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0권, 영조 33년 1757년 12월

싸라리리 2025. 10. 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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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기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효소전(孝昭殿)에 삭제(朔祭)를 친히 거행하였다.

 

윤동승(尹東昇)을 보덕(輔德)으로, 송형중(宋瑩中)을 겸사서(兼司書)로, 홍양한(洪良漢)을 수찬으로, 윤동도(尹東度)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임금이 유신을 불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12월 2일 경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서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을 소견하였다.

 

12월 3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왕세자가 관의합(寬毅閤)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시행하여 형률에 따라 감사(減死)한 자는 한결같이 초복(初覆)을 할 때에 임금의 뜻이 정하여진 바대로 따랐다. 대사헌 김선행(金善行)과 대사간 조중회(趙重晦)가 함께 죄인을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한 명을 환수(還收)하라는 장달(狀達)을 올리고, 또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때 예후(睿候)295)  가 오히려 침중(沈重)하였는데, 억지로 법복(法服)을 입고 책상에 기대어 정사를 들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물러간 뒤에 좌의정 김상로가 의관(醫官)을 불러 환후를 진찰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상하(床下)에 나아가 엎드리어 낮은 목소리로 아뢰고는 한참 있다가 사관(史官)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늘 한 말에 대하여서는 사관은 쓰지 말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신(大臣)이 된 자는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군상(君上)이 과실이 있으면 마땅히 정색(正色)을 하여 간하여야 하고 예덕(睿德)에 모자람이 있으면 창언(昌言)으로써 바로 잡아야 한다. 낮은 목소리로 은밀히 아뢰는 것이 어찌 대신의 도리인가? 게다가 사관으로 하여금 쓰지 말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인주(人主)도 할 수 없는 바인데, 김상로가 감히 하였으니, 가히 기탄(忌憚)함이 없다고 이르겠다."


【태백산사고본】 63책 90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670면
【분류】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註 295] 예후(睿候) : 왕세자의 환후.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신(大臣)이 된 자는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군상(君上)이 과실이 있으면 마땅히 정색(正色)을 하여 간하여야 하고 예덕(睿德)에 모자람이 있으면 창언(昌言)으로써 바로 잡아야 한다. 낮은 목소리로 은밀히 아뢰는 것이 어찌 대신의 도리인가? 게다가 사관으로 하여금 쓰지 말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인주(人主)도 할 수 없는 바인데, 김상로가 감히 하였으니, 가히 기탄(忌憚)함이 없다고 이르겠다."

 

전 어장(御將) 홍봉한(洪鳳漢)을 특별히 서용하여 다시 전임(前任)을 제수하였다.

 

12월 4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예조 판서와 편차인(編次人)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궁(尙宮) 김씨(金氏)는 황조(皇朝) 계유년296)  에 출생하고 16세에 입궐(入闕)하여 효묘(孝廟)께서 승저(承儲)하는 것을 보았고, 신축년297)  에 또 내가 승저하는 것을 본 뒤 나이 91세가 되던 계묘년298)  에 죽었는데,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으며, 이어서 그 일에 대하여 기(記)를 친히 지었다.

 

임금이 공묵합(恭默閤)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형조 판서를 불러서, 삼복(三覆)으로 결단한 죄수가 몇 명이나 되는지를 묻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이 스스로 전결(專決)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형조 판서 신회(申晦)가 아뢰기를,
"북실(北實)이라는 자가 인정전(仁政殿) 월랑(月廊)에 있는 종(鍾)과 경(磬)을 두 개 훔쳐 내었다가 수금을 당하여 승관(承款)하였는데, 나이 14세입니다. 어리고 무지하기 때문에 감히 일률(一律)299)  로 처단하지 못하여 상재(上裁)를 우러러 청합니다."
하니, 특별히 형을 감하여 도배(島配)하라고 명하였다.

 

12월 5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여직(鄭汝稷)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12월 6일 갑자

임금이 편집 당상(編輯堂上)과 예조 당상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효소전(孝昭殿)을 부태묘(祔太廟)할 때에 마땅히 부알(祔謁)의 예(禮)가 있어야 하는데, 경묘(景廟)의 신위(神位)를 본실(本室)에 그냥 모셔 두는 것은 신리(神理)에 있어서 미안(未安)하다. 여러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인사(人事)와 다르니, 부알할 때에 경묘의 실(室)을 닫아 놓고 열지 말게 하여 불안한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움직여 옮기는 것은 결코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성천주(成天柱)는 말하기를,
"단종(端宗)을 복위(復位)하여 부묘(祔廟)할 때에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의 의논이 《숙묘보감(肅廟寶鑑)》에 실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 상신의 의논은 말이 엄격하고 의리가 곧았지마는 세조(世祖) 이하의 신위를 모두 받들어서 하정(下庭)시키려 하였으니 일이 너무 중대하였으므로 이것이 선조(先朝) 때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고 다만 폐문(閉門)하는 예를 행하였는데, 비록 묘문(廟門)을 닫는다고 하지마는 거존(居尊)하는 혐의는 한 가지이다. 장렬 대비(莊烈大妃)를 부묘할 때에도 지금과 같이 하였는데, 그 당시 만일 다른 장소로 권봉(權奉)하자는 의논이 있었다면 선왕(先王)께서 반드시 따르지 않았을런지 어찌 알겠는가? 지난번 단경 왕후(端敬王后)를 추부(追祔)할 때에도 단지 단종을 부묘할 때의 예(例)를 따랐는데 지금 생각하여 보아도 끝내 불안함을 느낀다. 효소전의 신위를 묘정(廟庭)에 부알하게 할 때에 황형(皇兄)께서 전상(殿上)에 그대로 계신다면 마음이 편하겠는가? 나는 마땅히 황형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여기어 지금 동쪽 익각(翼閣)에 잠시 옮겨 봉안하였다가 예(禮)가 끝난 뒤에 도로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널리 순문(詢問)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신(大臣)들에게 문의(問議)하라고 명하였으나 모두 헌의(獻議)하지 않았는데, 유독 영부사(領府事)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일찍이 이 예(禮)에 대하여 의논을 한 일이 없었습니다. 오직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부묘할 때에는 단지 태조의 실(室)과 문을 열어 월대(月臺)에서 행례하고는 승좌(陞座)하였습니다. 기묘년300)   단정 대왕 부알시에 하위(下位)의 각실(各室)은 모두 문을 열지 않았었고, 기미년301) 단경 왕후 부알 때에도 또한 이 예를 썼으니, 정리와 예절을 참작하여 보건대, 남김없이 곡진하였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대개 신도(神道)는 비록 생존한 때를 형상한다고 하지마는 승강(陞降)하고 회피(回避)하는 절차를 생시(生時)와 같이 하기는 어려운 형세입니다. 비록 사가(私家)의 예를 들어 말하더라도 자손이 먼저 죽게 되면 전(奠)을 드리고 제사를 설행함에 있어 부조(父祖)가 비록 주관을 하더라도 망자(亡者)의 신주는 의탁(倚卓)에 그대로 있고 천강(遷降)함이 없으니, 옛부터 예(禮)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이것 때문에 의문을 일으켜 논란한 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한결같이 기묘년과 기미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감실(龕室)도 열지 말고 문도 열지 않는다면, 마치 딴집[隔屋]과 같으니, 진실로 온당할 것 같습니다. 임시로 옮겨 안치시키는 데 이르러서는 그 처소(處所)가 부알하는 신위에도 역시 섬돌의 상하(上下) 구별이 었어야 하는데, 또 장래에 뜰 아래로 이봉(移奉)하자는 의논이 있을 것입니다.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근래의 예(例)를 따라서 과오를 적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이 진실로 다름이 없는 것 같으나, 예(禮)에 이른바 ‘생시(生時)의 일이 끝나고 귀신의 일이 시작된다.’는 것은 존몰(存沒)과 유명(幽明)을 구분한 것이니, 신을 섬기는 의식에 순전히 생존한 때를 형상하는 예를 쓸 수는 없습니다. 기묘년과 기미년의 시행한 전례에 감실을 열지 않고 문을 열지 않은 데에 그치고 말았는데 갑자기 옮겨 모시는 의논을 하는 것은 아마도 정(靜)을 숭상하는 의도에 어긋남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부사가 이른바 이안(移安)하는 처소가 섬돌의 상하의 구별이 있다고 한 것은 과연 이러한 혐의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 혹시 존자(尊者)를 모시고 섰는데, 또 다른 존자가 와서 뵈려고 한다면, 감히 그 자리에 서서 내려다 보지 못하고 옆으로 서서 피하는 것도 역시 한 방법일 것이다. 동쪽 익각이 비록 섬돌 위에 있으나 이미 서향(西向)으로 하였으니, 남면(南面)하여 내려다 보는 것과는 현격히 다르다."
하고, 드디어 전교를 내리기를,
"조조(朝祖)와 부알할 때의 의절(儀節)을 문의한 뒤에 《숙묘보감》을 봉람(奉覽)하니, 고 상신의 헌의에 이미 내가 유시(諭示)하려다가 유시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상세히 논하였다. 그러나 신도(神道)와 인사(人事)는 차이가 있으니, 모시고 뜰을 내려가게 하는 것은 나도 역시 어렵다고 말한 것이지마는, 무릇 수개(修改)를 할 때에도 역시 임시로 봉안하는 경우가 있는데, 막중한 조조나 부알을 하는 데에 어찌 임시로 봉안하는 예(禮)가 없고 다만 외문(外門)만을 닫을 뿐이겠는가? 아! 유명(幽明)이 비록 다르나 정리(情理)는 다를 것이 없다. 효소전에 부알할 때에 우리 황형의 마음이 그 어떠하겠는가? 남의 자제(子弟)가 된 자는 마땅히 부형(父兄)의 마음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야 할 것이니, 지금부터 제도(制度)를 정하여 조조·부알의 의주(儀註) 가운데 좌실(左室) 이하는 익각에 임시 봉안하는 뜻으로써 고유문(告由文)에 첨입(添入)하고, 정시(正時) 전 2각(刻)에 동쪽 익각에 임시 봉안하였다가 예가 끝난 뒤에 도로 봉안할 것을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편집 당상(編輯堂上)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근래 《보편》의 일로 인하여 전후(前後) 세자빈(世子嬪)의 장례(葬禮)를 상고하여 보니, 공회빈(恭懷嬪)에 대한 일이 있어서 감히 아룁니다. 공회빈 윤씨(尹氏)는 바로 순회 세자(順懷世子)302)  의 빈(嬪)인데, 임진년303)   3월에 서거하였습니다. 장례를 치르기 못하고 4월에 왜란(倭亂)을 만났으므로 후원(後苑)에 구덩이를 팠으나 미처 영구(靈柩)를 옮기지 못하고 전내(殿內)에 실화(失火)하여 불길에 번져서 타버렸는데, 궁인(宮人)들이 모두 이르기를, ‘빈(嬪)이 생시에 늘 염불(念佛)을 하였는데 문득 다비(茶毗)304)  를 이루었으니 마침 그의 소원에 부합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천광(穿壙)하였던 자리를 보니, 아직까지 회(灰)로 쌓았던 자취가 있어서 풀도 나지 않았다. 《실록(實錄)》이 분명하지 못한 것 같다."
하매, 홍계희가 말하기를,
"《선묘실록(宣廟實錄)》은 고(故) 판서 이식(李植)이 편수(編修)한 것인데, 이식은 바로 윤씨의 외손(外孫)이니, 반드시 자세히 알고 썼을 것입니다."
하였다.

 

12월 7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는 유성(流星)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건방(乾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청대(請對)하고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나인(內人) 득혜(得惠)·오복(五福)과 중관(中官) 홍석해(洪碩海)를 모두 석방(釋放)하라고 명하였다. 김상로가 말하기를,
"협시(挾侍)했던 중관만이 홀로 빠졌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엄처(嚴處)할 데에는 엄히 다스리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지체시켰는데 경이 이미 말하였으니, 내가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유인식(柳仁植)·서태항(徐泰恒)·최성유(崔聖兪)를 일체로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예관(禮官)에게 이르기를,
"휘령전(徽寧殿)의 상(祥)이 끝난 뒤에 제사를 거행할 때의 상하 복색(上下服色)을 미리 강정(講定)하지 않을 수 없다. 친제(親祭)할 때에는 마땅히 시사복(視事服)으로 행례(行禮)할 것이나 향관(享官) 이하에 있어서는 효소전의 복제가 끝나기 전에는 포모(布帽)와 포포(布袍)로 행례하고, 복제가 끝나거든 천담복(淺淡服)으로 행례할 것이다. 휘령전의 중관이나 궁인(宮人)은 상이 끝나고 최복(衰服)을 벗은 뒤에는 효소전의 최복을 입고 본전(本殿)에서 행사(行祀)할 수 없다. 중관은 상시(常時)의 포모와 포포로써 하고, 궁인은 단지 상복(常服)인 백의(白衣)로써 행례하게 하라."
하였다. 또 예관(禮官)에게 하교하기를,
"휘령전 연제(練祭) 때 중관은 위를 따라 연복(練服)을 입고, 연제가 끝난 뒤에는 부판(負版)·벽령(襞嶺)·최(衰)·수질(首絰)을 제거하며, 요질(腰絰)은 숙마(熟麻)로 사용하게 하라. 효소전의 소상(小祥)도 역시 이와 같이 할 것이니, 아울러 예조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8일 병인

영녕전(永寧殿)의 축식(祝式)을 개정(改正)하게 하였다. 임금이 예관(禮官)과 편집 당상(編輯堂上)을 불러 하교하기를,
"영녕전의 축식은 서로 뒤섞인 곳이 있다. 대저 종묘의 축식에는 효증손 사왕(孝曾孫嗣王)이라고 일컫고, 왕비위(王妃位)에는 ‘조비(祖妃)’ 2자를 더하였다. 만일 영녕전으로 조봉(祧奉)하였다면 다시는 효증손이나 조비 자(字)를 쓰지 말아야 된다. 그런데 인묘(仁廟)·명묘(明廟) 두 묘(廟)를 조천(祧遷)한 뒤에 전의 축식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원종묘(元宗廟)에 이르러서는 또 인묘·명묘의 예(例)를 인용하여 역시 고치지 않았다. 한 개의 전(殿) 안에서 축식이 같지 않으니, 진실로 매우 미안한 일이다. 인종실(仁宗室)에만 홀로 효증질손(孝曾姪孫)이라고 일컫는 것은 직파(直派)가 아니라서 그러한 것 같으나, 진실로 이와 같다면 정종(定宗)·문종(文宗)·단종(端宗)·예종(睿宗) 4실(室)도 마땅히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나는 후한 쪽으로 따르려는 의도로 여러 실(室)에 대하여 모두 효증손으로 일컫고 조비(祖妃) 2자를 첨서(添書)하고 싶은데, 여러 사람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질(姪)이라는 글자는 본래 부인이 그 형제(兄弟)의 딸을 이르는 것인데, 백부(伯父)나 숙부(叔父)에 대하여 질(姪)이라고 자칭하는 것은 바로 잘못된 풍속입니다. 또 인종의 상(喪)에는 여러 신하들이 한 바가 무상(無狀)하여 1년도 넘기지 못한 임금이라고 일컫기까지 하면서 5월장(五月葬)도 행하지 않았는데, 그 질이라고 일컬은 것은 족히 후세에 본받을 것이 못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인종은 우리 나라의 성인(聖人)이였다. 내가 처음에 생각하기를 명종이 인종에게 이미 제(弟)라고 일컬었으니, 선조(宣祖)께서는 반드시 효질(孝姪)로서 일컬었을 것이다. 그 뒤에 차례로 전하여 오면서 드디어 효증질손으로 일컬어진 것이다. 지금 중신(重臣)들의 말을 들으니, 더욱이 이정(釐正)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대신(大臣)에게 하순(下詢)하였다. 영부사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방조위(傍祖位)에게는 조비(祖妃)나 효증손으로 일컫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의 생각으로는 덕종(德宗)은 이미 정저(正儲)이었었고, 또 추숭(追崇)되었지마는 실제로 성묘(成廟)를 낳으셨으니, 방조(傍祖)의 예로는 쓸 수가 없습니다. 예종(睿宗)은 성종이 이미 계통을 이어 자식이 되었으니, 더욱 방조의 예로 개용(改用)할 수가 없습니다. 성의(聖意)가 이제 후한 쪽을 따르려 하시니 각실(各室)에는 모두 조비 자(字)를 써야 하는데, 덕종실과 예종실에 대하여서는 효증손으로 일컫고, 정종실·문종실·단종실·인종실에는 모두 효증질손으로 쓰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판부사        이종성(李宗城)은 말하기를,
"이 일은 일찍이 성고(聖考)305)                  께서 정묘년306)                   경에 이미 순방(詢訪)하신 일이 있는데 그때 임금의 전교에 이르기를, ‘조비(祖妃) 자는 각실에 예(例)로써 속칭(屬稱)하는한 조관(條款)은 대신(大臣)이나 유신(儒臣)에게 문의하라.’하였습니다.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고치지 않은 것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청컨대 예관으로 하여금 정묘년에 수의(收議)하였던 일을 널리 상고하여 다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대신들의 의논이 나의 뜻과 대략 같다. 영녕전의 각실에는 똑같이 모두 효증손으로 일컫고 역시 조비로 칭할 것이니, 명일에 예방 승지(禮房承旨)는 축식을 고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덕종실(德宗室)에 사왕신(嗣王臣)으로 일컫지 않고 국왕신(國王臣)으로 일컫는 것은 그 뜻이 정미(精微)하다. 그것은 덕종이 왕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추숭(追崇)하였기 때문에 사왕으로 칭하는 것은 의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경년(頃年)에 국왕으로 일컫는 것은 교사(郊社)의 축(祝)과 같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지금 만일 국왕이라고 쓴 위에 효증손으로 쓴다면 정(情)과 문(文)이 진실로 합당할 것 같다."
하였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원종(元宗)도 역시 추숭하였는데, 국왕이라는 말로써 축에 일컫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종은 이위(禰位)307)                  로 입묘(入廟)하였고, 덕종은 성종이 이미 예종을 이위로 삼았기 때문에 원종과는 다른 점이 있다."
하였다. 홍계회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덕종을 만일 추숭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과 같을 것인데, 이미 추숭되어 입묘하였으니 분리하여 달리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축사(祝辭)에 속칭을 쓰지 않고 또한 사(嗣)라고도 일컫지 않으면서 단지 국왕으로만 일컫는 것은 외사(外祀)와 같은 점이 있으니, 진실로 깨닫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자세히 상고하여 보니, 《오례의(五禮儀)》 서례(序例)에 있는 축판조(祝版條) 연월(年月) 아래의 주(註)에 이르기를, ‘의묘(懿廟)에게 효질(孝姪) 국왕 신 휘(諱)로 칭하였다.’ 하였고 또 감소고우(敢昭告于) 아래의 주에 이르기를, ‘의묘를 황백고(皇伯考) 모왕(某王)으로 칭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성묘조(成廟朝)에서 처음 정한 축식입니다. 성묘(成廟)께서 이미 효질로 칭하였다면 중묘(中廟) 이후에는 마땅히 효질손이나 효증질손으로 개칭(改稱)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칭(屬稱)을 전혀 버리고 단지 국왕으로만 칭한 것은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으며, 사왕(嗣王)이라고 말하지 않고 국왕이라고 말한 데 있어서는 계통을 이어받은 것과 다르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원종을 추숭한 뒤 축사에 국왕이라고 칭하지 않고 사왕이라고 칭한 것은 혹시 그 소목(昭穆)으로 서로 전하여지는 것이 형제(兄弟)의 친(親)과 달라서 승통(承統)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입니까? 예의(禮意)는 정미(精微)한 것이니 어찌 감히 단정하여 논하겠습니까? 덕종실은 성교(聖敎)대로 효증손 국왕으로 칭하는 것이 아마도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왕의 위에 효증손이라는 말을 더 쓰는 것이 정의(情誼)에도 진실로 마땅하고 이치에도 역시 분명하겠다. 이로써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그 뒤에 편차인(編次人) 조명정(趙明鼎)이 또 말하기를,
"축식(祝式)을 이미 모두 바로잡았으나 덕종과 원종은 똑같이 추숭된 분인데, 한 군데는 국왕으로 칭하고 한 군데는 사왕으로 칭하는 것이 사체(事體)에 있어서 끝내 옳지 못한 데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실(各室)의 축문에 이미 모두 사왕이라고 칭하였는데, 유독 덕종실만은 국왕으로 일컫는 것은 똑같이 바로잡으려는 의도가 아니다. 또 덕종과 원종은 한결같이 추숭된 분이니 성묘(成廟)께서 덕종에 대한 그 당시의 마음은 곧 뒷날 인묘(仁廟)께서 원종에 대한 마음일 것이다. 한 개의 ‘사(嗣)’ 자를 홀로 빠뜨리게 되면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다. 기왕에 효증손으로 일컬었다면, ‘효(孝)’ 자 가운데 이미 사(嗣)의 뜻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지난(持難)하겠는가?"
하고, 다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효’ 자에는 ‘사’ 자의 뜻이 있는 것이 과연 성상의 하교(下敎)와 같으니, 성상의 학문이 고명(高明)하심을 찬송(贊頌)하여 마지않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뜻도 역시 이와 같으니, 덕종실의 축식에 국왕이라고 쓴 것도 사왕으로 개정하라."
하였다. 우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휘령전(徽寧殿)의 축문에 쓴 ‘감고우(敢告于)’ 3자 가운데 ‘감’ 자는 미안(未安)한 것 같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선조(先朝) 때에 영소전(永昭殿)과 경녕전(敬寧殿)의 축문에도 모두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른 대신(大臣)에게도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金在魯)와 이종성(李宗城)이 모두 선례(先禮)를 따르도록 앙대(仰對)하니, 임금이 전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예조 판서에게 이르기를,
"내일 연주 의주(練主儀註)에 욕주(浴主)308)                  를 하는 대축(大祝)이 있는데 왕비의 욕주를 어찌 대축으로 하여금 하게 하겠는가? 종묘에서 신주를 출납(出納)할 때 왕후위(王后位)에는 으레 궁위령(宮圍令)을 시켰다. 지금으로부터 제도를 정하여, 우욕(虞浴)·연욕(練浴)에 대왕위는 대축에게 명하고, 왕후위는 궁위령에게 명한다는 것으로 《보편(補編)》에 싣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9일 정묘

임금이 휘령전의 연제(練祭)를 친행하였는데, 대사성 윤동도(尹東度)가 연주(練主)에 글씨를 썼다. 임금이 초헌(初獻)을 행하고 왕세자가 아헌을 행하였으며, 대신(大臣)이 종헌(終獻)을 행하였다. 행례를 마치고 이어서 우주(虞主)를 받들어 태묘(太廟)에 나아가 매안(埋安)하여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밤중에 태묘에서 떠들썩해서는 안되니, 우주를 신여(神轝)로 모시고 태묘 문 밖에 나가서 악차(幄次)에 봉안하였다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매안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서 제주관(題主官)은 가자(加資)하고, 봉상시(奉常寺)·선공관(繕工官)은 모두 승륙(陞六)시키라고 명하였다.

 

12월 10일 무진

밤에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예조 판서 이익정(李益炡)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우주를 매안할 때에 한 조각 옥(玉)을 태묘의 후계(後階)에서 얻었는데, 16자의 각문(刻文)이 완연히 보였으므로 삼가 열성지장(列聖誌狀)을 상고하여 보니, 바로 인종(仁宗)의 시책(諡冊)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상하기도 하구나! 효릉(孝陵)309)  의 축식을 고치던 날에 맞추어 나왔으니, 숨었다가 나타나는 것도 역시 때가 있는 모양이다. 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인종의 성덕(聖德)을 해동(海東)의 우부 우부(愚夫愚婦)도 다 칭송하는데, 비록 추숭(追崇)하여 유양(揄揚)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차마 시책을 민몰(泯沒)시키고 본실(本室)에 받들지 않겠는가? 예조 판서·호조 판서·공조 판서로 하여금 옥책(玉冊)을 감조(監造)하게 하면 내가 마땅히 구문(舊文)대로 삼가 쓸 것이니, 택일(擇日)하여 묘전(廟殿)에 고하도록 하라. 이는 이미 올렸던 시책이므로 청시(請諡)·독축(讀祝) 등의 절차는 지금 의논할 것이 없고, 당일(當日)에 의정(議政) 1명과 3조(三曹)의 당상(堂上)들은 명정전으로부터 받들어 태묘로 나아가서 당실(當室)에 봉안하라."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시책의 옥편(玉片)이 어찌하여 후계(後階)에 묻혔는가?"
하니, 이익정이 말하기를,
"명묘(明廟) 이상 열성의 옥책(玉冊)은 현재 남은 것이 없으니, 아마도 임진란(壬辰亂) 때에 묘(廟)의 안에 묻은 듯하나, 지금에 와서 그 곳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인종의 시책은 지금 곧 중수(重修)하려고 하지마는 뒷날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열성의 시책을 모두 중수하자는 청이 있을까 두렵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늘 연석(筵席)에서 문득 근일(近日)의 상서(上書)의 유무를 묻고, 말하기를,
"11월에 이후에 조신(朝臣) 중에 한 사람도 진계(陳戒)한 자가 없으니 나라에 신하가 있다고 이르겠는가? 조선이 반드시 망하겠다."
하였다. 이날 장령 이정철(李廷喆)이 상서하여 맨 처음에 제왕(帝王)의 효(孝)에 대하여 논하기를,
"옛날의 효자는 오직 부모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서 한마디의 말을 하고, 말 한번 옮기는 것도 경근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질병으로 근심을 끼칠 것을 생각하여 오직 머리털 하나나 살갗 한 부분도 훼상(毁傷)시킬까 두려워하였고, 정성을 다하여 봉양할 것을 생각하였으므로 이목(耳目)의 완호(玩好)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고, 이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정사에 부지런하기를 진면하였다. 이때 조신(朝臣)이 상서하면 임금이 반드시 가져다가 보고 권장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였으므로, 이에 사람들은 모두 동궁에게 허물이 돌아가고 대조(大朝)에게 칭찬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말을 숨기는 풍속이 이루어져서 삼사(三司)의 글을 오랫동안 공거(公車)310)  에 끊어졌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정철이 비로소 상서하였으나, 역시 일상적인 면계(勉戒)를 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12월 11일 기사

이길보(李吉輔)·원인손(元仁孫)·송문재(宋文載)를 승지로, 심성진(沈星鎭)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태학(太學)에 황감(黃柑)을 내리고 시사(試士)하였는데, 이지회(李之晦)·홍계근(洪啓謹) 등이 높은 등수를 차지 하여 모두 급제(及第)를 내렸다.

 

서명신(徐命臣)을 발탁하여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서명신이 시관(試官)으로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그가 수염이 하얗게 희었는데도 오랫동안 하대부(下大夫)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특별히 발탁한 것이다.

 

12월 12일 경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임금이 태묘(太廟)와 양 혼전(兩魂殿)·산릉(山陵)의 납향(臘享)에 쓸 향을 친히 전하였다. 이어서 효소전(孝昭殿)의 재전(齋殿)에 나아가 인종 대왕(仁宗大王)의 시책(諡冊)을 친히 썼다.

 

12월 13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효소전의 납향을 친히 행하였다.

 

12월 14일 임신

열성(列聖)의 지장(誌狀)을 증수(增修)하라고 명하였다. 편집 당상(編輯堂上) 홍계희(洪啓禧)가 아뢰기를,
"열성의 지장에 있는 사실에 자구(字句)가 잘못된 곳이 많은데 숙종조·경종조 양조(兩朝)의 지장도 역시 따라서 간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청컨대 바로잡고 첨수(添修)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2월 15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효소전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12월 16일 갑술

임금이 비국의 여러 당상을 불러 보았다. 중외(中外)의 부녀(婦女)들의 다리[髢髻]를 금하고 쪽[後髻]으로 대신하게 하며, 조신(朝臣) 중에 당하관(堂下官)의 시복(時服)은 홍포(紅袍)를 착용하지 말고 구제(舊制)대로 청록색(靑綠色)을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부녀들의 다리를 쓰는 사치(奢侈)가 날로 심하여져서 다리 한 꼭지의 값이 간혹 수백금(數百金)에 이르니, 임금이 오래 전부터 고치려고 하여 여러 번 정신(廷臣)에게 묻고, 시험을 치는 선비들에게 책문(策問)으로 시제(試題)까지 내었으나, 끝내 정론(定論)이 없었다. 당하 조관(堂下朝官)의 구제(舊制)는 녹포(綠袍)를 착용하였는데, 임진 왜란(壬辰倭亂)·병자 호란(丙子胡亂) 뒤에 홍포(紅袍)로 변하였으니, 화인(華人)들은 군신(君臣)이 같은 복장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풍속이 이를 숭상하였고 또 선홍색(鮮紅色)을 귀히 여겼으니 사치스러움이 점차 번지게 되었다. 임금이 두 가지를 변경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다시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들 사치스러운 풍속을 누르고 옛 제도를 닦기 위하여서는 이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고 아무도 이론(異論)이 없었다. 임금이 이에 친히 윤음(綸音)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옛사람이 다리를 높였다는 기롱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궁중(宮中)에 이런 제도가 없었으니 궁중에서 높은 다리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곧 국인(國人)들이 높은 다리를 좋아한 것이었다. 습속(習俗)이 갈수록 사치스러운 데로 흘러 다리 한 꼭지의 비용이 자못 한나라 문제(文帝)가 말하는 열 집의 재산보다 많으니, 이는 곧 여말(麗末)의 퇴폐(頹廢)한 풍습이다. 옛날에 명부(命婦)가 입궐할 때에는 모두 궁중의 양식을 따랐는데, 지금은 혼동하여 한 투식(套式)이 되었고 다리를 올리는 데 이르러서 극단에 달하였다. 지금부터 다리를 변경하여 쪽을 만들어 궁중 양식을 착용하고, 상천인(常賤人)은 다리를 그대로 사용하라. 명부(命婦)나 사족(士族)의 예복(禮服)에도 역시 금주(金珠) 및 용봉차(龍鳳釵)를 금하여 사치를 억누르고 명분(名分)을 바로잡는다는 의도를 보이는 것으로써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알리는 바이다. 사족의 부녀로 하여금 다시는 다리를 얹지 말게 하며, 당하관의 융복(戎服) 외에는 녹포(綠袍)를 착용하여 모두 구전(舊典)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제도(諸道)의 관찰사에게 전과 같이 가족을 데려가도록 명하였다.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한 뒤로부터 조정에서는 백성이 곤란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염려되어 도신(道臣)이 솔권(率眷)하는 것을 금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균역청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이 더 많지도 않았고, 노친(老親)이 있는 자는 번임(蕃任)에 구애됨으로 역시 택인(擇人)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하여 특명으로 복구하게 하였다.

 

단오(端午)의 소첩(梳貼)을 정지시키고 수화(首花)·애화(艾花)를 대소 빈전(大小殯殿)과 각전(各殿)에도 거행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순안현(順安縣)의 밤[栗實]을 효소전에 봉진하게 하였다. 선묘(先廟) 임오년311)  에 경은 국구(慶恩國舅)312)  가 순안현을 다스릴 때에 인원 대비(仁元大妃)가 관아에 따라갔다가 담장의 동쪽에 손수 밤나무를 심었는데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열렸다. 그후 대비의 사친(私親)들이 이 읍에 수재(守宰)로 온 사람이 간혹 사적으로 그 열매를 올렸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그것을 아뢰니, 임금이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소지(小識)를 지어 관사(官舍)에 새겨 걸게 하였다. 또 그 나무를 봉식(封殖)하고 둘러친 담과 설치된 문을 그 모양대로 그려 올리며, 그 열매를 효소전에 바치라고 명하였다.

 

홍자(洪梓)를 보덕(輔德)으로, 김진동(金鎭東)을 동돈녕(同敦寧)으로 삼았다.

 

임금이 내국(內局) 도제조        김상로(金尙魯)·제조        이후(李)·부제조        조돈(趙暾)을 공묵합(恭默閤)에서 소견하였다. 김상로가 단종조(端宗朝)에 사절(死節)한 사람인 판서 조극관(趙克寬)·감사        조수량(趙遂良)·정언        조정서(趙廷瑞)·직장(直長)        조번(趙藩) 등을 복관(復官)시키자고 청하니, 임금이 따르고 그 후손을 녹용하라고 명하였다. 조극관은 그 아우 조수량과 종제(從弟) 조번 및 조수량의 아들 조정서와 함께 계유 정난(癸酉靖難) 때에 죽었다. 장릉(莊陵)313)                  이 복위(復位)되자 황보인(皇甫仁) 등 3상(相)은 복관되었으나, 조극관 등은 자손이 한미하여 함께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므로, 김상로가 말한 것이었다.

 

조돈(趙暾)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12월 18일 병자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에 들어갔다.

 

이창수(李昌壽)를 특별히 제수하여 도승지로 삼았다.

 

12월 19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 판서 이후(李)와 이조 참의 조명정(趙明鼎)을 파직시켰다. 이후는 조명정과 사사로운 일로써 사이가 좋지 아니하여 정고(呈告)하고 나오지 않았으며, 조명정도 역시 인입(引入)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후가 약방 제조(藥房提調)로서 진찰하는 자리에 들어와서 사직(辭職)하니, 도제조 김상로가 이후의 진연(診筵)에서 사면(辭免)을 간구(懇求)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잃었고, 조명정은 말로 장료(長僚)를 침범하여 쟁단(爭端)을 일으켰다고 하여 두 사람을 다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득재(尹得載)를 이조 판서로, 홍낙성(洪樂性)을 이조 참의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응협(李應協)을 대사간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21일 기묘

임금이 함인정(涵仁亭)에 나아가 평시서(平市署)의 관원(官員)과 시민(市民)들을 소견하고, 그 폐단이 되는 고질을 물어 보았다.

 

임금이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을 공묵합(恭默閤)에서 소견하고 친히 윤음(綸音)을 지었는데, 이르기를,
"지금의 사치는 옛날의 사치와 다른 점이 있다. 의복이나 음식은 빈부(貧富)의 형편에 따라 각자 다른 것인데, 요사이는 그렇지 아니하여 한 사람이 하게 되면 백 사람이 본받으니, 이름하기를 시체(時體)라고 하여 한정이 있는 재물을 가지고 무한한 비용을 쓰는 것이다. 다리[髢髻]가 사치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하는 것이 사치고, 홍포(紅袍)가 사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홍색으로 하는 것이 사치이니, 시체의 폐단이 종류가 이와 같다. 무늬 있는 비단을 이미 금하였는데, 상방(尙方)에서는 무늬 있는 비단 주머니를 나누어 준다. 지금부터는 우리 나라 직물(織物)에 모두 무늬를 금지하는 것으로 중외(中外)에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주례(周禮)》를 강하였다.

 

12월 22일 경진

명년 정월 상순(上旬)에 명릉(明陵)을 알현하겠다고 명하고, 각릉(各陵)의 제문을 친히 지었다.

 

12월 23일 신사

이날 밤에 임금이 복부(腹部) 아래에 불편한 징후가 있어서 내국(內局)을 불러 와내(臥內)에 입진하였다. 이때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모두 구대(求對)하였는데,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는 철단(撤單)하고 입시하니, 전후로 정고(呈告)한 것이 무려 73번에서 그쳤다.

 

12월 24일 임오

이날로부터 내국에서 하루에 두 번씩 입진하고 시강원(侍講院)으로 옮겨 숙직하였다.

 

12월 25일 계미

임금이 효소전 고유문(告由文)을 친히 지었다.

 

임금이 와내(臥內)에서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을 소견하고 면유(勉諭)하였다. 당시 동궁이 족부(足部)에 병이 있어서 오랫동안 신료(臣僚)들을 인접하지 못하였다.

 

12월 26일 갑신

신응현(申應顯)을 장령으로, 이수봉(李壽鳳)을 헌납으로, 김종정(金鍾正)을 정언으로, 이심원(李心源)을 교리로, 김화택(金和澤)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12월 28일 병술

날씨가 춥기 때문에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인종 시책(仁宗諡冊)이 이루어졌다. 임금이 함인정에 나아가 공경히 맞이하여 살펴보고 대신(大臣)을 보내어 태묘(太廟)의 해당 실(室)에 봉안하게 하였다. 배진 대신(陪進大臣)과 감조관(監造官)에게 상(賞)으로 말을 하사하고, 봉책관(奉冊官)에게는 준직(準職)을 주었으며, 낭청(郞廳)은 승륙(陞六)시켰다.

 

내국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원손(元孫)에게 시좌(侍坐)하여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외우라고 명하였다. 원손은 거지(擧止)가 단정하고 외는 소리가 크며 우렁차니, 우러러보는 사람이 얼굴빛을 바로잡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2월 29일 정해

조사(朝士) 중에 노친(老親)이 시골에 있는 자에게는 새해 초에 귀근(歸覲)하도록 허락하라고 명하고, 쌀과 고기를 주게 하였다.

 

삼척 부사(三陟府使) 이최중(李最中)이 본읍(本邑)의 공삼(貢蔘)의 폐단을 서진(書陳)하니, 왕세자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복주(覆奏)하여 채택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금궤문(金匱文)을 친히 지어 교리 윤득양(尹得養)에게 써서 올리라 하고 인하여 사고(史庫)에 보관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세도(世道)와 국사(國事)에 대하여 깊이 근심하였고 또 제석(除夕)314)  을 당하여 느낌을 글로써 엮어서 면려(勉勵)하고 소원을 비는 뜻을 붙였다. 글에 여덟 가지 조목이 있었는데, 첫째는 시기가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민생이 생업을 즐기는 것이고, 둘째는 세신(世臣)들이 서로 보호하여 나라를 태산과 반석처럼 만드는 것이며, 셋째는 어질고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여 백료(百僚)들이 화합하는 것이고, 넷째는 절약하여 쓰고 백성을 사랑하여 집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옳고 바른 말이 날마다 들어와서 공평하고 정직한 것이고, 여섯째는 사치스러운 풍속이 날마다 없어져서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순후(醇厚)한 인심이 날마다 새로워져서 화락한 세상을 점칠 수 있는 것이고, 여덟째는 들뜨고 허황된 것이 날마다 없어져서 진실함이 회복되는 것이었으니, 무룻 백여 마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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