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경신
임금이 효소전(孝昭殿) 삭제(朔祭)를 친히 거행하고, 세자에게 휘령전(徽寧殿) 삭제를 섭행하라고 명하였다.
전 대장(大將) 구성임(具聖任)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哀悼)하기를,
"훈척(勳戚)의 후예로서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는데, 옛날의 숙장(宿將)이 이제 거의 없어졌다."
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후하게 고조(顧助)하게 하였다. 좌·우상(左右相)을 재전(齋殿)으로 불러 하교하기를,
"장망(將望)의 일 때문에 경 등을 불렀다. 장붕익(張鵬翼)·이삼(李森) 등은 모두 풍채가 좋아서 능히 크게 쓰임을 받았으니, 대저 재주 있는 자가 풍채도 역시 잘 생겼다. 구성임의 아들이 능히 그 아비를 계승할 수 있으니, 가히 복이 있다고 하겠다. 김성응(金聖應)에게는 세 가지 병폐가 있는데, 활쏘기를 싫어하고, 사나운 말을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유선(柔善)하다."
하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신 등은 늘 말하기를 국가가 승평(昇平)에 익숙하여졌는데 훈장(訓將)을 보면 근심할 것이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성응은 바로 복장(福將)이로다."
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정여직(鄭汝稷)은 가는 곳마다 잘 다스려서 위엄을 표시하지 않아도 엄준(嚴峻)하였으니,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있는 인재가 아닙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구선복(具善復)은 어떤가?"
하니, 김상로가 대답하기를,
"역시 쓸 만한 인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10월 2일 신유
원경순(元景淳)을 대사헌으로, 송창명(宋昌明)을 대사간으로, 김원행(金元行)을 집의로, 남덕로(南德老)를 사간으로, 이수일(李秀逸)·이만회(李萬恢)를 장령으로, 이심원(李心源)을 헌납으로, 이흥종(李興宗)을 정언으로, 정상순(鄭尙淳)을 부응교로, 신응현(申應顯)을 지평으로 삼았다.
정여직(鄭汝稷)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좌·우상(左右相)과 행 사직(行司直) 이이장(李彛章), 전 북병사(北兵使) 오혁(吳)에게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범월 죄인(犯越罪人)을 3등급으로 나누어 처벌하려고 하는데, 어떤가?"
하니, 이이장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좋습니다."
하고, 이어서 참핵(參覈)할 때에 피인(彼人)과 문답한 말을 진술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잘 하였다."
하고, 오혁에게 명하여 범월 죄인들을 체포할 때의 일을 자세히 진술하라고 하였는데, 오혁이 매우 자세히 대답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북(西北)에 변란이 있으면 강변(江邊) 사람들이 반드시 쓸 만한 자가 많을 것이다."
하였다.
사조(辭朝)하는 여러 수령을 소견하였다. 제주 목사 조위진(趙威鎭)을 앞으로 나오라 명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백수 모년(白首暮年)에 어찌 제주 백성들에게 요예(要譽)를 하려 하겠는가? 산릉(山陵)에 부역한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그들의 나라를 향하는 마음은 가히 지성스럽다고 이를 수 있다. 무릇 사람이 그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만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면 감사하여 보답하기를 생각하기 마련이거늘, 하물며 임금이 그 백성에 대하여서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내가 만일 제주 백성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소홀함이 있다면 비단 위로 옛날에 도민(島民)을 돌보시던 거룩한 뜻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실로 효소전(孝昭殿)을 저버리는 것이 된다. 네가 내려간 뒤에 만일 제주 백성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라도 하루를 굶게 만든다면 이는 네가 나로 하여금 하루를 굶게 만드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제주에서 올리는 삼명일(三名日)232) 과 추동(秋冬)의 방물(方物)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호남(湖南)은 풍년이 들었으나, 오직 제주만은 흉년이 거듭 들어서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진자(賑資) 6천 석을 획급(劃給)하게 하고, 그 뒤에 독운 어사(督運御使)를 뒤딸려 보내어 곡식을 독운(督運)하게 하였다.
예관(禮官)을 보내어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묘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옥당 홍자(洪梓)가 그의 천장(遷葬)을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10월 3일 임술
밤에 유성(流星)이 북극성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여 권세숙(權世橚) 등 20명을 뽑았다. 특별히 부제학 김양택(金陽澤)을 풍덕 부사(豊德府使)로, 부응교 정상순(鄭尙淳)을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보외(補外)하였다. 이때에 관록(館錄)을 행하라고 명하였는데, 김양택 등이 여러 번 위패(違牌)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이런 명령이 있은 것이다. 그리고 김치인(金致仁)으로 김양택을 대신하게 하고, 홍자(洪梓)로 정상순을 대신하게 하여 곧바로 회권(會圈)하게 하니, 김치인 등이 명을 받들어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권(完圈)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비국(備局)의 문랑청(文郞廳)인 홍양한(洪良漢)을 제주 독운 어사(濟州督運御使)로 삼고, 수찬 홍경해(洪景海)를 충청도 청안 안집 어사(淸安安集御史)로 삼았다. 이날 좌·우상(左右相)을 입시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홍경해·홍양한을 불러 함께 들어오라고 하였다. 홍경해에게 하교하기를,
"단양·회인 양읍(兩邑)은 얼마 전에 이미 안집(安集)되었으나, 지금 듣자니, 청안의 폐단은 단양·회인과 다를 바가 없어서 2천여 호(戶) 중에 겨우 1천여 호만 남았다고 하니, 본현(本縣)의 백성이 어찌 자신들을 뒤로 미루느냐는 탄식이 없겠는가? 세후(歲後)에 곧바로 내려가 안집시키고 겸하여 권농(勸農)도 하게 하라."
하였으며, 홍양한에게 하교하기를,
"제주는 바로 옛날 아끼고 돌보던 백성인데, 금년의 능역(陵役)에 있어서 그들의 정성을 볼 수 있었다. 지금 너에게 명하여 어사를 삼으니, 곡식을 독려해 운송하고, 겸하여 나리포(羅里舖)도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어사가 만일 어버이를 모시고 있다면 바다를 건너가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매, 홍양한이 말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하여 봉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수령들이 일을 거행하는 데 태만하고, 곡물을 정실(精實)히 하지 않는 자는 장문(狀聞)하여 논죄(論罪)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원손(元孫)을 보양(輔養)하는 일을 잠시도 비울 수가 없는데, 전 사부(師傅) 남유용(南有容)은 모친이 늙고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글을 올려 걸군(乞郡)233) 하였으니, 이사람은 외직으로 내보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의 청을 들어주지 말고 고례(古例)에 따라 식물(食物)을 후하게 내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0월 3일 임술
윤봉조(尹鳳朝)를 대제학으로 삼았다. 이때에 문형(文衡)으로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윤봉조 한 사람뿐이었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조선(朝鮮)에는 장차 대제학이 없어지겠다."
하고, 전망(前望)을 들이라고 명하여 하점(下點)하였다.
이조 판서 이성중(李成中)을 잡아다 추문(推問)하였다. 이때 이성중이 일찍이 윤시동(尹蓍東)의 논핵(論劾)을 당하여 영번(嶺藩)에 보외(補外)되기까지 이르렀었다고 하였는데, 전직(銓職)을 제배하기에 미쳐 분의를 내세워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니, 좌의정 김상로가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동전장(東銓長)234) 의 사정은 가엾지 않은 것이 아니고 처지가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거취(去就)의 분의(分義)는 때에 따라 경중(輕重)이 있는 것입니다. 어제의 성교(聖敎)는 신자(臣子)로서 감히 들을 바가 아닌 것이 있었는데, 겨우 성외(城外)에 이르렀다가 도로 교차(郊次)로 돌아갔으니, 이 일은 기강(紀綱)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잡아다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4일 계해
밤에 금성(金星)이 남두성(南斗星)을 범하고, 달이 입성(立星)을 범하였다.
김치인(金致仁)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10월 5일 갑자
밤에 번개가 쳤다.
정언충(鄭彦忠)을 장령으로, 김응순(金應淳)을 지평으로, 홍경안(洪景顔)을 부교리로, 홍양한(洪良漢)을 수찬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예조 참판으로, 남유용(南有容)을 원손 사부(元孫師傅)로 삼았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군향(軍餉)을 유용(流用)한 일로써 경기 전 수사(水使) 유주기(兪胄基)·이태상(李泰祥)을 잡아다 처리하기를 청하고, 또 통영(統營)의 별회 모곡(別會耗穀)을 해를 걸러 강도(江都)에 이송(移送)할 것을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사간(司諫) 남덕로(南德老)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주례(周禮)》를 강하였다. 태학(太學)의 전복(典僕)으로서 인산(因山) 때에 따라갔던 자를 부르라고 명하여 향교(香橋) 곁에 정려(旌閭)한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병자란(丙子亂) 때에 선성(先聖)의 위판(位版)을 보호하였던 정신국(鄭信國)의 정려라고 대답하였다. 후손이 있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정신국의 5대손 정원교(鄭元僑)가 지금 수복(守僕)으로 있습니다."
하니, 쌀과 포(布)를 주라고 명하였다.
10월 6일 을축
밤에 번개가 쳤다.
임금이 여차에 나아가 유신을 불러 《주례》를 강하였다.
삼척 부사(三陟府使) 김유행(金由行)을 특별히 체차(遞差)하고, 이조 참의 조명정(趙明鼎)을 파직하였다. 임금이 사조(辭朝)하는 수령(守令)들을 소견하였는데, 삼척 부사 김유행의 차례가 되어서 임금이 그의 이력(履歷)을 물으니, 김유행이 대답하기를,
"신이 홍산 현감(鴻山縣監)이 되었다가 공산 판관(公山判官)으로 승직되었는데, 전하께서 온천(溫泉)에 거둥하시었을 때를 당하여 연풍 현감(延豊縣監)을 정산 좌수(定山座首)로 오인(誤認)하고 꺼둘러 내렸다가 드디어 그 죄로 파직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뒤에 또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가 두적(斗糴)의 일로써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아 잡아다 파직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으로서 이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칠사(七事)235) 를 물으니, 김유행이 또 잘못 대답하였다. 삼척의 일은 어떠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전관(前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마는 대개 듣자니, 온 경내(境內) 백성을 수탈(收奪)하여 뼈만 남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요즈음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여 수령들을 제대로 골라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삼척 부사 김유행은 홍산에서 기한도 되지 않았는데 공산으로 체승(遞陞)하였고 두적의 부정을 범하였는데 대사령(大赦令)으로 인하여 탕척(蕩滌)되었으며, 작년에 감률(勘律)하고는 올해에 또 승직시키었으니, 법(法)은 장차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경오년236) 의 일은 또한 과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 기품(氣稟)의 정조(精粗)는 이미 알 만하였다. 알고도 효유하지 않는다면 삼척의 백성은 무슨 죄인가? 그 직책을 특별히 체차하도록 하라. 정관(政官)으로서 칙교(飭敎)를 따르지 않았으니, 이조 참의 조명정은 파직시키고, 전 승지(承旨) 이최중(李最中)을 삼척 부사로 특별히 제수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김유행은 경오년에 온천에 거둥할 때를 당하여 공주 판관으로서 행재소(行在所)에 갔었다. 수령들이 있는 반열(班列)을 걸어서 지나는데 융복(戎服)을 입은 자가 앉아서 일어나지 않자, 김유행이 취하여 정산 좌수로 생각하고 아래로 내려가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웃으며 응하지 않자, 김유행은 성이 나서 관예(官隷)를 시켜 꺼두르면서 물었는데 그는 바로 연풍 현감이었으니,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감사(監司)가 드디어 김유행을 계파(啓罷)하고 아울러 연풍 현감도 파직시켰는데, 욕을 당하고 체통을 손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좌상과 우상을 불러서 사전 절목(祀典節目)을 강정(講定)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제(大祭) 때에 헌관(獻官) 이하는 산재(散齋) 3일과 치재(致齋) 2일을 하는데, 1일은 본사(本司)에서 직숙(直宿)하고 1일은 향소(享所)에서 직숙하며, 삭망(朔望) 및 절제(節祭)·능제(陵祭)에는 산재 2일과 치재 1일을 하는 일로써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대제 때에는 정원(政院)·병조(兵曹)·도총부(都摠府)·춘방(春坊)·계방(桂坊)·위장청(衛將廳)·부장청(部將廳)·충장위청(忠壯衛廳)·태복시(太僕寺)에 분배(分排)하여 입직(入直)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하순(下詢)하기를,
"명나라 조정에서는 망예(望瘞)237) 를 고쳐 망료(望燎)238) 로 하였는데, 그 뜻이 실로 깊은 것이었다. 내가 일찍이 능행(陵幸)을 하였을 때에 옛날에 묻어 놓았던 축문(祝文)을 보니 물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고 종이가 오래되어 썩었으며, 간혹 개구리들이 생겼으므로 마음이 몹시 송구스럽다. 지금부터 묻는 것을 고쳐 태우려고 하는데 여러 신하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명나라 조정의 전례(典禮)가 이와 같으니, 따라 행하여도 옳지 않을 것이 없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 보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친히 《주례(周禮)》의 서문을 지었는데, 교리 윤득양(尹得養)에게 책의 첫머리에 써서 간행(刊行)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조 판서 이성중(李成中)이 금오(金吾)에서 서명(胥命)239) 한다는 말을 듣고 하교하기를,
"서명하지 말고 곧바로 들어오게 하라. 내가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앉아서 기다리겠다."
하니, 이성중이 명을 받들고 사은 숙배(謝恩肅拜)하기 위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위유(慰諭)하기를,
"내가 오히려 경을 옛 친구의 아들로 생각하는데, 경은 어찌하여 멀리하려고 하는가?"
하니, 이성중이 눈물을 흘리면서 목메인 소리로 대답하기를,
"신이 온갖 지탄을 받은 것은 오직 권요(權要)의 자리에 있는 때문입니다. 만일 성상께서 선인(先人)을 생각하여 그 외로운 자식을 버리지 않으시겠다면 살 수 있는 길을 지시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한참 있다가 전교를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참소(讒訴)하는 자를 버리는 것은 구경(九經)240) 중 존현(尊賢)의 한 절목(節目)이다. 지난번에 거짓을 꾸민 말은 바로 이것이 ‘가죽이 없는데 털이 어떻게 붙겠는가[皮之不存毛將安傳]’란 것이다. 이미 보외(補外)하였다가 다시 불러들였거늘 어찌 그리 고집을 세우는가? 그러나 ‘임금이 신하를 예로써 부리라.’고 한 것은 공성(孔聖)이 이미 이른 바이다. 특히 그 청을 들어 염우(廉隅)를 펴 주기 위하여 그 본직(本職)을 해임하도록 허락한다."
하였다.
10월 7일 병인
임금이 양 혼전(兩魂殿)·산릉(山陵)의 동향제(冬享祭)에 쓸 향(香)을 함인정(涵仁亭)에서 친히 전하였다.
10월 8일 정묘
밤에 유성(流星)이 북두성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승지 이기경(李基敬)에게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이기경이 돌아와서 아뢰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지금 옥수(獄囚)들의 상황을 들으니, 마치 직접 눈으로 보는 듯하여 마음이 매우 측은하다. 어찌 하우(夏禹)만이 죄인을 보고 울었겠는가241) ? 아! 하우는 대성(大聖)이니 어찌 무고(無辜)하게 죄에 걸려든 자가 있었겠는가마는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는데, 하물며 부덕(否德)한 사람이겠는가? 어떤 자가 검고 어떤 자가 흰지를 가려 곧바로 처결하지 않고 다만 일차(日次)의 형벌만을 따른다면 옥중(獄中)에서 굶주림에 시달려 울부짖을 터이니, 이것이 어찌 왕자(王者)의 정사이겠으며, 장차 유사(有司)는 어디에 쓰겠는가? 형조(刑曹)의 관리로 하여금 평상시에 부좌(赴坐)하여 의심스러운 자를 자세히 조사해서 등대(登對)하여 아뢰도록 하라. 패수(牌囚)는 일찍이 신칙한 바가 있었는데, 한 사람이 갇히게 되면 폐단이 그 가족에게까지 미친다. 삼동(三冬)이 되기 전에 부득이한 사람 외에는 절대로 죄인을 잡아 가두지 말 것이며, 비록 죄인을 잡아 가두더라도 3일 동안을 넘기지 말게 하라. 또한 해서(該署)로 하여금 감옥을 깨끗이 정리하고 거적 자리를 넉넉히 주어 차고 축축한 것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친히 효소전(孝昭殿)의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거행하고, 세자(世子)에게 휘령전(徽寧殿)의 동향 대제를 섭행하라고 명하였다.
이후(李)를 이조 판서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10월 9일 무진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유신(儒臣)을 불러 《주례(周禮)》의 서문(序文)을 읽게 하였다. 사조(辭朝)하는 수령을 소견하고, 하동 부사(河東府使) 이기령(李杞齡)에게 묻기를,
"너는 양리(良吏)가 되겠는가, 능리(能吏)가 되겠는가?"
하니, 이기령이 대답하기를,
"신은 백성을 사랑하는 선정(善政)을 하여 양리가 되는 데 힘쓰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는데도 역시 양리와 능리로 분류할 수가 있다. 백성에게 내가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자는 능리이고, 비록 백성을 사랑하더라도 백성에게 알리지 않은 연후라야 비로소 양리라고 이를 수가 있으니, 그 하나는 남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만이 알려는 것이다.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기스러운 것은 백성이니, 비록 아무리 겉을 꾸며도 백성은 반드시 알게 되는 것인데, 하물며 남에게 요예(要譽)하려는 정치는 백성들의 버릇만 점점 변하게 하여 후인(後人)들이 다스리기에 어려워 진다. 나는 지금 애통한 상중에 있으면서 생민을 위하여 너를 불러 직접 신칙하는 것이다. 사람이 진실로 그 자식을 나에게 부탁하였더라도 오히려 그를 춥고 배고프게 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임금이 백리(百里)242) 지방의 백성을 부탁해놓고 어찌 차마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모른다고 하여 얼고 굶주리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지금 너의 임무는 백성이 곤경에 빠지지 않게 하며 들에는 얼고 굶주린 자가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돌아와 나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보편(補編)》 교정관(校正官) 성천주(成天柱)가 명나라 조정의 상례(喪禮)에 조조(朝祖)243) 의 절차가 있다고 말하니, 임금이 대신(大臣)과 의논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여러 신하의 의논이 같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궁(梓宮)을 받들고 조조(朝祖)한다면 과연 나아갔다가 물러나는 혐의가 있겠는데, 신백(神帛)으로써 거행한다면 재궁은 본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게 되니, 혐의는 없을 듯하다. 영부사(領府事)가 이른바 ‘땅에 들어가는 넋[魄]으로 작별하지 않고 반실(返室)할 혼(魂)으로 하게 된다’고 한 것은 옳기는 옳은 일이다. 백(帛)은 묘정(墓庭)에 묻고 반실하는 것은 목주(木主)244) 이다. 영부사가 비록 경산(瓊山)245) 의 설(說)을 배척하였으나, 바로 시왕(時王)의 제도이다. 오늘날 사대부(士大夫)는 모두 경산의 예를 따르는데, 대개 명나라 조정의 예를 따른 것이니, 나는 여기에 실로 감동된 바가 있다. 일찍이 황경원(黃景源)의 소주(所奏)로 인하여 명나라 의종(毅宗)이 우리 나라를 돌보아 준 은혜에 감격해서 함께 황단246) 에 배향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선조(先朝) 어제(御製)인 영렬전시(英烈傳詩)를 보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 나왔다. 그리하여 뜻을 결정하고 시행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고(故) 상신(相臣) 풍원군(豊原君)247) 은 기뻐하지 않았으니 내가 과장되게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향사(享祀)하던 밤에 이르러 풍원군이 천광(天光)과 운용(雲容)의 이상함을 보고 원경하(元景夏)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 밤의 광경은 삼가 기록하여 훗날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내가 명나라의 예(禮)에 있어서 어찌 특별한 느낌이 없겠으며, 어찌 종주(從周)248) 의 뜻이 없겠는가? 내가 전일에 태묘(太廟)에서 성생(省牲)249) 을 하다가 갑자기 선조의 어제(御製)인 ‘홍살문[紅箭門]에 머리 돌리니 날은 저물어 가는데 이 마음은 오히려 묘정 앞에 있네.[回首丹門日欲暮 此心猶在廟庭前]’라는 귀절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고 돌아왔다. 또 내가 명을 받들고 강도(江都)에 갔을 때 선왕(先王)께서 몹시 안타깝게 기다리다가 돌아오는 날에 미치어서 시(詩)로써 내려주기를, ‘내가 돌아오는 길에 처음 배에서 내린 것을 기뻐하였는데 더디고 더뎠던 여드레 동안이 1년같이 기다려졌다.[喜爾歸程初下船 遲遲八日待如年]’라고 하였다. 잠시 슬하를 떠났는데도 권념(眷念)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내 어찌 감히 그 뜻을 계술(繼述)하지 않겠는가? 내일 마땅히 여러 대신을 불러 의정(議定)하겠다."
하였다.
10월 10일 기사
나홍점(羅弘漸)을 청산 현감(靑山縣監)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나홍점은 성천(成川) 사람인데, 문과(文科)에 오른 지가 25년이지마는, 작산(作散)250) 된 지 13년에 땔나무를 몸소하여 어머니를 봉양하고 다시는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벼슬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답하기를,
"어버이가 늙었는데, 어찌 멀리 떠나겠는가?"
하였으니, 서쪽 지방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유신(儒臣) 윤득양(尹得養)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진백(陳白)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진취(進取)하는 데 욕심이 없고 그 어버이에 효도하니, 가히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를 감당할 만하다."
하고, 이에 이르러 이 직책을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그 뒤에 나홍점은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다만 사은 숙배(謝恩肅拜)하고 돌아가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망예(望瘞)를 고치어 망료례(望燎禮)로 하였고, 조조례(朝祖禮)를 정하였다. 임금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서 시임 대신(時任大臣),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 당상, 편집 당상(編輯堂上)을 불러 하교하기를,
"내가 최복(衰服)도 벗지 않고 경들을 보는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 며칠 전에 망료 문제로 수의(收議)하였는데, 지금 강정(講定)하려고 한다."
하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신이 외임(外任)을 많이 겪었는데, 향교(鄕校)의 유생(儒生)들이 간혹 폐백(幣帛)으로 옷을 지어 입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우려하는 바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였다. 이어서 윤음(綸音)을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아! 무릇 망예에 불결(不潔)한 폐단이 없지 않아 마음에 늘 안타까웠는데, 명나라 조정에 망료의 예가 있음을 알고 대신들에게 순문하니, 여러 의견이 다름이 없이 같았다. 묘(廟)·사(社)·전(殿)은 체통(體統)이 중한 곳이니, 제사가 끝난 뒤에 폐백은 불사르고 축문(祝文)은 내감(內坎)에 묻어 두었다가 세말(歲末)에 제조(提調)가 예조 당상·묘사(廟司)·단사(壇司)·전사(殿司)와 함께 외감(外坎)에 나아가 정결히 태우도록 하라. 태학(太學)에서도 역시 그렇게 여겨 능(陵)·묘(墓)·묘(廟)에 모두 제사가 지난 뒤 망료할 것을 청하였는데, 일찍이 감(坎)에 묻었던 것은 먼저 정결히 태우도록 하며, 여러 도(道)·군(郡)·읍(邑)의 성묘(聖廟)·사직(社稷)과 무릇 축문 및 폐백을 쓰는 곳에는 모두 망료할 것을 제도로 정하고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또 예조 당상에게 이르기를,
"3년의 복제(服制)를 복구한 뒤에는 조조(朝祖)하는 한 절차가 있는 것이 마땅하다. 영부사(領府事)의 헌의(獻議)에 ‘유진 무퇴(有進無退)하고 형귀 신반(形歸神返)한다.’라는 설(說)이 있는데, 과연 옳다. 영부사는 구경산(丘瓊山)을 배척하기를 심하게 하였으나, 경산도 이 예를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바로 명나라의 예이니, 배척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또한 자유(子游)가 부하(負夏)251) 의 상주[主人]를 나무란 것은 이미 조전(祖奠)을 드리고 다시 널[杷]을 밀고 돌아온 일인 것이다. 지금 만약 재궁(梓宮)을 조조(朝祖)하게 한 뒤에 본래의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면, 진실로 나아갔다가 물러나게 하는 혐의가 있다. 신백(神帛)으로써 널을 대신한다면 널은 움직이지 않은 것이니, 어찌 행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7월 인산(因山) 때에 실은 창행(創行)하려고 하였으나, 나의 선군(先君)께서 시행하지 않았으므로 감히 전후(前後)에 예를 달리 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부터는 구애될 바가 없다."
하매, 유척기가 말하기를,
"명나라 조정에서 행한 바는 역시 명나라 영락(永樂)252) 과 융경(隆慶)253) 두 차례뿐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글에 나타난 것이 두 차례라면, 열조(列朝)에서 모두 행하였다는 것을 가히 알 만하다."
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명나라 조정에서는 태묘(太廟)가 대명문(大明門) 안에 있으므로 시행하는 데 구애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태묘가 이궁(異宮)에 있어서 형세로 보아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도성(都城)의 안은 바로 하나의 담장[墻] 안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말하기를,
"옛날에 청사(廳事)로 옮기던 예절에 의거하여 하루 전에 조전(朝奠)을 드린 뒤에 재궁을 모시고 외전(外殿)에 나아가, 이어서 신백을 앞서 출발시켜 태묘에서 조조(朝祖)를 행하게 하고 돌아와 조전(祖奠)을 행한다면 예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매, 여러 신하들도 이의(異義)가 없었다. 이에 윤음을 쓰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예(禮)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으로부터 솟아서 생긴 것이겠는가? 그 근본은 바로 인정(人情)인 것이다. 이미 인정에 화합되면 예절에도 합당한 것이니, 거기에 무슨 흠결이 있겠는가? 아! 경자년254) 이후에 상제(喪制)를 복고(復古)하여 한(漢)·당(唐) 시대의 비루함을 모두 씻어 버리고 금년에 이르러서야 《보편》이 장차 완성될 단계인데, 아직도 궐례(闕禮)된 곳이 있으니, 바로 부제(祔祭)와 조조(朝祖) 두 가지 일이다. 부제는 묘제(廟制)가 예전과 달라서 구애되어 실행하기 어렵고, 조조에 이르러서는 이미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실렸으며 또한 구준(丘濬)의 의절(儀節)에도 있으므로, 여러 대신들과 재외 유신(在外儒臣)에게 물어 본 것이다. 신백(神帛)이 조조하는 것은 곧 문황제(文皇帝)의 대휼(大恤) 때에 이미 행한 예이고 구씨(丘氏)가 창론한 것이 아니다. 비록 신백을 받들고 행례를 하더라도 재궁은 빈전(殯殿)에 있으니 역시 나아갔다가 물러갔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영부사의 의논에 ‘영귀(永歸)할 체백(體魄)으로 하직 인사를 하지 않고 반실(返室)할 혼백(魂帛)으로만 하직 인사를 드리는 것은 지난(持難)의 단서가 된다.’고 하였으나, 신백(神帛)이 작별하는 것이 아니라 곧 재궁의 일을 대신하여 행한 것이니 혐의할 필요가 없다. 아! 부제는 비록 행하지 않더라도 장래에 스스로 부묘(祔廟)가 될 것이고 조조는 행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에 행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의절(儀節)이 순편하지 못한 것은 곧 다음 문제이다. 여러 의견을 물으니, 비록 조금 어긋남이 있으나 정리(情理)가 이미 이와 같고 예절에도 역시 근거가 있으니, 발인(發靷) 전 1일에 재궁을 받들어 외전(外殿)으로 나아가서 신백을 받들어 조조례(朝祖禮)를 행한 뒤에 돌아와 같은 전(殿)에 안치시키고 조전(祖奠)을 행한다면 정례(情禮)에 이미 유감(遺憾)됨이 없고 또한 유진 무퇴하는 도리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아! 밤을 지나고 올 때의 거둥에도 오히려 또한 먼저 가서 고하는데, 하물며 영원히 작별하는데 어찌 빠뜨릴 수가 있겠는가? 바로 예조로 하여금 의절을 상확(商確)하여 《보편》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1일 경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하령하기를,
"북도(北道)의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에 조적(糶糴)을 절반은 대봉(代捧)하라."
하였는데, 도신(道臣)의 장계를 따른 것이었다. 사간 남덕로(南德老)가 전달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대제학 윤봉조(尹鳳朝)가 노병(老病)으로 글을 올려 사직(辭職)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12일 신미
밤에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5경(五更)에 유성이 북두성(北斗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4, 5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서 《주례(周禮)》를 강하였다.
10월 13일 임신
충청도의 공주(公州)·전의(全義)·직산(稷山)·석성(石城) 등 4읍(邑)에 크게 천둥하였다.
중외(中外)의 사서(士庶) 중에 나이 80세 이상 된 자에게 쌀과 고기를 주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 봄에 칭상(稱觴)255) 의 예를 거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망극(罔極)한 애통을 당하였으니, 5삭(五朔) 안에 비록 상에 가득히 음식을 차렸더라도 어찌 그 정성을 펼 수 있겠는가?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위에서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여야 백성이 효를 일으킨다.[上老老而民興孝]’고 하였다. 아! 집은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었는데, 조석(朝夕)의 끼니도 잇기 어려운 자가 비록 고인(古人) 같은 효성을 가졌더라도 어떻게 어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아픈 마음이 나에게 있는 것 같다."
하고, 드디어 이런 명령이 있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황해 감사(黃海監司)가 ‘송도(松都)의 아병(牙兵) 3백 6명을 장단(長湍)과 풍덕(豊德)의 예(例)에 따라 해서(海西)로 모두 돌려보낼 것’을 계청(啓請)한 일을 비국에서 발관(發關)256) 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오수채(吳遂采)가 ‘지금 만일 모두 이송(移送)하게 되면 본부(本府)에는 장차 군대가 없는 진영이 되겠다.’라고 운운하며 계언(啓言)하였는데,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조정의 영(令)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윤(左尹) 구선복(具善復)이 아뢰기를,
"공주(公州)에 사는 이두재(李斗載)가 어장(御將)에게 와서 고하기를, ‘무신년257) 역적(逆賊)의 아들 조철금(趙鐵金)과 양일증(梁一增)이 지금까지 숨어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포교(捕校)를 본도(本道)에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여 보니 조철금은 곧 정형(正刑)한 죄인 조동규(趙東奎)의 조카이고 을축년258) 에 장폐(杖斃)한 죄인 조흥규(趙興奎)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양일증은 역적 양덕부(梁德溥)의 종손(從孫)이라고 하나 그 장적(帳籍)을 조사하여 보니 양덕부에게는 형제가 없었습니다."
하매, 김상로가 말하기를,
"조철금은 비록 망명(亡命)과는 다르지마는 흉역(凶逆)의 조카로서 법을 피하여 숨어 살았으니, 다만 연좌(緣坐)의 본율(本律)로 다스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청컨대 엄한 형장을 가하여 도배(島配)하고, 양일증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금년에 국역(國役)이 중첩되어 본조(本曹)의 경비(經費)를 지탱하여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근례(近例)에 따라 관서(關西) 별향고(別餉庫)의 면포(綿布)를 가져다가 사용하게 하소서."
하니, 3백 동(同)을 획급(劃給)하라고 명하였다. 김기대(金器大)를 도승지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10월 14일 계유
임금이 양 혼전(兩魂殿)·산릉(山陵)·육상궁(毓祥宮)의 망제(望祭)에 쓸 향을 함인정(涵仁亭)에서 친히 전하였다.
성천주(成天柱)를 대사간으로, 송덕중(宋德中)을 보덕(輔德)으로, 홍낙성(洪樂性)을 대사성으로, 서명빈(徐命彬)을 판의금으로, 이명식(李命植)을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10월 15일 갑술
임금이 몸소 효소전(孝昭殿)의 망제를 행하고, 세자에게 명하여 휘령전(徽寧殿)의 망제를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다시 이이장(李彛章)을 안핵사(按覈使)로 삼아서 의주(義州)로 보내었다. 이때에 피중(彼中)에서 자문(咨文)이 또 도착하여 조자영(趙自永) 등을 다시 조사하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는데, 인견(引見)하고 보내면서 병사(兵使)와 더불어 함께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치사(致仕)한 봉조하(奉朝賀) 박필기(朴弼琦)가 졸(卒)하였다. 박필기는 성품이 본래 염아(恬雅)하여 형식(形式)을 일삼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을 때 끼친 사랑이 있었는데, 3품관(三品官)으로서 나이를 이끌어 벼슬을 사양하였으니, 국조(國朝)에서 일찍이 없었던 바이었다. 벼슬을 그만둔 뒤에 집안에만 있으면서 잣나무 열매를 먹었으므로 강건(强健)하고 병이 없어서 나이 80이 넘어서야 졸하였다.
10월 16일 을해
공릉(恭陵)·순릉(順陵)에 호환(虎患)이 있었으므로, 포수(砲手)를 보내어 세 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
10월 17일 병자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 동지사(冬至使) 해흥군(海興君) 이강(李橿)을 불러 보았다.
10월 18일 정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여차에 나아가 유생(儒生)의 강(講)과 제술(製述) 시험에 친림(親臨)하여 제술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태정(李台鼎)과 2등을 한 이의록(李宜祿) 및 전강(殿講)에서 수석을 한 이종영(李宗榮)과 2등을 한 김규진(金奎鎭)을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10월 19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친히 공묵합(恭默閤)에 친림하여 한림(翰林)에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을 소시(召試)259) 하여 엄인(嚴璘) 등 4명을 뽑았고, 응시인(應試人) 권정침(權正忱)을 설서(說書)로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권정침은 시험장에 들어와서 사륙문(四六文)260) 을 익히지 않음으로써 백권(白券)을 바쳤는데, 임금이 그 사유를 묻고 가상히 여겨 하교하기를,
"현재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질(質)을 숭상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대저 응시를 함에 있어서 자기가 잘하는 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따라서 시험지를 메우는 자가 많은데, 권정침은 자신이 능하지 못한 바를 억지로 하지 않고 그냥 백권(白券)을 바쳤으니, 그 질실(質實)함을 볼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撥)[권벌(權橃)]의 자손이니, 춘방(春坊)의 참하(參下)를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만일 그를 무턱대고 하향(下鄕)하게 버려 둔다면, 어찌 그 추로지향(鄒魯之鄕)261) 을 위로하겠는가? 설서로 자리가 빌 때를 기다려 조용하게 하라."
하였다.
원손 사부(元孫師傅) 남유용(南有容)에게 호피(虎皮)를 내려 주었다. 임금이 원손을 불러 탑하(榻下)에 세우고 예문 제학(藝文提學) 남유용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사람이 누구냐?"
하니, 원손이 대답하기를,
"남유용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임금 앞에서는 이름자를 피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대었느냐?"
하고, 남유용에게 시권(試券)을 가져오게 하여 몇 자를 물어 보니 원손이 환하게 알았고, 임금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외라고 하니, 원손이 틀리지 않고 외었다. 임금이 기뻐서 남 유용에게 이르기를,
"읽는 소리가 쇳소리처럼 쨍쨍하다. 경이 고송(考誦)할 때에 혹 하생(下栍)262) 을 내었는가?"
하니, 남유용이 말하기를,
"늘 잘 외기 때문에 하생을 내리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원손에게 이르기를,
"이런 때에 너의 스승이 외방에 나가기가 어렵다."
하고, 또 남유용에게 이르기를,
"안씨 가훈(顔氏家訓)에 이르기를, ‘자식은 아기 때부터 가르치라.[敎子嬰孩]’고 하였으니, 경은 성심을 다하여 보도(輔導)하도록 하라. 원손의 기질(氣質)이 점점 전보다 나아지니, 이는 경의 힘이다. 끝내 능히 이와 같다면 종사(宗社)에 다행한 일이다."
하고, 하교(下敎)를 쓰라고 명하여 이르기를,
"눈앞의 급선무 중에 원손을 보도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다. 사부 남유용은 교도(敎導)하기를 잘하여서 성취(成就)시킬 희망이 있다. 마땅히 가장(嘉奬)하는 뜻을 보이기 위하여 호피 한 벌을 특별히 내린다."
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지금 이것을 경에게 주는 것은 경으로 하여금 고비(皐比)263) 를 깔고 앉은 스승이 되라는 것이니, 경에게 포장하려는 것이 아니고 종사(宗社)를 위한 것이다."
하였는데, 늘 말이 여기에 미치면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낮추었다. 남유용이 말하기를,
"원손의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고 성조(聖朝)의 가법(家法)이 엄정(嚴正)하여 그 가르침이 쉽게 주입됩니다. 신이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앞으로는 예모(禮貌)를 간결히 하고 일차(日次)를 건너뛰지 말게 하라."
하니, 남유용이 말하기를,
"3일에 한 차례씩 하는 것은 너무 가까운 것 같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글은 다독(多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일찍이 《소학(小學)》을 백여 번쯤 읽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여 욀 수가 있다."
하였다. 남유용이 말하기를,
"보도하는 방법은 과독(課讀)에만 전념하는 데에 있지 않고 관감(觀感)의 여하에 달렸습니다. 옛날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는 중묘조(中廟朝) 때에 문학(文學)하는 선비 십수 명을 뽑아 보도하는 임무를 맡기도록 청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많은 사람을 널리 뽑게 되면 기품(氣品)이 고르지 않아서 바르게 기르는 도리를 잃을까 두렵다."
하고, 이어서 남유용에게 이르기를,
"경이 걸양(乞養)하다가 이루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그 사정도 생각하여야 하겠다."
하고, 그의 조카 남공필(南公弼)을 수령(守令)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순절인(殉節人) 증(贈) 참판(參判) 이원길(李元吉)과 척화인(斥和人) 증 별제(別提) 이상형(李尙馨)에게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0일 기묘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차대를 행하였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강원 감사 심수(沈鏽)가 장계를 올렸는데, 회양(淮陽)·김성(金城)·삼척(三陟)·정선(旌善) 4읍에 재해를 입은 것이 가장 심하다고 합니다. 청컨대 옛 환곡(還穀)을 정면(停免)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이종백(李宗白)이 아뢰기를,
"경조(京兆)에서 강상 운부(江上運負)를 혁파(革罷)하여 달라고 계청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속전(續典)》에 실려 있는 운석계(運石契)264) 입니다. 모든 세미(稅米)가 경강(京江)에 정박한 뒤에 후한 품삯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운반해 들였기 때문에 운마(運馬)와 두 계(契)를 합하여 한 계로 만들고, 동계(洞契)를 혁파하여 강민(江民)의 폐단을 제거하였습니다. 지금 경조에서 백성을 모집하는 것이 송사의 단서가 됨으로 인하여 곧바로 파계(罷契)하기를 청하였으나, 옳지 못합니다."
하니,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0월 21일 경진
밤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10월 22일 신사
김시묵(金時默)·정존겸(鄭存謙)을 승지로, 채경승(蔡慶承)을 장령으로, 윤동승(尹東昇)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제주(濟州)에서 감귤(柑橘)을 진공(進貢)하였다. 임금이 진공한 사람들을 소견하고 묻기를,
"너희의 탄환(彈丸)만한 작은 섬이 먼 바다 끝에 있으니, 조가(朝家)에서 접제(接濟)하지 않으면 어찌 살아 가겠는가? 근자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호남미(湖南米) 6천 석을 독운(督運)하여 너희 명년 봄 양식을 대게 하였다. 너희 도민(島民)들을 생각함에 혹시 한 사람이라도 쓰러지는 자가 있다면, 이는 내가 석년(昔年)의 공을 저버린 것이다."
하고, 이어서 옷과 양식을 주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10월 23일 임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는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리때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5, 6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오혁(吳)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비국 당상·편집 당상(編輯堂上)을 인견하였다. 제주(濟州)의 전 목사(牧使) 이윤성(李潤成)이 진곡(賑穀)을 더 획급(劃給)하여 달라고 장청(狀請)한 데 대하여 대신에게 하순(下詢)하고, 호남 연해(沿海)의 저치미(儲置米) 2천 석과 군작미(軍作米) 3천 석, 상진 모조(常賑耗租) 2천 석, 피모(皮牟)265) 4천 석을 특별히 가획(加劃)하여 속히 들여보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피(臨陂) 나리포(羅里鋪)에 별장(別將)을 두어 제주와의 교역(交易)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폐단이 있어서 별장을 없애고 임피에 부속시켰다. 이에 이르러 비국 상당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나리포의 어곽(魚藿)과 죽립(竹笠) 같은 것들을 양호(兩湖)의 제읍(諸邑)에 나누어 주어서 임피 현령(臨陂縣令)은 위령(威令)이 행하여지지 않아 기일을 어기고 상납하지 않는 폐단이 있습니다. 청컨대 도신(道臣)이 구관(句管)하여 장부를 마감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제주에서 바치는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필선(弼善) 송덕중(宋德中)을 보내어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평안 감사 민백상(閔百祥)이 장계를 올려, 벽동(碧潼)의 범월 죄인(犯越罪人) 김성삼(金成三) 등을 법전(法典)에 의하여 효시(梟示)하기를 청하니, 수창자(首唱者)는 참(斬)하고, 수종자(隨從者)는 사형에서 감하여 도배(島配)하며, 변장(邊將)과 지방관(地方官)은 모두 잡아다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동래 부사 조엄(趙曮)이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조삼(造蔘) 죄인 이광림(李光林)·김여택(金汝澤) 등을 엄히 가두어 놓고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니, 이광림은 율에 따라 처단하고 김여택은 동정(同情)한 것으로 사형에서 감하여 도배시키며, 산산 별장(蒜山別將) 강필문(姜弼文)은 조삼을 사들여 그들과 체결(締結)한 흔적이 있으니, 잡아다 신문하여 엄중히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좌상과 우상에게 이르기를,
"종신(宗臣) 중에 악역(惡逆)을 범한 자는 비록 정법(正法)하지 않을 수 없겠지마는, 그 근본을 따져보면 한 가닥 같은 혈맥(血脈)이니, 그 자손과 지손(支孫)을 어떻게 관가에 몰입(沒入)하여 노비를 삼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좌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매우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탄(李坦)·이증(李增)·이학(李壆)은 유배(流配)에 해당하는 자이다. 그 율(律)을 적용하고 노복(奴僕)은 삼지 말 것이며, 이 뒤로 종신(宗臣) 중에 친진(親盡) 전에는 모두 이 법을 사용할 것을 나타나게 법령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로가 또 아뢰기를,
"국애(國哀) 때에 조신(朝臣)이 임시로 색깔이 있는 옷을 입는 것은 곧 한때 차길(借吉)한 것입니다. 마땅히 상복(常服)과는 강쇄(降殺)함이 있어야 하는데, 《오례의(五禮儀)》에는 실려 있는 곳이 없으며, 예조 의주(禮曹儀註)에는 곧바로 상복을 입고서 행례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예절은 정리(情理)에서 인연하는 것이니, 정리에 불안한 바가 있으면 예절도 역시 편치 못합니다. 황단(皇壇)은 사체(事體)가 특히 달라서 가벼이 의논할 수가 없지마는, 태묘(太廟) 이하의 행례에 대하여서는 흑각대(黑角帶)와 무늬 없는 흑단령(黑團領)에다가 흉배(胸褙)를 제거하여 평상시의 제도에서 조금 변경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서 《주례(周禮)》를 강하였다.
10월 24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고, 밤에는 번개가 쳤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 《주례》를 강하였다.
좌윤(左尹) 윤득재(尹得載)를 특별히 발탁하여 공조 판서로 삼고, 전 참의 조돈(趙暾)을 좌윤으로 삼았으며, 홍상한(洪象漢)을 형조 판서로, 서명빈(徐命彬)을 한성 판윤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윤득재는 윤유(尹游)의 아들이고, 조돈은 조상경(趙尙絅)의 아들이니, 임금이 그 아버지를 생각하여 이런 명령이 있은 것이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5부(部)의 부로(父老)를 불러 계주(戒酒)의 윤음(綸音)을 선유하였다. 이날 대신과 형조 판서를 공묵합(恭默閤)에 입시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오늘은 금주(禁酒)를 한 일초(一初)의 날이다. 전후 금주를 범하여 도배(島配)된 자가 7백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풀어주도록 하라. 정률(定律)을 고치어 조사(朝士)는 10년을 금고(禁錮)하고 유생(儒生)은 10년 동안 정거(停擧)하며, 서민과 공사천(公私賤)은 그 본토(本土)에서 10년 동안 종으로 삼되, 술을 빚은 자나 마신 자를 동률(同律)로써 시행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만일 술을 마시는 자가 없다면 술을 빚는 자가 스스로 그칠 것이라고 여기어 술을 빚다가 붙잡힌 자로 하여금 술을 사서 마신 자를 진고(陳告)케 하여 형을 면제하고 유배하게 하니, 이에 간사한 백성들이 진고를 하고 형을 면하는 자가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특명으로 곧장 석방하게 하였다.
밤에 입직(入直)한 선전관(宣傳官)과 무신 겸 총부 낭청(武臣兼摠府郞廳)을 불러 《무경(武經)》을 강하게 하고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10월 26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제도(諸道)의 범주 도유안(犯酒徒流案)을 살펴보았는데, 호남에서 가장 많았고, 북도(北道)에서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함경도의 전후 감사(監使)를 모두 파직시키고, 전라도의 전후 감사에게는 모두 말[馬]을 하사(下賜)하였다.
10월 27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28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고, 밤에는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여차(廬次)에 나아가서 도정(都政)에 친림(親臨)하여 이심원(李心源)을 교리로, 이기덕(李基德)을 헌납으로, 이재협(李在協)을 지평으로, 정원달(鄭遠達)·원의손(元義孫)을 문학으로, 송문재(宋文載)를 보덕으로, 유건(柳健)·이시민(李時敏)을 사서(司書)로, 조돈(趙暾)을 대사헌으로, 홍계희(洪啓禧)를 판의금으로, 홍자(洪梓)를 사간으로, 김기대(金器大)를 대사간으로, 이성경(李星慶)을 필선(弼善)으로, 이명준(李命峻)을 전라 우수사로, 김성우(金聖遇)를 전라 병사로, 구병훈(具秉勳)을 충청 수사로, 한덕필(韓德弼)을 경기 수사로 삼았다. 한덕필은 음관(蔭官)으로서 별천(別薦)하였는데, 역시 곤임(閫任)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병조 낭관(兵曹郞官) 곽성제(郭聖濟)를 보고 묻기를,
"이는 고 사부(師傅) 곽시징(郭始徵)의 일족(一族)인가?"
하고, 전관(銓官)에게 하교하기를,
"곽시징은 나의 감반(甘盤)266) 같은 고인(故人)이다."
하고,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9일 무자
임금이 양 혼전(兩魂殿)·산릉(山陵)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시민당(時敏堂)에 앉아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동래 부사의 장달(狀達)에 따라 차왜(差倭)의 요미(料米) 중에 해마다 부족한 수량을 절반만 획급(劃給)하라고 하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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