕손 교부(王孫敎傅)를 의정(議定)하라 명하였다. 이때 원손의 슬기로운 자질이 숙성(夙成)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종국(宗國)에는 두 가지 큰 일이 있으니, 원손을 보양(輔養)하는 것과 왕손을 교도(敎導)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한(漢)나라의 가의(賈誼)는 문제(文帝)에게 일찍 교유(敎諭)할 것을 청했던 것이다. 비록 백성이라 하더라도 교유가 중요하거늘, 하물며 제왕(帝王)임에랴? 원손의 나이 지금 5세이니, 이때 보도하는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보양관 이태중(李台重)이 이미 승자(陞資)하였으니, 누가 그를 대신할 만한가?"
하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서지수(徐志修)·김양택(金陽澤)이 적합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손을 교양(敎養)하는 방도는 이미 정식(定式)이 있으나 왕손의 경우 사부(師傅)를 두는 예가 없으니, 이는 궐전(闕典)이다. 만약 몽양(蒙養)하는 방도를 다해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게 한다면, 단지 왕손을 성취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원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니, 이천보가 말하기를,
"성의(聖意)가 종지(宗支)를 일찍 가르쳐야 한다는 뜻을 깊이 진념(軫念)하고 계시어 이는 실로 국가의 한 없는 복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왕손 교부 절목 의주(王孫敎傅節目儀註)’를 지어 내렸다. 어제(御製)에 이르기를,
"한나라가 의는 문제에게 일찍 교유할 것을 청하였다. 비록 백성이라 하더라도 교유가 중요한 법인데, 하물며 제왕임에랴! 오늘날 한없이 많은 온갖 일 중에서 원손을 선도(善導)하는 것이 곧 첫째 가는 것이다. 나이 지금 5세이나 지각(知覺)이 어른과 다름이 없으니, 이런 때 보도(輔導)를 어찌 조금이라고 소홀히 할 수 있으랴? 《소학초(小學抄)》의 강(講)을 이미 끝냈으니,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사흘을 일차(日次)로 하여 강을 시작하되, 법강(法講)이나 주연(胄筵)과는 차이를 둘 것이고, 무릇 탈품(頉稟)을 제외하고는 강독(講讀)은 두세 줄울 넘지 않도록 하여 간략함을 따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아! 원손을 교양(敎養)하는 방도는 이미 정식(定式)하였는데, 종친(宗親)으로 말하자면, 종학(宗學)이 곧 종친을 교양하는 스승이며, 그 벼슬에는 사교(師敎)하는 의리가 있고, 태학(太學)은 곧 청금(靑衿)161) 을 교양하는 학교로 그 벼슬에 또한 사교하는 의리가 있다. 또 대군(大君)·왕자(王子)에게는 모두 사부(師傅)가 있고 내시 동몽(內侍童蒙)에게도 모두 교관(敎官)이 있으니, 국조(國朝)에서 설치한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그러나 왕손에 이르러서는 교양하는 벼슬이 없는데, 이른바 왕손이란 세자(世子)의 중자(衆子)·서자(庶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세손 이외에는 왕자에 비할 바 아닌데도, 만약 부직(付職)한다면 종친 중 연장자의 뒤가 되는 데 불과하니, 본디 종학이 있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대학(大學)》 서문에 ‘왕궁(王宮)·국도(國都)로부터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없지 아니하며, 사람이 태어나 여덟 살이 되면 왕공(王公) 이하로부터 서인(庶人)의 자제(子弟)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小學)에 입학한다.’고 이르지 않았던가?
보건대, 동자(童子)162) 가 되기 전에 어찌 가르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종친의 아들은 부직하기 전에 각각 그 스승이 있지만 왕손에 대해서는 부직하기 전에 늘 궐중(闕中)에 있으니, 무슨 스승이 있겠는가? 내시(內侍)의 경우 입학하는 자에게는 저절로 교관(敎官)이 있고, 그 밖에 동서(東西) 교훈(敎訓)을 설치하는데, 내시부(內侍府)에서 녹과(祿窠) 둘을 만들어 녹을 주어 가르치니, 동몽 교관의 뜻을 모방한 것인데, 직함은 없고 녹만 있는 것이다. 국초(國初)에 설치한 것이 심상한 데 비길 바 아닌데, 오직 왕손에 대해서만은 사교(師敎)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도리어 내시 동몽만도 못한 것이다. 이는 한갓 사체(事體)를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니라 곧 몽양(蒙養)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다. 예(例)를 정한 뒤에 세손 이하 왕손들의 공상(供上)을 순서대로 질서 정연하게 경오년163) 부터 지금까지 살펴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음식·의복은 말단적인 것임에도 오히려 제도가 정해져 있는데, 교양하는 데 어찌 그 제도가 없을까 보냐? 그렇지 않다면 부직하기 전에는 늘 부시(婦寺)의 손에만 있게 되어 그 배움을 알지 못할 것이니, 어찌 능히 어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 수 있겠는가?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부직·취학(就學) 전에 동몽 교관의 예에 의거해 스승을 두어 ‘왕손 교부(王孫敎傅)’라 이름하고, 부직한 뒤에 감하(減下)하며, 처소와 범절(凡節)은 왕자 사부(王子師傅)의 예에 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왕손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대군·왕자와는 다름이 있으니, 세자의 중자(衆子)는 적서(嫡庶)를 논할 것 없이 한 사람이 겸한다면, 체모가 존엄해지고 교양하는 것은 실질적인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왕손의 스승을 이제 막 강정(講定)하였으니, 원자(元子)·원손(元孫)이야말로 생각건대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제도를 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양관은 능히 웃고 말한 뒤에 보도(輔導)하는 사람에 불과한데, 사부의 이름이 없는 것은 이로 인해 제도를 정했기 때문이다. 원자·원손은 초년에 보양관을 두되, 직품(職品)은 원자 보양관의 경우 이미 《속대전(續大典)》에 실려 있고, 원손 보양관의 경우 종2품과 당상 정3품을 통틀어 차정(差定)한다. 그리고 원자·원손이 여섯 살이 되면 사부를 두는데, 직품은 원자 사부는 정2품으로, 원손 사부는 종2품으로 거행한다면 사리(事理)에 합당할 듯하겠다. 하지만 이는 새로 만든 것이고 국제(國制)가 중요한 것이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물어보고 등대(登對)해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세자의 중자(衆子)·적서(嫡庶)를 부직하는 품계는 《대전(大典)》에 실려 있으나 연한은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대군과 왕자에 비교하건대, 의당 차등이 있어야 할 것이고 여느 종친과도 또한 혼동시킬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세자와 왕자의 아들은 사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증거댈 만한 문헌이 없으니,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을 상세히 살펴 제도를 정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10일 갑술
정언 이성경(李星慶)이 상서하여 맨 먼저 예학(睿學)에 힘쓸 것을 말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전야(田野)의 황폐함이 근래보다 심한 적은 있지 않았습니다. 혹은 수 년 동안 흉년이 든 나머지 땅은 넓은데 사람은 드물기도 하고, 혹은 큰물에 떠내려간 뒤라 하천이 터져 모래가 뒤덮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랜 해 동안 묵고 버려져 잡초만 눈에 가득한데, 재결(災結)에는 한정이 있어 근거 없는 세금의 징수가 셀 수도 없습니다. 기호(畿湖)와 관동(關東)이 이 폐가 더욱 심한데, 견감해 주는 은혜가 미치지 못하니 울부짖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있습니다. 마땅히 먼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사실대로 뽑아서 보고하도록 하고, 다음으로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되 두루 살펴 상세히 핵실(覈實)하게 해서 특별히 탕감해 주는 정사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막 기근과 전염병을 겪어 백성들이 요사(夭死)하여 들판에는 거적에 싸서 장사지낸 것이 여러 겹으로 쌓여 있는데, 가난한데다 홀몸으로서 의지할 데 없는 무리들이 여러 해를 지내고도 땅에 묻히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게 있습니다. 그리하여 귀신은 슬퍼하고, 고아와 과부는 울부짖고 있으니, 이 어찌 화기(和氣)를 감상(感傷)시키고 인정(仁政)에 결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마땅히 경외에 신칙해 가난하여 능히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사서(士庶)를 뽑아내어 소재지의 관원이 장례 물품을 도와 주어 백골이라도 묻어 주는 은전을 다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10월 12일 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재이(災異)가 있고 난 뒤에는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아무리 문구(文具)에 따라 수를 갖추는 일이라 할지라도 일은 응당 해야 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그런 일 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저께의 차대는 재이 뒤에 처음 있는 연석(筵席)이었는데도 또한 명령에 응하지 않았으며, 비록 한 두 대장(臺章)이 있었다 해도 대충대충 책임만 때운 것일 뿐이었습니다. 나라에 언로(言路)가 없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또 그 말을 쓰지 아니하는 것은 조정에서 말을 하도록 인도하는 본래의 뜻이 아닌 것입이다."
하고, 이어서 김상도(金相度)·이언형(李彦衡)에 대한 처분이 과중하였음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예순 살이란 늙은 나이인데 이에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을 속인 사람이 되었다. 경 등은 김상도·이언형에게 미련을 두니,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전 판서 이성중(李成中)을 특별히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하였다. 이성중은 대언(臺言)을 당한 뒤에 강교(江郊)로 물러나 지내고 있었는데, 이번 제수가 있게 되자 즉시 나와 명에 응했다.
10월 14일 무인
밤 1경에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10월 15일 기묘
왕세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헌부 【지평 이보관(李普觀)이다.】 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언소(李彦熽)는 상도(常道)에 어긋난 정사(政事)를 말하자면 한가지로 족하지 아니합니다. 그 읍면(邑面)의 수효대로 참나무를 깎아 곤장을 만들었는데, 길이는 양척(量尺)만 하고 크기는 어린아이의 팔뚝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곤장에 각기 면(面)의 이름을 쓰고 그 끝에 낙인(烙印)을 찍어 이것으로 백성을 치기도 하고, 이것으로 양전(量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고을에 한 사람이 그 어버이의 상(喪)을 당했는데, 장기(葬期)가 마침 환곡을 갚을 때 있었으므로, 장사를 치른 뒤 즉시 바치겠다는 뜻으로 시기를 늦추어 달라고 애걸하였더니, ‘관(官)은 단지 형장(刑杖)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른다.’는 제사(題辭)를 내리고는 물리쳐 버렸습니다. 진실로 조금이나마 인효(仁孝)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포악하고 사나우며 잔인하고 야박한 사람을 결코 자목(字牧)의 직임에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잡아다가 처리하라."
하였다. 또 상달하기를,
"후릉 참봉(厚陵參奉) 한지(韓芷)는 본디 불학 무식한 사람으로서 부모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가도(家道)가 엉망입니다. 심지어 천예(賤隷)들이 부끄러워하는 행실까지 있어 친척들이 부끄럽게 여기고 인아(姻婭)들이 버렸습니다. 이처럼 윤기(倫紀)가 없고 행검(行檢)이 없는 사람을 의관(衣冠)의 반열에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깎아 버리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충훈부(忠勳府)에서 무신년164)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 군공(軍功)을 세운 자의 자식에게서 포(布)를 징수하는 것은 제감(除減)한 것을 청하니, 상달한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전후로 금양(禁釀)을 범하여 섬으로 유배된 자를 다시 연수(年數)를 한정해 그 율(律)을 의정(議定)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자신이 법을 관장하는 관원이 되어 연수를 한정하기를 청하니, 더욱 지극히 한심하다."
하였다. 이보관이 인피(引避)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0월 16일 경진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10월 19일 계미
달이 귀성(鬼星)을 범하였다.
대사헌 김상익(金尙翼)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외방(外方)의 유개(流丐)는 마땅히 도신(道臣)과 수령에게 신칙하여 먼저 구제하여 겨울 전에 죽는 근심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행려(行旅)를 노략질하거나 여리(閭里)에서 제멋대로 난폭하게 구는 자는 마땅히 좌우 포청(左右捕廳)과 여러 도(道)의 진영(鎭營)에 신칙하여 각별히 형찰해 잡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노(逆孥)를 영남과 호남에 유방(流放)시킴에 있어서 한 곳으로만 치우치게 보내고 있으니, 마땅히 왕부(王府)에 신칙하여 각처로 나누어 소속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과거를 드물게 설행하여 음붕(淫朋)을 없애고 세도(世道)를 진압하는 한 단서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두 대신(臺臣)을 영남과 육진(六鎭)에 방귀(放歸)시킨 것은 율명(律名)이 마땅함을 잃었다며, 대조(大朝)께 우러러 품할 것을 청하니, 왕세자가 혹은 아뢴 대로 하라 하고, 혹은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우러러 품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대조께서 처분하신 것이 엄명(嚴明)한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는가?’라고 답하였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 대아(大雅)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이태중(李台重)이 졸(卒)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태중은 수십 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아니하여 의중(意中)에 반드시 지키는 바가 있었는데, 만년에 한번 출사(出仕)한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던가? 또 청렴·검소·근후(謹厚)한 것은 이태중이 본디 간직하고 있었으나, 재주와 간국(幹局)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만약 이태중으로 하여금 잠시동안 죽지 않고 세상에 쓰이도록 했다면, 알지 못하겠다만, 과연 유위(猷爲)와 건명(建明)이 있어 능히 임금의 권애(眷愛)에 부응하고 여정(輿情)에 흡족했을 것인가? 그러나 세상의 탐욕스러워 조경(躁競)하고 이익을 좋아해 부끄러움이 없는 자에 비교한다면, 이태중은 뛰어난 사람이도다."
【태백산사고본】 62책 88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634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태중은 수십 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아니하여 의중(意中)에 반드시 지키는 바가 있었는데, 만년에 한번 출사(出仕)한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던가? 또 청렴·검소·근후(謹厚)한 것은 이태중이 본디 간직하고 있었으나, 재주와 간국(幹局)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만약 이태중으로 하여금 잠시동안 죽지 않고 세상에 쓰이도록 했다면, 알지 못하겠다만, 과연 유위(猷爲)와 건명(建明)이 있어 능히 임금의 권애(眷愛)에 부응하고 여정(輿情)에 흡족했을 것인가? 그러나 세상의 탐욕스러워 조경(躁競)하고 이익을 좋아해 부끄러움이 없는 자에 비교한다면, 이태중은 뛰어난 사람이도다."
북도(北道)로 방귀(放歸)한 죄인 이민곤(李敏坤)이 김성(金城)에 이르러 점사(店舍)에서 불이 나서 타죽으니, 석방하라 명하고 해조(該曺)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거행하게 하였다.
10월 20일 갑신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균역청 당상을 소견하고 선혜청에 명하여 공미(貢米)를 내어 도민(都民)의 황급함을 구제하게 하였다. 겨울이 일찍 추워져 공조(公漕)·사운(私運)이 혹은 전복되고 혹은 얼어붙어 도하(都下)가 황급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임금이 금주(禁酒)한 이후에도 금양(禁釀)을 범하는 일이 계속된다 하여, 지금부터 이후로는 술을 빚다 잡힌 자는 엄하게 형신(刑訊)하여 그 사서 마신자를 캐묻되, 술을 빚은 자는 형(刑)을 면제하여 단지 도배(島配)만 시키고, 사서 마신 자는 엄하게 형신하여 영원히 잔읍(殘邑)의 노비로 소속시킬 것이며, 선비로 이름하는 자는 이름을 청금(靑衿)에서 깎고 엄하게 3차례 형신하여 멀리 귀양보내고, 중서(中庶)는 엄하게 형신하여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수군(水軍)에 충정(充定)시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황해 감사 남태기(南泰耆)와 충청 감사 조돈(趙暾)을 파직하였다. 석방(釋放) 여부를 장문(狀聞)하면서 금양(禁釀)을 범해 멀리 귀양보내진 사람에 대해 품(稟)하였기 때문이었다.
10월 23일 정해
임금이 유신을 소견하고 윤음(綸音)을 쓰라 명하고 이르기를,
"왕자(王子)의 봉작(封爵)은 일곱 살 때 하고, 종친(宗親)의 부직(付職)은 열 다섯 살에 하니, 내 생각으로는 왕손(王孫)의 봉작은 열 살에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숙안 군주(淑安郡主)를 봉작한 교지(敎旨)를 보았더니, 곧 열 살이었다. 우연하게도 내 뜻과 맞으니, 왕손과 군주·현주(縣主)의 봉작은 반드시 열 살로 하는 일을 제도로 정하라."
하였다.
10월 24일 무자
이덕해(李德海)를 헌납으로, 심관(沈鑧)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황해도 유생(儒生) 등이 상서하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병조 판서 이후(李)를 소견하였다. 이후가 이때 평안도의 옛 감사로서 대궐에 나아가 부신(符信)을 바치자, 임금이 승지에게 병조 판서의 명소패(命召牌)를 전하여 이후가 직접 받아 차게 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5일 기축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다 무양흑원령(無揚黑圓領) 차림으로 명정전(明政殿)에 임하여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기신(忌辰)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였다.
10월 26일 경인
임금이 재실(齋室)에 나아가 충청 감사 김양택(金陽澤)과 황해 감사 심발(沈墢)을 소견하고 격려·신칙하여 보냈다.
대신과 균역청 당상 이후(李), 호조 판서 민백상(閔百祥)을 불러 하교하기를,
"내 생각으로는 미곡(米穀)이 저절로 서로 유통되어 점차 여유가 있도록 하고 싶었는데, 어제 들으니, 비국(備局)에서 억지로 공가(貢價)를 정했기에 시인(市人)들이 이로 인해 조종을 하므로 공인(貢人)이 도리어 그 폐를 받는다고 한다. 물가가 고르지 아니한 것은 물가의 본래 정세(情勢)가 그런 것인데, 어찌하여 억지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낭청(郞廳)에게 신칙하여 서로 합의하여 팔고 사게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찌 억지로 정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공인·시인을 논할 것 없이 조정에서 마땅히 신칙했을 뿐입니다. 어찌 억지로 값을 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시민(市民)들의 일이 참으로 절통합니다. 어제 현재 있던 곡식들이 오늘 죄다 어디로 돌아간 것입니까? 한번 비가 오고 한번 볕이 나는 사이에 시가(市價)를 올리고 내려 이로 인해 이익을 노리는 것이니, 이것은 재화(財貨)를 다루는 권한이 아래로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서(該署)에 엄하게 신칙하여 조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통탄스럽게 여길 바는 시인이 곡식을 감추어 두고 조종하여 이런 폐단을 초래하는 것이다. 만약 지난해의 효시(梟示)하자는 청을 시행한다면 반드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맹자(孟子)》에 ‘사경(四境)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고, 《대학(大學)》에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말이 있으니, 이 어찌 군상(君上)의 허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10월 29일 계사
임금이 태묘(太廟)의 동지(冬至) 제향(祭享) 때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명정전(明政殿)에 친히 전하였다. 임금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또 사전(祀典)에 정성을 다 바쳐, 매번 원릉(園陵)의 향사(享事)를 당하면 재계하고 추모하는 것이 60년 동안 하루와 같았다.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춥거나 덥다 하여 혹시라고 폐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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